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2 권 (1)

작은샘 큰물줄기 2017. 9. 11. 17:35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반항으로 전 인류가 저주에 떨어지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 원죄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면 자기 자만이 없어진다. 1-3)

 

1.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1 옛날 격언이 역설한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대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수치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필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비참하게도 자기 기만에 빠지고 심지어는 눈뜬 소경이 된다는 것은 더우기 혐오스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훈은 정말로 귀중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더이상악용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자기 자신을 알라고 권하면서 자기의 가치와 우수성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허망한 자신과 자만을 부풀게 만드는 것만을 자기 속에서 관찰하기를 바란다(창 1 : 27).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얼마나 위대했을까를 아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것이 조금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묵인하에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알 때에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기 확신이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될 것이다. 태초에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창 1 : 27) 우리의 마음속에 선에 대한 열의와 영생에 대한 명상을 넣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野兽)와 구별하는 인류의 위대한 고귀성이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으로 인하여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해력을 부여 받은 것을 감사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궁극적 목표인 복된 영생을 향하여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최초의 우수성을 생각할 때, 반드시 그것과 대조되는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상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사람과 함께 우리는 원상태에서 타락한 것이다. 이 일이 근원이 되어 우리 자신에 대한 중오심과 불쾌감,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겸손이 생기며, 이로 인하여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선을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새로운 열정의 불길이 일어난다.

 

 

 

2. 인간의 본성은 천성적으로 거짓된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서 자기의 능력을 믿는 모든 것들 빼앗으며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빼앗고, 우리를 순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지혜와 행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수치심으로 우리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참한 빈곤과 수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선한 특징들을 생각하게 하는 원칙이 얼마나 유쾌한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을 받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천성이 높이 평가되는 것을 알 때에 사람들은 자기의 천성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 점에서 대개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맹목적인 자애(自爱)는 모든 인간의 천성이므로, 자기들의 천성에는 가증하다고 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장 자연스럽게 믿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할 풍부한 능력을 타고 났다는, 이 완전히 허망된 견해가 아무 외부의 지지가 없어도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 신뢰를 얻는다.2 비록 비교적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하나님께도 조금은 양보를 해서 만사를 자기의 공로라고 하지 않는 듯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공로를 분배한 결과에는 자랑과 과신의 근거가 여전히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된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 박여 있으며,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 언행을 가장 기뻐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대중 앞에서 인간성을 가장 듣기 좋은 말로 찬양한 사람의 말을 사람들은 듣기를 좋아하고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도륵 가르치는 인간의 우수성에 대한 이런 예찬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도취 이외의 아무 성과도 없으며 참으로 거기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철저한 파멸로 몰아 넣는다. 우리가 모든 허탄한 보장을 믿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숙고하며 계획하고 시험하며 착수할 때에, 우리가 노력을 시작하자마자 건전한 이해력과 진정한 덕성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없어지며, 그래도 경솔한 돌진을 계속해서 드디어 멸망에 빠진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끝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특징만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류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인식이 향상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최악의 깊은 무지 속으로 빠질 것이다.

 

 

 

3. 자기 인식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요 문제

 

그러므로, 지혜의 둘째 부분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는 인류의 공통된 판단과 하나님의 진리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상의 큰 차이가 있다. 육신적인 판단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의 이해력과 정직함만을 믿고, 담대하게 덕을 닦으려고 노력하며 모든 죄악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탁월하고 존귀한 경지를 향해서 정성껏 노력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과신할 이유를 찾아 낼 수가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가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디어는 일체의 자신을 맡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시조 아담에게 주시고 또 참으로 우리의 가슴에 의와 선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우리의 본래의 고귀성을 잊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는, 우리의 처음 상태나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영생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우리의 교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을 꺾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면 최초란 무엇인가? 우리의 타락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무리와는 완전히 멀어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처지가 싫어 신음하며 신음 중에서도 저 잃어버린 고귀성을 사모한다.3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안에서 기뻐할 원인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에게 믿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동의를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인식을 분류해 보자.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4 무슨 목적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지식에 힘입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내세 생명에 대하여 명상할5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부족함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부족함을 알게 될 때에 사람들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으로 땅에 엎드릴 것이며, 끝내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될 것이다. 첫째 점을 고려하면 자기의 의무의 성격을 인식하게 되며, 둘째 점에서는 그 의무를 실천하려는 자기의 능력의 한도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교훈을 절차가 요구하는 대로 각각 논하겠다.

 

 

 

 

(담의 죄로 인간이 최초에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상실하였고 전 인류 파멸을 가져왔다. 4-7)

 

4. 타락의 역사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창3장) : 믿음이 없음

 

하나님께서 엄한 벌을 주신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흉악한 범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야기시킨 아담의 이탈에는 어떤 종류의 죄가 있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아담의 죄를 탐욕에 의한 무절제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유치하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과실을 먹지 않는 데 최고의 미덕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때의 축복받은 그 기름진땅에는 여러 곳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 풍성했고 또한 풍성했을 뿐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종류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깊이 고찰하여야 한다. 아담의 복종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아담에게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 나무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하나님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그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악한 정욕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바랄 수 있다고 한 약속과 그와는 반대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맛보기만 하면 죽음이 있으리라고 한 무서운 경고가 그의 믿음을 시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6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유혹의 성격에서 보다 완전한 정의를 얻어야 한다. 부정한 생각이 있었기에 여자는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므로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도 이 점을 확인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 5 : 19).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해야 할 점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무시하고 허위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의 존엄 또한 우리 사이에 거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경배도 여전히 완전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타락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이의 권위를 멀리하는, 아니 오만하게 자기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그 변절이 추악하고 가증한 죄라면, 아담의 죄를 관대히 보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루한 결단과 결합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을 중상모략하여 하나님에게 허위와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한 데 찬동한 것이다. 끝으로, 배신으로 인하여 야심이 생겼으며 야심은 참으로 완강한 불순종의 모태가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린 사람은 정욕이 이끄는 대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 때에 사탄에게 귀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참조, 렘 9 : 21), 오늘날 우리가 같은 창문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 앞에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는7 버나드의 가르침은 옳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도 결코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굴레는 다른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종은 일이라는 생각과 행복한 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러한 좋은 굴레가 된다. 그러므로 아담은 악마의 모독적 언사에 휘말려 한껏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소멸시킨 것이다.

 

 

 

5. 제일 첫 번째의 죄가 원죄이다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롬 8 : 22)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롬 8 : 20). 원인을 찾는다면,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은 확실히 사람이 받을 벌의 일부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편만한 저주는 아담의 죄에서 흘러 퍼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지더라도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 하늘 형상이 그에게서 없어진 후에 이 벌-처음에 그를 훌륭하게 장식했던 지혜와 힘과 성결과 진실과 공의가 없어지고 그 대신에 무지와 무력과 불결과 허영과 불의 등의 가장 추악한 병들이 생겨난 벌-을 받은 것은 그 사람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후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물려받은 부패이며, 이것을 교부들은 "원죄"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죄"라는 말은 본래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 버렸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분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죄책으로 모든 사람이 그 죄책을 맡게 되어 죄가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상식과 가장 거리가 먼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언급이 모호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적어도 그들의 설명은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Pelagius)는 겁내지 않고, 아담의 죄는 그 자신의 손실을 초래했을 뿐 후손은 해하지 않았다는 모독적인 망상을 들고 나섰다.8 사탄은 이 궤변을 가지고 이 질병을 덮어 가리워서 고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가 전달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증명되자(롬 5 : 12), 펠라기우스는 그 전달은 모방에 의한 것이지 번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므로 선한 분들이(그 중에서도 특히 어거스틴이) 우리는 외부에서 나타난 사악으로 인해서 부패한 것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타고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9 이 점을 부인한다는 것은 지극히 파렴치한 짓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외 무리가 모든 다른 점에서 파렴치한 짐승들이었다는 것을 저 거룩한 분의 경고에서 깨닫는 사람은 그들의 무모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시 51 : 5)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부모의 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애를 더욱 칭송하기 위해서, 자기는 잉태된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만 있는 일이 아님이 분명하며, 따라서 그는 인류의 공통된 처지를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한 씨의 후손인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 전염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웠고 오염이 많았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욥기서에서 말하고 있다(욥 14 : 4).

 

 

 

6. 원죄는 모방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의 불결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출생할 때부터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조상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천을 찾지 않는다면 이 오염의 시초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은 시조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뿌리였으며 따라서 그가 부패한 때에 인류가 당연히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서 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 : 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되었다(롬 5 : 17). 이런 관점에서 펠라기우스파들은 어떤 어리석은 주장을 할 것인가? 아담의 죄가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그 의가 우리 앞에 모범을 보이고 우리가 그것을 모방하기 때문인가? 누가 이런 모독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와 그에 따른 그의 생명이 전달 또는 나누어져서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면, 의와 생명은 아담에게서 상실되어 졌다가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는 결론이 따른다. 또 죄와 죽음은 아담을 통해서 은밀히 들어왔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없어진다는 결론이 따른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말은(롬 5 : 19)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아담은 우리를 자기의 멸망에 끌어넣어 자기와 함께 멸망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총으로 우리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진리의 빛이 투명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더 이상의 길고 자세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진 생명이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전 15 : 22). 그는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죄의 병에 전염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불의의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정죄가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발언의 다른 부분으로, 거기에서 그는 생명을 얻을 희망이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일이 나타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의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그 놀라운 교제뿐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롬 8 : 10). 따라서 "우리는 아담과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말은 해석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 즉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불행과 멸망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 같은 파멸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죄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죄책은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며 그가 빠진 그 부패를 모든 후손에게 감염시켰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 것은(엡 2 : 3), 모든 사람이 이미 모태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바울이 "본질"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가 아니라 분명히 아담에게서 부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죽음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가장 부당한 생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를 부패시키고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까지 감염되고 만연된 것이다. 우리의 하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악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 : 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는 모두 그 앞에 생명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신다(요 3 : 5).

 

 

 

7.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죄

 

오염은 주로 영혼에 있는 것이므로, 자식의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에서 유전된10 것이냐고 하는 문제는 무척이나 교부들을 괴롭혔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써 논의할 필요는 없다. 주께서 인간성에 부여하시고자 하신 은사들을 아담에게 위탁하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야담이 그 받은 은사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만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은사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받은 것이며, 그 은사는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의심할 것인가?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했을 때에 인간성이 벌거숭이가 되고 빈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썩은 뿌리에서 썩은 큰 가지가 나왔으며 여기서 나온 작은 가지에 부패가 전달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했고 자녀는 다시 그 후손에게 대대로 병을 옮겨 주었다. 바꿔 말하면, 아담에게서 시작한 부패는 선조로부터 후손에게 전달되어 끊임없이 흘러간 것이다. 전염은 육이나 영혼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염은 처음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손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품을 가지며 또 잃어 버리도륵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11

자녀는 부모의 순결에 의해서 거룩하게 될 것이므로(참조, 고전 7 : 14), 경건한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펠라기우스파는 말한다. 그러나 이 궤변에 대한 논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영적 중생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육적 번식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12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 부모의 성결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받은 보편적 저주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책은 자연에서 오고 성결은 초자연적 은총에서 오기 때문이다.

 

 

 

(원죄는 본질이 타락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질에서 온 것은 아니다. 8-11)

 

8. 원죄의 본질

 

불확실한 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원죄의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자.13 나는 여러 저술가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정의들을 연구하려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보기에 가장 진리에 맞는 듯한 것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에 "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자주 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나오는 행위, 예컨대 간음, 우상 숭배, 도둑질, 미움, 살인, 열락 등을 그는 "죄의 열매"(갈 5 : 19-21)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행위를 보통 "죄들"이라고 부르며, 바울 역시 그렇게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어느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범행으로 인하여 받는 책임이 아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죄 없고 책임 없는 우리가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가 그 저주에 함께 말려들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한 심판이 우리에게 왔으며, 또한 그가 전염시킨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것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거스틴은 죄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 사이에 전파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죄를 자주 "타인의 죄"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죄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14 사도 바울도 가장 명쾌하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증언한다(롬 5 : 12). 즉 그들은 원죄에 빠져 쌓였고 그 오점들로 더럽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들까지도 모태에서부터 저주를 받았지만 그 책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에 있는 것이다. 아직은 그들에게서 불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불의의 씨는 그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본성 전체는 죄의 하나의 씨앗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죄로 인정된다는 결론이 된다. 허물이 없으면 처벌도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이미 앞에서 언급된 육의 일을 하는-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시초의 의의 결핍"을 원죄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의 의미를 전적으로 이 정의에 포함시키지만 그 위력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15 이것은, 우리의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냥 있도록 놔두지 않는 각종 악을 생산할 능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원죄를 "육욕"이라고16 말한 사람들은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에게 있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또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육욕으로 더럽혀지고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보다 전적으로 인간은 육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첨부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9. 죄는 전 인류를 전복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고 나는 말한다. 저속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의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마음속 깊은 밑바닥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부패를 소위 감각적 충동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또는 그 부패를 "불쏘시개"라고 부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감성" 부분만을 유인 선동해서 죄에 끌어넣는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완전한 무지를 폭로했다. 그는 부패가 있는 자리를 찾아내는 데 있어서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에 있다고 말하면서 육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육에서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17 이것은 마치 바울이 영혼의 본성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이 초자연적 은총에 반대한다고 가르쳤다는 말과 같다. 바울은 부패는 영혼의 일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는 치명적인 들지 않은 순결한 부분은 없다고 가르치면서, 이 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부패한 본성을 논할 때에, 눈에 보이는 욕망의 과도한 충동을 비난한 뿐만 아니라 특히 지성의 눈이 멀고 마음이 썩어 버렸다고 주장한다.18

로마서 3장은 단지 원죄에 대한 것을 나타나게 한 것에 불과하다(1-20절). "새롭게 함"에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은 옛 사람과 육에 반대하며, 영혼의 저속한 감성적 부분을 시정하는 은총을 표시할 뿐 아니라 모든 부활의 완전한 개혁을 포함한다. 따라서 바울은 동물적 욕망을 없애라고만 명령하지 않고 거기에 더하여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요구한다(엡 4 : 23). 다른 곳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같은 권고를 한다(롬 12 : 2). 그러므로 영혼의 탁월함과 존귀성이 특히 빛나는 부분이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히 부패하기까지 해서 치유를 받으며 새로운 본성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는 죄가 어느 정도로 지성과 심정을 모두 점령했는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인간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육으로 향하는 생각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롬 8 : 7), 따라서 사망인 것이다(롬 8 : 6).

 

 

 

10. 죄는 우리의 천성이 아니고 우리의 천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기들의 허물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19 물러가도록 하라. 아담의 상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작품을 찾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부패속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처음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미리 예방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더 잘 마련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서 불평해서는 안 된다.20 이런 반론은 뚜렷한 지나친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경건한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점은 후에 적당한 곳에서21 논하게 될 예정의 비밀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멸망한 원인을 본성이 타락한 데 돌리는 것을 잊지 말고 본성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그 분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치명적 상처가 본성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외부로부터 온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것에 불평을 돌릴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 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전 7 : 29). 분명히 인간의 멸망은 그 책임을 인간에게만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었음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허무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성"의 "자연적인" 부패

 

그러므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했지만 본성에서 타락이 유래 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주장한다.22 우리는 그 타락이 본성에서 흘러 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래 된 첨가된 성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려고 한다. "선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타락이 거의 상속권과 같이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있으므로 악행에 의해서 얻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2 : 3). 자기가 지으신 가장 작은 것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을 적대시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피조물의 부패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이 올바른 것이라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육을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죄들을 "선천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23 그리하여 마니교도들의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은 소멸된다. 그들은 사람에게 약한 본질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악의 원인과 시초를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린다는 인상을 주지않을 목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감히 다른 조물주를 만들었던 것이다.24

 

 

 

제 2 장

 

이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논제의 위험성들 : 관점을 수립. 1)

 

1. 이제부터 우리는,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가 노예 상태로 전락한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아니면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진상를 보다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 나는 논의 전체가 향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겠다. 오류를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양쪽에서 오는 위험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⑴ 인간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전혀 없다고 들을 때에 즉시 이 사실을 구실로 자기 만족에 빠진다. 자력으로는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듣기 때문에, 그런 추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외면해 버린다. ⑵ 인간에게 사소한 것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며, 사람은 파렴치한 자기 과신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된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위험성 모두를 지적한다.1

이같은 두 위험에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혀 없으며 심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편이 그의 천품에 최고의 고상한 덕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태만한 그를 더 날카롭게 자극하며 분발시킬 수 있다. 이 둘째 점의 필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나는 본다. 인간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자랑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영예의 표시들이 뚜렷했을 때에도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그 자신의 배은망덕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극도의 치욕된 상태로 떨어진 지금은 더욱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최고의 영예의 최정상에 올라 있을 때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밖에 사람에게 돌린 것이 없다(창 1 : 27).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선행들로 인해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2

또한, 우리의 지혜와 덕목에 대한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은 우리의 파멸에 신성 모독을 첨가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의 자신의 힘으로 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갈대로 우리를 높이 드는 것과 같아서 갈대와 비교하는 것조차 과대 평가인 것이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은 모두가 연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반복해서 자유 의지는 옹호자들에게서 힘을 얻기보다는 그들에게 짓밟히는 편이 더 많다는3 매우 타당한 말을 하곤 했다. 이 점은 서론의 의미로 말해 둘 필요가 있는데, 사람 안에 하나님의 힘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밑바닥에서부터 뿌리뽑혀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이들은 이런 논쟁은 쓸데 없다고 하지는 않더라고 전적으로 위험한 것이라고 해서 심히 싫어하기 때문이다.4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근본 문제인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의지론에 대한 비판. 2-9)

 

2. 철학자들은 이해력을 신뢰한다.

 

위에서 우리는 영혼의 능력은 지성과 심정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므로,5 이제 이 두 부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겠다. 철학자들은, 거룩한 빛이 가득하여 가장 효과적인 의견을 알리며, 우월한 힘이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이 지성 안에 있어서 등불과 같이 모든 생각을 비추며 왕과 같이 지배한다고 상상하는데, 이 견해는 그들 사이에서 대체로 분명하게 일치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감각에 의한 지각은 우둔하며 보는 것이 희미해서 항상 땅에서 기어다니고 저속한 일에 얽매이며 결코 진정한 식별을 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만일 욕망이 이성에 복종하고 감성에 굴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덕을 추구하게되고 바른 길을 계속하며 의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감성의 노예가 될 때, 그 욕망은 감성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침내 정욕으로까지 전락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6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내가 위에서7 말한 능력들은-지성과 감각과 욕망 또는 의지(이 마지막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영혼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들은, 지성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은 선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주도적인 원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의 우수성을 견지하며 자연이 부여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저 저속한 충동에 대하여서는, 감성은 사람을 오류와 망상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성의 채찍으로 길들이며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엇보다 철학자들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때때로 인간이 자기 안에 이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심히 어려운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쾌락의 유혹을 기뻐하며 혹은 행복에 대한 망상에 속기도 하고 혹은 무절제한 기호의 습격을 받아, 플라톤의 말과 같이,8 여러 밧줄에 매인 듯 여러 방향으로 끌린다. 따라서 우리의 악한 견해와 악한 관습으로 인하여 자연이 우리에게 준 희미한 빛이 곧 꺼져 버린다고 키케로는 말한다.9 이런 병들이 일단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때는 아무도 그 맹렬한 힘을 쉽게 억제할 수 없다고 철학자들은 인정한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이 병들을 사나운 말에 비교한다. 병거를 모는 사람이 병거에서 떨어지듯이 이성이 혼란될 때에 이 병들은 아무런 억제도 받지 않고 마구 날뛴다고 한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능력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면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 선택으로, 우리는 하는 일을 하고 피하는 일은 피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싶을 때에 어떤 선한 일을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악을 행한다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다.11 참으로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신들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선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방자하게 호언하기까지 한다. 또한 코타(Cotta)의 입을 통하여 키케로가 한 말도 여기에서 왔다. "사람은 모두 자기 힘으로 덕을 얻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 결코 그 현명한 것을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덕에 대하여 칭찬을 받으며 자기의 덕을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이고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는 말한다. "행운은 하나님께 구하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다."12 그러므로 모든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지도자인 이성에 따르며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

 

 

 

4. 일반적으로 교부들의 생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자유의지를 인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교회의 저술가 모두가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있는 이성의 건정성에 중대한 손상이 있었으며, 악한 욕망으로 인하여 의지가 심한 노예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지나치게 철학자들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도 많이 있다.13 그중에서 초기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본다. 첫째로, 인간의 무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철학자들의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로, 선에 대해서 이미 무관심한 육체에게 나태할 새로운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14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식적 판단으로 어리석게 생각될 것을 가르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성경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신념을 조화시키려고 타협시켰다. 그러나 둘째 점, 즉 나태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점에 그들은 특히 유의했다. 이 점은 그들의 말에서 나타나 있다. 어디선가 크리소스톰도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우리의 권한에 맡기셨으므로 우리에게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을 허락하시며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으로 받아 주신다." 또, "악한 사람도 원하기만 하면 선한 사람으로 변하는 일이 많으며, 선한 사람도 나태해서 타락하여 악하게 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에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연성을 부담시키시지 않고 적당한 치료법을 제공하시며 모든 것을 환자 자신의 판단에 맡기신다." 또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바르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몫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 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도 동시에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많이 쓴 표현 중의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것을 드리자.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하는 표현이다.15 제롬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시작할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신다. 우리는 힘써드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16

확실히 이런 발언들은 덕에 대한 인간의 열의를 과대 평가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오직 나태하기 때문이라고 논하지 않으면 우리가 타고난 나태를 분발시킬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이 일을 했는가는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용한 이 의견들이 전혀 거짓이라는 것도 조금 뒤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도 교부들 특히 크리소스톰이 인간의 의지력을 찬양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주장이 다르며 혹은 동요하고 또 혼란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확실한 것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각 사람의 의견을 정확하게 나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점만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인용할 것이다.

그들의 후대의 다른 저자들은 각각 인간성을 교묘하게 옹호하노라고 자랑하고자 했지만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사람은 감성부분에서만 부패하고 이성은 완전 무결하며 의지 또한 대부분 손상이 없다고 하게되었다.17 동시에 "사람의 자연적인 천품은 부패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천품은 제거되었다"18고 하는 그 유명한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나도 본성의 부패상을 분명하게 가르치고자할 때에는 이 말로 만족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초자연적 능력도 빼앗긴 그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주의깊게 고려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너무도 철학자들과 같은 말을 했다. 라틴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올바른 것같이 항상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헬라 사람들은 더욱 외람된 말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각 자기 손에 힘을 쥐고 있는 것처럼, 자력 또는 자주라고19 불렀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천품으로 받았다는 원칙을 모든 사람이-일반 민중까지도-믿었다. 그러나 명성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도 이 원칙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말의 영향력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성경의 단순한 증언에 의해서, 인간은 그 본성에 따라 선악간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를 결정하겠다.

