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3 권 (1)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6

제 3 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 우리에게 그것으로부터 무슨 유익이 오며, 어떤 효과가 따르는가?

 

제 1 장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진 사실들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1.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속시켜 주시는 띠로서의 성령

 

우리가 이제 이 문제를 검토하여야 한다.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은혜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사적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빈곤하고 곤궁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은혜들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 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익,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를 우리의 "머리"(엡 4 : 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8 : 29)이라고 하였다. 또 우리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롬 11 : 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갈 3 : 27). 이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기까지는 그가 가지신 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것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것,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모든 사람이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볼 때에 우리는 더 높은 견지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 사리에 닿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성령의 영원한 신성과 본질에 대해서 논술했다.1

여기서는 다만 이 한 가지 특별한 점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로 임하셔서" 성령으로 하여금 그에 관한 증거를 하시게 하셨다(요일 5 : 6-7 참조). 이것은 그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을 우리가 놓치지 않게 하시려는 의도이다. 하늘에 증거하시는 세 분이-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계신 것처럼, 땅에도 세 증거자 즉 물과 피와 성령이 있다(요일 5 : 7-8 참조). "성령의 증거"란 말이 되풀이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 증거가 우리의 마음속에 인(印)과 같이 새겨진 것으로 느끼며 그 결과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깨끗케 하심과 희생을 우리 마음에 인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신자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했다(벧전 1 : 2). 이런 말로써 베드로가 설명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이 허사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신비롭게 물을 뿌려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씻으신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바울은 깨끗이 씻는 일과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 말할 때에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다고 한다(고전 6 : 11).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시는 띠는 성령이다.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데 대해서 II권에서 우리가 가르친 것도 이것과 관련된다.2

 

 

 

2.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또 무슨 이유로 성령을 받으셨는가?

 

연구할 가치가 많은 이 문제를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으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영원한 기업의 소망을 바라보는 무리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고 부른다(살후 2 : 13, 벧전 1 : 2, 롬 1 : 4). 이는 성령이 인간과 그 밖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힘으로 우리를 살리며 영양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뿌리와 씨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실 때가 있으리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극찬하였다. 요엘서에 특히 주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 : 28). 여기에서 예언자는 영의 선물을 예언자의 직분에 제한하는 것 같으나, 그가 이 비유로 알리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나타내심으로써 지금까지 하늘의 교리를 모르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특히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주셔서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나눠주는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며,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3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롬 8 : 9). 여기에서 바울은 완전한 새롭게 함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롬 8 : 11).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사들로 인하여 찬양을 아버지께 돌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똑같은 권한을 돌리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영의 선물들은 그리스도께서 맡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목마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요 7 : 37).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 : 7) 각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또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같은 영으로 하나님과 결합되셨을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권능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허사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둘째 아담"이라고, 곧 "살려주는 영"으로서(고전 15 : 45) 하늘에서 보내여진 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는 이 독특한 생명을4 바울은 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과 대조시킨다. 또 그는 신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원하는 동시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기를 간구한다(고후 13 : 13). 성령과 교통하심이 없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 바울은 또한 다른 구절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롬 5 : 5).

 

 

 

3. 성경에 있는 성령의 명칭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그것을 완전하게 새롭게 하심을 논할 때에, 성경에서 성령을 어떤 칭호로 부르느냐는 것을 주목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그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은 "양자의 영"이라고 불려진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하신다. 사실 그는 기도할 말까지도 알려주셔서 우리가 대담하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다(롬 8 : 15, 갈 4 : 6).

똑같은 이유로 성령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印)"이라고 불려진다(고후 1 : 22, 엡 1 : 14 참조). 즉 성령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으며 죽은 자들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은 하늘로부터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로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또 성령은 의로 말미암는 "생명"이라고 한다(롬 8 : 10 참조).

성령은 은밀한 중에 물을 주어 우리의 의의 싹을 돋게 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자주 "물"이라고 불렀으며, 이사야서에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 : 1), "내가 갈(渴)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 : 3)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 : 37)라는 구절을 인용한5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와 잘 일치된다. 성령은 깨끗이 씻으며 정하게 하시는 힘이 있으므로 물이라고 불리워지는 때도 있지만, 에스겔서에서 주께서는 "맑은 물"을 약속하시며 그 물로 백성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겠다고 하신다(겔 36 : 25).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시냇물같이 부으시고 그들의 생기를 회복하며 강하게 키우시기 때문에 "기름"과 "기름 부음"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요일 2 : 20, 27).

반면에 성령께서는 꾸준히 우리의 사악하고 무절제한 육욕을 태워버리시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시기 때문에6 우리에게 이러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때 성령을 "불"이라고(눅 3 : 16)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모든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 되는 "샘물"이며(요 4 : 14),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행사하시는 "주의 손"(행 11 : 21)으로 묘사되었다. 성령께서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으시므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성령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어두운 마음과 사악한 마음뿐이다(갈 5 : 19-21 참조).

이미 앞에서 분명히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이 성령께 몰두하게 되기까지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분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우리의 밖에 계신 분-실로, 우리에게서 먼 분으로 보기 때문에7 이를테면 그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분이 되고 만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머리"로(엡 4 : 15) 모신 사람들에게만 유익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고(롬 8 : 29),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만이(갈 3 : 27) 그의 은혜를 입는다. 이와 같은 연합함이 있어야만, 적어도 우리의 입장에서 구세주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무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 되며 그의 뼈 중의 뼈가 되어 그와 하나가 되는 저 거룩한 결혼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엡 5 : 3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만 우리와 결합하신다.

같은 성령의 은혜와 힘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그의 아래 두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다.

 

 

 

4.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믿음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이다. 그래서 보통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표현하는 말들은 대체적로 믿음과 관련이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부여되고, 이 사람들은 혈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요 1 : 12-13) 하나님과 혈육을 대조시키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불신앙으로 살았을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혜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뜻이다(마 16 : 17).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8 이미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할 뿐이다. 에베소 신자들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엡 1 : 13) 한 바울의 말도 같은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우리 속에 계시는 선생이라고 가르친다. 이 선생의 노력으로 구원의 약속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며, 성령의 노력이 없으면 이 약속은 헛되이 우리의 귀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라고 한다. 또 바울은 같은 뜻으로, 데살로니가 신자들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고 말한다(살후 2 : 13). 바울은 여기서 믿음의 근원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간단히 일깨워주고 있다. 요한의 설명은 보다 더 명백하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 : 24).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요일 4 : 13) 한 말도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의 영"을(요 14 : 17)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이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성령의 중심되는 사명으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모두 생각나게 하는 일을 지정하셨다. 분별의 영이(욥 20 : 3) 마음의 눈을 뜨게 하지 않는다면 빛이 눈먼 자에게 비쳐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나라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주는 열쇠라고 불리워지며(계 3 : 7 참조), 성령의 비춰 주심이 곧 우리의 예리한 통찰력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바울이 성령의 직분을(고후 3 : 6) 높이 평가하는 것은 만일 내적 교사이신9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가 주신 사람들을 그의 영으로 자신에게 이끌지 않으신다면(요 6 : 44, 12 : 32, 17 : 6 참조) 교사들이 아무리 외쳐도 무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따라서 우리도 그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며"(눅 3 : 16), 그의 복음을 믿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 피조물이 되도록 하신다(고후 5 : 17 참조). 그리고 우리에게서 세상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고, 깨끗하게 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신다(고전 3 : 16-17, 6 : 19, 고후 6 : 16, 엡 2 : 21 참조).

 

 

 

제 2 장

 

믿음 : 믿음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설명

 

(믿음의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다. 1)

 

1.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믿음에 관한 정의를 보다 명확히 제시한1 후에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믿음의 힘과 성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에2 설명한 것을 회고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율법으로 정하셨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어느 부분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율법에 있는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선언이 우리 위에 내릴 것이다.

둘째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이르기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보며 우리가 당해야 할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좋은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이런 비참한 재난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해방의 수단은 다만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구속자, 즉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로 하셨다. 다만 한 조건은 우리가 견고한 믿음으로 이러한 자비를 받아들이며 꾸준한 희망으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기로 정하신 사람들은 이 믿음에 의해서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런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신념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현재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진정한 성격을 더욱 주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더욱 열성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실제로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3 보통으로 찬성한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그보다 더 깊은 무엇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사실 여러 학파들이 믿음을 논할 때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며,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4 허무한 공상을 통해 가련한 영혼들을 확정된 목표로 이끌지를 못하고 도리어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 6 : 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셔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요 8 : 12)이라고 하시고 다른데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신다(요 14 : 6).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시 36 : 9) 가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다(요 14 : 6).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시며, 그 다음에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신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눅 10 : 22). 이 일을 근거로 바울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고전 2 : 2).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21절) 증거했노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다.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 : 17-18).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인다고 증언한다. 바꿔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며 그 지식이 우리에게 비친다고 하였다(고후 4 : 6).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여기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 즉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 : 3)이 있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는다면5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멀리 숨어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계시하시려는 모든 것을 독생자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은혜를 전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진정한 형상을 표현하게 하셨다(히 1 : 3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분발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6 이와 같이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오직 그 형상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훌륭한 말을 했다. 그는 믿음의 목표를 논할 때에 우리는 가려는 곳과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이어 모든 과오에 대해서 가장 견고한 방비를 갖춘 길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그분이라고 한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되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될 뿐이다.7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가 믿음의 안정성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 그 믿음에 대해서 자기가 그렇게 자꾸 역설한 점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벧전 1 : 21)하면서 양쪽을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한다.

 

 

 

(믿음은 지식을 내포한다. 참된 교리를 맹신이라는 스콜라의 사고는 흐리 게 한다. 2-5)

 

2. 믿음은 방자한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있다

 

이 해독에 대한 책임은 다른 무수한 해독의 경우처럼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베일을 씌워 그를 숨겼다. 만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직시하지 않으면 끝없는 미로를 헤맬 것이다.

그들은 모호한 정의로 믿음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며 거의 말살할뿐 아니라 "맹신"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비할 데 없이 엄청난 유치한 무지를 이러한 허구로 장식함으로써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을 속여 멸망하게 만든다.8 더 나아가, 문제의 진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허구는 진정한 믿음을 파묻을 뿐 아니라 완전히 파멸시킨다. 우리의 감정을 공손하게 교회에 복종시키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이른바 믿는다는 것인가?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knowledge)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질문하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이 성립됐기 때문에(고후 5 : 18-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교회에 굴복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할 때에(롬 10 : 10), 사도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맹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의 의의 근거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인정하라고(explicit recognition ; 이해에 입각한 신앙) 요구한다.

 

 

 

3. 로마 교회의 "맹신"이라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우리는 무지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우리가 지금 안다는 것은 대개 함축적인 것이며, 우리가 육(肉)의 짐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갈때까지 그대로 혼돈하리라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판단을 보류하고 교회와의 단결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요 17 : 3),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이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교리"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믿음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9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는데 시간을 더 보내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우리의 교리를 비교하도록 독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진리 자체는 명백하므로 자연히 그들을 충분히 또 쉽게 논박할 것이다. 그들은 무지의 많은 잔재에 믿음이 둘러싸여10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올바른 신자라고 부른다. 즉 자기의 무지로 마비된 사람을 심지어 자기의 무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자기가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교회의 권위와 판단에 찬성하기만 하면 올바른 신자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믿음에는 이해가 따른다는 성경의 한결같은 교훈을 모르는 생각이다.

 

 

 

4. 올바른 믿음조차도 항상 오류와 불신앙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서 살고 있는 동안에 맹신이란 것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과 가리워진 것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오류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고요히 또 겸손하게 계속 노력하여 더욱 전진하는 것이다.11 그러므로 바울도 신자들에게 하는 권고에서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는 계시를 기다리라고 한다(빌 3 : 15). 육신을 벗어버리기까지는 원하는 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체험적으로 분명히 배우는 교훈이다. 평소에 매일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아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굴레로 우리를 일정한 한도내에 제어하시며,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정하셔서(롬 12 : 3), 가장 훌륭한 교사라도 항상 배우겠다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들은 이와 같은 맹신의 분명한 본보기였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머뭇거리며, 가장 초보적인 진리조차 맛보기 어려웠다. 또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면서도 이해하는 점에서는 거의 진보가 없었다. 사실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지만, 주의 부활이 꿈같이 느껴질 뿐이었다(눅 24 : 11- 12, 요 20 : 8 참조). 그리스도께서 예전에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셨으므로 이 때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참으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의 열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 살아날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도록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진실하신 분으로 믿은 이의 말씀을 여인들은 믿기는 했으나, 무지가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그들의 믿음을 암흑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아연실색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보고 그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스스로 발견한 후에 드디어 믿었다고 했다.

그때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숨은 믿음의 씨가-죽은 듯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씨가-그때에 새로운 힘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유일한 스승으로 존경하며 마음속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이, 그러나 아직 맹목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아 그분께서 자기들의 구주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을 하늘로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증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신앙에는 항상 불신앙이 섞여 있다는 것으로 증명은 충분하다.

 

 

 

5. 믿음의 필수적 선행으로 "맹신"

 

엄격하게 말해서 아직 신앙의 준비 상태에 불과한 믿음도 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서를 보면 복음의 교훈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기적에만 놀라서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공경하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공경하는 태도를 "신앙"이라는 훌륭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시초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은 왕의 신하는12(요 4 : 50) 집에 돌아가서 다시 믿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한다(요 4 : 53).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여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가 교훈을 잘 받는 사람, 언제든지 배우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구절에서 그가 믿노라고 한 것은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믿음이었으나, 둘째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들어간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요한복음에 있는 비슷한 예를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모여들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은 후에 여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 : 42). 이런 예들을 보면 아직 초보적 지식은 없을지라도 듣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불리웠다. 물론 정확한 의미는 아니나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경건한 마음 자세에 이런 위대한 영예를 주시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이 태도와 배우려는 이 욕망은 교환주의자들이 조작한 "맹신"으로 만족하는 저 나태한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그 전적 무지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을(딤후 3 : 7) 엄중히 책망하는데, 하물며 완전한 무지를 계획적으로 택하는 자들은 얼마나 더 큰 수치를 당해야 할 것인가 !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와 믿음의 간단한 정의. 6-7)

 

6.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아버지께서 제시하시는 그리스도 즉 자신의 복음으로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이 도착할 목표를 지정하신 것같이 복음이 우리를 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로 가는 바른 길을 걸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서는 확실히 은혜의 보고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만일 그 은총의 보고가 닫혀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가르침을 불가분리의 동반자로 서로 결합시키며,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채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한다(엡 4 : 20-21).

그러나 믿음을 복음에 제한할 때에 복음을 구성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에서 그리스도가 더욱 완전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가르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딤전 4 : 6 참조).

이런 이유로 그는 다른 구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말한다(롬 10 : 4, 갈 3 : 25 참조).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고 특별한 가르침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이 되신 후에, 아버지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실히 증거 하셨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 더 쉽고 더 적당한 방법일 것이다. 우선 우리는 믿음과 말씀 사이에 영속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선포하신다(사 55 : 3). 요한은 이와 같은 믿음의 원천을 보여주려고,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믿게 하려 함이요"(요 20 : 31)라고 말했다. 예언자도 백성이 믿도록 충고하기 위해서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 : 7)고 한다. "듣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자녀들과 외부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표지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을 가르치셔서(사 54 : 13, 요 6 : 45)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도록(요 6 : 45 참조)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은혜를 무분별하게 주신다면 왜 그분께서는 말씀을 소수 사람들에게 보내셨을까? 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보통 "신자"와 "제자"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사용하며 9장 36절에서는 한 여인에게까지 이 칭호를 적용한다(행 6 : 1-2, 7, 9 : 1,10,19,25-26,38, 11 : 26,29, 13 : 52, 14 : 20,28, 15 : 10,16-21).

그러므로 만일 믿음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이 목표로부터 조금이라도 방향이 달라진다면 그 믿음은 본성을 지키지 못한다. 그것은 불안하고 경박한 믿음과 막연히 오류를 믿는 심리 상태가 된다.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서 믿음이 배태되게 하는데 말씀을 심는 사람의 봉사가 필요한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할 것이다.13 그러나 말씀 자체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든 간에 거울과 같고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 간에 자신에게로 이끄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고 정의하며(롬 1 : 5),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충성한 것을 칭찬한다(빌 1 : 3-5, 살전 2 : 13 참조). 믿음의 뜻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14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특히 이 점이-문제이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하신가 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해서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의 말씀에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식의 근거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먼저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어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말씀의 권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며 약하거나 전혀 없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진실하시며(롬 3 : 3 참조),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딛 1 : 2 참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불가침의 진리라고15 확신해야 한다.

 

 

 

7.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약속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이 모두다 인간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때 믿음이 말씀 안에서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창 2 : 17).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것이었다(창 4 : 10).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결코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그 자체만으로는 믿음을 흔들리게 할 뿐이다. 우선 믿음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떻게, 무엇을 말하든지 하나님의 진실성을 지지하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묻는 것은 믿음은 주의 말씀에서 무엇을 발견하여 거기 의존하며 안주하는가16 라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진노와 징벌만을 깨닫는다면, 믿음은 어떻게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또는 그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피해서는 안되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아직 믿음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얻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믿음이라고 간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나 자비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식은 종종 슬프며 그 뜻이 선포될 때에 놀라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믿음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그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시며 염려하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이 사실이 우리에게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시다고 우리에게 증언할 수 있는 약속 곧 은혜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서는 안식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시편에서는 대개 자비와 진실을 서로 관련된 것같이 짝을 짓는다(시 89 : 14, 24, 92 : 2, 98 : 3, 100 : 5, 108 : 4, 115 : 1 등).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그 진실하심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의 자비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 : 10-11),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 36 : 5),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 : 10),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7 : 2, 라틴 역 116 : 2), "내가…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시 138 : 2).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는 예언서의 말씀들은 인용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하시며 우리를 먼저 부르셔서 그의 뜻이 의심스럽거나 모호하지 않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편에서 그는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신다고 단정하는 것은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유일한 보증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미움과 진노의 표징이 각처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선하심을 의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게 중요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이 섞인 이해는 제거해야 한다. 그런 이해는 자체내에 조화가 없고 자신과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거나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도 계속해서 주저함으로 흔들려서 확신 안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며 우리의 마음을 강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얻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를 할 수 있겠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을 근거로 두고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믿음"이란 용어에 대한 여러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들. 8-13)

 

8. "형식을 갖춘" 신앙과 "형식을 갖추지 않은" 신앙

 

더 나아가기 전에 독자들에게 방해물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난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우리는 소위 학파들이 문제 삼는 형성된 신앙과 미형성된 신앙이라는 무가치한 구별을17 논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며 경건한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구원에 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믿음을 일으키심으로써 우리의 양자 됨을 증거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조차도 없는 자들의 신념을 감히 "신앙"이란 이름으로 장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가 반대한다. 우리는 이 이상 더 그들의 정의를 논박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앙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기 보다 무지하고 미련하게 떠들고만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는 이미 부분적으로는 말했고,18 남은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적당한 곳에서 말하겠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허구같이 어리석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과 동의를 동일시하며,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도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동의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19 그러나 그들은 먼저 알아야 할 일을 모르고 있다. 즉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 것인지, 혹은 성령께서 신앙을 통해서 사람이 양자가 된 것을 증거하시는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에 어떤 속성이 첨가될 때에 그것이 같은 신앙인지, 또는 새것이며 다른 것인지를 물으면서 유치하게 떠든다. 그들이 이렇게 떠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성령의 독특한 선물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믿음은 그 시초에서 화해를 내포하는 것이며 이 화해에 의해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 : 10)라고 한 바울의 말을 숙고한다면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 냉담한 성격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이 논쟁을 종결시키는데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암시했고 앞으로 더 자세히 되풀이하려는 그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이다. 즉 문제된 찬동 그 자체는 두뇌에 속했다기보다 마음에 속했으며, 지성보다 감성에 속했다는 것이다.20 그러므로 그것은 "믿어 순종"하는 것으로 불리우며(롬 1 : 5), 주께서도 이 이외의 복종은 원하시지 않으셨다. 자신의 진실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연하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같이(요 3 : 33), 신자들은 그들이 마치 서명 날인하듯 이 진리에 인(印)을 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경건한 성향이 동의하는 것에 첨가될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21 하는 그들의 말이 우매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단정한다. 동의하는 것까지도 이런 경건한 성향을 근거로 삼는다.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동의함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명백한 논거가 있다. 믿음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므로(요 6 : 29 참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죄의 용서와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보내지셨을 뿐 아니라 성결을 위해서(고전 1 : 30 참조), 그리고 생명수의 원천으로서(요 7 : 38, 4 : 14 참조) 보내지셨으므로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화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좀더 쉽게 표현을 한다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을 경건한 성향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9. 고린도전서 13 : 2 - 형성된 신앙과 미형성된 신앙의 차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한(고전 13 : 2) 바울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역설한다. 그들은 믿음에서 사랑을 제거함으로써 믿음을 기형으로 만들며 이 구절에서 바울이 "믿음"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를22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앞장에서 성령의 각종 은사를-방언과 능력과 예언 등을(고전 12 : 4-10)-논하고 고린도 교인들에 게그들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여 교회 전체에 더 큰 유익을 주라고 권고한 다음에 이어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한다(고전 12 : 31). 이런 모든 은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사랑에 기초를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 은사들의 목적은 원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이 일에 이바지하지 못할 때에는 은사의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앞에서 열거한 은혜의 은사들을 다른 이름으로 반복 열거하면서 설명을 덧붙인다. 그뿐 아니라 그는 "능력"과 "믿음"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즉,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능력 또는 믿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며, 방언과 예언과 기타 은혜들과 같이 불경건한 사람이 이 믿음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악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사랑에서 분리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오류에 빠진 근본 원인은 "믿음"의 뜻이 여러 가지라는 데 있다.23 그들은 믿음이 의미하는 것의 차이를 보려 하지 않고 이 말이 마치 어디서나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것으로 논하였다. 그들이 똑같은 오류를 지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야고보서의 구절에(약 2 : 21)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 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적 목적을 위하여 믿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불신자들 사이에 하나님께 대한 어떤 종류의 지식이 있는가를 밝혀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믿음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복음서의 이야기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진리로 생각한다. 이런 판단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우리가 직접 목격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보통 가지는 판단과 그 성질이 동일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논의할 여지가 없는 신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에 다소의 충격을 느낀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인 불경한 태도로 공격하거나 거부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복종하는 체하는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말 하지만 이것은 그 말을 잘못 사용하는24 것이다.

 

 

 

10. 형식을 갖추지 않은 신앙은 오직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서 믿음의 그림자나 외형에 불과하며 믿음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이런 그림자와 믿음의 견고한 실재와는 서로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것은 더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지적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고 하지만(행 8 : 13), 그는 조금 후에 불신앙을 드러냈다(행 8 : 18). 그가 믿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석한다. 그들은 시몬이 마음에 없는 믿음을 말로만 믿는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시몬은 복음의 존엄성에 압도되어 일종의 믿음을 보이며, 그리스도를 생명과 구원의 원천으로 친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는 잠시 동안 믿다가(눅 8 : 13),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기 전에 기운이 막혀버리거나, 심지어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즉시 시들어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눅 8 : 6-7).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약간 맛보고는 더욱 욕심이 나서 말씀을 움켜 붙잡으며 그 거룩한 힘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자기 생각에도 믿는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보이는 존경이 곧 경건이라고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경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동의는 어떤 종류이든 간에 마음속까지 침투하지 못하며 정착하지 못한다. 뿌리를 내리는 것같이 보이는 때도 있으나 그것은 살아있는 뿌리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허영심이 숨을 틈이 많으며 거짓이 잠복할 공간이 많다. 그것은 거짓의 위선으로 장식되어 스스로 기만하는 때도 많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그림자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마귀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마귀들도 믿고 떠는 일들을(약 2 : 19) 듣고 이해한다고 하나 우둔하여서 마귀들보다도 훨씬 열등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든 간에 결국은 공포와 절망에 빠지고 만다는 점에서 마귀들과 같다.

 

 

 

11.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는가?

 

바울은 믿음을 선택의 결과라고 했는데(살전 1 : 4-5),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 믿음의 광명을 받으며 복음의 힘을 느끼지만 버림받은 사람들도 때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거의 같은 감동을 가지며,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전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행 13 : 48 참조). 그러므로 사도가 버림받은 자들도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고 한 것이나(히 6 : 4-6),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일시적으로 믿는다고 하신 것은(눅 8 : 13)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굳게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며 변명할 여지를 주시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양자로 삼는 영은25 받지 못하더라도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이 양자가 된다는 확신을 가질 근거가 없지 않느냐고 어떤 사람이 항의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과 일시적인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유사점이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바울이 칭송한 확신 즉 높은 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갈 4 : 6, 롬 8 : 15 참조) 부르는 확신이 풍성하게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사람들만을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나게 하시며(벧전 1 : 23), 그 마음에 심으신 생명의 씨가 결코 죽지 않게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양자로 삼으시는 선물을 그 마음에 확실하게 인치시고 항상 또 확실히 존속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보다 낮은 정도의 작용을 하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신자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도 겸손하게 자기 반성을 하며, 육의 확신이 들어와서 믿음의 확신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하라고 가르치신다. 이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혼돈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그것의 견고한 실체보다 그림자를 파악할 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령께서는 선택된 사람들에 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죄의 용서를 확인시켜 주시며 이 사람들이 특별한 믿음으로 그 용서를 잘 활용 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는 그들도 비록 혼란하며 불분명하면서도 화해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동일하게 믿음이나 중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위선의 가면을 쓰고 동일한 믿음의 시초를 가진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인식할 만한 광명을 그들의 마음에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식과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증거를 서로 구별하시므로 그들에게서는 그 인식이 완전한 결실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들을 참으로 죽음에서 구출해 그의 보호 하에 두시지는 않고, 다만 임시로 자비를 보이실 뿐이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믿음의 산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 주신다(마 24 : 13). 그러므로 반대주장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은혜를 보이신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그의 은혜에 대한 일시적인 인식을 후에 사라지고 마는 인식으로 조명하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2. 참 믿음과 거짓된 믿음

 

또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지식과 그 자비의 진실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세속적인 일들 때문에 소멸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인식은 믿음에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으며, 그 분의 진실하심에는 언제나 자기 모순이 전혀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이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락하는 비밀의 계시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 계시를 통찰하고 마침내 그것에 도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을 그대로 이해한다거나 그 뜻의 진실성을 꾸준히 믿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오직 일시적인 인식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뿌리를 내릴 정도로 깊이 심지 못한 나무에 비할 수 있는데, 그런 나무는 몇 해 동안 꽃과 잎 뿐 아니라 열매까지도 열릴 수 있으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린다. 요약하면 첫 사람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말살된 것같이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들을 은총의 빛으로 비추시다가 후에 빛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아는 지식으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감동시키시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마음에 깊이 스며들게 하시는 것을 무엇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다. 동시에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곧 선택된 사람들의 믿음이 아무리 부족하고 약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위해 그들이 양자가 되었다고 하는 확실한 보증과 날인을 해주심으로써(엡 1 : 14, 고후 1 : 22 참조) 그분이 새겨두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말소되지 않지만 사악한 사람들 위에 비치는 빛은 후에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씨에 대해서는 선택된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며 그 씨를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을 거짓되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사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때가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 서로 사랑하겠다는 감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상 경험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경건한 충동이 왕성한 때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 같으신 분으로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하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삼상 9-11장).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신념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처럼 행동한다. 사랑의 영은 그리스도께만 주어졌고, 그 조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그 사랑의 영을 불어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한 말은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 : 5).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확신(갈 4 : 6 참조), 곧 위에서 말한 그 확신을 일으키는 사랑을 의미한다.26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면서도 그들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분노하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느낌으로써 놀라서 육적인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며, 나태를 버리고 분발하여 회개하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나 그들의 죄에 대해서 노하시며, 동시에 자비를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기도하며, 동시에 고요한 확신을 가지고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에게로 피한다. 이런 증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이 없기도 하거니와 믿음이 있는 체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충동적인 열성에 휩쓸려 그릇된 의견을 품게 되며 자신을 속인다. 확실히 이런 사람들은 심히 태만하여 올바르게 자기의 마음을 검토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 하셨다"(요 2 : 24-25)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일시적인 신앙과 살아 있는 영구적인 신앙 사이에 유사점이 많으므로 나는 그것을 "공통" 신앙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런 공통 신앙에서 낙오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 : 31-32)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 안에서 전진하라고 권면하시며, 나태함으로 인해서 이미 받은 빛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였으며(딛 1 : 1), 사라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산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 : 13)라고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사람을 조롱하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야비한 것이다. 기만적인 구실로 믿음을 모독하는 이런 종류의 불경한 사람들을 야고보는 맹렬히 공격한다(약 2 : 14-16) 자기에게 없는 것을 담대하게 자랑하며, 공허한 겉치레로 남과 자기까지 속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딤전 1 : 5). 그러므로 그는 선한 양심을 믿음을 보관하는 상자에 비교한다. 이는 선한 양심을 버렸으므로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딤전 1 : 19, 3 : 9 참조).

 

 

 

13.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란 말의 뜻이 애매 모호함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앞에 인용한 구절에서와 같이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훈만을27 의미하는 때가 많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집사들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딤전 3 : 9) 가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같은 뜻으로 그는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딤전 4 : 1).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디모데가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 : 6 참조)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이 많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라 하고(딤전 6 : 20-21, 딤후 2 : 16 참조), 다른 곳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라고 불렀다(딤후 3 : 8). 그가 디도에게 그들을 꾸짖어(딛 1 : 13)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하라고 명령할 때에(딛 2 : 2 참조), "온전"이란 말은 단순히 순수한 교훈을 의미하며, 이 교훈이 경박한 인간성에 의해 쉽게 부패하고 타락된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골 2 : 3) 있으므로 믿음을 거룩한 교훈의 전체에 확대하는 것은 옳으며, 믿음을 거룩한 교훈에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음을 어떤 특별한 대상에 국한시키는 때가 있다. 예컨대 마태에 의하면 기와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그리스도께서 보셨다고 한다(마 9 : 2). 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백부장의 믿음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감탄하셨다(마 8 : 10). 그러나 그 백부장은 아들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요 4 : 47이하 참조), 아들을 고쳐야겠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승낙과 대답만을 얻고도 만족했고, 친히 와 달라고 간청하지는 않았다. 이 사정을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조금 전에28 우리는 바울이 "믿음"을 기적을 행하는 은사로 본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 되지 않았고 하나님을 열열하게 경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는 교훈과 믿음을 동일시한다. 믿음이 사라질 것이라고(고전 13 : 10, 롬 4 : 14 참조) 기록할 때에 그는 확실히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이 사역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이런 표현법에는 비슷한 예가 담겨져 있다. 거짓된 고백이나 거짓된 표시를 "믿음"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나 이 그릇된 적용이29 악하고 타락한 종교를 "하나님을 경외함"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사마리아와 부근 지역에 이주시킨 이방 민족들이 거짓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함께 경외했다는 말씀이 성경에 자주 나온다(왕하 17 : 24-41). 이것은 그들이 하늘과 땅을 혼합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묻는 것은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기도하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며,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한다. 나는 믿음의 성격과 힘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제 7 절에 있는 믿음의 정의에 무엇을 암시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검토 : 지식의 요소. 14-15)

 

14. 믿음은 보다 차원 높은 지식이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정의의 각 부분들을 다시 검토하기로 하자. 그 정의를 자세히 검토하고 나면 아무 의심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다. 믿음은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려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마음은 믿음에 도달한 때라도 그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에는 그 신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자체의 능력으로 지각한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힘이라고 바울은 아름답게 묘사한다(엡 3 : 18-19 참조). 그가 말하는 뜻은 우리의 마음이 믿음에 의해서 얻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무한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모든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뜻의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주께서는 그 비밀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다(골 1 : 26, 2 : 2 참조). 그러므로 믿음을 자주 "인식"이라고30 부르며(엡 1 : 17, 4 : 13, 골 1 : 9, 3 : 10, 딤전 2 : 4, 딛 1 : 1, 몬 1 : 6, 벧후 2 : 21), 요한은 믿음을 "지식"이라고31 부르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요한은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고 언급한다(요일 3 : 2). 또 그들은 확실히 이 일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다기보다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더욱더 강화된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밝힌다. "우리가…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 : 6-7). 이런 말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아는 일들은 우리 앞에 있지 않고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고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15. 믿음은 확신을 내포한다

 

우리는 확신의 더욱 견실한 항구성을 표현하기 위해 "확실하고 견실한"이라는 말을 첨가한다. 믿음은 의심스럽고 변하기 쉬운 견해로 만족하지 않으며, 모호하고 혼돈된 관념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믿음은 완전하고 확정된 확실성을 요구한다. 이런 확실성은 우리가 어떤 일을 체험했을 때와 증명했을 때에도 경험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불신앙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우리는 불신앙으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기 때문에, 각각 어려운 투쟁을 겪지 않고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마음으로 확신할 수 없다. 특히 현실생활과 부딪힐 때에 사람은 모두 흔들리며 그 숨은 약점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뛰어난 칭호를 사용하여 그 권위를 높이시는 것은 당연하다. 성령의 의도는 내가 언급한 병을 고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게 하시려는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 : 6)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 : 30)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솔로몬도 바로 이 생각을 거의 같은 말로 확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잠 30 : 5). 그러나 시편 119편은 거의 전체가 이 점을 증명하므로 다른 구절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권하실 때마다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앙을 책망하신다. 우리의 심정에서 사악한 의혹을 일체 근절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도 거의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완전히 확신하는 듯 하면서도 그 선하심을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국한시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인지를 의심하며, 비참한 불안에 눌려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위대하며 풍성한 것과 많은 사람이 그 자비를 받은 것과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비가 자기들에게도 임할까 또는 자기들이 그 자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이 추리를 도중에서 그치면 그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에 힘과 확고한 평안을 주지 못하고 불안한 의심으로 괴롭힌다.

