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 권(2)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8

15. 카톨릭 성직자들의 치외 법권

 

카톨릭 성직자들은 재판권에 자기들의 치외 법권을 첨부한다. 개인 문제로 국가의 재판관 앞에 나가는 것을 자기들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민에 공통된 법정과 법률에서 면제돼야만 교회의 자유와 위신이 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교회의 권리를 아주 엄격하게 선언한 고대 감독들은 법에 복종한다고 해서 자기들이나 교회가 손상을 입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경건한 황제들은 필요한 때에는 의례히 성직자들을 불러 재판했지만 항의하는 성직자가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감독이 경솔하게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의 오만한 태도는 하나님의 사역자의 공적 권위에 의해서 즉 나의 권위에 의해서 제지될 것이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감독들은 황제의 권한에 반대하지 않고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며 우리의 법률에 복종한다."27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믿었고 아무 항변도 하지 않았다.

 

#276 제11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교회 내부의 사건들을 감독의 판정에 맡긴 것은 사실이다. 그 예로, 어떤 하급 성직자가 국법을 어기지 않고 다만 교회법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국가의 재판소에 호출되지 않고 감독의 재판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관한 문제나 원래 교회에 속한 다른 문제가 논쟁 중인 때에는 거기에 대한 재판은 교회에 맡겼다. 암브로시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에게 보낸 서간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선제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을 뿐 아니라 법으로 명령하셔서, 신앙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는 직책상 자격이 있거나 관할상 외인이 아닌 사람이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정하셨나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성경이나 고대의 선례들을 존중한다면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는 반복하지만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는-그리스도인인 황제들에 관해서 판정하는 것은 감독이며 감독들에 관해서 황제들이 판정하지 않는 것이 관례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이까?" 마찬가지로, "폐하, 감독들이나 신자들이 보내 주기만 하면 저는 폐하의 회의에 가고 싶나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송사는 교회에서 신자들 앞에서 심리해야 된다고 말하나이다."28 암브로시우스는 영적 사건 즉 종교에 관한 사건은 세속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국가 재판소에 제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태도를 모든 사람이 찬양한다. 그러나 그는 만일 물적 강제력이 동원된다면 주장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나에게 위임된 곳을 스스로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요를 당한다면 나는 저항할 도리가 없다. 우리의 무기는 기도와 눈물뿐이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분의 탁월한 겸손과 지혜 그리고 위대한 정신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황제의 모친 유스티나는 그를 아리우스파에 끌어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교회를 치리하는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다. 만일 그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환을 당하여 궁중에 갔다면 추방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중대 논쟁에서 황제는 재판관으로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시대의 필요성과 문제의 영원한 성격이 이런 태도를 요구했다. 그의 찬성으로 이런 선례를 후세에 남기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그는 판단하였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할 때에는 그는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과 교회의 권리를 무력으로 옹호한다는 것은 감독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에 관해서는 그는 황제의 명령대로 할 용의를 보였다. "만일 황제께서 공납을 원하신다면 우리는 거부하지 않고 교회 토지에서 공납을 바칠 것이다 만일 땅을 원하신다면 황제에게는 그것을 차지할 권력이 있다. 우리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29 그레고리우스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폐하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사제들에 관한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폐하의 관례가 아니다. 무슨 일에든지 우리의 죄가 폐하에게 짐이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30 그레고리우스는 황제가 사제들을 일체 재판하지 금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 재판에 맡겨야 할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6. 감독들도 세속 재판에 복종했다

 

이런 예외를 설정함으로써, 거룩한 분들은 종교심이 약한 군주들이 전제적인 폭력으로 임의로 교회의 내부 행정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예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군주들이 그 권위로 교회 문제에 간섭하는 것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며, 교회의 권징을 해소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확립하려는 것이라면 그런 개입을 비난하지 않았다. 교회에는 강제력이 없으며 또 강제력을 추구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나는 국가의 강제력을 말한다), 법률과 칙령과 재판으로 종교를 지탱하는 것은 경건한 군주들의 의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야만족에게 쫓긴 감독들을 받아들이라고 어떤 감독들에게 명령한 일이 있다. 그 때에 그레고리우스는 황제의 명령이 정당한 것을 알고 감독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했다. 같은 황제가 그레고리우스 자신에게 콘스탄티노플의 요안네스 감독과 화해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세속 재판소에 대한 치외 법권을 자랑하지 않고 양심이 허락하는 대로 복종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마우리키우스가 이런 명령을 감독들에게 한 것은 경건한 군주로서 당연한 처사라고 말했다.31

 

 

 

제 12 장

 

교회의 권징 :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진정한 권징에서 열쇠의 권한은 어떤 것인가? 권징의 목적과 절차. 1-7)

 

1. 교회 권징의 필요성과 성격

 

교회의 권징에 대한 논의를 나는 여기까지 미루어 왔으나 여기서도 간단히 논하고 나머지 주제로 넘어가려 한다. 권징은 대개 열쇠의 권한과1 영적 재판권에 근거를 둔다.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교회를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두 가지 계층으로 나누겠다. 교회의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성직자"라고2 부르겠다. 먼저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공통적인 권징을 논하고 그 다음에 공통적인 권징 이외의 특별한 권징이 규정되어 있는 성직자들을 논하겠다.3

권징을 싫어하고 말만 들어도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교회도 하나의 사회란 것을 알아야 한다. 조그마한 가족 같은 사회에서도 규율이 없이는 올바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가장 질서가 지켜져야 할 교회에서는 규율이 더욱 더 필요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훈이 교회의 생명인 것같이, 권징은 그 근육이며 이 근육에 의해서 몸의 지체들이 서로 결합되고 각각 그 자리에 지탱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권징을 폐지하거나 그 회복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고의로 하든지 또는 모르고 하든지 간에-결국 교회를 해체시키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각기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둔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교리를 전파하기만 하고, 사적인 충고와 시정과 기타 보조 수단을 첨가해서 교리를 지탱하며 실천하게 하지 않는 다면 다 사람이 제멋대로 행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반대해서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며 길들이는 굴레와 같으며, 나태한 사람을 고무하는 자극과 같고, 더 깊은 타락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써 부드럽게 징벌하는 아버지의 매와4 같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억제하려는 생각이나 방법이 없어서 교회가 참화를 당할 위험이 보일 때에는 이 절박한 상태가 시정책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사용한 시정책은 이 권징뿐이다.

 

 

 

2. 교회 권징의 단계

 

권징의 첫 기초는 사적인 충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즉 어느 교인이 그 의무를 기꺼이 다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동을 하거나 점잖지 못한 생활을 하거나 비난받을 행동을 했을 때에, 그는 충고를 받을 용의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때에는 형제에게 충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특히 목사와 장로들이 깨어 있어서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들의 의무는, 신자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교훈으로 충분한 성과가 없을 때에는 각 가정에 다니면서 경고와 충고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또 각 가정에서 가르쳤다고 하였으며(행 20 : 20),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 했으므로(행 20 : 31)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라고(행 20 : 26) 하였다. 목사는 모든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설명할 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존경하지 않거나 지킬 성의가 부족하다고 본 사람들에 대해서 의무를 지키라고 요구할 권리와 수단까지도 가지고 있어야만 목사의 교훈에 힘과 권위가 있다.

만일 이런 충고를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그 죄악을 계속함으로써 충고를 무시한다는 태도를 보일 때에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증인들 앞에서 두 번째로 충고하며 그 후에는 교회 재판소 즉 장로회에5 불러 공적 권위로 더욱 엄중하게 충고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다. 이것은 만일 그가 교회를 존중한다면 굴복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도 굴하지 않고 그 악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 때에는 교회를 경멸하는 자로 인정해서 신자의 공동체에서 제거하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하셨다(마 18 : 15,17).

 

 

 

3. 숨은 죄와 나타난 죄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은밀한 허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적인 죄와 공적인 또는 공개적으로 나타난 죄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6 전자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에게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 : 15)고 말씀하신다. 나타난 죄에 대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 : 20)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하셨는데(마 18 : 15), 이 "네게"라는 말씀은(순순히 해석한다면) "너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면"이라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죄를 짓는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책망하라고 디모데에게 명령한 바울은 베드로에 대해서 그대로 실행했다. 베드로의 죄가 공중의 죄로 번질 정도가 됐을 때에, 바울은 사적으로 책망하지 않고 교회 앞에 베드로를 끌어냈던 것이다(갈2 : 14).

그러므로 올바른 행동 절차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비밀한 죄를 징계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절차를 밟아야 하며, 드러난 죄에 대해서는 그것이 참으로 공공연하게 나타난 죄인 경우에는 즉시 교회가 엄숙하게 책망해야 한다.

 

 

 

4. 경한 죄와 중한 죄

 

또 우리는 허물인 죄와, 범죄 또는 부끄러운 행동을 구별해야 한다.7 후자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충고나 견책뿐만 아니라 더 엄격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근친상간 죄를 범한 고린도 교회 신자에 대해서 바울은 말로 징계할 뿐 아니라 소식을 들은 즉시로 출교의 벌을 내렸다(고전 5 : 3이하).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의 말씀에 따라 죄를 처벌하는 교회의 영적 재판권이 교회의 건전성의 지주가 되며 질서의 기초가 되고 단결의 유대가 되는 까닭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드러난 간음범과 음행자, 절도와 강도, 반역자와 거짓 맹세한 자, 거짓 증거를 하는 자와 그 밖의 유사한 무리와 (경한 죄에 대해서 충고를 받고도 하나님과 그 심판을 냉소하는)불손한 자들을 공동체 생활에서 제거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런 판단을 멸시하거나 신자들의 투표에 의한 이 정죄를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이것이 자신의 선고를 발표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교회가 땅에서 한 일은 하늘에서도 확인된다고 선언하셨다. 교회는 패악한 자를 정죄하라는 주의 말씀을 받았으며 회개한 자는 다시 받아들이라는 말씀도 받았다(마 16 : 19, 18 : 18, 요 20 : 23). 나는 이 권징의 유대가 없어도 교회와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께서 미리 예견하신 그 보조 수단을 제거하고도 우리가 무사히 지낼 수 있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참으로 이 권징의 각종 사용법을 안다면 권징의 절실한 필요성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5. 권징의 목적

 

교회가 이런 시정책과 출교를 사용하는 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엡 5 : 25-26 참조) 마치 악하고 타락한 자들의 음모 단체인 듯한 인상을 주어 하나님에게 치욕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골 1 : 24), 이런 추하고 썩는 지체에 의해서 부패된다면 그 머리에도 어느 정도의 치욕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신성한 이름에 수치를 씌우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악행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가정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 또 여기서 우리는 주의 만찬의 제도를 보존하며 무분별하게 제공함으로써 성찬을 더럽혀서도 안 된다.8 성찬을 분배하는 일을 위임받은 사람은 합당치 못한 사람을 당연히 돌려보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을 의식적으로 성찬에 참가시킨다면 마치 그리스도의 몸을 개에게 던져준 것과 같은 모독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옳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사제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감히 아무도 제외시키지 못하는 것을 엄중하게 공격했다. "그대들의 손에서 피 값을 요구할 것이다(겔 3 : 18, 33 : 8). 그대들이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는 그대들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대들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나 자색 옷이나 왕관들을 무서워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더 큰 힘이 있다. 나는 그렇게 더러운 일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으며 피를 흘리기를 진정으로 원한다.9 그러므로 이 가장 신성한 신비에 치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성찬 분배에는 신중한 태도가 극히 필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교회의 재판권을 행사해야 한다.

둘째 목적은, 흔히 있는 것과 같이 악한 사람들과 항상 교제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바른 길을 벗어나기 쉬우므로) 나쁜 행동을 보면 우리도 바른 생활을 버리고 다른 데로 끌리기가 아주 쉽다. 사도가 근친상간 자를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을 때에도 사람에게 있는 이런 경향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 : 6). 그는 여기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예견하고 그와의 모든 교제를 금지했다.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 : 11).

셋째 목적은, 비루한 자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더 부드럽게 처리를 받았으면 더욱 고집을 썼을 사람들이 자기의 악행에 대한 징벌을 받고 매를 맞아 뉘우치며 유익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도는 이런 뜻으로 말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 : 14). 마찬가지로, 다른 구절에서는 저 고린도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면서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고전 5 : 5). 즉 바울은 그를 임시로 정죄해서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한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는 것은 마귀는 교회 밖에 있고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0 어떤 권위 있는 분들은 이 어구는 모종의 육체적 고통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11 내게는 대단히 의심스럽게 생각된다.

 

 

 

6. 권징은 경우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양하다

 

이렇게 목적을 열거한 다음에는 교회가 그 권한의 범위 내에서 권징의 이 부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우선 위에서 말한 구별을 생각하라. 어떤 죄는 공적이고 어떤 죄는 사적이며 또는 비교적 은밀에 속한다.12 공적인 죄는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니라 공연하게 지은 것이며 온 교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 비밀한 죄라고 한 것은 위선자들의 죄와 같이(이것은 교회가 판단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숨겼다는 뜻이 아니라, 중간적인 것 즉 아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은 공개되지 않은 죄를 의미하는 것이다.

처음 종류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단계가(마 18 : 15-17) 필요하지 않고 그런 죄가 나타나면 교회는 당사자를 불러서 그 죄에 해당되는 시정책을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규칙에 따라 둘째 종류에 대해서는 죄인이 고집을 부리기까지는 교회 앞에 문제가 제출되지 않는다. 교회 앞에 제기된 때에는 범죄와 허물의 구별을 고려해야 한다. 경한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처벌보다는 말로만 징계해도 충분하다. 이런 경우에도 온화하고 아버지 같은 태도로 해서 죄인의 마음을 완고하게 또는 혼란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며 그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여 시정받은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추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방법으로 징계할 필요가 있다. 추악한 행동으로 교회에 중대한 손상을 입힌 사람이 책망만 받는다는 것은 불충분하고, 얼마 동안 성찬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켜 회개의 확증을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를 말로 책망했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 추방했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를 오래 버려 둔 것을 책망했다(고전 5 : 1- 7).

교회 상태가 더 좋았던 고대에는 합당한 치리가 계속되는 동안은 이 절차를 지켰다. 범죄하며 교회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우선 성찬에 참가하는 것을 금하고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교회 앞에서 회개한 증거를 보이도록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실수한 사람에게는 회개의 표식으로서 엄숙한 의식을 지키도록 명령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교회가 만족할 정도로 의식들을 지키면 안수함으로써 회개한 죄인을 다시 받아들여졌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자주 "화목"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 이런 의식을 간단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을 참회한다. 다음에 공중 앞에서 고백하고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찬에 참가할 권리를 얻는다." 감독과 성직자들은 화목을 선고할 권한이 있었지만 키프리아누스가 다른 곳에서 밝힌 것과 같이 동시에 교회원들의 찬성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13

 

 

 

7. 고대 교회에서는 권징이 모든 위반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아무도 이 권징에서 제외되지 않았으므로 군주나 평민이나 모두 복종했다. 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권징이었고 그리스도께 모든 군주들이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데살로니가에서 있은 학살 사건14 때문에 암브로시스의 명령으로 성찬예식 참가를 금지 당했을 때, 황제로서의 형식을 일체 벗어버리고 교회 회중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서 저지른 자기의 죄를 통곡하며 신음과 눈물로써 용서를 빌었다. 위대한 왕들도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애원하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또 교회의 심판을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다. 그들은 궁 안에서 거의 아첨만을 듣고 있기 때문에 더욱 사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의 책망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도리어 사제들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이미 논했다. 단지 나는 이 점만을 첨가한다.15 바울이 사람을 출교한 조치는 합당한 것이었으나, 거기에는 장로들이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승인과 찬성했다는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 일반 신도가 대책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증인과 감시인이 되어 사태를 알며 소수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일이 처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참으로 이 조치의 과정 전체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를 증거하는 엄숙성이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재판권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

 

 

 

(권징은 온건하게 실시하라 : 엄격주의를 논박한다. 8-13)

 

8. 교회 권징의 엄격주의와 온건구의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엄격한 태도에 "온유한 심령"(갈 6 : 1)을 결합하는 것이 교회로서 합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명령한 것처럼, 벌을 받는 사람이 너무 심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고후 2 : 7)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고치려고 하다가 도리어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치려는 목적으로 본다면 온화한 방침이 더 좋을 것이다. 출교하는 목적은 죄인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자는 것이며, 신자들 사이에서 나쁜 습관을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훼방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극을 받아 본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일들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엄격하며 어디서 그쳐야 할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인이 교회에 대해서 회개한 증거를 보이고 그 증거에 의해서 그의 힘이 닿는 대로 교회에 끼친 잘못을 씻어 버린다면 더 이상 그를 추궁해서는 안 된다. 추궁한다면 그 때에는 엄격함이 한계의 도를 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고대인들의 과도한 엄격주의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은 주의 명령에서 완전히 떠난 것일 뿐만 아니라 극히 위험한 짓이었다. 엄숙한 참회와 친교정지를 혹은 7년 혹은 4년 혹은 3년 혹은 종신토록 계속하게 했으니16 큰 위선이나 철저한 절망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또 다시 타락한 사람이 두 번째 회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평생 교회에서 축출했다는17 것도 유익하지 않았고 도리에 합당하지도 않은 처사였다. 건전한 정신으로 이 문제를 숙고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고대인들이 이 점에서는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공적인 관례를 비난하는 것이지 그것을 추종한 사람들을 모두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습을 싫어하면서도 시정할 수 없어서 참고 견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키프리아누스는 자기가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란 것을 언명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오는 것을 참고, 온유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나는 모두 교회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의 동료 병사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진영과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집합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모든 일을 용서하며 많은 일을 묵인한다. 형제들을 모으겠다는 열망으로 나는 하나님께 대한 허물을 자세히 법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 용서해서는 안 될 허물까지 용서하는 나는 거의 허물을 범한다고 하겠다. 나는 회개하면서 돌아오며 겸손하고 단순한 보상으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즉시 받아들이고 완전히 사랑한다."18 크리소스톰은 좀더 엄격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친절하신데 그의 사제가 엄격한 체 할 까닭은 무엇이냐"19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에 대해서 얼마나 온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안다. 분열을 버리고 돌아온 사람은 서슴지 않고 본래 있던 감독구에 받아들였으며, 그것도 회개하면 즉시 받아들였다.20 그러나 반대되는 관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판단을 버리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9. 교회 권징에 따르는 우리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온유한 태도는 교회 전체에 필요하다. 교회는 타락한 사람을 온유하게 대해야 하며, 극도로 엄격한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울이 지시한 대로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야 한다(고후 2 : 8). 마찬가지로 평신도들도 각각 이와 같은 온건하고 온유한 태도를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선택된 사람들의 수효에서 삭제하거나 그들이 이미 멸망한 사람인 것같이 절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을 교회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사람으로 그러나 떨어져 있는 동안에만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이 온유한 태도보다 완고한 태도를 보일 때라도 우리는 그들을 주의 판단에 맡기고 그들의 일이 앞으로는 지금보다 잘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판단과 손안에만 있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 아니라 주의 법에 따라 각 사람의 행위의 성격만을 판단해야 한다. 이 방침을 따를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만을 의지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며 율법으로 그의 자비를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판단의 자유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장 악한 사람을 가장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며 이질적인 사람을 접붙이시고, 외인을 양자로 삼으셔서 교회에 들여놓으신다.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시며 그들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경망해서 분수에 넘치는 판단의 권리를 감히 주장하게 된다.

 

 

 

10. 출교는 교정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마 18 : 18)라고 약속하셨을 때 이 매는 일의 효력을 교회의 견책에 한정하셨다. 이렇게 하는 것은, 출교 당하는 사람들을 영원한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품행과 생활이 비난을 받는 것을 듣고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정죄를 받으리란 것을 확신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출교와 저주는 다르다. 저주는 모든 용서를 거부하고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 정죄하는 것이다. 출교는 그의 도덕적 행위를 처벌하며 징계하는 것이다. 출교도 벌을 주는 것이지만 장차 정죄를 받으리란 것을 미리 경고함으로써 사람을 불러 돌이켜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가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화해와 교제의 회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저주는 좀처럼 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의 권징은 출교된 사람들과 친밀한 접촉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지만 우리는 온갖 수단을 다해서 그들을 바른 생활로 돌이키며 교회에 돌아와서 함께 연합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사도도 이런 뜻으로 그들을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가르쳤다(살후 3 : 15). 사적 견책과 공적 견책에서 이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권징에서 도살 행위로 타락할 위험성이 있다.

 

 

 

11. 교회 권징에 대한 완고한 과격주의를 배척한다

 

권징을 온건하게 실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다. 도나투스파에 반대한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같이, 평신도들은 장로회가 죄악을 부지런히 시정하지 않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교회를 즉시 떠나서는 안 된다. 또 목자들은 시정해야 할 것을 소원대로 전부 씻어 버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직책을 돌리거나 비상한 엄격주의로 교회 전체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어거스틴은 참으로 옳은 말을 했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책망으로 시정하고 또 시정할 수 없는 것을 공정하게 비난하고 건실하게 참으면서 평화의 유대를 개뜨리지 않고 제거하는 사람은 자유로우며 모든 저주에서 풀려난다." 다른 구절에서 그는 그 이유를 말했다. "교회 권징의 방법과 수단이 경건하게 유지되려면 서로 용납함으로써 지키라고(엡 4 : 2) 사도가 우리에게 명령한 것 곧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엡 4 : 3)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 형벌의 약은 무용할 뿐 아니라 유해하게 되며 약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잘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권징을 엄격하게 세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과격한 시정책으로 우정의 유대를 끊지도 않는다."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 허물이 남아 있지 않도록 목자들은 끝까지 노력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각 힘 자라는 데까지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악한 사람들을 지지하거나 그들과 함께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경고하고 책망하며 시정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또 악한 사람들을 성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오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과오로 죄를 짓는다는 것을 어거스틴은 인정한다.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은, 주께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마 13 : 29) 그 신중한 태도이다. 여기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와 함께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한 태도로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길이 참으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슬퍼하며 신음하라"21고 결론을 내린다.

 

 

 

12. 혼란을 일으키는 엄격주의 :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도나투스파의 신경 과민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 내에 있는 허물을 감독들이 말로 책망하면서 출교로 처벌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에(감독들은 출교가 무익하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감독들이 규율을 위반했다고 맹렬히 공격하고 그리스도의 양떼로부터 불경건한 분리를 감행했다. 오늘날의 재세례파나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 모든 점에서 천사같이 완전하지 않은 곳에는 그리스도의 모임이 없다고 하며,22 열성을 구실로 해서 있는 계몽을 일체 부정한다. 어거스틴은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악을 미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투쟁을 즐기기 때문에, 자기들의 이름을 자랑함으로써 약한 사람들을 유혹해서는 자기들 편으로 끌어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분열을 일으키려고 한다. 교만으로 으스대며 미친 듯이 완고하고 거짓말로 중상하고 소란스럽게 선동을 하면서, 자기들에게 진리의 빛이 없는 것을 융통성이 없는 엄격주의의 그림자로 감추어 버린다. 그들은 성경에서 명령한, 사랑을 지키며 화평의 연합을 보존하면서 온전한 방법으로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라는 일들을 바꾸어서 모독적인 분파와 제거의 구실로 악용한다. 공정하게 엄격해야 할 때 사탄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만들며 평화와 단결의 유대를 부패케 하고 파괴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 : 14)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평과 연합의 유대가 확고한 동안은 사탄은 아무 해를 입힐 힘이 없으며 그의 음모의 덫은 약해지고 파괴 공작은 사라져 버린다.23

 

 

 

13. 어거스틴은 분별력이 있는 권징을 요구한다

 

어거스틴이 특히 권면한 것은 한 가지로서, 죄가 교인 전체에 전염되기 시작할 때에는 엄격하고 강력하게 권징을 세우는 엄격한 자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분리를 권하는 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하게 되므로 무익하고 유해하며 모독적이다. 그런 권고는 담대한 악인들을 시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약하고 선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24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권고한 것을 몸소 실천했다. 가르타고의 아우렐리우스 감독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 (성경이 엄격하게 비난한)술 취함으로 인한 폐해가 아프리카에 널리 펴졌는데도 처벌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명한 후에, 감독 회의를 열어서 대책을 강구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첨가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일들은 난폭한 방법이나 가혹한 또는 강압적 방법으로는 제거할 수 없나이다. 명령보다는 교훈으로, 위협보다는 충고로 제거되는 줄 압니다. 많은 죄인들을 다를 때에는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를 상대로 할 때에는 엄격한 태도가 필요합니다."25 그러나 그의 말은 감독들에게 공적 범죄를 묵인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또는 더 엄격하게 처벌할 수 없으니까 침묵을 지키라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을 그는 후에 설명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정한 결과가 죽음이 되지 않고 신체에 건강을 가져오도록 될 수 있는 대로 방법을 완화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평화를 어지럽게 할 위험성이 없을 때에는 결코 악한 사람들을 떼어버리라고 한 사도의 교훈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다른 의미로 이 일을 실천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원칙도 지켜야 합니다. 즉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26(고전 5 : 3-7, 엡 4 : 2-3).

 

 

 

(개인적 및 공적 금식의 가치와 목적 : 준수해야 할 원칙들. 14-18)

 

14. 죄를 공적으로 서로 고백한다

 

권징에는 본래 열쇠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목사가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신자들에게 금식이나 엄숙한 간구 및 그 밖의 행동으로 겸손과 회개와 신앙을 나타내기를 권고하는 부분이다. 여기 대해서 때와 방법과 형식을 정한 것이 성경에는 없고 교회의 판단에 완전히 맡겼다. 또한 이 부분의 준수는 유익한 것으로서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시대부터 항상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사도들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서를 본받았던 것이다. 거기서는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을 모으고 기도와 금식을 정했다(욜 2 : 15, 행 13 : 2-3). 그러므로 사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자기들에게도 유익하리라고 예견한 그 일을 행한 것이었다. 다른 행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런 일들을 함으로써 신자들은 의무감에 눈을 뜰 수 있고 의무와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 있어 수집할 필요가 없다. 요컨대 신앙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서 종교 회의나 교회 재판으로 해결해야 할 때, 목사를 선택하는 데 대해서 문제가 있을 때,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를 토의해야 될 때 또는 (전염병과 전쟁과 기근 같은)주의 진노의 심판이 나타난 때 등, 이런 때에는 언제든지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공적 금식과 특별 기도를 권고하라는 것이 거룩한 규정이며 모든 시대에 유익을 주는 규정이다. 구약성경에 있는 증언들을, 그리스도 교회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듯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더라도 사도들이 이 관습을 따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금식에 대해서 몇 마디 말하고자 한다. 금식의 가치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이 심히 많다. 또 어떤 사람은 금식을 무익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배척한다.27 또 세상이 금식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므로 그것은 미신으로 타락하기 쉽다.

 

 

 

15. 금식의 목적

 

성결하고 합당한 금식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육신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며 굴복시키기 위해서, 또는 기도와 거룩한 명상을 위해서 우리의 심신을 더욱 잘 준비하도록, 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자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한다.

첫째 목적은 공적 금식에는 해당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신체 구조와 건강 상태는 모두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첫째 목적은 개인적 금식에 더 합당하다.

둘째 목적은 양쪽에 공통된 것이다. 기도를 위해서 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교회 전체나 각 개인 신자나 마찬가지이다.

셋째 목적도 공통적이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라 전체에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다른 재앙으로 형벌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통적인 채찍을 맞을 때에는 온 백성이 자기를 책망하며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 손이 어느 개인을 칠 때에는 그는 단독으로 또는 자기의 가족과 함께 죄를 고백해야 한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마음속의 동기에 있다. 그러나 속마음이 올바르게 감동되면 외면적인 증거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공통의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 때에 외적 증거가 나타나게 되며,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이 함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예를 들어 서로 권면하게 된다.

 

 

 

16. 금식과 기도

 

따라서, 금식은 자기를 낮추는 표식이 되므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28 공적인 것이나 사적인 것에 공통된 것이지만 사적인 경우보다는 공적인 금식이 더 자주 이용된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권징에 관해서 본다면, 어떠한 중대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할 경우 금식을 기도와 함께 정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의 중대 사명을 하나님께 더욱 잘 맡기기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했다(행 13 : 3). 또 이 두 사람도 후에 각 교회에 일꾼을 임명했을 때에 금식과 기도를 함께 행하곤 했다(행 14 : 23). 그들이 이런 금식을 한 목적은 기도를 더욱 정성스럽게 드리며 기도에 방해되는 일을 제거하려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배가 부르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충분히 끌어올릴 수 없으며 정성과 열성을 다해서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며 계속할 수 없다. 누가가 안나에 대해서 한 이야기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안나가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를 섬겼다고(눅2 : 37) 누가는 말했으나, 금식함으로써 주를 경배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거룩한 여인이 이런 방법으로 기도를 계속하는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동족의 해방을 위해서 열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에도 그러한 금식을 했다(느 1 : 4). 그러므로 바울은 결혼한 남녀가 거리낌없이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시 서로 떨어져 있는 일은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도의 보조 수단으로서 금식을 첨가하며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금식은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경고한다(고전 7 : 5). 또 바울이 부부는 서로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고전 7 : 3), 일상 드리는 기도에 대한 말이 아니라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17. 금식과 회개

 

또 전염병이나 기근이나 전쟁이 심하게 날뛰기 시작하거나 어떤 재앙이 한 지방과 주민에게 몰아 닥쳐올 듯한 때에 주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목사는 교회에 금식을 권고할 의무가 있다. 주께서 위험 신호를 보이시는 것은 형벌을 내리실 준비와 무장이 됐다고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에 죄인이 재판관의 자비심에 호소하기 위해서 긴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에 검은 옷을 입고 그 앞에 엎드려 탄원한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겸손한 차림으로 주의 엄격한 형벌을 면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주께 영광이 되며, 사람의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를 위해서도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 또 요엘이 한 말을 보더라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는 관습이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나팔을 불며, 성회를 모으며, 금식일을 정하며, 등등을 명령을 했을 때에(욜 2 : 15-16) 그는 일반적인 관습을 말한 것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백성의 부끄러운 행실에 대한 재판이 정해졌고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고 말하고 죄인들을 불러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라고 했다(욜 2 : 1 참조). 그리고 백성들은 속히 굵은 베와 재를 쓰고 울며 금식하라고 외쳤다(욜 2 : 12). 즉, 여호와 앞에 엎드려 외적인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사실 당시에는 굵은 베와 재가 그것을 잘 나타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이 요구할 때에는 모임과 울음과 금식과 기타 유사한 행동이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29 이것은 사람이 자기를 낮추며 겸손한 태도를 고백하기 위한 거룩한 훈련이며, 따라서 우리는 비슷한 곤란을 당했던 고대인들보다 이 훈련을 덜 이용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운 이스라엘 백성의 교회뿐 아니라(삼상 7 : 6, 31 : 13, 삼하 1 : 12), 요나의 전도밖에 듣지 못한 니느웨 사람들도(욘 3 : 5) 자기들의 슬픔을 금식으로 표시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해서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당신은 이것이 외형적인 의식이며 다른 의식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다고 항의하는데, 그렇지 않다. 금식은 (과거에 항상 유익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훌륭한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채찍으로 징계를 받을 때에 지나친 자신과 태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한층 더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도 금식은 유익한 경고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을 변호하실 때, 금식이 폐지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재앙이 올 때에 금식하라고 하시며 금식과 애통을 연결시키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마 9 : 15, 눅 5 : 34-35)30

 

 

 

18. 금식의 성격

 

그러나 용어의 뜻을 오해하지 않도록 무엇이 금식인가를 정의하겠다. 우리는 금식에 대하여 음식을 억제하며 절제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조금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에 가깝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외에도 다른 종류의 금식이 있다. 즉 하룻 동안 또는 일정기간 동안 다소간 정상적인 생활을 줄이며 보통 때보다 식사를 더 엄격하게 제한하기로 맹세하는 임시적인 금식이다. 이런 금식에는 때와 음식의 질과 양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때라는 것은 금식하는 목적에 적당한 때에 금식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엄숙한 기도를 위해서 금식한다면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음식의 질은, 훌륭한 것을 제거하고 소박한 보통 것으로 만족하며 맛있는 것을 입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에 대해서는, 보통 때보다 적고 가볍게 먹으라는 것이다. 필요해서 먹는 것이지 음식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신, 공로 사상, 위선적인 금식, 사순절 행사 등은 위험한 것이다. 19-21)

 

19. 금식에 대한 오해

 

그러나 과거에 미신이 침입해서 교회에 큰 해독을 끼친 것과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우리는 항상 특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편이 열심히 지키는 금식이 거짓되고 유독한 생각으로 부패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목사들이 극도로 충실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이런 유해한 사상에 몇 번이고 빠지게 될 것이다.

첫째, 목사들은 요엘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고 한 것을 (욜 2 : 13) 항상 권고해야 한다. 즉 마음속의 감화와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와 진정한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진정한 슬픔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금식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이런 일들에 대한 부차적 보조 수단으로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면 금식은 아무 유익도 없다. 사람에게 순진한 마음이 없고 외형과 표징만으로 가장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마음속에는 불경하고 불결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금식을 했으니 하나님을 만족시켰다고 생각한 유대 사람들의 그 위선을 통렬하게 공격했다. "이것이 주께서 택하신 금식이냐"고 했다(사 58 : 5-6의 융합). 그러므로 위선적인 금식은 무익하고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가증한 짓이다.

이와 비슷하고 철저하게 피해야 할 해악은, 금식을 공로가 있는 행위나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경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금식 자체는 무해 무익하며 그 원래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면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행위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할 것 없이 그 자체만으로 필요한 행위들과 금식을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미신이다. 옛날 마니교도들이 이런 망상을 했다. 그들을 반박하면서 어거스틴은, 금식은 오직 내가 열거한 목적들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하며, 이런 목적과 관계될 때에 한해서 하나님께 인정된다고31 분명 하게 가르쳤다.

셋째 오류가 있는데, 이것은 그다지 불경건하지 않지만 역시 위험한 오류이다. 가장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인 듯이 금식을 엄격하고 엄밀하게 지키라고 요구하며, 세상 사람들이 금식을 실행하면 어떤 고상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금식을 과도히 찬양하는 것이 이 셋째 오류이다. 이 점에서 나는 미신의 씨를 뿌리며 또한 그 후에 일어난 압제의 원인을 제공한 고대 저술가들의 죄를 전적으로 용서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들의 글에는 금식에 대한 건전하고 현명한 발언들이 간혹 있지만, 그 후에 금식을 가장 중요한 덕 중의 하나로 만드는 지나친 찬사에 자주 부딪치게 된다.

 

 

 

20. 교회사에서 금식은 타락했다

 

그 때에는 벌써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은 이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에게 특별한 봉사를 한다고 생각했고 목자들은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32 해서 권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심으로써 복음은 사람의 사상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교훈이란 것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마 4 : 2). 그런데 (이미 명백한 논거에 의해서 여러 번 논박된)이런 순전한 망상이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금식하지 않으셨다. 매년 금식하라는 법을 정하실 생각이 있었다면 자주 금식하셨을 것이나 한 번밖에 하신 일이 없으며,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준비하신 때였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본받게 하시기를 원하셨다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금식하셨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자기를 본받게 하려고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경탄할 만한 예를 보이려고 하셨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이유는 모세가 여호와의 손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에 금식한 이유와(출 24 : 18, 34 : 28) 다르지 않았다. 모세에게서 기적이 나타난 것은 율법의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복음이 율법보다 못하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 기적을 빠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 그를 본받는다는 구실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그런 모양의 금식을 제정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예언자들과 조상들은 모든 경건한 행사에 대해서 극진한 열의가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모세의 금식을 본받은 사람은 없었다. 엘리야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행했다고 한 것은(왕상 19 : 8),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버린 율법을 회복하는 사명을 그가 받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도움이 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동이라고 해서 금식을 정당화한 것은 미신이 가득찬 잘못된 열성이었다.33

그러나 금식하는 방법도 놀라울 정도로 각양 각색이었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 전기 제 9 권에서 인용한 카시오도루스의 기록에 남아 있다. 로마에서는 3주일간 금식했는데, 일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금식이 계속되었다. 일리리아와 희랍에서는 6주간, 다른 곳에서는 7주간이었으나 이따금씩 중단되기도 했다. 택하는 음식도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빵과 물만 먹었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야채를 첨가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생선과 닭고기를 끊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34 어거스틴도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서한에서 이 차이를 언급했다.35

 

 

 

21. 금식 기간에 사악한 방종에 빠졌다

 

그후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일반 사람들의 그릇된 열성에 주교들의 무능과 훈련 부족 그리고 그들의 지배욕과 전제적인 엄격주의가 겹쳤다. 무서운 사슬로 양심을 결박하는 악법이 제정되었다. 육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모독적인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오류의 극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단 하나의 비행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철저하게 어리석은 금욕의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우롱하기 시작했다. 가장 훌륭한 진미를 먹으면서 금식을 찬양했다. 다음에는 어떤 진미를 먹어도 만족해하지 않는다. 금식 기간같이 음식이 풍부하고 종류가 많고 맛이 단 때가 없다. 그들은 이런 음식과 사치한 장식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금식 기간에 다른 때보다도 더욱 배불리 또 추악하게 먹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 요컨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경배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에 모든 진미를 풍성하게 먹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최악의 불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돼지기름이나 썩은 고기를 검은 빵과 함께 조금이라도 먹는 것이다. 제롬은 그의 시대에 이런 어리석은 짓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기름을 먹지 않기 위해서 각지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구해 왔다. 심지어 자연 법칙을 어기고, 물을 마시지 않는 대신에 달고 비싼 음료를 만들게 하여 잔으로 마시지 않고 조개 껍질로 마셨다고 했다.36 그때에 소수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악한 것을 지금은 모든 부자들이 행하며, 그들이 금식하는 목적은 진미를 더욱 호화롭게 먹으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한 일에 대해서 나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 마디만 말하겠다. 로마 카톨릭주의는 금식 문제에서나 권징의 다른 부분 어디에서도 바른 것, 성실한 것, 질서가 잘 잡힌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칭찬할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듯이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성직자 독신 제도는 유해한 새로운 제도다. 22-28)

 

22. 성직자들의 권징과 그 타락

 

이제부터 교회 권징의 둘째 부분 즉 특히 성직자들에게 적용되는 부분을 논하겠다. 이것은 고대 감독들이 자신들과 자기 계급에 부과한 교회법에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성직자는 사냥, 도박, 환락 등에 빠지지 말고 고리 대금이나 장사도 하지 말고 난잡한 무도회에도 참석하지 말라는 등등이다. 이런 교회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 교회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벌칙도 첨가했다. 감독이 이 법에 따라 자기에게 속한 성직자들을 다스리며 그들로 하여금 의무를 지키게 하도록, 성직자들을 다스리는 권한이 각 감독에게 주어졌다. 이런 목적으로, 매년 순시하며 종교 회의를 열어서 직책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고하고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죄에 따라 벌을 주었다. 감독들은 각 지방별로 매년-초기에는 매년 두 번씩-회의를 열고 누가 직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가를 판정했다.37 성직자들에 대해서 너무 가혹하거나 너무 난폭한 감독이 있으면 성직자들은 종교 회의에 호소할 수 있었다. 성직자 한 사람만이라도 불만을 말할 수가 있었다. 죄가 있는 사람에 대한 가장 엄중한 처벌은 면직시키는 것과 성찬 참가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구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폐회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 회의의 날짜를 정했다.38 세계적인 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고대의 모든 소집장이 증명하는 것과 같이 황제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9

이런 엄격한 제도가 실시되는 동안은 성직자들은 자기들의 모범과 행동에 나타난 것 이상을 신자들에게서 말로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에 대해서 보다 자신들에 대해서 훨씬 더 엄격했다. 또 이와 같이 일반 사람들은 이를테면 더 온유하고 관대한 규율로 다스리면서, 성직자들끼리는 서로 더욱 엄격하게 책망하며 다른 사람들 보다 자기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다.

이 모든 권징이 폐물이 됐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이는 오늘날 이 계급보다 더 방종하며 방탕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한 노골적인 방종한 생활을 전세계가 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고대의 전통이 완전히 매장된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들이 일종의 그림자로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가 고대의 관습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원숭이의 흉내가 사람이 이성과 계획으로 하는 일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크세노폰의 글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즉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상의 법규에서 추악하게 타락했으며 엄격한 생활을 버리고 나약해지고 사치에 빠졌으면서도 그 수치를 숨기기 위해서 이전의 의식들을 조심스럽게 지키더라는 것이다. 고레스 때에도 아직 금주와 절제의 기풍이 왕성해서 코를 풀 필요가 없었고 또 코를 푸는 것을 수치라고까지 생각했었는데, 후손들 사이에서는 코를 풀지 말라는 것이 하나의 종교적 관습이 되었고 탐식으로 인해서 생긴 (썩을 정도가 된) 콧물을 들이 삼키는 것을 허락했다. 그래서 고대의 교훈에는 술잔을 식탁에 들고 오는 것을 불법이라고 했으나, 후대에는 술에 취하여 들려 나갈 정도로 취하는 것을 용인했다. 하루에 한 번만 먹으라는 법이 있었다. 이 훌륭한 후계자들은 이 법을 폐지하지 않고 다만 주연을 정오부터 자정까지 계속하였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하루 갈 길을 다 갈 때까지는 먹지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법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를 피하기 위해서 하루 길을 두 시간으로 단축시키는 것이 용인되었고 또 관습이 되었다고 했다.40 카톨릭교가 거룩한 교부들과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타락한 규정들을 내세울 때마다, 크세노폰이 이야기한 예는 어떤 화가도 그 이상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 만큼 그들의 가소로운 모방을 충분히 비난할 것이다.

 

 

 

23. 사제 독신제는 성경에 배치된다

 

그들은 사제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41 한 가지 일에서만은 사정없이 냉혹하고 엄격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음행이 횡행하면서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나 자기들의 추악한 독신 생활을 믿고 모든 범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또 이런 금지는 그들의 모든 전통이 얼마나 크게 유해한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런 금지 때문에 교회는 착하고 유능한 목자들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죄악의 시궁창을 교회 안에 끌어들였으며 많은 영혼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확실히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닌 일체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불경건한 횡포를 가한 것이었다. 첫째, 주께서 각자의 자유에 맡기신 일을 사람이 금지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었다. 둘째, 이 자유를 침범하지 말라고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며 주의시키셨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바울이 여러 구절에서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기를 원했다는(딤전 3 : 2, 딛 1 : 6)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바울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세에 결혼을 금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있으리라고 단언하고 또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마귀라고(딤전 4 : 1,3) 한 것 보다 더 강력한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혼을 금하는 것은 마귀의 교훈이라고 한 것은 한 예언이요 성령의 신성한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성령께서는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서 처음부터 교회를 무장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는 몬타누스와 타티아노스파와 엔크라티스파와 기타 이단자들에 대한 이 선고를 부정함으로써 깨끗이 피한 것같이 생각한다. 이단자들만이 결혼을 정죄하고, 자기들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제 계급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만 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2 마치 이 예언이 처음에 저 이단자들에게서 실현되었으나 자기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또는, 그들은 결혼을 모든 사람에게 금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결혼을 금지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이 유치한 궤변을 들을 가치가 있는 것같이 행동한다. 마치 어떤 폭군이 도시의 일부분만을 부당하게 압박하는 법률은 부당한 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24. 결혼을 금지하고 영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사제들이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는 표식이 있어야 한다고 항변한다. 이는 사제들은 어떤 장식으로 탁월해야 된다는 것을 주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사도가 선한 감독의 완전한 모범을 묘사했을 때 필요한 조건으로서 다른 은혜와 함께 감히 혼인도 요구했으므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고 교회의 모습을 더럽힌다고 비난한다. 나는 그들이 이 말씀을(딤전 3 : 2, 딛 1 : 6)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안다. 즉 첩을 가진 사람은 택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43 또 나는 이것이 새로운 해석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지만 전후 관계로 보아서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해석이다.44 바울은 즉시 감독과 집사들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을 지시했다(딤전 3 : 11). 바울은 결혼을 감독의 덕의 하나로 치며, 카톨릭 교회는 결혼을 교회 제도에서 용인할 수 없는 죄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런 일반적인 비난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결혼을 교회법에서 육의 불결과 오염이라고 불렀다.45 어떤 곳에서 이런 것을 만들었는가를 각각 잘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보셔서 자기와 교회와의 신성한 연합의 모양이 되게 하셨다(엡 5 : 23-24,32). 결혼의 존귀성에 대해서 이보다 더 훌륭한 찬사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영적 은혜의 형상이 비치는 것을 불결하다느니 오염되었다느니 하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25. 여기에 반대하는 성경적 이론을 반박한다

 

그런데 그들의 금지 규정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백하게 상반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호할 자료를 성경에서 찾는다.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집행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순결하고 티없는 몸으로 성물을 다루기 위해서 아내와 따로 자야 했다(삼상 21 : 5이하 참조). 그러므로 훨씬 더 고귀하고 매일 집행하는 우리의 신성한 의식들을 결혼한 사람이 집행한다는 것은 심히 부적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복음 선포와 레위족의 제사장직이 똑같은 일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딤전 2 : 5) 그 완전한 순결로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원형46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모습을 죄인이 모든 점에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윤곽이라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들은 성소에 접근할 때 인간의 관습 이상으로 몸을 정결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상징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하늘 심판대의 모형인 장막에 나타나서 백성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조정자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사와 제사장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사도는 결혼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귀히 여겨야 하며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한다(히 13 : 4). 그리고 사도들 자신이 몸소 결혼함으로써 결혼은 아무리 훌륭하고 거룩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을 증명했다.47 바울은 그들이 아내를 가졌을 뿐 아니라 데리고 다녔다고 증언한다(고전 9 : 5).

