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 권(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9

2. 두 가지 "통치"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통치를 그 성질상 부패한 것,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마구 날뛰기를 좋아하는 광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외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대해서 죽은 우리는(골 2 : 10) 하나님 나라에 옮겨져 하늘 존재들 사이에 앉아 있으므로,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는 일에 대한 비열하고 세속적인 근심 걱정에 얽매인다는 것은 우리의 훌륭한 입장에 맞지 않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짓이라고 그들은 말한다.7 그들은 재판과 재판소가 없으면 법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재판이나 재판소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 죽이는 것이 불법이라면 왜 법률을 만들며 재판을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이런 통치는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내적인 나라와는 서로 다르다고 우리가 방금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영적 통치는 지상에 있는 우리 안에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하게 만들며, 이 죽을 덧없는 생명 속에서 영원 불멸의 복락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국가 통치에 지정된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현세 생활을 없애버린다면, 나는 이 모든 일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조국을 갈망하는 한편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생활에는 이런 보조 수단들이 필요하다면, 사람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빼앗는 사람들은 바로 그에게서 인간성을 빼앗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 교회는 완전해야 하며 교회의 통치만 있으면 다른 법률을 대신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전성에 대해서 우매한 공상을 한다. 극도로 엄격한 법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그렇게까지 완강하고 거만한 악인들이 만일 어떤 악한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짓을 할까? 악행을 억제하는 권력이 전혀 없을 경우 그런 악인들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국가 통치는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3-7)

 

3. 정부의 주요 임무

 

그러나 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더 적당한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8 여기서는 정부를 폐지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진실로 그 위치는 훨씬 더 귀중하다. 이런 것들이 하는 일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우상 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밖에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치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9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10

내가 위에서는 종교를 바로잡는 임무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두는 것 같았는데11 지금은 그 일을 정부에 맡긴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 진정한 종교에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모독을 가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줘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정부를 시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경건에 대해서 법을 정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앞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부의 각 부분에 대한 나의 논의를 읽는다면, 그 명쾌한 설명의 도움을 얻어 문제 전체에 대한 사고 방법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정부에는 세 부분이 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있다.12

그러면 먼저 집권자의 지위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합당한 소명인가 그리고 그 지위의 성격과 그 권한의 범위는 어떠한가를 고찰하겠다. 다음에 기독교적 정부는 어떤 법으로 운영되어야 하는가를 고찰하고, 그 법은 국민에게 어떤 유익을 주며 국민은 집권자에게 복종할 어떤 의무가 있는가를 마지막으로 고찰하겠다.

 

 

 

4.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주께서는 집권자의 지위를 시인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장식하시며 우리에게 극구 천거하신다.13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집권자로서 일하는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하시므로(출 22 : 8, 시 82 : 1,6) 이런 이름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위임과 권위를 받았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표, 이를테면 대리자로서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궤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명이다. 그는 "성경은‥‥‥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하셨다(요 10 : 35).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모세와 여호사밧이 유대 각 도시에 임명한 재판관들에게 명령한 것과 같이(신 1 : 16-17, 대하 19 : 6), 사람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하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 : 15-16). 이것을 바꿔 말한다면, 지상의 모든 일에 대한 권위가 왕들과 다른 권력자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인간성의 패악성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명령에서 유래한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사를 처리하기를 기뻐하시며, 사람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그들이 법을 제정하며 재판소에서 공의를 실시하는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의 은사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도(롬 12 : 8) 이것을 가르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스리는 은사는 은혜의 다양함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배되며,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 은사를 사용해야 된다고 한다. 바울은 원시 교회에서 공적 규율을 유지하며 주관하는 신실한 사람들의 회의에 대해서 말하고 이 직책을 고린도서에서(고전 12 : 28) "다스리는 것"이라고14 부르지만, 정부가 하는 일도 이와 같은 것이므로 사도가 모든 종류의 공정한 지배를 우리에게 천거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를 공정하게 논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명백하게 말한다. 권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롬 13 : 2),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권세는 없다고 한다(롬 13 : 1). 그뿐 아니라 주권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선을 행하는 사람을 칭찬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한다고 한다(롬 13 : 3-4). 우리는 거룩한 분들의 예를 첨가할 수 있다.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다윗과 요시야와 히스기야와 같이 왕위에 있었고, 어떤 이들은 요셉과 다니엘같이 고관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같이 자유를 얻은 백성들의 지도자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지위를 시인하신다고 언명하셨다. 따라서 정권은 하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무정부 상태를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은,15 비록 고대에는 왕이나 사사들이 무식한 사람들을 지배했지만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써 실현하신 현재의 완전 상태와 그런 노예적인 통치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항의한다.16 이런 말은 그들의 무지와 교만만을 폭로할 분이다. 그들에게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완전성의 백 분의 일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물이 어떻든 간에 그들을 논박하기는 쉽다. 다윗이 모든 군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권고했을 때(시 2 : 12), 그는 그들이 그 권위를 버리고 사생활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권력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시게 하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열왕이 교회의 양부가 되며 왕비들이 교회의 유모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사 49 : 23), 그들의 영예를 빼앗지 않고 도리어 고귀한 칭호를 주어 하나님의 경건한 경배자들의 수호자로 삼았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에 특히 시편에 이런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다(시 21, 22, 45, 72, 89, 110, 132).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바울이 한 말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공중 집회에서 왕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충고한 다음에 곧 그 이유를 첨부한다. "나아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 : 2). 이런 말로 바울은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

 

 

 

