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 권 (1)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8

제 4 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끌고, 그 곳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외적인 수단 또는 보조장치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모체(母体)가 되는 진정한 교회1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체가 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

 

1. 교회의 필요성

 

먼저 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향상시키려면 무지하고 게으르고 또 경박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을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엡 4 : 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선 성례를 제정하셔서 성례에 참가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돈독 하는데 매우 유익한 보조 수단임을 느낀다. 우리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적절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을 가르치는 계획에 의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 정치와 교회 직제와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는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민 정부를 논할 필요가 있다.2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일이 교황 제도에서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그 부패한 상태를 경건한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것을 버리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선 교회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막 10 : 9 참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3 율법 하에서 이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이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의 증거와 같다(갈 4 : 26).

 

 

 

2. 교회와 신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조에서 우리가 "공회를 믿는다"라고 하는 조항은 보이는 교회뿐만이(현재 우리가 본 제목 하에서 논하는)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죽은 사람들까지를 의미한다. "믿는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양떼와 사나운 짐승들을 다른 말로 구별할 수 없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전치사 in("안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맡긴다"라는 뜻을 첨가하는 전치사)을 넣는 사람이 많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 고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이었고 또 증거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교회사에 기록된 니케아 신조도 이 전치사를 붙였다.4 그러나 교부들의 글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만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인정되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했고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신조 해설(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을 쓴 사람도(그가 누구였든 간에) 그렇게 말했다.5 그뿐 아니라 그들은 전치사를 붙이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며 상당한 이유를 첨가하여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믿고 의지한다" 또는 "몸의 부활을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을 원하지는 않지만은 바른 용어를 택하고 싶다. 공연히 애매 모호한 말을 쓰기보다는 보다 적절한 표현법을 원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마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고 하나님의 원수들도 그것에 못지 않은 잔인한 분노로 격분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킬 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아무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못할 것이고 오히려 어느 정도 유익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그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 2 : 19),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모두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엡 1 : 13). 그들은 하나님의 훈장을 달고 있어서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가 숨어 있고 몇 개의 밀알이 쭉정이 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만 완전히 맡겨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연합된 교회에 분명히 접붙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선택받은 무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앞으로 다가 올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 한(고전 1 : 13 참조)-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교회도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엡 1 : 22-23 참조)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같이(롬 12 : 5, 고전 10 : 17, 12 : 12,27)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엡 4 : 16 참조).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심은 영생을 다 같이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시키기 위함이다(엡 5 : 30).

우리 주위에 있는 우울하고 황폐한 광경은 교회의 남은 자가 하나도 없다고 외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교회를 숨겨두신다는6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신다(왕상 19 : 18).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조의 이 항목은 또한 어느 정도 외면적인 교회에 적용된다. 즉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말할 필요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덧붙였다. 고대인들은 대개 이 구절을 빼놓았지만7 그것은 옳지 않은데, 그 구절은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원칙 아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절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사람의 사유재산이 허락되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재산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행 4 : 32) 신조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 : 4)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시라는 것을 참으로 확신한다면 그들은 서로 형제애로 묶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들이 받는 은혜를 서로 나누지 않을 수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 일에서 어떤 유익을 받게 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근거는 자기가 교회의 지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전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동요되거나 넘어질 수가 없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똑같이 동요하거나 파멸될 수 없다. 둘째, 교회는 영원 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진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끝으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되는 약속들이 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욜 2 : 32, 옵 1 : 17),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 46 : 5).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란 말8 자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확신할 때, 신자들이 받는 모든 은혜는 우리의 소망을 굳세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미 말한 바와 같이)9 그런 교회를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눈으로 분명히 볼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교회를 여전히 존중해야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 받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4. 눈에 보이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10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 22 : 30) 보살피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학교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와(사 37 : 32) 요엘이(욜 2 : 32) 말한 것과 같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겔 13 : 9). 그와는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향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한다(사 56 : 5, 시 87 : 6 참조). 그러므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 : 4-5)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의 양떼에 제한시킨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5-6)

 

5. 교회를 통한 교육과 그 가치 및 의무

 

이제 우리는 이 논제에 관한 문제점들을 제시하도록 하자. 바울의 서신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썼다(엡 4 : 10-1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을 똑같은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서 임명된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게 하셨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 : 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손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 양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모두 굶주려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만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말과 같다(롬 10 : 17).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데(롬 1 : 16), (역시 바울이 증거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복음 전파에 의해서 나타내신다(ibid).

이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옛날에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시려고 하셨다. 성전을 하나님이 "쉴 곳"(시 132 : 14), 지성소를 하나님이 "거하는 곳"과(사 57 : 15)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곳이라고 한다(시 80 : 1).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하늘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존경과 사랑과 경의와 위엄을 얻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시를 받는 죽을 인간이 나타남으로써 성전과 성소의 가치가 많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가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질그릇인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고후 4 : 7) 우리들에게 알리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며 또 이 질서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의 백성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술이나 기타 미신에 빠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신 18 : 10-11, 레 19 : 31) 그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즉 그들에게는 항상 예언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신 18 : 15 참조). 옛날에 백성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의 직책을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인간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사장들을 해석자로 삼아 사람들이 율법의 참 뜻을 그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말 2 : 7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신다.

이 일은 이중으로 유익한데, 한 편으로는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자신의 말씀같이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스스로 우리를 향하여 우레 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할 것이므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참으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압도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와 같은 친근한 교수 방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비천한 사람들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인해서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기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11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입으로 선포되는 구원의 교리를 기꺼이 그리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면적인 수단에 매이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 방법에 매이게 하셨다. 광신자들은 이 방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걸린다.

자만심이나 증오심, 경쟁심으로 인하여 단독으로 독서하고 명상하더라도 충분한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집회를 무시하며 설교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연합의 거룩한 관계를 끊기에 전력을 다하므로 이 신성하지 못한 분리에 대한 당연한 벌을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극악한 오류와 추악한 망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이에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이 풍성해지려면 우리는 이 신앙 생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높이 평가하셨다. 광신자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귀를 막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예언자와 경건한 교사들은 불경건한 무리와 어려운 투쟁을 했다. 이 자들은 완고해서 사람의 말과 전도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멍에를 메지 못한다. 이것은 전도를 통해서 우리 위에 비취는 하나님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옛날 신자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시 105 : 4), 이런 명령이 율법에서 자주 반복된 것은(시 27 : 8, 100 : 2, 105 : 4, 대상 16 : 11, 대하 7 : 14) 옛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과 예언자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췬다고 말한 것과 같다(고후 4 : 6).

더우기 가증한 것은 배교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교회들을 분열시키는데 온힘을 기울이며, 결과적으로는 양들을 우리에서 몰아내서 이리들의 입에 던진다.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울의 태도를 지켜야한다.

즉 교회는 오직 외면적인 복음 선포에 의해서만 성장하며 성도들은 한 결속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배우고 증진함으로써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질서를 지킨다는 것이다(엡 4 : 12 참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옛날 율법 아래에서 모든 신자가 성소 앞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은 목적은 특히 여기에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곳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부른다(출 20 : 24 참조). 분명히 그는 경건에 대한 교훈이 없는 곳은 무익하다고 가르친다. 확실히 다윗도 그와 같은 이유로 원수들의 포학과 잔인성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에 가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 한다(시 84 : 2-3). 이런 불만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즐거움만 남아 있으면 성전에 가지 못하는 것쯤은 매우 하찮은 일이며 즐거움에 손실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속을 태우며, 이 한 가지 곤란과 불안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탄식한다. 분명히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공중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 예배에 의해서 자기의 백성을 단계적으로 향상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 자신을 족장들에게 나타내시며 영적으로 알리려고 하신 것을 깨달아야한다. 따라서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시 42 : 2 참조), 미신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도 한다(시 132 : 7, 99 : 5, 대상 28 : 2).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머리를 앙모할 때 거기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일치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엡 4 : 13 참조). 이 원칙을 떠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신전은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모독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저속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들과 같은 모독 행위를 저질렀다. 스데반은 이사야의 말을 빌려,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그들을 책망했다(행 7 : 48, 사 66 : 1-2).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으로 성전들이 자신에게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별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 경솔하게 일을 시작한다면 기이한 조각품이 이 잘못된 출발에 달라붙어 한없는 해독을 퍼뜨리게 된다.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륵세스) 왕이 현자들의 권면에 따라 경솔하게 희랍에 있는 모든 신전을 불사르거나 파괴한 것은 어디든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신들이 벽과 지붕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며, 그러면서도 우리와 자리를 바꾸거나 우리를 땅에 속한 수단에 국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실 능력이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수단으로 무리를 마치 병거에 싣듯이 해서 그의 하늘 영광에 올리신다. 곧 무한하여 모든 것을 충만케 하며 하늘보다도 더 높은 하늘 영광에 올리시는 것이다.

 

 

 

6. 목회의 의미와 한도

 

우리 시대에 들어서 목회의 효력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의 위엄을 대단히 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죽을 인간들에게 옮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목사나 교사들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통찰하여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시정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13 우리는 이 논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양쪽의 쟁점들은 두 가지 성경 구절들을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⑴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주축자로서 전도에 성령을 결합시키시며 전도의 유익을 약속하신다. ⑵ 또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외면적인 보조수단을 구별하시며 신앙의 출발점과 그 모든 과정을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신다.

1. 말라기에 의하면 제 2 엘리야의 임무는 사람들의 생각을 밝혀주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하는 것이었다(눅 1 : 17, 말 4 : 5-6).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수고한 열매를 얻도록 그들을 보내신다고 언급하신다(요 15 : 16). 베드로는 이 열매를 간단히 정의해서, 우리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라고 한다(벧전 1 : 23).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으로써" 고린도 신자들을 "낳았으며"(고전 4 : 15) 그가 사도됨을 그들이 "인친다"고 자랑한다(고전 9 : 2). 그뿐 아니라, 자기는 의문의 일꾼이 아니며 말로 사람들의 귀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자기의 가르침이 무익하지 않게 하노라고 한다(고후 3 : 6). 이 같은 뜻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전도함은 지혜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고전 2 : 4). 또 갈라디아 사람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갈 3 : 2).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여러 구절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할뿐만 아니라 자기는 구원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노라고 한다(고전 3 : 9이하).

2. 이 모든 말을 하면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티끌만큼도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 점을 그는 다른데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골 1 : 29)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살전 3 : 5). 또 이처럼 덧붙인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 : 8).

그뿐 아니라 다른 구절들을 보게 되면 그가 사역자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7). 마찬가지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 10)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의 일부라도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경고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그 결과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

 

 

 

(보이는 교회 :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교회의 표식. 7-9)

 

7.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우리가 알 수 있는,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앞에서 논한 것으로 이미 명백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성직을 보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한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잠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기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언제나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교회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14 하나님의 눈에만 보인다고 믿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나중 말한 것, 즉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며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

 

 

 

8. 우리의 판단의 한계

 

따라서 주께서는 분명한 표식와 증거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지적하셨다. 이미 바울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 : 19).15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또, 평상시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 진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l6 주께서는 주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자들을 아시며 표를 해 두셨다. 주님의 눈만이 주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과 구원의 종점에 이르기까지(마 24 : 13) 참고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알아보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께서는 누가 그의 자녀로 간주될 것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다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주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적응시켜 주셨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그 대신 사랑의 판단으로 대치하셨으며, 그것으로 우리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17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분명한 표식에 의해서 그 지식을 뚜렷하게 하셨다.

 

 

 

9. 교회의 표식과 우리가 이를 판단에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교회의 얼굴이 나타나며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엡 2 : 20 참조).18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 20)고 하신 주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요점을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보편적 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은 큰 무리다. 그 보편적 교회는 나누어져 여러 곳에 퍼져있지만 거룩한 교리의 한 진리에서 서로 일치하며 같은 종교 생활의 유대로 연합되었다. 이와 같이 보편적 교회 아래 개교회가 포함되며, 그 개교회들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도시와 촌락에 설립되어 각각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각 개인이 신앙 고백에 의해서 이런 개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때, 비록 그들이 보편적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재판에 의해서 출교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보편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인과 개교회에 관한 판단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경건한 무리에 참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안에 그들을 용납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교회의 전반적 합의에 의해서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대접하고 신자로 인정해야 할 경우가 있다. 우리는 표결로 그들을 교회의 회원이라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그들이 차지한 자리가 합법적으로 그들에게서 빼앗기기까지는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회원 전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 한 단체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공경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물론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일들에는 결실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귀들이 분열시키려고 애써 온 보편적 교회의 통일을 유지한다. 동시에 우리는 각 지방의 필요에 따라 설립된 합법적 회중에게서 그 권위를 빼앗지도 않는다.

 

 

 

(이런 표식을 지니고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버려서는 안 된다 : 분열의 죄. 10-16)

 

10. 교회의 표식과 권위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지키는 것을 우리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으로 결정했다.19 이 일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반드시 결실이 있으며 또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즉시 결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말씀이 거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효과가 나타난다. 어쨌든, 복음 선포에 경건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례를 경시하지 않는 곳에서는 우선 교회의 형태가 보이며, 그것은 속임수도 아니요 모호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권위를 멸시하거나 경고를 무시하거나 또 그 지도를 반대하거나 그 징계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그 교리를 버리고 그 단결을 파괴하는 것은 더욱 용인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심히 중요시하시므로, 교회가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떠나는 교만한 사람을 배반자와 배교자로 여기신다. 주께서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시므로 그것이 침범을 당할 때에는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게 된 것으로 믿으신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요 "하나님의 집"이라고(딤전 3 : 15)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이런 말의 뜻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리의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봉사와 수고에 의해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셨고, 영적 양식과 구원에 유익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스스로 한 가족의 아버지이심을 보이고자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자기의 신부와(엡 5 : 27) "그의 몸이니‥‥‥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엡 1 : 23)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평범한 찬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이러한 악한 분리를 회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복시키려고 전력을 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맞아 분쇄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우리가 모독적인 불충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와 맺어주신 혼인을(엡 5 : 23-32 참조) 피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죄악은 상상할 수도 없다.

 

 

 

11. 표식이 가지는 신성한 효험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식들을 깊이 명심해서 주의 뜻에 따라 존중해야 한다. 두 표식 전부를 혹은 그중 하나를 제거하고 말살하려고 사탄은 최대의 음모를 꾸민다. 때때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하고 참된 특색을 없애기 위해서 이 표식들을 없애버리며 파괴하려고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이 표식들을 대대적으로 멸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그 간계에 의해서 어떤 시대에는 말씀에 대한 순수한 선포를 없애 버렸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악의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성직을(엡 4 : 12) 타파하려고 애쓴다. 주께서 주의 교회의 특색을 충분히 나타낸다고 생각하신 표식들이 보일 때 그런 집단에서 탈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아니 치명적인 유혹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면으로 깊이 유의해야 한다. "교회"라는 이름에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자칭하는 모든 집단에 이 표준을 시금석으로20 적용해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집단이 교회에 바칠 존경을 확신있게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례가 없으면서 교회를 자칭한다면, 우리는 반대 방면에 대해 경솔과 교만을 피해야 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세밀한 경계심으로 이런 거짓에 대처해야 한다.

 

 

 

12. 표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경솔한 분리를 막을 수 있다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한다면 이런 표식이 있는 단체를 교회로 인정해도 좋다는 충분한 보장이 된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이 표식을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 어떤 과오가 끼어들 수도 있지만 이런 사태가 우리를 교회와의 교통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는 진정한 교리의 모든 조항이 똑같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모든 사람이 종교의 진정한 원칙으로 확신하고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 등이다. 교회들 사이에는 다른 신조들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것이 신앙에 의한 연합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가령 한 교회는 (경쟁심으로 날뛰거나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육체를 떠난 영혼은 곧 하늘로 날아간다고 주장하고 다른 교회는 어느 곳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면서도 주를 향하여 사는 것으로 확신한다고 할 때, 어느 교회가 사도가 말한 이 한 점에서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것인가? 즉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 : 15).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21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은 충분히 알려 주지 않는가? 맨 먼저, 우리는 모든 점에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무지로 인해서 마음이 다소 어두워졌으므로, 우리는 어떤 교회도 남겨두지 않거나 아니면 신앙 생활의 본질에 손상이 없고 구원도 상실하지 않을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릇된 생각을 용서하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극히 적은 오류라도 그것을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며, 아첨과 묵계로 조장하려는 생각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소한 의견 충돌 때문에 경솔하게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건 생활을 건전하게 유지하며 성례전의 집행을 주께서 제정하신 대로 지키는 교리를 안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는 곳은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시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이 이 점에 해당된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 : 30). 이것을 보면 각 교인은 그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회중의 덕을 세울 책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22 다만 책임을 이행할 때에 예절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교회의 교통을 버려도 안 되고 교회 안에 머무를 때에 교회의 평화와 합법적 권장을 깨뜨려도 안 된다.

 

 

 

13. 교회 내의 물의가 생긴다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 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23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Cathari)파가24 그러했고 도나투스(Donatists)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의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들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긴 원인을 우리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게으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게으름을 벌하실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인자한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극단적인 엄격주의에 열중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엡 5 : 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마 13 : 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 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 둔다(마 13 : 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 마당과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혀 있게 된다(마 3 : 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짐이 되리라고-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인 것과 교리적인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 1 : 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 1 : 11, 3 : 3, 5 : 1, 6 : 7, 9 : 1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 5 : 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 15 : 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람을 돕지 못했다(고전 13 : 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갈 1 : 2).

 

 

 

15. 사악한 자들과의 교제

 

그들과 또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파렴치한 사람을 교회에서 물리치지 않았다고 해서 엄중하게 책망했으며(고전 5 : 2), 다음에 일반적 원칙으로서 파렴치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단정한다고(고전 5 : 11) 항의한다. 여기서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데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느냐"고 외친다.

만일 개와 돼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큰 수치란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만일 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팔린다면 그것은 더욱 큰 수치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을 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합당한 자와 합당치 못한 자들을 무분별하게 저 거룩한 잔치 자리에 앉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라고 해서 경계심이 항상 강렬한 것이 아니며 때로는 보다 관대하거나 또는 엄격하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도 성도의 무리에서 반드시 제거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사태는 바울이 고린도 서신에서 날카롭게 책망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과오임을 인정하며 변명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교회가 의무를 게을리 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즉시 떠날 결심을 할 권리는 없다. 악인들과 친밀히 지내지 않고 일부러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의 의무인 것을 나는 물론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과 친밀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그들이 밉다고 해서 교회와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악인들과 함께 주의 떡을 나누는 것을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들은 바울보다 훨씬 엄격하다. 바울은 성찬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키라고 권고할 때, 각각 서로 검토하라든지 또는 전교회를 검토하라고 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자기를 살피라고 요구한다(고전 11 : 28). 만일 합당치 못한 사람과 함께 성찬을 받는 것이 불가하다면 회중 가운데 우리를 더럽힐 불결한 사람이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바울은 틀림없이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각각 자기 자신만을 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합당치 못한 사람이 끼어 있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해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가 그 다음에 한 말은 이런 뜻과 부합한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 : 27-29).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라고 한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누가 용납되고 누가 배제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위는 개인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 이 판단은 교회 전체에 속한 것이며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는 행사할 수 없다. 이 점은 후에 자세히 말하겠다. 그러므로 합당치 못한 어떤 개인의 성찬 참가를 자기가 금지할 수 없고 또 금지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한 생각일 것이다.

 

 

 

16. 완벽에 대한 그릇된 주장은 왜곡된 의견에서 나온 것이다

 

의에 대한 잘못된 열성 때문에 착한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지만, 이런 신경 과민은25 진정한 거룩과 거룩에 대한 진정한 열성에서 생기기보다는 자만심과 교만 그리고 거룩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대담하게 교회 탈퇴를 선동하며 기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든 사람을 경멸하며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 외의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말했다. "교회의 규율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에(엡 4 : 3)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 상호 관용의 교훈을 지키라고 사도는 명령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시정책으로 처벌을 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시정책이 아니다. 이 악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미워한다기 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거나 적어도 분열시키려고 한다. 자만심에 부풀고 미친 듯이 완고하며 거짓말로 중상하고 음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 악한 무리는 강직, 엄격한 체해서 그들에게 진리의 광명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되, 더욱 온유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성실한 사랑과 평화로운 단결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원칙을 모독적인 분파 행위로 더럽히며, 형제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마 13 : 40, 3 : 12, 눅 3 : 17).26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이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차고 용감하게 의를 옹호하는 듯 하면서도 유일한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이 눈에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악인들이 밉다고 해서 이 공동체의 표지를 깨뜨리는 사람은 성도의 교통에서 탈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큰 무리 가운데 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거룩하며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 그들은 병든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과오를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를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삼 분발하며 더 고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지극히 성결한 사람도 심히 유감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때가 있으므로 사람을 한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며 거룩한 신비에 참가하는 것은 이 모든 권능이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허비될 가능성보다 교회의 집회를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가 완전치 못한 거룩으로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준다. 17-22)

 

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또한 그들은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특히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가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전하지 않은 한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국 교회는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옳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 : 25-27). 그러나 주께서 주름잡힌 것을 펴며 티를 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27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욜 3 : 17),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사 35 : 8, 52 : 1 참조)라고 예언하였다. 모든 교회 회원이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 예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과 완전한 순결을 열심히 갈망하기 때문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순결을 그들에게 인정하신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성화의 증거를 보기 어려운 때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천지 창조 이후로 주의 교회가 없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주의 교회가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처음부터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주께서는 이 오염된 덩어리 속에서 어떤 그릇은 귀히 쓰도록 항상 성별하셔서(롬 9 : 23이하) 주의 자비를 받지 않는 시대가 없도록 하신다.

이 일은 확실한 약속으로 다짐하셨다. 예컨데,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시 89 : 3-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 : 13-14) 그리고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렘31 : 35-36) 등이 그것이다.

 

 

 

18. 예언자들의 실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모든 예언자들이 여기에 대한 실례를 제공한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요엘과 하박국이 기술한 예루살렘 교회의 참상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백성과 관리와 제사장들이 모두 심하게 부패하자 이사야는 주저치 않고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했다(사 1 : 10). 종교는 멸시를 당하며 정말로 부패하기도 했다. 도덕적으로는 절도, 강도, 배신, 살륙, 기타 악행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을지라도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교회를 새로 세우지도 않았고 새로운 제단을 쌓고 따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 말씀을 두시고 그들 사이에 의식을 제정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셨다고 예언자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인들이 모인 한가운데서 깨끗한 두 손을 들어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이런 의식들에 의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그런 곳에 끌려가기 보다는 차라리 백 번 죽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분파를 만들지 않은 것은 오직 연합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크고 많은 비행을 저질렀어도 거룩한 예언자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을 분리하는 것을 불가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일부 사람들의 도덕 생활이 우리의 표준에 맞지 않거나 심지어 기독교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이유만으로 우리가 감히 교회의 교통에서 즉시 탈퇴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19.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준 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는 세상 형편이 어떠했는가? 그때에도 바리새인이 말할 수 없이 불경건했고 일반 사람들이 방종한 생활을 했지만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반 백성과 함께 같은 의식에 참여하며 같은 성전에 모여 공중 예배를 실천했다. 깨끗한 양심으로 같은 의식에 참가하는 사람은 악인들과 함께 있다고 해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았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보고도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하라. 키프리아누스는 적절한 말을 했다.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불결한 그릇들이 있는 것 같더라도 우리편에서 교회를 떠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알곡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며 주께는 철장도 맡겨져 있다(시 2 : 9, 계 2 : 27). 아무도 하나님 아들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며, 쭉정이를 키질하고 짚을 타작하거나(마 3 : 12, 눅 3 : 17 참조) 인간적 판단으로 모든 가라지를 갈라내면 충분하다고(마 13 : 38-41 참조) 하지 말라. 사악하고 미친 생각은 이런 완고하고 불경건하고 무례한 행동을 취하므로 참으로 오만하다."28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확립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교회의 보이는 교통에서 의식적으로 탈퇴하는 사람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둘째, 소수의 죄악이나 다수의 죄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의식에서 우리가 신앙을 적합한 방법으로 고백하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목사나 또는 평신도인 다른 개인이 무가치하다고 해서 경건한 양심이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성례를 불결한 사람들이 집례한다 해도 거룩하고 고결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고 유익한 것이다.

 

 

 

20. 죄의 용서받음과 교회

 

그들의 심술궂음과 교만은 한도를 넘어서, 사소한 결점이라도 있을 경우에는29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고결한 교사들이 신자들에게 향상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며 일평생 죄짐을 지고 신음하면서 용서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가르칠 때에, 그들은 그런 교사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의해 완전성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항의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서 완전하게 되라고 권고할 때, 우리의 노력이 게으르거나 열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노력을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지상에서 경주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완전하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마귀적인 공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교회를 말한 다음에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예언서를 보면, 교회 안에 있는 백성과 권속만이 죄의 용서를 얻는다(사 33 : 14-24). 그러므로 우선 하늘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그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의 불의를 도말되게 해야 한다. 내가 하늘 예루살렘을 우선 건설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가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성도의 공동체에서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 들어가는 첫 어귀는 죄의 용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과의 결속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편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 : 18-19)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자비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주께서는 진노로 흩으신 백성을 다시 모으셨다고 선포하시면서,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신다(렘 33 : 8) 따라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징에 의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처음으로 가입을 허락 받으며, 세례는 우리가 우선 하나님의 인애로 우리의 누추함을 씻어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가족에 가입하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21. 교회의 일원들에게는 용서가 계속된다

 

주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단번에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양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교회 안에서 보존하며 보호하신다. 아무 소용도 없을 용서라면 그런 용서를 제공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 경건한 사람들은 주의 자비를 한 번만 주신다

그것은 무익하고 허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자신들의 경험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여러 가지 약점이 일평생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특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분명히 공연한 일이 아니다. 화해의 소식을 매일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의 흔적을 가지고 다니므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일순간이라도 교회 안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고 그 자녀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든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라는 몸에 접붙임을 받은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관용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한 성화에 의해서 용서를 받았고 또 매일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한다.

 

 

 

22. 열쇠의 힘

 

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교회의 열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그 권한을 주신 것은 (마 16 : 19, 18 : 18, 요 20 : 23) 믿지 않다가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그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셨다기 보다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이 직책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바울이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화해의 사명이 맡겨졌다고 하며 그 직책에 의해서 그들에게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반복해서 권면하도록 한 것은(고후 5 : 18,20) 이 점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교통에서 우리의 죄는 교역자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용서된다. 즉 이 직책을 받은 장로들이나 감독들이 복음의 약속으로 신자들의 양팀에 힘을 주어 용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이 일을 실천한다.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약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공중 앞에서 전도할 때나 각 가정에서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며 각 사람에게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충고했노라고 말한다(행 20 : 20-21).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남달리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몸을 쓰고 사는 이상 여전히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둘째, 이 은혜는 교회에 속한 것이어서 교회와의 교통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 셋째, 이 은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통해서 혹은 복음 선포로 혹은 성례 집행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열쇠의 권한은 주로 여기에서 두드러지며 주께서는 이 권한을 신자들의 단체에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 주께서 용서를 두신 곳에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공적 화해는 권징과 관계된 것이므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31

 

 

 

(신도들의 공동사회 내에서 용서받는 사례를 설명해 주는 서건들. 23-29)

 

23. 모든 신도들은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한 광신자들은 교회에서 구원의 유일한 닻을 빼앗으려 하므로 우리는 이 유해한 견해에 대항하도록 양심의 무장을 더욱 튼튼해야 한다. 과거에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ists)파가32 이런 사상으로 교회를 흔들었으며, 지금은(노바티아누스파와 별로 다름이 없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이같은 광증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례로 거듭나서 아무 육적인 오점도 없는 순결하고 천사 같은 생활을 하는 것같이 말한다. 세례를 받은 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은 은혜를 받은 후에 타락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받을 소망이 없다고 하며 처음 중생했을 때 받은 용서 이외의 다른 용서를 용납하지 않는다.33

비록 이 오류를 성경보다 명백하게 반박한 것은 없지만 (노바티아누스를 따랐던 자들이 많았던 것과 같이) 이 자들로 하여금 이 오류를 믿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기와 남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광분하고 있는가를 간단히 알려 주려고 한다.

첫째, 주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은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마 6 : 12) 반복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의심 없이 고백한다. 또 주께서는 자신이 주실 것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허사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확언하시지만 이 죄의 사면에는 특별한 약속으로 인을 치셨다.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주께서는 죄를 고백하라고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며 또한 일평생 계속 고백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거나 또는 죄를 범하면 은혜를 전연 닫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주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시는가,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마 18 : 21-22)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를 그의 자비를 본받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한두 번만 용서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놀라 주를 부를 때마다 용서하신다.

 

 

 

24.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율법

 

교회의 초창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족장들이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창 37 : 18) 그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고 선택을 받아 언약에 참여했으며 근면한 조상들에게서 의와 정직에 대한 교훈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범하려고 한 죄는 가장 타락한 도적들조차 꺼려할 것이었다. 나중에는 유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져서 동생을 팔았지만(창 37 : 28) 이 역시 참을 수 없는 잔악한 행위였다. 시온과 레위는 그들의 누이동생의 일로 세겜 사람들에게 불법전인 복수를 하여(창 34 : 25) 자기 아버지에게 정죄를 받았다. 르우벤은 추악한 정욕으로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창 35 : 22).

유다는 음행을 즐기고자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며느리와 동침하였다(창 38 :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된 백성 사이에서 추방되기는 커녕 족장으로 세움을 받았다.

다윗은 어떠했는가? 공의를 실시하는 최고 통치자로 있었을 때에 그는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의 맹목적인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하였다(삼하 11 : 4,15). 그는 이미 중생한 사람이었고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인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이런 죄를 범했고 또 용서를 받았다(삼하 12 : 13). (개인들의 예는 이만 하고) 율법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약속될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죄를 용서하실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배교한 이 백성이 주께로 돌아설 때 모세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난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신 30 : 3-4).

 

 

 

25.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도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예언서

 

그러나 나는 끝없이 예를 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수한 죄로 뒤덮인 백성에 대한 이런 자비의 약속은 예언서에도 가득하다. 반역보다 중한 죄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교회와의 분열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죄를 이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렘 3 : 1).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 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렘3 : 12).

죄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돌이켜 사는 것을 바라노라고 언급하시는 이에게 다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겔 18 : 23,32, 33 : 11).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그는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빌며 기도의 응답이 있기를 원했다. 그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왕상 8 : 46-50)라고 기원했다. 그리고 주께서 죄를 위한 제물을 매일 드리도록 율법에 제정하신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민 28 : 3이하). 주의 백성이 항상 죄의 질병으로 괴로워할 것을 예상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치료 방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26.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자들은 이 은혜를 빼앗겼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은혜를 계시하셨는데도 주께 죄를 지은 신자들이 용서를 빌며 자비를 받을 길이 막혀 버렸다는 말인가? 구약시대에는 성도들이 죄의 용서를 위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비가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타났으며 주께서 풍부한 자비를 베푸셨고(딛 1 : 9, 3 : 4, 딤후 1 : 9)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해가 실현되었다고(고후 5 : 10이하) 성경은 명백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성경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는 끊어지거나 감해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위에 더욱 풍성하게 흘러내린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대한 증거도 없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리란 말씀을 베드로는 들었으면서도(마 10 : 33, 막 8 : 38) 하룻밤 사이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면서 저주까지 했다(마 26 : 7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서를 받았다(눅22 : 32, 요21 : 15 이하).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회개하라는 권고의 한 방법으로 징벌을 받았다(살후 3 : 14-15, 3 : 6 참조).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까지도 베드로는 기도하라고 권하여(행8 : 22), 절망 상태로 몰아넣지 않고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했다.

 

 

 

27.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온 교회가 가장 가증스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을 때 바울이 그 지도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온유하게 그들을 죄에서 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이탈은 사소한 죄가 아니었다(갈 1 : 6, 3 : 1, 4 : 9).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는데, 보다 가증스런 죄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주의 자비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사실 불결하고 음란하고 방종한 생활로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권고했다(고후 12 : 21). 진정한 솔로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엄숙하게 확증하신 여호와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언약의 말씀은 이것이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 : 30-33). 끝으로, 다름 아닌 사도신경의 순서에34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죄에 대한 은혜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다. 교회가 설립되면 죄의 용서도 첨가되기 때문이다.

 

 

 

28. 무의식적인 죄만 용서를 받는가?

 

좀더 사려가 깊은 일부 사람들은 분명한 성경 말씀에 의해서 노바티아누스 사상이 논박되는 것을 보고, 모든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허물 즉 사람이 알면서도 기꺼이 빠진 죄만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35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지은 과오 이외에는 어떤 죄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고의적인 죄를 대속할 제물과(레 6 : 1이하) 모르고 한 행위를 대속할 제물을(레 4장) 각각 따로 드리라고 주께서는 율법에서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고의적인 죄에 대한 대속을 거부한다는 것은 심히 악한 생각이다. 주께서는 육적인 제물을 인으로 삼아 성도들의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확인하셨으므로, 이 용서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명백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또 분명히 율법에 통달했던 다윗이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백성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매일 처벌한 다윗이 이런 것이 큰 죄라는 것을 몰랐던가?(삼하 11장) 족장들이 동생을 죽이는 것을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겠는가?(창 37 : 18이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정욕과 불결과 음행과 미움과 분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 배웠던가?(고전 5장) 신중한 경고를 받은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을 몰랐던가?(마 26 : 7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가 그렇게 관대하게 나타나는 데에도, 박정한 우리가 그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29. 고대 교회에 있었던 "두 번째 회개"에 대한 문제

 

고대 저술가들은 신자들이 매일 받은 용서는 가벼운 과실, 즉 육이 약하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가벼운 과실에 대해서 뿐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엄숙한 회개는 더욱 크고 가증스런 죄에 대한 것이며, 세례와 같이 한 번 이상 반복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36 우리는 이 견해에 대해서, 그들은 첫번 회개 후에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또는 소망을 빼앗으려고 했다든지 또는 다른 과실들을 하나님 앞에서 적은 것같이 경시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부들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고 비틀거리는 일이 많으며 때로는 공연한 맹세를 하고 가끔 화를 내며 심지어는 욕설을 터뜨리고 이 밖에도 주께서 심히 싫어하시는 악습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일들을 "경미한 과실"이라고 부른 것은 큰 추태를 부려서 교회에 알려지는 드러난 범죄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적으로 시정해야 할 만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용서를 받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죄가 주 앞에서 용서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엄격하게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명을 당할 만한 죄를 경솔히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지도 법칙인 주의 말씀은 더욱 온화한 태도를 명령하신다. 권징 시행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권징의 중심 대상인 사람이 슬픔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후 2 : 7) 우리는 이 점을 위에서37 매우 자세히 논했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와의 비교

 

(참된 교리와 예배를 떠나면 카톨릭이 주장하는 참된 교회란 무효가 되고 만다. 1-6)

 

1. 근본적인 구별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우리는 특히 존중해야 하며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는 영원한 표식으로 만들 정도로 이 일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1 즉 이 일이 건전하고 순결하게 유지되는 곳에서는 도덕적 과실이나 병폐가 있더라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교회 내에 사소한 과실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그 합법성을 부정할 정도로 교회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용서해야 될 과실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중요한 교리를2 손상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을 말살하지 않는 과실 그리고 성례에 대해서 주의 합법적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복시키지 않는 과오는 용서해야 된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요새에 허위가 침입해서 필수적인 교리의 핵심과 성례의 효험이 파괴될 때에, 분명히 교회는 죽게 된다. 목을 찔리거나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의 교훈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말에도(엡 2 : 22)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는데, 이 교훈을 없애버린 후에 교회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의 이 핵심뿐이므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 : 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2. 로마 카톨릭교회와 그 주장

 

교황 제도하의 이러한 상태, 즉 거기 얼마나 많은 교회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3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사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며, 이 조직이 순수한 빛을 꺼 버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미신으로 더렵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고 치명적인 비행에 참여하지 않아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어질 염려가 없다. 교회와의 교통은 그것이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기타 악행에 우리를 빠뜨리는데 이바지 해야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극찬하여 세상에는 그들 외에 다른 교회는 없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제가 결말이 난 것처럼, 자기들의 교회의 자랑거리인 복종을 감히 버리는 사람은 분리주의자이며 그 교리에 감히 반대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자기들에게 진정한 교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그들은 고대의 기록을 근거로 과거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있었다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건전한 교회들을 창설하고 피를 흘려 그 교리와 교회의 건물을 설립한 저 거룩한 분들을 자기들의 뿌리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회는 영적 은사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순교자들의 피로 성별되며 주교들의 연속적인 계승에 의해서 보존되고,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이 이 계승을 중히 여겼다고 회고한다.4

그러나 나와 함께 이러 주장들을 잠깐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천박한 것인가를 곧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사실, 그들도 나에게서 배워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할뿐이므로, 나는 몇 가지 점만 이야기함으로써 선한 사람들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선, 나는 그들이 왜 아프리카와 이집트와 아시아 전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고 묻겠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를 유지해 왔다고 자랑하던 주교들의 계승이 이 여러 지방에서는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교들의 계승이 끊어진 일이 없고 애당초부터 줄곧 주교가 존재한 자기들의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 앞에 희랍을 들이댄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나는 다시, 그들은 왜 희랍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가 소멸됐다고 하느냐고 묻겠다. (그들이 교회를 유일하게 보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주교들이 희랍에서는 계속해서 계승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희랍 사람들을 분리파라고 하는데,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하는가? 사도 교구에서 떨어졌으므로 특권을 잃었다고 대답한다.5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들은 더욱 특권을 잃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따라서 조상들의 손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건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고 그 진리대로 삼지 않는다면 계승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3.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표시 난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옛날 유대인들이 맹목, 불경건, 우상 숭배 등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하던 주장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와 같이, 유대인들은 성전과 의식과 제사장들의 활동을 굉장히 자랑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회를 확실히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 대신에 겉모습을 자랑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또 없어도 교회는 훌륭히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의 미련한 자신감을 꺾는데 썼던 논증을 사용하려고 한다.

즉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 : 4) 주께서는 주의 말씀이 전파되고 양심적으로 지키는 곳이 아니면 어떤 성전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의 그룹들 사이에 머무르며(겔 10 : 4) 이곳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가 되리라고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지만, 제사장들이 사악한 미신으로 예배를 타락하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는 그의 영광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성소에서 거룩한 성격을 빼앗으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로서 성별된 듯 하던 성전까지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세속적인 것이 되었으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과 장소에 매이며 형식적인 행사에 끌리고 교회라는 이름과 외형만 있는 곳에(롬 9 : 6) 항상 계셔야 한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다.

또 바울이 로마서 9장부터 12장6 사이에서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듯이 보이면서도 복음의 교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복음을 핍박한다는 사실이 연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리를 설명한 다음에 이 문제를 처리한다. 유대인들은 교회의 외형에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를 대적했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부정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해서, 자유인인 어머니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기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많다고 한다(갈 4 : 22이하). 바울은 더 나아가 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전해진 것같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그래서 종으로 나서 자랐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회의 자녀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서자이면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교만한 태도로 멸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으며(창 21 : 10), 이 신성한 명령을 믿고 그들의 무미 건조한 자랑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들의 외형적인 고백을 자랑한다면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었고, 그들이 연대가 오래 되었다고 자랑한다면 그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바울은 교리적으로 순수하고 합법적인 근원에서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대답한다(롬 9 : 6-9).

이 이론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자신의 사자 또는 통역자로 삼는다고 언약하셨다고 해서 자신이 그의 자손인 사악한 제사장들에게 매이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참으로, 제사장 계급의 존엄성을 특히 존중해야 된다고 하면서 항상 예언자들에게 반항하는 제사장들의 거짓된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려 대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기꺼이 인정하시면서, 자신은 언약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들 편에서 응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계승자들이 연속적으로 또 진심으로 선인들을 본받지 않는다면 이 계승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들의 근본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모든 영예를 박탈당한다(말 2 : 1-9). 가야바의 선조에 경건한 제사장이 많았고 (참으로 아론으로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중단되지 않고 제사장직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저 사악한 무리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세속적인 정치에서도, 브루투스나 스키피오나 카밀루스7 같은 사람들을 계승했다고 해서 칼리굴라, 네로, 헬리오가발루스의 무리가 행한 폭정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특히 교회 기관에서 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계승 관계만을 중시한다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주교들이 계속 계승되는 곳에서 일종의 상속권에 관한 것처럼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룩한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잘못이며, 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한 일도 전혀 없다. 처음부터 학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리에 변동이 없었던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들은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한 충분한 방어책으로서 한 원칙을 채택했다. 즉 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만장 일치로 확고하게 보존되어 온 교리로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항하여 싸웠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우리가 공경하는 또 공경해야 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을 더 속이려고 애쓸 이유는 없다. 그들이 교회를 정의하려고 할 때, 속담에 있듯이 그들에게 물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8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의 자리에 추악한 창녀를 앉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창에 빠져 버린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속지 않기 위해서(다른 이들도 있으나) 어거스틴의 권면을 생각하기로 하자. 그는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산적한 추문에 가려지는 것처럼 희미해지고 때로는 평온한 때를 만나 평온 무사하며 혹은 고난과 시험의 파도에 휩쓸린다." 가장 강력한 기둥들이 믿음을 위해서 용감하게 추방을 감수하며 혹은 세계 각지에서 숨어 지낸 일이 많다는 것을 그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9

 

 

 

4.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일 큰 대적이면서도 교회의 이름으로10 지금 우리를 괴롭히며 무식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성전과 사제 계급과 그외의 외부 장식을 내놓지만, 단순한 사람들의 눈이나 현혹시킬 헛된 외화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이는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 주께서 그의 백성에게 인치신 영원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 : 37)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요 10 : 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 : 27) 그러나 조금 전에 주께서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 : 4-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는 표식으로 교회를 교시하셨는데 왜 우리는 교회를 찿느라고 미친 사람같이 행동하는가? 표식이 보이는 곳에는 틀림없이 교회가 있으며, 표식이 없는 곳에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사제 계급이 아니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교훈이라고 바울은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킨다(엡 2 : 20). 참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탄의 권모술수의 차이점을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 : 47). 요약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흘로 즉 그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상상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것을(렘 7 : 4 참조) 어느 누가 분명히 깨닫지 못할 것인가?