모든 사람의 글에 자유 의지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그것을 정의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교회 저술가들은 오리겐이 제출한 정의에는 찬성하는 듯이 보이는데, 오리겐은 자유 의지는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며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이라고 말했다.20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을 자유 의지라고 한 어거스틴도 오리겐과 의견이 다르지 않다.21 베르나르두스는 자유 의지를 정교하게 말하고자, "의지의 불멸의 자유와 이성의 틀림없는 판단 때문에" 그것은 "찬동"이라고 더욱 모호한 말은 했다.22 안셈의, "공정을 위한 공정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유명한 정의도 그다지 명백하지 못하다.23 그 결과 롬바르드와 스콜라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정의를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정의가 더욱 분명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총이 없으면 의지는 자체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더 좋거나 혹은 설명을 더욱 자세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첫째,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이성이 하는 일이며 따라서 의지라는 명사는 이성을 가리키는 데 써야 한다고 그들은 의견을 일치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이라는 형용사는 좌우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24 그리하여 토마스는, 원래 자유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선택 능력" 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으로 생긴 것이지만 보다 욕구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한다.25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유 결정의 힘이 있는 자리라고 가르치는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인 것이다. 그들이 이 두 가지에 각각 얼마를 돌리는가를 보는 것이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이다.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와 "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중간적인 것을26 대개 인간의 자유로운 의견에 속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돌렸다. 이 점에 대하여 '이방인의 소명'이라는 저서의 저자는 감성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의 세 가지로 의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의 두 가지는 인간이 넉넉히 받았으며 마지막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친다.27 이것이 옳은 생각인지는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 지금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발언만을 반박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먼저 사회 활동 또는 외부적 활동을 위해서 자유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한 것이다. 나는 이 둘째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만 처음의 문제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의견을 잘 표명하게 될 것이다.28 그런데 스콜라 학자들은 세 가지 자유를 구별하여, 첫째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죄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 처음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다.29 나는 기꺼이 이 구별에 찬성하지만, 필연성과 강제를 혼동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차이점의 범위와 이것을 염두에 둘 필요성은 다른 곳에서 밝혀질 것이다.30

 

 

 

6. "역사하는" 은혜와 "협력하는" 은혜란?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고 할 때,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자유 의지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은총 즉 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은총은 평등하고 아무에게나 차별없이 분배된다고 하는 광신자들에31 대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선을 행할 힘을 완전히 박탈당하였는지 빼앗겼는지, 아니면 비록 미약하지만 아직은 다소의 힘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자체만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은총의 도움을 얻으면 자기 몫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명제집의 저자는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처음 종류를 "역사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선을 행하려는 뜻을 효과적으로 가지도록 마련하다. 둘째 것을 "협력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하나의 보조로서 선한 의지를 따른다.32 이 구분에서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선에 대한 효과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은총에 돌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효과적이 되지 못하는데도-선을 추구한다고 암시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두스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단정하면서도, 인간은 자기의 충동으로 이런 종류의 선한 의지를 추구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롬바르드는 어거스틴에게서 이 구별을 얻어 왔노라고 하지만.33 이 생각과 어거스틴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부분 또한 애매모호하여 부패한 해석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나는 싫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조하는 은총과 우리가 협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은총을 멸시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든, 그렇지 않고 그것에 복종해서 확인하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방인의 소명의 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성의 판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은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공로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성령의 협력이 없이는 할 수 없었을 일이, 자기의 의지로는 할 수 없었을 사람들의 공로로 인정된다."34 내가 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 것은, 독자 여러분으로 하여금 비교적 건전했던 스콜라 학자들과 나의 생각에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우리와 더욱 가까운 시대의 궤변가들은,35 그들이 고대에서 더욱 멀어졌기 때문에 나와의 차이가 더욱 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에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 의지를 사람에게 인정하는가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을 행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강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롬바르드는 마지막으로 단언한다. 롬바르드에 의하면, 비록 우리가 악해서 죄의 노예가 되었고 또 죄를 짓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경우라도 이 자유는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36

 

 

 

7.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자유 결정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선과 악을 선택하는 힘을 동등하게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강요를 받지 않고도 자기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에 훌륭한 이름을 붙여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이 강제로 죄를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원해서 노예가37 되었으며, 인간의 그 의지는 죄의 족쇄로 묶여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귀한 자유인가? 사실 나는 말다툼을38 몹시 싫어하며, 그 말다툼으로 교회는 쓸데 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뜻이 있는 말과, 특히 치명적 오류와 관련된 말을 피하는 데는 신중하기로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기만 하면 이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에서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한 마디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빠른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라는 이 말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한다. 고대 저술가들의 뒤를 이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배들의 해석을 무시하고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만 집착하여 파멸적인 자신에 빠지고 말았다.

 

 

 

8. 어거스틴의 "자유 의지론"

 

교부들의 권위가 우리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항상 이 말을 쓰면서 동시에 이 말에 대한 그들의 해석도 분명하게 밝혔다. 우선,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한다.39 다른 곳에서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그 주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직 어느 누구도 감히 의지의 결정을 부정해서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40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욕망이 수갑을 채우고 정복했기 때문이다."라고41 분명하게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죄악에 빠져 정복을 당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42 또, 인간은 자유 의지를 악용하여 자기와 및 자기의 의지 모두를 잃어 버렸다. 또, 자유 의지는 노예가 되어 그 결과 지금은 의를 행할 힘이 없다. 또, 하나님의 은총이 해방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또, 율법이 명령하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듯이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돕고 사람의 의지가 비록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어 복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는 실현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은 자유 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 버렸다고43 다른 곳에서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른 구절에서, 자유 의지는 은총에 의해 확립된다는 것을 밝힌 후에, 은총이 없어도 자기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꾸짖는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참한 인간들은 자유를 얻기도 전에 감히 자유 의지를 자랑하며, 또는 이미 자유를 얻었다면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인가? 자유 의지란 말에 자유가 내포된 듯한 사실을 그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 : 17). 그러므로 그들이 죄의 노예라면, 무슨 까닭으로 그들은 자유 의지를 자랑하는가? 사람은 자기를 정복한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제 만약 그들이 자유함을 얻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마치 자기의 노력으로 된 일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인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 5)고 하신 분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리만큼 그들은 자유로운가?" 참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이 말의 사용을 조롱하는 듯이 보이다. 그는,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고, 곧 의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말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 사람은 의지의 결정에 의해서만 의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구주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44 사람의 자유는 의로부터의 해방에 불과하다는 그의 단정은 그 어리석은 이름을 적절하게 조롱하는 듯이 보인다. 이 말을 사용하면서도 나쁜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그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러나 이 말을 보존하는 데는 반드시 큰 위험성이 따르며 따라서 폐기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은 이 말을 쓰지 않기를 원하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이 말을 피하기를 바란다.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아마 내가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회 저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애매모호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에서는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나는 인정했는데 이것이 내게 대한 큰 오해를 일으킬 것 같다. 그들은 모두가 나와는 반대 입장이므로, 내가 그들에게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을 못하도록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단하고 성실하게 알려 주려는 것 외에는 내게 아무런 다른 의도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부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일반 신자들은 항상 불안 중에서 허덕일 것이다. 때로 이 저술가들은, 인간은 자유 의지의 힘을 빼앗겼기 때문에 은총에서만 피난처를 구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장을 제공하거나 또는 제공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모호한 생각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은 인간의 덕성을 없는 것으로 또는 낮은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모든 선행에 대한 공로를 성령께 돌렸다. 그리고 이 점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나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가르친 발언을 몇 개 소개하겠다. 어거스틴도 자주 반복한 키프리아누스의 말이 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45 이 말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라고 할 것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과 유케리우스는 생명나무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면서 이 나무에 손을 내미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나무를 의지의 결정이라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 사람이 이 나무 열매를 맛보면 죽을 것이라고 한다.46 이들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모두 날 때부터 죄인일 뿐 아니라 온통 죄덩어리라고47 하는 크리소스톰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사람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죄악이라면, 그의 의지의 힘에 어느 정도로 효과가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겠는가?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말을 얼마든지 많이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유리한 것만을 택하고 나와 의견의 다른 것을 간교하게 묵살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기에, 나는 이들 증언을 파하겠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단정한다. 간혹 그들이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찬양한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덕성에 대한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의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그 진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자기 칭찬을 버려야 한다. 10-11)

 

10. 자유 의지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장의 서두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진보한다는 말이다.48 인간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창 3 : 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의 힘이 많아서 자기를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꺽어 버리는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귀를 기울여 그 만류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무릇 사람이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 : 5). 또,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 : 10-11). 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 : 29-31). 이 모든 구절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작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약 4:6; 참조, 벧전5:5; 잠3:34).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약속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 : 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 : 1). 이 구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유사한 구절들도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사 60 : 19). 틀림없이 주께서는 종들에게서 해와 달의 빛을 빼앗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만이 홀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므로,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도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11. 참된 겸손만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 철학의 기초는 겸손이라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은49 항상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나를 더욱 기쁘게 한다. "웅변술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어떤 수사학자는 '화술이다'라고 그는 대답했다.50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교훈들을 내게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항상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에서 단정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랑과 교만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겸손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겸손 이외에는 자기가 피난할 곳이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은 원래 사탄이다. 사람의 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우리 자신의 것은 죄뿐이 아닌가? 너 자신의 것인 죄를 버리라.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께로서 오기 때문이다." 또,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거짓된 자기 변호가 아니다." 또, "누구든지 자기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에게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을 때에, 그의 안에 있는 무기는 파기되고 전쟁은 끝이 난다. 모든 불경건의 무기를 우리는 부수고 태워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하며 우리 자신 안에 아무 도움이 없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는 더욱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편 70편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결국 우리 자신은 죄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다고 한다.51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이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의 힘입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아직 아무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기꺼이 굴복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겸손에 자기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그 능력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애와 야심이라는 병을52 버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 병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둡고 자신을 과대 평가 하는 것이다(참조, 갈 6 : 3). 오직 나는, 이 병을 버리고 성경이라는 진실한 거울 속에서 비추어 자기를 바르게 인식하라고 요구할 뿐이다(참조, 약 1 : 22-25).

 

 

 

(인간의 천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 오성 12-17)

 

12. 초자연적인 천성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성들은 타락했지만, 인간을 야만적인 짐승과 구별할 만한 충분한 이성은 남아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의견이 상식화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 의견은 사람의 자연적인 은사는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53 이 문장의 후반부는, 하늘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얻는데 충분했을 믿음과 광명의 의를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졌을 때에 동시에 영적 능력, 곧 영원한 구원을 얻을 희망으로 받은 은총을 빼앗겼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쫓겨나 영혼의 축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성질들이 온통 소멸되었으며, 중생의 은총에 의하여 처음으로 회복된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성질은 곧,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성결 및 의에 대한 열성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시므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질들은 제거된 것이라고 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의 건전성과 마음의 성실성도 동시에 제거되었다. 이것이 곧 자연적 은사의 부패이다. 오성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며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은 자연적인 은사이며, 따라서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일부분은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다(요 1 : 5). 이 말에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표현되었다. 첫째로,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아직도 어느 정도 희미한 빛이 번득인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천부의 이해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둘째로, 이 빛은 짙은 무지가 덮어 질식시키므로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 이것이 완전한 정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인간의 영혼을 오성과 의지로 구분한 데 따라54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먼저 오성의 능력을 검토하겠다.

인간의 오성은 항상 맹목 무지하다고 단죄하며 아무 대상도 지각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할 뿐 아니라 상식적인 경험과도 반대된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일종의 욕망이 인간성에 내재한 것을 보며, 이미 그 진리를 맛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오성은 원래 진리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각 능력이 있다. 동물에게 이 은사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 둔하고 비이성적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 동경은, 그대로 두면 곧 허무한 데 빠지기 때문에 경주에 참가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 실로 사람의 지성은 둔감하여, 바른 길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오류 사이를 헤매며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자꾸만 넘어지다가 마침내 길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이와같이 인간의 지성은 진리를 추구하며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허무에 눌려 가련한 수고를 하고 있는데, 때때로 마땅히 힘써 알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을 탐구하여 자기의 어리석은 호기심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 특히 이해해야 할 문제들에는 전혀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세속 저술가들이 항상 이 타락상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도 역시 거의 전부가 같은 타락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전도서 전체를 통해서 솔로몬은 사람들이 능통하다고 자처하는 연구 부문들을 열거한 다음에 결국 그것을 모두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정한다(전 1 : 2,14, 2 : 11;기타).

 

 

 

13. 세상적인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그러나 오성의 노력은 아무 결과도 없을 정도로 언제나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55 특히 아래에 있는 일들에 오성이 주의를 돌릴 때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는 반대로, 오성은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하려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다소의 경험을 하는 총명이 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할 때에는 그 기능이 균등하지 못한데, 지성이 현세의 영역을 넘을 때에는 자체의 무력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지성이 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전진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 알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땅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다. "땅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공의, 또는 내세의 정복에 속하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세에 관해서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세의 범위 내에 국한되었다. "하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정한 의의 본성과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의미한다.

처음 것에는 정치와 모든 기계 공작 기술과 문예가 포함된다. 둘째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뜻에 합치하게 하는 원칙에 대한 지식이다.

처음 종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이 사회적 동물이므로,56 타고난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사회 생활을 육성하며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회 생활상의 공정성과 질서에 대하여 보편적인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단체 생활은 모두 법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법의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관해서는 모든 민족과 모든 개인이 한결같이 합의하게 된다. 교사와 입법가가 없어도, 법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발생하는 분쟁과 충돌에 대해 나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절도범과 강도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모든 법과 권리를 뒤집고 모든 법적 제재를 깨뜨리면서, 자기들의 정욕만이 법으로 행세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며(이것은 더욱 흔한 허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금지한 일을 칭찬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법을 미워하는 것은, 그 법이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경솔한 정욕에 미쳐서 명백한 이성과 싸우는 것이다. 오성으로는 시인하는 것을 정욕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이러 종류의 갈등은 공정성에 대한 천부의 개념을 말살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법의 여러 부분에 대하여는 서로 논쟁하면서도 공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지성은 바른 길을 따르는 듯이 보일 때에도 절름거리며 비틀거린다. 그러나 사회 질서의 씨앗이 모든 사람 속에 심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현세 생활을 정리하는 데는 이성의 빛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14. 학술과 예술에 관한 오성

 

다음으로 학술과 예술에 관해서, 우리는 모두 이것을 배울 만한 어느

정도의 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인간의 총명이 나타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학예를 배우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한 방면에 분명한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류의 공통된 능력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어느 한 가지를 배울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각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고안하며 선배에게서 배운 것을 더욱 연마 완성하기도 하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런 이해는 회상에 불과하다고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57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이해력의 시초가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있다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는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오성에 보편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 선(善)은 보편적이므로, 여기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의 창조주께서는 저능아들을 창조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감사하는 생각을 많이 고취하신다. 하나님의 빛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편만하지 않을 때에 인간의 영혼은 어떤 천품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선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학예를 발견하거나 조직적으로 전수하거나 학예에 대한 오묘하고 탁월한 지식이 있다는 것은 소수 사람들의 특색이므로 이것은 공통한 총명에 대한 증거로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과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부여되므로 선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15.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속 저술가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쓴 것을 보면, 거기에는 진리의 훌륭한 광명이 비치고 있다. 이 광명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은 비록 그 완전 상태에서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훌륭한 능력을 아름다운 옷과 같이 입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그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게 될 것이다.58 그 이유는 영의 선물을 경시하는 것은 곧 영 자신을 경멸하며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대 입법가들이 사회 질서와 규율을 아주 공정하게 수립한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 위에 진리가 비쳤다는 것을 부정할 것인가? 자연을 훌륭하게 관찰하며 교묘하게 묘사한 철학자들이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변론술을 생각하고 조리있는 화법을 가르친 사람들을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의학을 발전시켜 우리의 유익을 위해거 전력한 사람들을 우리는 미친 사람들의 허튼 소리라고 할 것인가? 그럴수는 없다. 우리는 싶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술을 읽을 수 없는데, 그들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경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일은 훌륭하다 또는 고귀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교의 시인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신들이 철학과 법률과 모든 유익한 기술을 발명했다고 인정했다.59 성경에(고전 2 : 14)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60 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일을 탐구하는 데는 참으로 예리하고 투철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이 그 진정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께서는 많은 선물을 인간성에 남겨 두셨다는 것을 그들의 예를 보아서 깨달아야 한다.61

 

 

 

16. 예술과 과학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동시에, 인류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총명과 지식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넣어 주신 것이었다(출 31 : 2-11, 35 : 30-35). 그러므로, 인간 생활에서의 가장 훌륭한 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불경건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묻는 것 역시 정당한 물음이 되지 못한다. 신자들 속에만 하나님의 영께서 계시다는 발언은(롬 8 : 9) 성결의 영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결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고전 3 :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성령의 권능으로 만물을 채우시고 움직이시며 살리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법칙에 따라 각 종류에 부여하신 그 성격에 따라서 하신다. 우리가 자연 과학과 논리학과 수학과 그 밖의 학술의 도움을 받으며 불신자들의 활동과 봉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도움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학술을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태만에 대한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참조, 골 2 : 8) 진리를 이해라는 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를 참으로 축복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이해력과 거기에 따르는 지식은, 만일 진리의 견고한 기초가 그 밑에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즉시 첨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거된 것과 같이 남아있는 자연적인 은혜들도 부패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참으로 옳은 가르침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점에서 명제집의 선생과 스콜라 학자들은62 그에게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은사들이 저절로 더럽혀질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오염된 후에는 그의 은사들은 깨끗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은사를 이유로 칭찬을 받을 수도 전혀 없었다.

 

 

 

17. 12-16까지의 요약

 

이상을 요약하면, 우리의 본성에 이성이 고유하다는 것을 인류 전채에서 볼 수 있으며, 마치 동물이 감정을 가진 점에서 무생물과 다른 것과 같이 이성은 우리들과 동물들을 구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이 결함이 하나님의 전반적인 은총을63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돌려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완전히 파멸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판단력이 월등하다. 또 어떤 사람은 기술을 배우면 곧 깨닫는 총명이 있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은총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온전한 자비심에서 흘러 들어온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게 하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가의 공통한 본성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64 나타내시려는 것이 아닌가? 이 은총은 여러 사람을 그냥 지나감으로서 그 자체는 어느 사람에게도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그 소명에 따라 특별한 활동을 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사사기에 이런 예가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도록 부르신 사람들에게 "주의 신이 강림하셨다"고 한다(삿 6 : 34). 요컨대, 모든 특별한 사건에는 반드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다. 이렇게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용사들이 사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삼상 10 : 26). 사울이 왕으로서 성별될 것을 예언했을 때에, 사무엘은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했다(삼상 10 : 6). 그리고 이런 일이 정치의 전과정을 통하여 계속되었다는 것은 후에 다윗에 대하여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한 것과 같다(삼상 16 : 13). 똑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호머까지도,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이 우수한 것은 각각 제우스신이 주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65 일찍이 특별한 재능과 기술이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둔해지는 것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중과 뜻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총명한 자의 지식을 빼앗으며(참조, 욥 12 : 20)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신다"라고 한다.(욥 12 : 24; 참조, 시 107 : 40).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며, 이 흔적이 인류 전체와 다른 피조물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하기 전까지는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되었다.18-21)

 

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는가를 분석해야겠다. 이 영적 통찰에는 주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⑴ 하나님을 아는 것, ⑵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자비, 즉 우리의 구원을 아는 것, ⑶ 하나님의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점에서는, 특히 둘째 점에서는 가장 위대한 천재들이라 할 지라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두웠다. 물론 철학자들의 글에는 곳곳에 하나님에 대한 유능하고 적절한 발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에서는 항상 일종의 경솔한 상상이 엿보인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참으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자기의 신성을 조금 맛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무지를 구실로 자기들의 불경건을 숨길 수 없게 만드셨다.66 또 어떤 때에는 그들이 어떤 발언을 하게 만드시고,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스스로 고침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찰 태도로 인하여 사물을 보아도 진리로 향하지 못했으며, 진리에 도달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들이 어두운 밤에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번갯불이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밤의 암흑 속에 빠진다. 빛의 도움으로 길의 방향을 잡을 수는 더욱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저술의 여기저기에 진리의 작은 물방울을 몇 개 우연히 떨어뜨리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더럽히는 해괴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지! 요컨대,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느낀 일조차 없다. (이러한 확신이 없으면 사람의 오성에는 무한한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은 이 진리 즉,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그는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시는가를67 이해하는 진리에 접근하거나, 또는 접근하려고 노력하거나, 심지어는 이 진리를 직접 목표로 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19. 요한복음 1 : 4-5 나타나 있는 인간의 영적 맹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취해, 거룩한 일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이 전혀 맹목적이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따라서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논의보다 성경의 증언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얼마 전에 인용한 구절에서68 요한은 이 점을 아주 훌륭하게 가르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 : 4-5)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비추기 때문에 작은 불꽃이나 적어도 불똥이 없을 때가 없으며, 이런 조명이 있는데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서는,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한다(요 1 : 13). 이것은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것과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였다(마 16 : 17).

 

 

 

20.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중생의 영을 통해서(참조, 딛 3 : 5)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 의심을 생각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예언자들을 따라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시 36 : 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 : 3)는 사도 바울의 확언 또한 같은 뜻이다. 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 : 27)고 외쳤다. 요한이 "은사"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일반적인 천품이 아니고 특별한 조명69 이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한 자기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그의 불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께서 그의 영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한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일들을 알려 줄 힘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세까지도 백성들의 건망증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은사를 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 아니하셨느니라"(신 29 : 3-4). 만약 하나님의 행사를 보는 일에서 우리는 "장애"라고 그가 말한다면, 이 이상 더 표현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기겠다고 약속하시며 이것을 특별한 은총이라고 하신다(렘 24 : 7). 분명히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셔야만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셔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 : 44). 무슨 까닭인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산 형상이시며(참조, 골 1 : 15), 이 형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광채가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던가?(참조, 히 1 : 3)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그 형상이 밝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땅에 내려오신 것은 인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던가?(참조, 요 1 : 18) 그리고 그는 그의 사명을 충실히 다 하시지 않았는가? 분명히 다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스승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께로 온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듣는 것과 배움인가? 물론, 성령께서 놀랍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들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밝히신다. 교회의 갱신을 약속하실 때에, 그는 구원을 하기 위해 모으신 사람들은(사 54 : 7)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고 가르치신다(요 6 : 45; 사 54 : 13).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예언하신다면, 불신자들과 세속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는 교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70 바울은 이 문제를 진실하게 논의하고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 : 18 이하). 모든 인간적인 지혜의 미련함과 허무함을 공격하여 철저하게 분쇄한 다음에(참조, 고전 1 : 18이하) 그는 단정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 : 14). 누구를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연의 광명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적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나태하여 그 신비를 무시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신비들은 사람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신비는 미련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과 귀와 마음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찬양했다(고전 2 : 9). 참으로 그는 사람의 지혜를 휘장에 비교하고, 이것이 마음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사도는 선언한다(고전 1 : 20). 아직도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에 예리한 통찰력이 있다고 하며 그것에 의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략할 것인가? 이런 광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사람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름 곳에서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나님께만 돌린다. "하나님, 영과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구하노라"(엡 1 : 17). 이제 우리는 모든 지혜와 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듣는다. 그는 또 무슨 말을 하는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고 한다.(엡 1 : 18상). 그들에게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면, 그들 자신은 눈이 먼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운운한다(엡 1 : 18하-19).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소명을 알 만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인정한다.

여기서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사람의 이해력을 인도하시며, 이런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하시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 또는 무지를 시정하신다고 말할 것이다.71 그러나 전혀 터무니 없는 말이다. 다윗에게는 율법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자기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원한다(시 119 : 18). 분명히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위에 비칠 때에 해가 땅 위에 솟아나지만,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분이(약 1 : 17) 눈을 뜨게 하시거나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그 말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 빛을 비추시지 않는 모든 곳은 암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가장 훌륭하신 선생으로부터 충분히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받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가르칠 진리의 영이 필요하지 않았다면(요 14 : 26), 그 선생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행 1 : 4).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 결핍을 증명하신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조명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든지 서슴치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이상의 이해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를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더 무지한 것이다.

 

 

 

(죄와 무지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는 미혹에 의해 생길 수 있다. 22-25)

 

22.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증거는 인간이 변경할 수 없는 것이며, 올바른 지식을 주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영적 통찰의 셋째72 방면, 즉 올바르게 살아가는 원칙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의로운 행위에 대한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말이다. 때때로 인간의 지성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더 높은 일들보다 오히려 이 일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듯이 보이는데, 이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롬 2 : 14-15). 만일 이방인들이 그 본성에 따라 그 마음에 율법에 의한 의가 새겨져 있다면, 우리는 물론 그들이 인생 행로에서 전혀 맹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연법에73 의해 사람이 행위의 바른 표준을 충분히 배운다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사람에게 이 법 지식이 부여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한다면, 이성과 진리의 목표를 향해서 이 지식이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인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즉시 나타날 것이다. 바울의 말의 전후 관계를 본다면 이 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며 율법이 없이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 없이 멸망한다고 말했다. 이방인들이 우선 심판을 받지 않고 멸망한다는 것은 부당하게 생각될 것이겠기에 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을 대신한다고 바울은 즉시 첨부한다. 이것은 그들이 공정한 정죄를 받는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은 사람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자연법은 공정과 불공정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양심의 깨달음이며, 사람이 무지를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유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정의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죄의식에서 마음을 멀리하려고 하기가 쉽다. 플라톤이 그의 프로타고라스에서74 우리는 오직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사람의 위선이 죄를 교묘하게 은폐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프라톤의 발언은 옳은 발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인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에 붙잡히게 되며, 싫든 좋든 간에 간혹 눈을 뜨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 능력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말이다.

