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3 권 (2)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7

12. 오시안더를 논함

 

오시안더가 독자들에게서 숨기고 있지 않다고 장담하는 그 신비에 대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주목하도록 경고한다. 우선 그는 장황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데(그의 말을 쓴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의는 중보자로서의 위격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의로써 그의 밧줄을 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린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논쟁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지만(고전 1 : 30), 이것은 영원한 말씀에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의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참으로 그의 영원한 지혜였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이 이름을 그에게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 : 3).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것을(요 17 : 5 참조)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에 적용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잘 부합한다.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도 빛은 암흑에 비취었으나(요 1 : 5),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의의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리고 자기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기까지는(요 8 : 12), 그 빛은 숨겨져 있었다.

또 오시안더는 미련하게도 의롭다 하는 능력은 어느 피조물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천사와 인간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반격한다. 천사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보속을 치르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성과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인 그리스도께 속한 일이었다.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율법에 복종하셨기 때문이다(갈 3 : 13, 4 : 4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의 신성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심히 비열한 비난을 가한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중 한 가지 성은 버리고 더우기 두 하나님을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애려고(히 2 : 14 참조)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보면, 우리는 그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영광을 빼앗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를 밝힐 뿐이다. 이 점에서 오시안더는 가증스런 오류에 빠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된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와 권능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즉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주장한다. 나는 그가 무분별하고 상식을 벗어나서 성경 구절들을 무수히 인용하여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며, 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본질적 의"라고 해석해야 된다고 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무시하겠다. 예컨대 다윗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의에 호소할 때에 백 번 이상 호소하지만 오시안더는 번번이 서슴지 않고 그 뜻을 곡해한다.

그가 제기하는 다른 반대도 더 강력한 것이 못된다. 그는 우리를 바르게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것이 의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며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키며 일을 행하게"(빌 J : 13 참조) 하신다고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개조하셔서 우리 생활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하시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손을 통해서 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성령의 모든 충만하심을 맡기셔서, 그의 풍성함에서 지체들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신다. 다음에, 비록 의는 그의 신성의 은밀한 원천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가(요 17 : 19)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 자신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우셨으며 만일 아버지의 뜻이 그를 밀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25 오시안더가 첨부하는 내용도 이에 못지 않게 불합리하다.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공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26 이것은 오시안더 자신과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수단인 그의 공상에 아무것도 더 첨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의 원천이며 시초이시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로우며,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이런 추론을 누가 누구에게 허락하는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의로 호심경을 삼으신다"고 한다(사 59 : 1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미 주신 무장을 빼앗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속자가 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는가? 예언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 이외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시지 않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아무 도움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뜻을 간단하게 다른 말로 바꿔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한다(롬 3 : 25). 그러나 이 말이 그가 다른 곳에서 "단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롬 5 : 19)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 가련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에 전적으로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회롱으로 그리스도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자이다(막 15 : 17, 기타).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27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한다.28 우선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한 쪽을 세우면 다른 쪽은 넘어져야 할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로 하자. 사도는 "모든 것을…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 : 8-9)고 한다. 여기서는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멸망한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 : 3).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자랑이 없어진다고 말한다(롬 3 : 27). 여기서 행위에 의한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믿음이 모든 자랑을 없애버린다면, 행위에 의한 의를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로마서 4장에서 불평이나 구실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 : 2). 그러므로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에 바울은 반대 개념을 써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산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 : 4)라고 다른 논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은혜로서 주시는 의는 믿음에 따라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의 공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이런 의를 생각 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는 작별해야 한다.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성경의 뜻을 곡해하며 무의미한 트집잡기를 오락으로 삼는 이 궤변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묘한 핑계를 발견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행위"의 뜻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 자기의 자유 의지의 노력으로 율법적인 문자에 따라서만 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영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의는 그리스도의 영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며, 우리 자비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의를 가로채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가 미련하다는 것을 설복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도입하는 이 대오에서는 어떤 명칭이 그 행위들을 미화하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배제된다(갈 3 : 11-12).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에 의한 의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 믿음에 의한 의라는 것이다(롬 10 : 5,9).

그뿐 아니라, 후에 적당한 곳에서 알게 되겠지만29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의롭다하는 힘을 믿음에 돌릴 때에는 영적인 행위까지도 중요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전연 없었다고-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30 -한 바울의 말은 문자적이며 또는 외적인 유덕한 모양이나 자유 의지의 노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조작품을 유치하게 혼합한다. 더구나 그들은31 그에 못지 않게 패악한 사상을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감염시킨다. 두려움에 떠는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데도 그들은 영과 은혜라는 가면으로 하나님의 자비까지도 덮어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과 함께 율법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의롭게 될 만한 특별히 유익한 행위가 없으므로 행위로써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황주의에 속한 일반 사람들과 스콜라 학자들은 여기서 이중으로 속는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화신이 믿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해 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 : 8)고 한 말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저술을 보면, "은혜"라는 말을 쓸 때에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길이 두 가지라고 설명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다 하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자극을 받아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한다. 둘째로, 이 사랑을 통해서 마귀가 우리를 사로잡는 데 사용하는 죄가 소멸되어,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구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32

이와 같이 롬바르드가 칭의 안에서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선행으로 인도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그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멀리서 따라갈 뿐이며, 바르게 본받지 않고 상당히 어긋난 쪽으로 가기까지 한다. 어거스틴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롬바르드는 모호하게 만들며 어거스틴의 생각이 다소 오염된 때에 롬바르드는 아주 썩게 만든다.

스콜라 학파들은 점점 더 타락해서 드디어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를-적어도 그의 표현 방법을-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사람에게 의를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온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지만, 여전히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며,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한다.33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한 성경의 판단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해서 이와는 훨씬 다르게 가르친다. 즉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기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한다. 참으로 칭의의 순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다른 아무것도 찾으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상태만을 보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실 이유를 자신 안에서 찾으신다.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체험인데 죄인이 복음의 교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였으나 그가 받을 영원한 의는 그가 원하는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장만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을 하나씩 숙고한다면, 우리가 표명한 의견이 분명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논술한 순서보다 더 좋은 순서로 배열할 수도 있을 것이나 여러 가지 점이 서로 부합하여 우리가 전체 사항을 바르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배열 순서는 문제가 아니다.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믿음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위에서 확립한 것을 여기서 회상해야 한다. 복음에서 제시되는 의를 믿음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의가 제시된다고 하므로 행위에 대한 고려는 일체 배제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구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 10 : 5)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 10 : 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롬 10 : 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서, 율법은 행위에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중요한 구절이며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는 율법의 모든 조항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를 많은 곤란에서 구출해 낼 수 있다. 바울이 약속과 율법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빈번히 대립시키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갈 3 : 18). 같은 장에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그런데 물론 율법에도 그 자체의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비교가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면, 복음의 약속에도 어떤 특이한 점이 있을 것이다. 복음의 약속은 값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이것이 그 차이점이 아닌가? 사람이 자기의 힘과 자유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주책 없이 의를 자랑할 때에, 그런 의만이 배척되는 것이라고 하여34 나를 반대하고 위협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바울은 오해할 여지가 없는 말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롬 8 : 3 참조). 보통 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는 없다. 물론, 율법의 극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런 사랑을 품게 만들 때에 왜 그것이 우리의 의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가? 성자들도 사랑이 불완전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상을 받을 공로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18.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구절은 이것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 : 11-12 참조). 행위는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믿음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주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율법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관계를 보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들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가 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복음이 말해주는 의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이유가 없다 (롬 4 : 2-3)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주장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보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의가 성립된다고 부언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 : 4-5). 참으로 그가 여기서 쓰는 말들의 뜻은 이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는 조금 후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받으며, 이 일은 은혜로써 오는 것이라고 부언한다. 또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이 유업은 거저 받는 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 : 16 참조). 믿음이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바울의 추론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는 다른 구절에서도 확실히 같은 의미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가르친다(롬 3 : 21). 그는 율법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행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나 행함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19. "믿음만으로" 통해서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롬 3 : 28)35 하는 우리의 교리에 대해서, 궤변가들이 잡는 트집이 어느 정도로 공정한가를 독자는 이제 알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이 교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 4 : 2이하) 주장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려는가? 거저 주는 선물과 행위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가? 바울이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고(롬 1 : 17) 한 말을 그들은 어떤 기만 수단으로 회피할 것인가?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거짓된 구실-분명히 어리석은 구실을 만들어서 이 "만"이란 말을 제거해야 된다고 고집한다. 모든 것을 행위에서 빼앗는 사람이 모든 것을 믿음에만 돌리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 열거하는 말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 : 21),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24),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 : 28).

여기서 그들은 교묘한 궤변을 쓴다.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고 오리겐과 기타 고대 교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미련한 구실에 불과하다. 그들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는 배제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지껄인다.36 끊임없는 언쟁으로 그 방면에 능숙하게 된 그들은 논리의 초보자라 이해하지 못한다. 사도가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할 때에 정신없이 지껄인 것인가?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 : 12, 3 : 18), 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 : 10, 신 27 : 26).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의식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거나, 의를 어기는 사람들에게만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구절들이 도덕적인 면의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의롭다 하는 권한에서 도덕적 행위가 배제된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같은 목적으로 다른 논법을 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으로(롬 3 : 20), 의는 생기지 않는다. "율법은 진노를 키우게"하므로(롬 4 : 15),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양심에 확신을 주지 못하므로 의도 주지 못한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므로 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행함 없이 얻는 것이다(롬 4 : 4-5).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므로 우리의 자랑은 제거되었다(롬 3 : 27).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 : 21-22). 그러면 이런 발언들은 의식적 행위에 적용되고 도덕적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감히 지껄일 수 있으면 지껄여 보라. 어린 학생들이라도 그런 철면피를 야유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는 능력이 율법에 없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은 확실히 율법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20. "율법의 행위"

 

사도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라는 제한을 첨부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설명할 수 있다. 행위는 귀한 것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하나님이 시인하시기 때문이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인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행위에 대한 의를 하나님에 천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당연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가 의라는 이름과 보상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또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사도는 다른 곳에서, 언약을 한 후 사백삼십 년이 지나서 율법을 주셨다고 선언한다(갈 3 : 17). 무지한 자들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의로운 행위가 있을 수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 논법을 비웃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와 허락이 있어야만 행위에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에는 행위에 의롭게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생각한 것이다. 그가 칭의의 조건을 율법의 행위에서 빼앗으려고 할 때에,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한 분명히 이유는 율법의 행위만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임이 명백하다.

그는 간혹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고 모든 행위를 부정한다. 예컨대 다윗의 증거를 근거로 삼아서, 행위와는 별도로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롬 4 : 6, 시 32 : 1-2).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트집을 잡더라도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저 특수한 표현을 일반적 원칙으로37 생각한다.

또 그들은 세밀하나 어리석은 구별을 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한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으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에 의존한다고 한다.38 사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만이(갈 5 : 6)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가 역설하는 일이 모두 와해되고 말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 : 4). 바울이 그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연히 보상을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 이외에는 믿음의 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

 

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39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 우리가 항상 돌아가야 할 원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인인 동안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 : 1-2)라고 잘 표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니, 하나님의 얼굴을 죄인에게서 돌이키시게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죄인을 상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이질적인 일이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구라고 가르친다(롬 5 : 8-10). 그래서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주께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만일 행위에 의해서 판단된다면, 그들은 죄인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내가 이미40 인용한 바울의 말은 이 두 가지 점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 : 19).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 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증거를 인용하여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행위와는 별도로 의를 돌려주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윗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롬 4 : 6-8, 시 32 : 1-2). 분명히 다윗은 여기서 의를 말하는 대신에 복을 말한다. 그는 죄가 용서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므로 우리는 다른 정의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구원을 아는 지식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노래한다(눅 1 : 77). 바울이 안디옥 사람들에게 구원의 요점에 대하여 설교할 때에도 이 원칙을 따른다.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 : 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얻는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41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42 그는 전에도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43 라고 말한 적이 있다.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신중히 고찰할 만한 점이다. 참으로 여기서는 저 경박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의롭게 되기 때문이라고44 하는 이 경박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며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다. 자기 밖에서 의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의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극히 분명하게 주장한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 21).45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여 기서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히 또 풍부하게 가졌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졌다고(롬 8 : 3-4)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만 한가지이며, 우리는 전가에 의해서 그것을 얻는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조금 전에 한 말에서도 똑같은 뜻을 표명한 것이 명백하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 : 19).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46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이 의의 한 예로 해석한 암브로 시우스의 말은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야곱은 자기에게 장자의 권리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의 옷안에 숨고 향기 나는 형의 겉옷을 입은 후에(창 27 : 27)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아버지의 호감을 얻고 자기를 위하여 축복을 받았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맏형 그리스도의 고귀한 순결 밑에 숨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의46x 말은 이렇다. "이삭이 옷의 향취를 맡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기 때문이다."47

참으로 이것은 진리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한다.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칭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 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이 모든 일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완전히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지만, 이 일들이 얼마나 필요하냐 하는 것은 이 논의 전체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분명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무리의 논의는 인간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행위의 성실성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놀랄 만큼 경솔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단정한다.

사실 행위에 의한 의를 가장 자신 있게, 가장 요란하게 떠드는 자는 현저한 병에 걸려 괴이한 모습을 보이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뒤뚱거리는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느낀다면, 그렇게 까지는 우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면 그것을 존중할 줄도 모르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 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수도원의 회랑에 앉아서 누구든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행위 가치에 대해서 쉽게 지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며, 경박한 언쟁을1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유희를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의에 관해서 유익한 탐구를 하고 싶으면, 유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늘 심판자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2 이것이 그 문제이다. 우리는 이 심판자를 우리의 마음이 본래 상상하는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마음에 그려야 한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워지며(욥 3 : 9) 그의 힘은 산들을 녹이며 그의 진노는 땅을 떨게 만든다(욥 9 : 5-6 참조). 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며(욥 5 : 13), 그의 순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불결하여(욥 25 : 5 참조), 그의 의는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으며(욥 4 : 18 참조), 유죄한 자를 무죄하다고 아니하시며(욥 9 : 20 참조), 그의 복수에 한번 불이 붙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간다(신 32 : 22, 욥 26 : 6 참조). 그가 사람들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하여 심판대에 앉으셨다고 생각해 보자. 누가 그의 보좌 앞에 자신 있게 설 것인가?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라고(사 33 : 14-15) 선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 아무도 나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무서운 말이 들려온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 : 3).

또 다른 곳에도 쓰여 있듯이 참으로 모든 사람은 곧 멸망할 것이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욥 4 : 17-20).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 : 15-16)라고 하였다.

사실 욥기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를 말한다. 이 구별은 계속할 가치가 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는 의 앞에서는 검사에 견딜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은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지만 천사들의 거룩도 하늘 저울로 달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의를 나는 논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기록된 율법의 표준에 따라 우리 생활을 검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저주를 말씀하신 것에 공포와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둔감하다. 예컨대 이런 일반적인 저주가 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 : 10, 신 27 : 26). 간단히 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우리는 허망한 자랑을 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위로 향하고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만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할 것을 가졌노라고 누구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갈 때 우리의 그런 확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또 우리의 육체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관련해서 한없이 무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의 영혼에도 나타난다. 가까운 물건만을 볼 때에는 눈의 식별력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태양을 볼 때에는 우리의 시력은 엄청난 광채로 마비되며, 땅에 있는 물건을 볼 때에 느끼던 강한 힘은 없어지고 무력함을 느낄 뿐이다.3 그러므로 우리는 빈 껍데기뿐인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동등하거나 또는 우월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일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우리의 야성이 길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하신 대답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 : 15). 사람에게로 가서 당신의 의를 교만하게 자랑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의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성령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 : 2). 다른 종은 조금 다른 뜻으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 : 2-3)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 히 듣는다. 곧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천 가지 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하나도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인 바울이 자기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지만,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고전 4 : 4), 그는 이런 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3. 진정한 의의 증인으로써 어거스틴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이런 예는 성경에 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저술가들도 모두 이것이 그들의 견해란 것을 표시하였다. 어거스틴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객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가지 희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딤전 2 : 5-6 참조)4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행위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 있는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희망을 남기지 않는다. 베르나르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나는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

세상은 위험하고, 육체는 내리누르며, 마귀는 올무를 놓는다. 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대한 죄를 지었으며 나의 양심은 어지럽다. 그러나 나는 내 주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5 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후에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분명히 그에게 자비가 있으면 나에게도 공로가 있다. 주의 자비가 풍성하면, 나의 공로도 똑같이 풍부하다. 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의 의는 또한 저의 의 옵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를 나의 의로 만드셨다.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을 전적으로 안전하게 만드시는 일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의 완전한 공로가 된다."고 했고 같은 뜻으로, 그는 평화를 유지하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당신의 영광이 여전히 쇠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평화가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겠나이다. 또한 일체의 영광을 거부하나이다. 제 것이 아닌 것을 횡령한다면, 주신 것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한 구절이 있다. "무슨 까닭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자랑할 더욱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에 있지 않은가?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이는 특히 예언서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겔 36 : 22,32).

공로로는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는 것이 곧 넉넉한 공로이다. 그러나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은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 베르나르드가 선행에 대해서 공로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목적은 위선자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위선자들은 방자한 죄악 생활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곧 이 점을 설명한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행복하다."

교회는 담대할 이유는 있으나 공로는 없다. 공로가 있으나, 가치 있는 공로가 되게 하려면 있는 체하지 않아야 한다.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공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담대하게 자랑한다. 주의 풍성한 자비가 자랑할 까닭을 넉넉히 제공하기 때문이다.6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 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한다. 4-8)

 

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만이 없어진다

 

이것은 사실이다. 각성한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에는, 이것만이 안전한 피난처이며 마음놓고 호흡할 곳임을 깨닫는다.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인간의 가장 회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비교는 지극히 엄격한 시험이 될 것이며, 마음속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의지까지도 드러낼 것이다. 바울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한 것과 같다(고전 4 : 5).

이렇게 되면 게으르게 숨어 있던 양심은 이미 잊어버린 일까지도 모조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고소하는 마귀는 지금까지 우리를 시켜 짓게 한 죄악을 모두 알므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곳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 도취에 빠져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위선은 그 때에는 당황하며 붕괴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느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난 체 하는 그 위선뿐이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이런 광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즐겁고 평화롭게 자기의 의를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빼앗길 것이다. 꿈에 많은 대물을 쌓았다가도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7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본래 맹목적이다. 이는 아무도 잘난 체하는 악폐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악폐가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고 선언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라고 솔로몬은 말한다(잠 21 : 2).

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잠 16 : 2)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 망상 때문에 무죄 방면이 되는가? 물론 되지 않는다. 같은 구절에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잠 16 : 2) 하였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 다신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런 아첨에서는 유익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알면서 자기 기만에 빠져 멸망해서는 안 된다. 자기 검토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이는 우리의 패악성의 비밀한 곳을 심판대의 빛으로 철저히 드러낼 필요가 있으며,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에 있는 말씀들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 : 4, 6),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 : 16).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 : 4). 그 때라야 우리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욥 9 : 20)는 욥과 같은 체험을 할 것이다.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불평한 말인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 : 6)이란 말은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 참으로 그는 여기서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이 검토의 엄격성은 우리를 완전히 놀라게 할 때까지 되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 : 5, 약 4 : 6, 잠 3 : 34 참조).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하고 부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의 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파멸적인 위선을 가르친 것이다.8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과 자기 마음에 느끼는 것이 반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악행이다. 그러나 올바른 느낌을 가지려면, 우리는 즉시 자기에게 있는 고귀한 듯한 것을 일체 짓밟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라는(시 18 : 27, 라틴역 17 : 28 참조)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하는 것을 의지한다. 자기의 비참함과 빈곤함을 알고 진실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나 겸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께서 스바냐서에서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 : 11-12)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누가 겸손한 사람인가를 분명히 지적하시지 않는가? 그 사람은 자기의 빈곤함을 알고 고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랑한다"고 하신다. 번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하시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주를 바라는 것만을 남겨주셨다. 이사야서에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 : 2)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손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하려 함이라"(사 57 : 15)고 하였다.

우리는 "통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땅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겸손한 사람과 함께 높임을 받으려면,9 우리 마음에 이런 통회로 인한 상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교만이 꺾이며, 수치와 치욕을 당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주께서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설명하셨다(눅 18 : 13). 세리가 한 행동을 가짜 겸손의 표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더 가까이 오지 못한 것,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그가 충심으로 느낀 것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개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보통 사람들 즉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주 두 번씩 금식하며, 가진 것의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감사하노라고 한다(눅 18 : 11-12). 그의 공개적인 고백에서는 그에게 있는 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눅 18 : 14). 그러므로 우리의 겸손을 주께서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즉 우쭐하는 생각이 차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며 따라서 자비를 받을 수 없다. 아무도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때 그리스도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슬픈 자를 위로하되…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 61 : 1-3). 이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만을 불러 자신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마 11 : 28). 그리고 다른 곳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마 9 : 13).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 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 만족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된다. 행위에 대한 자신이 없더라도 자기 만족은 있을 수 있다. 많은 죄인들이 그 죄악 생활의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취한 것처럼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얻으려고 애쓸 줄을 모른다. 자기의 의에 대한 확신과 같이 그런 태만도 버려야만 우리는 비워지고 주린 마음으로 거리낌없이 주의 앞으로 달려가, 주의 주시는 좋은 것으로 배부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된다.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안을 때에"라고 말한다.10 그가 우리 안에서 공로를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선물을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드도 이와 일치하는 뜻으로 교만한 자들을 불성실한 하인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기를 지나쳐 가는 은혜를 자기의 것인 듯이 생각하여 사소한 일에도 자기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마치 벽이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 빛을 낸다고 하는 것과 같다.11

이 문제에 시간을 더 보내지 않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이며 확실한 원칙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말하겠다. 즉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 즉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다.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한다. 즉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1 하며,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의가 문제될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라는2 간곡한 권고가 매우 자주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라고 증거한다(롬 3 : 25). 그러나 그는 곧 이 의를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을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 : 26)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고 인정되며, 자격 없는 자에게 의의 선물을 거저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는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다(롬 3 : 19). 이는 사람에게 자기를 변호할 구실이 있는 동안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소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에는, 우리가 우리의 불의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겔 20 : 43),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20 : 44).

만일 이런 일들이 즉, 우리 자신의 불의를 알고 고민하며, 무가치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의 일부라면, 우리는 그의 거저 주시는 의롭다하심을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훔치려 하는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렘 9 : 23), 그러나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고전 1 : 31, 렘 9 : 24) 했을 때에, 그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된다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바울은 이 말씀을 이런 뜻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 : 30-31). 그가 말하는 뜻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이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물론 사태는 이렇다. 즉,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참으로 바울은, 사람에게서 자랑할 구실을 완전히 빼앗은 때라야 세상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고 생각한다(롬 3 : 19 참조).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고 선포하면서, "자랑하리라"는 말을 첨가한다(사 45 : 25). 이것은 선민은 주를 자랑하며, 주 이외의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 위하여 주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앞에 있는 구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자랑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즉,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힘은 여호와께 있다고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사 45 : 24). 단순한 고백이 아니고, 맹세로써 확인된 고백을 요구하는 데 유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되는대로 겸손을 가장 하면서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기 때문이다. 교만한 생각이 없이 자기의 의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이는 이런 자기 평가에는 반드시 자기 신뢰가 따르며, 스스로에게서는 반드시 자랑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찬양은 전적으로 주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말대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롬 3 : 26)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그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엡 1 : 6) 말한 후에, 이 뜻을 반복해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 8-9)고 부언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벧전 2 : 9). 베드로의 의도는 분명히 신자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만이 들려, 육에 붙은 모든 자만을 압도하며 침묵시키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의의 한 부스러기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는 불가피하게 모독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물을 때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의를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 : 9)라는 솔로몬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히 무한한 추악 속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양심 속으로 깊이 내려가서3 자기가 한 일을 검토한다면, 그가 얻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모두 잘된 듯이 달콤한 안도감을 즐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인가?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을 볼 때에 그의 심판 앞에서 확고한 평화를 느끼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지옥에 빠지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도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만큼 견고한 의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의에 관한 손익은 무익하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태연하게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런 때에 한해서 우리가 가진 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 점을 역설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 말보다 그의 말로 표현해 보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롬 4 : 14). 사도는 우선, 만일 의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의 행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거나 율법을 준수하는 데 좌우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며 배제된다고 추론한다. 아무도 그런 약속을 믿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아무도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을 완수했다는 확신이 결코 생길 수 없다. 이에 대한 증명은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한 눈으로 자기를 본다면, 누구든지 자기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 있게 제멋대로 생활하며, 심지어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자화 자찬을 대립시켜, 하나님의 법적 절차를 중지하도록 강요하려는 듯이 행동한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위선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에 파묻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훨씬 다른 근심과 고민이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의혹이 잠입하고, 드디어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는 무거운 빛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보라, 믿음은 벌써 눌리고 소멸되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2 : 5, 고후 13 : 4 참조).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바울은 약속이 무용하며 무효하게 되리라는 또 다른 점도 첨부한다. 우리의 공로에 따라서 약속이 실현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경지에 언제 도달할 것인가? 실로 이 둘째 점은 첫째 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약속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실현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약속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은혜에 의한 약속을 확립하기 위해서 기업은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할 때에 기업은 풍성하게 확인된다.

자비와 신실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약속하시는 것은 신실하게 실행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구원을 구하기 전에, 우선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고 말한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 119 : 76). 이 순서는 바르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다만 그의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근거로 삼고 그 위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깊고 든든하게 세우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 행위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행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 안에서 그들을 영원히 지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약속하셨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맹세하셨다.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 일을 선포할 때에, 아무도 불안을 느껴서는 안 된다."4라고 하였다. 베르나르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신다(마 19 : 25-26). 이것이 우리가 믿는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의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품는 이유의 전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우리는 그의 의지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누가 아느뇨"(전 9 : 1 참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 : 34, 사 40 : 13 참조). 여기서 믿음이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고, 진리가 우리를 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모르는 것, 아버지의 가슴속에 숨겨 있는 것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성령의 증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롬8 : 16) 우리의 마음에 확신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심으로써 설득해주실 필요가 있다. 확실히 이 일에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중간 통로가 있다.5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양심의 완전한 확신으로 붙잡은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은 확립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의심이나 불안이 있으면 약속은 무효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또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는 약속은 흔들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의가 우리를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행위를 문제로 삼지않고 신앙만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는 전연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가랴의 유명한 예언은 성취된다. 즉 이 땅에서 죄악이 제거될 때에는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슥 3 : 10) 하였다.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언자의 뜻이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쓰는 비유를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논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외면적인 복을 영적 은혜의 모형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키는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과(사 9 : 6) "우리의 화평"이라고(엡 2 : 14) 부른다.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푼 회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6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나는 왜 비교적 모호한 증거를 사용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롬 5 : 1)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에 평화와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바울의 시종 여일한 주장이 있다.

동시에 그는 이 확신의 근원을 밝힌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는 때라고 한다(롬 5 : 5).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모든 신자를 대표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는다(롬 8 : 35,39의 융합). 저 피난처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떨지만, 주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면 죽음의 암흑 속에서도 안전할 것이다(시 23 : 1,4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중생한 우리가 영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은7 은혜의 감미로움을8 맛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터키 사람이나 다른 불신 국민들같이 올바른 기도법도 모른다. 그것은 바울이 증거하듯이, 아버지의 아름답고 다정한 이름을9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믿음은-우리 입이 저절로 열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갈 4 : 6, 롬 8 : 15) 하지 않는 믿음은-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 : 12). 이런 일은 중생의 선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육신에 있는 동안 중생은 항상 불완전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각종 원인을 내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책은, 천국의 기업에 대한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한다.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이다(렘 17 : 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 8 : 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 94 : 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 36 : 1, 롬 3 : 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시 14 : 2). 요컨대 그들은 육이다(창 6 : 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갈 5 : 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선 나는 불신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현저한 재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1 또한 티토나 트라얀의 공정과 온건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안의 정신 착란, 방탕, 잔인성 등과 다름이 없다든가 또는 티베리우스의 음탕한 생활과 베스파시안의 이 점에 있어서의 절제 생활이 다름이 없다든가 하는 것, 또는 개개의 덕과 죄악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바른 길과 법을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내가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그 죽은 모습까지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의와 불의를 혼동한다면 세계에 어떤 질서가 남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마음에 착한 일과 악한 일의 차이를 새겨 두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의 경륜에 의해서 그 차이점을 가끔 확인하신다. 사회에서 유덕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현세의 복을 많이 주신다. 이것은 그런 덕의 겉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비록 외면적이며 가장한 의일지라도 그에 대한 현세적인 보상을 반드시 주신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방금 인정한 주장 즉, 이런 덕은, 더 적절하게 말해서 이런 덕의 형상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결코 칭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말은 여전히 옳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 멀어진 사람은 그 덕망이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 마음이 오염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에, 상보다도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의와 극기와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이 선한 사업을 심히 망칠 뿐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행에 대한 진지한 열성보다도 단순한 야심이나 이기심이나 그 밖의 악한 동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 근원인 마음이 불결하고 부패했으므로 덕과 비슷하여 사람의 눈을 속이는 악행과 같이 덕행이라고 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바른 일의 목적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것을 목표로 삼은 노력은 "바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명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그 패악한 의도로 보아서 죄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훌륭한 행위를 했던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 카토와 유사한 사람들도 행위로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의 광명이 없었고, 그들의 행위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는 그들에게 없었다. 그것은 의무 수행이 행동보다 의도에 의해서 그 가치가 판단되기 때문이다.2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고(요일 5 : 12) 하는 요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평생 멸망으로 또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 급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과 일치되는 말을 어거스틴도 했다. "우리의 종교는 의와 불의를 행위의 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의 법에 의해서 분별한다. 믿음이 없으면 선행 같은 것도 죄로 변한다."3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생각을 비유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이런 사람들의 열성은 길을 벗어나서 달음질을 계속하는 사람과 같아서 힘을 다하여 달릴수록 더욱더 목표에서 멀어지며 더욱더 불행하게 된다.

따라서 바른 길에서 절며 가는 편이 길 밖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그는 말한다.4 끝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도 없으므로 분명히 그들은 나쁜 나무와 같다. 보기에 아름다운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은 맛도 좋을는지 모르나 몸에는 조금도 좋지 않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의에 대하여 무가치할 뿐 아니라, 확실히 정죄를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듯이 우리는 무슨 까닭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는(히 11 : 6) 사도의 말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며(요 5 : 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한다(고후 5 : 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위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한다(엡 2 : 4-5). 다른 곳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다(롬 4 : 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 : 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는 의미에서(롬 11 : 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차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위에서5 인용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 2 : 8-9 참조)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 1 : 9)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딛 3 : 4-5,7) 인정해야 한다. 이 고백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의를 빼앗는다. 즉,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만일 행위의 의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가 의롭다 하심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분명히 그는 이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만일 행위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은혜는 벌써 은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롬 11 : 6). 주께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마 9 : 13) 말씀하신 뜻도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죄인만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를 가장하면서까지 들어가려고 애쓸 것인가?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애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스럽거나 모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비에 부당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악의는 큰 압력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좀더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이 분명하므로 내 자신의 말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주장을 세우겠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모사한 다음에 회복의 순서를 아름다운 말로 첨가한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 59 : 15-16). 하나님을 도와 구원 사역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 있는 것인가? 다른 예언자도 죄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호 2 : 19,23). 이것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첫 연합을 의미하는 계약이며,6 이 계약이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우리의 의가 설 곳은 전연 없다.

사람은 다소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대체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의 이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하나님께서 멸시하시는 원수들이-또 그들의 행위가-어떤 용납될 만한 것을 하나님 앞에 보낼 수 있겠는가? 의롭다함을 얻고 또 친구로서 영접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 철저하고 노골적인 원수라는 것을 진리는 증거한다(롬 5 : 10, 골 1 : 21 참조). 칭의가 사랑의 시초라면, 어떤 행위에 의한 의가 그보다 먼저 있을 것인가?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요일 4 : 10) 성실하게 깨우쳐 준다. 여호와께서도 이미 예언자를 통해서 똑같은 뜻을 가르치셨다. "내가‥‥‥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 : 4).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기꺼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때문에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은 이 뜻을 오해하여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7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전 6 : 11). 베드로도 같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화의 사역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벧전 1 : 2). 만일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는다면, 이 정결(净洁)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받은 때에(빌 1 : 29), 드디어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틀 받는다. 7-8)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분류 중에서8 둘째 종류와 셋째 종류가 포함된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한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죄인이 그의 심판대 앞에 가중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악한 마음이 지적되어도 여전히 자기들에게 아무 의도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기들의 불의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에게 조금은 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신다.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 2 : 11-14).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 마음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일평생 악하게 산사람도 주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히 악한 사람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로 인정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또 이 말씀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 때문에 오염된다고 언명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름을 제거해야 한다. 또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시는 비유는 얼마나 적절한가! 이는 주께서 명령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취하시는 입장은 다르다. 주의 율법에 거룩하다고 한 일도 악인의 불결 때문에 오염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신다. 부정한 손이 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8. 사람과 행위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도 아름답게 다루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备)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사 1 : 13-16, 58 : 1-5 참조).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께서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확실히 주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시지 않으신다. 율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그는 도처에서 가르치신다. 이 시초가 배제되는 때에는 그에게 드리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된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게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노엽게 할 것이다. 이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잠 15 : 8). 그러므로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된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일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9 가르친 이들은 참으로 옳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서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하였다(창 4 : 4).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열납하신다고 지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신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고(렘 5 : 3)한 말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은 믿음에 의해서만 순결하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성령이 선언하셨다(행 15 : 9). 그러므로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첫째 기초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넷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10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11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전 7 : 21, 왕상 8 : 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인가?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라.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竞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욥 25 : 5).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 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다(겔 18 : 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약 2 : 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한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12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이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13 언제든지 성립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별로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이다.14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다.15 즉,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고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16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신다(롬 4 : 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엡 2 : 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합 2 : 4) 예언자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 : 2, 31 : 1, 롬 4 : 7)라고 한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한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녀야 한다. 끝으로, 값 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한다(고후 5 : 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낸다. 즉,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한다(엡 2 : 8-9).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할 성자들의 잉여 공로설(supererogatory merits)을 검토․반박함. 12-21)

 

12. 반대자들의 핑계

 

이 문제에 관해서 스콜라 학자들이 도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핑계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충분한 고유의 가치가 있지만, "받아들이는 은혜"인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17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행위에 의한 의가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행위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일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범한 불법은 잉여 업적에 의해 보상된다고 한다.18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에 불과하다. 아버지께서는 값없이 베푸시는 선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시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시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며 순결하며 결백하다고 인정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완전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 나타나며 우리를 보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의를 받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끊임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 이 순결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우리의 추악과 불결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묻힌 듯이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오면 옛 사람이 죽어 분명히 파괴된 우리를 선하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셔서 새 아담과 함께 복된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리도록 하자.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썩지 않는 몸을 받아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 15 : 45이하 참조).

 

 

 

13. 직무 이상의 행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무거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자체로는 확실히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행위 자체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의 용서를 받는 때만은 예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개의 행위에 대해서 그 보상으로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의 일들을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레 18 : 5). 그리고 모든 일을 꾸준히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 유명한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신 27 : 26, 갈 3 : 10). 이런 말씀은 부분적인 의라는 공상을 철저히 논박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말씀들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것 이외의 의를 하늘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무 이상의 행위"가 충분한 배상을 제공한다고 하는 그들의 상습적인 모호한 말은 건전치 못한 생각이다.19 왜 그런가? 그들은 벌써 쫓겨난 자리로 항상 되돌아가지 않는가? 즉, 부분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입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정하지 않을 일을 그들은 뻔뻔스럽게 사실인 듯이 전제한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으면 행위에 의한 의를 전연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주께서는 자주 확언하신다. 우리에게 의가 없으면서도 모든 영광을 빼앗긴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 즉, 하나님께 절대로 굴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몇 가지 사소한 행위를 자랑하며, 다른 보속으로 자기에게 없는 의를 사려고 하는 우리는 얼마나 패악한가?

보속이란 생각은 이미 철저히 분쇄되었다.20 우리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무의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악한 것으로 보시는지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참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모든 의를 한데 뭉치더라도 죄 하나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한 번 범법한 것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그 결과로 동시에 구원을 회복할 능력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우리는 안다(창 3 : 17). 그러므로 사람은 보속을 치르는 능력을 빼앗겼다. 자기의 보속 능력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원수에게서 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거나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가 있다고 단정하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인정하시려면, 먼저 우리의 죄가 가려지며 용서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며, 보속을 밀어 넣는 자들은 그 은혜를 악하게 모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를 모범으로 삼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경주를 하며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야 한다(빌 3 : 13-14).

 

 

 

14. 우리의 의무를 완벽히 수행한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불가능하다

 

잉여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것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 : 10)는 교훈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가장이나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마음에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불필요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드려야 할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진지하게 깨달으며 생각하라고 명령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명령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종이며, 율법의 의무를 다하는 데 정신과 몸을 다 바치더라도 그 전부를 이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모든 의로운 행실과 그 이상의 행실도 이 모든 일들 중의 하나에도 해당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면 우리 각 사람은 이 목표에서 심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책임 분량 이상으로 무엇을 축적했노라고 감히 자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은 항변하기를 비록 나는 필요한 의무들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무들보다 더 많이 행하도록 노력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21 할는지 모르나, 이런 말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데22 공헌할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율법의 일부라면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자발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5. 하나님은 현재 우리 자체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직무 이상의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자랑한 것을 부당하게 적용한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했노라고 자랑하였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했을 뿐 아니라, 의무의 한계를 넘어 보수도 받지 않고 봉사를 하였다(고전 9 : 1이하).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행동은 약한 형제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한(고전 9 : 12) 그 이유에 유의하지 않는다. 거짓된 악한 일꾼들이 가장된 친절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 하며, 그 위험한 사상을 퍼뜨리며, 복음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나 또는 그런 흉계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피할 수 있으면서도 남에게 손해가 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도는 주를 위해서 의무 이상의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복음을 맡은 지혜 있는 청지기는 그런 일을 회피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바울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다. 끝으로 가령 이런 이유가 명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크리소스톰이 한 말은 언제나 옳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노예의 소유물과 같은 처지에 있다-즉, 그것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다.23 그리스도께서도 비유에서 이 점을 숨기시지 않는다. 종일토록 여러 가지 노동을 하고 저녁때에 돌아온 하인에게 우리가 무슨 감사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눅 17 : 7-9). 그는 우리가 감히 요구하지 못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종이라는 처지에 요구되어지는 일 이상의 것을 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능력은 온전히 우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따위의 잉여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잉여 업적은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도 없으며 시인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공로를 하나님 앞에 제출한다면 용납되지도 않을 것이다. 잉여 업적이 있다면 그 의미는 한 가지뿐이다. 즉, 예언서에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라고 한 것이다(사 1 : 12). 그들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런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 : 2). 참으로 이 한가한 랍비들이 그늘진 안락 의자에 앉아서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 심판자가 심판대에 앉으실 때 그런 허무한 의견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심판대 앞에 가서 우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확신을 추구해야만 하고 학교나 길목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24

 

 

 

16. 행위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해독을 머리 속에서 뽑아버려야 한다. 즉, 행위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자랑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한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최고 심판자의 자비를 찾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청산할 것을 요구하신다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다윗은 말한다(시 143 : 2). 욥이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이라고 할 때에(욥 10 : 15), 그는 하나님의 최고의 의에-천사들도 응답하지 못하는 의에-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의 엄격한 법도 앞에서 욥은 무용한 저항을 하지 않고 기꺼이 굴복할 뿐 아니라 그가 체험한 의는 모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즉시 시들어버릴 것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자기 신뢰를 없애버리면 자연히 모든 자랑도 사라질 것이다. 행위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 앞에서 붕괴될 때, 누가 행위에 의가 있다고 믿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가 부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함을 얻고 자랑하리라"고 한다(사 45 : 25).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사 61 : 3) 하는 말은 진리이다. 행위를 믿고 안심하는 일이 전연 없으며 행위의 영광을 기뻐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정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항상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릇된 자신감에 속아 교만하게 된다.