 

 

 

5. 종파 분립과 이단의 비난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분파와 이단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과 다른 교리를 선포하며 따로 기도 집회를 갖고 세례를 베풀며 성만찬과 기타 거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비난이지만 길고 어려운 변호가 필요하지는 않다.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단과 분파를 구별해서, 이단자들은 잘못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지만 분리론자들은 이따금씩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11

그러나 사랑의 결합은 믿음의 일치에 달려 있으므로, 이 후자는 전자의 출발점과 종점과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연합을 우리에게 권고할 때 요구 조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때 우리의 의지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호간의 호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의 연합을 권하면서,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는(엡 4 : 5) 입장이라고 한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빌 2 : 1-5) 또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고 (롬 15 : 5) 첨부한다. 주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간의 일치가 없고 오직 악한 사람들의 갈라지는 파당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6. 그리스도가 머리됨이 연합의 여건이다

 

키프리아누스도 바울을 따라, 교회 전체의 화합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감독으로 모시는 경우에만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결실이 많으므로 널리 퍼져 많은 교회가 된다. 빛이 하나이면서 그 광선은 많은 것과 같다. 나무의 가지는 많으나 그 굳센 줄기는 하나이며, 줄기는 땅 속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있다.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흐르고 많은 시내가 각각 자체의 풍부함에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다. 태양에서 오는 광선을 보라. 태앙 자체는 갈라지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꺾어 보라. 꺾인 가지에서는 움이 돋지 않는다. 시냇물의 근원을 막아 보라. 시내는 말라 버린다. 그와 같이 교회는 주의 빛을 풍성하게 받아 전 세계에 퍼뜨리며, 그 빛 하나 하나는 각지에 확산된다."12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가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항상 우리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이단설과 분파 행동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머리이신 분을 찾지 않고 하늘 교사의 교훈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회를 떠난 우리는 이단이라고 외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가 떠난 유일한 원인은 진리를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들이 절대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저주하는 말로 우리를 추방한 것을13 나는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도를 분파주의자라고 정죄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그의 이름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다(요 16 : 2). 주께서 말씀하신 이 회당들은 당시에 합법적 교회로 인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쫓겨났고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일이란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 대해서 좌우간의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점을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는데, 이는 나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재판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는 고대 이스라엘과 비교된다. 7-11)

 

7.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우상의 압제 하에 억눌려 있던 모든 교회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것은 예언자들이 기술한 고대 이스라엘 교회와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법들을 지킬 때에는 그들 중에 진정한 교회가 있었다. 즉 하나님과 은혜로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다. 율법에서 진리의 교리를 얻었으며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교리를 선포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 종교에 입문하며 그 밖의 성례를 실시함으로써 믿음을 강화시켰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영예로운 칭호들은 확실히 그들의 사회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 숭배와 미신에 빠져 그 특권의 일부를 잃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의 성례를 집행하는 일을 맡기신 백성에게서 누가 감히 교회라는 이름을 제거했는가? 또 주의 말씀을 공공연하게 짓밟고도 벌을 받지 않으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힘과 생명 자체가 되는 말씀 선포를 말살해 버리는 무리를 누가 감히 통 털어서 "교회"라고 불렀는가?

 

 

 

8.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그러면, 혹자는 유대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후에는 그들 사이에 교회의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첫째, 타락에도 몇 가지 정도가 있었다고 나는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 백성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경배에서 타락했을 때 그것이 같은 정도의 타락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송아지를 만들며 불법적인 예배 장소를 정했을 때에 그의 종교를 완전히 부패시켰다(왕상 12 : 28이하). 유대 백성도 종교의 외형까지 위조하기 전에 악하고 미신적인 풍습에 오염되었다. 여로보암 때에 이미 여러 가지 타락한 의식을 일반적으로 가르쳤으며 채택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여전히 율법을 가르쳤으며 제사장이 있었고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들이 존속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쓸만한 교회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 때까지 사태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 후에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혹은 아합과 같았으며 혹은(아합보다 조금 낫다는 것이) 여로보암을 본받았다. 그러나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가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였다. 유대에서는 가끔 변화가 있었다. 어떤 왕들은 거짓된 미신을 조작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타락시켰고 어떤 왕들은 쇠퇴한 종교를 재건했다. 드디어는 제사장들까지도 가증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성전을 더럽혔다.

 

 

 

9. 카톨릭 교회는 부패하였으며,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황주의자들은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에 못지 않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서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했었다는 것을 부정해 보라. 그들의 과오도 될 수 있는 대로 변명해 보라. 그러나 그들은 추잡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교리 방면에서도 더 순수한 점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실제적으로는 더욱 불순하다. 하나님께서, 또 보통의 판단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증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사태 자체까지도 나는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그들의 교회와 교통하도록 강요하고 싶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요구한다. 첫째는 우리가 그들의 기도와 성례와 의식에 참가해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모든 명예와 권세와 재판권을 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점에 대해서, 나는 상태가 완전히 부패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예언자들은 모두가 개인적으로 제물을 드리지도, 따로 기도회를 드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그들에게는 솔로몬의 성전에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신 12 : 13,11).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그 직분에 머무를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지만 성례를 집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셨고(출 29 : 9) 면직하신 일이 없으므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예언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즉 에언자들은 미신적인 예배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교황주의자들-에게는 어디에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과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거의 명백한 우상 숭배로 더렵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통의 중심 유대는 미사인데 이것을 우리는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혐오한다. 우리의 이 태도가 바른 것인지 또는 경솔한 것인지는 다른 곳에서14 알려질 것이다. 지금은 우리와 예언자간의 경우가 이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악인들의 의식에 참석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 이외의 것을 보거나 또는 거기 참석하라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일 모든 점에서 유사한 예를 원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다. 여로보암의 칙령에 따라 종전과 같이 할례를 행했으며 제물을 드렸고 거룩한 율법을 지켰으며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금지된 가짜 예배 형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한 일을 모두 불가하다고 정죄하셨다(왕상 12 : 31). 벧엘에서 예배하거나 제사를 드린 예언자나 경건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누구든지 내게 보이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짓을 하면 반드시 신성 모독으로 몸을 더럽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을 교회의 교통을 중요시하되 교회가 부패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타락했을 경우 그런 교회를 경솔하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10. 우리가 부패한 교회를 멀리해야하는 이유

 

둘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주장할 것이 더욱 많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그 판단만을 공경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며 그 경고에 순종하고 그 징계로 마음을 고치며 모든 일에 그 교통을 양심껏 보존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에 복종하게 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같거나 혹은 더 낫다면 예언자들이 당시의 유대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한 것을 우리도 교황주의자에게 기꺼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예언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모임이 신성 모독이고(사 1 : 14) 그들에게 찬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불법이란 것을 여러 번 공언했다. 만일 그들의 모임이 교회였다면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나 미가와 같은 사람들이, 유대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와 호세아와 그 밖의 종류의 사람들(당시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무할례자 보다도 더 나쁜 자들이라고 해서 미움을 받은 자들) 이 하나님의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집회가 교회였다면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딤전 3 : 15) 거짓의 버팀목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막(Taberacle)이 아니라 우상을 두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악한 음모에 불과한 그 모임들에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미신과 불경건한 교리에 오염된 현대 회중들을 교회 즉 그리스도인이 교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와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들이 교회라면 열쇠의 권한이 그들의 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쇠는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그들 중에서는 그 말씀이 파괴되었다. 또 만일 그들이 교회라면 "네가 무엇이든지 매면" 운운하신(마 16 : 19, 18 : 18, 요 20 : 23) 그리스도의 약속이 그들 사이에서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의 교통을 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약속이 헛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적어도 이 점에서-교회가 아니다. 끝으로,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을 가르치는 학교들과 각종 오류의 소굴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교회가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의 합법적인 회중과 불신자들의 집회를 구별하는 표식이 없어지거나 할 것이다.

 

 

 

11. 교황 제도하에 남아 있는 교회의 자취

 

옛날에는 교회의 일부 특전이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파멸을 면하게 하신 교회의 흔적이 교황주의에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한 번 맺으셨으나, 그것을 보존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언약이 그 자체의 힘으로 그들의 불경건과 싸우면서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언약이 그들 중에 존속한 것은 확실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배반은 주의 진실을 말소할 수 없었고, 비록 그들의 불결한 손이 할례를 더럽혔을지라도 그것을 여전히 여호와의 언약의 진정한 표징이며 거룩한 성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난 사람들을 주께서는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셨으며(겔 16 : 20-21), 이 사람들은 오직 특별한 복에 의해서 여호와께 속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신 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과 스페인과 영국에서도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들이 적 그리스도의 압제로 억압을 당할 때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로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건물이 헐릴 때에 기초와 폐허가 남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적 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 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혼란과 분열을 겪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12.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타락한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절대로 교황주의자에게 유일한 교회라는 칭호를 주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15 오히려 우리는 다만 신앙 고백의 표준인 성례뿐만 아니라 특히 교리에 있어서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진정하고 합법적인 교회 제도를 주장한다. 다니엘과(단 9 : 27) 바울은(살후 2 : 4) 하나님의 성전에 적 그리스도가 앉으리라고 예언했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16 수령과 기수는 로마 교황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지배력이 그리스도나 교회의 이름을 말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압제 하에 있는 교회들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그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파묻혀 숨겨졌으며 북음은 타도되었고 경건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의 말살되었다. 요컨대, 모든 일이 혼란에 빠져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보다도 바벨론의 모습이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그 교회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비록 비참하게 분산되어 있지만-기적적으로 보존하셨기 때문이며, 표식 특히 악마의 간계와 인간의 패악도 파괴할 수 없는 교회의 표식이 다소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논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하는 표식들이 없으므로 나는 그 교회들에게는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말한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 이 기능은 고귀하고 필요하다. 1-3)

 

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통치하기 위해서 쓰시는 교회의 교직 제도를 말해야 하겠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 : 11). 우리는 그가 사람들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에 도구를 쓰는 것과 같다.

나는 먼저 설명한 것을1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도움이나 도구가 없어도 사업을 친히 하시거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실 수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방편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택하신다.

이런 방편으로 우선 우리에게 대한 관심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고후 5 : 20 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그를 대표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우리를 그의 성전이라고 부르시는 것이(고전 3 : 16-17, 6 : 19, 고후 6 : 16)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신다.

사람들의 입들 통해서 마치 성소에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시기 때문이다.2

또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거나,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경건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그의 능력의 임재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렇게 위대한 위엄을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 끝없는 광채에 당황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흙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 : 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려는 의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서로 합하여서 사랑을 보다 올바르게 양육하는 한 끈이 있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이 목사로 임명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제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한 입에서 공통된 교훈을 받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만으로 만족해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이렇게 인간이 교만하다) 서로가 남을 멸시하며 또 멸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시고 이것이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힘있는 수단이라고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그들의 손을 거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이 점을 숙지하면서 바울은 에베소서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 : 4-7)라고 기록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말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 : 8,10-16).

 

 

 

2.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바울은 사람의 목회는 신자들을 결속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이라는 말로 사람의 목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울은 교회를 손상 없이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만드신 안전 대책으로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4 : 10). 이 일이 실현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통해서 선물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는 이 제도 안에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스스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성도들의 갱신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세워지며 (엡 4 : 12), 이렇게 우리는 범사에 머리이신 그에게까지 자라여(엡 4 : 15 참조) 서로 함께 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사이에서 예언 활동이 활발하고 사도들을 영접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교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질서와 이런 교회 정치를 폐지시키려고 하든지 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열이 또 음식이 필요하지만,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더욱 더 필요하다.

 

 

 

3.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풍요하다

 

위에서3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직 제도를 옳게 보시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교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라고 증언하신다. 예언자에게 명령 하셔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외치게 하시며(사 52 : 7), 사도들을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신다(마 5 : 13-14).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찬사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눅 10 : 15).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 문제를 마치 고의로 논의하듯이 했을 때 기록한 구절이 가장 확실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성령과 의와 영생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한다(고후 4 : 6, 3 : 9).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의 뜻은 성직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며 유지하는 방식,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시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직이 확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뿐만 아니라 실례로 공포하신다.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더욱 풍부하게 비추려고 하셨을 때,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어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다(행 10 : 3-6). 바울을 불러 자신을 알게 하시며 교회에 접붙이고자 하셨을 때, 친히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를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에게서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의한 성결을 받게 하셨다(행 9 : 6). 하나님의 대변자인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발표하지 않고 그렇게 할 사람을 부르도록 명령하신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자들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람에게 맡겨 배우게 하시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이 바울을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만하게 만드시기로 이미 정하셨다(고후 12 : 2-4) 그러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이런 증거로 그 유용성을 증명하신 성직을 멸시하거나 또는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할 것인가?

 

 

 

(성경에 있는 직분들을 설명한다. 4-9)

 

4.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 : 11). 이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것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막 16 : 15) 명령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도들에게는 아무 제한도 두지 않으시고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고 하셨는데, 이는 각 국민 사이에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여기 저기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들을 세웠노라고 한다(롬 15 : 19-20).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견된 목적은 반역하는 세상을 돌이켜 하나님께 올바르게 복종하게 만들며 복음을 전해서 세계 각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세계에 그 터를 닦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전 3 : 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엡 4 : 11).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그들 다음에 있으면서 그들을 대신해서 활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 외의 비슷한 사람들이 전도자였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인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었을 것이다(눅 10 : 1).

이렇게 해석한다면(이 해석은 바울의 말과 의견에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직책은 교회 내의 항구직으로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 세우거나 교회를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 한 당시에 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그 후에 간혹 사도들을, 적어도 그들 대신에 전도자들을 일으키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4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돌이키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직책이 바르게 조직된 교회 내에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다음이 목사와 교사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책들이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교사들은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5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5. 임시직과 항존직

 

우리는 이제 교회 조직에서 어떤 것이 임시직이며 어떤 것이 항존직으로 제정되었는가를 생각하겠다. 전도자와 사도를 한 덩어리로 뭉친다면 우리는 상응하는 두 쌍을 볼 수 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한다. 선지자의 직분은 그 탁월한 특수 계시의 은혜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 매우 비슷하며 그 목적이 똑같다. 그래서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할 목적으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은 가장 높은 서열에 있었다(눅 6 : 13, 갈 1 : 1). 그런데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듣지 못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열두 제자에게(후에 바울이 첨가된 그들에게)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다른 장소에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이 명칭을 적용하고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던" 사람들이라고 했다(롬 16 : 7). 그러나 그가 엄밀히 구분해서 말하고 싶을 때에는 처음 등급에만 이 말을 적용한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 용법이다(마 10 : 1). 그러나 목사들은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도들과 똑 같은 책임을 맡았다. 이제 그 책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하게 듣기로 하자.

 

 

 

6. 사도들과 목사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셨을 때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6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 : 19).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눅 22 : 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에게 신성 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여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사도를 사칭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목사들은 어떤가? 바울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들 전체에 대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고전 4 : 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다"(딛 1 : 9)고 말한다. 이 구절들과 흔하게 자주 나타나는 비슷한 구절들을 보아서, 우리는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례한다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가르치는 방법은 공개적인 강론만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을(행 20 : 20-21) 그들도 안다고 말하였고, 조금 뒤에 자기는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했다(행 20 : 31). 그러나 나는 지금 선한 목사의 은사를 자세히 알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목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이려는 것뿐이다. 즉 그들이 교회 위에 임명된 것은 무위 도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임명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주께서는 만일 그들의 태만으로 인해서 또 어떤 사람이 무지 때문에 멸망한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겔 3 : 17) 선포하신다. 바울이 자신에 관해서 한 말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 : 16-17). 끝으로, 사도들이 전세계를 위해서 한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해야 한다.

 

 

 

7.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다

 

우리는 목사를 각각 그 교회에 파송하지만, 동시에 한 교회에 매여있는 목사가 다른 교회를 돕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분란이 생겨서 그가 있어야 한다든지 어떤 애매 모호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조언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즉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이 없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 목사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 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 결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전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세운 교회들에 각각 처음으로 장로들을 임명했고(행 14 : 22-23) 또 바울은 디도에게 명해서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게 했다(딛 1 : 5).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에 대해서(빌 1 : 1) 또 골로새 교회의 감독 아킵보에 대해서 (골 4 : 17) 말한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주목할 만한 설교를 기록했다(행 20 : 18-19).

그러므로 교회를 다스리며 돌보는 일을 담임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이 법에 자기가 구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법률가들의 말과 같이) 교회 소유지에7 매이지 않았다. 즉 꽁꽁 묶여 그 땅에 매여 있어서 공공의 복리가 요구하는 때에도 그리고 그 요구가 정당한 방법과 순서를 밟아 온 때에도 그 땅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곳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그곳을 떠나거나 그곳에서 놓이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유익하다 할 때에도 자기의 사사롭게 개인적인 결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

 

 

 

8. 말씀을 전하는 직분 : 장로

 

내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자"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이 말들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이다.8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디도에게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딛 1 : 5) 명령한 직후에, "감독은‥‥‥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한다(딛 1 : 7, 딤전 3 : 1 참조). 다른 데서는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에게 문안하였다(빌 1 : 1). 사도행전에는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이야기한 기사가 있는데(행 20 : 17), 그는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른다(행 20 : 28).

지금까지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만을 생각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야 하겠다. 우리가 인용한 에베소서 4장에서(엡 4 : 11)9 바울은 다른 직분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와(롬 12 : 7-8) 고린도전서에서(고전 12 : 28)는 다른 직분들을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통역, 다스리는 것, 구제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그러나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

다스리는 사람들은(고전 12 : 28)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고 나는 믿는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롬 12 : 8) 달리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잘못을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10 말하겠다. 그런데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경험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9. 집사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롬 12 : 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과부들도 두 번째에 속하였다(딤전 5 : 9-10).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섬기는 일 : 집사직)라는 말에는 더 넓은 의미가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 행전에 기록했다(행 6 : 3).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은 매일 구제에서 제외된다는 소문을 터뜨렸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기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공궤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직한 사람 일곱 명을 선택해서 이 일을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다11(행 6 : 1이하).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10-16)

 

10.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성회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지만(고전 14 : 40) 질서가 가장 잘 지켜져야 할 때는 교회 정치를 확립할 때이다. 여기서는 무슨 일을 불규칙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썽을 일으켜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의했다.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되려면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아야 하고(히 5 : 4), 다음에 이 소명에 응해야 한다. 즉 명령을 받은 일은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바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사도직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과 자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암시한다(롬 1 : 1, 고전 1 : 1). 그리스도의 이 위대한 일꾼도 자기가 주의 명령으로 사도직에 임명됐다는 것과 위임된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교회에서 발언할 권위를 감히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중의 한가지도 없는 사람이 이런 영예를 가지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 직분 완수의 필요성에 관해 잠깐 언급했으므로 지금은 소명만을 논하겠다.

 

 

 

11.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네 가지 점을 이해해야 한다. ⑴ 어떤 종류의 사역자가 될 건인가? ⑵ 어떻게 ⑶ 누구에 의해서 임명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⑷ 임명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련된 외형적인 엄숙한 소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밀한 소명은12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 일꾼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된 직책을 받는 것은 야심이나 탐욕이나 그 밖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더 잘 증거한다.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런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비록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이 직분에 임하는 사람도 그의 사악한 심사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부르심을 받는다. 또한 사람들은 평신도에 대해서 그들이 성직에 적당하고 유능하리라고 생각할 때에는 흔히 소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좋은 목사의 경건을 겸한 학식과 그 밖의 은사는 확실히 이 직분을 위한 일종의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런 높은 자리에 예정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임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 여러 가지 직책을 논할 때, 각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특히 가져야 할 은사를 먼저 열거했다(고전 12 : 7-11).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제목 중의 첫째이므로 이제부터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12.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두 구절에서(딛 1 : 7, 딤전 3 : 1-7) 어떤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충분히 논한다. 요약하면,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딤전 3 : 2-3, 딛 1 : 7-8). 집사와 장로들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한다(딤전 3 : 8-13). 우리는 항상 그들이 맡은 직무에 합당하고 충분하도록, 즉 그 직분 수행에 필요한 기능을 알고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주셨다(눅 21 : 15, 24 : 49, 막 16 : 15-18, 행 1 : 8). 그리고 바울은 선하고 진정한 감독을 그려 보인 다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디모데에게 충고한다(딤전 5 : 22).

내가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선택하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때에 갖추어야 할 종교적 경외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행 14 : 23 기타) 그들은 무엇보다도 엄숙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드시 최고의 경의와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특히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간구했다(참조, 사 11 : 2).

 

 

 

13. 누가 사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우리가 논할 셋째 점은 어느 누가 사역자들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소명은 다른 것들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확실한 표준 이 될 수 없다. 사도직은 특별한 직분이었고 그 자리를 더욱 현저한 표식으로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도가 될 사람들을 친히 주의 입으로 임명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의 명령만으로 임명되어 임무 수행에 나섰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유다의 후임자를 구했을 때에도 감히 한 사람을 확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내세워서 주께서 제비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결정하시게 했다(행 1 : 23-26). 바울이 자기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자라고 한 말도(갈 1 : 1,12 참조)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람으로 말미암은"이라는 첫 말씀은 모든 말씀 선포자들과 공통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말씀은 바울에게 독특하고 또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점을 자랑한 것은 합법적인 목사가 가질 것을 가졌다는 자랑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을 표시하는 휘장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는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 그는 보통 제자이고 처음 사도들만이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가 암암리에 공격을 받는 것을 알고는 그의 전도의 위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이 자기는 모든 점에서 다른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자기는 보통 감독같이 사람들의 결정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입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선택되었다고 언명했다.

 

 

 

14. 사람을 통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이 감독을 임명하는 것이 합법적 소명과 모든 점에서 조화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 관습을 증명하는 구절이 많다. 방금 인용한 바울의 말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도 이 관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평상시에 사역자를 선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도들에게 특유한 점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특권을 행사하셔서 바울도 임명하셨지만 동시에 교회를 통한 소명이라는 규율을 이용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 : 2). 성령께서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신 후에 이렇게 따로 세우며 안수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자들을 임명한다는 교회 규율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언급하신 후에 교회가 그를 지명하게 하심으로써 가장 명백한 실례로 이런 질서를 시인하셨다. 맛디아를 선택했을 때에도(행 1 : 23)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사도직은 심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한 사람을 사도로 선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세워서 그 중 한 사람이 제비로 뽑히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선택은 하늘의 명확한 확인을 얻었지만 조금도 교회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다.

 

 

 

15. 평신도의 투표

 

사역자를 선택하는 것은 교회 전체인가,13 또는 그의 동료들과 도덕적 책망을 맡은 장로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의 권위로 임명되는가 하고 혹자는 사역자 임명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이 권위를 한 사람에게 주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 : 5). 디모데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 5 : 22).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와 그레데에 있는 디도가 교회를 다스릴 때에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속은 것이다. 디모데와 디도가 다른 사람들 위에 있은 것은 건전하고 좋은 충고를 하려는 것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증거를 위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비슷한 예를 들어 나의 주장을 밝히겠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해서 투표를 했다고 즉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14 라고 기록했다(행 14 : 23).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장로들을 "택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람들의 선거 풍속에 따라 교회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어떤 집정관이 민회를 열고 새로 치안관들을 "택했다"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투표를 받으며 선거를 주관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의 권리라고 주장한 것보다 저 큰 권리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허락했을 리가 없다. 바울은 항상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감독들을 "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교회 전체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을 선정하며 공중의 결정과 증언에 의해서 감독이 적임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유래한 일이라고 한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옳은 말이다. 사실 레위족의 제사장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성별하기 전에 온 백성 앞에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레 8 : 4-6, 민 20 : 26-27). 맛디아를 사도로 보선한 것도 같은 방법이었고(행 1 : 15이하) 일곱 집사도 신자들이 보고 찬성하는 가운데서 임명했다(행 6 : 2-7).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이런 예들을 보더라도 성직자를15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반 신도들이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임명이 모든 사람의 증거로 검토되며 공정하고 합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역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적당한 듯한 사람들을 일반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선거는 다른 목사들이 주관해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만 회중이 경박함과 악한 의도나 무질서 때문에 탈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6. 임명

 

우리가 소명의 마지막 점이라고 한 임명식이 아직 남아 있다. 사도들이 사역자를 임명했을 때에 안수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 관습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성별 받기를 원할 때 그 위에 손을 얹음으로써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려고 할 때에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창 40 : 14). 우리 주께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마 19 : 15).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제물에 안수한 것도(민 8 : 12, 27 : 23, 레 1 : 4, 3 : 2,8,13, 4 : 4,15,24,29,33 기타) 같은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수함으로써 그들이 사역자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눈에 보이는 은사를 신자들에게 베풀 때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행 19 : 6). 여하간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를 임명할 때마다 사용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목사와 교사와 집사들을 성별했다.

안수에 대해서는 일정한 가르침이 없지만 사도들이 항상 이 방법을 쓴 것을 보아서, 이 방식을 엄밀히 지키는 것이 곧 가르침을 대신할 것이다. 확실히 이 의식은 직분의 위엄을 교회에 알리는 징표로서 유용한 동시에, 임명을 받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앞으로는 그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한 매인 몸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그뿐 아니라, 안수의 진정한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면 그것은 허무한 표징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어떤 것도 이유 없이 교회 내에 세우시지 않는다면 이 의식도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므로, 미신적으로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무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회중 전체가 사역자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만이 안수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여러 목사가 안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곱 집사들과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럿이 안수한 것이 분명하다(행 6 : 6, 13 : 3).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럿이 아니라 자기가 디모데에게 직접 안수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말한다(딤후 1 : 6). 바울이 장로회의 안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에서16(딤전 4 : 14) 한 말을 나는 장로들이 안수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임명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장로로 임명했을 때에 안수에 의해서 그대가 받은 은혜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제 4 장

 

고대의 교회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정치1

 

(사역의 역사적 발전 ; 사역자의 세 부류 :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들, 그 중에서 선택된 한 사람의 감독, 대감독. 1-4)

 

1.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우리들에게까지 전해 온 교회 정치 질서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이다.2 이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고 진지하게 만들며 더욱 잘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고대 교회의 특색을 고찰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고대 교회의 특색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 볼 수 있다. 당시의 감독들은 여러 가지 교회 법을 발표해서 성경에 없는 뜻까지 표현한 듯이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있는 독특한 형태와 일치하도록 세밀하게 주의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결정에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혹 그들의 처리에 부족한 점도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보존하기 위해선 진지하게 노력했고 또 그렇게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무엇을 지켰는가를 간단하게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교회의 사역자들도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장로 계열에서 ⑴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⑵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책망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⑶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독경사와 시제는 아직 정확한 직분을 표시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을 "성직자"라고 부르며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일정한 일을 시켜 자기들의 임무를 잘 이해하도록 훈련시켰는데, 이것은 적당한 때가 오면 곧 직분을 맡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후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3

그러므로 제롬은 다섯 가지 교회 계급을 말하고, 그것을 감독, 장로, 집사, 신자, 학습 교인(catechumen)이라고 했다. 그 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는 특별한 지위를 주지 않았다.4

 

 

 

2. 감독의 지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불화를 막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훨씬 더 많은 영예와 위엄을 가지고 있어서 동료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은 원로원에서 집정관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즉 사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의견을 물으며 의견을 말하고 충고하며 권고함으로써 모임의 의장이 되며, 모든 행사를 그의 권위로 주관하고 회의 결정 사항을 심사하는 등, 집정관이 한 일들을 감독이 장로회에서 집행하였다.

고대 사람들 자신은 이 제도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사람들의 합의로 시작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롬은 디도서 주해에서 말한다. "감독과 장로는 꼭 같다. 마귀의 유혹으로 교회에 불화가 생기고 사람들이 나는 바울 파다, 나는 게바 파라 하기 전에는(고전 1 : 12, 3 : 4 참조) 장로들의 협의로 교회를 운영했다." 그 이후에 불화의 씨를 없애기 위해서 감독권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교회의 관습에 따라 주관하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이 감독들도 자기들이 장로들보다 높다는 것은 주께서 정하신 일이 아니라 교회의 관습에 의한 것이며, 장로들의 협력을 얻어서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5 그러나 제롬은 다른 곳에서, 이 제도는 매우 오랜 것이라고 한다. 즉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복음서 저자 마가의 시대에서부터 헤라클라스와 디오니시우스의 시대까지 장로들은 항상 동료 한 사람을 뽑아서 더 높은 지위에 앉히고 "감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6

그때에는 각 도시에 장로회가 있었으며 그 장로회는 목사와 교사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권고하며 징계하는 직무를 이행했다. 이것은 바울이 감독들에게 명령한 일들이다(딛 1 : 9). 또 그들은 후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거룩한 단체에 들어온 청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각 도시에는 일정한 지역이 할당되어, 그 지역 내에서 장로들을 뽑으며 그 지역을 교회의 몸의 일부로 생각했다. 장로회는 교회의 조직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감독 아래에 있었다. 감독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위엄을 가졌지만 동시에 형제들의 회의된 안건에는 복종했다. 그러나 감독이 맡은 지역이 너무 넓어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곳이 있을 때에는 장로들을 그런 지역에 배치해서 작은 일들을 대신 처리하게 했으며, 이들은 지방 전체의 감독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런 장로들을 "지방 감독"7 이라고 불렀다.

 

 

 

3. 감독과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하는 직분에 대해서 본다면,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을 전파하며 성례전을 시행하는 데 전력을 다하여야 했다.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 것은(아리우스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든 후) 알렉산드리아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Tripartite History)의 제 9 권에서 말한 바와 같고,8 제롬은 이 사실에 대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9

확실히 진정한 감독임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감독을 자칭한다면 이상한 일로 인정됐을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엄격해서, 사역자들은 모두 주께서 요구하신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한 시대의 관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미 고대 교회의 순수성이 많이 부패해서 교회가 거의 붕괴되었지만 그래도 감독이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에게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죽은 것이다. 설교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지 않는 감독은 숨은 심판자의 진노를 자기 위에 내리게 한다." 또 다른 곳에서도 말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깨끗하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행 20 : 26), 우리 자신에게 죄악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시키는 감독이라 불리우는 우리는 바울의 말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되고 강압을 느끼며 유죄가 증명된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미지근하고 잠잠한 우리는 그들을 죽이는 자들이다."10 그는 자기나 다른 감독들이 일에 대한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묵묵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직분을 절반 완수한 감독들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은 교회의 오랜 원칙이었다.

 

 

 

4. 대감독과 총대감독

 

각 지방마다 대감독 한 사람이 있었으며, 니케아 회의에서 총대감독 이 대감독보다 지위나 위엄이 더 높다고 결정한 것은11 규율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극히 드문 관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위는 어떤 교회 내의 문제가 몇 사람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을 때에 그 지방의 교회 회의에 맡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창설된 것이다. 만일 문제가 크거나 어려워서 더 광범한 토의가 필요한 때에는 교회 회의와 함께 총대감독들을 소집했고, 이 외에는 교회 전체의 총회에 상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조직된 것을 교권 제도(hierarchy)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말을 부적당하다고 보며 또한 이 말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말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정치에 관한 문제에 관한 한12 사람들이 주권이나 지배를 꿈꾸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용어를 등한시하고 사실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고대 감독들에게 하나님이 그 말씀에서 정해 두신 것과 다른 어떤 교회 통치 형식을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사와 부감독 : 재산과 구제 물자의 관리 : 하부 성직자. 5-9)

 

5. 집사의 직분

 

당시의 집사직은 사도 시대와 성격이 같았다.13 그들은 매일 신자들이 바치는 예물과 매년 교회에 들어오는 수입을 받아들여서 적당하게 쓰는 일을 맡았다. 즉 감독이 결정한대로 사역자들과 빈민들의 생활비로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년 그 분배 상황을 감독에게 보고했다. 교회법이 어디서나 감독을 교회의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은 감독이 직접 그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공적 원조를 받을 사람들을 집사에게 지정하며 남는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 또 얼마씩 주라고 지시하는 것이 감독의 책임이었다. 그는 집사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정했다고 하는 교회법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감독에게 교회의 일을 관할하는 권한이 있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의 영혼이(이것은 더욱 귀중한 것이다) 감독에게 위탁되었다면 그가 재산 관리에 관계하는 것은 더욱 적당하다. 그의 권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장로들과 집사들을 통하여 빈민에게 분배되며, 두려움과 주의 깊게 처리되어야 한다"14 그리고 안디옥 회의에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모르게 교회 일을 처리하는 감독들을 억제하도록 결정했다.15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더 이상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그레고리우스의 여러 서한을 보면, 당시의 다른 교회법들은 효력을 잃은 것이 많았지만 집사가 감독의 지도아래에서 빈민들을 돌본다는 규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처음에는 빈민 구제 사업을 돕는 부집사(sub-deacon)가 있어서 집사들 밑에 있은 듯하나 이 구별은 점점 불투명해졌다. 그뿐 아니라 부감독(archdeacon)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제롬은 그의 시대에 이미 부감독이 있었다고 하지만16 그들이 생긴 것은 교회 재산이 많이 늘어나서 보다 정확한 새로운 관리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부감독들은 교회의 수입과 재산과 설비 그리고 매일의 헌물을 전부 책임저 맡아보았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살로나의 부감독에 대해서, 만일 누가 태만하거나 속이기 때문에 교회 물품이 하나라도 없어진다면 그의 죄로 인정될 것이라고 엄명했다.17 그러나 부감독들은 신자들에게 복음을 읽어 주는 일과 기도에 대한 권고를 하는 일도 맡았으며, 성만찬에서 잔을 내어 주는 직분도 가졌었다.18 이런 일들은 그들의 지위를 높이는 의미로 지정된 것이며, 그들이 더욱 양심적으로 직분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직무란 것이 이런 여러 가지 표징으로 알려졌다.

 

 

 

6. 교회 재산의 운용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교회 재산이 어떻게 사용되며 어떻게 분배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 저술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기 소유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 행위를 한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나눠줘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것같이 최대의 두려움과 공경으로 치우침이 없이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크리소스톰과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및 그 외에 그들과 같은 감독들이 엄숙한 항의를 하면서, 자기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직했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공적인 경비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도 인정된 일이다(고전 9 : 14, 갈 6 : 6). 또 고대의 어떤 장로들은 자기의 유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스스로 빈민이 되었다. 따라서 사역자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그리고 빈민들도 무시되지 않도록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검소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역자들이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을 할 정도로 많이 받지 말고 꼭 필요한 정도로만 받도록 규정했다. 부모의 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들이 빈민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모독 행위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용하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 : 29).19

 

 

 

7.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처음에는 무보수로 또 자발적으로 맡았었다. 감독과 집사들은 자유 의사로 충실했으며 그들의 고결한 양심과 순결한 생활이 법을 대신했다.20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탐욕과 악행으로 인해서 악한 선례가 생겼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게 했다. 성직자들과 빈민들과 교회 건물들의 수리를 위해서 그리고 넷째로는 타지방과 본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 몫을 마련했다.

어떤 교회법에서는 이 넷째 부분을 감독에게 맡겼지만 이것은 내가 말한 구분법과 다르지 않다. 감독에게 맡겼다고 하더라도 감독의 개인 수입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혼자서 쓴다든지 마음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감독들에게 요구한 것과 같이(딤전 3 : 2) 손님을 접대하는 데 넉넉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겔라시우스와 그레고리우스도 이렇게 해석한다. 겔라시우스는 감독들이 비용을 요구한 것은 포로와 나그네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더욱 분명히 말한다. 사도 교구의 관습은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모든 수입을 사분 할 것을 명령한다. 즉 한 부분은 감독과 그의 가족에게 손님 접대와 생활 유지를 위해서 돌리고, 한 부분은 성직자들에게 또 한 부분은 빈민에게 그리고 넷째 부분은 교회 수리에 돌린다.21 그러므로 감독은 검소한 보통 정도의 의식에 넉넉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요구할 수가 없었다. 만일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김독이 있으면 즉시 동료들의 책망을 받았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 지위를 빼앗겼다.

 

 

 

8.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처음에는 교회 성물을 장식하는 데 비용을 아주 적게 들였으며, 나중에 교회가 점점 풍부하게 됐을 때에도 이 점에서는 여전히 절제했다. 교회에 기부가 들어오면 빈민을 위해서 그대로 고스란히 보관해 두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방에 기근이 들어 달리 구제 방법이 없었을 때에 키릴루스는 교회의 기물과 예복들을 팔아서 그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 아미다의 감독 아카키우스도 무수한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사 직전에 있을 때 자기 교회의 성직자들을 모아 놓고 이 유명한 연설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잡수시거나 마시지 않으시므로 접시나 잔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기물을 녹여 그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을 사며 몸값을 치르게 했다.22 제롬도 교회들이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공격하면서 당시의 툴루즈의 감독 엑수페리우스를 칭찬했다. 이 감독은 주의 몸을 버들가지 바구니에 담고 주의 피를 유리 그릇에 담으면서도 빈민은 한 사람도 굶기지 않았다고 했다.23 내가 아카키우스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암브로시우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포로들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가 교회의 거룩한 기물을 깨뜨렸다고 해서 아리우스파가 비난했을 때 그는 훌륭한 변명을 했다.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금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분은 교회를 모으실 때에도 금을 취하시지 않았다. 교회가 금을 가진 것은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값을 치르기 위해서, 곤란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무엇인가? 앗수르 사람들이 주의 성전에서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실어 갔는지를(왕하 18 : 15-16) 우리는 모르는가? 모독적인 적국이 가져가기보다는 빈민 구제를 위해서 제사장이 금은을 녹이는 편이 다른 방법이 없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왜 저렇게 많은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버려 두었느냐? 네게는 그들을 살리기에 넉넉한 금이 있었다. 왜 저렇게 많은 포로들이 끌려가는데 한 사람도 도로 사지 않았느냐? 왜 저렇게 많은 포로가 적에게 죽었느냐? 너는 쇠그릇보다 살아 있는 사람 그릇을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대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성전에 장식물이 없을까 염려했습니다'라고 할 것인가? 주께서는 대답하실 것이다. 성례에는 금이 필요 없다. 금으로 사지 않은 것은 금을 기뻐하지 않는다. 성례의 장식은 포로들을 도로 사는 것이다." 요컨대, 암브로시우스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을 우리는 대단히 옳은 말이라고 본다. "그 때의 교회 소유는 모두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뜻으로, "감독이 가진 것은 모두 빈민의 것이었다"24라고 하였다.

 

 

 

9. 직분들의 준비 단계

 

지금까지 열거한 것이 고대 교회의 직무들이었다. 이 외에 교회 저술가들이 언급한 것에는 분명한 직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훈련과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한 묘목판을 남겨 두기 위해서 부모의 허락과 인정을 얻어 소년들을 영적 군대에 모집하여 보호하며 교육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년들을 훈련시켜서 직분을 맡게 될 때에 무식하거나 미숙하지 않도록 했다. 이 예비 훈련을 받는 청년들을 다 성직자(clerics)라고 불렀는데, 더 적당한 이름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 전체를 성직자(clergy) 즉 주의 상속 재산이라고 부른 것을(벧전 5 : 3) 오해한 데서 적어도 그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 자체는 특히 거룩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이 제도에 따라 몸을 성별하며 교회에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감독의 지도 아래에 육성했다. 그것은 또 훌륭한 예비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교회에 봉사하게 하는 길을 확보했다.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거룩한 학문을 배우며 엄격한 훈련을 쌓아 근엄하고 거룩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세상 근심을 떠나 영적인 문제와 연구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병들이 모의 전투를 통해서 진짜 전투를 배우는 것과 같이 그들은 일정한 초보부터 훈련을 받아 정식 성직자의 직분을 맡았다. 처음에는 교회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문지기"라고 불렀다. 그 후에는 "시제"라고 해서 감독의 집안 일을 도우며 항상 감독을 따라 다녔다. 이것은 첫째는 주교의 명예를 위해서였고 다음에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신자들에게 점점 알려지며 신자들의 칭찬을 받는 동시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을 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장로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때에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강단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와 같이 각종 훈련에서 그 부지런함을 증명하도록 단계적으로 승진되어 마침내 부집사가 되었다.25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일들은 신규 모집자들에 대한 훈련이었지 교회의 진정한 사역자로서의 직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역자의 선택 및 임명의 변천사 : 집권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찬성으로 감독을 선택한다. 10-15)

 

10.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 : 평신도들의 찬성

 

우리는 사역자들의 소명에서 생각할 첫째 점과 둘째 점은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며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주의해야 되느냐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서 바울의 명령과 사도들의 전례를 따랐다. 그들이 목사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서로 모여 최대의 경외와 열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26 더우기 바울이 세운 표준에 따라 선택할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을 심사하는 일종의 심사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독에 대해서 바울이 요구한 것보다(딤전 3 : 2-7) 더 많은 것을 요구해서 다소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과오를 범했나. 특히 얼마가 지난 후에는 독신 생활을 요구했다.27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례는 바울이 정한 것과 일치했다.