6.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 점을 위정자들은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직책을 다하겠다는 큰 자극을 받으며, 임무 수행에 따르는 곤란이 아무리 많고 중대할지라도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일꾼으로 임명되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고결함과 슬기와 온유와 극기와 결백에 대해서 큰 열성을 가져야 하겠다고 자기를 스스로 일깨우고 격려할 것이 아닌가? 자기의 재판석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찌 뻔뻔스럽게 불공정한 재판을 허락하겠는가? 하나님의 신실을 발표하는 도구로 지정된 줄 아는 입으로 어찌 감히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하도록 지정된 손인 줄 알면서 무슨 양심으로 악한 법령에 서명할 것인가? 요컨대 주권자들이 자기는 하나님의 대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모든 주의와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으므로(렘 48 : 10), 의로운 소명을 받고도 거짓된 행동을 하는 자는 더욱 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세와 여호사밧이 재판장들에게 임무 수행을 권면했을 때,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말을 가장 설득력이 있는 말로 인정했다(신 1 : 16).17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 함도 없으시고"(대하 19 : 6-7).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라고 한 말씀이 있다(시 82 : 1). 이 말씀은 주권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라는 것을 알리며, 앞으로 그들은 그 정치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서 그들이 임무에 대한 용기를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또 이 경고를 그들은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떤 과오를 범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행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심판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게 되기 때문이다(사 3 : 14-15 참조). 또 그들은 불결한 일이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로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직책을 맡았다0?곰곰이 생각할 때에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7.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이렇게 많은 증언을 들으면서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기독교적 경건의 입장에서는 이 거룩한 직책을 배격해야 된다고 외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거룩한 직책을 비난하면 반드시 하나님 자신에게 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집권자만을 배척하지 않고 하나님까지도 버림으로써 자기들 위에 왕이 되시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삼상 8 : 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정부를 일체 배격하는 현대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을 주관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첫째 되는 자는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눅 22 : 25-26)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나 정부를 가지는 것을 일체 금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18 참으로 교묘한 해석가들이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 누가 제일 윗자리에 설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다. 이 헛된 야심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그들의 직책은 한 사람이 모든 다른 사람들 위에서는 왕국들과는 다르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이 비교가 왕들의 위엄에 어떤 불명예를 주는 것이냐고 묻는다. 참으로 이 말씀은 왕위와 사도직과는 다르다는 것 이외에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뿐 아니라, 집권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고 인정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구별이 없다. 바울은 그들을 통틀어서,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권세는 없다고 말한다(롬 13 : 1). 그리고 가장 유쾌하지 못한 일 즉 일인 집권이 다른 일보다 더 천거된다. 일인 집권은 모든 일을 자기 뜻에 굴복시키는 한 사람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 예속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고대의 용감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정치 못한 판단을 막기 위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에 의해서 왕들이 군림한다고 명백하게 주장하며(잠 8 : 15 참고) 특히 왕을 공경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잠 24 : 21, 벧전 2 : 17).

 

 

 

(정부의 형태들과 집권자들의 임무 : 전쟁과 과세의 문제. 8-13)

 

8. 각종 정부 형태

 

국가 조직을 생각할 자격이 없는 개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는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좋을까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익한 소일거리일 것이다. 또 이 문제는 단순하게 해결할 수 없고 신중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토의의 성격은 크게 환경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계없이 정부 형태를 서로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제일 유용한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 같은 조건으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왕국이 전제국으로 타락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정치가 소수인의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민중의 지배가 난동으로 타락하는 것은 가장 쉽다. 철학자들이 논하는 정부의 세 가지 형태에 대해서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귀족 정치 또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19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귀족 정치 자체가 가장 좋다기보다는, 항상 공정하며 바른 생각만을 하는 자제력이 강한 왕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뛰어난 총명과 지혜로써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아는 왕도 드물다. 그러므로 사람의 결함이나 실패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정권을 운영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고 보다 견딜 만하다.20 그래서 여러 사람이 서로 돕고 가르치며 경고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불공평한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여러 사람이 그 고집을 비난하며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증명하는 바이며, 주께서도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민주 정치에 가까운 귀족 정치를 제정하셔서 그의 권위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주께서는 다윗을 세워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좋은 형태 아래 두려고 하셨다(출 18 : 13-26, 신 1 : 9-17). 또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써 조절하고 견고한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 제도가 가장 좋다고 인정하며, 이런 형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이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굳세게 노력한다면 나는 그들은 이 직책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인정한다. 참으로 집권자들은 전력을 다하여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유가 감소되는 것을 방지해야 하며 침범 당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21 이는 그들이 자유의 수호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각성과 주의가 불충분하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해서 불충실하게 되며 조국에 대해서는 반역자가 된다.

그러나 주께서 다른 형태의 정부를 지정해 주신 사람들이 정부 형태를 바꾸려는 생각으로 바로 이 기능을 떠맡으려고 한다면, 이런 행동을 생각하는 것조차 미련하고 무익하며 더우기 전적으로 유해한 짓이다. 그러나 한 도시만을 보지 않고 전세계를 본다면, 적어도 먼 지역들을 본다면, 여러 나라가 여러 가지 정부에 의해서 통치되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지혜롭게 배정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소들이 균등하지 않은 비례로 결합되는 것과 같이 나라들은 각각 그 독특한 부동의 형태에 따라서 가장 잘 단결된다. 그러나 주의 뜻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모두 필요하지 않다. 왕국들에는 왕들을 세우며 자유 도시들에는 원로들이나 시의원들을22 세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사는 곳에 주께서 세우신 사람들에게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9. 율법의 두 돌판에 대한 고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집권자의 직책을 겸해서 설명해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그 직책을 어떻게 서술되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설명하겠다. 그 직책이 율법의 두 돌판에 까지 미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속 학자들의 글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집권자의 직책과 입법과 공공 복지에 대해서 논한 사람은 반드시 종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부터 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을 제일의 관심사로 삼지 않으면 원만하게 정부를 수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권리를 무시하고 사람의 일만을 돌보는 법률은23 앞과 뒤가 서로 뒤바뀐 것임을 모든 학자가 인정했다. 이와 같이 모든 철학자들이 종교를 가장 중요시하며 이 일에 대한 모든 민족의 관찰이 보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만일 그리스도인인 군주들이나 집권자들이 이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기의 태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가 대표하는 하나님과 또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권을 가지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며 선양하는 데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부패하거나 소멸되었을 때에 그것을 재건하거나 종교를 보호하여 순수하고 흠결 없는 종교가 번창하도록 한 거룩한 왕들을 성경에서는 매우 칭찬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성경은 무정부 상태를 악으로 인정한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행했다고 한다(삿 21 : 25).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무시하고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확립하는 일에만 유의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을 증명한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지상 생활의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으로 지배자들을 임명하시고 훨씬 더 중요한 일 즉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배해야 하는 일은 무시하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혁명에 대한 열기로 날뛰는 과격 분자들은 유린당한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려고까지 한다.24

둘째 판에 관련해서, 예레미야는 왕에게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경고한다(렘 22 : 3). 시편 82편에 있는 충고도 같은 뜻이다. 왕들은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라고 하신다(시 82 : 3-4). 모세는 자기의 대리자로 임명한 사람들에게, "너의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고 명령하고 또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라고 했다(신 1 : 16- 17).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으나, 성경에는 왕된 자들은 말을 많이 두지 말고 탐욕을 멀리하며, 형제 위에 교만하지 말고 주의 율법을 일평생 항상 묵상하며(신 17 : 16-19), 또 재판장들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며(신 16 : 19),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 곳에 있다. 내가 여기서 집권자들의 직책을 설명하는 목적은, 그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집권자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명하셨는가를 알리려는 것이다. 집권자들은 공중의 무죄와 겸손과 예절과 평온의 보호자와 옹호자로 임명되었으며 사회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윗은 이 모든 덕의 모범이 되겠다고 언명했다. 자기가 왕위에 오르면 어떤 범죄에도 찬성하지 않으며, 불경건한 자와 중상하는 자와 교만한 자들을 미워하고, 각처에서 정직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구해서 그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시 101, 특히 4,5,6,7절).