 

 

 

26. 고대 교회와 독신주의

 

그러므로 그들이 이 장식적인 정절을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면서 선전하고 다녔다는 것은 무섭도록 파렴치한 행위였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거룩했던 고대 교회에 큰 치욕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이 사도들을 무시한다면(사실 그들은 가끔 사도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감독 계급의 결혼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결혼에 찬성한48 모든 고대 교부들에게는 무엇이라고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고대 교부들은 주의 성례전을 합당하게 집행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성물에 대한 추악한 모독을 장려했다는 말인가? 니케아 회의에서 독신 생활을 요구하자는 선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언제든지 미신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런 자들은 무슨 신기한 것을 생각해서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 자기 아내와 동거하는 것이 정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선언한 파프누티우스의 의견이 채택되었다.49 그러므로 교부들은 여전히 결혼을 신성한 일로 인정했으며 결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직책 수행에 어떤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27. 독신주의의 후기 발전

 

그 다음에 독신 생활을 미신적으로 숭배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순결을 광적으로 찬양하는 시대였고, 대개가 순결에 비교할 만한 다른 덕성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을 정죄한 것은 아니나 그 위엄을 많이 떨어뜨렸기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은 완전성을 추구하는 열의가 부족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제가 되는 사람에게 결혼을 금하는 교회법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독신자가 아니거나 또는 부부의 합의로 동침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면 사제에 임명하지 않는다는 법이 생겼다. 나는 이런 규정들은 사제 계급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는 듯했기 때문에 고대에 많은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의 논적들이 고대의 관습을 근거로 삼는다면, 나의 첫째 대답은 사도 시대와 그후 수백년 동안 감독들이 자유로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딤전 3 : 2). 사도 자신들과 그들을 계승한 가장 권위 있는 목자들은 아무 문제없이 이 자유를 이용했다. 우리는 더욱 중요하고 더욱 오랜 시대의 교회를 본받아야하며, 그때 칭찬을 받으며 관례가 됐던 일을 불법이니 불미하다느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순결을 극단적으로 갈망하고 혼인을 싫어하기 시작한 시대에도 사제들에게 법으로 독신을 요구한 것은 독신 생활 자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기혼자보다 독신자를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들은 독신 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무리하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음행에 대해서는 심히 엄한 벌을 내렸으나 결혼한 사제들에 대해서는 사직을 명령했을 뿐이다.50

 

 

 

28. 독신 제도하의 폐해

 

그러므로 이 새로운 압제를 지지하는 자들이 독신 제도의 변호의 구실을 고대에서 찾을 때마다, 우리는 그 고대 사람들이 생각한 정절을 그들의 사제들에게서 회복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간음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제거해야 하며, 고귀한 침소를 더럽힌 사람들이 각종 정욕에 빠졌으면서도 아무 벌도 받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방종을 억제하던 규율을 다시 살려야 하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교회를 더럽혀 온 가장 부끄러운 악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그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들이 이런 요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유에 맡긴 일과 교회에 대한 유용성에 의존하고 있는 일을 의무라고 주장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충고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직자들에게 독신 생활의 족쇄를 채우는 교회법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의 원수들이 고대의 이름으로 사제들의 거룩한 결혼을 훼방하는 그 철면피를 식자들에게 폭로하려는 것이다.

저술이 남아 있는 교부들을 본다면, 제롬을 제외하고는51 그들이 자기 생각을 말할 때에 아무도 결혼의 존귀성을 악의로 공격한 사람이 없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크리소스톰이 한 찬사만으로도 족히 만족하리라 믿는다. 그는 순결을 특별히 찬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결혼을 추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을 보라. "제 일급 정절은 성실한 순결이요, 두 번째는 충실한 결혼 생활이다. 그러므로 둘째 종류의 순결은 결혼 생활의 깨끗한 사랑이다."52

 

 

 

제 13 장

 

맹세 :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맹세의 본질 : 맹세에 대한 일반적 오해. 1-7)

 

1. 타락과 여러 가지 위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매우 귀중한 피의 값으로 교회의 자유를 사셨건만 그 교회가 잔인한 압제에 눌리며 산더미 같은 전통에 거의 압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 사람의 개인적 광태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일을 허락하신 것도 정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경시하는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이 지운 짐을 모두 지고도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 자기만이 부담할 짐을 더 많이 찾아내며 자기의 함정을 팜으로써 더욱 깊은 곳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열심으로 맹세를 만들어 내어서는 공통된 사슬 위에 덮고 엄한 의무를 첨가했다. 우리는 소위 "목자"들이 교회를 마음대로 지배하며 악법으로 가련한 영혼들을 옭아매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킨 것을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이것과 관련된 이 다른 악을 여기서 함께 논함으로써 세상이 그 자체의 패악한 성질에 따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보조 수단들을 항상 힘껏 방해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적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맹세의 폐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은 이미 제시한 여러 가지 원리를 회상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첫째로 가르친 것은 사람의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훈련하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 율법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1 또 우리는 주께서 우리가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지 않게 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올바른 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복종에 포함시키셨다고 가르쳤다.2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가식된 예배 행동을 아무리 우리가 기뻐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곧 판단할 수 있다. 또 확실히 주께서는 친히 여러 구절에서 그런 행동들을 명백하게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심히 미워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서 떠난 맹세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맹세는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맹세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맹세는 어느 정도로 구속력이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 "맹세"라고 부른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상대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그들에게 갚을 의무가 있는 것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정성스러운 행동으로 상대해야 할 하나님 자신에게 맹세한 것은 마땅히 훨씬 더 엄밀하게 지켜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상하게도 미신이 모든 시대에 그 세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판단이나 생각도 없이, 심지어 혀가 돌아가는 대로 즉시 하나님에게 맹세를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무례하게 우롱하는 미련한 짓들, 때로는 어리석고도 해괴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 불손한 짓을 흉내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원래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난 수백 년 동안 이것은 가장 흔히 보는 악행이었다. 각처에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꿈에서 생각난 것이면 무엇이든지 열광적으로 맹세했다. 이 점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가를 나는 악의를 가지고 과장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세히 이야기하지도 않겠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맹세를 논의하는 것은 결코 공연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겸해서 말해 두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2. 우리가 맹세하는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맹세가 합당하며 어떤 맹세가 나쁜 것인가를 실수 없이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⑴ 누구를 상대로 맹세하는가? ⑵ 맹세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⑶ 어떤 의도로 맹세하는가?

첫째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셔서, 아무리 사람의 눈에 훌륭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자의적 숭배일지라도3(골 2 : 23) 일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우리 자신이 조작한 모든 자의적 숭배를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승인하는 경배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리라는 증거가 없는 일을 우리의 마음대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다 죄가 된다는(롬 14 : 23) 바울의 교훈은 모든 행동에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할 때에 해당한다. 바울은 음식을 구별하는 문제를 논했는데, 만일 그런 가장 사소한 일에서도 믿음이 분명한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실패하거나 과오가 될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를 무엇보다도 중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맹세에 관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경계할 것은, 우리가 경솔한 짓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양심의 확신이 없으면 결코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솔한 짓을 할 위험성이 없으려면, 우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한 일과 무익한 일에 대한 명령을 받아야 한다.

 

 

 

3. 맹세하는 사람

 

맹세 문제에서 생각해야 할 두 번째 점에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헤아려야 하며 우리의 소명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축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나 자기의 소명과 상반되는 일을 맹세하는 사람은 경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는데 그 은혜를 멸시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의 수중에 두셨으므로 우리는 자기의 힘을 믿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 약속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이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맹세는 합당치 않다고 한 오렌지 회의의 결정은 참으로 옳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가 그에게서 받은 선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4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어떤 것은 공정한 입장에서 주시지 않는 것이므로 바울이 가르친 대로(롬 12 : 3, 고전 12 : 11), 사람은 받은 은혜의 분량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 맞도록 분량을 정하셨으므로 우리의 맹세도 그 분량에 맞도록 하라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 된다. 예를 들어,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음모꾼들의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했는데(행 23 : 12), 그 계획이 악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사람의 생사를 자기들의 힘으로 좌우하려고 한 그 경솔은 용서할 수 없다. 입다는 경솔한 열성으로 경솔한 서원을 하였으며, 그 미련한 행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았다(삿 11 : 30-31). 이 종류의 맹세에서 독신주의는 첫째 자리를 차지할 만한 만용이다. 사제와5 수도사와 수녀들은 자기의 연약함을 잊어버리고, 독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평생 독신을 계속하고 따라서 그런 맹세를 하라는 교훈을 그들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받았는가? 그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신 "사람의 독거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창 2 : 18)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에는 심히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이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절제의 은사는 필요한 경우에 제한된 기간만 허락되는 편이 더 많은데, 그들은 어떻게 감히 이 일반적인 소명을 자신 있게 일평생 벗어버리는가?

이런 완고한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신 6 : 16, 마 4 : 7)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에 역행하는 것, 하나님께서 현재 주시는 은사를 우리의 것이 아닌 듯이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할뿐만 아니라, 일종의 독신 생활을 굉장히 찬양하기 위해서 감히 결혼을 "오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제정하는 것을 자기의 존엄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으며(창 2 : 22),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선언하셨고(히 13 : 4),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혼인식에 가셔서 처음 기적으로써 경의를 표명하기까지 하셨는데(요 2 : 2,6-11), 이 모든 사실을 그들은 무시한다.

그들 자신의 생활이(그것을 그들은 "천사 같다"고 부름으로써 더할 나위 없는 파렴치함을 드러내지만) 독신 생활과 순결은 문제가 다르다는 훌륭한 증거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그 밖의 더 악하고 더 부끄러운 것들에6 비교함으로서 천사들에게 큰 해를 끼치고 있다. 또 사실 자체가 명백하게 반박하는 논증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기를 과신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고 교만하게 행동할 때에 주께서 보통 내리시는 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숨은 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힐 정도이므로 차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우리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일체 맹세하지 말라는 것에는 반대할 여지가 없다. 한 가정의 가장이 처자를 버리고 다른 짐을 지겠다고 맹세하며, 공직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선출을 받고도 사사로운 시민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소명에 어긋나는 맹세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멸시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한 것은 설명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고 우리가 만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예속시키셨다. 따라서 우리를 도와야 할 외부적인 사물에 우리 자신을 예속시켜 그 구속을 받는다면, 그런 일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봉사가 되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일을 지킴으로써 자기를 얽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에서 우리가 해방되고 면제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성을 피하려면 우리는 주께서 그리스도 교회 안에 제정하신 경륜에서7 결코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4. 의도에 따라 맹세를 분류하다

 

이제 셋째 점을 말하겠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맹세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속마음이지 겉모양이 아니므로 같은 일도(마음에 가진 목적이 변하는 데 따라) 어떤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떤 때는 심히 불쾌하게 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행동 자체가 거룩한 것같이 생각해서 마시지 않기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어떤 나쁘지 않은 목적으로 맹세한다면 아무도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올바른 맹세가 될 수 있는 목적은 네 가지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 중의 두 가지는 과거에 관련시키고 다른 두 가지는 미래에 관련시키겠다.

과거에 속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나타내는 맹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겠다는 맹세다. 전자는 감사의 실천이요, 후자는 회개의 실천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타향 생활에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야곱의 서원은(창 28 : 20-22) 처음 종류에 속한다. 고대에 경건한 왕이나 지도자들이 의로운 전쟁을 하려고 했을 때에, 승리를 얻는다면 화목제를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도 한 예가 된다. 또는 어떤 중대한 곤란이 있을 때에 주의 구원을 빌면서 이런 서원을 했다. 시편에서 서원을 말하는 구절들은(시 22 : 25, 56 : 12, 61 : 8, 116 : 14,18)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어떤 재난이나 어려운 병이나 그 밖의 위기에서 구출해 주신 때에는 이런 맹세가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엄숙한 표시로서 서원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와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잘 알려진 예를 하나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탐식의 죄로 어떤 비행을 저질렀을 때에 자기의 무절제를 징벌하기 위해서 얼마 동안 맛난 음식을 먹지 않기로 하는 것과, 자기를 더욱 엄격하게 얽어매기 위해서 맹세하는 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보편적인 법을 제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맹세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허락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자유에 맡기기만 한다면 이런 맹세는 허락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5. 미래에 관한 맹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래에 관한 맹세는 우리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드는 것도 있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하는 것도 있다.

가령 달리 나쁘지 않은 일에 관해서 자기가 직접 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없는 것을-그런 특수한 죄에 대한 경향성을 - 자기에게서 발견한다고 할 때, 맹세를 함으로써 그것을 일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결코 미련한 일이 아니다. 예컨대 사람이 어떤 몸의 장식이 위험하다고 생각나면서도 거기에 대한 욕심의 유혹을 느낄 때, 자기에게 굴레를 씌움으로써 즉 그것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경건에 필요한 의무를 잊어버리거나 게을리 할 때에는 맹세를 해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태만을 떨쳐버리는 것이 나쁜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이 두 가지 맹세가 일종의 초보적인 훈련이란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힘이 부족할 때에 보조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무지하고 미숙한 사람들에게는 유익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목적 중의 하나를 위한 맹세는, 특히 외형적인 일에 관한 것은 허락된다. 단, 그런 맹세도 하나님의 승인으로 지지를 받고 우리의 소명과 일치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한정되어야 한다.

 

 

 

6.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하여

 

이제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맹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세례받을 때 하는 것이며 교리 문답과 성찬 참가로 확인된다. 성례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으로,8 이 계약에 의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영생을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순종할 것을 주에게 약속한다. 이 맹세의 형식 또는 적어도 그 요점은, 사탄을 물리치고 몸을 바쳐 주를 섬기며 주의 거룩한 계명에 순종하고 우리의 육의 악한 욕망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롬 1 : 3,14 참조). 성경이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요구되는 이 맹세가 거룩하며 유익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며 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러한 복종을 지속할 수 없지만 그런 사실도 지장이 되지 않는다. 이 규정은 은혜의 언약에9 포함되어 있으며 이 언약에는 죄의 용서와 성결의 영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하는 약속에는 용서와 도움을 구하는 기원이 결합되어 있다.

개개의 맹세를 판정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표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 맹세의 성격을 틀림없이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룩한 것이라고 단언한 맹세들도 매일 실행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효나 시기에 대해서는 감히 어떤 지시도 할 수 없으나, 나의 충고에 순종하는 사람이면 신중하고 일시적인 맹세만을 할 것이다. 빈번히 맹세를 너무 많이 하게 될 경우, 바로 그 반복으로 인해서 맹세의 종교적 성격이 전적으로 떨어지게 되며 맹세는 미신으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영구적인 맹세로 자기를 얽어매는 사람은 그 맹세를 실행하기 위해서 많은 곤란과 피곤을 느끼거나 오래 계속하는 맹세에 지쳐 맹세를 깨뜨리고자 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7. 사악한 맹세

 

그런데 과거 수백 년 동안 맹세에 대한 큰 미신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배인 듯이10 금욕을 맹세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하겠다고 자기를 얽어매며 또 어떤 사람은 일정한 날에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해서 그런 날이 다른 날보다 특별히 거룩한 것처럼 망상을 했다. 훨씬 더 유치한 일들을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맹세했다. 거룩한 곳으로 기원 순례하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여 종종 걸어가거나 반나체가 되어 여행하였는데 이처럼 피곤케 함으로써 더 많은 공로를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믿을 수 없는 열정으로 얼마 동안 추구한 이런 일들을 앞에서 말한 표준들에 비춰 검토한다면, 허무하고 무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불경건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육은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경배를 가장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치명적이며 저주받은 생각들이 있다. 위선자들은 이런 미련한 짓을 하고 나서 특별한 의를 얻었다고 믿으며 경건 생활을 전적으로 외형적인 일에 두고 또 그런 일에는 그다지 주의를 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을 모두 멸시한다

 

 

 

(수도사들의 맹세와 수도원 생활의 쇠퇴. 8-10)

 

8.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

 

개개의 형식을 열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수도사들의 맹세는 교회의 공적 판단으로 인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매우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간단하게 논하겠다.11

우선, 현재의 수도원 제도를 역사가 오래된다는 이유로 옹호하는 사람이 있을 듯한데, 옛날의 수도원 생활은 훨씬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엄격하고 어려운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갔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리쿠르구스의 법으로 살던 스파르타 사람들과 같이 수도사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그들의 규칙은 더욱 엄격했다고 한다. 그들은 땅에서 자고, 마시는 것은 물뿐이었으며, 먹는 것은 빵과 야채와 풀뿌리였고, 맛있는 것이라곤 주로 기름과 콩이었다. 사치한 음식이나 육신의 쾌락을 일체 단절하였다. 만일 안식이 있는 증인들이-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바실리우스와 크리소스톰과12 같은 목격자들이-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이야기는 과장된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런 예비적 훈련으로 수도사들은 더 큰 임무를 위해서 준비했다. 수도원 학교들은 성직자가 될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신학교였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사람들은 모두 수도원에서 양성된 후에 감독이 되었고 그밖에도 같은 시대의 여러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들이 이 점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어거스틴도 그의 시대에 교회에 성직자들을 공급한 것은 대개 수도원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가 카프라리아 섬의 수도사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말이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결심을 지켜 끝까지 지속하기를 나는 권합니다. 어머니인 교회가 여러분의 수고를 요구할 때에 너무 기쁘게 맡을 것도 아니요 나태한 마음으로 거절할 것도 아닙니다. 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한가한 생활 때문에 교회의 요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인 교회의 해산을 도우려는 선한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분 자신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는 사역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만일 수도원을 버린 사람들을 성직자로 선택하게 되면 그들 자신의 몰락을 초래할 뿐 아니라 성직 전체에도 심한 치욕과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적당하고 우수한 사람들을 성직자로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피리를 잘 불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한 음악가가13 된다고 하지 않는 한 나쁜 수도사가 훌륭한 성직자가 된다고 우리를 우롱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들에게 이런 파멸적인 교만을 조장하며 성직0湄涌?이렇게 중대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필요한 극기심이 있더라도 필요한 훈련이 없으면 좋은 수도사라도 좋은 성직자가 되지 못합니다."14 이런 구절들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은 보통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 규칙에 의해서 교회를 다스리는 준비를 하며 이 중대한 직책에 더 적합하고 유능하도록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수도사들의 대부분은 무식했으므로 그들이 모두 이 목적을 달성했다거나 이런 목적을 가졌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적격자들만이 선택되었다.

 

 

 

9. 수도원 생활에 대한 어거스틴의 묘사

 

어거스틴이 초기 수도원의 형태를 묘사한 중요한 곳은 둘이다. 카톨릭 교회의 품행에 관하여(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라는 책에서 그는 마니교주의자들의 중상모략에 반대하여 그 직책에 대한 거룩함을 방어하였으며, 수도사의 행위에 관하여(On the Work of Monks)라는 제목이 붙은 다른 책에서는 수도원을 타락시키기 시작한 일부 수도사들을 공격한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가르친 것을 요약하겠다. "그들은 이 세상의 유혹들을 멸시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공동 생활을 하며, 기도와 독서와 토론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만하게 뽐내거나 고집으로 무질서하거나 질투로 인하여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으며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모두 자기 손으로 먹을 것을 벌어들이면서 마음에 항상 하나님을 생각한다. '원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일해서 얻은 수익을 갖다 주고, 원감들은 모든 일을 주도 면밀하게 관리하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원장에게 보고한다.

이 아버지들은 그 행실이 거룩할 뿐 아니라 거룩한 교리와 모든 일에도 탁월하다. 그들은 '아들'들을 가르치되 교만한 태도가 없다. 큰 권위로 아들들에게 명령하며 아들들은 기꺼이 순종한다. 하루가 끝날 무렵, 아직 식사를 하기 전에 각각 자기 방을 나와 아버지 앞으로 모인다. 한 아버지 앞에 적어도 3,000명이 모인다"(이것은 주로 애굽과 동방에 대한 말이다). "그 다음에 건강에 충분할 정도로 음식을 먹으며, 비록 검소한 보통 음식일지라도 과식하지 않도록 자기를 억제한다. 이와 같이 고기와 포도주를 끊어 욕망을 길들일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도 끊는다. 어떤 권위 있는 사람들은 이 둘째 종류의 음식은 '깨끗한 것'이라고 하여 항상 어리석고 부끄러운 변호를 하며, 고기와는 아주 구별된다는 이유로 그러한 음식에 대한 비열한 욕망을 묵인한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벌고 또 음식을 절제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 많은데, 먹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남은 것을 모을 때에도 주의하지만 나눠 줄 때에는 더욱 주의한다. 일부러 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남은 것은 결코 보관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한다." 그 다음에 그는 밀라노와 다른 곳에서 실지로 본 내핍 생활을 회상하면서 말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무에게도 견딜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권하지 않으며 거절하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자기는 약해서 따라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사랑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라는 말씀을(딛 1 : 15) 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음식을 마치 부패한 것처럼 배척하지 않고 욕망을 억제하며 형제애를 유지하도록 정성껏 경계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라는 말씀을(고전 6 : 13) 잊지 않는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먹지 않는 강한 사람들이 많다. 흔한 음식, 사치하지 않은 음식으로 살고 싶다는 소원만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그들은 건강한 동안은 절제하지만, 병이 나서 건강상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음식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없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많으나 포도주 때문에 더러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허약한 형제들이나 포도주가 없이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인자하게 포도주를 준다. 허망한 미신 때문에 포도주를 거절하는 미련한 사람들에게는 더 거룩해지기 전에 더 허약해지지 않도록 형제와 같은 태도로 충고한다. 그들은 결심으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만 육체의 연습은 일시적이란 것을 알고 있다. 특히 형제우애를 지켜 음식과 말과 옷과 안색이 모두 사랑에 합치하도록 힘쓴다. 한 사랑으로 모이며 한 사랑을 위해서 노력한다. 사랑에 어긋나는 것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악한 일로 생각한다. 사랑에 반대하는 사람은 축출하고 피한다. 사랑을 비웃는 자는 하루도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15

저 거룩한 분은 이런 말로 옛날의 수도원 생활을 그린 것 같다. 그의 말은 길었으나 여기에 넣기로 했다. 내가 여러 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수집한다면 아무리 간결하게 만들어도 이보다 길어지겠기 때문이다.

 

 

 

10. 수도원 생활의 초기와 후기를 비교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논거를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다. 다만 고대 교회에는 어떤 종류의 수도사들이 있었으며, 그때의 수도원 생활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간단히 말하고자 할뿐이다. 그렇게 하면 현명한 독자들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현재 수도원 제도를 지지하는 자들이 역사가 장구하다고 주장하는 그 파렴치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고 합당한 수도원 생활을 우리에게 그려 보인 어거스틴은 주의 말씀이 우리의 자유에 맡긴 일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일체 배제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런 일들을 무엇보다도 엄격하게 요구한다. 옷의 빛깔이나 모양과 음식의 종류와 그 밖의 너절하고 무의미한 의식들에 관한 규정을 일점 일획이라도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인정한다. 어거스틴은 수도사들이 남의 덕으로 놀고먹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짓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의 시대에 질서가 잘 잡힌 수도원에서는 이런 예가 없었다고 한다.16 현대의 수도사들은 무위 도식하는 것을 그들의 성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명상 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며 천사들에게 가까이 근접한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에게서 나태한 생활을 박탈한다면 과연 명상 생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어거스틴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한 경건 생활의 의무를 실천하며 돕는데 불과한 수도원 생활을 요구한다. 그가 형제적 사랑을 중요시하고 거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소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교회 전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음모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인가?17 그의 의도는 다른데 있다. 수도사들의 모범이 교회의 단결을 보존하는 데 어떤 광명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에서 현대 수도원 생활의 성격은 너무도 다르며, 반대된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이보다 더 다른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꾸준히 열성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경건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조작해서는 그것을 명상하며 모든 사람들 보다 더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

 

 

 

(수도원의 완전성을 말함은 잘못이다. 11-14)

 

11. 수도원 생활은 상태가 완전한가?

 

만일 그들이 이것을 부정한다면, 나는 왜 그들은 그들의 계급에만 완전하다는 칭호를 붙여 위엄을 더하고 하나님의 모든 소명에서는 그 칭호를 빼앗느냐고 그들에게 묻겠다. 나는 그들의 궤변적인 답변을 안다.

수도원 생활은 그 자체 내에 완전성을 포함했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8 그들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선전을 할 때,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한 사람들을 올가미로 잡으려 할 때, 자기들의 특권을 주장하려 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기들의 위신을 높이려고 할 때에 그들은 완전 상태에 있다고 자랑한다. 추궁을 당해서 이런 헛된 교만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그 때에는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는 등의 속임수를 쓴다. 아직 도달하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들보다 완전을 더욱 추구하는 상태에 있노라고 한다. 동시에 세상에서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것만이 천사적이고 완전하며 모든 허물이 제거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허위를 이용해서 그들은 심히 유리한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제심을 몇 권의 서적에 묻어 두었다. 이것은 용인할 수 없는 우롱이요 허위란 것을 어느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에, 그들은 수도원 생활을 완전성을 얻는 길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것을 돌리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겠다. 그들이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수도원 생활과 다른 생활 방식을 구별하는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경에 한 마디도 인정한 일이 없는 이런 제도에 이렇게 큰 영예를 돌리며,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소명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고귀한 칭호로 장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생활에 비해서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을 어느 누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친히 자신의 증거로서 찬양하신 모든 생활 양식보다도 이 위조품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한 신성모독이 아닌가?

 

 

 

12.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생활 법칙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그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고 한 나의 말이 중상모략이라고 마음대로 주장해 보라.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자신을 훌륭하게 고발한다. 자기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보다 더 무거운 짐을 졌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복수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등의(마 5 : 33이하) 복음의 권고를 그들은 지키겠다고 약속하지만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권고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근거를 어느 고대인에게서 찾으려는가? 이런 생각을 한 고대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한 마디도 빼지 않고 모두 순종해야 된다고 고대인들은 이구 동성으로 선언했다. 이 훌륭한 해석가들이 그리스도께서는 권고하셨을 뿐이라고 상상하는 이 여러 가지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명령하셨다고19 고대인들은 서슴지 않고 꾸준히 가르쳤다.20 그러나 앞에서 우리는 그들의 해석이 가장 유해한 오류란 것을 말했으므로, 현대 수도원 생활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마땅히 배척해야 할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에 명령하신 공통된 생활 법칙보다 더 완전한 원칙을 고안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21 이런 견해를 근거로 삼아 세운 것은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3. 마태복음 19장 21절의 의미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완전성에 대한 다른 논의를 끌어들이며 이것을 가장 강력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의를 물은 청년에게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 : 21).

나는 그들이 그대로 행하든 행하지 않든, 우선은 행한다고 가정하겠다. 그들은 모든 소유를 버렸으므로 자기들은 완전하게 되었노라고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곧 완전성이라고 하면, 사람이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은(고전 13 : 3) 무슨 뜻인가? 사랑이 없으면 완전성은 그것을 가진 사람과 함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이것은 어떤 완전성인가? 여기서 그들은, 그것은 완전성의 유일한 행위가 아니라 최고의 행위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높은 소리로 반대한다. 이런 재산 포기가 없어도 주저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골 3 : 14)라고 하였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 의견 충돌이 없으며, 그 한 편이 사람의 완전성은 모든 소유를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런 포기가 없어도 완전성은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 : 21)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면 누구를 상대로 하신 말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22 어떤 일을 해야만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한 청년이 묻는다(마 19 : 16, 눅 10 : 25 참조). 행위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마 19 : 17-19).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율법은 그대로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패가 없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여호와의 율법에 있는 옛 교훈과는 다른 어떤 생활 방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의의 교훈이라고 확증하시며, 동시에 자신이 어떤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르쳐 백성에게 율법을 버리라고 선동하는 듯이 전하는 거짓말을 반박하신다.

어떤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청년에게는 헛된 자신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교훈은 다 지켰노라고 대답한다(마 19 : 20). 그가 도달했노라고 자랑하는 그 경지에서 무한히 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자랑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는 최고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같이 율법에는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 준수를 영원한 구원의 길이라고 부르는 사실만 보아도 이 점은 알 수 있다. 청년은 의를 완수했노라고 담대하게 대답했지만, 그 의를 향한 그의 전진이 얼마나 적은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단점을 찾아 낼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고 마음이 거기에 매여 있었다. 그가 자기의 숨은 상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상처를 건드리신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라고 하신다(마 19 : 21). 그가 자기 생각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다(마 19 : 22).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을 일체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염병같이 생각해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욕심 많은 부자 청년에게 그의 전재산을 버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야심가에게 그의 모든 영예를 버리라고 하며, 방탕한 사람에게 그의 모든 쾌락을 버리라고 하고, 파렴치한 사람에게 그 정욕을 채우는 수단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고에 감동되지 않는 양심은 이런 방법으로 그 특유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깨닫도록 각성시켜야 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특별한 예에 일반적인 해석을 붙여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재산 포기와 완전성을 동일시하신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헛된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지나친 자기 만족에 빠진 청년에게 그의 상처를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노라는 그의 주장은 잘못이며 아직도 그는 완전한 순종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교부들이 이 구절을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서 자발적으로 빈곤해진 체하는 기풍이 생겼고 땅에 속한 물건을 일체 버리고 벌거숭이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생각이 나타났다.23 그러나 선하고 온순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한 해석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에 대해서 의문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14. 수도원들의 분파주의

 

그러나 교부들에게는 후대에 생긴 것과 같은 완전 사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수도원 궤변가들이 이중의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조작한 사상이다. 수도원 생활을 세례에 비교하며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둘째 세례라고 선언하는 모독적인 교리는 교부 시대에는 아직 없었다. 교부들이 이 모독 행위를 진심으로 미워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거스틴은 고대 수도자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하며 그들은 완전히 사랑에 전념했다고 한다.24 그러나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랑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로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실이 알려 준다. 왜, 특이한 직분을 가지며 개인적으로 성례를 집례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자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연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시작한 비교를 계속해서 곧 끝낸다면 그들과 고대 수도사들과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고대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살았지만 따로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성례에 참가하며 성회에 출석하며 신자의 일원으로 처신했다. 현대 수도사들이 사적인 제단을 따로 설치한 것은 단결의 유대를 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 전체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 사이에 평화와 사랑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일반 성직 제도를 멸시한다. 현재 있는 수도원은 모두가 분파주의자들의 소굴로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며 신자들의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이 분리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종파명을 취했다. 바울이 극도로 저주한 일을(고전 1 : 12-13, 3 : 4) 그들은 파렴치하게 자랑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혹은 이 선생 혹은 저 선생을 자랑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눈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대신에 베네딕트파라고 자랑하며, 어떤 사람은 프란체스코파, 어떤 사람은 도미닉파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이런 이름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붙이고는 보통 그리스도인과 다른 체하니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법이 아니고 무엇인가?25

 

 

 

(고대의 주장과 수도원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 신약성경에 있는 과부와 여집사는 수녀가 아니었다. 15-19)

 

15. 수도사들의 행실이 타락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고대 수도사들과 현대 수도사들의 차이점은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도사가 아닌 수도원 제도에 대해서 말했으며, 소수 사람들의 생활에 포함된 허물들이 아니라 수도원 생활 그 자체에서 분리할 수 없는 허물들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을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품행에 큰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분명하다. 즉 그들같이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계급도 없으며, 파쟁과 미움과 당파열과 음모가 맹렬한 곳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욕을 억제해서 노골적인 추태를 부리지 않는 것을 성적 정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몇 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등가가 아니라 정결한 성역이라고 할 만한 수도원은 열에 하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그들의 음식은 얼마나 검소한가? 그들은 우리에 있는 돼지들같이 뚱뚱하다. 내가 그들을 너무 혹평한다는 불평이 생기지 않도록 그만 말하겠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몇 가지 점에는 고발자로서 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사태를 아는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수도사들이 대단히 훌륭하게 정절을 지켰다고 증거하는 동시에 부랑자 같은 수도사들도 있었다고 불만을 말한다. 이 부랑자는 간교한 속임수로 단순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며 순교자들의 유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추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뼈를 순교자의 유골이라고 속여 팔고 다녔고, 그밖에도 비슷한 여러 가지 비행으로 수도사 계급의 수치를 샀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덕을 닦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이, 수도원에서 타락한 자들보다 더 악한 인간도 본 일이 없다고 한다.26 그가 지금 살아서, 거의 모든 수도원에 이런 통탄할 여러 가지 죄악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 죄악들이 거의 수도원이 넘칠 정도로 가득한 것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나는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아는 사실만을 말한다.

그러나 이 비난이 모든 수도사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과 규율이 수도원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시행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무위 도식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있었다. 그와 같이 현대 수도사들은 거룩했던 고대에 비하여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무리 가운데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의 큰 무리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 있다. 그들은 멸시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괴롭힘을 당하며, 심지어는 아일랜드 격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 사이에는 착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학대를 받는 때도 있다.27

 

 

 

16. 고대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의문

 

고대와 현대의 수도원 생활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목적을 달성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두건을 쓴 친구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고대 교회의 예를 도입하는 것은 거짓이며, 양자 사이에는 원숭이와 사람과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려고 한다.

동시에 어거스틴이 칭찬한 고대의 형태에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는 아주 엄격한 규율을 외형적으로 실천한 그들에게 미신적인 점이 없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들에게는 지나친 외식과 집착된 열성 또한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28 모든 소유를 버리고 땅에 속한 모든 근심에서 떠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건한 가장이 모든 탐욕과 야심과 육의 다른 정욕을 버리고 일정한 직업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가정을 다스리는 일에 전심하는 편을 하나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신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은둔해서 명상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를 미워하는 것처럼 사막이나 광야로 도망하고 주께서 특별하게 명령하신 의무들을 저버리는 것은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다. 수도원 생활에 다른 악한 일이 없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교회에 무익하고 위험한 선례를 도입했다는 것은 확실히 작은 죄악이 아니었다.

 

 

 

17. 수도사들의 맹세, 특히 독신 생활에 대한 맹세

 

그러면 오늘날 수도사들을 더 훌륭한 계급에 가입시키는 맹세의 본질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들은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거짓 경배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데, 나는 위에서 말한 증거를 가지고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29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이나 승인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어떤 생활 방식이든지 생각해 내는데, 나는 그것은 경솔한 것이며 따라서 불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옹호할 근거가 없으며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14 : 23)이기 때문이다.30

그뿐 아니라 현대 수도원 제도에 포함된 여러 가지 비뚤어지고 불경건한 예배 행위에 자기를 얽어맬 때, 나는 그들이 몸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악령에게 바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독적인 의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더럽혔을 뿐이었는데,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은 자녀를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제물로 바쳤다고(신 32 : 17, 시 106 : 37) 말하게 허락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두건이 붙은 옷과 무수한 미신으로 몸을 둘러싸는 수도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은 어떤 맹세를 하는가? 그들은 마치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미리 하나님에게서 해방의 언약을 받은 것같이 하나님께 영원한 순결을 약속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이 맹세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으므로(마 19 : 11-12) 이 특별한 은사가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라. 육의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언제든지 주의 도움을 받으라. 주의 힘을 받을 때에만 그들은 저항할 수 있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그들에게 제시된 대책을 멸시하지 말라. 절제의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혼하라고 권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고전 7 : 9).

내가 "절제"라고 하는 것은 음행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몸을 순결하게 가질 뿐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외형적인 방종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타오르는 정욕도 경계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께 몸을 완전히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절제의 맹세로 자기를 매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관습이라고 말한다.31 물론 나는 이 관습이 고대에 허락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가 완전 무결해서 그 때에 한 일은 모두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후에 저 융통성이 없는 엄격주의가 잠입해서, 일단 맹세한 후에는 돌이킬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점은 키프리아누스가 분명히 표현했다. "처녀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했으면 겸손하고 정결하게 또 아무 거짓 없이 그 처지에 머물러 있어라. 이렇게 하면서 강하고 견고한 태도로 순결의 보상을 기다려라, 그러나 계속하고 싶지 않거나 계속할 수 없으면 죄를 짓고 불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좋다."32 지금 그들은 절제의 맹세를 이런 공정한 방법으로 시정하려고 하는 사람을 온갖 비난으로 괴롭힌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대의 관습에서 훨씬 많이 떠났다. 맹세를 지킬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 대해서 완화책이나 사면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결혼해서 육의 무절제를 고치는 것은 음행으로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것보다 더욱 흉악한 죄라고 파렴치하게 선언한다.

 

 

 

18.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 있는 과부들의 경우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며 이런 맹세는 사도 시대에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힘쓴다.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가 결혼한 과부들은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딤전 5 : 11-12) 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대해서 헌신과 봉사를 약속한 과부들은 영구적인 독신 생활을 약속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후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자체가 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해 모두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몸으로서 결혼의 멍에에 매이지 않아야만 맡은 일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33 그러나 맹세를 한 후에 재혼을 생각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은 정욕에 끌려 그리스도를 배반한다고 한 바울의 말은 당연하다(딤전 5 : 11). 그는 첨가하는 의미로, 교회에 약속한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한 처음 약속까지 어기고 취소한다고 첨부한다(딤전 5 : 12). 처음 약속에는 각자 자기의 소명을 완수해야 된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혹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체면을 잊어버리고 예의에는 일체 관심도 없으며 온갖 방종과 불결에 빠지고 그 방탕한 생활은 전혀 기독교 신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을 매우 기뻐한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하겠다. 그 때에 교회 일을 보도록 허락을 받은 과부들은 영구히 독신을 지키겠다는 조건을 수락했다. 그 후에 그들이 재혼했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염치를 버리고 기독교 신자답지 못한 무절제한 사람이 되었다(딤전 5 : 13)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한 약속을 어겼을 뿐 아니라 경건한 여성의 위치에서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 그들이 독신 생활을 선언한 데에는 그들이 하려는 일과 결혼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들의 소명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독신을 서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째, 육의 가시 때문에 고통하거나 불결한 생활에 빠지는 것보다, 차라리 결혼을 선택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그들이 맹세로 매여 있었다는 생각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바울은 상식적으로 위험성이 없을 나이를 지정했다. 특히 한 번 결혼한 것으로 만족하고 이미 모범적인 절제 생활을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독신을 서약하는 데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맹세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라고 오해하며 절제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이 경솔하게 그런 맹세를 하기 때문이다.

 

 

 

19. 수녀들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바울의 이 구절을 수녀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가? 여집사들을 임명한 목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의 노염을 풀라는 것이 아니었고 여생을 무위 도식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빈민들에 대한 교회의 사업을 도우며 자선 사업에 열의와 정성과 힘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독신을 서약한 것은,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어떤 경배를 드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신으로 있는 편이 임무 수행을 위해서 더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들은 청년기의 초기나 성년기에 이런 맹세를 하고 후에 자기들이 뛰어내린 벼랑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때에 거룩하고도 안전한 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자들의 두 가지 논점을 너무 추궁하지 않기 위해서, 60세 미만의 여성의 독신 서약을 받는 것은 불법이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사도는 60세가 된 부인들만을 허락하며(딤전 5 : 9), 젊은 부인들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라고 권고한다(딤전 5 : 14). 그러므로 처음에는 12세에, 다음에는 20세에, 후에는 30세에 서약을 허락하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어리고 경험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소녀들에게 혹은 속임수로, 혹은 폭력과 위협으로 이 저주의 굴레를34 씌우는 때도 있으니 이것은 더욱 허용할 수 없다.

나는 나머지 두 맹세는35 공격하지 않고자 한다. 단지 한 마디만 말하겠다. 이 맹세들의 현상을 보면 여러 가지 미신이 붙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맹세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우롱하게 되도록 맹세 자체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소한 점까지 일일이 혹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반박으로 만족하겠다.36

 

 

 

(불법적이고 미신적인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 20-21)

 

20. 허용할 수 없는 맹세도 지켜야 하는가?

 

어떤 종류의 맹세가 합당하며 하나님이 받으시는가를 나는 분명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무지하고 양심이 나약한 사람들은 어떤 맹세를 싫어하거나 또는 옳지 않다고 보면서도 맹세한 의무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어기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죄가 더 많지 않은가 해서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여기서 도와주어야 한다.

모든 불안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나는 불법적이거나 부적절한 생각에서 나온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대해서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 사이의 계약에 있어서 계약의 상대자가 우리에게 대해 구속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약속만이 우리를 구속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특히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우리의 양심의 증거가 있을 때에 한해서 바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 : 23)고 한 원칙은 변함이 없다. 바울이 한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가납된다고 확신하는 믿음은 모든 천한 일의 근본이며 따라서 만일 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 일은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런 확신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시도할 수 없다면 혹 무지해서 어떤 일을 경솔하게 시작했을 경우 그 과오를 깨달았는데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솔하게 한 맹세는 이런 종류에 속하므로 아무 구속력이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 이미 증명한 바와37 같이 그런 맹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운 것이다. 불필요한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는 것은 공연한 짓이다. 내가 보기에는, 경건한 양심을 안정시키고 모든 불만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는 이 한 가지 증명만으로도 넉넉할 것이다. 즉 순결한 원천에서 나오지 않고 합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행위는 모두 하나님께서 부인하시며 또 그런 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금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하는 것도 금하신다. 따라서 오류와 미신에서 생긴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도 없으며 우리도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21. 수도원 맹세를 파기하는 문제

 

이 설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수도원을 떠나 존경할 만한 생활로 돌아선 사람들을 지지하며 악인들의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수도원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파약과 거짓 맹세의 중죄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과 교회에 그들을 매는 소위 "끊을 수 없는" 유대를 끊었다는 것이다.38 그러나 나는 사람이 확인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취소하실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유대도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오류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그들이 매여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지금은 진리를 알고 광명을 얻었으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매여 있던 우리를 그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면(갈 3 : 13), 사탄이 속이는 그물에 불과한 저 외형적인 족쇄로부터는 더욱 우리를 구출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의 광명으로 조명하시는 사람들을 미신으로 짊어지게 된 모든 굴레에서도 풀어 주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풀려난 사람들이 처음부터 독신 생활에 부적당한 사람들이었다면 변호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며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킬 수 없는 맹세가 반드시 그 영혼을 멸망에 빠뜨린다면, 사람은 그런 맹세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제의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마 19 : 11-12) 절제의 맹세를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설명했다.39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이 말한다. 모든 수도원에 불결한 일이 만연하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안다. 개중에는 비교적 단정하고 점잖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순결한 것은 아니다. 불결의 악은, 억압하고 제한하더라도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본성을 거슬러 자기들에게 없는 것을 탐내며, 주께서 그들의 힘에 미치는 범위 내에 두신 구제책을 멸시하고, 무절제의 병을 그들이 극복할 수 있다고 완고한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을 무서운 실례로 처벌하신다. 그들을 완고하다고 했는데, 결혼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받고 그 대책으로 주께서 결혼을 허락하심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멸시하며 또 결혼을 멸시하겠다는 맹세로 자기를 묶는 것은 완고하다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 14 장

 

성례1

 

("성례"란 말의 뜻 :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 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다른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의 시행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성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간단하고도 적절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식이고, 우리편에서는 그 표식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식으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 정의를 택하든지 간에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와 뜻은 차이가 없다.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라고 가르친다.2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내용을 더 분명하게 잘 설명한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너무 간단해서 애매모호한 곳이 있다. 교육이 부족한 사람은 많이 속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말을 더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더 충실한 표현을 만들기로 했다.

 

 

 

2. "성례"라는 말

 

성례란 말을 고대인들이 이런 뜻으로 사용한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번역자가 희랍어의 (비밀, 신비)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에, 특히 신성한 사물을 의미할 때에는 반드시 "성례"라고 번역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 1 : 9)라고 되어 있다. 또,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엡 3 : 2-3)이라고도 되어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골 1 : 26-27)고 되어 있다. 디모데 전서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되어 있다. 그는 "비밀(secret)"이란 말을 쓰면 위대한 일을 낮추게 되는 듯해서 그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을 "sacrament"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교부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 라틴 사람들이 "sacraments"라고 한 것을 헬라 사람들은 "mysteries"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말의 뜻이 꼭 같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들에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디선가 이 점을 말한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sacraments'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3

 

 

 

3. 말씀과 표징

 

그래서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제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며 말하자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 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붙들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신체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4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은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나 믿음이 없이 속삭이는 것, 소리에 불과한 것, 마술사의 주문같이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을 성별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아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 행위였다. 그들은 신부가 축성경( the formula of consecration)을 중얼거리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뜻도 몰라도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교리에 관한 것을 조금도 얻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라틴어로 말했다. 후케는 미신이 팽창해서, 그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쉰 소리로 속삭여야만 축성이 잘된다고 믿게 되었다.

성례의 말씀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훨씬 다르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이 되리라, 말씀의 힘이 아니면, 물이 몸에 닿아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그 위대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말씀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말씀 자체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뒤에 남는 힘은 서로 다르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10 : 8). 따라서 사도행전에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고 하였으며(행 15 : 9), 사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3 : 21).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 : 8), 이 믿음의 말씀에 의해서 세례가 성별되고, 깨끗게 하는 힘이 세례에 있게 되는 것임이 확실하다."5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우리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 사도들이 따라서 행한 일 그리고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가 지킨 일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어떤 표징을 주실 때에 그 표징과 교훈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교훈이 없으면 우리의 감각 기관은 단순히 표징만을 볼뿐이어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이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단순하지 않은 미묘한 내용이 없는 딜레마로 우리와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안다면 우리는 그 뒤에 오는 성례에서 새로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알지 못한다면(성례의 힘은 전적으로 그 말씀에 있으므로) 성례전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정부 문서나 그 밖의 공문서에 찍는 인장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다. 반대자들은 이 비교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 자신이 분명히 할례를 "인"6이라고(롬 4 : 11) 부르기 때문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하는 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성례는 이 약속에 인을 친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약속들 자체를 보면 모두 서로 확인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분명한 것일수록 믿음을 지탱하기에 적당하다.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 이 점에서 성례가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그것이 약속을 우리 앞에 사생화를 그리듯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성례와 문서에 찍는 인장은 다르다고 하는 반대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7 두 가지가 다 이 세상 물질로 된 것이므로, 성례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인을 찍어 확인하기에 불충분하며 인장은 보통 무상한 일에 관한 군주들의 법령에 찍어 확인하는 것이라고 반대론은 구별한다. 그러나 신자는 눈으로 성례를 볼 때에 눈에 보이는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명상에 의해서(내가 비유적으로 암시한) 여러 단계를 밟아 성례 안에 감취어 있는 숭고한 신비를 향해서 올라간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주께서는 그의 약속을 "언약"(창 6 : 18, 9 : 9, 17 : 2)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약의 "표"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비유를 얻을 수 있겠다. 돼지를 잡을 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잡는 행위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돼지는 아무 내면적 또는 고상한 신비가 없이 잡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손을 서로 잡게 되는 때가 많은데, 바른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해서 말로 발표한 언약일지라도 말이 선행할 때에는 이런 언약의 표징에 의해서 그 언약의 법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우리가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선생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미련한 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8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9

성례를 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빠른 비유를 쓸 수도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에는 기둥으로 받친 것같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 또는 성례를 거울에 비교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0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에 의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 지이다. 7-13)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옳지 못한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성례가 악인들에게도 제공되지만 악인들은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한 정죄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똑같은 논법을 쓴다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서도 그것을 배척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를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복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문서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공문서에 찍힌 인장이 군주의 것이며 그의 뜻을 확증하는11 것인 줄 알면서도 진짜 인장을 우롱하며 비웃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주하기까지 한다. 내가 위에서 한 비교는 이 두 가지에 다 해당되므로 더욱 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 깨닫는다. 마치,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며 구원을 얻으라고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뜻을 전달하면서 말씀의 효력이 성례에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12

따라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성례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성례에 포함시킨다. 예컨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 : 27),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 : 12-13). 그러나 그가 성례를 악용하는데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것들을 허무하고 차디찬 그림자와 다름없이 간주한다. 바울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에서 역사하는 것을 불경건하고 패악한 위선자들이 사악하게 아무리 억압하며 애매 모호하게 하고 감추려 할지라도 성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어디서나 또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참으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영 또한 성례가 약속하는 것을 여전히 계시하며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옳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인장과 같다고 단정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항상 사용하는 논리는 너무나도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이 이미 좋은 것이라면 더 좋아질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또 꾸준히 믿어 동요 않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3 그들은 주께서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눅 17 : 5) 좋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믿음을 가진 듯이 확신에 찬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그런 믿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막 9 : 24)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그들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었고 불신을 제거하면 더욱 좋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양심이 어떤 논법보다도 그들을 더 잘 논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인임을 자백한다면(좋든 싫든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들 자신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빌립이 내시에게 그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행 8 : 37) 말한다. 믿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세례가 믿음을 굳게 할 여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은 자기의 마음 한쪽 구석에 믿음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어떤 명사의 말에 자기는 배우면서 늙었다고 했다.14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아무 진전 없이 늙는다면 우리는 심히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의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항상 성장해서 마침내는 완전히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엡 4 : 13). 그러므로 사도행전 8장 37절의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열렬한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무슨 일을 성의와 진심으로 하는 것을 "마음을 온전히 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시 119 : 10), "내가‥‥‥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 : 1, 138 : 1) 등등이다. 그러나 거짓되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에는 보통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15라고 책망하신다(시 12 : 2).