 

 

 

17.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가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动力人)은25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质料人)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지으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23-24, 엡 1 : 6 참조)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한다(롬 3 : 24). 우리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진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 3 : 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친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롬 3 : 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인을 가리킨다. 겸해서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엡 1 : 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26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 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18. 그러나 선행의 모습은 믿음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다.27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28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합치점은 이것이다. 즉,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본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된다-즉, 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무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에 자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하는 기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 8 : 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 준다.

 

 

 

19. 행위는 소명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이나(잠 14 : 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사실은(창 24 : 40, 왕하 20 : 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런 발언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힘의 흔적이 섞여 있는 것뿐임을 의식한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된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한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이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3 : 18).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한다(엡 3 : 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이유를 말한다(롬 8 : 37).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자들의 자기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29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 138 : 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77 : 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 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30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양심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기를 원한다.

 

 

 

21. 때때로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는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을31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动力人)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质料人)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目的人)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32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면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 8 : 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고(롬 6 : 23) 가르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슨 까닭에 그는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것처럼 의와 죄를 대조시키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를 생명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했으면 완전했을 대조를 이렇게 변형하여 씀으로써 어느 정도 깨뜨렸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법으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는 결과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들은 원인보다도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 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그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없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저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제 15 장

 

행위에 대한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 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 1-4)

 

1. 잘못된 물음과 올바른 물음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다. 즉,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직 믿음에 제한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1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망상에 빠져 끌려 들어가게 된다.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그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공로가 있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증명된다는 듯이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2 행위의 의는 율법을 완전 무결하게 준수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완전성의 최고에 올라서서 가장 사소한 어떠한 범법도 없는 사람이 아니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여기서 별개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칭의를 위해서 행위는 결코 층분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는 있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우선 이 "공로"란 말에 대해서 서론적인 말을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이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3 진실한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저술가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큰 해독을 끼치고 유익은 극히 적은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기 바란다. 선행의 가치는 다른 말을 사용해도 잘 설명될 수 있고 폐해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공로"란 말을 쓸 필요는 무엇인가? 이 말에 얼마나 큰 잘못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준 독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참으로 그것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자주 이 말을 썼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그들이 이 작은 말 한마디를 잘못 써서 후세에 잘못의 원인을 남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께만 돌리리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4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5

그러나 우리는 말보다도 일 자체를 보아야 한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음은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한 베르나르드의 말을 나는 이미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첨부해서 그 거친 표현을 완화한다. "따라서 공로가 있도록 유의하라. 공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인 줄 알라. 결실을, 즉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그러면 빈곤과 감사할 줄 모르는 망은과 교만 등의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복되다." 이 말보다 조금 전에 그는 그가 사용한 공로란 말의 경건한 뜻을 충분히 설명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 2 : 13 참조)."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는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겔 36 : 22,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충분한 공로가 된다.6

 

 

 

3. 선행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결한 것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주시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 준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성경에는 우리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이 있다(눅 17 : 10). 우리는 주를 위해서 필요없는 일을 한 것이 없고, 다만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감사받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갈 6 : 9, 살후 3 : 13 참조)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다.

이 점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인정한다면 공로를 믿는 생각이 일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공로라는 개념까지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궤변가들처럼7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주의 것으로서 보존한다.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선한 일들을 그의 불결로 더럽히고 오염시킨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오점이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을 받을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쓴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인가!

나는 여기에서 각 사람의 상식에 호소한다. 너그러운 사람에게서 토지 사용권을 얻은 후에 그 토지의 소유권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배은 망덕한 사람은 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주인이 너그럽게 해방시켜 준 노예가 해방된 노예의 낮은 처지를 숨기고 날 때부터 자유인이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번의 노예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받은 은혜를 바르게 누리는 방법은 받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은인에게 돌아갈 칭찬을 빼앗지 않으며, 그가 우리에게 넘겨준 것은 여전히 그의 것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면 하나님께는 어떤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우리는 각각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반증에 대답함

 

"하나님께 대한 공로"란 말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궤변가들이 성경의 말씀을 오용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집회에서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집회서 16 : 15). 다른 구절은 히브리서에 있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한 말씀이다(히13 : 16).8

나는 집회서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여기서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의 저자가-그가 누구였든 간에-쓴 말을 충실히 인용하지 않는다. 희랍어 원본에는 이와 같다. .("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그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 집회서 16 : 14). 이것이 정확한 원문이며 라틴 역이 오역이라는 것은 이 낱말들의 구조뿐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장의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히브리서의 인용문에는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만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사도가 쓰는 희랍어의 뜻은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용납하신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는 정도 이상으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의 선행도 항상 불결한 점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시며 우리에게 대해서 노하신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선행은 도저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거나, 우리에 대한 자비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검토하실 때에 그 최고의 법에 의하시지 않고 자비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마치 완전히 순결한 것같이 용납해주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치가 없는 행위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무한한 은혜를 보상으로 주신다. 경건한 학자들이 선행은 현세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게 하며 영원한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지만9 나는 이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께서는 거의 항상 수고에 대한 보상과 싸움에 이긴 면류관을 하늘에 두신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풍성히 받는 사실을 행위의 공로에 돌리고 은혜와는 절연시키는 것은 성결의 교훈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하시며(마 25 : 29, 눅 8 : 18), 적은 일에 착하고 층성된 종은 많은 일을 맡게 되리라고(마25 : 21) 하시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신자들이 풍부하게 되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그의 자비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신다(요 1 : 16 참조). 그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다(사 55 : 1). 그러므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락과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고려하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선물까지도 이런 영예를 받게 하신다.

 

 

 

(인간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데 반대함. 5-8)

 

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근본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만일 이런 문제들을 과거에 올바르게 처리했다면 그렇게 많은 소란과 분열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도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3 : 10 참조).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고전 3 : 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울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는다(고전 1 : 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이유는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 1 : 30). 참으로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엡 1 : 4-5). 바울의 말들을 더 인용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죽음의 정죄에서 구속되고 멸망을 면하게 되었으며(골 1 : 14-20 참조), 하늘 아버지에 의해서 자녀와 후사로 선정되었으며(롬 8 : 17, 갈 4 : 5-7 참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으며(롬 5 : 9-10),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아 멸망하거나 넘어질 위험성이 없게 되었고(요 10 : 28),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롬 11 : 19 참조), 이미 영생에 참가했으며 소망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이므로 우리 자신은 미련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으며,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가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우리는 불결하지만 그가 우리의 순결이 되셨으며, 우리는 약하며 사탄에 대항할 무장과 방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가도하며 지옥문을 분쇄하시려고 그가 하늘과 땅에서 받으신 권세가(마 28 : 18)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몸을 쓰고 다니지만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것이 모두 우리 것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주안에서 성전이 되기를 원한다면(엡2 : 21 참조) 이 터 위에 서서 건축이 진행되어야 한다.

 

 

 

6.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것과는 다른 생각을 배웠다. 각종의 "도덕적"인 선행을 발견해서 그것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접목 붙임을 받기 전에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음 속에 있다고(요일 5 : 12) 하는 성경의 말씀은 마치 거짓말인 듯이 말이다. 죽음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명이 있는 열매를 낳을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는(롬 14 : 23) 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마 7 : 18, 눅 6 : 43 참조). 이 가장 해악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실 수 있는 권능을 얼마나 남겨 놓았는가?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를 얻어주셨다. 즉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어주셨다. 그러나 이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현재 할 일이라고10 한다. 아, 이 얼마나 거만하고 파렴치한 불경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감히 그의 권능을 박탈하며 그를 사실상 짓밟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적인 증거는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유익은 각 개인이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자들이 다음 구절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 : 12),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 : 24, 6 : 40 참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의 주사가 되었다(딛 3 : 7, 롬 5 : 1-2 참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므로(요일 3 : 24),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굳게 연결된다. 그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은 하늘 자리에 앉는다(엡 2 : 6). 그들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며(골 1 : 13), 구원을 얻는다. 이 밖에도 유사한 구절이 무수하다. 그 구절들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를 얻는 능력 또는 구원을 얻는 능력뿐만 아니라 의와 구원 둘 다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면 즉시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의 후사와 의에의 참여자와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그리고(여기 그들의 거짓을 더욱 잘 논박하는 점이 있다) 공로를 세울 기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부 옮겨 받는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오류의 어머니인 소르본누(Sorbonne)의 학파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경건의 요점, 즉 이신 칭의를 빼앗았다. 참으로 그들은 말로는 사람은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고백하나, 후에 이것을 설명할 때 선을 행하는 것은 의롭다 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근거를 내세운다.11 그들은 믿음을 농담처럼 말하는 듯하다. 성경에 믿음이란 말이 자주 반복되므로 믿음을 말하지 않으면 대단히 거북하겠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선행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쳐다가 사람에게 넘겨준다.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본다면, 그런 선행은 사람을 칭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공로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려는 듯이 선행은 자유 의지의 능력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첫째 원인이 은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 의지에 의해서 모든 공로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12 이런 생각은 후기 궤변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피타고라스인 퍼터 롬바르드도 이렇게 가르쳤다. 이 사람을 그들과 비교한다면 정신이 바르고 건전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롬바르드가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말하면서도13 이 교부가 선행에서 야기되는 영광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심히 주의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소경 같았음을 참으로 분명히 나타낸다.

위에서 자유 의지를 논했을 때14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말을 몇 가지 소개했다. 그의 저작에는 비슷한 말들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공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또, 우리의 모든 공로는 은혜로써 온 것뿐이며 우리의 능력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를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15

롬바르드가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성경에 대한 훈련이 잘됐던 것 같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그와 그의 제자들을 논박하는 말로서는 사도가 한 말보다 더 명백한 것을 바랄 수 없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자랑을 금한 다음에 자랑이 잘못인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우리가 중생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서 선한 일이 나타날 수 없으며, 우리의 중생은 전적으로 일점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했노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연 없다.

끝으로, 그들 소르본느 학파들은 선행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친절하게 고려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16 사람들의 양심에 가르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공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교훈으로 분명하게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준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확실히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신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믿음 없이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말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일을 하려면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반드시 먼저 마음에 확정하라고 가르친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일한 기초에서 손가락 넓이만큼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일단 기반이 놓이면 현명한 공사 감독은 그 위에 똑바로 건물을 짓는다.

우리가 교훈과 충고를 받을 필요가 있을 때에 사도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 : 8-9),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며(벧전 4 : 3),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귀하게 쓰려고 택한 그릇이므로 모든 불결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딤후 2 : 20-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마 16 : 24, 눅 9 : 23) 알려주실 때에,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다 언급되었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악의 모든 뿌리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를 실행할 준비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범에는 인내와 온유 뿐 아니라, 경건과 거룩에 관한 모든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고(빌 2 : 8),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성취하셨으며(요 4 : 34, 눅 2 : 49 참조), 전심 전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고(요 8 : 50, 7 : 16-18 참조),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요 10 : 15, 15 : 13 참조). 그는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눅 6 : 27,35, 23 : 34 참조).

만일 위로가 필요하다면 놀라운 위안을 주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 4 : 8-10),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딤후 2 : 11-12),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면 그가 부활하신 모양대로 부활할 것이다(빌 3 : 10-11)‥‥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 29). 그러므로 "사망이나‥‥‥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우리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롬 8 : 38-39), 모든 일이 우리의 유익과 구원으로 바뀔 것이다(롬 8 : 28 참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모두 거듭나며‥(벧전 1 : 3),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 : 17)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간다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증언으로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며(벧후 1 : 10), 나무와 같이 그들의 열매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다고(마 7 : 20, 12 : 33, 눅 6 : 44)17 우리는 말한다.

 

 

 

제 16 장

 

이 교리를 악평하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

 

이 말은 어떤 철면피한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한 마디로 넉넉하게 반박한다. 우리가 사람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악한 사람들은 선행을 폐지한다느니, 또는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한다느니 하고 우리를 중상모략 한다. 또 우리가 칭의는 값없이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이것은 의로 가는 길을 너무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 우리의 교리는 시키지 않아도 이미 죄를 짓는 경향이 너무도 강한 인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1 이런 거짓된 비난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한 발언으로 충분히 반박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 하나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하려 한다. 그들은 이런 칭의를 통해서 선행이 폐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추악한 생활로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더럽히면서도 이렇게 떠드는 그들을 우선은 내버려두겠다. 믿음을 찬양하면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일을 슬퍼하는 체 한다. 만일 행위를 장려하며 강화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곧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분이요 우리의 믿음은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2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 : 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려 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 : 13). 주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시며 우리가 이 은혜들을 누리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가 자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뿐이므로 그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신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 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쇠퇴하게 하는가?

 

또 그들은 우리가 공로에 대한 관심을 빼앗을 때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선을 행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말이다. 후에 더 분명히 설명하겠지만3 여기서 우선 말한 김에 말하자면 독자들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미련하게도 보상으로부터 공로를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행하는 능력을 주실 때나, 행위에 대한 상을 주실 때나, 똑같이 너그러우시다는 원칙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차후에 적당한 장소로 미루겠다.

그런데 그들의 항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지적하면 족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로,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은 바른 생활을 하려고 주의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이런 견해는 완전히 잘못이다.4 사람이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노동을 파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한 짓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드리는 경배와 값없이 하는 사랑을 받고자 하신다. 그리고 보상을 받을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용납하신다.

사람을 정녕 자극해야 된다면 우리가 구속과 부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이 이런 자극을 주는 예를 들어본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이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사악한 배은망덕을 폭로한다(요일 4 : 19,10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히 9 : 14) 일단 깨끗함을 얻은 우리가 새로운 악에 물들며 저 거룩한 피를 모독한다면, 그것은 우리답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다(히 10 : 29).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 : 74-75). 우리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롬 6 : 18). "우리 옛 사람이‥‥‥십자가에 못박힌 것은"(롬 6 : 6)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 : 4).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면 그의 지체인 우리는 마땅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며 지상에서는 나그네 같이 살아 우리의 보화가 있는 하늘을 사모해야 한다(골 3 : 1-3, 마 6 : 20 참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 : 11-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작정지었다(살전 5 : 9). 우리는 성령의 전이며 이 전을 더럽히는 것은 불법이다(고전 3 : 16-17, 고후 6 : 16, 엡 2 : 21). 우리는 어두움이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이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엡 5 : 8-9, 살전 5 : 4-5 참조).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불결한 생활이 아니라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다(살전 4 : 7). 이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불법한 욕망을 버리고 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4 : 3). 우리가 받은 것은 거룩한 부르심이며(딤후 1 : 9), 그 요구하는 것은 순결한 생활이요, 그 이하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목적은 의에 순종하려는 것이다(롬 6 : 18). 우리의 사랑을 고무하는 논법으로서 요한의 말보다 더 강력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 : 11, 요 13 : 34 참조)라고 말한다. 사랑을 계속 실천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며, 마귀의 자녀인 암흑의 자녀들과 다르다(요일 3 : 10, 2 : 10-11). 다시 바울의 논법을 들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떨어지지 않으면 한 몸의 지체가 되며(고전 6 : 15,17, 12 : 12), 서로 일을 도와야 한다(고전 12 : 15 참조). 거룩한 생활을 하라고 부르는 요한의 말보다 더 강력한 외침을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 요한은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요일 3 : 3). 마찬가기로 바울은, 우리는 양자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고후 7 : 1) 말한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의 모범으로 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다는 말씀을 듣는다(벧전 2 : 21, 요15 : 10, 13 : 15 참조).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는 행동의 동기가 된다 : 행위는 종속적인 것이다

 

이 몇 개의 성경적인 증명은 단순히 맛을 본 데 불과하다. 만일 모든 관련 성구를 인용한다면 여러 권의 책을 편집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도의 글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모든 선한 일을 가르쳐주는 충고와 격려와 책망의 말이 가득하다(딤후 3 : 16-17 참조).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로를 말하는 일이 없다. 그들이 가장 강력한 충고를 할 때에 그 근거로 삼는 생각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고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의 서신 전체에 걸쳐 논한 다음에, 구체적인 권고를 하는 대목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권고한다(롬 12 : 1). 참으로 우리의 행실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마 5 : 16) 이 한 가지 이유가 있으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도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면 넉넉히 선을 행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5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공로를 역설함으로써 혹은 강제적으로 노예적인 율법 준수를 다소간 실현할는지 모르나, 우리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서6 우리에게는 선행을 권장할 근거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이런 율법 준수를 하나님이 친히 기뻐하시는 듯이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언명하시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하는 것을 금지하신다(고후 9 : 7).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정신을 각성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해서 자주 사용하는 충고 방법을 멸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롬 2 : 6-7, 마 16 : 27, 고전 3 : 8, 14-15, 고후 5 : 10 기타).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충고라든지, 가장 중요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또 우리는 이 점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그러한 공로를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점은 후에 알게 될 것이다.7 끝으로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에 헛 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공로를 지지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하는 바이다. 의롭다함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잡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먼저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면 성화를 추구하기에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하는 것은(시 130 : 4) 우리의 이 교리를 아름답게 시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의 기초가 된다고 예언자는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출발점은 그의 자비를 신뢰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교황주의자들이 공로가 있는 일이라고8 하는 그 경외는-"공로"란 말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경외는 죄의 용서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

 

우리가 죄를 값없이 용서받는 것이 의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들은 죄를 짓도록 선동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9 중상모략 중에서도 제일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는 죄의 용서가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으로 값을 치를 수 없고 따라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밖에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장 거룩한 피를 흘리셔서 많은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제외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대속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무도 추악해서 이 가장 순결한 피의 샘이 아니면 깨끗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듣는 편이 선행을 뿌림으로써 깨끗해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죄를 무서워하는 생각을 더 많이 일으킬 것이 아닌가? 또 다소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깨끗함을 얻은 후에 다시금 진흙탕에 뒹굴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샘의 순결을 흐리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말대로 믿는 사람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고 말한다(아 5 : 3).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죄의 용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어떤 사람들이 의의 존귀성을 더럽히는지 분명히 밝혀졌다. 그들은 배설물에 불과한(빌 3 : 8)10 그들의 무가치한 보속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 있는 체한다. 죄책은 너무도 무거워서 이런 가벼운 쓰레기로는 대속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너무도 중대한 범과여서 이런 무가치한 보속으로는 사면을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만이 사면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들은 의가 없어질 때에는 보속 행위로 회복되고 수리될 수 있다고 말한다.11 우리는 의는 너무도 귀한 것이어서 어떤 행위에 의한 보상도 충분히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 밖에 없다. 죄의 용서와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다음 장에 속한다.12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율법에 관련된 행위 : 고넬료의 예. 1-5)

 

1. 스콜라 논법을 언급하고 논박함

 

이신칭의를 뒤집어 엎으려고하고 또는 약화시키려고 사탄이 그 앞잡이들을 통해서 사용하는 다른 논법들을 이제 추궁하겠다. 나는 이 중상모략 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논박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우리가 선행에 반대한다는 말을 못할 것이다.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든가, 선행이 선하지 않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후예들이 되어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복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또 다른 계략으로 우리를 공격하므로 우리는 반격을 계속하겠다. 우선 그들은 주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신 율법의 약속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 약속이 완전히 폐지되기를 원하는가 또는 완전히 유효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폐지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고 모순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추론한다.1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신 7 : 12-13),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왜하지 아니하면"(렘 7 : 5-7, 23) 내가 너희 중에서 다니리라. 이와 같은 구절을 천 개라도 들 수 있으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구절들은 뜻이 다르지 않고 내가 인용한 구절에 대한 해설로 그 뜻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율법에서는 복과 저주(신 11 : 26), 그리고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고 모세는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복이 무용, 무익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칭의가 믿음에만 의한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2 만일 우리가 율법을 붙잡고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복을 잃고 모든 범법자들에게 예정된(신 27 : 26 참조) 저주가 우리 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주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았고,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는 전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으며, 이 저주와 진노에서 해방되려면 율법의 권능에서 떠나서 이를테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풀려 자유를 얻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육적인 자유가 아니다. 육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우리를 율법 준수에서 이탈시키며, 모든 일에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선동하며, 자물쇠가 부서지고 고비가 풀어진 것같이 우리의 육욕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므로 울며 회개하는 양심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율법의 결박과 족쇄에서 그리고 그 저주와 정죄의 압박에서 양심이 해방된 것을 알려준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을 때에 우리는 이 자유를 얻는다. 말하자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석방된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은 믿음으로 얻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한 일은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게 하여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2. 우리는 행위를 통해 율법의 약속을 완성시킬 수 없다

 

이와 같이 율법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약속들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율법의 약속에는 율법을 지킨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율법을 지켜야만 약속도 성취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은 결코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의의 일부를 우리의 행위에 맡기고 남은 부분을 자신의 사랑으로 보충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의로서 그리스도만을 지정하신다. 사도는 그와 유대인들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고 말한 후에, 그 이유를 덧붙인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의에 도달하는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것이다(갈 2 : 16). 신자들이 믿음에 의한 의가 율법과는 많이 다른 것을 알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의를 얻으려고 율법에서 믿음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면, 그들은 확실히 율법의 의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에게 내려질 보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도 좋으나 그와 동시에 잘 생각해야 할 사실이 있다. 즉, 우리는 너무도 패악하기 때문에 믿음에서 다른 의를 얻기까지는 율법에서 아무 유익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그의 종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보상을 회상하고는 즉시 그 보상을 폐기하는 죄를 인정한다. 시편 19편 12절에서 그는 율법의 유익을 높이 찬양하나 곧 외친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와 완전히 일치하는 다른 구절에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시 25 : 12 참조) "여호와의 모든 길은‥‥인자와 진리로다"라고 한 후에(시 25 : 10) 그는 첨부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 25 : 11). 이와 같이 율법에는-만일 행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다면-하나님의 자비가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비는 결코 율법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3.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약속을 주셨으나 약속은 아무 결실도 없이 사라질 뿐인가? 바로 위에서 나는 이런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참으로 약속이 행위의 공로와 관련되는 동안은 아무 유익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폐기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겔 20 : 11 참조),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레 18 : 5) 잘 알려진 약속이 있으나, 사도는 이 약속에는 아무 중요성도 없다고 가르친다(롬 10 : 5, 갈 3 : 12 참조). 우리가 거기서 끝난다면 약속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종들도 많은 허물이 있고 율법을 완수하지 못하므로 약속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으로 대치될 때에 이 약속은 죄를 값없이 용서한다고 선포함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될 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판정하실 뿐 아니라 저 언약 아래서 율법 준수자들이 받기로 되어 있던 복을 우리의 행위에 주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율법에서 의와 거룩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치러주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보상에서 행위가 은혜를 얻는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종들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그들의 행위는 언제든지 칭찬보다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을 포용하시며,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믿음의 중재에 의해서 그들을 자기와 화해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그의 아버지 같은 너그러우심과 선하심으로 우리의 행위를 영광의 자리에 끌어올리시며 다소의 가치를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셋째 이유는 이 행위들은 모두 부패한 것이어서 덕이라기보다 죄라고 인정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점을 보시지 않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궤변가들이 망상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행위에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한 고유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나 언약이 있기 때문이며3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행위를 높이 평가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들의 모든 어리석은 주장을 훌륭히 회피한 듯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 행위가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행위는 우선 믿음만을 토대로 한 칭의와 죄의 용서가 선행되지 않으면-선행도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오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신자들의 행위가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요,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들은 그 중에서 하나만을 보고 다른 둘은-가장 중요한 것은 - 보려고 하지 않았다.

 

 

 

4.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이중으로 용납을 받는다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 즉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 : 34-35)라는 말을 인용한다.4 아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말을 근거로 하여 그들은 만일 사람이 똑바른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만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가 죄인을 도와주시므로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얻게 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이중으로 용납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구절들을 서로 부합하도록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에서 그의 자비심을 일으키는 비참한 상태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에 하나님께 용납될 때에는 전혀 아무 선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각종 악이 속에 가득하고 또 그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어떤 천품을 근거로 해서 그에게 하늘의 부르심을(히 3 : 1 참조)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공로에 대해 헛된 꿈을 꾸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저 주시는 자비를 분명히 나타내 보이신다. 그들은 고넬료에게 말한 천사의 말을 왜곡해서 그들의 사악한 태도를 폭로한다. 그들은 천사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한 말을(행 10 : 31), 사람이 선행에 대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5 사실상 고넬료가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을 보면 이미 지혜의 영의 조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바울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라고 가르친 의를(갈 5 : 5)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성령에 의해 성결케 되었다. 그에게 있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으나 그는 이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 일들을 함으로써 은혜를 받을 만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이유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면 완전히 멸망할 것을 아시고 그의 멸망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를 해방하시려고 자비를 베푸시는 데 있다. 참으로 성경에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 교리를 반대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이제 우리는 어째서 이 용납이 사람의 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가를 그리고 사람은 이 위대한 은혜를 받을 가치가 전연 없는 가련한 죄인이지만, 그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베푸신다는 순수한 증거가 곧 이 용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5.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사람을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하신 주께서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사람을 자신의 자녀로 성별케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새로운 생명의 모습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의 영의 선물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를 포옹하신다(고후 5 : 17 참조). 이것이 베드로가 언급한 "받으신다"는 것이며(행 10 : 34, 벧전 1 : 17 참조), 신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이 용납에 의해서 그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벧전 2 : 5 참조). 이는 주께서 자신의 영으로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선한 일을 사랑으로 포옹하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 때문에 신자들을 "받으시는" 것은 오직 자신이 그 행위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한층 더하는 의미로 그가 주신 행위까지도 "받으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주께서 그들을 귀히 쓸 그릇으로 택하시고(롬 9 : 21) 기꺼이 진정한 순결로 장식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선행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또 이런 행위에 붙어 있는 결함과 오점을 인자하신 아버지께서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같이 선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요약하면, 그가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에 그들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6 중생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얼굴을 보실 때마다 당연히 그것을 사랑하시며 존중히 여기시므로 거룩과 의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도 죽을 육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며 그들의 선행은 아직도 불완전하며 육의 죄악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에 대해서나 그 행위에 대해서나 그대로는 받으실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친절하시며 자비로우시다고 증거하는 구절들은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는‥‥‥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 : 9)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후세 사람들은 격언같이 사용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라고 엄숙하게 기도했고(왕상 8 : 23), 느헤미야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느 1 : 5).

진실로 주께서는 그의 모든 자비의 언약에서 그의 종들이 바르고 성결한 생활로 보답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주의 선하심을 조롱하는 자가 없도록 하시며 교만한 자가 마음속에 스스로 위로하여 악한 생각대로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다(신 29 : 19). 따라서 주께서는 언약으로 맺어진 자들이 항상 의무를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언약은 처음에 자유로운 합의로 성립한 것이었고 영구히 그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그의 손이 깨끗하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 언명하면서도(삼하 22 : 21, 시 18 : 20 참조) 내가 말한 근원을 가리키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다고 하였다(삼하 22 : 20). 거기서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모든 선물에 선행하며 그 원인이 되는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칭의를 행위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을 검토함. 6-15)

 

6.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런 표현들과 율법의 약속과는 다르다는 것을 겸해서 고찰하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율법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의 책들 여러 곳에 보이는 약속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중에는 복음적인 약속도 많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의 시행에 직결된 것을 나는 율법의 약속이라고 부르며, 이런 종류의 약속은(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할 때에(신 7 : 9, 왕상 8 : 23, 느 1 : 5 참조) 이 말씀은 성실한 마음으로 주와 언약을7 맺은 주의 종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며, 주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보여주는 방법은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두려워하며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자비의 약속들은 당연히 이 목적 즉, 우리가 그 유익을 주시는 분을 경외하며 공경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항구적인 의무를 지적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경외하기 위해서 그의 자녀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양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부르심을 받은 쪽을 향해서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주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신자들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생활로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실행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의 영의 지도를 받아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자녀의 정직한 휘장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15편 1절에 교회 백성에 관해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은 것도 이에 관련시켜야 할 것이다. 그 대답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시 24 : 4 참조). 마찬가지로 이사야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라고 했고(사 33 : 14), 그 대답은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등이다(사33 : 15). 여기에 묘사된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는 그 기초가 아니라,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자신과의 교제에 인도하시며 그 교제 안에서 보호하시며 강하게 하시는 방법이다. 아버지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므로 신자들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영으로 자신과 연결된 그들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성도들에게 열어 주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설 영원한 자리를 마련하는 제일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자비하신 주께서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고, 계속 보호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묻는다면, 우리는 다윗의 시에(시 15 : 2이하 참조) 묘사된 중생과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

 

 

 

7.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로움"을 언급하지 않는가?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듯한 구절들이 있다. 거기서는 선행에 "의"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었고, 사람은 그런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대부분은 처음 유형에 관한 것인데 계명의 준수를 "칭의" 또는 "의"라고 부른다. 둘째 유형의 실례는 모세의 글에 있듯이 "우리가‥‥‥모든 명령을‥‥‥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는 말씀이다(신 6 : 25). 만일 이것은 율법적인 약속이고, 불가능한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결국 무의미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면,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없는 다른 항변도 있다. 예컨대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하였다(신 24 : 13). 예언자도 같은 일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치욕을 복수한 비느하스의 열성이 그에게 의로 정하여졌다고 한다(시 106 : 30-31).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기뻐 뛰는 이유가 여기 풍성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에 의한 의롭다함이 확립된 후에 행위에 의한 의롭다함이 폐지되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들은 여기에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서, 만일 행위로부터 의가 나온다면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율법의 교훈을 "의"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 그러하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HUCIM"(후킴)을 희랍어의 "의"(righteousnesses)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일러둔다.8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는 나의 주장을 쾌히 양보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행할 의무가 있으므로, 완전히 복종한 후에도 여전히 "무익한 종"이다(눅 17 : 10).

그러나 주께서 율법에 의라는 영예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주가 주신 것을 제거하지 않고, 율법에 대한 복종이 의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또 각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의 일부라고 인정한다. 다만 조건은 나머지 부분들에 의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의는 아무 데도 없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포기하는 것은 율법의 의 자체에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이 연약하여 우리에게서는 율법의 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의 명령들을 간단히 "의"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행위에도 이 말을 적용한다. 예를 들면, 스가랴와 그의 처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라고(눅 1 : 6) 할 때에, 그들의 행위를 행위 자체의 성격에 따라서 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내가 지금 한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부주의하게 희랍어로 번역한 사람의 것을 근거로 하여 원칙을 세울 수 없다. 그러나 누가에게는 전해 받은 문서에 어떤 변경을 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눅 1 : 3) 나는 이 점을 논하지 않겠다. 이는 율법에 포함된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라고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으면 그 의에 도달하지 못하며, 율법을 범할 때마다 그 의를 깨뜨지게 된다. 율법은 의만을 명령하므로,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에 있는 계명들은 그 하나 하나가 의로운 행위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여러 가지 행위에서 범법자가 되었으므로, 한 가지 행위만 가지고는 의롭다는 칭찬을 받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 한 가지 행위도 불완전하고 항상 어디엔가 결점이 있는 것이다.

 

 

 

8.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갖는 이중적 가치

 

그러나 이제 둘째 유형을 고찰할 터인데 여기는 특별히 곤란한 점이 있다. 바울이 믿음의 의를 증명하는 말로써,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한 것보다(롬 4 : 3, 갈 3 : 6) 더 확고한 증명은 없다. 비느하스의 행위에 대해서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했으므로(시 106 : 31) 믿음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보아서 우리는 행위에 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승리를 이미 얻은 듯이,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의를 완성하는 것은 행위라고 주장한다.9 여기서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청한다. 만일 의에 대한 진정한 표준을 성경에서만 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성경의 여러 부분을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는 방법을 나와 함께 경건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숙고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신칭의가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롬 5장 참조) 바울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행위에 의한 의에서 제외된다고 담대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똑같은 확신으로 바울은 아무도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는 반면에(롬 3 : 20 참조),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행위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과, 믿음에 따라 의가 확립된 후에 행위에 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것과는 문제가 서로 다르다.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서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하지 못하며, 사람은 자기의 어떤 행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므로, 행위의 도움이 일체 제거된 채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있게 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은 후에 따르는 선행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다른 입장에서 평가된다. 행위에 있는 모든 결함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으로 덮이고, 모든 오점은 그리스도의 순결로 깨끗케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허물의 죄책이 도말되고, 선행까지도 항상 더럽히는 허물의 불완전이 묻혀 버린 후에는,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은 의롭다고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의로 인정된다(롬 4 : 22).

 

 

 

9. 이신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

 

만일 누가 믿음에 의한 의를 부정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사람이 다른 행위에서는 범법자이면서도 한두 가지의 거룩한 행위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느냐고 문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물론 어리석다고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 범법하는 사람이 많은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느냐고, 다시 묻고자 한다.

반대자는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율법이 크게 선포하기 때문이다(신 27 : 26). 다시 나는 불순하다거나 결함이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행위가 있는지 묻고자 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별들도 깨끗하지 못하며(욥 25 : 5), 천사들도 의롭지 못하다고 하였다(욥 4 : 18).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반대자는, 부수적인 범법으로나 자체의 부패로 인해서 더럽혀지지 않으므로 의롭다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감당할 수 있는 선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하며 불결하며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커녕 보아주실 가치조차 없는 행위라도 의로 인정된다는 확정적인 결론이 이신칭의에서 나온다면 무엇 때문에 반대자들은 행위에 의한 의를 자랑함으로써 이신칭의를 배척하려고 애쓰는가? 믿음에 의가 없다면 이런 행위의 의를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닌가?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을10 낳기를 원하는가? 불경건한 자들의 발언들은 이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그들은 이신칭의가 행위에 의한 의의 시초이며 기초이며 원인이며 증명해주는 것이며 본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행도 의로 간주되므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문제의 진상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행위에 의한 의는 그 성격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인정되든지 간에 이신칭의에 의존한다면, 이신칭의는 이 관계로 인해서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욱 강화되며, 그 힘은 더욱 강력하게 빛나게 된다. 또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얻은 이후에 따르는 행위를 중시하더라도 그런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기능을 떠맡는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는 행위가 이 기능을 믿음과 나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신 칭의가 전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행위의 불결이 폭로될 것이다. 또한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므로 그 자신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10. 행위는 죄가 용서받을 때만 용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11 행위의 부분적인 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완전한 것같이 시인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는 근거를 생각해 본다면 모든 곤란은 해결될 것이다. 용서를 받은 후에 하는 행위라야 용납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지 않으신다면 이 용서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무죄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위도 모든 허물이 그리스도의 순결로 묻혀 버리며 우리에게 책임이 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롭고 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 행위의 의가-그 성격이 어떻든 간에-믿음과 값없이 얻은 칭의에 의존한다면, 또 후자에 의해서 실현된다면, 그것은 믿음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원인에 대한 결과와 같이 믿음에 종속시켜야 한다. 행위의 의에는 이신 칭의를 배척하거나 흐려지게 할 권리가 전연 없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고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려고, 특히 다윗의 말을 역설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 : 1-2, 롬 4 : 7-8 참조). 어떤 자들은 행위에 복을 돌리는 듯한 무수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 : 1),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 : 21),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시 1 : 1), "시험을 참는 자"(약 1 : 12), "공의를 지키는 자들"(시 106 : 3),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시 119 : 1),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마 5 : 3,5,7)들은 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바울이 말한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 칭찬 받을 성질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그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불행한 상태로 있게 된다. 성경에서 격찬하는 모든 복도,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복을 받은 후에는 다른 복들도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로 얻는 복은 최고의 또 가장 중요한 복일 뿐 아니라, 유일한 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것만을 근거로 삼은 다른 종류의 복이 이 복을 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별문제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자들에게 보통 적용되는 "의롭다"는 단어에 대해서 고심할 이유가 훨씬 적어졌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생활이 거룩하기 때문인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지로 의 자체를 실현한다기보다 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므로, 그들의 의는 이신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신칭의가 그 근본이기 때문이다.

 

 

 

11. 야고보는 바울에 반대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진실하게 반대하는 야고보가 여전히 문제라고 말한다.12 야고보는 아브라함까지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며(약 2 : 21), 우리도 모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한다(약 2 : 24).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들은 바울을 야고보와 싸우게 만드는 것인가? 그들이 야고보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지 않도록 야고보의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바울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고 언급하신다(롬 4 : 3, 갈 3 : 6). 우리도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동일한 성령이 야고보를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우리의 믿음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 성립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가 당착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이 구절들은 어떻게 서로 조화되는가?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최대한으로 뿌리 깊게 수립하려는 것을 -믿음에 의한 의를-송두리째 뽑아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에 평화를 주는 문제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즉, 그들은 이신칭의를 비방하기는 하지만 양심이 의지하는 의의 표준은 세우지 않는다. 의에 대한 모든 확신을 제거하는 것밖에 그들의 자랑이 없다면, 그들이 소원대로 승리를 거두게 하라. 또 그들이 진리의 빛을 꺼버리고 거짓의 흑암을 퍼뜨리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들은 그 비참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굳게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고보의 말을 가지고 아킬레스(Achilles)의 방패13 같이 끈덕지게 우리를 위협하지만, 그 말은 그들을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의 의도를 살펴보고, 다음에 그들의 망상에 대해 언급하겠다.

그 당시에는-또 이것은 교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화이기도 하지만- 신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전연 소흘히 하면서도 거짓으로 믿는다고 자랑함으로써 그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야고보는 여기서 이런 사람들의 어리석은 확신을 조롱한다. 그러므로 그의 의도는 진정한 믿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 경박한 사람들이 내용 없는 믿음의 모양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방탕한 생활에 자신들을 내맡기고도 태연한 그 어리석음을 폭로하려는 것이었다.