셋째 점에 관해서도 즉 누가 사역자들을 임명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항상 한가지 절차만을 따르지는 않았다. 고대에는 일반 신도의 찬성이 없이는 아무도 성직자 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에 문의하지 않고 아우렐리우스라는 사람을 독경사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 애써 변명했다. 그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관습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논하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직자들을 임명할 때 여러분에게 문의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재질을 함께 심사 숙고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입니다."28 그러나 이런 사소한 임무에는 큰 위험성이 없었고 또 당사자들은 오랜 견습 생활을 하였으며 큰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의 동의를 묻지 않게 되었다.

그후 감독직을 제외한 다른 교직에 관해서도 일반 신자는 적격자를 선택하고 임명하는 일을 감독과 장로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 한 교구에 새로 장로가 임명될 때는 아마 예외였을 것인데, 그런 경우에는 그곳 주민들이 분명히 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보유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부집사가 되는 데에도 반드시 당시의 엄격한 규율 아래서 장기간의 성직자로서의 경험이 있어야 했다. 이 계급에서 시험에 통과되면 집사가 되었고 집사로서 충실하게 행동하면 장로로 승진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이 보는 데서 다년간 시험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승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점을 처벌하는 교회법이 많았으므로 이 대책을 등한시하지만 않으면 나쁜 장로나 집사의 출현으로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 임명에도 반드시 시민들의 찬성이 필요했다. 이 점은 아나클레투스가 제정했다는 교회법 제 1 편 제 67 부가29 증명한다. 끝으로, 임명식은 매년 일정한 날에 있었다. 이것은 신자들의 찬성이 없이 몰래 기어드는 사람이나 증인이 없이 너무 쉽게 승진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1. 감독 선거에 대한 찬성 : 데오보도레트 시대까지

 

신자들이 자기의 감독을 선택하는 자유는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지 않는 감독을 억지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안디옥 회의에서는 신자들이 반대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을 금지했다.30 이 점에 레오 1세는 열렬하게 찬동하여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또는 그 대다수가 요구한 사람이 선택되게 하라" 또 "모든 사람 위에 앉힐 사람은 모든 사람이 선택하게 하라. 알려지지 않고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임명하려면 강제로 밀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선택하고 신자들이 원한사람을 택하라. 그리고 총대감독의 결정을 얻어 지방 내의 감독들이 그를 성별하라."31 그뿐 아니라, 거룩한 교부들은 신도의 이 자유가 결코 축소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가 넥타리우스를 임명했을 때에 모든 성직자와 신도의 승인이 없이 취임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이 사실은 로마 종교 회의에 보낸 서한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어떤 감독이 후계자를 지명할 때에는 교인들이 확인해야만 그 지명이 효력이 있었다. 이런 예와 그 형식을 우리는 어거스틴이 에라클리우스를 지명한 때에 볼 수 있다.32 데오도레트는 아타나시우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베드로에 관하여 언급할 때 장로들이 그 지명을 인정했고 관리들과 지도적 시민들과 모든 교인들이 만장일치의 환호로 승인했다고 덧붙여 말했다.33

 

 

 

12. 평신도와 성직자의 균형

 

라오디게아 회의가 선거를 조중에게 일임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에는34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많은 사람이 만장 일치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중은 확신이 없으며 상반되는 이해로 서로 갈라진다"는 것이35 보통이다. 그러나 이 위험성에 대해서 훌륭한 대책을 강구했다. 처음에는 성직자들만이 따로 후보를 선거해서 관리들이나 원로원과 지도급 시민들에게 제시했다. 이 사람들은 심사 숙고한 후에 그 선거가 바르다고 보이면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원하는 다른 사람을 다시 선출했다. 다음에 문제를 일반 신자들에게 제출하는데, 신자들은 이미 결정된 일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동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신자들에게서부터 시작할 때에는 그들이 특히 누구를 원하는가를 아는 것으로 그쳤다. 신자들의 소원을 들은 후에 성직자들이 선택했다.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할 수도 없었고 일반 신자들의 어리석은 소원을 성직자들이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었다. 레오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제시한다. "시민들의 소원과 신자들의 증언과 중요 인물들의 결정과 성직자들의 선택을 얻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중요 인물들의 증언과 성직자들의 일치된 의견과 관리들과 신자들의 찬성을 따라야 한다." "다른 방법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한다.36 라오디게아 회의의 결정은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이 부주의한 군중에게 끌리지 말고 필요한 때에는 그들의 지혜와 성의로 군중의 어리석은 소원을 억제하라는 뜻에 불과하다.37

 

 

 

13. 성직자들과 통치자들

 

이 선택 방법은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시행되었고 아마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는 그의 서한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디서나 새로 감독을 임명하는 문제가 생길 때, 그는 성직자들과 관리들과 신자들에게 관례적으로 글을 보냈다. 그 도시의 행정 제도에 따라서는 시장에게도 글을 보냈다. 교회 사정이 어지러워 인근 감독에게 선거를 조사하게 한 때에도 그는 항상 모든 사람의 서명을 받은 엄숙한 결정을 요구했다. 콘스탄티우스라는 사람이 밀라노 감독으로 선출됐을 때에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많은 밀라노 사람들이 제노아로 도망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그들까지 돌아와서 회의를 열고 그 선거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합법적인 선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38 참으로 교황 니콜라스가 로마 교황 선거법을 이런 방식으로 확립한 후 아직 50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방식은, 우선은 추기경들이 선거하고 다음은 나머지 성직자들이 그들과 합류하고 끝으로 일반 신도의 찬성으로 선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방금 인용한 레오의 결정을 인용하면서 이 결정은 후세에 계속 유효해야 된다고 명령했다. 악한 사람들의 악의 때문에 정직한 선거를 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이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일부 신자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명령했다.39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황제의 직접 관할 아래에 있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두 교회에 대해서만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암브로시우스에게 권한을 주어 밀라노의 감독 선거를 감시하도록 파견한 것은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취한 특별한 조치였다.40 그러나 옛날 로마에서는 감독 지명에 대한 황제의 권위가 대단한 영향력이 있어서, 그레고리우스는 비록 자기는 엄숙한 의식으로 이미 신자들의 부름을 받았었지만 황제의 명령으로 교회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41 그러나 당시의 관례는 다음과 같았다. 즉 관리들과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누구를 지명하면 그는 곧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는 그 선거를 시인하고 확인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반대해서 취소시켰다. 그라티아누스가 수집한 교령들도 이 관례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 교령집에는 교회법에 의한 선거를 국왕이 제쳐놓고 자기의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으며 이렇게 폭력으로 추천된 감독을 대감독들이 성별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이다.42 교회의 권리를 빼앗아 전권을 한 사람의 기분에 맡기는 것과 합법적인 선거를 국왕이나 황제가 자기의 권위로 확인하도록 이 영예를 양보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14. 임직 절차

 

이제 우리가 논할 것은 고대 교회에서 사역자 선거가 있은 후에 선거된 사람들을 임직시키는 의식이다. 라틴 교회는 이 의식을 서품 또는 축성이라고 불렀고 희랍 교회는 거수 또는 안수라고 불렀다.43 "거수"는 원래 손을 들어서 하는 선거를 의미한다.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는 대감독이 지방 내의 모든 감독들과 함께 모여 선거된 사람을 임직시킨다는 내용이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길이 멀거나 건강, 기타 사정으로 모일 수 없는 감독들이 있을 때에도 적어도 세 사람은 모여야 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문서로 찬성을 증명해야 했다. 이 규정은 사용하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여러 종교 회의 후에 부활시켰다.44 적어도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은 모두 모여야 했는데, 그 목적은 선출된 사람의 교리와 행실을 자세히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조사를 하지 않고는 임명식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을 보더라도 당시의 감독들은 선거 후에 부르지 않고 보통 일반 선거에 임석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회자가 되어 군중 사이에 소란이 생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일반 신자들에게 자격자를 사제로 선택하거나 무자격자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사도적 전통을 근실히 그리고 굳게 지켜야 한다. 이것은 현재 거의 모든 지방에서 지키고 있다. 즉 임직식을 바르게 거행할 수 있기 위해서 지방 내의 인근 감독들은 전부 지도자의 임직이 있을 신자들 앞에 모여야 하며 신자들 앞에서 감독이 선택되어야 한다.45 그러나 감독들이 모이는 것이 늦고 이 지체되는 것을 악용해서 선거 운동을 하는 자가 있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선거 후에 도착한 때라도 선택된 사람을 합법적으로 심사하여 승인한 후에 성별하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46

 

 

 

15. 대감독에 의한 성별

 

이것은 여러 곳에서 예외 없이 시행되었다. 그 후에 점차로 다른 관습이 생겼다. 선택된 사람들이 중앙 도시에 가서 임명을 받고자 했다. 여기에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심 때문이며 또 옛 질서가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 교구의 권위가 높아진 후에는 다른 더 나쁜 관습이 유행했다. 이탈리아의 감독들은 거의 전부가 로마에서 성별을 받으려고 했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의 서 한들을 보면 알 수 있다.47 고대 권리를 유지한 것은 몇 개 도시에 불과했고 이 도시들은 쉽게 양보하지 않았는데, 밀라노가 그 예였다. 이 권리를 보유한 것은 아마 지방 중앙 도시들 뿐이었을 것이다. 한 지방의 감독들이 모두 그 지방의 중심 도시에 모여서 대감독의 성별식을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식은 안수하는 것이었다.48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집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감독들과 다른 장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엄숙한 회합에서는 일정한 장식을 감독들이 달았을 뿐이다. 그들은 장로와 집사들을 임명할 때에도 안수를 했을 뿐이다. 감독은 각각 자기 교회의 장로회와 함께 장로를 임명했다.49 모두 공동으로 행동했으나 감독이 의식을 주관하며 모든 일을 그의 주장 하에 했기 때문에 임명식도 "그의"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대 저술가들은 장로와 감독의 차이점은 장로에게 임명의 권한이 없는 것뿐이라고 자주 언급한다.50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제도가 고대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평신도의 투표 없이 무자격자를 임명했다. 1-3)

 

1.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로마 교황청과 그 모든 예속된 단체들이 지키고 있는 교회 정치 제도와 그들이 항상 말하는 성직 제도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기술한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를 그들의 교회와 비교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이렇게 비교한다면 우리를 교회의 이름으로 압박하며 말살하려고 광분하는 그들의 교회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사역자가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소명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다음에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고찰하겠다.

우리는 먼저 주교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논술의 처음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영광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이 문제를 조금만 논하더라도 그들의 수치가 크게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나는 현재 쓰고 있는 이 글이 어떤 것인가를 잊지 않고, 단순한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그 한계를 넘지 않겠다.

그러나 수치심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 통상적으로 어떤 종류의 주교들이 선택되는가를 대답해 보기 바란다.

학식에 대하여 심사를 하던 관습은 확실히 너무도 구식이 되었다. 그러나 학식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법정에서 변호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한다. 분명히 지난 100년 동안 거룩한 학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주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이전 시대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때가 더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현대 교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도덕 생활을 평가한다면 고대 교회법이 무자격자라고 판단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술고래가 아니면 음행하는 자였고, 이런 죄가 없는 자는 노름꾼이나 사냥꾼이거나 또는 어딘가 생활에 허랑 방탕한 면이 있었다. 어떤 결점은 그다지 중대한 것이 아닐지라도 고대 교회법은 그런 사람을 감독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어리석은 짓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을 교황의 허락으로 주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파렴치와 어리석음은 극도에 달해서, 자연적인 감정으로 보아도 불쾌한, 이 해괴 망측한 죄악을 보고도 무서워 할 줄을 몰랐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런 부주의와 무관심이 있은 곳에서의 선거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1

 

 

 

2. 주교 선거의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지금은 주교를 선거하는 권리를 평신도로부터 완전히 박탈했다. 투표, 찬성, 서명 승낙, 기타 유사한 일이 모두 없어지고 전권이 참사회 의원들에게 이전되었다. 참사회 의원들은 마음대로 주교직온 수여하고 직접 신도들에게 소개한다. 신도들에겐 그를 검토하라는 것이 아니고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이것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2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3 아주 많은 종교 회의의 교령은 다른 방법을 엄중하게 금지하며, 그렇게 한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다.4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교황 제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나 교회의 권리에 의한 교회법에 입각한 선거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폐해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권리를 빼앗은 사실을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그들은 주교 선거에서, 평신도와 관리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판단력보다도 증오심과 당파심으로 움직이므로 이렇게 부패한 시대에는 문제의 해결을 소수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5 분명히 이것은 개탄해야 할 상황에 있어서의 악에 대한 비상 치료책이었다. 그러나 병 자체보다 치료약이 더욱 치명적인 듯한 이 때에 왜 이 새로운 폐단을 고치지 않는가? 그들은 교회법에는 선거 절차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6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감독을 선거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신성한 법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감독의 참 모습을 그리신 말씀 한 마디가 마땅히 수만 개의 교회법보다 더 비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비열한 정욕으로 부패하여 법이나 공정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법을 정하더라도 그것은 문서로서 묻혀 있을 뿐이다. 술고래나 음행자나 지독하게 상습적인 노름꾼들이 주교로 추천되어도 대개는 침묵하거나 심지어(계획적인 듯이) 승인한다. 나는 과장하지 않는다. 주교직은 간음하는 자들과 뚜쟁이들에게 대한 보수가 된다. 총사냥꾼과 매사냥꾼들이 주교가 되는 때에는 일이 아주 잘 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추행을 조금이라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잘 가르치며, 다투지 않으며 운운하는(딤전 3 : 1-7, 딛 1 : 7-9)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옛날 신자들에게는 훌륭한 법이 있었다. 그러면 왜 선거하는 책임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아 이런 자들에게 옮겼는가? 분명히 평신도들의 소란과 분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그 책임을 평신도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철저한 철면피가 되어 이기적인 야심으로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제멋대로 흔동하는 자들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3. 태만한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 구제책으로서 간섭하게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이다.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감독 선거 문제로 도시에 소동이 일어난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선거권을 시민들에게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아무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결점을 회피하며, 결점이 발생할 때에는 시정하는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일반 신자들이 선거에 더욱더 무관심해지기 시작하여 그 책임을 장로들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장로들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전제를 하게 되고 후에 새로운 법을 발표해서 자기들의 전제를 확립했다.

그뿐 아니라, 임명식은 단지 순전한 흉내뿐이었다. 그들이 한 심사는 내용이 극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어서 장식할 외형조차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방의 집권자들이 로마 교황과의 합의로 얻은 주교 임명권은 교회에 아무런 새로운 손실도 야기시키지 않았다.7 선거권을 참사회 의원들에게서 빼앗았을 뿐이기 때문이며, 참사회 의원들도 정당하게 그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도둑질한 것이었다. 참으로 추악한 예가 있었다. 경건한 군주라면 이런 부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궁정에서 주교를 파견해서 교회를 장악하게 했다. 일반 신자들이 원하지 않은, 적어도 자유로운 발언으로 승인하지 않은 주교를 강압적으로 떠맡긴다는 것은 교회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내에 무질서한 관례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군주들에게 자기들의 주교를 내세울 구실을 주게 되었다. 군주들은 자기들보다 권리가 더 많지 않은 자들이 자기들처럼 권리를 악용하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자기들이 그 권리를 차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직록 수여에 관련된 폐해. 4-7)

 

4. 사제와 부제를 임명하는 데 관한 폐해

 

이런 고상한 소명을 근거로 주교들은 자신들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제들을 임명하는 권리가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8 이것은 고대의 제도를 부패시키는 심히 사악한 행위인데, 그것은 그들이 임명하는 자는 신자들을 인도하고 양육할 장로들이 아닌 제사를 드리는 사제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제를 임명할 때 그 부제들에게 진정한 직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 즉 성작과 성반에 관한 의식만을 시킨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칼케돈 회의(451)에서는 목회 의무가 없는 임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즉 임명된 사람에게는 그 직책을 수행할 곳을 지정하라고 했다.9 이 결정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귀중하다. 첫째, 교회는 불필요한 경비를 부담하지 않으며 빈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둘째, 임명된 사람들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엄숙한 선서로 맡은 그 직책의 의무를 다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은(종교에서는 먹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성직 취임 자격을 먼저 생활 유지에 충분한 수입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수입은 자기들의 교회 재산에서 오든지 또는 사제직에서 오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제나 부제를 임명할 때에, 그들이 일할 곳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생활할 재력이 있기만 하면 성직을 준다. 그러나 칼케돈 회의가 요구한 성직 취임 자격이 생활비의 연수입이라고 하는 이 해석을 누가 용인할 수 있는가? 이런 경솔한 임명을 방지하려고 최근의 교회법에는10 주교가 임지 없지 그냥 임명한 이들 성직자들의 생활을 돕는 것을 금지했다. 이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만 수단이 고안되었다. 즉 어떤 성직에 임명되든지 임명된 자는 그 칭호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 합의에 따라서 생활비 청구 소송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여기서 생겨난 수많은 협잡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자들은 일년에 다섯 푼도10a 받을 수 없는 성직록에 대해서 자격이 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어떤 자들은 비밀 약정으로 성직록을 빌려쓰고, 곧 갚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갚지 않는 때가 있다. 이 밖에도 이런 종류의 기괴망측한 일들이 많이 있다.

 

 

 

5. 임명식은 가짜

 

이런 심한 악폐를 타파하더라도, 일할 곳을 주지 않으면서 사제를 임명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11 그들은 다만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사제를 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도록 임명하고 집사는 구제 물자를 수집하기 위해서 임명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가장함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가식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견실한 것이 없고 가짜뿐인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의식은 유대교에서 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므로 회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 신도의 찬성을 물어보는 진정한 심사와(그들이 유지하는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밖의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옛 의식을 본받노라는 그들의 서투르고 얼빠진 흉내와 그 우스운 몸짓들을 나는 그림자라고 부른다. 주교들은 대리를 시켜서 서품식이 있기 전에 후보자의 학력을 시험한다. 그들은 무엇을 물어보는가? 미사를 올릴 수 있는가, 교과서에 나오는 보통 명사나 동사의 변화를 아는가, 어떤 말의 뜻을 아는가, 이런 질문뿐이다. 그들은 성경의 한 절에 대해서도 그 뜻을 설명할 줄 몰라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초보지식이 없더라도 돈이나 권력의 배경이 있으면 사제가 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 서품식에서 성단 앞으로 인도될 때에도 변함없는 협잡이 계속된다. 그들은 이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누가 세 번 묻는다. 그러면 그들을 본 일도 없는 사람이 형식에 결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연극의 한 몫을 담당하고 나서서, "그들은 자격이 있습니다"라고12 대답한다. 이 거룩한 신부님들은 어디가 나쁜가? 그들은 이런 공공연한 모독 행위를 함으로써 뻔뻔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냉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런 관습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분명하고 무서운 악행을 감히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옛날에 케레스(로마의 농업 여신)의 성스러운 의식들을 폭로한 사람들과 같이,13 그들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한다. 만일 그들이 진정 어떤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6. 성직록의 정체

 

그러면 그들은 성직록을 수여하는 문제에서는 얼마나 올바른 행동을 하는가? 성직록 수여는 이전에 임명식과 결합된 것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다양하게 행한다. 주교들만 사제직을 수여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수여자"라고14 불리는 곳에서도 그들이 항상 전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성직록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고 주교들은 수여한다는 명예만 가지고 있다. 또 학교에 의한 지명, 단순한 또는 교환 조건이 붙은 양도, 추천, 우선권, 기타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도 비난할 수가 없다. 나는 현재 교황 제도 아래에서는 고대인들이 정의한 의미의 성직 매매가15 없이 수여되는 성직록은 백에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모두 돈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간접적인 배경이 없이 성직록을 받은 예가 스물에 하 나라도 있으면 내게 증명해 보라, 어떤 자들은 친척이나 인척 때문에, 어떤 자들은 부모의 세력으로 승진한다. 또 어떤 자들은 아첨으로 환심을 산다. 요컨대, 사제직을 수여하는 목적은 교회에 유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얻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성직록(benefice)이라고-말의 본래 뜻으로는 "은혜"라고-한다. 그들은 이것을 군주들의 하사금에16 지나지 않는 것, 군주들이 기사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또는 수고에 대한 보수로서 주는 것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이발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 노새 모는 사람, 그 밖의 비천한 사람들에게 이 상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 각지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건보다도 사제직에 관한 소송 사건들이 가장 시끄럽다. 결국 사제직은 마치 개들에게 던져서 사냥하게 하는 사냥감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또는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에 덤벼들 듯이 교회의 재산에 덤벼들었으며 또는 소송을 해서 교회를 얻었고 또한 돈으로 샀다. 어떤 자들은 추악한 아첨으로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자들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때에17 이미 아저씨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사생아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교회도 있다. 이런 자들을 그들은 "목자"라고 부르니 차마 이것을 들을 수 있는가?

 

 

 

7. 해괴한 악폐

 

평신도들이 비록 부패하고 무법한 행동을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무법 하거나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욱 해괴한 일이 있다. 한 사람이-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자기 한 몸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다섯이나 여섯 교회에 동시에 임명된다! 지금 군주들의 궁정에서는 각각 수도원장직이 셋, 주교직이 둘, 대주교직 하나를 가진 소년들을 볼 수 있다.18 한 참사회 의원이 성직록을 다섯이나 여섯, 일곱씩을 차지하고서 수입만 받으면서 그곳 교회들은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런 관습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곳에서 비난한다는 것을 역설하지 않겠다. 나는 이 무질서를 금지한 엄격한 법규가 여러 회의에서 결정됐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지 않겠다. 그들은 이 법규들을 언제나 마음대로 맹렬하게 배척한다. 단지 나는 이 악폐들은 해괴하다는 것, 즉 하나님과 자연과 교회 제도에 반대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한 약탈자가 동시에 여러 교회를 점령하는 것이나, 비록 원하더라도 자기의 양떼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목자로 임명하는 것은 다 해괴한 악폐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극도로 파렴치한) 그들은 모든 비난을 피하려고 이런 가증하고 추악한 것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린다. 또 그들은 외람되게도 이런 악행에 저 가장 거룩한 사도 계승권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계승의 공로로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자랑한다.

 

 

 

(성직을 가진 수도사와 참사회 의원과 기타 인물들의 무성의와 나태. 8-10)

 

8. "사제"가 된 수도사들

 

이제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가를 보자. 이것은 합법적인 목자를 판단하는 둘째 표식이다.

로마교회에서 임명되는 사제들 중의 일부는 수도사들이고 일부는 그들이 "세속 신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 두 무리 가운데서 수도사들은 고대 교회가 모르는 자들이었으며, 교회 안에 자리를 가지는 것은 수도 생활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고대에는 수도원에서 교회로 옮긴 사람은 수도사를 그만두었다. 심히 부패한 시대에 있던 그레고리우스까지도 이런 혼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장이 된 사람들에게 교회의 직분에서 떠나라고 했다. 수도사로 있는 것과 성직자로 있는 것은 서로 배치되므로 아무도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20 교회법에 부적당하다고 선언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무를 수행하느냐고 내가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은 물론 이노센트와 보니파키우스의 실패로 끝난 칙령을 인용할 것이다. 이 교황들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그대로 있으면서 사제의 명예와 권한을 받게 하였다.21 그러나 무지한 바보가 로마 교황청을 차지할 때마다, 한 마디로 모든 고대 전통을 전복해도 좋다는 이 주장은 무슨 논리인가? 이 점은 후에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교회가 비교적 순결했을 때에는 수도사가 사제의 일을 본다는 것을 큰 모순이라고 생각했다는 것만 말하겠다. 제롬은 그가 수도사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 사제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고 자기는 사제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22 그러나 한 걸음 양보해서 묻고자 한다. 그들은 사제직의 어떤 부분을 실천하고 있는가? 몇몇 탁발 수도사들은 전도를 하고, 그 밖의 수도사들은 모두 자기의 방에서 성가를 부르거나 미사곡을 중얼거린다. 마치 사제들이 이런 목적을 위해서 임명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거나 사제직의 성격이 허락을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제의 임무는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성경이 명백하게 확인한다(행 20 : 28). 그러므로 이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완전히 변경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모독이 아닌가? 그들이 임명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사제에게 명령하신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백하게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는 이것이다 . 수도사는 자기의 수도원으로 만족하라. 성례전을 집행하거나 공적 직책에 속한 일을 하려고 주제넘은 짓을 하지 말라.23 사제가 되면서 처음부터 사제의 진정한 직분은 다하지 않을 작정0?하고, 사제라는 이름은 가지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우롱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그들은 대답할 수 있는가?

 

 

 

9. 성직록을 받는 사제들과 고용살이를 하는 사제들

 

이제 세속 신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들의 말대로 성직록을 받는다. 즉 사제로서의 생활비를 받는다.24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미사를 집례하거나 성가를 부름으로써 매일 노동을 하여 이런 일에 대한 삯을 받아서 살아간다.

성직록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주교나 목사같이 영혼을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하는 기품있는 사람들도 있다. 성당 사제 참사회 의원, 교구 사제, 고위 성직자,25 지도 신부 등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미 일을 뒤집어 놓은 그들은 크고 작은 수도원들을 세속 사제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년들에게도 준다. 그들은 이른바 "특권으로", 즉 일상 관습으로 이렇게 한다.

보수를 목적으로 고용된 사제들은 지금 하는 일 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지금같이 전세계에 무수하게 퍼져 돈을 벌기 위해서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자기 몸을 파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감히 내놓고 구걸할 수 없어서, 또는 그렇게 해서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굶주린 개같이 돌아다니면서 싫어하는 사람들을 졸라댄다. 개가 짖듯이 성가시게 굴어서 조금이라도 빼앗아 시장기를 면하려고 한다. 사제의 영예와 직책이 이렇게 된 것이 교회에 얼마나 큰 수치인가를 내가 말로 표현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극심한 악폐에 해당하는 논의를 독자는 나에게서 기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간단하게 말한다. 하나님 말씀이 명령하고(고전 4 : 1, 요 10 : 1이하 참조) 고대 교회법이 요구한 대로 사제의 직책은 교회를 양육하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를 섬기는 것이라면 미사를 파는 일만을 일삼거나 그것만으로 삯을 받는 이 모든 사제들은 그 직분을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할 합법적인 직분도 없다. 그들에게는 가르칠 곳이 없으며 다스릴 사람도 없다. 요약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는 제단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귀신들에게 드리고 있다(고전 10 : 20 참조). 이 점은 다른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26

 

 

 

10. 여러 가지 성직들의 겉치레

 

나는 외면적인 악폐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제도에 뿌리를 박은 내면적인 폐악만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맡을 덧붙여 말하겠다.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사회 의원, 부주교, 부속 예배당 사제, 참사회 의장, 기타 하는 일이 없이 성직록을 먹는 자들은 모두 같은 종류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그들은 말씀 선포와 권징의 엄수, 성례 집행을 귀찮은 짐이라고 해서 던져 버렸다. 진정한 장로라고 자랑할 무엇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가? 노래가 있고 찬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장로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관습, 습관, 오랫동안 공인된 일들을 그들이 주장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정의와 대결시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것이 진정한 장로이며, 진정한 장로로 인정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표준을 따르라는 이 어려운 요구에 그들이 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원시 교회의 권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라. 그들의 현상을 고대 교회법에 따라서 판단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하지 못할 것이다. 참사회 의원으로 타락한 자들은 옛날 장로들과 같이 감독과 공동으로 교회를 다스리며 그의 동료로서 목회하는 일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27 그들의 이른바 "참사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진정한 교회 정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부속 예배당 사제와 그 밖의 쓸데없는 성직들도 적지 않다.

그러면 이 모든 자리들을 어떤 계급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고대 교회의 관례는 확실히 그들을 장로의 직위에서 제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로로 자칭한다. 그러나 이 가면은 벗겨야 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이 설명하고 고대 교회가 요구한 장로직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며 거리가 먼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성직들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이 제정하시거나 고대 교회의 관례가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교회에 주신 영적 제도를 설명할 때에는 그들에게 어떤 자리도 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내가 더 알기 쉽고 확실하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부속 예배당 사제와 참사회 의원 그리고 부주교와 참사회 의장과 그 밖의 무위 도식하는 자들은 장로의 가장 중요한 직책에 새끼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이 명예를 도둑질하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도를 침범하는 것을 우리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교와 목사와 부제들의 부패와 탐욕. 11-19)

 

11.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

 

이제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을 언급할 차례이다. 그들이 그 지위를 보존하도록 노력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그들이 직분을 다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거룩하고 훌륭한 것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위임된 교회를 기만하고 교회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 여전히 목자로 행세하려고 하며, 목자의 직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시외에 나가 본 일이 없는 고리 대금업자를 농부나 포도원지기라고 하며 전쟁터와 병영만을 돌아다니고 법정이나 법률 서적은 본 일도 없는 사람을 변호사라고 한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보고 누가 불쾌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욱 우스운 것은 교회의 합법적인 목자로 인정을 받고자 하면서도 목자의 일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 교회를 다스리는 체하는 사람조차 몇 명이 되는가? 일평생 교회의 수입을 받아먹으면서도 한 번도 그 교회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일년에 한 번 자기가 오거나 사환을 보내서 자기 수입에 손해가 없도록 한다. 이런 부패가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렇게 무위 도식을 원하는 자들은 특권으로 의무를 면했다. 지금은 누구든지 자기 교회에서 사는 것이 희귀한 예외이다. 사환이나 소작인에게 농토를 맡기듯이 그들은 그들의 대리자들에게 교회를 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양을 한 마리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양떼의 목자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 생각이다.28

 

 

 

12. 이 폐단의 초기 :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

 

이미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폐단의 씨가 약간 있어서, 교회 지도자들이 점점 가르치는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강경하게 불만을 말한 것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사제들은 가득하지만 추수를 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사제직을 맡으면서 직분을 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를 신부(아버지)라고 보지 않으며 겸손해야 할 곳을 교만한 주인의 자리로 바꾸어 버린다." 또, "그러나 목자들이여, 보수를 받으면서도 일은 하지 않는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보기에만 바쁘면서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한다. 전도하는 일을 버렸다. 주교라는 명예를 가졌으나 그 직책을 다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받을 벌은 더욱 중하다.29 단지 직책에 대한 성의와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그레고리우스가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책망했는데. 평생에 한 번 강단에 서는 주교가 거의 없거나 또는 몇 명밖에 되지 않고 다른 성직자들은 백에 하나도 되지않는 것을 본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지금 그들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신자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은 주교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사태가 더욱더 악화되어, 그는 이 계급 전체를 날카롭게 공격했다.30 그러나 그 시대의 주교 계급은 지금보다 상당히 순수했던 것 같다.

 

 

 

13. 선전과 현실

 

그러나 현재 교황 제도하에 있는 교회 제도의 외형을 잘 고찰한다면, 강도들의 소굴에서도 그렇게까지 법도 없고 체면도 없는 철면피한 난잡한 행동은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참으로 거기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과는 다르고 이질적이며 고대 교회의 규정과 관례에서 타락했고 자연이나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이런 무질서한 제도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이 지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타격이 된다. 그들은, 사도들의 권한이 그들에게까지 계승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교회의 기둥이요 종교 지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요 신자들의 머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나무 조각에 대고 말하듯이 이런 미련한 말을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지껄인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자랑을 할 때마다 나는 그들과 사도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 받을 수 있는 세습적인 작위가 아니라 그들이 한사코 도망하는 전도의 직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들의 지배를 적그리스도의 독재라고 선언할 때에 그들은 의례히 그것은 위대하고 거룩한 분들이 자주 칭찬한 존엄한 성직 제도라고 말한다.31 저 거룩한 교부들은 교회의 성직 제도, 즉 사도들에게서 그들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영적 통치를 칭찬했으나 현대의 혼란 상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가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서, 주교들은 대부분 무례한 바보들이며 믿음에 대한 초보적 상식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유모에게서 방금 떨어진 덩치만 큰 아이들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좀 더 학식이 있는 주교가 있으면 그는 주교직을 호화 찬란한 생활을 할 권리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교황 제도에서 교회 담당 신부들은 구두장이에게 밭을 갈 생각이 없는 것같이, 양떼를 먹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바벨의 혼잡보다 더 심하며 (창 11 : 9),교부들이 규정한 것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14. 사제들의 도덕 수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도덕 생활을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은 어디 있는가(마 5 : 14, 13) 인생의 영원한 지표라고 할 거룩함은 어디 있는가? 오늘날 무절제와 나약과 주색 등, 모든 정욕에 깊이 빠진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 이름난 계급은 없다. 그들처럼 온갖 기만과 사기와 반역과 배반에 능숙한 계급도 없다. 사람을 해하는 일에 그들같이 교묘하고 대담한 계급도 없다. 나는 그들의 거만과 자만과 탐욕과 잔인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 전체가 방종한 데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런 악폐에 진저리가 났으므로, 내가 부당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성이 없다. 그러나 그들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을 하나만 말하겠다. 만일 고대의 교회법에 따라 그들의 행위를 판단한다면, 파문을 면하거나 적어도 면직을 당하지 않을 주교가 거의 한사람도 없고 교구 신부들은 백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만큼 성직자들의 행위를 더욱 엄중하게 책망하라고 하던 옛날 규율은 폐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이 완전히 그러하다. 로마 교황의 기치 아래에서 일하며 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이제 가서 그들의 사제 계급을 서로 자랑하라. 그들에게 있는 이 계급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사도들에게서나 교부들에게서나 고대 교회에서 온 것도 아니다.

 

 

 

15. 부제

 

이제 우리는 부제들과, 교회 재산을 처리하는 그들의 지극히 거룩한 임무를 보기로 하자.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런 목적으로 그들의 부제(집사에 해당하는)를 임명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제에게 제단에서 봉사하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또는 노래하거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을 시킬 뿐이다.32 구제 물자 분배나 구제하는 일과 같은 그들이 옛날에 하던 일은 전연 없다. 나는 지금 제도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일을 보면 그것은 하나의 직분이라기보다는 사제가 되기 위한 단계에 불과하다. 미사에서 부제가 하는 일은 한 면에서는 고대를 흉내내지만 내용은 없다-그들은 성별하기 전에 제물을 받는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관습은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석하기 전에 서로 입을 맞추고 성단에 구제 물자를 드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을 먼저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다음에 구제품으로 표시했다. 빈민들의 심부름꾼인 집사는 들어오는 것을 받았다가 분배했다.33 지금 빈민들은 구제품을 바다에 던진 것같이 얻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 부제직으로 교회를 희롱한다. 사도들이 제정한 것이나 고대 교회의 관습에 비할 것이 전혀 없다. 참으로 그들은 재산 분배를 다른 데로 옮겨서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을 일으켰다. 강도들이 사람의 목을 찌르고 강탈한 물건을 나누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은 교회의 목을 찌르듯이 하나님 말씀의 빛을 꺼버린 다음에 거룩하게 쓰도록 봉헌한 물건은 모두 자기들이 나눌 전리품과 약탈품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을 나누고 각각 힘 자라는 대로 많이 집어 갔다.

 

 

 

16. 교회 수입의 분배

 

내가 여기서 설명한34 고대의 관습들은 혼란이 야기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말소되고 은폐되었다. 이런 약탈품으로 부자가 된 도시 주교와 사제들이 참사회의 이익이 되면 약탈품의 대부분을 압수해서 자기들끼리 나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한계에 대한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분배가 무질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했든지, 적어도 고대교회 수입의 절반이 빈민에게 가던 것이 지금은 한 푼도 가지 않게 만들었다. 교회법은 명백하게 사분지 일을 빈민들에게 배당하고 또 사분지 일을 감독에게 배당해서 손님 대접과 기타 자선 사업에 사용하게 했다. 성직자들이 자기의 배당금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나는 말하지 않는다. 교회와 건물, 기타에 배당된 나머지도 필요한 때에는 빈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그들의 가슴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이 먹고 입는 것이 모두 도둑질한 것, 아니 신성 모독 행위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도 그들은 태연할 수 있느냐고 나는 묻고자 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적어도 그들이 속이려는 상대가 감각과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항상 교회 안에 아름답고 정연한 질서가 있다고 자랑한다. 부제직이 도둑질과 강도질을 하라는 면허인지를 간단하게 대답해 보라.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부제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교회 재산의 관리가 완전히 모독적인 약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17. 교회의 참 광채와 거짓 광채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대단히 훌륭한 기만책을 쓴다. 그들은 교회의 위엄이 이런 장엄한 외관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을 시켜 노골적으로 파렴치한 자랑을 한다. 즉 사제 계급이 군왕들같이 호화롭게 보여야만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에 대해서 고대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이 실현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교회에 이런 일들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 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시 72 : 10-11 주해 참조)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사 52 : 1).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사 60 : 6-7). 내가 만일 그들의 후안무치함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면 나는 바보같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만일 어떤 유대인이 이런 말씀들을 악용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묻는다. 물론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에 대해서 영적 의미로 한 말을 육과 세상에 옮겼다고 비난할 것이다. 이는 예언자들이 땅에 속한 물건을 사용하여 교회 안을 비춰야 할 하나님의 하늘 영광을 비유적으로 그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말에 있는 이 복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제일 빈약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의 권능은 그 때에 가장 풍성했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이런 발언들의 뜻은 무엇인가? 어디 있든지 간에, 진귀하고 고상한 것은 모두 주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들에 대해서 명백히 한 말, 즉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흘을 바치고 왕관을 그의 발아래 던지며 그들의 재물을 교회에 바치리라고 한 말이 데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같이 참으로 또 완전하게 실현된 일이 있는가? 그는 그의 자색 옷을 벗고 통치자의 표지를 내려놓은 후에 일반 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부복해서 엄숙하게 참회했다.35 그뿐 아니라, 그와 같은 경건한 다른 군주들도 교회의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하며 건전한 교사들을 장려하고 보호하려고 노력과 주의를 기울인 때처럼 예언이 완전히 실현된 때가 있었는가? 그러나 그때의 사제들은 불필요한 재산이 많지 못했다는 것이 암브로시우스가 주재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주의 사제들은 빈곤이 영광이다.36 확실히 당시의 주교들은 재산이 있었고, 만일 외면적인 화려가 교회의 진정한 장식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의 진미와 화려한 옷과 많은 하인들과 웅장한 저택을 자랑하는 것은 목회자의 직책에 가장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겸손과 검소의 길을 걸었으며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자들 사이에 제정하신 빈곤한 생활을 따른 것이다.

 

 

 

18. 교회 재산의 부정한 사용과 정직한 사용

 

이 점에 대해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현재 교회 재산을 처리하는 아니 낭비하는 방법이 하나님 말씀이 추천하며 고대 교회가 준수한 진정한 부제직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요약하려 한다. 중용을 지키라는 것은 거룩한 물건들의 논질이 요구하며 사도들과 거룩한 교부들이 교훈과 실천으로 명령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중용의 길을 볼 수 있는가? 고대의 검소는 말하지 않더라도 정직한 중용의 길을 일체 배척하고 있다. 극단적인 것, 부패한 현대 취미에 맞는 것만을 좋아한다. 동시에 살아 있는 성전들은 돌보지 않고 가장 작은 잔이나 병 한 개를 아껴서 수천 명의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버려 둔다. 내 자신의 생각으로 가혹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경건한 독자에게 이 한 가지 일을 고려하기를 청한다. 즉 내가 이미 언급한 툴루즈의 엑수페리우스 주교나 아카키오스나 암브로시우스나 그밖에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지금 다시 살아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것이다.37 물론 빈민들의 심한 곤궁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불필요한 것인 듯이 돈을 다른 데로 빼돌리지 않을 것이다. (빈민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돈을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해독만이 있고 유익은 하나도 없다는 점은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물질들은 그리스도에게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뜻에 따라서 분배해야 한다. 그의 명령에 위반되는 일에 낭비한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계산하려 해도 그것은 허사일 것이다. 그러나 진상을 말한다면, 교회의 경상 수입에서 이런 일에 쓰는 부분은 많지 않다. 아무리 넉넉한 주교구와 대수도원일지라도 그리고 기증 재산이 풍부한 성직록을 아무리 많이 겸할지라도 사제들의 한없는 욕심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빈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미신적인 일에 쓰도록 신자들을 유혹하여 교회를 지으며 조상을 세우며 그릇을 사며 예식복을 준비한다. 이런 식으로 이 밑 없는 구렁이 일상 구제 물자를 삼켜버린다.