여기서 그들은, 만일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성령을 주신 것은 헛수고였으며 성령이야말로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이 있으며 또 그 일을 한다고 첨가하여 말한다. 나는 물론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고유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의 보고를 알게 되고, 성령의 광명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감각이 둔해서 영적인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 말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한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16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관해서는(이미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17 내가 이 특수 임무를 성례에 돌리는 것을 독자들은 생각해 내기를 바란다.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해서 그 자체만으로서 믿음을 증진하거나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18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해서,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눈은 햇빛에 의해 보게 되고 귀는 음성의 소리에 의해 듣게 되지만 눈에 빛이 비칠 수 있는 예리한 시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눈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귀가 듣기에 적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코 소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빛을 보는 데 있어서 시력이 하는 일과 우리의 귀가 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 청력이 하는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는 일 즉 믿음을 잉태하고 유지하며 자라게 하고 또 확립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가정하자(이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두 가지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즉 성령의 힘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며, 이 교사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차이는 오직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이렇게 볼 때에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는 반대론도 곧 사라지게 된다. 믿음을 증진시키거나 강화하는 일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면, 믿음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께 부당한 처사가 된다는 반대론이 있다. 우리는 믿음을 강화 증진시키는 일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 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표현이 애매 모호하다고 한다면 아주 명백하게 해 줄 비유를 첨가하겠다. 어떤 일을 하도록 어떤 사람을 말로 설득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의 의견에 기울어지게 하며, 어느 정도 우리의 충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만한 모든 논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 편에 우리의 이론의 가치를 헤아릴 만한 예리한 판단력이 없다면 우리는 헛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또 그에게 배우겠다는 마음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도가 없거나 우리의 성실과 지혜를 신용해서 우리의 의견을 채용할 만한 경향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이론으로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권위를 멸시하는 곳에서는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설득도 별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좋은 특성이 모두 있을 때 우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곧 순종하게 되며 비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신다. 우리들이 귀에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당연히 순종해야 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에 전달한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게 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굳게 서며 더욱 강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 확인을 새김으로써 효력이 나타나게 하실 때이다. 동시에, 빛들의 아버지께서(약 1 : 17) 태양 광선으로 우리 몸의 눈을 비추시는 것같이 성례를 통해서 일종의 중간적인 광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 성질이 외적인 그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말씀을 "씨"라고 부르셨다(마 13 : 3-23, 눅 8 : 5-15). 황폐해지고 버려 두었던 땅에 씨가 떨어지면 죽어 버리지만 잘 가꾼 땅에 심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고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면 모래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씨에서 곡식이 나서 자라며 결실하는 것같이 씨와 말씀에 같은 생각이 적용된다면, 말씀에서 믿음이 생기고 또 그것이 자라며 완성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여러 구절에서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가를(고전 2 : 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는 성령의 일꾼으로서 일하노라고 자랑한다(고후 3 : 6). 마치 불가분의 유대로 성령의 능력이 그의 전도에 결합되어 사람의 마음을 내면적으로 조명하시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사역자를 농부에 비교하는데, 이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말씀하려고 함이다. 농부들은 땅을 애써 가꾼 다음에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한다(고전 3 : 6-9).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심은 씨가 하늘의 복으로 자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구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352-353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 : 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 : 12)였음을 기억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엡 2 : 11). 여기서 사도는 약속의 표를19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환유법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에 빵과 또 다른 음식을 주시며 태양으로 세계를 비추시고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 그러나 빵과 해와 불도 주께서 이런 도구들로써 그의 복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다. 성례의 한 가지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앞에 놓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아니 우리에게 약속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대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유용하시는 일꾼이다. 피조물을 우리의 유익의 원인이라고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성례와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향해서 비약해야 한다.

 

 

 

13. sacramentum의 단어

 

어떤 사람들은 sacramentum이란 말에서 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이름난 문필가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했지만 "표징"에 해당하는 뜻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 말은 군인이 입대할 때에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병들이 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며20 군대 복무를 고백한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21 그들은 다른 비교를 덧붙임으로써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로마 사람은 토가(겉옷의 일종)를 입고 희랍 사람은 팔리움(겉옷의 일종)을 입었으며 로마에서 각 계급에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같이(원로원 계급을 기사 계급과 구별한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 기사 계급을 평민과 구별한 반지), 우리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22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faith)"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유추법을 따른 것이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맨툼(sacramentum)"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대인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즉 주께서는 "사크라맨타(sacramentum의 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 : 16, 겔 37 : 27).

그러나 나는 이런 자세한 점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분명한 논거로써, 고대인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오직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23 우리는 반대자들이 외적인 표징에서 이끌어 낸 비교들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점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이 둘째 점에 적용한다면 이 비교들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성례를 제정하신 용도와 목적대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며 우리의 교리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이 신비들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성례 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14-17)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례의 힘을 약화하며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그들과는 반대로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힘을 성례에 주셨다는 것은 성경의 어디를 읽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는다.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찾으라고 하며 하나님에게서 그들을 점점 분리시켜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허망한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율법의 성례는(즉 현재 그리스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 우리가 죽을죄로 장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의로우며 은혜를 준다고 궤변가들의 각 파는 이구 동성으로 가르친다.24 이런 생각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유해한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과거 수백년 동안 넓은 지역에 이 생각이 만연해서 교회에 큰 손실을 입혔다. 확실히 그것은 마귀적인 생각이다. 믿음과 관계없는 의를 약속함으로써 이 관념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둘째, 성례를 의의 원인이라고 함으로써25 원래 땅에 붙고자 하는 경향이 심한 사람의 가련한 마음을 이 미신에 옭아매어,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을 믿고 안심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 두 가지에 대한 긴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도록 우리가 그 악한 것들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약속과의 관련이 없이는 성례에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 약속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제시하는 동시에 불신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고 사람이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것 이상의 것을 성례를 통해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마치 성례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처럼,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의 보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으며, 그것은 성례라는 인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복음 선포에 의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표징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보이는 표징이 있어도 진정한 성화가 없을 수 있다고26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그의 다른 글에도 있는 것처럼,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 입고 성례를 받는데까지 이를 때도 있으며 성화의 생활에까지 이르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 상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공통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둘째 상태는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다.27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어거스틴이 자주 말한 것과 같이 성례와 성례의 본체와의 구별이 생긴다. 이 구별의 의미는 진상과 외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성례는 그 의미하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고28 한 것은 두 가지가 분리되는 데 대해서 말한 것이다. 또 유대 사람들에게 대해서 쓴 것도 같은 의미에서이다. "성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나 은혜 곧 성례의 힘은 공통적이 아니다. 그와 같이 중생의 씻음 곧 세례는(딛 3 : 5) 지금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 머리와 함께 중생하게 되는 은혜 자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29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주의 만찬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성단에서 받아먹고 죽으며 또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의 떡 조각이 유다에게 독이 된 것은 고가 악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선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30 조금 뒤에, "이 본체로 이루어지는 성례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성례가 어떤 곳에서는 매일 거행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먹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는다. 성례의 본체는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할뿐 아무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또 첨부한다. "먹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즉 보이는 성례가 아니라 성례의 힘에 도달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내적으로 먹는 사람이지 외적으로 먹는 사람이 아니다. 이로 씹는 사람이 아닌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31 이점에 대해서는 각처에서 받는 사람의 무자격에 의해서 성례가 그 실체에서 분리되며 허망하고 무용한 형태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눠 가짐으로써 우리는 유익을 얻으며 따라서 그만큼 성례에서 유익을 얻는 것이다.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만일 이것이 간단해서 그 뜻이 다소 애매 모호하다면 나는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와 구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성례를 의와 구원의 원인이라고 유식한 주장을 하는 피터 롬바르드의 오류는 더욱 용인할 수 없다.32 우리는 사람이 교묘하게 만들어 내는 모든 원인을 버리고 이 한 가지 원인만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성례가 제시하는 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그렇다면 악인들은 배은 망덕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쓸모 없게 만들고 폐기하느냐고 혹 물을 것이다. 내 말은 성례의 힘과 진실성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와 선택에 의존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여전히 견고하며 그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제시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의해서 성별된 상징이 실지로 그 이름같이 되며, 그 자체의 힘을 유지하는 것을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유익을 받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몇 마디로 잘 해결했다. "만일 우리가 육적으로 받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영적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렇지 못하다."33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에서 어거스틴이 성례를 그 진상에서 분리한다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할 때에도 양자를 동시에 구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적인 표징에 너무 긴밀히 매달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처럼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과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34 그는 여기서 피해야 할 두 가지 과오를 지적한다. 첫째 과오는, 표징을 받을 때 그것을 주신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태도를 취하며, 우리의 반대로 그 비밀한 뜻을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킴으로써 표징이 우리에게 대해서 전혀 결실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과오는, 우리의 마음을 보이는 표징보다 더 높이 비약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표징에서 오는 것 인양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익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게 만드신다. 외적인 표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유인해 간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유익을 얻지만, 표징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면 그 가치는 부끄럽게도 완전히 말살되는 것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액체들은 그것을 받을 그릇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부어도 흘러 없어질 뿐이다. 그릇 밖에는 온통 묻을지언정 그릇 속은 텅 빌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대인들이 성례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조금 과장해서 기록한 것에 있어서 비슷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성례에는 숨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난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35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자나 언약의 비준을 전하는 담보물이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성례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사자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지 않고, 다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성례는 담보물과 표이므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 확증한다. 성례가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특히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영의 능력의 임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집행할 때에 결실이 없고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표징으로 약속하며 표현하시는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신다. 표징은 그 창시자이신 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자체의 효력을 가졌다. 여기서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께서는(그들이 말하는) 그의 고유한 능력으로 행동하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을 외적인 상징들에 맡겨 버리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든, 그 도구가 그의 최초의 활동에 아무런 손상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성례에 대한 이 교리가 가르쳐질 때에 성례의 위엄이 높이 칭찬을 받고 그 효과가 분명하게 알려지며 그 가치가 풍성하게 선포된다. 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용을 지켜서 성례에 돌리지 않을 것을 돌리거나 성례에 속한 것을 빼앗는 일이 없게 된다. 동시에 칭의의 원인과 성령의 능력이 그릇이나 수레36 안에 있듯이 물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저 그릇된 교리가 제거되고, 어떤 사람들이 간과하는37 저 최고의 능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즉 목사가 설명하며 외적인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취하시며 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이 점을 현명하게 경고한다. "어떻게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성결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성례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신다. 또한 거기에는 보이는 성례의 모든 결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한 성화가 없이는 이 보이는 성례들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38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18-20)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 성격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어떤 때에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으로 나타내신다.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 : 9, 3 : 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 : 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생명나무는 나무였고 무지개는 무지개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가 새겨진 후에는 새로운 형태가 생겼고 전과 다른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허망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도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 곧 땅이 홍수로 인하여 멸망치는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읽는다. 그러므로 어떤 이론가가 우리의 믿음의 단순성을 우롱하려고 저렇게 많은 색깔은 맞은편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자연의 주인이며 주재자이신 하나님 곧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도록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우매함을 우리는 비웃는다.39 하나님께서 해와 별과 땅과 돌에 이런 기념의 뜻을 인치신다면 이 모든 자연물은 우리에게 성물이 될 것이다. 은 덩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은 덩어리는 자연 상태에 있을 뿐이지만 관인이 찍힐 때에 은전이 되며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건에 말씀으로 표를 하셔서 단순한 자연물이던 것이 성물이 되게 하실 수는 없겠는가?

둘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연기 나는 풀무 속에 있는 빛을 보이셨다(창 15 : 17).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을 때, 양털은 이슬에 젖게 하시고 땅은 마르게 하시며 또 그와 반대로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양털은 마르게 하셨다(삿 6 : 37-40). 히스기야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일영표에 있는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 : 9-11, 사 38 : 8). 이런 일들은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므로 역시 성례였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연합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40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맨 처음에 종들을 위해서 경건을 위한 일정한 행사를 제정하셨다. 그 후에 사탄이 이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다.41 그래서 이방인들이 여러 가지 비밀 종교에 입교시키는 의식과 그 밖의 타락한 의식들이 생겼다. 이런 의식들은 오류와 미신이 가득한 것이었지만 사람이 종교를 고백할 때에는 외형적인 표징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런 의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모든 표징이 나타내야 할 진리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회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성한 상징들 곧 진정한 경건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의 그 근본 목적에서 어긋나지 않는 상징들을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성한 상징들은 무지개나 나무와 같이 단순한 표징이 아닌 의식이다. 혹은 여기서 주어진 표징은 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 표징들은, 우리가 위에서42 주께서 오는 은혜와 구원의 증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쪽에는 고백의 표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43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상호 협약이 개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식들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례를 의식이라고 부르며,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키신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경륜에 따라 성례는 각 시대에 맞도록 다양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창 17 : 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결례와(레 11-15장) 희생과 다른 의식들이(레 1-10장) 첨가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마 28 : 19, 26 : 26-28). 나는 교회 전체가 쓰도록 제정된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목사들을 취임시킬 때44 안수하는 것을 성례라고 부르는데 반대하지는 않으나 또한 그것을 정규적인 성례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보통 성례라고 생각하는 다른 행사들의 지위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것이다.45

그러나 저 고대의 성례들은 현대의 성례전들과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을 잡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또는 형상으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인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46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후 1 : 20).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47 산상에서 모세 앞에 제시된 율법대로의 회막과 예배의 하늘 모형(출 25 : 9,40, 25 : 30)도 여기에 속한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고대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동안에 어렴풋이 그를 예시했고, 현재의 성례는 이미 임재하셨던 그리스도를 확증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현을 예시한다. 21-26)

 

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일들은 하나씩 설명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끊어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그뿐 아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이 복된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그들에게 회상시키며 확인하는 표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창 22 : 18), 그 후손에게서 유대인들도 복을 얻으리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후손은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였고(갈 3 : 16),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아담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할례와 아브라함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바울이 가르친 일이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즉 할례는 믿음의 의를 알리는 한 표징이었다(롬 4 : 11). 바꿔 말하면, 그 후손을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시는 일종의 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적당한 기회에 할례와 세례48를 더 자세하게 비교하겠다.

세례와 결례는 그들의 본성이 자신의 부정과 추악함과 오염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추악을 씻어 없애 버릴 다른 씻음을 약속했다(히 9 : 10,14). 이 씻음은 그리스도였다. 우리는 그의 피로 씻음을 받으며(요일 1 : 7, 계 1 : 5), 하나님 앞에 그의 순결하심을 가지고 가서 우리의 추악함을 덮는다.

희생은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49에 대해서 어떤 보속을 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있어서 피를 흘리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충분한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보속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였다(히 4 : 14, 5 : 5, 9 : 11). 그는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그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 : 8).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한 인류의 불순종을 그의 순종으로 말소하셨다(롬 5 : 19).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성례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더욱 완전하게 계시 될수록 성례는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계시하신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얻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은 씻음을, 피는 보속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말과 같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 : 6). 곧 씻으며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도 이 일을 증거하신다. 참으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 : 8) 물과 피는 깨끗하게 하며 구속하는 증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성령은 이런 증거를 우리가 확신하게 만드신다. 이 숭고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온 때에(요 19 : 34)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우리의 성례의 원천이 라고 불렀다.50

우리는 아직도 이 점을 좀더 자세하게 논해야 하겠다. 확실히 성령의 은혜도 시대의 전후를 비교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한복음 7장에서(요 7 : 8-9,38-39) 추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 하에서는 그림자가 있었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말도(골 2 : 17)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도의 의도는 고대에 있었던 은혜의 증거에서 효력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세례와 성만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려고 하시는 것과 같이 고대에는 은혜의 증거로 족장들에게 증명하려고 하셨다. 바울의 의도는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것을 찬양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율법 하의 의식들이 폐지된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러나 우리는 옛 율법과 새 율법의 성례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스콜라 학파의 교리를 완전히 배척해야 한다. (이 교리는 내친 김에 언급할 뿐이지만) 그들은 옛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할 뿐이고 새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의 실재로서51 준다는 듯이 구별한다. 참으로 사도는 조상들이 우리와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고 가르치며, 그 식물은 그리스도라고 설명했을 때에(고전 10 : 3) 신약의 성례에 대한 것과 똑같이 구약의 성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통을 계시한 것을 누가 감히 헛된 표징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또 바울이 다룬 일의 성격상 그의 주장은 분명히 우리편을 지지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빈약한 지식과 기독교의 무의미한 칭호와 외적인 표를 믿고 감히 하나님의 판단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이신 엄격한 태도를 예를 들어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죄악에 빠진다면 그들이 받은 벌이 우리에게도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각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비교가 적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짓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가 금한 은혜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다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성례에서 그 은혜가 같다고 했다. 영혼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특권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했다. 또 그가 다른 곳에서 믿음의 의를 인치는 인이라고 부른 할례에(롬 4 : 11) 돌린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우리의 세례에 돌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현재 성례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받았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례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힘을 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느꼈다. 즉 성례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인치는 도장이었으며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히브리서를 잘 해석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에 의해서는 죄는 속죄되지 않으며 그 옛 그림자들은 의를 위해서 중요하지 않았다고(히 10 : 1) 하는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거기서 논의되는 비교를 무시하고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는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점만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의식들은 아무 진d퓬볕?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고 만 생각했다.52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율법의 의식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효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그들은 항의하는 방법으로, 바울의 글에서 "의문에 속한 할례"에(롬 2 : 29) 관한 말을 인용할 것이다. 의문(仪文)에 속한 할례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하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언명은 할례를 세례보다 훨씬 낮게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롬 2 : 25- 29, 갈 5 : 6, 6 : 15, 고전 7 : 19 참조).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은 말을 세례에 대해서 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바울 자신이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왔을 때 받은 외면적인 씻음은, 만일 마음까지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되지 않고 또 끝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전혀 무시하신다고 말했다(고전 10 : 5 참조). 그 다음에 베드로는, 세례의 실상은 외면적인 씻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양심의 증거에 있다고 했다(벧전 3 : 21).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비교했을 때 손으로 행한 할례를 완전히 멸시하는 것 같다고(골 2 : 11-12)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할례의 위엄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미 폐지된 할례를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는 옛 그림자를 버리고 실체 안에 굳게 서 있으라고 신자들에게 충고한다. 이 교사들은 당신에게 몸에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이미 몸과 영혼에 영적으로 할례를 받았으므로 당신은 실체의 계시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림자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는 실체를 가졌다고 해서 그 모형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조상들 중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이 있었지만 외면적인 할례가 그들에게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반대를 막기 위해서,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즉시 부연하여 말한다(골 2 : 12). 이것은 고대인들을 위해서 할례가 한 일을 지금은 세례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곧 세례에 대한 부당한 처사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그러나 그 다음에 있는 것 즉 유대인들의 의식은 모두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요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것은(골 2 : 17)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최근에 언급한 일이 있다.53 참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히브리서의 여러 장에서 논의된 문제들이다. 동물의 피는 양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하고(히 9 : 12이하),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지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였으며(히 8 : 4-5, 10 : 1),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의식들에서 완전한 것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했으며(히 7 : 19, 9 : 9, 10 : 1), 그 외에도 이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나는 이미 간단하게 말한 것을54 반복한다. 즉 바울이 의식들을 그림자라고 한 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식들의 성취가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때까지 보류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는, 이것은 효력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표시하는 방법에 대한 말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권능과 임재를 신자들의 마음속에 느끼게 만드셨지만,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까지는 모든 표징이 그가 계시지 않은 것같이 그를 예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이 모든 구절에서 바울은 단순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의식만으로 경건이 성립된다고 가르친 거짓 사도들을 상대로 바울은 싸우며,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의식들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만을 말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목적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들은 그 진정한 본연의 의미로 인정되지 않고 사악하고 거짓된 해석으로 왜곡되었다. 그 합당한 사용이 아니라 미신적인 악용이 문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의식은 모든 힘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의미하는 본체가 제거될 때에는 표징이 가진 것도 일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만나를 몸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하실 때에 자기의 말씀을 그들의 유치한 생각에 맞추셔서, 영혼에 영생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그분께서 더 좋은 음식을 나눠준다고 말씀하셨다(요 6 : 27).

그러나 반대론에 대한 더 명확한 대답을 원한다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있는 모든 화려한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지향하지 않는 한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둘째, 그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그가 드디어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의식들은 성취되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의식들이 폐지된 것은 그림자가 태양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이 이상의 논의는 세례와 할례를 비교하기로 결정한 곳으로55 미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간단히 말할 뿐이다.

 

 

 

26. 유사점과 차이점 : 어거스틴의 구별

 

현대의 가련한 궤변가들은 우리의 표징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글에서 성례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읽고 속은 것 같다. 어거스틴의 발언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옛 율법의 성례들은 구주를 약속했을 뿐이나 우리의 성례는 구원을 준다." 여기 있는 표현과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궤변가들은 자기들의 과장된 교리까지 발표했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인들의 글과 상반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한 말의 뜻은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예고했지만 우리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56 파우스트에 대한 반박문에서도 "그들의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약속이었고 우리의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표다."57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들의 것은 그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그를 대표했으나 우리의 것은 이미 오신 그를 임재하시는 것같이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표시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른 곳에서 말했다. "율법과 예언자들에게는 장차 있을 일을 예고하는 성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성례들은 옛날 성례들이 장래의 사건이라고 선포한 것이 이미 나타났다고 증거한다."58 그러나 성례의 본질과 그 효력에 대한 생각을 그는 여러 곳에서 설명했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성례는 표징은 달랐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같았으며 보이는 외형은 달랐으나 영적 능력은 같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표징에 동일한 믿음이 있다. 즉 서로 다른 표징은 서로 다른 말과 같은데 이는 말은 때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며 표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우리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나 그 음료의 물질은 달랐다. 그러므로 표징은 변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반석이었으나(고전 10 : 4)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제단 위에 안치되셨다. 그들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물로 믿고 마셨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는지는 신자들이 안다. 외적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마신 것은 다르다 그러나 내면적인 의미를 보면 그들은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59 또 다른 구절에서, "이 신비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은 외형에 있어서가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반석으로 대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60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61 우리 것은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주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신구약간의 차이에 부합한다. (우리가 고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증인으로 생각해서 자주 인용하는) 어거스틴도 이런 뜻으로 가르쳤다. 즉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셨을 때에 그 수는 더 적으며 의미는 더 숭고하고, 능력이 더 훌륭한 성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이다.62

독자들이 간단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곧 궤변가들이 소위 opus operatum63(행한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것은 거짓일 뿐 이며 성례의 본질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제정하실 때, 모든 것을 빼앗긴 가련한 신자들이 아무것도 성례에 가지고 오지 말고 오직 간구하는 태도만을 가지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례를 받음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이 받는 행동조차 (그들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할 뿐이므로) 그들의 공로로 돌릴 수 없다.

 

 

 

제 15 장

 

세례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징표이다. 1-6)

 

1. 세례의 의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1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이런 목적은 모든 성례2에 공통된 것이라고 이미 가르쳤다). 세례의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차례로 논하겠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에 세 가지 것을 가져다주는데 이제 그것을 하나씩 논하고자 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첫째 것은,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는 (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더 설명하자면)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고 하겠다. 믿는 자는 모두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마 28 : 19, 행 2 : 38).

따라서 세례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와 표식에 불과하며 군인이 그 직업의3 표지로서 사령관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은 사람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막 16 : 16)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2. 세례의 효력은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다음 말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엡 5 : 26). "우리를 구원하시되‥‥‥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 : 5). 그리고 베드로에 의하면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 : 21)고 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며 구원한다거나 물 자체에 깨끗하게 하며 중생하게 하며 새롭게 하는 힘이 있거나 여기에 구원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성례에서 이런 은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의 말 자체가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의 말은 마치 생명의 말씀과 물로 주는 세례를 결합해서, 마치 "우리의 정결케 됨과 성화에 대한 소식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이런 세례를 통해서 그 소식이 인치 듯 확인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곧 이어 베드로는, 이 세례는 육에서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서 온 선한 양심이라고 한다(벧전 3 : 21). 실로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는 정결이지 결코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씻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에 피를 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씻는 진정한 물두멍이라고 확증하는 이 물에 대해서, 물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물의4 힘에 돌리는 사람들의 자기 기만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례의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논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요소와 그 밖의 모든 수단들이 떠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그러나 세례는 과거를 위해서만 받은 것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해서는 마치 전에 받은 세례의 힘이 소진한 것처럼 어떤 다른 성례에서 새로운 속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초기에는 이런 오류 때문에, 생명이 위급하거나 임종시가 아니면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받아야만 일생 동안 지은 죄의 용서를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대 감독들의 글에는 이런 어리석은 경계심을5 공격하는 말이 많다. 언제 세례를 받든지 간에 우리는 일생 동안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세례받은 것을 회고하며 마음을 굳게 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세례는 한 번 받은 것이며 지나간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세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얻었다. 그의 순결은 영원히 풍성하고, 어떤 오점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묻어 버리며 깨끗하게 씻어 버린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앞으로는 마음대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사실은 그런 대담한 짓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은 오직 자기의 죄에 지치고 눌려 있는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것이며, 그들을 일으키며 위로할 것이 있도록 그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고 했다(롬 3 : 25).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만 가련한 죄인들 곧 양심의 가책으로 상처받아서 의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를 지을 기회와 방종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야기시킬 뿐이다.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나는 세례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중생했을 때에 세례만으로 받은 사죄를 세례 후에는 회개와 열쇠의 덕택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6 그러나 이런 생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열쇠의 권한도 세례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세례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죄인은 교회의 활동 즉 복음선포에 의해서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선포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죄의 씻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씻음을 나타내는 표징과 증거는 곧 세례가 아닌가? 그러므로 죄의 사면은 세례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류는 저 고해 성사라는 허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문제는 전에 언급했고 앞으로7 적당한 곳에서 그 논의를 완결하겠다.8 본성이 야비해서 외형적인 사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갖는 인간이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보조 수단을 고안해서 이 결점을 폭로했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세례 그 자체가 고해 성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일평생 고해하라고 권고한다면 세례의 힘도 똑같은 한도까지 확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기의 죄과를 알고 괴로울 때마다 단호하게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유일하고 영원한 죄의 씻음을 받았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세례는 또 다른 유익을 준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는 것과 그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알려 준다. 참으로 사도가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롬 6 : 4). 사도는 이런 말로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분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말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경고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것을 파악한다. 즉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셔서 우리를 그 죽음에 접붙이려 하신다는 것이다(롬 6 : 5).9

가지가 그 접붙인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을 취하듯이,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 6 : 8).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야 한다고(롬 6 : 11) 권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논법을 사용했는데,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장사된 후에 할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어 버렸다는(골 2 : 11-12)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이미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에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른다(딛 3 : 5).10 이와 같이 먼저 죄의 용서와 의의 전가가 우리에게 약속되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개조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약속된다.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이 세례에서 받는 유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임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는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친교를 맺으시고자 하시는 그 연합과 친교의 가장 견고한 유대로서 세례를 공통 분모로 삼으시기 위하여 자기의 몸으로 세례를 성별하셨다(마 3 : 3).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혀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한다(갈 3 : 26-27) 이와 같이 우리는 세례의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그리스도를 세례의 고유한 목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도들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마 28 : 19)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된 것은(행 8 : 16, 19 : 5)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세례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주는 사람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도 같이 불러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것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비할 데 없는 인애에 따라 우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려고 그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도록 우리 사이에 이 중보자를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결과 중생을 위해서, 이를테면 아버지에게서는 원인을, 아들에게서는 질료(质料)를 그리고 성령에게서는 효력을 얻으며 또 분명하게 분별한다. 그래서 요한이 처음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후에 사도들도 그러한 세례를 주었다(마 3 : 6,11, 눅 3 : 16, 요 3 : 23, 4 : 1, 행 2 : 38,41).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이런 중생을 의미했고 "죄의 용서"는 깨끗하게 하는것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는 다르지 않다 : 그 뜻은 출애굽기에서 이 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7-9)

 

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요한의 사명과 후에 사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똑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다르다고 해서 세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교훈이므로 같은 세례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과 사도들은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쳤고 그 점에서 서로 일치했다. 즉 다 같이 회개를 위해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그리스도에게서 회개와 죄사함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다(요 1 : 29). 요한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이며 의로우신 화해자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사도들은 이 고백에 무엇을 덧붙여 말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양자를 구별하려고 애쓴 고대 저술가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권위를 너무 존중해서 성경의 확실성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세례 요한이11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주장한 누가의 말은(눅 3 : 3) 듣지 않고, 요한의 세례에는 죄의 용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겠는가? 어거스틴도 요한의 세례에는 죄를 용서받을 소망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는 실제적으로 용서되었다고 미묘한 구별을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12 누가가 요한은 그의 세례에서 죄의 용서를 약속했다고 분명히 증거하는데 왜 이 표현을 약화해야 하는가?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의 차이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차이는 한 가지뿐이다. 즉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이미 나타나신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눅 3 : 16, 행 19 : 4)는 것이다.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성령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내렸다는 사실은 세례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사도들이 행한 세례도 그리스도의 세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세례도 요한의 세례보다 성령이 더욱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도록 파송되기 이전의 신자들보다 더 많은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행 8 : 14, 17).

나는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고 초대 저술가들이 말한 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행 19 : 3,6) 읽고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은 다음의 적당한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겠다.13

그러면, 요한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마 3 : 11, 눅 3 : 16) 이것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요한은 세례의 종류를 구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그리스도의 인격을 비교한 것이다.

즉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권능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의 혀와 같이 보내신 날에 눈에 보이는 이적으로 나타났다(행 2 : 3). 사도들은 이 이상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었는가? 지금 세례를 주는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가? 그들은 외적인 표징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고, 내면적인 은혜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이 점은 고대 저술가들도 각처에서 가르치며, 특히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누가 세례를 주든 간에 그리스도만이 주재하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14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우리가 이야기한 육을 죽이는 일과 깨끗이 씻는 일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시되었고,1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다(고전 10 : 2). 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지배와 잔인한 속박에서 구출하셔서 홍해에 그들이 건너갈 길을 만드신 후에(출 14 : 21) 그들의 뒤를 바싹 따라온 바로와 애굽군대를 바다에 빠지게 하신 것은(출 14 : 26-28) 몸을 죽이는 일을 상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주께서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즉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으며, 우리의 바로인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지치게 만들지만 그는 이미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세례는 우리에게 약속하며 상징한다. 그러나 애굽 사람의 시체가 바다 속에 잠기지 않고 바닷가에 있어서 그 무서운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을 해칠 수는 없었던 것과 같이(출 14 : 30-3l), 우리의 이 원수도 여전히 위협하고 무기를 휘두르며 그 존재를 느끼게 하지만 정복할 힘은 없다.

구름에는(민 9 : 15, 출 13 : 21) 깨끗이 씻는 일의 상징이 있었다. 주께서 그들을 구름으로 덮어 서늘하게 해 주셔서 무자비한 태양열로 인하여 기진 맥진하게 되지 않도록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며 보호를 받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덮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불꽃의 엄습을 받지 않게 된다.

그 때에는 이 신비의 뜻이 애매 모호해서 아는 사람이 적었지만, 이 두 가지 은혜 외에는 구원을 얻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후사로 택하신 고대 조상들에게서 두 은혜의 표징으로 빼앗으려고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풀려 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0-13)

 

10.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그런데 세례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선전했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고집하는 생각이 있다. 그들은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원죄가 없어지게 되며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고, 아담이 창조된 대로 바르게 살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그 의롭고 순결한 본성을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회복한다고 가르친다. 이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교사들은 원죄나 원래의 의나 세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과 같이16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키며, 그 부패로 인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고, 다음에는 성경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 것이(갈 5 : 19)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점에 신중하게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로 인정된다. 의와 결백과 순결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아들까지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죄의 씨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본성은 죄의 씨이며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이 저주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고 취소되었다는 확약을 받는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7 주께서는 이 표징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다 완전히 용서되었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는데 오직 전가에 의해서만 의를 얻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의롭고 결백하다고 간주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 점 중의 또 하나는, 이 비뚤어진 성질이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곧 앞에서 "육체의 일"이라고(갈 5 : 19)18 한 것을 만들어 낸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가 끊임없이 불꽃과 불똥을 내뿜으며, 샘에서 쉬지 않고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 죽음의 몸에서 해방되며 자기를 완전히 벗어버릴 때까지는 사람의 정욕은 결코 죽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물론 세례는 우리의 바로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으며(출 14 : 28) 우리의 죄가 죽는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죄가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우리를 더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육체라는 이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안19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우리가 충실히 붙잡고만 있으면 죄의 흔적은 지배적인 세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 안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 기만에 빠지거나 자기의 죄악 생활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죄를 짓기 쉬운 사람들이 안심하고 죄악 속에서 잠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의 가시에 찔려 고민하는 사람들이 기진맥진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아직 전진하는 중에 있음을 생각하여 매일 정욕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것을 훌륭하게 전진한 것으로 믿어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인 육신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 때까지 끊임없이 씩씩하게 싸우며 전진하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완전한 승리를 향해서 매진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력을 했는데도 아직 적지 않은 곤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겠다는 분발심을 일으키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목적은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 죽이는 일은 우리의 세례와 똑같이 시작해서 우리가 매일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에게로 옮겨갈 때에 완성될 것이다.

 

 

 

12. 바울의 내적 투쟁 : 로마서 7장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다.20 그는 값없이 주시는 의를 논한 다음에,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점을 논거로 삼아 우리는 행위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추론하기 때문에(롬 6 : 1,15)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이 중생의 약속을 세례에서 받는다고(롬 6 : 3이하) 첨부한다. 따라서 죄가 그 지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롬 6 : 12). 바울은 신자에게 항상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위로의 말을 첨가한다(롬 6 : 14).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손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 폐지의 성질을 논하고(롬 7 : 1-6) 동시에 지금까지 두 번 연기해온 이 문제21 즉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논한다(롬 2 : 12-24, 7 : 7-13). 그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굳게 결합되기 위해서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우리가 자신의 부패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가련함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저 부패한 본성은 세속 사람들에게서 곧 나타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대로 산다) 바울은 중생한 사람 즉 자기를 예로 든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기의 육의 흔적과 싸우며22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 해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다고 한다(롬 7 : 18-23).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롬 7 : 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평생 감옥 생활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생각하고 심히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위로의 말을 첨부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롬 8 : 1) 하였다. 바울은 주께서 일단 은혜로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접붙이시고 세례에 의해서 교회의 공동체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속하는 동안은 (비록 죄에 포위를 당하고 자기 속에 죄를 가지고 다닐지라도)-죄책과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울의 단순하고 바른 해석이라면 아무도 우리가 이상한 생각을 가르친다는 인상을 가질 이유가 없다.

 

 

 

13. 세례는 고백의 표

 

또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 된다. 참으로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23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끝으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혀와 우리의 모든 지체가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능력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것을 본받아 같은 노력을 하도록 격려를 받게 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전 1 : 13). 그가 암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그에게 몸을 바치며 그의 이름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세례 때에 한 고백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는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는 그 상징된 약속을 믿고 받아야 하며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14-18)

 

14. 표징과 실상

 

이미 주께서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을 설명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세례를 어떻게 사용하며 또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판단하기가 쉬울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므로 만드신 분의 손에서 직접 받는 것같이 받아야 한다.

이 표징을 통해서 말하는 이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 증명이 된 일로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어 깨끗이 하며 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 주시는 이도 주님시며, 우리를 그의 죽음에 참여하게 하고 사탄에게서 그 지배력을 박탈하며 우리의 정욕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이도 주님이시며, 참으로 우리와 연합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그가 이 여러 가지 일을 우리 안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이 물로써 외적으로 깨끗해지고 물에 잠기며 물에 둘러 쌓이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참되고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성례의 가장 확실한 원칙은 이 유사점에 있다. 즉 우리는 물질에서 영적인 것을 마치 눈앞에 있는 듯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적인 것을 이런 형상으로 나타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은혜가 성례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자체의 힘으로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께서 이 표를 이용해서 우리에 대한 주의 뜻을 즉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때문이다. 또 주께서는 우리의 눈에 단순한 외형만을 보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임재하는 실재에 인도하시며 외형이 상징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신다.24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여기에 대한 증명으로서 우리는 백부장 고넬료의 예를 들기로 한다. 그는 이미 사죄와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역시 세례를 받았다(행 10 : 48). 그는 세례에 의해서 사죄를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욱 확실하게 단련되었다-참으로 보증을 얻어 확신이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만일 세례 자체의 힘으로 죄가 씻기는 것이 아니라면, 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했느냐고 (행 22 : 16, 9 : 17-18 참조) 더러는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자각하는 데 따라 받아 얻게 되며 이 점은 주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증거하실 때나 혹은 이 확증하신 것을 더욱 충분하게 또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실 때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한다. 아나니아의 말은‥‥"바울이여, 당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오, 주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세례를 받고 확신을 얻으시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표징과 실체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세례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성례와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도 믿음으로 받는 정도만큼만 얻을 뿐이다.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배은망덕의 증거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아야 한다. 세례에서 주신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가 우리의 고백의 상징인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죄의 용서는 순결하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증거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가입해서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화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이 마지막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가‥‥‥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바울은 말했다(고전 12 : 13).

 

 

 

16.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단정한 것 즉, 성례는 집례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옳다고 하자 성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며,25 이점에서 우리는 성례를 집례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편지가 전해질 때 필적과 서명만 충분히 인정되면 전한 사람이 누구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성례에서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우리 주의 필적과 인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논법은 목사의 가치에 의해서 성례의 힘과 가치를 측정한 도나투스파의 오류를 깨끗하게 반박한다. 지금 재세례파는 우리가 교황제도 아래에서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므로 올바르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6 따라서 그들은 격렬하게 재세례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며(마 28 : 19) 누가 집례하든지 세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의 미련한 생각에 대항할 강력한 이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례를 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심지어 하나님을 멸시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무지와 신성 모독에 참가하도록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세례를 준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 다른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례였다면 거기에는 확실히 죄를 사하고 육을 죽이며 영을 다시 살리고 그리스도께 참가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불결하고 배교한 제사장에게서 할례를 받아도 무방했으며, 그런 표징이 무효하다고 해서 반복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그것은 그 진정한 원천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세례가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거행되어야 된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도, 부분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해서 전체의 효력을 무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 오점도 없는 순결한 세례가 되기 위해서 구비해야 할 조건을 우리는 가르치지만 우상 숭배자들이 더럽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고대에도 여러 가지 미신 때문에 할례가 부패했지만 여전히 은혜의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요시야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냈을 때(왕하 18, 22, 23장),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그런데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 몇 해 동안에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의 의도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례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무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눈이 멀고 믿음이 없어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항상 확고하며 믿을 만했다고 대답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고 믿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믿을 만 하시다(롬 3 : 3) 모든 사람이 멸망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세례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무시했고 약속이 없으면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감사할 줄 모른 우리의 맹목과 완고함을 자책한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시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약속을 모든 신자에게 실행하신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세례에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참으로 우리의 불신으로 인하여 약속은 우리 안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자,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그러므로 주께서 유대 백성을 회개하라고 부르실 때, 이미 말한 바와 같이27 그들은 불경건하고 모독적인 인간들에게서 할례를 받았으며 오랫동안 똑같이 불경건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시지 않고 다만 마음을 돌이키라고 권고하셨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언약을 깨뜨렸을지라도 그 언약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견고하게 남아 있었고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깨뜨리는 제사장의 손에서 그 언약을 받았으며, 그후에는 그 언약을 더럽히며 무효화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시 세례를 주었다고(행 19 : 2-7) 주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불붙은 창을 던진다고 상상한다. 요한의 세례와 우리가 지금 받는 세례가 똑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그릇된 교훈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배운 후에 그 바른 믿음으로 다시 세례를 받았으니 바른 교리가 없는 세례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하며 또 우리는 지금 처음으로 맛보게 된 진정한 종교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28 중의 그릇된 열성 분자가 헛된 미신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사실에 두고, 요한이 이렇게 무식한 제자들을 파송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리가 없다. 성경에는 성령을 찬양하는 구절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성령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바울이 묻는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부여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받은 것은 요한의 참 세례였으며 그리스도의 세례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정한다.29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들은 바울에게서 진정한 교리를 배웠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30 그러나 나는 더 단순하게 해석해서 성령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안수함으로써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은혜를 "세례"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불과 성령의 세례에 대한 주의 말씀을(행 1 : 5) 회상했다고 한다. 베드로도 고넬료와 그 가족과 친척에게 이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같은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다(행 11 : 16).

또 이것은 그 다음에 첨가된 말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곧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라고 했다(행 19 : 6). 누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던 화술에 따른 것이다. 즉 우선은 사실의 요점을 말하고 그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31 글의 전후를 보면 누구든지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 위에 내리셨다고 한다. 이 둘째 표현은 세례의 성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무지가 처음 세례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두 번째 세례로 시정 해야된다면 가장 먼저 사도들부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도 3년 동안이나 더욱 순수한 교리를 조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는 주의 자비로 우리의 무지가 매일 교정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시 침례를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강이 있어야 충분할까?

 

 

 

(필요 이상의 의식과 여성에 의한 세례에 반대한다. 19-22)

 

19. 그릇된 세례식과 바른 세례식

 

이 신비의 힘과 가치와 유용성과 목적은 이제 충분히 명백해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외형적인 상징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행해서 사람들의 무모한 짓을 억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비천한 일인 듯이, 축복 기도라기보다는 주문이라고 할 것을 고안해서는 물을 참으로 성별하는 것을 더럽혔다. 그후에 촛불과 성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숨을 내쉬는 것이 세례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2 나는 이런 이질적인 잡동사니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든지 첨가하는 것을 배척할 권리가 있다. 사탄은 복음이 시작될 때 처음부터 미련하고 속기 쉬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사기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더욱 야비하게 우롱을 했다. 그래서 침과 그 밖의 값싼 허식을 노골적으로 함부로 끌어들여 세례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33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좋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마음을 죽이는 화려한 연극을 세례에서 일체 제거한다면 세례가 얼마나 개선될 것인가? 세례받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학습 교인이 배워야 할 신앙고백문을 낭송하며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학습 교인에게 세례를 준다(마 28 : 19). 그리고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 이상한 오염에 파묻힘이 없이 그 완전한 광채를 나타낼 것이다.34

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부어 뿌리기만 하느냐 하는 이런 세밀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가 다른 사정에 따라 교회가 자유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례를 주다"라는 말은 잠근다는 뜻이며 고대 교회에서는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35

 

 

 

20. "긴급한" 세례에 반대한다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도 여기서 말해 두어야 하는데,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들이나 모든 남자들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그가 임명하신 사도들에게만 이 일을 명령하셨다. 그는 친히 합법적인 관리인의 직책을 다하시고(눅 22 : 19), 그것을 본 제자들에게 그대로 성만찬을 집례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분명히 그들이 자기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여 있고 당장에 성직자가 없을 때에는 평신도가 세례를 주는 것이 거의 교회의 초기부터 오랫동안 행한 관습이 되었다.36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지지할 만한 건전한 이론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관습을 따랐거나 묵인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거스틴의 말에도 이 의문이 나타나 있다. "평신도가 부득이한 경우에 세례를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반복해야 된다고 경건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직책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거나 소죄밖에 되지 않는다."37 여자들에 관해서는, 카르타고 회의에서 여자는 일체 세례를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38

그러나 병자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신다고 언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창 17 : 7) 이런 뜻이다. 어린아이들의 구원은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그 자체만으로서 충분한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만큼 그렇게 불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는 잘못 설명된 교리가39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조심성이 적어졌다. 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멸망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우리의 형편은 하나님의 옛 백성들보다 더 나쁘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 아래에서보다 지금은 더 제한된 듯하다. 이는 그 때에는 난지 8일 이전에 구원을 줄 만한 효력이 있던 약속이(창 17 : 7, 12절 참조) 지금은 어떤 표징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효력이 없으리라고 하니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폐지하러 오셨다고(마 5 : 17 참조)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이 태어나기 이전의 관습은 우선 터툴리안의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집례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더우기 사제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40 여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허락한 마르키온을 에피파니우스는 책망했는데, 그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인이다.

나는 생각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잘 안다. 정녕 부득이한 때의 비상 대책과 보통 관습과는 아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가 여자들에게 세례를 집례할 권리를 주는 것은 웃음거리라고 선언하면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이 부패한 관습을 어떤 구실 아래에서도 용서할 수 없다고 정죄한 것이 분명하다. 제 3 편에서 그는, 성모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가르치면서 전혀 보류 조건을 첨가하지 않는다.41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십보라가 한 일을 인용하여 옳지 못한 주장을 한다(출 4 : 25).42 십보라가 돌을 집어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노염을 풀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가납하셨다고 그들은 추론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다면 앗수르에서 온 이주민들이 시작한 할례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왕하 17 : 32-33).

