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2 권 (2)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6

 

34. 성일의 영적 준수

 

그러나 고대인들이 우리가 말하는 주일로 안식일을 대신한 데는 신중한 고려가 없지 않았다.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끝낸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림자였던 의식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가 된다. 나는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해서 교회를 그것에 예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들도 미신만 없으면 나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을 생각할 때에, 거기는 미신이 없다고 할 것이다.

요약하면,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상징으로 전달된 것같이, 우리에게는 그림자 없이 진리가 제시된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명상해야 한다. 또 말씀을 들으며 성례전을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압박해서는 안 된다.42

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지정"만이) 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남아 있다고 주장했다.43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44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 : 13-15, 58 : 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을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 : 12).

 

 

 

35. 이 계명의 폭넓은 범주

 

이 계명의 목적은,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경륜이45 유지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그가 제정하신 상하 등급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신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하며 경의와 순종과 감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멸시, 고집, 배은망덕 등으로 그들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공경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의미가 넓다. 그래서 사도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할 때에(딤전 5 : 17), 그는 그들이 받아야 할 경의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들의 봉사에 대해서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어른을 인정하라는 이 교훈에 대해서 타락한 인간성은 강경히 반대한다. 인간성은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생각이 가득해서 아랫자리에 서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윗자리 가운데서도 그 본질상 가장 인자하고 남의 시기도 가장 받지 않는 종류를 예로 드신다. 이렇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을 더 쉽게 부드럽게 만들어 복종하는 습성이 생기도록 인도하실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용인하기 쉬운 복종으로 우리를 훈련하셔서 점점 모든 합법적 복종이 습성화하게 하신다. 복종하는 이유는 모두 같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상위에 두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자기의 이름을 나눠주셔서 그 위치를 유지하게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 "주" 등의 칭호는 오래 동안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칭호 중의 어느 것을 들든지 반드시 우리는 곧 그의 숭엄성을 연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나눠주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광채의 불꽃으로 빛나게 하셔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 눈에 띄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인 사람은 이유 없이 거룩한 칭호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떤 신적(神的)인 것을 그에게서 인정해야 한다. "왕"이나 "주"가 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예에 어느 정도로 참여한다.

 

 

 

36. 명령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 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신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신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바르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출 21 : 17, 레 20 : 9, 잠 20 : 20) 처음 부분인 경의를 확인하신다. 즉, 멸시와 박대를 벌하신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 : 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확인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4-6절)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엡 6 : 1-3, 골 3 : 20).

 

 

 

37. 약속

 

권면하는 의미로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여기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복종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다 더 잘 알리시려는 뜻이다. 바울이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째 계명이라고 한 의도는(엡 6 : 2) 이 말을 바늘로 삼아 무감각한 우리를 찌르려는 것이다. 이미 첫째 판에 주어진 약속들은 어느 한 계명에 국한되지 않고 율법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명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신 땅에 대해서 특히 말씀하신다. 땅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증한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은혜를 오랫동안 받아 즐길 수 있는 장수함을 약속하심으로써 자기의 은혜를 증명하시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계명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여 나의 호의의 보증으로서 너희의 소유가 될 그 땅에서 장수하면서 그 소유를 즐기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지구 전체가 축복 하에 있으므로, 현세 생활을 하나님의 한 축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장수도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한 증거라는 의미에서 이 약속은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나 고대 유대인들에게나 장수는 그 자체에 축복을 내포했다고는 약속하시지 않았지만, 장수는 경건자애게 하나님의 친절을 알리는 한 관습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복종하는 아들이 미성년으로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자주 있더라도, 주께서는 천 평밖에 약속하시지 않은 사람에게 십만 평이나 주시듯이, 요지부동한 자세로 끝까지 약속을 실현하신다. 요컨대,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장수는 하나님의 호의를 증거하는 때에만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에 대해서 자기의 호의를 죽음을 통해서 훨씬 더 풍부하고 확실하게 증언하시며, 실지로 증명하신다.

 

 

 

38. 위협

 

이밖에도 주께서는 부모를 올바로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현세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동시에, 고집 세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저주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암시하신다. 이 계명이 확실히 실행되도록, 주께서는 그런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율법에서 선언하시고, 처벌을 명령하셨다. 그들이 이 판결을 교묘하게 피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벌을 주신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많이 전쟁에서나 개인 싸움에서 죽으며, 혹은 다른 더 드문 방법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이 경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령에 이르기까지 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는지 모르나, 그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겨우 살아가며, 앞에는 더욱 큰 벌이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그 때에는 경건한 자녀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해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한 명령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엡 6 : 1). 이 점은 이미 언급된 원칙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부모가 앉아 있는 높은 자리는 주께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는 주의 영광의 일부를 나눠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율법을 어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부모가 아니고 우리를 참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이방인이라고 인정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군왕들과 귀족들과 그 밖의 각종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46 그들이 윗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위세로 하나님의 존엄성을 끌어내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땅히 우리를 높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 : 13)

 

 

 

39. 계명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신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마음 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한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문제를 회피하려고 애쓰더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선언하셨고(요일 3 : 15),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자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 : 22)고 선언하셨다.

 

 

 

40. 이 계명이 생긴 이유

 

성경은 이 계명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우리의 혈육이라는 이중의 근거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신성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모든 인류의 관계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웃의 신체를 우리의 몸같이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이 권면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은총에서 귀결되는가를 논하겠다.47 주께서는 사람에게 자연히 있으며 우리를 인도해서 이웃 사람의 생존을 돕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우리가 숙고하기를 원한다. 그 두 가지 일이란, 사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존경하며 그에게 있는 우리의 혈육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피를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는 살인죄를 피하지 못한다. 이웃의 안전에 해로운 일을 실행했거나, 시도했거나, 원했거나, 계획했다면, 그것은 살인죄로 간주된다. 또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이웃의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시 똑같이 율법에 대한 흉측한 위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체의 안전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은즉,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열성과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주께서 보시기에는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이니라"(출 20 : 14)

 

 

 

41.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신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이다(참조, 창 2 : 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42. 독신생활은?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로 놓아주신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본성의 상태 때문에, 또 타락 이후에 타오른 정욕 때문에 이중으로 여성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각 자기가 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 순결은 멸시하지 못할 덕성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사람에 따라 혹은 거부되고 혹은 부여된다. 그러므로 정절을 지키기 어려워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은 결혼에서 도움을 구하며, 그들의 부름의 정도에 따라 정조를 지켜야 한다. 이 교훈을(참조, 마 19 : 11)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절제에 대해 주신 타협안을 채용하지 않는 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그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자기는 하지 못할 일이 없노라고48 내게 반대하는 사람이 지금 많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길을 걷는 사람들만을, 바꿔 말하면, 자기가 부르신 대로 걷는 사람들만을 도우신다(참조, 시 91 : 1, 14) 하나님의 도움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불가피한 일을 충족하려고 어리석고 경솔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명에서 떠나는 것이다. 주께서는 정절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확인하신다. 그것은 교회라는 몸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종류의 은사가 아니라, 소수 지체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를 구별하신다(마 19 : 12). 즉, 그들이 천국 일에 더욱 전적으로 또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고자가 되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즉시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히 하늘에서 "허락된" 자들뿐이라고 지적하셨다(마 19 : 11). 그래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결론하신다(마 19 : 12). 바울은 더 분명히 말한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 : 7)

 

 

 

43. 이 계명에 관련지은 결혼

 

비록 대단한 열의와 노력으로 전심전력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독신생활에서 정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주께서 자기의 사업에 곧 쓰실 수 있기 위해서 정해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특별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의 공개 선언에서 배웠다. 따라서 우리 능력의 정도에 합당한 생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우리의 본성에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주께서는 간음을 금하신다. 따라서 순결과 정조를 요구하신다. 순결과 정조를 보존하는 길은 다만 하나뿐이다. 각각 자기의 표준으로 자기를 측정하는 것이다.49 아무도 결혼을 무익한 것이나 무용한 것이라고 경솔하게 멸시하지 말라. 처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독신 생활을 동경하지 말라. 또 동시에 독신 생활에서는 육신의 안식과 편리를 구하지 말고, 결혼 생활의 구속이 없으므로 경건의 모든 의무를 더욱 민첩히 다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 그리고 이 축복을 얼마 동안만 받는 사람이 많으므로, 독신을 계속하기에 자기가 적합한 동안만 결혼을 단념하라. 정욕을 억제할 힘이 없어지면, 주께서 이제는 결혼의 필요성을 자기에게 부과하신 것을 인정하라. 사도의 명령은 이 점을 증명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며(고전 7 : 2), 또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주 안에서 혼인하라"고 한다(고전 7 : 9). 사도가 말하는 뜻은 첫째로, 남자의 대부분은 무절제의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런 사람들은 불결과 싸우는 유일한 대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되 한 사람도 예외가 없도록 명령한다. 그러므로 무절제한 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약점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도의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다. 여자와 접촉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 마음속에서 정욕이 타오르는 사항이 무절제하다는 비난을 멸할 수는 없다. 바울은 "마음의 순결과 몸의 정조"를 합해서 정절이라고 정의한다.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고전 7 : 34) 이와 같이 사도는 위에서 언급한 교훈을 도리상 주장하면서, 창기와 합하여 몸을 더럽히기보다(참조, 고전 6 : 15이하) 처를 두는 것이 낫다고 할 뿐 아니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한다(고전 7 : 9).

 

 

 

44. 정숙과 정조

 

결혼한 남녀가 자기들의 결합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인정한다면, 동시에 그들은 정욕을 억제하지 않고 방탕하게 되어 결혼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권면도 받는 것이다. 결혼은 존귀하여 무절제의 추악을 덮지만, 무절제를 격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녀는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신중히 대하며, 혼인의 존귀상과 절제에 합당하지 않은 일은 전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주 안에서 맺어진 결혼 생활에 절도와 정숙을 회복해서 극단적 음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방탕을 힐난하여 엄격하고 당연한 비판을 내렸다. 즉, 결혼 생활에서 수치나 체면을 개의치 않는 사람은 자기 처를 간음하는 자라고 불렀다.50

마지막으로, 여기서 음행을 정죄하시는 입법자는 누구신가를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그는 권리상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완전하기를 요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음행을 금하시는 동시에, 우리가 문란한 의복과 음탕한 몸짓과 추악한 말로 다른 사람의 정절을 유혹하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지나치게 방자하고 사치한 옷을 입은 청년을 향해서 아켈라우스가 그의 어느 지체가 불결한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 말에는51 적절한 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어떤 부분에 불결이 나타나든 간에, 그것을 일체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정숙을 권장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서, 아무 의심도 없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정숙을 요구하신다면, 거기 반대되는 것은 일체 정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순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악한 음욕이 타오르는 것이나, 눈이 타락한 욕망으로 달리는 것이나, 몸에 음탕한 장식을 하는 것이나, 추잡한 말로 생각을 더럽히는 것이나, 욕망이 무절제한 생각을 타오르게 하는 것을 일체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죄악은 모두 정조의 순결을 더럽히는 오점과 같기 때문이다.

 

여덟째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 : 15)

 

 

 

45.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출 13 : 7).52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한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집어 가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는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기 수단을 보신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냉혹한 법을 보신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호림을 보신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한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에,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이다.53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 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 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인 것이다. 자기가 소명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하기 때문이다.

 

 

 

46.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염려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의 처지로 만족하며 정직하고 합법적인 이익만을 얻는 데 힘쓴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순종하는 것이다. 또 불공평한 짓으로 치부하려 하지 않으며, 이웃의 재산을 빼앗아 우리 재산을 긁어 모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또 잔인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의 피를 뽑아 거부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수단의 선악을 묻지 않고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긁어모아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키거나 방탕 생활에 낭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조력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모든 사람이 자기 것을 가지고 있도록 진실히 돕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이 없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야 할 때에는,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것을 내줄 생각을 하라. 그뿐만 아니라,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곤란을 나누며, 우리의 풍성한 것으로 그들의 곤궁을 도와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각각 어느 정도까지 남에게 대한 의무가 있는가를 알아서 성실히 빚을 갚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성들은 지배자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정치를 참고 견디며, 그들의 법과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롬 13 : 1이하, 벧전 2 : 13이하, 딛 3 : 1). 또 지배자들은 일반 백성을 돌보며 공공안녕을 유지하며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악인들을 처벌해야 한다. 만사를 처리할 때에 최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에게 근무 보고를 하려는 듯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참조, 신 17 : 19, 대하 19 : 6-7). 교회의 목사들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며, 구원의 교리를 불순하게 하지 않고(참조, 고후 2 : 17) 순수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해야 한다. 교훈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실생활의 모범으로 가르치라.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맡은 양들에 대해서 선한 목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라(참조, 딤전 3장, 딤후 2장, 4장, 딛 1 : 6이하, 벧전 5장). 신자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사도로서 그것들을 영접하며, 최고의 선생이 허락하신 영예를 그들에게 돌리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참조, 마 10 : 10이하, 롬 10 : 15, 15 : 15이하, 고전 9장, 갈 6 : 6, 살전 5 : 12, 딤전 5 : 17-18). 부모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자녀들을 양육하며 다스리며 가르치며, 학대로 노엽게 하거나 부모를 배반하게 만들지 말고(엡 6 : 4, 골 3 : 21), 부모답게 인자하고 친절하게 자녀를 사랑하고 포옹하여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다. 청년들은 노인들을 공경하라. 노인이 공경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노인은 부족한 청년들을 자기들의 우수한 지혜와 경험으로 지도하며, 그들을 가혹하게 책망할 것이 아니라, 온화하고 인자한 태도로 엄격한 언사를 완화해야 한다. 종들은 열심으로 부지런히 주인에게 복종하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충심으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듯 하라. 또 주인들은 종들에 대해서 까다롭고 고집을 피워, 공연히 엄격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들을 형제로 인정하며, 자기도 주님 앞에서 그들과 같은 종임을 인정해서, 서로 사랑하며 인자하게 대우해야 한다(참조, 엡 6 : 5-9, 골 3 : 22 -25, 딛 2 : 9-10, 벧전 2 : 18-20, 골 4 : 1, 몬 1 : 16).

이와 같이 각각 자기가 처한 지위와 처지에서 이웃에게 무슨 빚을 졌는가를 생각하며, 또 진 것은 갚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항상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 원칙은 우리의 손 뿐만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도 제정하셨으며, 그 의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홉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 : 16)

 

 

 

47.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 : 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 : 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 : 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신다(레 19 : 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신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하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상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 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하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위서가 내포된다. 위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 : 1),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된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 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다.

 

 

 

48. 우리 이웃의 명예

 

그러나 우리는 놀라리만큼 경솔하고 냉정하게 이 죄를 짓는 때가 많다. 이 질병이 현저하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남의 죄악을 들추어 폭로할 때에 독성 있는 쾌감을 즐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으로 적절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형제의 명예가 거짓말로 손상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형제의 명예에 오점이 찍히지 않기를 원한다. 참으로 그는 거짓말만을 상대로 형제의 명예를 지키지만, 거기는 그것을 지키도록 위탁을 받았다는 생각이 포함되었다. 이웃의 명예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따라서 험담이 전적으로 정죄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험담이라고 하는 것은 징계할 목적으로 하는 비난이 아니며, 악을 시정하기 위한 비난이나 공정한 비평이 아니다. 다른 죄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기 위한 공개적 징계도 아니며, 미리 경고해 두지 않으면 무지 때문에 위험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는 사람들 앞에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아니다. 험담은 미워서 하는 비난이며, 악한 의도로 거저 훼방하고 싶어서 하는 비난이다.

실제로, 이 교훈은 농담을 가장해서 정중한 체하면서도 가시가 있는 신랄한 조롱을 하는 것까지도 금지한다. 재담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자들이 이런 짓을 하는 예가 있다. 그들은 이런 건방진 짓으로 형제들을 상하게 하여 고통스런 수치와 슬픔을 준다. 그런데, 우리의 혀뿐 아니라 귀와 마음도 지배할 권리가 있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볼 때에, 우리는 험담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나 불리한 비판을 너무 쉽게 표명하는 것도 다같이 금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혀로 험담하는 병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심중의 악한 의도를 비난하시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고 사랑이 요구하는 대로 혀나 귀가 험담과 악랄한 농담에 끌리지 않으며, 이유 없이 교활한 의혹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언행을 공정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판단과 귀와 혀로 그들의 명예를 신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열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 20 : 17)

 

 

 

49. 이 계명의 뜻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이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도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54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틀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으로 기울며 끌려드는 것을 금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기에 다시 자극을 받는 것까지 금하신다.

 

 

 

50. 가장 깊숙한 의로움

 

하나님께서 이런 위대한 고결함을 요구하시는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영혼이 전력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떤 영혼이 사랑이라는 목표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그것에 병이 들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형제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형제에게 해로운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것인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완전히 배어 있다면, 이런 공상을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탐욕이 있는 이상, 거기는 사랑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항변하기를 탐욕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며, 생각 속에 방향 없이 오락가락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상을 탐욕의 예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가 여기서 문제시하는 공상은 생각을 점령하는 동시에 탐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강렬히 욕심으로 자극하는 종류의 공상이다. 우리의 생각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놀랄이만큼 열렬한 사랑이다. 한 점의 탐심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놀랍게 안정된 마음을 요구하시며, 사랑의 원칙에 어긋나는 자극은 바늘 끝만한 것이라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나의 견해에는 권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 계명을 이해하는 길을 나에게 처음으로 열어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55

모든 사악한 욕망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듯한 거짓된 인상으로 우리를 가장 빈번히 매혹하는 것들을 그는 실례로 드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서 광분 난무하게 만드는 것들을 빼앗음으로써 그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율법의 둘째 판의 내용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사람에게 다해야 할 의무를 풍부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을 명상해야만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격을 토대로 삼아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 판에 있는 의무들을 가르치려고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내가 돕지 않아도 현명한 독자는 일부 사람들이 고집으로 탐심에 관한 계명을 쪼개서 두 계명으로 만드는 것을56 비판할 것이다. "탐내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반복된 것은 우리 생각과 반대되지 않는다. 이웃의 "집"을 말씀한 다음에, 그 "집"의 내용을 "아내" 이하에 열거하신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은 히브리 사람들의 바른 예를 따라 우리도 한 계명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켜 침해를 받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도 분명하다. 손해를 입히거나 속여 빼앗고자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탐내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조차 금하신다.

 

 

 

(율법의 원칙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 51-59)

 

51. 율법의 개요

 

이제 율법 전체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묘사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요점을 상기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 : 12-13). 모세는 율법의 목표를 지적해야 할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율법의 교훈이 목적하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하며, 모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부종하게(꼭 붙어 있게)하려는 것이다(참조, 신 11 : 22, 30 : 20).

그런데 저 성결을 완성하는 데는 이미 언급한 두 가지 제목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과(신 6 : 5, 참조, 11 : 13),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레 19 : 18, 참조, 마 22 : 37,39). 참으로, 첫째는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충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바로 흘러 나올 것이다. 이 뜻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고 가르친다(딤전 1 : 5).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선두에 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이 경건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를 훈련하기 시작하는 기초와 예비 단계를 가르칠 뿐이고, 사람을 진정한 목표인 선행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해다. 모세와 바울의 발언들에 나타난 것보다 더 위대한 완전성은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묻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적인 경배를 드리며, 계명에 복종하며, 주의 바른 길을 걸으며, 끝으로 순결한 양심과 진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라고 하는 교훈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율법의 계명들에서 경건과 사랑의 모든 의무를 찾으며 발견하는 해석은 확인된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절반 만을 가르치지 않는 듯이 건조 무미한 초보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율법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2. 성경이 왜 가끔 둘째 판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율법을 요약할 때에 때때로 첫째 판을 빼놓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을 두 판에 다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인과 신"을 "율법의 더 중한 바"라고 부르신다(마 23 :23). 여기서 신은 사람에게 대한 신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경건이라고 해석해서, 율법 전체에 적응한다.57

확실히 이 해석은 어리석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의를 증명하는 행위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이유를 안다면, 다른 구절에서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 청년에게 주께서 다만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이유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 : 18-19). 첫째 판에 대한 복종은 대개 심정의 의도로 하거나 의식에서 했기 때문이다. 심중의 의도는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위선자들은 항상 의식을 행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는 실지로 의를 우리 눈에 보여 준다.

예언자들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예언서에 매우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점을 잘 안다. 선지자들이 회개를 권고할 때에는 대개 첫째 판을 생략하고, 신실과 정의와 긍휼과 공정을 촉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두려움의 증거를 표적으로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율법 준수를 논할 때에 대개 둘째 판을 역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둘째 판에서 의와 성실에 대한 열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누구나 다 확인할 수 있으므로 구절들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예컨대, 사 1 : 17).

 

 

 

53. 믿음과 사랑

 

그러나 혹자는 "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결백하게 사는 데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는 모든 점에서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경건의 증거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점을 증언하시므로, 우리가 다할 의무를 자기에게 국한하시지 않고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하도록 훈련하신다(참조, 시 15 : 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엡 3 : 19, 1 : 5, 골 3 : 14).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며(롬 13 : 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첨가한다(롬 13 : 8). 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고 한다(갈 5 : 14).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다(마 7 : 12).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을, 또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에 속한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보다 낮은 자리에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사람에 대해 바르고 공정하게 행하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목적은,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바르고 공정한 행위로 증거하는 훈련을 우리가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54.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우리가 확고하게 할 입장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을 위한 결실이 가장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계명에 가장 잘 합치하리라는 것이다.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해서는 율법 전체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한마디도 정한 것이 없다. 사람은 원래 너무도 이기적 경향이 강하게 태어났으므로-그리고 아무리 진리에서 벗어나더라도 이기심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이미 너무 많은 이기심을 조장하거나 자극할 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58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가장 착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며 노력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59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깊이 박혀야 하는가를 표현하시기 위해서(레 19 : 18) 우리의 이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셨다. 이기심같이 강렬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법의 힘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궤변가들이 미련하게 공상하듯이, 주께서는 이기심에60 첫 자리를 주시며 사랑을 둘째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6l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자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전 13 : 5). 이 궤변가들이 쓰는 논법은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즉, 측정되는 것은 언제든지 측정하는 표준보다 낮다고 그들은 말한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에 관한 표준을 정하시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기 예속시키신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에 못지 않은 성의와 열심과 주의를 다해서 언제든지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55.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웃"이라는 말에는 가장 인연이 먼 사람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리셨으므로(눅 10 : 36), 우리는 사랑의 교훈을 인연이 가까운 사람들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인연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도와 줄 의무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혈족 관계나 친분 관계나 이웃 관계가 긴밀할수록 책임도 더 많이 서로 분담하는 것이 인류의 공통한 습성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점은, 우리는 사랑이라는 한 감정으로 인류 전체를 예외 없이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야만인과 문명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친구와 원수 등의 구별을 하지 말며, 사람을 사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62 사람을 보는 법이 이와 다를 때에, 우리가 여러 가지 오류에 얽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향할 방향을 바르게 잡으려면, 먼저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볼 때에는 사랑보다 미움이 생기는 때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장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56. 복음적 권고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옛날에 모든 유대인에게 주셨고,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인데, 스콜라학파는 이것을 복종해도 자유, 복종하지 않아도 자유인 "권면"으로 바꿔 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흉악한 무지 또는 악의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 "권면"에 복종하는 의무를 수도승들에게 지우고, 그들은 이 "권면"을 준수하겠다고 기꺼이 서약했으므로 이 한 가지 점에서는 단순한 신자들보다 더욱 의롭다고 한다. 이 계명들을 율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짐이 되며, 특히 은총의 율법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인 것 같다는 것이다.63 그들은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감히 폐지하려는 것인가? 율법책에 이런 구별을 어느 곳에 있는가?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심히 엄격한 계명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가? 배고픈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며(잠 25 : 21),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바른 길에 데려다 주며, 원수의 짐승들이 짐이 너무 무겁거든 도와주라고 하는 것은(출 23 : 4-5) 어떤 계명인가? 원수의 짐승들을 도와주면서 원수 그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지 말 것인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히 10 : 30, 참조, 신 23 : 35) 영원하지 않은가? 다른 데서는 더욱 평이하게 표현하여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다(레 19 : 18). 그들은 이런 말씀들을 율법에서 말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입법자시었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는 단순히 권고하실 뿐이라는 거짓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7.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참된 계명이다

 

네가 다음과 같이 묻노니, 그들이 감히 어리석은 해석으로 조롱한 이 발언들은 무슨 뜻인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눅 6 : 27-28, 마 5 : 44-45의 융합). 누가 여기서 크리소스톰과 함께, 이 발언들은 의무를 지우는 것이므로, 분명히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라고 결론짓지 않겠는가?64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반열에서 배제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은 수도승들만이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수도승들만이 감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이론으로 추리한다면, 교회는 이방인과 세리의 무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너희가 친구에게만 친절하다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이방인과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했다(마 5 : 46-47, 눅 6 : 32, 마 18 : 17의 융합) 우리는 하늘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이라도 남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거스틴의 논법도 이에 못지 않은 설득력이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친구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원수의 아내도 건드리지 말라고 금하시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주의 명령은 친구의 것이든 원수의 것이든 일체의 도둑질을 허락하지 않는다.65

바울은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두 계명을 사랑의 원칙에 관련시킨다. 참으로 그는 이 계명들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포함시킨다(롬 13 : 9). 그러므로 바울이 틀림없이 율법을 잘못 해석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친구와 똑같이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그 계명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통한 멍에를 벗어 버리는 방자한 자들은 스스로 사탄의 아들들임을 확실히 폭로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 생각을 퍼뜨리는 것은 우둔하기 때문인가 또는 파렴치하기 때문인가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교부들 가운데는 이 말씀들이 참으로 계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이 없다. 그레고리우스 때에도 이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강경히 주장하는 바와 같다. 이 말씀들이 계명이라는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66 또 그들의 논법은 얼마나 미련한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리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계명에 비교한다면 다른 것은-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복수심을 송두리째 마음속에서 뽑아 버리라는 것이나 모두 쉽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이런 요구들은 율법의 가장 사소한 점까지도(참조, 마 5 : 18, 눅 16 : 17) 연약한 우리에게는 모두 곤란하다. 우리의 덕행은 주 안에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오며, 뜻하시는 것을 명령하시 옵소서."67 은총의 율법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규례를 벗고 함부로 헤맨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그의 은총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풀리며,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이 새겨진다는 뜻이다(렘 31 : 33). 이 은총을 바울은 "법"이라고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관련시켜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이 은총을 대조시킨 것이다(롬 8 : 2). 이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말을 가지고 허무한 사색을 하고 있다.