그러나 이와 훨씬 다른 완전한 확신을32 느낄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런 확신은 항상 신앙에서 기인된다고 한다. 우리들을 위하여 명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은 이 믿음이다(골 2 : 2, 살전 1 : 5, 히 6 : 11, 10 : 2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의 감미로움을 우리가 참으로 느끼며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확신이 생길 수 없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에서 확신이33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34 생긴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 : 12)고 하였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가 평온한 마음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거기는 바른 믿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담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확신하는 데서만 생길 수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란 말은 확신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믿음의 확실성과 두려움과의 관계. 16-28)

 

16. 믿음의 확실성

 

사실 믿음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자비의 약속은 우리의 외부에서만 타당하고 우리의 내부에서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 약속을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화평"이라고 부르는 확신이 드디어 생긴다(롬 5 : 1). 혹은 화평을 확신에서 온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화평은 일종의 확신이며, 이 확신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양심을 평온하며 평화롭게 만든다. 이 확신이 없으면 양심은 늘 놀라며, 그 혼란과 고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분 오열의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과 자기를 잊어버리고 잠시 잠이 드는 때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참으로 일시적인 망각이며, 이 가련한 망각도 얼마 가지 못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이 되살아나서 양심을 찢으며 고통을 가한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해서 인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 아버지시며 그 분의 관용을 근거로 삼아 모든 일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신자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들을 신뢰하며 의심 없이 구원을 굳게 바란다. 사도는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히 3 : 7)이라는 말로 이 점을 밝힌다. 그래서 사도의 생각으로는 천국의 유업을 확신 있게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주를 올바르게 신뢰한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마귀와 사망을 자신 있게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니면 신자가 아니다. 바울의 간략하고 능숙한 요약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고백하였다(롬 8 : 38-39). 그러므로 같은 방식으로 사도는 부름 받은 우리가 얻을 영원한 기업의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의 눈이 올바로 조명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엡 1 : 18). 바울은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암시를 가르친다. 즉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그것에 대한 큰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7. 시험에 맞서 투쟁하는 믿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자들의 경험은 매우 다르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자주 임하는 불안으로 시련을 받을 뿐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 흔들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시험은 너무도 강렬하여 믿음의 확실성과는 조화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말한 주장을 지지하려면 이 난제를 해결해야겠다. 확실히 우리는 한편으로 믿음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의심의 기미가 없는 확증이나 불안의 습격을 받지 않는 확신을 상상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신자들이 자기의 불신앙과 부단히 싸운다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우리는 신자들의 양심이 아무런 동요도 없는 평화로운 안식을 누린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그들이 어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얻은 그 확실한 신념에서 떨어지거나 떠나게 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경에는 다윗의 믿음보다 더 뛰어나거나 또는 기억에 남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우리가 그의 생애 전체를 바라볼 때 그러한 인상을 받는다. 다윗은 자기의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는 탄식을 무수히 말했는데 그런 탄식의 예를 몇 개만 들겠다. 그는 감정이 불안해 하는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비난할 때에 자기의 불신앙에 대해서 어찌 분노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 : 5, 11, 43 : 5). 확실히 놀라며 당황한다는 것은 불신앙의 명백한 징조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데서 우리는 더 완전한 고백을 읽는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시 31 : 22). 다른 구절에서 그는 불안하고 비참한 혼란 중에서 자기 자신과 논쟁을 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까지 언쟁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시 77 : 9, 7). 그 다음에 있는 말은 더욱 심하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시 77 : 10). 그는 절망에 빠져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로 인정하며 자기가 회의로 고통하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마치 투쟁에서 쓰러진 것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한때 자기를 도와주시던 그의 손을 돌려 자기를 멸망시키려 하신다. 그래서 그는 심한 풍랑에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그 평안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시 116 : 7).

그러나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 모든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은 신자들의 마음을 지켜주며, 그 효력에 있어서는 참으로 종려나무와 같다(시 92 : 12). 종려나무는 모든 짐과 싸우면서도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그래서 다윗은 압도된 듯이 보일 때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서 일어섰다. 자신의 무력과 싸우며 불안한 순간에도 믿음을 잡으려고 매진하는 사람은 이미 총체적으로 승리를 얻었다. 이런 추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말씀은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 : 14)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 말씀에서 겁이 많은 자신을 드러내며, 같은 생각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안스런 감정에 자주 붙잡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에 불안을 느낄 뿐 아니라 그 결점을 고치려고 정성껏 노력한다.

만일 다윗과 아하스를 공평하게 비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큰 차이를 발견할 것이다. 이 악하고 위선적인 왕에게 이사야가 파견되어 그의 불안을 고치려 하였다. 이사야는 왕을 향하여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고 말했다(사 7 : 4). 아람(Ahaz) 왕은 어떠하다고 했는가? 그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는 말이 위에 기록되었다(사 7 : 2). 그래서 그는 약속을 듣고도 여전히 떨고 있다. 그러므로 불신앙에 대한 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가 들어갈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떨다가 드디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무거운 시험에 눌리며 거의 뭉개질 정도가 되더라도 끊임없이 일어선다. 거기에 어려움과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마음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예언자와 함께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시 119 : 43).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마치 그들의 믿음이 쓰러진 것처럼 그들은 간혹 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싸움을 계속한다. 그리고 기도로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하여 해이한 생활로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18.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갈등

 

이 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35 언급한 영과 육의 분열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 분열은 여기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경건한 사람은 속마음에 분열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낌으로 감미로운 느낌이 일부에 스며들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재난의 쓴맛을 알고 슬퍼한다. 한편에서는 복음의 약속을 믿고 안심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죄를 알고 공포에 떤다. 한편으로는 생명을 소망하여 기뻐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직시하고 전율한다. 이런 변동은 믿음이 불완전한 데서 생긴다. 현세 생활에서는 불신앙의 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신앙으로 충만하게 채우며 차지하는 행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긴다. 육의 잔재 속에 안주하는 불신앙이 마음 안에 배태된 신앙을 공격한다.

만일 신자의 마음에 확신과 의심이 섞여 있다면 우리가 돌아가는 결론은 언제나 이것이 아닌가? 즉 믿음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막연하고 혼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에 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신앙의 책동으로 사면초가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불신앙의 밑 없는 수렁에 빠져버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얻어맞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갈등의 결말은 언제나 같다. 곤란한 문제들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듯하던 믿음이 결국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다.

 

 

 

19. 약한 믿음도 진실한 믿음이다

 

요컨대 처음에 지극히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곧 평화롭고 평온하고 우리에 대하여 은혜로우신 얼굴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먼데서 하나님을 보다 분명히 볼 수 있어서 우리가 결코 속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하므로36 더욱 꾸준하게 전진한다. 전진할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그리고 더 확실히 보게 된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조명될 때에 처음에는 많은 무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 무지는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어떤 일들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아는 것이 모호하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데에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이는 마음이 깨닫는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적이며 으뜸이 되는 부분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치 옥중에 갇혀서 반쯤 희미해진 햇빛이 좁은 창으로 비스듬히 비치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다. 그가 태양을 완전히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꾸준히 비치는 그 빛을 보며 그 은혜를 받는다. 이와 같이 아무리 짙은 암흑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육신의 쇠사슬에 매인 우리도 변하지 않는 확신을 가지기에 필요한 빛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그 찬란한 빛을 조금이라도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다.

 

 

 

20. 신앙의 약점과 장점

 

사도는 여러 구절에서 이 두 가지 점을 다 좋게 가르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 : 9,12)라고 하며,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라고(고전 13 : 12)하면서 바울은 참으로 거룩한 지혜가 현세에 있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조금 밖에 부여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시사한다. 이 말씀들의 뜻은 우리가 육신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동안은 믿음이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불완전하므로 더욱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무한한 것은 우리의 부족한 척도로 측량할 수 없으며 우리의 좁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무언중에 가르친다. 바울은 교회 전체에 관해서도 이 점을 밝혀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은 자기의 무지가 장애와 방해물이 되어 그만큼 가까이 접근해야 할 곳까지 가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 같은 바울은 아주 적은 믿음이라도 그 순수한 맛을 확실히 맛볼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즉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노출된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결과로 변화하여 주의 형상과 같이 된다고(고후 3 : 18) 바울은 언급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극도의 회의와 공포는 반드시 이런 무지에 둘러싸이게 된다. 그뿐 아니라 무수한 각종 시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양심이 죄의 짐에 눌려 혹은 불평하고 신음하며, 혹은 자책하며, 혹은 비밀히 중얼거리며, 혹은 노골적으로 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역경이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든지, 오는 양심이 스스로 자체 내에서 진노의 증명과 근거를 발견하든지 간에 불신앙은 여기서 무기와 계략을 삼아 신앙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공격하는 목적은 언제나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불구 대천의 원수이신 것같이 무서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21.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방패이다

 

믿음은 이런 공격을 견디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방위 태세를 강화한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 우리를 공격하며, 우리를 돌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라고 우리를 생각하게 할 때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지만 그의 고통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것이므로 그는 또한 자비로우시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불의를 벌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충격을 받을 때에 믿음은 여기에 대항해서 죄인이 주의 자비를 얻으려고 나아가기만 하면 주께서는 언제나 모든 불의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한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이 아무리 이상하게 번뇌와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확신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시험하며 괴롭히는 모든 싸움은 이 확신을 굳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심각한 압박을 받는 듯한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불평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전혀 들어주시지 않을 듯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만일 그에게서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기도할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적다고 그리스도의 꾸지람을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마 8 : 25-26). 실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실 때에 그들을 제자의 대열에서 축출하거나 불신자와 동일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 결점을 털어 버리라고 역설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한 말을 반복한다. 믿음의 뿌리는 신자의 가슴에서 결코 뽑히는 법이 없고 가장 깊은 속에 굳게 박혀 있어서 믿음이 아무리 흔들리고 전후 좌우로 구부러지는 것 같아도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이를테면 적어도 잿더미 아래서도 잔존한다. 또 이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썩지 않는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과 똑같은 열매를 맺으며, 씨의 번식력은 결코 완전히 소멸되거나 죽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성도가 낙망하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목전의 사태로 보아서 그들이 파멸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의 희망은 원대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욥 13 : 15). 실상은 이러하다. 불신앙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지배력을 얻지 못하고 밖에서 공격을 가할 뿐이다. 불신앙의 무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다만 괴롭힐 뿐이며 혹은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것은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훈과 같이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다(엡 6 : 16). 이 방패를 들면 그것은 원수의 무기의 힘과 대항해서 완전히 물리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공격력을 약하게 만들며 우리의 급소를 찌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굳센 용사가 맹렬한 창의 공격을 받아 뒷걸음질치며 물러서는 것과 같다. 그리고 믿음 자체가 상처를 입을 때 그것은 용사의 방패가 창에 맞아 터진 곳이 있지만 창에 꿰뚫리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은 항상 일어서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 : 4)고 다윗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사망의 음침한 곳을 다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굳센 신자라도 무서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곁에 계셔서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아 주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곧 사라지고 확신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악마가 아무리 위대한 계략으로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믿음이 거하는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상 결국 물러나고 만다.37 그래서 결과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자들은 모든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오며 새로운 힘을 얻은 후에는 곧 다시 전쟁터로 나아간다. 그뿐 아니라 요한이 편지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 : 4)라고 한 말이 실현된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의 믿음은 한 두 번 정도 전투에서만 또는 어떤 특수한 공격에 대해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 천 번 공격을 당할지라도 전세계를 이길 것이라고 단정한다.

 

 

 

22. 옳은 두려움

 

"두렵고 떨림"에는(빌 2 : 12) 다른 종류도 있다. 이것은 믿음의 확실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 예를 보고 신자들이 그것을 자기들에 대한 경고로 생각하며 같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때에 신자들은 이런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진다. 또는 자신의 가련한 상태를 반성하여 전적으로 주를 의지할 줄 알게 되고, 주를 떠난 자신들은 어떤 바람보다도 불안정하며 덧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는 때에 신자들은 두렵고 떨림을 경험한다. 사도가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징벌을 일일이 묘사하는 이유는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이 같은 악행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고전 10 : 11). 사도는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확신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의 태만을 일깨울 뿐이다. 대개 육신의 태만으로 믿음은 강화되기보다는 파괴되는 편이 더 많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실패를 근거로 삼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 : 12, 롬 11 : 20)고 권고할 때에 그는 우리가 자신의 확고함에 자신이 없는 듯이 흔들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의도는 우리의 교만을 없애며 우리가 자신의 힘을 경솔하게 과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후에 그들 대신에 받아들여진 이방인들이 기뻐 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자들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관만을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또한 개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비교하여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앙과 배은 망덕에 대한 당연한 벌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다음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최근에 양자가 된 은혜를 교만이나 허영으로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았을 때에 양자의 계약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 남은 것 같이 이방인들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 나타나 이 미련한 육적인 자신으로 부풀어 자멸에 이르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악용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의 이 말을 선택된 신자들에게 적용하더라도 겁낼 것은 없다. 자부심을 억제하는 목적은 육의 잔재에서 쳐지나 간혹 성도의 마음속에 잠입하는 이 교만이 헛된 확신으로 방자하게 날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과 양심의 정기를 잃는 것과는 문제가 아주 다르다. 공포심을 불어넣어 양심의 기운을 잃으면 양심은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지 못하여 평안을 잃어버린다.

 

 

 

23. "두려움과 떨림"

 

그러므로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 12)고 가르칠 때에, 사도는 우리가 주의 권능을 높이며 자기를 아주 낮추는 것이 습관화 되도록 하라고 요구할 따름이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마음에 확신을 얻게 되려면, 우리 자신을 믿지 말 것과 자신의 파멸 상태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뜻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경배하리이다"(시 5 : 7).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경건한 두려움을 올바르게 결합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엄하심 앞에 나아갈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며, 그 존엄하신 광채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며 항상 두려워하는 사람은 복되다고(잠 28 : 14)한 솔로몬의 말 역시 진리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며 넘어지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고 우리를 더욱 조심성 있게 만드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느낄 때 혼미한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회복하며 낙심했던 마음이 그의 안에서 되살아나며 절망에 빠졌던 마음이 그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소생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무서워하는 동시에 확고한 위안을 얻는 것은 전혀 무방한 일이다. 눈을 자기의 허무성에 돌렸다가 하나님의 진실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 속에 공존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태만과 불안이 공존하는 것과 같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수고를 피하려고 아무 고통도 없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추궁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백성이 겸손하도록 훈련시키시며 그들이 역전 분투하는 동안에도 능히 자기를 억제하며 지배할 수 있도록 하신다.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서 사도가 말한 의도도 분명히 이것이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그의 백성에게 올바른 의욕과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하는 능력을 주신다고 한다(빌 2 : 12-13).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언자가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 : 5)고 한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낳을 뿐만 아니라 낙심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한 때에 그 은혜의 감미로움과 즐거움은 그 사람의 마음을 경외와 동시에 찬탄으로 가득하게 채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권능에 겸손히 복종하게 한다.

 

 

 

24. 확실성이 확고부동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는 최근에 어떤 사이비 교황주의 신봉자들이 슬그머니 교묘하게 꾸며내기 시작한 유해한 철학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전해온 유치한 회의적 사상을 옹호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공상에 도피처를 구하는 것이다. 즉 불신앙이 섞인 확신이란 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에게서 완전한 소망의 근거를 발견한다는 것을 그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항상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이 무가치함을 보고 동요하고 주저하기를 바란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양심을 소망과 공포 사이에 놓고 가끔 번갈아 가면서 이쪽 저쪽으로 왕래하게 만든다. 그들이 말하는 소망과 공포의 관계는 소망이 높아지면 공포는 억압되고 공포가 다시 올라가면 소망은 다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믿음의 확실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사용하던 노골적인 수단이 이제는 무효하게 된 것을 알고 은밀한 수단으로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가끔 절망에 빠지는 확신이란 어떤 확신인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면 거기에는 확실한 구원이 있고 돌이켜 자신을 보면 거기에는 확실한 멸망이 있으므로 불신앙과 소망이 교대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그가 멀리 나타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셔서 그의 모든 은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이 이론을 그들에게 향하여 말하려 한다. 자신을 돌아보면 그대들에게는 확실한 멸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대들에게 나눠주셨으므로 그의 것은 모두 그대들의 것이 되며, 그대들은 그의 일부분이 된다. 참으로 그와 하나가 되며, 그의 의는 그대들의 죄를 눌러버리며 그의 구원은 그대들이 받을 정죄를 말소하시며, 그의 높은 가치로 인해서 그대들의 무가치함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중재하신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그 친교의 유대를 우리는 용감하게 두 손으로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려 산 것이니라."(롬 8 : 10)고 가르친다. 이 사람들의 쓸데없는 생각대로 한다면,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죄인이므로 여전히 사망과 정죄를 면할 수 없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한 말은 훨씬 다르다. 그는 우리는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그 정죄를 삼켜 버렸다고 가르친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내가 앞에서 말한 이유를 든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결합해서 계실 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마침내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38 믿음이 연약하여 좌우로 맹렬한 공격을 받아 중단되는 일이 있으며, 시험의 짙은 암흑 속에서 그 빛이 꺼지는 일이 있다고 한 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은 영원히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25. 믿음의 두 가지 면에 대하여 베르나르드가 한 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할 때에 비슷한 추론을 한다. 그의 교회 봉헌에 관한 제 5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끔 나의 영혼을 반성합니다. 그런 때에 나는 영혼에서, 말하자면 두 가지 상반되는 국면을 발견하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나의 영혼을 그대로 보면 그것은 무로 돌아간다고(시 72 : 22 불가타 역) 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말입니다. 영혼이 가진 가련상을 일일이 들어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의 짐을 지고 암흑에 둘러싸였으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육정과 정욕이 끓어 오르며, 망상이 가득하여 항상 악에 쏠리며, 각종 죄악에 끌리는 영혼-한 마디로 말해서 수치와 혼미가 가득한 영혼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의로운 행실들을 진리의 빛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그것은 모두 월경 중인 여인의 더러운 옷과 같음을(사 64 : 6)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의한 행실들은 무엇에 비교할 것입니까?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 : 23). 그러면 무엇이라고 해야겠습니까? 틀림없이 '사람은 헛것' 같을 뿐입니다(시 144 : 4). 사람은 무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게 보시는 사람이 어떻게 전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떻게 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용기를 냅시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필경 우리의 무엇인가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오 '자비의 아버지' !(고후 1 : 3) 오 가련한 자들의 아버지 !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에게 마음을 두십니까?…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 : 21).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당신의 보물이 되겠나이까?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 : 17). 참으로 당신 앞에서 그러하나이다. 그러나 당신 안에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의 진리가 판단하면 그러하오나 당신의 진실하신 의도에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께서는 참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 : 17).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없는 것을 부르시므로 그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므로 그들은 있습니다. 그들 자신만으로는 없으나 당신이 함께 계셔주시므로 그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것같이, 그들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롬 9 : 11).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의 연결은 경탄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서로 연결된 것은 확실히 서로 파멸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그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무엇인지를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세히 검토한다면, 즉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다른 편으로 보면 크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검토해 본다면…우리의 자랑은 적어 보이겠지만 이전에 비해서 아마 더 크고 근거도 더 훌륭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자랑하리라고 믿습니다"(고후 10 : 17).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는 곧 자유를 얻으리라(렘 17 : 14 참조)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높은 망대에 올라 하나님의 도성을 찾으며, 그의 성전을 찾으며, 그의 집을 찾으며, 그의 신부를 찾도록 합시다.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존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39

 

 

 

26.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하나님에 대한 공경함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서는 모든 성도가 증언하며, 어떤 곳에서는 이것을 "지혜의 근본"이라 하고(시 111 : 10, 잠 1 : 7), 다른 곳에서는 "지혜" 자체라고 한다(잠 15 : 33, 욥 28 : 28). "여호와를 경외함"은 하나이지만 그 근본 의미는 이중적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주인으로서의 경배를 받으실 고유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리고 동시에 충성된 종으로서 처신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주를 아버지로서 순종하는 것을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공경"이라 부르시고 주인으로서 섬기는 것을 "경외" 또는 "두려움"이라고 부르신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 : 6)라고 말씀 하신다. 여기서는 두 말을 구별하시면서도 서로 융합시켰다. 그러므로 주께 대한 우리의 경외는 공경과 두려움이 섞인 것이 되어야 한다. 한 마음이 이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진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분이신가를40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리낌없이 죄를 짓고자 하는 육의 욕망은 불손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억제하려면 우리를 자기 능력 아래 두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즉시 생각해야 된다. 그리고 악한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사람들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27. 자녀와 종의 두려움

 

더우기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 : 18)고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는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생기는 공포심이며, 신자의 두려움과는 아주 다르다. 악한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벌만 피할 수 있다면 그들은 태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시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진노에 대해서 말만 들어도 무서워 떤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들 위에 그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언제든지 자기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을 벌보다 더 두려워하며, 마치 벌이 목덜미 위에 얹혀 있는 듯이 벌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벌받을 일을 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한다. 그래서 사도는 신자들을 향해서 "누구든지…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41 임하나니"(엡 5 : 6)라고 말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신자들에게 임하리라고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방금 열거한 악한 행위들을 하는 불경건한 무리에게 임할 진노를 생각하라고 경고하여 신자들이 그런 행위를 할 욕망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위협만으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허락을 내리시면, 우둔하고 나태한 그들은 마음이 굳어 더욱더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한번 얻어맞으면 싫든 좋든 간에 그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두려움은 보통 "종의" 또는 "비굴한" 두려움이라고 불려지며 자녀들에게 합당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두려움과 대조된다. 어떤 사람들은 세밀한 구별을 해서 중간적인 두려움을 끼어 넣는다. 이것은 비굴하고 강요된 공포심이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키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기꺼이 올바른 두려움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42

 

 

 

28. 신앙의 보증하는 것은 지상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는 한 아무 선도 부족할 수 없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약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충분히 확신하게 된다.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 : 3)라고 예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요약하여 말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되는 것을 해소시키고 은혜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고 한다(엡 2 : 14).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케 되실 때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라을 위험은 일소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파악한 믿음은 금세와 내세에 대한 약속을 얻었으며(딤전 4 : 8), 모든 좋은 일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었다. 그러나 좋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종류의 일들이다. 믿음은 물론 이 세상에서의 장수나 부귀를 기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이런 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믿음은 한 가지 확신만 있으면 만족한다. 곧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이 우리에게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가진 가장 중요한 확신은 내세의 생명을 기대하는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의 생명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포옹하신 사람들은 어떤 불행과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전한 행복으로 느끼는데는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운을 요약해서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모든 좋은 일이 이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어떤 좋은 일을 말할때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를 생명보다도 더 감미로우며 귀한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시 63 : 3).

요컨대 모든 일이 우리의 소원대로 잘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증오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행복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따라서 불행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아버지의 얼굴같이 비친다면,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구원을 돕는 수단이 될 것이므로 불행이 곧 행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가지 불행을 열거하면서 그런 불행에 의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자랑한다(롬 8 : 35, 39 참조).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항상 모든 번영의 근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말한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공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세운다.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시 23 : 4)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은혜 안에서 평화를 찾지 않으면, 또한 저 시편에 있는 말씀을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 : 12).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으면, 항상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신앙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값없이 주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29-32)

 

29.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지탱한다

 

믿음은 원래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약속 위에 선 것이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의 기초로 본다.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명령과 금지 약속과 경고 등 모든 일에 참되시다는 것을 확신한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공손히 받아들이며 금지 사항들을 지키며 경고하신 것에 유의한다. 그러나 믿음은 원래 약속에서 출발하며 약속에 안주하며 약속에서 끝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므로 이 생명은 징벌에 대한 선언이나 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약속하는 값없이 주신 약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조건부의 약속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약속은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며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구원의 약속으로 그것을 강화해야 하며, 이 약속은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우리의 가련함을 보면서 주께서 기꺼이 또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고(롬 10 : 8) 증언한다. 그는 복음과 율법의 교훈을 구별하며 약속도 구별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사신들을 보내어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지 않으신다면(고후 5 : 19-20 참조) 믿음을 확립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자주 믿음과 복음을 서로 관련시킨다. 자기가 복음 전파의 직분을 받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롬 1 : 5) 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친다(롬 1 : 16-17).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므로(고후 5 : 1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완전히 확고한 증언은-믿음이 알고자43하는-복음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값없이 주신 약속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야말로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악행을 심판하시며 징벌하시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신 분"이며(시 86 : 5 참조), "자비로우시며"(시 103 : 8),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시 103 : 8), "만유에 친절하시며"(시 144 : 9),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시 145 : 9)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30. 믿음이 은혜에 대한 약속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유

 

나는 피기우스(Pighius)나 그와 같은 개들이 짖는 것을 상대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들은 이 제한성을 공격하여 믿음을 산산조각을 낸 다음에 한 조각만 붙잡을 생각인 것 같다.44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든지 은혜의 소망을 주시든지 하나님의 성실성이 믿음의 공통된 대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도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 노아가 그것을 두려워한 사실을 사도는 믿음으로 돌린다(히 11 : 7). 만일 절박한 징벌을 두려워서 믿음이 나온 것이라면, 믿음을 정의할 때에 경고를 제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은 마치 우리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부분을 고려한다는 것을 부인하는것같이 부당한 비난을 한다. 우리의 의도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역설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값 없이 주신 약속에 도달하기까지는 믿음이 견고하게 설 수 없다. 둘째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하지 않으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을 결코 화해시키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점은 다 유의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악한 자들과 구별하며 신자를 불신자와 구별하는 믿음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은 모두 정당하며, 그의 경고는 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신자라고 부를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성립될 견고한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믿음을 논하는가? 구원의 길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정의할 때에 이 특별한 효과를 역설하며, 신자와 불신자를 분리하는 표지로서 각자의 특색을 말하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요컨대 악의를 가진 자들이 이 주장을 헐뜯으려면 그들은 반드시 바울까지 비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롬 10 : 8).

 

 

 

31. 신앙에 대한 말씀의 의미

 

이 점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전에45 나무의 열매를 위해서 산 뿌리가 필요한 것과 같이, 믿음을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것을 다시 한번 추론한다. 이는 다윗이 증거 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시 9 : 10).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의 상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인자하심을 증거하실 때에 생긴다. 이 점을 예언자는 다른 곳, 곧 "주의 말씀대로…주의 구원"(시 119 : 41)에서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하오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한다(시 119 : 42 ,40 ,94). 여기서 우리는 우선 믿음과 말씀의 관계를 다음에는 그 결과인 구원을 주목해야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제외하지 않는다. 이 권능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이 서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합당하게 공경할 수 없다.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평범한 말을 한 것같이 볼 수도 있다. 즉, 축복받은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믿었다고 바울은 말한다(롬 4 : 2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자신에 관해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고 한다(딤후 1 : 12).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의심이 얼마나 자주 마음속에 잠입하는가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에 당연한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적지 않게 진보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능력이 있으시다고 우리는 모두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시험을 당하여도 무서워 쓰러지며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절감시키고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하여 우리를 위협하는 사탄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사야는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당당하게 논한다(사 40 : 25이하, 40-45장에서도 빈번히). 이사야가 용서와 화해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에는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하며 불필요한 긴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때가 많다. 그러나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 법칙으로 온 우주 전체를 얼마나 놀랍게 주관하시는가를 상고한다. 그러나 여기에 현 사태를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우리의 귀는 말씀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그 진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유력한 능력을 선언하는 것은 다른데서46 말한 바와 같이 경건한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권능을 활용하여 곤란에 대처하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이신 것을 증명하실 때에 행하신 업적들을 회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구속에 관하여 자주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번 자기들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 구원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윗의 예를 보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그들이 앞으로도 하나님을 굳게 믿도록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가 버림을 받은 듯이 보여질 때에 우리는 시야를 넓혀 하나님의 이전의 은혜를 회상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시편에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시 143 : 5)라고 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 하리이다"(시 77 : 11)라고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행하신 일들에 대한 생각은 말씀이 없 으면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증거로 조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단정한다. 이 단정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래와 리브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은 열렬한 신앙이 불타는 듯했으며, 말씀의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이기 때문이다. 사래는 약속받은 후손을 얻으려는 열망으로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다(창 16 : 2, 5). 사래가 여러 가지로 죄를 지은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가 열성으로 흥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내에 머물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욕망이 신앙에서 나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택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약은 속임수로 아들에게 축복을 얻어 주었다(창 27 : 9). 그녀는 남편 곧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전달하는 사람을 속이고 아들에게 억지로 거짓말을 시킨다. 여러 가지 간계와 기만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더럽힌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롱함으로써 그가 할 수 있는데 까지 그 약속을 깨뜨렸다(창 27장).

그러나 이 행위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고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었지만 신앙이 없는 행위가 아니었다. 리브가는 지상적인 유익을 얻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큰 곤란과 위험이 넘치는 일을 성취하려고 분투 노력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소한 장애물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족장 이삭에 대해서도 비록 둘째 아들에게 영예가 옮겨진 것에 관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맏아들 에서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신앙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예들을 보면 신앙에는 확실히 과오가 섞이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진정한 신앙은 항상 이기는 법이다. 리브가의 특별한 과오가 축복을 무효로 만들지 않은 것과 같이 그녀의 믿음도 말살되지 않았다. 이 믿음은 대체로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문제의 행동도 신앙이 발단과 원인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점에서 인간적인 심리를 드러내 보이는데 사람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단속을 완화하면, 아주 재빨리 곁길로 들어서 버린다. 그러나 사람의 태만과 무력은 신앙을 흐리게 할지라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동시에 이 예들은 우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를 경고하며 우리가 이미 가르친 것을 확인한다. 곧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사래와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비밀히 속박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순종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면, 정도를 벗어난 술책을 쓰다가 제정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32. 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

 

또 우리가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안에 포함시키는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사도는 복음 전체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포함시킨다(롬 1 : 17 참조).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가르친다(고후 1 : 20). 이 사실에 대한 이유는 알기 쉽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을 통해서 자신의 선하심을 증거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자주 받고 또 받으면서도 도리어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해서 이 사실에 또 다른 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정하는 때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마음속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 수 없고 짐승들이 그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받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자기들을 위해서 주신 약속을 상습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더욱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약속은 우리 마음에 신앙을 일으킬 때에 처음으로 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리의 배신 때문에 약속의 힘과 특성이 소멸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의 선하신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재촉하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약속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한다는 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데47 이점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 : 17, 17 : 5),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안에 거하고 머문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 사랑이 우리들 위에 쏟아진다. 이는 바울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 : 16).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재하실 때 은총은 반드시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사도는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며(엡 2 : 14), 다른 곳에서는 진실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와 연결시키는 띠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롬 8 : 3 이하 참조). 따라서 우리는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며 실현된다고 당당하게 가르친다(롬 15 : 8).

어떤 예는 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예컨대 수리아 사람 나아만(Naman)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예언자에게 물었을 때에 중보자에 대한 교훈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경건하다고 칭찬을 받았다(왕하 5 : 1-14, 눅 4 : 27). 이방인이요 로마 사람인 고넬료가 유대인들이 그것도 그 일부 사람들이 겨우 희미하게 알고 있던 일을 분명하게 알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구제와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행 10 : 31). 그리고 나아만의 제물은 예언자의 대답에 의해서 인정되었다(왕하 5 : 17-19). 신앙이 없이는 이 두 사건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빌립이 만난 내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에게 다소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는 예배하기 위해서 수고를 하며 비용을 들이면서 어려운 길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행 8 : 27). 그러나 빌립이 울었을 때에 그가 중보자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이 나타났다(행 8 : 31). 나는 그들의 신앙이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위(位)라고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권한과 직분에 대해서까지도 함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비록 조금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원리를 가르침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시가 모르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먼 예루살렘까지 왔을리가 없다. 고넬료는 유대교를 믿게 되자 확실히 오래되지 않아서 참 교리의 기초를 알게 되었다. 나아만에 대해서는 엘리사가 그에게 사소한 일들을 가르쳐주면서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애매모호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에 정한 제사를 실천했으며, 그 제사의 목표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들의 율법의 제사는 이방인들의 거짓 제사와 구별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된다. 33-37)

 

33.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에 효과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사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그들은 지식에서 생기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심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48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도달하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 : 14)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갈 3 : 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성령의 선물이 하나 뿐이었다면, 바울이 성령을 "믿음의 결과"라고 한 것은 불합리한 말이었을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끊임없이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만드신다고 하면서 그 여러 가지 은사를 열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일들을 바울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요 6 : 65) 하는 것은 대단히 모순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얼마나 은밀하고 고상한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사람이 얼마나 우둔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지각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확고 불변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4.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고전 2 : 11) 아무도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사물에서도 하나님의 진실성을 잘 믿지 못하면서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이해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을(고전 2 : 9 참조)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진실성이 확고부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서 사람의 통찰력은 완전히 압도되어 무력하게 되므로 주의 학교에서 전진하는 첫걸음은 자기의 통찰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베일같이 우리를 덮고 "어린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마 11 : 25, 눅 10 : 21) 하나님의 비밀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마 16 : 1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교훈이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 : 14)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원이 필요하며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권능만이 여기에서 성공할 수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 : 34). 그러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 : 10).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 : 16)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 : 44),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 : 45)라고 말씀하신다. 일찍이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만이 그를 보았다(요 1 : 18과 요 5 : 37의 융합).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단 끌려가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이해력은 초월한 경지에 이른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를테면 새로 날카로운 시력을 얻어 이전에 눈을 멀게 했던 그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또 인간적인 이해력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드디어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며, 이전에 심히 어리석고 미각이 둔하던 것과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눅 24 : 27)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 24 : 45) 하시기까지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비록 사도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배웠지만 그들이 귀로들은 바와 같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 주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실 필요가 있었다(요 16 : 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이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비치지만,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멀었다. 따라서 성령이 내면적 교사가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 없다.

 

 

 

35. 인간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다른 장소에서 자연의 부패상을 논할 때에 우리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기에 부적당하다는 것을 자세히 밝혔다.49 따라서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여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고 바울의 말만을 회상하려고 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 우리에게는 원래 없는 믿음 그 자체를 바울은 "믿음의 마음"(고후 4 : 13)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 안에서 "하나님이…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기를 기도한다(살후 1 : 11). 여기서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르며, 그것을 형용사로서 구별하는 대신 "선을 기뻐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 이와 같이 그는 사람 자신이 믿음을 일으킨다는50 것을 부인하며,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첨가한다. 고린도서에서 그는 믿음은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근거로 삼는다고 말한다(고전 2 : 4-5). 그는 사실 외부적인 기적에 대한 말도 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눈이 어두워 이 기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곳에서 말한 인치심을 포함시킨다(엡 1 : 13, 4 : 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광스러운 선물로 그의 크고 풍성하신 은혜를 더 완전히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 선물을 무차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고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특권으로서 주신다. 이에 대한 증거들을 우리는 위에서 인용하였다. 증거의 충실한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감탄하여 "우리 구주께서는 믿음이 공로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서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 : 44),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요 6 : 65), 두 사람이 듣는데 한 사람은 멸시받고 한 사람은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멸시받는 사람은 자기 때문인 줄로 여기고 세움을 입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같이 자랑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른 구절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이유로 한 사람에게만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가?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이것이 십자가의 깊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의 어떤 깊은 곳에서…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나온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어째서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그 어째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가? 이 점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밑 없는 구덩이며, 십자가의 깊이다. 나는 찬탄할 수는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51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의 힘으로 우리를 조명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실 때에 동시에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시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참여하게 된다.

 

 

 

36. 마음의 문제로서의 믿음

 

이제 남은 일은 지성이 흡수한 것을 마음속에 부어넣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말씀이 두뇌의 상층부에서 돌아다녀서는 안되고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은 시험의 모든 전략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방위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조명이 지성에 진정한 이해력을 준다면,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 또한 성령의 능력임은 더욱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하는 마음은 우매한 마음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이다.52 지성이 사상을 얻는 것보다 마음이 불신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성령이 날인하는 일을 맡으셔서, 이미 마음에 확실성을 심어준 그 약속들을 마음에 인치시며, 마음을 견고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보증의 직책을 맡으신다. 사도는 "너희도…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엡 1 : 13-14) 되느니라고 단정한다. 바울이 이를테면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인을 치셨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지 않는가? 우리 중에 복음을 확고하게 하신다고 해서 그는 성령을 "약속의 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같은 방식으로 고린도서에서도 그는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 : 21-22)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소망의 확신과 담대함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의 보증이 그 확신의 기초라고 한다(고후 5 : 5).

 

 

 

37. 의심은 믿음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말한 것을53 잊지 않았으며, 경험에 의해서 자주 그것을 회상하게 되는데 곧 믿음은 여러가지 의심에 시달려 신자의 마음은 평안한 때가 거의 없으며, 적어도 항상 평화로운 상태를 즐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격 무기가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지라도 그들은 시험의 골짜기에서 일어서며 망대 위에 굳게 선다.