그러나 저 미련한 여인이 한 일을 모방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다른 타당한 이유들로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선례로 삼아서는 안 되는 드문 일이었으며(할례를 집행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제사장들에게 하셨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없으므로) 또 할례와 세례는 문제가 다르다고 내가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한 충분한 반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며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 28 : 19).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세례를 행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셨으므로,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아론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히 5 : 4) 아무도 그 영예를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소명을 받지 않고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타인의 직책 을 빼앗는 것이 된다(벧전 4 : 15 참조).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극히 사소한 일도 양심에 의심을 갖고 행하면 죄가 된다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롬 14 : 23). 여성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칙을 범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훨씬 더 중대한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마 19 : 6, 막 10 : 3).43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더 말하지 않겠다. 독자들은 십보라에게는 하나님께 어떤 봉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모세가 위험한 것을 보고 십보라는 불평하면서 노하여 아들의 포피를 땅에 던지며 남편을 나무랐기 때문에 남편까지도 하나님께 대하여 노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 사건은 순전히 십보라의 성급함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아들의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님과 남편에게 불평을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모든 다른 점에서는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남편이 있었는데 자기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의 남편은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으뜸가는 예언자 모세였으며, 이보다 더 큰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나타난 일이 없었다. 십보라의 할례 거행이 그 때에 허락되지 않은 것도 지금 감독 앞에서 여성들이 세례를 집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논쟁을 쉽게 즉각적으로 해결할 원칙이 있다. 즉 유아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력하다는 듯이 우리가 그 언약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대한 불법 행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44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례나 어떤 첨가물 때문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에 이 성례에 일종의 인을 첨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효이기라도 하듯 그 약속에 효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 약속을 확증시하려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자녀가 세례를 받는 목적은,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외인이었다가 지금 처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약속의 복을 받아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으므로 이 엄숙한 표징에 의해서 교회에 가입되기 위한 것이다.45

그러므로 이 표징이 생략될 때에, 그 원인이 나태나 멸시나 부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위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규정을 존경하는 편이 즉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게서만 성례를 구하는 편이 훨씬 더 거룩한 일이다. 교회에서 받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에 결부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일치된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1-6)

 

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그러나 현재 일부의 열광적인 사람들이 유아세례 문제로 교회를 소란하게 하며 선동을 계속해서 그치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광태를 억제하기 위하여 여기 부록을1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교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평화를 중시하며 또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무 까다롭게 시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이 강화가 세례의 비밀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체계화할 것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공격할 때에 그럴 듯한 논거를 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외람된 생각과 타락한 호기심이 끌어들인 것이며, 결국에는 우매한 자기 만족감으로 경솔하게 관습화된 것이라고 한다.2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위에 확고하게 확립된 성례가 아니면 가느다란 실에 달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올바르게 깊이 생각할 때에, 만일 주의 거룩한 규례에 대한 이런 중대한 비난이 잘못되고 부당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규례의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 만일 경솔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이 드러날 경우에는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표준으로 세례의 진정한 준수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확실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폐지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오만불손한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세례의 의미를 결정한다

 

표징을 올바르게 고찰하는 것은 그 외형적인 의식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을 제정하실 때 의식이 표시하도록 하신 그 약속과 영적 비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잘 알고 또 인정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가치와 목적 즉 그 본질을 완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물질과 물질적인 외형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세례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세례가 표현하는 내면적 신비를 생각해야 한다. 이 일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례의 견고한 진상 이를테면 그 본체를 파악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될 때에 그는 외형적으로 물을 뿌리는 이유와 가치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일들을 멸시하고 무시하면서 관심을 전적으로 보이는 의식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례의 힘이나 성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물의 의미나 가치까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발언은 성경의 여러 구절이 분명하게 확증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이상 더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세례가 주는 약속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효력과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는 우선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긴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일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다. 다음에, 세례는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가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중생하여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다고 한다. 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한 가지 첨가시키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상징이3 된다.

 

 

 

3. 세례와 할례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할례가4 있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표징이 어떻게 서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서로 같은가를 검토하기로 하자. 이렇게 검토한다면 둘 사이의 비슷한 관계가5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그와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7 : 7,10). 그리고 모든 것을 풍부하고 충족하게 가질 것이라고 하셨다(창 17 : 1,6,8).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손을 모든 복의 원천으로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영생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해석하시고,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증명하셨다. 곧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눅 20 : 38, 마 22 : 32). 그러므로 바울도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주께서 어떤 멸망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출하셨는가를 가르칠 때에, 그들이 할례의 언약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그리스도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다고 추론했다(엡 2 : 12). 이 모든 것은 언약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접근하며 영생에 들어가는 첫 단계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으리라고 하는 세례의 약속에 해당한다. 후에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결백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신다(창 17 : 1). 이것은 육을 죽이는 것 또는 중생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무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의 포피를 베어 버리라고 권고함으로써(신 10 : 16)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고 설명하며, 이 때문에 땅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신 10 : 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실 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이, 모세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육신에 받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신 30 : 6). 또 아무도 자기 힘으로 진정한 할례를 얻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이 모든 일은 예언자들도 자주 반복하여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많은 a뻘??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렘 4 : 4, 겔 16 : 30).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에서 받는 것과 같은 영적 약속을 조상들은 할례에서 받았다. 할례는 그들에게 죄사함을 받음과 육을 죽이는 것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두 가지를 겸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기초라고 한 우리의 가르침과 같이 그가 할례의 기초가 되신 것도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로 인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창 12 : 2-3). 이 은혜에 인을 치기 위해서 할례의 표징이 첨가된 것이다.

 

 

 

4. 차이는 오직 외적인 것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표징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표징의 힘은 약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는데) 그 약속은 두 표징에서 똑같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혜와 사죄와 영생이 약속되었다. 다음에 표현된 것 중생도 같다. 두 표징의 기초 즉 이런 일들을 실현시키는 기초도 같다. 그러므로 성례의 힘과 성격을 평가하는 표준이 되는 내적 신비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는 외형전인 의식에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약속과 거기에 표현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외형적인 의식은 다수 경미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할례에 속한 것이 모두 세례에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6 모든 성경 해석을 검토하라고 가르친(롬 12 : 3,6) 사도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어떤 유사한 관계와 비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는 것이 곧 교회에 처음으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표현이었으며,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에 참가하겠다고 고백하는 표였기7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성별되어 그의 백성으로 인정되며 우리편에서도 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한 일을 세례가 우리 사이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그런데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물이라는 요소와 외형적인 관례에 그치고 그 영적인 신비에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말을 하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말을 한다고 할 것이 아닌가? 이 영적 신비를 설명한다면, 세례를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그들도 참여하게 하셨다(창 17 : 12 참조).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무의미한 상징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우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조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 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 시대 유대인의 유아들과 똑같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일에 그들이 참가한다면 표징을 그들에게 거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상을 안다면 왜 그들을 외형에서 쫓아 보낼 것인가? 외형적인 표징은 성례의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다만 표징을 말씀과 따로 고려한다면 어느 편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 우리는 표징이 말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표징은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보다 낮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모든 반대론자들을 충분하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할례8에는 일정한 날이 있었다고 하는 반대론은 도피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들같이 날짜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날짜를 정하시지 않으면서 엄숙한 의식으로 유아들을 자신과의 언약에 받아들이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더 확실한 지식을 열어 준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옛날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창 17 : 14 참조) 옛날 유대인과 동일하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도 유효하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관계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관계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명백하다. 그리스도가 와서 아버지의 은혜를 축소시키셨다고 하는 흉악하고 모독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대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어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으므로 거룩한 자손이라고 불렀다(스 9 : 2, 사 6 : 13). 그와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거룩하다고 인정되며 한쪽 어버이만이 신자일지라도 거기서 난 자녀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결한 자손과 다르다고 사도는 확언한다(고전 7 : 14). 그런데 주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직후에 외적인 성례로 유아들에게 그 언약을 인치라고 명령하셨다(창 17 : 12). 그런데도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는 인을 치지 않겠다는 구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할례 이외의 상징으로 여호와의 언약을 확인하라는 명령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없으며 그 할례는 오래 전에 폐지되었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주께서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할례를 제정하셨으나 할례가 폐지된 후에도 (우리와 유대인 사이에 공통된)주의 언약을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언약은 공통되고, 언약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공통적이다. 확인하는 방법만이 다르다-그들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던 우리를 위해서는 세례가 대신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유대인들이 후손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모호해지고 확실성이 적어질 것이다. 이런 말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중상모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신 사랑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욱 명백하고 풍부하게 땅 위에 부어졌으며 사람들에게 선언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율법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있던 때보다 이 은혜를 더 심한 악의로 은폐하거나 혹은 나타내더라도 더 무력한 증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

 

7. 예수님과 어린이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자비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기 위해서란 것을 세상에 알리시려고 자신에게 데려온 유아들을 다정하게 안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마 19 : 13-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신 것과 세례에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을 들어 안으시고 축복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기도로 보살펴 주자고 말한다.9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행동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 : 14)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을 안으시고 기도와 축복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의 뜻을 행동으로 확증하셨다.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친교의 상징이 아닌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표징은 그들에게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교회에 가입된 그들을 천국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입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쫓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 장식하시는 유아들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으며 그가 기꺼이 영접하시는 어린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그리스도의 이 행동은 아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으시고 안으시며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것이며 그들을 성별케 하셨음을 선언하신 그 행동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

이 구절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다른 옹졸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서 혼자 올 수 있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버린 아기들과 어린아이들"10이라고 부른다(눅 18 : 15, 마 19 : 14, 막 10 : 13 참조). 이 두 마디의 희랍 말은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다"라는 말은 "접근한다"11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의 거미집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런 자의 것"이라고12 하셨으므로, 천국은 유아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건전한 논점도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인정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이 나이 때문에 자신에게 외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셨을까? 유아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실제로 젖먹이들을 의미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사람들이 이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마 19 : 14). 유아들이 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면 "이런 자"라는 말은 유아 자신들과 유아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성경의 확고한 승인을 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들의 미련한 항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을 빼놓는 것이 아니므로, 올바른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기사를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행 16 : 15,32).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법칙으로 만족한다. 성찬의 제정 정신을 숙고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에서도 이 원칙을 지킨다. 참으로 세례의 제정 목적에 주의만 하면 세례는 큰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서 세례를 빼앗는 것은 곧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후 오랫동안 유아세례는 사람들이 몰랐던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 퍼뜨린다.13 이 점에서 그들의 부정직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고대의 저술가라도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14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유아세례를 무가치하며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이 행사에서 오는 유익을-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부모들과 세례를 받는 유아 자신들에게15 오는 유익을-간단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만일 무익하다는 구실로 유아세례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조롱하는 것이 되는데, 그들이 유아세례에 반대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중 할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육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곧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주께서는 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미련한 생각을 압도하는 다른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이 거룩한 제도는 우리의 믿음에 특별한 위로를16 주며 무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출 20 : 6)17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충만함을 품는다.

주의 약속만으로도 우리의 자녀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이의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르게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어린이들도 세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기 자식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표를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고 한 그 위협을 우리는 깊이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멸시하는 자에게는 주시겠다고 한 은혜를 거부하시며 취소하시기 때문이다(창 17 : 14).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다. 10-16)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미친 짐승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이 거룩한 제도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데 쓰는 논법들에 대하여 검토하겠다. 첫째, 그들은 세례와 할례의 유사성 때문에 너무도 구속과 제한을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두 표징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분리시켜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이 두 표징은 서로 의미가 다르고 각각 포함된 언약도 아주 다르며 어린이들에 대한 소명도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첫째 점을 증명하려고 할 때에, 들은 할례는 육을 죽이는 모형이었으나 세례의 모형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 우리의 입장을 잘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근거는, 세례와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우리는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옛날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준 의미를 우리에게는 세례가 나타내 보인다고 추론한다.18

언약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만용으로 성경을 남용하며 곡해한다. 그것도 한 구절만이 아니라 취급하지 않는 구절이 없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철저히 육적인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같이 만든다. 그들과의 언약은 현세 생활을 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준 약속은 현세의 물질적 유익이었다고 한다.19 이런 주장이 승인된다면, 유대 민족은 (우리 안에 있는 돼지들을 살찌우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배부르다가는 영원한 멸망에 빠질 운명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할례와 첨가된 약속을 우리가 말하면, 할례는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으며 그 약속은 육적인 것이었다고 그들은 곧 대답하기 때문이다.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할례가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다면 우리는 세례도 그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사도는 어느 한 쪽이 더 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에 거하는 죄의 몸을 벗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른다(골 2 : 11). 후에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첨부한다(골 2 : 12). 이런 말씀은, 세례의 실천과 진상은 곧 할례의 진상과 실천이며 둘은 똑같은 의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들은 이전에 할례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던 일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세례가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두 표징의 약속과 신비는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설명했으므로 이제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이상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신자들에게, 바로 영적인 하늘 일을 나타내는 표징을 땅에 붙은 것, 문자 그대로의 표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잘 생각하라고 경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생각을 어둡게 만들지 못하도록,20 그들이 아주 파렴치한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한 가지 항의를 여기서 논박하겠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재가하셨을 때에 그 언약을 포함한 근본 약속이 영적이며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또 그 약속을 받은 조상들도 그들이 열망한 영생에 대한 확약을 얻으려고 그 약속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으며)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호의를 지상적이며 물질적인 은혜로 증명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영적인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소망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이 은혜를 그의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다른 약속을 첨가하셨다(창 15 : 1,18). 유대 민족에게 주신 모든 지상적인 약속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약속들은 저 영적 약속을 원천으로 삼아야 하며 영적 약속이 항상 첫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신구약간의21 차이를 논할 때에 이미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간단히 논한다.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그들은 "자녀들"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사람들을 그의 자녀라고 불렀고 지금은 그의 믿음을 본받은 사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구별한다. 그러므로 할례에 의해서 저 언약의 공동체에 접붙임을 받은 신체적인 유아들은 신약 시대의 영적 유아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생을 얻도록 중생한 사람들을 예시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22 이런 말에는 희미하게 진리의 불꽃이 보인다. 그러나 이 경박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우선 손에 닿는 것을 잡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들러붙어서는 일체 여러 가지 일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해서 속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건전한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그의 영적 후손들의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의 자리를 일시 차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본래 그와 혈연이 없었지만 그의 자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갈 4 : 28, 롬 4 : 1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복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후손에게 약속된 일은 전혀 없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큰 오류이다. 우리는 성경의 확실한 인도를 받아 더 나은 목표를 향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그 후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다(창 12 : 3). 동시에 그와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확약하신다(창 17 : 7). 그리스도를 이 복의 근원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이 약속을 계승하게 되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은 모든 족속 사이로 널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세계 각지에서 신자들이 모여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하늘 영광 가운데 앉으려는 것이었다(마 8 : 11). 그러나 그보다 수 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에게 그와 똑같은 위대한 자비를 베푸셨다. 다른 모든 민족들을 제쳐놓으시고 이 한 민족을 택하셔서 얼마동안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만 한정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자신의 소유와 (출 19 : 5) 자신의 사신 백성이라고(출 15 : 16) 부르셨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 은혜를 확증하는 할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이 상징으로 가르치려 하셨다. 이 일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씀은 영생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로 일단 결정한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도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후에 그는 믿음으로 인한 의를 확인하는 일인 할례를 표징으로 받아서 무할례자와 할례자 즉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대에 가졌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조상이 되었다(롬 4 : 10-12).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영예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할례자들의 조상이었다. 사도가 말하듯이(엡 2 : 14),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담이 허물어진 후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세례가 있으므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의식만을 자랑하는 자들의 교만을 꺽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들만의 조상이란 생각을 명백하게 부정한다(롬 4 : 12). 지금은 세례에서 물밖에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헛된 생각을 같은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반대론자들은 또 사도의 다른 구절을 내놓을 것이다(롬 9 : 7). 거기서 사도는 육신으로 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에 의하여 난 자만이 그의 후손으로 인정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브라함 의 혈통에 의한 후손에게 어느 정도의 지위를 주는 데 비해서 사도의 말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논하는 문제점을 더 주의해 보아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후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이런 혈통 자체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마엘과 에서를 예로 든다(롬 9 : 6-13). 외인과 같이 제거된 이 두 사람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참다운 후손이었지만 축복은 이삭과 야곱에게로 갔다. 이 사실에서 사도가 후에 주장하는 결론이 나온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롬 9 : 15-16) 그러나 언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즉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언약의 이름으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혈통을 헛되이 믿는 것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일단 맺으신 언약은 결코 수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로마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후손이 그 위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논한다. 이 위엄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복음의 첫째 가는 자연적인 후계자였고, 비록 그들이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무가치한 자로 버림을 받았지만 하늘의 복이 이 민족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사도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하고 언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거룩하다고 부른다(롬 11 : 1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가치가 있다고 여기신 세대에 큰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 (우리와 그들을 비교하는 듯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유복자 또는 조산아라고 부르며 적자가 아니라 양자라고 한다. 또 마치 가지를 꺾어서 다른 나무 줄기에 접붙인 것 같다고 한다(롬 11 : 17).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특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가정에서 맏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예는 그들에게 제공되었고, 그들은 제공된 것을 거절하며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완고해서 복음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사도는 그 복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 : 29)

 

 

 

15.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를 어떤 저울로 달아야 할 것인가를 알아본다.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서자나 외인들과의 구별은 물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그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시기 위해서 할례로 인을 치셨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형편이 이와 같다. 바울이 그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그 부모에 의해서 성화된다고 논하는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는 그 부모에게서 동일한 성화를 받는 다고 가르친다(고전 7 : 14). 이 점을 근거로 그는 불결한 죄가 있는 사람들은(고전 7 : 15)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우리의 반대론자들이 내린 결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옛날에 할례를 받은 유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한 영적 유아 시기를 예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라고 말했다(롬 15 : 8).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마치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후손에 적용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께서 일단 약속하신 일을 이행하시려고 유대 민족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한 것처럼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언약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에게 비유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사도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은 뜻으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행 2 : 39) 언약을 받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당연히 복음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언명하며, 다음 장에서는(행 3 : 25) 그들을 "언약의 자손" 즉 상속자라고 부른다. 위에서 인용한 사도의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사도는 유아들에게 새겨진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해석한다(엡 2 : 11-13).23

만일 우리가 그들의 너절한 말을 듣는다면, 주께서 율법의 둘째 계명에서 그의 종들의 후손들에게 천 대까지도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약속은 어떻게 되겠는가?(출 20 : 6)24 우리는 여기서 비유로 회피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경박한 핑계가 될 것이다. 그 약속은 폐기되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율법이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영원히 유익한 것이 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마 5 : 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대해서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믿어야 한다.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더우기 그들이 내세운 세례와 할례의 차이점은 우습고 조리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모순된다. 세례는 영적 전투의 첫날에 속하지만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이 끝난 제 8일에 속한다고25 그들은 말한 다음, 즉시 이 말을 잊어버리고는 논조를 바꾸어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의 모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례는 매장이라고 부르며 이미 죽은 자가 아니면 매장할 수 없다고 한다. 미친 사람의 정신없는 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조리가 없을까? 처음 언급한 대로한다면 세례가 할례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요 둘째 언급에서는 할례보다 뒤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공상을 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말씀이라고 숭배할 때,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말한 차이점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제 8일에 대해서 비유를 말하고26 싶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대 저술가들에 의하면 여덟이라는 수는 (제 8일에 있은) 부활에 관련시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부활에 달렸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이다. 혹은 현세 생활의 전과정에 관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세 생활에서는 육을 죽이는 일은 생명이 끝나고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27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 8일까지 미루신 목적은 아직 연약한 유아들을 생각하신 것으로서 이는 갓난 핏덩어리 같은 아기에게 할례의 상처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8

이미 죽은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매장된다고 하는 말은 훨씬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어 장사지낸 바 된다고 하지만 그 조건으로서 우리는 죽은 후에 육을 죽이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롬 6 : 4) 확실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비슷한 속임수로서, 세례가 할례와 같아야 한다면 여성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트집을 잡는다.29 이스라엘 자손의 성결이 할례의 표징으로 확인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 표징으로 남녀가 다 같이 거룩하게 되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남자의 몸은 본래 할례로 인칠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에게만 할례를 행하였으나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통해서 여자들도 할례의 동반자와 협력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이런 미련한 말들을 물리치고 세례와 할례와의 유사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내적인 신비 즉 약속과 가치와 효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답변한다. 17-20)

 

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곧 어린이들은 그 나이로 인하여 세례가 의미하는 신비 즉 영적 중생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아주 갓난아기는 영적으로 중생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어린이들이 거듭나기에 적합한 연령이 될 때까지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도처에서 이 모든 이론에 반대한다. 어린이들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롬 5 : 12이하) 어린이들은 죽음 가운데 버려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명령하신다(마 19 : 14). 무슨 까닭인가?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에게 참가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추방과 죽음을 선고한다.

만일 그들이 이런 선고를 주저하면서 어린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오류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충분히 반박된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선언하므로(고전 15 : 22),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소망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구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를 받아야 하며(엡 2 : 3) 죄 중에 잉태되어(시 51 : 5) 항상 정죄 아래 있다고 하므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열리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본성을 떠나야 한다. 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말씀보다 더 명백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고전 15 : 50)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려라(이것은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생명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이 진리라면(요 11 : 25, 14 : 6) 우리는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유아들이 어떻게 중생하느냐고 묻는다.31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구원을 받을 유아들을(어떤 유아들은 확실히 구원을 받으므로) 주께서 먼저 중생시키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부패가 그들에게 있다면, 오염된 것이나 부패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계 21 : 27) 유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오염된 것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다윗과 바울이 주장하듯이, 유아들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면(엡 2 : 3, 시 51 : 5) 그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대상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 심판자 자신께서 하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다시 난 사람들에게만 열린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는데(요 3 : 3) 우리는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런 반대론자들을 침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 한 증거를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 거룩하게 만드셨으며(눅 1 : 15) 다른 태아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 여기서도 그들은 우롱하면서 핑계를 말하지만 아무 소득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것은 한 번만 있었던 일이며 이 한 가지 예를 근거로 주께서 유아들을 매양 이렇게 다루신다는 직접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고 우롱한다. 그러나 우리도 이런 논리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제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의 힘을 좁은 범위 내에 가지려고 하는 그들의 악한 불법 행위를 폭로하려는 것뿐이다. 그들의 다른 궤변도 역시 무가치하다. 그들은 "모세로부터"라는 말은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 방법에 의해서 "어렸을 때부터"라는 말과 같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말을 했을 때에는, 요한은 나기 전부터 성령이 충만하리란 것을 의미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법칙을 강요해서, 원하시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을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힘은 적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아이도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만드셨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갓난 유아기부터 거룩하게 함을 받으셨다. 그것은 연령의 구별 없이 그의 선민들을 자신 안에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으로 범한 불복종의 죄를 씻어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육을 입으셨다. 육으로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육을 취하시며 성령의 거룩함으로 충만하셔서 그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얻는다면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는 유아 시기가 성화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이 현세에서 불려가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화되고 거듭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다. 반대론자들은 성경에서 성령은 썩지 않을 씨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은 중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벧전1 : 23).32 그들은 이 점에서 베드로의 발언을 오해하였다. 베드로는 복음을 듣고 배운 신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중생의 유일한 씨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유아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 할 수 없다고 하는 추론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유아들을 중생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으로서는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 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마음대로 유아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권능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불완전한 논법일 것이다.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그러나 믿음은 듣는 데서 생기는데(롬 10 : 17), 유아들은 아직 듣지 못하며, 그들은 선악을 모른다고 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신 1 : 39)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반대론자들은 말한다.33 그러나 사람들은 사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도가 들음을 믿음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에 보통 사용하시는 순서와 방법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지 결코 하나님에게 일정 불변의 법칙을 지정하며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그런 다른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부르셨으며 내적인 방법으로 즉 설교와는 별도로 성령으로 마음속을 비추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한 유아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유아들이 조금 후에 완전히 즐길 은혜의 일부분을 지금 받는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충실한 삶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데 있다면, 어떤 어린이들이 아주 갓난아이 때에 죽어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 갈때에 확실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접되어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의 빛의 완전한 광채로 비추시려는 유아들을 지금 작은 불꽃으로 비추시기를 기쁘게 여기신다면, 그것을 불가하다고 할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그들을 이 육신의 감옥에서 구출하시기 전에 그들의 무지를 제거하시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그들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믿음을 받는다든지 또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와 똑같은 지식을 가졌다고 경솔하게 단정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은 채 남겨 두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큰 소리로 부정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둔한 교만을 나는 조금이라도 억제하려고 한다.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그러나 이 점을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례를 회개와 믿음의 성례라고 덧붙인다. 갓난 유아기에는 회개나 믿음이 생길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세례의 의미가 허무한 것이 되지 않도록 유아들에게 세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34 그러나 이런 창은 우리를 향한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증거를 보아서 할례 또한 회개의 표란 것은 아주 분명하다(렘 4 : 4, 9 : 25, 신 10 : 16, 30 : 6 참조). 그리고 바울은 할례를 믿음으로 인한 의의 인이라고 부른다(롬 4 : 11).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유아들의 몸에 할례의 인을 치셨는지는 하나님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세례와 할례는 경우가 같으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한쪽에 주는 것을 다른 쪽에 거부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유아 시기는 영적 유아들을 상징한 것이라는 상투 수단으로 도망하려 한다면 이 길은 이미 막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의 성례로서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셨으므로, 지금 유아들을 세례에 참가시키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일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그런 것과 같이, 이 일에서도 불경건한 자들의 훼방을 충분히 물리칠만한 지혜와 의가 빛난다. 유아들은 비록 할례를 받는 순간에는 그 표징의 뜻을 그들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죽이는 할례를 참으로 받았으며, 이 죽이는 일은 장성한 후에 실행할 것이다. 요컨대 이 반대론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유아들은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며, 아직은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세례의 의미를 곡해해서 우리에게 반대하는 것은 이 대답에 의해서 모두 결정적으로 반박된다. 바울이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를 때에(딛 3 : 5) 그는 세례에 이런 부전을 붙였다. 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세례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추론한다.35 그러나 우리는 할례도 중생을 의미했으므로 중생한 사람이 아니면 할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얼마든지 그들의 추론을 반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일이 우리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이미 여러 번 시사한 바와 같이) 할례를 흔드는 경향이 있는 어떤 논법도 세례를 공격할 힘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한 권위에 근거한 일은 아무 이유가 없올 지라도 확고 부동하지만,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하신 것이 아닌 유아세례나 그 밖의 비슷한 일들에는 그런 경의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36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일단 이 딜레마에 빠진 이상 그들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 유아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합당하며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비난을 받아야 하든 지의 둘 중의 하나이다. 그 명령에 불합리한 것이나 어리석은 점이 없었다면 유아세례를 행하는 일에서도 불합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신다. 21-22)

 

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 논제에 대해서 불합리하다는 낙인을 찍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씻어버리는 주장이 있다.37 즉 주께서 선택하시기로 의도하신 유아들이 중생의 표징을 받았으나 장성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힘으로, 주만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 만일 그들이 장성해서 세례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갓 태어났을 때 그들에게 중생의 표를 주어 일평생 그 뜻을 명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들에게 새로워지겠다는 열의가 불일 듯 일게 될 것이다.

바울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된다고 가르치는 것도(롬 6 : 4, 골 2 : 12)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말은 세례를 받을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근본 교리를 선언하려는 것뿐이다. 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세례 전에 매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모세와(신 10 : 16) 예언자들도(렘 4 : 4) 유아시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할례의 의미를 생각나게 했다.

동일한 취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편지하였다(갈 3 : 27).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는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는 그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은 이 신비의 뜻을 이해한 다음에 표징을 받아야 하지만 유아들은 다른 순서를 밟는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곧 설명하겠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한 구절이 그들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구절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례는 몸의 오염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이 고백하는 증거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3 : 21). 사실 이 구절에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위해서는 공허한 허풍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즉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38 그러나 그들은 실상이 표징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야 한다는 틀린 생각을 되풀이한다. 이는 할례의 진상도 선한 양심의 동일한 증거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양심의 증거가 할례의 진상의 기초가 된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에 할례는 장래를 위해서 부여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리신다. 따라서 유아 세례에 있어서 주께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현재적인 효과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성례의 나머지 의미는 후에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22.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런 종류의 논법은 모두 성경을 반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비슷한 나머지 논법들을 간단하게 추궁하겠다. 그들은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받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시한다.39 이 점을 인정할 때에 우리의 견해는 큰 지지를 받게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이미 죄인이므로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서 자비의 소망을 빼앗으시지 않고 오히려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실제보다 훨씬 낮은 표징을 그들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 따라서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들에게 다시 던진다. 즉 유아들은 죄사함을 받으므로 그 유아들에게서 그 표징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께서 물로 씻어 생명의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인용한다(엡 5 : 26). 그들 자신의 오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을 인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쉬운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씻으실 때에 세례에 의한 확증을 원하신다면, 어린이들에게 이 증거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이들을 천국의 상속자라고 부르셨으며(마19 : 14) 그들은 당연히 교회의 일부로 인정된다. 그리고 바울이 교회는 물로 씻음으로써 깨끗하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보편 교회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다른 곳에서(고전 12 : 13)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한 말도 우리는 같은 식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유아들이 그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 우리의 믿음의 요새에 가하는 그들의 공격은 맹렬하기만 하며 사용하는 무기 또한 많기도 하다.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 23-24)

 

23. 어른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이제 그들은 사도 시대의 관습을 보고, 그 때에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회개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먼저 회개하고 다음에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으라고 권고했다(행 2 : 37-38). 마찬가지로, 빌립에게 내시가 세례를 받겠다고 청했을 때 빌립은 그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행 8 : 37).40 이런 기사를 읽고 그들은 먼저 믿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례를 허락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법을 인정한다면 처음 구절은 믿음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에 회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증명이 될 것이며, 둘째 구절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두 구절은 서로 보충하고 따라서 서로 연결시켜야 된다고 대답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구절들도 이 두 구절과 비교해야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서 뜻을 해석해야 할 구절이 많다.41 여기에 인용된 구절이 그 예다. 베드로와 빌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생각하며 믿음을 이해할 만한 나이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회개하고 믿는다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유아들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할례의 표를 받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을 배워야 했다. 할례에 의해서 확인된 언약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그는 민족적으로 외인이었기 때문이다.42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여호와께서도 역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에, 우선 할례를 주시면서 그 표징의 의미를 감추시려 하지 않고 먼저 그와 맺으시려는 언약이 무엇인가를 언명하셨다(창 15 : 1).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은 후에 그를 성례에 참가하게 하셨다(창 17 : 1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성례가 믿음 다음에 있었고 그의 아들 이삭의 경우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 먼저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그때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던 장성한 아브라함을 이제는 언약의 공동체에 받아들이려고 했으므로 먼저 언약의 조건들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공정한 행위였지만 그의 갓난 아들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은 약속의 내용에 따라 상속권에 의해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는 (문제를 더 간단 명료하게 표명하기 위해서) 신자들의 자녀들이 이해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약에 참가하면, 언약의 조건에 대한 서약을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표징을 거부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을 자기를 위해서 낳은 자녀라고 부르신다(겔 16 : 20, 23 : 27). 그 후손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창 17 : 7 참조) 사람들의 어린이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불신자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연결되기 전에는 언약의 공동체에 대해서 외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표징의 의미가 그에게 잘못 이해되고 또 이해되지 않을 때에 그가 표징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도 이런 뜻으로, 이방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을 때에는 언약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엡 2 : 12). 내가 오해하지만 않았다면 이 간단한 발언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장성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으므로, 언약 사회에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믿음과 회개가 있기까지는 그들에게 세례를 휘장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난 유아들은 직접 언약의 상속자로서 태어났으며 하나님께 용납하였으므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43 죄를 고백한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서 기자가 한 말도(마 3 : 6) 이것과 관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교도가 세례를 받겠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만족할 만한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쉽게 세례를 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을 해석한다 :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고 해서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5-30)

 

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더우기 그들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요 3 : 5) 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례에는 현재의 중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친히 세례를 중생이라고 부르시지 않느냐고 한다. 유아들에게 중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인데, 우리는 무슨 구실로 중생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세례를 그들에게 허락하느냐고 한다.44

우선 그들은, "물"이란 말이 있다고 해서 이 구절은 세례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곡해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후에, 니고데모가 육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성령 즉 믿는 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는 데 있어서 물과 같은 일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간단하게 "물과 성령"을 "물인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또 이것은 신기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3장에 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 : 11, 눅 3 : 16, 요 1 : 26,33 참조)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이 성령을 주는 것이며, 성령은 중생시키는 일에서 불의 기능과 성격을 가진 것과 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며, 성령은 물이 몸에 대해서 하는 일을 영혼에 대해서 수행한다. 나는 다른 분들이 다른 해석을 한다는 것을 알지만45 이것이 참뜻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을 구하는 사람은 모두 그 본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불쾌하고 너절한 비난을 하기로 작정한다면(그들이 원하는 것을 인정한 다음에) 세례가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고 그들을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보면 물이 성령보다 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영적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영적 은사가 세례 후에 오는 것이라면 나는 바른 주장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너절한 반대론은 일체 버리고, 우리는 내가 제창한 단순한 해석을 고수해야 한다. 즉 생명수인 성령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 보내는 자들의 공상을 전적으로 배척해야 한다.46 그들의 가정에 따라서 세례는 어른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경건에 대한 초보 지식을 올바르게 배우고 세례를 받을 날이 가까운 어린이가 모든 사람의 기대를 어기고 돌연히 죽을 경우에 그 어린이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인가? 주의 약속은 분명하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5 : 24).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세례는 멸시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멸시한다면 주의 언약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며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세례를 받을 능력을 빼앗긴 사람은 멸망한 것으로 곧 인정해야 할만큼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들의 공상에 찬성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할 만큼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사정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예외 없이 정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모든 유아들에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유아들에게 천국을 주신(마 19 : 14)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들의 의견이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관계된 일을 우리가 다 인정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 소득이 있으려면 우리가 이미 확립한 교리를47 그들은 우선 논박해야 할 것이다.

 

 

 

27.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세례의 제정 자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견고한 보루가 된다고 자랑한다. 마태복음의 맨 끝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먼저 그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고 다음에 세례를 주라는 둘째 명령을 하셨다고 한다(마 28 : 19). 그리고 그들은 마가복음의 맨 끝장에 있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첨가한다(막 16 : 16). 세례를 주기 전에 가르치고, 세례에는 믿음 다음가는 둘째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의 음성이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이상 무엇을 더 구하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또 주 예수께서는 서른이 되시기까지 세례를 받으시지 않음으로써 친히 이 순서의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마 3 : 13, 눅 3 : 21-22).48

기막힌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자승자박하고 그 무지를 폭로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신 때부터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세례를 주게 하셨는데,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제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마치 이 두 구절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것같이, 거기서 세례에 관한 법칙을 연역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들의 이 오류를 묵인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대체 이 논법은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은밀한 곳이 아닌 넓은 들판으로 밖에 도망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니며‥‥‥전파하라‥‥‥세례를 받는"(막 16 : 15) 또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막 16 : 16)이라고 한 말씀의 순서에 집착해서 세례를 주기 전에 전파해야 하며 세례를 받으려고 하기 전에 믿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세례부터 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주께서는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8 : 19-20).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에 관해서, 위에서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고찰하였다(요 3 : 5).49 그들이 고집하는 대로 해석한다면, 여기서 세례를 먼저 말씀하셨으므로 영적 중생보다 세례가 먼저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물로" 거듭나라고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28. 마가복음 16 : 16에는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없다

 

그들이 논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이 근거도 이제 얼마만큼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한 말로 풍성하게 변호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점잖지 못한 방법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내용이 충실한 대답을 하겠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한 부록으로 첨가하시면서 세례를 주는 일은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천하 만민에게 보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목적은 그들이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잃어버렸던 사람들을 각지에서 그의 나라로 모으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물론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그 후에, 이런 사람들이 배운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첨부하시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부언하셨다(막 16 : 16). 이때 하신 설교에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한 마디라도 있었는가?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형식의 논법인가? 장성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믿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는 논법을 쓴다.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복음을 가르치라는 말씀밖에 이 구절에서 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아세례를 막는 장벽을 쌓을 수 있으면, 어디 쌓아 보라.

 

 

 

29. 예수님은 성년자의 세례의 원형이시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를 장님이라도 볼 수 있도록 나는 명백한 비교를 사용하여 그것을 폭로하겠다. 일하는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사도가 말한 것을 구실로 삼아(살후 3 : 10), 유아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에게 침을 뱉어도 당연하지 않은가? 왜 일정한 종류와 일정한 연령층의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을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우에서 우리의 논적들의 논법이 더 능숙하다고 할 수 없다. 어른들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을 그들은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성숙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정한 원칙에 이 연령층을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예도 그들의 입장을 전혀 돕지 않는다.50 그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서른 이후였다(눅 3 : 23, 마 3 : 13). 이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가르침으로 세례에 든든한 기초를 주려고 하셨다. 요한이 앞서 놓은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교훈으로 세례를 확립하려고 하셨을 때, 그 제정하시는 일에 더욱 큰 권위를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몸으로 그 제도를 거룩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즉 자기가 가르치기 시작하신 때에 실천하셨다.51 요컨대 그들은 이 구절에서 세례는 복음 선포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밖에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서른 살로 정하는 것이 좋다면, 그들은 왜 이대로 행하지 않고 그들이 보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세례를 받는가?

이 나이를 고집한 그들의 한 교사인 세르베투스까지도 스물 한 살이 되기 전에 벌써 예언자라고 자랑하기 시작했다.52 마치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전에 교회의 교사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사람을 신용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30. 세례와 성만찬

 

더우기 그들의 항의는 계속된다.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즉 세례를 허락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53 마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큰 차이점을 가르치지 않은 듯이 말이다. 사실 고대 교회에서는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은 키프리아누스와 어거스틴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54 그러나 다행히 이 관습은 폐지되었다. 세례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일종의 입문식이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한다는 표징이며 중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그러나 성만찬은 유아기를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다.

이 구별은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주께서 일정한 연령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성만찬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지 않고, 다만 주의 몸과 피를 분간하며 자기의 양심을 검토하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그 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하신다. 각각 자기를 검토하고 반성한 마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시라고 한 바울의 교훈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고전 11 : 28) 그러므로 우선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유아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다(고전 11 : 29).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하심을 바르게 분변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유아들에게 영양분 있는 음식을 주지 않고 독을 주려고 하겠는가?55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의 명령은 무슨 뜻인가?(눅 22 : 19, 고전 11 : 25)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사도가 주의 말씀에 의해서 명령한 것은 무슨 뜻인가?(고전 11 : 26) 유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때 이 일을 기억하라고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가? 유아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힘과 유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선포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례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하나도 지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표징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구약에 있는 비슷한 표징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런 차이를 보았다. 세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할례는 유아들에게 행하라고 하셨다(창 17 : 12). 그러나 성만찬으로 대체된 유월절에는 아무 손님이나 무분별하게 참가시키지 않고, 그 뜻을 물을 만한 나이가 된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먹을 수 있었다(출 12 : 26). 이 사람들에게 건전한 지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렇게 분명한 일을 보지 못하겠는가?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과 결론. 31-32)

 

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사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독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나 역시 괴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가 주장하는 이유들을 간단히 처리할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재세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자가 아닌 실로 그 족속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서 그가 전투 태세를 갖추고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가짜 이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상징들은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들을 또는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56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다. 세례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인데 세례의 완전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우리가 일생 동안 한 걸음씩 계속적으로 전진해서 마침내 완전성에 도달할 것을 요망하는데, 첫날에 사람에게서 완전성을 찾는 것은 미련한 생각이다.57

2.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는 것을 기념하라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해낸 것은 논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그가 세례에 적용하는 말은, 각각 "자기를 살피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1 : 28) 알려 주는 것과 같이 성만찬에 관련시켜야만 정당하다. 세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없다. 그러므로 아직 어려서 자기 반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도 좋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3. 그는 셋째 항의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여전히 죽음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요 3 : 36), 믿을 힘이 없는 유아들은 자기가 받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아담의 후손 전체가 빠져 있는 전반적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복음을 멸시하고 자기들에게 제시된 은혜를 교만하고 완강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고하신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은 모두 아담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된다는 반대 논법을 제출한다. 따라서 유아들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므로(마 19 : 15, 막 10 : 16) 그들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성령으로 나는 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요 3 : 8 참조)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성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데 따라 복종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씀을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짓이다.

4. 그의 넷째 항의는, 물질적인 것이 먼저 오기 때문에(고전 15 : 46) 영적인 세례를 위해서는 더 나이를 먹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육으로 난 아담의 후손이 모두 모태에서부터 정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즉시 대책을 마련하시지 못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해를 지정하셨다는 생각을 세르베투스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울이 확언하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녀도 본성대로 한다면 혹 멸망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다(고전 7 : 14).

5 . 다음 세르베투스의 비유에서, 다윗이 시온 성에 올라갈 때에 장님과 절뚝발이들이 아닌 강건한 군인들을 데리고 갔다고(삼하 5 : 8) 한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소경들과 저는 사람들을 하늘잔치에 초대하셨다는 비유를 인용한다면(눅 14 : 21) 세르베투스는 이 난문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또 나는 절뚝발이들과 불구자들이 이전에 다윗과 함께 일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에, 순전한 거짓말로 꾸며낸 이 논리를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6. 그는 또 다른 비유를 말한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였지(마 4 : 19) 유아들을 낚는 어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복음의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슨 뜻이냐고(마 13 : 47) 반문한다. 그러나 나는 비유 놀이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사도들이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을 때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라는 명령은 결코 받은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또 나는 아직도 알고 싶은 일이 있다. 복음서 기자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르는데(마 4 : 19, 이 말은 예외 없이 인류 전체를 포함한다), 왜 세르베투스는 유아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가?

7. 그의 일곱째 항의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고전 2 : 13-14) 영적이 아닌 유아들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바울의 말을 사악하게 곡해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울은 교리에 대해서 말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의 허망한 지혜를 너무도 자랑하므로 바울은 아직도 하늘 교리의 초보를 배워야 하는 그들의 우매함을 책망한다. 누가 이 말을 근거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육에서 난 유아들을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선택하셔서 자신에게 성별하시지 않는가?

8. 그는 그들이 새로운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는 영적인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반박하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즉 유아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양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을 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는 선택되었다는 상징만 있으면 그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만찬에 관해서 명백하게 요구하신 자기 성찰을 그들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9.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을 성찬에 초대하신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기념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허락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안아 주시기까지 한 유아들은 장성할 때까지 특이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외인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사람이 나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해괴한 일이라고 항의한다. 나는 대답한다. 영혼은 성찬을 외형적으로 먹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음식을 받으며, 따라서 유아들은 상징을 받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음식이 되신다. 그러나 세례는 경우가 다르다. 세례에 의해서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 그들 앞에 열릴 뿐이다.

10. 세르베투스는 다시, 착한 관리인은 적합한 때에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준다고(마 24 : 45) 항의한다. 나는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는 어떤 표준으로 우리가 세례 받을 때를 결정하며 유아기는 세례 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그는 주께서 밭이 희어지는 동안에 속히 추수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고 첨가한다(요 4 : 3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사도들이 자기들이 수고한 목전의 결실을 보고 더욱 분발해서 전도하라고 하신 것뿐이다. 누가 이 말씀에서 추수 때만이 세례에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11. 그의 열한번째 논거는 초대 교회에서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 동일인물이었다는 것이다(행 11 : 26).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가 부분에서 전체를 추론하는 서툰 논법을 보았다. 제자라고 한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이미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모세의 제자가 된 것과 같다. 그러나 올바른 논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확언하신 유아들을 외인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것이다.

12. 세르베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이지만 유아들은 성찬에 참가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만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원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안으셨다는 것은(마 19 : 13-15, 막 10 : 13-16, 눅 18 : 15-17) 그들을 택하셨다는 진정한 표였다.58 이 선택에 의해서 유아들은 어른들과 연합되었으며, 일시 성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라는 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은(눅 23 : 40-43) 성찬에 참가한 일이 없었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형제가 될 수 있었다.

13. 다음에 그는 양자의 영에(롬 8 : 15)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없으며, 양자의 영은 오직 듣고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라고(갈 3 : 2) 첨가한다. 나는 대답한다. 그는 항상 그릇된 논법으로59 돌아간다. 여기서도 어른들에 대해서만 한 말을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전후를 전도한다. 거기서(롬 10 : 17, 갈 3 : 5)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보통 방법은 자기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 성실한 교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직무와 수고를 통해서 자신의 손을 뻗치심으로써 택하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을 논거로 한 법칙을 세워, 하나님께서 다른 비밀한 방법으로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시는 것을 감히 금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14. 그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항의한다(행 10 : 44-48).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예로 일반적 원칙을 연역해 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시와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보면(행 8 : 27-28, 8 : 12), 주께서는 다른 순서에 따라 세례가 성령의 은사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15. 열 다섯째 이유는 어리석다는 정도를 넘는다. 그는, 우리는 중생에 의해서 신들이 되지만 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며(요 10 : 34-35, 시 82 : 6 참조)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자들에게 신성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의 한 가지 망상이지만 여기는 그것을 검토할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시편의 한 절을 곡해해서 이런 이질적인 뜻으로 바꾼다는 것은 극히 파렴치한 행동이다. 예언자가 왕들과 집권자들을 "신들" 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직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능숙한 해석가는 특수한 통치 명령에 관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복음의 교리에 적용해서는 유아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 한다.

16. 또 그는 유아들은 말씀에 의해서 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한다. 복음의 교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참으로 적합하다면 우리를 중생케 하는 썩지 않는 씨이지만(벧전 1 : 23), 우리가 아직 배울 나이가 아닌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독자적인 중생 예정표에 따르신다.

17. 후에 세르베투스는 다시 비유로 돌아가서, 율법에서 갓난 양과 갓난 암염소는 희생으로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적인 해석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나는 곧 반박할 수 있다. 즉 초태생은 모두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고(출 13 : 2) 양이나 염소나 일년 된 어린 수컷을 희생물로 사용했다(출 12 : 5). 이것을 보면, 우리는 결코 강건한 성인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최근에 태어난 아직 어린것을 희생으로 택하신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8. 그뿐 아니라 요한이 준비한 사람들만 그리스도에게 올 수 있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요한의 직무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이 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안아 주시고 축복하신 어린이들은(마 19 : 13-15, 막 10 : 13-16, 눅 18 : 15-17) 요한에게서 준비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 자, 이제 세르베투스와 그의 그릇된 원칙은 물러가도록 하라!

19. 드디어 그는 트리스메기스투스와60 여자 점장이들에게61 호소해서, 거룩한 씻음은 어른들에게만 적합하다는 증거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교도들의 모독적인 의식에 일치시키려 하며 트리스메기스투스의 뜻에 따라서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얼마나 존경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존중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에게 성별하시며, 비록 어린 나이로 인해 그 효력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한 상징에 의해 그들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속죄 의식에서 무엇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례에 적용함으로써 할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 불변의 법칙을 변경하는 것을 우리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 끝으로, 그는 만일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면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이 한 웃음거리로 세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해서 하나님과 논쟁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아직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이 보통 할례를 받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할례를 우롱거리로 집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파괴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마치 발광한 듯이 가장 우매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끌어다가 자기들의 오류를 변호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고집을 이런 불합리한 생각으로 처벌하신다. 나는 세르베투스가 그의 재세례파 아우들을 지지하는 힘이 약했다는 것을 밝혔다고 믿는다.

 

 

 

32. 우리의 어린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언쟁과 논쟁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경솔한 짓인가를 이제 신중한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이런 심히 미묘한 수단으로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유아세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신과 영적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경건한 자들로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들의 자녀까지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말씀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후손을 돌보아 주셔서 우리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일에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이처럼 인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시 48 : 10) 사탄이 이렇게 큰 군대를 동원해서 유아세례를 공격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증거를 우리에게서 빼앗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눈앞에 놓인 약속도 결과적으로 점점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불경건한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나태함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즉시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키는 길을 가르치겠다는 강력한 자극을 느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애를 흐리게 하려는 악의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의 권속 즉 교회의 일원으로 가입시키시기 때문이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1

 

(주의 만찬은 빵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 1-3)

 

1. 표징과 본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고 종이 아닌 아들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일을 걱정하시는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평생 먹여 주신다.2 또 그것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이 계속되는 너그러움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도록 담보물을 주셨다. 즉 독생자의 손을 거쳐 그의 교회에 행한 성례 영적 잔치를 주시고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는 떡임을 확증하시며, 이 떡을 우리의 영혼이 먹음으로써 진정하고 복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요 6 : 51).