 

 

 

58. 치명적인 죄와 가벼운 죄의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

 

그들이 "소죄"라고 부르는 것은 첫째 판을 위반하는 비밀한 불경건이나, 마지막 계명을 직접 어기는 것 같은 것들이다. 그들의 정의를 보면, 소죄는 의식적인 찬동이 없는 욕망이며,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지 않는 욕망이라고 한다.68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마음속에 없는 경우가 아니면, 소죄는 거기 침투할 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마음이 불신의 간교한 술책에 압도되어 다른 곳을 둘러볼 때, 갑자기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할 때-이런 순간적인 충동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것은 영혼 속에 어떤 빈곳이 있어서 이런 유혹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 논의를 더 길게 끌 것 없이,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 속에 하나님 나라에 반대하는 원수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방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의 양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증명이 된다. 마지막 계명이 원래 여기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69 어떤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했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이라는 죄를 범했고, 따라서 율법을 범한 자들이다. 주께서 금하시는 것은 타인에게 손해가 될 일을 결심하고 계획하는 것뿐 아니라, 탐심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도 금하신다. 주의 저주는 항상 율법 위반을 추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경미한 탐심이라도 사형 판결에서 면제할 근거가 없다. 어거스틴은 말한다. 죄의 경중을 달 때에는 "부정한 저울을 가져다가 우리 멋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생각에 따라 '이것은 무겁다, 이것은 가볍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인 성경을 하나님의 창고에서 내듯이 해서 이 저울로 경중을 달아야 한다. 아니, 우리가 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달아 놓으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70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물론 바울이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부르는 것은(롬 6 : 23) 이 타기할 구별을 그가 몰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너무도 위선으로 기울어졌으므로 결코 이 완화제를 붙여서 우리의 태만한 양심을 위무해서는 안 된다.

 

 

 

59. 죄는 모두 치명적인 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고 하신다(마 5 : 19). 율법에 대한 범행을 감히 가볍게 보아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이런 무리들이 아닌가? 그들은 율법의 명령뿐 아니라, 누가 명령하시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행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면,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약해서 사형이 즉시 따르지 않으리라고 공상하는가? 또 하나님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들이 미련한 궤변으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이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 : 4,20). 방금71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롬 6 : 23). 그들은 부정할 수 없어서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한 번만은 현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잠꼬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는 모두 죽을 죄라고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기 때문이다. 죄는 율법 위반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도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성도로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제 9 장

 

그리스도는 비록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마침내 복음을 통해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1

 

(그리스도의 은총은 기대되며 천명되었다. 1-2)

 

1. 신약 사회의 이점

 

옛날에 하나님께서 화목과 희생의 속죄 의식과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서 자기가 아버지심을 증거하며2 자기의 선택된 백성을 따로 세우기로 정하신 것은 허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광채가 나타나지만, 분명히 그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같은 형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라기는 자기가 죽은 후에 예언자의 직책이 중단되겠으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유의하며 열심히 율법을 계속 지키라고 명령한 후에, 곧 "의로운 해가 떠오르리라"고 선언했다(말 4 : 2). 이런 말로 그가 가르치려고 한 뜻은, 율법은 경건자들을 그리스도가 오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리스도 강림시에 그들은 훨씬 더 많은 밝은 광명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으며"(벧전 1 : 10), 그것이 이제 복음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한다. 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고 한다(벧전 1 : 12). 이 일들을 가르치는 것이 고대 백성에게 불필요하며 예언자들 자신에게 무가치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시키신 그 보화를 그들은 아직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증언한 그 은총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그들은 조금 맛보았을 뿐이나, 우리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자기를 증언했다고 선언 하시면서도(요 5 : 46),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받은 그 은총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으며 너희의 듣는 것을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이것을 갈망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느니라"(눅 10 : 23-24, 마 13 : 16-17의 융합). 하나님께서 보기 드물게 경건하던 저 거룩한 족장들 보다 우리를 더욱 돌보신다는 것은 복음의 계시에 대한 적지 않은 칭송이 된다. 이 생각과 잘 맞는 것이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는 구절이다(요 8 : 56). 아직 먼데 떨어져 있어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확신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거룩한 족장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쁘게 살았다. 세례 요한이 한 말-"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은(요 1 : 18)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죽은 경건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빛나는 지식과 광명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를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희미한 윤곽을 잠깐 엿본 그 신비들이 우리에게는 밝히 나타났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 : 1-2). 지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그 독생자가(히 1 : 3) 옛날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셨다는 뜻이다. 이전에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들의 지도자였다고 한 바울의 견해를(참조, 고전 10 : 4) 우리는 다른 곳에서3 인용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고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는 것은 사실이다(고후 4 : 6). 하나님이 이 자기의 형상 안에서 나타나셨을 때에, 이를테면 자기를 눈에 보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희미하게 그림자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대낮인데도 보지 못 하는 자들의 배은망덕과 타락은 더욱 가증하고 비열하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사탄이 어둡게 해서, 사이를 가리우는 수건이 없이 복음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고후 3 : 14-15, 참조, 4 : 4).

 

 

 

2. 복음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비밀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 복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교훈"(딤전 4 : 6)이라고 부르므로, 율법에서 하나님이 죄를 값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사람들과 화해하시겠다고 자주 약속하시는 것은 모두 복음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바울은 공포심을 행위에서 구원을 찾을 때에 양심을 괴롭힐 공포심을 믿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할 때에는, 하나님이 옛날 족장들에게 베푸신 자비와 아버지 같은 호의에 대한 증언들도 복음에 포함된다. 그러나 더 높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다. 이 용법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가 지지한다(마 4 : 17, 23, 9 : 35).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옳다. 그리고 마가는 복음서의 머리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다 (막 1 : 1). 이렇게 충분히 알려진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구절을 인용 할 필요는 없다.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복음으로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 : 10).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기까지 족장들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에는 명예로운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복음은 새롭고 특별한 종류의 사절이며(참조, 고후 5 : 20),이 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하신 일을-약속하신 진상이 아들에게서 실현되리라는 것을-실행하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되느니라"고(고후 1 : 20) 한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신자들은 체험한다. 이 약속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참조, 고후 1 : 2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그 육신으로 완전히 성취하셨으므로, 실재(实在)의 이 산 계시가 새롭고 특이한 찬양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 : 5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족장 야곱이 환상중에 본 사닥다리를 암시하시는 듯하지만(창 28 : 12). 그의 강림이 얼마나 탁월한 일인가를 표시하시기 위해서, 그가 강림하심으로 인해서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가 모두 하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에 대한 논박 : 세례 요한의 중간적 위치. 3-5)

 

3. 약속들이 우리에게는 철폐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르베투스의 악마적 공상을 경계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위대함을 찬양하고자 하면서, 또는 그렇게 하는 체하면서, 약속도 율법과 동시에 끝난 것같이 약속을 전적으로 파기한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약속이 성취하는 데 참가하는 듯이 그는 말한다.4 우리와 그리스도는 사이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 전체에서 조금이라도 완성하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나는 방금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혜택들을 이미 지금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구원이 희망 속에 감취었느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골 3 : 3, 참조, 롬 8 : 24) 거짓말이던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즉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긴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 : 2). 비록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은 현재의 완전한 영적 혜택이지만, 그 혜택을 받아 즐기는 것은 항상 희망의 보호 하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가 썩을 육체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가신 분의 영광으로 변모할 때까지 이를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는 약속을 믿으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성령의 권위를 믿는 우리는 저 불결한 개의 모든 짖음을 침묵시켜야 한다. 바울의 말대로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 4 : 8),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노라고 자랑한다(딤후 1 : 1).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옛날 거룩한 분들이 받은 것과 똑같은 약속을 받았다고 가르친다(고후 7 : 1; 참조, 고후 6 : 16-18). 끝으로 그는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엡 1 : 13)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 자신의 약속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만 그를 받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지만(참조, 엡 3 : 17). 동시에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하나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고후 5 : 5-7). 그러면 하늘 생명을 완전히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좋은 일들을 보는 것이라고 하는(참조, 히 11 : 1)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잘 일치한다. 다만 우리는 약속들의 성격이나 특질에 있는 차이점 즉 율법이 예표로 미리 암시한 것을 복음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율법과 복음과의 대치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로써 또한 행위의 공로와 의가 값없이 전가해 주시는 의를 대립시켜서 율법과 복음을 항상 잘못 비교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반박한다. 이 대립은 물론 버려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말로 의로운 생활의 표준을 의미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표준에 의해서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며,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살 소망을 전혀 주시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더하신다고 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약속된 보상을 받을 이만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전혀 없으므로, 우리는 다만 은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용서로 의로운 자로 인정된다는 것을 주장할 때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것은 정당하다(롬 3 : 21이하, 갈 3 : 10이하, 기타).

그러나 복음은 다른 구원 방법을 제시할 이만큼 율법 전체를 폐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약속한 것을 모두 확인하며 실현했으며, 그림자에 실체를 주었다.5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라"고(눅 16 : 16; 참조, 마 11 : 1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의 종들이 피할 수 없는 저주를 족장들도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그들은 초보훈련을 받았을 뿐이며 복음의 높은 가르침보다 훨씬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고 부르지만(롬 1 : 16), 얼마 안 가서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 : 21)고 첨부한다. 그리고 같은 서간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침묵 중에 감취었던‥‥‥그 비밀의 계시"라고 하지만(롬 16 : 25, 의역), 이 발언을 제한하는 설명을 붙여서,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알려지셨다"고 한다(롬 16 : 26). 이것을 보고 우리는 추리한다. 율법 전체를 볼 때에 복음은 계시의 명백함이 율법보다 다를 뿐이라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며 밝히 나타난 은총이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천국이 지상에 건설되었다고 말하며(참조, 마 12 : 28), 또 이 말에는 훌륭한 근거가 있다.

 

 

 

5. 세례 요한

 

요한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서서 양쪽에 관계된 직책을 담당하였다. 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죄를 씻기 위한 제물이라고 불러(요 1 : 29) 복음의 본질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부활에서 드디어 빛난, 비할 데 없는 권능과 영광은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도들과 동등하지 않다고 말하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이가 없으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뜻은 여기 있었다(마 11 : 1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들의 인품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을 모든 선지자들보다 앞에 세우신 다음에, 복음 전파를 최고의 지위에 올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데서 본 것과 같이, 이 복음 전파를 "천국"이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선지자들보다 낮은 듯이 자기는 한 "소리"에 불과하노라고 대답한다(요 1 : 23; 참조, 사 40 : 3). 이것은 겸손을 위장한 말이 아니며, 진정한 사절의 직책은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말라기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말한 대로(말 4 : 5), 자기는 선구자의 직책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의 활동기간을 통해서 그가 한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준비한 것 뿐이다. 그는 심지어 이사야를 인용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자기에게 명령하셨다고 증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고 부르신다(요 5 : 35). 아직 완전한 대낮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여전히 복음 전파자로 여겨야 하는데 이는 그가 후에 사도들에게 위촉된 것과 같은 세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요 1 : 33). 그러나 요한이 시작한 일을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훨씬 자유롭게 완성해 나갔다.

 

 

 

제 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구약성경의 언약은 신약성경의 언약과 실제로 같다. 1-6)

 

1. 문제

 

이미 말한 바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 곧 창세 이후로 하나님이 택하사 자기 백성 중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 언약을 맺게 한 율법과 교리는 현재 우리 사이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1 이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동일한 구원을 바라보았지만, 이 교제에서 그들과 우리는 경우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를 일종의 부록으로서 논하겠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수집한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의 차이점을 많이 논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당연한 조치로서 이 문제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논하는 몇 장을 특별히 마련해야 한다. 참으로 저 놀랄만한 불량배 세르베투스와 재세례파의 일부 미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은 돼지 무리에 불과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했을 일이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상 생활에서 살찌우셨지만, 그들에게 하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주시지 않았다고 그들은 지껄이기 때문이다.2 그러면 이 악취 나는 오류에 경건한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할 때에 즉시 일어나는 난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그리스도 강림한 후에 우리들과 맺으신 언약이 얼마나 서로 같으며 또 얼마나 다른가를 살펴 보기로 하겠다.

 

 

 

2. 일치되는 주요사항

 

한 마디로 두 가지 점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동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이 하나다. 다만 처리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말해서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논의에 전진이 있겠다. 그런데 신구약의 유사성이라기보다 그 동일성을 밝히려면, 이미 고찰한 세부를 검토할 필요는 없겠다. 다른 곳에서 논의 될 문제들을 여기서 뒤섞는 것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 점을 주장해야겠다. 첫째로, 노력할 목표로서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것은 육적인 번영과 행복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영생의 희망을 주셨고, 신탁(神讬)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 선택을 보증하시며 확인하셨다. 둘째로, 그들을 주에게 묶어 놓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 셋째로, 그들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며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리라고 믿었다. 둘째 점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는지 모르므로, 적당한 곳에서3 자세히 설명하겠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셨거나 약속하신 축복은 모두 오직 그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왔다는 진리를 예언자들의 수많은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확증할 것이다. 셋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증거를 보였고, 첫째 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지 않았다.

 

 

 

3. 구약은 미래를 기대한다

 

첫째 점이 특히 바로 눈 앞의 문제에 관계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논적들은 논란이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더욱 면밀히 주의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가 하는 설명에 빠진 곳이 있을 때에는, 설명을 추진하면서 보충하든지, 또는 다른 적당한 곳에서 첨가하겠다. 사도는 확실히 이 세 가지 점에 관해서 우리의 의혹을 제거해 준다. "오래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복음을 미리 약속하시고," 지정된 때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사도는 말한다(롬 1 : 2-3).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인한 의를 증언하며, 이것을 복음 자체가 가르친다고 한다(롬 3 : 21). 물론, 복음은 사람의 심정을 현세의 기쁨에 국한하지 않고, 영생을 바라보는 경지로 들어올린다. 지상의 쾌락에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안식을 얻는 희망을 전언함으로써 이를테면 사람의 심정을 하늘로 옮겨간다. 이 점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도‥‥‥복음을 듣고‥‥‥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엡 1 : 13-14). 또,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전에 복음 곧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골 1 : 4-5). 마찬가지로, "그는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 : 14). 그러므로 복음을 "구원의 말씀"(행 13 : 26),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 1 : 16), 또 "천국"이라고 부른다(마 3 : 2, 13장). 만일 복음의 교훈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는 생명을 얻게 한다면, 그 복음의 약속과 선포를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일을 돌보지 않고4 우둔한 짐승같이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관한 약속은 율법서와 예언서에 인봉되었고 새로운 백성을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5 하는 패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율법에 복음이 약속되었다고 말하고, 조금 후에 "무릇 율법에 있는 것은 특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첨가한다(롬 3 : 19 의역). 바울은 다른 것과 관련하여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례히 유대인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몇 절 앞에서 자기가 복음이 율법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한 말을 잊은 것이 아니다(롬 1 : 2; 참조, 3 : 21). 복음의 약속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구약이 특히 내세(来世)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같은 이유로, 구약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토대로 삼았으며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포하는 것도 죄인이 자기의 공로와는 별도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며, 그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감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복음의 언약을 주셨다고 하며, 복음의 유일한 토대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누가 감히 거저 얻는 구원의 선물에서 격리할6 수 있는가?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의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주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 : 56).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사도는 신자들의 전반적 경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 : 8).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이며, 이 권능을 신자들은 영원히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처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구원을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부른다(눅 1 : 54-55, 72-73). 주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으로써 옛날 맹세를 실행하신 것이라면, 구약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와 영생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7

 

 

 

5. 언약의 비슷한 표징들

 

참으로 사도는 언약의 은총뿐 아니라 성례전의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를 동등하게 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한 형벌들을 사도가 예로 든 것은 고린도 신자들이 그와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도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우리가 특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을 받지 않겠다고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은총을 나타내실 때에 같은 상징들을 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참조, 고전 10 : 1-6,11).8 그의 말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대들은 세례로 인치심을 받았고 매일 성찬에 참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는 놀라운 약속이 있으므로 그대들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고 믿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를 경멸해서 방자한 행동을 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런 상징이 없지 않았으면서도 주께서 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바다를 건넘으로써 세례를 받았고 뜨거운 태양을 가리워 준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바다를 건넌 것을 육적인 세례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영적 세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된다면, 사도의 논법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될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의 특권에 의해서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곧 계속되는 발언도 논적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 없다.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고전 10 : 3-4). 이것을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한다.9

 

 

 

6. 요한복음 6 : 49,54을 근거로 한 반대에 대한 논박

 

바울의 발언을 뒤엎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와(요 6 : 49),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6 : 54)는 말씀을 들어 반대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조화시키기 어렵지 않다. 주께서 그때에 상대로 말씀하신 사람들은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만 하고 영혼의 진정한 양식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해력에 알맞도록 말씀하셨다. 특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나와 그들의 육체를 비교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기적으로 권능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모세도 하늘에서 만나를 얻었을 때 광야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만나는 그 당시에 굶주린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도와준 것을 의미할 뿐이었고, 그들의 생각은 바울이 문제로 삼은 더 깊은 신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보다 자기에게서는 얼마나 더 위대한 은혜를 기대해야 하는가를 알리시고자, 이 비교를 말씀하셨다. 주의 백성이 광야에서 아사하지 않도록 주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늘 양식을 주시고 그들을 단시일 동안 지탱해 주신 것을 위대하고 기억할 만한 기적이라고 한다면, 영생을 주는 양식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를 추론해 보라고 하신다. 주께서 만나의 가장 중요한 면을 간과하시고 그 최저의 이용 가치만을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를 비난하려고 모세를 그에게 대립시키고, 모세는 궁지에 빠진 백성을 만나로 구출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훨씬 더 고귀한 은총을 전달하는 사람이며, 거기 비할 때에 백성의 신체적 요구를 만족시킨 것은, 비록 그들은 그것만을 중요시하지만 멸시해야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주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떨어뜨리신 것은 그들의 배만을 불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적 신비로서 주셨다는 것을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적 생명을 예시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고전 10 : 1-5). 그러므로 그는 특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이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다. 주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똑같은 영원한 하늘 생명의 약속을 유대인들에게도 알리셨을 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 성례전으로 그 약속에 인을 치셨다고. 어거스틴은 『마니교도 파우스투스를 논박함(Against Faustus the Manichee)』이라는10 저서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논의했다.

 

 

 

(영생에 대한 소망에 관한 주장은 구약성경의 족장들이 다가올 삶 속에서 약속이 이행될 것을 기대했음을 보여 준다. 7-14)

 

7. 그와 더불어 또한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들은 바와 같이, 족장들에게도 모두 공통적인 영적 언약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 독자들은 그것을 증명하는 말씀들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인용되기를 바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 소원대로 하겠다. 더우기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논적들은 더 확실히 반박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우선 제출하려는 증거를 재세례파는 무의미하며 심지어 우스운 것이라고 해서 멸시할 줄을 나는 알지만, 역시 그것은 정신이 건전하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귀중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속에 큰 생명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미 거기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신 사람들의 영혼을 모두 살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는 씨며 항상 있다고 한 베드로의 말은 언제든지 타당했고(벧전 1 : 23), 그는 이 점을 이사야의 말로 추론하기도 한다(벧전 1 : 25, 사 40 : 8). 그런데 하나님께서 옛날 유대인들을 이 거룩한 유대로 자기와 연결하셨은즉, 그들을 성별하셔서 영생의 희망을 주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결합되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천지와 우주 만물에 편만한 전반적인 전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법도 만물에 각각 그 본성의 정도에 따라 생명을 주지만, 썩어가는 곤경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을 비추는 특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동시에, 이를테면 그 영혼들을 하나님에게 결합시킨다.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와 같은 말씀에 의한 조명으로 하나님에게 밀착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 불멸하는 나라에 틀림없이 들어갔다고 나는 단정한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참여했으며, 이 참여에는 영생의 축복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사귐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것도 아직 조금 분명치 못한 것 같은가?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 자체를 보기로 하겠다. 그렇게 하면 조용한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요, 반대자들의 무지도 충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의 종들과 언약하신 말씀은 항상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다(레 26 : 12). 선지자들도 보통 설명하기를, 생명과 구원과 모든 축복이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고 했다. 다윗이 자주 한 말에는 근거가 있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 : 15),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 : 12). 이것은 지상의 복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출하시며, 영원한 자비로 영원히 보호하시며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같을 말을 한다. "당신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죽지 않겠나이다"(합 1 : 12, 의역).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 : 22). "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희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을 백성이로다"(신 33 : 29).

그러나 공연한 일로 애쓸 것 없이, 예언자들이 반복하는 경고를 들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동안, 우리에게는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하며 구원이 확실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시는 순간 그 얼굴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된다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하나님으로서 나타나실 때에 이 계시와 동시에 자기의 구원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조건은, 모세를 통해서 증언하신 대로(레 26 : 11),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계시는 사람은 동시에 생명을 받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 다른 설명이 없었지만, "나는‥‥‥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씀에서(출 6 : 7) 그들은 영적 생명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신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지 않은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격리되어 있으며 죽음 속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결합이 있을 때에는 영원한 구원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죽음보다 강하였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소망이 현세의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장래에까지 확대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 생명의 성격 묘사를 이렇게 해석했다는 것은 여러 구절이 증명한다. 신자들은 현재의 불행에 대해서 위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약속에는 둘째 부분이 있었고, 거기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을 위해서 지상생활의 한계를 넘어 더욱 연장되리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보장되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 : 7). 후손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죽은 사람에게 대한 후의를 선언하셨은즉, 죽은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확실히 은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친구가 죽으면 그에게 호의를 보일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친구의 후손에게 그 호의를 옮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방해를 받지 않으므로, 자비의 열매를 죽은 자에게서 철회하시지 않고, 그들 때문에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출 20 : 6).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훌륭한 증거로 자기의 인애가 위대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시려고, 모든 후손에게까지 넘쳐 흐르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그 은혜를 죽은 후에도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께서 당자들이 죽은지 오랜 후에 자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때에(출 3 : 6), 이를테면 이 약속을 실현하심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인하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만일 그들이 죽어 없어졌다면 이것은 불합리한 칭호가 아니었겠는가? 바꿔 말하면 "나는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가지 증거만으로 사두개파를 논박하셨다고 한다(마 22 : 23-32, 눅 20 : 27-38).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까지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는 모세 자신에게서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신 33 : 3)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점을 근거로 생사의 심판자이신 이가 인도하시며 돌보시며 보호해 주신 사람들은 죽음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10. 옛 사람들의 축복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의 중심점을 검토하겠다. 그들의 더 좋은 생명은 다른 곳에 있으며, 지상의 생명을 무시하고 하늘 생명을 명상하라는 것이 주께서 신자들에게 가르치시며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신 뜻인가 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점이다. 첫째로, 주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생활 양식은 일종의 계속적인 훈련이었다. 그들이 현세 생활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가련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훈련이었다. 잃어버린 행복을 회상하기만 해도 지극히 슬펐던 아담은 고된 노동으로 겨우 살아갔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어려운 육체 노동을 하는 것도 부족하다는 듯이(창 3 : 17), 남아 있는 위로 가운데서도 극도의 슬픔을 견뎌야 했다. 두 아들 가운데서 한 아들은 다른 아들에게 무참히 죽었다(창 4 : 8). 살아 있는 아들은 보기만 해도 밉고 몸서리쳐진 것은 당연하다. 한창 때에 참살을 당한 아벨은 인간의 재난을 대표하는 듯했다. 온 세상이 쾌락 추구의 태평 세월을 보냈을 때에 노아만은 일생의 상당한 부분을 방주 건조로 시달렸다(창 6 : 22). 겨우 죽음을 면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백 번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고생이었다. 방주가 십 개월 동안 일종의 무덤 같았을 뿐 아니라, 그 오랜 시일 동안을 짐승들의 배설물에 거의 묻히다시피 하면서 갇혀 지내는 것은 비할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이런 큰 곤란을 극복하고 나서 그는 새로운 슬픔을 당했다. 자기 아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을 보았으며, 부득이 자기 입으로 그 아들을-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홍수에서 살아난 아들을-저주했다(창 9 : 24-25).