 

 

 

19. 성직자의 재산과 권력

 

그들이 농지와 소유 재산에서 받는 수입에 대해서, 내가 이미 말한 것 이외에 또 온 세상이 보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 주교와 수도원장이라고 하는 자들이 수입의 대부분을 얼마나 충실하게 처리하는가를 우리는 안다. 여기서 교회의 질서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검소와 중용과 절제와 겸손의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세상 집권자들에게 옹호하지 않겠다고 고용인의 수효를 늘리고 찬란한 건물과 화려한 의복과 빈번한 연회에 경비를 들였으니 이것이 합당한 일인가?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며 간단한 음식으로 만족하라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딛 1 : 7) 촌락과 큰 저택들을 점령할 뿐 아니라 큰 지방과 온 나라들까지도 빼앗았으니 이 얼마나 그들의 직무에 배치되는 것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면 고대 종교 회의들의 결정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 회의들에서는 감독이 자기 교회에서 멀지 않은 작은 집에서 살며 값싼 음식을 먹고 값싼 가구를 사용하라고 했다.38 주의 사제들은 가난한 것이 영광이라고39 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제롬이 네포티아누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손님으로서 그의 작은 식탁에 자주 앉아야 한다고 한 명령을 그들은 너무 엄격하다고 해서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롬이 곧 첨가한 말에는 부끄러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주교의 영광은 빈민을 돌보는 것이며 모든 사제의 수치는 재산을 모으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했다.40 그들이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자기들의 수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점을 추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 합법적인 부제직이 없어진 지 오래라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며 이로써 그들이 교회의 한 미점이라고 해서 부제직을 자랑하는 것을 더 이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는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1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한 가설들을 반박한다. 1-7)

 

1. 카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교회 제도에 있었던 여러 가지 계급들이 후대에 부패하고 점점 더욱 악용되어, 현재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 이름만이 남아 있고 실제로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찰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 뜻은 경건한 독자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카톨릭교에 어떤 교회가 있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런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함으로써 분파의 죄를 우리에게 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조 전체의 갓돌(capstone)에 대해서, 즉 로마 교황청의 권위권에 대해서는 아직 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세계의 교회가 그들의 독점물이란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이 수위권을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도 아니며 고대 교회가 사실상 인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논한 제도들과 다르다. 그 계급들은 먼 고대에 만들어져서 시대가 흐르는 동안에 완전히 부패하고 마침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유일한 유대는 우리가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되지 않고 여전히 복종하는 것이라 또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한다.2 그들이 우리에게서 교회를 빼앗고 자기들만이 독점하려고 할 때에 특히 의지하는 논점은 하나인데, 즉 자기들에게는 머리가 있고 교회의 단결은 그 머리에 달렸으며 그 머리가 없으면 교회가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로마 교황청을 머리로 여겨,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는 목이 잘린 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직 제도를 논할 때에 언제든지 출발점으로 삼는 원칙도 이것이다. 즉 로마 교황은(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그리스도 대신해서 모든 교회를 주관하며 로마 교구가 모든 다른 교구들 위에 수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교회가 잘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위권의 정체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

 

 

 

2.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밝히겠다. 그들이 말하는 성직 제도, 즉 교회 조직의 진정한 형태를 위해서 어느 한 교구의 위신과 권한이 모든 다른 교구들을 능가하며 전체의 머리가 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런 필요성을 교회에 강요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부당한 법에 굴복시키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대자들은, 그 주장을 증명하려면 먼저 이런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은 율법에 있는 대제사장직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설치하신 최고 재판소를 언급한다.3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쉬우며, 그들이 한 가지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한 민족에게 유익한 일을 온 세계에 확대해야 된다는 이유는 없다. 한 민족의 근본법과 전세계의 근본법은 훨씬 더 다르다. 유대인들은 주위가 온통 우상 숭배 민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러 가지 종교에 마음이 유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처소를 세계의 중심지에4 두셨다. 그들의 단결을 더 잘 유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대제사장 한 사람을 임명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같이 진정한 종교가 전 세계에 퍼진 때에 동서의 지배권을 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어느 누가 간파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한 지방을 한 사람이 다스리므로 세계도 한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도 이런 모방은 불가하다. 대제사장이 그리스도의 한 예표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제사장직이 옮겨졌을 때에 권리도 옮겨졌다(히 7 : 12). 누구에게 옮겨졌는가? 교황은 자기가 교황이 된 때에 그 권리를 이양 받았다고 감히 파렴치한 주장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이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자나 후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이 제사장직은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일도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의해서 또 현재 아버지 앞에서 하시는 중보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노염을 푸시기 때문이다.

 

 

 

3.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예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서 우리를 속박하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짓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시적인 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의 견해를 확인할 만한 것을 신약성경에서 한 사람에게 말했던 것밖에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이다(마 16 : 18). 또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 : 15)고 하신 말씀도 그들은 인용한다.5

그러나 그들의 증명에 충분한 근거가 있으려면, 그들은 우선 양을 먹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지배권이 위임되었다는 것과 매는 것과 푸는 일은 곧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찬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주께서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도 교회를 먹이라고 권고한다(벧전 5 : 2).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무엇을 준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베드로는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나누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익한 언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다른 말씀을 보겠다.

다른 구절에서, 매며 푼다는 것은 죄를 그대로 두거나 또는 용서한다는 뜻이라고(요 20 : 23)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매며 푸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에 반복 설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장 훌륭한 설명을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동시에 이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고후 5 : 18, 10 : 6).

 

 

 

4.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

 

매는 것과 푸는 데 관한 구절을 그들이 얼마나 망측하게 왜곡하는가 하는 것을 앞에서 간단히 지적했지만6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7 지금은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답에서 그들이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하는가를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이리라고 하셨다(마 16 : 19). 만일 "열쇠"라는 말과 매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면 모든 논쟁이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노고와 곤란이 많은 것이므로 교황은 그것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그런 일은 그에게 아무 이익도 주지 않고 도리어 그의 쾌락만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8

복음의 교훈이 우리 앞에 하늘을 열어 주는 것이므로 "열쇠"라는 말은 적절한 은유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이며 풀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으며 어떤 사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더욱 속박을 받는다는 뜻에 불과하다. 교황이 이 일만을 자기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를 시기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계승하면 수고만 많고 이익은 적겠기 때문에 교황은 싫어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된다. 나는 이 약속 자체에는 사도의 직분이 존귀하다는 뜻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사도직과 수고는 분리할 수 없다. 내가 제시한 이 정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파렴치한 짓일 것이며, 만일 이 정의를 인정한다면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그의 동료들에게 주신 것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인격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교리의 권위 자체가 손상될 것이다.

그들의 항의는 참으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나는, 이 바위를 향해서 돌진한들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증명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즉 같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모든 사도에게 주어진 것과 같이, 매고 푸는 권한도 모든 사도가 공통하게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베드로를 온 교회의 통치자로 임명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때에 약속하신 것을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시에 부여하신다. 이를테면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다(마 18 : 18, 요 20 : 23). 한 사도에게 약속하신 것과 똑같은 권리를 모든 사도들에게 허락하셨은즉 어떤 점에서 베드로가 동료들보다 우월한가? 그들은 그가 단독으로 또 공동으로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공동으로만 받았으므로 우월하다고 말한다.9 내가 키프리아누스나 어거스틴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시지 않고 교회의 일치 단결을 명령하시는 뜻으로 하신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인 것을 알리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베드로와 똑 같았고 영예와 권한을 동등하게 나눠 받았다. 그러나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인 것을 보이시려는 뜻이었다."10 어거스틴은 다음처럼 말한다.

"만일 교회의 신비가 베드로에게 없었다면 주께서는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 : 19)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라면 교회에는 열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가 열쇠를 받았을 때에 그것은 온 교회를 상징한 것이다." 또 다른 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질문을 받은 후에 베드로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마 16 : 16)라고 대답했고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말씀을 받았다. 이것은 그만이 매고 푸는 권한을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연합을 몸소 상징했다. 따라서 연합이 모든 사람 안에 있으므로 한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11

 

 

 

5.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마 16 : 18) 어느 다른 사람에게는 하신 일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에 대해서 바울과 베드로 자신이 한말과는 다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 대해서 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한다(엡 2 : 20-21).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돌이 되라고 명령하며, 저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돌 위에 놓여(벧전 2 : 5-6) 각각 우리의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또한 서로 연합하라고 한다(엡 4 : 16, 골 2 : 19참조). 그들은 그가 특히 그 이름을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제일인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영예나 지위를 물론 베드로에게 기꺼이 돌린다. 만일 그들이 원하면 모든 사도들 중의 첫 자리를 주어도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 위에 수위권을 가진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대체 이런 연역법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는 열성과 교리와 용기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출중했고 그러므로 그에게 지배권이 있다는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지위가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간적으로 앞섰었고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기 때문이다(요 1 : 40,42). 그러나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주어라. 그러나 지위의 영예는 권력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사도들이 대개 베드로에게 이 영예를 준 것을 안다. 그는 집회에서 발언하며 토론과 권고와 충고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했다(행 2 : 14이하, 4 : 8이하, 15 : 7이하). 그러나 권력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읽어볼 수 없다.

 

 

 

6. 기초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아직 이 논쟁을 제기하지 않았으나12 우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주장하겠다. 즉 그들이 베드로라는 이름 하나를 기초로 하여 교회 전체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은 심히 무력한 논법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사기를 시작했을 때에 내세운 어리석은 주장은 논박은 커녕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 : 18)라고 하셨으므로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운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 몇몇 교부들도 있었다고 그들은 아직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이런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왜 교부들의 권위를 내세워서 하나님에게 반대하는가? 진실로, 왜 우리는 이 말씀의 뜻에 대해서 논쟁하는가? 그것은 어떤 애매 모호한 점이 없고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말씀이다. 베드로는 자신과 교우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언했다(마 16 : 16).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바울의 말과 같이 기초는 하나뿐이며 그 이외의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3 : 11). 또 나는 여기서 교부들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증언을 인용하려고 하더라도 나는 거부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13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무용한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 쪽의 대표적인 지지자들이14 오래 전에 많이 논술하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7.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도 성경 자체보다 더 훌륭한 해결을 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사도들 사이에서 어떤 직책과 권한을 가졌으며 또 어떻게 행동했고 다른 사도들은 그를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이 기록들을 전부 읽어 보라. 그렇게 하면 베드로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동등했으며 그들의 동료였으나 주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모두 회의에 제출하며 해야 할 일에 대한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에게 의견 발표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결정도 그들에게 맡기고는, 그들이 결정하면 그대로 따르며 복종했다(행 15 : 5-12). 목자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상관의 권위로써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료로 보며 동료들 사이의 관례대로 다정하게 권고했다(벧전 5 : 1이하). 그가 이방인과 가까이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것은 부당한 비난이었지만 답변하고 과실이 없는 것을 밝혔다(행 11 : 3-18). 그는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라고 동료들이 명령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행 8 : 14). 그를 보냄으로써 사도들은 그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했고, 명령에 복종하여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는 그들 위에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료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갈라디아서 하나만을 보면 우리는 곧 모든 의심을 버릴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거의 두 장에 걸쳐 자기는 사도로서 베드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그가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그에 대한 복종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요리상으로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베드로도 그런 일은 전혀 요구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함께 일하기 위한 동료로서의 악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방인 사이에서 그가 받은 은총은 베드로가 유대인 사이에서 받은 은총보다 적지 않았다고 한다(갈 1 : 18, 2 : 8). 끝으로, 베드로의 행동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때에 바울이 시정했고 베드로도 그 책망에 순종했다고 한다(갈 2 : 11-14). 이 모든 기록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동등했거나 적어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사이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분명하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의 동료이지 상전이 아니므로 아무도 사도직에서 그들을 자기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 내의 단독 통치권은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다. 8-10)

 

8.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베드로에 대해서 그가 사도들 중의 제일인자였고 다른 사도들보다 탁월한 위신을 가졌다고 하는 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특수한 예를 일반적인 법칙으로 만들며, 한 번 있었던 아주 다른 일을 영구화할 이유는 없다. 사도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두머리이었다. 그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열두 명 위에 한 명이 서 있었다고 해서 십만 명 위에도 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을 수 있는가? 열두 명이 한 명을 세워 자기들을 통솔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연이 이것을 허락하며, 인간의 자연법도 집회에서는 비록 모든 사람의 권한이 같을지라도 한 사람은 사회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지도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 (로마 시대에) 집정관이 없이는 원로원 회의가 없었고 재판장이나 검사가 없이는 법정이 열리지 않았다. 의장이 없는 위원회나 회장이 없는 협회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베드로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수위권을 주었다고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15

그러나 소수 사이에 있는 일을 직접 세계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다. 아무도 단독으로 전세계를 지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일부뿐 아니라 전체에서도 유일한 최고수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루미들과 벌들은 언제든지 하나의 지도자만 택할 뿐 여럿을 택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서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제출한 예를 인정한다. 그러다 벌들은 한 통치자를 선거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모이는가? 모든 여왕벌은 각각 자기 집 만으로 만족한다. 그와 같이 두루미들도 떼마다 지배자가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개교회마다 자체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 아닌가? 다음에 그들은 정치 관계의 예를 든다. "다수 지배는 좋지 않다"16라고 한 호머의 말을 인용하며, 군주 정치를 칭찬한 세속 문인들의 발언도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대답은 쉽다. 호머의 율리시즈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군주 정치를 칭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말한 뜻은 한 사람이 전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같이 권력은 동료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7

 

 

 

9.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전 세계가 한 군주의 지배 아래에 포섭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전혀 어리석은 카톨릭 교회의 생각을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교회 조직에서도 같은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아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 : 16). 우리는 바울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한 몸에 포함시키면서도 머리라는 영예와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남겨 두는 것을 알지 않는가? 바울이 각 지체에 일정한 분량과 일정한 제한된 기능을 배정하여 완전한 은총과 최고의 지배권이 그리스도에게만 있게 하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권위와 이름으로 지배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정당하다고 항의할 때에, 여기 대해서 그들이 의례히 쓰는 궤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상에 있는 그의 대리자로서 그의 밑에 한 행정 수반이 있지 못할 것은 없다고18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이런 직위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 궤변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공급되는 힘은 전적으로 각 지체에 보급되며 그 힘은 하늘에 계시는 유일한 머리에서부터 흘러온다고 한다(엡 4 : 16). 그들이 더 분명한 설명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이시며 이 영예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확언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대리로 임명하신 사람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이 영예를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명이 있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읽을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충분히 반박할 만한 구절만 많다(엡 1 : 22, 4 : 15, 5 : 23, 골 1 : 18, 2 : 10).

 

 

 

10.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여러 번 교회의 산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러나 하나인 머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의 묘사를 통해서, 한 머리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지만(행 1 : 9)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엡 4 : 10).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계실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봉사의 직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주께서는 각 지체에 베푸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우리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엡 4 : 7). 그러므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운운한다(엡 4 : 11). 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위에 자신의 대행자를 세우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게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특히 그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따라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신 사람들의 봉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왜 그의 기능을 위임하신 사역자의 머리에 의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하나가 되는 문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라고 한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특수한 방법을 배정하면서도 모두에게 공통된 일을 배정한다. 그는 연합을 권장할 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고(엡 4 : 4- 5) 말한 다음에 왜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제사장을 첨가하지 않았는가?19 그런 사람이 임명된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적절했을 것이다. 그 구절을 잘 생각해 보라. 확실히, 바울이 교회의 신성하고 영적인 통치를 그리려고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성직자 계급 제도"라고 불렀다. 그는 목사들 사이의 단독 지배 제도를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바울은 신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방법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역자들의 머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각 받은 은혜의 분량에 따라(엡 4 : 7) 각 지체에게 독특한 기능을 부여한다(엠 4 : 16).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늘의 성직자 계급 제도와 땅의 성직자 계급 제도를 비교해서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할 필요도 없다.20 하늘 제도에 대해서 분수에 넘게 지혜로운 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며, 땅에 있는 제도를 세울 때에는 주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에서 그 개략을 진술해 보이신 형태 이외의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영원한 수위권을 소유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11-13)

 

11.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 내에서의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확정되었으므로 그것은 끊임없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이 주장을 정신이 올바른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베드로의 교구가 로마에 설정되어 로마 시의 감독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온 세계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증명하려는가? 그들은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이 높은 영예를 어떤 권리에 의해서 한 장소에 결부시키는가? 그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살았고 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는 예루살렘에 계셨고 거기서 감독직을 다하셨고 죽음으로써 그의 제사장직을 완성하시지 않았는가? 목자장, 최고의 감독, 교회의 머리이신 그도 한 장소에 대하여 영예를 얻으실 수 없었는데 그보다 훨씬 열등한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베드로는 로마에 정좌했으며 따라서 베드로가 수위권자의 교구를 거기에 설치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치하다는 정도를 넘은 미련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논리를 쓴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최고의 교사요 예언자 중의 으뜸되는 모세가 그의 사명을 다하고 또 죽은 그 광야에(신 34 : 5) 수위권의 자리를 설치해야만 했을 것이다.

 

 

 

12.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유쾌한 논법을 쓰는가를 보기로 하자.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서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감독좌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특권으로써 그 수위권을 가져야 한다고21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처음 감독좌는 어디 있었는가? 그들은 안디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당연히 수위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안디옥은 첫째인 때가 있었다고 그들은 인정하지만 베드로가 그곳을 떠나서 로마로 이주함으로써 그 영예까지도 옮겨 온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교황 마르켈루스가 안디옥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베드로의 감독좌는 처음에 당신들과 함께 있었습니다만 후에 주의 말씀에 따라 이곳으로 감독좌를 옮겼습니다. 이와 같이 첫째인 때도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로마 감독좌에 양보했습니다"22 그러나 묻노니, 저 어진 사람이 주께서 그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계시를 받았는가? 이 문제를 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면, 그들은 이 특권이 인적인 것인지 또는 물적인 것인지 아니면 혼합된 것인지를 대답해야 한다.23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은 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특권은 장소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만일 물적인 것이라면 일단 한 장소에 준 다음에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거나 하더라도 그 장소에서 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얼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장소만을 고려할 수 없고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대답을 택하든 간에 로마는 결코 자기의 수위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곧 또 쉽게 추론하며 증명할 것이다.

 

 

 

13.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

 

그들이 상상하는 대로 수위권이 안디옥으로부터 로마로 이전되었다 고 가정하자. 그러면 왜 안디옥은 둘째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는가?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수위권을 차지한다면 둘째 자리는 그가 처음에 감독좌를 설치했던 곳에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가 안디옥보다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는가? 일개 제자에 불과한 사람의 교회가 베드로의 감독좌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 어떻게 합당한 일인가? 각 교회의 영예가 그 설립자의 위엄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나머지 교회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바울은 세 제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을 말하고 이 사람들은 기둥과 같다고 한다(갈 2 : 9). 만일 베드로에 대한 경의로 로마 교황청에 첫 자리를 배정한다면 요한과 야고보가 살았던 에베소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은 당연히 둘째 자리와 세째 자리를 받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대 총감독좌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맨 끝자리를 차지했었고24 에베소는 맨 끝 구석 자리에도 붙을 수 없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과 다른 사도들이 주관한 교회들과 그 밖의 교회들은 서열에서 전연 무시되었다. 제자에 불과했던 마가의 감독좌는 영예를 받았다. 그들은 저 순서는 상하가 바뀐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 교회의 영예의 정도는 그 설립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원칙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베드로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4-15)

 

14.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그리나 나는 베드로가 로마에 있는 교회를 주관했다는 그들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유세비우스가 베드로는 로마교회를 25년간 다스렸다고 한 것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약 20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고(갈 1 : 18, 2 : 1이하) 그 후에 안디옥에 온 것이 분명하다(갈 2 : 11). 여기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7년, 유세비우스는 25년이라고 계산한다.2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베드로를 죽였다고 그들이 말하는 네로의 통치 끝까지는, 37년밖에 되지 않는다. 주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은 티베리우스의 재위 제 18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대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20년을 감한다면 겨우 17년이 남고 이것을 두 감독구에 나눠야 한다. 만일 그가 안디옥에 오래 머물렀다면 로마에는 잠깐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서를 썼고(롬 15 : 25) 예루살렘에서 잡혀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4년 전에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주관하고 있었다면 그의 이름을 빠뜨렸을 리가 없는데 로마서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며 아는 사람은 모두 말하는데(롬 16 : 3-16) 베드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길고 난해한 증명을 할 필요가 없다. 일 자체와 로마서의 논법 전체가,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그를 무시했을 리가 없다고 높이 외친다.26

 

 

 

15.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

 

그 후에 바울은 한 죄수로서 로마에 호송되어 왔다(행 28 : 16). 누가는 그가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한다(행 28 : 15). 베드로에 대해서 누가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바울은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다. 어떤 편지에서는 교우들의 이름으로 문안을 보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에 거기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만일 베드로가 있었다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곁에는 디모데 같이 주의 일을 충실하게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모두 자기 일만을 생각한다고 불만을 말한다(빌 2 : 20- 21). 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가 처음 변명했을 때에 아무도 곁에 없었고 모두 그를 버렸다고 더욱 심하게 불만을 말한다(딤수 4 : 16). 그러므로 그 때에 베드로는 어디 있었는가? 그가 로마에 있었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가 복음을 버렸다고 바울의 비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수치인가?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부언했기 때문이다(딤후 4 : 16). 그러면 베드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언제 로마의 감독좌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적어도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 교회를 주관했다고 하는 점에서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그 저술가들은 누가 베드로의 후임이었느냐 하는 점에서 의견이 다르다. 혹은 리누스라 하며 혹은 클레멘트라고도 한다.27 또 그들은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이 논쟁했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28 어거스틴도 미신에 대해서 논할 때에,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이긴 날에 금식을 하지 않는 로마의 습관은 경솔한 의견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끝으로,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덮어놓고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아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생각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곳 감독이었다는 것, 특히 오랫동안 감독이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또 이 문제에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사도직은 유대인을 위한 것인 반면에 그의 사도직은 우리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고(갈 2 : 7-8) 바울이 확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언약한 협력 관계가(갈 2 : 9) 우리 사이에서 유효하기 위해서, 아니 성령께서 하신 임명이 우리 사이에서 확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는 베드로의 사도직보다도 바울의 사도직에 더욱 유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그들의 책임을 나누셔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바울은 우리들에게 보내셨다. 자,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그들의 수위권을 찾도록 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근거는 지극히 빈약하다.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은 하나로 통합하는 머리였기 때문이 아니다. 16-17)

 

16.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옹호를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고대 교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고대 교회를 살펴보겠다. 그들은 한 공리처럼 자랑하는 것이 있다. 즉 교회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땅 위에 최고의 머리가 있어서 모든 지체가 그 머리에 복종해야 하며, 따라서 주께서는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다음에는 계승권에 의해서 로마 교황청에 주셨으며 세상 끝까지 거기에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자랑할 때에 이 관습은 맨 처음부터 항상 지킨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증거들을 악의로 왜곡하기 때문에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즉 로마의 교회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이 큰 경의를 표명하며 경건하게 언급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베드로의 전도로 로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생각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유력했기 때문에 이 생각이 로마 교회에 호감과 권위가 돌아가게 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서방에서는 로마 교회를 존경하는 뜻으로 "사도의 교구"라고 불렀다.

둘째,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아마도 그곳 사람들은 교리와 지혜와 수완과 풍부한 경험 등에서 다른 곳 사람들보다 훌륭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참작해서 로마 시의 명예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더 훌륭한 재능들이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

셋째, 동방과 희랍과 아프리카에서까지도 교회들이 의견 차이로 많이 흔들렸을 때 로마는 그들보다 고요했고 문제가 적었다. 그래서 지위를 빼앗긴 경건하고 거룩한 감독들이 로마에 가서 피난처를 얻은 예가 많다. 서방 사람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두뇌가 예민하지 못하고 느린 편이었기 때문에29 새것에 끌리는 점도 적었다. 저 불안한 시대의 다른 교회들보다 로마 교회가 문제가 적었고, 한번 받은 교리를 더욱 굳게 지켰다는 사실은 그 권위를 많이 높였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설명하겠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에서 로마 교회는 적지 않은 존경과 칭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17.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의 논적들이 다른 교회들에 대한 수위권과 최고 권력을 로마에 주고자 한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먼저 그들이 그렇게 역설하는 연합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간단히 보여주고자 한다. 네포티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롬은 연합의 여러 가지 예를 말한 후에 끝으로 교회의 성직 계급 제도를 언급한다. 각 교회에는 그 자체의 감독과 수석 장로와 부감독이 있으며 교회의 질서는 모두 그 치리자들에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30 이렇게 말하는 그는 로마 교회의 장로인데 그는 교회 질서에서 연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는 한 머리가 모든 교회를 연합시키는 유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당면한 논증에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잊어버리고 빠뜨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만 허락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기꺼이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의 진정한 기초는 키프리아누스가 뛰어난 말로 묘사한 것임을 제롬은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직은 하나요, 이 '전체'의 한 부분을 각 감독이 차지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요, 결실이 늘어남에 따라 교회는 많은 수로 널리 퍼져 나간다. 태양의 광선은 많으나 빛은 하나이며, 나무에 가지는 많으나 굳센 줄기 하나가 땅 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으며,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흘러 각각 자체의 풍부한 데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고 갈라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도 주의 빛을 풍부하게 받아 많은 광선을 온 세상에 발한다. 그러나 하나의 빛이 각처에 확산되는 것이다. 몸의 연합은 깨뜨려지지 않고 교회의 가지들은 온 지구 위에 뻗어 나가며 넘치는 시내들을 쏟아 보낸다. 그러나 머리와 근원은 하나이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는 음녀가 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집을 알며 정절과 정숙으로 결혼의 신성함을 지킨다." 이 말들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 전체를 거느리는 보편적 감독이라고 한다. 이 머리 아래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전체의 부분들을 차지한다고 한다.31 완전한 감독직이 그리스도의 수중에만 있고 각 감독은 그 일부분을 가진다면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은 어디 있는가?

이런 말들을 인용한 목적은 카톨릭 교도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원리, 즉 지상의 한 머리 아래에서 성직 계급 제도의 통일이 된다는 생각을 고대 교부들이 전연 몰랐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초기의 로마 교구는 지위가 높지 않았다. 1-4)

 

1. 니케아와 에베소의 회의에서 로마 교구가 가졌던 지위

 

로마 교황청의 지상권이 고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대해서 니케아 회의의 결정보다 더 일찍 확인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결정에서 총감독 중의 첫째 자리가 로마 감독에게 주어졌고 그에게 인근 교구들의 교회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1 이 회의는 이와 같이 그와 다른 총감독들 사이에 한계를 정하고 그들에게 각각 한계를 지정했으나 그를 모든 총감독의 머리로 세우지 않고 지도자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 때의 로마 감독 율리우스를 대신해서 비투스와 빈센티우스가 회의에 참석했었는데, 그들에게는 넷째 자리를 주었다.2 만일 율리우스가 교회의 머리였다면 왜 그의 대리자들을 넷째 자리를 담당케 하였는가라고 묻고자 한다. 성직 계급의 순서를 정확하게 반영했다고 볼 수 있는 이 회의에서 어떻게 아타나시우스가 회의를 주관할 수 있었겠는가?3 에베소 회의에서는 (로마 감독) 코일레스티누스가 자기 교구의 위신을 확보하려고 계략을 쓴 것 같다. 자기의 대표들을 보내면서, 자기가 가더라도 회의를 주재하게 될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를 자기의 대리로 만들었다.4 "이렇게 위임한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이름을 첫 자리에 두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그의 대표들은 낮은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격으로 의견 진출의 기회를 받으며 그들의 순서를 기다려서 서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총감독은 코일레스티누스의 이름을 자기 이름과 연결시켰다.

제 2 차 에베소 회의에서는 레오의 사절들이 출석했음에도, 알렉산드리아 총감독 디오스코루스가 그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회의를 주재했으니5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회의는 성자와 같은 플라비아누스를 정죄하고 유티케스를 용서하며 그의 불경건을 묵인했으므로 정통적인 회의가 아니라고 로마 측은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회의가 개최되고 감독들이 서로 자리를 배정했을 때, 로마 교회의 대표들도 이것이 신성한 합법적인 회의인 듯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첫 자리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내주었다.6 첫 자리가 자기들의 권리라고 믿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로마 감독들은 자기들의 영예를 위해서 최대의 요구를 했고, 그 때문에 위험한 충돌을 일으켜 교회를 괴롭히며 불안하게 만들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는 자기의 사절들에게 첫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너무도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알고 단념했던 것이다.

 

 

 

2. 칼케돈과 제 5 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다음에 있은 칼케돈 회의에서는 황제의 양보로 로마 교회의 대표들이 첫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이것을 최고의 특권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마르키아누스 황제와 풀케리아(Pulcheria) 황후에게 이 자리를 청원했을 때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지 않고 다만 에베소 회의를 주재한 동방 감독들이 모든 일을 소란하게 만들며 권한을 남용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따라서 근엄한 장식이 필요하며 과거의 심히 경박하고 혼란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이 임무에 적합할 수 없으므로 레오는 다른 사람들의 결함과 무능을 이유로 삼아 주재권을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7 정상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 특별한 은전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관습법에 속한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전임 의장들이 일을 잘못했기 때문에 새로 다른 의장이 필요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일은 과거에 없었고 앞으로도 영구화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에 대처하는 것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칼케돈 회의에서 로마 감독이 첫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자리가 로마 교구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근엄하고 유능한 의장이 필요한데 의장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무절제와 무규율로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말을 레오의 한 후계자가 행동으로 인정했다. (오랜 후에) 열 렸던 제 5 차 폰스탄티노플 회의에 대표들을 보냈을 때 그는 첫 자리를 다투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의 총감독 멘나스가 의장이 되는 데에 곧 찬성했다. 어거스틴이 참석했던 카르타고 회의에서도 로마 감독의 권위가 토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주재한 것은 로마 대표가 아니라 그곳의 대감독 아우렐리우스였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에(아퀼레이아 회의) 로마 감독은 출석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대해서 영향력이 많았던 암브로시우스가 회의를 주재했다. 로마 감독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었다. 그러므로 암브로시우스의 명망이 당시에는 밀라노 교회를 로마 교회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8

 

 

 

3. 후대에 로마 감독들이 자칭한 높은 칭호는 초기에 없었다

 

카톨릭 교도들이 놀랍게 자랑하는 "수좌 대주교(primate)"와 기타 교만한 칭호들이 언제 어떻게 잠입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키프리아누스는 자주 코넬리우스를 언급하면서, "형제", "동료 감독", 또는 "동료"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나 코넬리우스는 후임자 스테파누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를 자기와 또 다른 감독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약간 엄격한 말로, 그의 거만과 또한 그의 무지를 비난한다.9 우리는 모든 아프리카 교회가 키프리아누스 이후에 이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안다. 카르타고 회의는 아무도 "사제장" 또는 "첫째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고 다만 "제일 교구의 감독" 이라고 부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더 오랜 고대 기록을 본다면, 당시의 로마 감독은 "형제"라는 보통 이름으로 만족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순수한 진실의 형태가 계속된 동안은 후대 로마 감독이 점점 오만 무례한 태도로 자칭하기 시작한 이름들은 전혀 들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최고 감독"이니 "지상 교회의 유일한 머리"니 하는 칭호들을 들었더라도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때 로마 감독이 이런 이름을 감히 자칭했다면 당시의 용감한 사람들은 그의 미련한 행동을 곧 억제했을 것이다. 제롬은 로마 교회의 장로였으므로 사실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 교회의 위신을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도 로마 교회를 그 당연한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본다. 만일 권위를 원한다면 세계는 일개 도시 보다 크다. 왜 그대들은 한 도시의 관습을 내게 제시하는가? 교회법들을 어기고 교만한 행동을 하는 단지 몇 명의 주장을 변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로마나 굽비오나 콘스탄티노플이나 레기오나 어디 있든지 간에 감독은 다 동일한 가치를 가졌고 다 동일한 사제직을 가졌다. 재물의 힘이나 빈곤의 비천 때문에 감독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10

 

 

 

4. 그레고리우스 1세는 "보편적 감독"이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보편적 감독"이라는 칭호에 대해서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는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콘스탄티노플의 요안네스가 이 싸움의 발단 원인이 되었다. 그는 보편적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이런 짓을 한 일이 없었다. 이 논쟁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자기의 권리가 빼앗긴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그 이름 자체가 세속적이며 모독적이고 적그리스도의 선봉이라고 강경히 반대했다. "만일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넘어지면 교회 전체가 그 지위에서 넘어진다고 한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곳에서는 "우리의 형제요 동료인 감독이 유일한 감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모든 감독들을 경멸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대단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 교만은 적그리스도의 시대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천사들과의 동료 관계를 멸시하고 최고의 특별한 자리에 오르려고 한 자를 그는 분명히 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율로기우스와 안디옥의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전임자들 가운데는 이 속된 말을 쓰려고 한 사람이 없었다. 만일 한 총감독을 '보편적'이라고 부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총감독'이라는 칭호를 빼앗게 된다. 그러나 형제들의 영예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유리한 자리를 요구하려는 욕망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악한 말에 찬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신앙의 단결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과 스스로 높이는 것을 억제해야 된다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이것은 나의 확신에서 나온 말이다. '보편적 감독'을 자칭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높이는 점에서 적그리스도의 선봉, 즉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를 높다 하여 뽐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일한 뜻을 말한다. "나는 처음 배교자가 창안한 미신적이요 교만한 말에 관련된 그의 자만심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와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당신의 영예에 대한 손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감독이 '보편적'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면 그 보편적 감독이 넘어질 때 보편 교회도 넘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 영예는 칼케돈 회의에서 레오에게 제공되었다고 한 말은 아무런 진실성도 없다. 그 회의의 의사록에는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 레오는 이 회의가 폰스탄티노플 교구에 유리한 결의를 한 데 대해서 비난하는 편지를 많이 썼다. 그런 레오가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거부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이 가장 그럴 듯한 증거를 무시했을 리가 없다. 명예를 욕심 낸 그가 자기에 대한 칭찬이 될 일을 알면서도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케돈 회의에서 이 칭호가 로마 감독에게 수여되었다고 생각한 그레고리우스는 속은 것이다. 그가 이 칭호는 거룩한 회의에서 출발했다고 단언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사악하고 속되며 가증하고 교만하며 모독적이며, 아니 마귀가 생각해 내고 적그리스도의 사자가 발표한 것이라고 하는 이 우스운 사태를 나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는 한 감독에게만 무엇을 준다면 모든 감독이 당연히 받을 영예를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의 선임자가 거절한 것이라고 첨부한다. 다른 구절을 인용한다. "아무도 이런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을 원한 일이 없다. 감독 계급에서 자기만이 독특한 영광을 차지한다면 모든 형제들의 영광을 부정하는 것같이 되겠기 때문에 아무도 이 외람된 칭호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11

 

 

 

 

(황제 및 대감독들과의 관계에서 로마의 권위는 제한되었다. 5-10)

 

5. 로마의 재관권의 시초

 

로마 감독이 모든 교회 위에 재관권(jurisdiction)을 가졌노라고 하며 그 권리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문제를 이제 논하겠다. 나는 과거에 이 문제로 인한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을 안다. 로마 감독이 다른 교회들을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은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 으로 로마 교구가 점점 어느 정도의 권력을 얻게 되는가를 여기서 검토하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차지하게 된 얼마 오래지 않은 그 무제한적인 지배력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겠다. 이 문제는 적당한 곳으로 미루겠다.12 여기서는 얼마나 빠른 시기에 또 어떤 방법으로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에 대한 불법적인 권리를 잡으려고 서둘렀는가를 간단히 보는 것이 좋겠다.

콜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아들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의 치세 시에,동방 교회들이 아리우스파 때문에 분열과 소란을 겪었을 때 정통신앙의 지도적 옹호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추방을 당했다. 이 재난을 만난 그는 할 수 없이 로마로 가서 로마 감독의 권위로 원수들의 광태를 억누르며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힘을 주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로마 감독 율리우스의 정중한 대접을 받았고 서방 감독들이 그의 주장을 지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절실했고 로마 교회가 가장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권위를 그에게 기꺼이 허락했다 그러나 이 사태는 그들이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심히 존중했다는 것과 그 친교의 길이 끊기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는 것뿐이고 그 이상의 다른 뜻은 없었다.

그 후에 악한 사람들도 로마 교회의 위엄을 많이 높였다. 그들은 합법적인 판결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로 도망해서 피난처를 얻었다. 자기의 감독에게 정죄를 받은 장로나 자기 지방의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감독은 저마다 곧 로마에 호소했다. 또 로마 감독들은 원근 각지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일종의 특별 권력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런 호소들을 상식에 벗어날 정도로 환영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플라비아누스에게 정죄를 받은 유티케스는 부당한 처사를 당했다고 레오에게 호소했다. 레오가 즉시 이 악한 주장을 지지한 행동은 성급하고 경솔한 것이었다. 그는 마치 플라비아누스가 무죄한 사람을 변호도 듣지 않고 정죄한 것같이 그를 통렬히 공격했으며, 이 야심이 성공해서 유티케스의 불경건을 일시 옹호할 수 있었다.13

아프리카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악한이든지 정규 재판을 받게 되면 곧 로마로 도망해서 자기 나라 사람들에 대한 온갖 중상 모략을 늘어놓았다. 그뿐 아니라 로마 감독은 언제든지 개입할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당돌한 태도 때문에 아프리카 감독들은 해외로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며 그런 사람은 파문하기로 결정했다.14

 

 

 

6. 당시의 로마가 가졌던 권한의 특색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로마 교구가 어떤 권리와 권한을 가졌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교회의 권한은 네 가지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 감독 임명과 회의 소집과 상소 수락 또는 재판권과 징계 명령 또는 견책의 넷이다.15

모든 고대의 회의들은, 감독은 각각 그곳의 대감독이 임명하라고 명령했다. 로마 감독이 자기 감독구역 이외의 감독을 임명하라고 한 회의는 없다. 그러나 이탈리아 감독들은 모두 로마에 가서 취임식을 하는 관습이 생겼다. 다만 대감독들은 자기들이 이런 종속 상태에 끌려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감독이 임명될 때 로마 감독이 장로 한 사람을 파견해서 의식을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참석하게 했다. 라우렌티우스가 죽은 후에 콘스탄티우스가 밀라노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이런 예가 있었던 것을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아주 오랜 규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경의 표시와 예의로 대표들을 서로 파견하여 취임식에 참석시키며 동지 관계를 표명했다. 이렇게 자발적이던 일이 후에 하나의 의무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전에는 로마 감독의 임명권이 니케아 회의의 결정에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의 감독구역에 즉 로마가 있는 지방의 교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취임식에는 종교 회의 서한을 반드시 보냈고, 이 서한에 보면 로마 감독이 어떤 점에서도 다른 감독들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취임식이 있은 직후에 대감독들은 의례히 엄숙한 문서로 그 신앙을 고백하며 거룩한 정통적 회의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신앙을 표명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승인을 교환했다. 만일 로마 감독이 신앙 고백을 다른 대감독들에게서 받기만 하고 자기는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는 상전으로 인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 고백을 듣는 동시에 자기도 고백하며 공통된 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상전이 아니고 동료라는 표징이었다. 이 관례는 그레고리우스가 아나스타시우스와 콘스탄티노플의 키리아쿠스에게 그리고 그외 모든 총감독들에게 동시에 보낸 편지들에 나타나 있다.16

 

 

 

7. 상호 충고

 

다음은 충고 또는 견책의 문제를 보기로 한다. 로마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에게 충고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충고를 받았다. 이레니우스는 빅토르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위험한 논쟁을 일으켜 교회를 소란하게 했다고 해서 그 경솔한 행동을 엄중하게 책망했다. 빅토르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복종했다.17 당시의 감독들은 로마 감독에 대해서, 그가 죄를 지을 때에는 언제든지 충고하며 견책하는 자유를 행사했다. 로마 감독 편에서도 필요한 때에는 다른 감독들에게 그 의무를 회상시키며 그 과실을 책망했다. 키프리아누스가 스테파누스에게 갈리아 지방 감독들에게 경고를 하라고 권고했을 때에 그는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더 큰 권한에 두지 않고 모든 감독들이 공통으로 가진 권위에 두었다. 내가 묻는 것은, 만일 스테파누스가 갈리아를 관리하고 있었다면 키프리아누스는 "그들은 당신의 사람들이니 명령하시오"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달랐다. "우리들을 서로 연결하는 형제적 동지애는 우리가 서로 충고할 것을 요구한다"고18 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매우 온유했던 이 사람이 스테파누스가 너무 거만해졌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아주 엄격한 말로 그를 공격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로마 감독은 자기의 지방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재판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8. 회의 소집권

 

회의 소집에 대해서는, 한 지방의 회의를 일정한 때에 소집하는 것 은 그 지방의 대감독이 할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로마 감독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더우기 세계적인 회의는 황제만이 소집할 수 있었다.19 만일 어느 감독이 회의를 소집하려고 했다면 그의 지방 이외의 감독들이 소집령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곧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공평하게 모든 감독을 소집했다. 참으로 소크라테스의 기록에 의하면, 율리우스는 자기를 안디옥 회의에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동방 감독들에게 항의하며 로마 감독에게 알리지 않고는 아무 일도 결정하지 말라는 교회법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20 그러나 이것이 교회 전체를 구속하는 결정에 대해서 하는 말인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로마시의 오랜 역사와 위대성 그리고 로마 교구의 위엄을 보아서, 로마 감독이 출석하지 않은 회의에서 종교에 관한 보편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마 감독이 출석을 거부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이 일과 교회 전체를 지배하는 일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로마 감독이 지도적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가 지금 주장하는 것, 곧 로마 감독이 모든 감독을 지배했다고 하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

 

 

 

9. 위조 문서를 이용했다

 

넷째 종류, 즉 상소를 받는 권한이다. 상소를 받는 법정에 있는 사람에게 최고 권한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로마 감독에게 상소하는 사람이 많았고 로마 감독 편에서도 사건 심의를 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가 월권 행위를 할 때마다 세상은 그를 비웃었다. 동방과 희랍은 물론이고 갈리아 감독들까지도 로마 감독이 그들 위에 불법적인 권위를 행사하려는 것으로 보일 때에는 강력하게 저항했다.21

아프리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토론이 계속되었다. 어거스틴도 참석한 밀레비스 회의에서 바다 건너로 상소하는 자들을 파문한 후에 로마 감독은 이 결정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대표들을 보내서 니케아 회의가 이것을 하나의 특권으로서 자기에게 준 것같이 보이려고 했다. 대표들은 니케아 회의의 의사록을 가지고 가서, 로마 교회 서고에 보관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감독들은 자기의 주장을 변호하는 로마 감독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저항하는 동시에, 콘스탄티노플과 다른 희랍 도시에는 의심할 여지가 적은 사본들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결과 로마측이 주장한 것이 동방측의 기록에는 없는 것이 발각되었다. 그래서 로마 감독에게 최고 재판권을 주지 않는다는 결정이 확인되었다.22 이 부끄러운 사건에서 로마 감독 자신의 철면피가 드러났다. 그는 사르디카 종교 회의를 니케아 종교 회의로 바꾸려고 사기를 꾸미다가 그 명백한 협잡이 탄로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회의에 보낸 위조 서한을 첨가한 자들의 사악한 심사였다. 그 서한은 어떤 카르타고 감독이 쓴 것으로, 거기서 필자는 자기의 선임자 아우렐리우스가 감히 로마 감독에게 대한 복종을 철회한 교만을 정죄하며 자기와 자기 교회는 복종하겠노라고 하면서 한 탄원자로서 용서를 빌었다.23 로마 감독의 권위를 증명하는 비범한 고대 문서들이란 것은 이런 것들이다. 고대 문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졌지만 거기에 있다는 증거는 유치한 것이어서 장님이라도 그 협잡을 느낄 수 있다. 그 위조 서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악마 같은 담력과 고집으로 교만해져서 그리스도와 성 베드로에게 반역했으니 당연히 저주와 정죄를 받아야 한다." 밀레비스 회의에 참석한 어거스틴과 다른 여러 교부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이 하찮은 글을 반박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할 필요는 무엇인가? 카톨릭 교도들도 겸허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심한 수치심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라티아누스도, 동기가 악의였는지 또는 우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외에 상소하는 자는 파문한다"는 저 결정에 대해서는 "로마 감독에게 상소하지 않고"라는 예외를 첨가했다.24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제정한 법임을 누구든지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한 가지를 그 법에서 제외한다는 이 몰상식한 짐승 같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해외에 호소하지 말라고 한 결정은 바로 로마에 상소하는 것을 금한 것이다. 이 훌륭한 해석가는 로마를 이 통상법에서 제외했다.