이 숭고한 신비를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하며, 이 신비는 아주 위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도 면밀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이 한량없는 보화를 교회에서 빼앗으려고 오래 전부터 검은 구름을 퍼뜨렸으며, 그 후에 이 광명을 덮어 버리기 위해서 논쟁과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 이 거룩한 음식을 맛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도 똑같은 술책을 사용했다.3 그러므로 나는 우선 문제를 무지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한 다음에 사탄이 세상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사용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겠다.

첫째, 표징은 떡과 포도주다. 이 표징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서 우리를 중생시키신 후에 교회라는 그의 공동체에 접붙이시며 택함을 받은 그의 권속으로 만드신다. 그와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서 생명을 가지게 하시고, 우리의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양식을 주심으로써 지혜 있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신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힘을 회복하며4 하늘 영생에 도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기운을 얻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자가 은밀하게 연합된다는 이 신비는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5 우리의 적은 능력에 가장 적당한 보이는 표징으로 그 신비의 형상을 보여 주신다. 참으로 담보물과 표를 주심으로써6 우리가 마치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알게 하신다. 이 잘 알 수 있는 비교는 아무리 미련한 마음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양식을 받는다. 이제 우리는 이 신비스러운 복의7 목적을 알 수 있다. 곧 주의 몸이 이미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면서, 우리는 지금 먹을 수 있으며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 독특한 희생의 역사를 우리 속에서 느끼고 또 우리의 영구적인 음료가 되기 위해서 주의 피가 이미 우리를 위해서 흘려졌다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시려는 것이다. 거기에 첨가된 약속의 말씀도 이 뜻을 알린다.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전 11 : 24, 마 26 : 26, 막 14 : 22, 눅 22 : 19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미 희생된 그 몸을 받아먹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명령의 의도는, 우리 자신이 그 몸을 먹는 것을 인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 효력을 나타내리란 것을 확실하게 판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다(눅 22 : 20, 고전 11 : 25). 이것은 우리가 맛보도록 그 거룩한 피를 우리에게 제공하실 때마다(그 피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한) 그가 이미 자신의 피를 흘려 확인하신 그 언약을 얼마간 새롭게 하시고 또 존속시키시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경건한 영혼들은 이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증거를 얻는다. 그 결과 우리는 그가 상속하신 영생이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을 감히 가질 수 있다. 또 그가 이미 들어가신 천국은 그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서도 분리할 수 없으며, 그가 우리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인 양 지시고 우리에게서 그 책임을 면제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8 즉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3.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우리는 이 성례에서 모든 일에 대한 완전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목전에 계시며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해야 한다.9 주의 말씀은 거짓이 없으며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받아 먹으라. 그리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마 26 : 26-28과 고전 11 : 24의 융합, 막 14 : 22-24, 눅 22 : 19-20 참조). 받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것이 우리 것임을 알리며, 먹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우리와 일체가 됨을 알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의 몸을 주시며 피를 흘리신다고 엄히 말씀하심으로써 그 두 가지가 그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몸과 피를 취하셨다가 다시 내놓으신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 성례의 강한 힘이-그 힘의 거의 전부가-"너희를 위하는" 또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말씀에 있다는 것을 신중하게 관찰해야 한다. 주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서 주시지 않았다면10 지금 그 몸과 피를 분배할지라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로 주의 몸과 피를 상징하게 하셔서 그것이 우리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그래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11 일종의 유추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떡을 받을 때12 우리는 곧 비교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곧, 떡이 우리의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피의 상징으로서 포도주가 제시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포도주가 신체에 주는 유익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비슷한 영적 유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영양을 주며 유쾌하게 하고 힘을 주며 기쁘게 하는 것이다.13 저 가장 거룩하신 몸을 주시며 피를 홀리신 사실에서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것을 받는가를 잘 생각한다면, 떡과 포도주의 여러 가지 성질은 유추해서 그것을 우리가 받을 때에 얻는 일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때에 성만찬으로 말미암아 보장된 약속- 이것은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느끼는 신비이다. 4-7)

 

4. 성만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그러므로 성례에서는 더 이상의 생각이 없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그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 6 : 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 6 : 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다(요 6 : 48,50).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십자가에서 그 약속이 실천되며 모든 점에서 성취되었다.

 

#449 제17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효력을 산 체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또 구원에 이르도록 먹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름을 성례에서 빌려 오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14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으로 주셨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죽을 성질을 공유하게 되심으로써 그의 신적인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실 때, 또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저주를 자기가 받으시고 자신의 축복으로 우리를 가득하게 하실 때,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삼켜 없애실 때(벧전 3 : 22, 고전 15 : 54 참조)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가 입으셨던 우리의 이 썩을 육을 영광과 썩지 않음으로 입히실 때에(고전 15 : 53-54 참조) 그는 자신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5. 믿음으로 참예자가 되는 법15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것은 복음에 의해서 할 수 있으나 성찬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 그러므로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가 떡을 끊임없이 먹을 때에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하고 그 떡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떡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나셨다가 죽지 않으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아니실 것이다.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효력과 결과가 영원 불멸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떡이 되실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답게 표현하셨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 : 51). 물론 이 말씀의 뜻은 그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위한 영적 생명의 양식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몸은 죽음을 당하시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과거에 그가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몸을 버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그의 몸을 떡으로서 주셨다. 지금 그는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몸을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어 먹게 하시며, 성찬의 거룩한 신비로 자신을 주시는 것을 확인하시고, 외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내면적으로 성취하심으로써 매일 그의 몸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표징을 경시함으로써 신비와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는 표징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표징을 지나치게 찬양함으로써16 신비 자체를 애매 모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며 이 떡에서 신자들은 영생을 위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저 고귀한 설교에서 자기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들에게 권고하신 말씀은(요 6 : 26이하) 더 명확하고 더 숭고한 무엇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께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참여하는 것을 "먹는다" 또 "마신다"는 말로 표현하셨다. 몸에 영양을 주려면 떡을 보는 것보다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이, 영혼도 그리스도의 힘으로 영적 생명을 얻으려면 그에게 진실로 또 깊이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으로 나는 이것은 믿음으로 먹는 것에 불과하며 다른 먹는 법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과 그들이 하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 즉 그들에게는 먹는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뿐이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에 의해 우리의 살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17 그의 살을 먹으며 이렇게 먹는 것은 믿음의 결과라고 말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먹음이 곧 믿음이요 나에게는 먹음이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로는 사소한 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가르치지만(엡 3 : 17),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모두가 사도의 말을 믿음의 현저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믿음에 의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심으로써(요 6 : 48),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의존할 뿐 아니라 떡을 먹으면 몸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이, 참으로 그를 먹음으로써 그의 생명이 우리 속에 옮겨져서 우리의 생명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6. 이 일에 관한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의 생각

 

그리고 (그들이 수호자로 여겨서 인용하는) 어거스틴은, 우리가 믿음으로 먹는다고 했을 때에 먹음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한다. 나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널리 나타나신 분으로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와 결합시켜 그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분으로서 받아들인다고 첨부한다. 나는 저 표현을 전적으로 물리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뜻을 정의할 때 그것이 완전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이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을 본다. 예컨대 그는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On Christian Doctrine)라는 책의 제 3편에서 말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라는 어구는(요 6 : 53) 하나의 비유이다. 즉 우리는 주의 수난에 참여하며, 그의 살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상했다는 사실을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또 베드로의 설교로 회개한 3,000명은(행 2 : 41) 그들이 잔인하게 흘린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마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주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믿음의 유익을 칭송하며 우리의 몸이 떡을 먹고 기운을 얻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18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에 의해서만 아니라 그의 몸 자체에 의해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만드신다"19고 하였다. 그의 말은, 이런 선은 믿음 이외의 근원에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한 상상으로 생각할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할뿐이다.

성찬을 외형적인 고백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금 말하지 않겠다. 성례를 총괄적으로 다룰 때20 이미 그들의 과오를 충분히 논박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독자들은 잔을 "피로 세우는" 언약이라고 부르실 때에(눅 22 : 20) 믿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속이 표현된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약속을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찬을 바르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7. 생각과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다

 

더우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교제인가를 알리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에 참여할 뿐이라고 하며 살과 피는 말하지 않는다.21 나는 이 사람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피는 참된 음료요(요 6 : 55),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고(요 6 : 53) 한 것과, 또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이 그들의 좁은 묘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우선 그들의 묘사를 간단 명료하게 처리하고 그 다음에 그들과 반대로 과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과오를 논하겠다. 이 엉터리 박사들은 조잡한 생각으로 먹고 마시는 데 대해서 어리석은 방법을 고안해 내는 동시에 그리스도에게서 그 자신의 살을 벗기고 그를 하나의 환상으로22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들과 긴 논쟁을 하게 되겠으나 이것은 이 위대한 신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할 것이며, 나의 지성으로는 이 신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이 신비의 숭고함을 나의 유치한 척도로23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오히려 나는, 독자들이 이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정신적 관심을 국한시키지 않고 내가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모든 것을 말하려고 애쓴 후에도 이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말한 것이 아직도 적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지성은 나의 혀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지성조차 문제의 위대성에 정복당하고 압도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 앞에서는 오직 경탄할 수밖에 없으며 지성도 생각을 할 수가 없고 혀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비록 그럴지라도 나는 어떻게든지 나의 견해를 요약하겠다. 그것은 바른 견해라고 믿으며 경건한 사람들의 찬성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8-10)

 

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먼저,24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의 말씀 즉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배운다(요 1 : 1). 즉 생명의 원천이었으며 만물은 항상 이 원천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요일 1 : 1) 혹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기록하여(요 1 : 4),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속에까지 흘러들어 그들에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힘을 불어넣으셨다고 한다

또 후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을 입으시고 우리가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지게 하신 때에만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첨부한다(요일 1 : 2). 그는 이미 피조물들에게 그의 힘을 부어 주셨지만, 사람은(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생명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어) 도처에서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생의 소망을 받으려면 말씀과의 교제에 영접될 필요가 있다. 우리와 거리가 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충만하다고 들을지라도 우리의 안과 밖에 죽음만이 보인다면 우리는 얼마만큼의 확신과 안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명의 그 원천이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동참하리란 것을 알려 주신다. 그는 또 그가 거처로 삼으신 우리의 육에 생명을 주시며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영생의 양식을 얻게 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 : 48,51)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이실 뿐 아니라 내려오심으로써 그가 취하신 육신에 그의 힘을 부으셔서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와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러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그의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으로 음료이며(요 6 : 55), 신자들은 이 양식에서 영양을 얻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육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 경건한 자들에게 특별한 위로가 된다. 그것은 이와 같이 그들이 쉽게 생명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그들 앞에 생명이 값없이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가슴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의미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 그 자체에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처음 상태에서는 죽을 성질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또 영생을 입은 지금도 그 자체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는 우리에게 전달할 생명이 충만하므로 "생명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나는 키릴루스와 함께,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 : 26)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 앞에서 가지셨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때에 가지신 은사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인성에도 생명이 충만해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한 사람은 동시에 생명에 참여한다고 가르치신다.25

우리는 잘 아는 예로 이 일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물은 샘에서 마시며 샘에서 긷고 수로를 통해서 밭에 그 물을 대지만, 그 자체에서 흘러 나와 이렇게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근원이 있어서 그 근원이 끊임없이 물을 제공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살은 다함이 없는 풍부한 샘과 같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신 안으로 흘러오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이제 하늘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사도도 이런 뜻으로 말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 : 23). 그러나 그는 "머리"시며 (엡 4 : 15),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연락하고 상합하여‥‥‥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 4 : 16)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 : 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영과 몸으로 우리와 전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결합되는 그 긴밀한 교제에 바울은 더욱 훌륭한 이름을 붙여 "우리는 그 몸의 뼈와 살의 지체"라고 했다(엡 5 : 30). 끝으로, 모든 말보다도 더 위대한 이 일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그는 강화를 "이 비밀이 크도다."26라는(엡 5 : 32) 감탄문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바울은 너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설명하는 것보다는 경탄하는 편을 택했는데 그런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히 미친 짓이라고 하겠다.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요약하면, 떡과 포도주가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는다. 영혼이 그리스도에게서 참으로 영양을 얻어야만 그 표징의 유추가 적용된다. 또 이 일이 있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기운을 얻어야 한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즉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27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의 생명을 우리의 뼈와 골수에까지 침투시키듯이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성찬에서도 증거하시고 인을 치신다. 성찬에서 그는 무익하고 허무한 표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약속하신 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실현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또 영적 잔치에 참석하는28 모든 사람들에게 성찬이 의미하는 실재를 제시하시며 보여 주신다. 비록 신자들만이 그 실재를 받아 유익을 얻지만 그들은 이 크고 너그러운 은혜를 진정한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말한다(고전 10 : 16).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며, 의미하는 실체의 이름을 표징에 준 것이라고29 항의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나는 물론 떡을 떼는 것이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본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도 우리는 상징을 보여줌으로써 본체도 보인다고 올바른 추론을 한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다고 말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허망한 표징을 제시하신다고는 감히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떡을 떼는 것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참으로 표현하신다면, 그가 참으로 그의 몸을 제시하며 보이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 손에 그의 몸의 상징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 몸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이는 표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는 확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그 몸 자체도 받았다는 것을 똑같이 확신해야 한다.

 

 

 

(외형적 표징과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를 스콜라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잘못 표현했다 그리고 화체설도 하나의 예다. 11-15)

 

11. 성례의 의미와 본체와 효과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항상 인정되었고 지금도 건전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가르치는 대로) 나는 성찬의 거룩한 신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물질적인 표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우리의 미약한 능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영적 진상으로서 이것은 동시에 그 상징들에 의해서 표현되며 전시된다.30

이 진상의 성격을 잘 아는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에 나는 대개 세 가지 것을 지적한다. 즉 의미와 의미에 의존하는 본체와 이 두 가지에서 나타나는 힘 또는 효과의 세 가지다. 의미는 약속에 포함되었으며 약속은 표징에 내포되어 있다. 본체 또는 실체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다. 효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

이 모든 것은 믿음과 관련이 있으나,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하는 궤변을 인정하지 않는다.31 약속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외형과 단순한 지식에서 머물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에게 참여하며 즐기라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신자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속과 의를 가지며 그의 죽음에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은혜들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에서는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나는 말한다. 즉 참으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고 모든 순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의해서 제시된다. 무슨 까닭인가? 첫째는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그의 본체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능력도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이제 나는 미신이 고안해 낸 엉뚱한 혼합물을 검토하겠다. 여기서 사탄은 신자들의 마음을 하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리스도가 떡이라는 요소에 고착되신 것같이 상상하는 사악한 오류를 그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교묘한 장난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심에 대해서 로마 교황청의 재주꾼들이 조작한 임재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에 임재해 있어서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으며 삼킬 수 있다고 한다. 교황 니콜라스는 베렌가리우스에게 그의 회개의 증거로서 이런 형태의 자설을 취소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그 사용된 말이 너무도 괴상했기 때문에, 주해서(Gloss)의 저자는 독자들이 현명한 경계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베렌가리우스의 것보다 더 악한 이단설을 거기에서 연역해 낼 위험성이 있다고 외쳤다.32 그래서 피터 롬바르드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면 서도 나중에는 다른 생각으로 기울어졌다.33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인간의 몸에 공통된 일반적인 특색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으며, (이미 하늘에 받아들인 바 되어)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돌아오실 때까지(행 3 : 21) 하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끌어다가 썩을 요소들 밑에 둔다거나 몸이 어느 곳에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합당치 못한 행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34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몸과 영과 영혼이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결의 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이 줄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수로와 같아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성질과 소유는 수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35 우리는 태양이 지구 위에 광선을 부음으로써 본질의 일부를 지상에 던져 지구의 소산물이 나게 하고 기르며 자라게 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어째서 태양에 비교했을 때 그리스도의 영은 그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빛이 적을 것인가?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일을 말할 때 그 힘을 전적으로 성령에 관련시킨다. 한 구절이 여러 구절을 넉넉히 대표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의 영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롬 8 : 9).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일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가하는 일을 배제하지 않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소유하며 우리 안에 모시게 하신다고 가르친다.36

 

 

 

13. 스콜라 학자들의 오류 : 떡을 하나님으로 오인한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런 야만적인 불경건에 공포를 느껴서 더 신중하게 말을 한다.37 그러나 그들도 기만적인 궤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제한된 또는 육체적인 모양으로 포함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38 그러나 다음에 자기들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양식을 생각해 낸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이 말하는 "떡의 형태"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떡의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할 때 거기 남아 있다고 하는 횐 빛에 그 본질을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는 성례에 포함되었으면서도 하늘에 여전히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련성의 임재가 아닌 임재를 주장하지 않는다.39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말을 인용해 오지만 그들 전체의 공통된 목적은, 전에는 떡이던 것이 성별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떡의 외형 밑에 숨어 계신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롬바르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체가 보이는 것이며 성별 후에 떡의 형태 아래 숨어 있으며 덮여 있다."40 이와 같이 떡의 형상은 우리의 눈이 살을 볼 수 없게 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런 말로 어떤 함정을 파려고 하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추측을 할 필요가 없다. 사태 자체가 분명하게 알려 준다. 과거 수백 년 동안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도자들까지 얼마나 큰 미신에 붙잡혀 있었는가 하는 것과 지금도 교황 제도하의 교회 지도자들이 미신에 잡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붙어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진정한 믿음인데도, 그들은 거기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임재를 조작하고, 그런 임재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교묘한 궤변으로 인하여 떡이 하나님으로 생각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화체설

 

여기에서 저 가공적인 화체설이 생겼고 그들은 지금 다른 신조보다 이 사상을 위해서 더욱 맹렬하게 싸운다.41 이 공간적 임재를 처음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의 본질과 혼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떡이 몸으로 변한다는 허구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떡이 재료가 되어 몸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형상 밑에 숨기 위해서 떡의 본질을 없애버리신다는 것이다.42

그러나 그들이 성경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의 일치한 의견까지43 멸시하고 저 괴물을 나타낼 정도로 무지하고 우매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는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가끔 "변화"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표징의 본질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비에 바친 떡은 보통 떡과는 훨씬 다르며 지금은 떡이 아닌 무엇이라는44 것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성찬이 지상적인 부분과 천상적인 부분으로 성립된다고 도처에서 분명하게 선언하며 지상적인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떡과 포도주라고 해석했다.

우리의 논적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그들의 교리를 확인하기 위한 지지를 고대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주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반대하기 위해서 고대를 내세운다. 화체설이 대두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더욱 순수한 교리가 아직 강성하던 더 좋은 시대뿐만 아니라 순수성이 다소 부패했던 시대에도45 화체설은 알려지지 않았다.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이 떡과 포도주란 것을 분명한 말로 인정하지 않는 고대 저술가는 한 사람도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신비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간혹 여러 가지 칭호로 그 떡과 포도주를 구별한다. 성별 할 때 비밀한 변화가 생겨서 이제는 떡과 포도주가 아닌 무엇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는 것은 내가 방금 말한 바와 같다.4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물질적인 요소들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고, 이제 그 요소들은 단순히 배에 들여보내기 위한 보통 음식과는 종류가 다른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뜻으로 말한다. 요소들에서 영혼을 위한 영적 양식과 음료가 제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가 있다면 한 가지 물건이 다른 물건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전과 다른 것이 된다는 뜻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동의한다. 만일 그들의 상상에 일치시키려는 것이라면 나는 세례에서는 어떤 변화를 느끼는지를 문의 할 것이다. 이는 교부들도 여기서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썩을 요소에서 영혼을 영적으로 씻는 일이 생긴다고 말하면서도 물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은 주의 만찬에서 "이것은 내 몸이라"(마 26 : 26)고 하신 것과 같은 일이 세례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뜻이 분명한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는 말에 있는데, 이 변화라는 말의 뜻은 성찬에서나 세례에서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궤변으로47 자기의 공허함만 나타내는 자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그러나 성찬에서 표현되는 진상에 대한 살아 있는 형상이 죄적인 표징에 없다면 성찬의 의미는 부적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자기의 살이 양식이 된다는 것을 외형적인 상징으로 증거하시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진정한 떡이 아닌 떡의 빈 외형만을 내주셨다면, 우리를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추 또는 비교는 어디에 있는가? 엄밀하게 말해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의 형태를 먹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세례에서 물의 형상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는 씻긴다는 확실한 보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런 거짓된 외형은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상의 표징이 하늘의 것과 동일하지 않으면 성례의 본질은 말살된다. 따라서 만일 진정한 떡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비의 진리는 우리에게서 소멸된다. 다시금 나는 반복한다.48 성찬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약속 즉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약속(요 6 : 51)의 볼 수 있는 증거에 불과하므로, 보이는 떡은 영적인 떡을 나타내는 중개물의 직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려고 주시는 모든 은혜를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떡의 외형만 있고 떡의 진정한 본성은 남아 있지 않는다면, 바울은 왜 우리가 모두 한 떡에 참여하는 한 떡과 한 몸이라고 추론했는가?(고전 10 : 17)

 

 

 

15. 화체설의 근거와 이론

 

그들이 먼저 오류에 미혹되지만 않았더라면 사탄의 간계에 속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싸여 사람의 입으로부터 위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공상을 하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었는데, 즉 그들 사이에서는 성별은 요술의 주문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떡이 성물이 된다는 원칙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마치 세례의 물은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이 첨가될 때에 즉시 우리를 위해서 전과 다른 것으로 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비슷한 다른 성물의 예를 보면 이 점이 더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다.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난 물은(출 17 : 6) 성찬의 포도주가 우리에게 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을 조상들에게 표시하는 표이며 표징이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고전 10 : 4). 그리고 그곳은 짐을 나르는 짐승들과 가축도 물을 마시는 곳이었다. 예를 통해서, 지상적인 요소들을 영적으로 사용할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 요소들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그 요소들이 약속을 확인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자주 반복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까지 들어올리려고 계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오라고 부르기는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떡 밑에 숨어 보이시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완고한 생각으로49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공간을 뛰어넘어 하늘 저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더 유해한 대책으로 시정하려고 한다. 지상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들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요구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두스 시대에 이미 더 조잡한 표현이 사용되었으나 화체설은 아직 인정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어느 시대를 보아도 이 신비에서는 영적인 실재가 떡과 포도주에 결합되었다고 모든 사람이 말했다.50

용어에 대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대답을 하노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문제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해서 비록 뱀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전과 같이 지팡이였다고 한다(출 4 : 2-4, 7 : 10). 그러므로 떡은 새로운 본질이 되지만 오용에51 의해서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며 이것을 합당치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 찬란한 이적과 그들이 조작한 어떤 사람도 볼 수 없는 환상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 또는 근사점을 발견하는가? 마술사들은 술법을 사용하여 자기들도 자연 질서를 초월한 신적 능력으로 피조물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애굽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모세가 나서서 그들의 속임수를 들춰내고 그의 지팡이가 다른 모든 지팡이를 삼키게 함으로써 그 무엇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자기편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출 7 : 12). 그러나 그때의 변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현재의 경우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조금 지나서 지팡이는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왔다(출 7 : 15). 그뿐 아니라 그 일시적인 변화가 본질적으로 생겼는지 혹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마술사들의 지팡이를 언급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예언자는 그것을 뱀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변화가 아닌 것을 변화라고 암시하는 것같이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마술사들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인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52 이것과 바울의 말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예컨대 "우리가 떼는 떡"(고전 10 : 16), "이 떡을 먹으며‥‥‥때마다"(고전 11 : 26),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행 2 : 42) 및 기타 유사한 구절들이 있다. 애굽 사람들의 눈이 마술사들의 주문에 속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세의 경우는 사태가 더욱 의아스럽다. 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시고 그 뱀을 다시 지팡이를 만드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천사들에게 육체를 입히셨다가 잠시 후에 다시 벗기시는 것과 같이 쉬웠다. 만일 이 신비의 성격이 같든지 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들의 해결책에 그럴 듯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외형적인 상징의 진정한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이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진실하고도 합당한 약속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확실하다.

그리고 한 가지의 오류는 다른 오류를 생기게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화체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서의 한 구절을 너무도 어리석게 곡해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싫다. 예언자는 그의 떡 속에 나무가 들어 있다고 불평함으로써(렘 11 : 19) 잔인한 원수들이 그의 떡 맛을 쓰게 만들었다는 뜻을 표시한다.53 다윗도 그의 떡이 쓸개로, 그의 음료가 식초로 더럽혀졌다고 비슷한 비유로 한탄한다(시 69 : 21).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비유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주장하려고 하며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마치 우리는 그들의 무지를 용서하며 수치를 묻어 줄 망정, 예언자의 참 뜻에 반대하는 원수로서 싸움을 계속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치욕을 더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몸의 편재설을 편협한 문자적 해석이라고 반대하는 이유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친교에 관한 견해를 설명한다. 16-31)

 

16. 반대론

 

다른 사람들은 표징과 표시되는 것과의 사이에 유추가 없으면 신비의 진리는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성찬의 떡은 참으로 지상적인 썩을 요소의 본질이며, 그 자체 내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그 밑에 그리스도의 몸이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54

만일 그들의 말이, 진상은 표징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근거로 이 신비에서 떡이 제시될 때 몸도 함께 제시되는 것이라는 뜻이라면55 나는 강하게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떡 속에 둠으로써 몸의 본성과 반대되는 편재성이 몸에 있다고 하며 또 "떡 밑에"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몸이 떡 밑에 숨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므로, 우리는 숨겨져 있는 궤변을 잠깐 폭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서 문제 전체를 정식으로 논하지 않고 다만 적당한 곳에서56 곧 하게 될 논의의 기초만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이지 않고 무한하며 떡 밑에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내려오셔야만 몸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올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색깔로 숨기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간적 임재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은 공간적인 결합과 접촉이나 조잡한 형태의 포괄 관계가 아니면 살과 피를 나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한번 경솔하게 생각한 오류를 완강하게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가진 일이 있는 유일한 부피는 하늘과 땅만큼 크고 넓다고 자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태에서 아기로 나서 자랐으며 십자가에 달렸다가 무덤 속에 계셨는데, 이것은 출생과 사망과 그 밖의 사람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시기 위해서 일정한 섭리에 따라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또 부활하신 후에 그의 평상시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이셨으며 (행 1 : 3, 고전 15 : 15) 하늘로 올리우셨고(행 1 : 9, 눅 24 : 51, 막 16 : 19) 승천 후 마지막으로 스데반과(행 7 : 55) 바울에게(행 9 : 3) 보이셨는데, 이것도 그가 하늘에서 왕이 되신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같은 섭리에 의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57 이것은 마르키온을 지옥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58 그리스도의 몸이 이런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유령이나 환영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더 교묘한 핑계를 사용한다. 성찬에서 주시는 몸은 영광과 불멸의 몸이며, 따라서 몸이 여러 곳에서 성찬 밑에 포함되어 있거나 어디에도 없거나 또는 아무 형태도 취하지 않더라도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날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어떤 종류의 몸이었는가? 잠시 후에 내주시려는 죽을 성질의 몸을 주셨다는 것은 그때 하신 말씀이 증거하지 않는가? 그들은 그가 이미 산상에서 세 제자가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마 17 : 2) 말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광채를 보이신 것은 제자들에게 영생 불사의 맛을 미리 보이시려는 뜻이었다. 또 그들은 거기서 이중의 몸을 보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영광으로 장식된 그리스도의 몸을 본다. 그러나 처음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분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맞으며 기운이 다해(사 53 : 4) 나환자같이 부끄럽게 쓰러질 시간이 임박했었다(사 53 : 3참조). 그때에는 전혀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한 곳에서는 죽을 것, 낮은 것으로 보였으나 다른 곳에서는 불멸하는 또 영화된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그것은 마르시온에게 큰 창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들의 견해가 옳다면 같은 일이 매일 생길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상징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고 그들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59 그러나 이런 해괴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수치를 전혀 수치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건드리지도 않는 우리를 공격하며 무서운 모욕을 가한다.

 

 

 

18.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만일 그들이 주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고착시키고자 한다면, 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분리될 것이다. 떡은 잔과는 별개로 제시되므로 떡에 붙은 몸은 잔에 있는 피와 나누어질 것이다. 그들은 몸이 떡 속에 있고 피가 잔에 있어서 각각 차지하는 공간에 의해서 떡과 포도주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몸과 피가 서로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감출 도리가 없다.

병재( 在)에 의해서 피는 몸 안에 있으며 몸은 피 속에 있다고60 하는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은 전혀 불합리하다. 몸과 피를 포함한 상징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눈과 마음을 가진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가서 그리스도 나라의 영광 속에서 그를 찾는다면, 상징들이 완전하신 그에게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떡이라는 상징 하에 그의 몸을 먹게 되며 포도주라는 상징 하에 그의 피를 따로 마시게 되어 결국에는 그를 완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그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몸으로 승천하셨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즉 아버지의 권능과 존귀와 영광으로 다스리신다. 이 나라는 공간 가운데 위치가 한정되거나 경계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어디서든지 뜻대로 권능을 행사하시며 아무런 방해도 받으시지 않는다. 권능과 힘으로 자신의 임재를 알리시며 자신의 백성 중에 항상 계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그들 안에 계시고 마치 육체로 계시듯이 그들을 지탱하고 강화하며 살리며 해를 받지 않게 하신다. 요약하면,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며 자신의 영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런 모양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19.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61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거나 떡 속에 포함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62(이렇게 하게 될 경우 분명히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끝으로, 그의 키를 낮게 하거나 여러 조각을 만들어 동시에 여러 곳에 분배하거나 그가 하늘과 땅에 가득한 무한한 부피를 가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진정한 인성에 배치된다. 우리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제한이 있다. 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해서는 안 된다-그리스도를 끌어내려 세상의 썩을 요소들 밑에 두거나 지상의 피조물에 고착시킨다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⑵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돌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무한하다고 하든지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시다고 한다면 이 둘째 제한을 어기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만 제거한다면,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표시되는 바와 같이 주의 몸과 피를 참으로 또 실질적으로 나눠 가지는 일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즉 신자들은 상상력이나 이해력만으로 받지 않고 다름 아닌 영생을 위한 영양으로서 본체를 즐긴다는 뜻을 표현해야 한다.

사탄의 무서운 마술이 여러 사람의 정신에 착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세상이 견해를 싫어하거나 편견 때문에 변호의 길이 막힐 까닭이 없다. 확실히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모든 점에서 성경과 일치한다. 불합리한 점, 막연한 점, 애매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진정한 경건과 건전한 교훈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거슬리게 하는 것이 전혀 없다. 다만 궤변가들의 무지와 야만성이 교회를 지배한 시대에는 이런 밝은 광명과 계시된 진리가 부당한 압박을 받았다. 지금도 사탄은 말썽꾼들을 통해서 온갖 비방 중상으로 진리의 위엄을 더럽히려고 이 문제에 유달리 애를 쓴다. 따라서 이것을 더욱 신중하게 주장하며 변호할 필요가 있다.

 

 

 

20. 말씀으로 제정하심

 

그런데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행동 자체를 논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특히 여기에서 가장 그럴 듯한 항의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에게 씌우는 부당한 오명을 벗기 위해서 먼저 그 말씀부터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세 복음서 기자와 바울이 기록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마 26 : 26, 막 14 : 22, 고전 11 : 24 참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 : 26),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전 11 : 24). 잔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 : 28, 막 14 : 24). 그러나 바울과 누가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한다(고전 11 : 25, 눅 22 : 20).

화체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대명사는 떡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성별은 말씀의 내용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대명사가 가리킬 수 있는 본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63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에 대해서 양심적이라면,6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그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허구는 떡이던 것이 지금은 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집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을 자기의 몸이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떡을 집으셨다. 그러므로 그 떡을 아직 보이고 계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떡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그 형상에 옮기는 것처럼 불합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est"("몸이다"의 "이다")라는 말을 "본질이 변화된다"는65 뜻이라고 해석해서 더욱 무리하고 난폭하게 왜곡된 주해로 도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체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다"를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언어에서도 들은 일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에 떡을 남겨 두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매우 다르다. 그들 중에서 온건한 편인 사람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고수하지만 후에 그 엄격한 태도를 버리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떡 안에 그리고 떡 밑에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66 그들이 주장하는 정체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말했고 앞으로도 곧 더 말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다만 말씀만을 논하려는데, 그들은 그 말씀에 의해서 떡은 몸의 표징이므로 떡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든 은유를 피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단순하게 지적하신 말씀에서 그들 자신의 아주 다른 용어로 비약하는가? "떡은 몸이라"고 하는 말과 "몸은 떡과 함께 있다"고 하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떡은 몸이라"는 단순한 발언은 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난관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더 대담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말한다면 떡은 몸이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문자론자임을67 확실하게 증명한다. 그렇다면 떡이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그런 분명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해도 그들에게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의 전체가 제공된다고 모든 사람이 일치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하고 썩을 요소에 대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모독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말과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하는 말은 서로 뜻이 같으냐고 묻고자 한다. 다르다고 인정한다면(그들은 싫더라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디가 다르다는 것을 대답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일 것이다. 즉 떡은 성례적인 의미에서68 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일반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문법으로 검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나는 모든 문자 고수파에게, 누가와 바울이 잔을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부를 때(눅 22 : 20, 고전 11 : 25) 그들은 앞 문장에서 떡을 몸이라고 부를 때와 같은 뜻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신비의 한 부분에 대해서 품은 존경심을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똑같이 품었기 때문이다. 말이 간단하면 뜻이 막연하고, 더 긴 이야기가 뜻을 더 잘 밝힌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자주 한 마디 말에서 떡이 몸이라고 추론할지라도 나는 여러 마디 말에서 떡은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라고 적합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바울과 누가가 한 것보다 더 충실하고 확실한 해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미 주장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감소하고 싶지 않다.69 그들이 말에 대해서 맹렬하게 싸우는 미련한 고집을 논박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바울과 누가의 권위에 의해서 나는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그의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생각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싸우는 것이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외하므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을 감히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없노라고 아무리 외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는 이유들을 모두 배제할 수 있는 타당한 구실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세우는 이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확인된 언약은, 우리를 그와 하나가 되게 하는 저 비밀한 교통이 그 언약에 결합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확고한 말씀의 비유적 해석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본체와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본체의 이름이 비유적으로 상징에 주어졌으나 매우 적절한 유추가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풍유와 비유를 말하지 않겠다. 내가 도피처를 찾으며 목전의 문제에서 이탈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표현을 일종의 전유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신비한 일들을 논할 때 보통 전유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예컨대 "할례는 언약이라"(창 17 : 13), "어린양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출 12 : 11), "율법의 희생은 속죄라"(레 17 : 11, 히 9 : 22)와, 끝으로 "물이 흘러나온 광야의 반석은"(출 17 : 6), "그리스도시라"(고전 10 : 4)라는 표현들은 뜻을 옮겨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이름을 옮길 뿐 아니라 보이는 표징의 이름도 표징이 의미하는 것에 붙인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으며(출 3 : 2) 언약궤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르고(시 84 : 8, 42 : 3)70 비둘기를 성령이라고(마 3 : 16) 부른 것과 같다. 상징은 그 의미하는 것과 본질이 다르지만 후자는 영적이며 하늘의 것이요 전자는 물질적이며 지상적이므로, 상징은 성별에 의해서 대표하게 된 그 본체를 상징하는 단순한 빈 표일 뿐 아니라 그 본체를 정확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본체에 붙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창출한 상징들이 목전에 있는 것의 표지라기보다는(상징은 목전에 있는 것을 잘못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목전에 없는 것들의 형상이면서도 없는 일들의 명칭으로 장식되는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들은 그것들이 항상 명확하고 틀림없이 의미하는 사물들의 이름을 차용하며 이것들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심히 유사하며 근사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논적들은 우리를 "비유파(tropists)"71라고 부르는 등 불쾌한 재담들을 많이 덮어씌우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 그들은 우리 성례에 관한 어구들을 성경의 일반 어법에 따라서 설명했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만, 성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이 전유에서 일종의 공통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영전 음료가 솟아난 반석을 그리스도였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이(고전 10 : 4)-반석은 보이는 표징이었고 그 밑에 영적 음료가 참으로 있었으나 영적 음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을 떡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떡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우리가 참으로 먹도록 제시하실 때 사용하신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가 새로 안출된 것이라고 경멸하는 사람이 없도록, 어거스틴이 같은 방법으로 느끼며 말한 것을 소개하겠다. "만일 성물들이 그 표시하는 사물들과 유사점이 없다면 그것은 전혀 성물이 아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사점으로 인하여 성물은 자주 실물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는 성물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대표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피인 것과 같이 믿음의 성물은 믿음이다." 어거스틴에게는 비슷한 구절이 많지만 일일이 그것을 열거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 것이다. 이는 이 한 구절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들은 저 거룩한 분이 에보디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동일한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성례에서 전유가 자주 또 보통으로 사용된다고 단정할 때 성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은 경박한 회피다. 이 회피를 인정한다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을 추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동물은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으므로 소와 말은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논법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거룩한 분이 다른 곳에서 한 말이 있으므로 이 이상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의 표징을 주셨을 때 그것을 그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으셨다고 한다. 또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내력은 놀랍다. 이는 자기의 몸과 피의 형상을 제정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는 잔치에 유다를 부르셨기 때문이다"72

 

 

 

22. "이다"라는 말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모르는 고집 불통의 사람이 "이것은‥‥‥이다"73라는 표현을 고집하면서 이 신비는 다른 모든 신비와 다르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쉽다. 그들은 이 연결 동사는74 강조하는 힘이 있어서 비유적 표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떡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75이라고 부르는 곳에도(고전 10 : 16) 이 연결 동사가 있다. 그러나 참여는 몸 자체와는 다르다.

참으로 성물들이 고려되는 곳에는 거의 같은 말이 나타난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est의 미래형)"(창 17 : 13),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76이니라"(출 12 : 11, 12 : 43 참조). 요약하면, 바울이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est의 완료형)"고 할 때(고전 10 : 4) 여기에 있는 연결 동사는 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 것보다 강조하는 힘이 적은가?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est의 과거형)"고 말할 때(요 7 : 39) 여기에 있는 연결 동사("계시다")의 힘은 어떤 것인가? 만일 그들이 자기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존재하기 시작하신 것같이 그의 영원한 본질이 파괴될 것이다. 끝으로, 세례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est의 부정형) 한(딛 3 : 5)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를 그들은 대답해야 한다. 세례가 분명하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2 : 12) 그들을 가장 강력하게 논박한다. 그는 사람의 몸과 비교한 다음에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첨부한다(고전 12 : 12).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체들에게 있는 독생자를 의미한다.

이 정도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선전하지만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그런 중상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결코 그들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들보다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다룬다. 참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완고한 태도를 옹호하는 구실을 주기만 하면 그 말씀의 참 뜻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들의 안이한 확신이 보여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검토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입술로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인간적 감각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증스럽게 교만을 부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비난이 얼마나 편파적인가 하는 것은 대체로 이미 밝혔고 또 앞으로 더 밝히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지시하실 때 즉시 응답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정한 뜻을 연구하는 것이 죄냐 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23. 순전한 문자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 선량한 선생님들은 학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문자에서 조금이라도 탈선하는 것을 금지한다.77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을 "용사"라고 부를 때에(출 15 : 3)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너무도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을 사람과 비교해서 한 것이라고 믿는다.

참으로 고대의 신인 동형 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论者)들이 정통 교부들을 괴롭힌 것도 오직 이 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컨대 "하나님이 보신다"(신 11 : 12, 왕상 8 : 29, 욥 7 : 8 기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민 11 : 18, 삼하 22 : 7, 왕하 19 : 28 기타), "그의 손을 펴셨다"(사 5 : 25, 23 : 11, 렘 1 : 9, 6 : 12 기타),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사 66 : 1, 마 5 : 35, 행 7 : 49)고 하는 어구들을 열심으로 모았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에게 몸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 몸을 빼앗는다고 항상 외쳤다.78 이 원칙을 인정한다면 한정 없는 야만적인 사상이 믿음의 빛을 덮어 버리게 될 것이다. 이 광신자들이 성경의 일점 일획을 남기지 않고 들춰내서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주장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들은 어떤 해괴하고 어리석은 말인들 하지 않을까 ?

반대론자들은, 역경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특별한 위로를 준비하신 그리스도께서 막연한 말씀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했을 리가 없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는 사실상 우리의 주장을 지지한다. 떡은 몸의 상징이므로 떡을 몸이라고 하신 것은 비유라는 것을 제자들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런 해괴한 일에 반드시 마음이 어지러워 졌을 것이다. 요한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제자들은 조금만 난해한 문제에 부딪혀도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께로 가시겠느냐고 서로 물으며,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도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요 14 : 5-8, 16 : 17), 그렇다면, 모든 이성이 거부하는 것 곧 자기들이 보는 곳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떡 밑에 포함되어 있다는 불합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 떡을 먹음으로써 찬성의 뜻을 표명한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와 같은 뜻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이름이 표징에 옮겨진다는 것을 즉, 성물들에는 드물지 않은 이 일을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우리와 같이 제자들에게도 확실하고 분명한 위로가 되었는데 그것은 수수께끼에 가려진 위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해석을 듣고 뒷걸음질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이 마귀의 홀림에 빠져 눈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어려운 수수께끼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비유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만일 우리가 이 어구를 정확하게 고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잔과 떡에 대해서 따로따로 말씀하신 것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떡을 몸이라고 부르시고 포도주를 피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혼동된 반복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과 피를 서로 가르는 구분이다. 사실 떡과 같이 잔에 대해서도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며, 반대로 떡을 피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만일 이 상징들을 채택한 목적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나는 물론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아무리 몸을 빼려고 해도, 떡이 피며 포도주가 몸이라는 이 불합리가 항상 그들의 오류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들은 떡과 몸은 서로 다른 물건임을 인정하면서,79 한 쪽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다른 쪽을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뜻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옷과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옷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옳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모욕을 주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미친 듯이 왜곡하며 혼동한다는 것과 우리는 충실하고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우리는 실지로 증명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에게 불어넣고 있으니, 이 궤변가들이80 얼마나 부당한 일을 우리에게 하는지는 독자들이 쉽게 판단할 것이다.

 

 

 

24. 우리의 해석은 이성에 지배되었다고 하는 비난에 대답한다

 

그러나 부정직하다는 수치를 완전히 씻어버리려면 또 한 가지 비난도 말살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의 이성에 매여서 자연의 질서가 허락하며 상식이 명령하는 것밖에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는다고81 호언장담한다. 이런 사악한 중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친 주장을 보라고 권고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이 신비를 인간의 이성을 표준으로 측정하거나 자연 법칙에 예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로 우리의 영혼을 먹여 주시지만 우리의 몸은 떡과 포도주에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과학에서 배웠는가를 나는 묻는다. 영혼을 살리는 이 힘은 어디로부터 육체에 오는가? 누구든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기뻐하는 일도 아니다. 요컨대 우리의 주장을 맛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밀한 힘을 경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선량한 열성가들은 자기들을 위한 기적을 조작해서는 그 기적이 없어지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도 사라지게 한다.

나는 내 교리의 의도를 성실하게 생각하라고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고자 한다. 나의 주장은 상식에 의존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날개를 타고 이 세상을 초월한 다음에 하늘을 향해서 높이 솟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살과 피의 본질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외형적인 상징과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한다. 이 간단한 말에 포함된 많은 기적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우둔하다는 정도를 넘은 사람들이다. 땅에서 태어나 죽음을 당한 살에서 우리의 영혼이 영적이며 천상적인 생명을 빌린다는 것 이상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 하늘과 땅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그 멀고먼 거리를 넘어 서로 연결될82 뿐만 아니라 하나가 되어, 영혼이 그리스도의 살에서 영양을 얻는다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은 우리가 사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어느 정도로 국한시키려고 한다는 추악한 거짓말로 우리에게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은 미련한 오해를 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궁색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가 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다고 단정한다. 죄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히 4 : 15, 2 : 17 참조). 우리의 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 자체의 일정한 부피를 가졌고 한 곳에 있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같은 살이 여러 다른 장소를 점유하며 아무데도 없으며 따라서 부피나 형태가 없게 만들 수는 없느냐고 말한다. 미친 사람이여, 왜 그대는 하나님의 권능이 살을 동시에 살이 되게 하며 또 살이 되지 않게 하라고 요구하는가? 그대는 하나님께서 빛을 동시에 빛과 암흑이 되게 하시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빛은 빛이며 암흑은 암흑이고 살은 살이기를 원하신다. 물론 원하실 때에는 빛을 암흑으로 만드시며 암흑을 빛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빛과 암흑이 다르지 않기를 요구한즉 그대는 하나님의 지혜의 질서를83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살은 살이고 영은 영이어야 한다. 만물은 각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태와 조건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의 조건은 일정한 장소에 있어서 크기와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을 취하셨으며,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살에 부패하지 않는 성질과 영광이 주어졌고 그 살에서 자연과 진리가 제거되지 않았다.84

 

 

 

25. 말씀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밝힌 말씀이 있다고 그들은 대답한다.85 즉 말씀의 뜻을 밝히는 해석의 은사를(고전 12 : 10) 교회에서 추방하는 권리를 우리가 그들에게 허락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옛날 신인 동형 동성론자들이86 하나님에게 몸이 있다고 하던 때나 마르키온과 마니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또는 유령 같은 몸을 생각하던 때와 같은 말씀이다. 이런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려고 했다. 예컨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 : 47). 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 : 7)라는 말씀을 인용했다.87

그러나 이 대식가들은 그들 자신의 두뇌가 조작한 괴물에 의해 자연 질서가 온통 뒤집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권능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상상한 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려고 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보이지만 땅에서는 무수한 떡조각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는 추론을 하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찬에서 주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신체적으로 먹는다는 개념을 연역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입견에 끌려서 성경 전체가 큰 소리로 반대하는 이 궤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조금이라도 감소한다고 하는 비난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권능에 최고의 찬양을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고 비난하며, 그리스도의 입으로 약속된 일은 상식으로는 믿기 어렵다고 해서 배척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서 나는 전에 말한 것을 반복한다. 믿음의 여러 가지 신비에서 우리는 상식의 인도를 받지 않고, 배우겠다는 고요한 태도와 온유한 정신으로 야고보가 교훈한 바와 같이(약 1 : 21) 하늘에서 내련 주신 교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문제에서는 우리가 유익하고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혀 생각하시지 않은 기적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 공상에서 여러 가지 추악한 불합리가 생겨날 때에, 그들은 이미 경솔하게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의 심연에 뛰어들어 이 방법으로 진리의 빛을 끄려고 한다. 여기서 그들의 다음과 같은 교만하고 괴팍한 태도가 생겨났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방밑에 숨어 계시는가를 알고자 하지 않고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중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연구함으로써 성경 전체와 같이 이 구절에 대해서도 건전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

처음에 언뜻 생각난 것을 덮어놓고 경솔하게 붙잡는 변태적인 열성을 우리는 취하지 않는다. 도리어 부지런하게 명상한 후에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시는 뜻을 받아들인다. 이 뜻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 반대되는 모든 지상의 지혜를 내려다본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 뜻에 대해서 감히 한 마디도 항의하지 못하게 하며 그 교만을 꺾어 감히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했다. 성경에 그다지 통달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우리의 설명은 성경의 일정 불변한 용법에 비춰볼 때 성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모두 안다.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를 본받아,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눅 1 : 34) 묻는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6.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제의한 교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연역되었으며, 그 말씀의 권위를 근거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경건한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될 것이기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이 점도 밝히겠다. 부활하신 때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하며88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보관되어 머무신다는 것은(행 3 : 21 참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 나는 그들이 이 점을 증명하는 구절들을 거만하게 회피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겠다(요 14 : 12,28, 16 : 7), 세상을 떠나시겠다(요 16 : 28)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들은 떠나신다는 것은 죽을 성질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89 그러나 이런 논법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말과 같이 자기의 부재중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성령을 대신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부재중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뒤를 잇지 않으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을 생명의 상태를 취하려고 하늘 영광에서 다시 내려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령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반대 현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보내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육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항상 이 세상에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마 26 : 11, 요 12 : 8).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자기가 항상 가난하거나 가련한 상태에 있거나 이 짧은 생명의 욕구에 예속되지 않으리라는 뜻을 말씀하신 데 불과하다는 것같이, 이 말씀을 깨끗이 말살했다고 생각한다.90 그러나 이 구절의 전후 관계는 분명히 이런 해석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곤궁이나 빈곤이나 지상 생활의 가현성이 문제가 되어 있지 않고 경배와 영예가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름을 부은 것을 제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낭비이며 거의 사치에 가까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낭비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그런 영예를 받도록 항상 함께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마 26 : 8-11)

그리고 어거스틴은 조금도 애매 모호한 점이 없는 말로 우리의 설명과 같은 설명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신체의 임재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실행하셨기 때문이다(마 28 : 20). 그러나 말씀이 입으신 육에 관해서는-처녀에게서 나시고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셨다가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에 싸여 무덤에 놓였다가 부활로 나타나신 그 육에 관해서는-'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왜? 신체적인 임재로 40일 동안 제자들과 교제를 가지셨고,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두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이다(행 1 : 3,9). '그가‥‥‥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 : 6). 그는 하늘에 올리우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막 16 : 19). 그러나 그는 여기에 계신다. 그의 위엄의 임재는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 1 : 3). 그의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는 항상 우리는 그를 모시고 있으나 육의 임재에 관해서는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옳다. 교회는 육의 임재에 따라서는 그를 수일 동안 모셨을 뿐이며 지금은 믿음으로 그를 가졌으며 눈으로는 볼 수 없다."91

여기서 어거스틴은(역시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 사이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혜 안에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는 놀라운 일을 포함시킨다. 다만 우리는, 이 참여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물질적 요소 밑에 포함되어 있는 가상한 몸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주께서는 사람이 만지며 볼 수 있는 살과 뼈를 가지셨다고 증거하셨다(눅 24 : 39, 요 20 : 27).