 

 

 

11.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에 그를 십만인의 가치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믿음은 믿는 자들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는 아브라함 족속의 일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창 12 : 3).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구석지고 으슥한 곳에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가 모든 신자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였으니(참조, 창 17 : 5),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를 신자들 사이에서-최고의 존경을 받는 계급에서라도-제거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말소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의 경험을 보면,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창 12 : 1), 그는 고향과 부모와 친구들을 즉 인간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으로 인정되는 것들을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그에게서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으시는 것 같았다. 그는 거주지로 지정된 땅에 도착하자, 기근 때문에 그곳에서 쫓겨났다(창 12 : 10). 도움을 얻으려고 도망해 간 곳에서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창 12 : 11이하). 이것은 여러 번 죽기보다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거주지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 기근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자주 배를 곯아야 하며, 거기서 도망하지 않고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땅에서 산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할 것인가? 아비멜렉의 땅에서도 같은 궁지에 빠져 자기가 살기 위해서 처를 내놓았다(창 20 : 1이하). 불안한 방랑을 여러 해 계속하는 동안에, 종들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자기 아들같이 사랑한 조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창 13 : 5-9). 확실히 그는 이 이별을 자기의 수족을 끊는 것같이 느꼈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 조카가 원수들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창 14 : 14-16). 어디를 가나 무섭게 야만적인 이웃들이 있어서, 자기가 공들여 판 우물들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먼저 우물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비멜렉에게서 도로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창 21 : 25-31). 그런데, 그는 노쇠하여서도 자식이 없었다(창 15 : 2). 이것은 노년에 가장 서글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드디어 천만 의외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나(창 16 : 15), 이 아들의 출생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다. 마치 그가 여종을 교만하게 만들어 가정 불화를 일으킨 듯이 사라가 원망하기 때문에 그는 지쳐 버렸다(창 16 : 5). 드디어 이삭이 났지만(창 21 : 2),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거의 원수같이 쫓아내어 버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창 21 : 9 이하). 이삭만이 남아 있어서 노쇠한 이 착한 사람이 의지할 아들이었는데, 그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잠시 후에 받았다(창 22 : 1이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삭이 병으로 죽었더라도 누가 아브라함을 가장 불행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희롱당한 것같이 아들을 얻었다가 그 아들 때문에 아들이 없는 슬픔이 갑절이나 더 고통스럽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삭이 낮선 사람에 의해 죽었다면, 그 부끄러운 죽음이 재난을 더욱 큰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재난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일평생 세파에 시달렸으므로, 비극의 일생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아브라함같이 적절한 모델을 얻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전하게 빠져났다고 해서, 그의 일생이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고 항변하지 말라. 무한히 많은 곤란을 당하면서 오랫동안 악전 고투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산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지 않고 현재 여러 가지 혜택을 고요히 즐기는 사람을 우리는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다.

 

 

 

12. 이삭과 야곱의 믿음

 

이삭이 당한 고생들은 비교적 심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도 역시 지상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했다.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쫓겨 났고(창 26 : 1),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겼다(창 26 : 7이하). 이웃들은 백방으로 그를 괴롭혀, 우물물 때문에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창 26 : 12이하). 가정에서는 그의 자부들이 큰 말썽을 일으켰다(창 26 : 34-35). 그의 아들들이 싸워서 괴로웠고(창 27 : 41이하), 이 큰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축복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창 28 : 1, 5).

야곱으로 말하면, 극도의 불행만을 겪은 사람의 특출한 표본이11 되었다. 소년 시절에는 가정에서 형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세월을 보냈고, 드디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창 27 : 41-45). 부모와 고향을 떠나갔을 때에-이런 추방에서 오는 슬픔뿐 아니라-그의 외삼촌인 라반도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받아주지 않았다(창 29 : 15이하). 야곱은 칠년 동안 가장 힘들고 잔혹한 종살이를 했건만, 그것도 부족했고(창 29 : 20), 거기다가 흉계에 걸려 처까지 빼앗겼다(창 29 : 23-26). 둘째 처를 얻기 위해서 다시 종살이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창 29 : 27), 그 자신이 불평한 것과 같이 온종일 불볕에서 타며, 추위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 31 : 40). 이십 년 동안 이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매일 장인의 부당한 처사로 고통했다(창 31 : 41). 자기 가정에서도 아내들이 서로 맞서 미워하며 싸우기 때문에 집안이 항상 어수선하고 거의 분열 상태였다(창 30 : 1이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부끄럽게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창 31 : 17이하). 그래도 장인의 악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여행 도중에 그에게서 모욕과 질욕을 받게 되었다(창 31 : 23). 불원에 그는 훨씬 더 잔혹한 곤란에 부딪혔다. 형이 있는 곳에 접근했을 때에, 그는 잔인한 원수가 계획한 것 같은 죽을 위험성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에서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 무서운 공포심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창 32 : 7,11).

에서를 보고 야곱은 거의 죽은 사람같이 형의 발 앞에 엎드려, 의외의 호의를 느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창 33 : 1이하). 그 후 고향에 들어가자 사랑하는 처 라헬을 잃었다(창 35 : 16-20). 후에 그는 라헬이 낳은 아들이 다른 아들들보다 특히 사랑하던 아들이 짐승에게 찢겼다는 말을 들었다(창 37 : 31-32). 아들이 죽은 슬픔에 압도되어 오랫동안 울고 나서 모든 위로를 완강히 거절하고, 죽어 아들에게 가기까지 슬퍼할 것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는 동안에 딸 하나가 잡혀 강간을 당했고(창 34 : 2,5), 아들들이 담대한 복수를 감행해서(창 34 : 25), 그는 모든 지방 주민에게 미움을 받을 뿐 아니라, 언제 피살될는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창 34 : 30). 이 모든 일이 불안과 슬픔과 염세의 큰 원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맏아들 르우벤의 극악한 범죄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창 35 : 22). 처가 능욕을 당하는 것만도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하거든, 하물며 그 죄를 지은 자가 자기 아들이었으니,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근친 상간의 추태가 있었다(창 38 : 18). 이렇게 많은 부끄러운 일을 겪으면, 아무리 재난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정신이라도 좌절될 것이다. 일생이 거의 끝나려 할 때에 그는 자신과 가족의 주림을 면하려고 하다가, 새로운 재난이 닥쳐온 소식을 들었다. 아들 하나가 옥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을 꺼내기 위해서 자기의 유일한 위로인 베냐민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창 42 : 34, 38). 이렇게 홍수같이 밀려오는 재난 속에서 야곱은 어떻게 일순간이라도 평화로운 숨을 쉴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는 자신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인으로서, 자기의 지상 생활은 짧고 험악했다고 바로에게 대답했다(창 47 : 9). 자기는 끊임없는 불행의 일생을 보냈고, 주께서 약속하신 번영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노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상에서 비참한 생애를 살았다는 그의 말은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이 옳았다면, 그는 땅의 일에 희망을 두지 않았다는 결론이 된다.

 

 

 

13. 족장들은 영원한 삶을 추구했다

 

만약 이 거룩한 족장들이 하나님에게서 축복된 생활을 받으려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복을 지상 생활 이외에 다른 축복을 생각하고 구한 것이다. 사도가 이 점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믿었으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원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 : 9-10, 13-16). 만일 그들이 약속의 실현을 다른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다면, 지상에서 실현 될 가망이 없는 약속을 추구하여 마지 않았다는 것은 목석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모세와 같이(창 47 : 9) 그들도 현세를 "나그네 길"이라고 불렀다고 바울이 우선 주장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이며 나그네라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만든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분명히 아주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무덤 이외에 "발붙일 만큼도" 얻지 못했다(행 7 : 5). 이것으로 그들은 사후에야 약속의 결과를 받으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그 땅에 묻히는 것을 심히 원해서 아들 요셉에게 맹세로 이 일을 약속시켰고(창 47 : 29-30), 요셉 또한 자기의 뼈가 흙이 되어 수백 년 지난 후에라도 그 뼈를 그 땅으로 옮겨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창 50 : 25).

 

 

 

14. 성도들의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끝으로, 족장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내세의 축복을 소망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만일 야곱이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에 장자의 권리를 그렇게까지 원했으며,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큰 모험을 했겠는가? 그 때문에 그는 외국으로 쫓겨가며, 거의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할 뻔했고, 소득은 조금도 없었다(창 27 : 41). 운명하려 할 때에 그는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로(창 49 : 18) 자기의 의도를 밝혔다. 만일 그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본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죽어 가는 줄을 안 그가 무슨 구원을 기다렸겠는가? 우리는 무슨 까닭에 거룩한 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가? 진리를 공격하려고 하던 자까지도 이런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았는가? 발람이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민 23 : 10) 그는 후에 다윗이 언명한 것같이 느낀 것이 아닌가? 다윗은 말하기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 : 15), 그러나 "불경된 자의 죽음은 극히 악하도다"라고 했다(시 34 : 21). 만일 죽음이 최후의 경계선이요 종점이라면12 죽음에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사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다윗과 욥과 에스겔과 기타 인물들을 인용해서 이 논의를 계속한다. 15-22)

 

15. 다윗이 희망을 선포한다

 

우리는 아직 모세까지 왔을 뿐이다. 모세가 풍부한 각종 물자와 옥토에 대한 약속으로 육적인 백성을 유인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 것이 그가 다한 유일한 직책이었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시된 광명을 고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적 언약이 이미 분명히 확인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장 찬란하게 제시되었다.

우선 예언자들의 선배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에 따라 하늘 신비들을 다른 예언자들보다 아주 희미하게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모든 발언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목표를 겨눈 것이었다. 그가 지상 생활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했는가는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라는 말이 증언한다(시 39 : 12). "사람마다‥‥‥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시 39 : 5-6).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 : 7). 지상에는 견고한 것이나 완전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은 확실히 자기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은 신자들을 참으로 위로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이 명상을 권고했다.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인간의 단명함과 무상함을 말한 다음에, 이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라고 첨부한다(시 103 : 17). 이와 같은 그의 발언이 시편 102편에도 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시 102 : 25-28). 천지가 멸망하더라도 경건자들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굳게 서 있다면,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사야서에 있는 약속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전연 성립할 수 없다.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 : 6)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거기서는 의와 구원에 영구성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 영구히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영구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16. 미래의 삶에 적용되는 첨부적인 구절들

 

그가 시편에서 성도들의 번영에 대하여 노래하는 많은 구절들도 하늘 영광이 나타난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르게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 : 10). "의인을 위하여 빛이 동트며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이 밝아오도다"(시 97 : 11, 의역). 마찬가지로 "의인의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 : 9).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시 112 : 10). 또,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시 140 : 13).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시 112 : 6). 또 다른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 하시나니"라고 한다(시 34 : 22).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악인의 정욕 때문에 고통당할 뿐 아니라, 찢기고 몰락하는 것까지 허락하시는 때가 많다. 선인들이 어둡고 누추한 곳에서 신음하는 것을 버려 두시는데, 악인들은 거의 별 사이에서 빛난다. 또 자기의 얼굴의 광채로 선인들을 격려하셔서 그들이 영구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까지도 만일 신자들이 현세의 사태만을 주목한다면, 그들은 심히 중대한 유혹에 걸려, 마치 하나님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호의와 보상을 베푸시지 않는 것같이 생각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만큼 악인들은 심히 창성하며 번영하는데, 경건자들은 치욕과 빈곤과 멸시와 각종의 십자가에 눌려지낸다.13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다윗은 말했다(시 73 : 2-3). 그러나 그는 이 발언의 결론으로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닫겠나이다"(시 73 : 16-17)라고 한다.

 

 

 

17. 믿는 자들의 소망은 현세의 곤경을 초월하여 미래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의 이 고백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는 일은 매우 드물거나 전혀 없다는 것을 구약하의 거룩한 족장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 올려, 현세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거기 숨겨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곳이 곧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였다. 그들은 비록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확신에 의해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있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이 점은 다음 발언들이 증거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 : 15). 또,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시 52 : 8). 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시 92 : 12-14). 조금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호와여‥‥‥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 : 5,7). 이 현상계가 하나님 나라의 출현에 의해서 전복될 때가 아니면 어디서 신자들의 아름답고 우아한 점이 나타나는가? 그들은 저 영원을 바라보면서 현세 재난의 일시적인 고통을 멸시하고 대담하게 부르짖었다.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시 55 : 22-23). 악인을 삼키는 영원한 파멸의 웅덩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악인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그 날을 형통하여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 가느니라"고도 한다(욥 21 : 13). 성도들의 위대한 평안은 어디 있는가? 다윗이 각처에서 한탄하듯이, 그들은 난폭하게 휘둘릴 뿐 아니라, 완전히 눌리고 소멸된다. 바꿔 말하면, 다윗은 바다의 파도보다도 더 불안정한 현세의 변화무상한 사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장차 심판대에 앉으셔서 천지의 영구한 상태를 확립하실 때에 하실 일을 내다보고 있다.

시인은 이 점을 다른 구절에서 적절하게 묘사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도다 아무리 고귀한 자라도 그 형제를 죽음에서 구속하지 못하며‥‥‥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 못하리로다‥‥‥지혜 있는 자는 죽고 악인과 우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 것을 그들은 보면서도 저희의 속생각에 자기 집이 영영히 있고 자기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땅에서 자기의 이름을 칭송하는도다 사람의 존귀는 장구치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 같으리로다 저희가 이같이 생각함은 우매의 극치이건만, 그 후손들은 그들을 열심히 본받는도다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모으시리니 사망이 저희를 지배하리로다‥‥‥빛이 동트면 의인이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소멸하여 음부가 저희 거처가 되리로다"(시 49 : 6-14).

현세의 소위 "행복"은 믿을 수 없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인데, 그것을 믿고 안심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조롱하는 것은,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훨씬 다른 종류의 행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들이 멸망한 후에 결경자들의 나라가 있으리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더욱 분명히 밝힌다. 묻노니, 빛이 동튼다는14 것은 현재의 이 시대가 끝난 후에 새로운 생명이 계시되리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18. 그들의 행복한 운명을 악인들의 운명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신자들이 불행 중의 위로와 고난에 대한 대책으로 사용한 저 큰 소망이 생겨났다. "주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시 30 : 5). 거의 한 평생을 계속한 곤란을 그들은 어떻게 순간에 제거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거의 맛본 일도 없는 그들이 어디서 이렇게 영구적인 은혜를 볼 수 있었는가? 만일 땅에 집착했다면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보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주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지되, 그것은 "잠시 동안"이며, 그들이 받는 "자비"는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했다(사 54 : 7-8). 그러나 하루 동안 꿈같이 행복했던 악인들에게는 영원히 계속하는 파멸이 있으리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다. 여기에 대한 발언들은 예컨대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 : 7),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 : 15),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 : 21)가 있으며 사무엘서에 "주께서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라"(삼상 2 : 9)는 말씀도 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성도들은 아무리 곤란으로 시달리더라도 결국은 생명과 구원이며, 악인의 길은 즐거운 행복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점점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을 고대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인의 죽음을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겔 28 : 10; 참조, 31 : 18, 32 : 19이하; 기타). 악인들은 부활할 희망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생각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것이었다(시 69 : 28).

 

 

 

19. 욥, 영생 불멸의 증인이다

 

다른 구절들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욥이 한 말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 : 25-27).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싶은 자들은, 이 구절은 최후 부활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이 자기를 더 인자하게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한 그 첫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15 지껄인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이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욥의 소망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고상한 소망에 도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들이 싫든 좋든 인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미래의 영생 불사를 우러러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무덤 속에 있을 때라도 자기의 구속자가 자기와 함께 계시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현세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최후의 결정적 절망이지만, 그 죽음도 욥의 소망을 끊어버릴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그는 말한다(욥 13 : 15, 불가타역).

이런 발언들은 소수 사람들이 한 것이고,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증명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궤변가들은 나를 공격하지 말라. 나는 곧 대답하리라. 이 소수 사람들은 이런 발언에서 어떤 감추인 지혜를 우수한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비밀히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일반 사람들의 교사로 임명되어 하나님의 비밀들을 널리 발표했고, 그 신비들을 백성이 배워 경건의 지도 원칙으로 삼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유대인 교회에서 영적 생명을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논하시는 그 공개적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육적인 언약으로 돌리며, 땅과 땅에 붙은 재물에만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용납할 수없는 완악한 고집일 것이다.

 

 

 

20. 영생에 대한 예언자들의 증언

 

후기 예언자들에게 내려오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분야를 활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과 욥과 사무엘에 관해서 주장하는 점을 우리가 쉽게 증명했다면, 예언서들에서는 그 증명이 훨씬 더 쉽다. 주께서는 자비의 언약을 실행하실 때에 질서 정연한 계획에 따르셨다. 즉, 세월이 흘러 완전 계시의 때가 접근함에 따라 주께서는 날마다 계시를 더욱더 빛나게 하셨다.16 따라서 맨 처음에 아담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을 때에는(창 3 : 15), 그것은 미약한 불꽃이 비치는 정도였다. 그 후에 점점 빛이 더욱 밝게 되어 더욱 강하고 더욱더 넓게 광채를 퍼뜨렸다. 드디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고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세계를 완전히 비추셨다(참조, 말 4장) 우리는 우리의 논점을 예언자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우리 앞에 거대한 산림같이 많은 자료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 책의 체재를 많이 벗어날 정도로 논해야 하겠고, 그렇게 한다면 이 문제만으로 큰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솔길을 표시해 놓았으니, 어지간히 총명한 독자라면 그 길을 따라 이 산림 속을 무사히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전에 그들에게 쥐어준 열쇠를17 써서 앞길을 열어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경고하겠다. 즉, 믿는 백성의 행복을 선지자들이 말하며, 그런 행복을 현세에서는 흔적조차 보기 어려울18 때마다 독자들은 그들의 특색에서 피난처를 구해 야 한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잘 추천하기 위해서 그 인애를 현세에서 받는 혜택의 모양으로 백성에게 이를테면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그림은 백성의 마음을 들어 올려, 땅을 초월하며 이 세상 초등 학문과(참조, 갈 4 : 3) 멸망해 가는 세대를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 그림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장차 올 영적 생명의 행복을 깊이 생각하도록 각성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21. 에스겔서에 있는 마른 뼈의 골짜기

 

우리는 예를 하나만 들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들은 이 민족 분산이 죽음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민족 부흥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서 이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썩어가는 시체들이 다시 살게 되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의 은혜는 여전히 있으리라는 것을 증명하시고자, 예언자에게 마른 뼈가 가득한 지면의 환상을 보이시고,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일순간에 그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라게 하시는 것을 보이셨다(겔 37 : 1-14). 참으로 이 환상은 당시의 회의를 시정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주의 권능이 유대 백성의 부흥뿐 아니라, 훨씬 그 이상의 일을 하신다는 깊은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 간단한 명령으로 흩어진 마른 뼈들을 살려 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스겔의 말과 이사야에 있는 구절을 비교할 수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 26 : 19-21).

 

 

 

22. 다른 예언서들에서 부가한 구절들

 

혹 누가 모든 다른 구절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구절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미래의 영생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 구절들을 우리는 몇 개 설명했지만, 다른 구절들도 대개 같은 뜻이며, 특히 여기서 인용하려는 두 구절이 그러하다. 하나는 이사야서에 있다.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항상 있으리라‥‥‥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사 66 : 22-24). 또 한 구절은 다니엘서에 있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 : 1-2).

 

 

 

23. 요약과 결론 : 영생 문제에서 신구약은 일치한다

 

아직 두 가지 점이 남았다. 즉, 구약의 조상들은 ⑴ 그리스도를 언약의 보증으로 소유하였고, ⑵ 미래의 행복은 그에게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둘은 비교적 분명하고 논쟁할 여지도 적기 때문에, 우리는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모든 술책으로도 공격할 수 없는 한 원칙을 담대히 견지하겠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구약 즉, 옛 언약은 땅에 붙은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이 언약에 참으로 찬동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에 이런 생명에 대한 기대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자들은 주께서 유대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 또는 그들이 추구한 것은 배가 부르는 것, 육의 즐거움, 불어가는 재물, 외면적인 권력, 번성하는 자손, 기타 자연인이 갈망하는 모든 것뿐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위험스런 사상을 물리친다. 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금 약속하시는 "천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는" 천국에 불과하다(마 8 : 11).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은 복음의 은총을 상속할 자들이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옛날에 자기 백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에 포함되었다고 말했다(행 3 : 25). 주께서는 이 일을 말로만 증거하시지 않고 행동으로도 인정하셨다. 부활의 순간에 주께서는 많은 성도들을 자기의 부활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셨고, 그들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보도록 하셨다(마 27 : 52-53).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하신 일과 겪으신 고난은 우리들과 똑같이 구약 시대의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하셨다. 참으로 베드로의 증언과 같이, 우리를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믿음의 영을 그들도 받았다(행 15 : 8). 우리 안에서 영생 불사의 불티와 같으시며, 따라서 다른 곳에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한(엡 1 : 14) 그 성령께서 그들 속에도 마찬가지로 계셨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서 생명의 상속을 감히 빼앗을 것인가? 옛날 사두개파가 부활과 영혼의 존재를19 부정할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것은(마 22 : 23; 행 23 : 8) 이 두 가지 교리를 성경이 이미 분명한 증언으로 인친 후였으므로, 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 유대 민족은 전체적으로 메시아의 지상적 왕국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 형벌을 받으리라고 성경이 벌써 예언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우둔함은 사두개파에 못지 않게 해괴할 것이다. 제시된 하늘 광명을 거부하고 고의로 암흑을 덮어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을 내리셔서 그 마음을 어둡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읽으며 항상 그의 글을 깊이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을 수건이 가리워 그의 얼굴에 있는 빛을 보지 못한다(고후 3 : 13-15). 그래서 그들은 지금 모세의 얼굴을 그리스도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지만, 모세의 얼굴은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때까지 그들에게 항상 가리워 있으며 숨겨 있을 것이다.