 

 

 

23. 선악에 대한 판단은 임의적으로 행해지는 한 그 판단은 애매모호하다

 

일반적인 정의나 문제의 본질에 관해 지성이 속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거기서 더 멀리 가려고 할 때에, 즉 원칙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할 때에는 틀리기 쉽다는 데미스티우스이75 가르침은 더욱 옳다. 일반적인 질문을 한다면, 누구나 다 살인은 죄악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살인을 좋은 일로 생각한다. 간음자는, 일반적으로 간음을 정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자기의 간음을 자랑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당하면 방금 설정한 일반적인 원칙을 잊어버린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시편 57:1에 대한 해석에서 어거스틴이 훌륭한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데미스티우스의 원칙에는 예외가 없지 않다. 악행의 수치가 양심을 심히 억압하기 때문에, 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면서도 일부러 사악에 돌입하는 때가 있다.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말의 일례를 든다면, "나는 무엇이 더 좋은가를 알고 또 시인하지만 나쁜 편을 따른다"라고76 한다. 내가 보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절조와 무절제를 지혜롭게 구별했다. "무절조가 득세할 때에는 혼란된 정신 상태 또는 격정이 지성의 특수한 지식을 빼앗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분별하는 악도 자기의 비행에서는 간파하지 못한다. 정신 혼란이 가라앉으면 곧 회개하는 마음이 돌아온다. 그러나 무절제는 죄를 깨닫더라도 소멸되거나 분쇄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완고하게 그 상습적인 악행을 택하며 계속한다."77

 

 

 

24.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완전히 어긋나나, 둘째 돌판에 관해서는 비난받는 경우에서만 어긋난다

 

선악을 구별하는 일반적인 판단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모든점에서 건전하며 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심정에 공정과 불공정을 구별하는 능력이 주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무지를 핑계로 삼지 못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그 결과로 반드시 개개의 경우에 진리를 식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정도의 이해력이 있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떨기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 그리고 완정한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으로 우리의 이성을 측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성이 맹목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확실히 그것을 첫째 돌판의 중요한 점들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78

예컨대 하나님을 믿으라, 그의 고귀성과 의를 올바르게 찬양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고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라는 점들이다(출 20 : 3-17). 자연적인 지각에 의지하는 사람이 이런 일들과 이와 비슷한 일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낀 일이 있는가? 세속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에는, 그 허망하고 사소한 짓들을 버리도록 아무리 말해도 항상 다시 그리로 되돌아간다. 물론 그들은, 성실한 의도가 동반하지 않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79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에 관해서 어떤 관념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증언하지만, 거짓된 방법을 고안해서 곧 이 관념을 부패시킨다. 경배에 관해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힘으로 깨닫지 못하며 경고에도 유의할 수 없는 지성이 훌륭한 분별력을 가졌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돌판에 있는 교훈들에 대하여(출 20 : 12이하) 사람들은 좀더 이해력이 있는데, 이 교훈들은 그들 사이에 생활을 유지하는 일과 더욱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간혹 인내심이 없는 것을 본다. 성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도, 불공정하고 지나치게 거만한 지배는 벗어버릴 방법만 있다면 참고 견디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하는 일반적인 판단은, 이런 지배를 참고 견디는 것은 비굴하고 비열한 인간의 특색이며 체면을 아는 자유인은 이런 지배를 떨쳐 버린다고 한다. 철학자들도 받은 손상에 대하여 보복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과도한 교만을 비난하시며, 사람들이 수치라고 생각하는 인내를 자기 백성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육욕을 고려하지 않는데, 자연인은 정욕이라는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빛은 사람이 이 심연에 들어서고 부를 때에는, 극히 천한 표징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격동들을 의미한다. 마음을 조용하게 건드리는 악한 욕망을 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25. 매일같이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플라톤이 모든 죄를 무지에 돌린 것을 우리가 위에서 비난한 것은 당연하다.80 그와 같이, 모든 죄에는 계획적인 악의와 타락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우리는 배척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으로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의 이성은 무수한 형태의 속임수에 압도되며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또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치며 무수한 곤란을 만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라고 함으로써(고후 3 : 5), 인생의 각 방면에서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밝힌다. 그는 의지나 감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무슨 일을 바르게 행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근면과 통찰력과 이해력과 신중성은 완전히 부패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을 고안하거나 준비할 수가 전연 없을 정도인가? 우리가 모든 천품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천품이라고 생각하는 예리한 이성을 빼앗기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응 헛것으로 아시며"(고전 3 : 20; 참조, 시 94 : 11),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성령께서는(창 6 : 5, 8 : 21) 이 일을 가장 적합하다고 보신다. 만일 우리의 본성이 생각하고 선동하고 자신하고 시도하는 것이 모두 항상 악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성결과 의만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께선 기뻐하실 일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 있는 이성은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무참하게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도 이 무력함을 알고 주의 계명을 바로 배울 만한 깨달음을 얻기를 기도했다(시 119 : 34). 그가 새로운 이해력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 번 만이 아니라 그는 하나의 시에서 거의 열 번씩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한다(시 119 : 12, 18, 19, 26, 33, 64, 68, 73, 124, 125, 135, 169). 이렇게 되풀이함으로써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한가를 암시한다. 다윗이 자기만을 위해서 구한 것을 바울은 자주 모든 교회를 위하여 간구한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골 1 : 9-10; 참조, 빌 1 : 9).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할 때마다 동시에 이 일이 사람의 능력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언한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성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 우리의 눈을 위해서 햇빛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 조명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빛을 보기 위해서 눈을 뜨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열어 주시지 않으면 닫힌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81 또 성경의 교훈을 보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하루만 조명을 받고 그후에는 자기 힘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방금 바울에게선 인용한 구절이 계속적인 전진과 성장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뜻을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 : 10). 거듭나고 진정한 경건에서 적지 않은 전진을 한 그였지만, 이미 받은 지식에서 후퇴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매순간 계속적인 인도가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허물로 잃어버린 바른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시 51 : 10). 처음에 주셨다가 우리에게서 일시 빼앗으신 것을 다시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 26-27)

 

26. "선한"것과 "용납할 수 있는"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관련없다

 

이제 우리는 결정의 자유를 특히 좌우하는 의지를 검토해야 한다.82 선택은 오성보다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83 우선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자연적인 본능에 의하여 선을 추구한다고 가르치며, 이 견해는 일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인간의 의지의 고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자유 선택의 능력은 이런 욕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구는 마음이 숙고한 결과가 아니고 자연적인 경향에서 생기는 것이다. 스콜라 학자들까지도 이성도 몇 가지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 비교할 때에만 자유 의지가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84 그들의 뜻은, 욕구의 대상이 선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또 선택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있는 이 선에 대한 자연적인 욕망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사실 욕망은 사람과 동물에 공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동물들도 잘 살기를 원하며, 그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훌륭한 영원 불멸의 본성, 곧 이성이 있으면서도, 인간은 자기에게 참으로 선한 것을 이성으로써 선택하고 열심히 추구하지도 않으며 또 이성을 가지고 신중히 고려하거나 지성을 경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물과 같이, 이성이나 숙고함이 없이 본성의 경향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의 충동으로 선을 구하게 되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의지의 자유와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대신에, 사람이 바른 이성으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알고 선택하며 또 선택한 다음에는 그것을 따른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여기서의 "욕구"는 의지의 충동이 아니라 본성의 경향을 의미한다. 둘째, "선"은 덕성이나 공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들이 잘 될 때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요컨대, 사람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충동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평안에 대한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은 의지의 자유를 증명하지 못한다. 금속과 돌에 그 본질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증명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의지가 다른 점에서 완전히 또 깊이 부패해서 악한 것밖에 생산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으면 상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어서 선한 욕망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27. 우리의 의지는 성령이 없다면 선을 추구할 수가 없다

 

우리가 효과적으로 결심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처음 은총에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영혼에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하는 능력이 있지만 너무도 미약해서 확고한 의도가 되거나 노력을 분발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오리겐과 다른 일부 고대 저술가들에게서 취한 이 견해가 스콜라 학자들에게 공통적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은 사람을 소위 "단순한 자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85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말도 사람을 그와 같이 묘사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 : 19,18).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여기서 추구하는 논법을 전적으로 곡해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논하고 있다(갈 5 : 17에서는 더욱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것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투쟁이다. 그러나 영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온다. 더욱이 바울이 중생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그가 자기 안에 아무 선도 거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육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첨부했기 때문이다(롬 7 : 18) 뜻은 무엇인가?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본래 내 안에서 선이 거하지 않는다. 나의 육에서는 아무 선한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변명이 따른다(롬 7 : 20). 이 변명은 영혼의 대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진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첨부된 결론은 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속의 법과 싸우는도다"(롬 7 : 22-23). 성령에 의해 중성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비록 한때는 이 구절을 사람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했었지만 후에 그 해석은 잘못이며 부적당하다고 해서 철회했다.86 그러나 만일 사람에게 은총과 별도로 선을 행하는 어떤 충동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충동이 아무리 적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고후 3 : 5) 사도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모세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의 계획은 악할 뿐이라고 선언하시는 주님께서는(창 8 : 21)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이 한 구절을 잘못 해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의견에 오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 : 34)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하자. 우리는 모드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전체가 죄의 세력하에 있다면, 분명 그것은 죄의 중요한 자리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가장 든든한 차꼬로 속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성령의 은총을 받기 전에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었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 : 13)라는 바울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준비"라고 말하는 생각을 일체 버리도록 하라.87 신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도록 자기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때가 있으며 다윗도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했지만, 이런 기도를 하겠다는 욕망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 점은 다윗의 말에서 추론할 수 있다.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기를 원할때에(시 51 : 10), 그는 물론 그 창조를 자기가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앞질러 모든 일을 하셨다. 이제 그대들은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 전에 행동을 취하라. 어떻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라. 그대들에게 있는 것은 모두 그에게서 온 것이며 모든 악은 그대들 자신이 근원이라고 고백하라." 그리고 조금 뒤에, "우리의 것은 죄 의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88

 

 

 

제 3 장

 

저주받을 짓은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한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 부패하여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완전히 재생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1. 육신이 인간의 전부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혼의 두 가지 능력과 그 영혼을 가진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사람을 설명하는 것을 보는 것인 가장 좋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요 3 : 6)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 전체를 묘사한다면(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의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 6-7). 그렇다면, 과연 육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뿐이며 하나님의 공정한 법에 찬동할 수 없고, 간단히 말하면 죽음의 열매 이외에는 아무것도 낳을 수 없으리만큼 사악한가? 인간의 본성에는 육체 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선한 것을 꺼낼 수 있는가를 당신은 시험해 보라. 혹자는 말할 것이다. 육이라는 말을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상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1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와 사도의 말씀에 의해 철저하게 반박된다. 사람은 "육"이므로(요 3 : 6)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요 3 : 3) 주님의 말씀이다. 신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 일부분만이 개조된다고 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새롭게 되어야만 다시 나는 것이다. 두 구절에 나타난 대조법이 이 점을 확인한다. 영과 육은 완전히 대립되어, 중간적인 것이 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영적인 아닌 것은 모두 "육적"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하지 않고는 결코 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육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모든 의혹을 일소해 준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간다"고(엡 4 : 22) 설명한 다음에 바울은,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엡 4 : 23)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법하고 사악한 욕망은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에도 있으며 그러므로 마음도 새롭게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조금 전에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그려 보였다. 이방인들은 모두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 4 : 17-18)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직 그의 바른 지혜와 공의에 합치하도록 개조하시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사도 바울의 이 말이 해당된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그가 곧 첨가한 비교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는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엡 4 : 20)고 경고한다. 실로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우리의 맹목 상태와 그 결과로 일어나는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길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고 결론하게 된다. 이사야도 그리스도의 나라를 약속할 때에,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사 60 : 2)라고 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시리라"고(사 60 : 19)예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위에만 비치고, 교회 밖에는 어두움과 무지한 맹목 상태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여기서의 그의 증거이다.2 나는 사람의 허무성에 관한 도처에 있는 말씀들, 특히 시편과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음의 다윗의 발언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허무와 함께 사람을 저울에 달면, 들려 허무보다 경하리로다"(시 62 : 9, 의역). 인간의 생각은 모두가 우매하고 경망되며 헛되고 패악하다고 조롱을 받으니 인간의 오성은 여지없이 깨뜨려진 것이다.

 

 

 

2. 인간의 타락에 대한 증거로서의 로마서 3장

 

마음에 대한 정죄에 대해서도 이에 못지 않게 엄격한 비난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 : 9). 나는 간결하게 하고자 한 구절만으로 만족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본성의 전모를 보여 주는 가장 맑은 거울과 같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교만을 없애고자 몇 가지 증언을 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참조, 시 14 : 1-3; 5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참조, 시 5 : 9)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참조, 시 140 : 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참조, 시 10 : 7)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참조, 사 59 : 7)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참조, 시 36 : 1; 롬 3 : 10-16,18). 사도 바울은 이런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으로 어떤 특수한 사람이 아닌 아담의 후손 전 인류를 공격하는 것이다. 또, 어느 한 시대의 부패한 것을 고발한다.3 그런데 이 구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단순히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큰 재난에 휩쓸렸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려 한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이 몰락하고 파멸한 것을 근거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 증언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바와 같은 것은 타락한 풍습이라는 결함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자체는 타락하고 버림받은 자이므로 주의 자비를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논법은(롬 3 : 23이하) 성립될 수가 없다. 나는 바울이 이 말씀들을 부적당하게 주워 모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하여 굳이 그 적합성을 증명하고 애쓰지는 않겠다. 도리어, 예언자들에게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독창적인 발언들이라고 가정했다. 우선 그는 사람에게 아무 의도, 즉 아무 성실이나 순결이 없다고 하였고, 다음에 총명이 없다고 하였다(롬 3 : 10-11).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하나님을 떠나 배반했다는 것은 총명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 결함이 있다. 바울은 덧부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떨어져 나가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이런 점들이 인류의 유전적인 천품이라면, 우리의 본성에서 어떤 선한 것을 찾는 것은 무익한 행위이다. 물론, 이런 사악한 모든 특징들이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인정은 하면서도, 나는 이 히드라(hydra, 희랍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 근절하기 어려운 큰 재앙을 뜻함)와 같은 화근이 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몰래 숨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육체내에서 병의 원인과 요소가 있을지라도, 비록 통증은 아직 격심하지 않더라도 그 병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런 몸을 건강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혼에 이렇듯 많은 죄악의 열병이 있는 이상 그 영혼을 건전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비교는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병든 신체에도 아직 조금의 생명력은 남아 있는데 이 죽음의 심연에 빠진 영혼은 여러 가지 죄악의 짐을 졌을 뿐 아니라 선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은총은 때때로 정화시킬 수 없는 곳을 제한한다

 

앞에서 이미 답변했던 것과 같은 문제가 이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자기의 천성에 따라 일생동안 덕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4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는 실수도 많았었지만, 나는 조금도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열렬한 성실은 그 천성에 어느 정도의 순결성이 있음을 증언했다. 이런 덕행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행위의 가치를 논할 때에도 자세히 말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도 필요하기때문에 여기서도 말하고자 한다. 이런 예들은 인간성이 완전하게 부패했다고 판단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경고하는 듯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천성에 고무되어 여러 가지 훌륭하고 뛰어난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일평생 아주 고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본성이 부패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움직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총은 본성을 정결하게 만들지는 않을지라도 내면적으로 억제하는 은총이다. 만일 주께서 각 사람의 마음이 정욕대로 날뛰는 것을 방임하신다면, 바울이 모든 인간성에 있다고 비난하는 악한 것이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참으로 있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시 14 : 3; 롬 3 : 12).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 자신은 "발이 피흘리는 데 빠른"(롬 3 : 15) 사람들 편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손이 도둑질과 살인으로 더럽혀진 자,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자(롬 3 : 13), 행위가 무익하고 썩었으며 살인적인 자,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 가장 깊은 마음속이 썩은 자, 눈이 술책만을 찾는 자, 욕설할 생각이 간절한 자, 한 마디로 모든 부분이 무한한 사악을 행할 태세인 자가(롬 3 : 10-18)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모든 영혼이 바울이 담대하게 단언하는 악행들에 얽매어 있다면, 주께서 인간의 정욕이 자체의 경향대로 방탕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정할 때의 결과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무리 미친 짐승도 이렇듯 제멋대로 날뛰지는 않을 것이며, 아무리 물살이 빠르고 급한 강이라도 이렇게까지는 광포한 홍수를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그 선택하신 사람들의 이런 병들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는 곧 설명하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만사를 유지하는 데 유익하다고 예견하시기 때문에 굴레를 씌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하신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추악상을 대체로 감추지 않으면서도 법이 무서워서 제한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생활 태도가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그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 수준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우수한 인물이 되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패악한 인간성을 제어하셔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으시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을 내면적으로 정결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재능은 정직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타락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카밀루스(Camillus)와 카틸리나(Catilina)를 동등시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인간성은 열심히 연마할 때에 전연 선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카밀루스의 예가 증명한다고 해야 하겠기 때문이다.5 참으로 카밀루스의 고결한 천품들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 자체로 볼 때에는 마땅히 칭찬할 만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천품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이 선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우리는 그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만일 자연인이 이런 뛰어난 도덕적 완전성을 가졌다면 확실히 인간성에는 덕을 함양할 능력이 없지 않다고 추론해야 하지 않겠는가?6 그러나 만일 그 마음이 사악하고 비뚤어져 전혀 정직성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또 카밀루스가 자연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마음이 역시 부패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외면상으로는 가장 고귀하고 성실한 사람도 언제든지 그 본성은 부패의 경향이 강한 것인즉, 그래도 우리는 이 점에서 인간성에 선을 행하는 힘이 얼마나 있다고 할 것인가? 덕성이 보이는 반면에 그 죄악의 인상도 깊은 사람을 유덕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의지가 자체의 패악성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바른 일을 추구하는 능력이 그 의지에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쉬운 해결책이 있으니, 즉, 이런 것은 인간성에 공통한 천품이 아니라 원래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과 정도로 내려 주시는 특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어떤 사람은 천성이 고귀하고 어떤 사람은 본성이 비열하다고 한다. 동시에, 양편을 인간성의 보편적 타락 상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특수 은총을7 베푸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삼상 10 : 6).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호머의 전설을 인용하여, 왕가의 자손은 날 때부터 특색이 있다고 말했다.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지배자가 될 운명인 사람들에게 영웅적 성품을 주시는 때가 많다. 역사상 유명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성품도 여기에서 왔다. 일반 서민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의 야심에 쫓긴다면 이 오점이 모든 덕성을 오염시켜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잃게 만들기 때문에, 세속 인간들의 탁월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열의가 없으면 정직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열의가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은(사 11 : 2) 실로 당연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며, 이 두려움은 "지혜의 근본"인 것이다(시 111 : 10). 허망한 외관으로 사람을 속이는 미덕들이 정치적 집회에서는 칭찬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겠지만, 하늘 심판대 앞에서는 전혀 의롭다함을 얻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5. 인간은 강제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짓는 것이다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나아갈 수 없으며, 더우기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이런 움직임은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시초가 되며, 성경은 이 전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돌린다. 그리하여 예례미야는, 만일 자기를 "돌이키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해 주시기를 기도했다(렘 31 : 18). 그러므로 예언자는 또한 같은 장에서 믿는 백성의 영적 구속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다"(11절)라고 하였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마귀의 멍에 아래에서 살고 있는 한, 죄인을 단단히 묶어 놓은 족쇄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는 남아 있어서, 가장 절실한 욕구로 죄를 향하여 기울어지며 달음질한다. 이것은, 사람이 이 필연성에 몸을 맡겼을 때 의지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으로, 선을 결심하면 이익이 되고 악을 결심하면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결심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악을 결심하는 것은 부패한 본성이 하는 일이며, 선을 결심하는 것은 은총이 하는 일이라고 베르나르두스가 가르친 것은9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끌려들거나 인도된다고 말하는 나를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에는 거룩한 분들이 한 말과 어긋나거나 어울리지 않는 점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과 강제를10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싫어한다. 가령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시지 않은가? 악마는 필연적으로 악하지 않은가?"하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신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신이신 것과 선하신 것은 똑같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의 타락으로 완전히 선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악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어떤 신성모독하는 자가,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성격을 보존하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므로 선하시다고 해서 찬양을 받으실 자격은 없다고 모독한다면,11 거기에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힘에 의한 충동을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무한히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선을 행하실 때의 하나님의 자유 의지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는 악마는 자기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필연적으로 범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의지 행위의 정도가 적다고 말할 것인가? 도처에서 어거스틴은 이 필연성에 대하여 말했는데,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가 그에 대하여 트집을 잡으면 반박했지만 어거스틴은 주저치 않고 단언했다. "사람은 자유로 죄에 빠졌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형벌인 부패는 자유를 필연성으로 변절시켰다.12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죄의 필연성인 속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구별의 요점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을 때에,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지 마지못해서 또는 강요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심정의 가장 간절한 욕구에 의한 것이지 힘에 의한 강제로 인한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정욕의 선동으로 한 것이지 외부로부터 강요를 받아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부패해서 움직이면 반드시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결국 인간은 죄를 짓는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13

베르나르두스의 글에도 어거스틴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다.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유롭다. 그러나 죄의 개입으로 인해 인간은 일종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의지가 해를 입은 것으로서, 그렇더라도 그의 선천적인 자유는 박탈되지 않았다. 자기의 의지고 하는 일은 또한 자유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죄로 인해 타락한 의지는 어떤 추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자체의 필연성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필연성은 의지의 필연성이면서도 의지를 변명하지 못하며, 의지는 그릇된 길로 끌려가면서도 필연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 필연성은 일종의 자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는 말한다. 우리는 다른 멍에의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발적인 노예 상태의 멍에를 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웠던 의지가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된 것이니, 노예인 점에서 우리는 가련하고 의지에 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그의 결론은, "그래서 영혼은 한층 더 이상하고 악한 방법으로 일종의 자발적이며 잘못된 자유로운 필연성에 지배되며, 동시에 노예이며 자유롭다. 필연성 때문에 노예이며 의지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더욱 이상하고도 한탄스러운 것은, 자유롭기 때문에 영혼은 유죄하고, 유죄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14 분명히 독자들은 내가 신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찬동을 얻어 어거스틴이 옛날에 가르쳤고, 거의 천 년 후에도 수도원들에서 보존되었던 생각에 나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롬바르드는 필연성과 강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의지의 전환은 내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6-14)

 

6.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은 구원의 일에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성의 부패를 시정하며 치료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에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므로, 그가 우리 안에 하시는 그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즉시 우리의 빈곤상이 밝혀질 것이다. 사도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빌 1 : 6) 했을 때에, 그 말은 "착한 일의 시작"이 회심의 맨 처음임을 의미하며 그 처음은 의지에 있다는 것을 뜻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선한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먼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의에 대한 사랑과 소원과 열의를 일으켜 주신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의를 향하도록 기울이고 다시 형성하여 인도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견인 불발의 정신을 확립시키심으로써 그 사업을 완성하신다. 혹자는 자체의 힘이 약한 의지를 돕기 위하여 주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다고 할지 모르나, 성령께서는 이런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의지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른 곳에서 언명하셨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겔 36 : 26-27).15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개조되며 갱신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느 누가 감히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의 도움이 강화해서 선을 택하려는 효과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고 말할 것인가?

만일 돌이 부드러워서 어느 정도 굽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사람의 마음도 그 불완전한 점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충하면서 바른 일에 복종하도록 개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전혀 선한 것을 짜낼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바른 일을 열망하게 만드실 때에 돌이 변하여 살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은 말살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의지는 말살된다. 그러나 의지가 의지로서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16 사람의 처음 본성에 속한 것은 사람이 전향할 때에 완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의지가 새로 창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의지가 지금부터 있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로 변한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같은 사도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고후 3 : 5)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약학 의지를 돕거나 부패한 의지를 바로 잡아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의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신다고 한다(빌 2 : 13). 이것을 볼 때에,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의지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깊은 뜻으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고전 12 : 6).

그는 여기서, 전우주적 지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많이 가진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적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한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다른 말로 같은 뜻을 표현한 일도 있다(고전 8 : 6). 여기서 그는 분명하게 새로운 창조를 찬양하며, 그 새로운 창조는 우리에게 공통된 본성에 속한 것을 모조리 쓸어버린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대조를 깨달아야 한다. 이 대조를 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이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엡 2 : 10). 모든 선한 일의 시초는 둘째 창조에서 오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째 창조를 얻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증명하려고 하였다(참조, 엡 2 : 5). 그러나 극히 작은 능력이라도 우리 자신에게서 왔다면 우리도 다소의 공로를 나누어 받겠지만, 바울은 우리의 공로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니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논한다. 이 말은 선행의 모든 부분은 그 시초의 움직임부터 하나님께 속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예언자도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이므로 하나님과 나눌 수 없다고 말한 후에, 곧 "우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첨부한다(시 100 : 3). 문맥으로 보아 이것은 그가 영적 생명의 시작점인 중생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이 분명한데, 이는 그가 이어서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시 100 : 3). 또 그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마땅한 찬양을 드릴 뿐 아니라 우리가 구원 사업에 참가했다는 생각을 명백히 일체 배제한다. 이것은 마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자랑할 점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7. 믿는 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는 먼저 은총을 통해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가 그 본성으로는 선을 버리며 오직 주의 권능에 의해 회심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의지는 일단 준비된 다음에는 그 회심에서 독자적인 구실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선행에는 은총이 먼저 앞서지만, 의지는 은총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종자로서 그 뒤를 따른다는 말이 있다.17 이 거룩한 분은 전혀 악한 의도가 없이 말한 것인데, 롬바르드가 전혀 엉뚱하게 왜곡을 하여 이러한 생각으로 변해버렸다.18 그러나 내가 이미 인용한 예언자의 말과 그 밖의 구절들에는 두 가지 점이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첫째로, 주께서 우리의 악한 의지를 교정, 아니 말소하신다. 둘째로, 주께서 친히 악한 의지를 주님께로부터 난 선한 의지로 바꿔 주신다. 은총이 의지를 앞지른다는 의미에서, 나는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총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글에 "의지가 없으면 은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은총이 없으면 의지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19 이것은 우리가 방금 바울의 말에서 본 바와 같이(빌 2 : 13), 은총이 의지까지도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의지를 은총의 수종자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선행에 있어서 은총에 다음가는 임무를 의지에 배당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원의 제일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 돌리는 펠라기우스의 극악한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뿐이었다.