참으로 우리가 시편에 있는 말씀을 굳게 잡고 있으면 이 확신만이 믿음을 키워 주며 믿음을 보호한다.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 : 1-3)라고 하였고 다른 시편도 이 아름다운 평안을 찬양한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 : 5). 다윗이 항상 평온하며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고, 그 범위 내에서는 자기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경멸한다고 장담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한다. 이사야서에서 "너희가…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이라고 했으며(사 30 : 15), 시편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하였다(시 37 : 7). 이런 구절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이라고 말한다(히 10 : 36).

 

 

 

(여기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의 항의를 논박함. 38-40)

 

38. 신앙의 확신에 관한 스콜라 철학자의 오류

 

그러므로 우리는 스콜라 철학자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판단 할 수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각 사람이 스스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부에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도덕적 판단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54 사실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삼아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생각을 판단해야 된다면, 우리는 추측으로 은혜에 전혀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하고 값없이 주시는 약속에 대응해야 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순결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한다면, 대체로 우리는 어떤 신념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55 논하기로 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이는 특히 믿음과 가장 반대되는 것은 의심과 유사한 모든 것이며, 추측도 그 하나님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전도서에 있는 증언을 항상 인용하여 그 뜻을 왜 곡되게 해석하는 악행을 범한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사람이 알지"(전 9 : 1) 못한다고 한 말씀이다. 라틴어 성경의 번역이 잘못이라는 것은 묻지 않더라도 솔로몬이 이 말을 하는 뜻은 어린이들이라도 오해할 수가 없다. 현존 상태를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미움으로 추궁하시며 누구를 사랑으로 안으시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헛수고를 하는 것이며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이 솔로몬의 의도이다. 또한 "의인과 악인이며…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라 한다(전 9 : 6).56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번창하게 하시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며, 괴롭히시는 사람에게 항상 미움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미련한 천성을 증명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할 일에 대해서도 인간성은 심히 우둔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조금 전에 사람과 짐승이 동일하게 죽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과 짐승의 혼과의 차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전 3 : 19). 이 말을 읽는 사람이 영혼 불멸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추측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의 사태를 눈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도 전혀 확실하지 못하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이 바른 정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재함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경솔한 추정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미약한 이해력을 표준으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판단하려는 것이라면, 그런 경우에 한해서 나는 그들의 주장에 양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바울과 함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느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 : 12)고 말하는데 그들이 성령을 모욕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에게 대항하여 소리를 칠 수 있는가? 성령께서 주신 계시를 허위, 불확실, 모호 등의 말로 비난하는 것이 무서운 모독 행위라면, 그 확실성을 단정하는 우리는 무슨 죄를 짓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감히 그리스도의 영을 자랑하는 것도 대단히 무모한 짓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세상의 선생으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초에 대해 이렇게 수치스러운 실수를 하며 이렇게 우둔한 짓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 그들이 쓴 글이 남아 있어서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명한다(롬 8 : 1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 정신으로 움직이며 하나님의 영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가르치기를, 우리는 성령의 명령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령만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한다(롬 8 : 16).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나 올바른 기도를 인도하셔야 할 성령을 배제한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한다(롬 8 : 9 참조).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필요로하지 않는 기독교를 조작한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된 부활의 소망이 우리에게 없다고 한다(롬 8 : 11). 그들은 이런 느낌이 없는 소망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혹 이렇게 대답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나 확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겸손한 태도이다57.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 반성하며, 그리스도를 소유했는지를 시험해 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하였다(고후 13 : 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3 : 24, 4 : 13)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확언하셨는데(사 44 : 3, 욜 2 : 28 참조), 우리가 이 영을 받지 않고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믿음은 특히 성령의 특별한 사역인데 그 믿음을 성령에게서 분리시키려는 것은 성령을 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점은 경건의 초보이므로 성령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감히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만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가장 가련한 장님의 표시이다. 이런 자랑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 : 17).

 

 

 

40. 우리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불확실성

 

그들은 믿음의 확고부동성을 해하려고 한편으로만 애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공격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의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인내 하는데 대한 지식은 어디까지나 미결이라고 말한다.58 도덕적 추측에 의해서 우리가 이 순간에는 은혜를 가졌다고 단정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훌륭한 확신이 남을 것인가 ! 사도가 하는 말은 훨씬 다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 38-39). 그들은 사도가 특별한 계시를59 받아서 그런 확신을 가졌던 것이라고 쓸데없는 해석을 지껄인다. 그러나 그들은 피할 수 없이 단단히 잡혔다. 바울이 논하는 것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믿음으로 얻는 은혜이며 그만이 체험한 일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약하고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 : 12). 사실 두렵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설명하듯이(벧전 5 : 6),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강하신 손아래 낮출 줄을 알게 하는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확실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믿음의 본성은 현세 생활이 지나간 후에 있을 미래의 영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을 통하여 하늘의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러므로 이런 자랑은 교만과는 전혀 다르다. 만일 이 자랑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행동은 겸손이나 순종을 증거 한 다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악행으로서 도리어 그의 극심한 배은망덕을 폭로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 및 사랑과의 관계. 41-43)

 

41. 히브리서 11장 1절에 있는 믿음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표현하려면, 믿음의 합당한 기초가 되는 소망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따라서 그 소망을 제거한다면 믿음은 완전히 무너진다. 아니,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믿음을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정의와 그가 믿음을 논할 때에 사용한 모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가르친다(히 11 : 1). 그런데 그가 사용한 실상(hypostais 휘포스타시스)이란 말은 일종의 밑받침을 신자의 마음이 그 위에 의지하며 그 위에서 평안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언약하신 것들을 확실하게 또 안전하게 소유한 것이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상의 뜻을 확신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60 가정에서 한 말인데, 나는 더 많이 통용되는 해석을 취하지만 이런 해석도 싫어하지 않는다. 동시에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마지막 날 "책들이 펴 놓일" 때까지(단 7 : 10) 우리의 구원에 속한 사물들은60a 너무도 고상하여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을 것이며,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이 사물들을 소유하는 방법은 다만 우리의 감각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며, 우리의 지각 능력을 모든 세상 물건의 저편으로 향하게 하는 것, 곧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확실히 소유했다고 믿는 것들은 소망 가운데 있는 것,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 : 24)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가 믿음을 "명시" 또는 "증거"라고 부를 때에-또는 어거스틴이 자주 번역한 것같이61 "현재 없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신"이란 말은 헬라어는 "엘레그코스"(e[legco" 히 11 : 1)이다.-바울은 마치 믿음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의 증거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봄이요, 모호한 것들의 명료함이요, 현재 없는 것들의 현존이요, 숨은 것들의 보임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하나님의 비밀들, 특히 우리의 구원에 속한 비밀들은 그대로는 또는 그 본성대로는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이미 실행된 것,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리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다고 확신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

 

그러나 사람의 믿음이 깨우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면, 그것과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가 간직하신 그 풍성한 행복을 알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번 감동을 받으면 사람은 그 행복감에 압도되며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비틀어지고 사악한 마음이 이런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으로 바로 하늘에까지 들려가고 비장된 하나님의 보고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신성한 경내에 들어간다. 여기는 불결한 마음이 들어가 더럽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먼저 있다고62 가르치는 것은 미친 말에 불과하다. 우리 속에 처음으로 자랑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63 다음과 같은 베르나르드의 말은 훨씬 더 바르지 않은가? 바울이 신자들의 "자랑"(고후 1 : 12)이라고 부른 양심의 증거는 셋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선,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믿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값없이 주시지 않으면 영생도 행위의 공로로서는 얻을 수 없다. 조금 지나서 그는 부언한다. "이런 것들로써 충분한 것이 아니고 이것들은 아직 믿음의 시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면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믿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죄가 용서되려면 성령의 증거도 즉 구원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용서하시며 공로를 인정해 주시며 상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보 단계에서 굳게 설 수 없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64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적당한 곳에서 논하게 되겠고65 지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4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뗄 수 없는 동반자로서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한다. 이 소망을 제거한다면, 아무리 웅변적으로 또 아름다운 말로 믿음을 논할지라도 믿음이 없다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66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하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시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내는 때를 기다린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요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되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 8 : 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해 주어 도중에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 : 3)고 한 예언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사 8 : 17) 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한다(벧후 3 : 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똑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깊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시 90 : 4, 벧후 3 : 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다.

 

 

 

4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기반 위에 섰다

 

이러한 관계와 유사점으로 인해서 성경은 간혹 "믿음"과 "소망"이란 말을 서로 바꾸어 사용한다.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가르칠 때에(벧전 1 : 5), 그는 소망에 해당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소망은 곧 믿음을 위한 자양분과 힘이라고 우리는 이미 가르쳤기 때문이다.

같은 편지에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한 것과 같이(벧전 1 : 21) 믿음과 소망은 간혹 결합된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나타나기까지 우리 자신의 소원을 보류한다고 하여(빌 1 : 20) 소망에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내가 이미 인용한 히브리 11장(1절)67을 보면이 모든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바울은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같은 뜻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쫓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 : 5). 다시 말하면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밑에 숨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가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를 소망의 두가지 근원이라고 한 것이68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다. 희망의 목표는 믿음의 목표와 다를 수 없다.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이미 분명히 설명하였다.69 이를테면 이 목표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롬바르드가 어떤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가를 듣는 것이 마땅하다. "공로 없이 무엇을 감히 소망한다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참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라고70 그는 말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는 하나님을 진실하시다고 믿는 사람을 경솔하고 참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하는 것이니 누가 이런 짐승들을 마땅히 경멸하지 않을 것인가? 주의 자비에서 모든 것을 대망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자비를 의지하고 안심하는 것은 불손한 짓이라고 한다. 참으로 훌륭한 선생이다.-저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논쟁가들의 학과에서 이 사람의 제자들이 배출된 것도71 그럴 듯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인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가지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성을 기꺼이 믿고 그의 자비만을 의지하며 행위에 대한 신뢰를 버리면서, 감히 견고한 소망을 품는다. 하나님께서는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 : 29)고 하셨다.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 회개1

 

(믿음의 결과는 회개이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오류를 논평함. 1-4)

 

1. 믿음의 결과로서의 회개

 

믿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유하는가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그의 은혜를 받아 즐기는가를 우리는 부분적으로 가르쳤을 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결과에 대해서 설명을 첨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장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죄의 용서가 복음의 전체라고 하는데는(눅 24 : 47, 행 5 : 31)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논의가 이 두 가지 논제를 누락시킨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고 불완전하며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회개와 죄의 용서는-곧 새로운 생활과 거저 얻는 화해는-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 따라서 이치로 보나 가르치는 순서로 보나 여기서 이 두 가지를 다 논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곧 할 일은 믿음에서 회개로 변이되는 것이다.2 이 제목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사람이 믿음으로만 그리고 단순히 용서에 의해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경우가 더욱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제생활은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일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회개가 항상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3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여 죄가 용서됨을 알리는 목적은 죄인들이 사탄의 압박과 죄의 멍에와 타락한 생활의 속박에서 풀려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하려는 것이므로 이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의 과오를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서며 회개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고4 하며, 회개가 믿음을 따르거나, 나무의 열매같이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의 능력을 깨달은 일이 없고 사소한 이유로 이런 생각을 한다.

 

 

 

2.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요한이 전도할 때에 먼저 백성에게 회개하라고5 역설하고 다음에 천국이 가깝다는 것을 첨부하였으며(마 3 : 2, 4 : 17), 사도들이 받은 전도 명령의 내용도 똑 같았다고 누가가 전하는 바와 같이(행 20 : 21) 바울도 이런 순서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글자의 순서를 미신적으로 고집하면서 그 말들을 함께 연결하는 의미를 무시한다. 주그리스도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 : 2)고 전도할 때에 그들은 은혜 자체와 구원의 약속에서 회개에 대한 이유를 이끌어 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하늘나라가 가까왔으므로 회개하라."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

마태는 요한이 전도한 말을 전한 다음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에게서 성취된 것이라고 하며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마 3 : 3, 사 40 : 3). 그러나 예언서에서는 그 소리가 우선 위로의 말과 기쁜 소식으로 시작할 것을 명령한다(사 40 : 1-2). 그렇지만 회개의 근원이 믿음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회개를 하게 만들기까지에 어떤 시간의 공간적 사이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데 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믿을 수도 없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 명백하게 논하겠다. 은혜를 깊이 알게 되기 전에, 또는 은혜를 맛보기도 전에, 양심의 가책에 눌리게되거나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속은 사람들도 혹 있을 것이다. 또 이 시초의 공포심을 어떤 사람들은 미덕으로 인정한다.

이는 그것이 진정하고 올바른 복종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6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가 또는 경건 생활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시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 곳에 올바른 생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서 그의 지체들에게 전달하는 그 영이 지배하셔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는 시편의 말씀과 같이(시 130 : 4),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셨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복종을 기뻐하신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죄를 관대히 용서해 주시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호의를 알리는 표지이다.

호세아의 권고는 이 점을 알려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 : 1). 용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비극의 수단으로 덧 붙여서, 사람들이 죄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잡아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회개로부터 시작하려는 자들의 미친 짓에는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들은 새로 개심한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참회하라고 명령하고 이 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런 사람들이 재세례파에 대단히 많고 특히 영적이라는 세상사람들의 말을 굉장히 기뻐하는 사람들이7 그렇다. 그들의 동반자인 예수회 회원들과8 그들과 비슷하다는 사람들도 그렇다. 분명히 그들은 경박한 생각으로 회개를 겨우 며칠 동안으로 제한하나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3. 죽임과 살림

 

그러나 회개에 대해서 잘 아는 어떤 사람들이 훨씬 전에 성경의 표준에 따라 단순하고 진지하게 말한 것이 있다. 그들은 회개는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의9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죽임"에 대해서 그들은 죄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된 영혼이 슬퍼하며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지 죄를 진정으로 알게 된 때에는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며, 다음에 진정으로 자신을 싫어하며, 자신이 가련한 자, 멸망할 자인 것을 인정하며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되면(여기서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과 타격을 받게 된다. 교만이 꺽이고 낙담하여 떨며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것이 회개의 시초요 보통 이것을 "통회"(contrition)라고 부른다. "살림"은 믿음에서 생기는 위안이라고 해석된다. 바꿔 말하자면 죄의식으로 좌절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싸였던 사람이 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즉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깨닫고-일어나며 정신을 차리며 용기를 회복하고, 말하자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죽임"과 "살림"이라는 말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회개의 힘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살림"을 기쁨(laetitia)이라고10 혼란과 공포에 빠졌던 마음이 진정된 후에 받는 행복감이라고 해석한다면,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살림"이라고 한 부분은 거룩하고 헌신적으로 살겠다는 소원을, 곧 중생에서 생기는 소원을 의미한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살기 시작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죽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4. 율법하의 회개와 복음하의 회개

 

다른 사람들은 회개란 말의 뜻이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특징으로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율법의 회개"라고 부른다. 죄인은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의 회개"라고 한다.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인은 큰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과 공포심에 대한 위로와 불행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다.11 "율법의 회개"에 대한 실례로서 그들은 가인과(창 4 : 13), 사울과(삼상 15 : 30), 유다를(마 27 : 4) 든다. 이 사람들의 회개에 대한 성경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자기들의 죄가 중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처벌자와 심판자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생각에 압도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생에서 이미 지옥에 들어간 사람, 하나님의 존엄하신 진노 앞에 벌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으며,12 그들의 회개는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 "복음의 회개"의 예는 죄의 가시에 찔려 통증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생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 주께로 돌아선 사람들이다. 히스기야는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확신을 얻었다(왕하 20 : 2, 사 38 : 2). 니느웨(Ninevetes) 사람들은 멸망하리라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지만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진노를 그치시고 자기들 쪽으로 돌아서시기를 바라고 기다렸다(욘 3 : 5,9).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것이 큰 죄였다고 고백하고 이어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삼하 24 : 10). 나단(Nathan)의 책망을 듣고 다윗은 자기의 간음죄를 인정하고 주의 앞에 엎드렸고, 또한 용서를 기다렸다(삼하 12 : 13,16).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의 회개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이렇게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 : 37). 베드로 자신의 회개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몹시 울었으나(마 26 : 75, 눅 22 : 62), 소망을 버리지는 않았다.13

 

 

 

(회개를 정의함 : 그 요소들인 육의 죽임과 영을 살림을 설명함. 5-9)

 

5. 정의

 

이런 이야기는 다 사실일지라도, 내가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보면, "회개"란 말의 뜻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을 회개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 : 21). 여기서 그는 회개와 믿음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진정한 회개는 믿음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서로 분리할 수는 없을지라도 구별은 해야 한다. 믿음 안에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나 믿음과 소망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회개와 믿음도 영구적인 줄로 묶여 있지만, 서로 결합할 필요는 있어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을 전체적으로 "회개"란 말로 이해하며, 믿음이 이 회심의 중요 부분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하는지는 회개의 능력과 본질을 설명하면 곧 밝혀질 것이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전환 또는 귀환이라는 뜻에서 왔다. 헬라말은 마음 또는 의도를 바꾼다는 뜻에서 왔다. 그리고 내용도 이 두 가지 어원에 밀접히 대응된다. 그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며, 우리의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회개의 좋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곧 회개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일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다.14 그리고 회개의 요소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는 것과 성령에 의한 삶으로서 성립된다.

옛날 예언자들과 그 후의 사도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권고하며 설교한 회개의 뜻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설교자들이 얻으려고 노력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기들의 죄를 알고 당황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가슴을 찔린 사람들이, 자기들이 노여우시게한 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한 태도를 가지며, 진정한 회개로 바른 길에 다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께로 돌아서라 또는 돌아가라", "바른 정신을 차리라", 또는 "회개하라"(마 3 : 2)15등의 말은 같은 뜻으로 서로 바꿔 쓰인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정욕대로 방종하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하며, 그들의 지도자가 부르는 곳으로 언제든지 갈 생각을 하게 됐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했다고 한다(삼상 7 : 2 참조). 또 요한과 바울은 모든 행동에서 이런 회개를 보이며 증거하는 생활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한다(눅 3 : 8, 행 26 : 20, 롬 6 : 4 참조).

 

 

 

6.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그러나 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가 결론한 정의를 좀더 분명히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회개를 세 가지 제목으로 나누어 검토해야 한다. 첫째로, 회개는 "하나님께로 생활을 전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가 변모할 것을 요구한다. 영혼은 그 옛 성질을 벗어버려야만 비로소 새로운 갱신과 조화되는 행위를 낳을 수 있다. 이 변화를 표현하고자 선지자는 회개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에게 새 믿음을 가지라고 한다(겔 18 : 31).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자주 가르친다(신 6 : 5, 10 : 12, 30 : 2, 6, 10). 이 말은 예언서에서 자주 반복되었다(렘 24 : 7). 또 모세는 회개를 "마음의 할례"라고 불러서 가장 깊은 감정까지 검토한다(신 10 : 16, 30 : 6).

그러나 회개의 진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예레미야 4장에 있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 : 1, 3-4) 여기서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사악한 생각을 때어버리지 않으면, 의를 행하려 하여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리라고 주께서 단정하시는 것을 보라. 또 그들의 마음을 철저히 움직이시려고 그들이 대하고 있는 분은 술책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경고하신다.16 이는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가지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약 1 : 8 참조). 그러므로 위선자들이 여러 가지 의식으로 가시적으로는 회개하는 척하면서 자기들이 압박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불법의 무거운 짐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는 그 서투른 노력을 이사야는 야유한다(사 58 : 6). 거기서 그는 또 어떤 의무를 다하면 진지하고 올바른 회개가 되는가를 훌륭하게 밝혀 준다.

 

 

 

7.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 생긴다

 

둘째로, 우리는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대에 오르셔서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시는 날이 오리라는 잘못된 생각이 마음속 깊이 철저하게 박힐 때에, 가련한 죄인은 일순간도 평안하지 못하고 심지어 호흡까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오직 어떻게 생활 방식을 고쳐야 심판대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회개를 전할 때에는 심판에 관해서 언급하는 때가 많다. 예레미야의 예언서에는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렘 4 : 4). 바울이 아덴 사람들을 책망할 때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다(행 17 : 30-31). 그밖에도 여러 구절이 있다.

성경은 간혹 과거에 받은 벌을 가리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만일 죄인들이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벌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명기 29장(19절 이하)에 이런 예가 있다. 죄를 무서워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생각이 회심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의 원인이라고 한다(고후 7 : 10). 우리가 벌을 싫어할 뿐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할 때에,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당연한 생각이다. 우리가 날카롭게 찔리지 않으면, 우리의 육의 태만은 고쳐지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더 깊이 찌르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찔림은 목석같이 둔한 우리의 육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쇠망치로 때려눕히듯 해야 되는 고집도 있다.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실 때에 더욱 엄격하게 하지 않으실 수가 없다. 잠든 자들을 조용하게 달래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알게 되는 말씀들을 나는 열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회개의 시작이 되는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사람의 생활이 모든 덕으로 가득 찼다고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활은 세상의 칭찬은 받겠지만 하늘에서는 가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그의 권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리와 영광을 도적질하는 불경 행위이기 때문이다.

 

 

 

8. 죽임과 살림은 회개의 구성 부분이다

 

셋째로,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린다는 두 부분으로 성립된다는 말을 설명해야겠다. 이점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은 육적인 사람들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맞도록 단순하고 무뚝뚝하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그들은 "행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라"고 한다(시 37 : 3, 8, 27의 융합). 마찬가지로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사 1 : 16-17)라고 하였다. 그들이 사람들을 향하여 악을 떠나라고 호소할 때 요구하는 것은 악과 패역함이 가득한 육을 전멸시키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벗어버리며 우리가 타고난 성질에서 떠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 자신에서 나온 것을 무엇이든지 일소하지 않으면, 우리의 육을 완전히 말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육의 감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롬 8 : 7 참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첫걸음은 우리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선지자들은 변화된 상태를 회개의 열매 곧 의와 공의와 자비라고 부른다. 마음이 의와 공의와 자비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으면 이런 의무들을 때때로 이행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의 영혼을 감화시키시며,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정으로 그의 거룩함에 깊이 잠길 때 우리의 영혼이 참으로 새로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 있으므로 자기 부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바른 길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세상과 육을 포기하며 우리의 악한 욕심과 작별하고 심령으로 새로워지라는 명령을 받는다(엡 4 : 22-23). 참으로 "죽임"이란 말 자체가 우리의 이전 성질을 잊어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죽임"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검이 우리를 쳐 죽이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건 생활의 초보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자녀 가운데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공통된 본성이 죽어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다.

 

 

 

9.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

 

이 두 가지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참할 때에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롬 6 : 6) 부패한 본성이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부활에 참가한다면 우리는 그 부활의 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하나님의 의에 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17 사도가 가르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 : 18) 했으며 같은 뜻으로 다른 구절에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3, 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 참조)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입은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생명의 기업을 받도록 양자로 삼으신 모든 사람을 완전히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 회복은 한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평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어떤 때에는 느린 걸음으로, 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바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고후 4 : 4)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엡 4 : 24 참조) 해석하는 것을 공격하여 이것은 현세 생활의 상태와 하늘 영광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논쟁가이며 배반자인 스타필루스(Staphylus)의 패역은 더욱 극심한 것이다.18 그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정의할 때에 그 완전 무결한 상태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질수록 7球ご纛?형상은 그의 안에서 더욱 빛난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도록 하신다.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 생활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한다. 10-15)

 

10.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기의 무력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19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서 죄를 짓게되며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성도들이 육욕(concupiscence)의 병에 잡혀 있어서 가끔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저술가들의 생각을 많이 연구할 필요도 없이 어거스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부지런히 충실하게 수집했기20 때문에 독자들이 고대인들의 의견에 관해서 확실히 알고 싶으면 그에게서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우리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21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연약"이란 말로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연약"함을 느끼는 일이나 그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떤 행동이나 동의가 이어질 때, 즉 처음으로 나타난 강력한 경향에 의지가 굴복할 때에 한해서 그것이 죄가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들의 육 속에 의와 싸우는 패악성, 곧 육욕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거스틴이 "죄"라는 말을 항상 피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는 모든 죄들이 어떤 원천을 통해서 육적인 욕망 속에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원천을 '죄'라고 부른다. 성도들에게 관한 한, 죄는 땅에서 지배력을 잃고 하늘에서 소멸된다." 이런 말로 그는 신자들이 육의 욕망에 굴하는 동안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11. 신자들 속에서 죄는 지배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며,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 구원을 실현하심으로써 교회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한다(엡 5 : 26-27). 우리는 이 말씀이 죄의 본체보다도 죄의 행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중생 시킴으로써 이 일을 참으로 실현하시며, 그래서 죄의 지배는 소멸된다.

이는 신자들이 성령의 주시는 힘을 받아 죄에 대하여 우세하게 되며 드디어 싸움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롬 6 : 6), 죄의 법이(롬 8 : 2 참조)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 흔적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무기력을 의식하게 하여 겸손하게 만든다. 이런 흔적에 대해서는 마치 그것이 아주 없는 것같이 책임을 추궁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책이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죄책에서 해방된다.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성경에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견해를 확인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한 말보다 더 명백한 어떤 증언이 필요한가? 우선 거기에서 바울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말한다(롬 7 : 6). 이 점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22 밝혔고 어거스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논리로 이 점을 증명한다.23 그가 "악"과 "죄"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를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말들을 억지로 흠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것이 악이란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의를 방해하는 것이 죄란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정신적 불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죄책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병에 대한 이런 사실들은 바울이 모두 공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간단히 다룰 수 있는 믿을 만한 지시를 율법에서 받는다. 율법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다(신 6 : 5, 마 22 : 37). 우리 영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야 된다고 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떠나서 허망한 것으로 끌려 가려는 경향이나 생각을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가지고 있거나 들여올 수 있는 사람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어떤 감정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런 것들이 영혼의 능력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능력들이 허망하고 패악한 생각에 굴할 때에 거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만큼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육의 모든 욕망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저 육욕의 병을 "불이 잘 붙는 물건"(tinder)이라고 부르며 죄의 원천24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12. "타고난 부패"란 무슨 뜻인가

 

사람의 본성에 따라서 느끼는 욕망은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주신 것인데,25 그것을 모두 완전히 정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사람의 성격에 새기신 경향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향들을 없애려면 인간성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인데, 우리가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에 반항하는 대담하고도 불손한 충동들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으므로 인간의 모든 능력은 오염되고 부패하여 그의 모든 행동이 항상 무질서와26 무절제에 빠질 경향이 크다. 이는 이런 경향들이 자제력의 결핍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경향들을 악하다고 주장한다. 더 간단한 요약을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악하며 죄라고 가르친다.-욕망은 우리가 타고난 그 욕망 때문이 아니고 무질서한 것이기 때문에 죄이다. 그뿐 아니라 욕망이 무질서한 것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에서 순결하거나 진지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얼른 보기에는 어거스틴의 생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는 펠라기우스파가 자기에게 씌우려는 오명을 너무 무서워해서 "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죄의 법은 성도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고, 죄책만이 제거된다고 기록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우리 생각과 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27

 

 

 

13. 신자들이 여전히 죄인인데 대한 어거스틴의 증언

 

그의 생각을 더 잘 나타내는 다른 말들을 소개하겠다. 율리아누스를 논박함(Aginst Julian)이라는 논문집의 제2편에 이런 말이 있다. "죄의 법은 영적 중생에 의하여 사함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죽을 육신안에 남아 있다. 신자들을 중생시키는 성례전에서 죄책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신자들이 대적해 싸우는 상대인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에 그것은 남아 있다." 다른 구절에서 "그러므로 저 위대한 사도 자신의 지체 안에도 있는 죄의 법은 세례에서 사함을 받으나 제거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다른 구절에서 "암브로시우스(Ambrose)는 죄의 법을 '불법'이라고 부르며, 이 불법에 대한 죄책은 세례에서 제거되나 불법 자체는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스리는(갈 5 : 17)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라고 했다. 제 5 편에 있는 구절은 더욱 분명하다. "마음의 눈이 어둡다는 것은 동시에 죄며 죄에 대한 벌이며 죄의 원인이다.-그것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죄인 것이다. 그 때문에 교만한 심령이 마땅한 벌을 받으니 죄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심령의 잘못 때문에 어떤 죄를 지을 때에 그는 죄의 원인이다. 마찬가지로 선량한 정신이 열망하는 것을 반대하는 육의 소욕은 동시에 죄요 죄에 대한 벌이요 죄의 원인이다. 마음이 지배하는데 대한 불복종이 육욕에 내재하니 육욕은 죄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의 행실에 대한 댓가이니, 그것은 죄에 대한 벌이다. 반역함으로써 동의하는 자 또는 전염으로 난 자에게서는 그것은 죄의 원인이다.28 여기서 그는 조금도 모호한 점이 없이 그것을 죄라고 부른다. 오류가 굴복하고 진리가 강화된 때 그는 중상을 덜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요한복음에 대한 제 41 설교에서 그는 논쟁을 떠나서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육으로 죄의 법을 섬긴다면, 사도 자신이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라고 한 말대로(롬 6 : 12) 행하라. 그는 죄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죄는 반드시 여러 분의 지체 속에 있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육욕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야고보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 : 15)라고 한 말을 들어 반대한다.29 그러나 이것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악한 행위 혹 실제로 나타난 죄들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악한 의도까지도 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운 행동과 악한 행위를 "무절제한 욕망의 후손"이라고 부르며, "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여기서 무절제한 욕망은 악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14. 완전성이라는 환상에 반대함

 

오늘날의 어떤 재세례파 사람들은 영적 중생 대신 어떤 광적인 무절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사상을 공개적으로 교만하게 떠벌리지 않았다면, 사람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미쳐 버린다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감히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만드는 자들이 그 모독적인 철면피로 인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부정직과 정직, 의와 불의, 선과 악, 덕과 죄의 구별을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인가? 그들은 말하기를 "이런 구별은 옛 아담이 받은 저주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음행과 정절, 성실과 간사, 진실과 허위, 공평한 거래와 강탈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재세례파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쓸데없는 공포심은 내버리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30 이런 해괴한 말에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맹목적인 정욕에 눈이 어두워 상식을 내버린 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상이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어떤 그리스도를 조작해 내려는가? 그들은 어떤 영을 내뿜는가? 우리는 한 그리스도와 한 성령을 인정한다. 이 영에 대해서는 선지자들이 천거했으며, 우리에게 계시된 대로 복음이 선포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영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다. 이 성령은 살인, 음행, 술에 취함, 자만, 투쟁, 탐욕, 사기 등의 수호자도 아니요 도리어 사랑, 겸손, 절주, 온화, 평화, 절제, 진실 등의 창시자가 되신다. 성령은 선악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이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며, 반대로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구별하는 총명이 가득하신 분이다. 성령은 사람을 선동하여 허랑방탕한 정욕으로 몰아보내지 않고, 도리어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분간하여 사람들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야수적인 미친 태도를 논박하려고 더 애쓸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혼란을 일으키는 유령이 아니다. 그들은 이 운명을 꿈에서 만들어 냈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대한 지식을 성경에서 진지하게 찾는다. 성경에서 우리는 성령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파견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부정과 불결을 씻어버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신다. 이와 같은 순종이 성립되려면, 저 사람들이 고비를 늦추려고 하는 그 육욕을 먼저 누르고 굴복시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정화되지만,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완전과는 아주 먼 우리는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며, 죄 속에 얽혀 있으나 매일 그 죄와 싸워야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태만과 부주의를 떨어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우리의 육의 전술에 부지불식간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보다 더 많이 전진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사도는 사탄의 사자 때문에 여전히 괴로움을 당했으며(고후 12 : 7),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고후 12 : 9)졌으며, 그 자신의 육안에 있는 영육의 분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롬 7 : 6이하 참조).

 

 

 

15. 고린도후서 7장 11절에 있는 회개

 

사도가 회개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곱 가지 원인과 결과 또는 부분을 열거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간절 또는 신중, 변명, 의분, 두려움, 사모, 열심, 징벌의 일곱 가지이다(고후 7 : 11). 내가 이것들이 원인인지 또는 결과인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또 이 일곱 가지는 회개와 연결된 경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제쳐놓고도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설명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고후 7 : 10) 신중함이 생긴다고 한다. 하나님께 대해서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서 강렬한 불만을 느끼는 사람은 동시에 부지런하며 주의하게 되어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으며, 마귀의 간계에 대해서 더 훌륭한 예비 조치를 취하며, 성령의 지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또는 안도감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된다.

다음은 "변명"이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부인하거나 자기의 허물을 적게 만들려고 하는 변명이 아니다. 여기서 변명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보다 용서를 비는데 치중하는 정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집이 세지 않은 아이들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용서를 빌고 또 용서를 받기 위하여 부모에 대한 공경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자기가 의로우며 무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용서를 받으려고 변명한다. 다음에 죄인이 마음속으로 애통하며 자신을 비난하여 자신에 대하여 노하며 자신의 패역성과 하나님께 대한 배반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의분을 느끼게 된다.

바울이 "두려움"이란 말을 사용한 때에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자기의 마땅히 받아야할 것과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하고 무서운가를 생각할 때에 느끼는 그 떨리는 마음이다. 그런 때에 우리는 비상한 불안으로 고통하며, 이 고통으로 인해서 겸손을 배우며 앞으로 더욱 조심하게 된다. 그러나 전에 말한 신중함이 두려움에서 생긴다면, 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모"란 말을 쓴 것은 의무를 이행하는 열심과 기꺼이 순종하는 태도를 표현하려는 뜻인 듯하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특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직접 여기에 연결시키는 열심도 관련된다. 이 말은 우리가 나는 무슨 짓을 했으며 또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로 빠져들었을까를 생각할 때에 자극되어 일어나는 열심을 의미한다.

끝으로 "징벌"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며 자신의 죄를 예리하게 검토할 수록 하나님께서 더욱더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바라는 대로 되려면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게 된 영혼이 처벌자의 일을 맡아 그 자신을 벌해야 한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확실히 알게 된 때에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과 당혹함과 번민과 자기 혐오와 그 밖의 죄에 대한 생생한 인식에서 일어나는 다른 감정들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에 자신이 삼켜지지 않도록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공포에 싸인 양심은 무엇보다도 절망 상태에 빠지기 쉽다. 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사람을 볼 때에 사탄은 이 절망이란 전술을 사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은 슬픔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 다시 솟아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겸손의 결과를 낳으며, 용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 두려움은 얼마든지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죄인은 사도의 명령에 따라 자기 불만과 과도한 공포에 눌려 지쳐버리는 일이 없도록(히 12 : 3) 항상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치면 회개를 통해서 우리를 자신 앞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한 베르나르드의 충고도 유익하다. "죄에 대한 슬픔은 그것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여러분이 한 일을 생각하고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리를 가끔 떠나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들을 생각하는 상쾌한 고원 지대로 올라가라. 쓴 쑥에 꿀을 섞어 보라. 달게 해서 마시면 쓴 것이 약이 된다. 여러분이 겸손하게 자기를 반성한다면, 그와 같이 자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31

 

 

 

(회개의 열매 :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과 용서, 평생 계속하는 회개. 16-20)

 

16. 외면적인 회개와 내면적인 회개

 

이제 우리는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표준으로 삼아서 자기의 생활을 진지하게 판단하면 할 수록, 그가 보여 주는 회개의 징조는 더욱 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실 때에, 자주 율법 개개의 교훈이나 둘째 돌판에 있는 의무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는 성령은 먼저 우리의 속마음의 원천이 불결한 것을 정죄하시고 그 다음에 진지한 회개의 표지인 외면적인 증거에 대해 언급하신다. 나는 조금 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묘사할 때에 이 일에 관한 일람표를 독자들 앞에 제시하겠다.32 나는 예언서에서 증거를 수집하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미련함을 가끔 멸시하면서 그들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또한 그들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시므로 외면적인 정직한 생활이 회개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33 마음의 내면적인 태도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경고를 받을 것 없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요엘서에 있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는 말씀이(욜 2 : 13) 이해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충고를 야고보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말로(약 4 : 8) 간결하게 표현한다. 여기서는 처음 문장에 첨가된 것이 있으나 다음에 근원과 원인을 밝힌다. 곧 사람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으려면, 은밀한 더러움을 씻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자기를 낮추며 육을 길들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외면적인 훈련 방법이 있고 공적으로는 이 방법을 회개의 증거로 사용한다(고후 7 : 11). 또 이런 훈련은 바울이 말하는 "징벌"에서 생긴다(고후 7 : 11). 고통하는 마음의 특색들을 든다면, 누추한데서 신음하고 통곡하며 찬란한 것이나 모든 장식을 회피하며 모든 오락에서 떠나는 것이다. 다음에 육의 반역이 얼마나 큰 사악한가를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억제할 모든 방법을 구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반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인가를 잘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겸손하게 영광을 돌리기까지는 편안할 수 없다.