 

 

 

제 11 장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다섯 가지이다 : 첫째로, 구약은 영적 축복을 일시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1-3)

 

1.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야 할 지상의 은혜를 강조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은 신구약간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또한 신구약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대립시키는 많은 구절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성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엄연한 통일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인정이다. 차이점들을 순서대로 토의하고 나면 이 점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거나 기억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은 넷이다. 다섯째 것을 첨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이 모든 차이점은 처리 방법에 관한 것이고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며, 그 점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신구약의 약속들이 같으며, 이 약속들의 토대도 같은 그리스도시라는1 입장을 방해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은 첫째로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자기의 백성이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하늘 기업을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의 이 소망을 더욱 잘 배양하시기 위해서 그 기업을 땅에 붙은 혜택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들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내세의 은총을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계시했으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직접 내세를 명상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시던 수준 낮은 훈련 방법을 버리신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육체에 대해서 약속된 축복을 더 이상 초월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나안 땅은 훌륭하고 심지어 유일한 상급이라고 하는 말씀이 자주 있는 것을 그들은 듣는다.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하시는 가장 가혹한 벌의 위협은 소유한 이 땅에서 쫓겨나며 외국 땅으로 흩어지리라는 것임을 그들은 듣는다(참조, 레 26 : 33, 신 28 : 36). 그들은 모세가 말한 축복과 저주의 거의 전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증거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했다기보다 다른 민족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서슴치 않고 단정한다. 즉, 그리스도 교회가 한 외형을 보고 거기서 영적인 일들의 증거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상적 혜택을 유대인들에게 주셨을 때에, 친히 그들의 손을 잡아 천상적인 일에 대한 희망으로 인도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가끔 보여 준다. 따라서 이런 처리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지몽매, 아니 우둔의 극치였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반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을 최고의 궁극적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가 계시된 후로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 상속을 예표했다고 그들은 가르친다.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즐긴 지상적 소유를 일종의 거울로 삼아, 자기들을 위해서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은 미래의 상속을 내다본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2. 지상에서의 약속은 구약에서 유년기 시절의 교회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지상의 일에 대한 희망을 구속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서신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유대 민족을 어린 상속인에 비교한다. 아직 자립할 수 없어, 후견인 또는 관리인에게 맡겨 돌보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갈 4 : 1-2). 바울은 주로 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비교하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기서도 그 비교론을 가장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유업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려서3 그것을 상속해서 운영할 수 없었다. 같은 교회가 그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아직 유년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을 이 보호 감독 하에 두시며, 영적 약속을 주실 때에 아무 장식없이 또 드러나 보이게 하시지 않고, 지상적 약속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예표된 것을 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생 불사의 희망을 주시기로 정하셨을 때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하셨다. 그 땅은 그들의 소망의 최종목표가 아니었고, 그것을 봄으로써 진정한 유업을 아직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은 유업을 바라보도록 그들을 훈련하며 확고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더 높은 약속을 주셔서 그 땅이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가 아님을 알리셨다.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가 거져 듣고만 있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를 향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말씀은,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것이었다(창 15 : 1).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궁극적 상급은 오로지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초등 학문에서(참조, 갈 4 : 3) 무상하고 포착할 수 없는 상급을 구할 것이 아니라, 불멸의 상급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주께서는 그 다음에 땅에 대한 약속을 첨가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인애의 상징과 하늘 유업의 예표에 불과했다. 성도들도 이 일을 체험했노라고 각기 증언한다. 다윗은 현세의 행복으로부터 비약해서 저 최고의 궁극적 행복에 도달한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나의…영원한 분깃이니라"(시 73 : 26, 참조, 시 84 : 2). 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그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 16 : 5). 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 : 5).

이런 말을 감히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들에게는 이 세상과 모든 현세적 혜택을 초월한 소망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주에게서 받은 예표로 내세의 행복을 표시하는 때가 더 많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컨대, "대저 경건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리라"(잠 2 : 21),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욥 18 : 17, 참조, 잠 2 : 22, 집회서 41 : 9). 이사야서에는 예루살렘에 각종 재물이 풍성하며 시온에 모든 물건이 차고 넘치리라고 하는 구절이 많다(참조, 사 35 : 10, 52 : 1이하, 60 : 4이하, 62장).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출생지에서나 지상의 예루살렘에 적용될 수 없고, 신자들의 진정한 고향 "여호와께서 복과 영생을 명하신"(시 133 : 3) 저 하늘 도성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3. 유형별로 본 육체적인 은혜와 육체적인 처벌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합당하지 못 할 정도로 현세 생활과 그 행복을 너무 중요시했다. 그것이 경주의 종점인 듯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약한 분량에 따라 그들을 훈련하시려고 그 행복에 은총의 표적을 남겨 주신 것을 보고, 그들은 그 은총을 직접 보지 않고 표적을 기뻐하여 거기 더욱 끌렸다. 그러나 주께서는 현세의 혜택으로 신자들에 대한 자기의 인애를 증거하실 때에 이런 예시와 상징으로 영적 행복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한편으로는 신체적 처벌로 장차 악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증명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지상적인 일에서 더 현저히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벌도 마찬가지였다. 무지한 자들은 상벌간에 있는 이 비슷함과 일치라고 할 것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많이 변하셨다고 해서 놀란다. 과거에는 엄격하고 무서운 벌을 모든 범행에 일일이 또 신속히 내리셨는데, 지금은 이전의 노하신 기분을 버리시고 훨씬 부드러운 벌을 훨씬 드물게 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니교도들과 같이,4 신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까지 공상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이런 의구심을 곧 일소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울로 가리운 형태로 언약을 주신 동안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의 은총은 지상적인 혜택으로, 그리고 영적 죽음의 중대성은 신체적 형벌로 표시하며 상징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둘째 차이점 :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습과 의식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4-6)

 

4. 이 차이점의 의미

 

신구약간의 둘째 차이점은 상징에 있다. 구약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 대신에 형상과 그림자를 보였을 뿐이고, 신약은 진상의 실체 그 자체를 현재 있는 것으로서 계시한다. 항상 이 차이점이 신구약이 대조될 때에는 거의 언급되지만, 히브리서에 있는 설명이 가장 자세하다.5 그곳에서 사도가 논란하는 상대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면 경건 전체도 파멸된다고 생각했다. 이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는 예언자 다윗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예언한 것을 인정한다(시 110 : 4, 히 7 : 11).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으셨으므로, 제사장이 날마다 교체되던 제사장 제도는 폐지된 것이 확실하다(히 7 : 23). 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은 맹세로 제정된 것이므로 우세하리라는 것을 그는 증명한다(히 7 : 21). 그리고 나서 그는 제사장 제도가 변했으므로 언약도6 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히 8 : 6-13). 율법은 그 자체가 약해서 완성에 이를 수 없었으므로, 이 변경이 필요했다고 그는 선언한다(히 7 : 19). 그 다음에 이 약점의 성격을 논한다. 율법에는 의의 행동이 외면적 신체적인 행동이 있었지만, 이런 행동을 준행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물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양심은 죄를 말소하거나 진정한 성결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가 있고 "일 자체의 산 형상"은 없다고 그는 단정한다(히 10 : 1). 그러므로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복음에서 나타난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히 7 : 19, 시 110 : 4, 히 7 : 11, 9 : 9, 10 : 1).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언약과 복음의 언약, 그리스도의 사역과 모세의 사역이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만일 약속들의 내용에 관한 비교라면 신구약간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경향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므로, 우리는 그것을 따라 진상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일찌기 영원 불멸할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설명하겠다. 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시며, 이 성취에 의해서 언약은 최종적으로 확정되며 인준된다. 확정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주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의식들을 제정하셨고, 의식들은 이를테면 그 확인에 대한 엄숙한 상징이었다. 율법에 제정된 의식들은 그리스도에게 위치를 양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생겼다. 그런데 의식은 언약의 일시적인 속성, 첨가물, 부속물, 소위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약을 실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은 다른 성례전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이 구절에서 "구약"은 언약을 확인하는 엄숙한 방법을 의미하며, 그 방법은 의식과 제사에 포함되었다.

우리가 방법을 초월하지 않을 때에, 거기는 본질적 기반이 없으므로, 사도는 방법을 종결시키며 폐지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참조, 히 7 : 22). 그리스도께서는 이 언약에 의해서 영원한 성결을 선택된 자들에게 단번에 주시며, 율법 하에서 처리되지 못한 죄를 없애버린다.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주의 옛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이었는데, 그것은 그림자7 같고 효과가 없는 의식 준수에 포함되었으며, 확고하고 실질적인 확인을 받기까지는 이를테면 미결 상태에 있는 것, 일시적인 것이었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되며 확립된 때에 비로소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의 잔"이라고 부르셨다(눅 92 : 20).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쳐질 때에 그 진리에 도달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는 뜻이다.

 

 

 

5. 교회의 유년기와 장년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고 사도가 말한 뜻이 분명하다(갈 3 : 24. 참조, 4 : 1-2). 사도는 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후사였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보호자의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에는 크고 빛나는 계시나 분명한 이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광명을 나눠주셨지만, 그들은 아직 그것을 여전히 또 멀리서 어렴풋하게 보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 미약한 이해 상태를 "어렸을 때"라는 말로 표현한다. 아동 교육의 방법으로서 이 유년기를 이 세상 초등 학문과 사소한 의식 준수로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비치시게 되면, 그로 인해서 신자들의 지식이 성숙하도록 하신 것이다(참조, 엡 4 : 13).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 구별을 시사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느니라"(눅 16 : 16. 참조, 마 11 : 13). 율법과 선지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들은 언젠가는 분명히 계시될 그 지혜를 예상하게 만들었으며, 그 지혜가 멀리 반짝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열렸다. 그리스도에게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 2 : 3)가 계시되었으며, 이 지혜와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가장 깊은 하늘 성소에 거의 이르게 할 수 있다.

 

 

 

6. 신앙이 깊었던 위인들도 옛 언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과 비교할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예언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훌륭히 받아서 지금도 전 세계를 그 힘으로 비출 만한 것이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한 우리의 견해는 움직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의 은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가르치신 그 통상적인 처리 방법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한 통찰력을 받은 예언자들이 가르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까지도 먼데 있는 물건같이 희미하였고 예표로 표현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탁월한 지식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었더라도, 그들은 민족의 전반적 훈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역시 어린이들로 인정됨을 면할 수 없었다. 끝으로, 그 때에는 시대적인 모호한 지식을 초월할 만큼 투철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 : 24). 그러므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 : 16). 확실히 이 특권을 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이 특출한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하늘 신비들이 더욱 분명히 계시되었다.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은 여기도 해당한다. 선지자들의 노고는 주로 우리 시대를 위한 것이었음이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벧전 1 : 12).8

 

 

 

(셋째 차이점 :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7-8)

 

7. 이 차이점의 성경적 기원과 의미

 

이제 셋째 차이점을 논할 터인데,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얻은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을 다스렸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리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 : 31-34 의역과 순서 변경). 이 말씀을 근거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한다. 율법은 문자적인 교훈이고, 복음은 영적인 교훈이며, 전자는 돌판에 새겼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에 새겼으며,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생명을 전파하며, 전자는 정죄를, 후자는 의를 전파하며, 전자는 무효하게 될 것이요 후자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고후 3 : 6-11). 사도는 예언자의 뜻을 해석하려고 한 것이므로, 두 사람의 취지를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의 말만을 검토하면 충분하겠지만, 그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예언자에 비해서 사도는 율법을 나쁘게 말한다. 율법 자체에 관해서 뿐 아니라, 일부 그릇된 율법 추종자들이9 의식에 대한 도착된 열성으로 명료한 복음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류와 어리석은 편벽을 보고 바울은 율법의 본성을 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특이점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바울이 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므로, 율법의 고유한 특색만을 고려한다. 예컨대, 율법에는 처처에 자비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데서 빌려 온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본성만을 논할 때에는 율법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이 율법의 기능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다. 즉, 바른 일을 명령하고 악한 일을 금지하며,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범죄자들을 처벌로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부패를 변하거나 시정하지 못한다고 한다.

 

 

 

8. 고린도후서 3장에 따른 세부적인 차이점

 

이제 사도의 비교론을 한 항목씩 설명하겠다. 구약이 문자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의 역사가 없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이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그것을 사람들의 심정에 영적으로 새기셨기 때문이다(고후 3 : 6상). 둘째 대조점은 첫째 것을 밝힌다. 구약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저주 가운데 덮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약이 생명의 도구인 것은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3 : 6하). 구약이 정죄를 내림은 아담의 모든 자손의 불의를 고발하기 때문이며, 신약이 의를 줌은 하나님의 긍휼을 계시하며 이 자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이다(고후 3 : 9).

마지막 대조는 의식적 율법에 관련시켜야 한다. 구약은 현장에 없는 것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때가 오면 죽어 없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은 본체 그것을 나타내므로 영원히 굳게 서 있다(고후 3 : 10-11). 참으로 예레미야는 도덕적 율법까지도 무력하고 연약한 언약이라고 부른다(렘 31 : 32). 그러나 거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즉, 은혜를 잊은 백성이 갑자기 이탈했기 때문에 그 언약이 곧 파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위반의 책임은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언약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런데, 의식들은 무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에 의해서 폐지되었은즉, 폐기된 원인이10 자체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자와 영의 이 차이를 근거로 주께서 유대 민족에게 주신 율법에 아무 효과도 없었고, 그들 중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선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차이점을 지적하여 비교한 것은 은총이 풍부하게 된 것을 찬양하려는 뜻이다. 동일한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마치 성격이 달라진 듯이, 복음 전파에 은총을 풍성히 베푸신 것을 찬양한다. 복음 선포를 통해서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을-모든 민족 사이에서 불러 모으셔서 교회의 교제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 무수한 사람들을-생각하라.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인 사람이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비교하지 않고 그들만을 본다면, 그들의 수가 많았 던 것이 사실이다.

 

 

 

(넷째 차이점 : 구약의 구속과 신약의 자유. 9-10)

 

9. 바울의 가르침

 

넷째 차이점은 셋째에서 생긴 것이다. 구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경은 구약을 "구속"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약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하므로 "자유"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한다(15절). 히브리서에 있는 구절도 여기 적용될 수 있다. 신자들이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이 아니라고 한다. 거기서는 이목에 접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그 무서운 음성이 울렸을 때에 백성은 듣지 않기를 구했으며, 모세까지도 겁이 났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 12 : 22).

바울은 우리가 인용한 로마서의 발언에서 이 점을 간단히 언급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상세히 설명한다. 거기서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해서 비유로 해석한다. 계집종 하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시내산의 상징이며, 자유 여인 사라는 복음의 근원지인 하늘 예루살렘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갈의 소생은 노예의 몸에서 났으므로 상속을 받을 수 없었고, 사라의 후손은 자유인이며 상속권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노예가 되지만, 복음에 의해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갈 4 : 22-31). 요약하면, 구약은 양심에 공포심과 전율을 불어넣지만, 신약의 은혜로 양심은 해방과 기쁨을 얻는다. 구약은 양심을 노예의 멍에에 구속하였지만, 신약은 너그러운 영으로 양심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항의한다고 가정하라. 곧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거룩한 족장들은 예외였으며, 분명히 우리와 같이 믿음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자유와 기쁨을 받았다는 결론이 된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 자유나 기쁨은 율법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족장들은 율법에 의해서 노예와 같이 압박을 받으며 양심의 불안으로 지치게 된 것을 느꼈을 때에 복음에 도망해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약의 일반법과는 별개로 구약의 폐해를 면하게 된 것은 신약의 특별한 결실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자유와 화신의 영을 충분히 받아서 율법에서 오는 공포심과 노예 상태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무리 복음의 은총을 통해서 받은 특권을 즐겼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일반 백성과 같이 의식 준수의 구속을 받으며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 상태와 비슷한 훈련의 상징인 의식들을 정확히 지켜야 했으며(참조, 갈 4 : 3-3), 그들에게 유죄를 고백하게 한 증서는(참조, 골 2 : 14)11 그들을 의무에서 해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때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쓰신 일반적 처리 방법을 고려할 때에, 그들은 우리와는 현저히 달라서 속박과 공포의 언약하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0. 율법과 복음

 

우리가 말한 둘째 이하의 세 가지 비교는12 율법과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 비교에서 "구약"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을, "신약"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의미했다. 첫째 비교는13 범위가 더 넓어서 율법 이전에 발표된 약속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약속들을 "구약"이라는 이름에 넣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예레미야와 바울의 발언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은총과 자비의 말씀을 구약과 구별했다. 어거스틴은 같은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적절한 말을 첨가했다. "하나님에 의해서 중생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으로 계명에 복종한(갈 5 : 6) 약속의 자녀들은(롬 9 : 8) 창세 이후로 모두 새 언약에 속했다. 그들이 복종한 것은 육적․지상적․일시적인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천상적․영구적인 혜택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보를 믿었고, 그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 선을 행하게 되며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14 이것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즉, 성경에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특별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동일한 축복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우리와 어거스틴의 분석이 다른 점은 이와 같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는 말씀에 따라(눅 16 : 16) 복음은 분명하고 그 이전에 있어온 말씀의 경륜은 비교적 모호했다는 점을 구별하는 것이며 어거스틴은 다만 율법은 무력했고 복음은 견고하다는 구별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족장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그들은 옛 언약하에 살면서도 거기 머무르지 않고 항상 새 언약을 사모해서 참으로 그것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의 그림자로 만족하고 마음의 시야를 넓혀 그리스도에 이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도는 맹목적이고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다른 일은 말하지 않더라도, 죽인 짐승에게서 죄의 대속을 얻겠다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맹목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는 외면적으로 물을 뿌려 영혼을 깨끗이 정결케 하며, 냉담한 의식들을 하나님이 즐기시는 듯이 그 의식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율법 준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어리석은 짓으로 엉터리없는 모순에 빠진다.

 

 

 

(다섯째 차이점 : 구약은 한 민족에 언급했으나, 신약은 모든 민족에 관계한다. 11-l2)

 

11.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너진다

 

다섯째로 첨가해도 좋은 차이점은 그리스도 강림할 때까지 주께서 한 민족을 택하시고 은총의 언약을 그 민족에 국한하셨다는 사실이다.15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모세는 말했다(신 32 : 8-9).

다른 곳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써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느니라"(신 10 : 14-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한 백성만이 자기 백성인 듯이, 자기 이름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만 주셨다. 그들의 가슴에 자기의 언약을 안겨 주시다시피 하셨고, 자기의 숭엄성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모든 특권을 그들에게 퍼부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축복들은 보지 않고 화제에 오른 축복만을 고찰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달하심으로써 그들을 자기에게 결부하시고, 그들이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높이게 하셨다. 동시에 모든 다른 족속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헛된 길로 다니게 묵인하셨다(행 14 : 16). 그들의 치명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인 말씀 전파도 그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주의 제일 사랑하시는 아들이었고, 다른 민족들은 남이었다. 이스라엘은 인정과 신임과 보호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자체의 암흑 중에 방치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성별해 주셨으나, 다른 민족들은 속화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시는 영예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이 막혔었다. 그러나 만유를 회복하시기로 지정하신 "때가 차매"(갈 4 : 4) 주께서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자로 나타나셨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의 경계선 안에 국한하던 "담을 허시며"(엡 2 : 14), "먼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엡 2 : 17), 이는 그들이 함께 하나님과 화평하여 한 백성으로 융합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엡 2 : 16). 그러므로 지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갈 3 : 28), 할례나 무할례의 차별이 없고(갈 6 : 15),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다"(골 3 : 11) "그리스도께서는 열방을 유업으로 만들어 주었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시 2 : 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된 것이다(시 72 : 8, 참조, 슥 9 : 10).

 

 

 

12. 이방인들을 부르심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것은 신약이 구약보다 우수한 점을16 밝히 표시한다. 참으로 이 점은 선지자들의 아주 분명한 발언이 여러번 확인했다. 다만 그 실현은 메시아 왕국이 나타날 때까지 연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까지도 전도의 초기에는 그 실현을 즉시 시도하시지 않고 연기하셨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마치며 치욕을 받으시는 기간을 끝내신 후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그 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야 하는 이름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실 때까지 연기하셨다(빌 2 : 9-10). 그래서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냄을 받지 아니하셨노라고 하셨다(마 15 : 24). 그리고 제자들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에 파송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일어 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마 10 : 5). 성경에 이방인을 부르시리라는 증언이 아무리 많았어도, 사도들은 그 일에 착수하려고 했을 때에 너무도 신기하고 해괴한 일같이 느껴져서 움츠렸다. 드디어 그들은 떠는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했으나,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또 그것은 당연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만을 택하시던 주께서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시고 그 선택을 버리신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예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띄는 일이 너무도 신기해서 이런 예언들을 읽을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을 부르시리라는 증거를 하나님이 옛날에 그들에게 주셨건만, 그 증거를 보고도 그들은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부르신 이방인의 수효가 아주 적었을 뿐 아니라, 이를테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접붙여서 그 민족에 가입시키셨다. 그러나 이제는 공개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동등하게 될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죽은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받아들이신 외국인들은 유대인과 동등시된 일이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일을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던 위대한 비밀이라고 부르며(골 1 : 26; 참조, 엡 3 : 9), 천사들에게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는 데는(참조, 벧전 1 : 12)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처리 방법이 다른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일관성을 의 심하는 자들에게 대답함. 13-14)

 

13. 보편적으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인가?

 

단순한 교리 설명의 범위내에서 나는 이 넷 또는 다섯 가지 점으로 신구약의 차이를 충실히 또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회 치리상의 이 변화와 교육 방법상의 차이와 예식 및 의식의 중대 변혁들을 비웃는다.17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대답해야겠다. 다만 그들의 항의는 자세히 반박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간단히 대답하겠다. 항상 시종 여일하신 하나님께서 일찍이 명령하시고 권장하시던 일을 후에 비난하신다는, 이런 큰 변동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각 시대에 유익하다고 보신 대로 형식을 조절하셨다고 해서, 그 일만으로 하나님이 변하신다고 볼 것이 아니다. 농부가 가족에게 시키는 일이 겨울과 여름에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의 변덕스러움을 비난하거나, 자연의 연속적 질서와 일치하는 정규의 영농법에서 그가 이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장(家长)된 사람이 가르치며 명령하며 인도하는 방법이 영아기와 유년기와 청년기에 서로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때문에 그를 변덕스럽다고 하지 않으며, 목적을 버린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대 차이를 적절한 표지로 구별하신 것을 무슨 까닭에 변심이라고 비난하는가? 내가 둘째로 든 비교로 우리는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어린이들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청년에 비교한다(갈 4 : 1이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나이에 맞도록 초등교육에 국한하시고, 우리는 더 엄격하고 이를테면 더 어른다운 규율로 훈련하신 것이 어디가 변칙이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대에 가르치시고, 자기 이름에 대한 결과는 처음에 명령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계속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나는 것이다. 외면적인 형식과 방법을 바꾸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가지로 다르며 또 변하는 인간의 능력에 알맞도록 행동하신다.

 

 

 

14.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인간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런 다양성이 생겼는가? 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강림 후와 같이 처음에도 어떤 상징 없이 분명한 말씀으로 영생을 계시하실 수 없었는가? 맨 처음에 몇 가지 명백한 성례전으로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며, 성령을 주시며, 은총을 전 세계에 보급시키실 수는 없었느냐고, 이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고 너무 늦게 창조하셨다느니, 겨울과 여름, 낮과 밤이 교대하게 만드셨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싸우려는 것과 같은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무슨 까닭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를 때가 많더라도,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을 하나님이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동물의 희생 제물과 레위 족속의 사제 직분에 딸린 여러 가지 부속물들을 하나님이 옛날에 기뻐하셨는데, 지금은 멸시하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대체로 이런 외형적이며 덧 없는 것들이 하나님에게 즐거움이나 어떤 감동을 주었다는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18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정하신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청년기에 쓰는 최선의 치료법과, 같은 사람의 노년기에 쓰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전에 기뻐하던 치료법을 버렸다고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그는 치료에 전념하면서 연령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가 장차 오시리라고 선포하는 데 필요했던 표징과, 그가 계시된 지금 그를 나타내는 표징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강림 후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백성 사이에 더욱 널리 퍼져 나갔고, 성령의 은총은 이전보다 더욱 풍부하게 쏟아졌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과 뜻으로 은혜를 자유로 분배하시며, 원하시는 민족들에게 광명을 주시는 것을 누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려는가? 원하시는 곳에서 말씀 전파를 일으키시며, 원하시는 방법과 정도로 자기의 교훈이 전진하며 성공하게 하시며,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에 대한 지식을 몇 세대 동안 빼앗으시며, 자기의 자비에 따라 다시 원하시는 대로 그 지식을 돌려주시는 것을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려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너무도 부드러운 중상이라고 본다. 단순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그들이 하나님의 의나 성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경건한 자들이 이런 중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 12 장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중보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 되셔야 한 이유들. 1-3)

 

1.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공간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중보자가 될 분이 동시에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것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말하듯이) 단순한 즉,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인간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 결정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최선의 길을 결정하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리워진 구름과 같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해 버렸기 때문에(참조, 사 59 : 2),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면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역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아담의 후손 중의 하나인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조상과 같이 모두 하나님을 보면 공포에 떨었다(창 3 : 8). 천사 중의 하나였는가? 그들도 우두머리가 있어야 했으며,1 그의 연줄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견고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참조, 엡 1 : 22, 골 2 : 10).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우리에게 없으므로 존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림하시지 않았다면 사태는 확실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며(사 7 : 14, 마 1 : 23),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기에는 친근감이 충분히 가깝지 못하며 친밀함이 충분히 견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 사이에는 그만큼 큰 차이첨이 있다. 사람이 본래대로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처지는 중보 없이 하나님에게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현상은 어떠한가? 치명적인 타락으로 죽음과 지옥에 떨어졌고, 무수한 오점과 부패로 더럽혔고 모든 저주로 압도되었다. 그러면 바울이 중보를 설명하면서, 그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지적하는 것은 훌륭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 : 5). 사도는 "하나님이신"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이 "사람"이라는 말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적당한 순간에 가장 적당한 대책을 쓰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친근하게 우리 사이에 두셨다. 그러므로 중보를 어디서 찾을까, 어느 길로 그에게 가야 하는가 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없도록, 성령께서는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참으로, 우리와 같은 육신이시므로 우리와 접촉해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분명히 성령이 여기서 가르치시는 뜻은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된 것과 같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 : 15).2

 

 

 

2. 중보자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인간이어야만 한다

 

이 점은 중보자가 성취하려고 한 것이 비상한 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의 임무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킴으로서 사람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지옥의 상속자들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시지 않았다면, 또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것을 취해서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본질상 그에게 속한 것을 은총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누가 중보의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증을 신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아들이 우리의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살로 자기의 살을, 우리의 뼈로 자기의 뼈를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엡 5 : 29-31, 창 2 : 23-24). 그는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도 되시려고, 쾌히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저 거룩한 형제 관계를 친히 칭찬하신다(요 20 : 17). 이와 같이 우리는 천국 상속의 확약을 받았다.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것인데, 그가 우리를 자기의 형제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형제면 또한 그와 함께 후사기 때문이다"(롬 8 : 17 의역)

똑 같은 이유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의 임무는 죽음을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의 자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세상과 공중(空中)의 권세들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보다 더 높은 권능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생명이나 의나 하늘 주권과 권위는 하나님에게만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로 정하셨을 때에,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 친히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참조, 롬 5 : 8).