이 배경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반대자들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곧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중의 오류 즉 첫째로는 "믿음"이란 말에서, 둘째로는 "의롭다함"이란 말에서 오류에 빠졌다.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허망한 견해를 사도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양보이며 그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그는 맨 처음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로 밝힌다(약 2 : 14) 그는 "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졌으면"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있노라 하고"라고 한다. 좀더 내려가서 그런 믿음은 귀신들이 가진 지식보다도 못하다고 조롱할 때에(약 2 : 19) 그의 뜻을 더욱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리고 끝으로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 : 20). 이런 정의를 보면 그가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라고 그는 말한다(약 2 : 19). 만일 이 믿음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뿐이라면, 이런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런 믿음을 제거한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에서 무엇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다. 진정한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킬 때뿐이며, 그와 하나가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 의롭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12.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였다

 

둘째 허위까지 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문제를 끝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일부분을 행위에 둔다고 한다.14 야고보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또 야고보 자신을 조화시키려면 "의롭다함"이라는 말을 바울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의 불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되고 우리가 의로운 자로 인정될 때에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야고보도 이런 견해를 가졌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운운하는 모세의 말을(창 15 : 6, 약2 : 23) 인용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 말을 인용한 전후 관계를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자기의 아들을 제단에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위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는 것이다(약 2 : 21).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약 2 : 23). 만일 결과가 그 원인보다 먼저 있다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모세가 여기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인정되었다고 하는 증언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삭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나타난 복종에 의해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이삭이 났을 때에 이스마엘은 이미 소년이었고, 그 이스마엘이 잉태되기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여러 해 후에 보인 복종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건의 순서를 잘못 거꾸로 만들었든지-이것은 상상하는 것조차 부당한 일이다-그렇지 않으면 야고보에게는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만한 것처럼 이 때에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없었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실히 야고보는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를 공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명한다. 공상적이고 속이 빈 믿음의 가면만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는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의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곤란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설명하는 줄로 생각하는데, 이 점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망상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한 확신을 분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야고보의 말을 왜곡하든 간에, 야고보의 말은 두 가지 개념을 표현할 뿐이다. 즉 내용이 없이 겉으로만 믿는 체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 신자는 이런 외형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으로써 자기의 의를 공표한다는 것이다.

 

 

 

13. 로마서 2장 13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롬 2 : 13) 인용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그들은 거의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암브로시우스의 해결 방법을 통하여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의 이행이 곧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15 나는 이 생각은 단순한 회피에 불과하며 길이 열려 있으므로 전연 불필요하다고 본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미련한 확신을 공격하는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들만 율법을 아노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아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하지 말라는 뜻으로, 율법에서 의를 구하는 사람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구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도록 노력하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물론 율법의 의가 행위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행위의 가치와 공로에 의가 있다는 것조차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완수한 사람을 하나라도 내놓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직 증명이 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뜻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은 전후 관계가 충분히 증명한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불의하다고 정죄한 다음, 그는 더 자세히 논한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이것은 이방인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이것은 유대인에 관한 말이다(롬 2 : 12).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결점은 못본 체하고 율법만을 자랑했기 때문에 바울이 여기에서 특히 적절한 말을 첨부하였다. 율법을 정한 목적은 그 소리를 듣기만 하면 사람들이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런 때에 한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대들은 율법에서 의를 찾는가? 율법을 들었노라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그것은 별로 중요성이 없다-행위를 보이라. 그대들을 위해서 율법을 정한 것이 무익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공언할 수 있을 만한 행위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없었으므로 율법을 자랑할 권리도 전연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반대 논법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즉 율법의 의는 완전한 행위에 있다.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실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율법에서 오는 의는 없다는 것이다.

 

 

 

14.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이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판단으로 검토되도록 신자들이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 대담하게 제시하며, 그것을 근거로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는 구절들이 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런 구절들을 인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예를 들면,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시 7 : 8),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시 17 : 1),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흠을 찾지 못하셨으니"(시 17 : 3),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시 18 : 20,21,23), 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시 26 : 1),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 26 : 4), 또,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 26 : 9),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시 26 : 10-11) 등이다.

나는 위에서16 성도들이 행위에서 얻는 듯한 확신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 인용한 증거들을 그 전후 관계에(perijstasin , complexum) 따라서 또는 보통 말하듯이 경우에 따라서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후 관계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완전히 조사해서 생활 전체의 성격에 따라 정죄 또는 무죄 언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특수 문제에 대한 판정을 원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서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악한 자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의를 주장한다.

우선,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이 문제인 때에는, 어떤 특수한 일에서 그의 입장이 올바를 뿐 아니라,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일종의 의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을 인정해 달라고 하나님의 판단에 호소하면서도, 자기가 모든 점에서 죄가 없고 허물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에만 구원에 대한 확신을 두지만, 하나님이 불공평한 박해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복구하시는 것을 믿고 결백한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제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반대자들을 부르면서도, 그들은 엄격한 검토에서 하나님 자신의 순결에 해당할 만한 결백이 자기에게 있다고는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반대자들의 악의와 부정직과 간계와 사악에 비교할 때에, 자기가 성실하며 정직하며 단순하며 순결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기뻐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기와 원수 사이를 심판해주시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라고 말했을 때에(삼상 26 : 33), 그는 여호와께서 각 사람을 그 공로에 따라 검토하시고 상벌을 가하시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울의 악한 것과 비교해서 자기가 얼마나 결백한가를 하나님께 언명한 것이다. 바울도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한 것을 자랑하며 이 일에 대해서 양심의 증거가 있다고 할 때에(고후 1 : 12, 행 23 : 1 참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랑을 의지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의 중상에 못 이겨 악인들의 악평에 대항해서 자기의 성실과 정직을 변호하며, 자기의 입장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임을 믿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지만, 이것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전 4 : 4).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흐린 시력을 훨씬 초월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위선에 비교해서, 하나+님을 증인과 심판자로 모시고 자기의 결백을 변호하지만, 하나님만을 상대로 할 때에는 이구 동성으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 : 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 : 2)라고 부르짖는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불신하고 기꺼이 노래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 : 3).

 

 

 

15. 신자들은 완전한가?

 

위에 인용한 구절들과 같은 다른 구절들도 있으므로, 그것을 기초로 자기의 주장을 세울 수도 있겠다. 솔로몬은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한다(잠 20 : 7). 마찬가지로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 : 28)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에스겔도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라고 한다(겔 18 : 9,21, 33 : 15 참조).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부정하거나 애매 모호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 나올 사람이 없으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난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서는 완전한 생활이-비록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일지라도-영생을 향해서 일보 전진하는 것임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근원이 무엇인가? 주께서 은혜의 언약으로 받아들이신 사람들에 대해서, 그 행위의 공과를 검토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안아 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스콜라 학자들이, 행위는 "받아 주시는 은혜"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을 이런 뜻으로 해석한다. 율법의 언약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행위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가치로 승격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17 그러나 신자의 행위는 자체의 오점과 다른 범행으로 더럽혀 지기 때문에 주께서 이 두 가지를 다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즉 사람에게 값없이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또 여기서 사도가 신자들의 완전성을 원하므로 신자들이 주의 날에 (고전 1 : 8, 살전 3 : 13, 5 : 23 참조)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골 1 : 22, 엡 1 : 4 참조) 그의 기도는 우리에게 시기 적절한 충격을 준다. 과거에 콜레스티우스(Coelestius)의 추종자들은 현세에서의 의의 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도의 이 말씀들을 힘차게 역설했다.18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을 따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간단히 대답하겠다. 신자는 모두 이 목표를 향해서 노력하며,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날, 흠이나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골 1 : 22 참조). 그러나 현세에서는 가장 훌륭한 계획도 진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완전히 결합될 때뿐이다.19 그러나 나는 성도들에게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는 "우리가 성도들의 덕을 완전하다고 할 때에, 이 완전성에는 성실하고 겸손하게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20고 하였다.

 

 

 

제 18 장

 

행위의 의를 보상이란 말에서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상을 말하는 구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1-4)

 

1. "행위에 따른 보상"의 뜻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마 16 : 27)1 하는 말씀들을 생각하겠다. 같은 종류의 구절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 : 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 2 : 9,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 : 29),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마 25 : 34-35).

여기에 첨가할 것은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수라고 하는 발언들이다. 이런 종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 손의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잠 12 : 14, 사 3 : 11의 융합),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 13 : 1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 : 12),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 : 23),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오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 : 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롬 2 : 6)하는 말씀은 설명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이 표현이 원인보다 일의 순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완성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 : 30)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만이 자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는, 정하신 순서에 따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것을 얻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행위에 따라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빌 2 : 12)한 말은 적절하며 그 때문에 그들은 선행에 몸을 바치는 동시에 영생을 명상한다. 이 말씀과 같은 다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신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명령이 있다(요 6 : 27 참조). 그러나 곧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는 말씀이 첨가된다(요 6 : 27). 이것을 보면 "일한다"는 말은 은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의 장본인이라든지, 구원은 그들의 행위에서 유래한다든지 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신자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주 예수님의 날까지 그것을 또한 완성하실 것이다(빌 1 : 6). 그러나 이 일이 완성되는 것은 그들이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늘 아버지와 같이 되며 참으로 자녀답게 되는 때이다.

 

 

 

2. 보상은 "기업"이다

 

"보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첫째로 우리는 천국이 종이 받는 삯이 아니고 자녀들이 받는 기업이라는(엡 1 : 18) 것을 진실되게 믿어야 한다.

주께서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만이 이 기업을 향유할 수 있으며(갈 4 : 7 참조), 그렇게 되는 데는 양자로 삼으신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엡 1 : 5-6 참조).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 : 30).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하시는 구절에서도, 그것을 명백하게 "기업"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것이 다른 원천에서 온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행위를 열거하시고 그것을 실행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으로 갚으시며, 하늘을 차지하라고 부르신다(마 25 : 35-37).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상속권에 의해서 차지해야 한다고 첨부하신다(마 25 : 34). 바울은 노예들에게 충실히 자기의 의무를 다하면서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을 대망하라고 명령하지만 그 보상을 "유업의 상"이라고 한다(골 3 : 24). 이런 구절들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규정된 용어로써 영원한 복락을 행위의 결과로 기인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신 데 돌려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행위를 동시에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 있는 예를 하나만 들면 이 문제는 밝혀진다. 이삭이 나기 전에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 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의 자손은 번성해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으리라고 했다(창 15 : 5, 17 : 1이하, 18 : 18 참조). 여러 해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명령을 받은 대로 아들을 제단에 바칠 채비를 했다(창 22 : 3). 이렇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이 약속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창 22 : 16-18). 우리가 여기서 듣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았는가? 그 명령을 받기 전에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지 않았는가? 신자들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고려되기 전에 주께서 주신 그 은혜 즉, 하나님 자신의 자비 이외에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이유가 없는 때에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셨다고 우리가 여기서 밝히는 점에는 애매 모호한 데가 조금도 없다.

 

 

 

3. 은혜로서의 보상

 

그러나 행위가 있기 전에 값없이 주신 것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속이거나 희롱하시는 것이 아니다. 약속하신 것들을 주실 것 혹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명상하고, 우리에게 제시된 복된 소망을 하늘에서 얻으려고 행위를 통해서 노력하도록, 주께서는 선행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약속의 열매가 성숙하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가는 우리의 행위에 그 결실의 공을 돌리는 것은 마땅하다. 사도는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사랑의 의무를 열심히 이행했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소망 때문이었으며 그 소망은 복음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두 가지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골 1 : 4-5). 그들이 복음에서 그들의 소망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그 소망을 지탱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뿐이라고 언급한다. 베드로의 발언도 이와 일치하여 경건한 사람들은 "때"가 오면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하였다(벧전 1 : 5). 바울은 그들이 이 때문에 수고한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일평생 달음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을 전한다.

주께서는 그가 약속하시는 보상을 우리가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자신을 집주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그들을 포도원에 보내서 일을 시킨다. 제 일시 (오전 7시)에도 보내고, 제 이시, 제 삼시(오전 9시)에도 보내고, 심지어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보낸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을 때 모두에게 같은 삯을 준다(마 20 : 1이하). 이방인들을 부르심이라는 고대 저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쓴 것이라고 하나, 저자가 누구였든 간에, 그는 이 비유를 간단하고도 바르게 해석했으므로 나 자신의 말보다 그의 말을 사용하겠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그의 은혜는 하나뿐이지만, 부르심은 각양 각색임을 밝혀 보이신다‥‥‥제 십일시에 포도원에 갔어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과 꼭같은 보수를 받게 된 사람들은 분명히‥‥‥날이 저물 때에 즉 일생이 끝날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한다. 주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은혜의 탁월성을 나타내려고 하신다.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별도로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 많이 수고했으나 늦게 온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 처사를 보고 자기들이 받는 것은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2

끝으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다. 즉,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인애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포용하실 때 이루어지는 복된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신 복을 소유하는 것 또는 그것을 소위 "즐기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내세에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고(막 10 : 30) 또 다른 곳에서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5 : 34)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이 있을 때에 양자되는 일이 나타날 것을 "양자 됨"이라고 부르고(롬 8 : 18이하), 그 후에 그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해석한다(롬 8 : 23).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영원한 사망3인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받아들여져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이 일은 다만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행위에 대한 보상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라고 하는(벧전 1 : 9) 베드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질 수 있다.

 

 

 

4. 보상의 약속이 지니고 있는 목적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당연하게 보상을 받을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을 이유가 전연 없다. 오히려 반대로 성결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대에서 힘을 얻으며 이런 위로로 생기를 얻지 못한다면 즉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 약한 우리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도움을 얻는다.

우선 우리는 각각 자기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즉 모든 신자에게 초보로 가르치는 첫 단계이다. 그 다음에 십자가의 훈련으로 일평생 그들을 연단시키시며, 그들이 현세의 유익을 바라거나 의지하지 않게 하신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절망에 부닥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한다(고전 15 : 19). 주께서는 큰 고난 가운데도 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머리를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라고 경고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으라고 하신다.

주께서는 이 복을 "상", "보수" 또는 "보상"이라고 부르신다(마 5 : 12, 6 : 1이하, 기타 참조).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불행과 고난과 중상과 그 밖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선례를 따라(고후 6 : 13, 히 10 : 35, 11 : 26 참조) 영생을 일종의 "보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생에서 자신의 백성을 노고로부터 안식으로, 박해로부터 번영하며 즐거운 상태로,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 빈곤으로부터 부요로,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당한 모든 재앙을 변화시켜 더욱 큰 복으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은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성결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롬 8 : 30).

다만 우리는 공로와 보상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궤변가들은 우리가 밝힌 목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관련성을 고집한다.4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은 다소의 위로로 육의 약함을 도우시려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허영으로 교만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보상에서 행위의 공로를 결론짓거나, 행위와 보상을 서로 비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론들에 대한 답변. 5-10)

 

5.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할 때(딤후 4 : 8),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대답한다.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의로우신 재판장은 면류관을 상으로 주셨을까?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라고 하는 은혜가 앞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당연히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 미리 부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당연히 받을 상으로서 주어질 것인가?"5 또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인다. 주의 자비가 우리의 행위에 있는 모든 불의를 덮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는 우리의 행위에 의를 전가하실 수 있겠는가? 그의 무한하신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행위에서 벌을 받아야 할 점을 삭제해 버리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늘 영생을 은혜라고 부른다. 영생이 행위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교만을 더욱 키우는 동시에 우리의 용기를 돋운다. 그 외에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므로,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동시에, 이들 행위가 추악한 찌꺼기로 더럽혀져 있어서 주의 심판의 표준대로 평가한다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는 다만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가르친다.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하는 말은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에게 보낸 세 번째 책에서 하는 말을 보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두 사람을 비교한다. 한 사람은 경탄하리 만큼 거룩하며 완전한 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은 정직하게 살며 건전한 생활 습관을 가졌지만, 아직도 불완전한 점이 많다.

끝에 가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둘째 사람은 물론 도덕 생활에서 처음 사람보다 못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다. 그는 그 믿음에 따라 살면서,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자신을 책하며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치욕은 자기에게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선행에 대한 사랑을 받는다. 이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가 이린 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행위가 없으면 믿음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지만, 그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기 때문에(갈 5 : 6 참조) 버림받은 믿음이 아니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합 2: 4) 그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도 받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면 선행같이 보이는 것도 죄로 변하기 때문이다."6 확실히 그는 여기서 우리가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 즉 선행의 의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승인 하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6.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

 

다음에 있는 구절들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뜻이 비슷하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 : 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며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 : 17-19).7 여기서 선행은 우리가 복된 영생에서 열락할 재물에 비교되고 있다. 나는 성령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대답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마 5 : 21)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 사람들이 현세에서 즐길 물건들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현세의 생명은 곧 꿈같이 사라질 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참으로 누리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곳으로 즉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거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미리 보내고, 일시 불편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데 그것은 오래 살 곳으로 재산을 많이 보낼수록 더 기쁘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늘이 고국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재산을 여기에 두었다가 갑자기 옮겨지게 되어 손해를 보는 것보다 그리로 미리 이전해 놓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전할 것인가? 그 방법은 확실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는 모두 자신에게 준 것으로 간주하신다(마 25 : 40 참조). 여기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잠 19 : 17)라는 유명한 약속이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 : 6).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바치는 것은 모두 주의 손에 저축되기 때문이다. 성실한 보관인이신 주께서는 때가 오면 많은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의무는 우리를 위해 주의 손에 감추어 두는 재산이라고 할이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이 일은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또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므로 누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에서부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쪽으로 비약하고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오류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 증거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증거들에서 올바르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돌아보실 가치도 없는 우리의 봉사가 그 어느 하나라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7.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

 

그들은 사도의 말을 빌려 우리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그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이런 환난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보낸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살후 1 : 5).

진정으로 사도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하늘로부터‥‥‥나타나실 때에"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살후 1 : 6-7) 말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 : 10)8고 말한다.

첫째 구절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기서는 공로의 가치를 의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로 택하신 우리를 맏아들인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시고자 하시기 때문에(롬 8 : 29), 그리스도께서 우선 고난을 당하신 후에 드디어 예정된 영광에 들어가신 것과 같이(눅 24 : 26),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행 14 : 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환난을 받을 때,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보통 그의 양들에게 찍으시는 표를 우리에게도 찍으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인정된다. 그것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갈 6 : 17) 가지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의 발언들을 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그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진다(고후 4 : 10) 우리는 그가 고난을 받으신 그 모양대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빌 3 : 10-11).

바울이 첨가하는 이유도,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 뜻을 바꿔 말한다면, "여러분을 괴롭힌 원수들에게 그 괴롭힌 데 대한 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일치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수고를 그치고 쉬며 평화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과 일치합니다"라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히 6 : 10)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봉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 것은 그의 공의에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치며, 만일 잊으신다면 그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가 되리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게으른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감당한 수고는 헛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는 뜻이다. 이 약속도 다른 모든 약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자비의 언약이 선행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 못 하리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의 언약만이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근거 위에 서서, 우리의 봉사가 아무리 무가치할지라도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주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이 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하지 않으시며 한번 하신 약속은 지키시리라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은 당연히 줄 것을 준다는 공정성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실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한 말은 유명하다. 이 거룩한 분이 그 말을 기억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 자주 반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 말을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새겨두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인용하겠다. "신실하신 주께서는 스스로 우리의 채무자가 되셨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9

 

 

 

8. 사랑에 의한 칭의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들을 인용한다. "내가‥‥‥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 : 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 : 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 : 14).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삼아 이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믿음보다 사랑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며, 물론 사랑의 힘은 더 크다고 한다.10 그러나 이 궤변도 아무런 문제없이 반박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처음 구절에 있는 말은 진정한 믿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11 둘째 구절도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바울이 사랑을 믿음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사랑에 더 많은 공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비효과적이며, 영향력이 많으며, 더 많이 봉사하며, 영원히 찬성하지만, 믿음은 얼마 동안만 유용하기 때문이다(고전 13 : 2이하 참조). 만일 우열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첫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바울의 발언과는 관계가 없다. 참으로 그가 역설하는 점은,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는 한 가지뿐이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사랑이 믿음보다 더 크다고 가정한다면, 건전한 판단력을 아니, 완전히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가 이 가정을 근거로 사랑이 더 많이 의롭다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믿음에 있는 의롭다 하는 힘은 행위의 가치에 있지 않다.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한다. 이러한 칭의를 믿음이 붙잡을 때에, 믿음이 의롭다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반대자들에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의롭게 한다고 주장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사랑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선하신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그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의 논법은 훌륭하게 전개된다. 우리가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은 한 도구에 불과 하다. 이 도구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얻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며, 의의 전체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사랑이 믿음보다 나으므로 우리는 사랑의 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왕은 구두 직공보다 무한히 훌륭하기 때문에 구두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법이다. 이 한 가지 삼단 논법만으로도 소르본느 학파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만일 어떤 궤변가가 여기에 뛰어들어,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란 말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단히 훌륭하고도 든든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열거하는 은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관련되기 때문에, 요약하는 의미에서12 그것을 모두 "믿음"과 "소망"에 포함시킨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해석하는 재능, 그리고 지식은 모두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현세에서 우리는 다만 소망과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과 소망을 말할 때에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 : 13상반절)-즉, 은사의 종류는 아무리 많을지라도 모두 이 셋에 연결되는 것인데-"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 : 13하반절).

셋째 구절에서 그들은 만일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면(골 3 : 14), 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므로, 사랑은 의의 띠일 것이라고13 추론한다. 우선 바울이 완전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르게 조직된 교회가 서로 잘 단결된 때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묻지 않겠다. 또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이런 추론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가? 나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들을 모두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이 완전성을 얻지 못하리라고 언제든지 그들을 반대하는 대답을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는 사람은 모두 사랑을 이루는 경지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완전성을 실현할 희망도 전연 없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9. 마태복음 19장 17절

 

미련한 현대 소르본느 학파는 아무 근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성경 구절들을 들어서 우리에게 던진다. 나는 그것을 일일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하는 어떤 말은 너무도 엉뚱하여 나는 그것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내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끝내기 전에, 먼저 그들이 매우 좋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하겠다.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신다(마 19 : 17).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고 은혜의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그들은 묻는다.14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시고 그 사람들에게 알맞도록 대답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모르는 생각이다. 여기서는 율법사가 주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묻는 사람의 인품과 질문 자체가 이와 같은 주의 대답을 유발시킨다. 율법의 의를 굳게 믿는 습성이 몸에 밴 율법사는 행위에 대한 확신 때문에 눈이 어두웠다. 그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의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의의 완전한 거울이 있는 율법으로 그를 돌려보내시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우리도 행위에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똑똑히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교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생명의 길을 떠나 사망의 구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겠는가? 우선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생명의 길에서 벗어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율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립되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들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식별할 수 있어야만, 구원을 회복하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피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약하면, 우리가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계명에 의해서 완전한 의를 배운다. 그러나 도중에서 실패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아무도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율법에 의한 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다른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께서는 율법사가 행위에 대한 허망한 자신감을 가지고 교만한 것을 마시고, 그가 영원한 사망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자각하도록, 그에게 율법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와 같이,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겸손하게 된 사람들에게 율법은 전연 말씀하시지 않고 은혜의 약속으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 : 28-29).

 

 

 

10.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성경을 잘못 이용하려고 하다가 지쳐버린 그들은 드디어 교묘한 궤변을 말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믿음을 "일"이라고(요 6 : 29) 한 사실에 관해서 그들은 트집을 잡는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은 우리가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추론한다.15 그들은 마치 믿음이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렇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며, 이것은 복음선포서인 우리에게 제시되는 자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들여 이 어리석은 말들을 분쇄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용서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은 외부의 압력이 없더라도, 그 자체의 약점에 의해서 충분히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반론은 참된 듯 해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힐 수 있으므로, 말이 나온 김에 이것을 처리하려 한다. 서로 반대되는 것에는 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것이 상식이며, 죄는 그 하나 하나가 우리의 불의로 인정되는 것이므로, 선행에 대해서도 그 하나 하나를 의로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사람이 정죄를 받는 것은 원래 불신앙에만 기인하는 것이고, 개개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지만,16 나는 이에 만족할 수 없다. 불신앙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물론 그들과 생각을 같이한다. 불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헛걸음이고, 그후에 개개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와 불의를 잴 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꼭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듯 해서, 이 점에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행위에 의한 의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테면 이 직선을 일평생 어김없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될 수 없다. 이 직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불의에 빠진다. 이것을 보면 의는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복종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싫증나는 일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의를 판정하는 척도는 아주 다르다. 음행하는 자나 도적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거스린 자이므로 한 가지의 범행으로도 죽음에 해당한다. 이들 궤변가들은 야고보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약 2 : 10- 11)이라고 한 말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각 개의 죄에 대해서 공정한 벌이 죽음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죄는 그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공정한 진노와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 즉 많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경우에도 선한 행위 하나를 하면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이론가라고 하겠다.

 

 

 

제 19 장

 

기독교인의 자유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중에 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 1-3)

 

1. 자유에 대한 기독교인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자의 자유를 말해야 하겠다. 복음의 가르침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제목에 대한 설명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것을 모르고는 양심은 거의 아무 일도 확신 있게 행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일에 머뭇거리고 위축되며 항상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자유는 특히 칭의에 따르는 것이 그 칭의의 힘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중하게 경외하는 사람은 이 교리에서 오는 비길 데 없는 유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불경건하고 루키아노스(Lukianos)적인 인간들1 즉 비꼬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 교리를 교묘한 말로 희롱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취한 자들이어서, 어떤 파렴치한 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앞에서 몇 번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일이 있으나,2 자세한 논의는 지금까지 미룬 것이 유익했다.

그 이유는 이 방자한 인간들에게 제때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자마자 정욕이 끌어 오르거나 큰 소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버려 두면 가장 선한 일까지도 가장 사악하게 더럽힌다. 어떤 자는 이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없는 방탕 생활에 뛰어든다. 또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혼란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적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이런 위험 사태의 원인을 일소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교리의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보통 제기되는 어리석은 항의에 대처하는 것이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3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성도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는 데 있어서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을 뛰어넘어 더욱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칭의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버리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즉, 행위를 전혀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소한 행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행위의 분량이나 한도를 측정할 수 없고, 율법 전체에 대한 채무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논의할 때에, 율법을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행위에 대한 생각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심에 확신을 얻고 싶으면 율법을 일체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4 그것은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며 권고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매우 다르므로, 우리는 바르게 또 양심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4 : 7, 엡 1 : 4, 살전 4 : 3 참조). 이 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 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갈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며 어떤 확신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양심이 고민할 때에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완전성이 전연 미칠 수 없는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서 제시해야 한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주장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논증은 거의 전부가 이 점을 증빙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의식에서 해방되는 자유 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해석가들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들이 이 점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 :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 : 1-4). 이 구절들에는 확실히 의식에서 벗어나는 자유보다 더 고상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의식을 논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폐지된 율법의 옛 그림자를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거짓 사도들과 논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 전체의 근본이 되는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저 유대교적인 그림자가 복음의 명료성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모세의 의식에서 예시된 일들이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나타났다는 것을 밝힌다. 그 다음에, 이 순종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는 극히 사악한 관념을 저 사기꾼들이 일반 신도들에게 불어넣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강경한 태도로, 신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더우기 저 무가치하고 유치한 것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났다는 것과(갈 4 : 5),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문제는 당연히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다고 다짐하여, 그들이 불필요한5 일에 의무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4-6)

 

4.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신자들은 진실로 순종을 확립한다

 

첫째에 의존하는 둘째 부분은,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6 율법의 지배하에서는 양심은 항상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꺼이 순종할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뜻을 곧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예를 들겠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신 6 : 5)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며,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 주의 길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전진한 사람도 이 목표로부터는 아직 멀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지한 애정으로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영혼의 많은 부분에는 육적인 욕망이 차 있어서 그들을 끌어당기며, 하나님을 향한 급속한 전진을 방해한다. 그들이 분투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나, 육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며 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완수하는 것같이 어려운 일이 없다고 느끼는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옳은가? 그들은 의욕과 열망이 있으며 노력도 하지만, 어떤 일에서도 요구되는 완전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을 해보아도 또 하려고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뿐이다. 만일 누가 생각하기를, 그의 행위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에 있는 선한 점을 받아주시리라고 한다면,7 이런 결론은 그를 속일 뿐이요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다. 율법의 준엄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은 모든 불완전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선하다는 판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바로 이 이유 때문에-율법에 대한 위반이란 것을 깨달을 것이다.

 

 

 

5. 구속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의 표준으로 측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저주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일올 하기 위해서 가련한 영혼들은 어떻게 진지하게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율법의 이 엄격한 요구에서 아니, 율법의 전체적인 준엄성에서 해방되며, 아버지같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면, 그들은 쾌활하게 또 열렬하게 응답하며 하나님의 지도를 따를 것이다. 요약하면, 율법의 멍에를 짊어진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매일 일정한 일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 종과 같다. 종들은 명령받은 일을 정확하게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인 앞에 감히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너그럽고 솔직한 대우를 받는 아들들은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일까지도 아버지 앞에 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순종한 행위와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봉사가 아무리 사소하며 졸렬하고 불완전 할 지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일을 확약하신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 3 : 17). 여기에서 "섬긴다"는 말이 사용되는 한편, "아낀다"는 말은 분명히 "관대하다, 또는 인자하게 허물을 묵인한다"는8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우리에게는 이 확약이 절실히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애쓰는 일은 모두 무익한 것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므로 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그에게 대한 공경을 표시한다고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대해서 불경이 되는지 또는 공경하는 것이 되는지를 모르고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6.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또 히브리서 기자가 거룩한 조상들이 행했다고 기록한 모든 선행을 믿음에 돌리며, 믿음만으로 그 행위들을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히11 : 2이하, 11 : 17 기타). 로마서에는 이 자유에 대해서 유명한 구절이 있다.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롬 6 : 14),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롬 6 : 12,14). 그는 그 앞에서 신자들에게 그들의 "죽을 몸에" 대해서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하며(롬 6 : 12),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충고했다(롬 6 : 13).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들이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있다고 항의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이 자유의 위안을 첨가한다. 그가 한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신자들은 아직 죄가 근절됐다든지 또는 의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를 언제까지나 노여워하시는 듯이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은혜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의 목적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 로마서에 의한 증명. 7-9)

 

7. 기독교인의 자유의 셋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 자체로서는 "무해 무익한"9 외부적인 사물에 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교적 의무에도 얽매여 있지 않고, 그런 사물을 때로는 이용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이용하지 않는 것은 전혀 무방한 일이다. 그리고 이 자유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인데, 만일 모른다면 우리의 양심은 결코 평안히 쉴 수 없으며 미신도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육식을 자유롭게 먹는 일과 휴일 문제와 옷 입는 문제 등에 대한 논의를 상기시킨다고 해서, 이것을 무익하고 경박한 행동이라고 보며, 우리를 몰상식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한 번 함정에 빠지면 멀고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트, 내의, 냅킨, 손수건등에 아마포를 써도 좋겠는지를 의심하게 되면, 다음에는 대마포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고, 드디어 거친 삼베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생길 것이다. 또한 식사할 때에 냅킨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손수건이 없어도 괜찮겠는가의 문제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맛있는 좋은 음식을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은 검은 빵을 먹거나 보통 음식을 먹거나 간에, 더 나쁜 것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불안을 느낄 것이다. 단 포도주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양심에 꺼림직해서 맛없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보통 보다 맑고 좋은 물까지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속담에서 말하듯이, 요컨대, 길에 있는 짚을 밟아도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10

여기서 중대한 논쟁이 벌어지데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쓰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거나 실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낙심해서 반드시 깊은 혼란의 와중에 빠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일정한 길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멸망의 길을 걸어간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의심에 휘말려든 사람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자유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한다(롬 14 : 14).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만일 우리의 자유가11 하나님 앞에서 근거가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모든 외적인 일들은 우리의 자유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미신적인 생각이 우리 앞에 장애물을 제시할 때는, 대체로는 정결한 것도 우리에게 더러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缘故)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 : 22-23)고 덧붙여 말한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행하는 사람들은 대담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마음이 압도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증거한다(딤전 4 : 4-5).

그런데 내가 말하는 이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와 양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좋은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이 자유가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라 아무 양심의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모든 의식이 포함된다. 이런 의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은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요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 되도록 자신의 주관 하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9. 기독교인의 자유를 탐식(贪食)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 자유의 힘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떠는 양심을 진정시키는 데 있다. 이는 신자들의 양심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끝내지 못한 일이나, 우리의 육의 허물로 더러워진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해서, 혹은 무해 무익한 것들의 사용 문제에 대해서 불안과 동요와 고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정욕대로 악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런 자기의 욕망을 변호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나, 자유는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종류의 인간들이 현재 더 많은 죄를 짓고 있다. 사치를 누릴만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화 찬란한 연회와 몸치장과 저택을 즐기며, 이웃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가지려 하며, 부유한 것을 굉장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런 모든 일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변호하며, 이런 것은 무해 무익한 일이라고 한다. 나도 무해 무익하게 사용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을 인정하겠으나 이런 일들을 탐내며 크게 자랑하며 낭비하는 때에는, 그 자체로는 용인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죄악 때문에 더러워진다.

바울의 발언은 무해 무익한 것들을 잘 구별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 : 15). 무엇 때문에 이제 위로를 받고 배부르고 웃고(눅 6 : 24-25), 상아 침상에서 잠을 자며(암 6 : 4),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사 5 : 8),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포도주를 갖추는(사 5 : 12)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는가? 확실히 상아와 금과 재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사람이 쓰도록 허락된 것, 아니 지정된 것이다. 우리는 웃지 말라거나, 배부르지 말라거나, 조상이 물려준 재산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 말라거나, 음악을 즐기지 말라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거나 하는 명령을 받은 일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물질이 풍족하며, 열락과 쾌락 속에서 뒹굴며, 배불리 먹으며, 현재의 쾌락으로 머리와 정신이 몽롱하며, 항상 새로운 쾌락을 갈구는 것-이런 짓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버리라. 무절제한 낭비를 그르치는 허영과 교만을 버리라. 맑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깨끗이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각성하며 절제할 때에 사람은 이런 복된 선물들을 합당하게 쓰는 법을 깨달을 것인데, 이런 절제가 없으면 평범한 쾌락까지도 지나친 것이 된다. 옷은 초라해도 마음이 고귀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12 자색 옷과 비단 옷을 입었어도 마음이 단순하고, 겸비한 예가 있다. 그러므로 생활이 빈곤하거나 보통이거나 부유하거나 간에, 사람은 각각 그 처지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생활을 위해 공급해 주신 것이요 사치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법칙은 다음과 같은 것인 줄로 알아야 한다. 즉, 바울과 함께,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만족할 줄 알며, 낮아질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며,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배부르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형편에 대처할 줄을 알아야 한다(빌 4 : 11-12).

 

 

 

(기독교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그리고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 10-13)

 

10. 기독교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자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듯이, 무분별하고 어리석게 그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은 약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 독자들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자유가 없다면 자기들에게 자유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13 나는 그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들은 자유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새 것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그것을 얻는다는 것과,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사하지 않는 것도 자유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기를 먹거나 계란을 먹거나, 붉은 옷을 입거나 검은 옷을 입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고도 오히려 여분이 있다. 자유는 원래 양심을 위한 것인데 양심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앞으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고, 한 가지 빛깔의 옷만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유는 감해지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자유이기 때문에 맑은 양심으로 먹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의 약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가장 위험한 잘못이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을 참으며,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해를 줄 경솔한 일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돌보라고 특별히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서 이 한도를 지켜야 하겠다.

 

 

 

11.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여기서 나는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서,14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며, 어떤 것을 피하며, 어떤 것을 무시할 것인가를 논하겠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지지가 있고 말의 뜻을 바르게 표현한다는 한도에서 "걸리게(걸림을 준다) 한다"는 것과 "걸린다(걸림을 받는다)"는 것을 보통 구별하는데, 나는 이 구별을 찬성한다.

우리가 경박해서, 혹은 방종해서, 혹은 경솔해서, 바른 순서나 장소에 어긋나는 어떤 불미한 행동을 함으로써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때에, 그것은 걸리게 하는 것이라고 불려진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행위자에게서 유래할 때 그것은 그가 걸리게 한다고 일컬어진다.

악한 행동이나 부당한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또는 악한 의도로 그 행동을 변하여 넘어지는(죄를 짓는) 기회를 만들 때15 그것을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 걸리게 "하는 것"은 없지만, 악한 해석가들이 그렇게 이해한다. 첫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약한 사람들만이 넘어진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악한 성품과 바리새적 교만을 가진 사람들이 넘어진다. 따라서 하나는 약자의 걸림이요, 또 하나는 바리새적 걸림이라고 부르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이다. 바리새적 엄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약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양보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라고 그는 말한다(롬 14 : 1). 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 : 13). 이밖에도 같은 뜻을 가진 구절들이 많은데, 여기서 말하기보다 각각 적절한 때에 찾아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요점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 : 1-2)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 : 9),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 : 25),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16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 : 29,32),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 : 13).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은 우리의 약한 이웃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사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그들의 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에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걸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는 그들이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니, 그대로 버려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마 15 : 14).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었다고 주님께 고했는데(마 15 : 12), 주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의 걸림을 무시하라고 대답하셨다.

 

 

 

12. 기독교인의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며 올바르게 포기하는데 대하여

 

우리가 누구를 약한 자로 보며 누구를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냐 하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구별을 없애 버린다면, 걸림을 주는 문제에 관해서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 자유는 항상 큰 위험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며 어느 정도로 걸림의 대가로 치뤄져야17 하는가에 대해서 바울은 교훈과 실천으로 가장 분명한 정의를 내렸다고 나는 본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 : 3).

그러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다(갈 2 : 3). 그가 한 행동은 다르나 목적은 같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 : 19-20),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 : 22)라고 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를 적당히 제한할 수 있다.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 까닭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 : 3-5).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약한 형제들의 양심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 : 23-24).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같이 자신도 자유를 포기하는 지혜를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결코 그 지혜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평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체 자유를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웃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웃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혹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만큼 중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일에 대한 자유의 권한을 그에 게 주신 목적은, 그가 모든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욱 예민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13.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걸리게 함을 피하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중간적인 무해 무익한 일들에 관한 것이다. 꼭 해야 할 일들을 걸리게 함이 무서워서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의 자유를 사랑보다 아래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랑 자체는 믿음을 완전히 지키면서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랑을 제단에 이르기까지라도(마 5 : 23-24 참조) 고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노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소동을 일으키며, 무슨 문제든지 조용하게 처리하지 않고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무절제를 우리는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온갖 악한 일의 괴수 노릇을 하던 자들이 이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고전 8 : 9 참조) 행동하겠노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런 말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이웃들의 양심을 악으로 인도했으며, 특히 그들 자신은 여전히 같은 진흙탕에 갇혀 있어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 또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젖을 먹여야 된다고 상냥한 태도로 말하면서, 사실은 이웃을 그들의 가장 악하고 치명적인 생각 속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젖으로 먹였노라고 한다(고전 3 : 2). 그러나 만일 그 때에 교황주의자의 미사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있었다면, 바울은 젖을 주기 위해서 희생을 드렸을 것인가? 그랬을 리가 없다. 젖은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언 이설로 사람들을 꾀어서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위를 일시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까지 그런 젖을 자녀들에게 먹일 것인가? 자녀들이 경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면 훌륭한 젖으로 키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들을 더 날카롭게 공격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의 진부한 주장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으며, 건전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당연한 멸시를 받고 있다. 둘째로, 나는 이미 특수 논문들에서18 충분히 증명한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독자들이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탄과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만들려고,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우리는 굳세게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위험이 앞에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서 손톱만큼도 벗어날 자유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인하시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구실 하에서도 불가하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정부에 대한 자유와 양심의 관계. 14-16)

 

14. 모든 인간적 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

 

우리가 이미 서술한 자유의 특권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양심이 이제 한 경지에 도달했다. 즉,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시는 문제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 관례의 올무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권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큰 은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양심도 그 받은 유익을 빼앗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큰 희생으로 얻어 주신 것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가 금이나 은이 아닌 자신의 피로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벧전 1 : 18-19). 바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람에게 예속시킨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갈 2 : 21 참조). 갈라디아서의 몇몇 장에서는,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 자유를 확고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희미하게 되며 심지어 말살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우리의 양심이 법과 규칙에19 얽매인다면(갈 5 : 1,4 참조), 양심은 확실히 자유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므로 더 자세하고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규정한 것을 폐지하는 문제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말이 나면, 마치 인간의 모든 복종이 동시에 제거되고 타도되는 듯이, 한편에서는 선동적인 사람들이, 또 한편에서는 중상자들이 즉시 큰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5. 두개의 왕국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먼저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여기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배운다. 보통 이 두 방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관할권이라고20 부르는데 이는 부적당한 명칭은 아니다. 첫 번째 종류의 통치는 그 뜻이 영혼의 생활에 속한 것이요, 둘째 것은 현세 생활에 관한 것 즉 의식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게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데 관한 통치이다. 전자는 마음속에 있고, 후자는 외면적인 행동을 규제한다. 하나는 영적인 나라, 또 하나는 정치적인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구별한 것과 같이, 이 둘은 항상 각각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한 쪽을 고찰할 때에는 다른 쪽은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 이를테면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으며, 두 세계가 각자 다른 임금과 다른 법률의 권위 하에 있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자유에 대한 복음의 교훈을 사회질서에 잘못 적응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외부적인 통치에 관해서 인간 사회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서 모든 육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다.