당면 문제를 논의하는 데는, 은총이 모든 공로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어거스틴은 주장했다. 그리고 그 동안 은총의 영속적 효과라는 다른 문제는 도외시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이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논하였다.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먼저 활동하시며 원하게 된 사람의 결심이 헛되지 않도록 뒤를 따르신다고 어거스틴은 여러 번 말하지만, 모든 선행의 근본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발언들은 너무도 분명하므로 긴 논평이 필요하지 않다."사람들은 우리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인 무엇을 얻기 위해 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에 대한 논박(Against Pelaius and Caelestius)이라는 저서의 제 1 편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신(요 6 : 45)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인간의 선택 능력은 도움을 받아서 마땅히 할 일을 알 뿐만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또한 행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의 문자가 아닌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실 때에, 그 결과로 사람은 그 배운 것을 앎으로써 깨달을 뿐만 아니라, 원함으로써 구하며 행함으로써 얻는다."20

 

 

 

8.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점에 와 있으므로, 나는 성경의 아주 분명한 구절을 몇 개 들어서 문제를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성경을 일부러 왜곡시킨다고 하는 비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성경에도 얻었다고 주장하는 그 진리에는 저 거룩한 분, 어거스틴의 증언도 없지 않다는 것을 밝히겠다. 우리의 견해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을 일일이 다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므로,21 나는 아주 간결하게 정선된 구절들만을 들음으로써 여기저기에 있는 나머지 구절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겠다. 그러나 이 기회에 나의 견해가 어거스틴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도 결코 시기 상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 동성으로 그에게 최고의 권의를 인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물론 하나님만이 선의 근원이라고 믿는 데는 쉽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선으로 기울어진 의지는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원인은 사람 밖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는 바른 의지는 그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엡 1 : 4) 그 기쁘신 뜻에서 흘러 왔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에는 비슷한 이유가 하나 더 있으니, 곧 선을 결심하여 행하는 것은 믿음에서 유래하므로 우리는 신앙 자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포하므로, 전심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도록 태어난 우리가 선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이키는 방법으로 "굳은 마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겔 36 : 26) 두 원칙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를 의의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을 말살시켜야 하며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온전히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언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한 곳에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라"(렘 32 : 39) 하시고, 이어서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리라"(렘 32 : 40)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고 말씀하신다(겔 11 : 19). 그는 여기에서 우리의 회심은 새 영과 새 마음의 창조라고 확언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선하고 바른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뜻을 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개조되지 않은 우리의 의지에서는 선한 것이 생길 수 없으며, 개조된 후에도 우리의 의지가 선한 것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항상 같은 결론이 따르기 때문이다.

 

 

 

9. 성경에 나타난 기도는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모두가 하나님께로서만 온다는 것을 특히 보여주고 있다

 

같은 뜻을 우리는 거룩한 분들의 기도에서 읽을 수 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왕상 8 : 58)라고 솔로몬은 기도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완고한 데 대하여,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한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반역하는 것을 자랑한다고 밝혔다. 시편에서도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옵소서"(시 119 : 36) 똑같은 기도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완고한 불복종으로 이끌리는 마음의 악한 마음과 순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에 대한 시정이 대조되어 있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일시 은총의 인도를 잃었다고 느낀 다윗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을 때에(시 51 : 10), 이는 자기의 마음이 불결한 것으로 속속들이 가득 차 있으며 자기의 정신이 부패하고 비뚤어졌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그는 자기가 원하는 정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부름으로써 과거에 받은 정결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았던가? 만일 이 기도야말로 경건하고 거룩한 성품의 표징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22 그에 대한 반박은 어렵지 않다. 곧, 다윗이 이미 어느 정도 회개를 했지만 이는 자기가 경험한 가련한 파멸 상태와 이전의 상태를 비교한 것이라는 간단한 반박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사람의 처지에 자기를 두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중생의 은혜로 주시는 것을 모두 자기에게도 달라고 적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것 같은 자기가 다시 창조되며 사탄의 소유권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의 교만의 방종의 정도는 해괴 망측하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곧 모든 일을 쉬라는 것보다 더 준엄한 주님의 요구는 없다(출 20 : 8이하; 신 5 : 12이하).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을 그만 두고 하나님의 일에 그 정당한 자리를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한다. 우리의 몰지각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증언하신 은혜를 사악하게 묵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 : 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 : 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 : 4).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 5). 포도나무 가지를 줄기에서 끊어 수분을 빼앗으면 싹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체로는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의 본성에서 선을 행할 가능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는(요 15 : 5)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자립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며 최소한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조차 일체 배제하신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에 우리도 포도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다. 땅의 습기와 하늘의 이슬과 생명을 주는 태양열에서 포도나무는 성장에 필요한 힘을 얻는다. 그와 같이, 선행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 우리에게 돌아올 몫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지에는 이미 수액이 가득하고 결실하는 힘도 내포되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에 있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충당을 하기 때문에 땅이나 뿌리에서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주장은23 미련하고 쓸데없는 괴변이다. 그리스도의 뜻은 간단 명료하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서 떨어질 때 우리는 마르고 쓸모 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뜻으로 다른 데서는,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 : 13).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 : 13).

선행의 처음 부분는 결심이며 다음 부분은 그것을 수행하는 강한 노력이다. 그리고 두 부분은 모두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결심이나 수행에서 우리 자신의 공로를 주장한다면, 이는 우리가 주의 공적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우신다고 말한다던 우리에게 무엇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의지를 만드신다고 하면 의지에 있는 선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밖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결심까지도 우리의 무거운 육에 눌려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 곤란한 싸움을 이기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력이 공급되며 이것은 뜻을 이루는 데 충분하다고 사도는 덧붙여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다음 구절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고(고전 12 : 6)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24 이 말에는 영적 생활의 전과정이 포함되었다. 다윗도 주의 진리에 행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곧 이어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첨가한다(시 86 : 11, 119 : 33 참조). 이 말씀은, 심정이 바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산란하여 견인의 힘을 얻지 못하면 곧 사라지거나 타락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자기의 행보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싸울 힘도 주시기를 기도한다(시 119 : 133).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행을 시작하시며 또 완수하시는 것이다. 의지가 올바른 일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려고 분발하며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나, 끝으로 이 모든 일을 사람이 꾸준히 계속하며 최후까지 인내하게 하는 것도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10.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시는 방법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가르치며 믿어 온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다음에 거기에 대한 복종이나 항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지의 방향을 효율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라고25 크리소스톰이 자주 반복한 이 말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고 우리가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아직 순결한 상태가 남아 있었을 동안에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결심하시며 역사하실 수 없다면 자유 의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사람이 실제로 분명히 보여 주었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이렇게 적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도가 가르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선한 의지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듯이 성령으로 지시하며 다스리며 주관하며 지배하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새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약속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의 교훈대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겔 11 : 19-20, 36 : 27).

이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 : 45)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은 그 자체만으로 효력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주장을 한다.26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거절하시지 않는다고27(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오캄(Ockham)은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무차별적으로 생각하시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모두 그 사랑이 주어진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랑을 구하게 되는 것은 하늘 은총의 입김이 불어 주신 사람들뿐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찬양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인도로 움직이며 주관된다는 것은 분명히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다. 이런 이유로, 결심한다는 행동의 일부는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거스틴이 바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또 거저 택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를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본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지만 은총은 그렇지 않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사람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주신다고 하는 견해를 어거스틴은 재치가 있으면서도 깨어지기 쉬운, 반짝이지만 허망한 유리와 같은 궤변이라고 불렀다. 다른 곳에서 그는 말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왔습니까? 믿음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길을 발견한 것은 자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그 바른 길에서 벗어나 멸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 선택으로, 자유 의사로 여기에 왔다고 말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자만하십니까? 이것도 여러분이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고 하십니다.28 또 우리는 요한의 말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확고 부동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 한다(요일 3 : 9). 여기서는 굳은 지조가 효과적으로 견인지구(坚忍持久)의 의지를 낳는다고 단정하므로, 궤변가들이 몽상하는 중간적인 움직임-곧, 사람이 자유로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하는 중간적인 움직임-이 분명히 배제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1. 궁극적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보충이 아니다

 

세상이 극악한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인내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음 은총을 받아들이는 동안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인내심이 분배된다고 하는 이 오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멸시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이런 견해를 일소할 때에 처음의 견해 또한 자연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처음 은총을 감사하며 그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대한 보상으로 선물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 외에도, 그 은총은 혼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협력할 뿐이라고 첨부하기 때문이다.29

처음 논점에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 종들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기쁘고 좋은 것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일을 더 큰 은총을 더하여 계속할 만한 것으로 보셔서, 매일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쌓아 올려 그들을 풍성하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무릇 있는 자는 받게 되리라"(마 25 : 29; 눅 19 : 26)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마 25 : 21,23; 눅 19 : 17)는 말씀이 그와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로, 처음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한 데 대한 상급으로 나중의 은총들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효과를 나타내게 만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급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즉, 먼저 받은 은총을 선용할수록 뒤에 따르는 은총이 더욱 많다는 이 축복이다. 그러나 이 선용하는 것 역시 주님께로부터 오는 일이며, 상급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은혜에서 오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하는 은총과 협력하는 은총이라는 케케묵은 구별을 그릇되고 부당하게 악용한다. 물론 어거스틴도 이러한 구별을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역사로 시작하신 일을 협력으로 완성하신다고 아주 적절한 정의로 완화시켰다. 그것은 같은 은총이지만 그 효과의 모습이 다른 데 따라 이름이 달라졌다.30

따라서 그는 은총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 쌍방의 행동이 일일이 서로 합치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은총이 점점 더하여진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사람의 선한 의지보다 하나님의 많은 은사가 먼저 있고 사람의 선한 의지도 그 은사의 하나라고 말한 것은 이 문제와 관련돼 있다. 따라서 의지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전연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바울도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다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빌 : 13) 이 두 가지 일을 하신다고 첨부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거저 주신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처음 은총을 받은 후에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그 뒤에 오는 은총과 협력한다고 말한다.31 이에 대해 내가 대답을 한다면 그들이 주님의 권능으로 일단 의에 복종하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 전진하며 은총이 하는 일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 은총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준비 태세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곳에서나 시종 일관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처음에 복종하는 심성을 만드시고, 다음에 그것을 함양하며 그 지조를 더욱 강화시켜 인내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사람에게는 동료로서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할 고유의 힘이 있다는 뜻이라면 그들은 가장 가련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12. 인간은 단 하나의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

 

무지한 그들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 10)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자기들의 뜻에 맞도록 곡해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이 발언을, 자신을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면 너무 교만하게 보일 것 같았기에 바울은 그 공로를 하나님의 은총에 돌림으로써 자기의 발언을 수정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수정 내용을 보면, 자기를 은총 안에서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라고 불렀다는 것이었다. 다른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이 이 어렵지 않은 문제에 많이 걸려 넘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도는 주의 은총이 자기와 함께 수고해서 자기를 동역자로 만들었다고 쓴 것이 아니라. 수고한 공로를 전부 은총에만 돌리는 의미에서 이 수정을 한 것이다.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모호한 표현 때문에 그들은 속았고, 특히 라틴어 번역이 졸렬해서 헬라어 관사의 표현력을 잃어버렸다,32 만일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는 은총이 자기의 동역자였다고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있는 은총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 점을 분명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의 선한 의지가 하나님의 은사보다 앞서는 때가 많지마는 모든 은사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앞서는 그 의지 자체도 그런 은사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시 59 : 10, 참조, 시 58:11),33 "그의 인자하심이 나를 정녕 따르리니"(시 23 : 6)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은총이 그를 앞지르며, 원하는 사람의 소원이 헛되지 않도록 그의 뒤를 따른다. 베르나르두스도 어거스틴과 같은 생각으로 교회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제가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저를 이끌어 원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걸음이 느린 저를 이끌어 달리게 만드소서"34

 

 

 

13. 어거스틴은 또한 인간의 의지가 독자적으로 활동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대의 펠라기우스파 즉, 소르본느의 궤변가들이 고대인 전체가 우리를 반대한다고 하는35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어거스틴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겠다. 우리에게 대한 이런 비난은 그들의 조상 펠라기우스를 모방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거스틴 자신도 펠라기우스 때문에 같은 처지에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간단히 언급하려는 것을 그는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글에서 더욱 자세히 논술한다. "만일 아담이 선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그렇게 행할 은총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고 소원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처음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였으나, 우리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더 큰 자유다." 롬바르드는 이것을 사람이 영원불멸을 얻은 후에 있을 완전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말한 것이라고 잘못된 해석을 했지만, 어거스틴 자신은 이런 생각을 막기 위해서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의혹을 제거해 준다. "확실히 성도들의 의지는 성령의 큰 감동을 받아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결심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그들은 결심한다. 그런데 그들이 심히 약한 가운데서도 의기 충천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고후 12 : 9). 만일 그렇게 심히 약한 그들의 의지를 그 자체의 힘에 맡겨서, 만일 결심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능력을 얻으라고 버려두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심하게 되도록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의 약한 의지는 그 많은 시험에 굴복하고, 따라서 뜻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약한 의지에 도움을 주시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동요하거나 분리됨 없이 전진하게 하시며, 따라서 아무리 약할지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향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반응하는가를 자세히 논한다. 참으로 그는 주께서 사람들 자신의 의지를 써서 그들을 이끄시지만, 그들의 의지는 이미 하나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36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특별히 원하는 증언을 어거스틴으로부터 들어보도록 하자.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받거나 거절하거나 자유로 선택하도록 은총을 제시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그 선택과 결심을 다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이 은총이며, 그래서 거기에 따르는 선행은 은총의 결과와 결실이다. 그리고 은총에 복종하는 의지는 은총이 만들어낸 의지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우리의 모든 선행을 실현하는 것은 은총뿐이다"라고 말했다.37

 

 

 

14.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시킨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은총은 의지를 빼앗지 않고,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 선한 의지를 돕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끌려가듯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감동을 받아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이다. 은총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리고 거저 주신다는 뜻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보니파티우스에게 써 보냈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은총을 주신 사람들에게는 행위의 가치에 따라서나 의지의 가치에 따라서 주신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은총을 주시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때문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같은 편지에서, 사람이 처음 은총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그 공로에 대해서 다시 은총을 더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는 강경히 논박한다. 그는 우리의 행동은 일일이 은총이 필요하며, 은총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며, 그래야만 은총이 참으로 은총이 된다는 것을 펠라기우스가 인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책 제8장에서 한 말보다 더 간단히는 요약할 수 없다. 거기서 어거스틴은 우선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같은 그 은총에 의해서 기쁨을 받으면 사람의 의지는 지속하게 되며, 불굴외 용기로 강화되며, 은총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지만, 은총에게 버림을 받으며 즉시 패망한다. 주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의해서 선으로 전향하며, 일단 전향하면 끝까지 선에 머무른다. 사람의 의지가 선을 향하게 되는 것과 방향이 정해진 후에 선에 머무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며, 사람의 어떤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자유 의지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즉,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으며,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38

 

 

 

제 4 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1

 

(사탄의 통제를 받는 인간 : 그러나 성경은 타락한 자들의 마음을 냉담하게 만드는데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하심을 보여준다. 1-5)

 

1. 인간은 악마의 세력 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

 

내가 실수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이 죄의 멍에를 메고 노예가 되어 자기의 본성만으로는 선을 사모하여 결심하거나 선을 추구하여 노력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증명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강제와 필연성의 차이를 지적했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나 역시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2 그러나 인간이 악마의 종으로 매여 살 때에는, 자기의 뜻보다 마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행동에서 마귀와 사람이 각각 담당하는 몫을 확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악한 행위에 하나님의 행동이 개입한다고 성경이 알리므로, 악행의 일부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어디선가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기수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 비교하고, 하나님과 마귀를 기수와 비교했다. "만일 하나님이 말을 타신다면 온화하고 숙련된 기수시기 때문에 말을 올바르게 인도하신다. 느릴 때에 박차를 가하시며, 너무 빠르면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거칠 거나 너무 광태를 부리면 억제하시며, 도중에서 안가겠다고 앙탈할 때에는 억눌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에 올라앉게 되면, 모든 미련하고 방자한 기수와 같이, 말을 난폭하게 몰아 길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도랑에 처박으며, 벼랑에서 뒹굴게 하며, 찌르고 괴롭혀 결국 고집을 부리며 난폭하게 만든다."3 더 좋은 비유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만족하겠다. 자연인의 의지는 악마의 세력에 예속되어 그 선동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노예들이 싫으면서도 복종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는 싫어서 반항하면서도 악마의 명령을 듣도록 강요를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 있는 의지가 필연적으로 언제든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복종한다는 뜻이다. 주께서 자기의 영의 인도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을 주님은 공정한 심판으로 사탄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 4 : 4), 그들이 복음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멸망할 운명이 된다고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이 세상 신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한다"(엡 2 : 2)고도 한다. 불경건한 자들의 눈이 먼 것과 이로써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사탄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탄 왕국의 기초 즉, 죄의 토대가 된다.

 

 

 

2. 동일한 사건 안에서 하나님, 사탄, 인간이 모두 작용한다

 

이런 일들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훨씬 다르다. 이 점을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갈대아 사람들이 저 거룩한 사람 욥에게 가한 큰 재난을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들은 그의 목자들을 죽이고 양떼를 약탈해 갔다(욥 1 : 17). 이제 그들의 행동이 악했다는 것은 더할 나 위 없이 분명하며, 모든 일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욥 1 : 12) 이 사건에서 사탄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욥 자신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갈대아 사람들이 약탈한 것은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이라고 말한다(욥 1 : 21). 우리는 어떻게 동일한 이 일을, 사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같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선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다음에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해결은 쉽다.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은 욥을 절망상태에 몰아 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 목적이 아주 다른 것이 벌써 행동의 특색을 뚜렸이 나타낸다. 방법도 거기 못지 않게 다르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을 사탄이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시며, 심부름꾼으로서 갈대아 사람들을 택하여 사탄의 지배하에 넘겨주신다. 사탄은 독을 묻힌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그 악행을 실천하게 만든다. 그들은 미친 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온 지체를 죄로 물들이며 더럽힌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사람들 위에 사탄이 지배력을, 즉 악한 지배력을 행사할 때에, 사탄이 그들 속에서 역사 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나님도 독자적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인 사탄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시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만물을 유지하며 그 모든 활동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에 대해서는4 언급하지 않고, 다만 모든 개개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그 특수한 행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

 

 

 

3. "냉담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부들은 이 사실을 단순하게 인정하는 것을 신중히 회피하는 때가 있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불경한 말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신중한 태도를 나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동시에 우리가 단순히 성경의 가르침을 지킨다면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까지도 저 미신을 버리지 못한 때가 있었다. 예컨대, 마음이 강퍅하게 되며 눈이 어둡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예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5 그러나 성경의 많은 구절은 이런 궤변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 이상의 것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 자신도 율리아 누스(Against Julian)를 논박함이라는 글의 제 5 편에서, 죄는 하나님의 허락과 용인에 의할 뿐 아니라, 또한 전에 지은 죄에 대한 일종의 벌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아주 길게 논증한다.6 마찬가지로, 허용에 대해서 그들이 전하는 말은 너무도 약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강퍅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 돌아오게 하고 따라오게 하고 재촉케 하신다고 자주 말한다(사 6 : 10). 이 점을 나는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가르쳤다.7 우리가 예지나 허용으로 도피하는 동안은, 이 역사의 성격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광명이 제거되면 암흑과 맹목 상태만이 남는다. 그의 영이 제거되면 우리의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진다. 그의 인도가 없어지면 우리의 마음은 비틀리고 구부러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며 복종하며 바르게 따르는 능력을 빼앗으실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눈이 멀며 마음이 굳고 비뚤게 만드신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방법은 이 말들이 원래 가진 뜻에 훨씬 더 가깝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의 실시자인 사탄을 시켜 자기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뜻대로 사람의 목적을 정하며 의지를 격발하며 노격을 강화하신다. 그래서 시혼왕이 이스라엘 백성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만드시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모세는 말하고, 즉시 붙여서 "그를 우리 손에 붙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이었다고 했다(신 2 : 3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혼 왕이 멸망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심으로써 그의 멸망을 준비하신 것이다.

 

 

 

4. 성경에서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실례

 

첫째 방법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 즉,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욥 12 : 20 ; 참고, 겔 7 : 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욥 12 : 24 ; 참고, 시 107 : 40). 마찬가지로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 63 : 17).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 하는 것보다, 그들을 버리심으로써 그들을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만드시는가 하는 것을 알린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범위를 넘은 증언도 있다. 예컨대,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드시는데 대해서,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출 7 : 3-4)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다(출 4 : 21). 그 후에 주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하며(출 10 : 1) "강퍅케" 만드셨다고 한다(출 10 : 20,27, 11 : 10, 14 : 8). 주께서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지 않은 것이 곧 굳게 만드신 것인가?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주께서는 바로를 사탄에게 넘겨 주셔서 그 강퍅한 마음이 아주 굳어져 버리게 하신 것이다. 앞에서 "내가 그의 마음을 억제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뜻이다(출 4 : 2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후에, 가는 곳마다 그곳 주민들이 그들을 원수로 대했다. 무엇이 그들을 선동했는가? 참으로 모세는 그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 것은 주시라고 백성에게 설명했다(신 2 : 30). 확실히 예언자도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그가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라고 한다(시 105 : 25).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게 되어서 범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을 "완강하게 만드셨다", 또 "변하셨다"고 한즉, 이것은 계획적으로 그들을 굽혀서 그런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백성의 죄를 벌하려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버림받은 자들을 통해서 실행하셨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은 도구에 불과했고, 실행하는 권한은 주님께 있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휘파람으로 불러(사 5 : 26, 7 : 18), 이스라엘 백성을 잡는 올무와(겔 12 : 13, 17 : 20) 부수는 방망이로(렘 50 : 28) 쓰시겠다고 경고하신다. 또 산헤립을 도끼라고 부르며(사 10 : 15), 그 도끼를 친히 휘두르며 겨누어 그들을 찍으신다고 하시니, 자기는 수수방관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선언하시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은 이 문제의 뜻을 잘 밝혔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이 죄 가운데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암흑을 나누시기 때문이다."8

 

 

 

5. 사탄도 역시 하나님은 섬겨야 한다

 

주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섭리로 여러 가지 목적에 배정하실 때마다 사탄이 개입해서 그들을 선동한다. 이 점을 증명하는 데는 한 구절만 인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무엘서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했다, 또는 사울을 떠났다는 말씀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삼상 16 : 14, 18 : 10, 19 : 9). 이것을 성령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불결한 영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영이 스스로 자신의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응해서 하나님의 한 도구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도 첨부해야겠다. 그는 오류와 유혹이 역사하는 것은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거짓을 믿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살후 2 : 10-11). 그러나 같은 행위에서도 주께서 하시는 일과 사탄과 악한 자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언제든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은 이 악한 도구들을 손에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셔서 자기의 공의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악한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그 부패한 본성이 생각한 악한 일을 실현한다. 하나님의 존엄성을 변호하거나, 악한 자들의 변명을 배제하는 데 관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다른 점들은 섭리에 관한 장에서 이미 논했다.9 여기서는 다만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사탄이 어떻게 지배하며, 사탄과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주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를 간단히 알리려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외형적인 일에서 인간의 의지를 능가한다. 6-8)

 

6.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없다

 

우리가 전에 언급한 일이 있는 문제지만,10 그 자체로서는 의롭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영적 생활보다 물적 생활을 지향한 행위에 있어서 인간에게 어떤 자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에서 인간에게 자유 선택을 인정해 주었다.11 아마 자기들이 인정한 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다기보다, 중대하지 않은 문제를 논하기 싫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중심점만을 고수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선택하도록 자극을 받을 때, 의지가 그 쪽으로 기울어질 때, 또는 반대로 유해한 일을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피할 때에는, 주의 특별한 은총이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본다면, 하나님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시는 대로 사태가 벌어질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도 같은 목표를 향하여 기울어진다. 외부에 나타난 일들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 보면, 사태가 이런 정도로 사람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일에서도 주께서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하신다고 선포하는 많은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결심 자체도 하나님의 특별한 자극에 좌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가장 귀중한 그릇들을 모두 빌려주었는데(출 11 : 2-3), 누가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기울게 만들었는가? 결코 자진해서는 그렇게 기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주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이교도라고 생각한 자기의 아들 요셉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창 43 : 14)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온 교회가 시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셨을 때에 잔인한 민족들의 마음을 길들여 인자하게 만드셨다(참조, 시 106 : 46). 그러나 사울이 격노해서 전쟁 준비를 했을 때에, 그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시킨 것이라고 한다(삼상 11 : 6). 아히도벨의 모략은 신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압살롬의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삼하 17 : 14) 르호보암이 소년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왕상 12 : 10,14) 전에는 용맹하던 민족들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떨게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기생 라합까지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다(수 2 : 9 이하). 또 이스라엘 백성을 공포심으로 낙심하게 만든 것은 율법서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아니고 누구였는가?(신 28 : 65)

 

 

 

7.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배는 우리의 자유를 압도하신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특수한 예이므로, 이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할 것이다.12 그러나 이 예들은 내가 주장한 것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길을 트고자 하실 때마다 외면적인 일에서까지도 사람들의 의지를 굽히며 돌리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자유를 지배하지 못할이만큼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고무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가장 단순한 일을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며 쉬운 일에서조차 용기가 나지 않는 것에 반해 가장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지혜가 생각나며, 결정적인 중대 문제에서 모든 어려움을 배제할 용기가 생긴다.