그러나 집권자들은 악인들의 침해를 받는 선한 사람들을 지켜 주지 않고 압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지도, 원조하지도 않는다면 이 직책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거나 깨뜨리는 노골적인 악인들과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무기로서 받았다(롬 13 : 3).25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솔론(Solon)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는 모든 정치 조직은 상벌에 의해서 유지되며 상벌을 제거하면 도시들의 규율은 붕괴되고 소멸된다고 말했다.26 덕행에 대해서 명예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정과 정의에 대한 열의가 식는 사람이 많으며 엄격하게 벌을 주지 않으면 악인들의 정욕을 억제할 수 없다. 예언자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종합해서 왕들과 집권자들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고 명령했다(렘 22 : 3, 21 : 12 참조). 참으로 정의는 무죄한 사람들을 지켜 주며, 감싸주며, 보호하며, 변호하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은 담대한 악인들을 방어하고 그 폭행을 억압하며 그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

 

 

 

10.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그러나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곧 하나님의 법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금지하며(출 20 : 13, 신 5 : 17, 마 5 : 21) 하나님의 거룩한 산(교회)에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고 예언했다면 (사 11 : 9, 65 : 25), 어떻게 집권자들은 경건하면서도 동시에 피를 흘리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집권자가 벌을 주는 것은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을 실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율법은 살인을 금한다. 그러나 살인자는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꾼들에게 칼을 주어 모든 살인자를 치게 하신다. 경건한 사람들을 해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해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는 사람의 경솔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모든 일을 명령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따르는 동안은 우리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행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정의를 억제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떤 법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일꾼들을 비난하려고 하는가? 바울은 그들이 공연히 칼을 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위하여 보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롬 13 : 4). 그러므로 군주들과 다른 집권자들이 그들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만한 경건과 의와 정직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딤후 2 : 15 참조), 우리는 그들이 이 임무에 전력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세가 주의 권능에 의해서 동족의 해방자로 임명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 애굽 사람에게 손을 댄 것도(출 2 : 12, 행 7 : 24) 이런 염원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족의 신성 모독을 처벌하기 위해서 하루에 삼천 명을 죽인 것도 같은 동기였다(출 32 : 21-27). 다윗이 그의 임종시에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같은 뜻이었다(왕상 2 : 5-6,8-9). 따라서 그는 또 그 땅의 악인들을 진멸해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모든 행악하는 자들을 좇아 내는 것을 왕의 한 덕행이라고 했다(시 101 : 8).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라고 솔로몬을 칭찬한 것도(시 45 : 7, 44 : 8) 이 부류에 속한다.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졌던 모세가 왜 이런 야만성이 불타올라 진중을 왕래하면서 형제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피가 사방에 낭자하게 만들었는가? 또한 일평생 극히 온유하던 다윗이 어떻게 임종시에 요압과 시므이의 백발이 평안히 묘지로 가지 못하게 하라고 아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유언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벌을 시행함으로써 그 잔인한 행위로 그들의 손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만일 사람을 아꼈다면 자기 손을 더럽혔을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잠 16 : 12) 솔로몬은 말한다.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 20 : 8),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잠 20 : 26),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을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잠 25 : 4-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 : 15),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잠 17 : 11),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잠 24 : 24). 칼을 빼어 들고 죄인과 악인을 추궁하는 것이 집권자들의 진정한 의라면, 자포 자기한 악인들이 도살과 살륙을 자행할 때에 칼을 집에 넣어 두기만 하고 피를 흘리지 않는 집권자들은 최대의 불경죄를 범하게 될 것이며 선하고 의롭다는 칭찬은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돌연히 나타나는 잔인하고 가혹한 처사나 고소 당한 사람들의 암초라고 당연히 불려지는 법정은27 물론 배척해야 한다. 나는 부당한 잔인성을 두둔하지 않으며, 항상 인자한 정신이 없이 공평한 판결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관용은 국왕들의 최선의 고문관이며 솔로몬의 말과 같이 왕위는 인자로 말미암아 가장 견고해진다(잠 20 : 28). 어떤 고대 저술가가 관용은 군주들의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28

그러나 집권자의 양쪽에 다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엄격으로 병폐를 고치기보다 해를 주게 되든지 또는 관용에 대한 미신적인 애착으로 가장 잔인한 온유에 빠질 수 있다. 즉 무력한 친절의 낭비로 파멸을 당하게 된 많은 사람들을 버려 두게 된다. 네르바(Nerva)의 치세 중에, 지배자가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불행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행하다고 사람들은 바른 말을 했다.29

 

 

 

11. 정부의 전쟁 수행권

 

그러나 왕과 국민은 공적인 보복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수행하는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영토 내의 평온을 유지하며 불온한 사람들의 선동을 억제하고 압제를 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악행을 처벌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개인의 평안과 모든 사람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나 선동적인 소란을 일으키는 자나 또는 남을 폭압하며 학대하는 자들이 있을 때에 그들의 광증을 억제하는 것보다 더 그 권력을 적합하게 사용할 기회가 있겠는가? 법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면, 법의 실시를 부패하게 하는 악인들의 노력을 겪는 것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몇 사람만을 해한 강도들을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한 나라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버려 둘 것인가? 아무 권리도 없는 외국에 침입해서 괴롭히는 원수는 그가 왕이건 가장 미천한 사람이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다 똑같은 강도요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공정성과 집권자의 직책으로 보아서, 집권자들은 공정한 처벌로 개인들의 비행을 무력으로 억제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맡아 지키는 영토가 적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전쟁으로 방어해야 한다.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증거를 통해서 이런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신다.30

 

 

 