다음에, 영적인 나라에 적용되는 듯한 제도 가운데도 착오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제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므로 합당하다고 인정할 것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과를 구별해야 한다. 세속 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21 교회 법에 대해서도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 자세한 논의는 제 4 편에서 하는 것이 더 적당하겠고, 거기서는 교회의 권한도 논하게 될 것이다.22

현재의 논의에 대한 결론을 말하겠는데,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문제 자체는 그다지 불분명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외부의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23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곤란을 당한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벌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정부에 복종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롬 13 : 1,5) 문제가 더욱 곤란하게 된다. 바울의 발언 때문에 양심은 세속적 법에도 매인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이제부터 영적 통치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전부 부정될 것이다.

이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원을 더듬어 정의를 내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과 이해력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며, 그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지식"이란 말의 유래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결합된 증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고24 부른다. 양심은 사람이 마음속에 아는 것을 숨기지 못하게 하며, 도리어 그것을 추궁해서 드디어 유죄를 선언하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이다. 바울도 양심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라고 말했다(롬 2 : 15-16). 말하자면, 단순한 지식이 사람 속에 숨어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끌어가는 이 지식은 일종의 보호자이다. 즉, 사람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서 하나도 흑암 속에 묻혀 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임명된 보호자이다. "양심은 일 천명의 증인이다"25라고 하는 옛 격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같은 이유로 베드로도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을(벧전 3 : 21) 마음의 평화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한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타날 때의 마음의 평화와 동일시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는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라고 하는 것은(히 10 : 2), 우리가 해방 또는 무죄 방면 된 것으로 인정되며, 죄가 다시는 우리를 고소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16. 양심의 구속과 자유

 

그러므로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다(딤전 1 : 5 참조). 후에 같은 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착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딤전 1 : 19) 말함으로써, 바울은 양심과 이해력이 얼마나 다른가를 가르친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활발한 심령과, 경건하며 거룩하게 살려는 진실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따금씩 양심을 사람들에게도 상관시키는 일이 있다. 누가가 전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언명한다(행 24 : 16). 그러나 이것은 선한 양심의 결과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한 말이고, 원래는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법이 양심을 구속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 없이 법이 그 사람을 구속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해서 모든 정욕을 배제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음란한 말이나 방탕한 행동을 일체 금지하신다. 나의 양심은 사람이 지상에 한 명도 없더라도, 이 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무절제하게 사는 사람은 형제들에게 나쁜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책으로 그 양심이 묶여 있다.

그 자체로는 무해 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다른 고려를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남을 넘어지게 만들 일을 일체 하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양심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에 대해서,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 : 28-29)라고 말했다.26 이미 경고를 들었으면서도 이런 고기를 먹는 신자는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신자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고 있다. 이 법은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면서도 양심의 자유는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0 장

 

기도 : 믿음은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1

 

(기도의 본질과 가치 1-3)

 

1. 믿음과 기도

 

지금까지 논의를 통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인간에게는 선이란 것은 전혀 없고, 구원에 도움이 될 것도 전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곤란에 빠진 자기를 구해낼 힘은 자기 밖에서 구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이 계시는 기꺼이 또 거저 주신 것이라는 설명이 후에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불행한 우리에게 행복을, 궁핍한 우리에게 모든 부를 주시겠다고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고, 우리의 믿음이 전적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모든 기대가 그를 의지하며, 우리의 소망이 전적으로 아들에게 밀착하여 안식을 얻게 하신다. 이것은 삼단 논법으로 이끌어낼 수 없는, 저 은밀한 숨은 철학이다.2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여 그 빛을 보게 하신 사람들만이 이 철학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시 36 : 9).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교훈을 받은 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에게 없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게 하셔서(골 1 : 19, 요 1 : 16 참조) 마치 우리가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물을 퍼내듯 은혜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얼마든지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아는 것들을 찾으며, 기도로 그에게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주인이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신 것과, 그에게 구하라고 상기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의 앞에 가서 달라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땅 속에 감추인 보화가 어디 묻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도 그 보화를 무시하는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등한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정하였다. 믿음이 복음에서 나는 것과 같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받는다(롬 10 : 14-17). 그는 조금 앞에서도 꼭 같은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마음속에 복음의 증거를 인치는 영 즉 양자의 영이(롬 8 : 16), 우리의 정신을 고무시켜 감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 : 26), 아무 의심 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롬 8 : 15) .

그런데 이 마지막에 언급한 점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간단하게 다루었기 때문에,3 이제 더 자세히 논해야 되겠다.

 

 

 

2. 기도의 필요성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해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교통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약속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었고, 필요한 때에는 또 약속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대해도 좋다고 약속하신 것은 또한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주의 복음이 우리에게 가리켜 주었고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 보화를 기도로 파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유익한가?-이는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유일한 안전한 요새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다고(욜 2 : 32 참조) 하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일들을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는 그의 섭리와, 약하고 거의 쓰러지려고 하는 우리를 지탱하는 그의 힘과, 비참하게 죄에 눌려 있는 우리를 받아들여 은혜를 입혀주시는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함으로써 기원한다. 따라서 우리의 양심에 특별한 평화와 안식이 온다. 우리는 긴급히 필요한 일을 주 앞에 알리고 나서, 우리의 어려운 일들을 주께서 샅샅이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주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돌보아 주실 의사와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완전히 안심한다.

 

 

 

3. 반대 의견 : 기도는 없어도 되지 않는가? 기도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상기시켜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점에서 곤란을 당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를 아시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마치 우리의 목소리로 깨우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졸고 계시거나 심지어 주무시고 계시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지를 모른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 인정을 기도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기시는데 이 입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그 유익도 우리에게 돌아온다. 따라서 저 거룩한 조상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 있게 찬양하면 할수록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엘리야의 예만 보아도 넉넉할 것이다. 그는 아합 왕에게 비를 분명히 약속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애써 기도하며, 사환을 일곱 번 보내서 확인하게 했다(왕상 18 : 42). 이는 자기가 한 예언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생기가 없어지거나 태만해지지 않도록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감각이 무디고 마비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을 지켜보시며,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도와주시는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 듯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거룩한 군원의 닻으로 믿고 그에게 달려가서 피난하는 습관이 붙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눈앞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내놓으며, 우리의 속마음을 토로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시 145 : 15-16 참조). 넷째로,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끝으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가 곤란한 때에 그에게 빌 길을 친히 열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언제나 도와주시며, 말씀으로 달래시는4 것이 아니고 즉각적인 도움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결코 졸거나 게으른 일이 없으시면서도, 게으른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잠자며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시는 때가 많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우리가 그 분을 찾으며 그분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기도에서 떠나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일을 지키시며 우리가 귀찮게 간청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라고5 떠들고 있으나, 그들의 행동은 너무도 미련하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시 145 : 18) 하신 주의 증거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말로 떠들어대면서, 주께서 언제든지 기꺼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간구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께서 자진해서 너그럽게 주시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기도로 그것을 얻는 것으로 인정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 시편에 있는 저 인상적인 말씀이 증거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비슷한 구절들이 많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 : 12, 시 34 : 15). 이 문장은 경건한 이들의 구원을 스스로 열심히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태한 경향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믿음의 훈련을 제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곤란하고 눈먼 자들을 돕기 위해서 지켜보고 계시지만,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더 잘 증명하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려 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것과(시 121 : 4), 그는 마치 우리가 게으르고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우리를 잊어버리신 듯이 활동이 없으시다는것, 이 두 가지가 다 사실이다.

 

 

 

(올바른 기도의 법칙. 4-16)

 

첫째 법칙 : 경외. 4-5

 

4.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경건한 초자연성이 필요하다

 

정당하고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첫째 법칙은, 하나님과 대화하려는6 사람에게 합당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자세를 바르게 하려면, 우리를 곁으로 이끌어 하나님을 바르고 순수하게 주시하지 못하게 하는 육신적인 근심과 생각을 버리고 전심 전력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정신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정신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하여 어떠한 근심으로도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큰 근심으로 인하여 기도할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깊은 구덩이에서 죽음에 직면해서 근심은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를 향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본다(시 130 : 1 참조).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원래 떠돌아다니는 우리의 정신이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염려 때문에 이리저리 끌리거나, 하늘을 잊고 땅에 얽매이는 일이 없도록, 모든 염려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그 자체를 높이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눈멀고 미련한 이성이 고안 해내는 것을 일체 하나님 앞에 가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그 허무한 본성의 한계 안에 붙들려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순결한 상태를 목표로 비약해야 한다.

 

 

 

5. 무례하며 불경건한 기도를 배척함

 

두 가지 일에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기도에 바쳐야 하고, 흔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경외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경박한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는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들이 어느새 스며들어 기도의 진행을 막거나, 굴곡이 많은 곁길에 들게 하여 앞으로 나감을 더디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친밀한 대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합함으로써 그분의 크신 인자하심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가를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같이, 기도중에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깊이 생각하여, 세상적인 걱정과 애착을 일체 버리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만이 충분하고 합당한 기도 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 것은 생각을 높이 비약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다고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이다. 시편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고 하였다(시 25 : 1).성경에서는 "기도하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예컨대, 사 37 : 4).이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찌끼 위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렘 48 : 11, 습 1 : 12 참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시고, 우리의 근심 걱정을 자신의 가슴에 털어놓으라고 친절하게 권할수록, 하나님의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이 은혜를 무시하는 우리의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더 중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며, 정신과 노력을 정성스럽게 기도에 바쳐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정신은 이 여러 가지 장해물과 굳세게 싸워서 이기고 초월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는 또 다른 점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그의 앞에 쏟아놓으라고 하셨지만(시 62 : 8, 시 145 : 19 참조), 우매하고 사악한 감정은 무엇이든지 날뛰게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경건한 사람들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방자한 뜻에 양보하시기까지 인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점에서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경솔하고, 몰염치하고, 무례한 태도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나님께 감히 조르며, 어떤 망상이든지 닥치는 대로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내놓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우둔하고 우매해서 사람 앞에서도 말하기를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감히 하나님 앞에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행동은 세속 문인들도7 희롱하며 미워하기까지 했지만, 이 죄악의 세력은 언제나 강력했다. 그래서 야심가들은 쥬피터(Jupiter)를 수호신으로 택했고, 인색한 자들은 머규리(Mercury)를, 지식을 탐하는 자들은 아폴로(Apollo)와 미네르바(Minerva)를, 군인들은 마르스(Mars)를, 음탕한 자들은 비너스(Venus)를 택하였다.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지금도 친구끼리 농담과 잡담을 할 때보다 기도중에 불법한 욕망을 더 관대하게 버려 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절한 대우를 이렇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그의 권력에 굴복시키며 억제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 : 14)고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한다.

 

성령이 올바른 기도를 도우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능력이 역부족하다. 따라서 보조 수단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간절히 거기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둘 다 훨씬 낮은 곳에 서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둘이 다 기력이 없어 낙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한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 기도의 교사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기도에 있어서 바른 것이 무엇임을 알려 주시며 감정을 조절해 주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 : 26). 성령께서 직접 기도하시거나 탄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확신과 소원과 탄식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생각하게 만드신다. 또 바울이 신자가 성령의 지도로8 하는 탄식을 "말할 수 없는"것이라고 형용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도의 훈련을 참으로 받은 사람들은 기도중에 맹목적인 불안으로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며 가슴이 답답하여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를 모르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려 해도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은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태만을 감싸면서,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의 영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본래 빠지기 쉬운 무관심 상태에 머물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맡아 주실 때까지 우리는 졸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불경건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무기력하고 침체된 자기를 혐오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면서도(고전 14 : 15), 동시에 깨어 있으라고 우리게 권고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고무하여 기도를 이루도록 힘을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정지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자기의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6-7

 

6.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배제된다

 

둘째 법칙은,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자신의 무력을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기도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9 기도를 드릴 때에 마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듯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간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치명적이 되기 때문에 기도가 그들의 곤란에 대한 필요한 대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은 냉담하여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 의무를 이행하며 자기가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막연하고 몽롱하게 자기의 부족을 느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 그 느낌이 현실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 기도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서 해방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는 적어도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이 없으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의 거짓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보다 더 가증하고 저주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직접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인류는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기도라는 행동만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을 기원하는 때가 많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도 다른 데서 오리라고 확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졌다고 믿고 있다.

이것보다는 덜 심한 듯하면서도 역시 허용할 수 없는 결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겠다는 한 가지 원칙이 몸에 습관이 되어서, 아무 명상도 없이 기도를 중얼거린다. 진정으로 갈망하며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얻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원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구하는 일들은, 얼핏 보기에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컨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마 6 : 9, 눅 11 : 2), 우리는 그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일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같이 정성껏 기도해야 한다.

 

 

 

7. 기도가 우리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우리는 항상 꼭같은 절박감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야고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약 5 : 13) 구별해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너무나 게으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도록,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아픈 자극을 주셔야 한다. 다윗은 이것을 "주를 만날 기회"라고 부른다(시 32 : 6). 그가 다른 데서도 자주 가르치는 것과 같이(시 94 : 19 등), 곤란과 불안과 공포와 그 밖의 시련이 우리를 가혹하게 압박할수록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듯이,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이 우리는 "무시(无时)로‥‥‥기도"해야 한다고 한 것도 (엡 6 : 18, 살전 5 : 17) 옳은 말이다. 아무리 일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디를 보나 기뻐할 일들이 주위에 가득하더라도,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은 없다. 포도주와 곡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는 떡 한 조각이라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지하실과 창고들도 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위험이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포심 때문에도 기도를 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자기의 많은 죄를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 죄와 벌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급히 도움을 받지 않아도 좋도록, 시험이 우리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때가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생각하는 열성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서, 같은 기회가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직 견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뒤로 미룰 것이다.10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 : 17) 권고하며, 우리의 태만을 책망하는데, 그것은 이 끊임없는 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께 대한 위선과 교활한 거짓을 기도에서 배제하며 멀리 추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약속하셨고(시 145 : 18),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29 : 13-14). 그런 이유로 자기들의 추악한 것을 즐기는 자들은 전혀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른 기도에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하며(요 9 : 31), 그들의 기도는(잠 28 : 9, 사 1 : 15 참조) 그들의 제물과 같이(잠 15 : 8, 21 : 27 참조)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말씀이 많다. 자기의 마음에 빗장을 지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귀가 닫힌 것을 발견하며, 마음이 냉혹해서 하나님의 엄격한 처사를 도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관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 : 15).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 11 : 7, 8 : 11)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일평생 더럽히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고의 수치로 여기신다. 따라서 이사야서에서 유대인들에게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책망하신다(사 29 : 13).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분께 대한 경배의 모든 부분에서 거짓은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신다. 야고보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약 4 : 3) 한 말은 이에 적용된다. 곧 다음 글에서 알게 될 일이지만,11 경건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그들의 가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요일 3 : 22) 경고한 것은 무용한 일이 아니다. 악한 양심은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성실하게 경배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기도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준비할 때에는 자기의 악한 행실을 혐오하고, 거지와 같은 처지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것은 회개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셋째 법칙 :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8-10

 

8.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여기 우리는 셋째 법칙을 첨가한다. 즉,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곧, 자기 신뢰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주장해서 허영과 교만에 부푼다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순종하여 모든 교만을 없애버린 예를 여러 번 말한 바 있는데 그들 모두는 거룩할수록 주 앞에 나갈 때에 더욱 겸손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칭호를 주셔서 칭찬하신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矜恤)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 : 18-19). 다니엘은 어떤 사람들 같이 정도를 벗어난 말을 하면서 대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들 가운데 섞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그로부터 피난처를 구한다. 그는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自服)하고"라고 하는(단 9 : 20) 웅변적인 말을 한다. 다윗도 자기의 예를 들어 이 겸손한 태도를 가르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 : 2). 이와 같은 모범으로 이사야도 기도한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 이니이다"(사 64 : 5-9).

그들이 의지한 확신은 한 가지밖에 없었던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자기들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예레미야도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배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 : 7)라고 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쓴 사람이 누구였던 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당신 앞에서 자비를 비옵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옵나이다"(바룩 2 : 18-1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 3 : 2).

 

 

 

9.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간단히 말하면, 올바른 기도의 시작과, 그 준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너그러운 화해를 얻기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용서하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실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믿는 자들이 이 열쇠로 기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는 때에도 "여호와여 내 소시(小时)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시 25 : 7). 또 "나의 곤고(困苦)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다(시 25 : 18). 이것을 보면 우리는 매일 최근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은 듯한 죄까지도 고백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예언자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중대한 죄 하나를 고백하고 나서, 자기가 그 죄에 감염된 곳, 곧 모태(母胎)를 말한다(시 51 : 5). 이것은 타고난 부패성을 근거로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전 생애의 죄들을 종합해서 더욱더 엄격하게 자기를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쉽게 받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성자들이 항상 많은 말로써 죄의 용서를 빈 것은 아니나, 성경이 전하는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기소할 생각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든지 우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양심을 조사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근심 걱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용기가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무서워 떨 것이다.

사람들이 벌을 면하기를 기원할 때에 특별한 고백이 하나 더 있다. 즉, 그들은 동시에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을 제거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든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증세만을 치료하고 병의 원인 자체를 등한시하는 미련한 짓을 배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표징으로 우리에 대한 호의를 증명하시는 것보다, 우선 우리에게 대해서 호의를 가지시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순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뜻이며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와의 완전한 화해를 느끼며 그를 전적으로 "사랑스럽게"(아 5 : 16)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도 우리에게 이 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9 : 2).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특히 원해야 할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셔서 그의 은혜 가운데 두시기를 원하고 그 다음에 화해의 열매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러나 특히 현재의 죄를 고백하여 모든 죄와 벌이 용서되기를 간구하는 동시에, 기도가 용납되도록 하는 일반적인 전제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근거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께 결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한 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 : 9). 그러므로 율법 하에서도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용납되게 하기 위해 죄의 대속으로 기도를 성별했다(창 12 : 8, 26 : 25, 33 : 20, 삼상 7 : 9 참조).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만을 믿고 기도를 드리지 않는 다면, 그들은 이 큰 특권과 영예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10. 자기의 의를 말할 것인가?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빌 때에 간혹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듯하다. 예컨대 다윗은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했고(시 86 : 2),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다(왕하 20 : 3, 사 38 : 3 참조). 그들이 이런 말로 표현하려고 한 뜻은, 자기들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종과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12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는 것을 가르치신다(시 34 : 15). 또 사도 요한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 : 22)고 가르치신다. 이 여러 구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공로에 따라서 기도의 가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실하며 정직하며 무죄하다는 것을 바르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이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확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고 한 말은(요 9 : 31)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죄인"이란 말이 보통은 의에 대한 아무 욕망도 없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안주하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동시에 경건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아무도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약속과 성도들의 증거는 부합하는데, 이 성도들의 증거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순결이나 무죄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바라는 것이 자기들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들의 불의에서 구제되기를 원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서, 보통 이런 종류의 기도를 드린다. 이런 비교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의로움과 순진함을 내세움으로써 문제의 공정성을 보아서도 도움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시게 했다고 하여,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가짐으로써, 주께서 진정한 경배자들을 위로하시며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주신 약속들로 자기의 입장을 확인하는데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이 복을 그들의 마음에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는 그의 확신은 다만 하나님의 관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자신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법칙 : 확신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1-14

 

11. 소망과 믿음은 공포심을 극복한다

 

넷째 법칙은, 이와 같이 우리는 진실로 겸손한 마음에 정복되고 압도되더라도, 동시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도록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과 그의 공정한 벌을 느끼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악행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잘 조화된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은 뗄레야 뗄 수 없이 굳게 결합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키고 다른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13 그와 같이 기도에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일치점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표현했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 : 7) 그는 하나님의 인자에 믿음을 포함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경외를 빼놓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를 깨닫고 모든 교만과 자기 신뢰를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란,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감미롭고 완전한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평안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일이 소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들에게는 아무 근심도 없고, 어떤 욕망도 타오르지 않고,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성도들을 가장 잘 자극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기회는 그들이 자기의 부족을 느껴 마음이 괴로운 때이다. 이런 때에 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껴 거의 미칠 듯하다가 이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 위에 비쳐 마침내는 믿음으로 인해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곤고한 처지에 눌려 신음하며 장래의 더 큰 곤란들을 두려워하여 고민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곤란을 참을 수 있게 되며 위로를 얻으며 앞으로 곤란을 벗어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기도가 두 가지 감정에서 시작하며, 그 두 가지를 내포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즉 그는 현재의 곤경에서 신음하며 앞으로 다가올 곤란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를 얻으며, 언제든지 그가 도와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기원하면서도, 그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믿음 부족함에 극도로 노여워하실 것이다.

 

기도와 믿음

 

그러므로 기도는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한 법칙이며, 이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과 가장 잘 조화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두 이 원칙에 유의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 : 24).14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확인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 : 22). 야고보의 말로 이것과 일치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 : 5-6). 여기서 그는 믿음을 의심에 대치시킴으로써 믿음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의심과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응답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확신이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고 그가 첨부한 말도 주목할 만하다(약 1 : 7 참조). 그는 이런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한다(약1 : 6).15 그래서 다른 구절에서 올바른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부른다(약 5 : 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믿는 대로 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마 8 : 13, 9 : 29, 막 11 : 24),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얻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의하지 않으나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 : 14)라는 바울의 말의 의미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 : 17)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믿음에서 기도가 시작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은 오직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알게 된, 아니, 그것이 깊이 계시된 사람들에 한 한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12.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박함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상의 요구 조건을 전연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고 인자하시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라는 요구 조건을 우리가 신자들에게 가르칠 때에, 그들은 이것을 가장 불합리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려본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믿음의 힘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공상밖에 해본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을 상대로 논의할 가치가 어디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요구하는 확신의 가치와 필요성은 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심이 대단히 무딘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울이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한다.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되고, 그 자비가 자기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없다(롬 10 : 14).

그러면 예컨대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이 저의 기도를 들으실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불안에 견딜 수 없어 당신께로 도망을 갑니다. 제게 무슨 가치가 있다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성도들의 기도와는 다르다.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도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명령한다(히 4 : 16). 그는 다른 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가르친다(엡 3 : 12).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신념을 두 손으로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은 주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모범으로 가르친다. 만일 굳건한 믿음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그런 믿음에서 생겨난 기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소망에 뿌리를 박은 기도, 이런 기도만이 하나님께 용납된다. 사도는 믿음을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나, 확신뿐 아니라, 담대하게 또는 자유롭게라는 말까지 첨가한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와 불신자들을 구별하려고 한다. 불신자들은 우리와 섞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이다. 본 교회는 시편에 있는 대로 기도한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 33 : 22). 다른 데서 예언자는 같은 조건을 설정한다. "내가 아뢰는 날에‥‥‥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 56 : 9),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 : 3). 이런 말들을 보면, 소망을 첨가하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던져진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망은 망대와 같아서, 우리는 거기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바울이 주는 충고의 순서도 여기 부합한다. 그는 신자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엡 6 : 18) 권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한다(엡 6 : 16-17).

여기서 독자들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회상하기 바란다. 즉 믿음은 우리의 불행과 궁핍과 부정과 결합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16 신자들은 무거운 죄의 짐에 아무리 심히 눌리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무서워 할 죄과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이런 느낌이 있으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에게로 가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기도를 제정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굴거나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을 높이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고백한 후에, 자녀가 곤란한 문제들을 부모에게 털어놓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호소하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리의 죄는 당연히 우리가 기도하도록 견딜 수 없는 아픈 자극을 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체험으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 41 : 4).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이런 창은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비할 데 없는 자비로써 이런 경우에 적합한 치료제를 첨부하셔서, 우리의 모든 혼란을 진정시키시며 근심을 덜며 공포심을 없애버리신다. 그리고 장애물은 물론이고 평탄하지 못한 곳까지도 없이 하여 스스로 길을 준비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친절히 이끄신다.

 

 

 

13.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

 

우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 주께서는 우리의 불경한 완고함을 책망하신다.17 시편에 있는 말씀 보다 더 정확한 명령은 생각할 수 없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 : 15). 그러나 경건 생활의 의무 중에서 기도처럼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이 점을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다(마 7 : 7). 그러나 이 명령에는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할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쉽게 받아 주시며 우리가 가까이 가는 것을 환영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을 확인한다면,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반역자이며 완고할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불신하기 때문에 불신앙의 선고를 받게 된다. 위선자들의 행동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다. 그들은 겸손하고, 온유한 모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교만한 태도로 무시하며 하나님의 친절한 초대를 의심하여, 하나님께 드릴 예배의 주요 부분을 빼앗는다. 옛날 사람들이 모든 거룩한 일은 제물을 바치는 데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거절하시고(시 50 : 7-13), 사람들이 곤란한 때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언급하셨다(시 50 : 15).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것을 요구하시며 정성스러운 순종을 명령하시는 때에, 의심의 깃발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도피할 구실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항상 나오는 하나님을 부르라는 많은 명령의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서 우리 눈앞에 세운 깃발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우리가 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친히 길을 열어 주신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 : 9).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 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이 따라오기를 원하시며 그가 친히 명령하시는 아름다운 곡조에 감화되어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찬미이다. 우리는 이 찬미의 내용을 믿고 모든 장애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 : 1-2) 하나님께서 이런 찬미를 받으셨다는 것처럼 기쁘고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찬미는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허락하시는 것이 그의 성품에 가장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예언자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시 50 : 15)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라서 다윗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 : 27). 이 말을 보아서 우리는 이 약속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두려워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라는(시 145 : 19) 일반론으로 무장한다. 사실 우리는 시편에서 이러한 경향을 불 수 있다. 즉 계속되던 기도의 문맥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혹은 그의 선하심으로, 혹은 그의 신실한 약속으로 그 기도의 문맥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얼른 보기에 다윗이 이런 말들을 부적당한 곳에 삽입시켜 기도의 흐름을 절단하며 기형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새로운 연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열성이 식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명상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시들어 가는 우리의 정신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도록 적당한 것을 삽입하며, 이 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14. 확신을 가지며, 무서워 떨 것이 아니라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심히 감미로운 이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냉담한 태도를 취하거나 전혀 느낌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로를 헤매기를 좋아하며,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 없는 웅덩이를 파며(렘 2 : 13),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잠 18 : 10) 솔로몬은 말한다. 요엘은 장차 올 무서운 파멸을 예언한 다음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 : 32, 롬 10 : 13)라는 인상적인 말을 첨가한다. 이것이 사실은 복음의 진행 과정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안다(행 2 : 21). 백 명에서 한 명도18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사 65 : 24) 친히 선포하셨다. 다른 데서 하나님은 꼭 같은 영예를 전 교회에,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에 주신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19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시91 : 15).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20 나는 모든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다만 두드러진 것들을 택하려 한다.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지를 맛볼 수 있으며, 이렇게 예리한 자극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태만하며 머뭇거릴 때에 우리의 배은망덕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 : 18)라는 말씀을 항상 귀에 쟁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사야와 요엘에서 인용한 말씀과 같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확약하시며,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을(벧전 5 : 7, 시 55 : 22)고 향기로운 제물같이 기뻐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아무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이 약속의 특별한 열매를 받는다.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떨게 될 것이지만, 이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가장 다정스러운 이름을 황송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사하신다.

다음으로 이렇게 많은 권유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의 기도와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기도의 가치와 기도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었고 또 그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이다.21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다른 데서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이리저리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거룩한 조상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거룩하였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으나, 우리에게는 거룩한 점이 없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기도하라는 공통된 명령을 받았고 공통된 믿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점에서 당연히 그들의 동료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2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청하여 친절하시겠다고 선포하심으로써 극도로 가련한 사람에게도 구한 것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저 일반적인 표현 양식에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이므로 (세상에서 말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 조건은 하나 뿐이다. 즉 우리의 마음이 성실하며, 자신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지 않고, 겸손하며,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위선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오도록 권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윗의 기도 태도도 이로 인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삼하 7 : 27-29). 또 다른 데서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라고 했다(시 119 : 76).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무장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두려워하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조상들을, 특히 야곱을 본받는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감당할 자가 못 된다고 고백한 다음에(창 32 : 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더 큰 일을 구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창 32 : 11-12 참조).

그러나 불신자들은 구실이 무엇이든 간에, 곤란한 때에 하나님께 피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새로운 신이나 우상을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하나님께 돌아갈 영예를 빼앗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경건한 사람들을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동안은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순종 이상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앞에서 담대한 기도 정신은 공포, 경외, 염려 등과 잘 조화되며, 엎드린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와 같이 조화되지 않는 듯한 표현들이 서로 훌륭하게 부합된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한다(렘 42 : 9, 단 9 : 18). 다른 곳에서도 예레미야는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렘 42 : 2)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주 "기도를 올린다"고 하기도 한다. 히스기야가 자기를 위하여 예언자의 중보 기도를 청하면서 한 말도 같은 것이다(왕하 19 : 4).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향과 같이" 올라가기를 갈망한다(시 141 : 2).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그가 너그럽게 약속하신 도움을 서슴지 않고 간구하지만 수치감을 버린 듯이 경솔한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해 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약속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에, 여전히 자기를 낮추어 기원자의 태도를 견지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15-16)

 

15. 사악한 기도를 들으신다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고 고요하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요담은 충분한 까닭은 있었으나, 격분과 복수심에서 세겜 주민들의 멸망을 기원했고, 후에 그대로 되었다(삿 9 : 20). 그 저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제력이 없는 격분을 시인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삼손도 이런 격정에 못이겨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 : 28)라고 말했다. 의분도 다소간 섞여 있었지만, 지배적인 것은 타는 듯한, 따라서 사악한 복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허락하셨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법칙대로 하지 않는 기도라도 효과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보편적인 법칙은 개개의 예에 의해 폐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특수한 충동을 받은 소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배려가 있었다. 제자들이 엘리야의 예를 따르도록 경솔하게 청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 9 : 55, 어떤 고대 사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라 해서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실례를 보더라도 성경의 교훈은 분명한 증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하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시며, 부당한 고통을 받아 그의 도움을 간구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과 호소가 그의 앞으로 올라갈 때에, 비록 그들에게는 티끌만큼도 받을 자격이 없을지라도, 그는 그의 심판을 단행하신다. 부당한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여 허공을 치듯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의 잔인, 강탈, 폭행, 정욕 및 기타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당돌함과 광분을 억압시키시며, 그들의 포악한 권력을 전복 시키셔서 눌린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이 없이 하늘에 닿지 못하는 기도라도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시편에서는 분명히 가르친다. 여기에서는 곤란을 당한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자연적인 감정으로 토로한 기도를 구별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한다(시 107 : 5, 13,19).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 것은 그들의 기도가 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에 의해서, 불신자들의 기도가 버림을 받지 않을 때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역설 또는 명시하시려는 것이며 동시에 불신자들의 호소도 때로는 유익한 것을 보고 진정한 경배자들이 더욱 더 기도하도록 격려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떠나거나, 혹은 불신자들이 소원대로 된 것을 보고, 그들이 큰 이득이라도 얻은 것같이 시기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아합이 회개하는 체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말을 했다(왕상 21 : 29).23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그 분의 노여움을 풀려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는 곧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06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것을 보고서도 유대인들이(시 106 : 8-12)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완악한 본성으로 돌아간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시 106 : 43, 106 : 13이하 참조)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사기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울 때마다, 비록 그들의 눈물은 거짓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다(삿 3 : 9 참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마 5 : 45), 동기가 정당하고 곤경에서 구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그 애원을 무시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것과 같다. 더 큰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사무엘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시하지 않으셨는데도 소돔을 위해서 기도했고(창 18 : 23), 사무엘은 분명한 금지 명령이 있었는데도 사울을 위해서 기도했다(삼상 15 : 11). 수도가 과멸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예레미야도 같은 행동을 하였다(렘 32 : 16이하). 그들의 기도는 거절되었으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온건한 독자들이 만족할 만한 해답이 있다. 즉, 무가치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원칙에 비추어 볼 때에, 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으나, 그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현명한 말을 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기원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 뜻은 감추어 있고 변함없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현명하신 결정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24 옳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사건들의 결과를 조정하셔서, 믿음과 과오가 섞여 있는 성도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 자신의 변명은 될 수 있으나 타당한 모범으로 삼을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적당한 정도를 지나친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착실한 약속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다윗의 말은 적절하다. "깨(Awake)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시 7 : 6). 여기서 그는 현세적인 어떤 은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16.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유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나는 올바른 기도를 위한 법칙 넷을 말했으나, 그것은 너무 엄격하게 요구할 것이 아니다. 완전한 믿음이나 회개가 없을 때, 열성과 올바른 기원이 없을 때-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거부하시리라는 것이 그 원칙들의 뜻이 아니다.

나는, 기도는 경건한 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이나 우리는 경외와 겸손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잡다한 요구를 함부로 늘어놓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탐내는 일이 없도록 하며, 생각을 고상하게 하여 하나님을 순결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하나님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25

이 법칙을 충분하게 또 올바르게 실행한 사람은 없다. 일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윗의 불평에도 무절제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고의로 하나님께 간하거나 하나님의 판단에 항의했다는 것이 아니라, 약해서 넘어질 듯한 그로서는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의 품에 내던지는 것밖에 달리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말을 다 관용하시며 우리의 무지를 용서하신다. 참으로 이런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기도할 자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려 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열성과 인내로 기도했지만 감정이 격동하였으며 아니, 때로는 끓어 넘쳤다. 이것은 우리가 설정한 첫째 법칙과 조화되지 않는 일이다.

특히 시편 39편의 끝을 보면, 이 거룩한 자는 격렬한 슬픔에 휩쓸려 거의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 : 13). 이 절망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속에서 썩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고의로 격정을 폭발시키거나, 보통 악인들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할 뿐이다. 이런 시련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과 잘 조화되지 않는 기원도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성도들도 합당한 일과 유익한 일을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하는 예가 있다. 이런 결점이 있는 기도는 모두 배척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자기를 책하며 즉시 올바른 자신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들은 제 2 법칙에26 관해서도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냉담한 자기와 재차 싸워야 하며, 자기의 부족과 불행에 대한 느낌도 그다지 절실하지 않아서 열렬한 기도를 드릴 만한 자극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자주 기도에서 멀어지고 거의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무기력하고 불완전한 기도, 또는 중단되고 막연한 기도는 거부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높이 들릴 때에 한해서 그의 기도는 합당하다는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의 마음에 심어두셨다. 여기서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27 이것은 모든 시대와 백성에게 공통된 형식이며, 지금도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두 손을 들 때에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땅에 붙어 있는데도 냉담한 자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용서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신자들이 이 문제를 경시하지 않지만, 기도에 참으로 능숙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윗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 : 17)라고 말한 제사의 십분지 일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이중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는, 많은 죄를 지은 줄 알면서도 그 느낌이 미약해서 자기를 혐오하는 생각이 당연히 있어야 할 정도로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자기의 죄를 올바르게 슬퍼하고 완전히 낙심하여 그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신 경우에, 그들은 심판자이신 그의 진노가 자기들에게 내리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신앙의 연약함과 불완전은 신자들의 기도를 부패하게 만든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결점을 용서해주신다. 그 분께서는 마치 그들의 믿음을 소멸시키기로 굳게 작정하신 것처럼 어려운 시련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시련은, 마치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듯이,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때이다(시 80 : 4, 79 : 5 참조).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라고 할 때에(애 3 : 8) 그는 격렬한 불안에 사로잡혔던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무수해서, 성도들의 신앙은 의심이 뒤섞여 있고 또 의심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므로 믿고 바라는 중에도 무심코 신앙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수록, 성도들은 더욱 더 노력해서 자기의 결점을 시정하며, 기도의 완전한 표준에 매일 더욱 접근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치료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도리어 새로운 병을 만들어 깊은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포함된 많은 결점을 하나님께서 무시하시지 않는다면, 공정한 입장에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타기(唾弃)하실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신자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자기를 용서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엄격한 자기 응징을 통하여 이런 장애를 극복하도록 노력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사탄이 그들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막으려고 애쓰더라도, 그들은 장애를 돌파해야 한다. 비록 모든 장애를 배제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즉시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것을 향해서 분투하고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용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17-20)

 

17.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갈 가치가 없다. 우리는 수치감과 공포심에 못이겨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 수치감과 공포심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친히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대언자와(요일 2 : 1) 그의 앞에 있는 중보자로(딤전 2 : 5, 히 8 : 6, 9 : 15 참조)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인도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과 같이, 아들이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하는 것도 거절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다. 또한 내가 믿음에 대해서 위에서 가르친 것은 모두 이 점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희망도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기도의 유익과는 단절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두려운 존엄성을 생각하면28 우리는 그 순간 떨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의 무가치를 느끼고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타나셔서 두려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변화시켜 주시기까지는 우리는 떨 수밖에 없다. 사도의 교훈에도 우리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며,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히 4 : 16).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이 있는 것과 같이,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 16 : 24).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 : 26), 그리고 "너희가‥‥‥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 : 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청하는 사람들은 완고하게 그의 명령을 멸시하며 그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없는데, 이 점은 분명하고 논박할 여지가 없다. 참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한다(고후 1 : 20). 즉, 모든 약속이 확인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1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는 자신의 중보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 그때의 상황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 : 26).