또 "떠나간다"와 "올라간다"라는 말들은 떠나며 올라가는 것같이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실지로 그 말에 표현된 대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하늘의 일정한 구역을 한정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이것이야말로 들추어내기를 좋아하는 무익한 질문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92

 

 

 

27. 위에서 말한 올라간다는 뜻

 

그러나 우리는 왜 "승천"이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는가? 이 말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뜻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하늘은 그리스도의 지배의 위엄을 의미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천 자체의 모양은 어떠했는가? 바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높이 들려 올라가시지 않았는가? 복음서 기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리워 가셨다고 하지 않는가?(행 1 : 9, 막 16 : 19, 눅 24 : 51) 이 영리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란 것을 신자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보는 데서 구름 가운데로 들려 가셨다고 말한다. 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임재를 우리가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가 일순간에 사라지시거나 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시기 전에 구름이 그를 싸버릴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공중으로 높이 들려 올라가시며 구름이 그의 아래 있음으로써(행 1 : 9) 다시는 그를 땅 위에서 찾을 수 없으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우리는 그의 주소는 이제 하늘이라고 추론해도 무방할 것이다. 바울도 하늘로부터 오실 그를 기다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빌 3 : 20). 그러므로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경고하며, 하늘로 올린우신 이 예수는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다(행 1 : 11).

여기서도 건전한 교리의 원수들은 한 미봉책을 강구해서는 그것을 영리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땅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백성 사이에 보이지 않게 계시며, 그 때가 되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시리라고 생각한다.93 이것은 저 천사들은 이중의 임재를 암시했으며 단순히 제자들을 승천의 목격자로 만들어 아무 의심도 남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천사들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그대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그는 그의 하늘나라를 되찾으셨으므로, 이제부터 그대들은 그가 세상에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하늘을 독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을 그의 곁으로 모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8. 어거스틴의 증언

 

그러나 이 기형적인 교리의 수호자들은 고대 저술가를 특히 어거스틴의 시인94에 힘입어 그것을 장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완고한 시도를 간단하게 폭로하겠다. 그들은 박식하고 경건한 분들의 글에서 증거를 수집했다.95 나는 남이 이미 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원하는 사람은 그분들의 노작에서 그러한 것을 찾도록 하라. 나는 이 문제에 관련된 어떤 자료도-어거스틴의 글이라도-모으지 않고, 몇 가지 증언만으로 그가 전적으로 우리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96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거스틴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고,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즉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희생 제물이 분배된다는 생각이 그의 저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같이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인데, 그는 그것을 "감사" 또는 몸의 성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뜻으로 "살"과 "피"라는 말들을 썼는가를 구태여 우회적인 방법으로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성물들은 그 의미하는 것과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그 이름을 믿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몸의 성물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 자신이 설명한다. 잘 알려진 다른 구절도 이 설명과 일치한다. "주께서는 표징을 주셨을 때에, 서슴지 않고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에 떨어져 입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기록했다고 다시 항의한다. 물론 그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며 그는 이 두 가지 말을 서로 연결시킨다. 이 신비가 실행된 후에 떡은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 그의 발언은 이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이 일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행할 때 기적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일이라고 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의 논적들이 경솔하게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신비로운 떡을 제자들에게 내주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손에 들고 계셨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유사성을 표시하는 부사 "이를테면"을 넣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빵 속에 참으로 또 진실로 들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밝힌다. 물론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공간 내의 위치를 빼앗긴 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데도 없으므로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권능을 행사하시는 성찬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구차한 궤변이다. 그리스도의 살에 관해서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이 거룩한 분은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살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으나 그 본성은 제거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이 살의 형태로 각처에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할 때 그의 몸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반드시 각처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한 위격이며 둘이 다 한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며, 사람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하늘에 계신다." 만일 그가 논한 교리에 반대되는 일이 성찬에 있었다면, 이 중대한 성찬의 신비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을까? 그러나 조금 뒤에 있는 말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성찬도 이 일반적인 주장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어거스틴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동시에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전적으로 각처에 계신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즉 교회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몸으로서 하늘의 어느 곳에도 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연합시키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하늘에서 가져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담겨 있어야만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실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하늘에서 가져오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유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표징을 통해서, 세례의 성례를 통해서, 성단의 양식과 음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표시하는 상징가운데 그가 미신적인 의식을 넣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의 임재와 십자가의 표징을 비교할 때 그는 두 몸을 가진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밝힌다. 하늘에 보이게 앉아 계시면서 떡 속에 비밀히 숨어 계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가 곧 뒤에 첨가한 것을 보면 된다.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는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고, 살의 임재에 관해서는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옳다(마 26 : 11).

그들은 그가 곧 첨가한 말이 있다고 반박한다. "형언할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 : 20)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서 그들은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몸과 항상 대립되는 권위에 한정되었고, 살은 분명히 은혜나 권능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른 구절에서도 동일한 대조를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영적으로 함께 계시기 위해서 자기의 신체적 임재를 철회하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에는 그가 살의 본질과 성령의 권능을 구별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어거스틴은 자주 같은 종류의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과 건전한 교훈의 표준에 따라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신체적으로도 계실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도 그들에게 와서 계실 것이며 세상에 있는 교회 전체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리라고 하셨다"(마 28 : 20, 요 17 : 12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가 신체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구원하기 시작하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영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신체적으로는 그들을 떠나려고 하셨다. "신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임재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신적 권능을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하늘로부터 우리 위에 부어 주신다는 것을 밝힌다.

 

 

 

29.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임재라는 속임수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는데, 이제부터 그들이 얼마나 그 속에 잘 숨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리스도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말을 그들은 성경에서 한 마디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신이 건전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가면 밑에 숨어 있지 않다면 성찬 때에 그 몸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과 우리와의 논쟁점이다. 그것은 결코 한 원칙으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지껄이는 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중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본래 그대로 보이지만 성찬에서는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립되느냐 하는 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베드로의 증거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은 그를 마땅히 받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행 3 : 21).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공간의 각처에 계시나 형태는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것은 영광의 몸의 본성으로서는 잘못이라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모든 경건한 사람이 당연히 가증하게 여기는) 세르베투스의 불건전한 생각이 따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삼켜졌다는 것이다.97 나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을 영화된 몸이 받은 한 은사라고 한다면, 몸의 본질이 말소되며 신성과 인성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에,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서 한 곳에서는 보이게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의 부피로 존재하는 몸의 본성은 어디 있으며 몸의 통일성은 어디 있는가? 터툴리안은 훨씬 올바른 주장을 했다. 즉 성찬식에서는 영적 생명의 담보와 보증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것이며 또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98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도 영화된 몸에 대해서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하셨다(눅 24 : 39).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는 만질 수 있으며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살의 실재성을 증명하셨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으면 살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이 조작한 특별 섭리란 것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주장하시는 뜻을 무조건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시므로 유령이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의 본성에 고유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을 제거한다면, 몸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어느 쪽으로 몸을 피하든 바울은 그들이 조작한 처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는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한다(빌 3 : 20-21).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특성들을 우리도 가지게 되어, 모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몸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심한 불합리를 믿을 우매한 사람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면서 어느 공간에도 들어 있지 않는다는 특성을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 돌리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그들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육신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우리도 그와 공통된 부활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우리의 육신으로 그와 함께 같은 영광에 참여하는 동참자와 동반자로 만드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을 취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보속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으로 수난을 받으신 것과 같이 부활하실 때에도 동일한 참 육신을 받으셨고, 그 육신을 하늘로 가지고 가셨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어느 교리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의 부활과 우리의 승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터툴리안이 말한 대로 우리가 부활하리라는 보증을 가지고 하늘로 가셨다는 것이다.99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이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부활하지 않으며 천국에도 올라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소망은 얼마나 무력하고 덧없는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몸이 공간 안에 있다는 것, 자체의 부피와 형태를 가졌다는 것이 몸의 진정한 본성이다. 자, 이제 사람의 마음과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는 이 미련한 허구는 사라져라!

 

어떤 의도로 그리스도께서 떡 밑에 숨어 계시다고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결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상징에서 머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지상에서 철회하기를 원하셨고,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여인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금지하셨다(요 20 : 17). 마리아가 진정과 열성과 경외의 태도로 급히 주의 발에 입맞추려 했을 때, 하늘로 올리워 가실 때까지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금지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늘에서만 자신을 찾기를 원하셨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그는 후에 스데반에게 보이셨다고(행 7 : 55) 하는 그들의 항의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처소를 바꾸실 필요가 없이 그의 종의 눈에 여러 층의 하늘을 꿰뚫는 맑은 시력을 주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행 9 : 4).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닫힌 무덤에서 나오셨으며(마 28 : 6) 닫힌 문으로 제자들에게 들어가셨다고(요 20 : 19) 항의한다. 이 사실도 그들의 오류를 옹호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호수 위를 걸으셨을 때에 물이 포장 도로와 같은 길을 제공한 것같이(마 14 : 25) 그가 가까이 가셨을 때에 단단한 돌이 길을 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의해서 돌이 옮겨졌다가 그가 통과한 다음에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다. 닫힌 문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딱딱한 물체를 통과하셨다기보다는 거룩한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셔서 비록 문은 잠겨 있었을지라도 놀라운 방법으로 돌연히 제자들 사이에 분명히 서 계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까지 함께 가신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누가복음의(눅 24 : 31) 기사를 그들은 인용하지만 이것도 그들에게는 유익이 되지 못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만 없어진 것이다. 같은 증인 누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을 때 주께서는 알아볼 수 없는 새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눅 24 : 16).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처소에 따라 다르게 만들며 그 자신과도 다르게 만든다. 요컨대 그들은 그렇게 상상함으로써 직접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인 말로 그리스도의 육신에서 한 영을 만들어 낸다. 또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혀 반대되는 여러 가지 성질을 부여한다.2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이중이라는 필연적 결론이 발생된다.

 

 

 

30.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배척한다

 

보이지 않는 임재에 대해서 그들이 지껄이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무한성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을 것이며, 무한성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떡 밑에 넣어 두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각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성찬 때에 떡 밑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저 편재성이라는 해괴망측한 생각을 도입했다.3

그러나 성경의 확고하고 분명한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가 증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적인 몸의 한도에 따라 국한되어 있었다. 또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모든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으로 옮기실 때에는 전에 계시던 곳을 떠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마 28 : 20) 인용하지만 이 약속도 몸에 적용할 것이 아니다. 첫째, 항구적인 연결이 성립하려면 성찬 집행과는 별도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신체적으로 거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성찬의 떡 밑에 넣어 두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사납게 싸울 타당한 이유가 없다. 둘째, 문맥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의 살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고, 다만 제자들에게 무적의 원조를 약속하여 사탄과 세상의 모든 공격에 대항해서 그들을 보호하며 지탱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사명을 주신 다음에, 그들이 주저하거나 또는 사명을 수행하더라도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하지 않도록 그가 함께 계시겠다는 확약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셨다. 그들은 반드시 보호를 받을 것이며 아무도 이 보호를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들에게 만사를 혼동시키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모양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을까?

분명히 일부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부끄러운 무지를 폭로해서 큰 수치를 당할지언정 오류는 추호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카톨릭 교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교리는 오히려 용서할 수 있으며 적어도 과격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투쟁열에 취해서, 그리스도 안에는 양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과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육신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마치 양성의 결합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어떤 중간적 존재가 합성됐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참으로 유티케스가4 그렇게 가르쳤고 세르베투스도 그의 뒤를 따랐다.5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양성이 있지만 그 양성들은 각각 그 고유의 특징을 본래대로 유지하며 아무 손상을 받음이 없다고 분명히 추론한다. 그들은 유티케스가 당연히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부끄러워서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그가 정죄된 원인을 무시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는 양성의 구별을 제거하고 위격의 단일성을 역설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사람을 또 사람으로 하나님을 만들었다. 지금 그들이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오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혼합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 착란인가?

그들이 자기들 편을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 : 13),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 : 18). "속성의 교통"6을 멸시하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거룩한 교부들은 오래 전에 속성의 교통이란 말을 만들어 유익하게 사용했다.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고전 2 : 8) 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수난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배척과 모욕을 당하며 육신으로 수난을 당한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는 또 하늘에 있는 인자였는데(요 3 : 13), 이는 육신을 따라 인자로서 지상에 살던 바로 그 그리스도가 하늘에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면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고 한다. 신성이 하늘을 떠나서 신체라는 감옥에 숨었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은 비록 만물에 충만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해서 육체로 거하셨다는 뜻이다(골 2 : 9). 즉 본래대로 그리고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거하셨다는 뜻이다.7 스콜라 학자의 상투적인 구별을 언급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는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8 이 발언의 힘을 스콜라 학자들 자신이 정직하게 고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라는 어리석은 공상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자는 그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므로 항상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성찬에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즉 그리스도 전체가 계시지만 완전히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판하러 나타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31.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에서 살이 떡 속에 있지 않으면 살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비밀히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올리신다면 우리는 그의 임재를 똑같이 즐길 수 있으리란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임재의 방법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고, 우리는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이 올바른지는 독자들이 결정하라. 단 그리스도께서 떡 밑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성찬에서 제거된다고 하는 중상모략은 그만 둬야 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32-34)

 

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만일 누가 이 일이 어떻게 생기느냐고 문의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고상한 비밀이어서 나의 지성으로 이해하거나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고백할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비밀을 이해한다기보다 경험한다.9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여 그 진리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는 그의 살은 나의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영혼의 음료라고 선언하신다(요 6 : 53이하). 나는 나의 영혼을 그에게 드려 그런 양식을 받아먹게 한다. 거룩한 만찬에서 그는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그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며 마시라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참으로 그가 친히 주시며 또 내가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위엄에 합당하지 않거나 그의 인성의 실재성과 양립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생각들만을 물리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으로 충돌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천국 영광에 들어가셔서(눅 24 : 26) 모든 지상적인 상태를 초월하셨다고 가르치며, 동시에 진정한 인성에 있어서 고유한 일들이 그의 인성에도 있다고 엄밀하게 밝힌다.

이것을 믿을 수 없다거나 이성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는 영적인 것이므로, 그가 교회에 대해서 역사 하시는 일을 이 세상의 이성에 예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 다른 신비들과 같이 이 신비도 사람이 집행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하는 일이지만 천상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10 몸의 임재는 이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임재인데, 이 임재는 강력한 권능과 효과로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부동의 확신을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도 영생 불사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참으로 우리의 육은 지금 그의 영원 불멸의 살에 의해서 생명을 얻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영생 불사에 참여한다.

 

자기의 과장된 생각으로 이 한계를 넘는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으로 단순하고 평이한 진리를 흐리게 할뿐이다.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나와 함께 잠깐 신중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금 논하는 성례는 그 전체를 믿음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언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몸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는 사람들 못지 않게 우리의 믿음에 풍성하고 훌륭한 양식을 먹인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영혼과 혼합된다느니 우리의 영혼에 주입된다느니 하는 그들의 생각을11 배척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의 본질에서 생명을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으신다면-참으로 그의 생명 자체를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다면-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모든 성경 해석이 따르기를 요구하는(롬 12 : 3,6) 믿음의 유추는 확실히 이 문제에서 우리의 견해를 현저하게 지지한다. 평이한 진리에 완강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의 표준을 따르고 있는가를 반성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요일 4 : 2-3). 이 사람들은 숨기거나 또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육신을 빼앗는다.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성찬 참여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 그들은 떡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삼키지 않는다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중대한 해를 가하게 된다. 우리가 가르치고 고대 교회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신비의 능력이 과거 400년 동안을 당연히 받을 존경을 받았다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이었을 것이다. 무서운 분쟁을 일으킨 여러 가지 추악한 오류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나12 지금이나 교회는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고 또 당하고 있다. 동시에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성경에 전혀 없는 과장된 임재 양식을 주장한다.

 

그들은 마치 경건의 전체가 속담에 있듯이 "이물과 고물"이13 그리스도를 떡 밑에 가두어 두는 데 있는 것같이 미련하고 경솔하게 생각한 이런 주장에 대해서 떠든다. 일찍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우리 것이 되는가, 또 일찍이 흘리신 그의 피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소유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우리도 즐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가장 중요한 일들을 보지 않고, 아니 무시하고 거의 매장하면서 이 한 가지 곤란한 질문 즉 그리스도의 몸은 어떻게 떡 밑에 또는 떡의 형태 밑에 숨어 계시느냐고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우리가 먹는 방법에만 주의한다고 함으로써, 영적으로 먹는데 대한 우리의 주장이 모두 참으로 또 실제로 먹는 것과는 반대된다고 거짓되게 떠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 둠으로써 육적 방법으로 먹고,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유대라고 함으로써 영적 방법으로 먹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신자가 받는 유익 또는 효과만을 말한다고 하는 그들의 항의 또한 옳지 않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자신이 성찬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결과는, 그의 죽음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그의 피에 의해서 우리가 깨끗해지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우리가 하늘 생명을 바라보는 경지에까지 높여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 성찬이라는 롬바르드가 시작한 우매한 공상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비뚤어졌다. 롬바르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떡과 포도주의 형태들은 성물이고 본체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성물이며 본체다. 그의 신비로운 살은 본체요 성물이 아니다." 또 그는 "상징된 또 포함된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의 살이다. 상징되었으나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신비로운 몸이다"라고 했다. 나도 그리스도의 살과 거기에 포함된 효과적인 영양을 그가 구별한 데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살을 성물이라고 하며 심지어 떡 속에 포함되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오류이다.

 

여기에서 성례전으로 먹는데 대한 그들의 잘못된 해석이 생겼다. 그들은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도 비록 아무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 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상상했다.14

그러나 성찬의 신비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 자체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똑같이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으며 그것은 맛을 모르는 사람인 포도주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추론한다. 만일 생명과 힘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불신자에게 준다면 당연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부당하게 쪼개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분명한 말씀이 반대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 : 56). 그들은 이 구절에서는 성례전의 먹음이 문제가 아니라고 반론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면 반드시 유익을 얻는다는 과오를 그들이 반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반론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그것을 먹은 후에 얼마나 오래 그것을 보존하고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들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으리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배은 망덕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이 감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한다. 물론 나도 그것을 인정하며, 악한 사람들이 이 신비의 권능을 말살하려고 아무리 전력을 다할지라도 그 권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공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는 문제가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영적 양식을 제공하며 이 영적 음료를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먹고 어떤 사람들은 도도하게 거절한다. 거절을 당한다고 해서 그 양식과 음료가 본성을 잃어버릴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비록 맛은 없지만 역시 살이라는 비교에 의해서 그들의 견해는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미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어거스틴과 함께) 바꿔 말한다면, 사람은 믿음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만큼 성찬에서 얻어갈 뿐이다.15 이와 같이 성찬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참으로 성찬의 진리성과 효과는 여전히 감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외형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간다.

 

만일 악인들이 썩을 떡 외에는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다면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그들이 항의를 한다면, 이미 대답도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받는 일 자체에서 인정할 것이 아니라 그의 변함없는 선하심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사람들이 거절하는 것을 언제든지,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며 참으로 값없이 제공하신다. 그리고 온 세계가 범할 수 없는 성찬의 완전성은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자들에게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가 굳은 바위 위에 떨어지더라도 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만 흘러내리는 것과 같이,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 완고한 마음으로 물리쳐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씨가 불 속에서도 싹이 틀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합당치 못한 말이다.

그리스도를 부적당하게 영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기 위해 오셨겠느냐고 하는 그들의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를 부적당하게 영접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사람이 죽음을 초래한다고 했다.

또 그들은 씨가 가시덤불 속에서 싹이 났으나 가시나무에 기운이 막혀 죽어 버렸다는(마 13 : 7) 그리스도의 비유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일시적인 믿음의 가치를 논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다를 베드로와 동등한 동지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비유는 도리어 그들의 오류를 논박한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씨는 길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모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하신다(마 13 : 4-5). 이것을 보면,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의 완고한 마음이 방해물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것을 막는다는 결론이 된다.

 

성찬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신자가 우물에 인도되어(요 4 : 6-15 참조)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생명을 퍼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후에 더욱더 그와 함께 자라 마침내는 그가 하늘 생명에서 우리를 그와 완전히 결합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성찬의 존귀성을 훌륭하게 칭송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고전 11 : 27) 항변한다.16 그러나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곧 그들이 정죄당한 것은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과의 거룩한 연합의 보증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짓밟음으로써 이 신비를 모독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34. 불신자의 성찬 참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생각

 

사람의 불신이나 악의 때문에 성례에서 무엇이 빼앗기거나 그 상징하는 은혜가 말살되지 않는다는 교리는 고대 저술가들 중에서 특히 어거스틴이 주장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개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사람들이 그의 발언을 이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잘못된 것인가를 그의 말을 인용해서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들은 예전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으면서도 성령의 권능이나 은혜의 효험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신중하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 : 54,50,51), 즉 그는 보이는 성찬뿐만 아니라 성찬의 권능을 받는 사람이요 참으로 외형적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받는 사람이며 그리고 이로 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합일체인 본체의 예전적 상징은 주의 성만찬에서 제시되어 어떤 사람은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지만, 성찬이 상징하는 본체는 누가 참여하든 모두가 다 생명을 얻고 아무도 죽음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제시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본체"를 "몸"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은혜라고 부르며 또 이 은혜는 본체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궤변을 쓰는 사람이 없도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조가 이런 애매 모호한 말들을 일소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이는" 것 중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은 보이는 상징만을 받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모든 의혹을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이 떡을 위해서는 속 사람이 굶주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모세와 아론과 비느하스와 그밖에 만나를 먹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출 16 : 14이하). 왜 그들은 보이는 양식을 영적으로 이해했으며, 영적으로 주렸고 영적으로 맛보고 영적으로 배부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도 보이는 양식을 받는다. 그러나 성찬과 성찬의 권능과는 서로 다르다. 조금 후에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육신으로 또 보이게 그 몸과 피의 표징을 이로 씹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그는 보이는 표징과 영적으로 먹는 것과를 대립시5껜? 이 대립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은 영적으로 먹지 않아도 예전적으로는 실제적으로 먹는다고 하는 그들의 오류가 반박된다. 또 어거스틴은 불경하고 불결한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먹는 보이는 행동 이외에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말 즉 다른 제자들은 그리스도인 떡을 먹었으나 유다는 그리스도의 떡을 먹었다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몸과 피에 참가하는 일에서 분명히 불신자들을 제외한다. 그는 다른 데서도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떡을 유다에게 주셨으며 그것으로 그가 마귀에게 묶여 넘어간 것을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가? 그와는 반대로 사탄의 사자를 바울에게 보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완성하시지 않았는가?"(고후 12 : 7)참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바울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고전 11 : 29) 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의 떡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도 악하게 받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가를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더욱 자세하게 말한다. 입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부정하는 악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논할 목적으로(또 악인들은 예전적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기 0㎸漫?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일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지체와 창녀의 지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6 : 15).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실 때에(요 6 : 56), 그는 그의 몸을 예전적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먹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그 뜻은 곧 그리스도께서 먹는 사람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꿔 말한다면,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내 몸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신다고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말이 될 것이다."

독자들이 예전적으로 먹는 것과 실제로 먹는다는 이 대립을 잘 생각한다면 아무 의심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같은 의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언명한다. "그대의 입을 준비하지 말고 마음을 준비하라. 이 만찬은 마음을 위해서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받을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안다. 우리는 적게 받으나 그것으로 마음의 영양을 얻는다. 그러면 양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여기서도 어거스틴은 악인들이 먹는 것을 보이는 상징에 제한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앙으로만 받는다고 가르친다. 다른 구절에서도 어거스틴은 선인과 악인이 함께 상징들에 참여한다고 명백하게 말한 다음에, 후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만일 그들이 본체 자체를 받는다면 그는 자기의 입장에 더 유리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또 다른 곳에서도 먹는 일과 그 유익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만일 성찬에서 눈에 보이게 받는 것이 참으로 영적으로 먹으며 영적으로 마시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모든 사람의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몸을 보이라. 어거스틴의 생각에 의하면 모든 진상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예전적으로 먹을 때에는 불신앙 때문에 실제로 가는 문이 닫히며 그렇게 먹는 것은 보이게 또는 외형적으로 먹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먹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의 뜻은 무엇이겠는가? "너희가 보는 이 몸을 너희는 먹지 않으며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흘릴 피를 너희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한 성례를 명령하였으니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너희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께서 희생으로 바치신 바로 그 몸이 성찬에서 제공된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먹는 방법에 주목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이미 하늘 영광 속에 영접되어 지금은 성령의 비밀한 힘에 의해서 우리 위에 생명을 불어 보내신다는 것이다. 나는 어거스틴의 글에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1榴?"성례에서"라는 말을 첨가해서 자기의 뜻을 설명한다. 또 다른 구절에서는 영적으로 먹는데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혹 반대론자들이 내가 어거스틴의 말을 너무 자주 인용한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서 그들이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서만 그 상징하는 결과를 나타낸다"17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에 의해서 상징된다는 것을 감히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키릴루스도 같은 의견이었다는 것은 그의 말이 증명한다. "녹은 밀랍에 다른 밀랍을 부어서 완전히 섞는 것같이, 주의 살과 피를 받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 권능이 분리될 수는 없지만 예전적으로만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또 실제로 먹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또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까닭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바위와 돌이 빗물을 받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배척한다. 35-37)

 

35. 물질 숭배를 배척한다

 

이 일을 앎으로써 어떤 사악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성찬에 집어넣은 물질 숭배에서18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논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몸에는 영혼과 신성이 함께 있으며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된다."

우선 그들의 병재설이19 부정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려는가? 그들은 몸에서 영혼과 신성을 분리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고 역설하지만, 어떤 건전하고 바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들은 삼단 논법으로 깨끗하게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에 대해서 따로따로 말씀하시고 그가 임재하시는 모양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양심이 좀더 엄숙한 느낌으로 불안을 느낀다면 그들은 그 삼단 논법과 함께 곧 해체되며 녹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책임 추궁을 당할 때에 굳게 의지할 곳은 하나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사도들의 교훈과 모범이 자기들에 반대된다는 것과 자기들에게는 자기 이외의 권위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즉시 실신하고 만다. 이 충격에 다른 날카로운 가책도 부과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명령도 받지 않은 듯이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배가 문제되는 마당에서 성경이 한 마디도 지지하지 않는 일을 그렇게 경박하게 시작해도 좋겠는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로 모든 생각을 하나남의 말씀에 복종시켰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받아 먹으라……마시라"는(마 26 : 26-27) 주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며, 성찬을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받으라고 하신 주의 이 명령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예배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명령에서 어긋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진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이런 신념처럼 귀한 것은 없다. 사도들의 선례를 보면 그들은 엎드려 숭배한 것이 아니라 앉아서20 받아먹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 사도 시대의 교회 관습을 보면, 누가가 기록하는 대로 신자들은 함께 예배하지 않고 떡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행 2 : 42). 사도들의 교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자기가 그들에게 전한 것은 주께서 받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1 : 23).

 

 

 

36. 이런 숭배는 미신이며 우상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경건한 독자들은 이런 숭고한 문제에서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떠나 우리 자신의 두뇌의 공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를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불안이 없어질 것이다. 경건한 사람이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늘로 높이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도와 영적 신비들의 높은 곳을 볼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게 하는 것이 성찬이 하는 일이라면, 외형적인 표징에서 그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는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떡 앞에 엎드려 거기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미신적인 경배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상징들에 우리의 겸비한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을 니케아 회의가 금지한 것은 확실히 이 폐해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21 같은 목적으로 옛날에는 성별하기 전에 회중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마음을 높이 들어올리라고22 권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신중하게 보고한다.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가 볼 수 있고 따라다닐 수 있는 곳에서 거두시고 자신에 대한 우리의 육적인 사고 방법을 일소하셨다. 그뿐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를 회상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마음을 높이 들어 하늘에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를 찾으라고 한다(골 3 : 1-2). 이 원칙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둔하고 육적인 개념이 가득한 위험한 예배 방식을 고안해 낼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에 대한 예배를 고안해 낸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상상한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배에 대한 말씀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성경이 빠뜨렸을 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성경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은사를 주시는 분 대신에 그 은사를 경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면 무엇이 우상 숭배인가? 여기에는 이중의 죄가 있다. 하나님에게서 빼앗은 예배를 피조물에게 옮길 뿐만 아니라(롬 1 : 25 참고), 하나님의 거룩한 떡을 가증한 우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선물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욕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귀와 눈과 마음과 지성과 혀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훈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교사 즉 성령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전진하므로 아무것도 다른 데서 얻어 올 필요가 없으며 또 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면 기꺼이 알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37. 성별된 떡으로 행하는 미신적인 의식들

 

그러나 한번 올바른 한계를 넘은 미신은 한정 없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은 더욱더 타락했다. 표징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성찬의 제정 정신과는 전연 이질적인 의식들을 만들어 냈다. 이 경배는23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만일 성찬에서 그렇게 한다면 나는 표징에서 머물지 않고 하늘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만이 합당한 경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실로 그들은 떡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장담하는가? 그들은 소위 성체를 성별해서는 행렬에서 들고 다니며, 사람들이 보고 경배하며 기도하도록 엄숙하게 전시한다. 그것이 어떤 권능으로 올바르게 성별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물론 그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받아 먹으라"고 하셨다고 나는 항의한다. 나의 이 항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약속과 명령이 결합되었을 때에 명령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로 분리되면 약속도 전혀 약속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비슷한 예를 보면 이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는 약속을 주셨다(시 50 : 15). 만일 사람이 베드로나 바울에게 기도하면서 이 약속을 기대한다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모든 사람이 외치지 않겠는가? 그러면 먹으라는 명령을 무시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지체가 잘린 약속만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과는 이질적인 의식들에 악용하는 사람들의 소행이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과 결합된 명령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약속을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의 떡을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미 성찬이라는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돕는다는 것을 논했다.24 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서 주께서는 이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그 은혜를 우리 손에 쥐어 주시며 우리가 그것을 깨닫도록 깨우치신다. 동시에 이런 풍성한 은혜를 잊지 말고, 합당한 찬양으로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며 감사함으로 축하하라고 충고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것을 행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가르치셨다(눅 22 : 19). 바울은 이 말씀을 "주의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니라"고 해석했다(고전 11 : 26). 즉 생명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이구 동성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고백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도 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찬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다. "주의 죽으심을 (심판하러)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명령은(고전 11 : 26) 우리의 믿음이 성찬에서 인정하는 것을-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라는 뜻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찬의 둘째 사용법이며, 이것은 외형적인 고백으로 나타난다.

 

 

 

(특히 중요한 점들 : 상호간의 사랑, 설교의 동반, 병든 영혼의 약, 합당하게 먹음, 합당한 형식과 빈번한 집행. 38-46)

 

38. 성찬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셋째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 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서 성찬을 제정하셨다.25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떡은 이 단결을 표현한다. 떡은 많은 밀알로 만들었으나 그 밀알들이 섞여서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한마음으로 일치 단결해서 어떤 불화나 분열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26 바울의 말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나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 : 16-17). 우리가 이 생각을 깊이 명심한다면 성찬에서 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즉 아무 형제라도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배척하거나 박대하거나 그 밖의 어떤 모양으로든지 넘어지게 한다면, 우리의 비행은 반드시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학대하게 된다. 우리의 형제들과 불화하면 반드시 동시에 그리스도와 불화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반드시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형제들은 우리의 지체이므로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그들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몸의 일부에 고통이 있으면 그 고통은 전신에 퍼지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형제가 어떤 곤란을 받으면 버려 두지 말고 깊이 동정해야 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자주 성찬을 "사랑의 유대"라고 부른 데에는27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도 그를 본받아 서로 헌신을 약속하며 실행하라고 권고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자극할 수 있겠는가?28

 

 

 

3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2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고 한 말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거나 고백을 연습하거나 의무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거나 하는 이 모든 일을 위해서는 설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하에서 일어나는 것같이 성찬을 말없는 행사로 만드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짓이다. 그들은 성별의 힘을 전적으로 사제의 의도에 의존시킨다.30 이 신비의 뜻은 누구보다도 회중에게 설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같이 처리한다. 따라서 또 다른 오류가 생겨났다. 즉 성별을 완성하는 약속은 물질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물질들을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향해서 내 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떡을 먹으라고 제자들을 향해서 명령하시며 그들이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리라고 약속하신다. 바울도 약속이 떡과 잔과 함께 신자들에게 제공된다고 가르친다. 분명히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마치 물질이 들어야 한다는 듯이 말씀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덕을 세우며 그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박혀 떠나지 않으며 그것이 약속하는 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효력을 나타내는 산 설교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에 병자들에게 분배하기 위해서 성별된 떡을 남겨 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병자들이 받을 때에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낭독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이 신비의 뜻을 바르게 설명하고 표징을 분배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침묵에는 남용과 과오가 따른다.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고 신비의 뜻을 설명함으로써 받는 사람이 유익하게 받게 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성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성별의 효과가 병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그런 성별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고대 교회의 선례가 있다고 말한다.31 나는 이 말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오가 큰 폐해를 일으키는 이런 중대 문제에서는 진리 자체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40. 성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한다는 뜻

 

우리는 주의 만찬의 이 거룩한 떡은 영적 양식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참으로 귀한 진미가 된다. 그것을 맛볼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이심을 느끼고 감사할 마음이 생기며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자는 권고를 받는다. 이와는 반대로 이 빵을 받아도 믿음이 영양과 힘을 얻지 못하며, 감사할32 생각이나 사랑할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무서운 독약이 된다. 물질적인 음식도 나쁜 체액이 가득한 위에 들어가면, 또 그 자체도 상하고 썩은 것이면 영양보다 해를 준다. 그와 같이 이 영적 양식도 악의와 사악으로 부패한 영혼에 들어가면 더욱 큰 파멸을 일으킨다. 양식 자체에 과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주의 축복으로 성결하게 된 것일지라도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딛 1 : 15)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한다(고전 11 : 27,29). 믿음의 흔적도 없으며 사랑하겠다는 열의도 없이, 돼지같이 성찬에 뛰어드는 이런 사람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몸이 자기들의 생명이란 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만큼 그 몸을 모욕하며 그 존엄성을 박탈한다. 끝으로, 그들은 그런 모양으로 받음으로써 그 몸을 모독하며 더럽힌다. 또 그들은 형제들과 불화해서 멀어져 있으며 감히 그리스도의 몸의 신성한 상징과 자기들의 불화를 섞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찢기고 분할되지 않는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주의 몸과 피를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더럽히는 그들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이렇게 합당치 않게 먹는 그들은 자신의 정죄를 초래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성찬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다른 보장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고발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되며 자기의 유죄 판결에 날인한다. 또 그들은 미움과 악의로 형제들에게서 즉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만이 구원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기 자기 자신을 살핀 다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령한다(고전 11 : 28).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즉 사람은 각기 자기 속으로 내려가서33 홀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기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충심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가? 그리고 깨끗하고 거룩한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를 주며 함께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누어 줄 용의가 있는가? 자기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되는 것과 같이 자기편에서도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는 그들을 자기의 지체로서 아끼고 보호하며 돕기를 원하는가? 이런 것들을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의무들을 우리가 지금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정성껏 노력하며 향상시켜서 일단 출발한 우리의 믿음이 매일 자라도록 하라는 것이다.

 

 

 

41. 누가 "합당"한가

 

합당하게 먹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할 때, 그들은 보통 가련한 양심들을 무섭게 괴롭히면서도 올바른 결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 그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합당하게 먹는다고 했다. 그 "은혜의 상태"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린 상태라고34 해석했다. 이런 교리는 지상에 있던, 또 있는 모든 사람을 성찬에서 제외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절망과 멸망뿐이다. 우리는 아무리 전력을 다하더라도 전진이 없을 것이며, 합당하게 되고자 굉장히 애쓴 다음에도 결국 가장 합당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상처를 고치려고 그들은 합당하게 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힘 자라는 데까지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모든 행위를 검토함으로써 통회와 고백과 보속으로 자기의 죄를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적합한 곳에서 이 속죄의 성격을 밝혔다.35 현재 문제가 된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이런 대책들은 자기의 무서운 죄에 놀라고 낙심하는 양심들을 위해서는 너무도 무력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만일 주께서 의롭고 결백하지 않은 사람을 성찬에 참가시키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하려면 엄중한 경계심이 필요할 것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했다는 확신을 가질 근거는 무엇인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전력을 다했다는 확신을 언제 가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정확한 확신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에 대한 죄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고전 11 : 29) 무서운 금지령 때문에 문은 항상 잠긴 채로 있을 것이다.

 

 

 

42. 믿음과 사랑은 필수 조건이지만 완전성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교황 제도에서의 지배적인 교리의 성격과 그것의 출처를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떨며 슬퍼하는 가련한 죄인들에게서 성찬의 위안을 빼앗는다. 그러나 성찬에 의해서 복음의 모든 기쁨이 죄인들 앞에 제시된다. 참으로 악마가 죄인들을 가장 신속하게 멸망시키는 방법은, 지극히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먹이고자 하시는 이 양식을 맛보지 못하고 먹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멸망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서, 이 거룩한 잔치는 병자를 위한 약이며 죄인을 위한 위로이고 빈민을 위한 희사라는 것과, 건강하고 의롭고 부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먹지 못하면 신체의 힘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굶주려 기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므로, 우리 안에 그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우리의 추악함과 우리의 소위 합당치 못함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그의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만들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실망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낮춰서 하나님께서 들어올리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고발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게 하는 것이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찬에서 권면하시는 그 연합을 갈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그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므로 우리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정신과 한 마음과 하나의 말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절망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선한 것도 없고 죄로 더럽혀져서 거의 죽게 된 우리가 어떻게 주의 몸을 합당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즉 우리는 빈민으로서 친절한 희사자에게 가고, 병자로서 의사에게 가며, 죄인으로서 의롭게 만드시는 분에게 그리고 죽은 자로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타당성은, 첫째로 만사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 있으며, 둘째로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충분한 사랑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불완전한 것을 키우시며 더 좋은 것으로 만드신다.36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우리와 일치하면서도 타당성의 표준 자체에 대해서는 아주 그릇된 생각을 한다. 그들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믿음과 또 우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등한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같이 이 가장 거룩한 만찬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의 견해가 인정된다면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다는 죄책이 지적될 것이므로, 성찬을 받는 것은 반드시 합당치 못한 행동이 되겠기 때문이다. 성찬을 헛되고 불필요한 것으로 산들 정도의 완전성을 성찬을 받는 사람에게서 요구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우둔한 짓이다. 이는 성찬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곧 약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고무하고 자극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아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43. 성만찬의 합당한 집행

 

성찬의 외형적인 집행에 대해서는 예컨대 신자들이 떡을 손에 쥘 것인가, 신자들끼리 나눌 것인가? 각기 받은 것을 먹을 것인가? 또 잔을 집사들에게 돌릴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인가? 또 떡에는 누룩을 넣을 것인가? 넣지 않을 것인가? 포도주는 붉은 것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흰 것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은 불필요한 것이며, 교회의 생각대로 어느 쪽을 채용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떡을 손에 쥐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끼리 나누라"고 말씀하셨다(눅 22 : 17). 역사서들을 보면, 누룩을 넣은 보통 떡을 써 왔는데 로마 감독 알렉산더가37 처음으로 무교병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기한 것으로 일반 사람들의 눈을 끌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건전한 경건을 가르쳐야 한다. 나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명이 없고 너절한 연극은 이미 정신이 마비된 사람들의 감각을 속일뿐이지만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보다 훨씬 찬란하게 빛나며 신자들에게 훨씬 풍부하고 감미로운 영적 위안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미신에 속아 정신이 둔해진 사람들을 마음대로 인도하면서 사람들을 종교에 잡아 둔다고 한다. 이런 신기한 짓들을 오래 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옹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고대에는 세례에서 기름을 사용했으며 액막이가 사용되었다는 것과38 사도 시대 직후에 성찬은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부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고질적인 당돌한 태도에서 온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항상 제멋대로 경솔한 짓을 하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아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에 비추어 천사들과 온 세상을 판단하게 하신다(고전 6 : 2-3, 갈 1 : 8).

그러면 이 복잡한 의식들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성찬을 교회 앞에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39 집행한다면 합당한 집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공중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설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은 후에 목사가 성찬의 제정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에, 목사는 성찬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는 동시에 주께서 금지하신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 후에 목사는 우리들에게 이 거룩한 양식을 주신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며 원래 이런 잔치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우리를 주의 자비로 합당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들을 노래하든지 또는 무엇을 읽든지 해야 하며, 목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적당한 순서로 신자들이 가장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성찬이 끝난 후에는 진지한 믿음과 신앙 고백을 그리고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권고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조용하게 산회해야 한다.40

 

 

 

44.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성찬에 대해서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보면, 현재의 통례와 같이 일년에 한번,41 그것도 형식적으로 받도록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주 성찬을 받도록 제정하셨고, 자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이런 회상에 의해서 믿음을 강화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며, 또 성찬을 자주 받음으로써 상호간의 사랑을 증진하고 서로 사랑을 증명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단결하는 데서 사랑의 유대를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표를 받아 그 상징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관련된 모든 의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하여, 필요하고 능력이 미치는 대로 아무도 형제를 해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며 도울 수 있는 일을 빠뜨리지 않도록 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것이 습관이었다(행 2 : 42). 이와 같이 교회의 집회에서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며 구제하는 것이 철칙이 되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고전 11 : 20). 그후 여러 세기 동안 이 질서가 계속되었다.

아나클레투스와 칼릭스투스의 교회법에 성별이 끝난 후에는 교회 밖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참여해야42 한다고 하였다. "사도적"이라고 부르는 고대 교회법에도 "끝까지 남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로서 마땅히 교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디옥 회의에서도 교회에 들어와서 성경 말씀을 듣고도 성찬에는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허물을 고치기까지 교회에서 제거하라고 결정했다. 제 1차 톨레도 회의에서는 이 규정이 완화되었으나 적어도 온화한 용어를 사용했으나 역시 설교를 듣기만 하고 성찬에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고를 하라고 하고, 경고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제명하라고 결정했다.43

 

 

 

45. 참여할 의무에 대한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의 견해

 

거룩한 분들은 이런 법을 정해서 성찬을 자주 받는다는 사도들 자신이 정한 관습을 유지하며 보호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빈번한 성난 참여가 신자들에게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등한시해서 점점 폐지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 대해서 말했다. "이 일의 신비는 즉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의 신비 어떤 곳에서는 매일 주의 식탁에 진설하며 매일 그 식탁에서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받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에 이른다."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제 1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몸과 피에 매일 참여하며,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날에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성찬을 제공하지 않는 날이 없고, 어떤 곳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또 어떤 곳에서는 일요일에만 제공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반 사람들은 간혹 더욱 해이해졌기 때문에, 거룩한 분들은 그런 무관심을 묵인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을 엄격하게 책망했다. 에베소서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설교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잔치를 욕한 사람에 대모해서 '왜 식탁에 앉았느냐'고 묻지 않고 '왜 들어 왔느냐'고 묻는다(마 22 : 12). 신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악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초대를 받고 잔치에 와서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먹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잔치와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와 같이, 당신들은 이 가장 거룩한 음식을 받으려고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을 때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당신들도 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참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겠는가? 당신은 저는 합당치 못합니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기도에 참여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 기도는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려는 준비이기 때문이다."44

 

 

 

46. 일년 일회의 성찬 참여에 반대한다

 

일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이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 제피리누스가 이 명령을45 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형태를 가진 교령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 그의 명령은 교회를 위해서 그다지 불리한 조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이 성찬을 받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시에 성찬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세속 우상 숭배자들과 섞여 있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표징으로 그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저 거룩한 분은 질서와 제도를 위해서 모든 신자가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날을 정하였다. 제피리누스의 성찬 규정을 후인들이 악하게 왜곡해서는 일년에 한 번 성찬을 받으라는 법을 만들었다.46 그 결과로, 거의 모든 신자가 한 번 성찬을 받으면 남은 일년 동안의 의무를 깨끗이 다했다는 듯이 아무 관심이 없이 지낸다.47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처사였다. 주의 식탁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진설해서 성찬이 선언하는 약속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게 하는 것이 옳다. 물론 아무도 강요할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을 권고하며 고무해야 한다. 타성적으로 태만한 사람들은 책망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굶주린 사람같이 이 풍성한 식사에 모여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년에 하루만을 지정해서 남은 일년 동안은 사람들을 태만하게 만드는 이 관습을 내가 처음에 마귀의 간계라고 불평한 것은 부적당하다고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우리는 이 악습이 이미 크리소스톰 시대에 잠입한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긴 것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한 큰 불균등을 통탄했다. 신자들은 어떤 때에는 깨끗한 때에도 자주 오지 않다가 부활절에는 깨끗하지 못하면서도 왔다고 한다. 그리고 탄식한다. "아, 관습이로다! 아, 외람된 생각들이로다! 그러므로 매일 진설해도 허사요, 우리가 성단 앞에 서 있어도 허사로다.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사담이 하나도 없도다."48 크리소스톰은 결코 그의 권위로 이 관습을 승인한 일이 없다.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47-50)

 

47. "한 가지만 행하는 성찬"을 논박한다

 

성찬의 절반을 하나님 백성의 대부분에게서 도둑질하는 또는 강탈하는 다른 규정이49 같은 곳에서 생겨났다. 피의 상징은 소수의 삭발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의 특별 소유이지 불경한 평신도에게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벧전 5 : 3) 이렇게 부른다. 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는 모든 사람이 마시라고 했다(마 26 : 27). 사람들은 감히 새로운 반대되는 법으로 그 명령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마시면 안 된다고 명령한다.