 

 

 

10. 콘스탄티누스와 멜키아데스 감독과 아를(Arles) 종교 회의

 

그러나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서 초기의 로마 감독에게 어떤 재판권이 있었는가를 명백하게 할 만한 역사적 사실을 하나 들겠다. 카사에 니그라에의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카에킬리아누스 감독을 고발했고 피고는 변론도 해보지 못하고 정죄를 받았다. 그는 감독들이 자기를 반대해서 공모한 줄을 알고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 사건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넘겨졌다. 황제는 문제가 교회의 재판에서 결정되기를 원하여, 로마 감독 멜키아데스에게 사건 심의를 위촉하고 동시에 이탈리아와 갈리아와 스페인의 감독들을 몇 명 동료로 구성했다. 교회 내의 사건에 대한 상소를 심의하는 것이 로마 감독의 정상적인 재판권에 속한 것이었다면 왜 멜키아데스는 자기의 권위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다른 감독들의 동참을 허락했는가? 왜 자기의 직권으로 재판을 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였는가? 그러나 그 후에 있은 일들을 듣기로 하자.

카에킬리아누스는 로마에서 이기고, 카사에 니그라에의 도나투스는 중상을 했다가 실패했다. 그는 상소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상소에 대한 심의를 아를의 감독에게 위촉했다. 아를의 감독은 로마 감독이 결정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신중하게 검토하려고 재판석에 앉았다. 만일 로마 감독에게 더 이상 상소할 수 없는 최고의 권한이 있었다면 왜 멜키아데스는 자기보다 아를의 감독이25 선택되었다는 이 수치스런 모욕을 용인했는가? 또 이렇게 한 것은 어느 황제였는가? 로마 감독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의 노력뿐만 아니라 제국의 전력을 거의 다했다고 그들이 자랑하는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로마 감독이 가지고 있던 권한은 지금 그들이 선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대단히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 지배권을 주셨다고 선언하며 전 세계의 지지를 얻어 모든 시대에 그 지배권을 행사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26

 

 

 

(5,6세기 교황들의 태도 : 로마 대 콘스탄티노플. 11-16)

 

11. 위조와 횡령

 

나는 로마 교황들이 모든 것을 그들의 교구에 돌리며 거기 대해서 확신있는 권리 주장을 하는 서한과 교서와 교령이 얼마나 많은가를 안다. 그러나 약간의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서들은 내용이 단조롭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보면 곧 어디서 만들어 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어떤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나클레투스가 "게바"는 "머리"라는 뜻이라고 했다는 저 유명한 해석을 참으로 아나클레투스가 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그런 기록을 남겼다. 지금 카톨릭 교도들은 로마 교구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라티아누스가 제멋대로 모아 둔 이런 너절한 이야기들을 악용하면서 우리에게 대항한다. 암흑 시대에 단순한 사람들을 속이던, 그 똑같은 거짓말을 그들은 이 광명한 현대에도 팔고 다닌다.27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을 논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다. 그것들은 완전히 어리석은 모순이기 때문에 분명히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나는 초대 교황들의 진짜 서한들이 현존하는 것을 인정한다. 거기서 그들은 굉장한 칭호를 사용하여 로마 감독직의 위대성을 주장한다. 레오의 어떤 서한도 이런 종류에 속한다. 레오는 학식과 웅변에 대한 지나친 자랑과 권세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교회들이 그의 과대 망상적인 주장을 믿어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자랑에 불쾌감을 느끼며 그의 권세욕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희랍과 근처 지방들을 관할하는 자기의 대리로 데살로니가의 감독을 임명한 일이 있다. 갈리아를 위해서 아를의 감독 또는 다른 감독을 임명했다. 스페인을 관할하는 대리로서 세빌랴의 감독 호르미스다스(Hormisdas)를 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임명을 할때 마다 로마 대감독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특권에 손상이 없게 한다는 조건으로 이런 임명을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레오 자신의 언급에 의하면, 이런 특권 중의 하나는 무슨 일에 대해서 의심이 생길 때에는 우선 로마 대감독에게 문의하라는 것이라고 한다.28 그러므로 이 대리직들을 주는 조건은 감독이 그 정상적 재판권을 행사하며 대감독이 상소를 받고 지방회의가 교회 문제를 처리하는 데 대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 감독이 아무 재판권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만 교회간의 친교의 성격과 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분쟁을 해결할 목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12.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의 교황의 권력

 

그레고리우스 시대에는 이미 고대의 방법이 많이 변했다. 로마 제국은 흔들리고 분할되었으며 갈리아와 스페인은 큰 재난이 반복되었고 일리리쿰은 황폐했으며 이탈리아는 약탈을 당했다. 아프리카는 계속되는 재난으로 거의 파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무질서한 정치 정세에서 적어도 신앙을 지키려고 또는 전멸을 면하려고 각지의 감독들은 모두 로마 감독과의 연락을 더욱 긴밀히 했다. 그 결과로서 로마 교구의 위엄뿐만 아니라 권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나는 이렇게 된 원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으나 적어도 로마 감독의 권력이 이전 시대들보다 한층 더 신장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무제한으로 지배한다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로마 교구는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악하고 완고한 감독을 동료들의 힘으로는 그 의무의 범위 내에 머무르게 할 수 없을 때 로마 감독은 그의 권위로 그런 자를 굴복시키며 억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권리를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자기도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충실히 지킨다고 진정을 토로한 일이 있다. "나는 야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서도 그가 당연한 권리로서 가진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나는 매사에 형제들을 존중하고자 한다." 그의 저술에서 그의 수위권이 위대하다고 자랑한 말은 "과오를 범하고도 사도적 교구에 복종하지 않을 감독을 나는 모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첨가한다. "과오가 없을 때에는 겸손의 질서에 따라 모두 동등하다." 그는 죄를 지은 감독들을 시정하는 권리를 맡는다. 그러나 모든 감독이 그 의무를 다할 때에는 자기도 다른 감독들과 동등하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가 자기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원하는 사람은 찬성하고, 싫은 사람은 항의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비잔틴의 수좌 대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사람은 지방 종교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후에 그 결정을 완전히 부정했다. 동료들이 그의 고집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심사하도록 지시했다.29 여기서 보면 그레고리우스는 정상적인 재판권에 위반하는 일은 전혀 시도하지 않고, 다른 감독들을 돕기 위해서 하는 일도 다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했음을 알 수 있다.

 

 

 

13. 그레고리우스 재임 중에 교황직에 가한 제한

 

그러면 로마 감독 그레고리우스가 가졌던 권한은 비상 대책이 필요한 때에-다른 감독들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완고하고 무절제한 감독들에게 저항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자기는 모든 사람의 시정과 교정을 언제든지 받겠다고 말하는 그는 자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한을 인정하는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서한에서 그는 아퀼레이아 감독에게 로마에 와서 자기와 다른 감독들 사이에 벌어진 교리상의 논쟁에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런 명령도 자기의 권위로 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유일한 재판장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종교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시대에는 아직 겸허한 생각이 있어서, 로마 감독의 권한에는 넘을 수 없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로마 감독 자신은 다른 감독들의 밑에 서지 않는 동시에 위에 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레고리우스는 이런 사태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감독이란 명목 하에 세상에 끌려가며, 평신도였을 때보다 더 많이 세상 걱정으로 고통을 느낀다고 자주 불만을 말했고 그의 높은 자리에서 번잡한 세속 문제로 인해 압박을 당한다고 했다. 또 다른 구절에서, "행정의 무거운 부담에 눌려 나의 마음은 하늘의 일들을 향해서 전혀 비약할 수 없다. 나는 사건들의 많은 파도에 밀려다니며, 저 고요한 여가가 있은 후에는 다시 거친 인생의 폭풍에 시달린다. 나는 바다 밑에 가라앉았고 폭풍이 나를 삼켜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30라고 했다. 이런 말들을 보면 그가 현대에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목자의 일을 못하면서 목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세속 정치에서 물러섰고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황제의 백성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부득이한 필요가 없는 한 다른 교회들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의 직무에만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미궁 속에 든 것같이 느꼈다.

 

 

 

14.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수위권을 다투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31 그 때의 콘스탄티노플 감독은 수위권 문제로 로마 감독과 다투고 있었다.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에는 제국의 위엄을 위해서 그곳 교회도 로마 교회 다음 가는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 로마 교회에 수위권을 부여한 것도 그때에 제국의 수도가 거기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라티아누스에게 교황 루키우스의 교서라는 것이 있어서, 대감독과 수좌 대감독이 주관해야 하는 도시들은 이미 존재했던 행정 기구에 따라서 결정됐다고 했다. 교황 클레멘스의 교서란 것도 옛날 로마 시대 에 이교의 제주들이 있던 도시들에 총대감독들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32 이것은 허황한 글들이지만 사실에서 이어 온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변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당시의 실정대로 지방을 편성하고, 그 지방 내에서 가장 위엄과 세력이 있는 도시에 수좌 대감독이나 대감독을 배치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투리노(Turin)회의에서는 각 지방의 행정 중심지에 우선적으로 감독을 둔다고 결정했다. 행정의 중심이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 일이 있으면 대감독의 권리도 새 중심지로 옮겨간다고 했다.33 로마 감독 이노센트는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후에 로마의 옛 위엄이 쇠퇴한 것을 보고는 자기 교구의 장래를 염려해서, 제국의 중앙 도시들이 변할 때마다 교회의 대 감독구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반대되는 법을 선포했다. 그러나 종교 회의의 권위가 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노센트의 주장을 불신하는 것이 마땅하다.34 여하간 그는 그 자신의 규정을 가지고 제국의 세속적 질서에 따라 대감독들을 배치하는 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제도였다는 것을 밝혔다.

 

 

 

15. 콘스탄티노플이 인정받은 것을 레오는 분개했다

 

이 오랜 규정에 따라, 제 1 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므로 그곳의 감독은 로마 감독 다음가는 특권을 가진다고 결정했다.35 그러나 훨씬 뒤에 칼케돈에서 같은 결정이 통과됐을 때 레오는 맹렬히 반대했다 그는 600여명의 감독들이 결정한 것을 감히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교회들에게 준 영예를 박탈해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주었다고 통렬히 비난했다. 도대체 왜 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세상을 괴롭히게 되었는가? 그는 니케아 회의가 이미 선포한 일은 책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한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듯이, 또는 총대감독구들을 배정한 목적이 교회를 조직하려는 데 있지 않고 다른 데 있는 듯이 생각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조직은 시대의 정세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니케아 회의가 한번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부여한 권위를 다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주어서는 안 된다는 레오의 주장은 쓸데없는 것이었다.36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이 결정은 시대의 정세에 따라 취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에 주로 관련되었던 동방 감독들은 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는가? 디오스코루스 대신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그들이 세운 프로테리우스는 분명히 출석했었고, 위엄이 깎인 다른 총대감독들도 출석했었다.

반대한다면 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지, 지위에 변동이 없는 레오가 할 일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은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찬성을 하는데 로마 감독만이 항의했다. 그 동기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얼마 후에 있을 일을 예측한 것이 분명하다. 옛날 로마의 영광이 쇠퇴하는데 따라,콘스탄티노플이 둘째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와 첫자리를 다투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레오의 반대는 회의의 결정이 찬성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후임자들은 자기들이 패한 것을 알고는 조용히 완강한 태도를 포기했다. 그들은 폰스탄티노플 감독을 둘째 총대감독으로 생각하는 것을 인정했다.

 

 

 

16. 단식자 요한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겸손

 

그러나 조금 지난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주관한 요한이, 자기는 "보편적 총대감독"이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 때에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교구의 정당한 입장을 지키려고 꾸준히 반대했다. 요한의 교만과 광태는 참으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교구의 범위를 제국의 판도와 일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자기가 가지겠다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가 그 칭호를 쓰든 간에 그것은 사악하고 불경건하고 너무 가증한 칭호라고 하며 극도로 싫어했다. 다른 곳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율로기우스가 비슷한 칭호로 자기를 부른데 대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귀서의 서두에 저를 '보편적 감독'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제가 금지한 존칭을 일부러 쓰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치에 닿는 이상의 것을 남에게 주시면 그만큼 귀하는 빼앗기게 됩니다. 형제들의 영예가 깎이는 것을 저는 자신의 영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편 교회의 영예와 형제들의 생명과 힘이 곧 저의 영예입니다. 그러나 귀하가 저를 '보편적 감독'이라고 부르신다면 그것은 저에게 전적으로 주시는 것을 귀하 자신에게는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37

참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입장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마우리티우스 황제의 후원을 받은 요한은 끝까지 목적을 관철하려고 애썼다. 그의 후계자 키리아쿠스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찬탈자들인 포카스와 페핀과의 관계를 통해서 로마의 권한이 확립되었고 그 후에 확대되어 교회에 해를 끼쳤다. 17-18)

 

17. 마침내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었다

 

마침내 마우리티우스 황제가 살해된 후에 그 뒤를 이은 포카스가 왜 로마 측에 더 호의를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분쟁도 없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가 원한 일이 없는 것을 보니파키우스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로마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논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면 황제의 이 혜택도 로마 감독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조금 후에 희랍과 아시아 전체와 로마와의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로마 감독에 대한 갈리아의 존경은 자기 뜻에 맞는 경우에만 복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페핀이 나라를 점령한 뒤 처음으로 갈리아는 굴복을 하게 되었다. 이는 로마 감독 자카리아스가 페핀의 배신과 강도 행위를 도와서 합법적인 왕을 추방하고 나라를 약탈물처럼 빼앗게 하고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갈리아 교회들에 대한 로마 교구의 재판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약탈물을 나누듯이, 이 훌륭한 신사들은 진정한 왕에게서 빼앗은 지상의 지배권은 페핀이 차지하고 자카리아스는 모든 감독들의 머리가 되어 영적 권력을 잡기로 한 것이다.

(새로 시작한 일의 통례대로) 이 권력도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후에는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그 사람도 로마 교황의 노력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의 덕을 입은 사람이었다.

각처의 교회들이 전부터 쇠퇴했었다고는 생각되지만, 그 때에 갈리아와 독일의 교회들의 옛날 형태가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파리 궁정 공문서 보관소에는 당시의 간단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 그 중에서 교회에 관한 것은 페핀과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과 맺은 협정에 언급되어 있다.38 이 점을 보아서, 그 이전에 있은 양해 조건이 이 때에 변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8.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시대까지의 교회의 쇠퇴

 

그때부터 사태는 날로 악화되어 로마 교황청의 전제정치는 점점 강화되고 증대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의 일부는 감독들의 무지에 있었고 일부는 그들의 태만에 있었다. 한 감독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법과 권리를 무시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려고 더욱 더 날뛸 때에, 다른 감독들은 그의 야심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비록 용기는 있었지만 진정한 학식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큰 일을 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베르나르두스 시대에 로마가 모든 거룩한 일을 어떻게 또 얼마나 광범위하게 더럽혔으며 교회 질서 전체가 얼마나 붕괴되었던가를 알 수 있다. 베르나르두스는 야심가, 욕심꾸러기, 성직 매매자, 신성 모독자, 축첩자, 근친 상간한 자, 그 밖의 모든 극악 무도한 자들이 전세계로부터 로마에 모여들어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교회 내의 영예를 얻거나 지키려고 애쓰고 있으며, 사기와 기만과 폭력이 휩쓸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는 당시의 재판 절차가 교회나 일반 법정에 합당치 못한 가증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교회에는 야심가들이 가득하며, 도적들이 길가는 사람들에게서 약탈한 물건을 소굴에 돌아가서 나눌 때와 같이 아무도 범죄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입법자의 입에 주의하는 사람은 적고 모두 그의 손만을 쳐다본다. 그럴 듯 한 일이다. 그 손들이 교황의 모든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향해서 잘했다,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얻은 약탈물로 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자들의 거리에 빈민들의 생명이 흩어져 있다. 진흙 창에서 은이 번쩍거린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든다.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힘센 사람이 집어간다. 또는 빨리 달리는 자가 가진다. 그러나 이런 도덕성, 아니 이런 죽음은 당신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일들 속에서 당신은 많은 값진 치장을 첩첩이 두르고 목회의 의무를 수행한다. 감히 말한다면, 그것은 양을 치는 목장이 아니라 마귀들을 먹이는 곳이다. 물론 베드로가 이렇게 실천했고 바울도 이런 놀이를 했다. 당신의 법정은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보다 선물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다. 악인들이 거기서 이익을 얻지 못한다 하나 선인들은 손해를 본다." 상소가 악용되는 데 대한 그의 말을 읽고 전율을 느끼지 않을 경건한 사람은 없다. 끝으로 로마 교황청이 재산권을 횡령하는 그 한없는 탐욕에 대해서 베르나르두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나는 교회들이 수군거리는 공통적인 불만을 말한다. 교회들은 갈기갈기 찢기고 수족이 잘렸다고 외친다. 잔인한 타격들을 한탄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교회가 전혀 없거나 또는 거의 없다. 무슨 타격이냐고 묻는가? 감독들은 수도원장을, 대감독들은 감독들을 끌어내는 등의 일과 그 밖의 그와 비슷한 일들이다. 이런 일을 용서할 수 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행동으로 당신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의는 증명하지 못한다. 당신들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땅히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을 임명한 목적은 각 사람의 영예와 지위를 보존하라는 것이지 결코 그 영예와 지위를 탐내라는 것이 아니다."39

나는 많은 예들 중에서 이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했는데, 이는 교회가 얼마나 심하게 쇠퇴되었는가를 독자들이 아는 동시에 이 큰 재난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슬픔과 고민에 빠졌던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후대 교황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와 베르나르두스의 원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19-22)

 

19. 현대의 교황 제도와 그 권력 주장

 

지금 우리는 중간 시기(레오와 그레고리우스의 시대)에 로마 교황이 가졌던 우월한 지위와 광범위한 재판이 교회의 것이었다고 인정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교황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지상의 영토나 세속적 통치권은 말하지 않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40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는 영적 지배와 현대의 실정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은 교황을 간단하게 정의해서, 지상에 있는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전세계의 보편적 감독이라고 한다.41 그러나 교황들은 자기의 권위에 대해서 굉장히 거만하게, 명령권은 자기들의 손안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복종해야 하며 자기들의 발언은 베드로의 거룩한 음성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하고 지방 종교 회의들은 교황이 함께 참석하지 않으므로 효력이 없으며 자기들은 어떤 교회에 대해서든지 성직자를 임명할 권한이 있고 또한 다른 곳에서 임명된 자들을 로마에 소환할 권한이 있다고 한다. 그라티아누스가 긁어모은 것에는 이런 따위의 말이 무수하지만 독자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나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요점은, 로마 감독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최고의 재판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교리를 판정하고 정의하든, 법을 제정하든, 규율을 세우든, 또는 재판을 하든, 로마 감독만이 최고 결정권을 가졌다고 한다.

또 그들이 "보류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취하는 특권들을 설명한다면 장황하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무한한 권력을 악용할 때 그 정욕을 조절하거나 억제할 만한 재판권을 지상에 전혀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수위권을 가졌으므로, 아무에게도 이곳의 교구가 판정한 것을 재심을 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같은 식으로, 로마 교황은 심판자로서 황제나 왕이나 교직 계급 전체나 신자들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한 사람이 자기를 모든 사람 위에 심판자로 올려 앉히고서 자기는 아무 사람의 심판에도 복종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런 태도는 더할 나위 없는 오만 불손한 교만이다. 그러나 교황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파괴하며 황폐하게 만든다면, 온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다면, 목자로서의 직분을 강도 행위로 바꾼다면 그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심지어 철저하게 악한 교황이라도 책임을 질 의무는 없다고 한다. 교황들이 한 말을 들어 보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사람이 결정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 교구의 감독은 하나님 자신이 판단하시기로 보류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예속자들의 행위는 우리가 판단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42

 

 

 

20. 무모한 권력 주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위조 문서들

 

이런 종류의 교황의 포고들에 무게를 가중하기 위하여 그들은 고대 교황들의 이름을 바꿔 넣고는 맨 처음부터 일이 그렇게 확정된 것같이 보이려고 한다. 우리는 고대의 회의들이 로마 감독에게 허락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그 이상의 무엇을 교황에게 돌리는 것은 최근에 조작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을 모르는 극도에 달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답서를 날조했다. 아무리 먼 지방에서도 로마 감독에게 미리 문의하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고대의 규정에 있는 금지 사항이라고 아나스타시우스가 확언한 것으로 되어 있다.43 이것이 전혀 사실 무근한 주장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영예와 위신을 위해서 서로 경쟁적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로마 감독을 높이는 말을 했으리라고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들이 정신이 나가고 눈이 멀 정도가 되어, 건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이자들의 악행이 뚜렷이 보이게 한 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9세가 만든 요령집과 클레멘스 교령집과 마르티누스 부록서에는 야만 민족의 왕들과 같은 방약무인한 광포와 전횡이 도처에 노골적으로 또 요란하게 나타나 있다. 카톨릭 교도들은 이런 교령들을 근거로 교황 제도를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교황 제도하에서 어디서나 신탁 같은 힘을 가진 저 유명한 말들이 생긴 것이다.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교황은 회의들을 초월한다. 교황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감독이며 지상 교회의 최고 수령이다.44

그들의 우매한 교회법 학자들은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들을 학교에서 지껄이며, 카톨릭 신학자들도 그들의 숭배하는 사람에게 아부하려고 그런 말들에 찬성할 뿐 아니라 갈채까지 보내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 지 않겠다.

 

 

 

21. 지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레고리우스는 배척한다

 

그들을 최대한으로 엄격하게 취급해야 함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 심한 교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키프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할 것이다. 그는 회의를 주재했을 때에 감독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감독들의 감독이라고 말하거나 동료들을 강제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는 없다." 또 조금 후에 카르타고에서, "아무도 사제들의 왕 또는 첫째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45 한 결정을 반대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모으며 회의들에서 많은 법규를 모으고 고대인들의 저서에서 많은 의견을 모아서, 로마 감독들을 그 당연한 자리에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너무 추궁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이런 말들은 하지 않겠다. 그렇더라도 로마 교황청의 이 훌륭한 보호자들은 그들도 아는 바와 같이 그레고리우스가 저주한 "보편적 감독" 이라는 칭호를 어떤 파렴치한 태도로 감히 변호할 생각인지를 대답해 보라, 만일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감독을 보편적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적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이 된다.

"머리"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곳에서 말했다. "베드로는 몸의 가장 중요한 지체였다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는 특수한 사람들의 집단에서 각자 머리였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지체는 한 머리 아래에 있다. 율법 이전의 성도들과 율법 아래의 성도들과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는 지체들로 선정되었다. 또 아무도 자기를 '보편적'이라고 불러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로마 감독이 자기에게 명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실은 그레고리우스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율로기우스가 자기는 "당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을 때에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명령'이란 말을 저에게 들리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누구이며 당신이 누구신지를 저는 압니다. 등급에서 당신들은 저의 형제시요 덕성에서는 저의 부모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명령한 것이 아니고 유익하다고 본 일을 삼가 지적한 것입니다."46

로마 감독은 자기의 재판권을 무제한으로 확대함으로써 다른 감독들뿐 아니라 각 교회에도 무섭고 중대한 손해를 입힌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교회들을 갈기갈기 찢으며, 폐허가 된 다른 교회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권한을 강화하려 한다.

그는 자신을 모든 심판에서 면제시키며, 자기의 변덕을 곧 법으로 여 길 만큼 전제적인 지배를 하기를 원한다. 이런 행동은 확실히 교회 질서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며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경건한 마음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간적인 감각에도 전혀 배치된다.

 

 

 

22. 현재의 교황권의 부패상

 

그러나 나는 개개의 문제점을 일일이 검토하지 않기 위해, 로마 교황의 가장 충실하고 훌륭한 지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교황 제도의 현상을 옹호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호소한다. 그레고리우스나 베르나르두스와 같은 거룩한 분들은 자기 시대의 교회 상태를 개탄했지만 그 때에 비하면 현재의 교황 제도가 백 배나 더 부패한 것이 분명하다. 그레고리우스는 자기가 실질적인 일 때문에 마음이 너무도 산만해진다고 자주 불만을 말했다. 감독이란 구실로 세상에 다시 끌려가며, 평신도로 일했을 때보다 더 큰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고, 번잡한 세속 문제에 눌려 마음이 하늘 일들을 향해서 비약 할 수 없으며, 사건들의 많은 파도에 밀려다니며 거친 인생의 폭풍에 시달려 "나는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47 그는 세속적인 사무를 보면서도 설교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그들을 바로잡아 주며 교회를 다스리고 동료들에게 의견을 말하며 의무를 다하도록 권면했다. 이 모든 일을 하고도 틈을 타서 저술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바다 밑에 빠졌다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했다. 당시의 행정 사무가 "바다"였다면 현재의 교황 제도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때와 지금은 어디가 서로 같은가? 지금은 설교도 없고 권징도 올바르게 지켜지지 않으며 교회들에 대한 열의도 없고 아무런 영적 활동도 없다. 모름지기 있는 것은 세상뿐이다. 그래도 이 미로를48 가장 질서 정연한 것같이 찬양하고 있다.

베르나르두스가 당시의 죄악들을 보았을 때에 그는 어떤 불만을 토로했으며 얼마나 통탄했는가?49 그가 만일 현재의 말세를, 타락 시대보다도 더 나쁜 우리의 시대를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모든 성도들이 이구 동성으로 비난한 것을 신성한 것이라고 고집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성자들이 전연 알지 못한 교황 제도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증거를 악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심한 패악인가? 나는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모든 일이 극도로 부패해서 현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레오와 그레고리우스의) 중간 시기에서 구실을 찾는 자들은 철저하게 파렴치하다. 그들은 형제들의 일인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서 고대 로마공화국의 상태를 찬양하는 자들과 같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자유에 대한 찬양을 빌려다가 그들의 전제 정치를 장식하려고 한다.50

 

 

 

(후기 교황권을 규탄한다. 23-30)

 

23. 로마에는 교회나 감독직이 있는가

 

끝으로, 우리가 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로마에 이런 혜택들이 있을 만한 교회가 없으며 이런 특권 계급을 유지할 만한 감독 또한 없다고 우리가 말하게 되면 새로운 충돌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주장이 거짓말이란 것을 증명했지만 그것이 사적인 말이라고 가정해 보자. 즉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베드로는 전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었으며, 그가 받은 영예를 로마 교황청에 맡겼고, 고대 교회의 권위가 그것을 시인하고 오랜 관습이 확인했으며, 모든 사람이 항상 이구 동성으로 최고의 권한을 로마 감독에게 주었고, 그는 모든 사건과 모든 사람의 재판장이었으며 어떤 사람의 재판도 받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원한다면 더 많이 가정해도 좋다. 나는 한 마디로, 로마에 교회와 감독이 없으면 이런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교회가 아닌 것이 교회들의 어머니가 될 수 없으며 감독이 아닌 자가 감독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로마에 사도적 교구가 있기를 원하는가? 진정하고 합법적인 사도직을 보이라. 그들은 최고의 주교가 있기를 원하는가? 주교를 보이라. 그들은 어디서 교회와 비슷한 것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가? 그들은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며 항상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 참으로 교회는 그 자체의 명백한 표식에 의해서 알아볼 수 있으며, "감독직"은 한 직책의 이름이다. 나는 지금 사람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영원히 빛나야 할 교회 질서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요구하는 봉사가 어디 있는가? 장로들과 감독들의 직책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51 회상하자.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추기경들의 직책을 검사한다면 그들은 장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로마 감독에게 어떤 감독의 자격이 있는지를 나는 알고자 한다. 감독직의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둘째 임무는 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이다. 셋째는 충고하고 권고하며 죄 짓는 자를 바로잡고 신자들을 거룩한 권징 하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들 중의 어떤 임무를 행하고 있는가? 하는 체라도 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감독으로 인정되기를 바라는가를 말하라. 그는 감독직의 어느 일부분에 새끼손가락을 대는 흉내조차 내지 않는다.

 

 

 

24. 배교

 

주교와 왕은 처지가 다르다. 왕은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 영예와 칭호를 유지한다. 그러나 주교를 비판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고려해야 하며, 이 그리스도의 명령은 언제든지 교회 안에서 효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에게 이 난문의 문제 해결을 부탁한다. 나는 그들의 교황은 주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주교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이 둘째 명제에서 이기려면 저 첫번 명제가 허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로마 교황에게는 주교의 특징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그 특징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참으로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그의 교리인가 또는 그의 행실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까? 어디서 그칠 것인가? 현재 전세계는 패악하고 불경한 교리가 팽배하며 각종 미신이 가득하고 무수한 과오로 눈이 어두웠으며 대대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데, 나는 이 모든 악의 원천이 로마 교황청이 아닌 것이 없으며 적어도 거기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복음의 교리가 부흥하려는 데 대해서 로마 교황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전력을 다해서 억압하려고 애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승리한다면 그들의 나라가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레오는 잔인했다. 클레멘스의 손은 피로 물들었다. 파울루스는 흉악했다.52 그러나 이 사람들이 진리와 싸우게 된 동기는 그들의 성격에 있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쫓아내지 않고서는 자기들이 평안할 수 없겠기 때문에 자기들의 강단과 가정과 생명까지도 지키려는 듯 싸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무서운 배교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사도적 교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미친 듯이 복음을 박해해서 적그리스도임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리가 될 수 있겠는가? 베드로가 건설한 것을 불과 칼로 모조리 부수는 사람이 베드로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겠는가?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교회를 끊고 그 사지를 뜯어버리며 그 몸을 갈기갈기 찢는 사람이 교회의 머리일 수 있겠는가? 옛날의 로마는 참으로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자리가 되기 시작한 후로는 더 이상 과거와 달라졌다.

 

 

 

25. 적그리스도의 왕국

 

우리가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53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를 중상 모략하는 자와 욕설을 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한 말을 폭언이라고 본다. 사실 우리는 그를 본받으며 그가 한 말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바울의 말을 우리가 왜곡해서 로마 교황에게 적용한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없도록, 나는 바울의 말은 교황 제도에 해당한다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으리라고 했다(살후 2 : 4). 성령께서는 다른 곳에서 안티오쿠스를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묘사하시며, 그의 나라는 곧 자만과 하나님께 대한 훼방일 것이라고 하신다(단 7 : 25, 계 3 : 10, 13 : 5).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우선 신체보다도 영혼에 대한 압박이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추론한다. 둘째로, 이 전제는 그리스도나 교회의 이름을 말살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악용하며 교회의 이름을 가면으로 뒤집어쓴다고 추론한다. 처음부터 있어 온 이단과 분파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묘사에서 배교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예고하는 것은(살후 2 : 3), 전반적인 배교가 교회를 점령할 때에 비록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각지에 흩어져서 신앙의 진정한 단결을 유지하겠지만 가증한 자의 자리는 높여지리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의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이미 그 불법의 은밀한 활동을 시작했고(살후 2 : 7) 후에는 공공연하게 그 일을 완성하리라고 첨가한다. 이 말을 우리는 한 사람이 이 재앙을 일으키거나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사도는 적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아 자기가 차지하리라고 한다(살후 2 : 4).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를 찾아내려고 할 때에 우리는 이 점을 가장 중요한 표식으로 삼아야 하며 특히 이런 자만이 교회를 공공연하게 흩어 버리기까지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이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 특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을 파렴치하게 자기에게 옮긴 것이 분명한 때에, 우리는 그가 저 불경하고 가증한 왕국의 지도자이며 기수인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26. 교황권은 진정한 교회 질서에서 멀리 떠났다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역사가 길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대항해 보라. 그렇게까지 만사를 철저히 뒤집어놓고도 그들은 주교직이 없는 곳에 주교직의 영예가 있는 듯이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교회를 펠라에 옮기셨다고 유세비우스는 말한다.54 한번 일어났던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수위권의 영예를 한 장소에 붙들어 매 놓고 과거에 수위였던 주교구를 차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현재 그리스도를 가장 미워하는 원수이며 복음의 최고의 적이며 교회를 가장 황폐하게 만들며 모든 성도의 가장 잔인한 도살자인 자를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리요 베드로의 후계자요 교회의 제일 주교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습고 미련한 짓이다. 나는 교황의 기만과 교회의 올바른 질서가 얼마나 다른가를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점만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의혹이 사라질 것이다.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교의 직책을 인장에만 국한시키지 않을 것이며 더우기 모든 사기와 기만의 본거지에55 국한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교황의 영적 지도를 사기와 기만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랑하는 로마 교회는 하나의 궁정으로 변한 지가 오래며 지금 로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궁정뿐이라고 한 말은 옳다. 나는 여기서 사람들의 악행을 말하지 않고 교황 제도 자체가 교회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27. 교황들의 악행과 이단설은 그들의 권력 주장과 전연 반대된다

 

이제 현실의 인간들을 본다면 그리스도의 대리가 어떤 인간들인가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율리우스와 레오와 클레멘스와 파울루스는 신앙의 기둥일 것이며 종교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일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루키아누스의 문하에서 배운 것 이외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56 그러나 나는 왜 3-4명의 교황들을 들먹임으로써 교황들이 모든 추기경들과 함께 오래 전에 고백했고 또 지금도 고백하는 종교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의혹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가? 그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비밀 신학의 제 1조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며, 제 2조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기록과 교훈은 허위요 기만이란 것이다.57 그리고 내세와 최후의 부활에 관한 교리들은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3조이다.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말하는 자는 극히 적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전부터 교황들의 상례적인 종교였다. 이것은 로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사실이지만 카톨릭 신학자들은 여전히 쉬지 않고 사랑한다. 즉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하셨으므로(눅 22 : 32) 그 그리스도의 특권에 의해서 교황은 과오를 범할 수 없도록 마련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파렴치한 희롱으로 그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도 존경하지 않을 만큼 사악이 극에 도달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할뿐이 아닌가?

 

 

 

28. 요한 22세의 배교

 

그러나 내가 말한 교황들은 설교로나 저술로 그들의 신앙을 발표하지 않고 단지 식탁이나 침실이나 방안에서 무심코 드러냈을 뿐이므로 세상에 대해서는 그 신앙이 숨겨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주장하는 특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싶다면 교황 명부에서 요한 22세를 삭제해야 한다. 이 사람은 영혼은 사멸적인 것이어서 육체와 함께 죽어 부활하는 날까지 죽은 대로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그때에 로마 감독직이 그 모든 지주와 함께 붕괴되었다는 것은 파리 학파가 프랑스 왕을 충동해서 교황이 자기 주장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 외에는 이 심한 광증에 반대하는 추기경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로써 쉽게 알 수 있다. 교황이 신속하게 회개하고 이 사실을 상례에 따라 전령관을 통해서 발표하지 않을 경우 프랑스 국민은 교황과의 교통을 끊으라고 왕은 명령했다. 이런 부득이한 강요에 의해 교황은 자기의 과오를 철회했다고 당시에 살아 있던 쟌 제르송(Jean Gerson)이 말했다.58 이런 일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 : 32)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으므로 교황청과 교황들은 신앙 문제에서 과오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반대자들의 발언에 대해서, 나는 그들과 더 길게 논쟁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요한 22세가 이런 추악한 과오로 진정한 신앙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감독직을 계승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베드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후세 사람들에게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교황 무오설 자체도 대답할 필요가 없는 유치한 이야기이다. 굳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모두 그의 후계자들에게 적용할 경우, 그 후계자들은 모두 사탄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6 : 23). 참으로 이 나중 말씀을 우리가 그들에게 돌려 대는 것이 그들이 처음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29. 교황들의 도덕적 방종

 

그러나 나는 이런 바보짓으로 그들을 상대로 경쟁할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그리스도와 성령과 교회를 한 장소에 묶어 두고 거기서 다스리는 자가, 거기는 과거에 베드로의 교구였기 때문에 비록 마귀일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리요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블경건한 짓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극도로 어리석고 몰상식한 짓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로마 교황들에게 오래 전부터 전연 종교가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종교에 대한 최대의 원수였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에 세운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이(살후 2 : 4), 베드로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교황들을 그리스도의 대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교황들의 행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들에게 주교다운 특징이 하나라도 있는가를 그들이 스스로 대답하게 하라. 첫째, 로마 시민들이 지금과 같은 식으로 생활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눈을 감고는 말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으니 이것은 전연 주교답지 못한 태도다. 주교의 직책은 엄격한 규율로 신도의 방종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서 너무나 가혹한 처사일 것 같기에 그 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그들의 가족과 추기경들의 거의 전부와 그들의 성직자 전체와 함께 온갖 사악과 추악과 불결과 또 각종 범죄와 비행으로 더럽혀져서,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 괴물에 가깝게 되었으니 이러한 그들이 주교일 수 없다. 내가 그들의 사악한 정체를 더욱 폭로하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59 그들의 추악한 진창을 건너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듣는 사람들의 깨끗한 귀는 아껴야 한다. 또 나는 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줄로 생각한다. 즉 비록 로마가 과거에 교회들의 머리인 때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현재는 교회의 발에 붙은 새끼발가락으로 볼 가치도 없다. 이 점을 나는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30. 추기경들

 

추기경들(cardinals)에 대해서, 나는 그들이 갑자기 큰 인물로 등장한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이름은 감독들에게만 붙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추기경들"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그들을 로마 교회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모든 교회에도 있는 것으로 말했다. 따라서 기본적인 사제는 감독일 뿐이다.60 더 이른 시대에는 이런 이름이 사용된 기록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옛날에는 감독보다 낮았고 지금은 감독보다 훨씬 높다. 어거스틴이 한 말, 곧 교회 내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직명에 의하면 감독직이 장로직보다 높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어거스틴은 제롬보다 낮다고61 한 말은 유명하다. 이 말은 로마 교회의 장로를 다른 장로들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감독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이 생각은 실천되어,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로마 교구를 대표해서 출석한 감독과 장로가 한 사람 중에서 장로는 끝자리에 앉게 했다.62 그러나 옛날 일들을 너무 추궁하지 않기 위해서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로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의 형편을 보면, 거기서도 장로들은 끝자리에 앉았고 서명도 장로들끼리 따로 했다. 집사들은 서명할 자리가 없었다. 사실 집사들은 회의에 참석해서는 감독 밑에서 가르침과 성례에 관한 심부름을 했을 뿐이다. 지금은 그들의 처지가 변해서 왕과 황제들의 사촌들이 되었다. 확실히 그들은 그들의 머리와 함께 자라서 현재와 같은 위엄의 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내가 이 점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작정한 것은, 현재의 로마 교구가 자신의 특권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변호하던 고대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독자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에는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은 로마에 진정한 합법적인 감독직이 없으므로, 옛날의 외관과 속이 빈 껍질만 남은 채로 있다. 실로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교회와 철저히 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자주 기록한 일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울면서 말하며 신음하면서 선언한다. 사제 계급이 내부적으로 타락했으므로 대외적으로도 오래 유지될 수 없다."63 이런 사제들에 대해서는 말라기가 한 말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말 2 : 8-9). 사악하고 파렴치한 교황주의자는 하늘과 땅에서 사람들과 천사들이 존중하며 거룩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로마 교황권에 굴복시키고 있으니, 카톨릭의 성직 계급 제도의 절정이 얼마나 높은지는 독자들이 심사 숙고하기를 바란다.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 교황 제도하에서 교회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회의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1-9)

 

1. 교리에 관한 교회의 권위 : 그 임무와 한계

 

이제부터 제 3 부 즉 교회의 권한에 대해서 논하겠다. 교회의 권한의 일부는 개개인의 감독들에게 속하고 일부는 지방 회의에 또는 총회의에 속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 권위이며 이것이 교회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권한이다. 그리고 이 권한은 교리에 대한 권한과 재판권1 그리고 입법에 대한 권한으로 나뉜다.2 교리 방면에는 신조를 제정하는 권한과 신조를 설명하는 두 부분의 권한이 있다.