처음부터 중보자의 은혜가 없으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응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가르치신 것을 보면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은 제사장뿐이었고, 그는 두 어깨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메고, 같은 수효의 보석이 달린 흉패(胸牌)를 가슴에 붙이고 들어갔다(출 28 : 21). 그리고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성전 뜰에 서 있었고, 거기서 제사장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참으로 제물까지도 그 가치는 기도를 확인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장차 있을 일을 예시한29 이 율법의 의식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며, 이 분이 우리를 그 두 어깨에 메고 그 가슴에 달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서 실현되도록 하신다.30 그뿐 아니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불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피를 뿌려 정하게 하신다고 율법의 의식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도들은 무엇을 얻고자 할 때에 제물에 소망의 근거를 둔 것을 우리는 안다. 기도를 용납하게 하는 것은 제물이란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제(素祭)를 기억 하시여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시 20 :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중보로 노여움을 푸시고 경건한 자들의 기도를 받으셨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 때문에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새로운 시기를 정하셨는가? 이 은혜가 지금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더욱 인정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는 같은 뜻으로 조금 전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요 16 : 24)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제자들이 중보자의 직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모두 이 기본적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승천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이전보다 더 확실한 변호자가 되시리라는 것을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특별한 은혜로 위로하시기 위해서 중보자의 직분을 취하시고, 그들이 지금까지 받지 못한 특별한 복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치셨다. 즉, 그들은 그의 보호를 믿고 더욱 자유롭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복을 누리리 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도는, 이 새로운 길을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히 10 : 20). 만일 우리만을 위해서 예정된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 은혜를 우리가(속담같이) 두 팔로 껴안지 않는다면, 우리의 완고한 불순종은 더욱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19.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상호간의 중재에 있어서도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이시므로(요 14 : 6), 이 길에서 벗어나며, 이 통로를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바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보좌에 그들을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은 진노와 심판과 공포뿐이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인을 치셔서(요 6 : 27 참조) 우리의 지도자와(마 2 : 6) 머리로(고전 11 : 3, 엡 1 : 22, 4 : 15, 5 : 23, 골 1 : 18) 삼으셨으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에게서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적어 놓으신 표지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려고 꾸준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중보자로 제정되었고, 그의 중보에 의해서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분, 기도를 쉽게 들어주시는 분이 되신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서로 중재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를 통해서 상호의 구원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사도가 이런 기도를 언급했으나(딤전 2 : 1), 신자들의 상호 중재 기도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우리들이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자발적으로 아무 이해 타산이 없이 사랑하며, 그 사랑하는 감정이 넘쳐 중재 기도로 나타나는 것같이, 그런 기도는 또한 한 머리와 관련이 있다. 이런 기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지 않으면 아무 기도도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하는 모든 중보 기도는 저 유일 한 중보 기도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여겨야 한다. 참으로 특히 이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 망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각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호소하는 것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거절하셔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의 변호인들로 임명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각각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남용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행위이니, 그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20.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며 불변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중보 기도의 중보자라고31 지껄이는 궤변가들의 무의미한 말을 들어 보라.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한 번 중보 직책을 다하시고, 영원 불변하는 중보 직책은 종들에게 맡기셨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영광의 작은 일부라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베어 내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매우 다르다. 이 사기꾼들을 무시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하여, 경건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요일 2 : 1) 요한이 말할 때 그 뜻이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만 우리를 위해서 대언자가 되셨다는 것인가, 또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는 것인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고(롬 8 : 34) 주장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른 곳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딤전 2 : 5) 할 때에, 그는 조금 전에(딤전 2 : 1-2) 말한 기도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라고 말한 후에 바울은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첨가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라고(딤전 2 : 5) 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의하여 서로 다른 사람을 권고한다. 그러나 진정한 중보자는 한 분 뿐이시다. 그를 위하여 중보하는 사람은 없으나,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신다"라고 동일한 설명을 한다. 사도 바울은 머리되시는 주님 밑에 있는 탁월한 지체였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였으며, 교회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정한 제사장은 상징적으로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확고한 사실로 하늘의 내부 성소, 곧 실재(实在)하고 영원한 성결의 자리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롬 15 : 30, 엡 6 : 19, 골 4 : 3). 또 그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자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한다.

그 이유로서 그는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라고 한다(고전 12 : 25-26). 이렇게 모든 지체가 지상에서 애써 일하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들보다 먼저 승천하신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요일 2 : 2). 만일 바울이 중보자였다면 다른 사도들도 그러했을 것이요, 만일 중보자가 여럿이라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 : 5)고 한 말은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엡 4 : 3)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한다(롬 12 : 5).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제사장을 구한다면, 그는 하늘 위에 계신다. 그는 거기서 당신을 위해서 중보라고 계신다. 또한 당신을 위해서 땅에서 죽으셨다"(히 7 : 26이하 참조).32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애원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때에는 그의 죽음의 힘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 기도로서의 효과를 가진다고 이해한다(롬 8 : 34 참조).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며, 이 세상의 종말까지(히 9 : 24이하 참조) 홀로 백성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시며, 백성은 멀리 바깥뜰에 머물러 있다고 이해한다.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그릇된 교리를 배척함. 21-27)

 

21.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의 영광을 빼앗는다

 

육신으로 죽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성자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기도를 드릴 때에, 그들이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요 14 : 6) 통하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다른 이름으로 받아주신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꿈에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소환해서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하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기를 원하신다(골 1 : 20, 엡 1 : 10). 그러므로 그를 떠나서는 들어갈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멀어질 정도로 성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것은, 미친 짓은 아니더라도 우매의 극치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이런 일이 보통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지금도 이른바 교황 제도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대개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빈번히 성자들의 공로를 내세우며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묻노니, 이것은 그리스도께만 속한다고 우리가 이미 주장한 그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지위를 성자들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조작한 소위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해서 누가 누구에게 한 마디라도 계시했다는 것인가? 그것이 천사였는가? 마귀였는가? 성경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조작을 했는가? 참으로,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근거가 없는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요, 그런 때에 그것은 자체에 신앙이 없음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나 성자들의 중재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들이 불안에 눌려 있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유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든지,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너무 엄격하신 것같이 느낀다. 첫째로, 이 혼란한 심리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며 유일한 중보라는 칭호를 그리스도에게서 빼앗는다. 그러나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독특한 특권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며, 그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그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어 결국 그가 하신 일과 받으신 고통에서 그가 당연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박탈한다. 그의 행적과 수난 당하신 것을 보면 그 분 만이 중보자이시며, 또 그렇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내던져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로 나타나시는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형제로33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 대해서 형제애를 가지셨고 그의 사랑에 비교할 만한 인자하고 다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형제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명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를 그에게로 보내면, 그의 안에 우리를 든든히 세운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우리의 입이시며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말한다. 그는 우리의 눈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우리의 오른손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바친다. 그가 중간에 개입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34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공중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항의한다면 이런 항변은 무가치한 핑계에 불과하다.35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죽은 사람들의 기도나 공로와 뒤섞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혀 무시하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예배 때의 글과 성가와 산문에서36 죽은 성자들에게 온갖 영예를 돌리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22. 성자 숭배

 

그러나 우매의 정도가 심해져서 지금은 명백히 미신으로 기울어진 이 경향은 제지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방자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성자들의 중재를 생각하게 된 후로 사람들은 각 성자에게 특별한 기능을 돌리고, 일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성자에게 또 어떤 때는 저 성자에게 중재를 기원한다. 그 다음에 각 사람이 어떤 한 성자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그의 보호를 신뢰하게 되었다. 옛날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처럼(렘 2 : 28, 11 : 13), 도시의 수에 따라 신을 설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구수에 따라서 신을 정하였다.

그러나 성자들은 모든 소원을 하나님 뜻에만 관련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명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고 어떤 다른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자들에 대해 우매하며 육적이며 모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성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각 성자는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에 대해서37 사적인 편애를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성자들을 돕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구원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기도하는 무서운 신성 모독을 여전히 감행하는 자들이 지금도 아주 많다. 가련한 인간들은 정당한 입장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질 때에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다.

이런 무신앙의 더 큰 기괴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는 않겠다. 바르바라(Barbara), 카타린(Catherine), 기타 성자들의 조각이나 그림 앞에 엎드려 그들은 "우리 아버지"라고 중얼거린다. 사제들은 이런 미친 짓을 고쳐 주거나 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득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시인하며 장려하면서 이런 추악한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면 엘리기우스(Eligius)나 메다르드(Medard)에게38 하늘에서 내려와 종들을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하도록 거룩한 동정녀가 그 아들에게 명령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구실로 변호하려는가? 고대의 칼타고 회의에서는 제단 앞에서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다.39 당시의 거룩한 사람들은 악습의 세력을 완전히 꺽지 못했으나, 적어도 극단화를 방지해서, "성 베드로시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는 식의 기도로 공중 기도를 더럽히지 않도록 한 것 같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옮기게 되었으니, 이 악마적인 거만이 얼마나 더 광범위하게 퍼졌겠는가?

 

 

 

23. 성경의 혼란한 해석은 성자들의 중보 기도를 지지하려고 이용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중보 기도의 기초는 성경의 권위에 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기도했다는 기사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40 그러나 현세를 떠난 성자들과 천사들을 비교하고 싶으면,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 되었고 구원을 얻을 후사를 섬기는 임무를 받았다는(히 1 : 14) 것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는 임무가(시 91 : 11) 천사들에게 위촉되었고, 천사들은 우리를 둘러 진치며(시 34 : 7), 우리에게 경고와 격려를 하며 우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임무를 천사들은 받았지만, 성자들은 받은 일이 없다. 죽은 성자들과 천사들에 대해서 성경이 그 직무를 여러 가지로 구별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천사와 성자를 터무니없이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판관 앞에서도 변호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감히 변호인의 임무를 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직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변호인들을 하나님께 강제로 떠맡기려고 하는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은 어디서 이 위대한 면허를 얻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돌보는 직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셨다. 그 결과로 그들은 성회에 참석하며,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보고 경탄하는 무대가 되었다(엡 3 : 10). 특히 천사들에게 속하는 것을 다른 데로 옳기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침범해서는 안 되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 민첩한 두뇌로 다른 증거를 끌어온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하셨다(렘 15 : 1).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산 사람들을 위해서 중재한다는 것을 모르셨다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셨겠느냐고41 묻는다. 나의 추론은 그와 반대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대로 모세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중재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이 직접 나오게 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성자가 그 일을 하리라고 믿을 수 있는가? 모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훨씬 잘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렘 15 : 1 참조)라고 하셨으므로, 죽은 사람들은 확실히 산 자들을 위해서 중재한다고 논쟁자들이 이런 무가치한 궤변을 계속한다면, 나는 더욱 그럴 듯한 추론을 하겠다. "만일 모세가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라고 하였으니, 자기 백성이 극도로 곤란했을 때에도 모세는 중보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더 다른 사람은 중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온유함이나 인자나, 아버지 같은 관심 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세에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궤변가들은 냉소함으로써 자기들을 훌륭히 무장시킨 줄로 생각한 바로 그 무기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간단한 발언을 그와 같이 곡해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전에는 모세나 사무엘 같은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이 백성의 변호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에 불과하다. 에스겔서에 있는 비슷한 구절에서도 아주 분명한 뜻을 알아낼 수 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그 자녀를 구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 : 14). 여기서는 "만일 이 셋 중의 둘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하는 뜻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사람 즉 다니엘은 그 때에 살아 있었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년 시대에 경건의 가장 훌륭한 증거를 보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분명히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또한 바울은 다윗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기도로 후손들을 도왔다고 하지 않고, 다만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했다(행 13 : 36).

 

 

 

24. 죽은 성자들은 세상의 근심 걱정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일생을 통해서 순전히 경건과 자비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경건에 대한 욕망을 모조리 빼앗을 것이냐?"고42 항의한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조사하려는 호기심이나 욕망이 없다. 그와 같이 아마 그들도 여러 가지 특별한 욕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일에만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신자의 구원에 못지 않게 악인들의 멸망이 포함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사랑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친교의 범위 내에 머물며, 그 교제의 성격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그들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역시 그들의 안식을 버리고 지상의 근심 걱정에 끌려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해서(딤전 2 : 1-2, 약 5 : 15-16) 성자들에게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신자 상호간의 기도는 그들이 서로 곤란과 짐을 나누는 동안 그들의 사랑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며, 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주의 교훈과 약속 이 두 가지는 언제든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죽은 이들의 경우에는 이런 이유들이 하나도 없다. 주께서 그들을 우리에게서 데려가셨을 때에, 그들과의 접촉점을 우리에게 전혀 남겨놓지 않으셨으며(전 9 : 5-6),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들에게도 우리와의 접촉점을 남겨놓으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믿음으로 우리와 연결되었으니, 그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한결같은 사랑을 지금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묻노니 우리의 음성을 들을 만한 귀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또는 우리의 곤란을 지켜볼 만한 밝은 눈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는가? 사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가 성자들에게 비치고 그 빛에 의해서 성자들은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인간 만사를 눈여겨본다고43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지껄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특히 그들같이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 머리 속의 몽롱한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한 관단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하며 성결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와 원수가 된다고 자주 언명한다(롬 8 : 6-7 참조). 또한 우리의 헛된 생각을 전적으로 정죄하며(엡 4 : 17), 우리의 이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우러러보라고 명령한다(신 12 : 32 참조).

 

 

 

25. 족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옹호하려고 성경에 있는 다른 증거들을 가장 사악하게 왜곡한다. 그들은 야곱이 자기 자손들도 자기 이름과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다고 한다(창 48 : 16).44 우선 우리는 부른다는 이 형식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도와달라고 부른 것이(기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례는 성자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우매한 자들은 미련하게도 야곱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나 그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형식까지도 유치하게 오해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이사야에는 여자들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그 보호하에서 살 때에, 남자의 이름으로 칭함을(=부름을) 받는다고 나와 있다(사 4 : 1).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른다는("칭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민족의 조상임을 말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시조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 이름을 퍼뜨리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의 후손이 완전한 복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언약을 계승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손들이 최고의 복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의 혈족으로 인정되기를 기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들에게 언약을 계승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후손들로서는 이런 기억을 기도에 삽입함으로써 죽은 이들의 중재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을 생각하시도록 한 것이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도들이 조상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언서에서 교회가 이구 동성으로 증거한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上古)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 : 16).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다.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 63 : 17). 그들은 중보 기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유익에만 유의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 예수께서 계시고, 그의 손으로 영원한 자비의 언약을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에 다른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성경 말씀이 족장들을 중보 기도자로서 확인한다고 이 훌륭한 교사들은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많은 중보 기도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가장 낮은 자리도 그들 사이에서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저 교사들이 어떤 종류의 찌끼에서 그들의 대변자를 만들어내는가는 세상이 잘 안다. 교사들은 내게 대답해 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보다 앞에 두셨고,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올리셨는데, 아브라함을 버리며 묵살하는 것이 어떻게 합당하단 말인가? 이런 관습은 고대 교회가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관습이 새로운 것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옛 족장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름이 다양하면 최근에 생긴 부패한 관습을 용서받을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위해서" 백성에게 자비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다고(시 132 : 10 참조) 항변한다.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과오를 지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강력하게 반박한다. 다윗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는 모든 성도들과 구별되어, 그의 손을 거쳐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언약을 고려한 것이고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선포한다. 다윗이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인 점에서 본다면, 다윗에게 특별했던 것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26.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듯이 성자들도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자들의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는 말이 자주 있는 데서 영향을 받는 것 같다.45 왜 응답이 있었는가? 물론 기도했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말에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 22 : 4-5)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들을 본받아 기도하여 저들과 같이 응답을 받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당치 않은 불합리한 추리를 해서, 이미 기도에 응답을 받은 사람들만이 앞으로도 응답을 받으리라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 : 17-18).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가? 야고보는 엘리야에게 독특한 특권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그 특권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경건하고 순수한 기도의 무한한 힘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이런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굳게 믿지 않는 다면, 우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과 호의를 악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 어느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게만 한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언급하셨다.

반대자들은 성경에 많이 있는 경고를 고의로 멸시하는 듯 하므로, 그들의 무지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 권능을 독점했으므로 우리가 그의 요청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었는가? 다윗 자신은 아주 다른 주장을 한다. "주께서 나를 후대(厚待)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142 : 7),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시 52 : 6, 64 : 10),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 : 6).46 시편에는 이런 종류의 기도가 많고, 다윗은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들어주심으로써 의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며, 그의 예를 보고 용기를 얻어 소망을 가지게 되도록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제 한 가지 예만 더 드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하도록 하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시 32 : 6). 이 성구를 내가 더욱 기꺼이 인용한 것은, 교황 제도를 옹호하기 위하여 고용된 논쟁가임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이 구절이 죽은 자들의 중보 기도를 입증하는 것같이 말하기 때문이다.47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 하나님의 온유와 인자하심에서 생겨날 결과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이 고용된 논쟁가들은 다윗의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같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의해야 될 점이 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경험은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데 비상한 도움이 된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은혜를 확신의 근거로서 회상하는 구절들이 많으나, 시편의 독자들은 잘 알겠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인용하지 않는다. 야곱도 자기의 예를 들어 같은 뜻을 가르쳤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 : 10). 그는 약속을 말하지만, 약속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대해서 변하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더욱 용기 있게 믿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라서, 너그러우심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시며 힘이 다하는 일이 없으시며, 그 자신의 성품으로 인하여 존귀를 받으실 분이시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현명하게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 : 5)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은 믿을 만 하시다고 첨가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히 불변하지 않으시다면, 그의 은혜를 받더라도 그를 믿으며 그에게 기도할 만한 충분히 확고한 기대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때마다 우리에 대한 호의와 신의를 예시하시며 증명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거나 속이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7.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교리를 결론적으로 논박함

 

종합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관해서, 성경이 가장 중요시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의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모든 제물은 그 다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를 다른데 드리는 것은 분명한 신성 모독이다. 따라서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 하셨으리이까"(시 44 : 20-21).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기뻐하시며,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신다. 끝으로, 말씀을 기초로 한 믿음은 올바른 기도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멀어지는 기도는 즉시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48 성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이 영예는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하였다. 중보하는 직무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리스도 특유의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49 이 중보자가 성결케 하시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신자들이 서로 교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다.50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중보를 믿으면서 자기와 다른 교우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뿐 아니라, 이 중보의 직무를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우리는 가르쳤다.51 그 이유는 성경에는 죽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한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호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자주 권하지만,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약 5 : 16) 두 가지 권고를 결합하여 언급함으로써 무언중에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였다.

그러므로 이 과오를 정죄하는 데는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올바른 기도는 믿음에서 생기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기며(롬 10 : 14,17), 하나님의 말씀에는 상상에 불과한 중보 기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자를 자기들의 대언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신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기도가 가득하나, 이런 중보 기도의 예는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황주의자들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 기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뿐 아니라, 이 미신은 분명히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들은 대언자로서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 이런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둘째 점을 쉽게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뻔뻔스러운 주장이다. 그들은 성자들의 변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고작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하게 접근할 가치가 없다는 것뿐이다.52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불발한 우리의 결론은 이것이다. 즉 영국에서 숭배하는 성자 죠지(George)나 히폴리투스(Hippolytus)나53 이와 비슷한 유령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도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일도 하실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의 종류 : 개인기도와 공중기도. 28-30)

 

28. 개인기도

 

기도는 원래 간원과 간구에 한한 것이지만, 기도와 감사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 이름으로 총괄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다. 바울이 열거하는 것은 처음 종류에 속한다(딤전 2 : 1 참조). 요구하며 간구함으로써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구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은혜를 구한다.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에 합당한 찬양을 돌리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을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에 돌린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50 : 15).54 양쪽을 항상 사용하라는 성경의 명령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무거운 빈곤의 짐과 체험상의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우리를 사방에서 압박하는 곤란은 많고 또 강력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신음하며 탄식하며 애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거룩한 자들은 역경을 모르는 경우에도, 자기의 죄책감과 무수한 유혹의 침범에 직면하므로, 아무리 거룩한 자라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의 제물을 드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주셔서, 우둔하고 태만한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는 크고 많으며 어디를 향하나 강력한 기적이 많이 보여 우리는 거의 압도될 정도이므로, 찬양과 감사를 드릴 이유와 기회가 언제든지 있다.

이 일들을 좀더 충분히 설명한다면, 이미 충분히 증명한 바와 같이,55 우리의 소망과 재산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에, 그의 복을 얻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소유는 번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항상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약 4 : 14-15 참조) 우리가 결정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과 뜻 아래서 즉 그가 도우시리라는 희망으로, 결정하며 말하며 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믿고 계획을 세우며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무슨 일을 착수하는 사람들도 같은 저주 아래 놓여 있다(사 30 : 1, 31 : 1 참조). 또 우리가 여러 번 말한 것과 같이,56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를 바르게 공경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받을 때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순전히 너그러우신 뜻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에 대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 쓸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결론도 나온다. 바울이 모든 것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딤전 4 : 5) 증거할 때에, 그는 동시에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거룩하며 순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말씀"을 그는 환유법에 의해서 "믿음"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깨닫고, 아름다운 말로 "새 노래"를 그의 입에 두셨다고 공언한다(시 40 : 3). 그의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침묵은 곧 원망을 의미한다는 암시가 자연히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마다 그에게 감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선포하면서, 신자들에게 새로운 특별한 노래를 부르라고 역설한다(사 42 : 10). 같은 뜻으로 다윗은 다른 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 : 15). 히스기야와 요나도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결과에 대해서 같은 형태로 증명한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여 노래하리라고(사 38 : 20, 욘 2 : 9) 하였다.

다윗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같은 법칙을 지시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 : 12-13). 교회는 다른 시편에서 이 법칙을 따른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여 우리를 구원하사‥‥‥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57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 : 4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시 102 : 17,18,21). 사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도록 간구하며, 자기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감사할 의무를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고 선포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호세아는 교회가 앞으로 구속을 받을 것을 말한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 14 : 2)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자연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한다(시 116 : 1).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자기가 경험한 도움을 말하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한다(시 18 : 1). 이 감미로운 사랑에서58 흘러나온 찬양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감사와 결합되지 않은 간구는 모두 사악하다고 한 말의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빌 4 : 6) 불평, 권태감, 초조감, 비통, 공포 등의 마음 상태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게 감정을 조절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여기서는 거의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해서 완전히 실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마다 더욱 거룩한 연관을 지어 우리에게 그를 찬양할 의무를 지우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의 기도가 성별되며, 그렇지 않으면 부정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사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면서(히 13 : 15),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입은 부정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것을 보면, 교황주의자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으니, 그들은 이상하게 홀려 있는 것이라고 추론하게 된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이유는(살전 5 : 17-18, 딤전 2 : 1,8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때와 모든 장소와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 드리며,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바라며, 모든 일을 위하여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데 이는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찬양하며 기도할 확실한 이유를 주시기 때문이다.

 

 

 

29. 공중기도의 필요성과 위험성

 

끊임없는 기도는 특히 개인의 사적 기도에 관한 것이지만, 교회의 공중 기도에도 어느 정도로 연관된다. 그러나 공중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여 합의된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끊임없이 드릴 수 없고, 또 그런 공중 기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을 정하게 되는데 하나님께는 어느 시간이라도 상관없지만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당하도록 일정한 시간을 합의하여 결정하며, 바울의 말대로 교회의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고전 14 : 40)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 교회가 가끔 어떤 감동을 받아서 더욱 자주 기도하며,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더욱 큰 열성으로 기도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견인에 대해서는 끝에 가서 논하려 한다.59

그런데 이 문제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금하신 중언부언(重言复言)하는 것과는60(마 6 : 7)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금하시는 것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나 긴 기도나 깊은 감정이 섞인 기도가 아니다. 그가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말,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거나 사람을 설복하듯이 하나님을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61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개선식에서 하듯이 기도에서 호화 찬란한 외식(外饰)을 보인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저 바리새인은(눅18 : 11) 마치 이런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어보려는 듯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칭찬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주의자들 사이에는 같은 이유로 빈말의 반복이 유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기도를 자꾸만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태산같이 많은 말로 자기 선전을 한다. 교회가 하나 님께 대한 이런 유치한 조롱을 금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들리는 기도는 진실해야 하며,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패한 요소와 근사한 것이 또 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배척하신다. 위선자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목격자가 있기를 갈망하며, 시장에 자주 다니면서 기도하여 세상의 환호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마 6 : 5). 우리는 이미 기도의 목표에 대해서 말했으므로,62 즉, 하나님을 찬양할 때나 그의 도움을 간구할 때나,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으므로-기도의 본질은 정신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는, 기도는 원래 속마음이 감동된 것이요,63 그 감동 받은 것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롬 8 : 27 참조) 쏟아 놓으며 펼쳐 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늘 교사께서는 최선의 기도법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데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면, 은밀히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들어주시리라고 하셨다(마 6 : 6). 빈말과 허식적인 기도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위선자들을 멀리하라고 하신 주께서는 또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더 훌륭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주께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마음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고요한 곳을 찾아 모든 생각을 집중하며,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감동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속 가까이에 계실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다(고후 6 : 16 참조) .

주의 말씀은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는 은밀한 것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무수한 근심 걱정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도 기도에 더욱 집중하시고자 할 때에는 항상 군중으로부터 멀리 떠나 고요한 곳을 찾아가셨다. 주께서는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이런 보조 수단을 경시하지 않도록 깊은 인상을 주고자 하신 것이다. 원래 너무도 불안정한 우리의 마음은 이런 수단으로 기도에 더욱 열성을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때에는 군중 속에서도 기도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필요하다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딤전 2 : 8).64 끝으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다. 신자들의 거룩한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은밀한 곳에서, 또는 자기 집에서 기도한다는 뜻도 모르는 자이다. 또 단독으로 사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쉬지 않고 공중 기도에 참가하더라도 장황한 기도를 드릴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공중 기도를 멸시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찍부터 그런 기도를 영예로운 명칭으로 장식하셨는데, 특히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셨다(사 56 : 7, 마 21 : 13). 이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는 뜻은 기도하는 일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활이며, 성전을 깃발같이 세워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에 참가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약속도 첨가되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 : 1). 예언자가 이 시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에는 반드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기쁜 노래를 부를 기회를 항상 주시기 때문이다. 율법의 그림자는 없어졌으나 지금도 확실히 옛날과 같은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으로 우리들 사이에 믿음의 단결을 조성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확인하셨을 뿐 아니라, 바울도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

 

 

 

30.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의 공기도를 명하시므로, 우리에게 는 이 공기도를 드릴 공공의 성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도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자기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거짓 구실을 만들 기회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구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마 18 : 19-20). 즉 공기도를 멸시하시지 않는다고 확언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은, 이런 공기도에는 외식(外饰)이나 무가치한 인간적 영광을 추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하며, 마음의 은밀한 곳에 진지하고 성실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교회 건물의 합당한 사용법이라고65 한다면, 또 사실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식 장소라든지, 교회 건물에 어떤 비밀한 신성성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수백 년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 건물 자체에 계시며, 거기서는 우리 기도를 더 가까이 들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건물 자체가 거룩하므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것처럼 꾸몄다.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으면 우리 자신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미련한 생각을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에게 일임 해두자. 우리가 받은 계명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장소를 구별할 것 없이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요 4 : 24) 구하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전이 기도와 제물을 드리는 일에 제공된 것은 사실이다. 그 때에는 진리가 숨겨졌었고 이런 그림자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진리가 산 현실로 우리에게 나타난 지금은 우리가 물질적인 성전에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성전 건물 안에 가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성전의 모양을 명상하는 훈련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사야와 스데반은 엄숙하게 책망하였다(사 66 : 1, 행 7 : 48-49).

 

 

 

(노래와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문제. 31-33)

 

31.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여기서 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기도 중에 쓰여지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66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의 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말은 미치는 범위가 더 넓지만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점을 책망하는 데도 관련이 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 : 13, 마 15 : 8-9)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 : 14)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과 노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의 감동과 관련된 것이면 극력 장려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깨어 있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 보조 수단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불안정하며 쉽게 변하며 해이하여져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신체 각부에서 어느 정도로 빛나야 하므로,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혀가 이 일을 하도록 맡겨진 것은 특히 합당하다. 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전하며 선포하도록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혀는 주로 공중 기도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도는 신자들의 집회에서 하는 것이며, 이런 기도로 우리는 한 공통된 음성과, 이를테면 같은 입으로 모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 영과 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서로 그 교우에게서 신앙 고백을 받으며, 교우의 행위에서 권유와 고무를 얻도록 한다.

 

 

 

32.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

 

겸해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논한다면, 이 관습은 심히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 : 15). 마찬가지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말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 : 16). 처음 구절에서 바울은 음성과 심령으로 노래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다음 구절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장려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밀라노 교회는 암브로시우스 때에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관습이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밀라노 교회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모친 유스티나가 정통 신앙에 맹렬히 반대해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욱 끊임없이 기도에 전심할 때였다. 그 후에 서방 교회들은 밀라노 교회를 본받았다.

이는 조금 전에 어거스틴이 이 관습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고 말한 이유이다.67 그는 또 저서 재고론(Retractations) 제 2 권에서 말하기를, 아프리카에서는 한창때에 이 관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호민관을 지낸 힐라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칼타고에서 최근에 시작한 이 관례에 대해서 악의를 품고, 기회 있는 때마다 비난 공격을 했다. 그 때의 노래는 성체를 들기 전 또는 성체를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에, 성찬대 앞에서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교우들의 권고로 내가 그에게 답변했다."68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히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겠다는 진정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기 보다 말하는 것같이 들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은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69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33. 기도는 일상 용어로 해야한다

 

그러므로 공중기도도 종래의 관습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사랑이나 친절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바울의 권위와 그가 한 분명한 말에서 다소 감동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 : 16-17).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 : 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남용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한나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도 원인은 여기에 있은 것 같다(삼상1 : 13), 모든 성도들 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항상 하는데, 그런 때에 그들의 기도는 단편적인 말로 되어 폭발한다.

기도할 때에 보통 보는 몸짓, 예컨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등은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기 위한 것이다.

 

 

 

(주기도문 : 처음 세 기원에 대한 해설. 34-43)

 

34.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

 

이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더욱 확실한 방법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의 양식 자체를 배워야 하는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그것을 가르쳐주셨다(마 6 : 9이하, 눅 11 : 2이하). 우리는 이 양식에 의해서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심과 관용에 감사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린이들이 어려운 근심 걱정이 있을 때마다 부모의 보호 아래로 달려가 피난처를 얻는 것같이,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으라고 경고하시며 역설하신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우리의 빈곤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공정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등 충분한 인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보충해 주셨다. 즉,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 양식을 정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기도해도 좋은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우리가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한 도표에 적은 듯이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이 친절하신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게 된다. 곧, 우리가 구하는 것이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으며,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조금도 부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우리는 거의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기술이 없는데다가 성취되면 도리어 자기들에게 해로울 일을 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고대 시인의 말을 빌어,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한 것을 결정하였다. "제우스 신이여, 우리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를 상관하실 것 없이 가장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좋지 못한 일들을, 비록 우리가 원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명령하소서."70 참으로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짓이라고 판단될 만한 총명이 이 이교도에게도 있었다. 동시에 그는 우리 인간의 불행을 밝힌다. 성령이 바른 기도 양식을 가르쳐주시지 않는다면(롬 8 : 2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때에 반드시 위험한 일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 양식을 성령으로부터 배운다는 이 특권을 우리는 더욱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우리 입에 말씀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일체의 주0向?동요가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35. 구분과 중요한 내용

 

이 기도의 모범 양식에는 여섯 가지 기원이 포함되었다. 일곱 제목으로71 구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찬성하지 않는 것은 복음서 기자가 반의 접속사(αλλα 마 6 : 13-역자 주)를 사이에 넣은 의도는 두 부분을 결합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저희들이 유혹의 압박을 받게 버려 두실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력한 우리를 도우셔서 넘어지지 않게 구해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도 우리와 의견이 같다.72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일곱째 자리에 첨가된 것은 해석상으로는 여섯째 자리에 넣어야 한다.

이 기도는 그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 하지만, 처음 세 기원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에만 유의하고 소위 우리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남은 세 기원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련되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구해야 할 것에 대해 특히 배정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것이 자유로운 마음에서 하는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려 하시므로, 우리는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아 이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기원과 같은 부류의 다른 기원들에 관해서도 꼭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대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성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익에는 눈을 감아,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때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세 가지 일을 여전히 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모세와 바울이 한 일을 보면, 그들은 자기를 생각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맹렬한 열의로 자기의 멸망을 갈망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멸망하는 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출 32 : 32, 롬 9 : 3).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이 양식도 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73 그러면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해석하기로 하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6. "우리 아버지"

 

우선 우리는 바로 우리가 전에74 말한 사실에 봉착한다. 즉 우리는 모든 기도를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놓는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누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아주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예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참 아들이시지만 그 자신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로75 주셨는데 이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이 위대한 복을 우리가 확고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양자로 삼으신 그 은혜에 의해 본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요 1 : 12)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가 그를 대할 때에도 이렇게 부르기를 원하신다. 이 한없이 다정한 이름으로 그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불신감을 없애려 하신다. 아버지의 사랑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을 증명하시는 데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요일 3 : 1) 부르는 것 이상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사람의 선함과 자비를 초월하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도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며 훌륭하다. 따라서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잊으며 자기 자녀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시 27 : 10, 사 63 : 16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딤후 2 : 13). 우리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 : 11)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예언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 : 15). 낯선 사람이나 외국 사람에게 보호를 청하여 몸을 맡기려는 아들은 동시에 반드시 자기 아버지의 잔인한 처사나 빈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데서 도움을 구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빈곤이나 수단의 결핍이나 잔인성과 지나치게 엄격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7. "우리 아버지" : 이 호칭 형식은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비록 친절하시고 인자하시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매일 우리를 불쾌하게 생각하시게 되므로,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만일 인간 사회에서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변호인을 시켜서 자기 일을 호소하게 하며, 중재인을 시켜 화해하려고 하며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아버지 앞에 나가서 겸손하게 탄원하는 태도로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이런 때 그 아버지로서는 아들의 간청에 감동되지 않은 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고후 1 : 3 참조) 어떻게 하실까? 그 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호소보다 직접 애원하는 자녀들의 눈물과 신음에 더욱 주목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직접 호소하라고 권고하신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와 친절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심에서 행하는 일이며, 거기는 절망적인 심리의 흔적이 없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풍부하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비유로 묘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눅 15 : 11-32). 어떤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고(13절), 모든 일에서 그에게 큰 죄를 지었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아들을 껴안고, 그가 용서를 빌기 전에 먼저 용서하며,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기꺼이 달려가 맞이하며(20절) 위로하고, 다시 사랑받는 아들로 만든다(22-24절). 사람에게도 이렇게 큰 애정이 있다는 것을 보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해야 할 사랑이 얼마나 더 풍부한가를 가르치신다. 그는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시다. 문제는 은혜를 모르고 반역하며, 사악하고 완고한 우리가 그의 자비를 여전히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데 달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자신이 그러한 아버지라고 하는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부르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 당신은 자녀들에 대해서 풍성하고 위대한 애정을 품으셨고,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하신 아버지를 가질 가치가 없는 저희들이지8?당신께서는 우리를 향해 아버지로서의 애정만을 품으신 것을 확신하며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자식들인 저희는 당신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좁은 마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양자된 것을 보증하실 뿐 아니라, 이 일에 대한 증거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큰 목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갈 4 : 6, 롬 8 : 15).

그러므로 어떤 주저하는 생각이 우리 앞을 막을 때마다, 우리는 이 공포심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면서 그의 지도로 담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38. "우리 아버지" : 이 호칭 형식은 우리와 교우들과의 친교를 확립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교훈은 각각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모두 공통적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들 사이에 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준다. 왜냐하면 자비와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꼭같은 권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한 아버지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되시며(마 23 : 9), 우리가 얻는 좋은 것이 모두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기꺼이 또 진심으로 서로 나누지 못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을 뻗치기를 원한다면, 이 합당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형제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훌륭하신 아버지의 보호가 그들 위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총애하신다면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인간 사회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를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가족 전체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백성과 가족과 그리고 그의 기업에 대해서까지도 아버지께 대한 것과 꼭같은 열성과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존중하셔서 독생자의 충만(엡 1 : 23)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즉 현재 눈에 보이며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한다는 법칙과 일치해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정하셨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하며 바라는 것이 인정을 받을 일일 뿐 아니라 경건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 곧 바울이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우리에게 부탁한 사람들에 대해서(갈 6 : 10) 특별한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요약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우리 주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가족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공동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

 

 

 

39. 기도와 자선을 비교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거기에 관련시키라는 뜻이다. 이런 기도는 각각 개인적으로 드리지만 그 기도가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은 공통된 기도이다. 다른 일과 비교하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자기들이 알고 또 보기에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람이 이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을 모두 알 수도 없고 모두 구제할 수도 없으므로 고통받는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빠뜨리게 된다. 그와 같이, 교회라는 공동 사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특수한 기도를 드릴 때 즉 하나님께서 잘 알려 주신 사람들의 곤란이나 자기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릴 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와 자선은 모든 점에서 같은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주는 일은 궁핍한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도를 통한 도움은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줄 수 있다. 이런 도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포함한, 따라서 저들도 포함한, 일반적인 기도 양식을 통해서 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이 그 당시 신자들에 대해서, 다툼 없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역설한 사실을 들 수 있다(딤전 2 : 8). 바울이 다툼은 기도의 문을 닫는다고 경고한 것은 신자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드리라는 뜻이었다.

 

 

 

4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다는 말씀이(마 6 : 9)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울타리 안 같이 둥근 하늘 안에 둘러싸여 갇혀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솔로몬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왕상 8 : 27).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그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말씀하신다(사 66 : 1, 행 7 : 49, 17 : 24 참조). 이렇게 말씀하시는 뜻은, 그가 어떤 특수한 공간 내에 갇히신 것이 아니고 만물에 편만(遍满)하시다는76 것이다. 그러나 우둔한 우리의 지성은 그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보다 더 숭고하거나 존엄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란 말로 그의 영광을 표시하게 되었다. 우리의 감각 기관들은 어떤 것을 지각하면, 그것을 그 장소와 결부시키는 것이 보통이므로 하나님을 모든 공간을 초월한 곳에 둔다.

그래서 그를 찾으려고 할 때에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모든 지각을 초월해야 한다. 둘째로, 이 표현에 의해서 우리는 그를 부패하거나 변하지 않는 영역으로 높인다. 끝으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힘으로 우주 전체를 포용하시며 유지하시며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크시며 또는 높으시며, 이해할 수 없는 본질을 가지셨으며, 무한한 위력을 가지셨으니 영생 불사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생각은 높이 비약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자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꿈꾸게 되고, 우리의 작은 척도로 그를 재며, 그의 뜻을 우리의 감정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가 그의 섭리와 권능으로 천지를 지배하신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요약한다면, "아버지"라는 이름이 우리의 눈앞에서 그려 주는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을 품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라는 다정한 이름은 신뢰감을 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의심스러운 거짓 신들에게 끌리지 않게 하는 힘이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독생자로부터 천사들과 교회의 유일한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어서 온 우주가 그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그리고 그는 기꺼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히 그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사도는 말한다(히 11 : 6).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낮은 자들에게도 그의 섭리가 미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이 초보적인 지시에 의해서 바울은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 교육을 한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라고(빌 4 : 6) 명령하기 전에 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 : 6),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빌 4 : 5) 서두를 끄집어낸다. 이것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는 것을(시 34 : 15, 벧전 3 : 12 참조)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마음의 의혹과 혼란으로 자기 마음속에서만 기도를 되풀이할 뿐이다.