이런 의미로 나는 솔로몬의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고 한 말을 이해한다(잠 20 : 12). 그는 귀와 눈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신 그 기능에 대해서13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글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한 것은(잠 21 : 1) 유 전체를(그 일부인) 한 가지 종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의지가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다면, 이 특권은 누구보다도 왕의 의지에 속할 것이다. 왕의 의지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어느 정도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왕의 의지가 하나님의 손으로 굽혀진다면, 우리들의 의지도 그 처지를 면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성경을 착실히 연구하면, 하나님이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만드시고 선하게 된 의지를 선한 행동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므로, 선한 의지들은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존하는 의지들까지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지들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신다. 혹은 은혜를, 혹은 벌을 주시려고-그리고 참으로 가장 비밀한, 그러나 가장 공정한 판단에 의해서-기울이시는 것이다."14

 

 

 

8. "자유 의지"의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여기서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점이 있다. 사람의 자유 선택의 능력은 사태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미련한 생각을 한다. 가장 높은 군주들도 만사가 원하는 대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은 사람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증명한 줄로 생각한다. 여하간,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 능력은 사람의 내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외면적인 성공으로 측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는, 외부의 방해가 있더라도 사람이 결심한 일을 모두 실현하며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점에서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경향이 자유로우냐고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이 두 가지가 다 충분히 자유롭다면, 못이 두루 박힌 포도주통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Atilius Regulus)에게도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가이사 아구스도(눅 2 : 1)에 못지 않은 자유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제 4 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1

 

(사탄의 통제를 받는 인간 : 그러나 성경은 타락한 자들의 마음을 냉담하게 만드는데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하심을 보여준다. 1-5)

 

1. 인간은 악마의 세력 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

 

내가 실수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이 죄의 멍에를 메고 노예가 되어 자기의 본성만으로는 선을 사모하여 결심하거나 선을 추구하여 노력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증명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강제와 필연성의 차이를 지적했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나 역시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2 그러나 인간이 악마의 종으로 매여 살 때에는, 자기의 뜻보다 마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행동에서 마귀와 사람이 각각 담당하는 몫을 확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악한 행위에 하나님의 행동이 개입한다고 성경이 알리므로, 악행의 일부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어디선가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기수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 비교하고, 하나님과 마귀를 기수와 비교했다. "만일 하나님이 말을 타신다면 온화하고 숙련된 기수시기 때문에 말을 올바르게 인도하신다. 느릴 때에 박차를 가하시며, 너무 빠르면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거칠 거나 너무 광태를 부리면 억제하시며, 도중에서 안가겠다고 앙탈할 때에는 억눌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에 올라앉게 되면, 모든 미련하고 방자한 기수와 같이, 말을 난폭하게 몰아 길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도랑에 처박으며, 벼랑에서 뒹굴게 하며, 찌르고 괴롭혀 결국 고집을 부리며 난폭하게 만든다."3 더 좋은 비유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만족하겠다. 자연인의 의지는 악마의 세력에 예속되어 그 선동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노예들이 싫으면서도 복종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는 싫어서 반항하면서도 악마의 명령을 듣도록 강요를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 있는 의지가 필연적으로 언제든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복종한다는 뜻이다. 주께서 자기의 영의 인도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을 주님은 공정한 심판으로 사탄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 4 : 4), 그들이 복음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멸망할 운명이 된다고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이 세상 신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한다"(엡 2 : 2)고도 한다. 불경건한 자들의 눈이 먼 것과 이로써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사탄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탄 왕국의 기초 즉, 죄의 토대가 된다.

 

 

 

2. 동일한 사건 안에서 하나님, 사탄, 인간이 모두 작용한다

 

이런 일들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훨씬 다르다. 이 점을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갈대아 사람들이 저 거룩한 사람 욥에게 가한 큰 재난을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들은 그의 목자들을 죽이고 양떼를 약탈해 갔다(욥 1 : 17). 이제 그들의 행동이 악했다는 것은 더할 나 위 없이 분명하며, 모든 일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욥 1 : 12) 이 사건에서 사탄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욥 자신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갈대아 사람들이 약탈한 것은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이라고 말한다(욥 1 : 21). 우리는 어떻게 동일한 이 일을, 사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같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선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다음에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해결은 쉽다.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은 욥을 절망상태에 몰아 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 목적이 아주 다른 것이 벌써 행동의 특색을 뚜렸이 나타낸다. 방법도 거기 못지 않게 다르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을 사탄이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시며, 심부름꾼으로서 갈대아 사람들을 택하여 사탄의 지배하에 넘겨주신다. 사탄은 독을 묻힌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그 악행을 실천하게 만든다. 그들은 미친 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온 지체를 죄로 물들이며 더럽힌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사람들 위에 사탄이 지배력을, 즉 악한 지배력을 행사할 때에, 사탄이 그들 속에서 역사 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나님도 독자적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인 사탄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시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만물을 유지하며 그 모든 활동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에 대해서는4 언급하지 않고, 다만 모든 개개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그 특수한 행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

 

 

 

3. "냉담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부들은 이 사실을 단순하게 인정하는 것을 신중히 회피하는 때가 있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불경한 말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신중한 태도를 나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동시에 우리가 단순히 성경의 가르침을 지킨다면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까지도 저 미신을 버리지 못한 때가 있었다. 예컨대, 마음이 강퍅하게 되며 눈이 어둡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예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5 그러나 성경의 많은 구절은 이런 궤변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 이상의 것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 자신도 율리아 누스(Against Julian)를 논박함이라는 글의 제 5 편에서, 죄는 하나님의 허락과 용인에 의할 뿐 아니라, 또한 전에 지은 죄에 대한 일종의 벌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아주 길게 논증한다.6 마찬가지로, 허용에 대해서 그들이 전하는 말은 너무도 약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강퍅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 돌아오게 하고 따라오게 하고 재촉케 하신다고 자주 말한다(사 6 : 10). 이 점을 나는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가르쳤다.7 우리가 예지나 허용으로 도피하는 동안은, 이 역사의 성격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광명이 제거되면 암흑과 맹목 상태만이 남는다. 그의 영이 제거되면 우리의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진다. 그의 인도가 없어지면 우리의 마음은 비틀리고 구부러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며 복종하며 바르게 따르는 능력을 빼앗으실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눈이 멀며 마음이 굳고 비뚤게 만드신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방법은 이 말들이 원래 가진 뜻에 훨씬 더 가깝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의 실시자인 사탄을 시켜 자기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뜻대로 사람의 목적을 정하며 의지를 격발하며 노격을 강화하신다. 그래서 시혼왕이 이스라엘 백성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만드시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모세는 말하고, 즉시 붙여서 "그를 우리 손에 붙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이었다고 했다(신 2 : 3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혼 왕이 멸망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심으로써 그의 멸망을 준비하신 것이다.

 

 

 

4. 성경에서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실례

 

첫째 방법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 즉,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욥 12 : 20 ; 참고, 겔 7 : 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욥 12 : 24 ; 참고, 시 107 : 40). 마찬가지로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 63 : 17).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 하는 것보다, 그들을 버리심으로써 그들을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만드시는가 하는 것을 알린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범위를 넘은 증언도 있다. 예컨대,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드시는데 대해서,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출 7 : 3-4)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다(출 4 : 21). 그 후에 주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하며(출 10 : 1) "강퍅케" 만드셨다고 한다(출 10 : 20,27, 11 : 10, 14 : 8). 주께서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지 않은 것이 곧 굳게 만드신 것인가?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주께서는 바로를 사탄에게 넘겨 주셔서 그 강퍅한 마음이 아주 굳어져 버리게 하신 것이다. 앞에서 "내가 그의 마음을 억제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뜻이다(출 4 : 2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후에, 가는 곳마다 그곳 주민들이 그들을 원수로 대했다. 무엇이 그들을 선동했는가? 참으로 모세는 그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 것은 주시라고 백성에게 설명했다(신 2 : 30). 확실히 예언자도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그가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라고 한다(시 105 : 25).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게 되어서 범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을 "완강하게 만드셨다", 또 "변하셨다"고 한즉, 이것은 계획적으로 그들을 굽혀서 그런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백성의 죄를 벌하려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버림받은 자들을 통해서 실행하셨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은 도구에 불과했고, 실행하는 권한은 주님께 있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휘파람으로 불러(사 5 : 26, 7 : 18), 이스라엘 백성을 잡는 올무와(겔 12 : 13, 17 : 20) 부수는 방망이로(렘 50 : 28) 쓰시겠다고 경고하신다. 또 산헤립을 도끼라고 부르며(사 10 : 15), 그 도끼를 친히 휘두르며 겨누어 그들을 찍으신다고 하시니, 자기는 수수방관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선언하시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은 이 문제의 뜻을 잘 밝혔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이 죄 가운데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암흑을 나누시기 때문이다."8

 

 

 

5. 사탄도 역시 하나님은 섬겨야 한다

 

주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섭리로 여러 가지 목적에 배정하실 때마다 사탄이 개입해서 그들을 선동한다. 이 점을 증명하는 데는 한 구절만 인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무엘서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했다, 또는 사울을 떠났다는 말씀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삼상 16 : 14, 18 : 10, 19 : 9). 이것을 성령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불결한 영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영이 스스로 자신의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응해서 하나님의 한 도구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도 첨부해야겠다. 그는 오류와 유혹이 역사하는 것은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거짓을 믿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살후 2 : 10-11). 그러나 같은 행위에서도 주께서 하시는 일과 사탄과 악한 자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언제든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은 이 악한 도구들을 손에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셔서 자기의 공의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악한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그 부패한 본성이 생각한 악한 일을 실현한다. 하나님의 존엄성을 변호하거나, 악한 자들의 변명을 배제하는 데 관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다른 점들은 섭리에 관한 장에서 이미 논했다.9 여기서는 다만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사탄이 어떻게 지배하며, 사탄과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주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를 간단히 알리려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외형적인 일에서 인간의 의지를 능가한다. 6-8)

 

6.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없다

 

우리가 전에 언급한 일이 있는 문제지만,10 그 자체로서는 의롭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영적 생활보다 물적 생활을 지향한 행위에 있어서 인간에게 어떤 자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에서 인간에게 자유 선택을 인정해 주었다.11 아마 자기들이 인정한 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다기보다, 중대하지 않은 문제를 논하기 싫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중심점만을 고수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선택하도록 자극을 받을 때, 의지가 그 쪽으로 기울어질 때, 또는 반대로 유해한 일을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피할 때에는, 주의 특별한 은총이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본다면, 하나님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시는 대로 사태가 벌어질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도 같은 목표를 향하여 기울어진다. 외부에 나타난 일들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 보면, 사태가 이런 정도로 사람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일에서도 주께서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하신다고 선포하는 많은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결심 자체도 하나님의 특별한 자극에 좌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가장 귀중한 그릇들을 모두 빌려주었는데(출 11 : 2-3), 누가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기울게 만들었는가? 결코 자진해서는 그렇게 기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주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이교도라고 생각한 자기의 아들 요셉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창 43 : 14)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온 교회가 시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셨을 때에 잔인한 민족들의 마음을 길들여 인자하게 만드셨다(참조, 시 106 : 46). 그러나 사울이 격노해서 전쟁 준비를 했을 때에, 그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시킨 것이라고 한다(삼상 11 : 6). 아히도벨의 모략은 신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압살롬의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삼하 17 : 14) 르호보암이 소년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왕상 12 : 10,14) 전에는 용맹하던 민족들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떨게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기생 라합까지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다(수 2 : 9 이하). 또 이스라엘 백성을 공포심으로 낙심하게 만든 것은 율법서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아니고 누구였는가?(신 28 : 65)

 

 

 

7.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배는 우리의 자유를 압도하신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특수한 예이므로, 이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할 것이다.12 그러나 이 예들은 내가 주장한 것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길을 트고자 하실 때마다 외면적인 일에서까지도 사람들의 의지를 굽히며 돌리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자유를 지배하지 못할이만큼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고무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가장 단순한 일을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며 쉬운 일에서조차 용기가 나지 않는 것에 반해 가장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지혜가 생각나며, 결정적인 중대 문제에서 모든 어려움을 배제할 용기가 생긴다.

이런 의미로 나는 솔로몬의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고 한 말을 이해한다(잠 20 : 12). 그는 귀와 눈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신 그 기능에 대해서13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글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한 것은(잠 21 : 1) 유 전체를(그 일부인) 한 가지 종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의지가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다면, 이 특권은 누구보다도 왕의 의지에 속할 것이다. 왕의 의지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어느 정도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왕의 의지가 하나님의 손으로 굽혀진다면, 우리들의 의지도 그 처지를 면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성경을 착실히 연구하면, 하나님이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만드시고 선하게 된 의지를 선한 행동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므로, 선한 의지들은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존하는 의지들까지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지들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신다. 혹은 은혜를, 혹은 벌을 주시려고-그리고 참으로 가장 비밀한, 그러나 가장 공정한 판단에 의해서-기울이시는 것이다."14

 

 

 

8. "자유 의지"의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여기서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점이 있다. 사람의 자유 선택의 능력은 사태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미련한 생각을 한다. 가장 높은 군주들도 만사가 원하는 대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은 사람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증명한 줄로 생각한다. 여하간,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 능력은 사람의 내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외면적인 성공으로 측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는, 외부의 방해가 있더라도 사람이 결심한 일을 모두 실현하며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점에서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경향이 자유로우냐고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이 두 가지가 다 충분히 자유롭다면, 못이 두루 박힌 포도주통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Atilius Regulus)에게도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가이사 아구스도(눅 2 : 1)에 못지 않은 자유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제 5 장

 

자유의지를 변론하고자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반대에 대한 논박

 

(상식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1-5)

 

1. 첫째 주장 :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발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

 

그릇된 자유 개념에서 출발한 자들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없어지게 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견해를 공격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훼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의 입장은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다음에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공격한다. 우리는 그들의 공격 무기를 차례로 파괴하겠다. 만일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죄는 이제 죄가 아니며, 만일 자발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 있다고1 그들은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도 이 무기로 어거스틴을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의 권위를 빌어서 그들의 무기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고, 먼저 문제 자체를 충분히 처리하겠다. 그러므로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죄라고 볼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나는 부정한다. 반대로, 죄는 의지적이므로 피할 수 있다는 그들의 추리도 부정한다. 만일 자기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쟁론하며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대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이 대답을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2 즉,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으며 악한 일 밖에 결심할 수 없는 것은 창조에서 오지 않고, 인간성의 부패에서 왔다는 것이다. 악인들이 서슴치 않고 구실로 삼는 저 무능은 아담이 자기를 악마의 압제 아래에 기꺼이 넘겨주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를 결박한 부패의 쇠사슬은 처음 사람 아담이 자기의 창조주를 배반한 데서 생겼다. 모든 사람에게 이 반역죄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면, 아무도 필연성을 이유로 용서를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필연성이야말로 그들이 정죄를 받는 가장 명백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하면서 악마 자신을 예로 들었다. 이 예를 보아도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여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점은 뒤집어서,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의 의지는 선을 버릴 수 없지만, 여전히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나르두스도 같은 생각을 적절하게 가르친다. 즉, 우리는 필연성이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불행하고 이 필연성은 우리를 그 자체에 동여 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이 되도록 강요한다 라고3 그들의 삼단 논법의 둘째 부분은 "자발적"에서 "자유"로 비약하는 오류를 범하므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 선택되지 않는 일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2. 둘째 주장 : 보상과 처벌이란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은 덕행과 죄악이 모두 의지의 자유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벌이나 상을 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한다. 이 논법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이지만 크리소스톰과 제롬도 어디선가 사용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제롬은 이것이 펠라기우스파가 잘 사용하는 논법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만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수고하지 않는 우리가 아니라 그 은총이 상을 받으리라"고 한 그들의 말까지 인용한다.4

벌에 대해서는 우리가 죄책의 근원이므로 우리에게 벌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나는 대답한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우리가 자유로운 판단 아래서 죄를 짓거나 노예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특히 사람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 의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그 보상이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큰 모순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자주 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상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상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당연히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사에 대해서 주시는 것이다!"5 확실히 그들은 자유 의지가 공로의 원천이 아니라면 공로가 있을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뚜렷이 본다.6 그러나 이것을 큰 논쟁점으로 보는 점에서 그들은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이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서슴치 않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항상 가르친다. 예컨대, "사람들의 공로란 무엇인가? 흘로 죄가 없으시며 죄에서 해방해 주시는 그는 당연히 갚아야 할 의무에서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발견하신다. 또, "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시지 않고, 받을 자격이 없는 은총을 주신다. 만약 은총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라." 또,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죄는 우리의 것이지만,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상급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사에 상을 주시게 될 것이다." 같은 뜻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은총이 공로에서 생기지 않고 공로가 은총에서 생긴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조금 뒤에 결론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공로보다 먼저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서 자신의 공로를 나오도록 하려 하시며, 사람을 구원하실 이유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은사를 완전히 값 없이 주신다"7

그러면 이런 문장이 어거스틴의 글에 자꾸만 반복해서 나오는데, 무슨 까닭에 더 많은 증명을 열거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사도가 성도의 영광을 어떤 원칙에서 이끌어 내는가를 들으면, 우리의 논적들은 이 오류에서 더 잘 해방될 것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한다(롬 8 : 30). 그러면 신자들은 무슨 까닭에 면류관을 받는다고(딤후 4 : 8) 사도는 말하는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자비에 의해서 택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 의지가 성립할 수 없으면 공로도 없으리라는 이 허망한 공포심을 버리라. 성경이 우리를 불러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는 바로 그것을 무서워하며 도망한다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 : 7)라고 사도는 말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한하며 여러 가지이므로, 자기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우리 것으로 만드시고, 마치 우리 자신의 덕행인 듯이 그것에 상을 주신다.

 

 

 

3. 셋째 주장 :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은 말살될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크리소스톰에게서 취한 듯한 항의를 첨가하여 만일 선악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면, 동일한 본성을 나눠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악하거나 모두 선할 것이라고 말한다.8 이 입장에 가까운 것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암브로시우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이방인의 소명(The Calling of the Gentiles)을 쓴 사람의 견해다. 그의 이론으로는 만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변덕스러운 상태에 버려두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9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을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크리소스톰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바울이 열심으로 주장한 것을-모든 사람이 부패했을 뿐 아니라 악으로 넘겨졌다는 것을(참조, 롬 3 : 10)-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함께, 모든 사함이 악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천적으로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는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만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그냥 버려 두시는10 사람들은 부패한 가운데서 쇠잔하며 드디어 소멸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발점에서 넘어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참으로 인내 자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다.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주신다. 무슨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굳게 견디어 내며 또 어떤 사람들은 동요 때문에 실패하는가 하는 이 차이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즉, 주께서 인내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며 자기의 권능으로 힘을 북돋아 주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는 사람들은 변덕스러움의 본보기가 되도록 자기의 권능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4. 넷째 주장 : 모든 훈계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만일 복종하는 능력이 죄인에게 없다면, 권면하는 것이 헛되며 경고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책망하는 것이 미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1 옛날에 어거스틴이 비슷한 반대를 받았을 때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책망과 은총에 대하여](On Rebuke and Grace)라는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저 비난들을 충분히 논박하지만, 주로 반대자들을 불러 이 중심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오 사람아, 교훈을 통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깨달으라. 책망을 받아서, 그대에게 그것이 없는 것은 그대의 허물임을 깨달으라. 기도를 드려서,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를 깨달으라."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글에서도 거의 같은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교훈들을 사람의 힘을 표준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올바른 일을 명령하신 곳에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수행 능력을 풍부히 주신다고 말한다.12 또 이 문제는 길게 토론할 필요가 없다. 우선 우리만이 이 입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모든 사도들이 우리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이런 상대자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 : 5)고 선언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떠나서 악을 행한 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며 징계하시지 않는가? 또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선행에 전심하라고 권하시지 않는 것인가? 고린도 신자들이 사랑을 등한시했다고 해서 바울이 얼마나 엄중하게 그들을 책망했는가?(고전 3 : 3, 16 : 14) 그러면서도 그는 주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그는 로마서에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한다(롬 9 : 16). 그러면서도 그 후에 여전히 경고하며 권고하며 책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슨 까닭에 주에게 간청해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서 저지른 일을 징벌하시는 헛수고를 하시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무슨 까닭에 바울에게 경고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버림을 당하고, 그 자비가 없이는 원하거나 달음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버려 두라고 하지 않는가? 열렬히 구하는 사람일수록 곧 받을 수 있다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 최대의 근거를 주님 자신에 둔 것이 아닌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바울은 썼다(고전 3 : 7). 여기서 그는 교훈과 충고와 책망이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데 얼마나 이바지하는가를 알린다. 이와 같이, 모세가 율법의 계명들을 엄격한 제약하에 두고(신 30 : 19), 예언자들이 범법자들을 얼마나 호되게 위협했는지 우리는 본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들은 사람이 깨닫는 마음을 받아야만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인정한다(예컨대, 사 5 : 24, 24 : 5 ; 렘 9 : 13이하, 16 : 11이하, 44 : 10이하 ; 단 9 : 11 ; 암 2 : 4). 또 마음에 할례를 주며(참조, 신 10 : 16 ; 렘 4 : 4), 돌같이 굳은 마음 대신에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참조, 겔 11 : 19),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율법을 새기며(참조, 렘 31 : 33), 결국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참조, 겔 36 : 26) 그의 교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그들은 인정한다.

 

 

 

5. 훈계의 의미

 

그러면 충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경건한 자들이 완고한 생각으로 충고를 거부하면, 그들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충고가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들의 양심을 두들긴다. 가장 거만한 자라도 충고를 실컷 냉소는 할지언정, 정죄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종하는데 필요한 유순한 마음을 받지 못했는데, 가련하고 약한 인간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완강한 마음을 그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탄이라고 할 수 없은즉, 그에게 어떤 변명할 구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은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하나님의 충고를 희롱할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충고의 힘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에게는 충고가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께서는 신자들 안에서 성령으로 모든 일을 하시지만, 도구로서의 말씀을 결시하시지 않고 신자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이용하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의 의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다는 것을 진리로 인정해야 한다. 예언서에 있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라고 한 말과 같다(겔 11 : 19-90). 그래도 그대는 항의하여 무슨 까닭에 그들을 성령의 인도에 맡기지 않고, 지금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 경고하는가? 성령이 밀어주시는 정도 이상으로 급히 전진할 수 없는 그들을 무슨 까닭에 충고로 괴롭히는가? 불가피적인 육의 연약 때문에 타락한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들이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징벌하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항의자여, 그대는 누구관데, 하나님에게 법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충고에 복종하도륵 은총으로 우리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받도록 충고로 우리를 준비하신다면, 그대는 이 경륜의 어디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겠는가? 설사 충고와 견책이 신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전연 무용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에 충고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즉, 누가 감히 충고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조롱하겠는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충고는 우리 안에서 선에 대한 소원을 일으키며, 태만을 얼어버리며, 죄악과 그 달콤한 독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동시에, 반대로 죄악을 미워하며 싫어하게 만드는 능력을 완전히 발휘한다.

만일 더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내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13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지성을 비추며 의를 사랑하며 함양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마음을 개조하셔서, 그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다.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그와 같은 혁신을 원하며 구하며 달성하도록 활발시키신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결륜의 방법에 의한 자기의 손의 움직임을 나타내신다. 버림받은 자들을 상대로 같은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들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다르다. 현재는 그들의 양심의 증언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심판 때에는 그들에게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이끄시는 사람이 아니면 자기에게로 올 수 없으며,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후에 온다고 말씀하시지만 하시지만(요 6 : 44-45), 역시 교사의 직책을 경시하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 성령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자기의 음성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바울은, 교훈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하나님에게는 아름다운 향기이므로 버림받은 자들 사이에서도 무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고후 2 : 15-16).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비난과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한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6-11)

 

6.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를 뜻하는가?