자세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교회의 권한에 대한 주장을 들을 때에 그 권한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하라고 경건한 독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다. 권세를 주신 것은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10 : 8, 13 : 10). 이 권한을 합당하게 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이라고 생각한다(고전 4 : 1).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역자들이 그리스도께서 그 권위를 유지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않아야 한다. 즉 그뿐만이 교회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저의 말을 들으라"고 성경이 말했기 때문이다(마 17 : 5).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마지못해 억지로 행사할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한도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변덕에 끌려 이리저리 탈선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이 권한을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특히 유익한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권한을 허락한다면 곧 독제로 타락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이 전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리 추방되어야 한다.

 

 

 

2. 교리에 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이 권위와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들의 사도나 후계자들에게 주실 때에 개인에게 주시지 않고 그들이 임명되는 그 직분에 주셨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선포하도록 위탁을 받은 그 말씀에 주신 것이다. 그들 모두를 차례로 검토해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에 따라서만 가르치며 대답하는 권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직분을 맡도록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동시에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리고 오직 주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씀만 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을 백성 앞에 내세워 말을 선포하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할 말을 가르치신다. 그들은 주의 말씀 외의 어느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예언자인 모세의 말을 다른 예언자들의 말 이상으로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미리 명령을 받았으며 주께서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할 수 없었다(출 3 : 4이하). 그러므로 백성이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한다.(출 14 : 31).

제사장들의 권위도 멸시를 받지 않도록 가장 엄중한 벌칙을 첨부해서 마련하셨다(신 17 : 9-1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께서는 레위와 언약을 세워 그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게 하셨다고(말 2 : 4,6) 말씀하심으로써 어떤 조건하에서 제사장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하는 점을 밝히신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말 2 : 7). 그러므로 제사장이 자기의 말을 사람들이 듣기를 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보여야 한다. 즉 주에게서 받은 명령을 충실히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규정되었다(신 17 : 10-11).

 

 

 

3. 교리에 관한 예언자들의 권위

 

예언자의 권한에 대해서 그 일반적 특징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한 말씀이 에스겔서에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 : 17).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말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는가? 주에게서 주신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말씀이라고 감히 확신있게 자랑하듯 말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똑같은 생각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렘 23 : 28). 그는 확실히 모든 선지자들이 지켜야 할 법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 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명령하신 것에 그 무엇을 덧붙여 가르치는 것을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모두 "겨"라고 하신다(렘 23 : 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면 어떤 예언자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예언서에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경고",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등의 표현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그것은 당연하다.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한탄했고(사 6 : 5) 예레미야는 자기는 아이가 되어 말할 줄을 모른다고 자백했다(렘 1 : 6).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자기 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더러운 입과 미련한 말 외에 무엇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입술은 거룩했고 순결했다. 예언자들이 자기가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이 경외심의 구속을 받을 때 그들은 비상한 권능과 훌륭한 이름으로 장식되었다. 주께서는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렘 1 : 10), 주께서 주의 말씀을 그 입에 두셨기 때문이라고(렘 1 : 9) 즉시 그 이유를 첨가하셨다.

 

 

 

4. 교리에 관한 사도들의 권위

 

사도들을 보면 참으로 휼륭한 칭호를 많이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다(마 5 : 13-14).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눅 10 : 16) 그들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마 16 : 19, 18 : 18, 요 20 : 23 참조)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그 직분에서 얼마만큼 허락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사도"이므로, 마음대로 지껄일 것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명령만을 충실하게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사명을 정하신 말씀은 분명하다. 즉 그가 명령하신 모든 것을 천하 만민에게 가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마 28 : 19-20). 그러나 그 자신도 이 법칙을 받으셨고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누구든지 이 법칙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즉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신다(요 7 : 16).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유일하고 영원하신 교사였고 아버지께서는 그를 만물의 주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 모범에 의하여 모든 일꾼들이 가르칠 때에 따라야 할 법칙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며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이를테면 주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5.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이 원칙이 처음부터 교회를 지배했고 또 지금도 지배해야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다름에 따라 배우는 방법도 다르다. 현재의 질서는 이전에 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우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마 11 : 27)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옳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 영원한 지혜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비밀을 홀로 계시 받으신 분에게서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마음으로 이해하거나 입으로 발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 거룩한 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울로 삼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알았다(고후 3 : 18 참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지혜와 빛과 진리이신 아들을 통하시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밖의 사람들이 하늘 교훈에 대해서 얻은 것은 모두 이 원천에서 마신 것이다. 예언자들이 발표한 하늘의 말씀도 모두 꼭 같은 원천에서 퍼낸 것이다.

이 지혜는 항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아니다. 옛 족장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는2a 비밀한 계시를 사용하셨고, 동시에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적을 첨가하셔서 그들에게 말하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 족장들은 받은 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주께서 그들이 그와 같이 전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자녀들과 그 자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들을 때에 그것이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우기를 기뻐하셔서, 말씀을 글로 기록하게 하시고3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가르칠 교훈을 거기서 얻도록 하고 가르치는 교리가 모두 그 표준에 일치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이 선포된 후에, 제사장들은 "주의 입에서" 말씀을 얻어 백성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다(말 2 : 7).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율법에 포함시키신 교리에 없는 이질적인 것은 결코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다. 참으로 율법에 가감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셨다(신 4 : 2, 13 : 1).

그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율법에 새로운 말씀을 첨가하셨는데, 그것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니고 율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 불과했으며, 앞일을 폭언한 것을 제하면 새로 첨가한 것은 없었다. 예언을 제하면 그들은 율법을 순수하게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약한 양심들이 만족할 만한 더 분명하고 더 풍부한 교훈을 나타내시고자, 예언들도 기록하여 말씀의 일부로 간주하도록 명령하셨다. 동시에 역시 예언자들이 성령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역사를 말씀에 첨가하셨다. 나는 시편도, 예언서에 포함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예언서에 돌리는 것이 시편에도 있기 때문이다.4

그러므로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과 역사들로 구성된 문서는 그 전체가 고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교사들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에서 오시기까지 이 표준에 일치한 교훈만을 가르쳐야 했다. 그들의 직책은 하나님의 입에서 받은 말씀으로 백성에게 대답하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은 불법이었다(신 5 : 32). 이것은 말라기에 있는 유명한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날까지 율법을 기억하며 존중하라고 명령하신다(말 4 : 4). 이와 같이, 주께서는 그들을 이상한 교리로부터 보호하시며 모세가 그들에게 충실하게 보여준 일에서 추호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다윗이 율법의 우수성을 웅변적으로 선언하고 또 여러 가지 율법을 찬양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시 19 : 7이하). 즉 모든 완전성이 율법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유대 사람들은 다른 것을 갈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7.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는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심사 숙고해야 할 일을 모두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전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이나 이제 의의 태양을 비추셨으므로5 지금 우리에게는 정오의 밝은 빛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빛이 있다. 참으로, 사도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히 1 : 1-2) 했을 때 그는 평범한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 곧 그가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말씀하시는 방법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간혹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또는 예언에 예언을, 계시에 계시를 첨가하면서 말씀하시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가르치는 활동을 그 아들 안에서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궁극적이고 영원한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우리에게 나타나신 때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의 신약 시대를 전체적으로 "마지막 때"6(요일 2 : 18), "이 말세"(딤전 4 : 1, 벧전 1 : 20), "말세"(행 2 : 17, 딤후 3 : 1, 벧후 3 : 3)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 꼭 완전성을 만족하게 생각함으로써 그 이상의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조작한 것을 인정하지도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특별한 특권으로 아들을 우리의 교사로 임명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명령하신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참으로 아버지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마 17 : 5) 간단한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교사로 추천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무게와 힘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사람들의 교리에서 끌어내어 아들에게만 데려가시며, 구원에 대한 모든 교훈을 오직 아들에게서만 구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에게 붙어 떨어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과 같다. 요컨대(그 말씀에 있는 것과 같이) 아들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또 생명의 말씀이 자신을 우리에게 친밀하고 명백하게 계시하셨은 즉, 우리는 무엇을 사람에게서 기대하고 또 바랄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셨으니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감추어 두셨으며(골 2 : 3), 참으로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지혜와(완전 무결한 지혜, 요일 19 : 23), 메시아에(만사를 계시하리라고 기대된, 요 4 : 25) 합당한 말씀을 하셨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뒤에 다른 사람들이 할 말을 전혀 남겨두시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8.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 즉 우선은 율법과 예언서에 다음에는 사도들의 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거나 교회 내에서 자리를 내줘서는 안되며, 교회 안에서 인정된 교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지시와 표준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에게 허락된 것은 옛날 예언서들에 있는 것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도들은 고대에 기록된 성경을 해설하며 또 거기서 가르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때에도 주의 지도를 받아야 했으니, 곧 그리스도의 영이 선도자가 되어 그들이 할 말을 어느 정도 불러 주신 것이다.7 그들이 생각없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을 때에(마 28 : 19-20)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조건으로 그들의 사명을 제한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곧 그리스도니라"(마 23 : 8,10).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에 더 깊은 인상을 주시기 위해서 같은 곳에서 같은 말씀을 두 번 되풀이하신다(마 23 : 9-10). 그리고 그들이 무지해서 주의 입에서 듣고 배운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와 영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며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다(요 16 : 13). 그리스도께서 입으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니(요 14 : 26) 우리는 이 한계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9.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주님에게서 잘 배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이외의 일을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그는 말한다(벧전 4 : 11). 즉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처럼 주저하거나 떨면서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은 종답게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하라는 것이다. 이것은(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든)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을 전적으로 배척하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신자들의 교회에서 가르치며 배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그 지위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규정이나 그들의 조작물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만이 효력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 즉 영적 무기이며, 하나님의 충실한 병사들은 이 무기로 "모든 전략을 파괴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후 10 : 4-5). 이제, 여기에 교회의 목사들이(이름은 무엇이든 간에) 받아야 할 최고의 권한이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일을 담대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세상 권력과 영광과 지혜와 교만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힘을 받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족을 세우고 사탄의 가족을 넘어뜨릴 수 있으며, 양들을 먹이고 이리들을 쫓아낼 수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또 반항하며 완고한 자들을 나무라고 책망하며 굴복시킬 수 있고, 매기도 하고 풀 수도 있다. 끝으로, 필요한 때에는 청천 벽력과 번갯불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8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틀림없이 받아썼고9 따라서 그들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들은 성경에 봉인돼 있는 것을 가르치는 직분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한 사역자들을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복종하도록 하신 그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할뿐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개인과 교회 전체에 허락된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개인에 관해서는, 주께서 바울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사도로 임명하신 것이 확실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후 1 : 24). 바울에게도 지배할 권한이 없다고 그가 말했는데 누가 감히 그런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목자에게는 그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자들이 의심없이 믿으며 지지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방자한 태도를 바울이 인정했다면,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두세 사람이 예언할 때에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하는(고전 14 : 29-30) 규정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아무도 남겨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에 굴복시켰다.

그러나 보편 교회의 문제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바울은 이런 의문을 예상하고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 : 17). 이렇게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한다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거기서만 단식을 얻는다면, 온 세계가 하는 말을 위해서 어떤 자리가 남아 있을까?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믿음은 사탄과 지옥의 모든 간계와 전세계에 대항했을 때 굴복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견고성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보편적 법칙이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새로운 교리를 제창할 능력을 박탈하시는데 이는 거짓말이나 속이는 말을 하실 수 없는 진실하신 하나님만이(롬 3 : 4) 영적 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선생이 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개개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대해서 또 적용된다.

 

 

 

(말씀에 의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과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10-16)

 

10. 카톨릭 교회의 주장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교회의 권한과 과거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스스로 감독과 종교 지도자로 사칭한 저 영적인 폭군들의 권한을 비교한다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후 6 : 15). 나는 그들이 어떻게 또 어떤 부끄러운 방법으로 압제했는가를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단지 그들의 교리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교리를 우선은 문서로 옹호하고 다음에는 칼과 불로 지지한다.

그들은 전체 회의가 교회의 진정한 현상이라고 하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원칙을 용인한 다음에, 그들은 곧 이런 회의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서슴지 않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회의들을 지배하고 구성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전체 회의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결정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본다.10 그래서 그들이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지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에 굳게 확립되며 그들이 시인한 것이 우리에게 아무 의심 없이 시인되고 그들이 정죄한 것은 우리에게도 정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교리를 만들어 내며, 후에 이 표준에 따라 신조를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긍정하든 아니면 부정하든 그들의 모든 교리에 확고하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지적인 신앙이 아니면 적어도 맹신으로 찬동하라고 한다.11 이것은 새로운 신조를 만들어 낼 권한이 교회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1.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 있다

 

우선 그들이 어떤 이론으로 교회가 이 권위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가를 듣기로 하자. 그 다음에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보겠다.

그들은, 교회는 결코 그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버림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을 것이라는(요 16 : 13 참조) 훌륭한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습적으로 말하는 그 약속 중에는 교회 전체를 상대하는 동시에 신자 개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 많다. 그리스도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 20)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요 14 : 26-17)12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약속은 사도를 전부에게 하신 것인 동시에 그 한사람 한사람에게도 하신 것이며 또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아들이신 제자들 뿐 아니라 앞으로 가입될 다른 제자들에게까지도 하신 약속이다. 그러나 그들은 큰 위로가 가득한 이런 약속을 신자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어 근원에서 모든 신자들을 끊어버릴 뿐이 아닌가? 나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각양 각색의 은혜를 받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신자 개인에 비해서 하늘 지혜를 더 완전하고 풍부하게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하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지혜와 총명의 영을(사 11 : 2 참조) 평등하게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성경의 말씀을 왜곡해서 그들의 악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이질적인 의미로 정화시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주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며 그의 영으로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참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 영은 오류와 무지와 허위와 암흑의 영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와 지혜와 진리와 광명의 영이시며, 이 영에게서 그들은 그 받은 것에 대한 진상을 배우게 된다(고전 2 : 12). 곧 그들이 받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엡 1 : 18) 배우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육신으로 살 동안에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으며 그것을 약간 맛볼 뿐이다.(롬 8 : 23)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무력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한도 내에 신중하게 머무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만일 제멋대로 멀리 방황한다면 진리와 허위의 구별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교사인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지 않겠기에, 바른 길을 완전히 떠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가 바울과 함께 자기들을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빌 3 : 12).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하다고 자랑하지 않고 매일 전진하려고 노력을 계속한다.

 

 

 

12.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성도에게 부분적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면 교회 자체에는 완전히 속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진리가 있는 듯하지만 나는 그것이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의 분량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시므로(엡 4 : 7), 그 은사들을 종합하면 교회 전체로서는 중요한 은사가 하나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논적들이 자랑하는 것과 같은 완전 무결하게 풍성한 상태와는 항상 거리가 멀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점에서나 부족하여 그 가진 것이 불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주께서는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회가 겸손하고 경건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상은 교회에 주시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여기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알고 있다. 주께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하셨으며(엡 5 : 26-27), 따라서 다른 곳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딤전 3 : 15) 부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앞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교회 내에서 하시는 일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매일 그의 모든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며 깨끗하게 씻기시고 닦으시며 그 얼룩을 씻어 버리신다면, 분명히 그들에게는 아직도 결점과 오점이 있으며 성화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신자가 흠이 있으며 불결한 점이 있는데 교회가 모든 점에서 완전히 거룩하며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이야기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결하게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성화의 시초가 보일 뿐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은 지성소이신(히 9-10장)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거룩하심으로 교회를 완전히 충만하게 하실 때에 나타날 것이다. 교회의 티와 주름잡힌 것이 씻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매일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남은 것을 완전히 제거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일 이 해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펠라기우스파와 함께, 신자들의 의는 이 세상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해야 될 것이다. 또 가타리파나 도나투스파와 함께, 교회 안에 있는 약점을 일체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13

둘째 구절은, 이미 다른 곳에서 본 바와 같이14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르다. 바울은 디모데를 진정한 감독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킨 다음에, 그렇게 한 목적은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에서 처신하는 법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디모데가 이 일을 위해서 더욱 경건한 열설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첨가한다(딤전 3 : 15).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에 의해서 교회 안에 보존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 : 11),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 : 14)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엡 4 : 13) 그러므로 진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진리를 충실히 보관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활동과 직무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보관이 이와 같이 예언자적 및 사도적 직무에 있다면, 진리의 보존은 주의 말씀이 순수하게 또 충실하게 보존되느냐 보존되지 않느냐 하는 데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13.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논적들이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반대하는 점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그들의 발언이 이 점에 관련되어 있고, 그들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으므로 말씀이 없어도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고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는 진리만을 생각하며 말할 수 있으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또는 그 말씀과 별도로 무슨 일을 제정하더라도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15

교회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처음 말한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모든 자기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 발언이 옳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논적들은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 밖에 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권위는 말씀에 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씀에서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요 제자인 교회가 그 남편과 선생에게 복종해서 그의 말씀에 항상 깊이 유의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르게 정돈된 가정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며, 질서가 잡힌 학교에서는 선생의 가르침만을 듣는다. 그러므로 교회도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지 말며 자기 생각대로 무엇을 생각해 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치신 곳을 자기의 지혜의 한계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자기의 이성이 고안해 낸 것을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말씀을 근거로 한 일에서는 어떤 불신이나 의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확신과 확고 부동한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 또 교회는 그 받은 약속들을 전적으로 확신함으로써 신앙을 지탱하는 훌륭한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가장 훌륭한 인도자인 성령이 자기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보혜사……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 : 7),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6 : 13)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성령 그가……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겠기"때문 이라고(요 14 : 26)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요 12 : 50)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요 12 : 49, 14 : 10), 우리도 복음과는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의 완성이심과 같이(롬 10 : 4),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다.16 이것이 크리소스톰의 말이다.

이제 우리는 논적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주께서는 교회에 근신할 것을 명령하셨고(벧전 1 : 13, 4 : 7, 5 : 8, 기타 참조),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금하셨다(신 4 : 2, 계 22 : 18-19 참조).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 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같이 말한다.

 

 

 

14. 전승은 성경보다 낮다

 

여기서 그들은 또 다시, 교회는 사도들의 글에 몇 가지를 첨가할 필요가 있었다느니, 사도들은 자신이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 것을 차후에 말로 보충했다느니 하고 중얼거린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도 사도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셨다(요 16 : 12). 그들은 이것을 성경에는 없으나 관습에 의해서 받은 명령이라고 설명한다.17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주께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의 제자들은 아직 유치했고 거의 가르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를 문자로 기록했을 때에도 그들은 무지몽매해서 기록에 빠뜨린 것을 나중에 구전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들이 진리의 영에 의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아(요 16 : 13) 글을 남긴 것이라고 하면, 그들이 복음의 교훈에 대한 완전하고 분명한 지식을 온통 기록에 남기지 못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혹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록된 것 이외에 어떤 것이 계시되었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그들이 감히 지적하려고 한다면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내놓을 것이다. "주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데 우리 가운데서 누가 감히 '이 일들이라, 저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감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떤 증거를 제공할 수 있는가?"18 그러나, 말하자면 이자들이 헐뜯어 쓸모 없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도 문서에는 주께서 그때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계시의 열매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린 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왜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15. 교회의 교리적 천명에는 모순이 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명령하는 것에 감히 반대하는 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마 18 : 17)19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교회의 모든 교리와 명령은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냐고 그들은 말한다. 첫째도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교리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다만 교회가 책으로 죄악을 시정하는 권위를 주장하시며 충고와 책망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의 판단에 항거하지 말라고 하실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악한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몰염치하게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만을 근거로 한 교회의 합의를 아무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20 누가 이것을 부인하는가?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교회는 주의 말씀에 없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상의 것을 그들이 요구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들을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며 주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강경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나를 논쟁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에게 이런 권위를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식자들은 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결정한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된다고 말할 경우, 불경하고 사악한 무리의 궤변이 대대적으로 밀려들어오리란 것도 식자들은 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산헤드린 공회에 교회라는 이름을 주셨는데(마 5 : 22), 이것은 제자들이 후에 교회의 성회들을 공경할 줄 알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에 각 도시와 각 촌락이 교리를 만들어 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16. 반대자들의 예는 빈약하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드는 예도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의 명령보다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옹호하기 위해서 교회의 권위에 피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것은 매우 가련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다르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충분하게 밝히겠다.21 같은 식으로, 그들은 니케아 회의가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질이라고 선언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항의한다.22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아리우스를 정죄한 교부들이 근거 없는 짓을 한 것같이 그들에 대해서 중대한 오해를 한다. 아리우스는 예언서와 사도 문서에 포함된 교훈 전체를 믿으라고 했지만 니케아 교부들이 하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한본질"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23 그러나 성경에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주장이 자주 반복되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하나인 참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자주 부르는 것을 볼 때에, 니케아 교부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한 본질이라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성경이 본래의 뜻을 설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24 데오도레트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서론으로 진술했다. 거룩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에는 성령이 정하신 교훈이 있으며, 복음서와 사도 서신은 예언서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24a 충분히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는 불화를 버리고 성령의 말씀에는 문제의 설명을 얻기로 하자25 그때 이 거룩한 충고에 반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교회가 자기의 것을 첨가할 수 있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모든 일을 계시하지 않았다든지, 적어도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모든 일을 말하지 않았다든지, 그밖에 이와 비슷한 항의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이 하는 생각이 바르다면 첫째,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권한을 빼앗는 악행을 했으며 둘째, 교회의 권한을 옹호하려고 일어선 감독들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들의 이 침묵은 배신 행위였다. 그들은 이런 행동으로 교회의 권리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오도레트가 그들은 황제가 한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했기 때문에26 이 새 교의를 당시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것이 확실하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교회 회의의 참된 권위. 1-2)

 

1. 두 가지 서론적인 말

 

교회에 관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점을 내가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대전제를 옹호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회의가 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며, 교회에 대해서 하는 말을 곧 회의에 옮기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교회의 권한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권한을 박탈해서 로마 교황과 그 측근자들에게 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서론적인 말을 간단히 해야겠다.

내가 여기서 엄격한 태도를 취하려 하는 것은 내가 고대의 회의들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며 또 모든 사람이 존경하기를 원한다.1 그러나 여기서 지켜야 할 규범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회의를 주관하며 그의 이 권위를 아무 사람도 나누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리다. 그리고 나는 전체 회합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의 지배를 받을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내가 회의에 돌리는 것이 논적들에 비해서 적다는 것은, 마치 회의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내가 회의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증명하며 교황 제도를 전멸시킬 만한 충분한 장비 곧 주의 말씀이 있으므로 다른 것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고대의 회의들이 대체로 이 두 가지 일을 위한 충분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하게 될 것이다.

 

 

 

2. 교회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자. 회의들에 어떤 권위가 있는가를 성경에서 살펴본다면 그리스도의 약속보다 분명한 말씀은 없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 20). 이것은 작은 모임과 세계적 회의 모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의라야 그가 그 가운데 계시겠다는 부대 조건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적들은 아무리 감독들이 모인 회의를 말한다해도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의란 것을 우리가 믿도록 증명하지 않는다면 회의들이 성령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우리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선하고 정직한 감독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과 같이, 불경하고 사악한 감독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을 공모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회의들이 발표한 교령들에는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이 점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2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는다고 한 마디로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도록 하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고(신 4 : 2, 12 : 32, 잠 30 : 6, 계 22 : 18-19 참조)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결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자들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완전한 지혜의 유일한 표준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두뇌로써 신기한 것을 조작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회의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고 진정한 합법적 회의와 그렇지 않은 회의들을 구별하는 특별 표식을 지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결코 이 구별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의 제사장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다(말 2 : 7).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도 항상 이 일을 요구하셨다. 이 규정을 사도들에게도 부여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언약을3 어기는 자들은 제사장직의 영예나 그 밖의 어떤 권위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나의 신앙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나의 논적들은 이 어렵고 난처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목자들의 결점 때문에 회의들도 오류를 범한다. 3-7)

 

3. "목자"가 없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자존할 수 있다

 

그들은 목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교회 자체도 총회의에서 나타내 보여야만 존재4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시대에 충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남겼다면 그들의 생각은 항상 진리가 아니다.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교회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교회의 목자들에 대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사 56 : 10-11). 호세아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호 9 : 8). 호세아는 빈정대는 뜻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들의 제사장직이 가짜란 것을 가르친다. 교회는 예레미야 때까지도 존속했다. 그가 목자들에 대해서 한 말을 들어보자.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6 : 13).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렘 14 : 14). 예레미야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하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이 23장(렘 23 : 1이하)과 40장을5 읽기 바란다. 같은 시대에 에스겔은 다른 곳에서 역시 엄격하게 같은 사람들을 질책한다. "그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배역함이 우는 사자가 식물을 움킴 같았도다‥‥‥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번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겔 22 : 25-26) . 같은 뜻의 말이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언서에는 비슷한 말씀이 자주 나온다. 사실 이보다 더 자주 나오는 말씀은 없다(사 9 : 14, 28 : 7, 29 : 10, 렘 2 : 8,26, 5 : 13,31, 6 : 13, 8 : 10, 13 : 13, 14 : 14, 23 : 1, 27 : 9 기타).

 

 

 

4. 목자들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혹자는,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을지 모르나 우리 시대에는 이런 큰 폐단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언명하셨는데, 이는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벧후 2 : 1)라고 베드로가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교사와 목자의 칭호를 자랑하는 자들에게서 위험이 오리라고 베드로가 예언하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목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장 큰 위험 인물들이라고 얼마나 자주 예언하였는가(마 24 : 11,24, 행 20 : 29-30, 딤전 4 : 1, 딤후 3 : 1이하, 4 : 3)? 참으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으리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살후 2 : 4).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서 말하는 무서운 재난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목자로서 앉아 있는 자들에게서 오리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이 가장 큰 재앙의 시초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즉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6 말한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 : 29-30). 목자들이 단시일에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었다면 오랜 세월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부패가 그들 사이에 생기겠는가? 그런 예를 위해서 여러 장을 메꿀 필요가 없다. 진리라고 해서 항상 목자들의 가슴에서 육성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건전성 또한 그들의 상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실례가 우리에게 경고한다. 목자들은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마땅히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 그러나 빛을 갚는 것과 갚지 못한 채 빛을 지고 있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5. 목자들을 잘 식별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모든 목자들의 권위를 일률적으로 경솔하게 손상시키는 것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만 목자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목자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곧 그렇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할 뿐이다. 그러나 교황과 그의 측근 주교들은 목자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만을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 버린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결코 진리의 빛을 빼앗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이 항상 자기들 사이에 계시고 교회는 자기들과 존망을 함께 한다고 우리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마치 고대 백성들의 배은 망덕을 벌하시던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은 세상을 벌하지 않을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정신을 둔하게 만드셨다(슥 11 : 17). 현대의 이 철저하게 우둔한 인간들은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던 자들이 부른 노래를 자기들도 지금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진리와 싸울 때에 한 말은 이것이었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렘 18 : 18)

 

 

 

6. 회의들도 진리에 맞설 수 없다

 

따라서 총회의들에 관한 다른 반대에도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 진정한 교회가 유대인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때 제사장들의 총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하면 거기 나타난 교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목자들 전체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렐 4 : 9).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 : 2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미 3 : 6). 생각해 보라. 가령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면 어떤 영이 그 집회를 주관했겠는가? 이 일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아합이 소집한 회의였다(왕상 22 : 6,22). 예언자 400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왕에게 아첨하려는 목적으로만 모였기 때문에, 주께서 사탄을 보내셔서 거짓말하는 영이 모든 자의 입에 있게 하셨다. 모든 자들의 투표로 진리는 정죄되었다.

즉 미가야는 이단자로 몰려 얻어맞고 옥에 갇혔다(왕상 22 : 26-27). 예레미야도 같은 일을 당했고(렘 20 : 2, 32 : 2, 37 : 15이하) 다른 예언자들도 그같이 당했다(마 21 : 35, 23 : 29이하 참조).

 

 

 

7. 요한복음 11 : 47에 있는 예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을 만한 다음의 예를 보면 다른 예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인 회의는(요 11 : 47)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결함 도 없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나 그 밖의 의식에 참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엄숙하게 회의가 열리고, 대제사장이 주관하고, 제사장들이 모두 출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그의 교훈을 배척했다(마 26 : 57이하). 이 행동은 그 회의에 교회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논적들은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위험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런 보장을 했는가? 이런 중요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은 태만죄라고 하겠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해서 목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그런 배교가 있으리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파멸을 보지 않으려고 고집하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목자들의 회의로 성립된다는 생각을 우리는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목자들이 영원히 선하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고 오히려 그들이 악하게 되는 때가 있으리라고 언명하셨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시는 것은 우리가 더욱 주의하며 경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성경을 떠났기 때문에 회의들은 타락했고 니케아와 칼케돈 회의도 결함 이 있었다. 8-11)

 

8. 회의들의 결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회의들에는 아무 결정권도 없다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결정권은 있다. 나는 여기서 모든 회의를 배척해야 된다든지 또는 모든 회의의 결정을 취소하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을 깎아 내리고, 누구에게나 회의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게 만든다고 내게 말할 것이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어느 회의의 결정이 있을 때마다 회의는 언제, 무슨 문제로, 무슨 목적으로 열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출석했는가를 사람들이 먼저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 다음에 회의에서 취급할 문제를 성경을 표준으로 하여 검토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회의의 결정이 자체의 중요성을 지니고 또 이전의 판단에 비추어 고려되어져야 하지만 내가 언급한 검토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어거스틴이 막시미누스 반박론에서 요구한 신중한 태도를 모든 사람들이 가지기를 바란다. 회의들의 결정 사항들에 대해서 이 이단자가 논란하는 것을 간단한 말로 침묵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니케아 회의를 내세우거나 당신이 나에게 아리 미눔 회의를 내세워서 문제를 애매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후자 의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신은 전자의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와 문제, 주장과 주장, 이유와 이유가 어느 한쪽의 특수한 권위가 아닌 쌍방의 공통된 권위 즉 성경의 권위에 의해서 서로 싸우게 하라.7

이렇게 하면 회의들은 그 마땅히 가져야 할 위엄을 가지게 될 것이며, 동시에 성경은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표준으로서 더 높은 수준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과 제 1 차 에베소 회의와 칼케돈8과 그 밖의 이와 같은 초기의 회의들을 거룩한 회의들로서 기꺼이 공경하며 받아들인다. 이 회의들은 신앙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 데 심사 숙고 했다. 거기에는 성경에 대한 순수하고 진솔한 해석이 있었을 뿐이며 거룩한 교부들은 당시에 있던 신앙의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해서 영적인 지혜로 이 해석을 적용했다. 그 후에 있은 일부 회의에서도 우리는 경건에 대한 진정한 열성이 빛나는 것을 보며 통찰력과 교리와 지혜의 분명한 증거를 본다. 그러나 사태가 대체로 악화됨에 따라, 우리에게 더 가까운 최근의 회의들에서 우리는 교회가 그 황금 시대의 순수성에 비해서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볼 수 있다.

나는 부패가 더 심한 때에도 회의에는 훌륭한 감독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옛날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의 결의 방법이 나쁘다고 한탄한 것과 동일한 일을 경험했다. 의견의 무게는 보지 않고 수효만 보기 때문에 더 좋은 부분은 더 큰 부분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런 회의들은 불경건한 교령을 많이 발표했으나 여기서 그 실례를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런 예는 너무 많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덧붙일 만한 것이 별로 없다.9

 

 

 

9. 회의들이 서로 충돌했다

 

그러면 회의들이 서로 충돌한 이야기를 내가 할 필요가 있는가? 일치하지 않는 두 회의 중의 하나는 불법적인 것이라고 해서 내게 항의하는 사람은 그렇게 항의할 근거가 없다. 무엇을 표준으로 그런 판단을 하는가? 만일 내가 속은 것이 아니라면 표준은 하나이다. 즉 성경에 의해서 어느 쪽 교령이 정통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가부를 구별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레오 황제 때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교회 안에 세운 형상들을 전부 끌어내어 부셔 버리기로 결정했다. 곧이어 이 회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레네 여왕이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는 형상들을 다시 복구하도록 판결했다.10 이 두 회의 중 어느 쪽을 우리는 합법적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교회 내에 형상들을 두기를 허락한 두 번째 회의가 그 후에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습관에는 항상 우상 숭배의 위험성이 동반한다고 말한다.11 그의 선배였던 에피파니우스는 기독교회 안에 형상이 있다는 것은 불법이며 가증한 일이라고 더욱 강경하게 말했다.12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회의를 인정하겠는가?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을 전하고 우리가 회의 기록 자체를 믿을 때, 그 회의에서는 형상뿐 아니라 형상을 숭배하는 것도 인정했던 것이다. 이런 교령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성경 전체를 곡해하며 찢어버리면서 성경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여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13 하여튼,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많은 회의들에 대해서 모든 사람과 천사들의 저울인 주의 말씀에 따라 그 경중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표준으로 우리는 칼케돈 회의를 받아들이며 제 2 차 에베소 회의를 배척한다. 에베소 회의에서는 유티케스의 이단설이 승인되었고 칼케돈 회의에서는 정죄되었기 때문이다.14 거룩한 분들은 이 문제를 오직 성경에 표준하여 판단했으며, 우리는 그들 앞에서 빛나던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 앞에서도 빛나도록 그들을 본받아 판단한다. 자,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가서 성령이 그들의 회의에 굳게 결박되어 있다고 그들의 상습적인 자랑을 하도록 하라.

 

 

 

10. 회의들과 인간적 결함

 

그러나 저 고대의 비교적 순수한 회의에도 결함이 있었다. 박식하고 현명한 분들이 참석했었으나 눈앞에 닥친 문제에 몰두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예견하지 못했으며, 혹은 더 중대한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덜 중요한 일에는 주의하지 못했고, 혹은 사람인 관계로 지혜가 부족해서 기만당하기도 했으며, 혹은 감정에 휩쓸린 때도 있었다. 가장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이 나중 문제는 모든 사람이 그 우수성을 인정하며 또 당연히 그런 인정을 받은 니케아 회의에서 현저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조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원수인 아리우스는 언제든지 싸울 용의가 있었고 그들은 그와 직접 맞붙어 싸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아리우스의 오류와 싸울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큰 위험성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엄숙과 겸손과 예의 등도 잊어버리고는, 오히려 아리우스를 도우러 온 것같이 하여 이길 싸움을 놓쳐 버렸다. 내부 불화가 일어나 그들은 서로 욕설을 하며 아리우스를 공격할 붓을 들어 동지를 공격했다. 입으로 추악하게 비난하며 서로 고발하는 선전문을 돌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서로 찌르고 상처를 입었을 정도로 분쟁이 격화되었다. 황제는 그들의 생활을 조사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비난하기보다 칭찬함으로써 그 무절제를 징계했다.15 그 후에 있었던 다른 회의들도 여러 가지 점에서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더 이상의 긴 증명은 필요 없다. 누구든지 회의록들을 읽어보면, 중대한 과오들은 그만 두고라도 많은 결점들을 발견할 것이다.

 

 

 

11.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로마 감독 레오는 칼케돈 회의를 교리에서는 정통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지각없는 경솔과 야심이 있었다고 서슴지 않고 비난했다. 그는 이 회의의 합법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과오를 범했을지도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단정했다.16 내가 이런 과오를 밝히려고 애쓰는 것을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는 구원에 필요하지 않은 문제에서는 회의들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우리의 반대자들은 인정하기 때문이다.17 그러나 이것은 공연한 수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입으로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모든 회의의 모든 결정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무분별하게 우리에게 강요할 때에는 처음에 인정한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회의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또는 과오가 있다 해도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거나 그들의 과오를 따르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나는 이런 사태에서 무엇을 생각 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할뿐이다. 즉 성령께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분들을 주관하셨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사람을 너무 신임하지 않도록 하셨는데, 이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어느 회의에서도 좋은 결말을 본 일이 없다고18 한 것보다는 나은 견해다. 이는 모든 회의가 예외 없이 결말이 나빴다고 주장할 때, 그는 회의들의 권위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 회의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신조를 제정하며 원하는 대로 무슨 교리든지 받아들이는 권위가 지방 회의에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전체 회의에 생각하면 쉽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 먼 인도자에게 순종하지 말라, 후대 회의들의 결정에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과오가 있었다. 12-14)

 

12. 맹종은 불가하다

 

현대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할 만한 도움을 이성에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최후의 가련한 도피 수단을 사용한다. 즉 이 사람들 자신은, 비록 그 마음과 생각이 둔하고 심정과 의지가 철저하게 악할지라도 인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히 13 : 17) 주의 말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19 과연 그런가? 사실 이런 자들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여호수아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주의 선지자요 훌륭한 목자였던 여호수아를 주께서 그 직책에 임명하실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어보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 : 8,7). 그러므로 주의 율법에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자들의 교훈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자주 경고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 : 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 : 1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 요한의 충고도 헛것이 될 것이다(요일 4 : 1). 천사들도 이 비판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탄과 그 거짓말은 오죽할까(갈 1 : 8)?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5 : 14)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어떤 목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가 하는 것과, 무분별하게 모든 목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칭호에 놀라며 우리까지도 끌려가서 그들과 같은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름으로 가장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끌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특히 경고하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이 해답이 옳다면, 대제사장이든 대주교든 교황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눈 먼 인도자라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과 함께 같은 벼랑에서 떨어지게 할뿐이다. 따라서 이름이 회의나 목자나 주교라고 해서(그 가운데는 진정한 이름0?가짜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증거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의 영을 검토하며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3.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권한이 교회에게 주어진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는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교리에 관한 토론이 일어날 때에는 진정한 감독들이 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문제된 교리를 검토하는 것이 가장 좋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교회의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을 받아 서로 일치하게 되는 결정은 목자들이 각각 자기 집에서 혼자 생각한 후에 신도들에게 가르친다든지 또는 몇 사람이 모여서 교리를 작성하는 것보다 더욱 무게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감독들이 모이면 무엇을 어떤 모양으로 가르칠 것인지를 공동으로 심사 숙고할 수 있을 것이며 다양성 때문에 생기는 불만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로 바울도 교리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권한다. 교리를 분별하는 일을 각 교회에 일임하면서(고전 14 : 29 참조) 바울은 더 중대한 경우에 따를 절차를 보여 준다. 즉 교회들은 서로 심리하며 인정하라고 한다. 경건한 감정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상한 교리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더 큰 분열이 생길 위험성이 보일 경우, 교회들은 먼저 모여서 문제를 검토하며 정당한 토의를 하고 그 다음에 성경에 입각한 결정을 내려서, 일반 신도들의 의혹을 제거하며 악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 감히 문제들을 더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한 대책을 일으켰다.20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불경건이 전복되었다. 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와 바실이나 키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수호자들을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제 2 차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유티케스의 이단설이 이겼고21 거룩한 기억을 남긴 플라비안과 다른 경건한 사람 몇 명은 추방을 당했으며, 그밖에도 이런 비행이 많았다. 이것은 극히 악한 성격을 가진 논쟁가 디오스코루스가 회의를 주관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영이 주관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교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나도 인정한다.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그러나 한 회의의 투표에 의해서 채택되는 성경 해석이 확고한 진리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 라고 생각한다.