 

 

 

41. 첫째 기원

 

첫째 기원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이다(마 6 : 9). 이 기원의 필요성은 우리의 큰 수치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배은 망덕과 악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참담함과 미친 듯한 불경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는가? 비록 모든 불경한 사람들이 신성 모독적인 방자한 행위로 영광을 흐리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여전히 거룩하게 빛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니"(시 48 : 10). 예언자의 이 선언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곳에서는 그의 권능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위력, 선하심, 지혜, 공의, 자비, 진리 등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부당하게 빼앗고 있으므로, 그것을 옹호할 힘이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적어도 기도 중에라도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요약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반드시 최고의 경의를 품어야 한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은 지금까지 너무도 흔했던 신성 모독이며, 이것은 지금도 세상에 만연되어 있다.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경건한 기풍이 있다면, 이 기원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다른 이름과는 관련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될 때에, 거룩은 그 순수한 영광을 나타낸다. 우리가 여기서 받은 명령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수호하셔서 모든 경멸과 불경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전 인류를77 복종시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만드시기를 기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는 교훈으로, 또 일부는 행동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므로 우리가 그를 거룩히 받드는 것도 이 두 가지 방면에서 그의 것을 그에게 돌리며, 따라서 그에게서 오는 것을 모두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표지를 각양 각색의 업적에 새겨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자비심뿐만 아니라 그의 엄격하심도 찬양해야 하며,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 사이에서 그 정당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우주 통치의 어디를 보아도 그가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원에는 다른 목적도 있는데, 그것은 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모든 불신과 불경이 일소되며, 소멸되며, 거룩하게 받드는 일을 흐리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비방과 조롱이 추방되며, 모든 모독 행위를 침묵시키고, 존엄하신 하나님께서 더욱 더 빛나시게 되는 것이다.

 

 

 

42. 둘째 기원

 

둘째 기원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것이다(마 6 : 10). 이 기원에는 새로운 점이 없지만, 첫째 기원과 분리시킨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가장 중대한 일에 대해서도 태만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문제의 성질상 철저히 이해되어야 했을 것이 사실은 그렇게 되지 못한 때에는 우리는 거기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논의를 연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모두 사로잡아 마침내 완전히 격멸 시키시기를 기원한 다음에, 거의 꼭같은 기원을 하나 더 첨가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 : 10).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는 전에78 있었지만, 여기서 간단히 반복하겠다. 사람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과 지상 생활을 경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로 약속하며 하늘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항거하는 모든 육의 정욕을 그의 영의 힘으로 바로 잡으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의 법도에 맞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순서를 바르게 지키는 것은 자신의 일부터 처리하는 사람들뿐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평화스러운 상태를 어지럽게 하며 그 순결을 더럽히는 일체의 부패를 자기에게서 깨끗이 씻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흘(笏)과 같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그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도록 만드시기를 하나님께 기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일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감동을 통해서 그의 말씀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그 말씀이 마땅히 받을 높은 영예를 받게 되는 때이다. 그 후에 우리는 불경한 자들 곧 하나님의 권위를 미친 듯이 한사코 거역하는 자들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굴복시킴으로써 나라를 세우신다. 그러나 방법은 여러 가지이니 즉 방자한 자들을 길들이시며, 길들일 수 없는 자들은 그 교만을 꺾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계 각지로부터 자기 앞으로 모으시도록, 교회와 교인의 수효를 늘리시도록, 교회에 각종 선물을 주시도록, 교회 사이에 바른 질서를 확립하시도록, 그러나 순수한 교리와 경건의 원수들을 모두 타도하시도록, 그들의 계획과 노력을 분쇄하시도록-이런 일들을 매일 기원해야 한다. 이것을 보아도 매일 전진하도록 열심을 다하라는 명령이 무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사는 순조롭게 추악한 죄를 말끔히 씻어버리며 완전한 고결에 도달하며 성장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오실 때까지 완전성의 실현은 지연된다. 그 때에는 바울이 가르친 대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다(고전 15 : 28).79

이와 같이, 이 기도는 우리를 세상의 부패에서 물러서게 하려는 것인데 이 세상의 부패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번영하지 못하게 한다. 이 기도는 동시에 육을 죽이려는 열심을 일으켜야 한다. 끝으로 이 기도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확장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후 4 : 16).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그의 의에 순종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빛과 진리를 더욱더 찬란하게 빛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의 어두움과 거짓이 소멸되는 때에 이루어진다. 그 때가 오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의 영의 도움으로 그들을 바른 생활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인내력을 강화시키신다. 그러나 원수들에 대해서는 그 악한 음모를 전복시키시며, 그 전략과 기만 술책을 폭로하시며, 그 악의에 대항하시고, 그 완고한 태도를 억압하시고, 드디어 자신의 입김으로 적그리스도를 죽이시며, 그리스도 강림의 광채로 모든 불경건을 멸망시키실 것이다(살후 2 : 8).

 

 

 

43. 셋째 기원

 

셋째 기원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이다(마 6 : 10). 이 기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존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뜻을 쉽게 또는 즉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때문에 따로 첨가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왕이 되신다고 하는 것을 이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아니다. 또한 만물을 주관하시며 그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시는 은밀한 뜻이80 아니다. 사탄과 사람들이 하나님께 맹렬히 대항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들의 공격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이용하셔서 이미 결정하신 일을 실행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복종하는 하나님의 다른 뜻에 주목해야 한다. 또 그래서 하늘과 땅을 비교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며, 열심으로 그의 명령을 이행한다(시 103 : 20).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은 아무 것도 행해지지 않으며, 천사들도 완전히 평화롭고 공정한 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지상 생활도 이런 표준을 따르며 모든 고난과 사악이 제거되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육의 욕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은 그의 뜻에 안간힘을 써서 대항한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부패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우리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과 심령을 창조하시도록(시 51 : 10)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것은 완전히 없애버려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가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욕망의 자극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심령을 주관하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의 내적인 이끄심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그 결과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모순된 우리의 모든 감정을 허망하고 무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첫째 부분의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의 처음 세 기원을 보았다. 이 기원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고, 자신이나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이런 기도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게 풍성한 유익이 오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기원하는 일들은 우리가 원하고 구하지 않아도 때가 오면 나타날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원하고 구해야 한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가치가 있다. 이렇게 기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다고 열렬하고 성실하고 철저하게 맹세를 한 종과 자녀임을 증거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겠다는 이 소원과 열의를 품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 일들은 실현될 것이므로, 그 결과는 그들에게 혼란과 멸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마지막 세 기원의 해설. 44-47)

 

44. 넷째 기원

 

다음에 있는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계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서-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고전 10 : 31)-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81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처음 세 기원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신다. 그 다음에야 우리 자신의 일을 돌보도록 허락하시는데, 거기에는 제한이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모두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죽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롬 17 : 7-9).

그러나 이 기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에 일임하여 그가 먹여 주시고 보호해주시도록 한다.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까지도 보호하고 지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기대함으로써 우리가 이런 사소한 일로 믿음을 실천하게 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는 악하여 우리의 영혼보다 육신에 대해서 더 민감하며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혼을 위탁하고도 여전히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육에 속한 일을 염려하며, 포도주와 양식과 기름이 풍부하게 자기 앞에 없으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많다. 그림자 같은 짧은 현세의 생명이 우리에게는 영원 불멸의 생명보다 이렇게도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육신을 위한 근심을 단연 포기한 사람들은 즉시 그보다 더 위대한 일들 곧 구원과 영생까지도 하나님에게서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를 심히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한다는 것은 신앙의 적지 않은 단련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의 골수에 박힌 이 불신앙을 버릴 적에, 우리는 큰 유익을 얻는다.

어떤 학자들은 "초실체(超实体)적인" 빵에82 대해서(마 6 : 11)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으나,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유수같은 이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께 양육자의 직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이 기원은(마 6 : 11) 불완전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모독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것이 당연한데, 땅의 근심 걱정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이 일에 끌어넣는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83

이런 생각은 마치 아버지의 축복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음식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딤전 4 : 8) 한 말씀은 쓸데없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신체의 영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낮은 것을 앞에 두셔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남은 두 가지 기원으로-천상 생활에 속하는 기원으로-인도하시고자 하셨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둔한 것을 고려하셨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배정해 주신 정도로 만족하고 부정한 계략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우리는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된다고 명하셨다. 동시에 우리는 그 양식이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세의 글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노력이나 노고나 우리의 손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레 26 : 20, 신 8 : 17-18 참조). 사실 음식이 풍부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영양있게 변하도록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는 가난한 사람 못지 않게 부자에게도 필요하다. 풍부한 포도주와 양곡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84 사람은 주리고 목말라 넘어질 것이다.

"오늘" 또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것과 같이, "날마다"라는 말과 "일용할"이라는 형용사는, 곧 없어질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을 억제한다. 우리에게는 보통 이런 욕망이 한정없이 불타듯 하며, 여기에 다른 악이 더 붙게 된다. 우리는 소유가 필요 이상으로 풍부할 때에는 쾌락과 오락과 허식과 기타 사치에 허비한다. 그러므로 그날그날 쓰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먹여주시니, 내일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물건이 풍부히 들어와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고 지하실에 포도주가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하루에 필요한 것만을 기원해야 한다. 주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의 소유가 계속 불어나게 하시며 유효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소유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까지도 주께서 시간마다 조금씩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은 자부심이 강하여 좀처럼 믿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면서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특별한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신 8 : 3, 마 4 : 4)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이 예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물질적인 수단으로 생명과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그의 권능만이 그 생명과 힘을 유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는 보통 반대되는 예를 들어 우리를 가르치신다. 즉, 가끔 빵의 힘을(또 지팡이의 힘이라고도 하신다) 꺾음으로써 먹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지 않고 쇠약해지게 하시며(레 26 : 26) 마시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하신다(겔 4 : 16-17, 14 : 13 참조).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욕망으로 무수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나, 소유가 풍부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산적한 재물을 믿고 아무 근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사실은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철저히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들의 탐욕을 감춘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 온통 쏟아놓는 것이라야 한다. 또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을, 즉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분께 구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권리에 의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신 8 : 18 참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점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당하고 무해한 노고에 의해서 얻은 것은 우리 것이라고 부르지만, 사취(诈取)한 것과 강탈한 것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 얻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달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든 간에, 우리 자신의 기술과 근면과 손으로 얻은 것같이 보이는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수고가 참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이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45. 다섯째 기원

 

다음에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한다(마 6 : 12). 이 기원과 다음 기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요약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맺으신 영적 언약도 두 부분만으로 성립한 것과 같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것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라는 것이다(렘 31 : 33-34, 33 : 8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고, 곧 이어 둘째 은혜를 첨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를 지탱하셔서, 우리가 모든 시험에 굴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빚"이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저히 빚을 만족하게 치를 수 없는데, 이 용서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온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빛들을 너그럽게 탕감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비로 스스로 만족을 거두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놓아 우리의 몸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롬 3 : 24 참조). 그러므로 자신이나 타인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런 만족으로 죄의 용서를 산다고85 믿는 사람들은 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자기들에 대한 고발에 동의할 뿐이며, 심지어 자기의 증거로 자기에 대한 정죄를 확정시킨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혜로 풀림을 받지 않으면 자기들은 빚진 자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경멸하며, 자기의 공로와 만족을 하나님께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는 완전하여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86 귀의 유혹을 받아 과오에 빠지는 사람들을 그들의 제자로 삼도록 내버려두라. 다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시며 죄인만을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아첨하는 말로 죄를 장려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아무리 육의 죄악을 벗어버리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세밀한 의무까지도 이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무 오점이 없는 순결함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하며, 이 일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그의 형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동안에 우리의 육에는 항상 다소의 오점이 남아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권위에 의하여, 평생 죄의 용서를 빌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들에게서 모든 흠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신진 교사들을 누가 용납할 것인가? 그들은 완전한 무흠(无欠)이라고 하는 유령으로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며,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요한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요일 1 : 10).

또 이 악한들은 이런 노력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부를 말살하고 파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언약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들은 지금까지 결합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독 행위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가련한 영혼들을 절망 상태에 몰아넣어, 불경건하며 잔악한 짓을 한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히 반대되는 나태한 상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신과 동류들을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을 갈망하는 것은 동시에 죄의 멸절(灭绝)을 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항변하나, 이것은 심히 유치한 생각이다. 주기도의 처음 부분에서는 최고의 완전성이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다음 부분에서는 우리의 무력한 상태가 제시된다. 이와 같이, 이 두 부분은 훌륭하게 서로 조화되며,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우리의 곤경을 위해 필요한 대책을 경시하지 않게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끝으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도 용서를 받기를 기원한다(마 6 : 12). 즉, 행동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말로 모욕하는 등,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해한 모든 사람을 우리가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것같이, 우리도 용서받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위법이나 불법에 대한 죄책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사 43 : 25 참조).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을 기꺼이 버리고, 부당한 처사를 기꺼이 말끔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일 우리가 현재 우리를 해하거나 이미 해한 모든 사람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에 미워하는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복수를 계획하며 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의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각양 호의를 보이며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우리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지 말라고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시라고 빌기 때문이다(마 7 : 12 참조). 참으로, 이 기도의 뜻은,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우리에게 하시지 마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끝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 : 12)라고 조건을 붙인 것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니 우리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마치 우리가 받을 용서의 이유가 있음을 말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위로하시려는 뜻도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과 시기와 복수심을 깨끗이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남을 용서해준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도 그만큼 확실하다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 조건을 한 표로서 첨가하신 것이다.

이 표의 또 다른 의도는, 주께서 그 자녀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시려는 것이다-즉, 복수심이 강렬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약하여 항상 적의를 품고 행동하며, 자기들에게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진노가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을 자녀들 가운데서 제외시키려고 하신다.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감히 주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가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었다(눅 11 : 4).

 

 

 

46. 여섯째 기원

 

여섯째 기원은(마 6 : 13),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응하는 것이다(잠 3 : 3, 고후 3 : 3).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반드시 끊임없는 싸움과 어렵고 괴로운 투쟁이 따르기 때문에, 이 기원에서 우리는 승리를 얻는데 필요한 무장을 갖추며 보호를 받기를 추구한다. 이 기원에서 우리가 받는 지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우리를 굽히시며 지도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의 도움은 사탄의 모든 전술과 모든 맹공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로 굴복하지 않게 만드시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시험의 모양은 참으로 각양 각색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은 시험이다. 우리의 육욕이나 사탄의 선동으로 우리의 생각이 율법을 범하려 할 때 그것은 시험이다. 또한 그 자체로서는 악하지 않은 것들도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에, 시험이 된다(약 1 : 2,14, 마 4 : 1,3, 살전 3 : 5 참조). 이런 유혹들은 좌우에서 오는데, 바른편에서 오는 것은, 예컨대 재물, 권세, 명예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찬란하고 좋은 듯해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며, 그 감언 이설로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간계에 걸리고 그 감미로움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왼편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은, 예컨대 빈곤, 치욕, 경멸, 고난 등이다. 사람들은 이런 곤란을 당하여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망 상태에 빠져 확신과 소망을 버리고, 드디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

우리의 육욕이 일으키거나 혹은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제시되는 두 가지 시험과 싸워 굴하지 않게 하시기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우리를 지탱하시며 격려해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의 원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든 간에 그 악한 적들의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굳게 서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기고 일의 결과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더라도, 우리가 그것이 선한 결과로 변할 수 있기를-즉, 순경(顺境)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역경(逆境)에서 낙심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이 전혀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분발하도록 자극을 받으며 시험에 의해서 압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너무 활동하지 않아서 태만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시험이 오기를 원한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었고(시 26 : 2 참조), 주께서 날마다 그의 선민을 시험하시는 것도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다(창 22 : 1, 신 8 : 2, 13 : 3). 이런 때에 주께서는 치욕과 빈곤과 고난과 기타 곤란으로 선민들을 징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은 서로 다르다.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여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혼란에 빠뜨리며 낙심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연단 시키심으로써 그들의 성실을 시험하시며, 실천을 통해서 그들의 힘을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억제하지 않으면 방종에 흐르며 한정 없이 자만하는 육의 세력을 꺾으시며 정화하시며, 달군 쇠로 지지듯이 하신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무장과 준비가 없는 사람을 습격해서 불시에 타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동시에 벗어날 길도 마련하시며, 그가 가하시는 모든 것을 그의 백성이 꾸준히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신다(고전 10 : 13, 벧후 2 : 9).

"악"이라는 말을 마귀로 해석하느냐 또는 죄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 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사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원수이며(벧전 5 : 8), 더군다나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죄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험에도 정복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에 대항해서 주의 힘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 기원의 목적은 우리가 주의 돌보심과 보호를 받아 안전한 입장에서 모든 유혹에 굴복함 없이, 도리어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과(마 16 : 28) 마귀의 나라 전체를 견디고 이기려는 것이다. 이것이 악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위대한 용사인 마귀와 싸우는 것이나,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희롱이 될 것이다. 이 싸움을 위해서 자신감 있게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상대하는 원수가 얼마나 사나우며 무장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87 여기서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는 사자의 입을 피하는 것같이(벧전 5 : 8)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주께서 우리를 임박한 죽음에서 구해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찢기고 그에게 삼키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할 것이다"(시 60 : 12, 시 107 : 14 참조). 능력과 자유 선택의 힘을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원하는 대로 그것을 믿게 버려 두라. 우리는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하고 굳세게 서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도에는 얼른 보기보다 더 깊은 내용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사탄과 싸우는 것이라면, 성령이 충만해서 우리의 약한 육을 완전히 버리기까지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새롭게 우리에게 풍부하게 내리고 더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충만해서 모든 악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야고보의 증거와 같이(약 1 : 13),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이므로,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굴복시키는 모든 시험은 원래 우리의 정욕이 그 원인이며(약 1 : 14), 우리의 정욕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의문은 이미 부분적으로는 해결되었다. 또 야고보가 말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은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그 죄를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은 무익하며 부당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생각되실 때, 우리를 사탄에게 넘겨주시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배교자의 심리와 추악한 욕망에 빠뜨리시며,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공정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인을 확실히 아시지만 사람은 모르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서 배교자의 눈을 어둡게 하시며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셔서 그의 복수의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려고 하시는 때가 많은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기도가 부적당한 표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47. 결론

 

특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물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 세기원은 우리가 전에 말한88 점을 분명히 알려 준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공개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 일반의 덕을 세우며 신자 상호간의 교제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함께 양식과 죄의 용서를 얻으며,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기원하며 받으리라고 확신해야할 이유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라틴어 번역에는89 없지만, 빼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합당하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의 것이라고 하였다(마 6 : 13).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하고도 평온한 안식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비록 가련하고, 무엇보다도 무가치한 것들이며, 아무 칭찬할 점도 없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기도할 이유가 있으며, 언제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 아버지께서 빼앗을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 "아멘"이란 말이 첨가되었다(마 6 : 13). 이 말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고 싶다는 열의를 표명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실현되었고, 속이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90 약속하셨으므로 앞으로도 반드시 모두 실현되리라는 우리의 소망이 강화된다. 또 이런 소망은 우리가 전에 제시한 기도 형식과 일치한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단 9 : 18-19).91 이런 말에 의해서 성도들은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기도를 들어주실 이유를 구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그런 목적을 얻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도 오로지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론적인 고찰 : 주기도의 완전성과 다른 말을 쓰는 자유에 대하여. 48-49)

 

48. 지켜야 할 표준으로서 주기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온통 이 기도 형식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우리의 최대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를테면 기도의 표준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생으로 정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신다(마 17 : 5).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였으며(사 11 : 2), 사람이 되셔서는 위대한 지혜의 사자로서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으셨다(사 9 : 6, 28 : 29, 렘 32 : 19의 융합).

그리고 이 기도는 모든 점에서 완전해서, 이것과 관련을 지울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거나 이질적인 것을 첨가한다는 것은 불경한 짓이며 하나님의 시인을 받을 수 없는92 짓이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요약하신 것은 그에게 합당한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요컨대 그가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이 범위를 넘어 다른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것이니, 이런 짓은 광적인 모독에 불과하며,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면서 자기들의 날뛰는 욕망대로 멀리 빗나가 헤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믿음이 없이 기도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모두 신앙과는 관계없이 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굳게 서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보이신 표준을 경시하고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힘껏 싸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이 주기도를 "합법적 기도"라고93 부른 것은 옳은 말이며 훌륭한 말이다. 그는 은연중에 모든 다른 기도는 법 밖에 있고, 따라서 금지를 당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49. 우리는 주기도의 용어의 형식보다 내용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 기도의 형식에 구애되어 그것이 일점 일획이라도 변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우리가 사용해서 유익을 얻을 다른 기도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고, 용어는 많이 다르나, 그 기도들은 같은 성령이 만드신 것이다. 같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암시하시는 기도는 많으나, 그 용어가 주기도와 비슷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이 기도에 요약되어 포함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거나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되며, 설사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기도와 경건한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주기도와 관련시켜야 한다. 참으로, 이 기도같이 완전한 기도는 달리 찾아 볼 수 없으며, 더 완전한 것은 더군다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과,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기도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또 그 구조도 지극히 정밀해서, 아무도 개선해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요약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르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셨고. 필요한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정 시간에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데 대하여. 50-52)

 

50.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고 위에서94 말했으나, 우리는 연약해서 여러 가지 보조수단으로 지탱하며, 나태해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각각 이 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들을 지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시간들이 오면 반드시 기도를 드리며, 그 시간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완전히 기도에 바쳐야 한다. 그런 시간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먹고난 때, 밤에 자려고 할 때이다.

그러나 시간들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갚는 듯이, 그리고 시간 이외에는 갚을 빛이 없다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며, 따라서 이 연약함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계속 자극을 받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곤란을 당할 때, 우리는 속히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 또 자신이나 타인의 일이 순조로운 것을 보면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써 그의 손이 도와주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떤 특수한 일에 묶어 두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어느 때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방법으로, 무슨 일을 해달라고 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주기도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어떤 조건을 가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과 방법과 때와 장소 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도록 일임하라는 것이다.95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마 6 : 10). 이런 말로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며, 우리의 뜻을 재갈로 제어하듯 함으로 해서 감히 하나님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원을 조정하시며 지도하시도록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시킨다.

 

 

 

51. 기도는 인내로 참으면서 계속하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복종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에 지배되도록 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참고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보류하고 주를 기다리면서 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주께서 나타나시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사람들이 보기에 주께서 무시하는 것 같은 기도들에 대해서도, 결코 들으시지 않은 것이 아님을 적당한 때에 말씀하시리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요구에 응하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한결같은 위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열성에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첫 요구를 들으시고 곧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시고 적의를 가지셨다고 속단하고서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일체 버리고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으로 우리의 희망을 뒤로 물려가면서, 성경이 강력히 권장하는 견인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시편에서 보면, 다윗과 기타 신자들은 기도에 거의 지치고, 듣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많은 말로 허공만 치듯 한 때에도, 기도를 그만두지 않는다(시 22 : 2).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믿음이 모든 사태를 초월하지 못하면, 그 말씀의 권위가 효력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악한 언행으로 하나님을 괴롭혀 노엽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과 어떤 조건하에 계약을 맺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종인 듯이, 자기들이 정한 법으로 하나님을 얽매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즉시 복종하시지 않으면 격노하며 불평을 말하며 항의하며 중얼거리며 하나님께 대해서 미친듯이 날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심으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는 허락하신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이 점을 증명하는데 그들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편이, 고기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민 11 : 18,33).

 

 

 

52.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는가?

 

그러나 오래 기다린 후에도 기도에서 받는 유익을 감각으로 알 수 없거나, 기도의 결과를 지각할 수 없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유익한 것을 얻었다는 확신을 준다. 우리가 곤란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곤란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겠다고 자주 또 확실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빈곤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며,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백성의 기대와 인내에 실망을 안겨 주실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대신하실 것이다. 이는 모든 좋은 일이 그 안에 있고 심판 날에, 즉 그의 나라가 나타나는 때에 그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허락하실 때에도 반드시 우리가 원한 그대로 응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는 듯 하면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요한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 : 15)고 한 말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공연한 말을 많이 한 것같이 보이지만, 특히 유익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원대로 하시지 않는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친절히 잘 들어주시며, 그의 말씀을 믿고 가진 소망은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겠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이 인내심에 의하지 않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인내심으로 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주께서 그 백성에게 가하시는 시험은 가볍지 않으며, 훈련도 쉽지 않다. 그들을 극단으로 모는 때가 많으며, 그렇게 몰린 그들이 진창에 빠져 하나님의 다정한 은혜를 맛볼 때까지 거기 오랫동안 있게 하신다. 그리고 한나가 말한 것같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신다(삼상 2 : 6). 괴로움을 당하고 고독하고 거의 죽게 된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의하시며 현재의 불행을 끝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이 소망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잠시도 기도를 쉬지 않는다. 기도는 끊임없이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 21 장

 

영원한 선택,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1

 

(예정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1. 예정론의 필요성과 이것이 가져오는 이로운 결과 : 호기심의 위험성

 

생명의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전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또는 같은 정도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매우 놀랄만큼 깊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다양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정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면 즉시 중대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하는 바를 결정할 때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 같이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2 그러나 그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스스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음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놀라게 하는 그 흑암 속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뿐 아니라, 그 깊은 향기로운 열매까지도 알려진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일체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하신 사람들을 선택하시지 않는다면, 꼭 알아야 할 다음의 사실을 알 길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한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행위되지 못하느니라"(롬 11 : 5-6 참조).3 오직 하나님께서 너그러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회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은, 드높게 찬양하며 선포해야 할 이 일을 극도의 악의로 희미하게 만들며, 겸손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바울은 분명하게, 백성 중에서 남은 일부분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돌릴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다만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그 구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또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실 수 없으므로 보상을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문을 닫고 아무도 이 교리를 맛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꼭 같이 해한다.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 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굳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공포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무수한 위험과 함정과 필사적인 투쟁 속에서도 우리를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신 것은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신다(요 10 : 28-29).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끊임없는 공포심으로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추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세 가지 은혜를4 모르고,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우리 사이에서 제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준다. 이 점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지는데 그것은 베르나르드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피조물 사이에서 발견되거나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놀랍게도 복된 예정의 품속에 그리고 또 가련한 정죄받은 대중 속에 교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5 라고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서론으로서 두 가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종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한다. 그대로 버려 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한다.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각처에 있고, 그 중에는 다른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6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의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겠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 곳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에 들어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탐색하거나, 가장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영원 자체로부터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다.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신 범위 내에서 계시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 예정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어디까지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임금님의 침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 주께서 그의 위대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요 16 : 12), 그 분께서는 조금도 원망을 품으시지 않았다. 우리는 걸음을 계속해서 전진하며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아직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을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끝날이 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될 것이다."7 우리가 주께 대해서 알아도 좋은 모든 일을 탐구할 때에,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가 주에 대해서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주는 빛은 주의 말씀뿐이다. 만일 이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곧 모든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의 한계를 넘는 순간에 바른 길을 벗어나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거기서 반드시 헤매며 미끄러 넘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점을 명심해야 하는데, 즉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욥 12 : 24 참조)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자. 여기에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이8 있기 때문이다. 알려고 갈망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심지어 치명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차라리 자진해서 묻지 않는 것이 좋다. 경박한 호기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때에는,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는 생각으로 억제하는 것이 종을 것이다. 즉, 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은 것과 같이, 호기심으로 영광을 탐구하는 자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잠 25 : 27 참조). 이 오만 무례한 행동은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뿐이므로, 우리는 당연히 단념해야 한다.

 

 

 

3. 둘째 위험성 : 선택의 교리에 대해 걱정스런 침묵하는 것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9 그들은 이 신비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심히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이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지성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라고 하는(잠 25 : 2)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상식으로 보아서 이 말은 모든 일에 무차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구별하는 길을 찾아서 겸손과 침착의 자세를 보이며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세는 이 점을 간단한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 : 2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이 하늘 명령을 근거로 삼아서만 율법의 교훈을 연구하도록, 모세는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또 그는 이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이 범위 안에 머물라고 했다. 즉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비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 때문에 우리가 제한을 받는다면, 그들과 같은 무리가 모독하지 않는 신앙 문제는 거의 없으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숨겨야 할 것이다. 완악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세 위(位)가 있다고 들었을 때에 못지 않게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우주 창조 이후로 5천년이 약간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는 상태에 있었느냐고 묻는다.10 요컨대, 그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반드시 조소하며 공박한다. 이런 모독적인 언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우주 창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심히 강력하므로, 악인들의 험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소논문 견인의 은혜에 대하여(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진정한 교리를 중상하고 비난했지만, 바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11 게다가 이 점에 있어 여러 가지 어리석은 생각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적당한 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다.12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곧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걷듯이 성경도 약한 우리가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전진하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였다.13 그러나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14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특히 예지를 예정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반대 의견으로 예정설을 묻어버린다.15 물론 우리는 예정과 예지를 다 하나님 안에 두지만,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앞에 항상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모든 것이 현재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개념을 통해서 생각하고 계실 뿐 아니라, 참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시며 식별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지는 우주전체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16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개개인에게서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한 예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각 민족의 장래도 그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밝히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 : 8-9). 그 구별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밝히 알 수 있다.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나무와도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모세가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우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원인에 대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열조를 사랑하셨고 "그 후손 너를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4 : 37).

다른 장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 7 : 7-8). 모세는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늘과‥‥‥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 : 14- 1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신 7 : 6)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신 23 : 5). 신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시 47 : 4)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물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저 거룩한 조상 자신도 자기와 자손들을 위해서 그런 큰 영예를 얻을 만한 높은 덕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책망하신다(출 32 : 9, 신 9 : 6 참조). 예언자들도 유대 백성들이 부끄럽게도 은혜를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하나님의 이 선택을 자주 언급하여 책망했다(암 3 : 2).

여하간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에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백성보다 한 백성을 총애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 심지어 악하고 완고한 사람들까지도 총애하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이런 방법으로 증명하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의를 할 것인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서 모욕의 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의를 건드리거나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돌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때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될 때에는 이 거저 주신 언약의17 원칙을 상기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 : 3). "우리 자신"을 배제하기 위하여 첨부된 부정어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풍성하게 가진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구하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예언자는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만족하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고 한다(시 105 : 6).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선택의 결과임을 말한 후에,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행하신 것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시 105 : 42 참조). 온 교회의 찬송도 이 교리와 일치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 44 : 3) 그런데 "땅"을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포함한 비밀한 선별을 의미한다는데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백성에게 권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 : 12).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 : 22)라고 백성들에게 소망을 고무시켰다. 이와 같이 다윗도 자기의 신앙이 공격을 받을 때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 : 4)라고 하면서 무장을 갖춘다. 그뿐 아니라, 선택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첫째 해방과 둘째 해방,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가지 은혜로 확인되었으므로, "선택한다"는 말은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사 14 : 1). 예언자는 미래를 묘사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같이 보였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모으실 것인데, 그것은 그 순간에는 무효로 된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의 선택이 확고부동하다는 표징이 되리라고 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여(사 41 : 9),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이 놀랍도록 너그러우시며 끊임없이 계속됨을 역설한다. 스가랴서에 있는 천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여, "여호와께서‥‥‥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한다(슥 2 : 12). 마치 하나님께서 혹심한 징벌로 이 도성을 버리셨거나, 민족의 포로 생활로 인하여 선택이 중단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택의 표징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선택 자체는 여전히 침범할 수 없다.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이 둘째 단계 곧 제한적인 성질을 첨가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두셨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제외되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이-거의 모두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의 후손이 부르심을 받았다. 같은 부르심이 야곱에게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똑같은 일례이다. 이 일은 시편에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 : 67-68)라고 훌륭하게 선포되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이 변경을 통해서 밝히 드러낸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무리가 양자된 지위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책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시편을 보면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147 : 20)라고 언급되어 있다. 두 단계를 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온 민족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오직 그의 관용을 베푸실 때에 어떤 법에 의해서 구속을 받으시지 않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선택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가문에서 선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불충하고 불경하여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 : 2-3, 롬 9 : 13)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다 한 거룩한 아버지께로부터 난 언약의 상속자 즉, 거룩한 뿌8??가지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 존엄한 지위를 가지도록 용납되었으므로, 둘 다 당연히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맏아들인 에서가 제외되고, 출생으로 보면 그보다 낮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중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이 그 이중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셨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 분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 밖에 해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저 독특한 후손으로 인정된다(롬 9 : 7-8, 갈 3 : 16이하 참조). 선택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였다. 그러나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인정되어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선택의 효과가 나타나며 참으로 영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올라가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풀 수 없는 끈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방금 인용한 말라기서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시고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그 중의 일부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의 방법을 사용하시지,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고(롬 9 : 13), 훌륭한 논법을 전개한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말 1 : 2) 하신 말씀은 이조상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데, 예언자는 이 사람들과 에서의 후손들을 대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신 채로 지나치시는 일이 없는 선택의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에 바울이 관심을 갖는데(롬 9 : 27, 11 : 5, 사 10 : 22-23 참조), 그 까닭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하여 사라지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때로는 확고하며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중생의 영을 즉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내면적인 은혜만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는 외면적인 변화는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했지만(신 32 : 9, 왕상 8 : 51, 시 28 : 9, 33 : 12 기타), 그 중에는 이방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와 구속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의미한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리는 많은 배반자들보다 자기가 거저 주신 은혜에 주의하신다. 배반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실은 배제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남은 몇 사람을 보존하심으로써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롬 11 : 29).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민족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교회를 모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언약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소수에 국한시키셨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공통으로 택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에게 주신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자손들과 이삭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영적 후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갈 4 : 28).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말은 반드시 언약을 모욕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변할 수 없는 계획은 본질적으로는 이 영적 후손들에게서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느 쪽으로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성경의 구절들에 비추어 취해야 할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선택 교리의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걱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 무흠하면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써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신다. 여기서 나는 예정론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조작한 여러 가지 공상을 무시하겠다. 그런 공상은 말로 표현되면 즉시 자체의 허위성을 충분히 증명하게 되므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다만 유식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단순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제의하는 것들을 잠깐 검토하겠다.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증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

 

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지금까지 우리가 서술한 입장과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한다.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 선택하시고, 악한 의도와 불경건한 생활로 기울어질 성향을 가지리라고 보시는 사람들을 죽음의 저주를 받도록 결정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예정을 예지의 보자기로 덮음으로써 그들은 예정을 모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예정의 근원이 다른 데 있는 것같이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일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각 시대의 중요한 학자들도 품은 것이었다.2 내가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두는 것은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입장이 큰 타격을 받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고 명백하여 사람의 권위가 그것을 움직이거나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으면서 이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공격하므로 나는 그 불손한 태도를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한다.3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이 하나님과 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분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푸신다고 하는 말은,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말이 아니다.4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했느냐 하는 문제도, 그 평가의 원인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 때문에 소나 나귀가 아니고 사람이 되었는가를 대답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로 만드실 권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들은, 짐승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대해서 마치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는 듯이,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허락하려는가? 반대론자들도 아무 공로 없지 특권을 얻은 사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의 표준에 따라 은혜를 다양하게 베푸시는 것보다 더 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논쟁을 개인들의 문제로 돌려, 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떨며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을 인간으로서 잉태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태중에서 당연히 천사들의 머리와, 하나님의 독생자와,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 되셔야 했던 것은(히 1 : 2이하 참조) 어떤 덕행에 의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언급하였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머리 자신께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선택의 가장 분명한 거울이 되어주신다. 따라서 지체인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것이 아니라, 값없이 그 영광을 받으셔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선물을 나눠주시게 되었다."5 만일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모두 그와의 거리가 이렇게 먼가, 왜 우리는 모두 부패했는데 그만 순결 그 자체이신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의 정신 이상뿐 아니라 파렴치까지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제외됨의 고유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다면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도 빼앗게 해 보라.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우리는 "창세 전에"(엡 1 : 4)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에, 그는 우리편에 있는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눈을 돌려, 생명의 교제에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몸에서 지체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고귀한 기업을 받도록 택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을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할 때에(골 1 : 12), 이것을 언급하였다. 만일 장차 올 생명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은혜보다 선택이 선행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도록 그를 움직일 만한 무엇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실 것인가? 바울의 다른 말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곧 창세 전에" "우리로‥‥‥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엡 1 : 4-5) 그는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우리의 공로를 대조시킨다.