 

 

 

3. 오직 참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해서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두 번째로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다. 즉, 불복종으로 멸망한 사람을 바로 고쳐서 불복종을 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행하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께서는 참 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으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으로서는 죽음을 느낄 수 없으며, 인간만으로서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겠으므로, 인성과 신성을 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는 데는 약한 인성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른 본성의 권능으로 죽음과 싸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박탈하는 자들은 그의 존엄성과 영광을 감축하거나, 그의 인애를 희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약화하며 전복시키므로, 인간에게도 적지않은 해를 준다. 믿음은 이 토대 위에서 안정하지 않으면 굳게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대망했던 구속자는 하나님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분 즉,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 이 일은 경건자들에게 혜택을 더한다. 그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무수한 신탁이 환영한 그 기름부음을 받은 분임을 더욱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방금 설명한 점을 특히 지지해야 한다. 즉, 우리와 그리스도가 본성이 같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한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가 죽음과 죄를 모두 정복하셔서 그 승리와 개선(凯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받은 육신을 제물로 바치셔서 그 대속 행위로 우리의 죄를 씻어 버리시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에 대답한다. 4-7)

 

4. 그리스도의 성육신되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다

 

이런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할 때에 필요한 근면하고 주도 면밀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경박한 자나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자를 매혹하는 허망한 사변을 쉽게 버릴 것이다. 이런 사변의 예를 들면, 인류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인간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3 창조된 처음의 질서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천사와 사람의 우두머리으로 그들 위에 위치하셨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 : 15)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그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려고 육신을 입으셨다고 선포하므로, 다른 이유나 다른 목적을 상상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무슨 까닭에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약속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안다. 타락한 세계를 재건하며 멸망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표현되었으며, 신자들의 죄가 대속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신 후에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희망을 주려고 했다. 율법이 아직 발표되지 않은 때에도, 어느 시대에나 피 흘림 없이 중보가 약속된 일이 없으므로, 그는 인류의 불결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임명되셨다고 우리는 확실히 추론한다. 피를 흘리는 것은 속죄의 증표이기 때문이다(참조, 히 9 : 22).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를 선포할 때에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리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대한 모든 증언 가운데서 이사야의 유명한 말을 들면 충분할 것이다. 백성의 죄악을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손에 맞으며 평화의 징계가 그에게 내리며 (사 53 : 4-5),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히 9 : 11-12), 그가 맞은 채찍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되며, 모두 양같이 그릇 행하여 흩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혀 모든 사람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리라고 한다(사 53 : 5-6). 가련한 죄인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자신을 임명하셨다고 하므로, 이 범위를 넘는 사람은 어리석은 호기심에 너무도 깊이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가 강림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으로써 우리를 모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증언을 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 : 14)고 가르치기 전에 인류의 반역을 말한다(요 1 : 9-11).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직책에 대해서 선언하신 것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 : 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리라"(요 5 :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 : 25)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마 18 : 1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마 9 : 12). 모든 구절을 인용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불러 이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다. 확실히,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명예로운 제사장직은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임명되기 때문이다(히 5 : 1). 또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아니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위해서(고후 5 : 19)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성결이 그에게 드리는 모든 칭호를 잃으실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즉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는(롬 8 : 3-4) 바울의 발언도 소멸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셨을 때에, 이 거울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무한한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참조, 딛 2 : 11)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허사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취하기로 결심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이 명령을 받으신 유일한 이유로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아버지의 진노를 푸는 희생이 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또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 : 46-4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 : 17, 15,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 : 14). 또 다른 구절에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 : 27-28,23절과 융합)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육신을 취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리신다. 즉, 우리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희생과 속죄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같은 의미에서 사가랴도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눅 1 : 79)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오셨다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는 알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하듯이,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며"(골 2 : 3), 그를 떠나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울은 자랑한다(고전 2 : 2).

 

 

 

5.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을 것인가?

 

혹 누가 항의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는-정죄된 인간들을 구속-하셨지만, 구원을 받아 안전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람의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이 모든 일은 방해 않는다고4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고 성령이 선언하시므로,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본성의 동참자가 되셨는가를 더 탐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가 속죄를 얻는 대가로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그리스도에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할 뿐 아니라, 예정의 고원한 신비에까지 솟아올라가서, 인간성의 모든 방자함과 경망한 호기심을 적절한 말로 억제한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며"(엡 1 : 4-5),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받을 만한 자로 만드셨으며(엡 1 : 6), "우리는 그리스도 잔에서‥‥‥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고 한다(엡 1 : 7). 여기서는 확실히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모든 시대 이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 때에 하나님이 인류의 불행을 고쳐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5 가령 우리의 대적자들이 다시 항의해서, 하나님의 이 계획은 그가 예견하신 인류의 타락에 좌우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내가 할 말은 이것이면 아주 충분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비밀한 결정으로 정하신 일 이상의 일을 물으며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불경건하고 외람된 생각으로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를 만들려고 덤빈다는 것이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직책을 논한 다음에, 에베소 신자들이 깨닫게 하는 영을 받아(엡 3 : 14-17)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즉 "모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엡 3 : 18-19) 올바른 기도를 드린다. 그는 마치 우리 마음의 주위에 계획적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리스도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화해의 은총에서 조금이라도 떠나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쁘다‥‥‥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임하셨다"라는 바울의 증언에 따라(딤전 1 : 15) 나는 기꺼이 이 일에 찬성한다. 또 같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지금 복음에서 계시된 은총은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라고 가르치므로(딤후 1 : 9) 나는 끝까지 항상 이 은총 안에 머무를 결심이다.

이와 같은 온건한 태도에 대해서 오시안더(Osiander)는 부당한 항의를 한다. 이전에 몇 사람이6 간단히 언급한 이 문제를 그가 현대에 새로 일으킨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그는 외람되다고 비난하며, 성경에 이 공상을 반박하는 증언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는다. 바울은 이런 도착된 호기심에 굴레를 씌우지 않았던가!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속에 대해서 말한 후에 곧 우리에게 명령하기를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한다(딛 3 : 9). 어떤 사람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미련한 생각으로 재치를 보이고자, 하나님의 아들은 나귀의 본성을 취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까지 일으킨다.7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 해괴한 짓을 가증한 것으로 보아 타기하건만, 오시안더는 그것을 특별히 반박한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구실로 변명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귀중하거나 알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은 바울은(고전 2 : 2) 나귀가 구주라고 인정했는가! 또 그는 다른 곳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일하는 머리로 임명되었다고 전파하니(엡 1 : 10, 22), 속죄 사역을 위임받지 않은 어떤 다른 머리를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6.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

 

그러나 오시안더가 자랑하는 원칙은 전혀 보잘 것 없는 너절한 것이다. 사람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본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며,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히기로 이미 결정하신 이와 사람이 같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는 추론하기를, 아담이 시초의 올바른 상태에서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이것이 얼마나 너절한 편견인가를 자연히 이해한다. 또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자기가 처음으로 알아냈노라고 생각한다. 아담을 장식한 비상한 재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그의 안에 거하신 것이라고 한다.

아담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한(이것은 진정하고 가장 완전한 존엄성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우수성의 표지들을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점에서만 이 형상을 찾아야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인정한다. 따라서 아담에게 새겨진 우수성은 모두 그가 독생자를 통해서 창조주의 영광에 접근했다는 사실에서 왔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 : 27),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창조주 자신의 영광이 보이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독생자의 덕택으로 이렇게 높은 영예에까지 승진되었다. 그러나 나는 첨가한다. 아들 자신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공통한 머리였다고. 이와 같이, 아담에게 부여된 존엄성은 천사들도 가졌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시 82 : 6), 그들이 그 아버지와 같은 어떤 성질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이 천사와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그 두 본성에서 나타나는 것을 아버지께서 원하셨다면, 오시안더가 천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었으므로 사람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하는 것은 무지해서 지껄이는 말이다. 천사들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면 항상 하나님을 직접 뷜 수 없을 것이다. 또 바울은 같은 뜻으로, 사람들은 천사들과 합하여 한 머리 아래서 서로 밀착해야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워진다고 가르친다(골 3 : 10). 요컨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늘에 영접될 때에 천사들의 형태를 취할 것이며(마 22 : 30),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형상의 처음 모형은 사람인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는8 오시안더의 추론을 허락한다면, 누구든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이 천사들에게도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7. 오시안더에 대한 요점 하나 하나에 대한 논박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아들의 성육신에 대한 확고 부동한 결정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오시안더의 걱정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담이 끝까지 순전한 상태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나 천사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걱정도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가 속죄주로서가 아니라 처음 사람으로서 태어 나시기로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특권적 지위에서 떨어졌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멸망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우연이 없었다면 태어 나시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그가 아담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죄를 제하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데(히 4 : 15), 오시안더는 무슨 까닭에 이 일이 무서워 떠는 것인가? 누가도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담의 후손이라고 인정한다(눅 3 : 38). 또 아담의 후손들을 그리스도가 멸망에서 구출하도록 그의 인간 상태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고전 15 : 47) 부르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다. 그리스도가 창조 이전에 오셨다면 그는 첫째 아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시안더는 분별없이 선언한다. 사람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형으로 삼아 인류가 창조된 것이라고.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담의 타락 사건을 자연을 회복할 필요성의 원인이된 이 타락 사건을 사람의 처음 창조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회복 사이에 둔다.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려고 나셨다는 결론이 된다. 그런데 오시안더는 서툴고 부적당한 추리로 아담이 그대로 근직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몸과 영혼에서 빛났을 것이라고. 이 형상의 광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만유의 머리시며 만유의 수위(首位)를 점유하신다는 것이 항상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시안더가 퍼뜨리는 무익한 궤변을 배제한다. 아담의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이 아들에게 육신을 입히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면, 천사들에게는 이 두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런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일에 오시안더는 경솔하게 달라붙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천사들에 대한 수위권이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그를 지도자로서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오시안더는 주장한다. 그러나 옳은 추리는 바울의 말에서 곧 나온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므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골 1 : 15). 이것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창조물 중의 하나로 계산되셔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었던 그 완전 상태의 세계는 그 이외에 다른 기원(起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되신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였다(골 1 : 18). 사도는 한 짧은 구절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⑴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가 천사들을 지배하시게 되었으며(골 1 : 16), ⑵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는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참조, 골 1 : 14).

오시안더의 다른 주장도 역시 그의 무지를 폭로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인간의 육신을 입으시지 않았더라도-천사들과 사람들을 모아 자기의 하늘 영광과 생명을 나누게 하며, 스스로 만물 위에 수위권을 행사하셨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성립하지 못하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오시안더를 항상 속이는-또는 그가 스스로 속는-그릇된 원칙이 있다. 곧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머리가 없었으리라는9 것이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지도를 즐겁게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무슨 까닭에 자기의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시지 못하겠는가! 또 자기의 영의 비밀한 힘으로 자기 몸같이 사람들에게도 생명과 양식을 주어, 드디어 그들을 하늘에 모으며, 천사들과 똑같은 생명을 즐기게 하실 수 없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논박한 이 너절한 생각들을 오시안더는 가장 확고한 말씀으로 여긴다! 자기의 사변에 도취되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리석게 찬양한다. 후에 그는 훨씬 확고한 증명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아담이 자기 처를 보았을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말을(창 2 : 23) 그는 "아담의 예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이것이 예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가 같은 말을 하나님에게 돌리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말씀에는 모두 어떤 예언이 포함되었다는 말인가! 율법의 교훈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한즉, 오시안더는 그 교훈들에서 예언들을 찾아 보라. 그뿐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인 의미에 자기를 국한하셨다면, 그것은 땅에 붙은 유치한 생각이었을 것이다(마 19 : 4-6).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문제는 교회와 자기와의 신비적 결합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성실뿐이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고 하며, 해소할 수 없는 이 결합을 아무도 이혼으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만일 오시안더가 이 단순한 뜻을 싫어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더 미묘하게 해석해서 제자들을 신비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그가 비난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바울은 오시안더의 망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의 살이라고 말하고(엡 5 : 30-31) 즉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엡 5 : 32). 아담이 이런 말을 한 뜻을 말하려 하지 않고, 결혼을 한 비유로 삼아,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가 되게 하는 그 거룩한 결합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말 자체에 나타나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고 하면서, 시정하는 의미에서 결혼의 원칙과 그리스도 대 교회의 영적 결합과를 구별한다. 이와 같이, 이 망령된 주장은 곧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너절한 생각들을 이 이상 더 상대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이 아주 간단한 논박으로 그 모든 것의 허무성이 폭로되겠기 때문이다. 다음의 엄숙한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양식을 넉넉히 주고도 남는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 : 4-5).

 

 

 

제 13 장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갖추었다

 

(고대 이단설에 관련해서 칼빈은 멘노 시몬스에게 대답함. 1-2)

 

1.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임에 대한 증명함

 

그리스도의 신성은 분명하고 확고한 증언에 의해서 다른 곳에서 증명했다.1 따라서 내 생각이 잘못이 아니라면, 여기서 다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보의 직책을 완수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의 인간성이 진실였다는 것을 옛날에 마니교도들과 마르키온파는 부정했다.2 마르키온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지 겉모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상했고, 마니교도는 그리스도는 천상적 육신을 받으셨다고 공상했다. 그러나 이 양자를 반박하는 강력한 성구가 많다. 왜냐하면 천상적인 후손이나 유령 같은 사람을 인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을 인해서 복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시다(창 12 : 3, 17 : 2, 7, 18 : 18, 22 : 18, 26 : 4). 또 영원한 보좌는 공중(空中)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과 그의 육신의 소생에게 약속되었다(시 45 : 6, 132 : 11). 따라서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1 : 1). 이것은 공중에서 창조되었으나 처녀의 태중에서 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울이 해석한 대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기" 때문이다(롬 1 : 3). 같은 사도가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롬 9 : 5). 그렇기 때문에 주 자신도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자주 자기를 인자(人子)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자기가 참으로 사람의 씨에서 난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시려는 뜻이다. 성령이 이 명백한 사실을 자주 선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쓰며 아주 부지런히 또 단순하게 표현하셨는데, 이 일을 감히 기만으로 더럽히는 파렴치한 자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더우기 증언을 더 많이 수집하려면 그것은 곧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 : 4)고 하는 바울의 발언이다. 그리스도가 굶주림과 목마름과 추위를 느끼며 그밖에 우리의 본성에 있는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셨다는 것은 수많은 증거가 있다. 이 많은 증언 중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진정한 신념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천사들에 관심이 없어서 그들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고(히 2 : 16),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이와 같이 "헐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시며"(히 2 : 14), 또, 우리는 그와 인연이 있는 덕택으로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신다(참조, 히 2 : 11). 또, "그는‥‥‥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였도다. 이는‥‥‥자비하고 충성된 중보가 되려 하심이라"(히 2 : 17 의역),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 : 15). 기타 무수한 구절들이있다. 우리가 조금 앞에서3 언급한 것도 이 점에 해당한다. 즉, 세상 죄는 우리의 육신을 입은 이가 대속해야 했다고, 바울이 분명히 단언한다(롬 8 : 3) 확실히 이런 근거에서, 아버지가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모두 우리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머리시며,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로 자란다(엡 4 : 16). 참으로,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기 위하여"(요 1 : 16)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그(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요 3 : 34)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우연한 선물에 의해서 그 본질이 더 풍부하게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모순된 이야기일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다른 곳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신가(요 17 : 19).

 

 

 

2.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함

 

반대자들은 자기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을 제시하지만, 그들은 그 구절들을 심히 곡해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입증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들은 너절한 궤변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빌 2 : 7-8) 바울이 다른 데서 하는 말을 근거로 삼아,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어떤 환상(幻像)을 입으셨다고 공상한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말하는 의도를 전혀 무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몸을 가지셨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기의 신성을 빛내셔도 당연했을 것이지만, 일개의 미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으로서 나타나셨다고 가르치려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받아 우리에게 복종을 권면하려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직접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자진해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으며, 이런 비천한 처지에 만족해서 자기의 신성이 육신의 휘장으로 가리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참조, 빌 2 : 5-7).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무엇이었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처신하셨는가를 가르친다. 문맥 전체를 보아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워 참으로 인간적인 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빌 2 : 8) 잠시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비치지 않고 사람의 형상만이 낮고 천한 처지로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벧전 3 : 1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성을 쓰고 연약하셨던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이 약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단언한다(고후 13 : 4). 그리스도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신 후에 새로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는 명백한 말씀이 있다. 그가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몸과 영혼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이 해당될 수 없다.

마니는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난 둘째 아담이며 하늘에 속한다"고 한 말을(고전 15 : 47-48)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의 몸은 공기(空气)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하늘에 속한 본질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으셔서 우리를 살리는 그 영적인 힘을 말한다. 그런데 이미 본 바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은 그 힘을 그리스도의 육신과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한 정통파 교리는 도리어 이 구절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만일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주장은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요,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시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바울의 강렬한 주장은(고전 15 : 12-20 요약) 무의미할 것이다. 고대의 마니교도들과 현대의 그 제자들이 어떤 궤변으로 (이 증명을) 회피하려고 노력 하더라도,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미한 말을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약속되셨다는 의미에서만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4 이것은 비열한 도피다. 히브리말로 참사람을 "인자"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국어의 이 용법을 보존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또 "아담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 없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시편 제8편의 말씀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顾)하시나이까"(시 8 : 4, 히 2 : 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는 죽을 운명의 부친에게서 직접 나신 것이 아니지만, 그의 근본은 아담에게서 유래했다. 그렇지 많다면 내가 이미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그 자녀들을 자기에게 모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히 2 : 14)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똑같은 본성을 나눈 동지와 동참자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도 한다(히 2 : 11상). 이 말씀에 곧 이어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므로(히 2 : 11하), 문맥으로 보아 그 뜻은 본성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했으니, 이렇게 존귀한 사람들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은총으로 낮고 부끄러운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고 한다(히 2 : 11하). 그뿐 아니라, 그렇다면 불경건한 자들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리라는 그들의 항의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헐육에서 나지 않고(참조, 요 1 : 13), 믿음을 통하여 영에서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육신만으로는 형제 관계가 유대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영예를 사도는 신자들에게 국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이 같은 원천에서 나지 못한다는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에,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사이에 끼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맏아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서투른 논쟁을 일으키려 한다. "형제 중의 맏아들"이 되시려면(롬 8 : 29) 그리스도는 맨 처음에 아담에게서 나셨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연령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예의 정도와 숭고한 권능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고(히 2 : 16)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하며, 그가 인류에게 은총을 베푸셨다는 의미로 이렇게 지껄이지만, 이것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려 주신 영예를 더욱 높이려고 우리와 천사를 비교하며, 우리를 천사들보나 더 귀히 여기셨다고 한다. 모세의 증언을-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는 증언을(창 3 : 15)-신중히 고려한다면, 이 논쟁은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이 발언은 그리스도뿐 아니라, 인류전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를 얻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말씀으로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이기리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서 나셨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여자가 절망에 압도되지 않도륵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과 참된 인간성. 3-4)

 

3.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혈통 : 불합리한 생각을 폭로함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와 다윗 몸의 소생이라고 하는 증언들을 우리의 논적들이 풍유라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사악한 짓이다. "씨"라는 말을 풍유로 쓴 것이었다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구속자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뿐이라고, 즉 그리스도뿐이라고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했을 때에(갈 3 : 16),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미리 약속되었다가 드디어 자기의 때가 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롬 1 : 3). 바울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전에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제 9장에서는 그를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확언한다(롬 9 : 5). 그런데, 만일 그가 참으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나신 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그 태중의 아이"라고(눅 1 : 42)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네 몸의 소생이 너의 보좌에 길이 있으리라"고 한 약속은(참조, 시 132 : 11 의역 ; 삼하 7 : 12 ; 행 2 : 30) 무슨 뜻인가?

그런데 그들은 마태가 기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 무용한 이론으로 궤변을 떨고 있다. 마태는 마리아의 조상들을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선조를 기록했다(마 1 : 16). 그러나 그는 당시에 잘 알려진 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즉 마리아가 요셉과 같은 가문에서 났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밝히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가는 이 점을 더욱 역설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은 전인류에 공통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의 선조인 아담에게서 나셨다고 한다(눅 3 : 38). 족보를 볼 때에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점에서만 다윗의 후손이심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새 마르키온파는 자기들의 오류를 감추기 위해서-즉 그리스도는 무에서 육체를 취하셨다는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서-여자에게는 "씨"가 없다고5 거만한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연의 원칙을 전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며, 그들이 제출하는 이유도 허무한 것이어서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철학과 의학에 속한 문제들을 논하지 않고, 그들이 성경에서 끌어 오는 항의만을 논박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론과 여호야다가 유다 족속에서 처를 취하였은즉(출 6 : 23 ; 대하 22 : 11), 만일 여자에게 생산하는 씨가 있다면 지파간의 차이에 혼란이 생겼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에 관해서 혈통을 따질 때에는 남자측의 혈통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이 남성의 우선적 지위는 여자의 씨가 생식 행동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해결책은 모든 족보에 적용된다. 성경에서 사람의 이름을 열거할 때에는 남자들의 이름만을 기록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우리는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여자는 "남자" 가운데 든다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다. 성은 항상 남자의 성을 따르기 때문에 여자는 남편의 아이를 낳는다고 말한다. 자녀의 귀천은 부친의 신분에 따라 정한다는 사실에서 남성의 우위(优位)가 인정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그와 반대로 "후손은 태(胎)를 따른다"고 법률가들은 말한다.6 이것을 보면 어머니의 씨에서 자식이 난다고 추론해야 될 것이다. 어머니를 "생산자"라고7 하는 것이 옛날부터 모든 민족에 공통한 말이다. 이것은 외숙과 질녀의 결혼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법과도 일치한다. 이런 법이 옳은 것은 근친(近亲) 결혼이 되겠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만 다르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남매가 결혼하는 것은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수동적인 힘을 돌린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도 여자에 대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도 여자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났다고 하기 때문이다(갈 4 : 4).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염치도 버리고 방자하게 묻는다. 그리스도는 처녀의 경도씨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냐고.8 나는 그가 어머니의 피와 결합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며, 그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에서 곧 추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하므로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라고.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났다고 할 때에(마 1 : 5) 유사한 생산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태는 여기서 처녀 마리아를 그리스도가 통과한 수로(水路)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놀라운 생산방법과 보통 방법을 구별한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며,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나며,요셉이 야곱에게서 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셨다고 한다. 마태가 하는 말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것을 증명할 생각으로, 마태는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 한 가지 일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마리아가 요셉의 친척(이고 따라서 다윗의 족속)9 이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인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4. 참된 인간이나 죄가 없으시고, 참된 인간인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를 누르려 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유치한 훼방이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후손이 된다면, 아담의 후손은 예외 없이 죄 아래 있다고 하는 일반 원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글에 있는 비교는 이 곤란을 곧 제거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그와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쳤느니라"고한다(롬 5 : 12,18, 15 의역). 이와 일치하는 다른 비교도 있다. "첫째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땅에 속한 자연인(人)이요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났으니 천상적이라"(고전 15 : 47 의역).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고, 같은 뜻을 가르친다(롬 8 : 3,4). 이와 같이 사도는 그리스도와 보통 인간을 훌륭히 구별하고,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지만 허물과 부패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치하게 지껄인다.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고 성령의 비밀한 역사로 마리아의 씨에서 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불결하지 않고 남자의 씨만 불결한 것이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나셨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되어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에 있었던 생산과 같은 순결하고 오염이 없는 생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든지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촉구할 때에는 그의 참인간성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순결하시다고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도(19절) 신성에 대해서 하는 말씀일 수 없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전염이 없었다고 하지만, 아담의 씨에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식 그 자체는 불결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고, 아담의 타락에서 생긴 우발(偶发)적인 성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완전성을 회복할 사명을 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부패를 면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불합리하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지적하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는 지상적인 신체라는 좁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철면피다! 무한한 본질을 가진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인격이 되셨더라도, 우리는 그가 그 속에 갇혀 계셨다고는 공상하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일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지만, 하늘을 떠나시지 않고서 자의(自意)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시에, 맨 처음부터 하신 것과 똑같이, 끊임없이 우주에 편만하셨다는 것이다.