회개의 열매를 논할 때에 옛날 저술가들은 이런 훈련을 자주 말했다.34 그러나 그들은 회개의 힘을 훈련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이런 훈련에 너무 치중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독자들은 나의 솔직한 발언을 용서하리라). 이 문제를 현명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그들이 두 가지 점에서 적당한 한도를 넘었다고 보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육체의 훈련을 강력하게 권장하며 지나치게 칭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시해야 할 일은 다소 희미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징벌을 가할 때에 그 징벌들은 교회의 온유함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엄격한 것들이었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35

 

 

 

17. 회개의 외면적 실천이 주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엘서에서(욜 2 : 12) 통곡하며 금식하며 재를 쓴다는 것을 읽고 회개는 주로 금식이나 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36 이런 오해는 풀어야 한다. 요엘서에서 말한 주께로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 것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것은 참으로 회개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통곡하며 금식하는 것은 회개에 항상, 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가 아니고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 요엘은 유대인들에게 큰 재앙이 오리라고 예언했으므로 회개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슬픔을 외부에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예방하도록 그들을 권고하였다. 범죄한 사람이 재판관 앞에 나타날 때에 그의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 긴 수염, 엉킨 머리, 상복을 입고 애걸하는 것과 같이,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았을 때에 그의 엄격한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가련한 모습으로 비는 것이 마땅했던 것이다. 굵은 베와 재는 옛날에 더 적합한 듯하나, 주께서 우리를 파멸이나 재앙으로 위협하시는 듯한 때에는 언제든지 울며 금식하는 것이 매우 합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어떤 위험한 일을 나타내시려고 할 때에, 징벌을 내릴 준비와 무장이 다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백성에게 울며 금식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좋다. 바꿔 말하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에게 슬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가 그들의 악행이 심판을 받게 됐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대의 교회 목사들도 자기 백성들 위에 파멸이 임박한 것을 볼 때에, 속히 금식하며 통곡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곧 목사들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욜 2 : 13) 더욱더 주의와 노력을 다해서 항상 경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식이 반드시 회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금식은 특히 재앙이 있는 때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그가 떠나셔서 제자들이 슬픔에 잠기게 될 때까지는 그들이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마 9 : 15) 금식과 애통을 연결시킨다. 나는 공적인 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신자의 생활은 검소와 절제로 조절되어, 평생이 일종의 항구적인 금식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교회의 규율 문제를 논할 때에37 다시 연구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할 따름이다.

 

 

 

18.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점을 삽입하고자 한다. 즉 외면적인 고백을 "회개"라고 부를 때에, 내가 설명한 회개의 진정한 의미에서 탈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개는 죄책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며, 동시에 벌과 심판대 앞에서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옷을 입고 재에" 앉는다는 것은(마 11 : 21, 눅 10 : 13),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대 범행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노하실 때에 우리의 자기 혐오를 표시하는 증거에 불과하다. 이런 고백은 공적이며, 천사들과 세상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들의 태만을 책망하기 위해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하나님에 의해서)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한다(고전 11 : 31). 우리의 회개에 대해서 사람들을 의식적이며 공개적인 증인으로 세우는 것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의 일부이며, 이것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죄, 탄로되지 않도록 가식적으로 숨기는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면 그런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짓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마땅할 뿐 아니라 큰 죄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잊은 것이라도 회상해서 고백해야 한다. 다윗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최근에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면서, 그는 모태에 있었을 때까지 돌아가서 자기를 검토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자기는 육의 더러움에 감염되어 있었고 부패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시 51 : 3-5). 또한 그는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군중 속에 숨으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 넣음으로써 벌을 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윗의 행동은 훨씬 다르다. 자기는 바로 유아 시대부터 부패했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악행에 악행을 거듭했노라고 고백하며, 자기의 죄책을 공공연하게 확대한다. 다른 곳에서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회상하면서, 젊었을 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다(시 25 : 7).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며 우리의 악행을 통곡하면서 하나님에게 사죄를 간구한다면,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실천하도록 명령을 받은 회개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사람들의 회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치스럽게도 타락을 했거나, 제멋대로 방종한 생활에 뛰어들어 죄를 지었거나, 일종의 반역을 감행해서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났던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회개를 권고할 때에, 이를테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소생을 의미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한 백성이 "회개"했다고 할 때에, 그들은 우상 숭배와 그 밖의 중대한 죄악에서 돌아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하는"(고후 12 : 21) 죄인들 때문에 슬퍼 울리라고 선언한다. 이 구별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회개하라는 호소를 받는 사람이 적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가 부주의하게 될 염려가 있다. 곧, 육을 죽이는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열한 욕망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며 악습은 자꾸만 싹이 트므로 우리는 육을 죽이는데 대한 관심을 늦출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에서 떼내어 죽음의 올가미에 걸어 넣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요구되는 특별한 회개가 있다고 해서 일상적인 회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두고 이런 회개에 계속해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19. 회개와 용서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복음이 회개와 죄의 용서라는 두 제목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께서 자기의 백성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해서 그들을 진정한 의에 복구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자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였다(마 3 : 2, 4 : 17). 회개하라고 권고함으로써 요한은 그들이 스스로 죄인인 것과38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육을 죽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그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 때에, 하나님 나라란 것은 죄의 용서와 구원과 생명과 그 밖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서를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하였다(막 1 : 4, 눅 3 : 3). 이것은 죄의 짐에 눌려 지친 그들로 하여금 주께로 돌아서며 용서와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도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가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막 1 : 15). 우선 그는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의 보고가 열렸다고 선언하셨다. 다음에 회개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려고 하셨을 때에, 자신이 "고난을 받고…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전파될 것"이라고 하셨다(눅 24 : 26, 46-47).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은 "예수를…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라고 전파하였다(행 5 : 30-31).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성향과 노력은 모두 부패하고 악하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가 선포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한 구속과 의와 구원과 생명이 되셨다는(고전 1 : 30) 말씀을 들을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고 무죄한 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말을 들을 때에 거기서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 내가 다른 곳에서 증명한 것과 같이,39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믿음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이 자비에 의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므로 믿음과 회개는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20. 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

 

죄에 대한 증오심이 회개의 시초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를 처음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상대자들은 가련하고 고통받는 죄인들뿐이며, 신음하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주리며 목마르고 슬픔과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뿐이다(사 61 : 1-3, 마 11 : 5, 28, 눅 4 : 18).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면 회개를 목표로 노력하며, 일생을 통해서 회개에 몸을 바치며, 끝까지 회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나 부르시는 목적은 회개시키려는 것이었다(마 9 : 13 참조). 그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파견되셨으나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사악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다(행 3 : 26, 5 : 31 참조). 성경에는 이런 증언이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는 그의 자비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라고 그는 말씀하신다(사 56 : 1). 또,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 : 20). 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 : 6-7).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한다(행 3 : 19). 그러나 이런 조건은 우리의 회개가 근거가 되어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주께서는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를 알리신다. 따라서 이 육신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결점과 아니 우리의 타고난 영혼 그 자체와 싸워야 한다. 플라톤은 죽음을 명상하는 것이 철학자의 생활이라고 했다.40

그러나 우리는 더욱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다. 즉 육을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여,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를 심히 싫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싫어하되 진흙 구덩이에 박혀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속히 가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生)과 사(死)에 접붙임을 받아 계속적인 회개에 유의하게 되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먼저 의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면41 결코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가장 순수한 것인 동시에 성경의 진리와 가장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개와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

 

21. 회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점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하며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보고 놀랐다(행 11 : 18, 고후 7 : 10). 바울은 디모데에게 불신자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딤후 2 : 25-26).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신다고 선포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권고를 보내신다. 그러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에 달렸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창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자기 능력으로 더 훌륭한 본성을 입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전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고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으로 살리신다. 엄밀히 말한다면, 회개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도 증거한 대로 이미 밝혀졌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 : 20).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왕성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역사 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보면,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호소하고 슬퍼하면서, 버림을 받았다는 일종의 표지로서 자기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사 63 : 17). 배교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제외하려고 한 사도는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히 6 : 4-6).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그의 은혜를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의 고요하고 기쁜 얼굴로 그들을 그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불경하여 용서하실 수 없는 자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만드시며 그들에 대해서는 진노를 나타내신다.

의식적으로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도는 이런 벌이 있으리라고 위협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버리며, 하나님을 조롱하며, 그의 은혜를 멸시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며 짓밟으며(히 10 : 29), 참으로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다(히 6 : 6). 어떤 엄격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듯이, 바울은 모든 의식적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고42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교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독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의 여지 없이 엄격한 벌을 내리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 : 4-6)고 하였다. 다른 구절에서도 그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 있으리라." (히 10 : 26-27)고 하였다.

옛날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ts)가 미친 듯이 날뛴 것은 이런 구절들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선량한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난 냉엄한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이 서한에는 사도적 정신이 그 모든 부분에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짓된 작품이라고 믿었다.43

그러나 우리는 이 서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의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로, 사도는 그의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2 : 31-32, 막 3 : 28-29, 눅 12 : 10).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우리가 사도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대된 자로 만들려고 하지 아니한다면, 사도가 이런 예외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서 결론은 어떤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일이 없으나, 한 가지 죄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절망적인 광기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22. 용서할 수 없는 죄

 

그러나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할 이 가증한 죄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44 그러나 이런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이 죄는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과(마 12 : 31-32)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헛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 세상에서 범할 수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거스틴의 정의가 옳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그런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에게 내려진 은혜를 시기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다고 한다.45 그들이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히 모든 다른 정의를 쉽게 능가할 수 있는 진정한 정의를 이제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진리의 조명을 받아 무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진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항거만이 그들의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서,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즉시 부언하셨기 때문이다(마 12 : 32, 눅 12 : 10, 막 3 : 29 참조). 그리고 마태는 "성령을 거스르는 훼방" 대신에 "훼방의 영"이라고 기록하였다.46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비난을 던지면서 어떻게 동시에 성령을 비난하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지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기만 하면 그 진리를 소멸시키려는 의식적인 의도는 없는 사람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임을 알고 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 즉, 이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 복음의 가르침을 극악한 말로 저주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이 복음에서 온 것인 줄 안다면 기꺼이 진심으로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논박하며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확신하면서도 그 양심이 여전히 반대를 계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인 조명에 반항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성령을 거슬려 훼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유대인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었는데, 스데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대적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항하였다(행 6 : 10). 그들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부득이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악하고 불결한 생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항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인 줄을 알면서도 그 교훈에 항거한다. 주께서 책망하신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Beelzbud)"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중상하였다(마 9 : 34, 12 : 24). 그러므로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불신 앞에서 모르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에(딤전 1 : 13), 그는 이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와 불신앙이 합해서 바울이 용서를 얻게 했다면, 지식과 불신앙이 합한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여지가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주의해 보면,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한두 번 하는 타락이 아니고,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버리는 그 보편적인 반역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의 서한에서,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선택받은 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요일 2 : 19)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이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떠났으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잘못되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권하면서 그는 큰 진리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배척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척한다는 뜻은 방탕, 무절제한 생활로 단순히 주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 아니고 주의 가르침 전체를 고의로 또 의식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만성이 "타락"과 "죄를 지음"이란 말들에 있다(히 6 : 6, 10 : 26). 그래서 노바티아누스파는 "타락"을 해석할 때 그것은 주의 율법에서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고 배웠으면서도 절도 행위나 음행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한다.47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여기는 암시적인 대조법이 있어서 전에 말한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이를테면 전인이 배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후에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히6 : 4-5), 그것은 성령의 조명을 의식적인 불경건으로 없애고 하늘의 은사의 맛을 뱉어 버리는 자들은 성령에 의한 성화에서 스스로 단절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유린하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불경건이란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뒤에 있는 다른 구절에서 "고의로" 이라는48 말을 첨가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서는 속죄의 제사가 다시없을 것이라고(히 10 : 26)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위한 계속적인 속죄의 제물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서신의 거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회생을 거부하면 다른 희생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명백하게 부정할 때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한다.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빌면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전혀 용서를 받을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냉혹하며 주의 자비와는 이질적인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용서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 영원히 눈이 어두웠고, 그 결과로 회개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에서의 경우에도 이 점에 반대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사도는 후에 에서의 예를 이 점에 적용하여, 에서가 잃어버린 상속권을 회복하려고 눈물과 통곡으로 구했으나 헛수고였다고 말한다(히 12 : 16-17). 이것은 예언자가 한 경고에 버금가는 진리이다. 예언서에는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한다(슥 7 : 13). 이런 말들은 진정한 회심이나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궁지에 빠졌을 때에 느끼는 불안을 표시할 뿐이다. 그들이 전에 태연하게 무시하던 일, 곧 그들의 모든 행복은 주의 도움에 달렸다는 사실을 궁지에 빠진 다음에야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도움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을 괴로워하는 것이지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부른다"(슥 7 : 13)는 말과 사도의 "눈물"(히 12 : 17)이란 말은 절망 상태에 빠진 악인들을 괴롭히는 저 무서운 고통을 의미할 뿐이다.

여기에 깊이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인이 회개하기만 하면 곧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하신(겔 18 : 21-22) 하나님께 자기 분열이 생기는 결과가 초래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49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결코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재난을 당해서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고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여전히 도망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맹목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회심"이니 "기도"니 하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그러나 문제가 있다. 사도는 가짜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아합이 용서를 받고 그에게 내리게 되어 있었던 벌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만년의 행동을 보면, 그가 다만 갑작스런 공포심에서 떨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왕상 21 : 28- 29). 그는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재를 쓰고 땅에 누웠으며(왕상 21 : 27), 그에 대한 증거로 보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여전히 완고하고 악의를 품고 있었던 이상 옷을 찢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위선자들은 이와 같이 얼마 동안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이다. 아합에 대한 벌은 경감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느끼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비록 은밀했으나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다.

에서에게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거절을 당했으나, 그의 눈물로 인하여 현세의 축복은 허락되었다(창 27 : 4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영적 상속은 두 형제 중에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에서가 무시되고 야곱이 선택됐을 때에 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위안은 남아 있었다. 즉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창 27 : 28).50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진지한 회개를 하도록 더욱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하게 또 충심으로 회심할 때, 무가치한 자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수단으로 강팍한 자들 위에는 어떤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인가를 배운다. 지금도 강팍한 자들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얼굴과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며 무시하는 것을 하나의 재미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울음이 거짓이며 마음이 부정직한 것을 아시면서도, 자주 손을 내밀어 그들의 재난을 완화하셨다(시 78 : 36-37 참조). 그들이 곧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바와 같다(57절). 이와 같이 지극히 인자한 처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지한 회심으로 인도하려 하셨고 또한 그들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시 징벌을 중지하심으로써 항구적인 법으로 자신을 속박하시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위선자들에 대해서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하시며 벌을 배가하셔서, 그들의 거짓을 불쾌하게 생각하심을 알리신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하신다는 선례를 보이셔서, 경건한 사람들은 생활을 고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게 핍박을 아는 교만한 자들은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만드신다.

 

 

 

제 4 장

 

그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고백과 통회에 관한 스콜라 교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 1-6)

 

1. 스콜라학파의 회개에 관한 교리

 

이제부터 회개에 대한 스콜라학파의 궤변가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이 책을 간단한 교과서로 만들려고 부심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추구함으로써 책의 체제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은 무수한 책을 써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미혹에 조금이라도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서 상투적인 말들을 인용하여 쓰지만 그런 말들은 회개의 힘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예컨대, 회개는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우는 것이며, 울어야 할 죄를 다시 짓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과거의 악행에 대해 통곡하는 것이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슬퍼하는 즉 과거 행동에 대하여 슬픔으로 자기를 벌하는 것이며, 자기가 하였거나 찬성한 악행에 대한 심령의 슬픔과 영혼의 괴로움인1 것이다. 교부들의 이런 말들에 대해서 논쟁가들은 부인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합당한 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회개를 정의하려는 뜻이 아니었고, 구원을 받기 전에 짓던 죄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듣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궤변가들이 이런 종류의 말들을 정의로 바꾸고 싶다면, 첨가할 만한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말들이 달리 있다. 예를 들면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즉 그는 "회개는 죄를 씻어버리는 약이며, 하늘에서 온 선물이며, 놀라운 힘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2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후기 스콜라 학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이 교부들의 정의보다 더 졸렬하다. 그들은 외면적인 훈련을 너무 고집하기 때문에, 그들의 방대한 책들을 읽어도 회개란 일종의 고행이라는 것 즉 조금은 육(肉)도 길들이며 허물도 징벌하는 것이라는 인상밖에 받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말씀의 내면적 변화와 거기 따르는 생활의 진정한 개선에 대해서는 탄복하리만큼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은 통회(contrition)와 성찰(attrition)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또한 사람의 영혼을 여러 가지 근심으로 괴롭히며, 불안과 고뇌와 번민의 바다에 집어넣는다. 사람의 심령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나서는 약간의 가벼운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모든 고통을 치료한다.

그들은 회개를 교묘하게 정의하여 심령으로 하는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으로 나눈다.3 그들은 삼단 논법을 구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분법은 그들의 정의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논리학자들의 논법에 따라 이 스콜라 학자들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추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입으로 고백하지 않더라도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울 수 있고 울어야 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과거의 악행을 통곡할 수 있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슬퍼하는 과거 행동을 다시 벌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기의 구분법을 유지하겠는가? 이는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는다면, 고백 없이도 회개가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답변하기를, 이 구분법은 회개를 한 성례전으로 생각할 때, 또는 회개의 전체 완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때 고해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해석을 그들은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들은 나를 비난할 까닭이 없다. 좀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를 하지 않은 자신들을 비난해야 한다. 나는 미련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그 정의 자체로 환원시킨다. 논쟁 전체의 요점과 기초는 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 교사들의 임의에 맡겨두고 우리는 다만 여러 가지 부분을 순서대로 관찰하기로 하자.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신비한 비밀이라고 선전하지만, 나는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다. 이것은 부지중에 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이 교묘하고 세밀하게 논한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을 검토하는 것이 내게는 그다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나, 내가 그렇게 꼼꼼하게 하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는 사소한 문제로 독자들을 피로하게 만들뿐이다. 그들을 흥분시키는 문제들, 그리고 가련하게 그들이 번민하도록 만드는 문제들을 보면,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떠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죄에 대한 고집은 그냥 있는데 한 가지 죄만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또는 하나님께서 내린 벌이 보속이 될 수 있느냐, 또는 큰 죄에 대하여 자주 회개를 반복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들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들은 사람은 가벼운 죄에 대해서만 매일 회개한다고 추악하고도 불경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롬(Jerome)이 한 말을 기초로 하여 회개는 "파선 후의 두 번째 판자"라고4 하는 심한 오류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동물적인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과오를 그 천 분의 일내지 그 이하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2. 스콜라학파의 회개의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

 

그러나 이것이 당나귀의 그늘에 관한 싸움이5 아니고 가장 중대한 일, 즉 죄 사함 받는 일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회개의 세 가지, 즉 심령의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신앙의 전분야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문제이다. 즉 무엇 때문에, 어떤 법으로, 어떤 조건하에, 얼마나 쉽게 또는 어렵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가장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지식이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양심은 평안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으며, 확신이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도리어 양심은 끊임없이 떨며, 흔들리며, 불안하며, 고민하며, 동요하며, 증오하며,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다.

그러나 죄 사함이 그들이 붙이는 조건에 달렸다면, 우리들에게 그보다 더 불행하고 비통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통회와 용서를 얻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하면서, 그것은 충분한 통회, 즉 바르고 완전한 통회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6 그러나 동시에 언제 사람이 자기의 통회가 바르게 실천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죄를 더욱 싫어하며 미워하도록 조심스럽게 또 날카롭게 격려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는 슬픔은 후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후 7 : 10). 그러나 큰 죄에는 거기 해당하는 큰 슬픔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사죄의 확실성과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요구할 때에, 참으로 통회하는 양심은 색다른 방법으로 고통을 받으며, 죄에 대한 충분한 통회를 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게 된다. 자기가 진 빛의 분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빚을 갚았는지 분간할 수 없다. 스콜라 학자들은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하라고 말하나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돌아올 뿐이다. 누가 능히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는 데 전력을 다했노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양심은 오랫동안 자기와 씨름하며 오랫동안 싸우기 위해 힘쓰고도 쉴만한 피난처를 여전히 찾지 못한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안심하기 위해서 억지로 슬퍼하며 억지로 눈물을 짜냄으로써 통회를 실행하려고 한다.

 

 

 

3. 죄인의 통회가 아니라, 주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의 비난을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런 통회론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나, 진실하지 않은 거짓된 슬픔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이유로서 죄를 깨닫고 고통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진심으로 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는 죄 사함을 받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첨가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양심을 괴롭히는 것을 우리의 한 의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폐지하였다. 죄인은 자기의 통회나 눈물을 문제 삼지 않고 두 눈으로 주의 자비만을 주시한다고 가르쳤다.7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과하며, 갇힌 자를 놓아주며, 슬픈 자를 위로하시기 위해서(사 61 : 1, 눅 4 : 18) 오셨을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마 11 : 28)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회상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에 배가 불러 자기의 빈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악에 대한 치료법을 구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일체 제외된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도 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도 지지 않았으며, 마음도 상하지 않았으며, 포로되거나 그 몸이 갇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공정하고 완전한 통회란 것을 하면, 그 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죄인이 자기의 불행과 동요와 피로와 포로된 상태를 인정하며, 새로운 원기 회복과 안식과 자유를 얻을 곳이 어딘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구하라고 죄인에게 명령하는 것-결국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4. 고백은 명령이 아니다 : 깨끗함을 받은 나환자들에 대한 스콜라파의 은유적 추리를 반박함

 

지금까지 교회법 학자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는 고백 문제에 대해서 항상 큰 분쟁이 있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교훈이 고백을 명령한다고 주장하고 법학자들은 교회법이 명령할 뿐이라고 주장한다.8

그런데 이 논쟁에서 신학자들의 파렴치함이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논쟁을 위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나 모두 잘못 인용하며 그 뜻을 몹시 왜곡하였다. 이렇게까지 하고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알자, 남보다 더욱 민첩하게 보이고 싶은 자들은 핑계를 만들어, 고백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에서 나왔지만, 그 형식은 실정법에서 얻었다고 한다. 물론 가장 무능한 보잘 것 없는 법률가라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 : 9)라고 부르신 것을 하나님의 법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이의 제기도9 마찬가지이다. 아담은 이의를 말하듯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운운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창 3 : 12).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서 형식은 민법에서 온 것이다. 그들이 어떤 증거에 의해서 형식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 고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증명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주께서 나환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다고 말한다(마 8 : 4, 막 1 : 44, 눅 5 : 14, 17 : 14). 무슨 뜻인가? 고백하라고 보내셨다는 말인가?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고백을 듣기 위해서(신 17 : 8-9)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은유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즉 모세의 율법에 제사장들이 나병의 진행 정도를 분간하라는 규정이 있고(레 14 : 2-3),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이에 대해서 선고하는 것이 사제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내친 걸음에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이 구절이 그들을 영적 나병의 심사관으로 만든다면, 그들이 자연적, 육체적 나병을 심사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추리는 성경을 조롱하는 것이다. 즉, 율법에는 나병을 심사하는 일을 레위족 제사장들에게 위임하였으니 우리가 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법적 심사관이 되자고 하는 논법이다!

이제 나는 대답하겠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 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 : 12). 제사장들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께로 옮겨져서, 그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모든 권리와 명예도 그에게 옮겨졌다. 만일 그들이 은유를 따르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제사장으로 모시고 그의 심판 자리에 모든 일에 대한 무제한의 권한을 집중시키라. 우리는 이 일을 기꺼이 허용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은유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민법을 예전과 하나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나환자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셨는가? 제사장들이 그에게 율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율법에는 병이 나은 나환자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며 제물을 드려 속함을 받으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된 나환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명령하는 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 : 14).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 8 : 4). 참으로 이 기적은 제사장들을 위한 증명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나환자라고 선언했었는데, 이제 그들은 나았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싫든 좋든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증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의 기적들을 검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핑계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기적이 그들 앞에 증거가 된다. 그래서 다른 구절에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라고 한다(마 24 : 14). 마찬가지로 "너희가…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신다(마 10 : 18). 다시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더욱 강력한 유죄 선고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이 크리소스톰의 의견에 찬성하고 싶다 해도, 그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 때문에, 즉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으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한다.10 그러나 이런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사람의 지지를 구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법적 권리는 모두 제사장들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실 때, 그들 가운데는 복음의 원수임을 공언한 자들도 있어서, 그 입을 막아 놓지 않으면 그들은 항상 복음을 반대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파의 사제들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강제로라도 저주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편에 그들을 공공연히 가담하도록 하게 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일꾼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5. 나사로를 풀어준 것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은유가 매우 중요한 듯이, 둘째 논거를 동일한 근원, 즉 은유에서 끌어낸다. 중요시하는 것은 버려두겠으나 나는 같은 은유를 그들 보다 더 그럴듯하게 인용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나사로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한다(요 11 : 44).11 우선 이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는 말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셨다고 보는 편이 가능성이 더 많은 추측일 것이다(유대인들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은 주의 기적을 사기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며, 그의 큰 권능을 보여주시려는 뜻이었다). 그는 죽은 자에게 손을 대시지 않고 말씀만으로 살리셨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유대인들이 모든 사악한 의심을 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직접 돌을 굴려 젖히며, 썩는 냄새를 맡으며, 분명히 죽었다는 증거를 보며, 주의 말씀의 능력만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며, 살아난 사람을 제일 먼저 만져보게 하신 것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생각하였다.12

그러나 가령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떤 주장을 한 것인가? 주께서 제자들에게 풀어주는 권한을 주셨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 사건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훨씬 더 적당하고 교묘한 처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자 하셨다. 즉 그가 살리신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풀어주고 그들의 죄 즉 하나님 자신이 잊어버리신 죄를 기억하지 않도록 또 하나님 자신이 용서하신 죄인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이 너그럽게 보신 일들로 죄인들을 책망하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께서 자비를 베푸시며 용서하고자 하시는데 신자들이 벌을 주겠다고 냉혹한 태도로 허물을 캐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을 제일 확실히 일으키는 것은 재판관의 비유이다. 그는 너무 엄격하고 몰인정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제 그들을 보내서 그들의 은유적 해석을 퍼뜨리게 하자.

 

 

 

6. 성경적인 고백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명백한 증거로 무장했다고 상상하고 접근전으로 다가온다. 곧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온 사람들은 죄를 자복(自服)했으며(마 3 : 6), 야고보는 우리가 "죄를 서로 고하며"라고 하였다고 한다(약 5 : 16).13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이…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 : 4)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하는 증표로서 물세례를 주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가 세례를 주었을까? 세례는 죄 사함에 대한 상징이다. 죄인들과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고서 이 상징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야고보가 "죄를 서로 고하며"(약 5 : 16)라고 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바로 다음에 있는 말씀에 유의했다면, 이 구절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기도하라"고 하였다(약 5 : 16). 그는 상호 고백과 상호 기도를 결합하였다. 우리가 사제들에게만 고백해야 된다면 또한 그들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의 말에서 사제들만 고백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그가 우리에게 서로 고백할 것을 요구할 때에, 그는 서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 그가 사용한 "알렐로이스(ajllhvloi")란 말은 "서로", "교대로", "번갈아", 혹은 그들이 원한다면 "상호간에"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상호간에 고백을 실행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특권을 사제들에게만 돌리기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는 일도 사제들에게만 위탁한다.

이런 하찮은 말들을 전부다 버리라. 우리는 사도의 견해를 취하자. 그것은 단순 명료한 생각이다. 즉 우리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약점을 알았으므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데, 그들은 왜 야고보의 말로 우리를 비난하는가?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먼저 고백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교회 즉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저주를 선언한다. 그것은 주께서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이다(갈 3 : 22). 주의 뜻은 "모든 입을 막고"(롬 3 : 19),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롬 3 : 20, 고전 1 : 29 참조).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로우시다고 하며(롬 3 : 4 참조)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비밀 고백의 후대 기원설의 증거. 7-8)

 

7. 고대 교회에는 의무적인 고백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이, 자기들이 말하는 고백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나는 놀란다. 물론 고백하는 관습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유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이전에는 고백에 대한 법이 전혀 없었다. 더 오랜 법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들고나섰을 것이 틀림없고, 겨우 라테란 종교회의(Lateran, 1215년)의 명령으로 만족하여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허위 교서의 조작을 주저하지 않고 만들어내어 그것들을 가장 오랜 교회 회의가 정한 것이라고 하며, 고대에 대한 존경심을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속인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증명하듯이, 이노센트 3세가 고백을 해야 된다는 함정을 파 놓은 것은 겨우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14

그러나 연대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법이 조잡한 말을 쓴 것 자체가 법의 위신을 불신하게 만든다. 이 선량한 신부들은 남여 양성15의 모든 사람들이 일년에 한 번 자기의 사제 앞에서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익살꾼들이 농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이 명령은 양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양성체인 남성이나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자기의 사제"란l6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들의 제자들은 더욱 큰 부조리를 폭로한다.

교황의 이 삯군 논쟁가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이 법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로부터 이런 법이 나올 때까지는 1200년이 경과했다. 경건과 교리가 소멸되고, 목회자의 망령에 불과한 자들이 모든 권한을 통틀어 떠맡은 후에 이런 횡포가 드디어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역사 서적과 그 밖의 다른 고대 저술가들의 분명한 증언을 보면, 고백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정한 법이 아니고 감독들이 제정한 교회 행정상의 한 규율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될 만한 여러 증언 중에서 하나만 제시하겠다. 소조멘(Sozomen, 5세기 전반)은 감독들이 정한 이 법이 서방에서, 특히 로마에서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 직무를 위해서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특히 지명되었다고 한다. 교황주의자들이 하늘 열쇠는 사제 계급 전체에 공통으로 맡겨져 이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철저히 논박한다. 참으로 그것은 사제들에게 공통된 직책이 아니라, 특히 이 일을 위해서 감독이 선택한 사제 한 사람만의 직책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도 대성당에서는 청죄 사제라고 해서 중대 범죄를 조사하고, 징계로서 견책할 사람을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조메누스는 부언하기를, 콘스탄티노플에 이 관습이 있었으나 어떤 부인이 고백을 가장하여 어떤 부제와 애정 관계를 가졌던 것이 발견되어, 거룩함과 학식으로 유명하던 감독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이 사건을 이유로 고백의 행사를 폐지했다고 한다.17 이 미련한 자들아 귀 기울여 들으라. 만일 비밀 고백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무슨 까닭에 넥타리우스가 감히 그것을 폐지했겠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며, 모든 교부들이 칭송한 넥타리우스에게 그들은 이단설과 분파의 죄명을 씌우려는가? 그러나 이런 선고를 내린다면 그들은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소조메누스의 말에 의하면, 이 교회에서는 고백의 관습을 일시 등한시했을 뿐 아니라, 아주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만일 정직하게 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한 불가침의 법을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동방 교회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백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크리소스톰이 분명한 증언을 한 문구들은 심히 많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었으므로 그들이 그와 반대되는 말을 감히 중얼거린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가 한 말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해서 씻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죄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창피하거든 자기의 영혼에게 매일 고하십시오.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르는 동료 하인에게 고백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쳐 주실 하나님에게 고백하십시오. 침상에서 죄를 고백해서 양심이 매일 자기의 비행을 인정하게 하십시오." "그뿐 아니라, 증인 앞에서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죄를 검토하십시오. 이 재판에서 증인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고백을 보시게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연단 위에 데려다가 동료 하인들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죄를 폭로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양심을 들고 가서 그의 앞에 펼쳐 놓으십시오. 가장 훌륭한 의사이신 주님께 여러분의 상처를 보이고 그에게서 약을 얻으십시오.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책망하시지 않고 인자하게 고쳐주십니다"

"물론 사람에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릅니다. 동료에게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을 퍼뜨릴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돌보시는 친절한 의사이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써 "나는 너희들이 강단 중앙에 올라와서 여러 증인들 앞에 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죄를 나에게만 비밀히 말해서 나로 너희들의 아픈 상처를 고치게 하라"고18 하였다. 그들을 얽매고 있는 그 구속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양심을 풀어주려고 크리소스톰이 이런 글을 쓴 것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며, 감히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죄의 고백 : 공적 및 사적 고백. 9-13)

 

9. 하나님 앞에서 고백함

 

그러나 문제 전체를 더 분명하고 쉽고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어떤 종류의 고백을 배울 수 있는가를 충실히 이야기하려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이 만든 조작품들을 이야기하겠다. 물론 그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큰 바다를 누가 능히 쏟아놓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의 비밀 고백의 요점을 내포한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부끄러운 일이나, 나는 옛날 번역가들이 "찬송한다"는 말을 "고백한다"는 말로 번역한 것을 회상한다는 것이 부끄럽다(시 7 : 17, 9 : 2, 95 : 2, 100 : 4, 117 : 1).19 이것은 가장 무식한 평신도라도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대담한 짓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관해서 쓴 것을 그들의 포악한 법으로 옮겨 놓은 것은 폭로하는 것이 좋다. 고백에는 마음을 명랑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에 있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란 말을(시 42 : 4) 끌어넣는다. 만일 이런 수정이 정당한 일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되었으니, 경건한 독자들은 그들의 담대한 것이 더욱 가중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공정한 징벌에 의해서 그들이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을 의지할 생각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런 가장(仮装)에 속을 위험성은 없을 것이다.