12. 전쟁에서의 자제와 인도적 정신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증거나 전례가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첫째, 전쟁을 해야 될 이유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있으며 집권자들이 그 지배 아래에 있는 주민을 방위하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둘째,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말을 사도들의 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 정부를 조직하려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점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거기에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교리가 모든 전쟁을 배척한다면, 군인들이 구원에 관한 지도를 요청했을 때 무기를 버리고 군대에서 완전히 물러서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는 충고를 받았다(눅 3 : 14).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으므로 무기를 드는 것을 전혀 금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이라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는 것이 모든 집권자들의 의무다. 벌을 줘야 할 때라도 격분에 휩쓸리거나 증오심에 사로잡히거나 무자비한 가혹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은 벌을 받을 사람의 특별한 과실만을 보지 말고 그에게 있는 인간의 공통된 본성에 동정하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31 또 적에 대해서 즉 무장 강도에 대해서 무장해야 할 때에도 그렇게 할 기회를 찾아서는 안 되며,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면 주어진 기회도 피해야 한다. 전쟁은 평화를 모색하는 것같이 하라고 한 이교 철학자의 요망보다32 우리가 하는 일이 훨씬 더 훌륭해지려면, 우리는 무기에 호소하기 전에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끝으로, 이 두 가지 경우의 어느 쪽에서도 집권자들은 사적인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 되며 국민을 위한 고려만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권력을 남용하게 되며, 이것은 심히 악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전쟁을 하는 이 권리가 있기 때문에 수비대와 동맹 관계와 기타 민간 방위 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수비대"는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 도시들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맹"은 곤란한 문제가 일어날 때에 서로 도우며 협력해서 인류의 적을 타도하자는 인근 군주들의 조약을 의미한다. "민간 방위 수단"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사물을 의미한다.

 

 

 

13. 정부의 과세권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공물과 세금은 군주들의 합법적인 수입이며, 이것을 그들은 주로 공무의 공적 경비에 사용하겠지만 호화로운 가정 생활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생활은 이를테면 그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위엄에 붙어 다닌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과 히스기야와 여호사밧과 그 밖의 거룩한 왕들은 또 요셉과 다니엘은(그들의 지위의 존귀성에 따라) 경건을 위반하지 않고서도 공공 경비를 많이 사용했고, 에스겔서를 보면 왕들에게는 많은 토지가 배당되었다(겔 48 : 21). 거기서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묘사했으나 인간 사회의 합법적인 왕국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주들 편에서도, 그들의 수입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재산이란 것과(바울도 그렇게 확언한다, 롬 13 : 6) 그것을 낭비하거나 약탈하면 반드시 분명한 불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요망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은 거의가 국민의 보혈이므로,33 아끼지 않는 것은 극도의 잔혹 행위가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부과하는 각종 조세는 필요한 공공의 재원에 불과하며 이유 없는 과세는 전제적 착취란 것을 그들은 숙고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군주들은 낭비와 사치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타오르게 된 그들의 탐욕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신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불쾌감을 사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에서든지 합당한 한도를 알아야 한다. 사사로운 개인들도 일반 시민의 공통된 지출보다 군주들의 비용이 많은데 대해서 경솔하고 파렴치한 비난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

 

 

 

(공법 및 재판 절차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의 관련. 14-21)

 

14. 구약성경의 율법과 각국의 법

 

국가 조직에서 집권자 다음가는 것은 법률이다. 법률은 국가의 가장 튼튼한 힘줄이며,34 키케로는 플라톤을 따라 법률을 나라의 영혼이라고 부른다. 법률이 없으면 집권자의 지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집권자가 없으면 법률에 힘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법은 무언의 집권자요 집권자는 살아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옳은 말이다.35

기독교적 국가는 어떤 법에 의해서 통치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논제라고 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법인가 하는 긴 논의를 나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의는 끝이 없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가 목적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나는 간단히 지나가는 말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용될 수 있는 법은 어떤 것이며 어떤 법이 사람 사이에 실시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겠다.

 

만일 여기서 위험한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모세의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국가의 관습법으로36 통치하더라도 나라는 바르게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 이 관념이 얼마나 위험하며 선동적인가는 다른 사람들이 고려하게 하고, 나는 이 생각이 잘못되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모세에 의해서 발표된 하나님의 율법 전체는 보통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37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씩 고찰해서, 거기 있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해당되고 어떤 것이 해당되지 않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들도 도덕에 관한 율법에 속한다고 하는 사소한 문제에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이 구분을 가르친 고대 저술가들이 뒤의 두 가지가 도덕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도덕에 관한 율법은 변동이 없는데 비해서 다른 두 가지는 변하거나 폐지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에 관한 율법이라고 부르지 않고 첫째 종류에만 이 이름을 적용했다. 도덕에 관한 율법이 없으면 도덕의 진정한 거룩함이 지탱될 수 없고 올바른 생활을 위한 불변의 표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한다

 

우선 도덕에 관한 율법을 본다면 거기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한 부분은 순수한 믿음과 경건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또 한 부분은 진실한 애정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한다. 따라서 도덕에 관한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을 정돈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정해 주신 의의 표준 곧 참되고 영원한 표준이다.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뜻은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관한 율법은 유대 사람들의 후견인과 같았다. 여호와께서는 이를테면 유년기에 있는 유대 민족을 의식에 관한 율법으로 때가 찰 때까지 훈련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셨다(갈 4 : 3-4, 3 : 23-24 참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지혜를 완전하게 나타내며, 그 때에 비유로 예표하신 일들의 실체를 보이려고 하셨다.

재판에 관한 율법은 유대 민족의 통치를 위해서 주신 것이었으며 그들이 허물 없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공평과 공의의 형식들을 정하신 것이었다.

의식의 관례는 유대인 교회가 항상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도록 했으므로, 경건에 대한 교훈에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경건 자체와는 구별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재판에 관한 율법의 형태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이 명령한 그 사랑을 가장 잘 보존하려는 의도만을 가진 것이었지만 사랑의 교훈 자체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경건이 의식에 관한 율법을 폐지하고도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재판에 관한 율법을 폐지했을 때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영원한 의무와 교훈은 여전히 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각 민족은 자체에 유익이 있다고 례상되는 법을 만들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런 법은 사랑이라는 영원한 표준에 일치해야 하며 형태는 틀린 지라도 목적은 같아야 한다. 도적들을 존중하며 난잡한 남녀 관계와 기타 더욱 추잡하고 더욱 어리석은 행위를 허용하는 야만적인 법들이 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법은 정의의 입장에서만 가증한 것이 아니라 인도적 정신과 예절 바른 생활의 입장에서도 가증한 것이다.