 

 

 

2. 선택은 창조 이전의 일이며 공로에 대한 예지와는 관련이 없다

 

더욱 완전한 증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구절의(엡 1 : 4-5) 각 부분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각 부분을 종합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선택된" 자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그도 곧 이렇게 언명한다. 그러므로 "선택된"이란 말을 복음이 선포된 시대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은 비열한 허위로 이 말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다.6 바울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엡 1 : 4) 말함으로써 가치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과 또 후에 아담 안에서 동등한 인간들이 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할 조건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다면, 각 사람이 그 자신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중에서 분리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더우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 : 4하반절)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의 원인을 예지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은 선택의 결과라고 바울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더욱 고차원적인 원인을 묻는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셨으며, 이 일은 "그 기쁘신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엡 1 : 5상반절). 이런 말로 그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상상하는 선택의 수단을 일체 배제한다.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다만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은혜를 그들이 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각각 간직해두신 것이라는 이 한 가지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3. 선택받음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 결정이 지배하는 곳에는 행위에 대한 고려가 있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는 이 대조법을 전제하지는 않으나, 그가 다른 데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 : 9). 그리고 "우리로‥‥‥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에 의해서(엡 1 : 4), 우리는 모든 의혹에서 풀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혔다.7 만일, "우리가 거룩하리란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말하는 순서를 뒤집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택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케 된다고 하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일치할 수 없다. 그들은 자주 궤변을 사용하여, 주께서는 이미 있은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고 하지만,8 이런 말에는 정당성이 없다.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있을 거룩은 선택에서 유래했다는 뜻이 암시된다. 선택에서 유래한 것이 선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하겠는가?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을 확인하는 듯이 후에 "그 기쁘신 뜻대로" (엡 1 : 5), "그 기쁘심을 따라"(엡 1 : 9)라고 말한다. "그 기쁘심을 따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에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고려를 하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곧 부언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오로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한다(엡 1 : 6 참조). 우리가 선택된 데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그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경우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택하실 때에 각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면, 그 선택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라고(요 15 : 16) 하신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공로를 배제하실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먼저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는 선택될 아무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또 바울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한말은(롬 11 : 35)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앞지르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을 과거에나 미래에나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신다는 것이 바울이 밝히려고 한 것이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논법을 더욱 깊이 반복하여 더욱 자세히 전개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한다(롬 9 : 6). 비록 모든 사람이 상속권에 의해서 복을 받았지만 그 상속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는 유대 사람들이 교만하며 거짓된 자랑을 하는 데서 생겼다. 그들이 자기들을 "교회"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자기들의 결정에 의존시키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황주의자들은 이 거짓된 구실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에는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적자(嫡子)의 지위에서 서자(庶子)로 전락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모든 사람 위에 엄연히 있어서 그들을 지배하며, 독자적으로 양자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경건 때문에 구원의 소망이 확보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배반 때문에 상속권이 말살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는 이 비밀의 선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밖에서 구할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 모두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욱 전개해 나간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다. 이 변경은 하나의 전조(前兆)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 일의 근원과 원인을 묻는다면, 예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덕성과 죄악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의 피상적인 논법의 요점은, 야곱이란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이셨고, 에서에게서는 무가치하다고 예견하시는 사람들은 버리신다는 것을 보이셨다고9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 : 11-13, 창 25 : 23 참조). 만일 두 형제 사이에 차이를 둠에 있어서 예지가 그에 어떤 관련을 가졌다면, 여기서 때를 말한 것은 확실히 부적당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장차 있을 덕에서 오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바울은 왜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하는가? 그가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경솔한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고 따라서 야곱의 경건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곧 대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가 은혜를 얻게 한다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야곱이 나기 전에, 그가 성장한 것 같이, 이미 당연히 확정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도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야곱의 선택은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사도는 행위를 말함으로써 미래나 과거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연히 대립시킨다. 그 한 편을 확립함으로써 다른 편을 교묘하게 부정하고자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고려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이고,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끝으로, "선택"과 "목적"이란 말들을 보면(롬 9 : 11),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과는 별도로 안출해 내는 원인들이 모두 이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하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행위에 대한 주장을 반박한다

 

선택에는 행위도 관여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 점들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구실을 사용할 것인가? 이는 그들의 입장이 사도의 주장을 직접 회피하려는 것이기 때문인데 사실상 두 형제 사이의 구별은 그들이 나기 전에 확정된 것이므로, 그것이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의존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다. 그들의 궤변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그 무엇이 있다면 사도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께서 선택의 은혜를 통하여 주시기를 이미 결정하신 것 이외의 선한 것을 사람에게서 조금도 예견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선행을 그 원인 앞에 두는 어리석은 짓으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눈앞에 그에 대한 실례를10 보고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같은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쪽은 버리신다. 한가지 나은 것은 다만 장자 상속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시하시고, 장자의 것을 빼앗아 아우에게 주셨다.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획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멸시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를 일체 박탈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시고 이삭을 사랑하신다(창 21 : 12). 므낫세를 제쳐놓으시고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다(창 48 : 20).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누가 나를 가로막고, 우리는 내세의 삶 전체에 관해서 이런 낮고도 사소한 유익들을 근거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며, 장자의 영예를 받은 사람이 곧 하늘의 기업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이는 심지어 바울까지도 위에서 인용된 증거들을 사용할 때, 성경을 왜곡하여 생소한 의미로 해석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도가 경솔하게 잘못 말했거나 고의로 성경의 중언들을 오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12 그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감춰져 있었던 야곱의 영적 선택을 지상적인 표징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부여된 장자 상속권을 내세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각종 곤란과, 고통과 쓸쓸한 타향 생활과 많은 슬픈 일과 비통한 근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위해서 그의 나라에 준비하신 영원한 영적 복을 외적인 복으로 증거하셨다고 확실히 깨달았을 때에, 바울은 서슴지 않고 그 외적인 복에서 영적 복을 증명하는 증거를 찾은 것이다(엡 1 : 3이하 참조). 우리는 또한 가나안 땅도 하늘나라 처소의 증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야곱이 천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나누기로 되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공로에서는 다르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버림을 받은 에서와 구별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다고(롬 9 : 15) 대답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이유를 그들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의 긍휼에서만 취하신다고 하는 것이(롬 9 : 16) 주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로지 주 자신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 안에서만 확립하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 내려가는가?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긍휼만을 가리켜 주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가? 주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그의 긍휼 가운데 국한시키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의 관심의 일부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향하게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고 하는,(롬 11 : 2) 소수의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을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한가한 망대 위에서, 자신이 직접 하시지 않는 일을 다만 예지하실 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그러한 뜻에서이다.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이란 말이 있다(행 2 : 23).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확실히 구경꾼이 아니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벧전 1 : 2).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정하시는 그 은밀한 예정을(벧전 1 : 2) 적절하게 표현한다. "뜻"이란 말을 동의어로서 첨가할 때에-이 말은 보통 확고한 결심을 의미하므로-베드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주관하실 때에 자신의 외부로 나가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장에서 그리스도를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양이라고 말한다 (벧전 1 : 19-20).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 인류의 구원이 올 것인지를 보시려고,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한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리 알려진 사람들은, 바울이 보기에는 군중 가운데 섞인 소수에 불과하고, 군중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교만을 억제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한다(딤후 2 : 19). 요약하면, 바울은 이런 말로써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전체요, 또 하나는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로서 사람은 올 수 없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 숨겨 있는 자들이다. 바울의 이 말이 모세의 말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언급한다(출 33 : 19). 이 말씀은, 외적인 상태는 같은 선민에 관한 것이었으나 마치 그가 일반적인 선택 안에 일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더욱 거룩한 보화같이 여겨진다고 한 것과 또한 공통된 언약이 있다고 해서 소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대열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 자신이 값없이 은혜를 나눠주시며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다만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또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단언하신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거절을 당하는 일이 없이 자비가 내려진다.

이런 때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예측하거나 그 일부를 취득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에 관하여 자기를 찬양할 것을 요구하신다.

 

 

 

(선택과 유기(遗弃)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

 

7.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이제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최고의 심판자시요 주이신 분의 발언을 듣기로 하자. 그는 청중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들 앞에서 하시려는 말씀이 거의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이 장애를 극복하시려고 외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 6 : 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 6 : 39).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증과 보호를 받게 되는 발단은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혹 어떤 사람은 여기서 논의의 방향을 돌려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한 자들만이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항의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무수한 군중이 배반하여 전세계를 뒤흔들지라도 선택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이 하늘보다도 더 견고할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었느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낯선 자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어떤 궤변의 구름으로도 덮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 : 44-45)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선택은 전반적인 것이 되겠지만, 현재 신자가 소수인 데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신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소유였다고(요 17 : 6) 말씀하시고 조금 후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하신다(요 17 : 9, 요 15 : 19 참조). 그러므로 전세계가 그 창조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 자체는 그 예정된 대로 자멸하게 버려두신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이시지만, 아버지와 함께 선택권을 주장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신다(요 13 : 18). 어디서 택하셨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세상에서"라고 대답하신다(요 15 : 19).

그러나 제자들을 아버지께 맡기시는 기도에서 그는 세상을 제외시키신다(요 17 : 9).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만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하신 자를 아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인류 가운데서 특별한 일부분 곧 그 덕의 성질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에 의해서 구별되는 일부의 사람들을 암시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선택의 창시자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아무도 자기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탁월한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를 "마귀"라고 부르시면서도 자신이 택하신 자라고 하신다(요 6 : 70). 이것은 그의 사도직에 관해서만 하신 말씀이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 것과 같이(예컨대, 갈 1 : 16, 엡 3 : 7), 사도직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거울이지만, 그 자체에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사도직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보다 더 나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이신 사람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요 10 : 28). 그 이유는 그들을 보존하시는 것이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만유보다 크신"(요 10 : 29)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13 그가 다른 곳에서, "아버지여‥‥‥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 : 11-12)라고 하신 말씀은 오용되기는 하지만14 모호한 점은 없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의의 선택으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만드신다. 이 일의 본질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는 은밀한 뜻으로 만족하시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 특히 어거스틴의 주장

 

그러나 암브로시우스와 오리겐과 제롬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은혜를 선용하리라고 예견하신 대로 사람들 사이에 은혜를 나눠주셨다고 생각했다.15 그뿐 아니라, 어거스틴도 오랫동안 이 견해를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잘 알게 된 후에는 이 생각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강경하게 반박했다.16 사실, 그는 철회한 후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오류를 고집하는 것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가 이 궤변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는 아직 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 다음에,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롬 9 : 14)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예견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17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선택 이전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제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예지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여기서 확실히 무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선택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하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요 15 : 16) 말씀하시는 분은, 선한 것을 미리 보셨다는 말씀을 전연 하시지 않는다. 만일 그가 우리를 택하신 것이 우리가 선하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라면, 그는 또한 우리가 그를 택하리란 것과 그 결과도 예견하셨을 것이다."18 교부들의 권위에 의지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어거스틴의 증거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가 다른 교부들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 점으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명쾌한 증명으로 이런 증상의 허위성을 밝힌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긍휼히 여기시는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불경건한 자를 경건하게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불러 주시고자 하는 사람을 부르시며, 원하시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신다."19 만일 내가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한 책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가 한 말 이외에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곧 증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장황한 말로 독자들을 괴롭히고 d皋?않다.

이제 우리는 교부들이 침묵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울은 행위를 고려할 것을 제의함으로써 한 마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 바울은 여전히 곤란한 논의를 계속했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께는 건망증이라는 허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단 명료하게,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출 33 : 19) 하신 말씀이 문체를 결정한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고, 그밖에 아무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여전히 진리이다."20

 

 

 

9. 자유로이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같은 공적이 가능한 한, 선택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공로를 "예지"한 것과 관련이 없는가?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궤변에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로에 대한 예지는 예정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예정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에게도 부를 수 있다. 즉 예정에 대한 특별한 평가에 의해서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공로로 영광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21 주께서는 우리가 선택에 있어서 단지 그의 선하심만을 보기를 원하신다. 그 이상의 무엇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지혜있는 체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도 궤변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토마스의 궤변을 반박할 방법이 있다. 그는 선택된 자들에게 공로를 근거로 어느 정도의 영광이 예정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예정하시고, 그 은혜에 의해서 그들이 영광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우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항의를 제시하여, 은혜를 받기로 예정되는 것은 생명을 받기로 선택되는 것에 종속되는 것 곧 후자에 대한 일종의 시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은혜가 예정된 사람들은 훨씬 전에 영광을 가지기로 결정된 자들이며, 주께서 그 자녀들을 선택에서부터 의롭다 하시는 데까지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은 은혜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의 원인이고,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논쟁은 무익한 것이다. 오래 전에 교회의 어떤 저술가가 "하나님의 선택을 공로에 돌리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22 바르게 말한 적이 있다.

 

 

 

10.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부르시면서 몇 사람만 선택하여 받아들이신다면 자가 당착이 될 것이라고 항의한다. 이와 같이 이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속의 보편성은 특수한 은혜의 구별을 배제한다. 또 어떤 온건한 사람들도 이렇게 말함으로써 진리를 압박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막으며, 여러 사람의 호기심을 억제하려고 한다.23 이것은 대단히 좋은 생각이나, 모호한 회피는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 의도로 시인할 수 없다. 거만하게 선택을 욕하는 자들은 구역질이 날 정도의 궤변이 아니면, 수치스러운 오류를 말하고 있다.24

나는 다른 곳에서, 성경이 이 두 가지 생각 즉, 외적인 전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오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회개와 믿음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두 가지 생각을 조화시킨다는 것을 말했고, 곧 그 일부를 반복하겠다.25 나는 그들의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으므로 그것을 부정한다. 한 도시에는 비가 올 것이나 다른 도시에는 한발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시며(암 4 : 7),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선언하시는 분은(암 8 : 11) 모든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어떤 고정된 법을 만드심으로써 스스로를 구속하시지 않는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을 금하시고(행 16 : 6) 그를 비두니아로부터 마케도냐로 향하게 하신 분은(행 16 : 7),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보화를 분배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그의 구원의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특별히 보내신다는 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보여주신다. 즉 그들만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인류 전체가 차별 없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신다(사 8 : 16). 그러므로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서만-그 개개인을 위해서만-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구원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도 실제로 똑같이 유익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히 이 가르침을 그릇되게 저속화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믿음의 선물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사야는 "주의 팔"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사 53 : 1). 만일 이사야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여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와 사악한 생각으로 복음을 멸시하는 결과가 생긴다고 했다면, 보편적인 소명의 이 측면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사람들에게 팔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가르치는 것은(사 53 : 1) 결코 사람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는 다만, 믿음은 특별한 선물이므로 외면적인 가르침을 듣기만 해서는 무익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 나는 설교만이 또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느냐고 이 교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요한복음 1장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요 1 : 12)할 때, 확실히 여기에서는 뒤섞여진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들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요 1 : 13)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말씀 사이에는 상호 일치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26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씨가 가시덤불 속에나(마 13 : 7) 돌밭에(마 13 : 5) 떨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불복종의 태도를 고집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는 눈과 들을 귀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오지 않을 줄을 아시면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어떻게 모순이 없다고 할 것인가? 어거스틴의 대답을 빌리겠다. "그대는 나와 논쟁을 하려는가? 나와 함께 놀라며 '오, 깊도다!' 하고 감탄하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두려운 마음으로 일치하여, 오류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자."27 그뿐 아니라, 바울이 증거하는 것과 같이, 선택이 믿음의 모체라면, 선택이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일반적이 아니라고 하는 논법을 그들에게 돌려보낸다. 그 이유는, 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서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할 때에(엡 1 : 3-4),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리 택하신 사람을 값없이 비추어 주시는 것임을 알라고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권고한다(딛 1 : 1). 베르나르드가 한 말은 옳다. "그리스도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 : 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라고(마 13 : 11) 말씀하실 때에, 그의 친구들은 각각 이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누군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롬 8 : 29), 또 하나님의 위대한 은밀한 계획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 : 19)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신 일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자기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신 사람들 이외에는 이렇게 위대한 비밀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조금 뒤에 그는 결론을 내린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 : 17). 예정하셨으므로 영원부터요, 하늘의 복을 주시므로 영원까지이다. 전자는 처음이 없으며, 후자는 끝이 없다."28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베르나르드를 증인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주께서 직접하시는 말씀이 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 : 46).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얼굴의 광채에 놀란다는 것이다. 또 참으로, 믿음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면, 믿음을 선택과 연결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 순서는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 : 39-40).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다면, 그의 아들을 그들 위에 두시고 모든 사람을 신앙의 거룩한 유대로 그의 몸에 접붙이셨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담보 곧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사람들을 위해서 보존된 담보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요 10 : 4-5).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양들의 귀를 주께서 뚫으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29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은 이길 자가 없는 하나님의 힘이 보호함으로써 영원히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가르치신다(요 10 : 29). 따라서 불신자들은 그의 양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신다(요 10 : 26).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 가운데(사 8 : 16, 54 : 13 참조), 그들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인용한 증거들은 견인을 의미하므로, 동시에 선택의 변함없는 항구성도 증명한다.

 

 

 

11. 제외되는 것도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기는 일이다

 

이제 버림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려 한다.30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도는 동시에 관심을 보인다.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가 없이 은혜를 받게 된 것과 같이, 에서는 아직 범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롬 9 : 13). 우리가 행위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일을 사도가 보지 못했다는 것같이 되어,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도가 행위를 보지 않았음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선악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에 그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는 문제를 언급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의 의를 가장 화실하고 분명하게 옹호할 수 있을 듯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즉 에서에게는 그의 사악함에 따른 보상을 주신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버림을 받은 자들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움을 받는다고 하는 다른 해결 방법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는 결론을 첨가한다(롬 9 : 18). 바울이 두 가지를 다 하나님의 결정에만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다른 이유를 확정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시는 데 대해서도 그의 뜻 이외에 아무 이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신 대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강퍅하게 만드시기도 한다고 하실 때, 이 말은 하나님의 뜻 이외에서는 다른 원인을 찾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제 23 장

 

이 교리를 항상 거짓되고 부당히 평가해온 그릇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유기는 선택과 하나님 뜻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1-3)

 

1. 선택이 있을 뿐 유기란 없단 말인가?

 

그런데 인간의 오성(五性)은 이런 말들을 들을 때에, 그 교만을 억제할 수 없어, 전투 나팔이나 들은 듯이 함부로 날뛰며 소동을 일으킨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듯이 선택을 용인하면서도 누군가 정죄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무지하고 유치한 짓이다. 버림과 대조되지 않으면 선택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신다고 말하면서, 선택만이 소수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또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정하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외하고자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천사들까지도 찬양하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칠 때에, 그 말씀을 듣고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용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2 자비가 하나님의 손과 뜻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퍅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손과 뜻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롬 9 : 14이하). 또 바울은 내가 말한 사람들과는 달라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거짓 구실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진흙이 토기장이와 언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경고할 뿐이다(롬 9 : 20). 그런데 하나님께 정죄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마 15 : 13)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말씀의 뜻은 분명히,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농장에 거룩한 나무로서 심어주시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은 유기의 표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분명한 일이라도 그들에게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논란을 그치지 않는다면, 건전한 믿음은 바울의 충고로 만족해야 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롬 9 : 22-23) 하나님과 싸울 까닭이 없다고 한다. 독자들은 바울이 모든 수군거리는 중상의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권능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데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우리의 모든 지력을 삼켜버리는 깊은 판단을 우리의 결정에 예속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관대하게 용인하시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까 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라고 무가치한 대답을 한다. 이것은 "멸하기로 준비된"(롬 9 : 22)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신다고 바울이 생각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거스틴은, 권능과 인내가 결합될 때,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으로 주관하신다고3 이 구절을 바르네 설명한다.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첨가한다. 진노의 그릇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되었다"고 하며,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들을 예비하셨다"고(롬 9 : 23)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동시에, 멸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표현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앞에 있는 문구의 가혹한 점을 완화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멸하기로 준비된 일을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이외의 어떤 것에 옳긴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짓이다. 이 점은 바로 앞에 있는 문맥에서도 언급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다고(롬 9 : 17)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하였다(롬 9 : 18).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강퍅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이 된다. 적어도 나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을 지지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리를 양으로 만드실 때에,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극복할 만한 더 강력한 은혜로 그들을 개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자들을 회심시키시지 않는 것은 더욱 강력한 은혜를 나타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4

 

 

 

(첫째 반대론 : 선택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폭군인 셈이다. 2-3)

 

2. 하나님의 뜻이 곧 의의 표준이다

 

경건하고 온건한 사람들과 자기가 사람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발언들만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악독한 개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뿜는 독은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리는 필요한 대로 그 하나 하나에 대답하려 한다.

미련한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들으셔야 하는 듯이 여러 가지로 항의한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서 노하시는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 폭군의 변덕과 같다"고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공과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결정만으로 영원한 죽음에 예정된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만일 이런 생각이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다면, 한 가지 점만 고려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호기심만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한 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또 그러해야 마땅하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어떤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그 먼저 있는 것에 지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합당치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5 대답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없는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까지 발견하지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제지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의 대담한 태도에 대해서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도움도 받음 없이 그의 의로 충분히 자기 변호를 하실 것이다. 즉 그들의 양심에서 모든 궤변과 구실을 빼앗고 그들의 유죄를 선언하시고 정죄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절대적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속적인 개념이므로 우리에게는 당연히 가증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법인 무법한 신을 상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말과 같이, 정욕에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 허물도 없을 뿐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이다.6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또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용된 범위를 넘으려고 할 때에는 시편에 있는 말씀 곧 죽을 인생이 하나님을 판단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자가 되시리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시 51 : 4)

 

 

 

3.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공평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원수들을 억제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태연하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무기로 주신다. 만일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사망의 심판을 받을 일을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어떤 사람들을 사망에 예정하셨느냐"고7 우리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대답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성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시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더럽혀졌으므로 하나님께는 극히 가증할 뿐이다. 이것은 폭군적인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공의의 입장에서 가장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의 상태에 의해서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그들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들을 묶어 영원한 재난에 넘겼다고 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쟁론하게 해 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신다면, 하나님의 이 변호 방법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 전부가 썩은 덩어리에서 생겨났다면,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 자기들의 본성이 자연히 자기들을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싫든 좋든 간에 느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에 예정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항의하는 그들의 심사가 얼마나 패악한가는 그들이 정죄의 원인을 고의로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스스로 정죄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을 정당화해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정죄를 내리시는 당사자라고 내가 백 번 말할지라도-이것은 옳은 말이다-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새겨져 자꾸만 눈에 띄는 죄책을 신속하게 씻어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公义)는 우리의 의문에 귀속하지 않는다. 4-7)

 

4. 하나님의 정의 속에는 역시 하나님의 법령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항의한다. 즉 지금 그들의 정죄의 원인이라고 하는 그 부패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그들이 부패 속에서 멸망할 때에,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타락하여 불행에 빠지고 그 후손들까지 끌어넣은 그 불행의 벌을 치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자신의 피조물들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속이는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8 인류가 지금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또 우리는 결국 항상 하나님의 뜻의 단독 결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9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비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결론은 여기서 직접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 : 20-21).

그들은 그러한 대답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변호되지 않으며 우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궤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대로하시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과는 전연 다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라고 할 때보다 더 강력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어떻게 불의를 용인하실 수 있는가?(창 18 : 25 참조).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일이라면, 하나님은 본성에 따라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를 미워하신다.

따라서 사도는 자기의 주장이 곤란을 당한 것같이 도피하는 구실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표준으로 측량하거나 사람의 약한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것임을 밝힌다. 사도는 하나님의 판단에는 심히 깊은 기초가 있어서(롬 11 : 33), 사람의 마음이 그 깊이를 알려고 하면 완전히 삼켜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떤 법으로 판단하려 하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 일을 비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미한 짓인가를 가르친다. 비록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만,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는 미련한 자들과 범법하는 자들에게 각각 그 삯을 주시느니라"(잠 26 : 10 제네바 성경 참조).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죄인들에게 그의 영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결정에는 그들에 대한 벌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자기에게 있는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극히 약한 척도로 무한자를 측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정신 착란에 빠진 자들이다! 바울은 고결한 지조를 지키는 천사들을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고 부른다(딤전 5 : 21). 만일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천사들의 반역은 그들이 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버리심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안에 숨겨져 있다.

 

 

 

5. 하나님의 감추어진 법령은 샅샅이 파헤쳐 질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경외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 마니(Mani)나 콜레스티우스(Coelestius)의10 제자, 즉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위대하여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므로(롬 9 : 19-23 참조) 섭리에 대한 이유를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일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이 제한되어,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기를 원하는가?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말한다. 주께서는 멸망으로 갈 줄을 분명히 미리 아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고자 하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물을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11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의 논쟁에 끌어내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의로우신 최고 지배를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왜 불의를 문제삼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악한 자들의 입을 막으며, 그들이 감히 떠들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 : 20).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그대들의 무지에 맞도록 조절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일들이 육에 대해서는 감추어졌다고 해서 악하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은 "큰 바다"라는 것을(시 36 : 6) 그대들은 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신 일을 그대들의 좁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대들의 정신 착란에 빠진 탐구욕으로 그 "바다"에 뛰어든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그대들 자신의 멸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대들의 이성이 말한다.

욥기와 예언서들이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지혜와 무서운 권능을 선포하는데, 그대들이 적어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를 억제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일 그대들의 마음이 괴롭거든, 부끄러워 할 것 없이 어거스틴의 충고를 들으라. "사람인 그대는 내게서 대답을 들으려 한다. 나 역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라고(롬 9 : 20) 하시는 이의 말씀을 듣자. 믿는 무지는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 공로를 구하라. 그대는 형벌만을 발견할 것이다. '깊도다!'(롬 11 : 33). 베드로는 모른다고 하며, 도적은 믿는다. '깊도다!' 그대는 이유를 찾는가? 나는 깊음 앞에서 떤다. 그대는 이론을 말하라. 나는 찬탄하겠다. 그대는 변론하라. 나는 믿겠다. 나는 깊음을 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놀라운 일을 발견했기 때문에 쉬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라고 하는데, 그대는 측량하려고 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롬 11 : 33), 그대는 찾아내려고 하는가?"12 더 계속하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급한 그들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이미 성령을 통해서 바울의 입으로 하신 변호 이외에 다른 변호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말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바른 말을 잊어버린다.

 

 

 

6. 둘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그들의 불경건은 또 다른 반대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직접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죄하신 죄인을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한 자들은 지껄인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일들을 왜 사람들에게 죄로서 전가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하나님의 결정에 반대해서 싸울 것인가? 그것은 전연 불가능한 일이므로 해보아도 무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교회의 저술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변호법을 피하려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악은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예지는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변호를 하면 궤변은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계속되어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 예견하신 악을 막고자 하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그의 예정된 계획에 의해서 사람을 지상에서 그렇게 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현재 하고있는 일을 모두 하도록 창조되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하는 일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것이다.1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바로 해결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겠다. 우선, 모든 사람은 솔로몬이 한 말에 찬성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 : 4). 보라, 만사의 처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구원과 사망의 결정도 그의 권한내에 있으므로, 그는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죽기로 결정되어 출생하여서, 그 멸망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도록 정하셨다. 만일 누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섭리에 의해서 그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행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일부를 말하는 것이요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학자들도 간혹 이런 해결책을 사용했으나, 주저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14 스콜라 학자들은 이것을 의지하고서, 이에 대해서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는 듯이 말한다.15 사실, 나도 예지8맛?피조물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는 것이 아님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예지도 사물의 원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왈라(Valla)가 거룩한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 더욱 명쾌하고 현명한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주장은 유익하다고 했다. 그리고 생사는 하나님의 예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16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예견하시기만 하고, 그의 결정에 의해서 배치하시거나 제한하시지는 않는다면, 그의 예견과 인간의 상황의 필연성과의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시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생기도록 자신이 결정하셨기 때문이므로, 그들이 예지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사는 하나님의 결정과 명령으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7.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을 예정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반역으로 멸망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딸씀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결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시 115 : 3) 선포하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 중의 가장 고귀한 존재를 목적이 불확실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사람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공과에 따라서 처리하시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정하신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만일 이런 무익한 조작이 용인된다면, 아무 것도 의지하시지 않고 자신의 비밀한 계획에 따라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싫든 좋든 간에 예정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나타난다. 한 조상의 죄 때문에 모든 후손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저절로 생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인류 전체에 관해서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을 왜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이런 핑계로 그들의 노력을 낭비하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영원한 사망에 예속되었다고 선언한다(롬 5 : 12이하 참조). 이 일은 자연에 돌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려는 이 훌륭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려 있으면서, 높은 지붕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다시,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면, 아담의 타락이 무수한 후손을 어린아이들까지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끌어넣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을 예견하셨으며,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경솔하고 부주의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장차 있을 일을 모르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 심판자를 비난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문제들과 같이 이 문제도 훌륭하게 처리한다. "우리가 바르게 믿으며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건전한 일이다. 즉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 만물을 지극히 선하게 만드신 하나님(창 1 : 31 참조), 또 선에서 악이 생기리란 것을 미리 아셨으나, 악한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도 자신의 전능한 선하심의 일부임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생활을 정하실 때에, 그들의 생활에서 우선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며, 그 다음에 자신의 은혜의 복과 자신의 공의의 결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도록 마련하셨다."18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를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로 하셨다. 8-11)

 

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은 뜻과 허락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의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이지, 그것을 뜻하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19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뜻하시지 않았다면, "허락"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고 아무 것도 뜻하시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의 영장이 어떤 상태에 있으리란 것을 원하고 확정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사물의 필연성이며"20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필연코 발생하는데 이는 그가 예견하신 일들이 참으로 발생하는 것과 같다고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자나 마니교도나 재세례파나 에피큐로스파는(우리의 상대는 이 네 파이다) 자기들과 악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강압을 받는다고 하여 필연성에 항의하지만21 그들은 이 문제에 적용될 만한 논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정이 하나님의 비밀의, 그러나 흠 없는 공의를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이 상태에 예정될 만하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들이 예정에 의해서 당하는 멸망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것에 못지 않게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화제에 오를 때는 그의 공의를 생각해야 한다. 찬양할 만한 것은 모두 반드시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 : 31).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그 악은 어디서 왔는가? 창조에서 왔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앓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 시인하시는 도장을 이미 찍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순결한 천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의 타락에 의해서 모든 후손을 자기와 함께 멸망으로 끌어넣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서 정죄에 대한 명백한 원인을 보아야 하며, 감추어진, 전연 알 수 없는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복종시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그 지혜의 수많은 비밀 앞에 굴복해야 한다.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이며,22 변태적인 지식욕은 일종의 정신 이상이다.

 

 

 

9. 둘째 반대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내가 아직 이 사악한 구실을 침묵시킬 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 것이다. 나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불만을 완전히 막을 만한 증거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미리 말한 것은 모든 반대론의 이유와 구실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를 받을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자기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이 필연성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자기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멸망하도록 예정했다고 그들 자신이 불평하는 그 하나님의 결정에는 그 자체의 공정성이 있어서,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받는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내리는 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이 정죄받은 원인을 찾기 위해서 감추어진 성역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시선을 돌리고, 정죄의 진정한 원천인 자기들의 부패한 본성은 못 본 체하는 것은 패악한 행동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막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사람은 현재 당하고 있는 재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재난이 생기는 근인(根因)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창조하신 상태에서 부패하고 불순하고 패악한 상태로 타락했다는 것이 그가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10. 셋째 반대론 :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하나님의 예정을 반대하는 자들은 셋째 어리석은 이론으로 예정을 중상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의 상속자로서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멸망에서 면제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고 우리가 주장하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인데 성경은 각처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느냐고 항의한다. 그들은 또 성경에 모순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에는 공로에 대한 고려가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내린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뜻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람" (person)이란 말은 사람(m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 보통 호감, 품위, 권위 등의 인상을 주거나, 또는 미움, 경멸, 치욕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은 예컨대 재산, 권위, 가문, 지위, 조국, 육체적인 미(美) 등등이며(신 10 : 17 참조), 또 빈곤, 곤궁, 비열, 사악, 치욕 등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아니하신다고 가르친다(행 10 : 34, 롬 2 : 11, 갈 2 : 6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을 구별하시지 않으며(갈 3 : 28),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편을 받아들이고 다른 편을 물리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3 야고보도 하나님의 판단에는 재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을 선언할 때에(약 2 : 5), 같은 말을 사용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에 있어서 자유인이나 노예를 차별하시지 않는다고 한다(골 3 : 25, 엡 6 :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로를 전연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어떤 사람들은 자녀로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며 정죄하신다고 우리가 말할 때에, 아무도 이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욱 만족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로가 다르지 않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하는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아무 것도 없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또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고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대하시는 이유를 자신의 선하심에서 찾으신다고 추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한 사람만을 고려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자유로 나타나는 것이다.24 다른 구절에서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 : 26)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사람의 외모에 매이지 않는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같은 태도로 예정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편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사악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보시면 모든 사람을 꼭같이 벌하실 것이며, 결백하다고 보시면 그 엄격한 심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철회하셔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고자 할 때에 그의 심판을 일체 포기하셔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죄책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몇 사람을 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벌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 옳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이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베푸시는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이거나, 베푸시는 것을 용인하더라도, 적어도 심판을 전적으로 포기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가장 합당하다. "첫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정죄를 받았으므로‥‥‥그 중에서 귀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그 자신의 의의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다. 그러나 다른 그릇이 천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은(롬 9 : 21 참조) 이유를 탐구할 문제가 아니고 심판에 돌릴 문제이다."25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벌을 주시지만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받을 이유가 없는 은혜를 분배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비난도 받으실 이유가 없다. 마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빚을 탕감해주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빚을 받아낼 권리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비하시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으며, 공정한 심판자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지는 않는다.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주심으로써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실 수 있다‥‥‥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이 무엇임을 나타내실 수 있다."26 바울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 : 32, 갈 3 : 22)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말을 첨가하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다(롬 11 : 35).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12-14)

 

12. 넷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곧은 생활에 대한 열정이 모두 피괴되어 버린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예정론을 뒤엎기 위하여 만일 그것이 옳다면 선행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전적으로 파멸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 생사(生死)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명령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들을 때에, 누가 하나님의 예정은 자기의 노력으로 막을 수도 없고 진전시킬 수도 없으므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포 자기에 빠지며 정욕에 끌리는 대로 무모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다.27 분명히 그들이 전연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추악한 모독적인 언사로 예정설을 더럽히는 돼지들이 많으며, 그들은 이런 구실로 모든 충고나 책망을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일단 결정한 처리 방법을 알고 계신다. 구원으로 결정하셨다면 적당한 때에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실 것이요, 사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반대해서 싸운들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28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위대한 신비를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신자에게는 훨씬 다른 태도를 가르치며, 이런 사람들의 범죄적인 미친 태도를 효과적으로 반박한다.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불경건하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찾아 덤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교만을 꺾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표로 삼는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이 돼지들이 꿀꿀거리는 데 대해서는 바울이 적당하게 침묵하게 만든다.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죄악 생활을 계속하노라고 말한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 사이에 들어 있다면, 죄가 그들의 궁극적 구원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엡 1 : 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이런 신성 모독적 언행을 일소하라. 그것은 선택의 질서 전체를 뒤엎는 악한 행위이다.29

그러나 그들은 더욱 모독 행위를 확대함으로써 하나님께 정죄받은 자가 결백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여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더라도(딤후 2 : 15),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전연 파렴치한 거짓말이다. 이런 노력이 선택 이외에 어디서 올 것인가? 버림을 받은 자들은 천하게 쓰도록 만든 그릇이므로(롬 9 : 21 참조), 아무리 심판에 대해서 무익한 저항을 계속하더라도, 그 끊임없는 범죄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며 분명한 표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그들 위에 선언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마지않는다.

 

 

 

13. 다섯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정론이 마치 경건한 생활에 대한 모든 충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악의에 찬 파렴치한 훼방을 한다.30 이 문제 때문에 혹자가 어거스틴을 크게 악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망과 은총에 관하여 발렌티누스에게 보냄(Rebuke and Grace, to Valentinus)이라는 글을 써서 그 악의를 일소하였다.31 경건하고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정칙하고 양순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몇 가지 점을 간단히 말하겠다. 바울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을 분명한 말로 공공연하게 선포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보았다.32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경고와 훈계를 하는 데 대해서 냉담하였는가? 선량한 열성가들에게 그들과 바울의 열의를 비교해 보게 하라. 바울의 강렬한 열의에 비하면 그들은 얼마나 냉담한가를 깨달을 것이다. 사도는 모든 의심을 제거하는 원칙을 말하였다.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살전 4 : 7),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 4 : 4),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요컨대, 바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긴 설명이 없더라도, 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들을 사도가 잘 조화시켰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요 6 : 65) 말씀은 거짓도 아니며, 그의 명령에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계속하여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믿음 안에서 보존하여 끊임없는 유익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예정에 대해 인식함을 막지 말라. 그래야만 복종하는 자들도 자기의 힘으로 되는 일같이 자랑하지 않고 주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마 13 : 9) 하신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권고하며 전도할 때에, 그들은 기꺼이 순종하지만,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응한다(사 6 : 9).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러나 왜 이 사람들은 귀가 있고 저 사람들은 없는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롬 11 : 34). 감추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명백한 것을 부정할 것인가?" 나는 어거스틴의 말을 충실히 옮겼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보다 그의 말에 더 강력한 권위가 있을 것이므로, 그의 글을 인용하기로 하자. "만일 이 말을 듣고 무감각하고 태만하게 되어, 종래의 노력을 버리고 마음대로 정욕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서 한 말을 거짓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해질 것을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빠져 있는 악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그들은 착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하리라고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지금은 아무리 선한 점이 보일지라도 악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러면, 예컨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다른 오류들을 범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말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류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유와 진실을 말할 필요성은 문제가 서로 다르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이유를 모두 찾아내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이해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더하기 위해서 우리가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악하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이와 같은 사람들의 지식이 증가되는 것도 아니요, 더욱 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우리가 말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더 악해지고. 우리가 침묵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더 악해진다면, 그런 진리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얻도록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쪽도 진리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력이 더 있는 사람은 손해까지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될 수 있다‥‥‥또 우리는 성경의 증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말함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넘어지게 말까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허위에 빠지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끝으로 그는 이 생각을 압축해서 더 명쾌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교회의 교사들이 두 가지를 다 했다면-즉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루며, 동시에 신자들을 경건한 생활 훈련 하에 붙들어 놓았다면-왜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진리의 구속력을 느끼면서도 '예정에 대한 말은 옳다고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선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옳게 생각하는가? 확실히 이 말씀은 선포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게' 해야 한다(막 4 : 9, 마 11 : 15, 눅 8 : 8). 그러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서 받지 않으면 누가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할 것인가? 받지 않는 사람은 거부할는지 모르나, 받는 사람은 받아서 마시고, 마시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도록 경건을 선포해야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이런 예정을 선포해야 한다."33

 

 

 

14.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저 거룩한 분은 덕을 세우려는 비상한 열의로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을 조절하여, 가능한 한 실족하게 하는 일을 현명하게 피하였다. 그는 진리를 말하더라도, 동시에 적당한 표현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회상시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멸망하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태만한 마음을 조장할 뿐 아니라, 악한 의도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일 미래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미 정죄되었으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가르치는 말이라기보다 저주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런 사람들은 미련한 선생이거나 악하고 불길한 예언자이므로 교회에서 물러나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34 그는 다른 곳에서, 책망을 하지 않고서도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며 도움을 주실 때, 사람은 책망에서 유익을 얻는 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왜 사람에 따라 방법이 다른가? 결정권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에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후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망을 들음으로써 의로운 길에 들어오거나 돌아올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구원을 실현하는 분은, 누가 심고 누가 물을 주든 간에, 오직 자라게 하시는 그 분이(고전 3 : 6-8) 아닌가?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 의지가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는 그 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 곧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데서 다 행하시는 이'(시 135 : 6), 장차 있을 것들도 만드신 이(사 45 : 11)의 뜻에 사람의 뜻이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지를 이용해서 그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실 때에, "그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 역사 하신다. 즉 내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붙잡으시며 움직이시며 그들에게 내적으로 역사 하셔서 그들 자신의 뜻으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러나 그 직후에 첨가하는 말을 빠뜨릴 수 없다. "우리는 누가 예정된 수효에 포함되며 누가 포함되지 않는지를 모르므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마다 우리의 평화에 참가하5돈?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평안은 평안의 자손들 위에 머물 것이다 (눅10 : 6, 마10 : 13 참조). 따라서 우리의 입장으로서는‥‥‥건전하고 엄격한 책망을 의약품처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 그들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예지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책망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35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확실히 된다 : 더우기 사악한 자들은 그들에게 운명지워진 공정한 파멸을 스스로에게 초래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

 

1.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과. 악한 자들의 눈이 어두워지며 마음이 굳어지는 데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약속의 보편성이 모든 인류를 동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반박할 때 이미 다소 말한 바가 있다.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자신 안에 감추어 두시지만, 부르심으로 그 선택을 나타내실 때에는 무차별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 : 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 8 : 30). 이것은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한다.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성령을 바울은 "양자의 영"(롬 8 : 15)이라고도 하고, "인치심"과 "미래의 기업에 보증"이라고도 한다(엡 1 : 13-14, 고후 1 : 22, 5 : 5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장차 양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인치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이런 뜻으로 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을 우리는 이미 인용했다.2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 : 45).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 : 6). 다른 곳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신다(요 6 : 44). 어거스틴은 현명하게 이 구절을 설명했다. "진리(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것이(요 6 : 45) 사실이라면, 오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올 수 있는 사람도 오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대로 행하지 않는 한 그가 실제로 오리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은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실제로 온다. 그리고 이 결과에 이미 가능성의 유익과 의지의 움직임과 행동의 결과가 나타나 있다."3 다른 곳에서는 더욱 분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말씀은(요 6 : 45),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고서 내게 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온다면 오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지 않았다. 만일 듣고 배웠다면 왔을 것이다‥‥‥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들에게로 오도록 가르치신다는 이 가르침은 육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조금 뒤에, "그러므로 이 은혜는 사람의 마음 위에 비밀히 베푸시는 것인데, 강퍅한 마음은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우선 마음의 강퍅함을 제거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서 들을 때‥‥‥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마음을 없애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 11 : 19, 36 : 26)‥‥‥이와 같이 그들을 약속의 자녀의 그릇으로 만드시며,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신다(13장).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가르치시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람은 모두 긍휼로 가르치시고, 가르치시지 않는 사람은 심판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이 아닌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기' 때문이다"(롬 9 : 18, 14장)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사람들을 자녀라고 부르시며,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심으로써 가족 안에 받아들이시고 자신과 연합하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경은, 부르심과 선택이 연결될 때, 이 일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 이외의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충분히 보여준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긍휼만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 : 16).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원하고 달음박질하는 것 사이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통 이해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의 소원과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돌보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의 도움을 받으면, 구원을 얻는 일에서 그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그들의 이 너절한 반대에 대해서 나는 어거스틴의 말로 반박하겠다. "만일 사도가 말하는 것이, 주께서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면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말을 돌려서,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이 없으면 긍휼만으로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불경건한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는 모든 것을 주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돌리고, 우리의 소원과 노력에는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5 이 거룩한 분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들이 여기서 제기하는 궤변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노력과 원하는 것이 없다면,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일부를 사람의 노력에 돌리는 것을 보고, 그들의 오류를 이 문장의 전반부에서 비난하고, 후반부에서 구원의 전체를 하나님의 긍휼에 돌린다. 또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부르심만을 끊임없이 선포하지 않는가?