 

 

 

제 14 장

 

중보자의 두 본질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적 본질과 신적 본질에 대한 설명. 1-3)

 

1. 이중성과 통일성

 

다른한편으로는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 : 14)는 발언을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말씀이 육신과 혼합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말씀이 그 거처할 성전으로서 처녀의 태중을 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기는 본질의 혼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위격( Person)의 통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결합․통일되어 두 본성은 각각 그 특이성에 손상을 받지 않은 대로 결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이루었다고1 우리는 주장한다.

만약 위대한 이 신비와 유사한 것을 인간사에서 찾을 수 있다면, 가장 적절한 것은 두 가지 본질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 본질들은 각각의 특이성을 유지하지 못할이만큼 다른 본질과 섞인 것이 아니다. 영혼은 신체가 아니며, 신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은 영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신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당되지 않으며, 또 신체에 대해서 하는 말이 영혼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 또 사람 전체에 대해서 하는 말을 각각 영혼이나 신체에 대해서 한다면 반드시 부적당하게 된다. 끝으로, 마음의2 특색을 신체에, 또 신체의 특색을 영혼에 옮기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들로 된 것은 한 사람이요 여러 사람이 아니다. 이런 표현들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된 한 인격 (person)이 있으며, 이 인격의 기반으로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질이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3 것을 의미한다. 성경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에는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만 말해야 할 일을, 또 어떤 때에는 그의 신성에만 속하는 일을, 또 어떤 때에는 두 가지에 속하고 어느 한 쪽에만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돌린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 두 가지의 통일을 열심히 주장해서 드디어 양성을 서로 교환하는 때도 있다. 이런 표현법을 고대 저술가들은 "속성(属性)의 상통(相通)"이라고4 불렀다.

 

 

 

2. 신성과 인성과의 상호 관계

 

이 여러 가지 사실들은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많은 어귀에 의해서 사람의 조작이 아닌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설득력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 8 : 58)고 하신 말씀은 그의 인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 구절을 곡해하는 사람들의 비꼬인 논법을 나는 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계획에서와 경건자들의 마음속에서 구속자로서 이미 예지되었으므로, 영원 전에 계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5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가 나타나신 때와 자기의 영원한 존재를 분명히 구별하시며, 자기의 권위는 아브라함의 권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고 명백히 높이시므로, 여기서는 자기의 신성에 고유한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선언한다(골 1 : 15, 17). 또 주께서는 창세 전에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가졌다고 하시며(요 17 : 5),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신다고 하신다(요 5 : 17). 이런 속성들은 인간에게 전혀 이질적(异质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종"이라고 하며(사 42 : 1, 기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며(눅 2 : 52),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요 8 : 50), "최후의 날을 모르며"(막 13 : 32 ; 마 24 : 36),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요 14 : 10), "그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며"(요 6 : 38),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졌다고 한다(눅 24 : 39). 이 모든 말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신 한, 어떤 것이든 자랄 수 없으며,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 하신다. 아무 일도 그에게서 숨길 수 없다. 그는 자기의 뜻으로 결정하신 대로 모든 일을 하시며, 사람이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런 속성들을 자기의 인성에만 돌리지 않고, 중보자로서의 위격과 조화되는 것으로 인정하며 자기의 속성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고유성 또는 특성의 상통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으며"(행 20 : 28),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고전 2 : 8) 말한 것과 같다. 요한도 같은 뜻으로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졌다"고 한다(요일 1 : 1). 물론 하나님은 피가 없으며, 고난 받지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그가 인간성으로서 하신 일을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유가 없지 않지만, 적합한 일은 아니다. 비슷한 예를 들면,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가르친다(요일 3 : 16). 따라서 여기서도 인성에 속한 성질을 신성과 나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아직 지상에 계시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요 3 : 13) 말씀하셨을 때에, 물론 육신을 쓰고 계신 사람이었으므로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사람이었으므로, 신인 양성의 통일을 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에 주신 것이다.

 

 

 

3. 중보자의 위격의 통일성

 

그러나 두 본성을 동시에 포함한 구절들이 요한복음에 많고, 그런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참본질을 가장 분명히 나타낸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신성이나 인성만을 말하지 않고 양성을 일시에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며(요 1 : 29), 원하는 사람을 살리며, 의와 성결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임명되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게 되셨다(요 5 : 21-23). 마침내 그를 "세상의 빛"이요(요 9 : 5, 8 : 12), "선한 목자"요, "유일한 문"이며(요 10 : 11,9), "참포도나무"라고 한다(요 15 : 1).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특권들을 받고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이 특권들을 가지고 계셨지만, 같은 모양이나 방법이 아니었으며, 또 인간에 불과한 인간에게는 이 특권들이 부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심판이 있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는(고전 15 : 24 의역) 바울의 말도 이와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 : 7) 존엄성의 광채를 제쳐놓고 낮은 육신 밑에 숨어 계셨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순종하셨다(참조, 빌 2 : 8). 이 순종 생활을 마치신 후에 "드디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으며"(히 2 : 9) 최고의 주권자로 높아져서 그의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되었다(빌 2 : 10).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영광과 이름과 면류관,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바쳐,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앞에 계시게"(고전 15 : 28)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권능과 주권을 주신 것은 그의 손을 거쳐 아버지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참조, 막 16 : 19 ; 롬 8 : 34).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직접 뵙고 즐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옛날 교부들이 중보의 위격을 무시하며, 요한복음에 있는 가르침의 거의 대부분에 대해서 그 참뜻을 모호하게 만들며, 여러 가지 올무에 스스로 걸려든 그 오류를 용서할 수 없다.6 그러면 올바른 해석의 열쇠는, 중보의 직책에 해당하는 일들은 신성이나 인성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7 그러므로 세계의 심판주로 임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지배하실 것이며, 연약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우리를 아버지와 결합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 영광에 참가하여 하나님을 그 계신 그대로 뵙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는 중보의 직책을 다하셨으므로 아버지의 대사됨을 그만 두시고 천지창조 이전에 누리시던 그 영광으로 만족하실 것이다. 그리고 ""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 있는 지위를 표시할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의 위격에만 속한다. 바울의 발언은 이와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 6). 즉, 우리가 그의 신직 존엄성을 대면하여 보게 될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주로서의 권능을 그에게 맡기겼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주권을 아버지에게 돌려서, 그의 존엄성을 감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한층 빛나게 하실 것이다. 또 그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이 지금은 아직 휘장에 가리워 있지만, 그 때에는 스스로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와 세르베투스의 오류들에 대한 비난. 4-8)

 

4. 두 본질은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이 견해를 지혜롭게 적용한다면, 아주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나 완전히 무식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런 종류의 표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에 꼭 적합하지 않은 말이라고 해서 놀랄이만큼 고통을 당한다. 이것은 이 표현들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중보자로저의 그의 직분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착한 해설자가 이 위대한 신비들을 그에 합당한 경건한 태도로 검토할 때에는, 이 여러 가지 발언들이 분명히 또 아름답게 서로 일치한다.8 그렇지만 저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뒤섞어 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속성들을 붙잡고 그의 신성을 제거하며, 반대로 신성의 속성을 붙잡고 인성을 제거한다.9 또 양성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해서 어느 한 쪽에만 적용되지 않는 속성들을 붙잡고 두 본성을 모두 제거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아니며, 또 사람이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며, 또 동시에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시므로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도 아니라고 쟁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두 성품이 통일되었으나 혼합되지 않은 것이므로, 인성 때문이 아니라 인성에 의해서까지도 우리의 주시며 하나님의 참아들이시다.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배척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별하지 않고 분리시키고자 해서 이중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성경은 분명한 목소리로 이 생각에 반대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처녀에게서 나신 이에게 적용하며(눅 1 : 32), 그 처녀 동정녀를 "우리 주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눅 1 : 43). 우리는 유티케스의 미친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격의 통일성을 증명할 생각으로 어느 한 본성을 파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증언을 많이 인용했고 그밖에도 증언이 많으므로, 가장 투쟁적인 사람이라도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조금 뒤에10 나는 그들의 공상을 더 효과적으로 분쇄할 증언들을 첨가하겠기에 지금은 한 구절만 인용하면 충분할 것이다. 즉, 만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 몸과 다른 신성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르시지 않았을 것이다(요 2 : 19). 따라서 에베소 회의가 네스토리우스를 비난한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후에 콘스탄티노플과 칼케돈 회의에서 유니케스를 비난한 것도 정당하다.11 그리스도의 두 성품을 혼합하는 것이나 분리하는 것은 모두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현대에도 그들에게 못지 않게 흉악한 괴물 미가엘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본질과 영과 육과 그리고 세 가지 창조되지 않은 원소로 혼성(混成)된 허구(虚構)라고 주장했다.12 우선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의 태중에서 났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 그의 궤변은 다음과 같는 방향을 취한다. 즉 두 본성의 구별을 없애 버리고서는 그리스도는 약간의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의 혼합체이지, 하나님이며 또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논리 전체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림자 같은 형상들만이 있었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았다. 그리고 아들이 되는 영예를 받도록 예정되었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했을 때에 처음으로 그 그림자 같은 형상들의 진상 또는 효력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정녀에게서 난 중보자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며 또 그 이름을 가지는 존엄성을 받으시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거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내린 정의는 확고 부동하다. 즉, 모든 시대 이전에13 아버지에게서 난 말씀이 인성을 취하여 위격(hypostasis)의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은 "위격의 통일"을 정의해서 두 본성이 한 위격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네스토리우스의 망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 안에 거하였으며, 동시에 인간이 아니었다고 공상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말씀은 육신을 입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고 말하는 우리에 대해서, 세르베투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둘로 만든다고 비난한다.14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할 뿐이다. 그가 사람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이셨다면, 인간이 되셨다고 해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지만, 영원한 생산에 의해서 항상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계셨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도 불합리한 주장이 아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이 점을 암시한다.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 : 35). 마치 율법아래에서 희미했던 "아들"이라는 이름이 앞으로 도처에서 분명히 알려지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도 같은 생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자유로 또 자신있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다(롬 8 : 14-15 ; 갈 4 : 6). 옛날 족장들도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이 권리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에 나타나신 후에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알려졌다. 따라서 바울은 이 특권을 그리스도의 나라에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확고 부동하게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와 관계없이 천사들이나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신 일이 없으며, 특히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값없이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시는 것이라고.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부자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세르베투스가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여기서는 속죄를 짐승의 피로 표시하던 것과 같은 상징이 문제가 아니다. 양자로 정하시는 일이 저 머리를 토대로 삼지 않았다면, 그들은 실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체들에게 공통된 것을 머리에 주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 나는 한 걸음 더 나가겠다. 성경에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데(시 82 : 6), 그들의 높은 위엄은 장차 올 구속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지위상 그들 위에 계셔야 했다. 나는 이 발언을 간단히 반복해서 인류에게도 적용하겠다. 창조 당시에 천사들과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공통된 아버지가 되시도록 지어졌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항상 머리가 되시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 만물의 으뜸이 된다고(참조, 골 1 : 15이하) 한 바울의 발언이 옳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결론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6.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들되심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부터 시작했다면, 그는 인성에 관해서도 아들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 및 그와 같이 미친 사람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육신을 떠나서는 이 이름을 받을 수 없었겠기 때문이라고 한다.15 그러면 그리스도는 두 본성에 의해서 또 두 본성에 관해서 아들이신지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들은 이렇게 지껄이지만 바울은 아주 다르게 가르친다. 인간의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를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일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양자가 되어, 또 은총에 의해서만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고 진정한 본질상의 아들, 따라서 유일한 아들이시며 이 표식에 의해서 다른 모든 아들들과 구별되신다.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영예를 주시지만, "진정한 독생자"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로서 받은 것을 그는 본성으로서 가지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많은 형제 중에서 "독자"가 되시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영예를 중보자의 위격 전체에 확대한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동정녀에게서 나시며 또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 제물로 아버지에게 바치신 분, 참으로 또 바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 그의 신성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그의 아들에 관하여‥‥‥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 : 1-4). 무슨 이유로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을 따로 하는가? 이것은 그의 육신 이외의 무었에 좌우된 일임을 알리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뜻으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고후 13 : 4). 이와 같이 그는 두 본성을 구별한다. 그가 어머니에게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받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애게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받았다는 것을 그들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인성이 아닌 것, 인성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 가지로, 즉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아들로 부르고 있다. 그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히브리어로는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인만큼 이 이름에 대해서 그들은 싸움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를 "인자"라고 부르는 사실을 그의 인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한 것과 똑같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내가 언급한 구절 즉,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라고 한 구절에서 (롬 1 : 3-4) ,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며 저는‥‥‥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롬 9 : 5)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을 말한다. 이 두 발언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는데, 우리의 논적들은 무슨 권리가 있어서 육신으로 인자이신 분이 그의 신성에 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가?

 

 

 

7. 세르베투스의 빈약한 반증

 

그들은 자기의 오류를 변호하기 위해서 소란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시지 않았다고 하며(롬 8 : 32), 천사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자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눅 1 : 32).16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논리가 얼마나 타당한가를 우리와 함께 잠깐 검토한다면, 이런 무익한 항의를 자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잉태된 이를 "아들"이라고 부르니, 그는 잉태된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는 이 결론이 옳다면, 요한이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며 저희가 손으로 만졌다고 하므로(요일 1 : 1),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에 말씀이기 시작하셨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예언서에 있는 것도 요한의 발언과 같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을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이니라"(미 5 : 2와 마 2 : 6의 융합) 만일 그들이 이런 식으로 주장할 결심이라면, 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는가? 나는 이미 증언했다. 우리는 이중의 그리스도를 공상한 네스토리우스에 찬성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우리와 형제이신 인연으로 우리를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우리에게서 육신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그 육신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시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현명하게 경고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놀랍고 특이한 은총의 빛나는 거울이시며,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영예를 얻으셨다고.17 그러므로 그는 육신에서, 태중에서부터도, 이와 같이 훌륭히 탁월성으로 장식된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통일된 인격에 어떤 혼합이 있어서 그의 신성에 속한 것을 제거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 한 위격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되지 않다. 마치 그를 여러 가지 점에서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혹은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 것과 같다.18

세르베투스의 다른 비방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는 상징적 의미 이외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그 때에는 다소 희미했지만,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 낳으신 말씀이시었다는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이시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다. 또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었다는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이 이름은 그가 자취하신 중보자의 위격에 속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다. 또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엡 3 : 15) 분과 아들 사이에 이미 그 때에 상호 관계가 있던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 증거를 근거로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이름이 교회내에서 유명하게 되기 전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고. 그러나 가령 솔로몬이 하나님의 무한한 숭고성에 대해서 하는 발언 하나를 가지고 그들은 논란할 수 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하면서(잠 30 : 4) 솔로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증언이 쟁론가들에게 충분한 무게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따라서 나는 이 증언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점을 제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악한 훼방꾼임을 보여 준다는 것은 밝혀 둔다. 이 밖에 고대 저술가들도 이구 동성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증언했으므로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우리에게 반대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철면피는 가증하고 가소롭다. 이 두 저술가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눈으로 볼 수 없었으나 후에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19

 

 

 

8. 세르베투스의 교리에 대한 납득이 가는 계시와 반증

 

세르베투스가 한 말에는 무서운 조짐이 많으며, 거기 찬성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추궁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의 태중에 잉태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옛날 마니교도들도 다음과 같은 공상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성경에 있으니(창 2 : 7)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영혼을 옮겨 받는다고20 한다. 그들은 "아들"이라는 이름을 완강히 고집해서 본성들의 차이를 남겨 두지 않으며, 사람인 그리스도는 그 인간성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혼란한 말을 지껄인다. 그래서 솔로몬이 말하는(집회서 24 : 9. 참조, 잠 8 : 22이하) 지혜의 영원한 출산이 말살되며, 중보자에게 있는 신성이 무시되며, 또는 단순한 가현(仮现)이 진정한 사람을 대신한다.

세르베투스는 더욱 졸렬한 기만적 언어로 자신과 타인을 현혹했다. 그의 말들을 논박한다면, 경건한 독자들이 그의 전례에서 경고를 받아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게 되겠고, 그만큼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단행본에서 반박했으므로,2l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문제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세르베투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은 처음부터 한 관념이었고, 그 때에도 하나님의 본질직 형상인 사람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외면적으로 찬란한 말씀 이외의 하나님의 말씀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아들을 낳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어서 창조 자체에까지 행동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성령과 말씀을 혼동하여,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과 성령을 육신과 영혼 속에 분배하셨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세르베투스의 생각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출산(出产)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그 때에 한 그림자 같은 아들로 보이던 이가 드디어 말씀에 의해서 출산되었다고. 이와 같이 그는 말씀에 씨로서의 기능을 배정한다. 이런 생각이라면 개와 돼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처음 씨에서 창조되었으므로 똑같이 하나니의 아들들이라는 결론이 생길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를 창조되지 않은 세 원소의 혼합체라고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산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났다고 상상하지만, 돌(石)들에도 그 정도에 따라 똑같은 본질적 신성(神性)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을 빼앗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육신은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로22 되었고, 육이 하나님으로 변함으로써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와서 신성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말씀의 영원한 위격을 말살해 버리며, 우리의 구속자로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참으로, 그가 여러 번 반복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곧 아들은 예지와 예정에 의해서 하나님에게서 났지만, 종국적으로는 물질을 재료로 삼아 사람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물질은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세 가지 요소에서 빛났고 후에 세계의 처음 빛과(창 1 : 3) 구름과 불기둥에서(출 13 : 21) 나타난 요소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르베투스가 간혹 부끄러운 아기 모순에 빠지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너무도 지루할 것이다. 정신이 건전한 독자들은 이 요약을 읽고 이 더러운 개의 간교한 도피적 언사가 구원의 희망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육신이 신성 자체라면 그것은 신성의 성전이 아니겠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나서 육신으로는 참사람이었던 분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있다. 세르베투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말을(요 1 : 14) 자기 입장의 기초로 삼지만,23 이것은 사악한 짓이다. 이 말은 네스토리우스의 오류에 대항하는 동시에, 유티케스의 불경건한 조작도 지지하지 않는다. 요한의 유일한 목적은 두 본성이 통일된 위격을 이루었음을 선언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 15 장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직을 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의 3중의 구원 활동 : 첫째, 예언적 사명. 1-2)

 

1. 이 교리를 이해할 필요성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에 대한 성구들

 

어거스틴의 바른 논술과 같이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지만, 신자들과 공통된 근거가이 없고, 이것은 교회에만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심사 숙고할 때에, 우리는 이단자들에서 그리스도의 이름만 찾아볼 뿐이고, 그가 실제는 그들 사이에 계시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1 그래서 현재 "하나님의 아들, 세계의 구속자"라는 말을 교황주의자들이 드높이 외치지만, 그들은 이름만 허망한 구실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의 권능과 존엄성을 빼앗으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 : 19).

그러므로 믿음이 구원의 확고한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며, 따라서 그 안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해야 할 원칙이 있다. 즉,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임명하신 직책에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2 그러나 이 이름들을 알더라도 그 목적과 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아는 것이 무가치할 것이다. 교황파주의자들도3 이 이름들을 쓰지만, 이 칭호들이 각각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흥미도 없고 효과도 없이 사용한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연달아 보내시며, 구원을 위해서 충분하고 유용한 교리도 알려 주셨지만, 경건자들의 마음에는 항상 메시야가 와야만 이해의 완전한 광명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가득했었다. 진정한 종교를 깨달은 일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이 기대가 침투했었다는 것은 "메시야가‥‥‥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한 여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요 4 : 25). 또 이것은 유대인들의 경솔한 억측이 아니라, 분명한 계시에서 배운 믿음이었다. 이사야의 말은 특히 유명하다.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 : 4). 다른 곳에서 이사야는 그를 "지혜가 위대한 사자(使者) 또는 해석자"라고 불렀다(사 9 : 6, 28 : 29 ; 렘 32 : 19의 융합).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복음의 교훈의 완전함을 찬양해서 우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히 1 : 1), 다음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첨부하는 것이다(히 1 : 2). 그러나 예언자들의 공통된 임무는 교회가 기대를 잊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중보가 오실 때까지 그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 민족의 이산(離散) 기간에 신자들은 저 정상적인 혜택을 빼앗겼다고 탄식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시 74 : 9).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림이 멀지 않게 되었을 때에 "이상(异象)과 예언자가6 응할" 기한을 다니엘에게 지정하셨다(단 9 : 24). 그 뜻은 거기서 언급하는 예언이 권위 있게 확립될 뿐 아니라, 모든 계시의 최고의 완성이 가까웠으므로, 얼마 동안 예언자가 없더라도 신자들이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2. 우리에게 대한 그 예언자적 사명의 의미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이 세 가지 직책에7 관계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과 왕뿐 아니라, 예언자도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시야"라는 존칭은 약속된 중보자에게도 주셨다. 다른 데서 밝힌 바와 같이,8 그리스도는 특히 그의 왕권에 관해서 또 그 왕권 때문에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예언자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언자에 관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될 자에게 자유를‥‥‥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날을 전파하여"(사 61 : 1-2. 참조, 눅 4 : 18).

그가 성령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아버지의 은총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방법으로 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직분을 가진 다른 교사들과 그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가르치는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받으셔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이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가져다가 복음에 끼워 놓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린다. 하늘에서 우뢰같이 들려 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은(마 17 : 5. 참조, 마 3 : 17) 모든 다른 사람들을 초월한 각별한 특권으로 그를 높이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 기름부음이 머리로부터 지체들에 확산되어, "너희 아들들이 예언하며 너희 딸들이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는(욜 2 : 28 의역) 요엘의 예언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로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며(고전 1 : 30), 다른 곳에서 "그의 안에 지식과 총명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말할 때에(골 2 : 3 의역), 그는 조금 다른 뜻을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 이외에는 알 가치가 있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믿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늘 은혜의 무한한 전체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내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귀한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한다(고전 2 : 2 의역). 복음의 단순성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의 태도는 참으로 옳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위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완전한 지혜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왕으로서의 사명-그 영적 성격. 3-5)

 

3.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이제부터 왕권을 논하겠다. 이 문제를 말할 때에 먼저 그것은 본질상 영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할 것이다.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이 추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원성은 다니엘서에서 천사가 그리스도의 위격에 돌리며(단 2 : 44),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백성의 구원에 올바르게 적용한다(눅 1 : 33). 그러나 이 영원성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개인 교인에 관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말씀은 첫째 종류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시 89 : 35-37).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자기의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시겠다고 여기서 확실히 약속하신다. 이 예언의 진정한 성취는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죽은 직후에 나라의 대부분에 대한 권위가 붕괴되고, 한 사사로운 개인에게로 넘어가서, 다윗 가문에 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왕상 12장).9 그 후에 권위는 더욱더 쇠퇴하여 드디어 슬프고 부끄러운 멸망이 되었다(왕하 24장).