 

 

 

16. 법의 단일성과 다양성

 

우리가 모든 법에서 다음 두 가지를 검토할 때에 내가 한 말의 뜻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헌법과 그 헌법의 근거가 되는 공정성이다. 공정성은 당연한 것이므로 모든 법에서 동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법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이 동일한 목적이 모든 법에 적용되어야 한다. 헌법은 부분적으로 환경에 지배된다. 따라서 모든 헌법이 공정성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동등하게 추구한다면 그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 율법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율법은 자연 법칙의 증거에 불과하며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기신 양심의 증거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38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공정성의 개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만이 모든 법의 목표와 표준과 한계가 되어야 한다.

그 표준에 따라서 구성되며 그 목표를 향하며 그 한계를 지키는 법이라면, 그런 법이 유대인들의 법이나 우리의 법과 다르더라도 우리는 배척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법은 도둑질을 금한다. 유대에서 도둑에게 준 형벌은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다(출 22 : 1-4). 다른 민족들의 상고 시대의 법들은 도둑질에 대한 벌로서 두 배를 배상하게 했다. 그 후에 생긴 법들은 나타나는 도둑과 나타나지 않는 도둑을 구별했다. 형벌이 다름에 따라 혹은 추방, 혹은 태형, 혹은 사형에 처했다. 위증에 대한 유대인들의 벌은 손해를 끼친 것만큼 유사한 또는 동일한 손해를 받게 하늘 것이었다(신19 : 18-21). 다른 나라 법에서는 큰 수치만 주거나 또는 교수형에 처하거나 십자가에 달았다. 살인죄에 대해서는 모든 법전이 사형에 처했으나 처형 방법은 달랐다. 간음죄에 대한 벌은 어떤 나라에서는 가벼웠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무거웠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모든 법이 같은 목적을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법이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같이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위증을 처벌한다. 그러나 처벌 방법은 같지 않다. 또 같을 수도 없고 같은 것이 유리하지도 않다. 어떤 나라는 살인자를 잔혹하게 처벌해서 무서운 본을 보이지 않으면 살인과 강도 사건이 빈발해서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한층 더 가혹한 벌을 주어야 하는 시대도 있다. 나라의 치안이 문란해지면, 거기에 따르는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게된다. 무기가 힘을 쓰는 전시에는 벌에 대한 비상한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살벌한 기풍이 휩쓸 것이다. 가뭄이나 전염병이 유행하는 때에는 벌을 더욱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오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다. 극형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어떤 특수한 죄악으로 달리는 민족들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 가기 위해서 이런 다양성으로 적절하게 대처하는데, 만일 이 다양성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에 대해서 심한 악의와 증오심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는데,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발언이다.39 다른 법들을 시인하며 채택할 때에는 단순한 비교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나라와 민족의 상태를 보아서 한다. 모세의 법을 폐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법은 원래 우리를 위해서 정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의 손을 통해서 법을 주신 것은 그 법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며 모든 시대에 실시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을 스스로 지키며 보호하시기로 하셨을 때에 특히 그들에 대한 입법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래서 현명한 입법자답게 특히 그들을 고려해서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17.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자리에 둔 문제 즉 법과 재판과 집권자는40 그리스도인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유용한가를 검토하겠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문제는, 사사로운 개인이 집권자들을 어느 정도로 공경하며 어느 정도로 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집권자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은 복수를 하거나 소송을 제기하거나 법에 호소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경건의 입장에서는 집권자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41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여기에 반대해서,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라고 단언한다(롬 13 : 4). 사도의 뜻은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셨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집권자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딤전 2 : 2). 우리가 이런 혜택을 입는 것이 불가하다면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게 하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집권자에게 도움을 호소하더라도 경건에 위반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람들을 취급해야 한다. 소송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소송을 해도 무서운 증오심과 맹렬한 복수심으로 날뛰며 고집과 앙심으로 상대자들을 파멸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그리고 부정을 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법적 절차를 밟는다는 구실로 하여 그런 악행을 변호한다. 그러나 형제를 상대로 법에 호소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해서 그 형제를 미워하거나 또는 해하겠다는 무모한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무자비하게 괴롭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18. 그리스도인이 소송하는 동기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때에 한해서 그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고의 기소와 피고의 변호를 위해서 소송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즉 피고가 지정된 날에 출정해서 될 수 있으면 이의를 제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말하며 자기의 당연한 권리에 속하는 것만을 옹호하려고 할 때에 그는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또 반대편의 원고도 신체와 재산에 부당한 압박을 받았을 때, 법관의 보호를 청하며 고소 이유를 말하고 공정하고 선한 결과를 구한다면 그도 역시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해하려는 생각이나 복수하려는 욕망이나 가혹한 증오심이나 투쟁욕을 일체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자에 대한 적의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입장을 양보하며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용의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악의로 차고 시기심으로 더럽혀지고 복수심에 찬 위협과 투쟁욕으로 타올라 사랑이 손상될 때에는 가장 공정한 주장을 위한 소송까지도 불경건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있다. 즉 마치 분쟁 중인 사건이 이미 평화롭게 해결되며 조정된 것같이, 사랑과 성의로 상대자를 대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소송을 바르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이런 온건한 태도는 어떤 소송 사건에서도 볼 수 없으며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나도 현재의 사정으로 보아 공정한 소송 당사자가 드물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악으로 더럽히지 않는다면 이 원칙은 여전히 선하고 순결하다. 집권자의 도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선물이라는 말을 듣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과실로 그 선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더욱 정성껏 경계해야 한다.

