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3 권 (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7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16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다. 마니교도들은 이 생각에 대해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17 무가치한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영혼의 하늘 생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영혼은 불결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한 그들의 망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18 내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우선 바울은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고후 7 : 1) 명령하므로,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고후 5 : 10)한 판단은 이것의 결과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말과 부합하는 말을 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 : 11).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과 혼과 아울러 그들의 몸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한다(살전 5 : 23).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으로 성별하신 몸이(고전 3 : 16) 부활의 소망이 없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신자들의 몸은 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가?(고전 6 : 15) 하나님께서는 몸의 각 부분을 그에게 성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사람의 혀가 그를 찬양하며,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딤전 2 : 8),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지 않는가?(롬 12 : 1)

사람의 이 부분에 대해서 하늘 심판자께서 이렇게까지 빛나는 영예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죽을 인생이 그것을 회복될 소망이 없는 흙으로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를 섬기라고 우리에게 충고한 바울은(고전 6 : 20),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라고 확실히 주장한 그것이 영원한 부패의 운명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한다(고전 15 : 53). 만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만드신다면, 이 성질의 변화는 어디서 생길 것인가? 만일 성경이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다면 이 모호한 표현이 그들에게 너절한 반대를 할 구실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한다.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한다.19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한 사실을(롬 14 : 11) 잔소리꾼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사 49 : 18)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는(사 45 : 23, 롬 14 : 11)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의 글을 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각각 일생 동안 한 일을 고해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일 새 몸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단 12 : 2) 한 말에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명백한 이유가 나타난다. 죽음이 인간의 티끌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회복은 그 죽기 시작한 육체에 속한다. 바울이 부활을 주장했을 때 아덴 사람들이 웃은 것을 보면(행 17 : 32), 그가 어떤 전도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웃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 : 28). 만일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몸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도 이와 꼭 같이 분명하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 : 28-29) 우리는 영혼들이 무덤 속에서 쉬고 있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할 것인가? 오히려 그의 명령이 있을 때 몸이 그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된다면 머리와 지체들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새 몸을 입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그는 말씀하셨다(요 2 : 19). 그는 전에 입으셨던 죽을 몸을 다시 입으셨다. 속죄 제물로 바친 몸이 소멸되고 새로운 몸이 대치되었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고(고전 15 : 12이하) 사도가 선포한 이 연관성을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은 현저한 예를 보아서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에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무덤에서 나왔다"고 한다(마 27 : 52-53 참조). 이 일이 우리가 대망하는 부활의 전조 또는 보증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일은 이미 에녹과 엘리야에게 있었던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부활의 후보자"라고 불렀다. 이는 그들이 몸과 영혼의 부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영접되었기 때문이다.20

 

 

 

8. 육신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

 

나는 이렇게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악하고 대담한 자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속일 틈을 남겨 놓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은 귀찮겠지만 불편을 참기 바란다. 내가 지금 논의의 상대로 하는 이 경박한 사람들은 부활이 있을 때에는 새 몸이 창조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되겠다고 느끼는 것은, 오랫동안 부패하여 없어진 시체가 원상으로 회복된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오직 불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몸의 부활을 대망하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세례를 우리의 미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한다(골 2 : 12). 성만찬은 우리가 입으로 영적 은혜의 상징들을 받을 때에, 부활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촉구한다. 우리의 지체를 의에 순종하는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롬 6 : 13,19) 바울의 충고는, 그가 그 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한 말과(롬 8 : 11)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전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발과 손과 눈과 혀를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 바치더라도, 그 봉사의 열매와 보상에 참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울은 직접 이 점을 확인한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 : 13,14). 더욱 분명한 것은 그 다음에 있는 말이다. 즉,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였다(고전 6 : 15,19). 그리고 조금 뒤에 구속의 값을 우리의 몸에까지 확대하는 것과 같이(고전 6 : 20), 바울은 부활을 정숙과 거룩에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바울의 몸(갈 6 : 17),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나타낸 그의 몸이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랑하였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 : 20-21).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행 14 : 22),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기치 하에 훈련시키시고 승리의 찬사로 장식하시는 몸이 천국에 들어0〈?것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을 품는 데 대해서 아무 의혹도 생기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시험하는 모든 환난을 맡으시고 환난에는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의식을 통해서 율법 하의 거룩한 조상들에게 이 믿음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셨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21 매장하는 몸들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장례는 왜 생겼겠는가?