이는 성경에는 이 일에 관하여 고백하는 한 가지 방법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며 잊어버리며 씻어버리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주께 죄를 고백하자. 주님은 의사이시므로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도록 하자.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며 노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주께 화해를 구하도록 하자. 마음속을 아시며20 모든 생각을 아시는 이는 주님이시니(히 4 : 12 참조), 우리는 그의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속마음을 쏟아 놓자. 끝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다윗은 말한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 : 5). 다윗의 다른 고백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 51 : 1) 다니엘이 한 말도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 9 : 5). 성경에 자주 나오는 다른 고백들도 있고, 또 이것을 인용한다면 거의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1 : 9). 우리는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괴로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의 앞에 엎드려 고백해야 한다.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비난하며 정죄하면서, 그의 선하심과 자비로 무죄 선고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10.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함

 

이와 같은 고백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입으로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한 사람에게 한 번만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자기의 수치와 하나님의 큰 자비와 영예를 진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을 들었을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였다(삼하 12 : 13). 바꿔 말하면, 이제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판정받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내가 하나님에게 감추려고 하던 일들까지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비밀히 고백한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 필요한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주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규례를 정하셔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일정한 말을 낭송한 다음에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하셨다(레 16 : 21 참조). 그것은 각 사람이 공정한 자기 평가를 하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고백함으로써 우리 사이에서와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밝히 보이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11. 온 회중이 죄를 고백함

 

이런 종류의 고백은 교회에서 평상시에도 실행해야 하며 사람들이 어떤 공통된 죄를 지었을 때에는 특별히 실천해야 한다. 모든 백성이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의 지도아래 행한 것은 이 특별한 고백의 실례였다(느 1 : 7, 9 : 1-2). 그것은 그들이 모든 백성의 공통된 반역죄로 형벌을 받아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했으며, 수도와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종교가 퇴폐하였기 때문에 우선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해방의 은혜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중 가운데는 소수의 죄없는 사람들이 있는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약하고 병든 몸의 지체이므로 자기의 건강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그들도 다소의 감염을 면할 수 없으며, 죄책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그 밖의 재앙을 당할 때마다, 애통과 금식과 그 밖의 방법으로 우리의 죄지었음을 표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우리는 모든 다른 일의 근본이 되는 이 고백을 가장 중요시해야 한다.

평상시의 고백은 주께서 친히 권장하셨다는 사실 이외에, 고백의 유용성을 생각한다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감히 그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집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서 있는 것이므로 우선 우리 자신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은 그것은 모든 기도에서 하는 일이며 우리는 용서를 빌 때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고 말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기 만족과 우둔과 태만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공적 고백의 행사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것이 유익한 규례가 될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께서 제정하신 의식은 율법의 교육적 임무의21 일부였지만, 그 이면에 있는 실재는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에게도 관계된다. 또 사실 잘 지도되는 교회들이 이 관습을 지켜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우리는 안다.

즉 주일마다 목사가 자신과 교인들의 이름으로 고백문을 작성해서, 모든 사람의 사악함을 고발하며 주의 용서를 간구한다.22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열쇠로 기도의 문호를 개방하여 각 개인은 개인적으로, 온 회중은 공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2. 영혼의 치료에 있어서 개인적 고백

 

성경은 개인적 고백의 두 가지 형식을 인정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니, 우리가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된다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약 5 : 16) 이 개인적 형식의 고백이다. 야고보가 말한 뜻은 우리가 자기의 약점들을 서로 알린 후에 서로 충고하며 위로함으로써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형식은 이웃을 위한 고백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가 어떤 해를 받았을 때에, 그의 노여움을 풀고 그와의 화해를 위해서 사용하는 형식이다. 처음 종류의 고백에서 야고보는 누구를 상대로 고백할 것인지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교우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택하는 자유를 남겨 놓았지만 누구보다도 적당한 사람은 목사일 것이므로 우리는 목사들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목사들이 더 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며 교정하도록 말로 가르치며, 죄가 용서된다는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하도록 그 직책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마 16 : 19, 18 : 18, 요 20 : 23). 상호 충고와 상호 견책의 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목사들은 특별한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그 확신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목사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우리의 양심에 불어넣어 주는 증인과 보증인으로 임명된 사람들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이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해방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직책이 그들에게 있다고 들을 때에,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23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죄의식으로 혼자서 마음속에 불안과 고통을 느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제시하신 대책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죄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며, 위로를 얻기 위해서 목사의 적극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사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복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것을 직무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항상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이 없으면, 일정한 멍에로 사람의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고백은 자유 선택에 맡기며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권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또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규정으로 강요하거나 술책으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된다. 고백하는 당사자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고백하게 하여, 완전한 위로를 얻게하는 것이 마땅하다. 직무에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이 자유를 허용할 뿐 아니라, 이 자유를 수호하며 굳게 방위해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들의 횡포와 교인들의 미신을 피할 수 있다.

 

 

 

13.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고백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두번째 종류의 고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 : 23-24) 이렇게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의 죄과로 인해서 깨어진 사랑이 다시 회복된다.

교회 전체에 해를 입히게 된 사람들이 그 죄를 고백하는 것도 이런 종류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중대시하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형제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먼저 공정한 배상으로 화해하기까지는 거룩한 예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악한 행동으로 교회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교회의 화해를 얻어야 할 이유는 더욱 크다.24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 신자는 시정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시 교회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후 2 : 6).

키프리안이 회상한 초대 교회의 고백 형식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 참회한 후에 고백하러 와서 감독과 교직자들의 안수로 친교의 특권을 받는다."25 성경에는 이와 다른 형식의 고백은 전연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혼을 속박하지 말라고 매우 엄격하게 금하셨으니, 새로운 올가미로 영혼을 얽매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동시에 양들이 성만찬에 참가하기를 원할 때마다 목자 앞에 나가서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각지에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 하면 괴로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혜택을 입으며, 견책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견책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박과 미신은 항상 물리쳐야 한다.

 

 

 

(열쇠의 권한과 죄의 사면. 14-15)

 

14. 열쇠의 권한에 대한 그 성격과 가치

 

열쇠의 권한은 다음 세 가지 고백에서 적용될 수 있다. 즉 교회 전체가 그 허물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간구할 때, 한 개인이 어떤 현저한 범행으로 일반적인 죄를 짓고 회개를 표명할 때, 또는 괴로운 양심 때문에 목사의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 그에게 자기의 잘못된 점을 고할 때이다. 타인에 대한 죄를 제거해야 될 경우에는 방법이 다르다. 이런 때에는 양심의 평안도 고려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증오심을 없애고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의 줄로 묶어 주는 것이다(엡 4 : 3 참조).

그러나 우리가 더욱 자발적으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말한 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온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같이 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서 유일한 피난처를 구할 때에 화해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임석해서(고후 5 : 20 참조) 죄의 사면을 선언한다는 것은 평범하거나 사소한 위로가 아니다. 이 미신이 그 임무를 공정하게, 바른 절차에 따라 그리고 경건하게 수행할 때에는 열쇠의 권한이 유익하다고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약간 멀어진 사람이 용서를 받고 형제적 단결에 다시 참가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뉘 죄든지 땅에서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하여질 것이요"라고 하신(요 20 : 23, 마 18 : 18의 융합) 그 사람들에게서 자기도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죄를 특별한 치료법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사면을 받을 때에, 그 효과와 은혜는 공적 사면에 못지 않게 크다. 이는 어떤 사람은 신자 전체에 주는 일반적인 약속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고 아직도 용서를 받지 못한 것 같아서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목사에게 심중의 비밀을 털어놓고,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 : 2)는 복음의 말씀이 특히 자기를 향해서 목사의 입에서 들려올 때 그는 마음에 확신을 얻으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불안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열쇠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항상 주의해서 복음 선포와 관계없는 어떤 권한도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나는 교회 행정 관리 문제를 논할 때에 이 문제도 다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매고 푸는 권리는 말씀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6 이 점은 특히 열쇠를 사용하는 데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의 은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은 열쇠의 권한은 완전히 이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사실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5. 고백에 대한 천주교 교리의 요점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양성"의 모든 사람은 분별 연령에 도달하는 즉시로 자기의 모든 죄를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자기의 사제에게 고백해야 하며, 그들에게 죄를 고백하겠다는 확고한 의도가 없으면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회가 제공될 때에 이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들 앞에 닫힌다고 한다. 그들은 사제에게는 죄인을 매고 풀어주는 열쇠의 권한이 있으며 이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운운하는(마 18 : 18) 그리스도의 말씀이 헛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7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이 권한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맹렬히 싸운다. 어떤 학자는 열쇠는 본질적으로 하나뿐이라고-즉 매고 푸는 권한뿐이라고-말한다. 그리고 열쇠를 잘 쓰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식은 부속물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권한과 결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28 또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너무나 무제한적인 면허라고 보고 분별과 권한이라는 두 가지 열쇠를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완화책이 사제들의 부패를 억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열쇠들을 만들었다. 분별하는 권위라는 열쇠는 선고를 내릴 때 사용하는 것이고 권한이라는 열쇠는 그 선고를 실행할 때에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으로서의 지식을 첨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매고 푸는 일을 단순히 죄를 용서하며 말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못한다. 그것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나 곧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 : 11, 25)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가 매이고 누가 풀릴 것이며, 누구의 죄가 용서를 받으며 누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라고 한다. 또 고백을 받고 죄를 용서하거나 남겨둘 때, 또는 파문이나 성사 참가의 허락을 선고할 때, 이런 선언을 한다고 한다.29

끝으로 그들은 아직도 곤란한 문제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며 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을 사제들이 혹은 매며 혹은 풀어 주는 일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하늘에서 매이거나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런 때에 그들이 최후로 도피하는 수단은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즉 열쇠의 권한을 위탁하는 데는 한 가지 제한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들의 선고가 그의 심판대 앞에서 시인되리라고 약속하셨으나, 그 선고는 매이거나 풀리는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공정하게 표명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30 그런데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이 열쇠의 권한을 모든 사제에게 주셨고 사제들은 서품시에 주교의 손에서 받지만 그것을 자유로 쓰는 권리는 교회 직무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수중에만 있으며, 파문을 당하거나 직권 정지를 당한 교직자들도 열쇠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열쇠들은 녹이 쓸고 묶여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겸손하고 정신이 올바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모루 위에서 새로운 열쇠들을 만들어내고 교회의 창고는 이런 열쇠로 잠겨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후에 적당한 곳에서31 논할 것이다.

 

 

 

(천주교 교도들의 오류들을 그리고 고백과 보속에 관련된 유해한 관습을 서평함. 16-25)

 

16. 모든 죄를 열거하여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부터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씩 간단히 대답하겠다. 여기서는 법으로 신자들의 영혼을 속박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또는 없는가 하는 문제는 말하지 않고 적당한 곳으로32 미루겠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죄를 말해야 된다는 법을 만들며, 고백하겠다는 확실한 의도가 없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며, 고백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낙원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지껄이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죄는 모두 고배해야 되는가? 다윗은 죄를 고백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또 바르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 : 12)라고 외쳤다. 다른 곳에서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였다(시 38 : 4). 그는 우리의 죄의 구렁이 얼마나 깊은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에는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으며, 이 히드라(hydra,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인 뱀)에게는 얼마나 많은 머리가 있으며, 죄는 얼마나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악행의 깊은 구렁 밑에서 주를 향해서 나는 눌렸나이다, 묻혔나이다, 숨이 파히나이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시 18 : 5),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지며"(시 69 : 2-3, 15-16), 원컨대 손을 내밀어 주소서, 나는 힘이 빠지고 죽어 가나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의 죄들을 낱낱이 세려고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자기의 죄를 세려는 생각을 할 것인가?

 

 

 

17.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준다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행위로33 인해서 영혼에 가장 참혹한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을 검토하여, 그들의 양식에 따라 죄를 큰 가지와 작은 가지와 잎으로 나눴다. 그 다음에 죄의 성질과 분량과 환경을 고려하여, 문제는 다소 전진하였다. 그러나 더 전진하여 사방이 하늘과 바다가 되었을 때에는34 항구나 정박지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는 더욱 큰 덩어리가 나타났다. 참으로 갈수록 태산이었다. 먼 우회로를 돌았어도 탈출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케단과 칼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35 드디어 결과는 절망뿐이었다.

여기서 이 도살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상처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사람마다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36 치료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불안이 끼어들었다. 참으로 "나는 시간을 더 들였어야 할 것을 나는 정성이 부족했다. 나는 소홀해서 잊어버린 것이 많다. 내가 부주의해서 잊어버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고통이 가망 없는 영혼들을 혹독하게 책망했다.

그들은 이런 고통을 감하려고 또 다른 약을 사용했다. 너의 태만함을 회개하여라. 완전한 부주의가 아니라면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상처를 감싸지 못하며, 고통을 덜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꿀을 탄 독약같이, 처음 맛보기에는 불쾌하지 않으나 모르는 사이에 깊이 침투한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무서운 소리가 항상 그를 압박하고 귓속에서 울린다. 확실한 위로가 아니고는 이 공포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

여기서 독자들은 생각해 보라. 일년 동안에 한 모든 행동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으며, 매일 지은 죄를 어떻게 함께 모을 수 있겠는가? 하루에 한 실수만을 밤에 생각하더라도 기억이 희미할 것이다. 우리에게 밀려드는 죄의 수와 종류는 그렇게 많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교적 중대한 죄를 서너 개 눈여겨보고는 이 고백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야만적이고 우둔한 위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검토해서 압박됨을 느끼며,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하나님일까 보냐"라고(요일 3 : 20)한 요한의 말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 지식을 가지신 심판자를 보고 그들은 떤다.

 

 

 

18.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데서 오는 악영향

 

더우기 이런 무서운 독약에 아첨하는 말을 섞어 많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런 감언이설이 하나님을 만족시킨다거나 심지어 자기들까지도 참으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는 대양 한복판에서 닻을 내리고 일시 항해를 정지한 것이나 지쳐서 길가에 주저앉아 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 점을 증명하는 데 힘을 들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법인가를 요약해서 말하겠다. 첫째로, 그것은 전혀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당황하게 만들며 파멸과 절망에 떨어뜨릴 뿐이다. 다음으로, 이 법은 죄인들에게서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는 위선자로 만든다. 참으로 그들은 죄를 일일이 열거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서, 자기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수렁과 비밀한 죄와 그 추악성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알았다면 특히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고백에 대한 확실한 지도 원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우리의 죄의 심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세리의 고백이 이 원칙에 따른 것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눅 18 : 13). 그 말은 "저는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죄인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저의 죄들이 얼마나 큰지를 저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자비의 심연으로 저의 죄의 심연을 삼켜버리소서"라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죄는 하나도 고백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말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고백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의 앞에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 놓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인이라는 한 마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죄의 오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종류가 많은가를 잘 알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불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결의 성질이 어떠하며, 정도와 종류가 얼마나 넓고 많은가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 빛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며, 얼마나 많은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인정해야 한다. 상처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심한 매를 맞았는가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쏟아 부은 때에도 아직 죄가 남아 있다는 것과 죄악의 깊은 속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다윗과 함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마땅하다(시 19 : 12).

그들은 고백하겠다는 생각이 확실한 때에만 죄가 용서되며, 고백할 기회가 제공됐을 때에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의 문이 닫힌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주장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죄의 용서는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을 읽을 때에, 거기에 어떤 고해 신부의 귀에 대고 고백했다는 말씀은 없다. 고백을 받을 신부나 고백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그들은 고백을 할 수도 없었다. 그 후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백 제도는 없었으며, 이런 조건이 없이도 죄는 항상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스러운 일을 오랫동안 논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영원히 서 있다.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 : 21-22). 이 말씀에 감히 무엇을 첨가하는 자는 죄를 결박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결박하는 자이다.

사건 내용을 듣지 않고서는 재판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재판관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이 직책을 맡은 것이 우선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것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원칙들을 그들은 태연하게 조작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들은 매고 푸는 직권이 그들에게 위임되었다고 자랑한다. 마치 그 직권이란 것이 어떤 재판권과 수사권인 것같이 말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리 전체는 이런 권리가 사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죄인이 사면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사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사면해 달라는 간구를 받으시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죄의 목록을 들어도 그것이 정화하며 완전한지37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사람의 말만 듣기로 하지 않는다면, 사면은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면 처분 전체는 믿음과 회개에 달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점은 사람이 사람에게 선고를 내려야 할 때에,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따라서 매고 푸는 일의 확실성은 지상의 재판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직무를 합당하게 수행할 때에, 그는 다만 조건부로 사면할 뿐이다. 그러나 죄인들을 위해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하는 말씀을 하셔서(요 20 : 23),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 약속된 용서가 하늘에서도 인정될까 하는 의심이 그들의 마음에 없게 하셨다.

 

 

 

19. 비밀 고백을 비판함

 

그러므로 우리가 귓속말로 하는 고백을 공격하며 우리 사이에서 추방하기를 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악한 제도는 여러 가지로 교회에 해를 끼친다. 비록 이 제도가 그 자체로는 무해하다고 하더라도 실지로 그것은 무익하고 무효할 뿐 아니라, 많은 불경과 모독과 과오를 야기했으니, 누가 그것을 즉시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대단히 유효하다고 해서 어떤 이용 가치를 선전하지만, 그것은 거짓 가치거나 전혀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특히 한 가지 이용 가치만을 중시한다. 즉 고백하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것이 큰 벌이되어 죄인은 그 후에는 더욱 주의하게 되며,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하나님의 징벌을 피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각 사람이 최고의 하늘 심판대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심사를 받으라고 할 때에, 그것은 사람에게 크게 수치를 주며 충분히 그를 겸손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한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한 양심에 대한 증인이 되실 때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 얼마나 이익이라고 할 것인가!38

그러나 그들의 선전 자체가 전혀 거짓말이다. 이는 신부에게 고백한 사람들이 입을 닦고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잠 30 : 20)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들은 아주 대담하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일년 내내 죄 지을 담력을 얻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일년 동안은 고백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거나 정신을 차리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계속 죄에 죄를 거듭하면서 한번에 모조리 뱉어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 뿐만 아니라, 뱉어버린 때에는 짐을 벗은 것 같이 생각하며, 신부를 절친한 친구로 만들었으니 심판을 하나님에게서 신부에게 이양하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잊어버리시게 만든 것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어느 누가 고백하러 갈 날을 고대할 것이며, 어느 누가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고백하러 갈 것인가?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같이,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신부들은 아마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재미있는 일화같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나는 귓속말 고백에 관련된 무수한 몸서리치는 이야기로 많은 지면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다. 저 거룩한 분이39 음행에 관한 풍설 하나를 듣고 자기 교회에서 아니 자기 교구민의 기억에서 고백을 제거한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면, 지금같이 수많은 매음과 간음과 근친 상간과 음행 방조 사건이 있는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경고를 받는다.

 

 

 

20. 열쇠의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고해 신부들은 이 목적을 위해 열쇠권이란 것을 주장하며, 그들의 왕국의 배를 전적으로-소위 "이물과 고물"을40 그 능력에 의존시킨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열쇠를 주신 것은 아무 뜻도 없다는 말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8 : 18) 아무 근거도 없다는 말인가?41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 여기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열쇠를 주신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점은 내가 최근에 설명했고 다시 파문론에서 특히 자세히 논하겠다.42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의 이런 요구의 구실을, 그들의 신부들은 사도들의 대리도 아니며 후계자도 아니라고 한 칼로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이 점도 다른 데서 다루게 될 것이다.43 그런데 그들은 방위 태세를 강화하려고 공성 병기를 가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장치를 파괴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성령을 주시기 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선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 열쇠의 권한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우선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지시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열쇠를 사용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노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지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허무한 것,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술책으로 그들은 완전히 패배를 당한다. 그들이 열쇠로 열 수 있다고 자랑하는 문이 어떤 문이든 간에 그들에 대해서는 항상 성령을 가졌느냐 즉 열쇠를 판단하며 보관하시는 성령을 가졌느냐고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가졌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성령은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그들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말은 하지만 감히 솔직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매라고 하신 것을 풀며, 주께서 풀라고 명령하신 것을 매는 일을 아무 분별없이 반복하는 신부 따위에게는 열쇠의 권한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21. 사제가 매고 푸는 것은 불확실하다

 

해당되는 사람이나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분간하지 않고 매며 푼다는 극히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그들의 유죄가 드러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지식이 없으면서도 권한을 남용한다. 권한을 선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권한 자체는 악한 행사자들에게 부여되었다고 그들은 글에 쓴다. 그러나 그 권한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것이다(마 16 : 19, 18 : 18). 그리스도의 약속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권한을 맡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매며 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매이거나 풀릴 사람의 가치에 따라서 제한된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매이거나 풀리는 데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매이거나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들과 교회에는 이 해당 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 신자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을 선언할 수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교회는 "음란 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 : 9-10)고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맬 때에 확실한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시 이 말씀으로 교회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위로한다. 그러나 무엇을 매며 무엇을 풀어야 할는지를 모르는 이 권한, 알지 못하면 매지도 못하며 풀지도 못한다는 이 권한은 대체 무슨 권한인가? 불확실한 사면을 하면서, 자기들이 받은 권위에 의해서 사면하노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상상적인 권한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불확실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도 상당수의 사제들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합당하게 쓰지 않으면 이 권한은 무효라는 것을 인정한다.44 그렇다면 나를 풀어주는 사람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한다고 내게 믿게 할 사람은 누군가? 만일 그가 악한 사람이라면, 그는 허황된 사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 그는 "그대에게서 무엇을 매거나 풀어야 할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열쇠를 공정하게 쓸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에게 해당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대를 사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평신도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말을 참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교도와 마귀라도 그만한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풀어주는 데 대한 확실한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없으나 그대에게 공로가 있으면 나는 그대를 사면할 권위를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열쇠는 분간하는 권위요 실행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고문으로서 즉 고문으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첨가된다고 설명했을 때에,45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자기들이 정욕대로 무례히 지배하기를 원한 것이다.

 

 

 

22. 열쇠의 권한을 그릇되게 쓰는 것과 바르게 쓰는 것과의 차이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 의존하는 사면은 언제나 애매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당한 사역자들도 그 의무 이행에 있어서 적지 않은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의 신앙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역자 자신이 그들의 사면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아무 위로도 아닌 위로까지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항의한다고 해도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은 사제가 죄에 대해서 들어 알기까지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용서는 사제의 판단에 달렸고 그가 용서받을 만한 사람을 현명하게 분간하지 못하면 그의 행동 전체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권한은 조사와 결부된 재판권이며, 용서와 사면은 이 재판권에 한정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고한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밑 빠진 수렁이 있다. 이는 고백이 완전하지 않으면46 용서받을 희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둘째로, 죄인이 죄를 정직하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사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끝으로 사제들은 너무나 무지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구둣방 주인이 밭갈이하는 것만큼도 그 직무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나머지도 거의 모두 당연히 자신을 의심해야 할 위인들이다. 이런 데서 교황의 사면에 관한 혼란과 주저가 생긴다. 그것은 그들이 사제라는 사람을 사면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사제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고와 조사와 증명을 거친 문제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선량한 선생님들에게 묻기를, 죄를 용서받은 후에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할는지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은 사제가 방금 낱낱이 들은 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선언하든 간에, 비난받을 다른 죄가 아직 남아있는 동안은 그 선언은 효과가 없다고 고백해야 될 것이다. 고백하는 사람의 편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는 사제의 재량에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양심이 치명적인 불안에 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이런 모든 모순이 전혀 없다. 사면은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대속을 구하며, 그가 베풀어주신 은혜로 만족한다면, 그는 이런 신뢰감을 조건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령으로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명령을 죄인에게 전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 없다. 주께서는 친히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마 9 : 29, 마 8 : 13 참조). 주님 자신의 이 일반적인 원칙을 교황청에서는 사악한 생각으로 멸시하지만 죄인은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받기만 하면, 이 간단한 조건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

 

 

 

23. 그릇된 주장을 폭로함

 

열쇠의 권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뒤섞어 놓는가를 나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고 약속했다. 더우기 적당한 곳은 교회 행정을 다루는 부분일 것이다.47 그러나 내가 독자들에게 기억하기를 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부는 복음 전파에 관한 것이었고 일부는 파문에 관한 것이었는데(마 16 : 19, 18 : 15-18, 요 20 : 23), 그들은 이 말씀을 불합리하게 왜곡해서 비밀한 고백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죄를 인정하며 용서함으로써 행사하는 사면권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분명히 이런 원칙은 거짓말이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에 도움을 주는 사유는 용서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며, 이 증언은 복음이 값없이 주는 약속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규율에 의존하는 다른 종류의 고백은 비밀한 죄와는 상관이 없고, 교회에 대한 공적 범행을 제거하기 위한 징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만 죄를 고백하거나 평신도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사제가 조사관으로서 관여하지 않고서는 불충분하다고 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서 증거를 수집한다. 그들의 근면은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고대 교부들이 신자들에게 목자들 앞에 죄의 짐을 풀어놓으라고 충고한 것은 죄를 일일이 고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런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롬바르드와 그의 동료들이 너무도 패악해서 왜곡되고 고의적으로 위서를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그들의 거짓으로 속이려 한 것 같다. 참으로 그들도 푸는 일은 항상 회개에 동반하는 것이므로 회개한 사람은 아직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사실은 풀린 것이라고 바르게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죄를 용서한다기 보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활하게 이 "선언"이란 말에 조잡한 오류를 도입해서 교훈을 예식으로 바꿔 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은 교회가 보기에도 사면을 얻은 것이라고 첨부한다. 이렇게 그들은 공동 훈련을 목표로 제정된 일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쪽으로 끌어갔으나 원래는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중대하고 알려진 허물을 저지른 죄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겸비한 태도에서 타락하고 부패해져서 새로운 용서 방법을 덧붙인다. 즉 벌과 보속을 명령한다.48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단일체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희생물들이 분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회개와 신앙을 요구하시므로 이 분할 또는 이의는 완전한 모독 행위이다. 이것은 마치 사제가 호민관의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개입하여49 우선 호민관 앞에 엎드려 매를 맞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순수한 자비심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24. 요약

 

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이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이 거짓 고백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들의 무익한 노력은 논박을 받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이 여러가지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들을 고의로 곡해한다는 것을 나는 증명했다. 이 법은 사람이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 명백하므로 나는 그것을 압제자의 악법인 동시에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그의 말씀에 붙들어 매시고 사람의 권력에서 풀어 놓으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애되지 않기를 원하신 일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사람이 규정할 때에,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모독 행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죄를 용서하는 데 있고 이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포악한 제도는 세상이 가증한 야만 세력의 압박 아래에 있었을 때에 도입된 것임을 나는 밝혔다. 여기에 첨부하여 나는 이것이 유해한 악법인 이유를 말하였다. 이 법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현저한 곳에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빠뜨리며, 관심이 없는 곳에서는 허무한 감언이설로 쓰다듬고 달래어 사람들의 태만을 조장한다. 끝으로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완화책은 모두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를 위장하는 것이며, 순수한 교훈을 혼란하게 하고 모호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5. 천주교의 교리를 개탄하며 논박함

 

그들은 고해성사에서 셋째 자리를 보속 교리에 둔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모든 공허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과거의 악행을 그치고 행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보조적인 방법에는 눈물과 금식과 예물과 자선 행위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방법들로 우리는 주의 노여움을 풀며,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갚으며, 우리의 범행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죄책을 용서하셨으나, 공의의 법에 의하여 벌을 보류하신다. 보속에 의해서 속량되어야 하는 것은 이 형벌이라고 한다.50 이 모든 말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우리의 범행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행위의 공로가 그 사이에 끼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로도 죄의 범죄에 대한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보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에 대해서 나는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를 대립시킨다. 성경에는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없다(사 52 : 3, 롬 3 : 24-25, 5 : 8, 골 2 : 13-14, 딤후 1 : 9, 딛 3 : 5). 첫째로, 용서는 순수한 관용에서 주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돈을 받고 영수증을 쓰는 채권자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받지 않고도 친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빚을 말소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보속이란 생각을 일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거저"라는 말을 붙이는가?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신념으로 이렇듯 강력한 노호로 때려 부순 보속 교리를 여전히 일으켜 세우는가? 주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실 때에(사 43 : 25), 용서의 원인과 근거는 그의 선하심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밝히 선언하시지 않는가? 또한 온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행10 : 43). 이것은 다른 모든 이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용서를 "보속"이란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그들은 보속을 보조 수단으로 도입하는 듯하지만 용서를 보속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성경에 있는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위임만 의지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바울이 선언한 것과 같다(고후 5 : 19). 그리고 바울은 곧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고후 5 : 21)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법과 이유를 첨부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준다. 26-27)

 

26. 그리스도는 완전한 보속을 제공하셨다

 

그러나 심히 패악한 그들은 죄의 용서와 화해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됐을 때에, 단 한 번 있는 일이며, 세례 받은 후에는 보속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의 열쇠에 의해서 나눠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나는 불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두명이 아니고 모든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주 분명히 글로써 자기들의 오점을 폭로하였다. 그들의 선생은51 베드로의 교훈에 따라(벧전 2 : 24),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 발언을 시정하는 예외를 덧붙인다. 곧 세례에서 죄에 대한 모든 현세적 징벌이 완화되지만 세례 후에는 회개의 도움으로 더욱 경감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회개가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52 그러나 요한이 한 말은 훨씬 다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 :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 : 12). 그는 분명히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죄의 대속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들과 단 한 번 화해하셨고, 지금은 그대들 스스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변호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회복시켜 주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고 한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이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 : 29, 1 : 36 참조).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므로 그는 죄를 위한 유일한 제물이시며 또한 유일한 화목의 제물이시며, 유일한 보속물이시다. 죄를 용서하는 권리와 권한은 아버지께 고유한 것이며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53 이 점에서 그는 아들과 구별되시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정도에 둔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맡으시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이루신 속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데, 다만 자신의 보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화해시키는 영예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지 않아야 한다.

 

 

 

27. 로마 교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며, 양심으로부터 확신을 일소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고려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완전히 지켜 손상됨이 없도록 하며, 양심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54

이사야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사 53 : 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하셨다고 한다(사 53 : 5-6). 베드로는 이 뜻을 다른 말로 반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한다(벧전 2 : 24). 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음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한다(갈 3 : 1, 롬 8 : 3의 융합).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회생 제물이 되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 짐을-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죽음의 벌을-모두 지웠을 때에, 그의 육신에서 죄의 세력과 저주는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거짓말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면, 최초의 정화가 있은 후에 우리는 각각 회개에 의한 보속의 분량에 비례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력을 느낀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타락할 때마다 다만 그리스도가 가르친 보속을 회상하라고 한다.

이제 그들의 어리석고 흉악한 주장들을 눈앞에 놓고 보라. 그들은 처음 죄를 용서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작용하나, 그 후에 우리가 타락하면 우리의 행위가 함께 작용해서 두 번째 용서를 얻는다고 한다.55

이런 원칙들이 성립한다면, 전에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던 기능은 손상됨 없이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을까?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지우며 그를 통하여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 죄의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죄는 보속으로도 속해 진다고 들을 때에 양심은 어떤 진정을 얻겠는가? 언제 사람은 보속의 분량에 대한 자신이 생길 것인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하신 지를 항상 의심하며 항상 불안하며 항상 떨 것이다. 사소한 보속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며 죄의 큰짐을 경시한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56 적당한 보속으로 어떤 죄를 속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일 백 평생의 죄를 위한 보속을 바쳐도 부족하리 만큼 많은 죄에 압도될 때에는,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죄의 용서를 선언할 때에 그 상대는 세례 지망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품안에서 오랫동안 양육을 받아 온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중생한 자녀들이다. 바울이 극찬한 사신의 임무, 즉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 : 20)는 이 말씀은 외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생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 작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위탁한다. 그가 골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할 때에(골 1 : 20) 그는 교회가 우리를 받아들인 순간에 이 일을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은 글의 전후 문맥을 보아서 곧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는다고 그는 말한다(골 1 : 14). 이와 같은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더 많이 인용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차이점과 반대 의견을 비관적으로 검토함. 28-39)

 

28. 소죄와 대죄

 

여기서 그들은 한 도피 수단으로서 어떤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즉 소죄로, 어떤 죄는 죽을 죄라는 대죄로 어리석은 구별을 한다. 대죄를 위해서는 무거운 보속이 필요하고 소죄는 더 쉬운 수단으로-주기도와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과 미사에서 받는 사면으로-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우롱한다. 항상 소죄와 대죄를 말하면서도 마음속의 불경과 불결을 소죄라고 하는 것 외에는 죄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한다.57 그러나 의와 불의의 표준인 성경의 교훈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 : 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 : 20), 신자들의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죽을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며(롬 8 : 1), 죄가 인정되지 않고 용서를 받아 말소되기 때문이다(시 32 : 1-2 참조).

그들은 우리의 이 주장을 중상모략하여, 죄들의 동등성에 관한 스토아파의 역설이라고58 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입으로 그들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이 대죄라고 하는 죄들 가운데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대죄들은 동시에 다 같다는 결론이 곧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 : 23), 율법에 대한 순종은 생명의 길이며(레 18 : 5, 겔 18 : 9, 20 : 11,13, 갈 3 : 12, 롬 10 : 5, 눅 10 : 28 참조) 법을 어기는 것은 죽음이라는(롬 6 : 23, 겔 18 : 4,20 참조) 정확한 언급이 있으므로 그들은 이 선고를 회피할 수 없다. 죄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그들은 보속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한 가지 죄를 보속하는 데 하루가 필요하다면, 이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 더 많은 죄를 짓는다. 가장 의로운 사람도 여러 번 넘어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잠 24 : 16 참조). 죄들을 보속하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동안에도 많은 죄를-무수히 많은 다른 죄를 짓는다. 이렇게 죄를 보속할 수 있다는 보증이 제거되었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가? 어떻게 감히 보속을 하겠다고 여전히 생각하는가?

 

 

 

29. 죄의 용서는 벌의 면제가 포함된다

 

그들이 몸을 빼려고 애쓰나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물은 떨어지지 않는다."59 그들은 죄와 벌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죄책이 용서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벌은 남아 있다고한다. 그러므로 보속은 원래 벌을 면제받는 것과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60

이 얼마나 경박한 짓인가! 그들은 죄책의 용서는 값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벗을 위해서는 기도와 눈물과 그 밖의 각종 준비를 해야 된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에 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 이런 구별과 완전하게 반대된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충분할 정도로 증명했다고 믿지만, 다른 증언들을 첨부해서 이 꿈틀거리는 뱀들이 다시는 꼬리도 사리지 못하도록 단단이 붙잡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렘 31 : 31, 34). 이 말씀의 의미를 다른 예언서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고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 : ?4),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 : 21-22, 27 참조). 그들의 의로운 행실을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그 행실들을 마음속에 새겨두는 일은 하시지 않겠다는 뜻과 사실상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같은 뜻을 표시하는 다른 말씀들도 있다.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 : 17),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도말 하였으니"(사 44 : 22),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 : 19),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 : 1-2). 우리가 이런 말들에 주의한다면, 거기에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려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면 그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계산하신다. 벌을 주신다면 죄를 기억하고 계신다. 재판에 붙이신다면 숨기시지 않는다. 죄의 가볍고 중함을 고려하신다면 등뒤로 던지시지 않는다. 검토하신다면 구름같이 쓸어버리시지 않는다. 죄를 드러내신다면 깊은 바다에 던지시지 않는다. 어거스틴도 분명한 말로 이 점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셨다면 죄를 보시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다. 죄에 주의하고자 하시지 않았다면 벌하지 않으시려고 한 것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무엇 때문에 '죄를 덮었다'고 하시는가? 죄가 보이지 않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보심은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61

그러나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 죄를 용서하시는가를 듣기로 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 : 18).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 : 20). 이 말씀들의 뜻을 간단히 알아보고 싶은가? 한편으로 주께서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욥 14 : 17), 불의가 "봉함 되었고"(호13 : 12), 또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새겨 졌거늘"(렘 17 : 1)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런 어귀들은 벌을 내리시리라는 뜻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께서 이와 반대되는 말씀들로 모든 벌을 용서하신다고 확언하신 것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이 내가 붙인 설명에 주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62

 

 

 

30. 그리스도의 특별 희생만이 벌과 죄책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만일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가 나무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그의 몸에 지셨다고 말할 때에(벧전 2 : 24), 우리는 그가 우리 죄에 해당한 벌을 받으셨다는 의미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 점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 53 : 5)라는 더욱 의미 심장한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란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 우리가 받았어야 할 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죄에 대한 벌을 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에 그것을 보통 구속(ajpoluvtrwsi")이라는63 말로 부른다(롬 3 : 24, 고전 1 : 30, 엡 1 : 7, 골 1 : 14 참조). 바울은 단순히 보통으로 이해하는 그런 의미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하기 위한 대가와 보속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속전으로서64 자기를 바치셨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딤전 2 : 6). "주님 앞에서 화해란 것은 회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회생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어거스틴은 묻는다.65

그러나 죄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에 확정된 것이 우선 우리에게 든든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거기서 주께서는 이러 저러한 모양의 배상을 정하시지 않고 제물을 드려 완전한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모든 속죄의 의식을 극히 자세하게 또 엄격한 순서로 결정하신다(출 30 : 10, 레 4 : 1-7, 16, 민 15 : 22이하). 여호와께서는 전혀 죄에 대한 배상을 행위로 치르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속죄의 제물만을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그의 심판을 무마하는 한 가지 보속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은 사람의 행위로 인정되지 않고 그 본질에 따라서, 즉 그리스도의 특별한 회생에 따라서 판단되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배상을 요구하시는가를 호세아(Hosea)는 간단하게 웅변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라고 했으니, 이것은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라고 했으니(호 14 : 2), 이것은 참으로 보속을 의미한다.