이런 입법가들은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그들의 투쟁이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 거룩한 잔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불상사가 생길 위험성이 있다는 구실을 내세운다. 이것은 그런 위험성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예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실로 그들은 하나만 있으면 넉넉히 둘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미묘한 논법을 사용한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그것은 그 몸에서 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몸은 병존에 의해서 피를 포함한다."50는 것이 그들의 논법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조금 고리를 늦춰 제멋대로 하게 버려 둘 경우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가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주께서는 떡을 우리에게 보이시면서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보이시면서 그것을 자기의 피라고 부르신다. 인간의 이성은 담대하게 거기에 반대해서 그 떡은 피며 포도주는 몸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과 표징을 써서 자기의 몸과 피를 구별하신 것은 아무 이유도 없었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를 하나님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고 하는 태도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전체를 의미하셨다면, "이것이 내 몸이라, 이것이 내 피라"고 하시지 않고 "이것이 내라"고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14 : 27, 요 18 : 5, 눅 24 : 39).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떡과 따로 잔을 제정하셔서 자신은 우리의 양식과 동시에 음료로도 완전 무결하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절반을 빼앗긴다면 그가 주시는 영양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가령 그들의 구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즉 병존에 의해서 피가 방 속에 있으며 몸이 잔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그들은 여전히 주께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강화를 경건한 사람에게서 빼앗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궤변을 물리치고 이중의 보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규정에서 받는 유익을 굳게 지켜야 한다.

 

 

 

48. 사도들은 다만 "희생을 드리는 자"로서 잔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마귀의 사자들이(성경을 조롱하는 그들의 상습에 따라) 궤변을 지껄이는 것을 안다. 첫째로 하나의 단순한 행위에서 교회가 항상 지켜야 할 원칙을 연역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행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이 명령하신 말씀이다(마 26 : 27). 그리고 바울도 그것을 이런 행위로서 기억하고 하나의 고정된 명령으로서 지키라고 권고했다(고전 11 : 25).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택해서 "희생을 드리는 자"의 계급에 가입시키신 사도들만이 이 성찬에 참가하는 허락을 받았다고 그들은 다른 구실을 내세운다.51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들은 이 질문들에서 도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자기의 거짓말 때문에 쉽게 논박을 받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전연 없는 이 해결책을 어떤 신의 말이 그들에게 주었는가? 성경에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이 열둘이었다고 한다(마 26 : 20).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희생을 드리는 자"라고 불러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떨어뜨리지 않는다(우리는 적당한 곳에서 이 용어를 논하겠다52).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열두 제자들에게 주셨지만 그들도 같은 일을 하라고 즉 서로 나누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더 좋던 시대로부터 사도 시대 후 일 천년이 지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두 가지 상징에 다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성찬에 참가시키셨는지를 몰랐던가? 여기에서 머뭇거린다든지 질문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가장 타락한 파렴치일 것이다. 교회 역사서들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들이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53 터툴리안은 말한다. "육신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이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영양을 얻기 위해서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에게 말한다. "폐하께서 어찌 이런 손으로 주의 거룩한 몸을 받으시겠나이까? 어찌 주의 귀중한 피를 폐하의 입으로 감히 마실 수 있겠나이까?" 제롬은 "성찬을 집례하며 사람들에게 주의 피를 분배하는 사제들"을 언급한다. 크리소스톰은 말한다. "구약 율법에서와 같이 사제가 일부분을 먹고 회중이 다른 일부분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한 몸과 한 잔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성찬에 속한 것은 모두 사제와 신도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 어거스틴도 여러 구절에서 같은 뜻을 확언한다.54

 

 

 

49. 후대까지 평신도도 잔을 받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인가? 희랍계와 라틴계의 저술가들의 책을 모두 읽어보면 이런 증거는 풍부하게 발견될 것이다. 또 교회에 약간의 성실성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이 관습이 폐지되지 않았었다. 로마 최후의 감독이라고 불러도 좋은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시대에도 이 관습을 지켰다고 말한다. "어린양의 피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제 들음으로써 안 것이 아니라 마심으로써 알았다." "그의 피는 신자들의 입에 쏟아졌다."55 그의 사후 400년을 지나서 모든 일이 이미 타락했을 때에도 이 관습은 아직 남아 있었다.

또 단순한 관습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침범할 수 없는 법으로 인정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제도에 대한 경외심은 그 때에 왕성했고, 주께서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은 신성 모독임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겔라시우스도 그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성체의 한 조각만을 받은 후에 잔은 받지 않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미신에 매여 있으므로, 성찬 전체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연 참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신비는 분할하면 반드시 큰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키프리아누스가 말한 이유들에 유의했으며 그 이유들은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었다. "장차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피를 흘리라고 가르치거나 권고할 수 있는가? 또는 우리가 우선 교회 내에서 그들이 성찬 참가의 권리로서 주의 잔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순교의 잔에 합당하게 만들 수 있는가?" 교회법 학자들이 겔라시우스의 저 명령을 사제들에게56 국한시킨다는 것은 너무 유치하므로 반박할 필요조차 없다.

 

 

 

50.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잔을 줄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셋째,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에 대해서는 단순히 먹으라고만 하시고 잔에 대해서는 모두 마시라고 하셨는가?(막 14 : 22-23, 마 26 : 26-27) 의도적으로 사탄의 간계에 반대하려고 하신 것과 같다.

넷째, 만일 주께서 성찬에서(그들이 말하는 대로) "희생 드리는 자"들만을 존중하신다면, 누가 감히 주께서 제외하신 외인들을 성찬에 참가하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또 주만이 주실 권한이 있는 선물에 대해서 그가 명령하시지 않는데 누가 감히 자기에게 권한이 없는 그 선물에 참여하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그들에게 주의 명령과 모범이 없다면, 어떤 확신으로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을 감히 일반 신자들에게 감히 분배하겠는가?

다섯째,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전한 것을 주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은(고전 11 : 23) 거짓말이었는가? 후에 그는 모든 사람이 무차별하게 두 상징에 다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전했노라고 언명한다(고전 11 : 26). 모든 사람이 아무 차별 없이 참여하는 허락을 받는다는 관례를 바울이 주에게서 받았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거의 전부 쫓아 버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관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는 하나님에게서 받았노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 1 : 19).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감히 교회의 이름으로 이 가증한 짓을 숨기며 옹호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명령을 언제든지 유린하며 폐기하는 적그리스도가 교회인 것같이 또는 종교가 번성하던 사도 시대의 교회가 교회가 아니었던 것같이 행동한다.

 

 

 

제 18 장

 

카톨릭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소멸하는 모독 행위이다

 

(미사는 모독적이며 성만찬을 말살한다. 1-7)

 

1. 로마 교회의 교리

 

사탄은 이런 여러 가지 간계로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짙은 어두움으로 덮어 희미하게 만들고 더럽히려고 애썼다-적어도 교회 내에 그 순수성이 유지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마귀가 한 표징을 들어 올려 성만찬을 희미하게 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완전히 소멸해서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을 때에 무서운 가증한 일은 극치의 절정에 달했다. 마귀가 극악한 오류로 거의 전세계의 눈을 멀게 한 때에 이 일이 있었는데, 곧 미사는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제물과 예물이라는 신념을 그가 퍼뜨린 것이다.

나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파들이1 처음에 이 교리를 어떻게 용인하였는가를 묻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의 난해하고 교묘한 주장을 우리는 물리친다. 그런 주장을 아무리 궤변으로 변호하더라도 그것들은 성찬의 찬란한 빛을 흐리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로마의 적그리스도와 그의 예언자들이 전세계에 감염시킨 견해를 상대로 싸우려 한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기를 바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드리는 사제와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미사라는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미사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며 이 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화해시킨다고 한다.2

이것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의 조직이 일종의 유화 수단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속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보속을 드리기 위해 날조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사도 이 관념을 표현한다.3 그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는 뜻은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이 악폐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았으며, 외형적인 선 밑에 악폐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고,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라는 말한 마디에 믿음의 전체가 포함되었다고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리 찬란하게 장식할지라도 미사는 그리스도에게 큰 모욕을 가하고,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은폐하며. 그의 죽으심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죽으심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빼앗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하는 성찬의 힘을 약화시키며 소멸시킨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증명한다면, 이 가장 무거운 도끼로도(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끊어서 파헤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가 있겠는가? 이 빛이 그 밑에 숨은 악을 폭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덮개가 있겠는가?

 

 

 

2.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

 

그러면 제일 처음에 한 말 즉 미사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을 가한다는 점을 밝히겠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들이 일정 기간 임명을 받는다고 했으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제사장으로서 성별을 받으신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을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제사장직도 영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계승할 후계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생하시는 분이므로 뒤를 계승할 대리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영원히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하셨다(히 5 : 6,10, 7 : 17,21, 9 : 11, 10 : 21, 시 110 : 4, 창 14 : 18). 이 신비는 오래 전에 멜기세덱에게서 예시되었다. 성경이 그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한 번 소개한 후에 다시는 그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은 그의 생명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유사점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금 매일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그 예물을 드릴 제사장을 지정해야 하며, 그들은 후계자와 대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이런 대신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빼앗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우편에서 그를 쫓아내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제사장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제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보좌할 뿐이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은 여전히 존속한다고 그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라. 사도의 말이 그들을 붙잡고 도망하지 못하게 한다. 제사장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많은 제사장들이 생겨난다고 한다(히 7 : 23). 그러므로 죽음의 장애를 받으시지 않는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동료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멜기세덱의 선례로 무장하여 그들의 불경건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고 했으므로(창 14 : 18) 이것은 그들의 미사를 미리 보인 것이라고 그들은 추론한다. 떡과 포도주를 주는 점에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4 이것은 너무도 천박하고 미련한 생각이어서 논박할 필요조차 없다. 멜기세덱은 행군과 전투로 지친 아브라함과 동행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어 그들의 기운을 북돋우려고 했다. 이 행위와 제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세는 저 거룩한 왕의 친절을 칭찬한다(창 14 : 18). 이 사람들은 성경에 아무 말도 없는 신비를 조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과오에 다른 색을 칠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말씀이 곧 뒤따르기 때문이다(창 14 : 18). 그들은 사도가 축복과 관련시켜 한 말을 왜곡해서는 떡과 포도주에 적응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했다(창 14 : 19). 여기서 사도는(그보다 더 훌륭한 해석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의 탁월한 지위를 추론한다.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히 7 : 7). 만일 멜기세덱이 음식을 준 것이 미사의 제물을 예시하는 것이었다면, 가장 사소한 일까지도 가려내는 사도가 그런 중대한 일을 잊었을까?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그들은 사도 자신이 제시하는 논법을 격파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죽을 성질의 인간들이 제사장이 될 권리와 영예는 없어졌다고 사도는 주장한다(히 7 : 17-19).

 

 

 

3.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나는 미사에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은폐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제단을 쌓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즉시 전복시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면(히 9 : 12) 이 희생의 힘과 효력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 하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소가 송아지 이상의 존경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소나 송아지의 희생의 효력과 힘이 약했다는 것은 그것이 자주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영원히 깨끗하게 하는 힘이 없다고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한 번 행하신 희생은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한다(히 9 : 26).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 : 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 : 14). 이런 말들에 사도는 다시 첨가해서, 우리는 단 한번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주목할 만한 말을 한다(히 10 : 18,2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으로(요 19 : 30) 이 뜻을 표시하셨다. 우리는 사람이 운명할 때에 하는 말을 예언이라고5 생각한다. 운명하시려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그의 한 희생에 의해서 모두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확언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희생을 완전하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마치 그것이 불완전한 것인 양 그리스도의 이 희생 위에 매일 수많은 조각을 잡아매도 좋을 것인가? 이 희생은 단 한 번 행한 것이며 그 힘은 전적으로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확언할 뿐만 아니라 높이 외치며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불완전하며 무력하다고 고발하지 않는가?

매일 수십만 번씩 희생을 드리도록 마련된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유일한 희생으로서 아버지 앞에 드리신 그 수난을 묻어 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명백하고 공개된 진리와 싸우려고 한 것은 4游翅?사탄이었다는 것을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거짓말의 조상이 자기의 기만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간계를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희생이나 또는 다른 희생이 아니라 같은 희생을 반복하는 것뿐이라고 마귀는 말한다.6 그러나 이런 연막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사도는 이 문제를 논할 때에 항상 다른 제사는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 한 제사는 단 한 번 드려졌고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리한 사람들은 더 비밀의 틈새로 빠져나간다. 즉 미사는 반복이 아니라 적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궤변도 간단하게 반박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 번 제물로 바치신 것은, 그의 희생을 매일 새로운 예물로 확인하라는 조건이 아니라 그의 희생의 혜택을 복음 선포와 성찬 집행에 의해서 우리에게 분배하라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하고(고전 5 : 7) 우리에게 명절을 지키라고 명령한다(고전 5 : 8). 십자가상의 제물이 우리에게 충분히 분여되어 우리가 향유하며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곧 이 희생을 우리에게 적당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말한다.

 

 

 

4. 말라기 1 : 11에 의한 주장

 

미사의 희생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이상의 어떤 근거를 말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예언에서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때가 오리라고 약속하신다(말 1 : 11).7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부르심을 받으리라는 문제를 말할 때에, 예언자들이(그들에게 권하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묘사하기 위해서 율법의 외형적인 의식을 사용한 것은 새삼스럽거나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이방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를 믿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더 똑똑하게 알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항상 자기 시대의 예표를 통하여 복음에 계시된 진리를 묘사했다.

예컨대 주께로 향하는 것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며(사 2 : 2-3, 미 4 : 1-2),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각양 각색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고(시 68 : 29, 72 : 10-11, 사 60 : 6이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모든 신자가 받게 될) 하나님께 대한 더 풍부한 지식을 꿈과 이상이라고 표현한다(욜 2 : 28). 그러므로 그들이 말라기에서 인용하는 것은 이사야에 있는 다른 예언과 같다. 이사야는 앗수르와(사 19 : 23) 애굽과(사 19 : 19,23 참조) 유다에(사 19 : 24) 각각 제단이 있으리라고 예언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성취된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둘째, 지금 그 제단들이 어디 있으며 언제 쌓은 것이냐고 묻는다. 셋째, 그들은 이 나라들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같은 제단이 각각 배정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런 일들을 깊이 생각한다면, 이사야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가 전세계에 퍼지리라는 것을 자기 시대의 적합한 예표를 통하여 예언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자주 보기 때문에 더 열거하려고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미사 이외의 다른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도 가련하게 속고 있다. 신자들은 지금 주께 진정한 제사와 깨끗한 예물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곧 말하겠다.8

 

 

 

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나는 이제 미사의 셋째 기능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참으로 죽으신 사실을 소멸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유언자가 죽어야만 유언이 확정되는 것과 같이, 우리 주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유언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인하셨다(히 9 : 15-17). 이 유언을 감히 변경하거나 거기에 새로운 무엇을 첨가하는 자들은 주의 죽으심을 부정하며 무시하는 자들이다. 미사는 새로운 전혀 다른 유언이 아니고 무엇인가? 미사는 드릴 때마다 죄의 새로운 용서와 의의 새로운 획득을 약속하며 따라서 지금은 미사의 수만큼 유언도 많아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이 새로운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아니, 수많은 죽음으로 이 수많은 미사의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진실로 죽으신 사실을 말살한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은가? 미사는 직접 그리스도를 다시 죽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유언이 있으면 유언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기 때문이다(히 9 : 16). 미사는 그리스도의 새 유언을 전시한다. 그러므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제물은 반드시 죽여서 바쳐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제물이 되신다면 그는 순간마다 수많은 곳에서 잔인한 죽음을 당하셔야 될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사도의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신을 바쳐야 했다면 그는 천지 창조 이후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을 것이라고 한다(히 9 : 25-26). 나는 그들이 곧 대답하며 우리를 중상모략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일이 없고 지금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비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과 사가 그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불경하고 사악한 교리의 어리석은 결과를 밝히려고 할뿐이다. 나는 사도 자신의 말로 이 점을 증명한다. 비록 그들이 이 희생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9 백 번 항변할지라도 나는 사람의 변덕에 따라 희생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신성 불가침의 제도가 붕괴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8┠종?한다는 사도의 확고한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히 9 : 22).

 

 

 

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한다

 

이제 나는 미사의 넷째 기능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우리가 인정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점을 논해야 한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자기가 구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용서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의 용서를 가져다주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미사에서 죄의 용서를 얻는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자신을 구속한다는 조건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었다고 호언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탄의 사자들은 이미 이런 교리를 퍼뜨리며 현재 이 교리를 선전과 칼과 불로 옹호하고 있다. 즉 우리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바칠 때, 우리는 예물을 바치는 이 행위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친다.10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속의 한 예로 보며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속자인 것을 깨닫는다는 생각이 아닌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수난에서는 무엇이 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만찬에서 용서의 확약에 인을 치실 때에, 제자들을 이 행위에서 머물라고 하시지 않고 그의 죽음의 희생으로 그들을 보내시면서, 성찬은 회상하게 하는 것(이른바) 기념행사라는 것을 보이신다. 즉 이 행사에 의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속죄 제물이 단 한 번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희생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첨부해서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에 묶지 않는다면 그 이해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7. 미사는 성만찬을 폐기한다

 

이제 마지막이다.11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 기억하게 하신 장면인 성찬은 미사에 의해서 제거되고 파괴되며 폐지된다는 점에 도달했다. 참으로 성찬 자체는 하나님의 한 선물이며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미사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치르는 값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속으로서 받으신다고 한다. 이 희생과 성찬의 신비가 서로 다른 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여기서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배은 망덕 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배은 망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우리는 생명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소생된다는 것을 약속한다 미사의 희생은 아주 다른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면 매일 희생이 되셔야 한다고 한다. 성찬은 교회의 공적 집회에서 분배되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로 뭉치는 그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미사의 희생은 이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분열시킨다. 마치 성찬이 사제들에게 이양되었다는 듯이 신자들을 대신해서 제물을 드려 주는 사제가 있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지배하게 된후로, 성찬은 주의 명령대로 신자들의 교회에 나눠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미사가 잠입할 문이 열렸고, 이것은 주께서 제정하신 영적 교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수찬 정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물을 먹으려는 사제들이 모든 신도에게서 자기를 격리시키기 때문이다.12 (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거니와) 아무리 많은 군중이 참석했을지라도 신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때에는 나는 그것을 개인적 미사라고 부른다.

 

 

 

(초기의 관습과 오해의 발생. 8-11)

 

8.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

 

나는 "미사"라는 말의 출처를 확정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드린 예물들에서 온 것 같다.13 그래서 고대 저술가들은 대개 복수형을 썼다. 그러나 나는 용어 문제의 논쟁을 피하고, 개인적 미사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에 정반대되며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불경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성찬을 받아서 우리끼리 나누라는 것이 아닌가?(눅 22 : 17) 바울은 이 명령을 어떻게 지키라고 가르치는가? 떡을 떼는 것 즉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고전 10 : 16) 그러므로 한 사람이 받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을 때 거기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 한 사람은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받아먹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명령에 의한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나눠야 할 것을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바울의 말씀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들에게 나누기 위해서 떡을 떼지 않는 곳에는 주의 만찬이 없으며 변태적이요 거짓된 모방뿐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말한다.

그러나 거짓된 모방은 곧 타락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위대한 신비를 타락시키는 것에는 반드시 사악한 결과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미사에는 사악한 남용이 있다. (종교에서는 한 가지 잘못은 다른 잘못을 반복 생산하기 때문에) 제물을 나누지 않는 관습이 일단 잠입한 후에, 그들은 교회의 어느 구석도 빼놓지 않고 수많은 미사를 행하며 신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자들을 한 곳에 모아 서로 하나가 되는 신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미사에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고 떡을 제시해서 그것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선전하게 하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이 약속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약속을 주신 뜻은 결코 불결하고 부정한 자들이 언제든지 또 어떤 악한 목적을 위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신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지킴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기쁨을 소유하라는 뜻이다.

 

 

 

9.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이외에도 이런 타락은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에는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 중에서 특히 파렴치한 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우리가 다른 문제에 관련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고대 교회가 전적으로 그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14 또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면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강론을 끝내기 전에 우리의 미사 박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즉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여러 가지 제사보다 더 힘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시는 줄을(삼상 15 : 22) 그들도 알기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데 대해서 그들은 명령을 받은 일이 없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아무나 제사장직의 영예를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만이 얻으며,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 제사장직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셨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을(히 5 : 4-5) 그들도 듣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사제직에 대해서, 그것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영예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지 않은 그들 자신이 악하고 경솔한 생각으로 뛰어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제직을 옹호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점 일획도 찾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사제가 없이는 드릴 수 없다는 그들의 제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10.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로 간주했는가?

 

만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 여기저기에서 문장을 떼어다가 그것을 권위로 삼고서, 성찬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고안한 가짜 제사를 시인하느냐에 관한 문제일 경우 고대 저술가들은 이런 모독 행위를 절대로 옹호하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물론 그들은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어디서나 선언하듯이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유일하고 진정한 제사에 대한 기념이라는 뜻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면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실 미래의 희생 제물에 대한 예언을 찬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거룩하게 바치며 또 그 몸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바친 희생에 성대한 기념을 축하한다." 여기서 그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뜻을 집사 베드로에게 보내는(이 글의 필자가 누군지를 나는 묻지 않지만) 신앙론(Con- cerning Faith to Peter the Deacon)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15 "우리를 위해서 육신이 되신 독생자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말라. 그에게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에게 구약 시대에는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지금은 그에게 (그와 한 신성을 가지신)아버지와 성령에게 전세계의 거룩한 교회가 떡과 포도주를 끊임없이 드린다. 저 육적인 제물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드리실 그리스도의 살을 예시했으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흘리실 그의 피를 예시했다. 그뿐 아니라 이 제사에는 우리를 위해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회상하며 감사하는 뜻이 포함되었다."16

따라서 어거스틴 자신도 여러 구절에서 이 제사는 찬양의 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끝으로, 우리가 주의 만찬을 제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바치신 특이하며 진정하고 유일한 제사에 대한 기념과 형상과 증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자주 발견할 것이다.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권 24장에도 잊을 수 없는 구절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저 특이한 제사를 논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제사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누구에게,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목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그 유일하고 진정한 중보자는 그가 희생을 드린 분과 여전히 하나이며, 그가 위해서 희생을 바치신 사람들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며, 희생을 바친 이와 희생으로 바친 것도 하나이다."17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예를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18

 

 

 

11. 교부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신에서 이탈했다

 

우리는 고대 저술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광경이 거의 우리 눈앞에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전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갈 3 : 1). 그러나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이 기념 행사에 대해서, 주의 제정 정신과 맞지 않게 오해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성찬론에는 희생이 반복된다는 적어도 새롭게 된다는 듯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19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명령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성찬은 하나님의 만찬이라고도 하며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만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고대 저술가들에게 불경건이 있었다고 정죄할 수 없다. 이것은, 나는 그들이 이 신비 전체에 대해서 경건하고 정통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며, 주의 특이한 희생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려는 생각을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다소의 허물이 있었던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이나 복음의 성격이 허락하는 정도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를 엄격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괴팍한 신비로운 해석만은20 그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순수한 제정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 그림자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있는 제물 관념 ; "제물"이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 : 미사는 신성 모독이다. 12-18)

 

12.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

 

만일 부지런히 깊이 생각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모세의 제사와 우리의 성찬 사이의 차이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모세의 제사는 오늘날 성찬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지만(레 1 : 5) 그 보여 주는 방법이 달랐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희생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명령을 받아 예시했으며 그리스도 대신에 희생 동물이 제시되었고 제물을 드릴 제단이 있었다. 요컨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릴 희생의 모양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도록 모든 일을 행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후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제정해 주셨다. 즉 아들이 그에게 드리신 희생의 유익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 대신에 잔치상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 대신에 성직자들을 성별하셔서 거룩한 잔치를 분배하게 하셨다.21 신비가 숭고하고 신성할수록 더욱 경건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간적인 지성의 모든 외람된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교훈만을 굳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또 성찬은 주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할 경우, 우리는 사람의 권위나 오랜 규정으로 인하여 주의 성찬에서 털끝만큼도 어긋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이미 잠입한 모든 과오를 일소하려고 할 때에, (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그들을 저 유일한 제정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며 이 원천에서 영원한 원칙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전 11 : 20이하).

 

 

 

13. 희생의 성격

 

sacrifice (희생, 제물, 제사)와 Priest(제사장, 사제)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와 언쟁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내가 이 논의에서 이 말들을 사용한 뜻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모든 거룩한 의식과 종교적 행동을 "제물"이라는 말로 표시하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의 일관된 용법에 의하면 희랍 사람들이 , 혹은 , 혹은 라고 부른 것을 제물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모두 이 말에 포함된다.22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과 구별해야 한다. 즉 신비적 해석을23 허용할 수 있는 구별이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그림자를 가지고 제물의 보편적인 진리를 그의 백성에게 보이려고 하셨다. 제물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전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제물은 보속의 의미로 죄를 위해서 드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면제되었다. 또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상징과 경건의 증거였다. 이런 제물은 어떤 때에는 간구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빌고, 어떤 때에는 감사의 형식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증거하며,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경건의 표시로서 새로 언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둘째 종류에 속하는 것이 번제와 전제와 예물과 첫 이삭과 화목제였다.24

따라서 우리의 제물도 두 가지로 구별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교육적 의미로 하나는 "찬양과 경외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25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하고 또 드리는 경배와 예배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원한다면 "감사의 제물"26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무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자기의 몸과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제물은 "화목의 또는 속죄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심판에 대한 보속을 행하고 죄를 씻어 깨끗이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씻음으로써, 모든 불결이 제거되고 순수한 의가 회복된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 하에서 속죄하기 위해서 바친 동물을 희생 제물이라고(출 29 : 36)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거나 죄를 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희생을 예표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생은 실제로 그리스도만이 최종적으로 성취하셨는데 이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의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확인하셨다(요 19 : 30). 즉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며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희생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 어떤 다른 희생을 바칠 필요가 전혀 없다.

 

 

 

14. 미사를 판매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며 의를 얻는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또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 희생에 대해서 극악한 치욕과 참을 수 없는 모독을 가한다고 단정한다. 새로 예물을 드리는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미사를 드리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의 광태는 한정 없이 확대되어, 그들의 미사는 그들이 마음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특히 지정하지 않는 한 교회 전체를 위해서 공통적으로 평등하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은 사소한 일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이 상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그들의 미사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가 받은 값을 받을 수는 없었으나 조상과 어떤 유사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숫자를 같게 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은 30개에 팔았으나(마 26 : 15) 이 사람들은 프랑스의 계산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를 동전 30개로 판다.27 유다는 한 번 팔았으나 이자들은 몇 번이든지 판다.

헌물을 바침으로써 사제들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푼 후에 속죄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부인한다. 신약의 제사장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히 9장). 그리스도에게 모든 제사장직이 옮겨졌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모든 제사장직이 종결되고 폐지되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옛날 제도를 폐지하시고 새 제도를 만드시지 않았으므로 사도의 주장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 : 4). 그러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도살하는 자라고 호언하는 이 모독자들은 어떤 철면피를 쓰고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을 자칭하는 것인가?

 

 

 

15. 유사한 허식과 망상에 대한 플라톤의 발언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 제 2 권에 훌륭한 구절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옛날의 속죄제를 논하면서, 악한 사람들이 이런 제물에 의해서 자기의 비행이 가려져서 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며 마치 신들과 계약을 한 듯이 더욱 마음을 놓고 방탕하게 생활하는 그 우매함을 비웃는다. 플라톤은 여기서 현대의 미사가 행하는 속죄의 관습을 언급하는 것같이 보인다. 불공평한 거래로 과부들을 괴롭히고, 고아들의 물건을 강탈하며, 빈민을 괴롭히며, 협잡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위증과 사기로 남의 소유를 점령하며, 폭력과 공갈로 남을 압박하는 것이 악한 짓이란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 모든 일을 반복하고 이런 짓들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진실로 이 문제를 잘 검토한다면, 이 사람들을 가장 격려하는 신념이 있는데 곧 그들은 값을 치르는 것같이 미사의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푼다고 또는 적어도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쉬운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이런 속죄제를 드리면 지옥에서28 받을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짐승같이 미련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런데 현대 미사의29 대부분과 매년 행하는 기념 행사는 악한 자들을 일평생 가장 잔혹한 폭군이었던 자들과 가장 욕심 많은 강도였던 자들과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자들을 연옥의 불에서 빼내기 위해서 값을 치른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6. 그리스도의 교회의 "감사 제물"

 

우리가 "감사의 제물"30이라고 부르는 둘째 종류의 희생에는 사랑의 의무가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을 존귀하게 한다.31 또 이 둘째 종류에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모든 예배행위가 포함된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저 더 큰 제사 곧 우리의 영혼과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는 제사에 의존한다(고전 3 : 16 기타). 외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은 우리 자신을,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며 그 영광을 더욱 나타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거나 죄의 용서를 얻거나 공로로 의를 얻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 죄책이 면제를 받은 후에 드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에게 기꺼이 열납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미 예언자의32 말에서 안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한 이 제사는 계속될 것이다. 예언자의 말은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 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 : 11). 우리는 결코 이 제사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피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33고 명령한다(롬 12 : 1, 벧전 2 : 5-6 참조). 여기서 "영적 예배"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의미가 있다. 사도는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언중에 모세의 율법에 있는 육적인 제사와 대립시킨다.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라고 한다(히 13 : 16). 그래서 빈궁한 바울을 도운 빌립보 교회 신자들의 관용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신자들의 모든 선행은 영적 제사인 것이다.

 

 

 

17. 찬양의 제물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나는 왜 증거를 많이 찾아내려고 하는가?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율법의 외형적인 지도하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 민족에게 공통된 진리가 육적인 제물의 기초가 되었다고 예언자들이 분명하게 선포했다. 다윗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과 같이 올려지기를 기원했다(시 141 : 2) 호세아는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입술로 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며(호 14 : 2-3), 다윗은 "영화롭게 하는 제사"라고 부른다(시 50 : 23, 51 : 19). 사도도34 그를 따라 감사를 "찬미의 제사"라고 부르고 그것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설명한다(히 13 : 15). 주의 만찬에는 이런 종류의 제물이 없을 수 없다. 성찬에서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고전 11 : 26)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곧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는데(벧전 2 : 9), 이는 사도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부르는 찬미의 제사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중재자가 계신다. 우리를 위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고유를 아버지께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히 9 : 24)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가 들어갈 길을 열어 주신다(히 10 : 20).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물을 드리는 제단이시며(히 13 : 10 참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의 안에서 행하게 하신다.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은 그리스도시라고(계 1 : 6) 말한다.35

 

 

 

18. 미사는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미사라는 이 가증한 것에 대해서 아직도 소경이 볼 수 있고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금잔에 넣어 드리는 미사는 세상의 모든 왕과 백성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든 자에 이르기까지 취하게 만들며 졸음과 현기증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짐승들보다도 더 둔감해진 그들은 구원의 배를 조종해서 전적으로 이 죽음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확실히 사탄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포위하고 함락시키기 위해서 이 이상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든 적이 없다. 진리의 원수들이 현재 미친 듯이 잔악한 수법으로 싸우는 것은 바로 이 헬렌36이라는 음녀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헬렌과 같은 음녀를 상대로, 영적 음행이라는 가장 가증한 행위로 몸을 더럽히고 있다. 그들은 거룩한 미사의 순결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구실로서 여러 가지 야비한 악폐를 제시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들에 새끼손가락 하마도 대지 않는다. 미사를 이용한 그들의 비열한 장사와37 불결한 이익, 한정 없는 탐욕 등에도 나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사의 가장 거룩한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단순한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지적할 뿐이다. 이 거룩한 점이 있기 때문에 미사는 수백년 동안 존경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지극히 위대한 신비를 그 존귀성에 합당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큰 일일 것이다. 또 나는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추악한 부패상을 이 신비들과 혼합하고 싶지 않다. 미사가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를 아무 부속물이 없는 상태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철두철미하게 온갖 불경과 훼방과 우상 숭배와 신성 모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17장과 18장에 대한 결론 : 기독교의 성례는 둘뿐이다. 19-20)

 

19. 세례와 주의 만찬만이 성례이다

 

신약 시대의 초기부터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 교회에 전해지는 두 가지 성례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의 전부를 이제 독자들은 간단히 알게 되었다. 세례는 이를테면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신앙 생활의 입문이다. 그러나 성찬은 일종의 계속되는 양식이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신자인 가족들에게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과 한 믿음과 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이 세례도 하나뿐이며(엡 4 : 4-6) 이는 자꾸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해서 분배되어 일단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 성례 이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례는 없으므로 신자의 교회는 다른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성례를 제정하는 것은 사람이 선택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분명하게 설명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 점을38 곧 이해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알리시며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성례를 제정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사 40 : 13, 롬 11 : 34) 이 점을 이해할 것이다. 즉 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또 우리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며 무엇을 거절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짐하며 믿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떤 표징을 내놓고 하나님의 의도나 약속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표징을 주셔서 우리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더 간단하게 또 더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더 분명히 말한다면, 결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이더라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성례를 제정할 수 없다.

 

 

 

20. 성례를 첨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두 가지 성례로 만족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셋째 성례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도 원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보통 성례 이외에 시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서 여러 가지 성례를 주셨다. 예컨대 만나와(출 16 : 13, 고전 10 : 3), 반석에서 흐르는 물과(출 17 : 6, 고전 10 : 4), 놋뱀과(민 21 : 8, 요 3 : 14), 그밖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이런 변천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이런 무상한 형태에서 머물지 말고 더 좋은 것, 폐하거나 끝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기다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된 후로 우리는 사정이 훨씬 달라졌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골 2 : 3). 한없이 풍부한 이 보화에 어떤 새로운 것이 첨가되기를 바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갈망하고 바라보며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의 영광을 완전하게 나타내시며(고전 15 : 24) 우리에게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요일 3 : 2)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만을 구하며 배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시대를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요일 2 : 18), "모든 날 마지막"(히 1 : 2) 또 "말세"(벧전 1 : 20)라고 부르며, 공연히 새로운 교리나 계시를 기대해서 속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 : 1-2), 아들만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으며(눅 10 : 22),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 같으나(고전 13 : 1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범위 내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충분히 나타내셨다.

그런데 교회 안에 새로운 성례를 만드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시지 않은 것과 같이, 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도 사람이 조작한 것을 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물을 넣으면 포도주가 변질되고 묽어진다. 누룩을 뿌리면 반죽한 덩어리 전체가 시어진다. 그와 같이 사람이 자기 생각을 첨가할 때 하나님의 신비는 더럽혀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집행되는 성례들이 그 시초의 순결성에서 많이 타락한 것을 본다. 어디를 보아도 행렬과 의식과 무언극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례가 성립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언급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들은 무수한 의식에 짓밟혀 머리를 들 수 없게 되었다. 세례에서는 (우리가 이미 당연한 비난을 한 것같이)39 빛나며 주시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 즉 세례 자체를 볼 수 없지 않은가? 성찬은 미사로 변모된 후에 완전히 매장되었으며, 이런 것 외에는 일년에 한 번 보이는 찢기고 잘린 반조각의 성찬뿐이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1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다섯 가지 성사(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 1-3)

 

1. "성사"라는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성례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을 본다면, 교훈을 잘 받고 건전한 사람들은 호기심에 더 끌리거나 주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이외의 것 즉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것을 성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가지 성사라는 관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며 모든 학파와 설교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아직까지도 깊이 자리잡고 있다.2 따라서 나는 남아 있는 다섯 가지의 소위 성사들을 낱낱이 엄격하게 검토해서 그 기만을 벗기고, 단순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 진상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성사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밝힌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 이름에 대해서 논쟁을 시작하는 것은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며 이 이름이 남용되는 것을 공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만물의 주인이며 따라서 마음대로 사물에 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경건한 태도만 유지된다면 다소 부정확한 말을 쓰더라도 용인할 수 있다. 나는 사물이 말을 따르는 것보다 말이 사물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사란 말은 문제가 다르다. 일곱 성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라는 정의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 일곱 가지를 모두 성령의 그릇, 의를 부여하는 기구,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고 한다.

진실로 면제집(the Sentences)의 대가 롬바르드 자신도,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사들은 그것들이 예표하는 것을 줄 수 없었으므로 그것들이 성사라고 불려지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한다.3 나는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훌륭한 약속으로 장식하신 상징들을 성사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 쪽으로는 사람이 제멋대로 고안하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없이 행하는 의식들에 이 영예를 돌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사라는 단어의 정의를 바꾸든지 아니면 그 단어 사용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종부 성사는 성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상과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추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으므로, 이런 오류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용어 자체를 문제로 삼아 그들에게 도전한다. 여기서도 그들은 이 의식에는 외형적인 표징과 말씀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이것을 성사라고 인정한다.4 명령도 없고 약속도 없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반대할 수밖에 아무런 대책이 없지 않은가?

 

 

 

2.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용어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해서 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무적의 논리로 확인한 것 즉 성례 제정권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 진실으로 성사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해서 신자의 양심에 용기와 위안을 주어야 한다. 양심은 사람에게서는 결로 이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나 천사가 이것을 증거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사 40 : 13, 롬 11 : 34)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과 합당한 권위로 증거하신다. 성사는 하나님의 언약 또는 약속에 날인하는 장이다. 그러나 물질과 이 세상의 원소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 형성되고 예정되지 않으면 약속에 날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사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이런 위대한 신비를 이런 비천한 물질 속에 숨긴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적절한 말과 같이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사와 다른 의식들을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도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므로(행 7 : 60, 9 : 40, 20 : 36, 21 : 5, 26 : 14) 신자들도 무릎을 꿇으면 곧 성사가 될 것이다. 제자들은 동쪽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하므로 동쪽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성사가 될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각처에서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며(딤전 2 : 8) 거룩한 분들은 자주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고 하므로(시 63 : 4, 88 : 9, 141 : 2, 143 : 6) 두 손을 펴 드는 것도 성사가 될 것이다. 결국 성자들의 모든 몸짓이 성사로 변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이 더 곤란한 문제들과 관련이 없다면 여기에 시간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3. 성례가 일곱 가지란 것은 고대 교회가 몰랐다

 

만일 그들이 고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교회 저술가들 가운데서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숫자가 언제 잠입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라는 말을 아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사용했는가? 경건에 관한 모든 외형적인 의식과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로 만족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나는 어거스틴의 증언을 인용하겠다. 그는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이 논의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복음서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우셨다는 것이다(마 11 : 29-30). 따라서 새로운 백성의 사회를 단결시키는 수단으로서, 수가 아주 적고 지키기 쉬운 그러면서도 의미가 매우 깊은 성례를 정하셨다. 이것이 곧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별하는 세례와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과 기타 정경에 시인된 것이다."5 또 기독교 교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자신과 사도들이 몇 가지 표징을 지정하셨다. 그것은 수가 많지 않고 쉽게 행할 수 있으며, 뜻이 극히 숭고하고, 극히 깨끗하게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세례와 주의 몸과 피의 기념이다."6 왜 어거스틴은 이 신성시되는 "일곱"을 말하지 않는가? 만일 당시의 교회에서 일곱이 확인되었다면 그가 빠뜨렸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다른 데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숫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참으로 세례와 성찬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두 가지 신비가 특히 존귀하고 다른 의식들은 지위가 낮다는 뜻을 무언중에 표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성사의 박사들에게는 주의 말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굉장한 거짓말로 자랑하는 고대 교회의 찬성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위 성사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견진례는 성사가 아니다 : 교육한 후에 받아들이던 고대의 관습을 회복 하라. 4-13)

 

4. 고대 교회의 관습

 

고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장성하면 감독 앞에 서서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학습 교인이 된 어른들은 믿음의 신비를 올바르게 배워 감독과 회중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유아 세례를 받은 청년들은, 아직 교회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았으므로 소년기의 마지막이나 청년기의 초기에 부모가 다시 한 번 감독 앞에 데려다가 당시에 사용된 일정한 교리 문답 형식에 따라 심사를 받았다. 이 행동 자체가 이미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었지만, 더욱 존중하는 의미에서 안수하는 의식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청년들은 믿음이 인정된 후에 엄숙한 축복을 받고 물러갔다.

고대 저술가들은 이 관습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7 교황 레오가 한 말이 있다. "이단에서 돌아온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게 하지 말고 그가 받은 세례에는 성령의 권능이 없었으므로 감독의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하라." 여기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령을 받는 의식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그가 한 말의 뜻을 다른 곳에서 설명한다. "이단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르는 안수례에 의해서 믿음을 굳게 하라. 그는 세례를 받았으나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롬도 루시퍼파에 대한 반대론에서 이 점을 말한다. 나는 제롬이 이 행사가 사도 시대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또 그는 이 축복하는 행위가 감독들에게만 허락되었으나 법적 필연성보다도 감독직에8 대한 경의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완화 조건까지 첨부한다.9 그러므로 나는 일종의 축복 형식에 불과하다는 안수례에 전심으로 찬성하며 지금 그 순수한 사용법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5. 로마 카톨릭교가 가르치는 완성된 견진례의 의미

 

그러나 후대에 와서 실체를 거의 소멸하고 일종의 가장된 견진을 하나님의 성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세례에서 죄의 결백을 위해서 받은 성령을 주어 은혜를 더하게 하고, 세례를 통하여 중생해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싸워 나갈 힘을 더해 주는 권능이 견진례에 있다고 말한다. 견진례를 행할 때에는 기름을 바르며 일정한 선언을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너에게 이 거룩한 십자가의 표를 치며 구원의 성유로 너를 견진하노라."10 모두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일점 일획도 보여 줄 수 없다. 그들의 성유가 성령의 그릇이란 것을 그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진하고 미끈미끈한 액체인 기름을 보지만 그것뿐이다. 어거스틴은 "물질에 말씀을 더하라, 그러면 물질은 성물이 될 것이다"11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그 기름에서 기름 이외의 무엇을 보이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말씀을 내보이라고 하겠다. 만일 그들이 성물을 분배하는 일꾼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또 그것이 마땅하지만 나는 더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꾼이 지켜야 할 첫째 법칙은 명령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일을 하라고 한 명령을 보이라, 그러면 나는 한 마디도 더 말하지 않겠다. 만일 받은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그 대담한 보복 행위를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왔는지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다. 만일 그들이 "사람에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 세례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서"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을 너무 중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감히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마 21 : 25-27). 그러므로 견진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그것을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복시키려면 먼저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6. 사도들의 안수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진실로 그들은 사도들의 선례를 들어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무 일도 경솔하게12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며, 만일 그들이 사도들을 진실하게 따른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행 8 : 14-17). 누가는 이 안수하는 일을 자주 언급한다(행 6 : 6, 8 : 17, 13 : 3, 19 : 6)

나는 사도들이 한 일 곧 그들이 받은 직책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듣는다. 주께서는 그 때에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놀라운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은사를 부어 주셨으며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그 은사들을 나눠주시고자 하셨다. 나는 이 안수에 어떤 깊은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들이 이 의식을 행한 것은 안수를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 천거하며 이를테면 바친다는 것을 이런 몸짓으로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그 때에 행한 직책이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안수하는 일도 보존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시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니 안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령의 지도가 없으면 교회는 존속할 수 없으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목마른 사람들은 자기에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원 불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요 7 : 37, 사 55 : 1, 요 4 : 10, 7 : 38 참조).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 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이 배우들은 어떤 점에서 사도들을 추종하고 있는가? 성령의 분명한 권능이 즉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안수로 그것을 실현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수할 권리가 있다고 장담하는가? 사도들이 안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7.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을(요 20 : 22) 성령을 받는 성사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사도들의 기도로 명백한 성령의 은혜를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사도들이 안수한 목적은, 그 후손들이 원숭이들처럼 단순한 흉내로 아무 유익이 없이 냉담하고 공허한 가짜 표징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안수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사도들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더라도(그들의 변태적 열성을 제하면 사도들과의 유사점은 없지만),13 그들이 "구원의 기름"이라고 부르는 그 기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 기름에서 구원을 구하라고 가르쳤는가? 누가 기름에 신앙을 굳게 하는 권능을 돌리라고 가르쳤는가?14 바울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떠나라고(갈 4 : 9) 가르치며 이런 유치한 행사에 구속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배척하지(골 2 : 20)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기름을 "구원의 기름"15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기름은 배를 위한 것이요 배는 기름을 위한 것이나 주께서는 두 가지를 다 폐하실 것이다(고전 6 : 13 참조) 사용하면 없어지는 이 모든 무력한 물질은 영적이고 결코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대는 세례에 사용하는 물이나 성찬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도 같은 척도로 판단하느냐"고 묻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리 앞에 제시되는 물질의 본질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물질 위에 새기신 형상이며, 이 성물의 힘은 전적으로 이 형상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물질이 그 본질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례에서 우리 눈앞에 놓이는 떡과 포도주와 물에 대해서는 바울이 한 말이 항상 적용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고전 6 : 13) 그것들은 이 세상 형적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 : 3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별되어 성물이 된 점에서 그 물질은 우리를 육신 안에 붙들어 놓지 않고, 참으로 또 영적으로 가르친다.