영생 불사의 상징인 향료와 기타 물질은 회생 제물과 같이 율법 하의 가르침의 모호한 점을 완화하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매장 풍습은 미신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성령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장례에 대해서도 믿음의 중요한 여러 가지 신비에 못지 않게 많이 유익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기 대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적은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마 26 : 10) 이유도 확실히, 장례는 모든 것을 썩히고 말살하는 무덤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갱신의 광경을 그려보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를 극히 엄숙하게 지키는 것을 족장들도 시인하였거니와, 그런 엄수는 그들이 장례를 믿음에 대한 가치 있는 도움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아브라함의 눈앞에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가치와 종교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그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세밀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창 23 : 4,19). 즉, 그는 아내의 시체를 부활의 표징으로 장식함으로써 자기의 믿음과 가족의 믿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은 야곱이 한 일이다. 그는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희망이, 죽을 때에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자기의 뼈를 그리로 가져가라고 명령하였다(창 47 : 30). 묻노니, 그가 새 몸을 입게 될 것이라면, 없어지고 말 흙에 관해서 지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면, 부활 교리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교리도 없다.

어린이들까지도 "부활"과 "다시 산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방금 창조된 것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않는다. 더우기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요 6 : 39)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잔다"는 말은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묘지를 침소라고 부른다.22

 

부활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부활의 모양에 대해서 다소의 암시를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고전 15 : 51), 우리가 절제하며, 너무 자유롭고 미묘한 사색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이 점을 바울은 잘 아는 예를 들어 주장한다(고전 15 : 39). 사람과 짐승의 육체는 본체가 같으나 성질이 다르며(고전 15 : 39), 모든 별은 같은 재료로 되었으나 그 광채가 다른 것과 같이(고전 15 : 41),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 15 : 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는 성질을 버리고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고전 15 : 53-54). 하나님께서는 모든 요소들 마음대로 지배하실 수 있으므로 흙과 물과 불에게 그것들에 의하여 소멸된 것을 모두 복구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도 이 점을 비유로 언급한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 26 : 21)

그러나 죽은 지 오랜 사람들과 그 날 아직 살아 있을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15 : 51). 죽는 때와 둘째 생명이 시작하는 때의 사이에 간격을 둘 필요가 없다.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은 상태로 살아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갑자기 같은 영광으로 변화할 것이다(고전 15 : 52-53).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죽게 될 신자들을 같은 말로 위로하며, 그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앞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리라고 한다(살전 4 : 15-16).

만일 사도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히 9 : 27)한 말을 인용해서 반대한다면, 설명은 어렵지 않다. 본성이 변할 때에는 죽는 듯한 인상을 주며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린 때에 죽음에 의해서 모두 새로워지리라는 것과, 변화가 갑작스러운 경우에는 몸과 영혼이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서로 잘 부합되는 일이다.

 

 

 

9. 불신자의 부활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즉 무슨 권리로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도 부활하는가? 부활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독특한 은혜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을 안다(롬 5 : 12, 고전 15 : 22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서 오셨다(요 11 : 25). 그는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하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는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자들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을 완악하고 눈이 어두운 자들이 얻는다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확고 부동한 사실이 있다. 한쪽은 심판의 부활로, 또 한쪽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이며(요 5 : 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이다(마 25 : 32). 나의 대답은, 우리가 여기 해당하는 일들을 일상 경험에서 보기 때문에, 이 일을 신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전세계의 유업을 빼앗겼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통 음식도 먹을 자격을 빼앗겼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것은(마5 : 45) 현세 생활에 있어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끊임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속한 것이 악인들에게도 풍부하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소유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구실이 없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악인들은 놀라운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친절을 체험하는 일이 많고,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복을 훨씬 능가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체험은 그들에게 더욱 엄중한 정죄가 된다.