 

논적들은 굉장한 노력으로 성경으로 성경 구절을 수집한다. 쉬지 않고 모아서 비록 이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수효로 우리를 압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오합지졸이 아무리 화려한 겉치레를 보일지라도. 일단 백병전에 들어가 한두 번 얻어맞으면 즉시 제각기 도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적군의 대부대를 우리는 아주 쉽게 흩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용하는 구절들은 몇 개의 큰 제목을 붙여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절 몇 개에 대답 하나를 하면 폭하고, 일일히 처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의 교훈들을 가장 중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명백한 요구를 모두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훈들을 일일이 검토하며 그것에서 우리의 능력을 측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결․경건․복종․정조․사랑․유순을 명령하시며, 불결․우상 숭배․불근신․분노․약탈․교만 등을 금지하실 때에, 그는 우리를 희롱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산더미같이 모아 놓은 교훈들이 거의 전부를 분류한다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어떤 것은 우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요구한다. 어떤 것은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라고 한다. 또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일단 받은 사람은 그 은총 안에서 매진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먼저 이 모든 교훈에 대한 개론을 말하고, 다음에 그 세 종류를 논하겠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법규로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것은 진리인 듯하기도, 했으나 율법을 전연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율법은 준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무서운 죄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고 하는, 분명히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유를 우리에게 역설한다.14 참으로 그들은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한 일이 없는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묻겠다.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 3 : 19),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20), 율법이 죄를 만들어 낸다(참조, 롬 7 : 7-8),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 : 20) 이런 주장들은 무슬 뜻인가? 율법을 주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제한해야 했는가?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보다 훨씬 높은 데 두셨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정의를 보면, 확실히 율법이 실현하려고 목적한 것은 사랑이다(참조, 딤전 1 : 5).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마음에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소서라고(살전 3 : 12) 기도 할 때에, 그는 만약 하나님이 온 율법의 강령을(참조, 마 22 : 37-40) 우리의 마음속에 불어넣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귀에 들리는 율법에 소리가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7. 율법 자체가 은총에 이르는 길을 지적해 준다

 

만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율법은 생활 원칙이며 우리는 그 원칙대 로 노련해야 한다는 것 뿐 이라면, 물론 나도 즉시 저들의 견해에 양보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여러 가지 효용을 충실히 그리고 분명히 설명하므로,15 우리는 율법이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 해석에 따라 고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당면 문제에 관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설명한 다음에 즉시, 복종하는 힘은 하나님의 인애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가 이 힘을 받도록 기도로 간구 할 것을 명한다. 만일 명령만 있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이 그 명령에 응답할 만한가를 시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령에는 즉시 약속이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얻는 지지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덕성까지도 전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도움에 달렸다고 선언하므로, 우리는 율법을 준수하기에 충분한 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그 약속들이 넉넉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율법의 교훈들을 비교하는 것을 이 이상 더 강조하지 말라. 주께서는 율법으로 주시려는 의의 표준을 우리의 연약한 힘을 가늠 보아 적용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점에서 주의 은총이 지극히 필요한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준비가 빈약한가를 이 약속들을 보아서 더욱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목석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누가 믿겠느냐고 그들은 말한다.l6 아무도 이런 논법을 쓰지는 않는다. 악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들의 정욕이 하나님 뜻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죄책을 느끼게 될 때에, 그들은 목석이 아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무력에 대한 경고를 받고 은총에서 피난처를 구할 때에, 그들도 목석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의 심원한 발언들이 적절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를 일게 하신다."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사람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공경한다면, 교훈은 심히 유용하다." "믿음은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성취한다." "참으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명령된 것을 믿음이 성취하기를 원해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 자체를 요구하시지만, 찾으시는 것을 먼저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요구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며, 주시려는 것을 명령하시게 하라."17

 

 

 

8. 여러 종류의 계명은 우리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교훈들을18 검토하면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⑴주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많다(을 욜2 : 12 ; 겔 18 : 30-32 ; 호 14 : 2-3), 그리고 한편에서 예언자는 대답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등이다(렘 31 : 18-19). 주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며(신 10 : 16;렘4 : 4), 모세를 통하여 이 할례는 주 자신의 손으로 행하신다고 선언하신다(신 30 : 6). 어떤 곳에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시지만(겔 18 : 31), 다른 곳에서는 그 새로운 마음을 자기가 주신다고 하신다(겔 11 : 19, 36 : 26).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은총을 통해서 하신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우리는 율법과 약속 또는 계명과 은총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를 티코니우스의(성경 이해를 위한) 원칙 중에서 다섯째로 둔다.19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종할 능력이 있다고 추론하는데 이러한 추론은 제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계명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⑵둘째 종류의 교훈들은 단순하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그의 뜻을 굳게 잡고 준행하라, 그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와 성결과 경건과 순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⑶셋째 종류는 바울과 바나바가 신자들에게 했다고 누가가 언급한 말, 즉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한 권고다(행 13 : 43). 그러나 지조라는 그 미덕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가르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46 : 10)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한다(엡 4 : 30). 여기서 요구하는 것을 사람은 완수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서 주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러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 : 11). 같은 식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헌금 문제를 논할 때에 그들의 착하고 경건한 뜻을 여러 번 칭찬하지만(고후 8 : 11), 조금 뒤에 가서 "권고를 받는 마음을 디도에게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고후 8: 16-17, 의역). 만일 디도가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자기 입을 이용해서 남을 권고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직접 지도를 받지 않고서 기꺼이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9.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눠서 하는 일이 아니다

 

논적 중에서도 더 교활한 자들은 이 모든 증언에 대해서 궤변을 눌어 놓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도와주시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전력을 다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한다. 또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동등하게 나눠진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예언서에서 인용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 : 3). 주께서 어떤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느냐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으니,20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점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즉,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은총이 무리에게 약속되었다는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율법에 대한 복종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이유만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응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이 명백하다. 또, 예레미야의 다음 말은 어떤 괴변으로도 논박할 수 없다. 즉 옛날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문자로만 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영이 언약에 개입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하게 만드시지 않으면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렘 31 : 32-33).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도(슥 1 : 3)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 거기서 하나님이 돌이키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회개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질적 번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친절히 대해 주심을 입증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역경을 주셔서 우리에게 대한 불쾌감을 보이시는 때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불행과 재난으로 지친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고 불평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의의 모범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정직한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회개하는 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눠지는 듯하다는 논적들의 추론은 이 구절의 말씀을 일부러 곡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율법론에서 논할 것이므로,21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10. (반대자들의 견해를 따를 것 같으면)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재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종류의 논법은 첫째 논법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주께서 우리의 의지와 언약을 맺으시는 약속들을 인용한다. "너희는 선으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 : 14, 의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 : 19-20). 또,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렘 4 :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98 : 1).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을 인용한다(렘 26 : 3이하).

주께서는 이 축복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만일 우리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거나 무효로 만들 힘이 없다면, 그 약속이 우리의 의지를 상대로 하는 것은 부적당하거나 희롱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점을 부연하기 위해서 그들이 말하는 웅변적인 항의들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일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우리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면, 자기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잔인하게 속이신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자기의 축복들을 전개해 보이시면서도 그것을 즐길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의 이 선심은 대단한 것이다. 걸대로 실현되지 못할 불가능한 일에 의존하는 약속이니 놀랍고 확실한 약속이로다!"22

조건이 붙어 있는 약속들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할 것이다.23 그때에 약속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데는 아무 불합리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이 전연 없는 것을 아시면서 자기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잔인한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런데 약속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다 같이 제시되므로, 양쪽에 다 유용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훈으로 불신자들의 양심을 찔러, 그들이 심판을 잊어버리고 죄악에 탐닉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외 사학을 받을 가치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언하도륵 약속 안에서 그들을 부르신다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자기를 공경하는 자들을 축복 하시며, 자기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을 엄벌하시는 것이 완전히 공평하고 적합한 일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죄의 속박하에 있는 불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한 번을-즉, 그들은 악에서 떠나야만 마침내 축복을 받으리라는 법을-정하시는 것은 적절하며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경배자들이 받는 축복에서 그들이 배제되는 것이 정당한 처사임을 이해시키기만 해도, 이 법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은총을 간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백방으로 격려하시므로, 우리가 보인 바와 같이, 교훈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약속으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교훈으로 자기의 뜻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에, 우리의 불행을 알려 주시며, 우리가 얼마나 충심으로 그의 뜻에서 어긋났느냐 하는 것도 알려 주신다. 동시에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호소하라고 격려하신다. 그러나 교훈은 나태한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키지 못하므로, 약속을 첨가하적서 일종의 달콤한 생각으로 우리가 그 교훈들을 좋아하도록 유인하신다. 의에 대한 소원이 간절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열렬히 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즐겨한다면", 또 "너희가 순종한다면"이라고 하시는 호소의 말씀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결심하거나 순종하는 자유로운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무력함을 조롱하시는 것도 아닌 것이다.

 

 

 

11. 우리의 반대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온 비난은 만일 의지가 자유롭지 못한다면 의미를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논적들이 쓰는 셋째 종류의 논법은 앞에 있는 두 가지와 비슷하다. 그들은 배은 망덕한 백성을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그 구절들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지극한 자비에서 모든 좋은 것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런 종류의 구절을 들면 다음과 같다.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민 14 : 43), "내가‥‥‥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이 집‥ ‥‥에 행하리라"(렌 7 : 13-14), 또 "너희는‥‥‥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렘 7 : 28). 이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했다(렘 7 : 29). 또 저희가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주께 복종하고자 아니하였으므로, 이 모든 재난이 저희에게 임하였다는(참조, 렘 19 : 16) 말씀이 있다.

이런 질책은 당장 다음과 같이 대답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곧 우리는 순경을 원하고 역경을 두려워했으며, 그 순경을 얻고 역경을 피하기 위해서 주께 복종하지 않고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도 않은 것은, 우리가 죄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어 해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도망할 수 없는 악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다라고.

그러나 필연성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력하고 무익한 변명이므로, 나는 그것을 무시하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오를 변명할 수 있느냐고 묻겠다.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들이 패악해서 주의 자비의 혜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한 원인은 그들 자신의 패악한 의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해 보라. 악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은 자기의 멸망을 자초하지 않은 듯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얻으려고 애쓰는가? 그러나 만일 죄인들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고 징벌을 받는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완고하게 죄악을 계속 범한다면 큰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잔인하시다고 비난하기보다 자기의 무가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을 배울 것이며, 또 만일 그들이 배울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의 불행과 파멸의 원인인줄로 아는 자기의 죄에 싫증이 났다면, 그들 자신이 비참하고 길일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며, 주께서 책망으로 자기들을 깨우쳐 주신다는 사실을 충심으로 인정하며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책망이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 제 9장에 있는 다니엘의 위대한 기도를 보면 분명히 알수 있다(4-19절). 첫째 효과의 실례를 우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례미야를 보내 그들의 불행한 원인을 설명하라고 명하셨으나, 이 일은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였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라고(렘 7 : 27) 하신 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무슨 목적으로 귀머거리들을 당대로 노래를 부른 것인가? 그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그 말씀이 옳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불행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것은 사악한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자들은 계명에서, 또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서 무수한 증거를 끌어다가,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은 망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몇 개의 설명으로 독자는 그들에게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시편에서 유대인들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사악한 세대"라는 책망을 듣는다(시78 : 8). 다른 시편에서도 예언자는 동시대 아람들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고 권한다(시 95 : 8). 확실히 이것은 모든 완고한 마음이 사람들의 사악함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마음은 주께서 준비하신 것이니(참조, 잠 16 : 1)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굽힐 수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시 119 : 112) 유쾌한 생각으로 기꺼이 하나님에게 자기를 바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성향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같은 시편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시 119 : 36).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의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경고의 말에 유의해야 한다(빌 2 : 12-13). 참으로 사도가 그들에게 할 일을 지정하는 것은 육의 태만을 허락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그는 두려움과 조심성을 명령해서 그들의 자만을 깼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침을 기억하게 한다. 여기서 바울은 신자의 행동이 이를테면 피동적임을 분명히 알리며, 그들이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능력은 하늘이 공급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말한다. 또 베드로는 "너희 믿음에 덕을‥‥‥공급하라"고(벧후 1 : 5) 권하면서도, 우리가 무슨 일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듯이 이차적인 의무들을 우리에게 지정하지 않고, 다만 육에서 오는 나태를 분발시킬 뿐이다. 이 나태가 믿음을 자주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태만은 시정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신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하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살전 5 : 19)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받은 빛을 키우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짓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우둔한 생각은 쉽게 반박될 것이다. 바울이 명령하는 열성 그 자체는 하나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고후 7 : 1).

사실, 성결케 하는 직책은 성령이 홀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게 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는다. 요컨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고 한다(요일 5 : 18). 그런데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우리가 한 부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또 다른 부분은 자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사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 준 바로 이 보존이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도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다(요 17 : 15). 또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사탄과 싸울 태에는 하나님의 무기만으로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안다(참조, 엡 6 : 13이하).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깨끗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시정하는 의미로 즉시 "성령을 통하여"라고 첨부한다(벧전 1 : 22).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요일 3 : 9)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전투에서 사람의 힘은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단히 밝힌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요일 5 : 4) 하는 말로 그 이유를 알린다.

 

 

 

(성경에 있는 특별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답변. 12­19)

 

12. 신명기 30:11이하

 

그러나 반대자들은 우리의 설명에 강력히 반대되는 듯한 구절을 모세의 율법에서 인용한다. 모세는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 앞에서 증언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 11-14).24

그런데 만일 이 말씀을 단순히 교훈으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당면 문제를 위해서는 적지 않은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판정한다. 이것은 계명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성향에 관한 것이지 계명들을 지키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의심이 남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믿을 수 있는 해석가인 사도 바울은 모세가 여기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롬 10 : 8). 그러나 어떤 완고한 사람이 있어서, 바울이 이 말씀을 복음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심하게 곡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사람의 대담성은 불경건한 것이지만, 우리는 사도의 권위를 빌 것 없이 그를 논박할 방법이 있다. 만일 모세가 교훈들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라면, 그는 백성에게 심히 허망한 자신을 불어넣은 것이 된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처운 일인 듯이 자기 힘으로 지키려 했다면, 그것은 파멸로 돌진한 것 외에 달리 무 이었겠는가? 율법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죽음이 걸려 있는 절벽을 지나야 하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능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모세의 이 말씀은 자비의 언약을 의미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는 율법의 규정들과 함께 그 자비의 언약을 공표했던 것이다. 몇 절 앞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필요가 있다고도 가르쳤기 때문이다(신 30 : 6). 그러므로 그는 곧 뒤에서 말한 그 능력을 사람의 힘에 두지 않고 성령의 도움과 보호에 둔 것이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 안에서 자기의 사업을 힘차게 실현하신다. 이 구절도 단순히 교훈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약속은 의를 얻을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는 전연 주장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능력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바울은 이러한 증언을 확인한다. 즉, 복음 안에서 주어진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어렵고 가혹하고 지키기에 불가능한 조건 아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쉽고도 언제든지 지킬 수 있으며 공적으로 따를 수 있는 조건하에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율법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은 모든 율법을 성취한 사람만 결국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말씀은(롬 10장) 인간 의지의 자유를 확립하는 데는 아무 가치도 없다.

 

 

 

13.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전제 한다는 주장

 

하나님께서 간혹 사람들을 시험하시는 의미에서, 은총의 도움을 철수하시고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노력의 방향을 돌리는가를 기다려 보신다고 하는 구절들을 반대자들은 자주 끌어온다. 예컨대 호세아서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내 얼굴을 구할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리라"는 말씀이 있다(호 5 : 15, 의역).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그 본유적인 능력으로써 어느 쪽으로든지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께서 그들이 자기의 얼굴을 구하게 될까 하고 생각하시는 것이 우스운 일일 것이라고. 마치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백성이 그들의 생활을 바르게 고치기까지 그들을 멸시하며 버리시는 듯한 띨을 극히 자주 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자들은 이런 위협의 말씀에서 결국 무슨 결론을 내리려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백성이 자기 힘으로 회심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성경 전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회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와 싸우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고유 능력을 보유하는 조건으로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25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증명하는가? 물론 그것은 그 구절이나 유사한 구절일 수는 없다. 사람에게서 물러서시고 그들이 자기 지혜만으로 무엇을 판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는 것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그 약한 정도에 따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말씀들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 백성은 완고해서 경고와 권고와 책망이 아무 효과도 없으므로, 나는 잠깐 물러서서 그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조용히 내버려두겠다. 오랫동안 재난을 겪고 나서 언제 나를 기억하고 내 얼굴을 찾게 되는지 볼 것이다." 주께서 떠나가신다는 것은 예언을 중지하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를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으로 조용히-말하자면 비밀히-시험하신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일을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공순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정을 받기 전에 역경의 채찍으로 타도되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완고한 고집에 노하시고 심지어 지치신 주님께서 잠깐 우리를 떠나실 때에-바꿔 말하면, 자기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조금씩 이라도 나타내시는 그 말씀을 일시 주시지 않을 때에-그리고 주가 계시지 않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시험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 관찰하며 시험하실 어떤 자유 의지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잘못 해석한다. 하나님이 일시 떠나시는 목적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26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려는 것뿐이다.

 

 

 

14. 그러면 이 행위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가

 

그들은 또 성격이나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방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죄를 짓지만 거듭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한다고 인정된다. 죄가 우리에게서 왔다고 해서 우리에게 들리는 것이 옳다면, 같은 이유로 선행에서 우리가 하는 몫도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밀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거저 돌덩이처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첫째 자리를 드리지만 저 표현들은 우리의 노력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일러준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단순히 주장한다면, 나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원하는 떡도 "우리의"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다(참조, 마 6 : 11). 여기서 "우리의"라는 소유 대명사는, 원래는 우리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주기도에도 같은 어리석은 점이 있다고 조롱하든지, 그럴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의 선심에 의해서 할 뿐인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러석은 일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둘째 항의는 좀더 강하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의를 보존하며 율법을 지키며 열심히 선행을 한다고 확언하는 때가 많다. 이런 일은 마음과 의지의 고유한 기능이므로 만일 우리의 열성이 하나님의 힘을 어느 정도 나눠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성령에게도 돌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의 성령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시는가를 잘 생각하기만 하면, 이런 너절한 항의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들이 악의로 우리에게 던지는 비유는 적당하지 않다. 어떤 미련한 사람도 우리가 돌을 던지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7 또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찬성과 배척, 원함과 원치 않음, 추구와 저항 등의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기능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허망한 것에 찬성하고 완전한 선을 배척하며, 악을 원하고 선을 원하지 않으며, 사악을 추구하고 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부패 행위를 자기의 진노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뜻대로 조종하셔서 사람의 썩은 손을 통해서 자기의 선한 사업을 실현하신다. 그러면 자기의 정욕만을 따라 노력하는 악인이 하나님의 권능을 섬길 때에, 우리는 그런 악인을 돌에-외부의 힘에 움직여 자기의 운동이나 감각이나 의지가 전연 없이 거저 길려가는 들에-비교 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문제되는 선한 사람들은 어떤가? 주께서 그들 속에 자기의 나라를 건설하실 때에 주님은, 의지의 본유적 성향에 따라 빗나간 정욕에 의해서 전후좌우로 끌리지 않도록 성령으로써 그들의 의지를 억제하신다. 그리고 성결과 의를 향하도록, 자기의 의를 표준으로 삼아 그 의지를 굽히며 청태를 주며 방향을 지시하신다. 비틀거리며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의지를 바로잡으며 힘을 주신다. 이런 뜻으로 어거스틴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용을 받을 분이고 자기는 행동하지 않느냐?"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을 하며 또 작용을 받습니다. 선한 사람의 작용을 받으면 여러분은 좋은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은 행동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돕는 이'라는 말은 여러분도 행동한다는 뜻을 보입니다.28 이 발언의 처음 부분에서 그는 성령의 작용이 사람의 행동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을 추구하도록 지도를 받는 사람의 그 의지는 본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돕는다"는 말에서 우리도 무엇을 하는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고 곧 첨가하는데, 이 점은 우리 각 사람에게 무엇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나태를 조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을 연결해서, "결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고 바르게 결심하는 것은 은총에 속한다"고 말한다.29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에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정복할 수 없고, 심지어 싸울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15.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격려 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하나님의 은총과의 관계를 논할 때에, 그 은총은 사람의 의지를 지휘하며 규정하는 성령의 지배라고 해석된다. 성령이 지배하실 때에는 반드시 시정과 개혁과 갱신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시작은 우리의 것을 일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이런 기능들을 하시려면 반드시 움직이며 행동하며 재촉하며 참으며 보존하여야 한다. 따라서 은총에서 생기는 행동들은 모두 전적으로 성령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동시에 우리는 어거스틴이 "은총은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한다"고30 가르친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즉, 사람의 부패하고 타락한 의지가 시정되어 의의 참된 지배를 받도록 지도될 때에, 그것은 재건된다고 한다. 동시에 새로운 의지가 사람 속에 창조된다고 한다. 본성에 있는 의지는 심히 타락하고 부패해서 새로운 본성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의 적합한 행동이라고 아무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다른 어떤 기의 것을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데서31 인용한 어거스틴의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세인은 사람의 의지에서 사람 자신의 어떤 선을 찾아보려고 무익한 노력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 의지의 힘과 하나님의 은총을 혼합하려고 애쓰지만, 그런 혼합은 은총을 부패시킬 뿐이다. 마치 포도주에 쓴 흙탕물을 타는 것과 같다. 설사 의지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순수한 감동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를 타고났으므로, 하나님이 자기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하시는 일을, 한 편에서는 우리가 했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 것이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선을 향해서 지도하시는 그 마음도 우리의 것이요, 의지도 우리의 것이요, 노력도 우리의 것이다.

 

 

 

16. 창세기 4 : 7

 

그들은 여기저기서 다른 증거를 긁어모으지만, 이미 제시한 논박들을 잘 이해한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총명하지 않더라도 별로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에 있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발언을 인용한다(창 4 : 7). 그들은 이 말씀을 죄에 적용해서, 주께서 가인에게 약속하시기를, 만일 그가 죄를 정복하려고 애쓸 결심을 한다면, 죄의 힘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리라고 하신 듯이 말한다.32 그러나 이 절을 아벨에 적용시키는 것이 말의 순서에 더 잘 맞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이 아우에 대해서 품은 악한 시기심을 책망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책망하신 점은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것만이 칭찬을 받는 것인데, 가인은 헛되이 범죄를 계획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우보다 나으려고 했다. 둘째로, 가인은 하나님에게서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할 줄 모르고, 아우가 자기의 권위하에 있었는데도 그 아우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우리의 견해와 반대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 해석을 취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는지도 모르는 까닭에, 하나님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잘쏨하셨다고,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럴게 가정할 때에, 주께서는 이 발언 내용을 약속하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명령하셨을 것이다. 만일 명령하셨다면, 인간의 능력이 있다는 증명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히 설명했다. 만일 약속하셨다면, 가인이 정복하리라던 죄에 항복했으니, 그 약속은 어디서 실현되었는가? 그 약속에는 무언중에 조건이-예컨대, "네가 싸운다면 승리를 얻으리라"는 식으로-포함되어 있었다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그러나 누가 이런 핑계를 용인할 수 있는가? 이 지배가 죄에 관한 것이라면 말투가 명령법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정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일 자체로 보거나 문법의 원칙으로 볼 때, 가인과 아벨을 비교한다고 해야 한다. 장자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아우보다 낮게 된것이 아니였다면, 아우 밑에 들었을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17. 로마서 9 : 16과 고린도전서 3 : 9

 

그들은 또 사도의 증언인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을 이용한다(롬 9 : 16).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은 비록 자체만으로는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도움을 받을 때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추론한다.33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바울이 여기서 무슨 문제를 논하는가를 침착하게 생각한다면, 그의 발언을 이렇게까지 경솔하게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의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 오리겐과 제롬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편에서는 어거스틴을 대립시킬 수 있다.34 그러나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들의 견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비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구원이 예비되었으며,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파멸과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뜻이다. 그는 바로의 예를 들어 악인들의 운명을 지적했다(롬 9 : 17).