 

 

 

19.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모든 법정 투쟁을 엄금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과 깨끗한 자에게 깨끗할 수 있는 선물의 하나를(딛 1 : 15) 거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행동을 부끄러운 것이었다고 비난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바울은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중상을 논박하며 동시에 그들의 간계와 악의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행 24 : 12이하) 법정에서 자기의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주장했으며(행 16 : 37, 22 : 1,25), 필요한 때에는 불의한 재판장을 기피하고 가이사의 법정에 호소했다(행 25 : 10-11).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한 명령과 모순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법정에서 복수심을 멀리 축출한다(레19 : 18, 마 5 : 39, 신 32 : 35, 롬 12 : 19). 사건이 민사에 관한 것일 때 사건을 공안 수호자인 재판장에게 순진하고 단순하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바른 길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악을 악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롬 12 : 17). 이런 생각은 곧 복수심이다. 그러나 사형에 해당하거나 그 밖의 중대한 범죄인 경우에라도 우리는 고발자에게 불타는 듯한 복수심이나 사적 피해에 대한 원한을 품고 법정에 나갈 것이 아니라 사회를 해하려는 흉포한 사람의 노력을 방지하겠다는 생각만을 하라고 요구한다. 복수심을 버린다면 그리스도인은 복수하지 말라는 명령은 파괴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는 그리스도인은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의 손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며 압박과 괴로움을 받는 자들을 위해서 친히 복수하시겠다고 약속했으므로(롬 12 : 19), 자기나 타인을 위해서 법관의 원조를 청하는 사람은 천당의 보호자가 하실 복수를 앞질러 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법관이 하는 복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같이(롬 13 : 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을 시켜서 원수를 갚으신다.

 

 

 

20.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하시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겉옷을 주라고 명령하신다(마 5 : 39-40).4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의 복수심을 철저하게 싫어하여 악을 악으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 더 해를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관용과 인내심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참으로 그들은 중상과 손해를 받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들이다. 악인들의 악의와 사기와 조롱에 대한 방비가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모든 재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태연 자약해서, 한 가지 해를 받으면 다른 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일평생 계속적으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만을 자신에게 약속한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를 해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눅 6 : 28, 마 5 : 44 참조), 선으로써 악을 이기려고 노력해야 한다(롬 12 : 21).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승리다. 이런 정신으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복수를 가르친 것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의 몸이 상하고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그런 해를 받는 즉시 악인을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마 5 : 38이하).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평온하고 온건한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원수에 대한 친절을 유지하면서도 법관의 도움을 얻어 자기의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사회 복지에 대한 열의로 극악한 죄인 곧 죽음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죄인의 처벌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어거스틴은 이 여러 가지 교훈을 바르게 해석한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은 악인이 선하게 되기를 원하므로 악인의 악의를 참고 견딜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선인의 수효를 증가시킬 수 있으며 악인의 악을 본받아 스스로 악인의 무리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둘째, 이 교훈들은 밖에 나타나는 행위보다 속마음의 준비 태세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심과 호의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간직하면서, 겉으로는 그들에게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잘되기를 원해야 하기 때문이다.43

 

 

 

21.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소송을 죄악시했다고 하는 항의 역시 잘못이다(고전 6 : 5-8). 그의 말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 내에 소송에 대한 과소한 열기가 팽창해서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들의 종교가 불신자들의 조롱과 악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바울은 첫째, 그들의 과격한 분쟁으로 인하여 복음이 불신자 사회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비난한다. 둘째, 교우들끼리 이렇게 싸우는 것을 책망한다. 그들은 자기의 손해를 인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서로 남의 소유를 탐내며 까닭 없이 서로를 공격하며 가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덮어놓고 모든 논쟁을 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친 듯한 소송 열을 배격한 것이었다.

자기가 손해를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싸우기까지 한 것을 바울은 그들의 과실 또는 약점이라고 부른다. 조그마한 손실에도 곧 분개해서 법정에 달려가 고소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분노로 너무 많이 기울어지고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기독교 신자는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언제든지 자기의 권리를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행동해야 한다. 법정에 가면, 돌아올 때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되지 않을 수 가 없다. 손해가 너무 클 때 그리고 사랑을 잃지 않고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법에 호소하더라도 바울의 말에 배치되지 않는다. 요컨대(우리가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이)44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좋은 지혜를 각 사람에게 줄 것이다. 사랑을 버리고 하는 일과 사랑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분쟁은 절대로 공정하지 못하며 경건하지 못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불의한 통치자도 공경하며 순종하라. 22-29)

 

22. 공경

 

집권자들에 대해서 그 지배 아래에 있는 국민이 해야 할 첫째 의무는 그들의 지위를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45 집권자들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한으로서 주신 것으로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대표자로서 존경해야 한다. 세상에는 집권자에게 큰 경의를 표시하며, 순종할 만한 집권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회 복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집권자들을 일종의 필요악으로만 인정한다. 왕을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명령은(벧전 2 : 17)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과 왕을 경외하라고 가르치는 것도(잠 24 : 21) 같은 뜻이다.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말에는 왕에 대한 진실하고 솔직한 생각이 포함되었다. 왕과 하나님을 연결한 솔로몬은 왕은 거룩한 존귀와 위엄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도 우리는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롬 13 : 5). 사도의 말의 뜻은, 국민은 다만 군주나 통치자가 무서워서 그들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반항하면 즉시 복수할 무장을 하고 있는 원수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개 굴복한다). 국민이 집권자에게 복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게 된다. 통치자들의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집권자들의 인물을 논하지 않는다. 우매나 나태나 잔인성 그리고 악행이 가득한 악한 행실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은폐하거나, 이 악을 덕이라고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집권자의 지위 자체는 영예와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권자들을 높이며 그들의 지위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들도 공경해야 한다.

 

 

 

23. 복종

 

여기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즉 통치자들을 충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그들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야 하며, 그들의 포고에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방위 임무를 맡거나 그 밖의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복종심을 실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롬 13 : 1-2)라고 바울은 말한다.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라고 한다(딛 3 : 1). 또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말한다(벧전 2 : 13-14).46 그리고 복종하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통치자들의 안전과 번영을 하나님께 빌라고 첨부한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 : 1-2).

여기서 아무도 자기 기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집권자에게 항거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집권자를 모욕하고도 형을 받지 않을 수 있을 듯이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이 모욕에 중벌을 줄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그뿐 아니라 나는 사사로운 시민이 공중 앞에서 지켜야 하는 자제심도 일종의 복종으로 인정한다. 개인으로서의 시민은 자기를 억제해서 공적인 일에 일부러 간섭하거나 공연히 집권자의 직무를 침범하거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기가 손을 댈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자기 손을 묶어 놓아야 한다. 자유로운 손을 가진 것은 집권자뿐이므로 문제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은 명령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배자가 명령할 때 사사로운 시민은 공적 권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군주들의 자문관들을 보통 그들의 귀와 눈이라고 하기 때문에,47 군주들이 명령으로 임명해서 일을 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의 손이라고 할 수 있다.