이사야가 "그의 세대중에 누가 말하였으리오"라고 외치는 것도(사 53 : 8) 같은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서 자기의 지체들과 결합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보호하에서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10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로 끊임업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수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안전하다. 다윗은 원수들이 대담하게 하나님과 그 기름부으신 자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하는 것을 웃으면서, "군왕들과 백성이 헛되이 분노하도다‥‥‥하늘에 계신 자가 강하여 그들의 공격을 넉넉히 분쇄하리라"고 한다(시 2 : 2, 4). 이와 같이, 그는 교회가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신자들에게 다짐하며, 교회가 압박을 받을 때마다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다른 데서 다윗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한다(시 110 : 1). 아무리 많은 강적들이 교회를 전복할 음모를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영원한 왕으로 임명하신 그 확고 부동한 결정을 전복시킬 힘은 그들에게 없다고, 다윗은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도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적인 멋은 모두 이 세상과 시간에 속했으며 참으로 순식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들어올리기 위해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언명하신다(요 18 : 36).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각 사람은 이 말에서 용기를 걷어 더 좋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오는 시대에 이 은총이 완전히 결실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적인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그 힘과 효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평생 십자가를 지고 투쟁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어렵고 가련하다는11 사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된다. 만일 이 지상 생활의 저 편에서 하늘 임금의 통치의 혜택을 즐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그 통치하에 지금 소집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결하는 풍부한 오락-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의 생활에 있다. 이 세상에서 한 국민이 번영하며 평안하려면, 한 쪽으로는 모든 재물이 풍부하며 국내가 평온해야 하며, 또 한 쪽으로는 외적에 대한 방위 태세가 강해야 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게 풍부히 주시며, 영적 원수들의 모든 공격 앞에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로 백성의 방위력을 강화하신다. 이것을 보면, 그는 내외 양면으로 통치하실 때에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유익한 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없는 것이며, 이 처음 받는 결실에 의해서 우리는 완전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령의 힘을 믿고, 악마와 세상과 각종 장애물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항상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파에 대답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므로 볼 수 있게 임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눅 17 : 20,21).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왕이라고 공언하시고, 자기 아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농담 삼아 그의 표적을 보자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각각 자기의 양심을 들여다 보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롬 14 : 17).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땅에 붙은 일에 마음이 너무 쏠린 사람들이 미련한 영화를 꿈꾸지 못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간단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가르친다. 그 나라는 지상적이거나 육적인 것이어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 영생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과 기한(饥寒)과 멸시와 비난과 그 밖의 괴로움이 있는 이 세상을 참고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일로 만족하자-즉, 우리 임금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하게 버려 두시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며, 드디어 우리는 싸움을 끝내고 부르심을 받아 개선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는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모두 우리와 나누시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지금 그는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하시며 자기의 웅대한 미(美)로 장식하시며 자기의 부요하심으로 풍부하게 만드신다.12 그러면 이런 혜택들은 우리가 자랑할 가장 풍부한 이유가 되며, 악마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싸울 확신을 준다. 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세상의 모든 비난을 용감하게 초월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낌없이 풍부한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영적인 본질 : 그리스도와 성부의 주권

 

그러므로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쓰는 것은 기름이나 향기로운 연고가 아니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셨기" 때문이다(사 11 : 2). 이것이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다"고 시편이 선언하는 그 "즐거움의 기름"이다(시 45 : 7). 왕이 이와 같이 출중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굶주릴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3 그가 풍부하게 되신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풍성한 것을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하며(요 3 : 34), 이는 우리가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하려든 것이라고 한다(요 1 : 16). 이 원천에서 바울이 말하는 풍성한 은혜가 흘러나온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 : 7). 이 발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령에 있고 지상적인 쾌락이나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한 말을 충분히 확인한다. 따라서 그 나라에 참가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

이 거룩한 기름부음의 상징이 그리스도의 세례 때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즉,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그의 위에 와서 머물렀다 (요 1 : 32 ; 눅 3 : 22). 성령과 그 은사를 "기름부음"이라고 부르는 것은(요일 2 : 20, 27) 새로운 일이 아니며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방법은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늘 생명에 관해서는, 성령이 주입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그 생명력이 한 방울도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거처로 택하시고, 우리에게 심히 필요한 하늘 보화가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다. 신자들은 왕의 힘을 받아 불굴의 자세를 견지하며, 왕의 영적 보화가 그들에게 풍부하다. 따라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그 후에‥‥‥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고 한 바울의 발언은(고전 15 : 24) 우리가 말한14 이 영원성을 손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들 자신도‥‥‥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5 : 28). 저 완전한 영광 안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현재와 같지 않으리라고 바울은 말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아들의 손을 거쳐 우리를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지탱하시며 보호하시며 도우신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헤매는 그 짧은 기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 서 계시며, 우리를 점진적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굳게 결합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를 아버지의 대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며, 이 대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가진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이를테면 간접적으로 통치하며 보호하기로 정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설명한다(엡 1 : 20-23). 그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 9-11). 이런 말로 바울은 또 그리스도의 나라와 현재 질서를 칭찬하며,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연약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때에는 교회를 수호하는 그리스도의 임무가 완수될 것이므로, 하나님 이 친히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시리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같은 이유로 성경은 보통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주권을 행사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 위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 많으나(참조, 고전 8 : 5),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8 : 6). 이런 근거에서 이 분은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자기는 교회의 왕과 입법자라고(사 33 : 22) 선언하신 이와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다. 자기가 가진 모든 권능을 "아버지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아들이 시종 여일하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배하신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는 무슨 까닭에 중보의 위격을 취하셨는가? 그가 아버지의 품과 무한한 영광을 두고 내려오신 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종할 결심을 더욱 굳게 가지며, 하나님의 뜻에 모든 열성을 다하여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또 공손히 복종하는 경건자들을 위하여 왕과 목자의 임무를 겸행하신다. 그러나 그는 저희 모든 자들을 질그릇 같이 부술 철장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을 우리는 듣는다(시 2 : 9). 또 "그는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는 말씀도 듣는다(시 110 : 6). 우리는 현대에서 이런 일의 예를 몇 개 보지만, 완전한 증명은 최후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 심판은 또 그리스도의 통치의 최후 조치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 제사장직으로서의 사명 : 화해와 중보 6)

 

6.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그 목적과 효험을 간단히 말하겠다. 그는 순결하고 흠없으신 중보자로서 자기의 성결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키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가 우리를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또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우리에 대하여 노하신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주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속죄가 그 사이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이 직책을 다하려고 그리스도가 제물을 가지고 나오셔야 했다. 율법하에서 제사장이 피를 들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히 9 : 7) 이것은 제사장이 신자들의 대언자로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죄를 대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게 하려는 뜻이었다(레 16 : 2-3). 사도는 히브리서 7장부터 거의 10장 끝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길게 논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과를 말소하시고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으므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고 한다(히 9 : 22). 하나님께서는 "변치 아니하실" 엄숙한 행세로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하여,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다(시 110 : 4. 참조, 히 5 : 6, 7 : 15).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 말씀으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점으로 아시는 것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불결한 범과와 죄 때문에 길이 막혔던 그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효험과 혜택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영원한 중재자시며, 그의 호소에 의해서 우리는 호의를 얻는다. 기도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경건자들의 양심의 평화도 여기서 생긴다. 그들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안심하고 의지하며, 중보자를 통해서 성별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율법하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있어서 한 분이 제사장과 제물을 겸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기에 합당한 것이 달리 없으며, 독생자를 하나님에게 드릴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행동하시는 것은 영원한 화해 원칙에 의해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며 친절하게 되시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위대한 직책에서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시려는 뜻이다(계 1 : 6). 우리 자신은 오염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사장이므로,15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에게 바치며, 자유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하며 향기롭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하신 뜻은 이것이다(요 17 : 19), 우리는 원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우리를 아버지 앞에 성별하셨으므로, 오직 그의 성결이 몸에 가득히 배어 순결하고 정결한 자로서 심지어 거룩한 자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하듯이, 성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때문이다(단 9 : 24). 우리는 이 기름부음과 그 당시에 사용된 그림자 같은 기름 부음과의 대조에 주의해야 한다. 마치 천사가 "그림자를 흩어버리면 참제사장직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히 그를 새로이 제물로 바치노라고 한 자들의 조작은 더욱 가증하다. 교황파는 매일 이 짓을 시도하며,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노라고 생각한다.

 

 

 

제 16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으며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우리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 1-4)

 

1. 구속자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한 말은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원래 정죄를 받아 죽고 멸망한 우리는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는(행 4 : 12) 베드로의 유명한 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다. "예수"라는 이름을 그가 받게 된 것은 이유 없이, 또는 우연히, 또는 인간의 결정으로 된 일이 아니라, 최고의 명령을1 전달한 천사가 하늘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눅 1 : 28-33). 그 이유로서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다고 첨부하였다(마 1 : 21. 참조, 눅 1 : 31).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2 언급한 점을 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구주가 되시도록 속죄주의 직책이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그가 구원의 종점까지 줄곧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속은 불완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견고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에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일체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버나드의 경고는 기억해 둘 만하다. "예수의 이름은 광명일 뿐 아니라 양식이다. 그것은 또 기름이다. 이 기름이 없으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마른다. 그것은 소금이다. 이 소금으로 맛을 내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이는 음식은 온통 맛이 없다. 끝으로,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는 향기가 없다."3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이것은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확신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충분하고 확고한 토대를 얻으며,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지 이탈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자기 속에 내려가서4 자기의 진상을 성실하게 생각한다면, 반드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적의를 느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노염을 푸는 방법과 수단을 애써 찾아야 하며, 여기는 충분한 배상이 요구된다. 죄인이 죄책에서 사면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항상 그들 위에 머무를 것이니, 필요한 것은 평범한 보증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므로 자기의 법을 어기는 자를 벌 없이 버려 두시지 않고, 처벌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진노를 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잠깐 생각할 일이 있다. 즉, 우리를 앞질러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목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는 것은 어떻게 합당한 일이었는가? 만일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우리를 이미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특별한 보증을 주실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일종의 모순이 생기므로, 나는 이 문제를을 처리하겠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통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 : 10). 그의 희생으로 그들의 불의가 속량되기 전에는 그들은 저주 아래 있었다(갈 3 : 10,13).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화해되기 전에는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골 1 : 21,22) 이런 발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얼마나 가련한 파멸 상태에 있는가를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덮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우리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해방의 혜택을 경시했을 것이다.

예컨대, 누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대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대를 미워하셔서 그대가 당연히 받을 일을 하셨다면, 즉 그대를 버리셨다면, 무서운 파멸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꺼이 또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그대를 은총 가운데 두시고 그대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험에서 그대를 구출하신 것이다"라고. 이렇게 들은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비의 덕택을 얼마만큼은 느끼며 체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즉, 그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진노를 받을 자,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면치 못할 자, 구원을 얻을 희망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길이 전혀 가망이 없는 자, 사탄의 종, 죄의 멍에를 멘 포로, 결국 무서운 멸망을 당할 운명이며 이미 멸망 중에 있는 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자. 또 이 때에 그리스도가 그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모든 죄인에게 내리려는 그 벌을 자기가 대신 맡아 받으셨으며,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로 만든 죄악들을 자기의 피로 깨끗이 씻으셨으며, 이 속죄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올바른 배상과 희생을 드리셨으며,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으며, 이 터전 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성립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하나님의 인애가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에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재난에서 구출되었는가를 역력히 그려 보이는 이 모든 일에서 더욱더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인가?5

요컨대, 우리 마음은 우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놀라며 압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도 생명을 붙잡는 열성이 부족하거나, 생명을 받아도 올바로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이를테면 우리의 원수이며, 그의 손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3.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화해보다 앞선다.

 

이 발언은 연약한 우리의 이해력을 고려한 것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최고의 공의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보이는 불의를 결코사랑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거기 따르는 악한 생활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 있는 자며, 나면서부터 지옥의6 저주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것을 잃지 않으시길 원하시므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우리는 비록 자신의 허물 때문에 큰 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피조물이다. 비록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지만, 그는 우리를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값없이 주시는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여 은총을 베풀려 하신다. 의와 불의는 화합할 수 없으며, 이 불화는 영구히 화해시킬 수 없으므로, 우리가 죄인인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실 수 없다. 따라서 적대관계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며, 우리와 완전히 화해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제시된 속죄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일소하신다. 이전에 불결하고 불순하던 우리가 그가 보시기에 의롭고 거룩한자로 나타나게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목을 얻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미리 손을 쓰시는 것이다. 참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 4 : 19), 후에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노염을 받아야 할 불의가 우리 안아 그대로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정죄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결합하실 때에 한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또 굳게 결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눈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한다. 사실, 그를 힘입어야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죄가 돌아오면 하나님의 진노를 동반하는 것이다.

 

 

 

4. 속죄 사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생긴다 : 그러므로 속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받아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기초를 가졌다고 한다(엡 1 : 4-5). 이 일들은 명백하며 성경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포하셨다고 하며(요 3 : 16), 반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가지게 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고 하는(롬 5 : 10) 구절들도 서로 훌륭히 조화된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나는 어거스틴이 바로 이 점을 가르치는 구절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변함이 없다. 우리가 성자의 피를 통해서 화해를 얻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세상창조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도 독생자와 함께 아들들이 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무엇이 되기 전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전에 미워하시던 자들을 이제부터 사랑하시기 시작하도록 만드셨다는 듯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와 화해했다.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는 사도가 증언 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 8).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를 미워하신 때에도 놀랍고 거룩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시지 않은 우리의 상태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셨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의 피조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우리가 만든 것을 미워하시는 동시에, 그가 만드신 것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7 이것이 어거스틴의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종과 죽음의 결과. 5-7)

 

5. 그리스도는 복종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는 이를 위해 평생동안 복종을 실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와 친절을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8 이 점을 증명하는 바울의 증언이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느니라"(롬 5 : 19). 참으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는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확대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 : 4-5). 그래서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의의 일부를 완성한다고 주장하셨다(마 3 : 15).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자유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고 언명하신다(마 20 : 28).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 4 : 25).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려고" 오신 분이라고 선언했다(요 1 : 29).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화해자로 세우셨느니라"고 가르친다(롬 3 : 24-25).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죽으심으로 말미암아‥‥‥화목 되었느니라"고 한다(롬 5 : 9-10).

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다(고후 5 : 21). 모든 증언을 열거하려면 한정이 없을 것이므로 나는 그 전부를 인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중의 여러 구절을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사도신경"은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즉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간다. 여기에 완전한 구원의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보이신 복종의 다른 부분도 제외되지 않는다. 바울은 자초 지종을 전부 포함시켜서 "그는‥‥‥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한다(빌 2 : 7-8). 그리고 참으로 죽음 자체에서도 그가 기꺼이 하신 복종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기꺼이 바치는 희생이 아니면 의를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는 "자기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을 때에(요 10 : 15),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적절한 말씀을 첨가하셨다(요 10 : 18). 이런 뜻으로 이사야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말한다(사 53 : 7. 참조 행 8 : 32).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서도 예수께서 나아가 군대를 만나셨다고 하며(요 18 : 4), 빌라도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순순히 재판을 받으셨다고 한다(마 27 : 12, 14). 물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약점들을 맡으셨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에게 대한 복종이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대한 그의 무쌍한 사랑에 대한 비범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즉, 무서운 공포심과 싸우며 저 잔인한 고통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우리를 도우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견지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감정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뜻에 전직으로 자기를 바쳐 복종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에게 합당한 희생을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사도가 시편에서 인용한 증언은 적절하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 : 7),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 : 8),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왔나이다"(히 10 : 7, 9, 시 40 : 7, 8). 그러나 괴로운 양심들은 오직 죄를 대속하는 제사와 성결에서만 안식을 얻는 것이므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생명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

 

(빌라도를 통한 정죄)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가 하나님의 하늘 심판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은 우선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정죄를 받으신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벌이 이 의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을 인간에게-더군다나 악한 불신자에게-정죄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총독"이라는 칭호를9 말하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사야의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 : 5)라고 가르친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정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가 거저 죽으시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죽음의 종류를 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정죄를 자기에게 옮기는 동시에 우리의 죄책도 맡으심으로써 우리를 해방하는 죽음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가 도둑에게 죽거나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죽으셨다면, 이런 죽음에는 배상을 치렀다는 증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재판정에서 죄인으로서 고발을 당하시고, 유죄 증거가 제출되고, 재판관의 입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으므로, 이런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는 그가 죄인과 악인의 처지에 서신 것을 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의 신탁을 통해서 예언된 두 가지 일에 주의해야 하겠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많이 도우며 강화한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서 두 강도 사이에서 달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는 복음서 기자가 언급하듯이, "그는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고 한 예언이 실현된 것을 안다(막 15 : 28. 참조, 사 53 : 12). 무슨 까닭이었는가? 그가 의인이나 무죄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무죄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죄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정죄한 바로 그 사람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말을 들을 때에(빌라도는 여러 번 그의 무죄를 공중 앞에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마 27 : 23), 우리는 다른 예언자가 그는 도둑질하지 않은 것도 물어 주었다고 한 말을(시 69 : 4) 상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인과 악인을 대표하신 것을 보지만, 동시에 그의 빛나는 결백을 볼 때에, 그가 자기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지셨다는 것이 명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고, 총독의 공식 선고에 의해서 범죄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가 아니었다-재판관 자신이 자기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언해서(요 18 : 38) 그가 의인이심을 선언했다. 바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할 죄책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전가된 것이 우리의 무죄 석방이 된다(사 53 : 12).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 대속적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로운 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맡아 받으셨는데, 그 벌이 지금도 우리를 위협하는 듯이, 우리는 평생 떨며 불안해 할 것이다.

 

 

 

6. "십자가에 못박힘"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도 독특한 신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의견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규정에서도(신 21 : 23)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완전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에게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또 율법에서 희미하게 예시된 일이었다. 그런데 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과 속죄 제물을 "아슈모트"10 라고 불렀다. 이것은 원래 죄 자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성령께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이 제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를 맡아 쓰고 가는 속죄 염소와11 같다는 것을 알리셨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 제물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려고 자기의 목숨을 "아샴"으로서(사 53 : 10),12 곧 선지자들이 말한 것 같이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내주셨다. 그 제물 위에 이를테면 우리의 오점과 벌을 던져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만드신 것이다. 사도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증언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고후 5 : 21).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자기의 순결을 입히셨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롬 8 : 3) 같은 뜻인 듯하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드려 속죄 제물로서 죽으시게 한 것은 그의 희생으로 모든 배상을 치른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말뜻이 여기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사 53 : 6) 하는 예언자의 뜻은 분명하다. 즉, 더러운 불의를 깨끗이 하려는 사람이 책임 전가에 의해서 그 불의를 썼다는 것이다. 그가 못박히신 십자가가 이 일을 상징한다는 것은 사도의 증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 : 13-14, 신 21 : 23). 베드로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벧전 2 : 24). 우리는 바로 그 저주의 상징을 보고 우리를 압박하던 짐이 그에게 옮겨졌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저주에 압도되어 쓰러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는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 힘을 전적으로 꺾고 부수어 버리셨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죄에서 무죄 방면을 얻으며, 그가 받으신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수치가 가득하던 십자가가 개선하는 전차로 변한 듯이, 자기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얻으신 승리를 웅장하게 선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십자가에 못박으시고‥‥‥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골 2 : 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13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자기를 드렸기" 때문이다(히 9 : 14).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과 씻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이시라는14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놋대야가 되었다(참조, 엡 5 : 26, 딛 3 : 5, 계 1 : 5).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사도신경에는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묻히시며"라고 한다. 여기서도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 값을 치르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멍에 아래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죽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히 2 : 9) 하는 사도의 말도 이런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지 않게 하셨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해서 확실히 살게 하셨다. 그러나 그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즉, 그가 이를테면 죽음이 자기를 삼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죽음의 깊은 연못에 자기가 빠져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불원에 삼켜 버렸을 그 죽음을 자기가 삼키시려는 생각이었다(참조, "죽음을 삼키심"은 벧전 3 : 22의 불가타역에 있음). 그가 자신이 죽음에 따른 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시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는 것이었다(히 2 : 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장사지낸 바 된것도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 매장에 우리도 참가함으로써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매장되는 것이다. 사도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롬 6 : 5), "그와 함께 장사되어"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롬 6 : 4),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갈 2 : 19, 6 : 1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골 3 : 3). 이런 발언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범을 나타내 보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용하고 무효한 것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 죽음에 내포된 효력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는 우리가 받아 즐길 이중의 축복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묶여 있던 그 죽음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교리에 대한 설명. 8-12)

 

8. "지옥에 내려 가사"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보면, 사도신경에 있는 이 어귀가 교회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은 때도 있는 것 같다.15 그러나 교리의 요점을 설명할 때에는 이 어귀를 보존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은 이 어귀를 생략하지 않는다.16 그러므로 이 어귀는 얼마 후에 삽입되었고, 교회내에서 즉시 통용되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관례가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표현이 모든 경건자의 공통된 신념을 반영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다만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누가 언제 이 문구를 삽입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이 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점은, 거기 우리의 믿음의 전체가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문을 신경에 넣는 데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17 이 신조가 우리의 구속 전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곧 명백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신조를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신조에 아무 새로운 말이 없고, 그리스도의 매장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며,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18 나는 이 말의 뜻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은 "무덤"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를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도록 설복한다. 그 자체로서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을 분명하고 쉬운 말로 표명한 다음에, 그것을 밝히기보다 도리어 모호하게 만드는 말로 되풀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주의한 짓이었겠는가! 같은 문맥에서 같은 일을 위해서 두 가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후자는 전자의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장사한 바 되셨다"는 것이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설명이 될 것인가? 둘째로, 우리 믿음의 중요한 점들을 적절하고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글에 이런 쓸데없는 반복 문구가 잠입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한 사람이라면 곧 내게 찬성하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9. 그리스도는 음부 세계에 가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해석이 달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하에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들에게 내려가서 이미 성취된 구속을 발표하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고 한다.19

이 해석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편에서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꺽으셨다"라는 말씀을(시 107 : 16) 인용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스가랴의 "그가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한다(슥 9 : 11 의역). 그러나 시편은 먼 나라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이며, 스가랴는 백성이 당한 바벨론의 비극을 깊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비교하는 동시에, 교회 전체의 구원은 낮고 깊은 곳에서 석방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럭저럭하는 중에 그곳을 지하에 있다고 생각해서 "림보"라는20 이름까지 붙였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저술가들이 반복했고, 지금도 여러 사람이21 참말이라고 열심히 옹호하지만, 여전히 이야기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유치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필요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석방하러 그리로 내려가셨을 것인가?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만 맛보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22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망대'에 있는 또는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 : 19). 문맥으로 보아서,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영혼은 간절히 기다리던 강림을 목전에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에서 전적으로 배제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경건자들과 불신자들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양자를 무차별적으로 혼동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았다고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10. "음부에 내려가심"은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영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신경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것에 대해서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있는 설명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 아니라, 놀라운 위로가 가득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 육체의 죽음뿐이었다면, 그 죽음에는 효험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엄격한 천벌을 받으며, 그 진노를 진정시키며, 그 공정한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셔야 했다.23 조금 전에24 인용한 예언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한다(사 53 : 5). 예언자가 말하려는 뜻은 그리스도가 악인들을 대신해서 보증과 담보가 되시며, 심지어 피고가 되셔서 그들이 받아야 하는 모든 벌을 참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벌을 받으셨다-다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 : 24). 그러므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악인들에게 가하신 죽음을 그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 뒤에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순서가 이렇게 뒤집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너절하고 가소로운 반대를 하는 것이다.25 문제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즉,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의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

 

 

 

11. 성경 구절로 이 설명을 변호함

 

이런 뜻으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고 살아나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의 고통에 매여있거나 능가될 수 없었음이라"고 한다(행 2 : 24). 베드로는 단순히 죽음을 말할 뿐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통에 붙잡히셨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오는 고통이며 죽음의 원인이다. 아무 두려움 없이 나서서 장난같이 죽음을 당하게 되셨다면, 그것은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몹시 무서워 하시면서도 그것을 피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무한한 자비를 참으로 증명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그리스도는 "그의 공포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는 것도(히 5 : 7) 같은 뜻임이 확실하다(다른 사람들은 "경외하심" 또는 "경건하심"이라고26 번역하지만, 사실 자체와 표현 방법으로 보아서 그것은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 : 7).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죄인으로서 죽음에 삼켜 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또 참으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 멀어진다고 느끼며, 하나님에게 간구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연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멸망을 계획하신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심히 낙망하셔서 깊은 고민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마 27 : 46 ; 시 22 : 1) 외치지 않을 수 없으신 것을 우리는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외치심을 그리스도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27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분명히 그의 심중에 있는 깊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셨다거나 노하셨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서, "내 마음을 안식하게 하는 자"라고 하신 이에 대해서(참조, 마 3 : 17) 노하실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이 미워하셨다면, 그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아버지의 노염을 푸실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엄격한 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아 고통을 받으셨으며(사 53 : 5), 노하시며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징을 체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힐라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가 다른 구절에서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이것들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하며, 또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계시지만, 사람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한 말도 우리 생각과 다르지 않다.28 그러나 사도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있는데, 내가 무슨 까닭에 한 사사로운 개인의 증언을 인용하겠는가? 사도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결과를 회상하면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한다(히 2 : 15).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괴롭히며 압박하는 공포심을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하시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슬픔은 보통 슬픔이나 사소한 원인에서 생긴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이 곧 더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의 권세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정복하고 개선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죽음에 대해서 우리의 왕이 삼켜 버리신 그 일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참조, 벧전 3 : 22, 불타카역).