그는 또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는(롬 9 : 15 ; 출 33 : 19) 모세의 증언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거저 선택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했다. 그리고 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결론지었다(롬 9 : 16). 그러나 만일 의지와 노력이 이 무거운 짐을 질 만한 힘이 없으니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바울의 발언은 부적당할 것이다. 이러면,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의 원함과 어느 장도의 달음박질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이 궤변을 그만 두라, 바울이 말하는 뜻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를 위해서 구원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은(사람의) 의지도 아니요 노력도 아닌 하나남의 자비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바로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 : 4-5). "원하는 자로 말미암으며 달음박질하는 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부정했으니(롬 9 : 16), 원함과 달음질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암시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같은 식으로 추론한다면, 즉 우리는 우리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바울이 부정하니 우리는 다소의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추론의 권리를 그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추론에서 결점을 발견한다면, 그들 자신의 추론에도 같은 오류가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확고한 추론을 한다. "그러므로 만일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논법을 뒤집어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째 추론이 불합리하므로, 어거스틴은 주께서 사람의 의지를 준비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선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바른 결론을 내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달음질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성취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35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한 바울의 말을(고전 3 : 9) 비틀어서 똑같이 무지한 곡해를 한다.36 이것이 교역자들에 국한된 말씀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동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무엇을 공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할 능력과 필요한 은사를 주신 다음에 그들의 수고를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18. 집회서(묵시 문학서 중의 한 책) 15 : 14-17

 

그들은 집회서의 저자를 들먹인다. 이 사람의 권위가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알고 있다. 나는 이 저자를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가 있지만, 가령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자유 의지를 어떻게 변호하겠는가? 그는 말한다. "사람이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은 그가 자기의 지혜의 힘으로 살도록 맡기셨다. 그에게 계명들을 주셨다. 그가 계명을 지키면 계명이 그를 지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앞에‥‥‥생명과 죽음, 선과 악을 두셨다. 어느 쪽이든지 그가 택하신 대로 주시리라고 하셨다"(집회서 15 : 14-17, 의역).37 사람이 창조된 때에 생명이나 죽음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장하자.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은 이 능력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나는 솔로몬이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한 말에(전 7 : 29)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기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으므로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그가 가졌던 것이 모두 다 반드시 곧 그의 부패․타락만 본성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논적들뿐 아니라 집회서 저자에게도(그가 누구였든간에) 대답한다. 구원을 얻는 능력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우리는 그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대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편견을 일으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그대는 육의 악한 경향을 억압하며, 육이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면서 헛된 자기 변호를 시도하는 것을 누르려는 생각뿐이며, 따라서 정직한 마음을 사람 속에 넣으신 것은 사람의 파멸이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그대가 대답한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주께서 처음에 사람에게 베푸신 여러 가지 장식을 사람이 자기의 허물 때문에 지금은 빼앗기고 없다는 점에서, 그대와 나의 견해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나 나나 사람은 지금 변호인보다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19. 누가복음 10 : 30

 

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어("절반 산채로") 길에 버려졌던 행인의 이야기를(눅 10 : 30) 무엇보다도 자주 인용한다. 이 행인은 인류의 큰 재난을 대표한다고, 거의 모든 저자들이 가르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것을 근거로 반대론자들은 추론한다. 즉, 행인을 "절반 산채로" 버렸다고 하니, 사람은 죄와 악마라는 강도를 만나 선했던 이전의 모습이 아무 흔적도 없어질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며 바른 이성과 의지가 조금은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절반 살았다"고 하겠느냐고 추론한다.38

첫째로 내가 그들의 이 풍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확실히 교부들은 주의 말씀의 참뜻을 고려하지 않고 이 해석을 고안했다. 성경의 원칙이 지정한 한계를 넘어서 풍유(알레고리)를39 해석해서는 안 되며, 어떤 교리의 완전한 토대로 삼는 것은 더욱 안 된다. 내가 이 허위를 근절하려면 그렇게 할 근거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절반 살았다"고 하지 않고 축복된 생활에 관해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죽은 우리를‥‥‥살리셨다"고 말하고(엡 2 : 5), 성도들이 "절반 살아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절반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의 광명을 받으라고 호소하지 않고, 잠자는 자와 무덤에 묻힌 자들을 상대로 한다(엡 5 : 14). 같은 식으로 주께서는 친히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 나는 때가 왔다"고 하신다(요 5 : 25, 의역). 사소한 암시를 들어 이렇게 많은 분명한 발언들에 반대하는 그들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그러나 그들의 이 풍유가 확실한 증언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절반 살아 있다고 하니, 아직 건전한 데가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사람은 천상적이며 영적인 지혜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성은 없지만, 그의 지성에는 이해력이 있다. 그는 정직한 일을 다소간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은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속성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확실히 이런 속성들이 있다고 해서, 여러 학과들의 공통된 찬동으로 인정된 어거스틴의 견해를 우리가 버려야 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타락한 후에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을-거저 주시는 선한 것들을-빼앗겼고, 사람의 여러 가지 천품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고 한다.40 그러므로 우리가 틀림없는 진리, 어떤 공성기로도 흔들 수 없는 진리라고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즉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는 것이 불경하고 패악하고 악취가 나고 불순하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죄의 독소가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 호흡에서 나오는 것은 악취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선한 외관을 보이지만, 그 지성은 여전히 위선과 간계에 싸여 있고, 심정은 내면적 패악성으로 결박되어 있다.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추구해야만 한다1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처럼 보인다. 1-2)

 

1. 중보만이 타락한 인간을 도우신다

 

인류 전체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말한 시초에 있었던 훌륭한 고귀성은2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도리어 큰 수치를 주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죄로 오염되고 더렵혀진 인간을 자기의 작품으로 인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드디어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구속자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에서 사망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논술한3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더라도, 믿음이-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는 믿음이-따르지 않으면, 그 모든 지식은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자연적인 순서로서는 우주라는 구조가4 일종의 학교가 되어 그 안에서 우리가 경건을 배우고, 거기서부터 다시 영생과 완전한 복락으로 전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반역한 후로 우리는 어느 쪽으로 향하든간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만나게 된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죄없는 다른 피조물들까지도 이 저주하에 잡혀 있고 덮여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이 저주에 압도되어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려고 하시더라도. 우리는 우주를 보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우리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전혀 인정하시지 않고 인연을 끊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으므로 당연하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의 마음도 눈이 어두워져서 참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둔해지고 은혜를 모르게 된다. 우리의 모든 감각도 뒤집혀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만큼 악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발언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 : 21). 수많은 기적이 가득히 들어찬 하늘과 땅-이 웅대한 극장을6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른다. 이것을 잘 보면 우리는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 믿음을 어리석다고 보아서 멸시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과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멀어진 우리의 창조주에게로 돌아가서 그가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전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틀림없이 처음 사람의 타락 이후로 중보를 떠나서는7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구원을 얻게 하는 힘이 없었다(참조, 롬 1 : 16: 고전 1 :24). "영생은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믿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요 17 : 3) 그리스도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문이라고(요 10 : 9) 모든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이8 모든 불경건한 자와 불신자들에게 천국을 열어 주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더욱더 추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발언을 복음 전파에 국한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에 대한 것은 곧 반박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참조, 엡 4 : 18) 저주를 받은(참조. 갈 3 : 10) 진노의 자녀라고(참조, 엡 2 : 3) 선언된 사람들은 화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의 상식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 : 22). 이런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방 종교를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하시는 것과 똑같이, 율법 아래에서 구속자가 선민에게만 약속되었다는 그 이유를 알리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는 경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된다. 또 이 근거 위에 서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없고 생명에 대한 희망을 빼앗겼다고 단언한다(엡 2 : 12), 그런데 요한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었고(요 1 : 4), 모든 세계가 그 생명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하므로(참조, 요 1 : 10),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가 화해자 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생명이라고 선언하신다(요 11 : 25, 14 : 6). 확실히 하늘을 이어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뿐이다(.참조, 마 5 : 9-10). 그뿐 아니라 독생자의 몸에 접붙임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자녀의 지위를 가진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부적당한 생각이다. 요한은 분명히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요 1 : 12, 의역).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아직 철저히 논할 생각이 아니므로, 언급하기만 하고 지나가도 충분할 것이다.

 

 

 

2. 구약의 중보가 없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중보를 떠나서 하나님이 저 옛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이 없고 은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주신 일도 없다. 율법에 있는 제사는 그리스도만이 행하는 속죄에서만 구원을 찾으라고 신자들에게 명백히 가르쳤지만, 나는 그 제사들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의 기쁘고 복받은 상태는 언제나 그 토대가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을 포함시키셨지만(창 17 : 4), 바울은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할 후손은, 바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였다고 현명한 추리를 한다(갈 3 : 14).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람이 모두 그의 후손인 것이 아님은 우리가 아는 바이기 때문이다(갈 3 : 16). 이스라엘과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은 아직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을 때부터, 하나는 택하심을 받고 하나는 버리심을 받았으니(롬 9 : 11),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참으로 장자가 버림을 받고 차남만이 자기의 지위를 지킨 것은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또 많은 사람들이 상속권을 빼앗긴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주로 머리인 한 분 안에서 인정되며,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직책인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약속의 구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최초에 선민을 택하신 것도 중보의 은총에 의한 일이었다. 비록 모세의 글에 이 점이 분명한 말로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충분히 알려져 있다. 아직 백성 위에 왕이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경건한 자들의 행복을 이미 노래에서 묘사했다. "여호와께서‥‥‥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 2 : 10). 이런 말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교회를 축복하시리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 생각과 부합되는 예언이 조금 뒤에 첨가되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 : 35) 또 우리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다윗과 그 후손에게서 그리스도의 산 형상을 보기를 원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다윗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권할 때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시 2 : 12)고 명령한다. 이와 일치하는 것은 복음서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 : 23)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나라는 열 지파의 반란으로 인해서 붕괴했지만. 다윗과 그 후계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변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 : 13,32)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약속은 두세 번 반복되어, 분명히 "내가‥‥‥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왕상 11 : 39). 얼마 후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라고 한다(왕상 15 : 4). 그 후에 사태가 거의 파멸 상태였으나,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한다(왕하 8 : 19).

간추리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버려 두시고 다윗을 택하셔서 하나님 의 영구히 기뻐하실 사람을 삼으셨으니, 다른 곳에 있는 말씀과 같다. "실로의 성막 그리고 요셉의 장막을 싫여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틀 택하지 아니하시고"(시 78 : 60,67),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 : 68),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 78 : 70-71).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의 교회를 보존하기로 정하셔서, 저 머리되시는 분에게서 그 건전성과 안전성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라고 선언한다(시 28 : 8). 그는 즉시 기원을 첨가하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라고 해서(시 28 : 9), 교회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뗄 수 없게 연결되었다는 뜻을 표시한다. 다른 구절도 같은 생각을 표명한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낙하소서"(시 20 : 9).9 이 말씀은 신자들이 자신들은 왕의 보호하에 피하여 있다는 이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도움에서 피난처를 얻으려 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 뜻은 다른 시에서 "여호와여‥‥‥구원하소서‥‥‥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는 말씀에도 포함되어 있다(시 118 : 25-26). 여기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을 받을 소망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다른 기원에서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데, 역시 같은 생각을 표명한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 : 17). 이 시편 기자는 모든 백성이 흩어진 것을 통곡하면서도 그들이 머리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백성이 외국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가 황폐하고 모든 것이 파멸된 상태에서 예레미야가 교회의 재난을 슬퍼했을 때에, 그는 특히 나라가 망해서 신자들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통곡한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애 4 : 20).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중보 없이는 인류와 화해하실 수 없으므로, 율법하에서 거룩한 조상들이 믿어야할 대상으로서 항상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언약과 참된 신앙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분이다. 3-4)

 

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

 

그런데 환난 중에서 위로가 약속되며 특히 교회의 구원이 묘사될 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깃발이 예시되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와 함께 나오셨느니라"고 하박국은 말한다(합 3 : 13). 그리고 예언자들은 교회의 회복을 말할 때마다. 다윗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킨다(참조, 왕하 8 : 19) 또 이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약에 안정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사야가 한 대답이 매우 적절하다. 불신자인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해제되어 도성이 곧 안전하게 되리라는 이사야의 증언을 물리쳤을 때에, 그는 갑자기 메시아에 관해 언급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 : 14). 이런 말로 그는 비록 악한 왕과 백성이 고의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려는 듯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거부했지만, 구속자가 지정된 때에 오실 것이므로 그 언약은 무효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모든 예언자가 항상 애써 선포한 것은 구속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올 다윗의 나라였다. 그래서 이사야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라고 한다(사 55 : 3-4).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이 증언을 받지 못할 때에는, 심한 절망에서 신자들은 아무 소망도 가질 수 없었다. 낙망한 자들을 고무하시기 위하여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신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벗이며"(렘 23 : 5-6). 그뿐 아니라, 에스겔서에는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34 : 23-25)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이 믿어지지 않는 거듭남을 논하신 후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라고 하신다(겔 37 : 24,26).

모든 경건자들의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에게만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나는 여러 사람에게서 몇 구절씩 수집하는 것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다. 예를 들면, 호세아서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라는 말씀이 있다(호 1 : 11). 그는 후에 이것을 더 분명히 설명해서,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라고 한다(호 3 : 5) 또 미가도 백성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명백히 말한다.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미 2 : 13). 아모스도 백성이 새로워질 것을 예언하려고,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라고 한다(암 9 : 11). 이 말씀의 뜻은 "내가 다윗의 가문에 다시 한 번 왕가의 영광을 일으키리니, 이것은 구원의 유일한 기치며,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출현 시대에 더 가까워진 스가랴는 더욱 분명히 선포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슥 9 : 9). 이것은 이미 인용한 시편의 말씀, "여호와는‥‥‥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힘이시로다‥‥‥여호와여 구원하소서" 하는 말씀과(시 28 : 8-9) 일치한다. 여기서 구원은 머리로부터 전신에 흘러내린다.

 

 

 

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이 이런 예언들을 듣고 깨달아, 직접 그리스도를 향해서 해방을 구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들은 수치스러운 타락 상태에 빠졌지만, 대원칙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서 교회를 구원하시며, 선민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실 그 언약-거저 주신 그 언약-은 확고 부동하리라는 것이 그 대원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마 21 : 9). 어린이들이 부른 그 찬송가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고, 하나님의 자비의 유일한 보증은 구속자의 출현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믿기 위해서는 자기를 믿으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너희는‥‥‥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 1). 믿음은 원래 그리스도로부터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곧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완전히 굳은 믿음을 가진 분이 중보로서 사이에 있지 않으면 믿음은 점점 사라지며, 중보가 없으면 하나님은 너무도 존엄하고 높으시기 때문에 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와 같은 죽을 인생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라고10 하는 일반적인 말에 나는 찬성하지만, 거기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데는(골 1 : 15) 이유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칭호는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예언자들이 구속자에 대해서 가르친 것을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해석으로 모호하게 만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절망 상태에서는 중보의 출현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며, 교회를 해방하는 방법도 달리 없다는 것이 여론과 같이 인정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롬 10 : 4)11 바울의 가르침은 유감이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율법 자체와 예언서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바울의 가르침은 바르고 확실하다. 다른 적당한 곳이12 있겠기 때문에 여기서는 믿음에 대해서 아직 논하지 않지만, 독자들의 의견이 이 점에서 일치하기를 바란다. 즉, 경건 생활의 첫째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우리를 지켜 주시며,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드디어 우리를 모아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상속으로 주신다는 것을-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최근에 말한 것이13-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분명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들이 그를 보며 그를 믿게 하셨다.

이런 의미로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광대 무변한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아들 안에서 유한하게 되시고 우리의 작은 척도에 자기를 맞추셨다고 했다.14 광신자 들은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유용한 발언을 불경건한 공상으로 바꾸어 마치 하나님의 완전하신 전체에서 흘러나는 신성의 일부분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듯이 곡해한다.15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말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된다는 뜻에 불과하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라고 한 요한의 말은(요일 2 : 23) 언제든지 옳았다. 천지를 만드신 최고의 존엄하신 분을 경배하노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에게 중보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참으로 맛보지 못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모시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은 잠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 그 결과로 그들은 드디어 유치하고 추악한 미신에 빠져, 자기의 무지를 폭로했다. 현재 회교도들도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면서 우상으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

 

 

 

제 7 장

 

율법을1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뜻하는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율법. 1-2)

 

1. 중보자는 타락한 인간만을 돕는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갈 3 : 17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증언들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온 것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원칙을 가르치는 십계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하신 종교 형태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모세를 입법자로 세우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말소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거저 받은 언약과 그들이 그 언약의 상속자임을 여러 번 그들에게 회상시켰다. 마치 그는 그 언약을 부활시키려고 파견된 것 같았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 의식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기름에서 나는 악취를 드리는 것보다 더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 자기의 더러운 살결을 씻어 버리기 위해서 물과 피를 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의 예배 형식은 진정한 것에 대응하는 그림자와 상징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전체가 전혀 우스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막에 속한 모든 것을 산에서 보이신 규례 대로 만들라고 명령하신 구절을(출 25 : 40) 스데반의 설교와(행 7 : 44) 히브리서에서(히 8 : 5) 아주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이방인들이 너절한 짓에 정력을 소모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그 의식들에서 공연한 노력을 낭비했을 것이다. 경건을 위한 열성으로 노력한 일이 없는 무(无)종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진저리날 정도다. 그들은 무슨 까닭에 하나님이 저 고대 민족을 이 많은 의식으로 괴롭히셨느냐고 할 뿐 아니라, 이 의식들을 멸시하며 어린애 장난이라고 비난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율법의 목적에 주목하지 않는다. 율법의 형식을 그 목적에서 분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허망한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사를 명령하신 목적은 세상적인 일로 경배자들을 분주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님을 바로 저 모형이2 알린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의 본성을 생각해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경배만이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의 많은 말들도 이 점을 증거하며, 유대인들의 미련함을 비난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물에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율법의 가치를 낮추려고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해석가였으므로, 목표에서 멀어져 가는 일반 사람들의 눈을 이런 방법으로 다시 그 목표로 향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은총을 보면, 우리는 확실히 율법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점이 없지 않다는 언급을 할 수 있다.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라고 모세가 그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다(출 19 : 6). 이것은 짐승의 피로 얻는 화해보다 더 위대하고 우수한 화해가 사이에 끼지 않으면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참조, 히 9 : 12이하). 아담의 후손은 모두 유전적 오염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다. 그러면 그들이 왕 같은 존엄한 지위에 오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만일 이런 탁월한 명예가 어떤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가장 합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러운 죄악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그들이 거룩한 머리 안에서 성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사장직의 권리가 그들 사이에서 잘 실현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모세의 말을 교묘하게 돌려, 유대인들이 율법하에서 맛본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고 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2 : 9). 그가 이렇게 말을 바꾼 것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조상들보다 더 많이 얻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과 임금의 영예를 받았고, 중보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감히 자유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율법은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의 가문을 중심으로 드디어 건설된 왕국은 율법의 일부분이며, 모세의 제도하에 포함되었다는 점에 우리는 여기서 잠깐 주목해야겠다. 따라서 레위 지파 전체에서와 다윗의 후손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고대인들의 눈앞에 마치 이중의 거울에 비치듯이 제시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며 자신의 부패에 오염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받은 후손이 나타날 때까지 유대인들은 "몽학 선생"의 감독 아래에 놓였다고 한 바울의 말은 옳다(갈 3 : 24).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친숙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 일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애들과 같았다.3 의식들이 어떻게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는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했다. 이 점은 예언자들의 많은 증언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노염을 풀기 위해서 매일 새 제물을 드려야 했지만, 그들의 모든 악행을 다만 한 제물이 대속하리라고 이사야는 약속했다(사 53 : 5). 다니엘도 같은 생각이었다(단 9 : 26-27). 레위 족속에서 임명된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다만 한 제사장에 대해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이 엄숙한 맹세로 선택하셨다고 한다(시 110 : 4 ; 히 5 : 6, 7 : 21). 그 때에는 눈에 보이는 기름을 부었는데,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서 다른 종류의 기름 부음이 있으리라고 선언했다(단 9 : 24). 여기서 무수한 예를 말하지 않고 히브리서 기자의 예를 보면, 그는 제 4장부터 제 11장까지, 그리스도의 때가 오기 전에는 의식들이 무가치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십계명에 관해서는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롬 10 : 4) 경고한 말에 주의해야 한다. 또, 의문 자체는 죽이는 것이지만(고후 3 : 6), 그리스도는 그 의문을 살리는 영이시라고 한다(고후 3 : 17). 율법의 마침이라는 발언은, 그리스도께서 의를 거저 전가해 주시며 중생의 영으로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쓸데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 즉 마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더라도, 그 감당할 수 없는 멍에와 짐에 눌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 지식에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3 : 19). 즉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의를 얻는 듯이 말하는 악한 거짓 교사들을 상대로 사도는 논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서 율법 자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율법은 거저 택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포함한 아름다울 것이었다.

 

 

 

(우리는 도덕적인 율법을 수행할 수 없다. 3-5)

 

3. 율법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며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죄를 알고 용서를 구하게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율법을 배울 때에 변명할 여지가 더욱 없어진다는 것을 간단히 알아두어야 한다. 만약 율법이 완전한 의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럴 때에 인간은 하늘 심판대 앞에서 분명히 외로운 자로 인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을 선포한 후에,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놓았노라고 하면서(신 30 : 19), 주저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으로 삼았다.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보상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만일 우리가 이 길을 취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율법의 무력함이 나타난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다시 완전한 저주로 떨어진다. 나는 있는 일을 말할 뿐 아니라, 있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율법의 교훈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 것이므로, 사람은 제시된 약속을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 약속에서 혜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약속이 선하심으로 사람은 자기의 불행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구원받을 소망이 없어졌으므로 자기는 분명히 죽으리라는 위협을 느낀다. 여러 가지 무서운 협박이 몇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압박하며 괴롭힌다. 협박은 우리를 지나지 않고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추궁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가장 임박한 죽음을 볼 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약속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만을 볼 때에 우리는 낙심하며 당황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서 얻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정죄와 저주이기 때문이다(갈 3 : 10). 율법은 지키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도, 그 축복과 우리 모든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또한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희롱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행복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보이시며, 그것을 얻으라고 불러 인도하시며, 얻을 수 있다고 다짐하시면서, 한 편으로 그것을 감추며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드시니, 이것은 희롱과 다른 데가 없지 않은가? 나는 대답한다. 율법의 약속에 조건이 붙어 있는 점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행해야만 약속을 얻을 수 있으며 완전한 준수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약속을 주신 것은 허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인애로 우리의 행위를 보심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지 않으며, 우리도 복음이 보여 주는 그 인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율법의 약속에 아무 결실이나 결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 그 약속은 조건이 붙어 있더라도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베풀어주시며, 자기의 충만한 친절에 다시 다른 선물을 첨가하신다. 즉, 주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을 물리치시지 않고 도리어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완전히 만드시면서, 마치 우리가 조건을 이행한 듯이 율법이 약속하는 혜택들을 받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제목하에4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논해야 하겠으므로, 지금은 더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5. 율법의 수행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했다. 제롬이 아무 저주함없을 만큼5 이 생각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일반 사람이 생각하므로, 우리는 곧 간단히 설명하여 재확인해야겠다. 나는 제롬의 생각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를 살펴야 하겠다.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구질구질한 말로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지금까지 있은 일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나는 "불가능하다"고 부른다. 우리가 가장 오랜 과거를 찾아본다 하여도 성도들은 사망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참조, 롬 7 : 24), 한 사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함을 다하며"(막 12 : 30)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사랑의 목표에 도달한 일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또 정욕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누가 이것을 반대하겠는가? 물론 나는 우리가 어리석은 미신으로 어떤 성자를 공상하는가를 안다. 하늘 천사들도 그 성자들처럼 순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또 경험에서 얻는 증거와는 반대된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도 육체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완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이 점을 지지하는 명백한 증언들이 성경에는 얼마든지 충분히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솔로몬이 말한다(전 7 : 20 ; 참조, 왕상 8 : 46).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한다(시 143 : 2). 욥은 여러 구절에서 같은 생각을 주장한다(참조, 욥 9 : 2, 25 : 4). 바울의 말은 가장 분명하다. "육체외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 : 17).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에 바울이 드는 이유는 다 큰 것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것이다(갈 3 : 10 ; 신 27 : 26). 여기서 그는 아무도 그렇게 항상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전제한다. 성경에서 기록된 일은 영구적인 것,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펠라기우스파는 어거스틴을 궤변으로 괴롭혔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행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그들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물론 죽을 인생을 천사 같은 순결 상태에 끌어올리실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서 선언하신 것과 반대되는 일은 하시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6 나는 이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실을 대립시키는 것은 생각이 부족하다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기를, 성경이 선언하는 것은 있지도 않고 또한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고 하면 이런 발언은 냉소해 버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하자.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마 19 : 25-26). 또 어거스틴은 우리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지 못한다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한다. "사랑은 지식에 따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애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땅에서 방랑하는 동안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전 13 : 12)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불완전하다."7 그러면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력한 것을 볼 때에, 율법을 이 육신 생활에서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기를 바란다. 이 점은 바울의 다른 구절도 밝힌다.(롬 8 : 3).8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주며, 거울처럼 우리의 죄 많음을 밝혀 줌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인도 한다. 6-9)

 

6. 율법은 엄격함이 우리에게서 모든 자기 기만을 제거해 준다

 

그러나 이 문제 전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른바 "도덕적 율법"의 기능과 용도를9 간단히 개관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그 기능에 세 부분이 있다.10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유일한 의를 밝히는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며, 알리며, 죄를 깨닫게 하며, 결국 정죄한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눈이 어둡고 정신이 마비되었으므로, 자기의 무력함과 불순함을 알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자기의 허무함을 분명히 믿게 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의 정신력에 대해서 지나친 자신을 가지며, 자기가 택한 표준으로 재는 동안은 자기의 정신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게 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과 율법의 난해함을 비교하게 되면, 자기의 오만불손함이 다소간 꺾이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기의 능력을 아무리 굉장한 것으로 생각했더라도, 이 무거운 율법을 지고는 숨이 가쁘고 비틀거리는 것을 곧 느끼며, 결국은 심지어 넘어지며 지쳐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율법을 배운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의 눈을 맹목적으로 만든 그 교만을 탈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병도 고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가 자만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판단을 근거로 삼는 것을 버려 두는 동안은 위선을 의로움 이라고 가장하며, 여기 재미를 붙여서 가짜인 여러 가지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은총에 반역한다. 그러나 그 모든 허구적인 가짜 의를 제쳐놓고, 율법의 저울로 자기의 생활을 저울에 달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는 자기가 성경에서 멀며, 참으로 지금까지 자기는 오염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 무수한 죄악이 자기 안에서 가득차있는 것을 깨닫는다. 탐욕의 죄는 아주 깊고 꼬불꼬불한 구석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쉽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사도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롬 7 : 7). 율법이 탐욕을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끌어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련한 인간을 아주 비밀히 죽여 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그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

 

 

 

7.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은 그 가치를 감하지 않는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 그가 거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의 첫째 기능, 즉 아직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이 경험하는 것 뿐이다. 여기에 관련된 발언들이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 : 20), 그래서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으로서(고후 3 : 7) "진노를 이루게" 하며(롬 4 : 15) 죽인다.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가책이 더욱 커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럴 때에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범행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 자체만으로는 고발하며 정죄하며 멸망시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11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율법을 공경하지 않거나 그 훌륭한 우월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지가 율법에 순종할 태세가 완전히 준비되어 있으면 율법을 알기만 해도 구원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맹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으므로, 원래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는 결과가 된다.12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범법자임이 증명되므로,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명백하게 나타낼수록, 반대로 우리의 죄를 더욱 폭로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구원이라는 보상은 의에 달렸다고 율법이 확실히 다짐할수록, 그것은 악인의 열망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이 격언들은 결코 율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분명히 칭송하므로 가장 가치있는 발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사악과 부패로 인해서 율법이 우리 앞에 명백히 제시하는 복된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지지 없이 우리를 양육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감사하며, 우리에게 은총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로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며 새로운 은사를 더욱 많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8.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

 

우리 모든 사람이 사악하다는 것과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한다. 그러나 이 확인은 우리가 낙심해서 주저앉아 버리거나, 완전히 용기를 잃고 낭떠러지에 뛰어들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증언에서 마땅한 유익을 얻으면 된다. 율법이 악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아는 것이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참으로,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 : 19)고 사도는 단언한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거나 멸망하게 버려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 : 32).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자기의 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다. 율법의 교훈에서 하나님은 다만 완전한 의에 보상을 주시며 그러나 이런 의는 아무에게도 없다. 반대로 악행은 엄격히 심판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을 대해서까지 은총과 인자로 충만한 빛이 난다.13

 

 

 

9. 율법은 어거스틴이 말하고 있듯이 비난함으로써 우리가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주 말한다. 예컨대, 힐라리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가 율법의 요구 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연약하여 피로할 때에, 율법은 우리에게 은총의 도움을 구할 줄 알라고 합니다." 아셀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글을 써 보내었다. "사람이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며 그 대책으로서 그러스도 안에 있는 은총을 구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유용합니다"라고. 또 로마의 이노센트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율법은 명령하고 은총은 실천력을 공급합니다"라고 썼다. 발렌티누스에게 보낸 글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라고 한다. 또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책망하며, 책망을 받은 우리가 두려워하며, 두려워하므로 용서를 빌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고 감히 행동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다." 또,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위대한 체하는 우리를 작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게는 의를 얻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궁핍하여 우리가 은총으로 피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한다. "주여, 행동하소서, 자비하신 주여, 행동하소서, 행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소서, 아니, 당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명령하소서,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입이 막히고 아무도 자기를 큰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작은 자가 되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게 하소서"14 그러나 그가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15 글을 썼는데, 내가 그의 증거를 많이 늘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율법의 둘째 가치를 이렇게 명백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첫째 가치에 의존한 것이라고 알았거나 또는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그 정확한 뜻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말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율법의 이 첫째 기능은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육을 억누른 후에 속사람이 새로워지며 다시 꽃이 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첫 인상에 놀라 절망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이 이런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버림받은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기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율법과 양심의 증거에서 철저한 타격을 받아, 마땅히 받은 것을 스스로 탄로시킨다.