그들이 더욱 교묘한 도피 수단을 강구해서 영원한 벌과 일시적 벌을 구별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일시적 벌을 해석하여 영원한 죽음을 제외한 모든 벌 즉 하나님께서 몸이나 영혼에 내리시는 모든 벌이라고 하지만, 이런 제한은 그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인용한 구절들이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책을 용서하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면제하신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다윗과 다른 예언자들은 죄의 용서를 빌 때마다 동시에 벌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빌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들은 주의 자비를 약속할 때에, 거의 항상 벌과 사면에 대해서 가르친다. 바빌론 포로 생활을 종결시키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 주께서는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신다(겔 36 : 22, 32). 이 말씀은 확실히 두 가지를 다 값없이 주신다는 뜻이다. 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책을 면하게 된다면 죄책에서 생기는 벌도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31. 그릇된 해석을 폭로함 : 하나님의 심판에는 형벌적인 것과 교정적 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 있는 증언들로 무장하고서 어떤 논거를 제시 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간음과 살인에 대한 책망을 듣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간음으로 인하여 태어난 아들이 죽음으로써 후에 벌을 받았다(삼하 12 : 13-14)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용서된 후에도 받지 않을 수 없는 벌에 대해서 보속으로써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자선사업으로 죄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권하였다(단 4 : 27). 솔로몬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기록하였고(잠 16 : 6), 다른데서 "사랑은 모든 허물를 가리우느니라."고 하였다(잠 10 : 12). 베드로도 이 견해를 인정한다(벧전 4 : 8). 누가복음에서 주께서는 죄인인 여인에 대해서 같은 뜻으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 : 47)6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항상 이렇게도 패악하며 완고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관찰했다면 - 또 이것은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다윗에 대한 이 책망에 포함된 벌은 보복과는 훨씬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책망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징계의 목적을 깨닫기 위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징계가 하나님께서 불경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진노로 추궁하시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알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문제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는 보복의 심판, 또 하나는 징계의 심판이 라고 부르겠다.

보복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신다. 즉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뜨리시며 좌절시키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결합된 벌이다.

징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엄하심은 노여움에 이르지 않으며, 멸망시키려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 교정이나 경고이다.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그의 범행을 헤아려 범죄 자체에 벌을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징계할 때에는 복수나 학대하려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더 조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와 조금 다른 비유를 사용하지만, 결국 같은 뜻을 말한다. "아들도 채찍으로 맞고 노예도 맞는다. 그러나 노예는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아들은 훈계를 받아야 할 자유인과 아들로서 징계를 받는다. 아들에게는 교정이 시련과 개선이 되며, 노예에게는 응징과 벌이된다.67

 

 

 

32.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연 다르다

 

이 문제 전체를 속히 요약하기 위해서 두 가지 차이점 중의 첫째 것을 들겠다. 벌이 보복인 때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나타나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결코 내리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욥 5 : 17, 잠 3 : 11-12, 히 12 : 5-6).

이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해서 충분히 지적되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이를테면 일종의 지옥의 통로를 우리에게 묘사해 보이며,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영원한 저주를 이미 멀리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고치거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초보적인 경험이 도리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음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죽음에 내어주시지는 않는다(시 118 : 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으로 맞은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였고 자기들의 진정한 교육을 촉진시켰다고 고백한다(시 119 : 71). 우리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성도들은 벌을 받을 때에 평온한 마음으로 임했으며, 항상 첫째 종류의 벌을 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 10 : 24-25). 그뿐 아니라,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한다(시 6 : 1, 38 : 2).

그리고 주께서 성도들의 죄를 징계하실 때에 그들에 대해서 노하신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때가 많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이사야서에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라고 하는 말씀이 그와 같다(사 12 : 1). 마찬가지로 하박국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 : 2), 미가에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 : 9)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당한 벌을 받는 사람은 큰 소리로 불평을 말해도 무익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함으로써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업을 욕되게 하셨다고(사 47 : 6, 42 : 24 참조)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영원히 욕되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나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엄한 벌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그 심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조금만 엄격하게 벌하며 찌르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를 입히시므로 그들 자신은 지옥의 벌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며 그래서 그들로서는 자기의 악행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더욱 조심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용서를 비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에서 진노보다도 자비를 더욱 분명히 증거하신다.68 하나님께서 신실한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은(삼하 7 : 12-13) 지금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 이 계약의 효력은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 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 : 30-3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자비를 더욱 확신하게 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의 후손들을 단련하실 때에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삼하 7 : 14).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온화하며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벌을 느끼는 사람들 편에서는 극심한 공포심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예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이 관대한 징계를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사 48 : 10). 은처럼 한다면 너희는 완전히 타버렸을 것이라는 말이다(사 43 : 2 참조). 주께서는 징계가 주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만 백성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도록 징계를 완화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 생활에 전심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악인도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 신음하지만, 그는 이 일을 숙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하신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말하며 반항하며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과 정신 착란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경고로 생각해서 즉시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간절히 구하게 된다. 가련한 영혼들의 이와 같은 고민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진노의 징조만 보이더라도 백 번이나 기절할 것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에는 둘째 차이점을 보기로 하자. 악인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미 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짐의 진노의 이런 증거를 무시한다고 해서 벌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바른 정신을 차리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자시며 처벌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지팡이로 맞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하나님에게서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일들은 과거보다 미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뜻을 내 자신의 말보다 크리소스톰의 말을 빌어 표현하려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벌을 내리신다.-과거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를 교정시키시려는 것이다."69 어거스틴도 "그대들이 받는 고통과 불평하는 일은 벌이 아니고 약이다. 정죄가 아니고 징계이다. 기업에서 배제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채찍도 배제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형제들이여, 온 세상이 불행에 신음하고 있으나, 인류의 모든 불행은 처벌 선고가 아니라, 의약에서 오는 고통이다."라고 말한다.70 이 구절들을 인용하기로 정한 것은 내가 이상한 말을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패악한 마음으로 모든 처벌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배반 행위를 자주 책하시며 분노가 섞인 불만을 말씀하시는 뜻도 여기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사 1 : 5-6). 예언서에는 이런 언급이 가득하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벌하시는 목적이 오직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며 회개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을 간단히 밝히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나라를 빼앗았을 때에 그에게 보복의 벌을 내리셨다(삼상 15 : 23). 다윗의 어린 아들을 빼앗았을 때에(삼하 12 : 18), 그를 교정하시려고 질책하신 것이다. 바울의 말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 : 32).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의 손으로 고통을 받는 일이 있지만, 이것은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징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어거스틴은 분명히 우리편을 든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똑같이 받는 벌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 벌이 분투와 노력의 기회가 되며, 악인들에게는 죄의 용서가 없으며 불의에 대한 처벌이 된다. 여기서 그는 다윗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받은 벌을 열거한 다음에, 이 벌들은 그들의 자만을 꺾으며, 이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경건을 단련 내지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한다.71 이사야가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서 충분히 징계를 받았으므로 그 불의가 용서되었다고(사 40 : 2) 말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벌을 치르는 데 달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말을 바꿔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 그 벌이 무겁고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이미 오랫동안 슬픔에 지쳤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자비를 베푸신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때가 되었고, 너희 마음이 기뻐하며 나를 아버지로 느낄 때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시며, 그 자식에게 조금 가혹한 벌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비록 그것이 정당하고 엄격한 처사였지만, 후회까지 하신다.

 

 

 

34.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신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무장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렘 25 : 29),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 : 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느끼는 심한 고통이 보복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처벌하는 자를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진노와 적의로 밖에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채찍을 저주와 영원한 정죄라고 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를 벌하실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결국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 대해 노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비하시며 인자하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가 자기의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시 88 : 16). 또 모세가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시 90 : 7-9) 한 것과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다윗은 신자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징계에 의해서 압박보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징계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 : 12-13). 참으로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아끼시며 그들의 범죄를 무시하시면서, 자기 백성에게는 더욱 엄격하신 듯할 때에,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위로를 받아야 할 이유를 첨부한다. 즉 율법으로 훈계를 받는다고 한다. 이 훈계에 의해서 신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때에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불경건한 자들이 제멋대로 과오에 돌입하는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한다. 그 벌이 영원한 것인지 또는 현세적인 것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질병이 악인들에 대한 주의 진노와 보복의 수단으로서 주어지게 될 때에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 자체에 못지 않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35. 다윗이 받은 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벌하신 목적을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살인과 간음을 하나님이 노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시는 충실한 종이 이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대단히 노하신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다윗이 감히 다시는 이런 범죄를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에게 어떤 배상을 하도록 하기 위한 벌이 아니었다. 주께서 한 교정책으로서 무서운 전염병을 그의 백성에게 보내신 것도(삼하 24 : 15)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구 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책을 거저 용서하셨지만, 이런 죄를 벌하는 것이 모든 시대에 본을 보이며 다윗의 교만을 깨기 위하여 합당한 처사라고 보셔서, 다윗을 채찍으로 심히 냉혹하게 징계 하셨다.

인류의 보편적인 저주에 대해서도(창 3 : 16-19 참조)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도 우리의 처음 조상이 죄에 대한 벌로서 받게 된 그 모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이런 시련에 의해서 경고를 받는 것으로-즉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어기는 우리의 죄에 대해 얼마나 심히 노하시는가 하는 경고를 받는 것-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하고 낙심하며 겸손하게 되어, 더욱 간절히 진정한 행복을 구한다. 현세에서 당하는 재난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연 어리석은 짓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런 뜻으로 기록했다고 나는 본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목적이 악행을 계속하는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면, 회개한 후에는 벌이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7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성질에 따라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더 엄하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더 친절하고 관대하게 다루신다. 따라서 얻어맞고도 죄를 그치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그 굳고 완고한 마음을 책망하셔서(렘 5 : 3), 자기가 내리는 벌은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에브라임은 한쪽은 익고 한쪽은 익지 않은 번병과 같다고 책하신다(호 7 : 8). 교정이 그들의 마음속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 죄를 익혀내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만드시겠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곧 관대하게 대하시리란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엄격하게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고한 태도가 그에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자진해서 고치면 그 엄격한 처사는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이 굳고 무지하여 징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극히 현명하신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을-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한 공통된 채찍으로 일평생 훈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셨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의 예만 보고 많은 다른 예에 대해서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을 그들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눅 18 : 14). 거기는 아무 벌도 따르지 않았다. 베드로도 용서받았다(눅 22 : 61). 암브로시구스가 말한 것과 같이, 그가 울었다는 말씀은 있어도 속죄물을 바쳤다는 말씀은 없다.73 중풍병자는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마 9 : 2) 벌은 받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사면은 모두 값없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법칙은 특별한 양상을 가진 한 가지 예에서 취할 것이 아니라 빈번히 나타나는 이런 예들에서 찾아야 한다.

 

 

 

36. 벌에 대한 보속으로서의 선행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간하여 공의를 행함으로써 죄를 속하고 빈민을 긍휼히 여김으로써 죄악을 속하도록 설득했을 때에(단 4 : 27), 그는 그 공의와 긍휼을 하나님께 대한 화해의 제물과 벌에 대한 배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다른 몸값이74 있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라! 다니엘이 "속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고 사람에 관한 말이다. 그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오 왕이여, 당신은 지금까지 부정을 하였으며 포악한 지배를 했으며, 낮은 사람들을 압박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강탈했으며, 백성을 가혹하고 부당하게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불법 징수와 포악과 압박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긍휼과 공의를 행하십시오."라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한다(잠 10 : 12).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 절을 전부 인용한다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는 것이다(잠 10 : 12). 대조법을 상용한 그는 여기서도 미움에서 생기는 악한 일들과 사랑에서 생기는 결과들을 대조시킨다. 그의 뜻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서로 물고 빼앗고 비난하고 손해를 입히고 매사에 트집을 잡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많은 일을 숨겨주며 보지 않는 체하며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허물을 옳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관대하게 보며 비난으로 악화시키지 않고 충고로 고쳐준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취지도 확실히 여기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 말씀의 품위를 저하시키며 뜻을 간교하게 곡해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벧전 4 : 8 참조).

솔로몬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가르친 것은(잠 16 : 6),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른다든지, 또는 하나님께서 이런 보속으로 화해하시고 내리시려고 하던 벌을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정신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시리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죄가 그칠 때에 주의 진노도 진정되며 심판도 그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솔로몬은 용서의 원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치고 진정한 회심의 수단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직과 사랑의 실천을 기뻐하시는데, 위선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아우 소용도 없는 거짓된 예식을 하나님 앞에서 강행하는 것을 예언자들이 자주 비난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식으로 친절과 인정을 찬양하여 이런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히 13 : 16). 그리스도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접시를 깨끗하게 하는 데만 유의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무시하는 것을 비웃으시며, 구제를 함으로써 모든 것을 순결하게 만들라고 가르치셨을 때에(눅 11 : 39-41, 마 23 : 25 참조), 속죄를 하라고 역설하시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오히려 주께서는 어떤 종류의 순결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가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도 논하였다.75

 

 

 

37. 죄인이었던 여인

 

누가복음에 있는 구절에 관해서는(눅 7 : 36-50), 주께서 제시하신 비유를 건전한 정신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대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주께서 그 여인을 선뜻 용인하셨으나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죄인인지를 알았다면 용납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속는 그리스도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주께서는 자신이 용서해주신 그 여인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이러므로…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 : 41-47). 이 말씀은 그 여인의 사랑이 사죄의 원인이 아니고 증거라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비교한 것이다. 그 사람이 탕감받은 것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교는 다음과 같이 적용 되어야한다. 즉 너는 이 여긴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은 죄인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용서를 받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저 여인의 사랑을 보고서 너는 당연히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납법인 증명 즉 결과적인 증거에 의해서 어떤 일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주께서는 그 여인이 어떻게 용서를 얻었는가에 대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셨다(눅 7 : 50).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증거한다.

 

 

 

38. 천주 교회 교리는 교부들의 권위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 널리 나타나 있는 보속설은 나의 생각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저술이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이 점에서 타락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날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새로운 보속설 변호론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글을 쓸 정도로 야만적이고 무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기록했다. "자비를 간청하는 데서는 조사가 그친다. 자비를 탄원하는 곳에서는 심판이 진정된다. 자비를 구하는 곳에서는 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비가 있는 곳에는 심사가 없으며, 자비가 있는 곳에서 받는 대답은 용서된다."76 이런 말은 아무리 곡해된다 해도 스콜라 학자들의 주장과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저술한 교회의 교리(The Dogmas of the church)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회개를 통한 보속은 죄의 원인을 끊어버리며 그 원인들의 시사를 허용하지 않는다."77 이 말을 보면 지은 죄에 대해서 갚는 것이 보속이라고 하는 주장은 고대에도 일반적으로 조소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그때에 보속을 후에 조심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과 항상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앞에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고78 한 말을 나는 인용하지 않겠다. 이런 말은 그의 글과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어디선가 자선 사업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는 다른 곳에서 이 항의에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회생이다. 세례에서 완전히 소멸된 죄뿐 아니라, 그 후에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잠입하는 죄까지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호소한다(마 6 : 12). 그리고 저 유일한 회생을 통해서 죄는 용서된다."79

 

 

 

39. 스콜라 학자들은 교부들의 교훈을 부패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보속을 하나님에게 치르는 보상이라고 하지 않고 파문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에 행하는 일반적 증언이며 그 증언에 의해서 자기들의 회개를 교회에 확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탄식과 그 밖의 의무를 지워서, 참으로 진심으로 이전 생활을 미워한다는 것을, 또 이전 행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자 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보속을 치렀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편람(便览, Enchiridion)에서 라우렌티우스(Lauremtius)에게80 이 점을 바로 이런 말로 표현했다. 이와 같은 고대 의식이 현재 사용되는 고백과 보속의 근원이다. 이 훌륭한 형식의 그림자도 남지 못하게 한 무리는 참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겠다(마 3 : 7, 12 : 34 참조).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때로 다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것을 나는 안다. 또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81 그들이 잘못한 것 같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군데 오점이 있는 그들의 글을 이 사람들이 불결한 손으로 만질 때에는 전부가 더러워지고 만다. 또 교부들의 권위에 의해서 논쟁해야 된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어떤 교부들인가? 그들의 지도자인82 롬바르드가 그의 편찬을 만들기 위해서 인용한 저술가들의 대부분의 저술은 수도승들의 무의미한 광적인 발언을 모은 것이고 이런 발언들이 암브로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등의 이름으로 유포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증거의 거의 전부를 어거스틴의 책 회개에 대하여(On Repentance)에서 취했다. 이것은 어떤 열광적인 문필가가 필자의 우열을 묻지 않고 되는대로 끌어 모아 서툴게 꿰매어 놓은 것이다. 저자를 어거스틴이라고 하지만, 다소의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그의 저술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83 내가 스콜라 학자들의 미련한 행위를 명백하게 검토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나는 독자의 짐을 덜고자 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신비스러운 비밀이라고 자랑한 것을 폭로해서 웃음거리로 만들며 그들에게 수치를 주는 것은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 칭찬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설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냥 지나가겠다.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1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2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3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4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5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 : 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 : 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 : 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 : 13 참조).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 : 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 : 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 : 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 : 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6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 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7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 : 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8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 : 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9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 : 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 : 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 : 25, 롬 15 : 19 참조).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 : 7 참조).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10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 : 15 참조).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 : 11 참조),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 : 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 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11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12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연옥설 지지용으로 인용된 구절들을 바로 해석함으로써 연옥설을 반박함. 6-10)

 

6. 연옥설은 논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끼로 이미 그들의 "연옥"을 쪼개고 베고 송두리째 넘어뜨렸으므로 이제 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연옥 문제를 모르는 체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분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이 문제에서는 맹렬한 충돌이 생길 뿐이고 덕을 세우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13 나는 그 심각성이 중대하지 않다면 이런 무가치한 것은 무시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러나 연옥설은 많은 신성 모독으로 구축된 것이며, 매일 새로운 모독으로 지탱되며, 여러 가지 중대한 죄악을 선동하고 있으므로 도저히 묵인할 수 없다. 대담하고 경박한 자들이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연옥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혹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또 사람들은 연옥을 간교한 사탄이 조작한 일종의 "계시"로 믿었으며, 이 생각을 확립하기 위해서 무지한 자들이 성경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했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난의 비밀한 곳에 침입하려는 인간의 무엄한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용인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죽은 자들에게서 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히 금지하셨다(신 18 : 11). 그의 말씀을 불결하게 타락시키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이런 것은 모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일시 허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속죄를 구할 때나 보속을 다른 데로 돌릴 때에는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소리로-옥과 폐에서 나오는 큰 소리로 -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연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부숴 버린다. 그 자들의 이 연옥은 죽은 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죄에 대한 보속을 치른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보속이라는 생각이 부서지면 연옥 자체도 송두리째 뽑혀지고 만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를 위한 유일한 보속과 유일한 속죄와 유일한 정화라는14 것이 분명하다면, 연옥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연옥을 옹호하기 위해서 매일 모독적인 말을 하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연옥이 종교 생활에서 빚어내는 비교적 사소한 죄악들과 이 불경건이 근원이 되어 흘러나오는 그 밖의 무수한 일들도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7. 복음서에 연옥설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 구절들을 거짓되게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구절들을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마 12 : 32, 막 3 : 28-29, 눅 12 : 10), 그들은 주께서 동시에 오는 세상에서 어떤 죄는 용서된다는 뜻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5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죄에 대한 죄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과 연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벌온 연옥에서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죄책이 이 세상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욕설을 막기 위해서, 더 분명한 논박을 하겠다. 이런 부끄러운 죄악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 희망이 전연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주께서는 그것이 용서를 결코 받지 못하리라고 만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더욱 역설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양심이 현세에서 경험하는 심판과 부활시에 공적으로 캐릴 최후의 심판을 구별하셨다. 주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악한 반역은 즉각적인 파멸이라고 생각하여 조심하라. 성령이 제시하는 빚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끝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끝날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할 것이며, 천국에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것이다."(마 22 : 32-33 참조)이다.

그들은 또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를 끌어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 : 25-26).

만일 이 구절에서 재판장은 하나님이고 송사하는 자는 악마요, 관예는 천사요, 감옥은 연옥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공정과 화합을 더 절실하게 역설하시기 위하여, 공정과 선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율법의 문자를16 완고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험과 재난을 자초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누가 보든지 명백하다. 그렇다면 연옥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8. 빌립보서와 계시록과 마카비후서에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17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 바울의 말에서(빌 2 : 10) 그들은 증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땅 아래"는 영원한 저주에 묶여 넘어간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생각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그 말을 연옥에서 고통하는 영혼들에 적용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로 사도가 진정한 경배를 의미했다면 그들의 추리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단순히 그리스도께 지배권이 부여되어 모든 피조물을 복종시키게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땅 아래 있는 자"는 마귀들을-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와서 공포와 전율로 심판자를 인정할 마귀들을-의미한다고(약 2 : 19, 고후 7 : 15 참조)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 예언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롬 14 : 10-11, 사 45 : 23).

그러나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 : 13)라고 한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물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말하는 만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성이 없는 것과 무생물도 포함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부분이 하늘 꼭대기로부터 지구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 모양대로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데 불과하다(시 19 : 1 참조).

그들이 마카비 가문의 역사에서 인용하는 것은(마카비후서 12 : 43)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성경의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정경으로 인정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선 그는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인정했는가? 그는 "유대인들은 마카비서를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 : 44)고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 책은 침착하게 읽거나 듣는다면 교회에 무익하지 않다."18고 말했다. 그러나 제롬은 아무 주저함이 없이 마카비서의 권위는 교리를 증명하는 데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19 키프리안이 기록했다고 하는 고대의 저술인 신조의 해석에 관하여(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를 보면, 마카비서가 고대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20 또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무익한 논의에 시간을 보내는가? 저자 자신이 끝에 가서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간청함으로써(마카비후서 15 : 39), 자신이 충분한 존경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사람은 확실히 그것을 성령이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유다의 경건을 칭찬하는 이유도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예물을 보냄으로써 종말의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였다는 특색뿐이었다(마카비후서 12 : 43). 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유다의 행위를 구속의 대가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죽은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행동은 미신적인 것이었으며 잘못된 열성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 후로 율법에 의한 회생이 없어진 줄 알고 있는데, 그 옛날 관습을 현재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짓이다.

 

 

 

9.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강력한 전투 부대를 제공하며, 이 군대는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인용한 바울의 말은"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 : 12-13,15)고 한 것이다. 이것이 연옥의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연옥의 불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없애버리고 우리는 순결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 중에는 이 말의 뜻을 달리 해석한 사람이 매우 많다. 그들은 불을 환난 또는 십자가로 보며, 주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그 백성이 육의 더러움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그들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였다.21 그리고 이 편이 공상적인 연옥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과도 의견을 달리한다. 나는 이 구절을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해석을 소개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사도들과 성자들은 모두 이 연옥의 불을 통과해야 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그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리라는 것을 안다. 사도들과 성자들의 공로가 모든 교인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준다고 상상하면서 그들도 연옥을 통과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일부 사람들의 업적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업적이 시험을 받으리라고 언명한다. 이것은 내가 하는 논박이 아니고 그런 해석에 반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또 그들의 해석에는 더욱 어리석은 점이 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행위 때문에 불을 통과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들이 지극히 성실하게 교회를 건설했다면 그 업적이 불로 시험을 받은 후에 상을 받으리라고 말한다.22

우선 우리는 사도가 사람의 두뇌로 고안해낸 주장들을 "나무와 풀과 짚"이 라고 비유적으로 부른다. 이 비유는 나무를 불에 넣으면 곧 타버리는 것과 같이, 이런 것도 시험을 받게 되면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하나님의 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기의 비유의 줄거리를 따라 각 부분의 상호 관계를 종합하여 성령의 시험을 "불"이라고 부른다. 금과 은은 불에 가까이 두면 둘수록 그 순수성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된다. 그와 같이 주의 진리는 조심스럽게 영적 검토를 거치면 거칠수록 그 권위가 더욱 완전히 확립된다. "나무와 풀과 짚"은 불에 넣으면 즉시 타버린다. 그와 같이 인간의 조작품은 주의 말씀을 토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시험에 견뎌나지 못하고 즉시 몰락하고 소멸한다. 간단히 말하면, 조작한 교리는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이 불에 타버리기 때문에 "나무와 풀과 짚"에 비교되지만 그런 교리를 태워 없애버리는 것은 주의 성령뿐이다. 따라서 교리들을 시험할 불은 성령이다. 이 성령에 의한 시험을 바울은 성경의 통례에 따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고전 3 : 13). 주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때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주의 진리가 빛을 나타내는 때에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불"은 성령에 의한 시험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공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고전 3 : 15) 어떻게 저 불을 통과하여 구원을 얻는가? 사도가 어떤 사람들을 겨냥하여 두고 말하는지를 알면, 이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합당한 기초 위에 부적당한 재료로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신앙의 중요하고 필요한 교리에서는 떠나지 않지만, 덜 중요하고 덜 위험한 교리에서는 곁길에 들어, 자기들이 생각해낸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섞어 넣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조작품과 함께 그들의 공력까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것처럼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전 3 : 15). 바꿔 말하면 그들의 무지와 망상이 주 앞에서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권능으로 그것들이 깨끗이 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금같은 순수성을 이 추악한 연옥설로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10. 초대 교회에 호소하는 것도 로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교회가 지켜온 극히 오랜 관습이라고 말한다.

이 항의에 대해서 바울은 자기의 시대까지도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교회를 부적당한 기초 위에 세우는 사람은 모두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한다(고전 3 : 11-15)

그러므로 나의 반대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과거 1300년 동안 있은 관습이라고23 항변하나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 어떤 계시에 의해서, 어떤 전례에 의해서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기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의 예를 보더라도 이런 일은 전연 없었다. 애도와 매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많으나, 이런 기도에 대해서는 일점 일획도 볼 수 없다. 문제가 중요할수록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싸들을 위해서 기도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합법적인 전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24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감히 했는가? 그들은 인간 본성의 약점에 굴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한 일은 모방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롬 14 : 23), 신자는 양심에 확신이 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특히 기도에서 이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강요한 것은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슬픔을 덜어줄 위로를 구했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하나님 앞에서 표시하지 않는 것은 몰인정한 것같이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인간성이란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아는 일이다.

또 일반적으로 공인된 풍습이 불붙은 나무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모든 이교도들 사이에 옛날부터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있었고 매년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탄은 이런 술책으로 우둔한 인간들을 속였지만, 그는 바른 원칙에서 그들을 속이기 위한 기회를 얻었다. 즉 올바른 원칙이란 죽음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이생에서 다른 생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미신 자체가 이교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내세 생활에 생각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사람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이 마치 없어진 것같이 그들을 위해서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여기서부터 저 잘못된 정신이 생겨났다. 장례식이나 연회나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그릇된 경쟁심에서 시작한 일이 새로운 것을 추가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교황권의 신성성을 표시하는 중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보다 훨씬 더 흘륭하고 환전한 위로가 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장한다(계 14 : 13). 그리고 그 이유로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부언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인정에 빠져서 교회 안에 패역한 기도 풍습까지 장려한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 들이 기록한 일은 당시의 사회 풍습과 무지로 인해서 허용되었다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교부들도 오류에 휩쓸려 들었다는 것을 단정한다. 부주의한 경신(轻信)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판단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권할때에 그들이 많이 주저한 것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제단에서 예식을 행할 때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자기를 기억하라고 간곡하게 요망했다는 것을 그의 참회록(Confession)에서 밝힌다. 이것은 분명히 한 노인의 요구였고 아들은 그것을 성경의 기준에 의해서 시험하지 않고 자기의 자연적인 애정을 다른 사람들이 시인해 주기를 원했다.25 그뿐 아니라, 그가 쓴 사자(死者)를 위하여 할 일(The Care to Be Taken for the Dead)이라는 책에는 너무도 많은 의혹이 있어서, 그 냉정한 태도는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미련한 열심을 즉시 꺼버릴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냉정한 상상들을 읽으면 정성이 있던 사람들도 성의가 없어질 것이다.26 이 관습에 대해서 이 책이 주는 유일한 지지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지금까지 있는 관습이니, 멸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은 경건한 행동같이 생각된다는 점에서는 나도 교회의 고대 저술가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속일 수 없는 지켜야 할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우리의 기도에 집어넣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그것은 어떤 기도를 받으시고자 하는가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나 복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허락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더럽히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고대 교회가 이를테면 그들과 오류의 동지가 된다고 자랑한다면, 나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고대인들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한 기념으로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연옥에 대해서 그들은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의 현재 논적들은 그들이 상상해낸 연옥을 하나의 신앙 조항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고대인들은 성만찬에서, 죽은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에게 형식적으로 간혹 기도했을 뿐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열렬히 추진하며, 끈덕지게 선전함으로써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보다 그것을 우선시킨다.27

참으로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은 고대에 사용된 죽은 자를 위한 모든 기도를 분명히 부정한다. 그런 증언을 제시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일례로서 어거스틴이 한 말을 들 수 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람은 죽은 후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면 모두 평안한 휴식을 얻는다고 어거스틴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신자가 예언자와 사도와 순교자들과 똑같이 죽은 후에 즉시 복된 휴식을 얻는다고 증거한다.28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나는 묻고자 한다.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한 유치한 미신에 대해서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런 미신은 무수히 많지만 그 대부분이 너무도 괴상해서 도저히 점잖게 꾸밀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무지몽매를 이용해서 그들이 비열한 장사를 하며 그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추악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선량한 독자들은 양심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제 6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주장하는가?

 

1. 논설의 의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1 중생의 목적은 신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순종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받은 자녀로서의 자격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갈 4 : 5, 벧후 1 : 10 참조).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둔하여 많은 자극과 도움이 필요하므로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의 열성이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토대로 생활을 설계하는2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를 서술함에 있어서 나는 문제의 내용이 복잡 다양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중대성으로 보아서, 만일 자세히 논하려면 방대한 저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한 훈계를 기술하는 데도 옛날 교부들은 무수한 말을 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마디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해서 권장하려고 해도 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자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생활지침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개개의 덕목을 상술하거나 여러 가지 충고를 하는 등의 탈선을 할 생각은 없다. 이런 것은 다른 분들의 글에서, 특히 교부들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정리된 생활로 인도될 수 있는가를 경건한 사람에게 보여주며, 그의 각종 의무를 결정할 어떤 보편적인 준칙을 간략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열변을 토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나, 내게 적당하지 않은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원래 간결한 것을3 좋아하며 더 많이 말한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더 길게 가르치는 것이 많은 환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뿐 아니라, 이 저서의 계획으로 보아서, 교리의 단순한 개요를 가급적 간단하게 제시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바른 것과 고상한 것의 한계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개개인의 의무와 수다한 덕목을 끌어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이 문제에 대한 고유의 질서가 있으며, 그 처리 방법이 지극히 아름답고 모든 철학적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철학자들은 명예욕이 강했기 때문에 자기의 민첩한 두뇌를 자랑하기 위해서 논술이 지극히 정연하고 명료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솔직하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어떤 조직적 방법을 정확히 또는 부단히 따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규정하실 때 그는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암시하신다.

 

 

 

2. 그리스도인 생활의 동기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교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양상이 있다. 첫째는, 우리의 본성에는 의에 대한 사랑이 전연 없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의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된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지 않도록 준칙을 정하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권장하는 심히 많고도 훌륭한 비유가 있다. 그 중에서 얼마는 이미 다른 곳에서 보았고 여기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레 19 : 2, 벧전 1 : 15-16). 의의 기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길을 잃은 양들같이 흩어져서 이 세상의 미로를4 헤매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모으셔서 자신과 만나게 하셨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이 그 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게 굳게 결합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악이나 불결과는 아무 접촉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그의 영광의 가장 특이한 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표는 이것이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자 하면 우리는 항상 이 목표를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사 35 : 8, 기타). 세상의 사악과 부패에 잠겨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평생 거기서 주저앉아 있다면, 구원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주의 백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거해야 한다는 충고가 있다(시 116 : 19, 122 : 2-9 참조). 주께서 이 도성을 자신의 것으로 성별하셨으므로 주민의 불결로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흠이 없고 의를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시 15 : 1-2, 24 : 3-4). 이는 그가 거하시는 성소가 마구간 같이 오물이 가득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기를 그리스도 인격과 그의 구속 행위에서 얻는다

 

성경은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일깨우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을 때에(고후 5 : 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형상을 인치시고(히 1 : 3 참조), 우리가 그 형상과 같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면 도덕 철학을 철학자들만이 충분히 또 조직적으로 진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처리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자.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특히 덕에 대한 교훈을 할 때에, 본성대로 살라고5 할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근원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다. 또한 우리의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창조 당시의 본연의 상태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친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게 된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세우셨고 우리는 그 모범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한 가지 일보다 더 효과적인 어떤 것을 요망할 수 있는가? 아니, 이 한 가지 일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한가? 주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즉 우리의 양자 관계의 유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의에 몸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반역하는 사악한 배신 행위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열거하고 그 은혜와 우리의 구원의 각 부분에 대해서 일일이 충고할 계기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으므로 만일 우리가 자녀다운 생활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는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말 1 : 6, 엡 5 : 1, 요일 3 : 1).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를 씻어 정결하게 하셨고 세례를 통하여 그 정결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또다시 타락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엡 5 : 26, 히 10 : 10, 고전 6 : 11, 벧전 1 : 1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지체인 우리 자신에 오점이나 결점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엡 5 : 23-33, 고전 6 : 15, 요 15 : 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승천하셨으므로 우리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늘을 동결해야 한다(골 3 : 1이하). 성령께서 우리를 성전으로서 하나님께 바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빛나도록 주의하며, 추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전 3 : 16, 6 : 19, 고후 6 : 16). 우리의 영혼과 몸은 하늘의 불멸과 퇴색하지 않는 면류관을 받기로 정해졌으므로(벧전 5 : 4),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을 주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보존하도록 힘있게 노력해야 한다(살전 5 : 23, 빌 1 : 10 참조). 이런 충고들은 우리의 생활을 건설하는 기초로서 가장 복된 것이다. 철학자들에게 가서 이와 같은 것을 구하려고 해도 무익할 것이다. 그들은 덕을 권장할 때에, 기껏 고상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인간 본래의 존엄성이란 생각을 결코 넘지 못한다.6

 

 

 

4.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가장 깊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휘장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칭하고 싶은 사람들을 여기서 책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그들은 그의 신성한 이름을 얼마나 염치 없이 자랑하고 있는가? 참으로,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면, 그와의 친교를 가질 수 없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교훈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를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은 욕망에 속아 썩어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엡 4 : 22,24).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넓은 지식과 유창한 말주변으로 무엇이라고 지껄이든 간에, 그리스도를 아는 체하는 그들의 태도는 거짓이며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고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 분야에서는 오성과 기억력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을 해득하려면 복음이 영혼을 전적으로 점령하고 속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7 그러므로 아니면서 그런 체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모독 행위를 못하게 하고 교사인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처신하라. 우리는 종교 생활의 근원이 되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 교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우리의 속마음에 들어가며, 다음에 일상 생활이 되며, 우리를 개조하고 동화시킴으로써 복음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인생의 스승으로 믿기에, 그것을 궤변술로 타락시키는 자칭 철학자들을 볼 때에 격분하여 그들을 철학계에서 축출한다.8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혀끝에서 복음을 굴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천박한 궤변가들을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훨씬 더 당연하지 않은가? 복음의 효력은 마음속 가장 깊은 감정에까지 침투해서 영혼 안에 자리를 잡고 인간 전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하는 충고보다 백 배나 더 심각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불완전과 노력

 

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 생활에서는 복음만을 호흡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원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복음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복음적 완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에서 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 교회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다. 목표에 조금은 접근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을 버린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을 눈앞에 세우라. 우리가 분투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들을 일부분은 실행하고 일부분은 우리의 생각대로 버리는 식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과 우리가 나눈다는 것은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어디서나 그에 대한 경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실을 요구하신다(창 17 : 1, 시 41 : 12 기타) 이 말은 마음의 진실한 단순성, 아무런 간사함이나 가장이 없는 마음, 두 마음과 반대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올바른 생활의 출발점은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이 영적인 생활에서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함양하고 체득하기 위해서 마음의 깊은 감정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친다.