덧없는 지상의 혜택에 의해서 부활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들이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처음 단절되었을 때에 그들은 마귀의 죽음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하여 중간 상태가 마련되었고, 그들은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악인이 우연히 부활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 주와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가더라도, 그것이 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심판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그들은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말한 입장을 지키며, 바울이 벨릭스(Felix)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백을(행 24 : 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信经)에서도 복된 생명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사람의 내세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 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예언은(사 25 : 8, 호 13 : 14, 고전 15 : 54-55) 그 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행복이 얼마나 탁월하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하리라는 말을 들으며, 또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동안은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 쌓여 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고전 13 : 12 참조)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요한은 말했다(요일 3 : 2).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성경이 여러 군데서 우리에게 가르친다. 예컨대, "아브람아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 : 1)고 하신다. 다윗의 말이 이와 부합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 : 5-6). 다른 구절에서도 "나는‥‥‥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 : 15)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벧후 1 : 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 이는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겠기 때문이다(살후 1 : 10). 만일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권능과 의를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아니, 자신을 그들에게 푸셔서 즐기게 하시며, 심지어 그들을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은혜 안에 모든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 더 알려고 하는 과도한 욕망의 유혹을 느낀다. 이런 상태에서 무가치하고 유해한 질문이 자꾸만 생겨난다.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질문들은 더욱 다르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즐기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변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런 질문을 유해하다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기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똑같지 않으리라고23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날에(살전 2 : 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살전 2 : 20) 한 바울의 말이나, "너희도‥‥‥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마 19 : 2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고,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그들을 장식하시리란 것을 안 바울은, 자기 수고에 해당하는 특별한 면류관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딤후 4 : 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직무가 존귀하다는 것을 가르치실 때, 그에 대한 결실은 하늘에 저장되어 있다고 하셨다(마 19 : 21 참조). 다니엘서에도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다(단 12 : 3). 자세히 연구해보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사람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딤후1 : 18).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마 19 : 29) 하신 약속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 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 동성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방해가 되는 난문들을 피하여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무익한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얼마나 다를까, 처녀들은 기혼 여성들과 어느 정도 다를까, 하고 묻는다.24 요컨대, 그들은 하늘을 샅샅이 뒤져서 알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회복시킬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영원한 복의 상징인25 천사들과 같이 되었으므로(마 22 : 30) 이 위대하고 비할 데 없는 풍성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 복은 보기만 해도 큰 즐거움이며, 알기만 하고 이용하지 않아도 큰 기쁨이며, 우리가 지금 향유한 모든 즐거움을 훨씬 초월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가령 우리가 이 지상에서 모든 쾌락이 구비된 가장 풍부한 곳에 있다고 상상할 때, 가끔 자기의 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자기의 무절제로 인해서 평탄한 생활에 자주 파동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썩을 생명에 무익하다 하더라도 아무 악이 없는 맑고 순수한 즐거움은 행복의 극치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속의 찌끼와 그 밖의 퇴폐물은 회복과는 먼 것, 그것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계속 묻는다.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점을 인정하지만, 바울처럼 이런 결함이 고쳐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죄에서 시작한 결함이며, 그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 : 22). 그들은 계속해서, 후손들의 복도 그때에는 끝날 것인데 인류를 위해서 어떤 더 좋은 상태가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 이 곤란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성경이 자손의 복을 극구 찬양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손에 의해서 자연의 질서를 그 목표를 향하여 계속 전진시키는 데도 해당된다. 그러나 완성된 상태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그러나 유혹이 부주의한 사람들을 곧 붙잡아서 점점 깊은 미로로 끌어들인다. 그 결과로 각각 자기 의견에만 만족하고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결의 첩경은 우리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까지 "거울"과 그 "희미함"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이다(고전 13 : 12). 어떻게 하면 하늘로 갈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천만명 중에서도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태만해서 가상적인 숭리를 미리 상상할 뿐, 실지로 싸우는 것은 싫어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예컨대 어둠, 울음, 이를 갊(마 8 : 12, 22 : 13), 꺼지지 않는 불(마 3 : 12, 막 9 : 43, 사 66 : 24), 심장을 갉아먹는 죽지 않는 벌레(사 66 : 24) 등이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려고 하신다. 예컨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 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사 30 : 33). 이런 자세한 모사는 악인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하지만,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이다.26 그뿐만 아니라 도저히 그 압력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맹렬한 불처럼 삼켜버린다. 둘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시하는 데 이바지하므로, 주의 진노를 공개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생물과 기타 만물이 자기를 향하여 무서운 분노로 타오르며, 자기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했다고 느낄 것이다. 따라서 사도가 불신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살후 1 : 9)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 예언자들이 물질적인 비유로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킬 때, 그들은 우리의 태만에 맞설 만한 과장된 언사를 사용하지 않지만, 해와 달과 우주 전체의 현상을 통해서(마 24 : 29 기타) 장차 올 심판의 예감을 그들의 교훈에 섞는다. 따라서 가련한 양심은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괴로움을 당하며,27 원수가 된 하나님께 찢기는 듯, 치명적인 창에 찔리는 듯, 하나님의 번개가 때리는 듯, 그의 무거운 손에 눌려 부서질 듯한 느낌으로 일시도 안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공포 가운데 한 순간이라도 서 있는 것보다 차라리 끝없는 깊음이나 구렁으로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쉴새없이 하나님의 포위를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인가? 이 점에 대해서 시편 90편에 잊지 못할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으로 모든 죽을 인생들을 흩으시며 멸망시키시지만,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려하시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셔서 계속 전진하게 하신다(시 90 : 7이하).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고전 15 : 28) 전진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이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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