 

 

 

14.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카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권은 회의들에 속하며 더 상소할 길이 없다고 카톨릭 교도들이 주장할 때에 그들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회의의 모든 결정을 "성경에 대한 해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구실로 악용한다. 연옥과 성자들의 중보 기도와 은밀한 고백과 기타 비슷한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22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허락되었으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의견과 관습에 의해서 용인되었으므로 그 하나 하나를 성경에 관한 해석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한다. 결코 그뿐이 아니다. 어떤 회의가 무엇을 결정하면, 비록 성경이 분명히 반대할지라도 그것은 "해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만찬에서 잔을 주시면서 모두 그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셨다(마 26 : 27-28). 콘스탄스 회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사제만 그 잔을 마시라고 했다.23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전혀 반대되는 이 결정을 그들은 "해석"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바울은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24 마귀들의 위선이라고 한다(딤전 4 : 1-3).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는, 성령께서는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거룩하고 귀한 것이라고 언명하신다(히 13 : 4). 그들은 후대에 와서 그들이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한 것을 성경에 대한 진정하고 순수한 해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이질적인 것은 고안할 수가 없다. 누가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들은 이단자라고 판정한다. 교회의 결정은 상소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해석이 옳은가를 문제로 삼는 것을 불법이라고 한다. 내가 왜 이런 파렴치를 공격하겠는가? 그것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성경 인정권이란 것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겠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판단에 굴복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의 타당성을 사람의 변덕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모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25 그러나 다음의 한가지 질문만은 하겠다. 만일 성경에 권위가 있는 것이 교회의 인정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어느 회의의 결정을 인용 할 것인가? 나는 그런 결정이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왜 아리우스는 요한복음에 인용된 증거에 의해서 니케아 회의에서의 패배를 인정했는가?26 카톨릭 교회의 의견에 의하면, 회의의 승인이 아직 없었으므로 아리우스는 그 증언들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증거로서 "경전"(canon)이라고 하는 고대의 목록을 제시하며 교회의 판단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시 묻는다. 어느 회의에서 그 경전이 공포되었는가? 그들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 사이에는 경전에 대해서 일치한 적이 없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제롬이 한 말에 중요시해야 한다면 마카비서와 토비트와 집회서와 기타 유사한 책들은 다시 외전의 지위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27

 

 

 

제 10 장

 

입법권 :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교회법과 교회 전통,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양심. 1-4)

 

1. 근본 문제

 

교회 권한의 제 2부를 논하겠다.1 카톨릭 교도들은 이 부분을 입법권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인간적 전통 즉 가련한 영혼들을 묶어 매는 수많은 그물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다른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비양심적인 인간들이다(눅 11 : 46, 마 23 : 4 참고),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은밀한 고백에 관한 그들의 교리가 얼마나 잔인한 도살 행위인가를 말했다.2 그들의 다른 법에는 그렇게 심한 폭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참을 수 있는 듯한 것도 잔혹하게 양심을 억압한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타락시키는 것이나 유일한 입법자인 하나님의 권리를 빼앗는 데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이 권한 즉 법을 정해서 양심을 속박할 합법적 권리가 교회에 있느냐 하는 면에 대해서 논의하겠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치 질서를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에 따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영적 자유가 손상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과는 별도로 사람들이 발표한 모든 명령을 "인간적 전통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 전통들에 반대한다. 규율이나 성실이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유익한 교회의 거룩한 제도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목자로 인정받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야만적인 도살자같은 자들이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한계 없이 야만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제지하려는 것이 우리가 노력하는 목표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법은 "영적"이고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한다.3 그러나(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4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방법으로 침해을 당하며, 그가 신자들의 양심에 주신 자유는 이런 방법으로 완전히 압박과 버림을 당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며, 그 법을 지킴으로써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구하라고 가르치며, 종교와 경건은 모두 그들의 법을 지키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극히 사악한 짓이지만 나는 지금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는 문제들에 관한 한, 양심을 다시 속박하지 말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5 양심은 자유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양심은 한 왕이시며 해방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나의 자유의 법 즉 복음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를 유지할 수 있다. 양심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아야 하며 아무 속박도 받지 않아야 한다.

 

 

 

2. 카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로 만든다

 

이 입법자들은 그들의 법을 자유의 법, 부드러운 멍에, 가벼운 짐(마 11 : 30)이라고까지 자부한다.6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란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법을 참혹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버리고 그들 자신이 만든 법과 하나님의 법을 태연하게 또 적극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구원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올가미에 걸려 있는 한, 도저히 그들처럼 자유를 느낄 수 없다. 바울은 이 문제를 깊이 다루었고 어느 한 가지 일에 대해서도 감히 사람들을 제재하려고 하지 않았다(고전 7 : 35). 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은 주께서 자유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서 의무를 지운다면 그것이 양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았다. 그러나 이 자들은 억압적 태도로 이루 다 셀 수 없는 법을 공포하고는, 어기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벌을 받을 것이며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법이라고 하면서 심히 엄격하게 실행한다.7 그 가운데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많은 데다 그런 법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렸으니 그것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어떻게 당황하지 않으며 극도의 공포와 고민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여기서의 내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내적으로 속박하며 또 구원에 필요한 일을 명령하는 듯이 하면서 의심과 가책만을 던져 주는 이 법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3. 양심의 본성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모른다. 즉 외면적인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충분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8 또 바울이 형벌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라고(롬 13 : 1이하) 가르친 사실도 이 문제를 더 난처하게 만든다. 바울의 교훈에서는 양심은 세상 법률에도 매여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앞장에서9 한 말과 이제 논하려는 영적 지배에 대해서 하려는 말은 모두 다 허사가 될 것이다.

이 곤란을 해결하려면 우리는 먼저 양심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양심의 정의를 알기 위해서는 "양심"(conscience)의 어근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의 개념을 지성과 오성으로 파악할 때에 우리는 "안다"고 하며, 여기서 지식이란 말이 생겼다.10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마음으로 의식하며 이 의식이 한 증인같이 붙어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감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우리를 심판대 앞에서 고발할 때에 이 의식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일종의 매개물로서, 사람이 아는 것을 마음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며 그 죄과를 인정할 때까지 추궁한다.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양심이 사람들의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한다고 가르친다(롬 2 : 15-16). 단순한 의식이라면 병 속에 밀봉한 것같이 사람 속에 평안히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심은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세우며, 사람에게 붙여 놓은 감시인과 같이 그의 모든 비밀을 감시하고 하나도 어둠 속에 숨기지 못하게 한다.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이라는 격언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11 같은 논법으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갈 때에 느끼는 마음의 평화와 "선한 양심의 하나님께 대한 응답"을(벧전 3 : 21 참조)11a 동일시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는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라고(히 10 : 2) 하는 것은, 우리는 해방 또는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죄가 다시 우리를 고발할 수 없다는 뜻이다.

 

 

 

4. 양심의 속박과 자유

 

그러므로 행위가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선한 양심은 곧 속마음이 올바르게 서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하였다(딤전 1 : 5). 뒤에 양심과 오성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착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했다고 같은 장에서 말한다(딤전 1 : 19). 바울은 이런 말을 사용함으로써,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활발한 열망이며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겠다는 성실한 의도라는 것을 가르친다.

사람을 상대로 양심을 운운하는 때도 있다.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 바울이 자기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선한 양심으로 행하고자 노력하노라고 단언한다(행 24 : 16).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은 선한 양심의 유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며 그들에게 미리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원래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12

그러므로 율법이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또는 다른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우리에게만 의무를 지을 때에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맨다고 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는 온갖 정욕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가지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음란한 말과 행동을 완전히 금하신다. 이 세상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도 나의 양심은 이 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무절제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의 형제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감에 묶이기 때문이다.

본래 무해 무익한 일에 있어서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일이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야 양심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한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 : 28-29). 만일 신자가 미리 경고를 받고도 이런 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먹지 않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 아무리 필요하다해도 먹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이 법은 외면적인 행위만을 제재하고 양심의 자유는 침범하지 않는다.

 

 

 

(인간들과 교황들이 정한 법에 대한 양심의 입장 : 하나님만이 입법자이시다. 5-8)

 

5. 인간들이 만든 법은 양심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인간이 만든 법을 보기로 하자. 만일 그런 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필요한 일인듯이 우리의 양심에 짐을 지우기 위해서 정한 법이라면, 우리는 그런 짐은 불법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양심은 사람을 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지상의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구별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전세계가 무지의 암흑 속에 가장 깊이 묻혀 있던 때에도 이 조그마한 빛은 남아 있었다. 즉 모든 인간적 판단보다 사람의 양심이 더 높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했다. 후에 그들은 그렇게 고백한 것을 한 마디로 부정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에도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서 인간의 학대로부터 양심을 구출하게 하셨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서13 생겨난 곤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벌을 피하려는 생각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면(롬 13 : 5), 위정자들의 법률은 우리의 양심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가졌다는 결론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우리는 먼저 유(類)와 종(种)을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개의 법률은 우리의 양심에 적용되지 않지만, 위정자의 권위를 우리들에게 추천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다. 바울이 논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임명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롬 13 : 1). 또한 그는 위정자들이 제정한 법이 영혼의 내면적 통치에 적용된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만든 어떤 법보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바른 생활의 영적 규율을 여러 곳에서 찬양하기 때문이다.14

지금까지 말한 여러 가지 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역시 주목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즉 위정자나 교회가 만든 인간의 법을 (선하고 공정한 법인 때에) 지켜야 하지만 그 자체로는 양심을 구속하지 않는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는 그 일반적인 목적에 관련된 것이지 명령하신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새 형식을 명령하며 자유로운 문제에 대해서까지 의무를 지우는 법규들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6. 교회는 양심을 속박하는 독립된 법을 정할 권리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이 현재 교황 제도에서 "교회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만이 하나님께 대한 진실하고 필요한 경배라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이런 법은 수 많으며 그만큼 영혼을 잡으려는 올가미도 무수하다. 우리는 율법을 설명할 때에 이 문제를 잠깐 언급했다.15 그러나 여기가 올바른 논의를 하기에 더 적당한 곳이 되겠기에, 될 수 있는 한 순서적으로 문제 전체를 요약해 보겠다. 또 거짓 주교들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가르칠 권리가 있노라고 하는 그 횡포적 태도를 우리는 최근에 충분히 논했다고 생각하므로, 이 문제는 전적으로 제외하고 여기서는 그들에게 있다고 하는 입법권만을 논하겠다. 거짓 주교들은 우리의 양심에 새로운 법의 짐을 지운다. 그들이 내세우는 구실은 영적 입법자로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교회의 통치를 자기들이 맡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이중의 반역자라고 한다.16

그들이 진정한 감독(주교)이라면 이 점에서 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많은 권위는 아닐지라도 교회를 합당하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정도는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이 존경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는 본 마음이 다른 자들이므로 월권행위를 하지 않고는 극히 적은 권위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도 다른 곳에서 이미 검토했으므로,17 여기서는 진정한 감독들에게 속한 권한을 이 사람들도 권리로서 가졌다고 인정하자. 그렇게 하더라도 나는 그들이 신자들을 지배하는 입법자로 임명되어 마음대로 신자들의 생활 규칙을 정할 수 있다든지 또는 그들이 결정한 규칙을 신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즉 나는 그들에게 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들이 생각해낸 것을 의무적으로 지키라고 교회에 명령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권한은 사도들이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친히 여러 번 사역자들에게 거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사도들의 선례와 하나님의 명백한 금지 명령을 어기면서 감히 이 권리를 잡으려고 했으며 현재도 그것을 옹호하려고 하는지 나는 심히 이상하게 생각한다.

 

 

 

7. 모든 자의적 지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침범이다

 

주께서는 선한 생활을 위한 완전한 표준에 필요한 것은 모두 그의 율법에 포함시키시고, 아무도 그것에게 첨가하지 못하게 하셨다.18 이렇게 하신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우리 생활의 주인과 인도자로 생각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그 표준에 일치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이다. 의로운 생활은 전적으로 그렇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순종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한다.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 : 11-12)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의 권위와 법으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이 한 가지 특권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이사야를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다. 약간 불명확한 표현이었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 : 22). 이 두 구절이 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영혼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신 이에게 있다는 것을 밝힌다. 사실 야고보는 이 점을 명백하게 말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이 권한을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혼의 유일한 지배자로 인정해야 한다. 오직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은 동시에 지배자와 재판장과 입법자와 구주를 겸하셨다고 한 이사야의 말과 같다(사 33 : 22). 그러므로 베드로는 목자들에게 그 직분에 관한 충고를 할 때에, 양떼를 먹이며 맡은 무리 곧 하나님의 기업인 신자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라고 한다(벧전 5 : 2-3). 하나님께서 자기 것으로 확보하신 것을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이 불법이란 것을 잘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회 안에서 무엇을 명령하려고 덤비는 자들의 권한이 완전히 말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8.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방법

 

문제 전체의 근본은, 만일 하나님이 유일한 입법자이시라면 사람이 이 영예를 빼앗는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께서 이 영예를 자기만이 가지겠다고 하시는 이유를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라고 이미 말했다. 첫째, 모든 의와 거룩의 완전한 표준은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하나님을 알면 선한 생활을 완전히 알게 된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고 합당하게 예배하는 방법을 구할 때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셨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한다.

이 두 가지 이유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인간이 만든 어떤 법이19 의 말씀에 반대되는가를 쉽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법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에 관계된 것이며, 양심이 그 법을 지킬 의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꼭 지켜야 할 종류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모든 법을 우리는 이 저울로 달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완전한 기준이 있어서 이 기준에 따라 모든 일에 과오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부담으로 교회를 억압하려고 하는 거짓 사도들과 싸운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골 2 : 8) 첫째 이유를 사용했고, 비슷한 문제로 갈라디아 교회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갈 5 : 1-12) 둘째 이유를 더 많이 사용했다. 골로새서에서 그는 논한다. 즉 주를 어떻게 경배한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주께서는 성실하고 충분하게 우리를 가르쳐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법은 사람에게서 배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만드는 지혜는 전부 복음에 포함되었다고 1장에서 말한다(골 1 : 28). 2장의 처음에서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 있다고 말한다(골 2 : 3).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리기를 신자들은 헛된 철학과 인간의 법에 속아 그리스도의 양떼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였다(골 2 : 8). 그러나 2장의 끝에 가서는 모든 자의적(自意的) 숭배를20 즉 모든 원시적 경배를 더욱 단호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 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관해서 그들이 마음대로 공포한 교훈이라고 한다(골 2 : 16-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모든 법을 불경건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지배만을 받아야 할) 양심을 각종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지 말라고 역설하는 구절들, 특히 5장은 (갈 5 : 1-12) 뜻이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지적하기만 하겠다.

 

 

 

(예배 의식을 제정한 교회법은 전제적이며 경박하며 성경에 배치된다. 9-18)

 

9.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교회법은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 전체는 실질적인 예를 들어야 더 분명하게 되겠기에, 더 진행되기 전에 이 교리를 우리의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우리는 교황과 그 앞잡이들이 교회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교회법"은 너무나 해로우며 불경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은 그것을 거룩하며 구원에 유익하다고 하여 옹호한다. 그런데 교회법에는 의식에 관한 것과 규율에 관한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다 공격하는 것은 정당한가?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정당하다.

우선 법을 만든 자들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가장 진정한 경배는 바로 그들의 이 법안에 담겨 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는가? 그들이 의식을 지시하는 목적은 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단지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인식으로 이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책임을 가진 자들의 승인을 얻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나는 그들이 모든 경건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행하는 여러 가지 가증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그들이 조작한 법에 예속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장 사소한 전통을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극악한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가르친 것 즉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법을 인간의 결정에 예속시키는 것은 우리도 참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특히 그들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이라고 확언했다(골 2 : 20). 또 그들이 자기들의 명령을 모두 준수하도록 지극히 엄격하게 양심을 결박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에게 반대할 때에 우리는 바울과 공동 전선을 펴는 것이다. 바울은 신자의 양심을 인간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갈 5 : 1).

 

 

 

10. 교황 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허무 맹랑한 조작을 종교라고 부를 때 이 패악에는 반드시 다른 부패가 따른다.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이런 일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유전(遗传)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기한다고 하셨다(마 15 : 3). 나는 현대 입법자들과21 싸울 때에 나 자신의 말을 쓰고자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들이 이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년 동안 철저하게 악한 생활을 계속한 것보다도 연말에 은밀한 고백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악한 일이라고 하니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온 몸을 매일 음행으로 더럽힌 것보다도 금요일에 고기를 조금 맛본 것을 더 악하다고 하며, 모든 지체를 동원해서 가장 악한 죄악을 열심히 지은 것보다도 어떤 꼬마 성자의 날에 정직한 일을 위해 손을 움직인 것이 더 큰 죄라고 하고, 사제가 일 천 번 간음죄를 지은 것보다도 한 사람을 상대로 합법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더 악한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모든 약속을 어긴 것보다 맹세한 순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악하며, 가난한 사람의 곤경을 돌보지 않는 것보다도 교회들을 괴상하고 쓸데없는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데 낭비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고, 전인류를 학대하는 것보다 우상에게 경의를 표시하지 않고 지나는 것이 더 악하다고 한다. 합당한 기도를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는 것보다 무의미한 말을 길게 중얼거리지 않는 것이 더 큰 죄라고 한다. 그들의 유전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은(마 15 : 3)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할 때에는 냉담하고 소홀한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령은 그 속에 경건의 모든 능력이라도 포함된 양 정확하게 지켜야 된다고 열심히 또 분주히 역설하니 이것은 무슨 짓인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데 대해서는 단지 정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자기들의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투옥과 추방과 불과 칼로 처벌한다.22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가혹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증오심으로 끝까지 박해를 가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모든 법이 전복되는 것은 침착한 마음으로 그저 바라보라고 가르치면서, 소위 교회의 교훈을 한 획이라도 어기는 것은 중대한 일인 양 떠든다. 우선 사소한 일과(하나님이 보시기에) 무해 무익한 일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재판하며 추방한다는 것은 큰 죄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이 경미한 악에 불과하다는 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갈 4 : 9> 말한) 세상의 초등 학문을 더 높이 평가한다. 간음죄에서 거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음식 문제로 재판을 받으며, 창녀와 관계한 사람에게는 아내가 금지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람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짜 순종의 결과인 것이다.

 

 

 

11.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하며 무익하다

 

이 교회법들에는 우리가 마땅하게 생각지 않는 두 가지 결점이 있다. 첫째, 교회법에는 대체로 무익한 것들과 심지어 어떤 것은 미련하기까지 한 준수 사항들이 규정되어 있다. 둘째, 경건한 양심은 그 수많은 규정에 압박되며 일종의 유대교에 돌아가서23 그림자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교회법들을 무익하고 미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육적인 지혜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육의 지혜는 교회법을 즐기며, 그것을 제거하면 교회가 완전한 기형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며(골 2 : 23),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엄격한 태도로 육신을 길들일 수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건전한 경고다. 바울은 인간의 전통이 지혜의 외형을 쓰고 거짓으로 속인다고 말한다. 이 속이는 빛깔이 어째서 생기는가? 사람들이 가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혜는 자기 것을 알아보며, 그것을 알아본 다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참으로 훌륭한 것이 있어도 자체의 허영심과 잘 맞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교회법은 그 멍에로 사람의 마음을 땅에 닿도록 내리 짓밟아 일어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훈련을 위해서 적합한 지시를 주는 듯이 보인다. 끝으로, 교회법은 육의 쾌락을 억제하며 엄격한 금욕으로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 같기 때문에, 현명한 조치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단순한 사람들이 그 거짓에 속지 않도록 그 가면을 벗겨 버리는가? 바울은 교회법들의 허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처럼 일일이 반박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골 2 : 22). 참으로 그는 교회 안에 있던 모든 가짜 예배가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가짜 예배가 인간을 기쁘게 할수록 더욱 신자들의 의심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즉 외면적 겸손의 가면은 진정한 겸손과 완전히 다르므로 곧 식별된다는 것과 초보적인 규율은 신체 훈련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사실들이 신자들을 위해서 인간의 유전을 충분히 반박해 주기를 원했다. 원래 신자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이 유전들을 무지한 사람들에게 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 그들의 신비는 기만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무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속적 지혜로 심히 교만한 사람들까지도 화려한 의식에 굉장한 매력을 느낀다. 참으로 위선자들과 경박한 여자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많은 의식들을 더 깊이 연구하고 또 경건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 가치를 실제로 알아 본 사람들은 첫째, 그 의식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너절하다는 것과 둘째, 화려한 허식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므로 기만이란 것을 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카톨릭 교사들이 그 속에 큰 신비가 숨어 있다고 하는 의식들인데, 우리는 그 의식들에서 순전히 우롱과 기만만을 경험할 뿐이다.24 그런 것을 만들어 낸 자들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으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데까지 타락했다는 것은 이상한일이 아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이방인들의 미친 짓을 본받기도 하며 모세의 율법에 있는 고대의 의식들을 원숭이같이 경솔하게 흉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며 그밖에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른 증명이 없더라도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서투른 혼돈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의식의 목적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마비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은 사실 자체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또 그들의 최신식 교회법도 규율을 유지한다기보다는 파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은 그것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러나 좀더 철저하게 연구하는 사람은 그것이 규율의 그림자요 금방 사라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13.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한 축적으로 유대교적 요소로 양심을 괴롭힌다

 

둘째 점을 본다면, 이런 유전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효가 불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일종의 유대교가 의식에 나타나며 어떤 규정은 경건한 마음에 잔인하게 고통을 가한다.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 대해서, 하나님의 교훈은 무시되고 매사에 선입견이 가득하여, 축일(祝日) 8일간에 맨발로 땅을 디디는 사람을 술에 만취된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책망한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자유롭게 하신 교회가 유대인들보다 더 심한 압박을 받는다고 하였다.25 저 거룩한 분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현재의 속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보고 얼마나 한탄을 했겠는가? 그의 시대에 비해서 지금은 법의 수가 열 배나 더 불었고 그 일점 일획을 백 배나 더 엄격하게 강행한다. 이와 같이 이 악한 입법자들은 한번 권위를 잡으면 중단하지 않고 계속 명령하고 금지하여, 끝내는 극도의 신경 과민 상태에까지 미치게 된다. 이 사정을 바울은 명쾌한 말로 간파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골 2 : 20-21)라는 말에는 먹는다와 만진다는 두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수많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먹는다는 뜻을 취한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수법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우선 미신에서부터 출발해서, 먹지 말라고 할뿐만 아니라 조금 씹는 것조차 금지한다. 여기서 이기면 다음에는 맛도 보지 말라고 한다. 또한 여기서 인정을 받으면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까지도 불법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14. 의식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인간이 만든 법들의 압제를 비난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는 가련한 양심들이 그 법들에 의한 수많은 명령과 가혹한 강요에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규율에 관한 교회법을 논했다.26 그리스도를 거의 묻어 버리고 우리를 유대교적 상징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의식들에 대해서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거스틴은 말한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새 백성의 공동체를 성례로 결속하셨다. 그것은 몹시 그 수가 적고 뜻이 아주 훌륭하며 지키기가 매우 쉽다."27 이 단순성에 비해서, 현재 보는 바와 같이 교회를 얽어매고 있는 무수한 각종 의식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 그 정도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이 패악한 상태를 몇몇 교활한 사람들은 교묘하게 변명한다. 그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 사이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초보적인 규율이 마련되었으며, 강한 사람들은 비록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약한 형제들에게는 유익한 것이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도 약한 형제들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의식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려서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옛 사람들을 구별하시고, 옛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표식과 비유로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그런 외면적인 부속물이 없이 더 단순하게 가르치신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린아이가 그 연령의 능력에 따라 보호자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보호 하에서 제한을 받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갈 4 : 1-3). 그러나 우리는 어른같이 관리인의 보호에서 해방되었고 기초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있으리란 것과 그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 것인가를 확실하게 예견하셨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와 유대인들을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신 유대교적인 것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옛 백성과 새 백성과의 이 차이에 유의하면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리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요 4 : 23). 사실 그때는 줄곧 와 있었다. 새로운 경배자들이 옛날 경배자들과 다른 점은,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이를테면 여러 가지 의식으로 감싸서 비유적으로 나타냈지만 지금은 이런 의식들을 폐지하고 하나님을 더욱 단순하게 경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차이점을 혼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인정하신 질서를 뒤집어엎는다.

당신은 경험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도울 만한 의식을 전혀 주지 않는다는 말이냐고 물으리라. 그렇지 않다. 나는 그런 도움이 매우 필 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를 숨기는 것이 아닌 나타내는28 방법을 사용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혀 어렵지 않은 소수의 의식을 우리에게 주셔서 임재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더 많은 의식을 주셔서 임재하시지 않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는 임재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능력이 아닌 그를 알리려고 사용한 수단에 임재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수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적게 하고 지키기 쉽게 하며 표현을 존귀하고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실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다.

 

 

 

15. 부패한 의식들을 속죄의 제사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세상 사람들이 이미 감염되어 있는 치명적인 견해를 말하고 싶지 않다. 그 견해는, 의식은 곧 제사로서 그 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노염을 충분히 풀고 죄를 깨끗이 씻으며 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인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질적인 오류는 선한 일들을 부패시킨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에 관해서도 사람은 이 점에서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경솔하게 만들어 낸 행위를 그렇게 존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영생을 위해서 공로가 된다고 믿는 것보다 더 비열한 짓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위에 보상이 따르는 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그 행위를 순종의 증거로서 받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는 그 자체의 가치나 공로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높이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위, 그러나 사람이 성취하지 못하는 행위의 완전성이다. 우리가 행하는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에 의해 은혜를 받게 되며, 행위 자체를 본다면 우리의 순종은 약하고 부족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없는 행위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겠다. 나는 현재 논의되는 문제를 되풀이 하겠다. 즉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순종만을 주목하신다. 이것은 예언자를 통해서 언명하신 바와 같다. "내가‥‥‥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렘 7 : 22-23). 거짓된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사 55 : 2) 마찬가지로,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 : 13, 마 15 : 9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가련한 백성들로 하여금 저 너절한 외형적인 일에서 의를 구하도록 만든 사실을 결코 변명할 수 없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의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늘 심판대 앞에서 그 의가 자기들을 지켜 주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무대 위의 연극 장면같이 또는 마술의 주문같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들을 과시하는데, 이 또한 비난을 받아야 할 과오가 아닌가?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지 않을 경우 확실히 모두가 부패하고 유해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재 교황 제도하에서 사용하는 의식들은 가르침과 분리되고 순전히 무의미한 표징으로 사람들을 구속한다.

끝으로, (사람의 배는 간교한 기술자이기 때문에) 욕심 많은 사제들이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고안한 의식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작은 어떻든 간에 지금은 모든 의식이 더러운 이익에 팔려 있어서, 이 불경하고 모독적인 장사를 교회에서 일소하려면 그 의식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잘라 버려야 한다.

 

 

 

16. 일반적인 통찰과 그 적용

 

이 논술은 완전히 현대에 관한 것으로서, 내가 인간이 만들어낸 법에 대한 지속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느 시대에 막론하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하나 도 없다. 이 미신이 스며들어, 사람들이 자기가 조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경우 이 목적으로 만들어낸 모든 법은 즉시 타락해서 심한 폐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교훈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고 놀라도록 하겠다고(사 29 : 13- 14) 어느 한 시대뿐만이 아닌 모든 시대에 대하여 이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많은 경고를 멸시하고 치명적인 이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드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마음이 어두워져서 계속적으로 모든 미련한 짓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떠나서 모든 시대의 인간적 전통 곧 교회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배척해야 할 인간적 전통이 어떤 것인가를29 이해하고 싶다면 바로 우리가 위에서30 제시한 것이야말로 확실하고 분명한 정의가 될 것이다. 즉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법이며 사람들이 만든 법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규정하려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필요한 일들에 대한 규정을 만든다는 구실로 양심을 여러 가지 가책으로 속박하려는 것이다. 만일 이 두 가지 목적 중의 어느 하나에 또는 그 두 가지 목적에 다른 결점들을 첨가한다면 그 법들이 너무 많아서 복음의 명료성을 애매 모호하게 만들며, 그것은 진정한 경배 행위가 아니라 무익하고 무가치하고 전혀 건설적인 점이 없으며, 추하고 비루한 이익을 얻으려는 계략이며, 너무도 지키기 어려우며, 부끄러운 미신으로 더럽혀졌다는 이런 여러 가지 점을 본다면-이 법들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내포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7. 카톨릭의 교회법은 교회법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전통은 그들 자신에게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그들이 변명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교회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교회의 권위는 그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 점이 인정된다면, 그들의 전통은 성령의 계시요 하나님을 경멸하는 불경한 자가 아니면 그 전통을 멸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곧 나오게 된다. 또 그들은 큰 권위가 있어서 모든 일을 한다는 듯이, 그들의 관습의 적지 않은 부분이 사도들에게서 내려온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하나의 예만 본다면 사도들이 다른 상황에서 한 일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도들은 회의를 열고 회의의 결정으로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삼가도록 이방인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행 15 : 20,22).31

그들이 자기 선전을 위해서 교회의 이름을 사칭한다는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32 목전의 문제를 위해서 우리는 가짜 교회의 모든 거짓과 가면을 벗겨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 교회가 우리의 제일 관심사가 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교회의 표준에 일치하도록 우리 자신을 형성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날뛰며 새로운 법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옛날에 교회에 주신 법은 영원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 : 32).또 다른 구절에,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하셨다(잠 30 : 6).

이것이 교회에 하신 말씀이란 것을 그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금지된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감히 자기가 만든 것을 하나님의 교훈에 붙여서 섞었다고 그들은 자랑하니 이것은 교회의 반항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의 위선은 교회를 심히 모욕하는 것이며, 우리는 도저히 그 위선에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 심히 경박해서 하나님의 계명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미친 듯이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을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경솔한 인간적 충동을 생각할 때에 "교회"를 들먹이는 것은 거짓이요 가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를 경배하는 일과 구원의 교훈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것도 가담하지 말라고 보편 교회에 명령하셨으며, 이 금지의 말씀에는 조금도 복잡한 뜻이나 희미하고 모호한 점이 없다.

그들은 이것이 율법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요 그 후에 예언과 복음선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렇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예언과 복음은 가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보충한 것이라고 덧붙여 말한다.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아무것도 가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의 율법은 이를테면 그것을 둘러싼 것이 많기 때문에 모호한 점이 있지만, 아무것도 가감하지 말고 주께서 그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끝내는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더 분명한 교훈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과 복음에 아무것도 가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신 것을 왜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사람이 만든 의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신다고 옛날에 선언하신 주께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이며 그 말씀들은 항상 우리 귀에 쟁쟁해야 한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렘 7 : 22-23). 또,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렘 11 : 7). 이런 구절들은 그 외에도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출한 것이 다음 구절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 : 22-23). 그러므로 이 방면에서 교회의 권위를 빙자한 인간적 조작은 모두 불경건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조작을 교회에 돌리는 것이 거짓이란 것도 쉽게 증명될 수 있다.

 

 

 

18. 카릭의 교회법은 사도들이나 "사도적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이 교만하게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이 인간의 전통을 우리는 거리낌없이 공격한다. (우리를 미워하는 논적들은 거짓말로 부당한 비난을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멸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찬양인 순종의 찬양을 교회에 돌린다.33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한 한계를 넘은 것 같이 말함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주를 거역하게 만드는 자들로부터 크나큰 해를 입게 만든다. 나는 교회의 권한을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교회에 대한 주의 명령과 주의 명령을 지켜야 할 교회의 의무를 숨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파렴치이며 악한 생각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와 일치하기를 원한다면-또 그것이 마땅한 일이므로-주께서 우리와 교회에 무엇을 명령하셨는가를 알고 기억하는 것이 더욱 합당한 일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한 마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 주께 순종한다면 우리가 교회와 잘 일치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를 억누른 이 전통의 근원이 사도들에게 있었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사도들의 교훈 전체의 목적은 새로운 규정으로 양심에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과 우리 인간의 조작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또 역사 서적과 고대 기록을 조금이라도 믿을 수 있다면, 사도들은 카톨릭 교회가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을 몰랐을 뿐 아니라 들은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도들의 명령이 기록에 남지는 않았으나 관습과 관례에 의해서 전달되었다고 그들이 지껄이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생존시에는 사도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성령의 시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요 16 : 12-13).34 이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을 했다.35 여기서의 논증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 충분하겠다. 사도들이 오랫동안 알지 못한 큰 신비가 있었는데, 그 신비의 일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풍습이었고 (어떤 것은 유대인 혹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오래 전에 발표된 것이었다), 일부는 미련한(수영도 할 줄 모르고 글자도 모르는)36 신부들이 굉장히 빨리 집행하는 어리석은 몸짓과 무의미하고 작은 의식들이다. 이런 것을 신비라고 하여 그들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사실 어린아이들과 광대들도 적절하게 흉내내며 이 거룩한 의식들의 가장 적합한 집행자가 될 만하다. 역사 서적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본다면, 이 산더미 같은 의식들과 관습들은 갑자기 교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시대 직후에 생존했던 저 거룩한 감독들이 질서와 규율에 관한 일들을 만든 후 차례로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은 신중한 태도가 부족했으며 호기심과 욕심이 많았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신기한 일들을 생각해 내는 점에서 선임자들을 능가하려는 어리석은 경쟁심이 더욱 치열해졌다. 또 (신발명으로 후계자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애쓴 그들은) 자기의 발명품이 불원간 무용지물이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준수를 더욱 엄격하게 요구했다. 이 어긋난 열심37 때문에 이런 의식의 대부분이 생겼으며, 그들은 이런 것들을 사도적이라고 선전한다. 이 점은 역사 서적들도 증명한다

 

 

 

("사도적"이라고 사칭하는 무익한 의식들이 축적되었다 : 약한 양심들에 대한 의무. 19-22)

 

19. 사도 시대 이후에 축적된 무익한 의식

 

이른바 "전통들"을 완전히 나열해서 장황하게 떠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예만 들고자 한다. 사도 시대에는 주의 만찬을 아주 간단하게 지켰다. 사도 직후의 사람들은 이 신비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을 덧붙였으나 그것은 배척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련한 모방자들이 후계자가 되어 때때로 하나 둘씩 덧붙이다가 마침내는 현재 미사에서 보는 사제복과 성찬 장식과 몸짓과 그 밖의 필요 없는 장치 전체를 고안해 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일반 교회 내에서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한 일을 옛날 사람들은 사도들이 물려준 것으로 확신했다고 항변한다. 그들은 이 점에 대한 권위로서 어거스틴을 끌어댄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겠다. "온 세계가 지키는 일들을 우리는 사도들 자신이나 전체 회의들이 제정한 것으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사도들과 전체 회의들은 교회 내에서 가장 건전한 권위를 가졌다. 예컨대 그런 행사들은 주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과 기타 유사한 사건들을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매년 의식을 행하여 기념한다."38 어거스틴이 말한 예가 아주 적은 것을 볼 때에, 그는 믿을 만한 권위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 당시에 통용된 관습들 즉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단순하고 지나치게 빈번하지 않고 정중한 의식들만을 존경하려고 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아내지 못하겠는가? 이것과 카톨릭 교회에서 모든 작은 의식까지도 사도적인 것으로 인정하라고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20. 어거스틴의 말을 해석한다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한 가지 예만 들겠다. 그들의 성수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곧 "사도들에게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치 역사 서적들이 이 발명을 어떤 로마의 감독에게 돌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39 그 로마 감독이 사도들에게 물어 보기만 했던들 그런 이상하고 부적절한 상징으로 세례를 더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 역사서들이 기록한 것처럼 성수의 기원이 오래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말에, 그 당시의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발 씻으신 것을 엄숙하게 모방하는 것은 그 의식이 세례의 일부라는 인상을 줄 염려가 있다고 해서 피했다는 것이 있다.40 이 말을 보면 세례와 비슷한 씻기는 일이 당시에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하여튼 나는 세례가 매일 상징적 행위로 그것을 회상함으로써 반복된다고 하는 생각을 부정한다. 이런 관습은 사도들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나는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다른 일들을 사도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겠다. 그는 추측만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며 이런 중대한 문제를 추측만을 근거로 해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끝으로, 어거스틴이 말한 일들이 사도들에게서 전래된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더라도 신자가 자유로운 양심으로 채용할 수 있는 경건한 행위(무익할 때에는 폐기할 수 있는 행위)를 정하는 것과 어떤 법을 만들어서 올가미같이 양심을 잡아 속박시키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전통들의 창시자가 누구였든 간에 현재 그것이 큰 폐해로 타락한 것을 보았으므로, 우리는 창시자에 대한 경의를 훼손하지 않고서도 그 전통들을 당연히 폐지할 수 있다. 그런 전통들을 권했을 때에 언제까지고 변하지 말라고 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21. 사도행전 15 : 20에 있는 명령

 

그들의 압제를 변명하기 위해 사도들의 선례를 인용해도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원시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없는 결정을 했고, 그 결정으로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행 15 : 20)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일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면 그들의 후계자들이 정세가 요구하는 때마다 같은 관례를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냐고41 말한다.

그들이 다른 일에도 이 일같이 항상 사도들을 따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사도들은 거기서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언하며 이를 강력한 논리로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 회의에서 베드로는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게 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 언명했으니(행 15 : 10), 만일 그 후에 그런 멍에를 지우는 데 찬성했다면 그는 자기 견해를 뒤집는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도들이 자기들의 권위로, 우상의 제물이 되었던 고기와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고 이방인들에게 명령했다면 그것은 멍에를 메우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금지했기 때문에 여전히 양심에 의혹이 있다. 그러나 그 결정 자체의 진실한 뜻에 유의한다면 이 의혹은 쉽게 해소시킬 수 있다. 그 결정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이방인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율법을 지키라고 그들을 괴롭히거나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다(행 15 : 19,24,28). 여기까지는 우리의 입장에 유리하다. 그러나 곧 예외가 따른다(행 15 : 20,29). 이것은 사도들이 정한 새로운 법이 아니라 사랑을 해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명령이다. 이방인의 자유에서 일점 일획도 제거하지 않고, 다만 형제들에 대해서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며 자유를 남용해서 형제들을 넘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할 뿐이다. 이방인들은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둘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역시 특수한 일을 명령한다. 그 시대에 적합한 범위 내에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일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에 자기들의 생각으로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않는다.

 

 

 

22. 약한 형제들에 대한 의무

 

이것은 마치 아직 기초가 확립되지 않은 교회들을 맡은 목사들이 신자들을 향해서, 함께 있는 약한 형제들이 강하게 될 때까지는 금요일에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고기를 먹지 말라, 거룩한 날에 공공연히 일을 하지 말라는 등의 당부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일들은 미신이 아닌 이상 그 자체로는 무해 무익한 것이지만, 그 일을 함으로써 형제들을 넘어지게 할 경우에는 반드시 죄가 된다. 현재 상황으로는 형제 앞에 이렇게 나타난다면 반드시 그들의 양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게 된다.

여기서 이 목사들은 주께서 명백하게 금지하신 대로 넘어지게 하는 일을 미리 방지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모략 중상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목사들이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죄를 짓는 것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역설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주께서는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당신들에게 명령하신다. 당신들이 우상의 제물이 되었던 고기와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먹으면 반드시 형제들을 넘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들에게, 남을 넘어뜨리면서까지 먹지는 말라고 주의 말씀에 따라 명령한다." 사도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바울이 제일 잘 증명한다. 그가 쓴 글은 회의의 결정과 확실히 일치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아노라‥‥‥그러나‥‥‥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 : 1,4,7,9). 이 일들을 잘 생각하는 사람은 후에 사도들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전제를 변명하는 자들의 위장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자들은 마치 사도들의 명령이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초가 된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항변에 대한 이 답변을 그들이 인정한다고 자백하지 않고 도망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슨 권리로 그들이 감히 사도들의 명령을 무시했는가를 내게 대답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방지하려고 한 가벼운 범죄와 분쟁의 위험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법은 그 목적에 의해서 판단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법은 사랑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고 사랑에 속한 것을 명령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 법을 어기는 것은 곧 사랑을 유린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조작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첨가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법을 만든 시대와 당시의 관습에 적응한 것뿐임을 그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예배에서 쓰는 관습과 인간의 창안을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께서 배척하신다. 23-26)

 

23.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증거와 모순된다

 

이런 법들은 우리들에게 백 배나 더 부당하며 유해한 것임에도 불 구하고 그들은 예외없이 복종하라고 주장한다. 오류에도 찬성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문제는, 우리는 속박된 자들이므로 우리의 지도자들의 가혹한 명령을 참아야 하며 또 우리에게는 그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께서는 그의 말씀의 진리를 그들에게 대립시키시며 우리를 이런 속박에서 해방시켜, 그의 거룩한 피로 사신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다(고전 7 : 23). 주의 피의 은혜는 주께서 말씀으로 여러 번 확인하셨다. 악의에 찬 그들은 그 주장과는 반대로 우리의 신체에 중대한 압박을 가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에서 자유를(즉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빼앗고 노예처럼 학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점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이 묵과하겠다. 그러나 우 리는 주께서 자신의 것이라고 엄격하게 주장하시는 그 나라를 주에게서 빼앗는 것을 얼마만큼 중대한 일로 생각하는가?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서 주를 경배하는 것은 곧 주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다. 주를 경배하는 법에 대해서 주 자신이 유일한 입법자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일을 과소 평가하지 않도록, 주께서 이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시는가를 주의 말씀에서 들어보자. "이 백성이‥‥‥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 : 13-14). 다른 구절에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 : 9)라고 한다. 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러 가지 우상 숭배로 부패했을 때 그 모든 악의 원인은 이 불순한 혼합에 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새로운 의식들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역사를 보면 바빌로니아의 왕이 사마리아에 데려온 이민들은 그 땅의 하나님의 판단과 법을 모르기 때문에 야수의 밥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의식에 있어서 죄를 범한 것은 아니나 주께서는 그들의 화려한 허식을 기뻐하시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의 말씀에 없는 것을 생각해 내서 예배법을 어겼기 때문에 주께서 벌을 내리셨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벌에 놀라서 율법에 정한 의식들을 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배는 아직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도하고 경외하지 않기도 했다고 두 번 반복하였다(왕하 17 : 24-25, 32-33,41). 이 기사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일부는 우리의 조작품을 섞지 않고 그가 명령하신 대로만 경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경건한 왕들을 자주 칭찬하는 것도, 그들이 모든 교훈대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왕하 22 : 1-2, 왕상 15 : 11, 22 : 43, 왕하 12 : 2, 14 : 3, 15 : 3, 15 : 34, 18 : 3 참조). 그뿐이 아니다. 어떤 조작된 예배에서는 비록 불경한 점이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역시 하나님의 교훈에서 떠난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것을 엄중하게 비난하신다.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모형도를 얻어다가 만든 단은(왕하 16 : 10) 성전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 같았다. 왕은 이 단에서 유일신에게 제물을 드리며 종래에 있던 단보다 더 훌륭한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인간의 조작품을 사용하는 것은 불순한 부패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는 왕의 참람한 처사를 미워하셨다(왕하 16 : 10-18).42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될수록 우리의 방자한 시도는 더욱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고 하신 그 예루살렘에 므낫세 왕이 새로운 단을 쌓은 것은(왕하 21 : 3-4) 그의 범죄를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권위를 공공연하게 무시했기 때문이다.