 

 

 

24.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

 

지금까지 우리가 묘사한 집권자는 참으로 그 칭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즉 국부,48 시인이 말한 국민의 목자,49 평화의 수호자, 의의 보고자, 무죄한 사람을 위한 복수자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부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어리석다고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군주들은 당연히 유의해야 할 일에 등한하며 아무관심도 없이 자기의 쾌락만을 추구해 왔다. 또 일부 군주들은 자기 일에 열중해서 법과 특권과 재판과 청탁 편지를 경매에 부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반 국민의 돈을 빼내서는 심히 어리석은 증여에 낭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강도질을 하고 집을 털며 부녀자를 강간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따라서, 이런 자들을 집권자로 인정해서 가능한 한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에 설복당할 사람은 많지 않다. 집권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직책에도 어긋나는 이런 큰 치욕과 범죄 속에서는 집권자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으며, 선행하는 자를 표창하며 행악자를 벌하기 위해서 임명된(벧전 2 : 14) 하나님의 사자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배자의 존귀성과 권위를 가르치지만 그들은 이런 사람을 지배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런 타고난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사람들은 합법적인 임금들을 사랑하고 공경한 것같이 항상 폭군들을 미워하며 저주했다.

 

 

 

25.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본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앞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공정하고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 군주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할뿐만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든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비록 군주로서의 직책을 조금도 이행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또한 복종해야 한다. 주께서는 사람들의 안전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집권자의 직책을 그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증거하시며 집권자들에게 한계를 지정하시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집권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그에게서 권위를 받은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통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애의 진정한 표본의 증거이며,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은 국민의 사악을 벌하시기 위해서 세우셨고, 지배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합법적인 권력에 주신 거룩한 위엄을 부여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여기에 대한 확증을 첨가하겠다. 그러나 악한 임금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내리시는 진노란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욥 34 : 30, 호 13 : 11, 사 3 : 4, 10 : 5, 신 28 : 29). 아무도 내게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나 남의 가정을 더럽히는 간음하는 자나 남을 죽이려고 애쓰는 살인자와 같이 왕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성경은 이런 모든 재난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깐 머물러 사람들의 마음에 잘 이해되지 않는 이 일을 증명하겠다. 아무 영예도 받을 가치가 없는 심히 악한 인간이라도, 만일 공적 권력을 잡고 있다면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그의 공의와 심판의 사자에게 주신 저 고귀하고 거룩한 권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복종에 관해서는 가장 훌륭한 왕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그에게 드릴 그 공경과 존경을 악한 지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려야 한다.

 

 

 

26.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성경은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우리에게 자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나게 하므로, 나는 우선 독자들이 그 섭리에 주의하여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배치하며 원하시는 대로 임금들을 임명하시는 섭리의 특별한 작용을 신중하게 고찰하기를 바란다. 다니엘서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며 왕들을 혹은 폐하시고 혹은 세우신다(단 2 : 21,37). 마찬가지로, 이는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다(단 4 : 17) 성경에는 이런 구절들이 많은데 이 예언서에는 특히 많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정복한 느부갓네살이 어떤 임금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강력한 침략자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정복자였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애굽 땅을 정복한 수고 때문에 그에게 그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다(겔 29 : 19-20). 또 다니엘은 그에게 말했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단 2 : 37-38). 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에게 말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단 5 : 18-19). 우리는 하나님에서 어떤 왕을 임명하셨다는 것을 들을 때에, 왕을 공경하며 두려워하라는 저 하늘 명령을 곧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가장 악한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두신 자리에 서슴지 않고 두게 될 것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들에게 저 받을 고통에 대해서 경고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삼상 8 : 11-17) 왕들은 율법에서 모든 자제와 근신하는 훈련을 받았으므로, 물론 이런 일들을 왕의 권리로서 할 것은 아니었다(신 17 : 16이하). 그러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권리라고 하였다. 백성은 복종해야 하며 항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곧 왕들의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횡포는 극도에 달할 것이나 그것을 억제하는 것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즉 왕들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27. 예레미야 27장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경우

 

그러나 예레미야서에 명심할 만한 구절이 있다. 상당히 길지만 우리의 문제전체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주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나는 내 큰 능과 나의 든 팔로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땅을 사람에게 주었노라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 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그의 땅의 기한이 이르면 여러 나라와 큰 왕이 그도 자기를 섬기게 하리라마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렘 27 : 5-8,17).

저 가증하고 잔악한 폭군이 왕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는 폭군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왕위에 앉았으며 왕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므로 그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것은 불법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왕의 권위를 세우는 동일한 명령이 가장 무가치한 왕까지도 임명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생각하며 눈으로 본다면 결코 선동적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왕은 그 공적에 따라서 처우해야 한다고 하며, 우리에게 대해서 왕답지 못한 왕에게 우리가 피지배자로서의 예를 다하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은 선동적인 생각이다.50

 

 

 

28. 왕 개인을 존엄하다고 하는 성경의 증거

 

그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유한 것이었다고 하는 항의는 무가치하다. 우리는 주께서 어떤 이유로 그 명령을 확인하시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 : 6), 그러므로 그를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렘 27 : 17)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라를 받은 것이 분명한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어떤 사람을 왕위에 오르게 하실 때에는 그의 통치를 원하신다는 결의를 우리에게 보이신다. 이점에 관한 성경의 일반적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솔로몬의 잠언 28장에서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라고 하며(잠 28 : 2), 욥기 12장에도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라고 한다(욥 12 : 18). 이 점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섬기고 사는 것뿐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글에는 또 다른 명령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간 바벨론이 평안하기를 힘쓰며 그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나라가 평안하면 그들도 평안하겠기 때문이라고 하신다(렘 29 : 7). 여기서는 모든 재산을 잃고 고국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정치적으로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다른 구절에서 우리의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과는 다르다(마 5 : 44). 여기서는 정복자의 나라가 안전하며 평안하도록 기도해서 그들도 그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에게 왕으로 지명되어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을 때에도 무고한 박해를 가하는 사울의 목숨을 여전히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왕국의 영예로써 사울의 생명을 성별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고 했다(삼상 24 : 6). 또,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다(삼상 24 : 10). 또,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라고 했다(삼상 26 : 9-11).

 

 

 

29.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최대의 존경을, 따라서 최대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자주, 우리는 인물을 검토해서는 안 되며 여호와께서 불가침의 위엄을 새기신 그 직위를 여호와의 뜻에 의해서 그들이 지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반복한다.