 

 

 

2. 부르시는 방법은 오로지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그뿐 아니라, 부르심의 성격과 적용까지도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한 조명이다. 우리는 예언서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 : 1).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자비가 이방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때에 그를 어떤 곳에서 취하셨는가를 회상시키신다. 즉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고 하신다(수 24 : 2-3 참조).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그의 인애가 거저 주시는 것임을 충분히 또 분명히 보여주신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증거를 배척하기 때문에 더욱 엄중한 심판이 그들 위에 내려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는 그의 영의 효과적인 역사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소명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 여기 요한의 말이 해당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 : 24, 4 : 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값없이 자신을 내어 주셨을 때에, 육은 적어도 응답했노라고 하여 그 일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육에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다고 밝히신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각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점에 대한 현저한 실례를 누가의 보고에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들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말씀으로 교훈을 받은 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다(행 13 : 48). 부르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만이 주관하고 있는데 부르심이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정한다면,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3.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 주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선택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의 협력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위를 점한다. 이는 우리가 받는 것은 믿는 능력뿐이고, 믿음 자체는 아니라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은 생각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6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까지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떤 이유로 선택을 믿음에 의존시킨다. 마치 믿음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선택은 의심스럽고 효력이 없게 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관계된 범위 내에서는 선택이 확인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 감추어져 있다가 밝히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이 말의 뜻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 확인된다는 것-이를테면, 지금 인침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라야 선택이 효과를 나타내며, 여기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물론 복음에서 확신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까지 파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 깊은 바다가 우리를 삼켜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을 우리에게 밝히 보이실 때, 우리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며 결과가 원인을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대로 우리는 비추임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데, 이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시어 선택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이상 어리석고 부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동시에 우리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믿고 간구하리만큼 우리의 신뢰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강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까우며 우리 입과 마음에 있는(신 30 : 4)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름 위를 떠돌아다니려는 잘못된 갈망을 품었다. 그러므로 이런 경솔한 태도를 침착한 믿음으로 억제하며,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말씀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감추인 은혜를 충분히 증거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만 우리에게 풍부하게 물을 배급하여 마시게 하는 그 수도관이 우리가 그 원천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한다.

 

 

 

4.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올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선택이 우리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믿음, 즉 복음에 대한 믿음에 선택의 힘을 의존시키는 것은 잘못이므로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에 가장 좋은 순서를 따르려면 선택을 확실히 증명하는 표징들 즉 부수적인 표징들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내가 "그릇된 곳에서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내부로 침입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고의 영원에까지 침투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기에게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밑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져 그것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그는 풀려날 수 없는 무수한 올무에 걸리며, 볼 수 없는 암흑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고 할 때에, 어리석은 그의 이해력이 무서운 파멸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 이 유혹은 우리의 거의 전부가 다른 어느 유혹보다도 가장 많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치명적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선택되었다는 어떤 계시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 번 이런 생각을 마음에 가지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견딜 수 없는 고민으로 불행에 빠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다. 이런 경험은7 이런 사람들이 예정에 대해서 얼마나 비루한 공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양심을 점령하여 동요를 일으키며, 하나님과의 평화와 평온을 잃게 만드는 오류가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선을 면하려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바위를 피해야 한다. 여기 부딪치고서 멸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예정에 대한 논의를 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의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는 뱃길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상쾌하다고도 하겠다.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심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의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출발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매일 받는 은혜가 저 은밀한 선택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한 것과 같다(사 25 : 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일종의 증거품같이 쓰셔서, 우리가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그의 계획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알도록 우리에게 확인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증거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가를 생각해보아야겠다. 베르나르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말을 했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말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결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의 평화의 목적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위에 여전히 있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그들의 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선행을 갚아준다. 그래서 주의 자비의 놀라운 방법으로 선한 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까지도 서로 협력하여 선한 결과를 나타낸다‥‥‥‥'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 : 33). 나의 의를 위해서는 하나님만 내 편에 계시면 충분하다. 나는 그에게만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가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신 모든 일은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 뒤에, "오, 진정한 안식처로다! '거할 곳'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도다. 오, 하나님을 뵙는 곳, 성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나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자하고 다정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감화를 체험하는 곳이로다! 이 환상은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준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도리어 진정시킨다. 우리의 감각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안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느낀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화로운 것을 제공하신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8 라고 말한다.

 

 

 

5.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자비하심과 인자하신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오직 그리스도 위에 머무신다(마 3 : 17 참조).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천국의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국의 상속자이시다. 그런데 선택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택의 목적을 아무리 이모저모로 생각해보아도, 결국은 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엡 1 : 4).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실 수 없었다면, 따라서 그들을 미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들로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의 나라를 상속하는 영예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 기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영원 전부터 정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려고 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계 21 : 27 참조)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고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의 확실한 친교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즉,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복음 선포를 통해서 증거하셨다(롬 8 : 32). 우리는 그로 옷 입으며(롬 13 : 14), 그에게까지 이르러(엡 4 : 15), 그가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살 게 하려 하신다고 한다.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롬 8 : 32, 요 3 : 15 참조)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셨다는(요 3 : 16) 것이다. "이를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한다(요 5 : 24).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며(요 6 : 35), 이 떡을 먹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다(요 6 : 51,58). 다시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인정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인정되는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초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면, 그의 안에서 이미 얻은 것, 그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의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미친 짓인가?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이며, 불변의 진리이며, 견고한 계획이시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구하는 아버지의 뜻과 조금이라도 다를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의 처음부터 영원까지를 우리에게 충실히 계시해 주신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이 생각을 항상 가져야한다. 선택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를 촉진시키지만,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선택하셨으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조건을 붙여 흥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족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지를 다른 데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기록된 바른 생각을 바르게 이용할 줄을 안다면, 이 지혜는 우리를 여러 가지 함정에서 구해낼 것이다. 일정한 한도 내에 두어야 할 일을 이리저리 끌어내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인내는 안전하다 :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함. 6-11)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하고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

 

우리의 선택의 확고성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확신을 든든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아는 지식으로 비춰주시고 교회의 품에 안겨 주신 사람들을, 또한 그가 돌보시며 보호하신다고 한다. 그가 받아 주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셨고, 영생을 얻도록 보호하게 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을 그의 보호 하에 두셨다고 선언하신다(요 6 : 37,39, 17 : 6,1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맡기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 위에 세우신 유일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보호 하에 받아들이셨는지를 아직도 의심한다면, 이 의심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기꺼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며,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의 양떼에 넣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요 10 : 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우리를 맞이하러 오신다. 그는 우리를 그의 양떼에 넣으시고 그의 우리 안에 두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 몰래 숨어든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다고 가르치며(롬 8 : 30) 그리스도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시기 때문이다(마 22 : 14). 참으로 바울은 과도한 자신을 가지지 말라고 권고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 : 12). 또한 그대는 하나님의 백성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 : 20)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찍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 11 : 21-23 참조)고 한다. 끝으로 견인9을 첨가하지 않으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또 견인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런 불안에서 해방시키셨다. 확실히 미래에 적용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 : 37).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 : 39). 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 : 27-29).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마 15 : 13)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을 역으로 암시하신다. 요한의 말은 이 뜻과 부합한다.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 : 19). 그리고 바울이 생명과 죽음, 현재와 미래의 일을 이겼노라고 당당하게 발언을 하는 이유도(롬 8 : 38)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의 자랑은 견인의 은사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확실히 이 생각을 모든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한다. 다른 곳에서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 : 6). 다윗도 믿음이 약해진 때 이와 같은 도우심을 의지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 :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는 것은(눅 22 : 32)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일을 보아서 우리는 그들의 경건이 변함없기를 기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부를 당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일에서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셨는가? 우리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반전하리란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 아닌가?

 

 

 

7.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다시 떨어져 멸망으로 급행하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은 하나도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멸망의 자식"만은 제외하셨다(요 17 : 12).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매달린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진심으로 신뢰해야만 우리는 선택을 굳게 확신할 수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라고(요일 2 : 19) 요한은 말한다. 선택된 자들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표징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신자들에게 복음의 말씀에서 구하라고 권고하는 것과 같은 선택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다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가 있다고 해서 주의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요 3 : 16, 6 : 39 참조). 우리는 조금 뒤에 유다에 대해서 말하겠다.10

바울은(고전 10 : 12 참조) 신자들의 단순한 확신을 금하지 않고, 순전히 우둔하고 육적인 자신을 금한다. 이런 자신은 거만과 자만과 타인에 대한 멸시를 낳으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없애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가르칠 때, 유대인들이 제외되고 그 대신에 자기들이 용납되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무정하고, 교만한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한다(롬 11 : 18이하 참조). 그는 또 두려움을 품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겁을 내며 마음을 흔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11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으려고 준비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감이 결코 약화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파벌들을 상대로 말한다. 교회가 두 파로 갈려서 경쟁과 분열이 생겼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특별하고 거룩한 백성의 자리에 놓였으니, 두려움과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고 경고한다. 그들 중에는 교만해진 사람이 많았고, 그들의 그러한 자만은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12 우리의 희망이 미래에 곧 죽음의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았으며, 우리의 장래를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의 성격과 가장 반대되는 생각이란 것을 알았다.

 

 

 

8. 일반적인 소명과 특별한 소명(마 22 : 2이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신(마 22 : 14)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매우 큰 오해가 있다. 위에서 분명히 말한 점을 굳게 지킨다면, 이 말씀에는 모호한 데가 없을 것이다. 즉,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인 소명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복음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서(고후 2 : 16 참조), 또 더욱 엄격한 정죄의 기회로서 제시하시는 사람들도 부르신다. 다른 종류의 소명은 개별적인 것이며, 대개는 신자들에게만 주신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을 비추시어, 선포하신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머물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신자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비추어 그도 참여하게 하시지만, 후에 그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시며 더 심한 맹목으로 벌하시는 일도 있다.

그런데 주께서는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소수 사람들에게만 바르게 존중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을 어떤 임금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왕은 장중한 연회를 베풀고자 사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여 많은 사람을 초청하나, 수락하는 사람이 심히 적다. 각각 일이 있어서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거절하기 때문에 왕은 할 수 없이 네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부르기로 한다(마 22 : 2-9). 여기까지는 이 비유를 외면적인 소명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주께서는 후에 첨부해서, 하나님을 좋은 주인으로 비유하신다. 주인은 이 식탁 저 식탁으로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한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면, 합당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 부정한 옷으로 연회의 기쁨을 모욕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는다(마 22 : 11-13). 나는 이 말씀이, 믿노라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왔으나 그리스도의 성결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이런 치욕을, 이런 암적 존재를13 언제까지나 참으시지 않고, 비열한 그들에게 합당한 처분을 내려 그들을 쫓아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었다(마 20 : 16 참조). 그러나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할 소명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소명은 악인들에게도 공통된 것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소명은 중생의 영이 동반한다(딛 3 : 5 참조). 중생의 영은 장차 있을 기업의 보증이며 확인하는 인인데(엡 1 : 13-14), 그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 이 인을 우리의 마음속에 거두신다(고후 1 : 22). 요약하면, 위선자들이 진정한 경배자들과 같이 경건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내실 것이다(마 22 : 13). 이것은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시 15 : 1).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 24 : 4, 15 : 2이하 참조).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 : 6) 이와 같이 성령은 신자들에게 참으라고 역설하신다. 또한 이스마엘 자손이 교회 안에 섞여 있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사람들은 결국 가면을 벗고 수치스럽게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9. 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는 바로 위에서14 언급한 예외 즉,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라고(요 17 : 1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예외에도 해당한다.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으나 모호한 것은 아니다. 유다가 그리스도의 한 양으로서 뽑혔던 것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에서 다른 곳에서 그가 사도들과 함께 선택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직무에 관련된 말씀이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신다(요 6 : 70). 바꿔 말하면, 그를 사도직에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선택을 말씀하실 때에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그를 멀리 버리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 13 : 18). 만일 누가 이 두 구절에 있는 "택한다"는 말을 혼동한다면, 그는 심한 곤란에 빠질 것이나, 그 차이에 주의한다면 사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알뿐이고, 선택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고 한 것은 위험한 오류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워하며 떨라고 권고하며, 그 이유로서는 우리는 오늘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지만, 앞으로 무엇이 되겠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15 그러나 이런 말은 그가 이 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 준다. 그는 선택을 행위의 공로에 의존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심할 이유를 충분히 제공하고, 그들의 마음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로 전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자들은 우리가 처음에 한 말의 뜻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바르게 이해하면 예정은 믿음을 조금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끔 우리의 이해 수준에 맞도록 말씀을 조절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겔 13 : 9).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속한다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생명책에 기록하기 시작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에 의해서(눅 10 : 20)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빌 4 : 3). 그러나 에스겔서의 말씀은 선택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같이 보이던 자들이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표시할 뿐이다. 시편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시 69 : 28, 계 3 : 5 참조)라는 말씀과 같다.

 

 

 

10. 부름받기 전에 선택된다. 따라서 선택의 씨앗은 없다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양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출생 직후도 아니며, 모두 동시에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데 따라서 되는 일이다. 그들이 저 최고의 목자에게로 모아지기 전에는 모두 다같이 황야를 헤맨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궁극적인 죽음의 멸망으로 돌입하는 것을 특별한 자비로 막아 주시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도 아담의 후손이요, 인류에 공통된 부패한 냄새를 피운다. 그들이 순전한 불경건으로, 심지어 절망적인 불경건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돌보시며 손을 그들에게 뻗쳐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날 때부터 일종의 선택의 씨가16 심어져 있어서 그 힘으로 그들은 항상 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으며, 우리의 경험17 자체로도 부정한다. 그들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선택된 사람들은 비추임을 받기 전에도 경건 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흠 없는 생활을 하였고(빌 3 : 5-6) 고넬료는18 구제와 기도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사람이었다고 한다(행 10 : 2). 바울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만 고넬료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바이다. 그는 그 때에 이미 성령의 조명을 받아 중생했고, 다만 복음의 분명한 계시만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수의 예에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인가?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경건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소크라테스(Socrates),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스키피오(Scipio), 쿠리우스(Curius), 카밀루스(Camillus) 등의19 고귀한 생활을 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우상 숭배의 암흑 속에 버림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거룩함과 순결함을 성의껏 추구했다고 추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는 그들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곳이 한 둘 뿐이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중생 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씨는 한 알도 보이지 않는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 : 1-3). "그 때에 너희는……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 : 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 : 8-9).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이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런 무지 속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는 거짓말이나(엡 4 : 25) 도적질을(엡 4 : 28)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말은 파렴치한 무고죄가 될 것이다. 또 그들은 다른 구절들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고린도서에는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고전 6 : 9-10) 말한 후에 즉시 이어, 그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죄를 짓던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고 그의 영에 의하여 해방을 얻었다고 첨가한다(고전 9 : 11). 마찬가지로 로마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롬 6 : 19).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롬 6 : 21).

 

 

 

11.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신 것이다

 

그러면, 악에 철저하고자 하는 듯이 가장 추악하고 가증한 죄 속에서 뒹굴면서 평생을 여러 가지 더러운 생활을 하던 사람에게서 어떤 선택의 씨가 싹텄다는 말인가? 만일 바울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할 생각이었다면(고전 6 : 9-11 참조), 그들을 이런 추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얼마나 컸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베드로도 그의 추종자들이 선택의 영원한 씨에 대해 감사하도록 권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의 정욕을 따른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경고한다(벧전 4 : 3). 실례들을 든다면, 기생 라합에게는(수 2 : 1) 믿기 전에 어떤 의의 씨가 있었는가? 예언자들의 피로 온 예루살렘이 거의 적셔졌을 때의 므낫세(왕하 21 : 16), 죽는 최후 순간에 회개를 생각한 도적(눅 23 : 42)-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씨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이 성경에 없는 일을 꿈꾼 이런 주장을 버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 : 6), 즉 멸망으로 갔다. 이 멸망의 구렁에서 구출하기로 결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는 적당한 때까지 연기하시며, 그 동안은 다만 그들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죄는 저지르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들을 처리하시는 방법. 12-17)

 

12. 타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심으로써 영원한 계획으로 그들에게 예정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과 같이, 타락한 자들에 대한 계획도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시행하신다. 그러면 현세에서 치욕을 받으며 사후에는 멸망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 그의 진노의 도구가 되며 준엄성의 실례가 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예정대로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흑은 말씀을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며, 혹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키신다.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는 예는 무수하므로 그 중에서 가장 명백하고 현저한 것을 하나만 택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약 4천년이 경과하였고, 그 동안에 그 분께서는 구원의 교리의 빛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숨기셨다. 그들을 무가치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은혜를 나눠주시지 않았더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후손들 또한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말라기가 유력한 증인이 된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과 심한 모독적인 행위를 폭로하면서 구속자가 오리라고 선언한다(말 4 : 1이하). 그러면 왜 구속자를 전자에게는 주시지 않고 후자에게만 주셨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넘어 더 깊은 원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고통만 당할 것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지 않으면, 포피리(Porphyry)의 어떤 제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태연하게 헐뜯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20 아무도 부당하게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이 멸망으로부터 벗어 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인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궤변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 심판자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시고 그의 빛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을 어두운 상태에 버려두심으로써 그의 예정을 이루어 나가신다. 눈이 먼 예는 매일 볼 수 있고, 성경에도 증거가 많다. 같은 설교를 백 명이 들을 때, 20명은 곧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 설교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거나 비웃거나 싫어한다.21 이런 차이는 그들의 악의와 타락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본성은 다른 자들과 똑같은 악의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고 묻는(고전 4 : 7) 바울의 질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심중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의 말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은 그들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13.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고 다른 사람들은 버리시는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가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행 13 : 48).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롬 9 : 21-22) 이유 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거스틴과 같이 다음의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악인들의 뜻을 선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그의 뜻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왜 다른 데 있는지는 그만이 아신다."22 즉 우리는 분에 넘치는 지혜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크리소스톰과 같이, 원하는 사람, 손을 뻗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끌어당기신다고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적절하다.23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판단에 있지 않고, 온전히 사람의 결정에 있는 것같이 될 것이다. 사실, 사람의 마음 자체에는 그런 충동이 없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도 성령의 자극이 필요하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부인이었으나, 바울의 말을 듣고 유익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필요가 있었다(행 16 : 14). 이것은 한 여인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경건의 길에서 전진하려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주는 왜 바로에게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시는가? 사자를 자주 보내심으로써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을 보내시기 전에 결과를 아셨고 또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돌아가라"(출 4 : 19),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 : 21).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셨을 때에도, 완고하고 배반하는 백성에게 보내신다고(겔 2 : 3) 미리 경고하셔서, 그가 귀가 먹은 자들을 상대로 노래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셨다(겔 12 : 2).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그가 전하는 말이 불같이 되어 백성을 나무같이 멸망시키며 흩어버리리라고 하신다(렘 1 : 10, 5 : 14 참조). 이사야의 예언은 이 점을 더욱 철저하게 주장한다. 그를 보내시면서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 : 9-10, 마 13 : 14-15, 막 4 : 12, 눅 8 : 10, 요 12 : 40, 행 28 : 26-27, 롬 11 : 8 참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되 그들의 귀를 더욱 막히게 하시려는 것이며, 빛을 비추시되 그들의 눈을 더욱 멀게 하시려는 것이며, 진리를 가르치시되 그들을 더욱 우둔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약을 쓰시되 그들을 낫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예언을 적용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능히 믿지 못한 것은(요 12 : 39) 하나님의 이 저주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고자 하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씀을 수수께끼에 싸서 보내심으로써 그들이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고 더 심한 우둔에 빠지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신 비유를 사도들에게만 해석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실 때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신다(마 13 : 11). 알아듣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의 허물인지를 생각하고, 더 묻지 말라. 말씀에는 모호한 점이 많을지라도, 악인의 양심을 정죄할 만한 빛은 언제든지 충분히 있다.

 

 

 

14.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아야겠다. 사람들의 불경건과 사악과 배반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24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 즉, 왜 어떤 사람들은 굴복하여 순종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강퍅한가의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모세에게서(출 9 : 16) 주목한 점까지 전진해야 한다. 즉, 주께서 처음부터 모세를 세우신 것은 주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시려는 것이었다(롬 9 : 17). 버림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악의와 사악한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첨부해야 할 조건이 있다. 즉, 그들이 그 패악한 상태에 넘겨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정당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이 그들을 세워, 그들의 정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엘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일한 훈계를 무시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었다고 할 때에(삼상 2 : 25), 그 구절은 그들 자신이 사악해서 그런 완악한 태도가 생겼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을 그 완악한 상태에 버려 두신 이유도 언급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그의 확고 부동한 결정이 그들을 멸망에 예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도 이와 같이 같은 뜻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하였더라"(요 12 : 37-38, 사 53 : 1). 요한은 완악한 자들을 책망 받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성령께서 그 맛을 보게 하시기까지는 그 맛을 모른다는 이유로 만족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이사야의 말을(요 6 : 45, 사 54 : 13) 인용하시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교회와 멀어진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확인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 : 23-24 참조)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을 노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배척을 당한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고전 1 : 22-24 참조). 그는 조금 전에(고전 1 : 21) 이런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고 불렀지만, 믿음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당연히 차지할 자리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정하는 의미로 두 번째 발언을 첨부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돌리도록 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조금 뒤에 그들을 "하나님께서‥‥‥택하사"라고 가르친다(고전 1 : 27-28).

불경건한 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서, 하나님은 그 무절제한 권능으로 가련한 피조물들을 학대함으로써 잔인한 쾌락을 누린다고 불평한다.25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일 천 가지 죄상에 대해서 한 가지도 만족한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악인들이 당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극히 의로운 판단에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지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15.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성경 구절 : ⒜ 에스겔 33 : 11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반대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 구절에서는 악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반대의 소리를 높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부정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그것이 우리가 위에서 표명한 견해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에스겔서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한 말을(겔 33 : 11), 그들은 인용한다.26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류 전체에 적용하기를 기뻐하신다면, 복종할 가능성이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고무하시지 않고, 매일 불러도 마음이 점점 완악해지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것과 같이, 복음 선포와 기적은 유대에서보다(마 11 : 23) 니느웨와(마 12 : 41 참조) 소돔 사람들 사이에서(마 11 : 23) 더 많은 효과를 나타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를 원하신다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예언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대립시킨다면, 그것은 이 구절에 대한 극심한 곡해가 될 것이다.27 예언자의 진정한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용서의 소망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죄인이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예언자가 전하는 소망의 요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원하시는 동안은 그가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자들의 회개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경험은 가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속임수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외면직인 부르심은 그것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의 모든 핑계를 빼앗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베푸시는 은혜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죄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목적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보증하려는 것이며, 악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과 친절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이중으로 커진다는 느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든지 회개하는 자를 맞이하신다. 그러나 에스겔을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친다.

 

 

 

16. ⒝ 디모데전서 2 : 3-4, 기타 유사한 구절들

 

둘째로 그들은 바울의 글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다(딤전 2 : 3-4).28 이 구절은 위에서 말한 이유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나의 대답은, 첫째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일을 원하시는가는 문맥상으로 보아 분명하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한다. 만일 반대자들이, 이 일은 그들이 구원의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확정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다음의 모세의 말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 : 7).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들에게는 복음의 빛을 주시고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서는 빼앗으신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경건의 교훈을 겨우 그 희미한 초보라도 맛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순수한 인식에도 결코 이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점을 보아서, 바울이 추론하는 뜻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조금 전에 디모데에게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에서 엄숙한 기도를 드리라고 명령하였다(딤전 2 : 1-2). 그러나 거의 소망이 없는 종류의 인간들을, 즉 그리스도의 몸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파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다소간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 : 3-4). 바울의 이 말은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층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길을 막으시지 않고, 자비를 베푸셔서 아무도 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을 표명할 뿐이다.

다른 말씀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감추신 판단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하셨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선언할 뿐이다. 만일 반대자들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신다는 말씀을(롬 11 : 32 참조) 끝까지 주장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는 뜻에서 다른 곳에 있는 말씀을 제시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 이 말씀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신(출 33 : 19) 말씀과 조화가 되도록 해석해야 한다. 자비를 반드시 베푸셔야 할 사람들을 택하시는 그 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개인들이 아니고 사람의 계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이 어두워 극력 반대하는 자들이지만 왕과 고관들까지도, 복음에 참가하게 만드실 자유가 하나님께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벧후 3 : 9) 한 말을 근거로, 그들은 더욱 강력한 반대론을 제기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곤란은 그 다음 구절에서 곧 해결된다. 왜냐하면 회개하여야 한다는 그의 뜻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퍅한 마음을 주시되 소수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6 : 26).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신 말씀은(슥 1 : 3) 부적당한 말씀일 것이다.29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해주시지 않으면 죽을 인생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사람 편에서 회개를 선택한다면, 바울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라고(딤후 2 : 25)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히 회개를 권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활동을 통해서 선택된 자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렘 31 : 18-19).

 

 

 

17.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의 약속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약속이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증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불가침의 결정과 반대되는 일을 원하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구원의 약속은 그것이 아무리 보편적일지라도, 그 약속의 결과를 주의해본다면, 버림받은 자들이 예정되었다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동시에 약속도 폐지된다. 이것이 약속의 성격이라면, 약속과 예정이 서로 어긋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옹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신다.30 나는 이 말씀들은 서로 완전히 합치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비를 찾으며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자비가 미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을 조명하신다. 약속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고 신실하여 어김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그 분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증거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사람이라고 하시는가? 믿음만 있으면 죄인들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건한 자들이 양심에 더욱 든든한 확신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피난처를 제공했는데도 그 은혜를 잊고 거절했기 때문에 죄의 속박을 피하여 숨을 만한 피난처가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복음을 통해서 이 두 종류 사람들에게 모두 제시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믿음 즉, 하나님의 조명이다. 그 결과 경건한 사람은 복음의 의사를 느끼고, 불경건한 사람은 복음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조명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척도가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는 그리스도의 비탄을(마 23 : 37) 인용하지만, 이 말씀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의 자격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계속 거절한 데 대해서도 책망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논제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정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전하시려고 주도 면밀하게 노력하셨다는 것과, 그들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자기들의 욕망에 몰두하여 함께 모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중의 뜻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항의한다.31 그들이 이 항의의 뜻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감정을 품으시고 그의 위엄있는 자리보다 낮은 데까지 내려오신다고 하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들이 이런 구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는 배반하는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손을 뻗치셨으며(사 65 : 2),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온종일 수고하셨다. 이런 표현이 비유적인 것임을 무시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적용한다면 여러 가지 무익한 혼란이 생길 것이지만, 인간적인 것을 하나님께 옮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혼란은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데서 제출한 해결 방법이면32 충분할 것이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가지로 생각되지만, 하나님 자신은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듯이(엡 3 : 10) 하나님의 각종 지혜에 따라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키셨다가 마침내 일시는 그의 뜻에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일이 그가 놀라운 방법으로써 뜻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그들은 경박한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므로, 이미 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버리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돼지와 개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것을 잊은 듯한 말이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들은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들 중에서도 꽃을 따듯 소수만물 택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이 훼방하는 자들이 악담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씀이 있다. 곧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하신 것이(마 5 : 45),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때의 그 소수에게(마 25 : 34) 기업을 맡기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그 어느 하나라도 미워하시지 않는다고 항의한다.33 이 점을 나는 그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롬 10 : 12) 첨부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들은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심에 따라,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시며"(롬 9 : 24), 아무에게도 매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한 구절을 가지고 항의를 제출할 때(롬 11 : 32, 갈 3 : 22의 융합),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이 그 구원을 그의 자비로 돌리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여 항의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면 양편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제출될 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바울과 함께 이 심오한 비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이것이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이 떠든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울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 : 20)라고 한 말을 외쳐야 한다.

이는 어거스틴의 올바른 주장과 같이, 사람의 공의를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공의를 측량하려는 사람들은 사악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34

 

 

 

제 25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에 대한 교리 주장 1-4)

 

1. 부활의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의의 태양이신(말 4 : 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시고,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딤후 1 : 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요 5 : 24), "이제부터‥‥‥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 2 :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 : 6), 이것은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려운 싸움 가운데서 심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소망의 특성에 대해서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롬 8 : 25),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므로(히 11 : 1), 이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1 "우리가‥‥‥주와 따로" 거하기 때문이다(고후 5 : 6).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한다(골 3 : 3-4). 그러므로 우리의 놓인 처지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딛 2 : 12-13). 따라서 우리는 피로하여 우리의 길을 돌아가거나 또는 우리의 위치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쁨 속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 : 8-9).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골 1 : 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마 6 : 21).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믿음이 드물다. 우둔한 우리들이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처럼(빌 3 : 14) 어려운 일은 없다.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동기를 준다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열심히 논하며, 심지어 서로 논쟁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최고선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플라톤뿐이었고,2 플라톤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그 연합의 거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였다.3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목표를 보여주며(빌 3 : 8), 자기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빌 3 : 13) 이 목표를 얻기까지 노력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며, 세상에 붙잡혀 태만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빌 3 : 20).

그리고 신자들이 이 경주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동반자라고 한다. 그는 도처에서 형태도 없는 폐허를 보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한다(롬 8 : 19). 아담의 타락이 자연의 완전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후에, 사람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받게 된 속박은 그들에게 중대한 슬픔이 되었다. 그들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연히 타락 전의 완전한 상태를 동경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다(롬 8 : 22). 이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가(롬 8 : 23) 자신의 부패 속에서 쇠약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적어도 사람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는 무생물들을 모방하지도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세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바울은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롬 8 : 23 참조). 우리의 부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이 되셨으므로(히 10 : 12),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 : 28). 어떤 곤란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이 구속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한다.

 

 

 

3. 바라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정당하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 15 : 13-14).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 : 19).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여 있으며(고전 15 : 30 참조) 참으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롬 8 : 36, 시 44 : 22). 따라서 우리가 양자가 되며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복음의 권위는 그 일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간단한 논의를 이 때까지 연기한 것은,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독자들이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줄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생과 영광을 입으셔서, 온 몸이 그 머리(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의 실례로서 우리에게 몇 번이든지 보여주신다.

완전히 썩어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4 이런 견해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으나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면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5 우리를 둘러싼 불행 가운데서(고후 4 : 8-9 참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 : 10).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쥐어 떼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추론한다(고전 15 : 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다.

오히려 각 지체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모든 지체에 완성되어야 할 것이 머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든 지체들이 모든 점에서 머리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한다(시 16 : 10, 행 2 : 27 참조). 우리도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이 믿음의 일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완전한 결과는 모든 부패를 면하고 완전한 몸을 다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엡 1 : 20 참조),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빌 3 : 20-21).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골 3 : 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번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한다(롬 8 : 11 참조).

나는 지금 간단하게 취급할 뿐이나, 이것은 더욱 자세히 취급할 수 있으며 더욱 찬란한 해설을 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말에서 경건한 독자들은 각자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얻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요 11 : 25). 이 거울에서 부활의 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오랜 기간에 싫증이나 초조를 느끼지 않는다면,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생각대로 분초를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그에게 붙은 자"라고 충고한다(고전 15 : 23).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여자들이 전해준 이야기, 또 공포심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빛나는 기념품을 성전이나 공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시지 않았는가? 왜 빌라도 앞에 그 두려운 자태를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왜 제사장들과 온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시지 않았는가?6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정당한 증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대답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약하다고 해서 경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주관되어, 공포심에 압도되었던 자들이 무덤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만큼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건한 열성 때문에, 또 얼마만큼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갔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본 일에 대해서 천사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인들이 한말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가 스스로 사실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의 신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일반 사람들과 총독이 풍성한 증거가 제시된 후에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나 다른 표징들을 볼 기회를 빼앗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꾼이 지켰지만(마 27 : 66), 사흘째 되는 날에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눅 24 : 3, 마 28 : 6,11, 27 : 24 참조). 뇌물을 받은 병정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마 28 : 12-13,15). 이는 마치 제자들이 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또는 무기로 무장을 했다거나, 심지어 이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제자들을 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왜 그들을 쫓아가서 민중의 도움으로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잡지 않았는가? 빌라도는 참으로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들의 소리가 울렸다(마 28 : 6, 눅 24 : 6 참조). 하늘 광채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천사임을 명백하게 알려 주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의심을 제거해주셨다(눅 24 : 38).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번 만났고, 그 손과 발을 만져보기도 하였다(눅 24 : 40, 요 20 : 27 참조). 그들의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행 1 : 3), 드디어 그들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 : 9). 이 광경은 열 한 제자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졌다"(고전 15 : 6).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면서 자신이 살아나신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주 되심을 확실히 증명하셨다. 이것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요 16 : 7) 이미 예언하신 바와 같다. 그리고 바울을 노상에 엎드러지게 만든 것은 죽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으며, 바울은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분이 최고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느꼈다(행 9 : 4).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유로 스데반에게 나타나셔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셨다(행 7 : 55). 이렇게 많은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어리석은 고집이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육신 부활에 대한 근거이다

 

부활을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바울은 간단하게 이 점을 가르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 : 21). 여기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이며, 우리의 지각을 압도하는 위대한 기적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해서 어떤 자연 현상을 상상하는 것은 가장 부적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계에서 증거를 빌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 : 36). 씨를 뿌리면, 썩은 것으로부터 곡식이 돋아나므로,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기적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실은 그다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이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능에 그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면, 장차 올 부활을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신념에 고무되어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 : 19). 다윗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라고 한다(시 68 : 20). 욥은 사람이라기보다 시체같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날이 오면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즉, 그의 권능을 보이시려고)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 : 25-27),7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부활에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듯이 교묘하게 왜곡하지만, 그들은 논박하려는 점을 도리어 확인한다. 거룩한 사람들은 곤란을 당할 때에 무엇보다도 부활의 비유에서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에스겔에 있는 구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들 앞에 길이 열리리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것과 같다고 했을 때에, 에스겔은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중에 들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그 뼈에 힘줄과 살이 붙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한다(겔 37 : 1-10), 예언자는 이 비유로 백성이 돌아갈 소망을 가지게 하였지만,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구원에 대해서도 부활이 그 모형이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음성이 생명을 준다고 가르치신 후에, 유대인들이 그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즉시 다음과 같이 첨가하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 : 28-29)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전투 중에도 개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에게 내세를 약속하신 분은 우리가 맡긴 것을 지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1 : 12).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고, 의로우신 심판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딤후 4 : 8).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미리 내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고통으로 갚으시며, 부당한 핍박을 받는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은(살후 1 : 6-8)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곧 그 다음에 첨가하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며 모든 복음을 믿는 자로부터 기이히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 : 10).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는 다양한 계층의 반대가 논박되었음. 5-9)

 

5. 이교도들의 반대론을 장례 의식으로 반박함. 천년 왕국론자들의 오류

 

사람들은 부활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일체 잊어버리게 하려는 신중한 계획이나 세운 것처럼, 죽으면 만사가 끝나고 인간은 소멸한다고 하였다.8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은(전 9 : 4) 당시의 일반적인 상식을 표현하였다. 다른데서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한다(전 3 : 21). 모든 시대에 이 동물적인 어리석은 생각이 널리 퍼졌고, 교회 내에까지 침입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공언했고(막 12 : 18, 눅 20 : 27, 행 23 : 8), 영혼은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무지를 변명의 구실로 삼지 못하도록, 본성의 놀라운 충동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의 눈앞에 항상 부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장 풍습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도 이런 풍습이 오류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도 매장 의식은 엄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같은 풍습이 이방인들 사이에도 존속하여, 그들 앞에 놓인 부활의 형상으로 그들이 깨우쳐지기를 원하셨다. 매장 의식은 유익하지 못했지만, 만일 우리가 그 목적을 현명하게 통찰한다면 우리에게는 유용한 것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을 모든 사람이 함께 고백했다는 것은, 그 불신앙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체와 함께 부활의 기억도 묻어버리도록 사탄은 그들의 감각을 마비시켰을 뿐 아니라, 부활론의 이 부분을 각종 거짓말로 혼란시켜 결국 부활론 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 시대에 사탄이 그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고전 15 : 12이하 참조). 그러나 조금 후에 천년 왕국론자들이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다.9 그들의 조작은 너무도 유치해서 논박할 필요나 가치가 없다. 그들의 오류에 구실을 준 것이 계시록임이 분명하나, 그 계시록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천이라는 수는(계 20 : 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도리어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한다(마 25 : 41,46).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시력으로 볼 수 없으며 지력으로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세의 생명의 기업을 향유하는 기간을 천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얼마나 큰 비난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이 그의 영광으로 변모하게 될 그리스도 자신도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시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5 : 13이하). 만일 그들의 복이 유한하다면, 그들의 복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요약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권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 악의를 품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권능은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삼켜지고, 영생이 완전히 회복되는 때에 비로소 실현된다.

이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극심한 잔인성을 돌리게 될 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소경에게도 들여다보이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신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스스로 잃은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그 나라를 빼앗으시는 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처사이며 그들의 죄는 일시적인 것이라고10 말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침해한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허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벌이 죄의 정도를 넘는다고 그들은 말하지만11 이런 모독적인 언사는 참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공경할 줄 모르고 도리어 경멸하면서, 한 영혼이 멸망하는 것을 더 큰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박한 자들이 떠드는 것에 우리가 논박할 가치를 인정하는 것같이 되어, 앞에서 한 말과 다르게 되겠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겠다.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다.12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13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 두 가지 생각 중에서 처음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창조를 논할때에 다소간 언급한 것이 있으므로,14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이 생각이 얼마나 동물적인 오류인가를 다시 한번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는다. 그 결과, 몸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된다.

성경의 교훈은 훨씬 탁월하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을 "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벧후 1 : 14). 그러나 바울은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고후 5 : 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 : 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한다(고후 5 : 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는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히 12 : 23) 모든 의심을 일축한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몸을 벗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눅 23 : 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눅23 : 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벧전2 : 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행 7 : 59).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15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요 12 : 32 참조), 한편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말씀은 없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일을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낼 것인가? 장소에 대해 묻는 것도 미련하고 무익한 일이다. 영혼은 몸과 같은 차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 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눅 16 : 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한다. 동시에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라고 명령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그 때까지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한계, 즉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즐길 때를 기쁘게 기다리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며, 모든 일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보류된다는 한계를 지키고 만족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 확실히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같다. 즉,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져 있을 것이다(유 1 : 6).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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