그러나 지상 감옥인 육체를9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해서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의 미미한 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전진할 생각으로 우리가 시작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비록 아주 짧은 거리일지라도 매일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출발은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길에서 다소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중단치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사소한 때에도 낙심하지 말라. 원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나으면 무익한 노력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계속 분투 노력하라. 우리의 목적은 선한 일에서 평소보다 조금씩 나아 져 드디어 선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분과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 만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다.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 자기 부정

 

(탈속과 자기 부정의 기독교 철학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 나님의 것이다. 1-3)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인간 생활의 규율을 위하여 가장 잘 마련된 적절한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제공한다. 그러나 하늘 교사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 율법에 제시된 준칙과 부합하도록 더욱 명백한 계획에 따라서 인도하는 것을 좋게 보셨다. 그 계획의 출발점은 신자의 의무에 대한 개념인데, 그 의무는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롬 12 : 1).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권면이 나온다(롬 12 : 2).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별되며 바치어져, 금후로는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명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속되게 사용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현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고전 6 : 19 참조) 주의 것이라면 우리가 멀리 피해야 할 오류가 무엇이며, 일생의 모든 행동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소유를 잊어버리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라(롬 14 : 8, 고전 6 : 19 참조).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의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참으로 얼마나 큰 유익을 얻겠는가! 우리의 사욕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멸망시키는 해독이듯이 유일하고 안전한 피난처는 아무것도 아는 체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자기 힘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주의 인도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이것을 제일보로 삼으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육적인 생각을 버린 빈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명하시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건만, 철학자들은 이 변화를 몰랐다. 바울은 이것을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다(엡 4 : 23). 저들은 이성만을 사람 안에 있는 지배 원리로 설정하고 이성의 소리만을 따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인생 행로를 이성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1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며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사람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며 지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한다(갈 2 : 20).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함

 

여기서부터 두 번째 요점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한 걱정은 물론 경시하면서 우리의 열성을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 신실히 바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전진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2 충심으로 느낄 만큼 마음의 자세를 확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것을 모두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에 맡길 뿐 아니라, 하고자 하는 것까지도 양심적으로 온통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아는 사람은 동시에 모든 허탄한 생각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부정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이다(마 16 : 24 참조)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함이나 그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연 허용하지 않는다(딤후 3 : 2-5 참조). 이와 반대로 자기 부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때에는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횡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기에는 선한 것이 있다고 해도 타락한 명예욕으로 더럽혀진다. 주의 계명에 따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친절을 베푸는 예가 있으면, 그런 사람을 내게 보이라. 자기 부정의 심정이 강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덕은 덕 자체를 위해서 추구돼야 된다고3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안하 무인격으로 거만하여 그들이 덕을 추구한 것은 자랑할 기회를 얻으려는 생각이었고 그밖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속 풍조에 아부하는4 사람과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모두 아주 불쾌히 여기시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마 6 : 2,5,16), 창녀와 세리들이 그들보다 천국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마 21 : 31).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를 바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아직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무수한 죄악이 숨어 있다."고5 한 옛말은 옳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추구하며,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전심 전력으로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잘 정돈된 생활의 각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간단하나마 더 분명하게 설명을 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 : 11-14). 바울은 우리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했다.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장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물을 제거했다. 첫째는 불경건인데, 우리의 천성은 이 쪽으로 너무나 많이 기울어져 있다. 둘째는 세상 욕심인데, 이것이 미치는 범위는 더욱 크다. 불경건이란 것은 미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두려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상 욕심은 육의 정욕과 같은 것이다(요일 2 : 16, 엡 2 : 3, 벧후 2 : 18, 갈 5 : 16, 기타 참조). 이와 같이 율법의 두 돌판에 관련해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을 버리며,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는 인생의 모든 행동을 세 부분으로 묶어 둔다. 즉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이다. 이 가운데서 근신은 정절과 절제뿐만 아니라, 세상 재물을 순결하고 검소하게 사용하며 빈곤을 참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의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주는6 공정성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다(롬 13 : 7 참조). 다음으로, 경건은 세상의 불법에서 분리된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켜 참으로 거룩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서로 결합되어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끈으로 묶이게 될 때 완전 무결한 상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육의 이성과 작별하고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며-아니, 버린 후일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며, 세상의 더러움 속에서 천사의 생활을 명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올무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복스러운 영생을 우리에게 환기시키며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살전 3 : 5 참조).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나타나셨던 것같이 세상 종말에 오실 것이며 그 때에 그가 행하신 구원의 결과를 보이실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 전력을 다해 하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을 일소한다. 참으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우리의 천국 기업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나그네같이 살라고 가르친다.7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자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4-7)

 

4. 자기 부정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 부정이 일부는 사람과 관계되고 다른 부분 즉 그 중요 부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인 관계의 행동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빌 2 : 3), 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롬 12 : 10 참조)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서 본성의 감정을 우선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와 비교해서 남은 모두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부끄럽지 않은 것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곧 마음이 부풀어올라 그 자만심으로 거의 터질 정도가 된다. 우리는 우리를 침범하는 죄악들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려고 애쓰며, 한편으로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구실로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선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때도 있다. 우리가 감탄하는 재능이나 우리보다 우수한 재능을 다른 사람이 발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경시하며 배척해서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에게 과실이 있다면 우리는 엄하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추악하게 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교만하여 자신은 평범한 운명에서 제외됐다는 듯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원하며 모든 인생을 거만한 태도로 욕하거나 적어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보며 멸시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평민은 귀족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배우지 못한 사람은 유식자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더 낫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그 가슴속에 일종의 왕국을8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인격과 도덕 생활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충돌점에 이르게 되면 독을 뿜는다. 모든 일에 명랑하고 유쾌한 동안에는 분명히 온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 때에도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투쟁욕과 이기심은9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다. 이것을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뽑아버리는 것밖에 다른 치료법이 없다.

성결의 교훈은 이 전염병을 일소해버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잊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사람은 그의 배은망덕을 폭로한다. 바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 : 7)라고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를 오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남지 않을 것이지만 낙심하게 만드는 일은 많을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재능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재능을 높이며 그 사람들을 존경하라는 것이 우리가 받은 명령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영예를 주셨는데, 우리가 그 영예를 그들에게서 빼앗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큰 죄악일 것이다.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물론 좋은 말로 칭찬할 것이 아니나 관대히 보아주라고 우리는 배웠다. 결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땅히 호의와 존경으로 대할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대로 한다면, 우리는 관대하고 겸손하게 대할 뿐 아니라 다정하게 그리고 한 친구로서 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친절을 체득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다.

 

 

 

5.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돕는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웃의 유익을 구하려고 할 때 자기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말하자면 자기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방면에서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사랑의 일이라고 가르친 그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하였다(고전 13 : 4-5). 우리에 대한 요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상당히 가혹하게 다루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시기만을 위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해서 우리 자신과 재산을 무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을 기꺼이 내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우리의 천성으로 보아서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러한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는 모두 일정한 조건 아래 위탁된 것이라고 경고한다. 받은 은혜를 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그 조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사용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친절하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 전체는 우리의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서 분배하라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위탁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배웠다(벧전 4 : 10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규칙이나,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한 더 타당한 권고를 생각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일보 전진해서 우리의 은사를 신체 기관들의 능력에 비교한다(고전 12 : 12이하). 어느 기관도 자신을 위해서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사로운 필요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각 기관은 다른 기관들을 위해서 그 능력을 쏟아놓는다. 온 몸에 공통적으로 유익하게 된 때에 비로소 각 기관은 자체 능력의 혜택을 받는다. 그와 같이 경건한 사람도 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위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하며,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을 위해서 전심 전력하는 이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돌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관용과 자선에 대한 우리의 규칙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우리의 청지기 직책에 관해 하나님께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바른 청지기의 유일한 자격은 사랑을 표준으로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이익에 대한 열심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을 결합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기 위해서 이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상고 시대에 그가 주신 가장 작은 선물들에까지 이 규칙을 적용하셨다. 곧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고 주시는 혜택을 우선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고서 받아쓰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백성들이 증거하도록 하셨다(출 23 : 1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의 손으로 창조주에게 바친 때에만 거룩하게 된다면, 바치지 않고 쓰는 것은 분명히 부패한 남용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풍부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인간의 관용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예언자의 말과 같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시 16 : 2-3). 그리고 율법의 규정에 해당하는 일을 현재도 행하기 위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거룩한 제사에 비교하였다(히 13 : 16).

 

 

 

6.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종류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우러러본다

 

그뿐 아니라 선을 행하다가 곧 낙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을 막기 위해서(갈 6 : 9) 우리는 마땅히 바울이 말한 다른 생각을 더 첨가해야 한다. 그는 "사랑은 오래 참고…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고전 13 : 4-5).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히 13 : 16). 그러나 사람은 그 자신의 공로로 판단한다면, 대부분이 심히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 성경은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돕는다.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 형상에 대해서 경의와 사랑을 표시하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믿음의 식구들 사이에서(갈 6 : 10),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만날 때에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를 그에게 주셨다. 주께서는 우리 자신의 골육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셨다(사 58 : 7). 가령 "그가 비루하고 무가치하다"고 하자. 그러나 높으신 주께서는 낮은 그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형상을 주셨다. 그 사람에게 봉사할 아무런 의무도 우리에게 없다고 말하자. 그러나 우리에게 크고 많은 은혜를 주시고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우신 주께서는, 이를테면 그를 자신의 자리에 두시고 그를 향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들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그에게는 우리가 그를 위해서 조금도 수고해 줄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를 우리에게 추천하신 하나님의 형상에는 그대 자신과 그대의 전소유를 바칠 가치가 있다. 또 그는 우리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불의한 행동이나 저주로 그대의 감정을 상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까지도 우리가 그를 사랑으로 포옹하며 그를 위해서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중단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마 6 : 14, 18 : 35, 눅 17 : 3). "그는 당연히 나와는 아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리라. 그러나 주께서 당하신 일은 과연 당연했는가? 주께서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때에, 자신이 그 죄를 맡겠다고 하시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을 유익하게 해주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축복으로 대한다는 것은(마 5 : 44)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전혀 반대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확실히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악의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10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것이 그 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말소하며 삭제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 그들을 사랑하며 껴안게 만든다.

 

 

 

7. 보이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이런 자기 부정은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수행할 때에 한해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의 의무를 다 실행하고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수행했다고 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외면적으로는 모든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면서도 진정한 의무 이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덕한 체하면서도 반드시 자랑하는 얼굴이나 심지어 거만한 말로 물건을 주어서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또 이 비참하고 불행한 시대에, 사람들은 구제품을 나눠줄 때에 대개는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흉악한 짓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명랑한 얼굴이나 다정한 말로 유쾌하게 의무를 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자기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의 처지에다 자기를 두고 그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며 견디는 것같이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비와 인자의 정에 이끌려 자신을 돕는 것같이 남을 돕게 되어야 한다.

이런 심정으로 형제를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은 교만이나 비난으로 자기의 의무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곤란한 형제에게 도움을 줄 때에 그를 멸시하거나 자기에게 빚을 진 노예같이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짓은 온 몸이 재생시키려고 애쓰는 병든 기관을 비난하거나 갚아줄 수 없으리만큼 많은 도움을 다른 기관들에게서 받았다고 해서 병든 기관에게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불합리한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기관들 사이에 배당된 일은 거저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 법칙에11 따라서 보답하여야 할 것, 거부하면 흉악한 결과가 될 그런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일을 수행한 사람은 자기에게 다른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부자들은 자기 소유에서 얼마를 내어준 다음에는 다른 부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이웃들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것이며, 이웃에 대해서 친절한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재력이 미치는 데까지 계속할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범위가 넓은 때라도 사랑의 법에 따라서 한계를 정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자기 부정의 원칙. 8-9)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자기 부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곧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부분을 더 자세히 반복하겠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것이 많으므로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부분이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고 관대하게 만드는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현세 생활에서 평안과 평온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의 뜻에 맡기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그에게 일임해서 길들이며 복종시키도록 하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듯한 일에 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의 욕망은 날뛰며 중단될 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가난한 살림과 낮은 가문과 이름 없는 처지를 우리는 경탄하리만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 따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야심이나 탐욕의 목표에 도달하며 한편으로는 빈곤과 비천을 피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해서 지칠 정도에 이른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들이 취할 길이 하나 있다. 첫째로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않고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번영하겠다는 욕망이나 희망이나 계획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12 그러므로 안심과 확신을 품고 주께서 주시는 복에 몸을 맡기며 거기서 안식을 얻으라. 육은 자체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또는 사람들의 호의에 의해서 부귀를 구할 때에, 아무리 자체만으로 충분한 듯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주나 노고도 주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의 축복이 있기만 하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기쁜 결과가 될 것이다. 주의 복이 전연 없어도 우리는 어느 정도의 영광과 재산을 얻을 수 있다(사악한 자가 굉장한 재산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본다).13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티끌만한 행복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우리가 얻는 것은 모두 우리의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얻으려는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9.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의지하라

 

그러므로 일이 잘 되며 좋은 결과가 나타나려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만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복이 없으면 각종 불행과 재난이 우리를 괴롭힌다.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민첩한 두뇌와 근면이나 사람들의 호의나 공상적인 행운을 믿고 부귀를 탐내어 애쓸 것이 아니라, 항상 주를 우러러보며 주의 지도를 받아, 주께서 정하신 우리의 처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선 우리는 사악한 행동, 책략, 간계 그리고 탐욕 등의 수단으로 재물을 움켜잡으며 지위를 강탈하려고 날뛰어 이웃을 해하는 일이 없게 되고 우리의 순진성을 버리게 하지 않는 사업만을 하게 될 것이다.

사기와 강탈과 그 밖의 악한 술책을 쓰는 곳에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도움이 임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순결한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오며,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왜곡된 생각과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억제해서 재산을 모으려는 지나친 욕망의 불길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야심적인 갈망을 없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을 바라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신 일을 복주심으로 도우시리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끝으로,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초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더러운 처지를 혐오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일이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며 빈부와 귀천은 일체 하나님의 뜻으로 배정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기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만 의지하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이 미친 듯이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악한 술책을 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자기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일이 잘 될 때에 그것을 자기의 공로나 자기의 근면, 노력, 행운 등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공로로 돌릴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사업이 번창하고 자기 일은 진척이 미미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그는 평온과 겸손한 마음으로 이 부진한 상태를 참고 견딜 것이다. 자기가 얻은 보통 정도의 성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세속적인 사람이 경칩하는 심리에 비하면, 그의 마음은 더 평화로울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는 최고의 부귀보다 더 위대한 안식과 평화를 주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위로는 나의 구원이 될 것이므로 그는 자기의 사업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의 태도가 이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인도에 일임하면서 자기는 젖뗀 아이가 어미의 품에 안긴 듯하며,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힘쓰지 아니한다고 증거하였다(시 131 : 1-2).

 

 

 

10.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우리가 말한 신자의 평화와 인내는 여기에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현세 생활에서 당하는 모든 일에 미쳐야 한다. 자신을 주께 전적으로 드리고 생활의 모든 부분을 남김 없이 하나님의 뜻에 맡긴 사람만이, 자신을 온전히 부정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태연한 사람은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처지에 대해 하나님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심경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우리가 불의에 당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병이 우리를 거듭 괴롭힌다. 혹은 전염병이 만연하기도 하며, 전쟁의 참화를 입기도 한다. 얼음과 우박이 일년 추수를 전멸시켜 흉년이 들며 우리를 가난에 빠지게도 한다. 처자와 이웃을 죽음에 빼앗기며 집이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한다. 이런 재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며, 난 날을 미워하며, 하늘과 태양을 싫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독적인 구변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고 잔인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할 때에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러러보어야 한다. 따라서 설사 일가 친척이 떠나고 집안이 적적하게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주를 찬양하며 내 집에 계신 주의 은혜는 내 집을 황량한 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에 주의를 돌릴 것이다. 추수한 것이 서리나 우박을 맞으며, 혹은 얼어서 전멸하여 굶어 죽을 위험이 있을 때에도 그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굳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할 것이다(시 78:47 참조).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시 79:13) 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추수의 성과가 극도로 나쁜 때라도 주께서 식량을 주실 것이다. 병고에 시달릴 때에도 심한 고통에 용기가 꺾이거나 불안하고 초조하여 하나님에게 간언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징계는 공정하며 인자하심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평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권한에 영원히 양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 이교도들이 생각한 위안이란 것은 우매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배격해야 한다. 견고한 마음으로 역경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들은 역경을 운명에 돌렸다.14 운명은 소경이며15 사려 분별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16 그와 반대로 경건 생활의 입장은 선악간 운명을 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 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무책임한 힘으로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장 정연하고 공정하게 배정하신다고 믿는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 자기 부정의 일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각각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1-2)

 

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그러나 경건한 마음은 더 높은 데로,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올라오라고 하시는 데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제자가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경지이다(마 16 : 24).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할 자로 인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곤란과 노고와 불안이 많은 생애-각양 각색의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며 일정한 시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그는 이 계획을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자녀에 이르기까지 적용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셨고 그를 심히 기뻐하셨지만(마 3 : 17, 17 : 15), 사실은 그를 관대하게 혹은 너그럽게 다루시지 않으셨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생애에서 끊임없는 십자가의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 전체가 일종의 끊임없는 십자가에 불과하였다. 사도는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시는" 것이 합당했다고(히 5 : 8)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조건을 무슨 까닭에 우리는 모면하려고 할 것인가?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그 조건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친히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도는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얻도록 정하셨다고 했다(롬 8 : 29). 따라서 불행과 재앙이라고 할 만한 궁지에 빠지더라도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있다. 곧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서, 그가 복잡 다단한 재앙의 미로를 통과하여 하늘의 영광을 얻으신 것같이, 우리도 각양의 고난을 통과하여 같은 영광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행 14 : 22). 바울은 다른데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줄을 알게 되는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를 알게 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게 될 때 그의 빛나는 부활에 참여할 준비가 된다고(빌 3 : 10-11) 말했다. 역경의 고통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가혹한 성격을 완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주와 사귐을 가짐으로써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증명하려는 목적 이외에는 십자가를 지실 아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계속적으로 십자가 밑에서 지내야 할 이유가 많다. 첫째로 우리의 천성은 모든 것을 우리의 육에 돌리는 경향이 너무도 강하다. 우리의 연약함을 눈앞에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곧 자기의 선을 과대 평가한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우리의 선을 꺾어지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을 믿고 의기 양양하며, 이런 자신감이 허탄한 것임을 모른다. 또 자신의 선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아도 자기의 능력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오만 불손의 태도를 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교만을 억제하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심히 무능함과 연약함을 증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치욕, 빈곤, 근친의 죽음, 병 기타의 재난들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이러한 재난이 있는 동안 우리는 견뎌내지 못하고 곧 굴복한다. 이렇게 자만심이 건여 하나님의 힘을 구할 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만이 재난을 이기고 굳게 버티는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지극히 거룩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을 얻게 하시지 않으면 자신의 용기와 지조를 과신한다. 이런 자기 만족은 심지어 다윗의 마음속에까지 스며들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 : 6-7).1 다윗은 번영했을 때에 태만하여 감각이 마비되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를 믿어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위대한 예언자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무슨 일인들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평화로운 때에 자기의 위대한 지조와 인내심을 자랑했으나 역경에 처하게 되자 그 자만심이 꺾이고 모든 것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자는 이렇게 자기의 병이 증명됨으로써 경고를 받아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육에 대한 사악한 신뢰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맡겼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체험하며, 이 점에서 풍성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보호를 받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필요하다. 3-6)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롬 5 : 3-4) 가르친다. 환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꾸준히 참고 견디는 동안에 그들은 체험한다. 이런 인내는 자기의 힘으로는 전연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는 약속하신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성도들은 인내를 통해서 체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망도 강화된다. 그들이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앞으로도 과거와 같이 확고부동하리라는 것을 기대한다면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가 서로 연결되어 십자가에서 솟아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칠에 대한 그릇된 과대 평가를 바로 잡으며 우리를 기르게 하는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십자가는 육에 대한 우리의 위험한 신뢰를 없애버린다. 이렇게 교만이 건인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가르치며 그 결과로 우리는 낙심하거나 항복하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승리의 뒤를 이어 소망이 생긴다. 이는 주께서 약속을 지키심으로써 앞으로도 신실하시리라는 확증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만 가지고도 우리는 평소에 십자가를 질 필요가 얼마나 큰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2

그리고 자기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깨끗이 없애버리는 것은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의 무능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의 무능을 느끼면 자기를 믿지 않게 될 것이요, 자기를 믿지 않으면 그 대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안심하면 그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끝까지 버티어 굴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버티면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무조건 확신하면 그만큼 소망이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다.

 

 

 

4.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히시는데는 다른 목적도 있다. 즉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순종심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순종 이외의 어떤 다른 순종을 그들이 표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각종 은혜가 그들 안에 숨은 채로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그것들을 오해할 여지없는 증명으로 밝히 드러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들에게 주신 인내력과 지조를 밖으로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신다고 한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말씀들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그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거절하지 않은 사실로 그의 경건을 증명하셨다(창 22 : 1,12). 베드로도 몸을 불로 연단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련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고 가르친다(벧전 1 : 7). 신자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훌륭한 은사인 인내심을 활용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하고 명백하게 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각종 덕성을 주시고 그 덕성들이 사장되어 결국 소멸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자극하며 발동시키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성도들에게 고난이 없으면 인내력도 없을 것이므로 그들이 받는 고난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또 십자가에 의해서 순종을 배운다. 자기의 경박한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들의 소원대로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따른다는 뜻을 깨닫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역경을 견디라."고 충고할 때에, 옛 속담은 "하나님을 따르라."고3 했다고 세네카(Seneca)는 회고했다. 이런 말로 고대인들이 암시한 것은 손과 등을 하나님의 채찍에 내맡기는 때에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이 지우시는 멍에를 참으로 멘다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우리는 백방으로 이 순종의 습관을 우리에게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결코 거부해서는 안 된다.

 

 

 

5. 십자가는 약이다

 

이와 같은 순종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항심을 생각해야 한다. 일순간이라도 부드럽고 관대하게 다루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는 우리의 육의 충동은 강렬해진다. 기운 좋은 말을 부리지 않고 먹이기만 하면, 며칠 후에는 더욱 날뛰어 길들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전에는 순종하던 기수도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시던 일을 우리는 항상 하고 있다. 살이 오르고 비대하게 되자, 우리를 먹여 살리신 이를 발로 찬다(신 32 : 15). 하나님의 은혜에 끌려 그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는 반대로 악의를 품고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고도 계속해서 타락한다. 따라서 우리가 충동으로 날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징벌을 내려 억제시킬 필요가 있다. 한없이 풍부한 재산 때문에 방탕에 흐르지 않도록, 자신의 영예를 자랑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그밖에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또는 운 좋은 일들로 거만하게 되지 않도록, 주께서는 십자가의 치료법을 적당히 적용하셔서 우리의 광분하는 육을 제압하시며 굴복시키신다. 사람에 따라 건강 회복에 유익한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 같은 병이라도 우리는 같은 정도로 앓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똑같은 거친 치료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이런 십자가로, 저 사람은 저런 십자가로 시련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의사께서는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치료하시고, 다른 사람은 거친 방법으로 깨끗이 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병이 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6.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내다보시는 동시에, 우리의 지나간 죄들을 시정하실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셔야만 우리가 합당한 순종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즉시 우리의 지나간 생활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런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반드시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라는 충고는 주로 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은 훨씬 더 좋은 개념을 제공한다. 즉 주께서 역경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1 : 32). 그러므로 심이 어려운 환난에서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관용을 발견해야 한다. 그 분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을 촉진시키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은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받는 정죄를 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성경이 다른 곳에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 3 : 11-12)고 교훈하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채찍을 깨달을 때에, 악한 행실이 고질이 된 절망적인 사람들같이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잘 배우는 자녀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우리가 타락했을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멸에 몰아넣으신다. 그러므로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옳은 말씀이다(히 12 : 8).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인자하심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견디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히 사악한 자들이다. 성경은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불신자는 고질적이며 철두철미한 악의 노예와 같이 징계를 받으면 더욱 악하게 되고 더욱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신자는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아들같이 회개할 줄 안다. 우리는 어느 쪽에 들기를 원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했으므로4 여기서는 이 간단한 언급으로 만족하고 더 말하지 않겠다.

 

 

 

(박해와 기타 재난에서 십자가를 짐. 7-8)

 

7.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음

 

그런데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은 독특한 위로가 된다. 하나님을 위한 군인에게 이 특수한 휘장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영예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의를 위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사탄의 거짓말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든지 또는 악한 자에 대항해서 선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보호하든지 간에, 우리는 세상의 멸시와 미움을 받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명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나님에게 우리의 노력을 바치는 것을 슬퍼하거나 근심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복되다고 선언하신 일들을 하면서(마 5 : 10),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빈곤까지도 그 자체로 본다면 불행이다. 마찬가지로 추방, 모욕, 감옥에 갇힘, 치욕 등도 불행이며 죽음은 최고의 재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으로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하심에 만족하고, 육의 그릇된 평가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사도를 본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행 5 : 41) 기뻐할 것이다. 우리가 무죄하고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불신자들 때문에 재산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물론 인간 사회에서는 몹시 빈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의 진정한 재산이 불어난다. 자기 집을 쫓겨난다면5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더욱 친근하게 영접을 받을 것이다. 괴로움과 멸시를 당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만큼 더 견고하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게 된다. 모욕과 수치를 당한다면,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서 더 훌륭한 자리를 얻는다. 죽임을 당한다면, 복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우리 앞에 열릴 것이다. 주께서 크게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하신 일들을 현세의 허망한 일시적 유혹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8. 십자가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더 위로를 얻는다

 

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치욕이나 재난을 받을 때에, 우리는 성경에 있는 이런 경고의 말씀에서 충분한 위로를 받는다. 따라서 주께서 주시는 이런 고통들을 기꺼이 또 즐겁게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은혜를 모르는 자들일 것이다. 특히 이런 십자가는 신자가 지는 것이 가장 적당하며, 베드로가 가르친 것과 같이(벧전 4 : 12이하),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에게는 치욕을 받는 것이 백 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딤전 4 : 10) 박해뿐 아니라 비난도 받으리라고 바울은 특히 경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세평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고후 6 : 8)

그러나 즐거운 태도를 취하라고 하는 것은 심신의 고통과 아픔을 전연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과 근심이 없다면, 십자가 안에서의 성도의 인내도 없을 것이다. 빈곤과 병과 치욕에 각기의 고통이 있으며, 죽음에는 공포심이 따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들을 태연하게 견디는 것이 무슨 용기나 절제가 될 것인가? 이런 경험은 그 성질상 고통스러운 것,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통으로 인한 곤란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도리어 그 고통으로 연단을 받아 용감하게 저항하며 그것을 극복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용기가 나타난다. 날카롭게 찌르는 자가 있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급하고 과격한 행동을 억제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인내가 나타난다. 비통한 일로 상처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위안에서 안식처를 얻는다면, 거기서 신자의 즐거움이 빛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나, 스토아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9-11)

 

9. 스토아 철학자들과 달라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한다

 

신자가 인내와 절제를 견지하기 위해서 자연히 느껴지는 슬픔과 싸우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적절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 : 8-9). 십자가를 참고 견딘다는 것은 완전한 마비 상태가 된다든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옛날 스토아 철학자들이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한 우매한 말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인간성을 버리고 역경이나 순경(顺境)에 대해서 슬픈 때나 기쁜 때나 똑같은 느낌을 가진다.-아니, 돌과 같이 전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6 이 장엄한 지혜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그들이 묘사한 인내는 인간 사회에서 발견된 일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엄격하고 까다로운 인내를 체득하려고 했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 생활에서 인내의 힘을 추방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새로운 스토아 철학자들이7 나타나서 고통으로 신음하며 우는 것뿐 아니라, 슬픔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까지도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대개 한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행동보다 사변으로 시간을 보내며, 이런 불합리한 생각 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우리 주께서 말씀뿐 아니라 행동으로 배격하신 이 냉혹한 철학은 우리가 상대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주께서는 자신의 불행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제자들에게도 같은 뜻으로 가르치셨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요 16 : 20). 아무도 죄라고 하지 못하도록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 : 4)라고 밝히 선언하셨다. 당연한 말씀이다. 울음을 일체 배격한다면, 주님 자신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의 몸에서는 눈물이 피방울 같이 흐르지 않았는가?(눅 22 : 44) 공포심은 모두 회의라고 낙인을 찍는다면, 주께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는 기사를(마 26 : 37, 막 14 : 33)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슬픔을 싫어한다면, 주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 : 38)라고 하신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인가?

 

 

 

10. 현실의 슬픔과 현실의 인내는 서로 충돌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이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자연히 느껴지는 슬픔을 뿌리칠 수 없어 견디고 버티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내를 무감각으로 생각하고 용기와 지조가 있는 사람을 목석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혹한 불행이 괴롭혀도 굴복하지 않으며, 비통한 일이 있어도 영적 기쁨이 넘치며, 불안이 눌려도 하나님의 위안으로 소생하여 용기를 회복하는 성도의 인내를 성경에서 칭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참는 동안에도 성도의 마음속에서는 인간성에 배치된다고 느끼는 것을 피하며 무서워하는 자연적인 심리와 이 여러 가지 곤란까지도 헤쳐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진하겠다는 경건한 뜻이 서로 싸우고 있다. 주께서 이 상극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 : 18)고 말씀하셨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을 때에 베드로가 저항하면서 억지로 끌려갔을리는 없다. 그랬다면 그의 순교는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큰 열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지라도 인간성을 벗지 못한 그로서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의지에 끌렸다. 앞으로 당할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면 공포심을 못이겨 도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생각하고는 자신의 공포심을 극복하고 딛고 일어서서 기꺼이 또 즐겁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와 순종으로 가득하여, 모든 반항하는 감정을 길들이고 극복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십자가가 무엇이든 간에, 또 마음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우리는 굳게 참고 버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역경은 가혹하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우리는 병모로 신음하며 불안해하며 건강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가난에 시달려 걱정과 슬픔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치욕과 멸시와 불법적인 처사를 당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을 묻으면서 자연히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주의 뜻이니, 주의 뜻을 따르자는 그 한 가지일 것이다. 고통의 가시가 찌르며, 신음과 눈물이 그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마음을 이렇게까지 요동하게 만드는 이 일들을 기꺼이 참도록 마음을 돌리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11. 인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

 

십자가를 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데서 발견한 우리는 철학적인 인내와 기독교적인 인내의 차이를 간단히 정의해야겠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련을 받는다고 이해하며, 이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의 높은 견지이지만, 이 경지에 도달한 철학자는 극히 적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8 이것은 하나님께 항거하려고 해도 무익하므로 그에게 양보하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필연적이라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라면, 도피할 수 있는 때에는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아주 다르게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는 의와 공정이요, 다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런 생각으로 인내를 권한다. 빈곤이나 추방이나 감옥에 갇힘이나 모욕이나 병이나 근친의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일이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생기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질서가 정연한 정의9 이외의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가 매일 짓는 많은 죄악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더 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우리의 육이 그 본성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그 정욕을 길들이며, 이를테면 멍에를 쓰는 습관이 생기게 하는 것은 완전히 공평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공정과 진실을 위해서는 우리가 고생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백한 공정성이 우리가 받는 고난에 나타난다면, 우리가 거기 대해서 불평하거나 항거하는 것은 반드시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불가피하니 양보해야 한다."는 효력 없는 주문은 이제 들리지 않고 우리는 생명력과 효력이 충만한 교훈 즉 "항거는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초조와 불안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항하는 무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삼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듣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과 유익이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야 우리는 기뻐하기 때문에,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고난을 겪게 하시는 바로 그 행동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을 마련하신다고 언명하심으로써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우리가 받은 고난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 마음과 평온한 마음으로 그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고난을 참고 견딜 때에 우리는 필연성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우리가 자연히 그 가혹함을 느끼며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동시에 영적인 기쁨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다. 여기에서 감사하는 마음도 생긴다. 이는 기쁨이 없으면 감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는 유쾌하고 기뻐하는 마음에서만 올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분명히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 9 장

 

내세에 대한 명상1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2)

 

1. 현세 생활의 허무성

 

어떤 환난이 우리를 압박하든 간에, 우리는 현세를 무시하는데 익숙해지며, 그렇게 됨으로써 내세를 활발하게 명상하기 위한 그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본성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강한 동물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고 우리가 이 애착심에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를 끌어내시며 우리의 태만을 없애버리기 위해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늘의 영생 불멸을 동경하지 않거나 그것을 얻으려고 평생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후의 영생을 바랄 수 없다면 우리의 처지는 야수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으로서 하나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계획이나 노력이나 행동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우둔함은 우리의 지성이 부귀 영화의 허망한 광채에 마비되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탐욕, 야심, 정욕 등에 억눌려 더 높이 비약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영혼 전체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의 행복을 구한다. 주께서는 이 악한 사태를 없애기 위해서 현세 생활의 불행을 끊임없이 증명하심으로써 그 허무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현세에서 깊고 든든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전쟁이나 소란으로, 강탈이나 기타 피해로, 그들의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들이 곧 없어질 재물을 너무 탐내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을 너무 믿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추방으로, 흉작으로, 화재로, 기타 방법으로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으시며, 적어도 풍족하지 못한 처지에 있도록 제한하신다. 그들이 마음놓고 결혼 생활을 즐기지 않도록,2 주께서는 악한 처나 불량한 자녀나 가족의 죽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며 교만을 꺾으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관대히 다루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허영심으로 부풀고 자신감으로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들에게 병과 재난을 보내어, 이 모든 좋은 것은 없어지는 것, 불안정하고 무상한 것임을 눈으로 보게 하신다.