 

 

 

12. 오해와 오류에 맞서는 이 교리를 옹호함

 

여기서 어떤 배우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서운 훼방을 한다고 외친다. 그들의 항의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의 구원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셨는 것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다음에 더 심한 중상을 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믿음과 반대되는 절망을 돌린다고 한다.29 첫째로, 복음서 기자들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대해서 그들이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악한 짓이다. 죽으실 때가 가깝기 전에 그는 "심령에 민망"하여(요 13 : 21) 슬퍼하셨고, 그때가 다가오자 두려워 더욱 심히 떨기 시작하셨다(참조, 마 26 : 37). 그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운 시늉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어릭석은 도피다. 암브로시우스가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이,30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슬픔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또 사실, 그의 영혼도 함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신체에 대해서만 속죄주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싸우실 필요가 있었다. 그가 움츠리지 않고 우리의 약점들을 담당하신 데서 그의 인애가-아무리 찬양해도 다할 수 없는 그 인애가-빛난다. 따라서 이 일은 그의 하늘 영광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 또 사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위로도-우리의 고민과 비애에 대한 위로도 -여기서 생겨난다. 즉, 이 증오자는 불행한 우리를 더 잘 구출하기 위해서 우리의 약점들을 체험하신 것이다(히 4 : 15).

그들은, 본질상 악한 일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면서(히 4 : 15) 이 두 가지 일을 조화시키시는 성령보다 그들이 더 현명하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연약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놀랄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는 폭력이나 필연성의 강요를 받아서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로서 굴복할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받으신 모든 고난은 조금도 그의 권능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이 훼방꾼들이 속아 넘어간 점이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에, 연약하셨을지라도 아무 죄나 오점이 없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격렬하고 충동적인 감정이 한도를 모르며 따라서 절제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논적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 표준으로 측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는 타락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감정의 움직임에서 극단을 억제하시는 훌륭한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는 점에서 우리와 같으실 수 있었지만(참조, 히 2 : 17), 이 특성에 의해서 그 느끼시는 법이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논적들은 반박을 당하자, 다른 허위 궤변으로 비약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무서워하셨지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무서워하신 것이 아니며, 도리어 이 저주와 진노에 대해서는 자기가 완전한 줄로 아셨다고 한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은 그리스도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보다 더 씩씩하지 못하며 겁이 많으신 것이 그에게 얼마나 명예가 되었겠나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도둑과 그 밖의 악인들이 거만하게 죽음을 서두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멸시하여 만용을 보이며, 어떤 사람들은 고요히 견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이 무서워서 놀라며 거의 마비되셨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항구성과 위대성이라고 할 것인가? 그에 대해서 기적적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일이 전해지는데, 격렬한 고민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 핏방울이 흘렀다는 것이다(눅 22 : 44) 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에 그는 비밀히 아버지에게 신음으로 호소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특별한 위로로 그의 용기를 고무해야 했다는 사실은(눅 22 : 43) 모든 의심을 흩어 버린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보통으로 죽으시면서 그 죽음이 무서워 심히 고민하며 피땀까지 흘리셨고, 겨우 천사들이 나타났어야 기운이 되살아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나약이었겠는가? 대답하라. 믿을 수 없이 비통한 마음에서 우러난 저 기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세 번 반복하신 저 기도는(마 26 : 39) 그리스도께서 보통 죽음보다 더 가혹하고 더 곤란한 싸움을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것을 보면, 내가 싸우고 있는 이 궤변가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대담하게 지껄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속되었다는 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뜻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셨는가를 바르게 느끼는 것이 우리의 지혜가 된다.

그런데 누가 묻기를, 그리스도는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지옥에 내려가셨더냐고 한다면,31 나는 대답한다. 이 기도는 출발이었고, 여기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고. 즉, 그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서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가 얼마나 가련하고 무서운 고민을 하셨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의 영의 신적 능력이 일시 숨어 있고 육의 연약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통과 두려움에서 온 그 시련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연설에서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고 한 말이(행 2 : 24) 실현되었다. 그는 이를테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셨지만, 하나님의 인애를 믿는 점에서는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이 점은 격렬한 고민 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고 외치신 그의 비범한 기도가 증명한다. 그는 무한한 고통을 느끼셨지만 자기를 버리셨다고 외친 그 하나님을 여전히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이 점은 아폴리나리스와 이른바 단의론자(单意论者)들의 과오를 논박한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영이 있었으나 영혼은 없었다고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절반 사람에 불과하셨다고 한다.32 그가 아버지에게 복종하시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복종하는 성향이나 의지는 영혼에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의 영혼이 불안을 느낀 것은 공포심을 구축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단의론자들과는33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성에 따라서 원하신 일을 인간으로서는 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말한 공포심을 반대 감정으로 극복하셨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지 않겠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니(요 12 : 27-28), 이것은 분명히 커다란 모순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시면서도, 우리가 자신을 억제하려고 굉장히 애쓸 때에 보이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없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

 

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음에 있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에서 나타난 것은 무력함뿐이므로,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완전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며, 저주가 제거되며, 형벌을 완전히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벧전 1 : 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도 오직 그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34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롬 4 : 25)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성격을 더 잘 표현한다. 그 뜻을 바꿔 말하면,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가 제거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의가 소생하며 회복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죽음에 굴복해 버리셨다면, 어떻게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이 싸움에 지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어 주실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어, 그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활의 덕택으로 그의 죽음은 우리 안에서 그 권능과 효력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 : 4) 그 때에 그가 드디어 하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고, 이 권능은 그의 신성(神性)을 분명히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도 바울은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고난을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으셨다고, 같은 뜻으로 가르친다(고후 13 : 4).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완전성을 논할 때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즉시 계속해서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고 첨부한다(빌 3 : 10). 이와 긴밀히 일치하는 것이 베드로의 발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으니 이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 : 21).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지탱되는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래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권능이 특히 부활에서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동시에 그의 부활에 속한 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또 "부활"이란 말에 대해서도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이 표현법이 적용된다. 즉, 죽음과 별도로 부활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심으로써 승리자의 상을 타셨으므로-즉, 부활과 생명이 있게 하셨으므로-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속임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고(고전 15 : 17) 주장하는 것은 바르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구절에서 정죄가 일으키는 공포심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한 후에, 더욱 역설하는 의미로, 확실히 죽으신 이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의 중보로서 하나임 앞에 나타나신다고 첨부한다(롬 8 : 34).

그뿐 아니라,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은 그의 십자가에 참가하는 데 달렸다고 우리가 이미35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도 거기 부합하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합하여 접붙임이 된 것을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6 : 4) 따라서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서(골 3 : 3) 우리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어야 한다는 증명을 얻어낸다(참조, 골 3 : 5).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는 지상의 일이 아니라 위에 있는 일을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다(골 3 : 1-2). 이런 말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라고 권고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하여 의를 얻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셋째 혜택도 받는다. 즉, 그의 부활이 실증하는 일종의 보증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5 : 12-26에서 자세히 논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을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을 겪으셨고, 그가 죽을 인간으로서 입으셨던 그 육신으로 영생 불사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4. "하늘에 오르사"

 

부활과 승천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지상 생활과 십자가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영광과 권능을 더욱 완전히 나타내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나라를 창건하신 것은 비로소 승천하신 때였다. 그리스도는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이 일을 가리킨다(엡 4 : 10). 거기는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훌륭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셨으나,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되도록 하셨다. 지상에 우거하신 동안은 미천한 육신을 집으로 삼으시고 그 안에만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는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요 7 : 37),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믿는 자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첨부했다(요 7 : 39 의역). 주께서도 친히 이 점을 제자들에게 확인하셔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 : 7). 그는 육신으로 계시지 않는 문제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을 고아같이 버리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4 : 18-19, 16 : 14).

사실, 그들은 그때에 더욱 확실한 체험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권위와 권능은 신자들을 축복 가운데 살며 기쁨으로 죽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성령을 얼마나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며, 얼마나 놀랍게 그의 나라를 확대하셨으며, 얼마나 그의 큰 권능을 발휘하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며 원수들을 흩으셨는가를 안다. 그러므로 승천하심으로써 육체적으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게 하셨지만(행 1 : 9), 그것은 아직 지상 순례를 계속하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직접적인 권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려는 뜻이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약속하신 일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을 실현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 가신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힘은 온 천지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며 보급되었다. 나는 내 말보다 어거스틴의 말로 이 점을 설명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서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가, 그리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는 순수한 가르침과 믿음의 원칙에 따라 육체적 임재로 이 일을 하려 하셨다. 그가 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되어 있었다."36 다른 데서 어거스틴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은총에 의해서는, 그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 : 20) 실현될 것이다. 말씀이 취하신 육신에 의해서는, 처녀에게서 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며 십자가에서 내리워 세마포로 싸여 무덤에 눕히며 부활로 나타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 : 11) 실현되었다. 왜? 그는 40일 동안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들이 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가운데 승천하셨고(행 1 : 3, 9) 여기는 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막 16 : 19). 그러나 그의 숭엄성의 임재를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기 계신다(참조, 히 1 : 3). 그러므로 숭엄성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임재에 관해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 : 11) 바르다. 교회는 육신의 임재로는 그리스도를 며칠 동안 모셨고 지금은 믿음으로 모시며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37

 

 

 

15. "아버지 우편에 않아 계시다가"

 

결과적으로 곧 이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이 있다. 이 비유는 임금들이 정사를 맡기는 신하들을 자기 옆에 앉히는 데서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영접되셨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천지에 대한 주권을 받으시며, 위임된 정권을 엄숙히 장악하셨으며, 일단 차지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 날에 내려오실 때까지 통치를 계속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해석한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 : 20-21. 참조, 빌 2 : 9), 또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고전 15 : 27),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 : 22). 이것으로 저 "앉아 계시는"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천지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숭엄성을 우러러보아 경탄하며, 그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가르치려고 사도들은 자주 이 일을 회상해서, 만사는 그리스도의 결정에 위임되었다고 했다(행 2 : 30-36, 3 : 21, 4장, 히 1 : 8). 그러므로 이 말은 그의 축복된 처지를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행 7 : 55) 중요한 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된 것은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의 숭엄한 권위였기 때문이다. "앉아 계시다"는 것은 하늘 심판대에서 주재하고 계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38

 

 

 

16.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신앙에 주어지는 혜택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받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첫째로, 주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는 것을(요 14 : 3) 깨닫게 된다. 그가 우리의 육을 쓰시고 우리를 대신하시듯이 하늘에 들어가셨으므로,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엡 2 : 6). 그래서 우리는 소망만으로 하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믿음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된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의 예언자와 중보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이다(히 7 : 25, 9 : 11-12, 롬 8 : 34). 이와 같이, 그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자기의 의를 보시게 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해하게 하셔서, 자기의 중재로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가까이 가는 길을 준비하신다. 가련한 죄인들에게는 무서움이 가득했을 그 보좌를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깨달으며, 그 힘에 우리의 힘과 능력과 보화와 또 지옥을 이긴 영광이 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 : 8. 참조, 시 68 : 18), 원수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백성을 풍성하게 만드시며, 그들에게 매일 영적 양식을 아낌없이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 앉으시사, 우리에게 자기의 권능을 주입하셔서 우리를 영적 생명으로 살리시며, 성령으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며, 각종 은사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교회가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도록 보호하시며, 그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반대하여 대적하는 원수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억제하시며, 끝으로 천지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계신다.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시다가 드디어는 그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고전 15 : 25. 참조, 시 110 : 1) 교회 건설을 완성하실 것이다.39 이것이 그의 왕국의 진상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권능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셔서 최후의 치리를 완수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미래에 다시 오심. 17)

 

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있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지상에서는 이를테면 비천한 육신 밑에 숨겨졌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가 저 마지막 날에 나타내실, 눈에 보이는 임재(臨在)를 심사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옳다. 그는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행 1 : 11, 마 24 : 30). 그리고 그의 나라의 형언할 수 없는 숭엄성과 영생 불사의 광채와 신성(神性)의 무한한 권능과 함께 일단의 수호 천사들을 데리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 날에 저리로부터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 25 : 31-33). 생사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 4 : 16-17).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말을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저술가들 중에 이 표현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40 우리는 물론 안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설명은 평이하고 분명하므로 신경에 훨씬 더 가깝다. 신경은 분명히 보통 사람이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뜻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한 바울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히 9 : 27). 최후 심판 때에 아직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은 겪지 않겠지만, 그들이 당할 변화는 죽음과 같을 것이므로 "죽음"이라고 불러도 부적당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전 15 : 51).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의 죽을 운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삼켜 버리고, 새로운 본성으로 직접 변화하리라는 것이다(고전 15 : 52). 이렇게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에 호출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바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전 4 : 16-17). 그런데 이 표현은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의 설교와(행 10 : 42)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엄명에서(딤후 4 : 1) 따온 것 같다.

 

 

 

(사도신경에 대한 결론 : 그리스도의 충족성. 18-19)

 

18. 심판자가 구속자시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위로가 생긴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는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광을 나눠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이다(참조, 마 19 : 28). 참으로 그가 심판대에서 우리를 정죄하실리는 만무하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왕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멸하실 수 있겠는가? 머리가 어떻게 자기의 지체들을 흩어 버리실 수 있겠는가? 우리의 대언자가 어떻게 자기의 피(被)보호자들을 정죄하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 우리를 정죄하려고 능히 나설 자가 없다고 사도가 담대히 외치므로(롬 8 : 34,33),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맡아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정죄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훨씬 더 확실하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바로 그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41 그뿐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이가 그때에는 심판정에서 그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셔서(요 5 : 22) 영예를 주신 목적은 심판이 무서워 떠는 자기 백성의 양심을 그가 보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그것은 신경이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공중(公众)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42

 

 

 

19.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에는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체적으로 또 그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행 4 : 12). 그러므로 그 가장 사소한 부분이라도 다른 데서 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추구한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고전 1 : 30).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를 구한다면, 그것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권에 있으며, 순결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잉태에 있으며,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탄생에서 나타난다. 그는 탄생하심으로써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 : 17), 우리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셨다(참조, 히 5 : 2). 우리가 구하는 것이 구속이라면 그것은 그의 고난에 있으며, 무죄 방면이라면 그것은 그가 정죄받으신 데 있으며, 저주를 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십자가에 있으며(갈 3 : 13), 배상을 치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희생에 있으며, 정결이라면 그것은 그의 피에 있으며, 화목이라면 그것은 그의 지옥에 내려감에 있으며, 육을 죽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무덤에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라면 그것은 그의 부활에 있으며, 영생 불사라면 그것도 그의 부활에 있으며, 천국을 상속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승천에 있으며, 보호나 안전이나 모든 풍부한 축복이라면 그것들은 그의 나라에 있으며, 안심하고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받으신 심판권에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 모든 종목의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데로 갈 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런 희망 저런 희망으로 떠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지마는 생각의 일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바른 길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풍부한 축복을 한번 참으로 안다면 이런 불신(不信)이 그들 속에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제 17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만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당연하며 알맞는 일이다

 

1.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한다

 

덧붙여서 이제 이 문제도 설명해야겠다. 궤변을 고집하는 어떤 사람들은1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인정하면서도, "공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듣기도 싫어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한 도구나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고, 베드로가 부르는 것과 같이, 생명의 주로는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행 3 : 15). 사실, 그리스도를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운다면, 공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만한 가치를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거스틴의 지당한 말과 같이 "예정과 은총의 가장 밝은 빛은 인간으로서의 구주 예수그리스도시다. 그는 선행하는 행위나 믿음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인간성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다. 한번 내게 대답해 보라. 어디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될 자격을 얻었으며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말씀에 의해서 그 말씀과의 위격 통일을 얻을 자격을 얻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머리되신 분을 은총의 토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 은총은 머리로부터 모든 지체에 각각 그 분량에 따라 확산되어 간다. 이 사람이 은총을 받아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된 것같이, 모든 사람이 같은 은총에 의해서 믿음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2 마찬가지로 다른 구절에서, "중보 자신보다 더 현저한 예정의 예가 없다. 다윗의 후손인 이 사람은 그의 의지의 공로가 먼저 있은 것이 아니건만 그를 의롭게 만드시고 결코 불의하게 되지 않게 하신 이가 저 머리의 불의한 지체들을 의롭게 만드신다"고 한다.3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논할 때에, 공로의 시초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일 원인인 하나님의 결정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오직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를 우리의 구원을 얻어주는 중보자로 세우셨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긍휼을 대립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종속되는 것은 그 일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통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거저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하나님외 자비보다 하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공로도 우리를 위해서 중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호의와 그리스도의 순종을 각각 그 정도에 따라 우리의 행위와 대립시키는 것은 적당하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떠나서는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공로로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공로를 얻으신 것은 그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며 그의 복종으로 우리의 죄를 말소하도록 미리 임명되셨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달렸으므로, 그리고 이 은총은 우리를 위해서 이런 구원 방법을 정했으므로, 모든 인간적 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립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대립시키는 것과 같이 합당하다.

 

 

 

2.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연결한다

 

이 구별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6)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높은 원인 또는 근본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며, 그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둘째로 근인이 되어 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는 형상인(形相因)에 불과하다고 항의한다면, 그럴 경우에 그는 여기 인용된 말씀이 뜻하는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을 축소하는 것이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구원의 질료(质料)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여러 성경 구절이 이 점을 분명히 증명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4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 10). 이 말씀은 분명히 한 사실을 증명한다.

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는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를 임명하신 것이다. "노염을 푼다"는 말은5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이치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동시에 노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해하신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발언들은 모두 이 뜻을 표명한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 : 2). "아버지께서는‥‥‥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 : 19-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 : 19).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엡 1 : 6). "이는‥‥‥십자가로 우리 둘을 한 사람 안에서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 : 15-16 의역). 이 신비에 대한 설명은 에베소서 1장에서 얻을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가르치고 동시에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첨부한다(엡 1 : 4-5).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사랑하신 자들을 어떻게 은혜로 받아 주시기 시작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와 우리를 화해시키심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의의 원천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죄인으로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원수와 심판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설명하듯이, 사랑의 시초는 의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 21). 이 뜻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엡 2 : 3)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우리가 하나님의 노염을 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되는 때마다 이 구별이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얻으신 것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로를 아버지에게 돌리지 않고 그에게 돌리는 것은 바꿔 말하면, 은총은 그의 것이며 그에게서 온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3.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공로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복종에 의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참으로 우리를 위해 은총을 얻어 주셨다. 이 일을 확고부동하게 증언하는 구절이 성경에 많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배상을 치르시며,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받으시며,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노염을 푸셨다면-간단히 말해서, 의인이 확실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면-그는 자기의 의로 우리에게 구원을 얻어 주신 것이며, 이것은 공로로 얻으신 것이나 다름 없으며, 이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는 화목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을 얻었다(롬 5 : 10-11). 그런데 노여운 일이 없으면 화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시던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 노염을 푸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셨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뜻이다. 그리고 곧 그 뒤에 있는 대조법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한다(롬 5 : 19). 이 말씀의 뜻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멸망할 운명을 받은 것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서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되어 은혜를 받게 된다는5a 것이다. 동사는 미래형이지만, 문맥으로 보아서 현재의 의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은사는6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5 : 16).

 

 

 

4. 그리스도가 대신하심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은혜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피로 우리가 깨끗이 되며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더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요일 1 : 7).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흘리는 바 나의 피라"(마 26 : 28 ; 참조, 눅 22 : 20). 그가 피를 흘리신 결과로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충분히 실시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한 말은(요 1 : 29) 이 점에 해당된다. 요한은 율법의 모든 제물에 그리스도를 대치시키고, 상징들이 나타낸 일이 그에게서만 실현되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모세가 자주 "불의는 대속되며 죄는 말소되며 용서를 받으리라"고 말한 것을 안다(참조, 출 34 : 7 ; 레 16 : 34). 요약하면, 구약의 상징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과 권능을 잘 가르친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는(히 9 : 22) 원칙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이 점을 설명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결론한다(히 9 : 26). 또,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드리신 바 되셨고"라고 한다(히 9 : 28). 그는 이미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했다(히 9 : 12).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암송아지의 피로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그리스도의 피가 어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못하겠느뇨?"라고(히 9 : 13-14 의역). 이것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속죄하며 노염을 풀며 배상을 치르는 힘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 그리스도의 은총이 너무도 약화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사도가 조금 뒤에 첨가하는 것과 같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율법하에서 남아 있는 이전의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 : 15 의역).

바울이 제시하는 유추법(类推法)은 특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운운한다(갈 3 : 13). 다른 사람들이 치러야 할 것을 치르심으로써 그들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 아니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사야의 증언도 분명하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사 53 : 5).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그가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노염을 푸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구절에 있는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하여 내가 그를 쳤느니라"는 말씀도(사 53 : 8 의역) 같은 뜻이다. "저는‥‥‥친히 나무에 달려‥‥‥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는 베드로의 해석을(벧전 2 : 24) 첨부한다면, 모든 의혹이 제거될 것이다. 우리는 정죄를 면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정죄의 짐을 지셨다고, 베드로는 말하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이다

 

우리를 사형에서 구출하시려고, 그러스도께서 대가(代价)를 치르셨다고, 사도들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7 세우셨으니"(롬 3 : 24-2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속의 대가를 주신 것을(롬 3 : 24)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찬양하고,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안전하게 설 수 있도록 그 그리스도의 피에서 피난처를 얻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롬 3 : 25). 베드로의 발언도 같은 뜻이다.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 전 1 : 18-19). 만일 이 대가로 우리 죄를 위한 배상을 치른 것이 아니라면, 이 비교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값으로 샀다"고 바울이 말한다(고전 6 : 20). 만일 우리가 받을 벌을 그리스도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면, "중보도 한 분이시니‥‥‥자기를 속전으로8 주셨으니"라는 바울의 말도(딤전 2 : 5-6)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속을 "죄의 용서"라고 규정한다(골 1 : 14). 이 뜻을 바꿔 말한다면, "그 피가 우리를 위한 배상에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또는 무죄 방면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그는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를 도말하셨다"고 하는 구절도 이와 같은 뜻이다(골2 : 14). 사도는 우리의 죄책을 면제하는 대가지불 또는 배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 : 21).

이 말에서 우리는 추론한다.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을 때에 율법에서 얻을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된다고. 같은 뜻을 바꿔 말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에서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레 18 : 5) 우리의 행위에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얻는다. 이 점은 안디옥 설교도 분명히 확인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행 13 : 39 의역).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사도가 다음에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 : 4-5).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논하는 바와 같이(롬 4장), 행위가 없어도 의를 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살을 "우리의 양식"(요 6 : 55)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안에서 생명의 본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힘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의를 위한 대가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엡 5 : 2). 다른 곳에서도, "그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한다(롬 4 : 25).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결론짓는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은총에 의해서 지금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신다고.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7 : 35). 이사야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일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느니라"고 말하는 사도가 여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인이다(요일 2 : 12). 요한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쓰지 않지만, aujtov"("그이")라는 대명사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주께서도 이런 뜻으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너희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다(요 6 : 57). 바울의 발언도 이와 합치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9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 : 29).

 

 

 

6.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공로를 쌓지 않았다

 

그러나 롬바르드나 스콜라파와 같이,10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공로를 세우신 것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그들이 감히 이런 정의를 내리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호기심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자기를 위해서 어떤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내려오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밝히시며, 모든 의심을 일소하신다. 성경은 성부께서 성자의 공로에 의해서 성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하지 않고, 그가 성자를 죽음에 내어 주시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롬 8 : 32)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요 3 : 16. 참조, 롬 8 : 35,37). 또, 우리는 예언자들의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 9 : 6),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라고(슥 9 : 9) 하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또,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면서(참조, 롬 5 : 10) 바울이 그 사랑을 찬양하며 확인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일을 생각하시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요 17 : 19). 자기의 성결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버리신 분이 자기를 위해서는 얻으신 것이 없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시며, 이를테면 자기를 잊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면서 증언한 것을(빌 2 : 9) 저 사람들은11 어리석게 여기에 적용한다. 그들은 묻기를 사람들과 천사들의 모든 능력과 덕성으로도 그 천 분의 일도 얻지 못할만한 것을 한 개인이 얻었으니, 즉 세계의 심판자와 천사들의 머리가 되며 하나님의 최고의 주권을 받으며 자기 안에 저 숭엄성이 영원히 있게 하셨으니, 이것은 어떤 공로로 된 일이냐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이 있다. 바울은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높여지신 이유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범으로 삼도록 그리스도의 높여지심은 낮아지심 다음에 있었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그 뜻은 다른 데 있는 말씀과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 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 : 26).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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