 

 

 

8.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름이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먹여 키우는가를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이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세례에서는 죄의 결백을 위해서 견진례에서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며, 또 세례에서 우리는 중생해서 생명을 얻고 견진례에서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견진례가 없으면 세례가 올바르게 완성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다. 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가?(롬 6 : 4-5)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바울은 우리의 육을 죽이며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서는 "우리로 또한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롬 6 : 6)하며,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라고 한다(롬 6 : 5). 이것이 바로 전투 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모든 점에서 그들이 잘 복종하는 체하는 교회는 왜 존경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밀레비스 회의의 결정보다 더 강력한 반대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누구든지 세례는 다만 죄의 용서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런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누가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행 8 : 16) 말한다. 누가의 이 말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롬 10 : 10). 누가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나타난 힘과 보이는 은혜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행 2 : 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 : 20)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면 여기서 사탄의 악하고 위험한 기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을 세례에서 몰래 떼기 위해서, 세례에서 진실로 받는 것을 그의 견진례에서 받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리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세례에 속한 약속을 세례에서 분리해서 다른 데로 이전한다. 우리는 이제 이 훌륭한 기름 바르는 것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한다(갈 3 : 27).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하게 하는 약속은 세례에서 받지 않았다"16고 말한다. 처음 것은 진리의 음성이요, 나중 것은 허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견진례에 대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바른 정의를 할 수 있다. 즉 견진례는 세례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며, 세례의 기능을 엄폐하거나 내지 폐지한다.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 약속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또는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으로 더럽혀진 기름이며 단순한 사람들을 속여 암흑 속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9.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말하기를 신자는 모두 세례를 받은 후에 안수에 의해서 성령을 받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주교의 견진례를 받아 성유를17 바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 된다고 첨가한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에 속한 일은 모두 성경에 지시되고 포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교의 진정한 형태를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 배우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늘 진리와 그리스도의 교훈 전체는 그리스도인의 초보에 불과하고, 기름이 그들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이 문장 하나로 성유를 받은 일이 없는 모든 사도와 많은 순교자들이 정죄를 받는다. 그 당시에는, 그들 위에 부어서 기독교의 모든 세밀한 점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들 기름, 아니 아직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이 사람들 자신이 자기의 주장을 훌륭하게 논박한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되는 신자들에게 세례 후에 기름을 바르는가? 그들의 양떼 가운데 있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도 왜 그대로 버려 두는가? 빠뜨리면 반드시 중대한 죄를 쓰게 될 일을 신자들이 빠뜨리는 것을 왜 그렇게 비겁하고 나태하게 버려 두는가? 갑자기 죽어서 기회가 없었던 사람 이외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도 필요하고 필수적인 일을 그들은 왜 더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견진례가 멸시받는 것을 그렇게 너그럽게 버려 둠으로써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언중에 고백하고 있다.

 

 

 

10. 카톨릭 교회는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요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거룩한 기름 바르는 일을 세례보다 더욱 존중해야 된다고 단정하고 그 이유로서 세례는 모든 사제들이 행할 수 있지만 견진례는 주교들의 손으로만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8 그 까닭은 자기들의 조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장 거룩한 제도를 함부로 멸시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 모독적인 입이로다! 너는 너의 악취 나는 입김과 중얼거리는 주문으로 더럽혀진 기름을 감히 그리스도의 성례에 대립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별한 물과 비교하는가? 그러나 너의 무례함에는 이것들은 사소한 일이었고 너는 심지어 이것을 원했다. 이런 말들이 바로 거룩한 교황청의 대답이며 사도적 삼각좌의 신탁이다.19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런 광증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견진례를 더 존중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견진례가 더 큰 힘과 유익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더 훌륭한 사람들이 신체의 더 훌륭한 부분 즉 앞이마에 행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또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더 유리하고 견진례는 덕을 더욱 증진시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이유를 말함으로써 스스로 도나투스파임을 폭로하지 않는가? 그들은 성례의 가치를 집행자의 가치에 따라서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교의 손은 더욱 가치가 있으므로 견진례도 더욱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겠다.20 그러나 주교의 이 대단히 위대한 특권의 근원에 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변덕 이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도들만이 성령을 주었으므로 사도만이 그 권리를 사용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주교들만이 사도인가? 대체로 주교들은 사도인가? 그러나 이 점도 우리는 양보하기로 한다. 그들은 왜 같은 논법으로 주교들만 성찬의 피에 손을 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주께서 사도들에게만 피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평신도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왜 주장하지 않는가? 사도들에게만 주셨다면, 왜 주교들에게만 주셨다고 추론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는 사도들을 단순한 사제들로 만들고 여기서는 현기증이 나서 방향이 달라지고 갑자기 사도들을 주교라고 한다. 끝으로,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울은 그에 의해서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행 9 : 17-19). 나는 이 한 가지를 첨가하겠다. 만일 이 직책이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 주교들에게 속한다면, 왜 그들은 감히 그것을 일반 장로들에게 이전했는가?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서 우리는 이 일을 읽을 수 있다.21

 

 

 

11.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시하는 이유는 경박하다

 

하나님의 세례보다 견진례를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들의 다른 이유들도 얼마나 경박하고 어리석은가? 견진례에서는 기름을 이마에 바르지만 세례에서는 머리 위에 바른다고 한다.22 세례에서는 기름을 쓰고 물은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악한들이 그들의 누룩으로 성례의 순수성을 더럽히려는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데 대하여 나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23 성례들은 인간의 수많은 조작품들에 끼여 있어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빛을 보일 틈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그때 내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 자신의 선생들을 믿으라. 그들은 세례에서 물을 무시하고 전혀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기름만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는 이마도 물에 적셔진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물과 비교할 때 그대들의 기름에는-세례에서 쓰든지 견진례에서 사용하든지 간에-일고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기름의 매매 가격이 더 비싸다고 주장한다면 그 더 많은 값으로 인하여 본래 거기에 있는 가치까지도 더럽혀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철저하게 추악한 사기를 비밀리에 퍼뜨리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견진례는 세례보다 덕을 더 많이 증진시킨다고 지껄이는 그들의 셋째 이유는 그들의 불경건을 폭로한다.24 사도들은 안수함으로써 성령이 보이는 은혜를 나눠주었다. 이 사람들의 기름은 어떤 점에서 유익을 주는가? 그러나 한 가지 모독 행위를 여러 가지 모독 행위로 감싸는 이 지도자들은25 물러가도록 하라.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려고 애쓰기보다 끊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12. 고대 교회의 관습은 견진례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명할 만한 논거를 빼앗긴 것을 알고서, 그들의 상습대로 견진례는 가장 오랜 관습이며 여러 시대의 찬성으로 확정된 것인 듯이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안 될 것이다. 성례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하신다. 견진례가 성례로 인정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에 대해서 정확하게 논하고자 할 때 어디에서도 두 가지 성례밖에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은 견진례가 고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믿음의 피난처를 사람들에게서 구한다면, 이 자들이 성사라고 사칭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결코 성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된다. 고대인들은 안수에 대해서 말하는데 과연 그들은 그것을 성사라고 했는가? 어거스틴은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단정한다. 이제 그들은, 그는 안수를 견진례라고 생각하지 않고 치유적인 것 또는 화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추악한 구별을 하면서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그의 책이 현존하며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다. 만일 어거스틴이 그 책에 쓴 의미를 왜곡한다면, 나는 그들이 나를 여전히 질욕하는 것을 버려 둘뿐만 아니라 내게 침을 뱉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 그는 분파 행동을 버리고 교회의 연합에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주께서 평화의 유대에 의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도록 안수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례를 반복하지 않고 안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차이점을 알려 준다. "안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안수의 의미란 것은 다른 구절을 보아도 분명하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위대한 은사이며, 사랑이 없으면 다른 거룩한 것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위해서는 모두가 무가치하다. 그 사랑의 유대를 위해서 바르게 돌아선 이단자들에게 안수를 하는 것이다."26

 

 

 

13. 진정한 견진

 

나는 성례의 기형적 유령이라고 할 이 견진례가 나타나기 전에 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한 그 관습이 보존되기를 충심으로 원한다. 그들이 공상하는 견진례로서 남기자는 뜻이 아니다. 견진례를 말하면 반드시 세례를 멸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어린이들이나 청년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교육 방법으로서 보존하자는 것이다. 최선의 교육 방법은 이 일을 위해서 지도서를 준비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모든 기독교회가 찬성하며 반대하지 않는 신조의 대부분을 단순하게 요약해서 포함시켜야 한다. 열살 된 어린이가27 교회 앞에 서서 신앙을 고백하며 신조마다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어떤 점을 모르거나 이해가 불충분하면 가르쳐 줄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보는 데서 어린이는 하나의 진정하고 진지한 믿음을 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고백할 것이다.

이 규율이 지금 시행된다면, 자녀 교육은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등한시하는 게으른 부모들을 반드시 각성시킬 것이다. 자녀 교육을 무시하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앙 문제에 관해서 견해가 더욱 일치하게 될 것이며 신앙에 대한 무지도 적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신기한 사상에 경솔하게 끌려가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조직적인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고해도 성사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14-17)

 

14. 고대 교회내의 참회

 

다음 자리에 그들은 고해를28 두고 어지럽고 무질서한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에서 양심은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회개에29 대한 성경의 교훈과 그들의 주장을 자세하게 말했다. 이제는 고해를 하나의 성사라고 하는, 지금까지 교회와 학교에서 지배적인 의견을 확립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가를 간단하게 논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교회의 의식을 구실로 삼아서 그들의 조작품을 확립하려고 하므로 우선 그 고대 의식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겠다. 고대인들이 공적인 회개에 있어서 준수한 의식은 지정된 보속을 이행한 사람들을 엄숙한 안수에 의해서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안수식은 죄를 용서한다는 표징이었고, 이 표징에 의해서 죄인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섰으며, 교회는 그의 죄에 대한 기억을 말소하고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받았다. 키프리아누스는 안수를 자주 "평화의 수여식"30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행위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며 신자들의 존경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항상 감독의 권위가 개입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제 2 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회개하는 사람을 장로가 미사에서 공중 앞에 화해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결정했다. 또 오랑주 회의에서는 "참회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화해의 안수 없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라. 만일 병이 나으면 참회자 중에 들어가고 때가 차면 감독에게서 화해의 안수를 받게 하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제 3 차 카르타고 회의는 "감독의 허락이 없으면 장로는 참회자를 화해시키지 말라"31고 결정했다. 이 모든 발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유지하고자한 엄격성이 과도한 관용 때문에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회자를 더욱 신중하게 검토할 것으로 기대되는 감독이 심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는 다른 구절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성직자 전체가 안수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적당한 기간을 참회한 다음에 성찬에 와서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찬에 참가할 권리를 받는다."32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 일은 타락했고 마침내 공개적인 참회와는 별도로 사적인 사유에도 이 의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라티아누스는 공적 화해와 사적 화해를 구별했다.33

나는 키프리아누스가 말하는 고대의 관습은 거룩하고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판단하며 현대에도 회복되기를 바란다. 최근에 생긴 관례에 대해서 나는 감히 배척하거나 혹평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참회에서 안수하는 것은 사람이 정한 의식일 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며, 이것은 무해 무익한 외형적인 행위라고 알고 있다. 물론 멸시할 것은 아니지만 주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천거된 의식들보다 지위가 낮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15.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카톨릭 교회와 스콜라 학자들은(왜곡된 해석으로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상습자들이므로) 여기서 성례를 찾아내려고 고심한다. 갈대에서 옹이를 찾는 자들이므로 이상할 것은 없다.34 그러나 죽을힘을 다한 후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려서, 문제는 복잡하고 미결 상태이며 애매 모호하고 혼란한 채 여전히 두통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회개, 바꿔 말하면 통회의 표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통회가 이 성사의 본체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외형적인 고해와 내면적인 회개가 합해서 한 상징일 것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성사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에 불과 하며 내면적인 회개는 성사의 본체 및 성사라고 말한다.35 그뿐 아니라 죄의 용서는 본체일 뿐이지 성사가 아니라고 한다.36

우리가 위에서 제출한 성례의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성사를 검토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께서 제정하신 외형적인 의식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정의가 그들도 복종해야 하는 법칙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이 가장 거룩한 분으로 생각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이는 성례들은 육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성례를 계단으로 삼아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올라가게 하시려는 것이다."37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에서 그들은 이와 유사한 무엇을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을 성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안에서 한 가지 일을 보고 다른 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형태가 있고 이해되는 것은 영적 결실이 있다."38 이 말과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영적 결실을 대표하는 외형적인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16. 왜 사면을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짐승들을 그들의 투기장에서 죽이기 위해서, 만일 여기서 성사를 구한다면 외면적 또는 내면적 고해보다 사제가 선언하는 사면(absolutio)을 성사라고 하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한 자랑이 아니겠느냐고 제의한다. 이 사죄 선언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신념을 강화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소위 열쇠의 약속 즉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마 18 : 10, 마 16 : 19 참조) 약속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새로운 율법의 성사들은 그 표현하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사제의 사면을 받아도 이런 사면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혹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항변이다. 그들은 성찬에서 이중의 먹음을 가정하여 (선악간 모든 사람의)예전적인 먹음과 (선한 사람들만의)39영적인 먹음을 구별하는데, 왜 그들은 이중의 사면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그 문제를 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는 훨씬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40 다만 나는 여기서, 그런 의심 때문에 사제의 사면을 성사라고 부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입을 빌려서, 보이는 성사가 없는 성화가 있으며 내면적 성화가 없는 보이는 성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택받은 자들에게서만 성사는 그 표시하는 것을 실현한다"고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나 다른 사람들은 성화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전자는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만 후자는 오직 선인들에게만 해당된다"41라고 한다. 그들이 무척 애를 쓰면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렇게 분명한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은 어리석게도 속았을 뿐만 아니라 밝은 햇빛42 속에서도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17.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사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들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것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단정한다. 첫째로는 그런 성사의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기서 전개되는 의식은 사람이 조작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성사의 의식은 하나님만이 제정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증명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위 고해 성사에 관해서 만들어 낸 것은 거짓이며 협잡이다.

그들은 이 가짜 성사를 "파선 후의 둘째 판자"라는 적당한 이름으로 장식했다. 세례에서 받은 결백의 옷을 죄로 더럽힌 사람은 고해에 의해서 그 결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제롬의 말이라고 한다.43 그들이 설명하는 뜻대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누가 했든지 간에 분명히 불경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가 죄에 의해서 말소된다는 생각이다. 또 죄인이 죄의 용서를 얻으려고 할 때마다 자기가 세례를 받은 것을 회상해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며 세례에서 약속된 죄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신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제롬이 거칠고 부적당하게 말한 것 즉 교회가 파문해야 할 정도로 세례에서 떠난 자들은 회개함으로써 세례를 회복한다고 한 말을 이 훌륭한 해석가들은 자기들의 불경건에 맞도록 고쳐 버렸다.

그러므로 세례를 고해 성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 될 것이다. 이는 충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보장의 인장으로서 주시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의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이것은 성경의 말씀과 부합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에서는 분명히 이런 해석을 확정된 원칙으로 선포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어거스틴이 쓴 것으로 보이는 소책자 베드로에게 주는 신앙론(Concerning Faith to Peter)에서는 세례를 "믿음과 회개의 성사"44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저자가 불분명한 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는가? 복음서 기자의 말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 그는 "요한이‥‥‥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한다(막 1 : 4, 눅 3 : 3).

 

 

 

(종부 성사는 야고보서 5 : 14-15을 오해한 것이며 성례가 아니다. 18-21)

 

18.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셋째 거짓 성사는 종부 성사이다. 이것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으로 사제만이 사람의 임종시에 행하며 그때 다음과 같은 형식의 말을 한다. "이 거룩한 도유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가장 인애하신 자비로, 네가 봄으로써 들음으로써 맡음으로써 또는 맛봄으로써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지어다" 그들은 종부 성사에 두 가지 힘 즉 죄를 용서하며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상상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혼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들은 야고보가 이 성사를 제정했다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이것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 : 14-l5)45 이 도유는 우리가 위에서 안수에 대하여 설명한 것과46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며, 사도들을 본받으려는 것이지만 이유도 없고 유익도 없다.

마가의 기사를 보면, 사도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했을 때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고 병자를 고치며, 병자를 고칠 때에는 기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하였다(막 6 : 13).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해서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한 것은 이것과 관련된 말이다.

이런 외형적인 일에 있어서 주와 사도들이 아주 자유롭게 행동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런 의식에 깊은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님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려 하셨을 때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바르셨으며(요 9 : 6) 어떤 소경은 만져서 고치셨고(마 9 : 29) 어떤 소경은 말씀만으로 고치셨다(눅 18 : 42).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어떤 병은 말만으로 고쳤고(행 3 : 6, 14 : 9-10) 어떤 병은 만져서 고쳤으며(행 5 : 12,16) 또 어떤 병은 기름을 발라 고쳤다(행 19 : 12).

그러나 도유와 그 밖의 방법들은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도유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교육이 없고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징을 보고 이런 위대한 권능의 근원을 깨닫게 하며 사도들의 권능으로 돌리지 않게 하려는 상징에 불과했다. 기름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다(시 45 : 7).

그러나 병을 고치는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동안 나타내기를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가 영원히 놀라운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나눠주신 권능을 위해서는 도유가 하나의 성사였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지금은 도유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런 권능을 나눠주는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19. 종부 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그들은 도유를 성사로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다른 상징들을 성사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실로암 같은(요 9 : 7) 목욕하는 못을 지정해서 병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몸을 잠그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헛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도유하는 것보다 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청년 위에 엎드림으로써 그를 살렸는데(행 20 : 10), 왜 그들은 죽은 사람 위에 엎드리지 않는가? 왜 침과 먼지로 성물을 만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다른 예들은 한번씩 있었던 것이고 이것은 야고보가 명령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교회가 아직도 하나님의 이런 복을 받던 시대를 대표해서 말한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지금도 같은 힘이 그들의 도유에47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다르다. 그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우롱하는 것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생명과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게 되면 감각과 시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신체의 살아 있는 감각을 속이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노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물론 주께서는 어느 시대든지 그의 백성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같이 필요할 때마다 그들의 약함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주시던 보이는 권능이나 기적은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였으며, 사람들의 배은 망덕도 한 원인이 되어 일찍 소멸하고 말았다.

 

 

 

20.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름을 상징으로 삼아, 그들이 받은 치유의 은사는 그들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란 것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증거했다. 따라서 아무 효력도 없는 썩은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기름을 그렇게 부르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해서(마 3 : 16, 요 1 : 32) 모든 비둘기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들 자신이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그저 그들의 도유는 성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도 아니며 아무 약속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면 된다. 참으로 우리가 성사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란 것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점을 요구할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 의식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기를 요구한다. 지금 할례를 기독교 교회의 한 성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첨부된 것이지만,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이 없으며 거기에 관련된 약속도 같은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종부 성사에 관해서 맹렬히 주장하는 약속을 우리가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 자신도 체험으로 그것을 밝힌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병을 고친다기보다는 죽이고 난도질하는 것이 더 능한 이 백정들이 이 의식을 행하는 것도 잘못이다.

 

 

 

21. 카톨릭 교회는 야고보가 "제정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도유에 관해서 야고보가 지시한 일은 현대에도 적용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도저히 득세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들이 이긴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실행한 도유가 옳다는 증명에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모든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기를 원하는데(약 5 : 14), 이자들은 병자가 아니라 이미 운명하려는 임종시의 시체 같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바른다.48

고통을 완화하는 강한 치유력이 또는 적어도 영혼에 위안을 주는 칠이 그들의 성사에 있다면, 기회를 놓치기 전에 치료하지 않는 그들은 잔인한 자들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이 병자에게 도유하기를 바라는데 이 사람들은 젊은 사제만을49 도유자로서 허락한다. 야고보서에 있는 "장로들"이란 말을 "사제들"50이라고 해석하며 복수를 사용한 것을 한 장식이라고 하는 것도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당시의 교회에는 사제들의 큰 무리가 있어서 성유를 가마에50a 들고 긴 행렬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야고보가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단순하게 명령하는 것은 보통 기름을 바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가복음에도 다른 기름 이야기가 없다(막 6 : 13). 이 사람들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이 아니면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많은 입김으로 더워진 기름, 긴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아홉 번 무릎을 꿇어 인사한 기름이다. 세 번 무릎을 꿇으면서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기름이여" 하고 인사하며 다시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성유여" 하고 그 다음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향유여"51라고 한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푸닥거리를 배웠는가? 야고보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서 기도를 드릴 때, 만일 죄가 있으면 용서를 받으리라고(약 5 : 14-15) 즉 그의 죄책이 면제되고 벌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름이 죄를 씻어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병석의 형제를 위해서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가 무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소위 "신성한" 즉 가증스러운 도유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고 사악한 거짓말을 한다. 야고보의 증거를 제멋대로 함부로 악용한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익을 얻는가를 보라. 우리가 이 증명에 더 애를 쓰지 않도록 그들의 연대기까지도 우리의 곤란을 덜어 준다. 어거스틴과 같은 시대에 로마 교회를 주재한 교황 이노센트는, 장로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나 후손들이 필요한 때에는 기름을 사용하라는 관례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연대기의 저자 시지베르이다.52

 

 

 

(소위 신품 성사는 성직의 7계급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 신품 예식과 그 기능을 비평한다. 22-33)

 

22. 한 성사인가 또는 일곱 성사인가

 

그들의 목록에서 넷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품 성사인데,53 이것은 다산적이어서 일곱 성사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일곱 성사가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셀 때에는 열 셋을 세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또 모두 한 사제직을 향한 단계이므로 한 성사를 구성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수 없다. 분명히 각각 다른 의식이 있고 또 그들도 각각 다른 은혜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인정한다면 일곱 성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또 그들 자신이 분명하고 똑똑하게 일곱 가지를 선언하는데 왜 우리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같이 논의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첫째, 그들이 신품을 성사라고 선전할 때 얼마나 많은 또 어떤 불쾌한 불합리를 우리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가를 우선 간단히 취급하겠다. 둘째, 교회들의 성직자 임명식을 대체로 성사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겠다.

그들은 일곱 가지 신품 즉 성직 계급을 말하며 그것을 "성사" 라고 부른다. 일곱 신품은 수문품과 강경품과 구마품과 시종품과 차부제품과 부제품과 사제품이다. 그들은 이 일곱 계급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한다고 까지 말하며, 이 직위들에 승진되면 그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승진됨에 따라 은혜가 증대되며 더욱 풍부하게 쌓인다고 한다.54

그런데 이 수효 자체는 성경을 왜곡한 데서 신성시하게 되었다. 이사야는(사 11 : 2) 여섯 가지만을 말하는데, 그들은 성령의 일곱 가지 권능에 대해서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는 여섯으로 국한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데서는 성령을 "생물의 신"(겔 1 : 20), "성결의 영"(롬 1 : 4), "양자의 영"(롬 8 : 15)이라 하고, 이사야서에서는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총명한 자들은 개선교회의 모습을 따른다고 하면서 일곱 신품이 아닌 아홉 신품을 말한다.55 그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삭발을 첫 계급으로 그리고 주교직을 마지막 계급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삭발을 제거하고 대주교를 한 계급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시도루스의 구분은 다르다. 그는 성가 대원과 강경사를 구별해서, 성가 대원은 노래를 부르며 강경사는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성경을 낭독한다고 한다. 교회법은 이 구분을 따른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 가운데서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것을 따르고 어느 것을 피하라고 하는가? 우리는 일곱 신품이 있다고 할 것인가? 스콜라 학파의 대가 롬바르드는 그렇게 말하지만 가장 유식한 학자들은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그 학자들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가장 거룩한 교회법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56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거룩한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이렇게도 의견이 일치한다.

 

 

 

23.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직분을 다 가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 계급에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동료로 만들어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 내셨을 때(요 2 : 15, 마 21 : 12) 문지기의 직분을 다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요 10 : 7) 하심으로써 자신이 문지기이심을 알리신다.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심으로써(눅 4 : 17) 강경사의 기능을 다하셨다. 귀먹은 벙어리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셔서 그를 다시 듣게 만드셨을 때에(막 7 : 32-33) 구마사의 직책을 다하셨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하심으로써(요 8 : 12) 시종이심을 증거하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요 13 : 4-5) 차부제의 일을 하셨다. 만찬에서 몸과 피를 분배하셨을 때에 부제의 일을 하셨다(마 26 : 26).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마 27 : 50, 엡 5 : 2) 사제의 역할을 다하셨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을 기록한 것이 사람이라면, 대체 어떻게 웃지도 않고 이런 내용을 기록했을까 해서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활함을 가장 잘 발휘해서 "시종"이라는 칭호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며 시종을 세촉 봉사자라고 부른다.57 이것은 마술 용어라고 나는 추측하는데, 여하간 어떤 나라나 어떤 국어에도 없는 말이다. (시종의 라틴어 acoluthus의 어원인) 를 희랍 사람들은 "하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정색을 하고 이런 의견들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내 자신이 당연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만큼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24. 낮은 계급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여자들까지도 이런 말에 속지 않도록 그 허망한 정체를 폭로시키고 지나가야겠다. 그들은 굉장히 찬란하고 엄숙한 의식으로 강경사와 성가대원과 문지기와 시종들을 임명해서 각각 직책을 위임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소년들이나 적어도 그들이 "평신도" 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시키고 있다. 촛불을 켜며 병에서 포도주와 물을 따르는 것은 그런 일로 살아가는 소년이나 가련한 평신도가 제일 많이 하지 않는가? 바로 그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또 그들이 역시 교회 문을 열고 닫지 않는가? 시종이나 문지기가 교회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누가 본 일이 있는가? 어려서 시종의 일을 하던 사람이 시종으로서 성직자가 되면 시종의 일을 하지 않으니, 결국 그들은 어떤 칭호를 가지게 되면 그 칭호에 해당하는 직책을 버리려고 신중하게 계획하는 것 같다. 그들이 성사에 의해서 성별되며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무일도 하지 않게 만들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직책을 태만히 하고 돌보지 않는 것은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면,58 그들은 동시에 그들이 굉장히 치켜세우는 성직들이 현대 교회에서는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시종으로 성별되지 않으면 초와 병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소년들과 세속 사람들에게 그 일을 시키며 성별된 입술만 불러야 한다는 성가를 소년들에게 맡기고 있으니, 그들의 교회는 전적으로 저주로 가득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또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구마사들을 성별하는가? 나는 유대인들에게 구마사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나 그들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행 19 : 13). 이 거짓 구마사들이 한 번이라도 그들의 공적 직무를 실행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정신병자와 학습 교인과 귀신 들린59 사람들에게 안수할 권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귀신을 이해시킬 수 없다. 귀신들은 그들의 명령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명령한다. 그들 중에는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 십분의 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급 성직에 대한 그들의 막연한 말은 무식하고 불쾌한 거짓말들을 꿰맨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교회 제도를 논할60 때 옛날 시종과 문지기와 강경사들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는 다만 성직의 일곱 계급이라는 이 최신식 발명에 반대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이 신발명에 대한 이야기는 무식한 악덕 변호사들 곧 소르본느 신학파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쓴 글에서만 읽을 수 있다.

 

 

 

25. 성별 의식, 특히 삭발식

 

이제부터 그들이 사용하는 예식들을 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성직자로 채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 공통된 상징을 준다. 즉 머리 꼭대기를 깎아서 왕적 위엄을 나타내게 한다. 성직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다(벧전 2 : 9). 그러나 모든 교회에 주신 것을 독점하며 신자들에게서 빼앗은 칭호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교만하게 자랑한 그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교회 전체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이자들은 그 말을 왜곡해서는 삭발한 소수에 대해서만 "거룩한자가 되라"고 한 것같이(벧전 1 : 15-16, 레 20 : 7, 레 19 : 2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만을 산 것같이(벧전 1 : 18-19), 또 그들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같이(벧전 2 : 5,9) 주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유도 말한다. 머리 꼭대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마음을 주에게 개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고후 3 : 18) 하나님의 영광을61 보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입과 눈의 과오를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머리를 깎는 것은 세상 것을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리에 남아 있는 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서 보존하는 좋은 사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일은 상징으로 표시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소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27 : 51). 그들은 이런 일들을 정수리로 상징했으므로 직책도 잘 이행한 것으로 믿고 실제로는 전혀 직책을 이행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들은 이런 사기와 협잡으로 언제까지 우리들을 기만하려는 것인가? 약간의 머리털을 깎음으로써 성직자들은 풍성한 세상 물질을 포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귀와 눈의 정욕을 죽였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욕심이 많고 미련하고 정욕적인 계급이 세상에 또 있는가?62 왜 그들은 거룩하다는 허위의 표징을 외형적으로만 보이면서 진실로 거룩함은 드러내지 않는가?

 

 

 

26. 나실인들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이제 성직자들의 삭발은 나실인들로부터 근원과 근거가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예전들은 유대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아니 유대교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까지도 서원이 있어서 성결하게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행 18 : 18) 그들이 덧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무식만을 폭로할 뿐이다.63 이 기록은 브리스길라에 대한 것이 아니며 아굴라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삭발은 바울과 아굴라의 어느 편에도 관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선례가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즉 바울은 성화를 위해서 삭발한 일은 없고, 삭발한 것은 약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것뿐이다. 나는 평소에 이런 서원을 경건의 서원이 아니라 사랑의 서원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온유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 자신이 자기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같이 되며 운운하는 말로 밝혔다(고전 9 : 20).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임시로 순응하기 위해서 한 번만 단기간 동안 그렇게 했다. 이자들이 나실인들의 성결 행위를 본받으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것은 옛 유대교를(민 6 : 18, 6 : 5 참조) 계승하는 척하면서 다른 유대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직자들은 머리를 길러서는 안되고 공처럼64 깎아야 한다는 교서는 이런 종교적인 의혹에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기록된 것이다. 남자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서 가르친(고전 11 : 4) 사도가 마치 성직자의 공같이 빡빡 깎은 머리 모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것을 보고,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한 다른 예전들의 효력과 가치에 대해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27. 삭발에 대한 역사적 해석

 

어거스틴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성직자의 삭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여성적인 남자나 또는 남자답지 못한 매끈하고 우아한 맵시를 내려는 사람들만이 머리를 길렀기 때문에, 성직자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좋은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머리를 자르든지 깎든지 해서 여성적인 장식을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삭발이 유행하게 되자 어떤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자기들의 거룩함을 자랑하려고 머리를 길렀다.65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장발이 유행하게 되고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과 같이 항상 장발이던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자, 성직자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짝지어서 머리를 깎은 것 같다. 마침내 더 부패한 시대가 와서 모든 이전 풍속이 악용되었거나 또는 미신으로 타락했을 때, 성직자들의 삭발은 미련한 모방뿐이고 아무 이유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신비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성사를 인정하게 하려고 그 미신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한다. 문지기들은 성별될 때에 교회의 열쇠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경사들은 성경을 받는다. 구마사들은 미친 사람들과 학습 교인들에게 사용할 주문을 받는다. 시종들은 초와 병을 받는다. 이런 의식들에는 비밀한 힘이 있으며 또 이런 물건들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와 표시가 될 뿐 아니라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의식들을 성사로 인정하려고 하므로 성사의 정의에 따라서 그렇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결론을 언급한다면, 나는 스콜라 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이런 하급 계급들을 성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을 가르치는 사람들 자신이 이런 계급들은 원시교회에 없었고 여러 해 후에66 고안된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포하므로, 하나님만이 제정하시는 것이니 천사나 사람이 제정해서는 안 된다. 약속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28. "사제"와 "장로"

 

아직 남은 세 가지 계급을 그들은 "중요" 계급이라고 부른다. 이중에서 소위 차부제를 여기에 옮겨 온 것은 하급 계급이 생겨난 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 계급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성직"이라고 불러서 존경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의 규정을 부정직하게 남용해서 자기들의 구실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로 또는 사제의 계급을 먼저 논하겠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말이 같은 뜻이라고 하며, 장로나 사제의 임무는 성단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서품식에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는(레 5 : 8 참조) 권한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는 표로서 성체를 담은 성반을 받으며, 축성하는67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으로서 두 손에 기름을 바른다. 그러나 의식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68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씀은 일점 일획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를 그들은 이 이상 더 사악하게 타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미사를69 논할 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선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제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해하는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맹세로써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지명하고 성별하셨으며(시 110 : 4, 히 5 : 6), 그리스도에게는 생명의 끝이나 후계자가 없게 하셨다(히 7 : 3). 그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와 화목의 제물을 드리셨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다(계 1 : 6, 벧전 2 : 9 참조).70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 즉 우리 자신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제물을 바쳐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죄를 대속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받은 직책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 직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그들의 사제직은 불경하며 신성 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이 의식을 감히 성사라고 부르는 그들은 철저히 사악하다.

 

장로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천거하셨으며 나는 기꺼이 그것을 인정한다. 거기에는 의식이 있으며, 이것은 처음에 성경에서 취했고, 다음에 바울이 공허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은사의 충실한 표라고 증거한다(딤전 4 : 14). 그러나 나는 이 의식을 셋째 성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직책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예를 기독교의 사역자들에게 주셨다고 해서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자랑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과 성례를 맡는 관리인들을 임명하라고 명령하셨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임명하라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마 28 : 19, 막 16 : 15) 양떼를 먹이라고(요 21 : 15) 명령하셨으나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속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의 임무를 올바르게 맡아서 꾸준히 수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 28 : 20 참조).

 

 

 

29. 사제의 임명식

 

의식들은 현실과 잘 일치한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을때 주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셨다(요 20 : 22). 이 상징은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을 의미했다. 이 선한 사람들은 이 숨을 불어넣는 것을 보존하여 마치 그들의 목에서 성령을 불어 내는 것처럼, "성령을 받으라"(요 20 : 22)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중얼거린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흉악하게 위조한다. 배우들의 몸짓은 어느 정도 예술적이며 뜻도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든지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흉내내는 원숭이와 같다. 그들은 주를 본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우리가 본받으라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다(요 11 : 43).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다(마 9 : 5, 요 5 : 8 참조). 왜 그들은 모든 죽은 사람과 중풍병자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입김을 불어 그들을 성령의 은사로 가득 채워 주심으로써 그의 신적 능력의 증거를 보이셨다. 그들이 입김을 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이며 거의 도전하는 것이 되지만 물론 효력도 없고 그 무능한 몸짓으로 그리스도를 희롱할 뿐이다. 참으로 그들은 감히 성령을 주노라고 주장할 정도로 후안무치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경험이 증명한다. 그들이 사제로서 성별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이 변해서 나귀가 되며 바보가 변해서 미치광이가 된다고 경험은 외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점에 대해서 그들과 다투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의식에 반대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이적의 상징으로서 하신 일을 그들이 본받는다는 것이 원래 잘못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노라는 구실은 도저히 그들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변호가 될 수 없다.

 

 

 

3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누구에게서 도유법을 배웠는가? 그들은 사제직의 근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서 배웠다고 대답한다.71 그들은 자기들이 경솔하게 사용하는 것이 자기들이 고안한 것이라는 것은 고백하지 않고 항상 나쁜 선례를 들어서 자기 변명을 한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계승했다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모든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만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그 모든 제사장직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말했고 또 히브리서가 주석 없이도 분명히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그 모든 제사장직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게까지 모세의 율법을 좋 아한다면, 왜 수소와 송아지와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가? 참 으로 그들에게는 고대의 장막과 유대교적 예배 전체의 상당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송아지나 수소를 제물로 드리지 않는 것은 그들의 종교의 결함이다. 이 도유식이 할례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이 행위의 가치에 대한 바리새적 관념과 미신을 덧붙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의의 근거로 믿었다. 이 사람들은 도유식에 영적 은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레위 족을 본받으려고 갈망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목자의 직책을 포기한다.

 

 

 

31. 도유는 쇠퇴한 의식들에 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씻을 수 없는 표지를 새기는 거룩한 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름은 먼지와 소금으로 씻어 버릴 수 있고 (더 단단히 붙은 것이면) 비누로 닦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지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72 기름이 영혼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흉내내면서도 그가 한 말을 잊어버렸는가? "만일 물에서 말씀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물에 불과할 것이다. 물을 성물로 만드는 것은 말씀이다."73 그들은 기름에 동반할 어떤 말씀을 보이려는가?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할 것인가?(출 30 : 30, 28 : 41, 29 : 7 참조) 모세는 그밖에도 아론을 장식할 속옷과 에봇과 관과 거룩한 관에 대해서(레 8 : 7,9)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속옷과 띠와 관에 대해서(레 8 :ᄑ13) 명령을 받았다. 모세는 수송아지를 죽여 그 기름을 불사르는 일에 대해서(레 8 : 14-16), 수양을 죽여 불사르는 데 대해서(레 8 : 18-21), 다른 수양의 피로 그들의 귓부리와 옷을 성별하는 데 대해서(레 8 : 22~24), 그밖에도 무수한 예식에 대해서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기름 바르는 것만을 좋아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74 그러나 그들이 뿌려 받기를 원한다면, 왜 기름보다 피를 뿌려 받지 않는가? 확실히 그들은 영리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교를 꿰매어서 한 종교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르는 기름은 소금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악취가 난다.

남은 것은 안수례다. 나는 이것이 진정하고 영적인 임명식에서는 하나의 성사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웃음거리 연극과 안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으며 약속이 우리를 인도해 가야 할 그 목표를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표징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그 원래의 목적인 진실된 일에 적용해야 한다.

 

 

 

32. 부제

 

또 사도 시대와 어느 정도 순수하던 교회에 있었던 집사직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나는 거기에 해당한다는 부제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75 그러나 고대의 집사들과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부제들은 어디가 같은가? 나는 부제들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과실을 문제로 삼아 그 사람의 교리에 대해서 불공평한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아무도 그런 불평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부제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사도 교회가 집사로 임명한 사람들을 증거로 드는 것이 부정직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제를 돕는 것 곧 성사에 있어서의 모든 일이 세례와 성유와 성반과 성작의 일을 도우며, 예물을 가져다가 성단에 드리며, 성찬상을 준비해서 덮으며, 십자가를 들며, 신자들에게 복음서와 사도 서한을 읽어서 들려주는 일들이 부제의 직책이라고 말한다. 부제들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제 그들이 임명되는 절차를 보기로 하자. 부제가 임명될 때 주교만 안수한다. 주교는 피임명자의 왼쪽 어깨에 기도서와 영대를 얹어서 주의 가벼운 멍에를 받았다는 것을(마 11 : 30) 알게 하며 그의 왼쪽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바치도록 한다. 주교는 복음의 말씀을 주어 부제가 복음 선포자임을 인정하게 한다. 이 모든 일과 집사가 한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향을 태우고 성상의 먼지를 털며 교회를 청소하고 쥐를 잡으며 개를 쫓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임명한 사람을 마치 사도로 임명한 듯이 카톨릭 교회는 행동한다. 누가 이런 계급의 사람들을 사도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비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한 연극으로서 임명한 이 사람들을 그들은 앞으로 부제라는 거짓말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그 직책의 성격을 충분히 밝힌다. 그들은 부제들을 레위 족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근본과 시조는 레위의 아들들이라고 한다.76 그렇게 하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예복을 빌려 부제들에게 입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33. 차부제

 

차부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면 적당하겠는가? 옛날에는 빈민구제 사업을 맡았던 그들에게 카톨릭 교회는 하찮은 일, 예컨대 성작과 성반, 물이 든 병, 성단에서 쓰는 수건 등을 가져오는 일과 손 씻는 물을 붓는 일 등을 시킨다. 그들이 예물을 받아 온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탐식하고 저주를 받게 마련인 예물을 의미한다.

그들의 성별식은 이 직책에 아주 잘 일치한다. 차부제는 주교에게서 성반과 성작을 받으며 부주교에게서 물이 든 병과 기도서와 기타 폐물들을 받는다.77 그들은 이런 쓰레기에 성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며, 위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78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만 말하면 흥분할 것이다. 즉 약속과 연결된 의식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또는 의식에서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확실한 약속이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약속을 확인하는 의식을 찾는다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또 그들이 사용하는 의식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성사가 있을 수 없다.

 

 

 

(에베소서 5 : 28과 기타 구절들을 오해한 데서 혼인 성사라는 그릇된 주장이 생겼다 : 결혼에 관련된 폐해. 34-37)

 

34.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맨 마지막은 혼인 성사이다.79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창 2 : 21-24, 마 19 : 4이하),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그것을 성사로서 집행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80 또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하고 거룩한 규정이며, 농업과 건축업과 구두 수선과 이발업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법적인 규정이지만 성례는 아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확인하시는 외형적인 의식이 지정되어 있어야 한다. 결혼에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신성한 일 즉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연합의 표징이라고 말한다.81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시는 상징을 "표징"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다. "표징"은 비교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면, 나는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예리한 가를 밝히겠다. 바울은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한다(고전 15 : 41-42), 여기에 성사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은‥‥‥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신다(마 13 : 31). 여기에도 성사가 하나 있다. "천국은‥‥‥누룩과 같으니라"(마 13 : 33). 이것은 셋째 성사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라고 한다(사 40 : 10-11). 넷째 성사다. 다른 곳에서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라고 한다(사 42 : 13). 이것이 다섯째 성사다. 결국 어디서 끝이 나며 어디에 한계가 있을 것인가? 이런 논리대로 한다면 성사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있는 비유와 직유의 수만큼 성사가 있을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르리라"고 하였은즉(살전 5 : 2) 심지어 도둑질도 성사가 될 것이다. 이 궤변가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지껄이는 것을 누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포도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시며(요 15 : 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신(요 15 : 1)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양떼를 거느린 목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 : 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 : 27)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런 비유들을 성사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82

 

 

 

35. 그들은 에베소서 5 : 28을 잘못 적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바울의 말로 우리를 공격하면서, 바울은 "성사"라는 말을 결혼에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8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 : 28-32)84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땅과 하늘을 혼합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이 자기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내세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정하신 교회에 애정을 쏟으시는 것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라고 한다(엡 5 : 28-29).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자신같이 사랑하셨으며 신부인 교회와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바울은 모세가 아담이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라고 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자기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하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다(창 2 : 23). 바울은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와 우리에게서 영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확언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이며 그와 한 살이 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그는 요약해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호한 뜻에 속지 않도록, 자기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갈빗대 하나를 떼어서 우리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밀이다. 즉 그가 강하셨을 때에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도록, 그는 약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앞으로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였다(갈 2 : 20).

 

 

 

36. "비밀"이란 말의 번역과 그들의 혼인을 경시에서 이 혼란이 생겼다

 

그들은 "sacrament"란 말에 속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에 대한 벌을 온 교회가 받는 것은 옳은가? 바울은 "mystery"라고 말했다. 이 말을 번역한 사람은 이것이 라틴 사람들의 귀에 생소하지 않은 말이므로, 그대로 두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밀"(secret)이라고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sacrament"란 말을 사용했으나 바울이 사용한 "mystery"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85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어학에 재주 없음을 요란하고 한탄하게 하자. 어학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쉽고 분명한 일에서 오랫동안 가장 부끄럽게 속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 한 곳에 있는 "sacrament"란 말을 그렇게 고집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무시하는가? 디모데전서와(딤전 3 : 9) 에베소서에서도(엡 1 : 9, 3 : 3,9) 라틴역 성경의 번역가는 "mystery"에 대해서 항상 "sacrament"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 실수는 용서하라. 거짓말쟁이들은 적어도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86

그러나 그들은 혼인을 성사라는 이름으로 장식하고 나서 그것을 부정과 부패와 육적인 추악이라고 부르니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경거 망동인가? 사제들을 이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들은 사제들을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결합의 정욕을 막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적 결합 자체도 이 성사의 일부라고 하며, 이것만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자연에 합치하는 비유라고 가르친다. 남녀는 육체적 연합에 의해서만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두 가지 성사를 발견했다. 하나는 하나님과 영혼과의 성사로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같으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성사로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을 여전히 성사라고 한즉 그리스도인에게 이 일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사는 서로 모순이 있어서 도저히 일치할 수 없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교리에는 다른 불합리도 있다. 그들은 성사에서는 성령이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성적 결합을 하나의 성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은 결코 이 결합에 임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87

 

 

 

37. 카톨릭 교회의 교리의 결과는 폭압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일로만 교회를 우롱하지 않고 이 오류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헛된 말과 사기와 비행을 첨가했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혼인을 하나의 성사로 만듦으로써 가증한 일들의 소굴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혼인을 성사라고 일단 결정한 다음에 그들은 혼인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혼인은 영적 문제이므로 세속 재판관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법을 정해서 그들의 전제력을 강화했으나, 어떤 법은 노골적으로 불경건한 것이었고 어떤 법은 사람에 대해서 심히 불공평한 것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부모의 승낙 없이 미성년자들이 혼인한 것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친척끼리의 결혼은 7촌 끼리라도 불법이고 설사 결혼했다 해도 취소해야 된다고 한다.88 그들은 모든 민족의 법과 모세의 규례에도(레 18 : 6이하) 반대되는 촌수를 만들어 낸다. 간음하는 아내를 버린 사람은 재혼할 수 없으며, 대리 부모는 서로 혼인할 수 없고 사순절전 제 3 일요일부터 부활절 후 8일까지, 요한의 탄생일 전의 3주간 그리고 강림절부터 예수 현현 대축일까지는 결혼할 수 없으며 이 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규정이 있다.89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오래 그들의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제는 빠져나가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귀들의 등에서 사자 가죽을 벗기는 데 조금은 성공했다고 믿는다.

 

 

 

제 20 장

 

국가 통치1

 

(국가 통치와 영적 통치의 관계. 1-2)

 

1.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우리는 사람이 이중의 통치2하에 있다는 것을 확립했고, 영혼 즉 속사람에 대한 그리고 영생에3 관계된 통치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둘째 통치 즉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외적인 도덕성만을 확립하는 통치에 대해서 논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토의해 온 영적인 신앙론과 이 문제는 성질이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앞으로 하는 말을 보면 두 가지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아니 부득이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지금은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한 쪽에서는 미친 야만인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제도를 뒤엎으려고 날뛰고 있는 동시에 또한 편에서는 군주들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군주의 권력을 과장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지배에 대립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4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독을 다 억제하지 않으면 순수한 믿음도 없어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입증하게 되기 위해서 이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문제 자체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앞에서 한 구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5 서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혼동을 피해야 한다. 복음은 자유를 약속하며 이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왕이나 집권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우러러본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위에 어떤 권력이 군림하는 동안은 자유의 혜택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전세계를 새로운 형태로 개조해서, 법원이나 법률이나 집권자나 자유를 속박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과 영혼을 구별하며 덧없는 현세와 영원한 내세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세속적인 지배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세상의 초보적인 제도에서 찾으며 거기에 한정하려는 것은 유대적인 허망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영적인 결실이며, 이 영적 결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6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부여되는 자유는 전적으로 그 자체의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갈 5 : 1) 우리에게 명령하는 사도가 다른 곳에서는(고전 7 : 21) 종들에 대해서 그 입장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 이것은 국민 생활에서의 노예 상태와 영적 자유가 완전히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의 다른 발언들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 하나이며(갈 3 : 28), 거기에는 헬라 사람과 유대사람, 할례자와 무할례자, 야인과 스구디아 사람,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신다고 한다(골 3 : 11). 사도의 이 말들의 뜻은,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든 또는 우리가 어느 나라 법률 지배하에서 살든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상태에 있어도 아무런 구별이 상관없다는 것이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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