십자가의 훈련을3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깨닫는 때라야 우리는 올바로 전진을 할 수 있다. 현세 생활은 그 자체만을 본다면, 불안과 동요와 불행이 무수히 많고 순수한 행복은 아무 데도 없다. 인생의 행복이란 것은 모두 확실하지 못하며 곧 없어지며 허망하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이 섞여 있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동시에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바라며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분투 노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을 생각할 때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세 생활을 철저히 무시하지 않으면, 참으로 정신을 차려 내세를 원하며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사랑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따라서 영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악한 족쇠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 현세 생활에는 우리를 꾀는 것이 많으며, 즐겁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런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재앙의 아픈 자극을 끊임없이 받으면서도 인생의 가련상을 고려할 만한 각성이 없는데 만일 부하고 행복한 기쁨이 장구히 지속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생은 연기나(시 102 : 3 참조) 그림자 같다는 것은(시 102 : 11 참조) 유식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제일 잘 아는 속담이다. 이 생각을 대단히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처럼 등한시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 우리는 마치 지상에서 영생 불사할 작정인 듯 모든 일을 시작한다. 시체를 묻거나 묘지를 통과할 때에는 죽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철학을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도 우리의 철학은 일시적이어서, 돌아서면 곧 사라지고 전연 기억이 없다. 극장에서 좋은 장면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박수 갈채와 같이 결국 증발하고 만다. 죽음을 잊어버릴 뿐 아니라 죽을 운명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우리는 경솔하게 지상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누가 "사람은 하루살이"라는4 속담을 말하면, 우리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없이 하는 일이고 존재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 말로 충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경험을 통해서 지상 생활의 가련상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확신하게 된 후에도 지상 생활에 최고의 선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여전히 인생에 대한 어리석고 비열한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실 때에는 우리의 태만을 떨쳐버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시하고 전심 전력하여 내세의 생명을 명상하도록 해야 한다.

 

 

 

 

(무상하고 불완전한 현세 생활을 바르게 평가하면 내세를 명상하게 된다. 3-6)

 

3. 지상 생활을 감사함

 

신자는 현세 생활을 무시하더라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일이 없도록 습관화돼야 한다. 아무리 무수한 불행이 가득하더라도 현세 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으며, 결코 경멸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아무 은혜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중대한 배신의 죄를 짓게 된다. 특히 현세 생활은 신자들의 구원을 촉진시키는 데 전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현세 생활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공개하시기 전에, 그보다 작은 증거로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받는 은혜이다. 이렇게 현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듯이 무시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 생활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결코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아주 많고 분명한 성경의 증거들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 자체가 또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우리에게 권고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빛을 보게 하셨고 자연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셨고 자연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이를테면 우리가 현세에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앞으로 하늘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들이 우선 지상에서 싸우고 노력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싸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를 얻기 전에는 개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는 현세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넓으신 인자하심을 맛보기 시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완전히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상 생활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그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본성은 지상 생활에 애착을 느끼지만, 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 가장 불행한 상태를 생각하게 되며, 과도한 애착에서 해방되려고 할 것이다.

 

 

 

4. 영생에 대한 올바른 동경

 

현세 생활에 대한 잘못된 애착을 억제한 것만큼 더 좋은 생활에 대한 욕구를 강화해야 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고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죽는 것이 다음으로 좋다고(전 4 : 2-3 참조)한 사람들의 판단이 건전하다는 것을5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광명과 진정한 종교가 없는 그들이 현세에서 불행하지 않고 추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겠는가? 친척의 생일이 돌아오면 슬피 울고 그들을 장사지낼 때에는 엄숙히 기뻐한 사람들의6 행동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믿음에 대한 바른 교훈을 몰랐고 그 자체로는 복되지도 않고 갈망할 만 하지도 않은 것이 신자들에게는 유익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포자기해서 생각을 그만두고 말았다.

따라서 신자가 죽을 운명의 인생을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원래 비참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동시에, 더욱 큰 열성으로 곧 내세의 영생을 명상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내세의 삶에 비하면 현재의 삶은 무시해도 무방할 뿐 아니라, 완전히 멸시하며 싫어해야 한다.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라면 땅은 타향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곧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죽음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육신에서 놓이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육신은 감옥이7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것은 곧 불행이 아닌가? 세상을 작별할 때까지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한다"(고후 5 : 6).

그러므로 지상 생활을 천상 생활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곧 멸시하며 짓밟아버려도 된다. 물론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들지 않는 한 현세 생활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죄로 우리를 사로잡는 현세 생활을 미워하더라도 현세 생활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하간 우리는 현세에 대해서 염증이나 증오를 느끼며 그것이 끝나기를 바라더라도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세상에 남아 있을 각오를 하며 우리의 염증에 불평이나 초조감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현세는 주께서 우리를 배치하신 초소와8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소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초소를 지켜야 한다. 바울이 육신의 질곡에 너무 오랫동안 매여 있던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구속되기를 갈망하여 탄식한 것은 사실이다(롬 7 : 24).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느 쪽이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언급한다(빌 1 : 23-24). 그는 생사간 어느 것을 통해서라도(롬 14 : 8)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편이 하나님의 영광에 제일 큰 도움이 되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라면 우리는 죽고 사는 시간을 하나님의 결정에 일임하되, 죽음에 대한 열의가 뜨겁게 타올라야 하고 동시에 그침없이 그것을 늘 명상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영생 불멸과 비교해서 죄로 우리를 얽어매는 현세 생활을 경시하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버릴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한다.

 

 

 

5.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기는 고사하고 죽음에 대한 커다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말만 듣고서도 어떤 지극히 비참하고 불길한 그 무엇인 듯 벌벌 떠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우리가 죽어 없어진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자연적인 지각이 공포로 긴장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더 큰 위안으로 그런 공포심을 극복하고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그런 경건의 광명이 마음속에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이 육체라는 장막은 불안전하고 불완전하며 썩을 것, 곧 없어질 것, 쇠퇴하는 것, 썩어가는 것이지만, 분해된 후에는 곧 새로워져서 견고하고 완전하여 썩지 않는 영광으로 결국은 하늘의 영광으로 빛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신념은 본성이 무서워하는 것을 우리가 도리어 열렬히 주하게 만들 것이 아닌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유랑 생활에서 소환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즉 하늘나라로 돌아가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아무 위안도 얻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살아 있기를 갈망하지 않을 것도 없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9 나도 물론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있을 평생 불멸을 존중해야 하며, 거기서 우리는 지상에서 결코 얻지 못하는 견고한 상태를 얻으리라고 주장한다. 신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는 것은 옷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옷을 입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라고(고후 5 : 2-3) 바울은 적절히 가르친다. 짐승들과 나무나 돌 같은 무생물까지도 자기의 현존 상태의 허무함을 느끼고 부활이 있을 마지막 날을 동경하며, 그때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허무성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롬 8 : 19이하). 그런데 우리는 오성(悟性)의 빛을 받았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의 영의 조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존망이 문제가 될 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땅 위에서 썩어가는 것을 초월하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해괴 망측한 현상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럴 장소도 아니다. 나는 맨 처음에 평범한 일들을 상론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소심한 사람들은 키프리아누스의 논문 죽음에 대하여(On the Mortality)를10 읽기를 바란다. 만일 그들을 철학자들에게 보낸다면, 철학자들이 죽음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기의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쁘게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로 결론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자. 바울도 이 점을 표준으로 신자들을 구분하고(딛 2 : 13, 딤후 4 : 8 참조), 성경은 완전한 행복을 증명하려고 할 때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지적한다. 주의 말씀에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신다(눅 21 : 28). 묻노니, 우리 주께서 우리를 기쁘게 하며 밝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계획하신 일이 우리를 슬프게 하며 당황하게 만들뿐이라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우리의 주라고 자랑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더 건전한 견해를 가지고 육에 속한 우매하고 맹목적인 욕망이 항거하더라도 서슴지 않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생각해서 동경할 뿐 아니라, 신음과 탄식으로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는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악한 일과 불행한 일이 가득한 이 말없는 심연에서 우리를 구해내시고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6. 내세에 대한 열망은 신자에게 위로를 마련해준다

 

신자들은 누구나 자기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지상에 있는 동안은 모두 "도살할 양같이"(롬 8 : 36)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늘의 것에 전념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극복하며, 그 현존 상태를 초월하지 못한다면(고전 15 : 19 참조), 그들은 심한 절망적인 비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머리를 높이 들어 모든 지상적인 것을 초월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비록 악한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며 깊은 평화를 즐기며, 호사스러운 재물을 자랑하며, 온갖 환락에 젖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11-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신자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그들의 교만 때문에 모욕을 당하며, 그들의 탐욕 때문에 재산을 강탈당하며, 그밖에도 그들의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더라도-신자들은 이런 재난까지도 쉽게 견뎌낼 것이다. 이는 주께서 그의 평화의 나라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영접하실 날이 임박했기 때문인데 그 날에 주께서는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계 7 : 17, 사 25 : 8 참조), "영광과…환희의 옷"을(집회서 6 : 31) 입히시며, 형언할 수 없는 그의 희락의 단맛으로 만족하게 하시며, 자신과의 숭엄한 친교에 들게 하셔서, 결국 그들이 자신의 행복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창성한 악한 불신자들은 철저히 몰락시키실 것이다. 그들의 즐거움이 고통으로 그들의 웃음이 울음과 애통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평화를 양심의 가책으로 어지럽히시며, 그들의 방종을 꺼지지 않는 불로 벌하실 것이다(사 66 : 24, 마 25 : 41, 막 9 : 43,46, 계 21 : 8 참조).12 또 경건한 사람들의 인내를 모욕하던 그들을 경건한 이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공의에 대해서 증거한 것과 같다. 즉 그는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는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한 불행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며, 경건한 이들을 괴롭히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하였다(살후 1 : 6-7).

이것은 참으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다. 이 위안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절망 상태에 빠지거나 이 세상의 허망한 위안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다. 예언자까지도 악한 자들이 현세에서 번창하는 것을 너무 깊게 생각했을 때 거의 실족할 뻔했노라고 고백한다(시 73 : 2-3).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경건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말로를 볼 때까지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시 73 : 17).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만일 신자들이 눈을 돌려 부활의 능력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귀와 육과 죄와 악한 자들을 결국 이겨 낼 것이다.

 

 

 

제 10 장

 

현세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현세 생활에서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 즐겨 사용하라. 1-2)

 

1. 두 가지 위험 : 잘못된 엄격한 금욕과 잘못된 방종

 

성경은 이런 초보적인 교훈으로 동시에 지상의 복리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은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친다. 이 문제는 우리의 생활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등한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사는 데 필요한 보조 수단들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필요하다기보다 즐거움을 주는 듯한 것들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든지 그것을 깨끗한 양심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침을 지켜야 한다. 주의 말씀에 이 방침을 정하신 것이 있는데, 현세 생활은 주의 백성들이 하늘나라로 가려고 서두르고 있는 나그네의 생활이라고1 한 것이다(레 25 : 23, 대상 29 : 15, 시 39 : 13, 119 : 19, 히 11 : 8-10,13, 16 : 13,14, 벧전 2 : 11).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단순히 지나갈 뿐이라면, 현세의 좋고 유익한 사물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갈 길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돕는 범위 내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전 7 : 30-31)고 우리에게 올바로 권고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끄럽고도 좌우로 경사져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설 수 있는 곳에 발을 든든히 붙이도록 해 보자. 엄격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때에 무절제와 방종한 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달음질한다. 이 미친 듯한 죄악의 위험성을 보고 무절제와 방종을 시정하고자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점에서는 선하고 거룩한 이 사람들이 생각한 유일한 방안은 필요성이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만 물질의 이용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2 그들의 생각은 경건한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엄격하였고 주의 말씀에 비해서 사람의 양심을 더욱 구속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성이라고 한 것은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은 일체 멀리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맨빵과 물 이외에 다른 음식물을 첨가하는 것은 일체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도 더 엄격하였다. 테베사람 크라테스(Crates)는 재산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된다고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3

물질 사용에 있어서 육의 무절제를 변명하며, 방종한 쾌락 생활의 길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들은 내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한 일같이 생각한다. 이 자유에는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을 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에 맡겨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정확한 법률 조문으로 양심을 구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합당한 사용에 대한 일반적인 표준이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

 

 

 

2. 대원칙

 

우리가 다룰 원칙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선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지, 우리를 멸망시키시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용은 방향이 바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주시하는 사람이 가장 곧은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은 필요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의복의 목적은 필요성뿐만 아니라, 외모와 풍습을 단정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풀과 나무와 열매는 여러 가지 이용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그와는 별개로 모양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졌다(창 2 : 9 참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시 104 : 15)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 이용하며 어느 정도까지 이용할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주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옷을 꽃에 입히시고 우리 코에 달콤한 향기를 풍겨보내게 하셨는데, 우리의 눈이 그 미를 느끼며 코가 그 향기를 느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주께서는 빛에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도록 구별하여 만드시지 않았는가?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에는 그것들을 다른 금속이나 돌보다 더 귀중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주시지 않았는가? 한 마디로 주께서는 필요한 이용 가치를 떠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드시지 않았는가?4

 

 

 

(우리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런 각종 은혜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탐욕스럽게 재물을 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따라 충실히 섬겨야 한다. 3-6)

 

3. 선물을 주신 분을 우러러보면, 옹졸한 생각과 방종을 막을 수 있다

 

그러면 피조물의 이용을 필요한 용도에만 제한하는 몰인정한 철학을 버려라.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에게서 빼앗는 사악한 생각이며, 인간을 무감각한 목석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육의 정욕을 억제하는 데도 이만 못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육의 정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한없이 흘러 넘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5 육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구실로, 무엇이든지 육욕에 허락한다. 정욕을 억제하는 방법의 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뜻은 우리가 그를 인식하며 그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도록 하시려는 데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연락과 폭음 폭식으로 둔하게 되어 경건과 소명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감사는 어디 있는가? 만일 우리의 육의 힘이 끓어 넘치고 추악한 정욕이 정신을 침범하며, 죄의 더러움이 바르고 고상한 일들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의복이 사치한 탓으로 우리 자신에 탄복하고 남을 멸시한다면, 또는 그 우아하고 찬란한 옷을 입고 부끄러운 일을 준비한다면, 의복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생각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찬란한 옷에 잡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 있는가? 즐거운 일들에 모든 감각이 예속되어 정신이 압도된 사람들이 많다. 대리석과 금과 그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리석이 되었고, 말하자면 금으로 변했고, 색칠한 우상과 같이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방의 냄새와 그 좋은 향기에 마비되어, 정신적인 것은 전연 냄새를 맡지 못한다. 다른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태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의 남용을 허락하는6 것은 명백하게 다소간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롬 13 : 14) 한 법칙이 확인된다. 만일 우리가 육욕에 너무 양보한다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무한정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4. 영생을 갈망하는 것도 우리의 외면적 생활을 바르게 결정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현세에서의 생활을 멸시하고 하늘의 영생 불멸을 명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법칙이 나온다. 첫째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는 바울의 교훈이다(고전 7 : 29-31). 둘째는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세상 물건을 쓰되 쓰지 않는 것같이 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폭음 폭식과 식도락과 건물과 의복의 사치와 야심과 자만과 교만과 까다로운 성벽뿐만 아니라, 천국 생활을 생각하며 영혼을 함양하려는 우리의 열의를 방해하거나 탈선시키는 모든 관심과 취미까지도 끊어버린다. 옛날에 카토(Cato)가 "의복에 대한 관심이 크면, 덕에 대한 무관심도 크다."고 한 말은 옳다. 옛날 속담을 사용하면, 육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사람은 영혼에 대해서는 대개 등한하다.7

그러므로 외면적인 일에 대한 신자의 자유를 고정된 조문으로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자유는 이 법에 복종해야 한다. 즉 될 수 있는 대로 쾌락에 흐르지 말라. 오히려 불필요하게 풍요한 것은 형적도 없이 끊어버리도록 불굴의 정신으로 싸우라. 방탕한 것은 입에 담지 말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보조물들이 장애물로 변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라는 것이다.

 

 

 

5. 검소와 위탁물인 지상 소유에 대하여

 

둘째 법칙은 가난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없이 지내며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절제의 법칙을 지킨다면 그들은 주님의 학교에서 많이 전진할 것이다. 또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점에서는 주의 제자라는 증거를 보일 길이 없다. 대부분의 죄악이 물욕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제외하고라도, 빈곤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여유가 생기는 때 대개는 반대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초라한 의복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비싼 옷을 자랑할 것이요, 빈약한 음식으로 만족할 수 없어 더 좋은 음식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하는 사람은 그런 음식을 얻게 되는 때에 무절제하게 남용하게 될 것이다. 빈곤하고 낮은 처지를 부득이 참기는 하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사람은 명예를 얻는 때에 반드시 교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저 사도의 모범을 따라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빌 4 : 12).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지상 물질을 이용하는 데 대한 세 번째 지도 법칙이 있다. 사랑에 대한 교훈을 논할 때에 그것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을 때8 이 법칙에 의하면,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며 우리의 유익에 충당되도록 하셨을 때에, 그 물질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우리가 언젠가는 청산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보던 일을 셈하라."는(눅 16 : 2) 말씀을 항상 귀에 들리게 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 셈을 누가 요구하시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곧 극기와 단정한 정신과 검소와 절제를 권장하시고 무절제와 자만과 허식과 허영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다. 유용한 물질을 분배하더라도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을 시인하시지 않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물건이 사람의 정신을 정절과 순결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 마음을 흐리게 할 때에는 친히 전적으로 배격하셨다.

 

 

 

6. 주의 부르심이 우리의 생활 양식의 기초임

 

끝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주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이 모든 행동에서 각각 자기의 소명에9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큰 불안으로 타오르며, 얼마나 경박하고 방탕하며,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움켜잡으려는 야심이 얼마나 맹렬한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매하고 경솔한 우리가 만사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그 독특한 생활 양식에 따라 의무를 지정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한계를 경솔히 벗어나지 않도록, 그 다양한 생활들을 소명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각 개인에게는 주께서 지정하신 생활 방식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초소와 같아서,10 사람이 생각 없이 인생을 방탕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지정하신 것이다. 이 구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의 앞에서 이 구별의 표준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적 이론과는 그 판단이 훨씬 다를 때가 많다. 철학자들도 조국을 압제자의 손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이 직접 압제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죄하셨다(삼상 24 : 7,11, 26 : 9).11

그러나 이 이상 더 예를 들지 않겠다.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시초와 기초는 주의 부르심에 있다는 것만 알면 넉넉하다. 주의 부르심에 전심하지 않는 사람은 의무의 길을 결코 바르게 걷지 못할 것이다. 간혹 칭찬할 만한 일을 할는지 모르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배척을 받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생활의 각 부분 사이에는 조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이 이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에 가장 잘 정리될 것이다. 소명의 한계를 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경솔하게 굴어서 소명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미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자기의 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열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알면, 걱정과 수고와 곤란과 그 밖의 짐이 있더라도, 적지 않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더욱 기꺼이 직무를 수행할 것이요, 일가의 가장은 그 의무에 전심할 것이다. 각자의 생활 양식에서 받는 불편과 근심과 권태와 불안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것이라고 믿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참고 견딜 것이다. 여기서 또한 소명임을 알고 순종하면, 아무리 낮고 천한 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날 것이며 아주 귀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12 유일한 위안이 생길 것이다.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 용어를 정의함. 1-4)

 

1. 칭의의 교리가 갖는 그 위치와 의미

 

율법 아래서 저주를 받은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회복하는 수단이 단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즉 믿음으로 회복하는 수단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이미 설명했다고 믿는다. 믿음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것과 믿음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결과도 설명했다고 믿는다.1 이제 이 설명들을 요약하겠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흠 없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선물 중의 둘째인 중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말했다.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보다 가볍게 논했다. 왜냐하면 먼저 믿음은 선행을 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문제가 부분적으로 관련된 선행의 문제를2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문제들을 철저하게 토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 토의를 진행할 때에, 이것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3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가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서 더 잘 나타날 것이다.

 

 

 

2. 칭의의 개념

 

우리는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우선 다음과 같은 표현들의 뜻을 설명하도록 하자.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며, 의롭기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미워하시므로 죄인이 죄인인 동안은 그리고 죄인으로 인정되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나타난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굳게 서며 모든 죄인들은 넘어진다.

무죄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서 공정한 재판관 앞에 불려갔을 때에, 그의 무죄한 사실대로 판결이 나면, 그는 재판관 앞에서 "정당한 것이 인정되었다."("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죄인들과의 교제에서 풀려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증거하시며 확인해주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사람의 생활이 순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는 증언을 얻을 만할 때에는,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또는 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는-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성경에 있는 용법

 

이 사실을 확인하는 명백한 증거가 성경에 많다. 우선 이것이 이 용어의 바른 뜻이며 가장 많이 통용되는 뜻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구절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것은 너무 긴 작업이고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의 논제인 칭의를 특별히 다룬 구절을 몇 개만 소개하겠다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눅 7 : 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고 하셨다(눅 7 : 35). 첫 구절에서(29절) 누가는 백성이 하나님께 의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일이 없으며, 온 세상이 빼앗으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35절에서도 누가는 구원에 대교리의 정당성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그 자체가 정한 것이다. 누가의 이 두 구절은 같은 표현을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과 그의 교훈에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드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스스로 옳다(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실 때에(눅 16 : 15), 말씀하시는 뜻은 그들이 선행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가 없으면서 의롭다는 세평을 얻으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이 뜻을 더 잘 이해한다. 히브리어로는 자기의 죄를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정죄를 받는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부른다. 밧세바가 자기와 솔로몬이 "죄인"이라고 한 것은(왕상 1 : 21)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와 아들은 수치를 당하며 죄인과 정죄받은 자들같이 인정되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전후 관계로 보아서, 라틴어로 읽을 때에도 이 말은 어떤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해석해야 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3a

그러나 당면한 문제에 관련해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에(갈 3 : 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하신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 : 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점은 그가 결론으로 외친 말에서 더욱 명백하게 나타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 : 33-34).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변호하며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 : 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끝으로, 보속이 도입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의 용서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래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고 할 때에(눅 18 : 14), 그가 어떠한 행위의 공로로 의를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b泳汰막?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가 옳은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행위가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가 죄의 고백은 합법적인 칭의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4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용어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 표현하려는 내용 자체를 주시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의심도 없다. 에베소서 1장 5-6절에서 바울은 확실히 "용납"이란 말로써 칭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 : 5-6).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 : 6-7, 시 32 : 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 : 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액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좋은 구절은, 그가 복음 전파사명의 요점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때문이다(고후 5 : 18-20). 나는 독자들이 이 구절 전체를 심사 숙고하기를 바란다. 이는 바울이 조금 뒤에 일종의 설명을 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 : 21) 화해의 수단이었다고 한다(고후 5 : 18-19 참조). 그가 "화해됨"이란 말과 "의로 인정됨"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 : 19)고 가르치는데, 이 주장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오시안더(Osio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

 

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그러나 오시안더(Osiander)는 "본질적 의"라는5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속에 묻어버리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문제들로 넘어 가기 전에, 이 황당 무계한 공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변은 단순히 무기력한 호기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성경에서 많은 증거를 수집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이며, 우리는 그와 하나인 것을6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결합의 유대를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속는다. 그가 빠진 난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신비한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이입하기 위해서 마니교와 비슷한 그 무엇을 생각하였다.7 여기서부터 다른 공상이 생겨났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인간성의 원형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 그러나 나는 간단한 서술을 원하므로 그전의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오시안더는 말하는데 우리도 그 말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고 하는 데는 반대한다. 그리고 그는 이 원칙을 그의 기만적인 개념들에 잘못 적용한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바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인인 것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계획대로 다른 곳으로 넘겨야 할 문제를 여기서 간단히 다루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그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견해에 응답할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발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 안에 주입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스도뿐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도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맹렬히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것을 옳은 생각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패역하게 왜곡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내주의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골 2 : 9), 그의 안에서 우리도 신성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에 관해서 따로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사람들을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도록 도울 뿐이다.

그 다음에 그는 여러 가지 실체를 혼합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하심으로 우리를 그의 일부로 만드신다고 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며,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섞이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아무 중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더욱 밝히 나타낸다. 즉 우리는 중보자의 은혜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히 또는 완전히 제공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9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합한다

 

가령 그가 한 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에, 본질의 결합에 의해서 그는 우리 것이 되시며 그것은 그가 사람이시므로 우리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신성의 본질이 우리 안에 주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이런 진미를 먹어도 해(害)가 덜했을 것이며, 이 망상으로 인한 큰 싸움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다.10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한다. 그는 이 논쟁 전체를 통해서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10a 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한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첫째 점을-즉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은 용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중생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하신 후에, 그들의 악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들을 본성대로 버려두시겠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쉽다. 그리스도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신 사람에게 동시에 양자의 영을 주셔서(롬 8 : 15), 이 영의 힘으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개도하신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 열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태양의 빛이 지구를 덥게 하고 태양의 열이 지구를 비춘다고 하는가? 목전의 문제에 대해서 이 비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는가? 태양은 그 열에 의해서 땅에 생명과 열매를 주며, 그 광선에 의해서 땅을 비추며 밝게 한다. 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한쪽의 특성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은 이성이 금한다.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흔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한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에(고전 1 : 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는다.11 그리고 그가-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구원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출발점으로 삼아-우리는 거룩하며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논할 때,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성경에 관해서 오시안더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그릇된 해석을 한다. "일하는 자"가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바울의 언명에 대해서(롬 4 : 4-5), 그는 "의롭다함"을 "의롭게 만든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똑같이 경솔하게 그는 로마서 4장 전장을 곡해한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인용한1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도(롬 8 : 33) 그는 동일한 속임수로 변질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는 단순히 죄책과 무죄 방면이 문제가 된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 대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결론에 있어서나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오시안더는 자기 자신이 무능한 해석자임을 증명하였다.

"의"라는 말에 대한 그의 논의도 이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덕에서 뛰어나게 된 후였다고 주장한다.13 이것을 보면, 그는 두 개의 건전한 발언에서 출발하여 그릇된 생각으로 하나의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여기서 언급된 의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과정 전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는 탁월하게 선한 사람이었고 장기간 그것들을 견지함으로써 더욱 선을 쌓았지만, 여기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은 다만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능숙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 사실에서 칭의에는 행위가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능력이 없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고 오시안더는 항변한다. 나도 이 항의를 기꺼이 인정한다. 만일 믿음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다 한다면, 믿음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 하는 일을 부분적으로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상상을 하지 않는다. 올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는 기능을 그리스도에게 옮긴다. 우리는 믿음을 일종의 그 룬쎄 비교한다.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의롭다 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 궤변가가 "믿음은 그리스도다."라고14 말하는 그 왜곡된 비유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금이 들어 있다고 해서 질그릇을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치는 마찬가지다. 믿음 자체는 가치나 값이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다. 돈이 가득한 질그릇이 부자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은 의를 닫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이자 분배자시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으로 우리는 칭의를 고려할 때에 "믿음"이란 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처리하였다.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외면적인 말씀의 작용으로 내면적인 말씀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주장으로 그는 우리를 제사장이시며 증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켜 그의 외면적인 신성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할하지 않고 그 육신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주신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또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증보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오시안더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신성에 관해서 옳게 적용된 것이라면, 특히 그리스도께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으로 적용된 것이다. 한쪽의 의가 다른 쪽의 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부터 계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과(고전 1 : 30)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것은 증보자로서의 위격의 특이한 점이다. 이 위격에는 신성이 내포되지만 고유한 명칭에 의해 증보자는 아버지나 성령과는 구별된다.

오시안더는 여호와가 우리의 의가 되시리라고 약속한 예레미야의 말 하나를(렘 51 : 10, 23 : 6, 33 : 16 참조) 어리석게도 기뻐한다. 그러나 그는 이 말에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라는(딤전 3 : 16 참조) 사실 밖에는 추론해 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15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말을(행 20 : 28) 인용했다. 이 말에서 죄를 대속한 피는 하나님의 것이며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누가 이런 추악한 오류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안더는 이 대단히 유치한 항변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의기 양양해서 기뻐 날뛰며, 여러 장에 호언 장담을 늘어놓는다.16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은 곧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여호와가 다윗의 후손이 되실 때에 경건한 자들의 의가 되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이사야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는(사 53 : 11)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이는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그가 의롭게 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과 그 이유로서 아들이 의롭다는 것을 부언하신 사실과 가르침 안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시는 그 방법과 수단을 두셨다는 것에 유의하자. 여기에 있는 다아트( )라는 말은 피동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17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 2 : 7)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 : 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에 따라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그의 의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에, 이 비교적 낮은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게 할 수밖에 없다.

 

 

 

9. 증보자의 하시는 일로서의 칭의

 

만일 오시안더가 이 사역은 그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신성에 돌릴 수 밖에 없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첫번째 반박은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반박에 관해서는 그가 큰 망상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의 영혼을 그의 피로 정결하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회생으로 그의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죄책을 사면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요약하면, 제사장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의 힘으로는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일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롬 5 : 19 참조). 그러나 그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지 않고(빌 2 : 7) 어떤 다른 방법으로 복종 하셨겠는가?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다른 말로서 바울은 의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육신에만 둔다. 그런데 나는 오시안더가 바울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 21).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의를 큰 소리로 찬양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유령 같은 "본질적 의"를 확인하시는 듯이 개선가를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은 뜻이 훨씬 다르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이 시인하시는 의라는 옷이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도 다 아는 일이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요 12 : 43, 5 : 44).18 간혹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의의 근원이며,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인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은 이 표현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회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오시안더가 우리와 의견이 일치한다면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성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의와 구원에 인을 치시고자 하셨을 때에, 자신의 육신으로 확실한 보증을 삼으셨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고(요 6 : 48), 그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부언하셨다(요 6 : 55). 이런 교수 방법은 성례전에서 볼 수 있다.19 성례전은 우리의 믿음을 부분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의와 구원의 두 가지가 그의 육신에 내주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 하며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증보자 안에서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평소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서 열려 있는 샘이라고 말한다. 깊고 은밀한 샘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을 우리는 이 샘에서 길어내며 또 증보자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로 나온다. 이런 방법으로 또 이런 의미에서, 만일 내가 제시한 확고하고 분명한 이유들을 오시안더가 수락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이 일은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나누게 하시는 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오시안더의 트집에 속지 않도록,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이 비할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20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의 친교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함으로써 믿음을 의로 생각한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중상을 반박하였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비우고 나가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그만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리를 빼앗는 것같이, 그는 우리를 중상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유대를 멸시하는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여 큰 오류를 범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광적인 오류 즉 "본질적 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쯔빙글리과(Zwinglian)"라고 불러 그의 악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그들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본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만하고 자신의 기만에 걸린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뿐 아니라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공결해야 할 세계적 학자들까지도 공격한다. 나는 나 개인의 문제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공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게는 아무런 악한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 일을 더욱 진지하게 변호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와 본질적 내주를 열광적으로 고집하는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른다. 우선, 그가 성만찬에서 몸을 먹는다고 공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일종의 조잡한 혼합물로서, 우리 속에 자신을 주입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불어보내어, 우리가 그와 함께 참으로 의롭게 되게 하신다고 한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 또는 거룩이나 완전성이라고 한다.

나는 그가 제시하는 성경의 증명들을 반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허비하지 않겠다. 그는 그릇되이 성경을 인용해서 그 뜻을 왜곡하여 하늘의 삶을 현세의 상태로 바꿔버린다.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너희로…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 : 4)라고 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실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복음의 약속이 현재 이루어진 것 같은 생각이다. 참으로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 3 : 2).21

나는 한 작은 예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이 무가치한 일들을 무시한다.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하고 무익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오시안더 사상의 둘째 단계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의롭다고 하는 데는 더 많은 해독이 숨어 있다. 나는 총명하고 경건한 독자들이 이 가상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다지 유해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냉담하며 내용이 빈약하며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구름 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고요한 기도 즉 속죄를 믿고 은혜를 받아들여,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중 의라는22 것을 구실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불경건이다.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이다. 그는 또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한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 : 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다른 구절에서 칭의가 송사와 대립되는 것과 같다. 이 대조법을 보더라도 이 표현이 법적인 용어에서 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히브리어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23 이 말의 근원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따라서 그 경향과 뜻이 여기서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허물의 사함을 얻고…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시 32 : 1, 롬 4 : 7) 행위가 없이 받는 의를 묘사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이 완전한 정의인지 또는 불완전한 정의인지를 오시안더는 내게 대답하라. 바울이 예언자를 인용한 것은 죄의 용서가 의의 일부분이라든가 또는 사람을 의롭다 하는 일의 부수물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주장을 지지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바울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의 전체를 포함시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어주시며, 그 불법을 용서하시고, 그 죄과를 그 앞으로 돌리시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바울이 판단하고 인정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즉 자기의 원래의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여전히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 : 4 참조) 매우 다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에,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시며, 어떤 때에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부분적인 의만으로는 우리의 양심에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어떤 주장이 사람의 마음에 의혹을 불어넣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동요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자유롭고 담대한 기도를 방해하여 평화와 평온과 영적 기쁨을 주지 못할 때에, 그런 주장은 패악한 것이며 완전히 깨뜨려야 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반대 명제를 써서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며(갈 3 : 18),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헛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 : 14). 행위에 중점을 두는 믿음은 흔들린다. 이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행위에서는 의지할 것을 전연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와 중생을 오시안더는 "이중의 의"라는 말로 혼동하지만, 바울은 명백하게 구별한다. 그는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해서-자기가 받은 바른 성품,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비통하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 24)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한 의에서 피난처를 구하며, 거기서 생명과 사망과 비난과 기아와 전쟁과 기타 고난을 영광스럽게 극복하였다고 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 : 33).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롬 8 : 38-3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으며, 그래서 그는 자랑할 확신이 감해지지 않으며, 그가 조금 전에 자기의 처지라고 통탄해 하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차이는 불의의 짐에 눌려 신음하지만 동시에 승리의 확신을 품고 모든 공포심을 극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또 익숙히 살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항변을 와해시킨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 "이중의 의"를 털옷같이 입히지만, 역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적어도 본래의 의가 없는 자들이 세상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일정한 비례에 따라24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인간적인 의 대신에 거저 주시는 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구분할 수 있는가? 한 근씩인가 또는 한 푼씩인가? 물론 그는 확신이 없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므로 좌우로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말씀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 : 4).

최고의 심판자가 값없이 사면하실 때에 그를 정죄하며, "나는…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 : 19)고 하시는 말씀이 그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참람한 행위인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견제하신 모세의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용서하시지 말아 달라고 한 뜻이 아니라, 백성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책하지 말고 모두 한결같이 사면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써 자기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의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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