그러나 통치자들도 통치를 받는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점을 근거로 삼아서 공정한 지배자들만을 섬겨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논리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은 서로 책임을 지니고 있다. 가령 부모와 남편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자.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심히 냉혹하고 난폭해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엡 6 : 4) 자녀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므로 지치게 만든다고 하자. 아내를 사랑하며(엡 5 : 25) 연약한 그릇으로 인정해서 아끼라는(벧전 3 : 7)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심한 학대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자기 구실을 하지 않는 그 악한 자들에게 여전히 순종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각각 "그들의 등에 달린 주머니를 보려고"51 해서는 안 된다. 즉 남의 의무를 묻고자 해서는 안 되며 자기의 유일한 의무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잔인한 군주가 우리를 학대할 때, 욕심이 많거나 방탕한 자가 우리를 착취할 때, 태만한 자가 우리를 무시할 때, 악하고 모독적인 자가 신앙을 이유로 우리를 괴롭힐 때, 이런 때에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의 비행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비행은 꾸준히 주의 채찍으로 징계를 받는다(단 9 : 7 참조).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겸손하게 되며 불안과 초조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또 생각해야 한다. 이런 병폐를 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주의 도움을 간청할 수 있을 뿐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보의 물과 같이 하나님이 마음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잠 21 : 1).52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의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시 82 : 1)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입맞추지 않는 왕들과 땅의 모든 법관들은 주의 앞에서 넘어지며 부서질 것이다(시 2 : 10-12). 불의한 법을 제정해서 빈민을 불공평하게 재판하며 미천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에게 토색하며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도 모두 여호와 앞에서 멸망할 것이다(사 10 : 1-2).

 

 

 

(그러나 헌법상의 관리들은 왕들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 우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30-31)

 

30.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섭리가 나타난다. 어떤 때는 그의 종들 가운데서 공공연한 복수자를 일으키셔서 악한 정부를 처벌하며 부당한 압박을 받는 그의 백성을 참혹한 불행에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어떤 때는 다른 의도를 품고 다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열광을 인도하셔서 이 목적을 달성하신다. 그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셨고(출 3 : 7-10), 옷니엘을 시켜 수리아 왕 구산의 폭력에서 구하셨으며(삿 3 : 9), 다른 왕들이나 사사들을 통하여 그 밖의 압제에서 구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교만을 애굽 사람을 통해서 누르시고 애굽 사람들의 거만을 앗수르 사람들을 시켜 꺾으셨다. 앗수르 사람들의 흉포는 갈대아 사람들로, 바벨론의 오만은 고레스가 메대 사람들을 굴복시킨 후에 메대 사람들과 바사 사람들로 꺽으셨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배은 망덕과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에 대한 그들의 불경하고 완고한 태도는 앗수르 사람들과 혹은 바벨론 사람들을 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쇄하며 처벌하셨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합법적인 소명에 의해서 파견되었고, 그들이 무력으로 왕들에 대항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왕들에게 주신 그 존엄성을 조금도 침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에서 무력을 받아 우세한 힘으로 열등한 힘을 굴복시켰다. 이것은 왕들이 부하들을 처벌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과 같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되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실행했으나 그 마음에는 오직 악행만을 계획했을 뿐이다.

 

 

 

31.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헌법상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행위가 그 자체로서는 어떻게 판단되든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일들 성취하신다. 즉 거만한 왕들의 피비린내 나는 흘을 꺾으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신다. 군주들은 듣고 떨라.53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집권자들의 권위를 멸시하거나 침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집권자들이 가장 무가치한 사람들이며 악행을 다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더럽힌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하나님의 지극히 중대한 명령으로 확립되었으며 존중할 만한 위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폭한 독재를 시정하며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이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곧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복종하며 고통을 참으라는 것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사사로운 개인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왕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국민의 관리들이 있다면(예컨대 고대 스파르타의 왕들에 대립한 감독관, 로마 집정관들에 대한 호민관, 아테네의 원로원에 대립한 지방장관 그리고 현재 각국 국회가 중요 회의를 열 때에 행사하는 권한 같은 것) 나는 그들이 왕들의 횡포한 방종에 대하여 그 직책대로 항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미천한 일반 대중에 대한 군주들의 폭정을 못 본 체한다면 나는 그들의 이 위선을 극악한 배신 행위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된 줄을 알면서도 그 자유를 배반하는 부정직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54

 

 

 

32. 인간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집권자들의 권위에 마땅히 복종해야 된다고 했지만 그 복종에는 항상 한 가지 예외가 있어야 한다. 실로 예외라기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즉 우리는 이런 복종으로 인하여, 모든 왕들의 욕망도 마땅히 복종해야 할 분에게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왕들의 모든 명령도 그분의 명령에 양보해야 하며 왕들의 권력은 그분의 위엄 앞에 굴복해야 한다.55 그분을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분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왕들의 왕이시며, 주께서 입을 여실 때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더 중요시해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들 위에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을 존경하지 말라. 이런 경우에는 집권자들이 가진 위엄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최고의 권력 앞에 굴복한다고 해도 그들의 위엄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다니엘은 왕의 불경건한 칙령에 복종하지 않은 자기가 왕에게 어떤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단 6 : 22-23).56 이는 왕이야말로 자기의 한계를 넘어 사람들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하여 자기의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의 악한 포고에 순종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호 5 : 13).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새로운 우상을 따르게 되었다(왕상 12 : 30). 그들의 자손도 같은 식으로 왕들의 명령에 곧 복종했다. 예언자는 그들이 왕의 칙령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들을 엄하게 책망했다(호 5 : 11). 거짓된 겸손은 결코 칭찬할 수 없다. 조정에 있는 간신들은 겸손을 가장하고 단순한 백성을 속이면서, 자기들이 왕명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죽을 인간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셔서 그들로 인류를 지배하게 하셨다는 듯, 또는 지상의 권력을 주신 분 앞에서는 하늘의 권력들도 떨고 굴복하는데도 그분에게 복종한다면 지상의 권력이 축소된다는 듯이 생각한다. 나는 절개를 지키는 데에는 어떤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왕은 항거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며, 솔로몬은 "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자와 같다"고 했다(잠16 : 14). 그러나 하늘의 사자인 베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행 5 : 29) 칙령을 선포했으므로, 우리는 경건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받는 편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도록 하자. 또 우리의 용기가 꺾이지 않도록 바울은 또 다른 자극을 주어 우리를 격려한다. 이는 곧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회생하셨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악한 욕망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불경건한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고전 7 : 23).

 

하나님을 찬양하라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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