 

 

 

24. 하나님은 사악한 예배를 미워하신다

 

사람의 계명으로 주를 경배하는 자들을 주께서 놀라게 하시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시며(사 29 : 13-14), 사람의 교훈으로 경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마 15 : 9) 언급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종교 문제에서(즉 하늘의 지혜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만을 의지하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인간성의 고집에 따라서 행하는 패악한 의식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데에는 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이 정한 법에 따라 경배하는 자들도 법에 복종하는 점에서는 겸손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복종하는 법을 하나님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들의 전통에 속지 말라고(골 2 : 4이하) 강경하게 경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그것을 ejqeloqrhskeiva라고도 부른다. 자의적 숭배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사람이 고안한 종교라는 뜻이다(골 2 : 23,22). 하나님만이 지혜롭기 위해서 우리의 지혜와 모든 사람의 지혜가 어리석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사람이 고안한 빈약한 관습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리라고 기대하며 할 수 없다는 듯이 가짜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지 저 (바른)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수백 년 동안 또 우리가 기억하는 한, 조물주보다 피조물이 더 많은 권위를 가진 곳에서는(롬 1 : 25 참조) 그렇게 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어떤 이교보다도 더 많고 더 어리석은 미신이 종교를 (이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다면) 더럽히고 있다. 사람의 지성은 참으로 사람과 같은 육적이며 우매한 짓 외의 무엇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25.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반증을 논박한다

 

또한 미신 지지자들은, 사무엘이 라마에서 희생을 드린 것은 율법에 없는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기뻐하셨다고 한다(삼상 7 : 17). 이 주장은 논박하기 쉽다. 사무엘이 쌓은 단은 유일한 단에 대립하는 둘째 단이 아니었고 또 언약의 궤가 있을 처소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살고 있던 곳을 가장 편리하다고 선택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가감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지하셨으므로(신 4 : 2), 이 거룩한 예언자에게 거룩한 의식을 새로 만들어 내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마노아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비상하고 특별한 경우였다고 말하려 한다(삿 13 : 19). 그는 한 사사로운 개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렸고 또 하나님의 가납도 없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자기의 경솔한 충동적인 생각으로 하지 않고 하늘의 영감을 받아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노아에 못지 않은 기드온은 죽을 인간들이 생각해 낸 예배법을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증명하는 현저한 예가 되었다. 기드온이 만든 에봇(ephod) 때문에 그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이 큰 화를 입었다(삿 8 : 27). 요컨대 경박한 조작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참으로 신성한 예배를 더럽힐 뿐이다.

 

 

 

26.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러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 사람들이 백성에게 지운 견딜 수 없는 짐을 그리스도께서 견디라고 하신 것은(마 23 : 3) 무슨 까닭이냐고 그들은 묻는다.43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마 16 : 6) 무슨 까닭인가? 마태의 설명에 의하면 "누룩"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섞어 넣는 사람의 교훈이었다(마 16 : 12). 사람의 교훈은 일체 멀리 피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 점을 볼 때에, 저 다른 구절에서도 바리새인들의 독특한 유전으로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원치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또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도 순순하게 해석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은 나오지 않는다.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통렬히 비난하셨고, 바리새인들의 생활에는 본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행하라고 먼저 청중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교사들의 나쁜 행실 때문에 교리까지도 멸시하지 않도록 백성에게 경고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치만을 말해서는 믿지 않고 항상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요구하므로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인용하겠다. "주의 양떼는 감시인이 여럿이다. 아들도 있고 삯꾼도 있다. 아들인 감시인은 진정한 목자다. 그러나 삯꾼도 필요하다. 지상의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린다. 양들이 삯꾼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삯꾼을 통해서 목자를 따르는 것이다(요 10 : 11-13 참조). 삯꾼은 주께서 스스로 지명하신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것은 행하지 말라(마 23 : 2-3). 주의 말씀은 '삯꾼들을 통해서 목자의 음성을 들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가르치신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법을 가르치려 한다면 듣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44 이것이 어거스틴의 말이다.

 

 

 

(교회 정치와 예배를 바르게 정리하는 길, 예절과 사랑과 자유로운 양심. 27-32)`

 

27. 교회법의 필요성

 

사람의 유전은 사람의 양심에 불경건한 속박을 가하는 것이며 사람 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무지한 사람들은 교회의 질서를 형성하는 모든 법을 말살하려고 하는 예가 많다. 그들의 과오도 여기서 논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이 점은 매 우 오해하기 쉽다. 두 가지 종류의 규칙들이 어떻게 다른가는 처음 보아서는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유사점 때문에 속는 사람이 없도록 이 문제 전체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우선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인간 사회는 공공의 평화 촉진과 화합의 유지를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조직될 필요가 있다.45 그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거래에는 언제든지 어떤 절차가 있으며, 공공 생활의 예절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성 자체를 위해서도 그 절차는 필요하다. 이 점은 특히 교회에서 준수되어야 한다. 모든 일이 정연한 법 아래 있을 때에 교회는 가장 잘 유지되며, 화합이 없으면 전혀 교회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한(고전 14 : 40) 바울의 명령에 성의껏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습과 마음은 각양 각색이며 사람들의 판단과 성향은 상충되므로 명확한 법의 규정이 없으면 견고한 조직을 이룰 수 없다. 또 일정한 형식이 없으면 절차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도움이 되는 법들을 배척하지 않으며, 심지어 교회에서 법을 없애 버리면 곧 교회의 근육들이 분해되어 완전히 불구가 되며 결국 흩어지고 만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바울의 요구도 연합의 유대라고 할 만한 규정들을 첨가해서 질서와 예절을 확립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규정에서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규정이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따라서 여러 가지 가책으로 양심을 속박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규정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연결시키며 따라서 규정을 지키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28. 올바른 교회법의 문제

 

그러므로 불경건한 교회법 즉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종교를 모호하게 만들며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는 교회법과46 올바른 교회 규정을 서로 구별하는 아주 훌륭하고 확실한 표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교회법의 목적이 다음의 두 가지나 또는 그 중의 하나인 것-즉 신자들의 성회에서는 모든 일이 적절하고 위엄 있게 행해지고 또 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애와 절도의 유대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구별의 표식을 알 수 있다. 법은 공공의 예절을 위해서 만든 것임을 깨달을 때, 인간의 조작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측정하려는 자들이 빠진 미신이 없어진다. 또 법이 공통적인 관습과 관치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전통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양심에 큰 공포를 던져 주는 법의 의무와 필연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우리가 함께 노력해서 서로 사랑을 배양하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명령한 예절과 질서의(고전 14 : 40) 뜻을 더욱 분명히 정의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거룩한 사물에 대한 경건한 생각을 조성하기 위해서 의식을 행할 때에 이러한 보조 수단에 의해서 우리의 경건한 마음이 고무되도록 하는 것이 예절의 한 목적이다. 또 하나의 목적은 모든 존경할 만한 행동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겸양과 근엄한 태도가 크게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질서에 관해서 첫째로 중요한 점은, 책임자들은 훌륭하게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올바른 권징에 순종하는 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질서 정연하게 교회를 세운 후에는 교회의 평화와 평온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29. 예배에서의 진정한 예절 ; 허식을 피하라

 

따라서 우리는 헛된 즐거움만 있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고 말한다.47 이런 예를 우리는 교황주의자가 의식에서 쓰는 연극적인 도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는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가면만이 있을 뿐 유익이나 결실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예절은 거룩한 신비에 대해서 경외를 표시하는데 적합한 것이며 경건의 합당한 연습이고 적어도 예배 행위에 합당한 장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실이 없지 않고 거룩한 사물에 대해서 고도의 겸양과 경건과 경외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신도들에게 가르치게 될 것이다. 의식이 경건의 연습이 되려면 우리를 직접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우려는 질서는 일시적인 호화로움에 불과한 너 절한 허식이 아니라 모든 혼란과 야만성과 불순종과 소란과 분쟁을 제거하는 조치를 의미한다.

처음 종류의 예는 바울의 글에 있다. 비속한 술잔치와 주의 성만찬 을 혼합해서는 안 되고(고전 11 : 21-22) 여자가 공중 앞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다(고전 11 : 5). 우리의 일상 관습에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컨대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주의 성례를 집행할 때 경솔하게 하지 않고 정중하게 하는 것,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 합당한 예를 갖추는 것 등 그밖에도 이 종류에 속하는 관습들이 있다.48

둘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공중 기도와 설교와 성례를 위해서 시간을 정하고 설교 시간에는 정숙해야 하며 일정한 자리에 앉으며 찬송을 함께 부르고 일정한 날을 정하여 성례를 거행하며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라고(고전 14 : 34) 한 것 등이다. 특히 권징을 유지하기 위한 일들, 예컨대 교리 문답과 교회의 견책과 출교와 금식과 그 밖의 유사한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룩하고 유익한 교회법이라고49 인정하는 것은 그 전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식에 관한 것이요, 둘째는 권징과 화평에 관한 것이다.

 

 

 

30.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있다. 한 편에서는 거짓 주교들이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자기들의 불경하고 독재적인 법을 변명하려 하며, 다른 편에서는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폐단을 듣고 거룩한 법이 있을 여지를 일체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성경에서 이끌어 낸 법들 곧 인간이 만들기는 했으나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법들만을 인정한다고 언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엄숙한 기도를 드릴 때 무릎을 꿇는 데 대해서, 문제는 그것이 사람의 전통인가-즉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가 주의해서 지키라고 한(고전 14 : 40) 예절의 일부라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에게서 왔다. 그러나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암시된 것을 표시한다는 의미에서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이 한 가지 예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 종류 전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판정할 수 있다. 즉 주께서는 진정한 의의 글자 전체와 그의 위엄 앞에 드리는 예배의 모든 국면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한 말씀에 충실히 포함시키며 분명히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는 주의 말씀만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외형적인 규율과 의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자세히 명령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이런 일은 시대의 형편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시고 한 형식이 모든 시대에 적합하다고 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전반적 규정 즉 교회의 질서와 예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표준에 따라 결정하자는 것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끝으로, 주께서는 특수한 지시를 하지 않으셨으며 이런 일들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도 민족과 시대의 풍습에 여러 가지로 순응해야되기 때문에,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적인 관습을 변경 또는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제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물론 충분한 이유 없이 경솔하고 갑작스럽게 개혁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엇이 해가 되고 무엇이 덕이 되는지는 사랑이 가장 잘 판단할 것이다. 사랑을 인도자로 삼으면 모든 일이 안전할 것이다.50

 

 

 

31. 교회법과 관련된 속박과 자유의 문제

 

이제 이 표준에 따라 제정된 규정들에 대해서 자유로운 양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물론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 언제든지 순종한다는 경건한 심정으로 지켜야 한다. 규정을 경멸해서도, 태만한 부주의로 인하여 빠뜨리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물론 교만이나 고집으로 공공연하게 어기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이런 극도의 주의와 경계에 무슨 양심의 자유가 있겠는가? 실로 이것들은 우리를 속박하는 영원이고 정된 제재 규정이 아닌 인간적인 연약을 돕기 위한 외형적 초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문제는 아주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가 모두 이런 초보적 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사랑을 함양할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점은 위에서51 든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외출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면 종교는 여자의 수건에 있다는 말인가? 잠잠 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신성하므로 그것을 어기면 큰 죄가 된다는 말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나 시체를 묻는 것이 거룩한 의식이어서 그것을 어기면 반드시 죄가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웃을 돕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 머리에 쓸 틈이 없을 때, 벗은 머리로 이웃에게 달려가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잠잠하고 있는 것이 합당한 곳이 있는 것과 같이, 발언하는 것이 합당한 곳도 있다. 병으로 인해서 무릎을 굽힐 수 없는 사람은 서서 기도를 드려도 전연 무방하다. 끝으로 수의가 없거나 관을 운반할 사람이 없을 때, 죽은 사람을 묻지 않고 시체를 썩을 때까지 두는 것보다는 적당한 때에 묻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한 지방 고유의 관습이나 인정이나 중용의 규범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지시한다. 사람이 잊어버리거나 경망하여 이런 규례에서 어긋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멸하기 때문이라면 이런 고의적인 행동은 비난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배 일시와 예배 장소의 건축물, 어느 날 어느 시편을 부를 것인가 하는 등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 단,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날과 시간을 정해 두는 것과 모든 사람을 수용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는 것이 편리하다. 공공 질서에 관계된 사항을 각 사람이 마음대로 바꾸도록 버려 둔다면 이런 세밀한 일에서 생긴 혼란이 큰 분쟁의 씨가 될 것이다.

이 문제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해서 각 개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좋아하는 예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어느 누가 큰 소리로 불평을 말하며 없는 지혜를 있는 체 한다면, 그는 주 앞에서 어떤 이유로 그의 신경 과민을 변호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변론하는 것은 우리의 풍습도 아니요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는 일이라고 한(고전 11 : 16) 바울의 말을 우리는 만족하게 생각해야 한다.

 

 

 

32.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순수한 이 관습을 부패시키거나 흐리게 만드는 오류가 잠입하지 않도록 심히 주의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정을 세우든 간에 분명히 유익하다는 것이 나타나야 하고 수효를 아주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충실한 목사의 교훈으로 패악한 의견이 나올 길을 막아야 한다. 이런 점을 앎으로써 얻는 결과는 첫째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각자의 자유를 지키며 동시에 각 사람은 위에서 말한 예절이나52 사랑에 대한 고려가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 그의 자유에 다소의 제한을 가하게 될 것이다.53 둘째로, 우리는 이 일들을 지키더라도 미신에 빠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까다롭게 준수를 요구하지 않고, 의식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대한 더 좋은 예배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외형적인 규율의 차이로 교회끼리 서로 멸시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여기서 영원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규정의 운용과 목적을 전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두게 될 것이다. 만일 교회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일부 규정의 변경뿐만 아니라 지켜오던 규정의 폐기까지도 용인할 것이다. 다른 환경 하에서는 불경건하지도 않고 예절에 어긋나지도 않는 의식일지라도 현 상황하에서는 기회를 보아서 폐기하는 것이 합당하리라는 사실을 우리의 이 시대는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과거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무지해서) 교회들은 지금까지 부패한 견해와 완강한 집념으로 의식에 집착했다. 따라서 옛날에 의식을 제정했을 때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 자체로는 현저히 불경건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런 여러 가지 의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교회에서 무서운 미신들을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없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재판권의 남용

 

(재판권과 권징 : 열쇠의 권한과 국가 행정. 1-5)

 

1. 교회 재판권의 근거는 열쇠의 권한에 있다

 

질서 정연한 교회 상태에서는 가장 중요한, 교회 권한의 셋째 부분이 아직 남아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재판권이다.1 그런데 교회의 재판권은 전적으로 도덕적 권징에 관한 것이며 이 점은 곧 논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 집권자와 정치 제도가 없으면 그 도시가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도 (이미 말한 것이지만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영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국가 행정 조직과 다른 것이지만 국가 행정 조직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 재판권은 그 영적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형성된 질서에 불과하다.

이 목적을 위하여, 처음부터 교회에 재판소를 설립하고 도덕적 문제에 대하여 견책을 하고 죄악을 조사하며 열쇠의 직책을 다하게 했다.2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다스리는 직분을 언급한 것은(고전 12 : 28) 이 제도를 지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서에서도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라고 했다 (롬 12 : 8). 그는 여기서 국가 관리를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그때에는 신자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었다) 목사들과 협력해서 교회의 영적 통치를 담당한 사람들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 디모데서에서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과 말씀은 선포하지 않고 통치하기만 하는 장로들을 구별했다(딤전 5 : 17). 이 둘째 종류의 장로들은 분명히 도덕적인 문제를 감독하며 열쇠 권한을 사용하는 일을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이 권한은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열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적인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신자들의 이름으로 엄격하게 경고하며,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서 듣지 않을 때에는 신자의 공동체에서 제외해 버리라고 명령하셨다(마 18 : 15-18). 그런데 이런 경고와 충고는 그 원인을 조사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재판소와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열쇠의 약속을 무효로 만드는 것과 출교를 폐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어느 정도의 재판권을 부여해야 한다. 마태복음 16 : 19과 요한복음 20 : 23과는 달리 이 구절은 일반교리에 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의회의 재판권이 장차 그리스도의 양떼에 옮겨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정치 제도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교회 내의 제도로 설치하시고 엄중한 제재력을 부여하신 것이다. 또 이것은 합리적인 처사였다. 그 이유는 그런 권한이 없으면 멸시를 받는 교회의 판정을 경솔하고 미련한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 조금씩 다른 두 가지 일을 설명하는 것을 독자들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매고 푸는 데 대한 구절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마태복음 16장인데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후에, 즉시 그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승인되리라고(마 16 : 19) 첨부하셨다. 요한복음에서도 사도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쉰 후에(요 20 : 22)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 : 23).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알기 쉽고 무리하지 않고 편견이 없는 해석 즉 자연스럽고 순조롭고 쉽게 해석을3 하겠다.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데 관한 이 명령과 매고 푸는데에 관해서 베드로에게 하신 약속은 전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만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를 맡기실 때에 매고 푸는 직책도 주셨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노예였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에 의해서 풀려 자유를 얻으며(롬 3 : 24 참조), 그리스도를 해방자와 구속자로 인정하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사슬에(유 6 참조) 매이리라는 것이 복음의 전체가 아닌가?

모든 민족에게 가서 이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을 때에(마 28 : 19 참조), 주께서는 그 명령이 자기의 것이며 자기에게서 나온 것임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그 명령을 이 고귀한 증언으로 높이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도 자신들과 그들의 선포를 받을 사람들에게 큰 힘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들이 전도 활동을 할 때에 그 사명에 대해서 항상 완전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와 염려와 곤란과 위험을 무릅써야 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피까지 흘려야 했다. 그들의 확신이 허망하지 않고 강력한 것임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즉 이런 근심과 어려움과 위험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전세계가 그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공격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의 장본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들에게 주신 교리의 진실성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확증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동시에 청중에 대해서는, 복음의 교리는 사도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며4 땅에서 난 음성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음성이라는 것을 틀림없이 확증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죄의 용서와 영생의 약속과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사도들은 심부름하는 것뿐이며 그들의 입을 도구로 삼아 모든 일을 말하고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확언하셨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진정한 약속이며 그들이 선언한 정죄는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이라고 확증하셨다. 그뿐 아니라 이 증언은 모든 시대에 주신 것이며 또한 언제든지 확고 불변해서, 어떤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든 간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언이란 것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확신할 수 있게 한다. 이 하나님의 선언은 최고 심판대에서 발표하시고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하늘에서 확고 불변하게 준비되었다. 우리는 그 구절들에서 열쇠의 권한은 복음 선포에 불과하며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권한이라기보다 심부름이라고 단정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고 그의 말씀에 주셨으며, 사람들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2. 매고 푸는 권세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다른 구절은 우리가 말한 대로 매고 푸는 권세에 관한 것이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 : 17-18). 이 구절은 처음 구절과(마 16 : 19)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고 약간 그 뜻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아주 달라서 서로 연결이 없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구절에는 같은 점이 있다. 즉 두 구절은 다 일반적인 발언이며, 매고 푸는 같은 권세(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와 같은 명령과 같은 약속이 두 구절에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즉 처음 구절은 특히 말씀을 맡은 자들이 실천하는 전도에 관한 것이고 둘째 구절은 교회에 맡겨진 출교 규정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출교시킨 사람에 대하여 구속력이 있다. 그를 영원한 멸망과 절망에 집어넣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과 품행을 책망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정죄를 받으리라고 항상 경고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연합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판정을 완강하게 무시하거나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죄된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신자들에 의한 이런 판단이 주님 자신의 선고를 발표하는 것에 불과하며 신자들이 지상에서 판정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그대로 인정된다고 확언하신다.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패악한 사람들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은혜 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판단할 뿐이며, 하나님의 법은 불확실하거나 땅에서 생긴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말씀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과오를 범하거나 하나님의 판단에 어긋날 수 없다.

나는 이 두 구절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또 다르게 해석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도취에 빠진 이 미친 사람들은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삼아서 혹은 고해를, 혹은 출교를, 혹은 재판권을, 혹은 입법권을, 혹은 사면을 무분별하게 확립하려고 노력한다. 참으로 첫째 구절을 인용해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확립하려 한다.5 이와 같이 그들은 열쇠를 어느 자물쇠나 문에 마음대로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일평생 자물쇠 제조업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3. 국가의 재판권과 교회의 재판권

 

이 모든 일은 임시적인 것이었고 집권자들이 우리의 종교를 믿지 않았을 때에만 통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6 이 생각은 그릇된 것인데, 그들은 교회의 권한과 국가의 권한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 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형벌을 주며 강요하는 칼의 권한 즉 강제적 구속력이 없다. 집권자와 같이 투옥이나 기타 형벌을 가할 수 없다. 문제는 죄인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자신을 스스로 징계하여 회개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매우 다르다. 당연히 교회는 국가가 할 일을 담당하지 않으며 국가는 교회가 행하는 일을 할 수 없다. 다음의 예가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할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있을 때 질서가 있는 도시에서는 그에게 투옥의 형벌을 가할 것이다. 음행하는 자라면 비슷하거나 더 엄중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법률과 관리와 외형적인 정의는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불평불만을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여기서 그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성만찬에 참가시킨다면 그리스도와 그의 신성한 제도에 손상을 입히게 될 것이다. 또 불미한 행동으로 교회에 누를 끼친 사람은 엄숙하게 회개를 선언함으로써 자기가 지은 죄를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 도리상의 당연한 요구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논거는 빈약하다. 그들에게는 이런 기능을 수행할 행정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교회에 맡기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정관리들은 게으르며, 데오도시우스 황제7 와 같이 자신이 징계를 받아야 할 경우도 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 전체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반대자들이 말하는 대로한다면, 지금은 목사들이 분명한 비행도 책망하지 말고 질책이나 비난, 책망 등도 전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법과 칼로 이런 일들을 시정해야하는 그리스도인 관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정관리가 형벌과 신체적 제재로 교회 내에서 죄악을 씻어 버리는 것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관리들을 도와서 죄를 짓는 사람이 점점 적도록 힘써야한다. 그들의 기능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서로가 연결되어 도와야한다.

 

 

 

4. 교회와 그리스도인 관리

 

진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마 18장) 보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기에 묘사된 것이 일시적인 교회 제도가 아니라 확정된 영구적인 제도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고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관리에게 고발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관리들이 교회의 직분을 맡는다면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년 또는 수년 동안을 위한 약속이라고 해야 하는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운운하셨다(마 18 : 18).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새로운 제도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유대 백성의 고대 교회에서 항상 지켜오던 것을 본받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교회가 처음부터 행한 대로 영적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교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하셨다. 또 이 점은 모든 시대가 똑같이 확인한다. 황제들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을 때에 이 영적 재판권은 즉시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다만 국가의 권한을 손상하거나 그것과 혼동되지 않도록 조절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옳은 처사였다. 경건한 관리자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복종하는 일에서 자기를 제외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은 이런 복종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결코 교회의 판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암브로시우시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황제에게 더 큰 명예가 있는가?"8 선한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관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이 권한을 빼앗는 사람들은, 그릇된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패하게 할뿐만 아니라 사도 시대 이후에 있었던 모든 거룩한 감독들이 관리의 영예와 직책을 잘못된 구실로 빼앗았다고 비난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5. 교회 재판권의 영적 성격

 

또한, 우리는 이전에 교회의 재판권이 어떻게 바르게 행사되었으며 어떻게 남용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만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폐지해야 할 고대 관습과 회복해야 할 고대 관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교회 재판권의 목적은 죄악을 막으며 발생한 불상사를 제거하는 것이다. 재판권을 행사할 때에 고려해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즉 이 영적 권한은 첫째, 칼의 권리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며 둘째, 한사람의 결정이 아닌 합법적인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9 행사 되어야한다. 교회가 비교적 순수했을 때에는 이 두 가지 점을 모두 준수했다(고전 5 : 4-5).

그런데 거룩한 감독들은 권한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벌금이나 투옥이나 그 외의 국가의 벌칙을 쓰지 않고 오직 주의 말씀만을 사용했다. 이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교회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벌, 이를테면 그 최후의 벼락같은 벌은 출교 선고이며 이것은 불가피한 때에만 사용한다. 이 처벌을 행하는 데에는 물리적 강제력이 필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힘만을 믿는다. 요컨대 고대 교회의 재판권은 목사들의 영적 권한에 대해서 바울이 말한 것을 선언함으로써 실천된 것에 불과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 : 4-6). 이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므로, 이 교훈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가족에 속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을이 교훈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사적으로 경고하거나 더 엄격하게 시정해야 할 사람들을 소환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 성만찬의 위대한 신비를 모독하게 될 사람들이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외인들을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고전 5 : 12),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 견책을 받는다고 하면서 그 때에는 신자 중 아무도 면제되지 않는 심판이 실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교들의 부당한 권력에서 발생된 폐해들. 6-10)

 

6. 고대 교회에서는 어느 개인이 법을 집행하지 않았다

 

이 권한은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10 한 사람이 잡고 마음대로 행사한 것이 아니라 장로회의 수중에 있었다. 장로회와 교회와의 관계는 시의회와 시와의 관계와 같았다. 키프리아누스는 당시에 이 권한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때 대개 성직자 전체를 감독과 관련시켰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는, 성직자들이 다스린다는 것은 사실 심의에서 일반 신자들을 제외시킨다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감독이 된 후로 성직자들의 충고와 신자들의 찬성을 얻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11 그러나 일반적인 관습으로는 교회의 재판권이 장로 회의를 통해서 행사되었고, 이 장로에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12 두 종류가 있었다. 어떤 장로들은 가르치는 일에 임명되었고 어떤 장로들은 도덕적인 문제 감찰하였다. 이 제도가 점점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해서 벌써 암브로시우스 시대에는 성직자들만이 교회 재판에 참석했다. 그는 여기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다. "고대의 회당과 그리고 그 이후의 교회에는 장로들이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떤 무관심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관습이 없어졌다. 아마 자기 혼자서 훌륭한 체하려는 지식인들이 나태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교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3 적어도 그 당시에는 이 제도가 아직 용인될 수 있었지만 저 거룩한 분은 더 좋았던 상태가 다소 부패한 것을 이와 같이 분하게 여겼다. 만일 그가 현재의 폐허에서 옛 건물의 흔적조차 거의 찾을 수 없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통탄을 할까? 우선 주교는 법과 권리를 침범하면서 교회에 주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원로원을 축출하고 집정관이 단독으로 권위를 잡은 것과 같다 그러나 주교가 다른 사람들보다 영예가 더 높은 것과 같이 회의의 권위는 개인의 권위보다 더 높다. 공동체의 권한을 한 사람이 자기에게 옮기고 전횡의 길을 열며 교회에 속한 것을 강탈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제정하신 회의를 억압하고 해산했다는 것은 심히 악한 비행이었다.

 

 

 

7. 재판권과 권징의 타락

 

그러나 (한 가지 폐단은 다른 폐단을 생기게 하는 일이 많으므로) 주교들은 교회 치리를 자기들이 보호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경멸하여,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판사"들이다.14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 일을 맡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은 세속 재판관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맡은 소송은 지상의 사물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여전히 "영적 재판권"이라고 부른다. 다른 폐단은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법정을 뻔번스럽게도 "교회의 법정"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하며 출교를 선언한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을 우롱하고 있다. 어떤 빈민이 빚이 있을 때에 그를 소환한다. 출두하면 유죄 판결을 받는다. 판결을 받고도 빚을 갚지 않으면 경고를 받는다. 두 번째 경고가 있은 다음의 단계는 출교다. 출두하지 않으면 재판을 받으라는 경고를 받는다. 지체하면 경고를 받고 곧 이어 출교를 당한다. 묻노니,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나 고대의 관습이나 교회 절차와 조금이라도 같은 점이 있는가?

그러나 죄악을 책망하기도 한다. 즉 그들은 음행, 방탕, 만취, 기타 유사한 비행들을 버려둘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묵인함으로써 조장하고 시인한다. 일반 신자들의 그러한 비행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비행도 묵인한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을 부른다. 묵인하면 너무 태만하다는 비난을 듣게 되기 때문에 또는 돈을 받아먹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관련된 약탈과 강탈과 횡령과 신성 모독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 자리에 대개 어떤 인간들이 임명된다는 것도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카톨릭주의자들이 그들의 영적 재판권을 자랑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절차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며, 암흑이 광명과 다른 것과 같이 그들의 재판권은 고대의 관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이것만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8. 주교들의 세속적 권력은 주교직의 의미와 모순된다

 

우리는 진술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모두 말하지 않았고 우리가 말한 것도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소위 영적 권세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승리한 줄로 믿는다. 즉 교황과 그 당당한 측근자들이 자랑하는 이 영적 권세는 불경건한 압제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도 부당한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영적 권세"라는 말에 나는 여러 가지를 포함시킨다.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있던 시초의 순수성에서 가련한 신자들을 떠나게 만든 그 대담한 태도, 가련한 신자들을 올가미로 매던 그들의 악한 전통, 부주교와 판사들을 통해서 행사하는 그들의 가짜 교회 재판권 등, 이런 것들 모두가 그들의 영적 권세에 속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사이에 건설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교황의 나라는 즉시 전복되며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더우기 우리는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무력의 권세를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15 이것은 양심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은 항상 그들답다는 것을 즉 교회의 목자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들의 정체는 아주 판이한 것을 말해 둘 가치가 있다.

내가 비난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계급 전체의 공통된 범죄 즉 그 극심한 해독이다. 그들은 풍성한 생활과 자랑스러운 칭호로 장식하지 않으면 계급의 손과 발이 잘리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구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지배력과 지상의 권위를 가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마 20 : 25-26, 눅 22 : 25-26). 이 말씀의 뜻은, 목자의 직분은 군주의 직책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이 아주 심해서 한 사람이 겸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두 직책을 겸했다는 것은 첫째, 희귀한 기적에 의한 일이었고 둘째, 사태가 정돈될 때까지의 일시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정확한 형태를 지정하셨을 때 모세에게는 일반 정치권을 남겨 두시고 제사장직은 그의 형 아론에게 넘겨주도록 하셨다(출 18 : 13-26). 이것은 옳은 조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짐을 진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이 점을 삼가 지켰다. 교회의 진정한 형태가 지속된 동안은 무력의 권리를 도둑질하려고 생각한 감독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시대에는 "사제들이 제국을 탐내는 것보다 황제들이 사제직을 더욱 탐낸다"는 속담이 있었다. 암브로시우스가 "궁궐은 황제의 것이요 교회는 사제의 것이라"고17 말한 것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9. 주교들이 군주의 권세를 장악했다

 

주교들이 아무 부담이나 걱정 없이 주교직의 칭호와 영예와 재산을 향유하도록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러나 그후에, 주교들이 전혀 하는 일이 없지 않도록 무력의 권리를 그들에게 주었다. 주었다기보다는 그들이 도둑질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 파렴치한 행동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재판 사건에 개입하고 도시와 지방의 행정에 관계하며 자기의 본직과는 아주 동떨어진 활동을 하는 것이 주교들의 의무였는가? 그들의 본직만 수행해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다른 일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전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주력하기에는 오히려 힘이 부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고해서,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이 제대로 찬란하게 나타나며 또 이렇게 하여도 그들의 사명 수행에 그다지 큰 지장이 되지 않는다고 서슴지 않고 장담한다.

첫째 점에 관해서는, 거만한 임금들까지도 두려워할 만한 높은 자리에 주교들이 오를 것이 성직에 합당한 장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와 논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예에 중대한 손상을 입히셨고 더할 나위 없는 폭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마 20 : 25-26, 막 10 : 42-44, 눅 22 : 25-2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먼저 받고 견디신 법칙보다 더 어려운 것을 그의 종들에게 부과하시지 않았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관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다(눅 12 : 14). 그는 재판하는 자리를 거절하시며, 설사 그 일이 그의 직분과 똑같더라도 그는 하시지 않았으리란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께서 스스로 복종하신 그 계급에 그의 종들은 들어가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들이 말로 하는 것같이 실지 경험으로도 이 일을 쉽게 증명하기를 원한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 이 마땅하지 않다고(행 6 : 2) 생각했다. 주교들은 사도들에게서 배우려 하지 않으므로 한 사람이 선한 주교와 선한 군주의 일을 겸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큰 은사를 받아서, 그들 후에 태어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어렵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음식을 베푸는 일을 함께 맡게 된다면 반드시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는데, 사도들에게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 소인들이 어떻게 백 배나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해보겠다고 하는 것조차 엄청나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자기 과신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짓을 행했다. 일의 성과는 분명하다. 그 결과 그들은 본직을 버리고 다른 쪽 진영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10. 주교들이 어떻게 세속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카톨릭주의자들이 사소한 시초로부터 출발해서 조금씩 조금씩 크게 불어난 것은 틀림없다.18 단숨에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를 수는 없었다. 어떤 때에는 교활하고 부정한 술책으로 은밀하게 전진해서, 일이 나타나기까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기회를 엿보아서 공갈과 위협으로 군주들에게서 조금씩 그 권력을 빼앗았다. 또 어떤 군주들의 마음이 후한 것을 보면 그 미련하고 그릇된 선심을 악용했다.

과거에는, 분쟁이 생기면 경건한 사람들은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 판단을 주교에게 맡겼다. 주교의 성실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감독들은 자주 이런 문제에 관계되어 (어거스틴이 어디선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19) 그 일을 매우 성가시게 여겼지만 하는 수 없이 수고를 해서 관계자들이 법정에서 싸우지 않도록 했다. 카톨릭주의자들은 자진해서 중재에 맡긴 일을-법정의 소란과는 전혀 다른 정상적인 재판권으로 만들었다.

얼마 후에 여러 도시와 지방이 이따금씩 각종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은 주교들의 성실을 믿고 그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놀라운 간계로 보호자의 입장에서 주인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폭력과 파쟁으로 많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주교들에게 재판권을 기꺼이 넘겨 준 군주들은, 여러 가지 동기가 있었겠지만 그들의 선심에 다소의 경건의 색채가 있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은 그 미련한 선물로 교회의 복리를 도운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교회의 진정한 권징을 타락시킨 것이다. 솔직이 말해서 그들은 교회의 권징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군주들의 큰 기증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악용한 주교들은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주교가 아니란 것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사도적 정신이 있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바울의 말로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고후 10 : 4)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자신과 후계자들과 교회를 파멸에 몰아넣었다.

 

 

 

(교황들이 무모하고 부정직한 권력을 주장하며 세속적 권력을 찬탈했다. 11-16)

 

11. 교황이 세계의 수위권을 가지게 된 시초

 

마침내 로마감독은 적당한 귀족령에 만족하지 않고, 처음에는 왕국들에 손을 대고 다음에는 제국 자체에 손을 댔다. 그리고 순전히 강탈한 땅을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때에는 신이 주신 권리로 가졌다고 호언하며, 어떤 때에는 콘스탄티누스가 기증했다고 거짓말하고 또 어떤 때에는 다른 소유권을 주장했다. 나는 우선 베르나르두스의 말로 대답한다. "그가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런 주장을 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사도적 권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없었고, 자기에게 있는 것 곧 교회들을 돌보는 일을 후계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교사이신 주께서 두 사람 사이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므로(눅 12 : 14), 제자와 종이 된 사람은 자기가 모든 사람을 재판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는 국가의 법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첨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귀하들의 권한은 비행에 관한 것이지 소유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재산이 아닌 비행에 관한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재산을 분할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당신에게 더 큰 영예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 비천하고 세속적인 일들에는 그 자체의 재판관 즉 땅의 군주들이 있다. 당신들은 왜 다른 사람의 경계를 침범하는가? 마찬가지로, "당신을 높은 자리에 앉히신 것은" (교황 유게니우스에 대해서 하는 말) "무엇 때문인가? 권세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중요시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섬기는 일이 준 것이지 주인 노릇하는 권리가 부여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예언자의 일을 하려면, 그에 필요한 것은 홀이 아니라 호미란 것을 알라." 또, "사도들이 주인 노릇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감히 주인이면서 사도직을 자기 마음대로 일컫는다든지 사도이면서 주인 노릇을 하든지 한 쪽을 택하라." 그리고 곧 이어 "사도직의 형태는 이것이니, 곧 주인 노릇은 금지되었고 심부름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0라고 말했다. 베르나르두스가 이렇게 한 말이 진리란 것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설령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두 칼에 대한 최고 권리는 하나님의 권리에 의해서 자기에게 속한다고 로마 교황은 아를(Arles) 회의에서 파렴치하게 선언했다.21

 

 

 

12.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는 어리석은 사기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에 관해서는, 당시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허황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이야기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서를 보지 않더라도 그레고리우스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하고 완전한 증인이다. 그는 황제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반드시 "지극히 영명하신 주"라고 부르며, 자기는 "무가치한 종"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어떤 구절에서는 "그런데 폐하께서는 폐하의 지상 권력으로 인하여 사제들에 대하여 너무 쉽게 노하시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탁월하신 고려로 그들을 종으로 삼으신 분을 생각하셔서 그들을 지배하실 때 적당한 경의도 표시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레고리우스가 일반 백성과 함께 황제에게 복종하며 그들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위해서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구절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건한 군주들에게 만수를 허락하시며 폐하의 치하에서 그의 자비에 따라 우리를 처리하시리라고 믿나이다"22라고 했다. 내가 이런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제를 철저히 논의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카톨릭 교회가 교황의 지상의 권세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거짓말인가를 독자들이 겸해서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소할 희망이 없는 이 송사를 변호하겠다고 교황에게 자기의 수고와 혀를 팔아먹은 아우구스티누스 스테우쿠스(A. Steuchus)의 파렴치한 행동은 더욱 추악한 것이다. 발라(Valla)는 이 황당 무계한 이야기를 완전히 반박했다. 그것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논의에 유용한 것을 모두 말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스테우쿠스가 덤벼들어 그의 추악한 강변으로 투명한 빛을 흐리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주인의 입장을 위해서 한 변호는 무가치한 것이며, 발라편을 변호하는 익살꾼의 변론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이 돈을 주고 이런 옹호자들을 사는 것 같다. 또 스테우쿠스 같이 돈을 받을 속셈으로 속아서 고용된 논쟁가들도 못지 않게 가치 있는 인물이다.23

 

 

 

13. 헨리 4세와 힐데브란드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언제 이 조작된 제국이 일어나기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교황들이 군주들에게 복종하며 반드시 황제의 인정을 받아서 교황이 된지는 아직 5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황제 헨리 4세는24 성격이 경솔하고 무분별하며 지혜가 없으면서 담대 무쌍하고 생활이 난잡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이 질서를 변경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헨리가 그의 궁정(court)에서 독일 제국의 주교구를 장악하고 혹은 팔며 약탈자에게 맡기고 있을 때에, 황제의 도전을 받은 힐데브란드는 자기의 체면을 세울 그럴 듯한 구실을 잡았다. 그는 정직하고 경건한 입장을 취한 듯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호의와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헨리는 오만불손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주들이 미워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를 자칭한 힐데브란드는 원래 불결하고 악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 악한 의도가 탄로되었다. 그래서 그와 공모하던 많은 사람들이 배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후계자들은 황제의 멍에를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황제들을 굴복시키고도 해를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25 그뿐 아니라 그 후에는 줄리우스 시저보다 헨리와 비슷한 황제들이 많아서 굴복시키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교황의 탐욕을 강경하고도 합법적인 수단으로 억압할 필요가 있는 때에도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비겁해서 궁중에만 앉아 있었다. 저 유명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가 아름다운 색채로 위조된 것과, 이 문서를 근거로 교황은 서방 제국이 자기에게 이양된 것같이 꾸민 것을 우리는 안다.

 

 

 

14.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저주받은 교회 재산 유용

 

그 후로 지금까지 교황들은 혹은 사기로 혹은 배신 행위로 혹은 전쟁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땅을 침략했다. 약 130년 전에는 (그때까지 자유시였던) 로마 시 자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넣어 현재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약 200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거나 증대하기 위해서 (이것은 로마 시에 대한 공작보다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를 괴롭혔고 거의 파멸 상태에 빠뜨렸다.

옛날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교회 소유지의 관리인들이 교회 재산인 부동산에 손을 대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소유권의 증거로서 자기의 어떤 소유 표식을 설치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주교 회의를 열고 이런 모독 행위를 강경하게 비난한 후에, 자기 명의로 소유권 문서를 작성함으로써 재산을 점령하려고 한 성직자들을 저주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을 시켰거나 알고도 처벌하지 않은 주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물었다. 모두 "저주"한다고26 대답했다. 일개 하급 성직자가 소유권 문서를 작성함으로써 얼마의 토지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저주를 받을 일이었다면, 교황들이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빼앗을 목적만으로 전쟁과 유혈, 군대의 살륙, 도시의 약탈과 파괴, 민족들의 학살과 왕국들의 황폐 등을 200년 동안 계속해 왔으니 이런 짓들에 대해서는 어떤 저주를 해야만 넉넉히 강력한 처벌이 될까? 참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다. 그들이 모두 그 가진 세속 권력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나 건전한 요리나 교회의 안전성에는 하등의 위험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력에 대한 야욕 하나에 정신이 팔려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예언자의 말과 같이 강포로 다스리지 않으면(겔 34 : 4) 만사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