 

 

 

(율법은 죄인과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구속한다. 10-11)

 

10. 율법은 부정한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율법의 둘째 기능은 적어도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있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강압을 느끼지 않으면 바르고 공정한 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그들이 억제되는 것은 속마음에 감동이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굴레를 쓰고 있어서 외면적인 활동에 손을 대지 못하며, 제멋대로 즐겼을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도 나아졌거나 의로워진 것이 아니다. 공포심이나 수치심이 방해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품은 것을 감히 실행하지 못하며, 날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시키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올라, 무서운 율법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곧 무엇이든지 하며 어디서든지 폭발할 자세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 자체를 극히 미워하며 입법자인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바른 일을 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실 때나, 하나님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때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쪽으로 기꺼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싫어서 반대를 해보지만 하도 무서워서 억지로 복종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 억제된 또 강요된 의는 인간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다.16 주께서는 만사가 소란․혼돈하지 않고 사회가 평온하도록 이런 방법을 마련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을 허락한다면 사회는 소란하고 혼돈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 : 4), 어리석은 육의 욕심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17 받는 것이 유익하다. 하나님의 벌이 무서워서 적어도 외면에 나타나는 난동을 삼가는 동안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고 적지만, 그래도 의의 멍에를 담당하므로 조금은 야성이 꺾인다. 그 결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전혀 규율에 대한 초보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다음과 같은 교훈은 특히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해 언급한 듯하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 : 9-10). 사도는 여기서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 두면 한정 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고 가르친다.

 

 

 

11.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방해물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 3 : 24)라고 한 말은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다.

처음 종류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덕이 있고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그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다.

둘째 종류의 인간들은 굴레가 필요하다. 그들이 육의 정욕이 날뛰는 대로 포기하여 의를 전혀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을 굴레로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직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욕이 몹시 끓어올라 영혼을 결박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멸시하는 상태에 떨어뜨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대항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상속시키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즉시 중생시키지 않는 때에는, 그들에게 찾아오실 때까지 공포심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신다(참조, 벧전 2 : 12).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순결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는 데 유익한 공포심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많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암중모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이 굴레가 되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경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성령으로 중생해서 충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18

 

 

 

(율법은 주로 믿는 자들을 깨우치며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믿는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필요하다

 

셋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본래의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도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19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렘 31 : 33; 히 10 : 16),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 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마치 주인의 마음에 들겠다는 성의와 준비가 있는 하인이 주인의 습관을 따르며 거기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 습관을 자세히 연구하며 관찰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필요성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율법을 매일 공부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더욱 순수하게 아는 일에서 새로운 전진이 없을이 만큼 지혜가 많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또 우리는 배울 뿐 아니라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즉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죄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아무리 정성껏 노력하더라도, 무관심한 육이 짐이 되어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율법은 육에 대해서 마치 가지 않는 게으른 나귀를 가게 하는 채찍과 같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율법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한다. 확실히 다윗은 율법을 찬양했을 때에 이 용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 : 105) 이 밖에도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컨대, 시 119 : 5). 이 구절들은 바울의 발언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도는 중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율법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서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자는 율법의 위대한 효용가치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종심을 불어넣으시고,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읽을 때에 그들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교훈뿐 아니라, 거기 동반하는 은총의 약속을 붙잡는다.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든다. 만일 율법이 명령과 위협만으로 사람의 영혼을 무섭고 놀라게 하여 괴롭히며 슬프게 만든다면, 율법보다 더 싫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윗은 특히 율법에서 중보를 인식했다는 것을 알린다. 중보가 없으면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13. 믿음이 깊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이 전적으로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20 이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집어던지며, 율법의 두 판을 버린다. "죽음의 직분"이 포함된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악한 생각을 우리의 머리 속에서 추방하라. 모세의 훌륭한 교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서는 죽음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려 할 때에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 32 : 46-47). 그러나 만일 율법에 의의 완전한 모범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르고 공정한 생활의 표준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변의 표준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생활은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라고 한 다윗의 발언은(시 1 : 2) 한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세상 끝까지 적용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적 순결은 우리가 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율법을 무서워하여 도망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지금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관인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그 완전성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일평생 애써야 하는 목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의무와 일치하는 동시에 또한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기진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참으로 인생 전체가 경주다(참조, 고전 9 : 24-26). 경주로를 다 달릴 때에, 지금 멀리 바라보면서 뛰어가는 그 목표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이른바 율법의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단절을 뜻한다. 14-17)

 

14. 율법이 어느 정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철폐되었는가?

 

그런데, 율법에는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권고를 반복해서 태만한 그들을 일깨워 주며 잠자는 그들을 꼬집어 자기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자 해서, 신자들에게는 율법이-즉 내가 말하는 도덕적 율법이-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21 율법이 신자들에게 지금은 바른 길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해서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지금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 넣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이 이와 같이 철폐된 데 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히 가르친다(참조, 롬 7 : 6). 주께서도 철폐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주께서는 자기가 율법을 폐하리라는 생각을 부정하셨는데(마 5 : 17), 만일 이 생각이 유대인 사이에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을 부정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구실도 없이 우연히 그런 생각이 생겨났을리가 없으므로, 아마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오류는 거의 모두가 진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 가운데서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주께서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 : 17-18)고 선언하심으로써, 주의 강림으로 인해서 율법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고, 충분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그는 도리어 율법 위반을 고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교정함으로써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참조, 딤후 3 : 16-17).

 

 

 

15.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의식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계명의 힘에 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법은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명령을 솔직하게 실시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저주의 벼락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갈 3 : 10; 신 27 : 26). 사도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에 우리를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는 그 용서에 자기의 의의 근거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속박하에서 비참하게 멸망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속박에서 풀러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속박을 의미하는가? 가혹하고 위험한 요구의 속박이다. 그것은 율법의 철저한 형벌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며 어떤 범행이든지 반드시 처벌하고야 만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 : 13 ; 신 21 : 23). 바울은 그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갈 4 : 4-5)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갈 4 : 5).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끝없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억눌려지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율법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고, 우리는 항상 여전한 경외심과 복종심으로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6. 의식적인 율법

 

의식들은 문제가 별개이다. 의식들은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의식을 끝내셨지만 그 신성은 조금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정하시며 존중하셨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의식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허무한 외관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의식들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의식을 정한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의식 준수가 쓸데없을 뿐 아니라 또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식은 그림자요 그 본체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골 2 : 17). 그러므로 이미 자기를 분명히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의식이 상징하는 것보다 멀리서, 또 휘장으로 가리워 있듯이 상징하는 것보다 지금은 의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진실이 더 잘 빛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은(마 27 : 51),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히 10 : 1) 전에 희미한 윤곽만으로 시작했던 하늘 축복이 명백하고 살아 있는 형상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눅 16 : 16) 여기 해당한다. 저 거룩한 족장들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대낮에 보는 것을 그들은 멀리서 희미한 윤곽으로 잠깐 보았을 뿐이라는 뜻이다.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교회는 이 초보적 단계를 아주 초월해야 하는가를 세례 요한이 설명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 : 17). 비록 속죄가 고대의 제사에서 참으로 약속되었고, 언약의 궤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증했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안정성이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림자에22 불과했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은 준수하지 않게 되었으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폐지하시면서 자기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인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17. 우리에게 불리하게 기록된 유대관계는 삭제되어 있다

 

바울이 지적한 것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점이 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운운한다(골 2 : 13-14). 이 발언은 율법의 철폐를 확대해서 율법의 규정이 이제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정도까지 가는 듯하다. 이 말을 도덕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교훈보다 그 용서 없는 엄격성을 폐지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23 그 생각은 잘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더 신중히 고려해서 그 본뜻은 의식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의문"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에서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한다(엡 2 : 14-15).24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를 막힌 담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엡 2 : 14),이 발언이 의식에 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둘째 주석가들이 저 첫째 사람들을 바르게 비평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사람들도 아직 사도의 뜻을 썩 잘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두 구절을 세부까지 비교하는 것을 나는 옳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다짐하려고, 과거에 그들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런 장애물은 의식들이었다. 유대인들을 주 앞에 성별한 결례와 제사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했던 것이다. 그러면 골로새서에서 언급하는 것이 더 숭고한 신비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거기서 문제는 모세에 있는 규례들이며,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그 규례로 몰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가 더 깊은 데까지 논의를 전진시키는 것과 같이-이를테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이 구절에서도 같은 논의를 한다. 의식들에 관해서 순수해야 된다는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 의식들을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라고25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골 2 : 14) 그뿐 아니라, 무슨 까닭에 우리의 구속을 그 증서가 "도말"되었다는 사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시키는가? 그러므로 문제 자체가 우리에게 더 내면적인 것으로 인정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옳은 해석을 얻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글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사도의 분명한 말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 그러하다. 곧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죄에 대한 속죄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참조, 히 10 : 1이하; 레 16 : 21).26 유대인들이 제물을 드림으로써 얻은 것은 자기들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고백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자기 대신에 결례를 드렸다. 그들이 결례로 얻은 것은 자기의 불결을 고백하는 데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항상 자기의 죄와 불결에 대한 "증서"를 갱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를 준다고 해서 거기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의 글에 구약아래에서 없어지지 않던 범죄가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에 속량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히 9:15). 그러므로 사도가 의식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증서"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의 유죄와 불결을 공개적으로 확증했기 때문이다(참조, 히 10 : 3).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은총에 참여했다는 사실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총을 받았고 의식에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용한 의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게 만들었으므로, 사도는 그 구절에서 의식과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의식 자체만을 볼 때에는 사람의 구원에 "적대하는 증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람들의 의무를 증거 하는 의무적인 법적 요구 문서이기27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의식 준수의 의무로 얽어매려고 했을 때에, 바울은 정당한 논거에 입각해서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심원한 말로 다시 규정하며, 골로새 신자들을 향해서 만일 이 모양으로 끌려서 의식적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에 다시 빠지게 될 것인가를 경고했다(골2 : 16이하).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혜택을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영원한 속죄를 완수하신 후에 매일 준수하던 의식을, 죄를 증거할 뿐이고 말소하는 데는 아무 공헌도 할 수 없는 의식을 철폐하신 것이다.

 

 

 

제 8 장

 

도덕적 율법에 대한 설명 (십계명)

 

(기록화된 도덕적 율법은 자연법을 말하는 것이다. 1-2)

 

1. 십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나는 율법에 있는 십계명에1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언급한2 점이 더욱 분명 하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맨처음에 제정하신 공중 예배는 아직도 유효하다. 다음에 내가 말한 둘째 점, 즉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경건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심판이 무서워서 원하지 않으면서도 부득이 중보에게로 마음이 끌렸다는 점이 확인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요약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생각하면 반드시 즉시 그의 존엄성과 직면하게 되며, 따라서 그를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3 가르쳤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논했을 때에 우리는 이 가장 중요한 점을 설명했다. 즉, 우리 자신의 덕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신념을 일체 포기하고-참으로, 우리 자신의 완전한 빈곤상을 깨닫고 완전히 의기가 꺾여-우리는 순수한 겸손과 자기 낮추는 것을 배우게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4 주께서는 율법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하신다. 첫째로, 합법적인 명령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시며, 자기의 신성을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그 경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신다. 둘째로, 자기의 의의 표준을 발표하신 후에, 우리의 무력함과 불의함을 꾸짖으신다. 우리의 사악하고 비뚤어진 본성은 항상 그의 의에 반대하며, 선을 행하기에 너무도 미약한 우리의 능력은 그의 완전성에서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내면적인 법이5 기록되었다고 심지어 새겨졌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 두 판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영구히 무감각한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내면적으로 증언하며, 경고하며, 선과 악의 구별을 우리에게 보이며, 우리의 의무 태만을 비난한다. 그러나 사람은 오류의 암흑에 덮여 있어서, 이 자연법에 의해서는 어떤 경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확실히 사람은 경배에 대한 참된 이해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뿐 아니라, 만심과 야심이 가득하며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자기를 볼 줄 모르며, 이를테면 자기 속으로 내려갈6 줄을 모른다. 따라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며 자기의 가련상을 인정하게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둔하고 또 거만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보셔서, 우리에게 성문법을 주시고 자연법에서 너무도 모호했던 것을 더욱 분명히 증언하며, 무관심한 우리를 각성시키며, 우리의 지성과 기억에 더욱 강력한 감명을 주려고 하셨다.

 

 

 

2. 율법의 냉혹성

 

그런데 율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곧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므로, 우리를 향하여 권리상 아버지와 주님의 지위에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과 존경과 사랑과 경외로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변덕대로 움직일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기뻐하시는 일만을 지속히 행하여야 한다. 그는 의와 정직을 기뻐하시고 사악을 미워하시므로 악한 배은망덕으로 우리의 창조주를 등질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의를 존중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율법에서 배운다.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 마땅한 존경이라면, 그에게 마땅한 유일한 경배는 의와 성결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빙자해서, 빈궁해진 채무자와 같이, 갚을 수 없노라고 핑계할 수 없다.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측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이시다. 즉, 의의 친구요, 불의의 원수시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올바른 일만을 요구하실 수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의무다.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다. 만일 죄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의 정욕이(참조, 롬 6 : 12) 우리를 속박해서 아버지에게 복종할 자유가 없어졌더라도, 우리에게는 불가피성을 구실로 변명할 근거가 없다. 필연성이라는 그 악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비하시며, 성결하 시며 인자하게 복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 율법에서 배운다. 3-5)

 

3. 율법이 엄격함은 긍정적 목표를 가진다.

 

율법의 가르침에서 이 정도까지 도움을 입은 다음에, 우리는 그 가르침에 따라 자기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두 가지 일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로, 율법의 의로움을 우리의 생활을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경지에서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깨닫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으며, 그의 자녀로 인정될 자격은 더욱 없다. 둘째로, 우리의 능력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율법을 완수하기에 너무도 악할 뿐 아니라,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덕성에 대한 불신이 생기며,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따른다. 양심은 불의의 책임을 느끼면 불원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면 반드시 죽음이 무서워진다. 또 양심은 자기가 무력하다는 증거의 압력으로, 곧 자기의 능력에 대한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감정들은 겸손과 자기 낮춤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의 불의 때문에 당연히 영원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철저히 놀라서, 드디어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며 그것을 유일한 안전한 피난처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사람은 율법에 대한 빚을 갚을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깨닫고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므로, 다른 방면에서 도움을 구하며 또 기다릴 생각을 하게 된다.

 

 

 

4. 약속과 위협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의 의에 대한 존경을 받으신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의에 대한 사랑과 사악에 대한 증오를 우리 마음에 채우기 위해서 약속과 위협을 첨가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눈이 어두워 선한 일의 아름다움만을 보고는 감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극히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구하도록, 즐거운 보상으로 우리를 끌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덕행에 대한 상급을 많이 장만하셨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수고가 헛되지 않으리라고 선포하신다. 그와 반대로, 불의를 미워하실 뿐 아니라, 불의는 그의 존엄성에 대한 멸시이므로 친히 처벌하실 것이며, 이 벌은 면할 수 없으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백방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려고, 계명을 공손히 준수하는 자들에게는 현세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다 약속하신다.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징벌로서 현세의 재난과 함께 영원한 죽음이 있으리라고 위협하신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레 18 : 5) 약속과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갤 18 : 4,20) 그에 대응하는 위협은 확실히 미래의 무궁한 생명이나 죽음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仁慈)나 진노가 화제가 될 때마다, 인자에는 영원한 생명이 포함되며 진노에는 영원한 멸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에는 현세의 축복과 저주가 되는 일들도 많이 열거되었다(레 26 : 3-39, 신 28장). 그리고 그 형벌에는 하나님의 최고의 순결성이 나타나 있으며, 이 순결성은 사악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약속에서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의에 대한 보상이 사취(诈取)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그의 뜻뿐 아니라, 그의 놀랍게 후하신 마음도 증명되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해서 거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빚으로서 요구하실 완전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빚을 갚는 것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종에 대해서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복종은 기꺼이 하는 것도 아니며, 또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약속들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는 일부는 이미 말했고, 일부는 적당한 곳에서 더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7 지금은 하나님이 율법 준수를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을 더욱 밝히기 위해서, 율법에 있는 약속들은 의를 비상히 칭찬하며, 동시에 불의를 더욱 미워하도록 형벌이 제정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죄인이 죄악의 유혹에 깊이 빠져,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잊는 일이 없도록 형벌이 있는 것이다.

 

 

 

5. 율법의 완벽함

 

주께서는 완전한 의의 표준을 주실 때에, 그 모든 부분을 자기의 뜻에 관련시키심으로써 순종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셨다. 사람이 경망한 생각으로 여러 가지 의식을 고안해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수록,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경건을 자랑하는 이 불경건은 인간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난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의를 얻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을 항상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직으로 선행이라고 인정되는 것들 가운데서 율법의 계명들은 좁은 부분에 배당될 뿐이고, 무수한 인간적 교훈들이 거의 전부을 차지한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에게 한 말은 이런 방자함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신 12 : 28).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 : 32). 모세는 이미 백성에게 주에게서 여러 가지 판단과 교훈과 의식들을 받은 것이 모든 다른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혜와 총명이 된다고 증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첨가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신 4 : 9)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후에 그것으로 안식하지 않고, 엄격히 억제하지 않으면 새로운 가르침들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견하신 것이다. 이 율법에 완전한 의가 여기에 내포되었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이 말씀이 가장 강력한 속박 수단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들은 엄금된 생각의 무례를 삼가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물론, 같은 말씀이 우리를 속박한다. 의의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율법에 영구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 위에 선행을 고안하려고 굉장히 수고한다. 이 과오를 고치는 최선책은,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생각을 확고 부동하게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거기는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를 가르치신 것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경배는 순종뿐이며, 새로운 행동 방식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모두 허사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그 범위 밖에서 선행을 하려고 애쓰면서 헤매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의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때로는 모든 미덕의 어머니와 수호자라고 부르며, 때로는 그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8

 

 

 

(율법은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율법을 주신 분의 목적에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6-10)

 

6. 율법은 하나님의 법령이므로,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요구를 한다

 

그러나 주의 율법을 더 충분히 설명하려면, 율법의 기능과 용도에 대해서 내가 이미 설명한 것이9 더 적절하고 유익하게 확인될 것이다. 다만 개개의 조항을 설명하기 전에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선, 율법에 의해서 인간의 생활이 외면적으로 정직하게 될 뿐 아니라, 내면적․정신적으로 바르게 된다는 의견에서 우리는 모두 일치해야 한다. 이 점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나, 충분히 유의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이다. 이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의 성격을 평가하려면, 그 입법자의 성격에 비춰 보아야한다. 만일 어떤 왕이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다면, 마음으로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을 원하더라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바꿔 말하면, 죽을 인간이 제정하는 법의 권한은 외면적인 사회 질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의 법규는 실지로 범행을 하지 않으면 위반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사를 역력히 보시며, 외관보다 내심의 순결에 더욱 유의하시므로,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실 때에 정욕, 분노, 미움, 남의 재산에 대한 탐심, 사기 등등을 금하신다. 하나님은 영적 입법자이시므로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상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영혼이 하는 살인은 분노와 미움이며, 도둑질은 악한 탐욕이며, 음행은 정욕인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법도 우연한 사건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의도를 문제시한다고 말할 것이다.10 나도 그 점을 일정하지만, 그 목적과 의도는 외면에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법은 어떤 의도로 각 범행이 있었는가를 결정하지만, 비밀한 생각은 찾아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행에 손을 대지만 않으면 인간의 법은 만족한다. 그와 반대로, 하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상대로 내릴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키려면 우선 영혼을 억제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멸시감을 굳게 숨기면서, 눈과 발과 손과 신체 각 부위는 어느 정도 율법을 지키는 모양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내심은 전연 순종할 생각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을 사람의 눈에서 점잖게 감추기만 하면 원만히 무죄 방면이 된 줄로 생각한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들은 살인하려고 칼을 뽑거나, 창녀에게 가거나, 다른 사람의 재물에 손을 대거나 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살기(杀气)를 품으며, 정욕이 타오르며, 시기하는 눈으로 모든 사람의 재물을 보며, 그것을 모두 빼앗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점이 없다. 나는 묻는다. 그들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비위에 맞도록 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유치하고 우둔한 짓이 생겼느냐고, 바울은 그들에게 강경히 항의하며 "율법은 신령하니라"(롬 7 : 14)11고 역설한다. 사도의 뜻은, 율법은 영혼과 마음과 의지의 복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천사 같은 순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육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고 오직 성령의 향기만을 풍기는 것이 천사 같은 순결이다.

 

 

 

7.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회복하셨다

 

이것을 율법의 의미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바리새파는 악한 견해를 백성에게 감염시켰다. 율법에 거스리는 외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완수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험한 이 왜곡된 오류를 책망하시고, 부정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언명하신다(마 5 : 28).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단언하시며(요일 3 : 15), 마음속으로 노하기만 해도 "심판을 받게 되며", 중얼거리며 불평함으로써 성난 표시를 하는 사람은 "공회에 넘기울 자", 욕설과 저주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하신다(마 5 : 21-22 참조, 마 5 : 43이하). 이런 교훈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세와 같은 입법자라고 공상하며, 모세의 율법에 없는 것을 복음의 율법으로 보층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복음의 율법은 완전하다느니, 옛 율법을 훨씬 초월하느니12 하는 말이 돌아다니게 되었으나,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지극히 해로운 생각이다. 앞으로 모세의 교훈 전체를 볼 때에, 이런 견해가 하나님의 율법에 얼마나 부당한 악평을 가하는가를 모세의 말로 밝히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조상들의 성결은 위선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며, 저 의의 유일하고 영구한 규범은 버리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이 오류를 반박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성실성을 회복하셨을 뿐인데, 그들은 율법에 무엇을 첨가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리새파의 거짓말에 덮여 흐려지며 그들의 누룩으로 더럽혀진 율법을(참조, 마 16 : 6,11) 그리스도께서는 구출해서 깨끗하게 씻으신 것이다.

 

 

 

8. 올바른 의미에 도달하는 방법

 

우리의 둘째 의견은, 계명과 금지에는 말로 표현된 것 이상의 것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칙을 조절해서 레스보스 섬의 잣대가13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을 함부로 곡해해서, 무슨 해석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게된다. 그들은 이렇게 함부로 처리함으로써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율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이해할 희망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똑바르고 확실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해석이 어구(语句)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옳은가를 탐구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사람이 설명을 덧붙인 해석이 되지 않고, 입법자의 순순하고 진정한 뜻을 충실히 나타낸 해석이 되게 해야 한다. 분명히 계명들은 거의 전부가 명백한 제유법(提喻法)이 사용되었으므로, 율법 해석을 언어의 좁은 범위내에 국한하려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건전한 율법 해석은 언어의 범위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넘느냐 하는 것은 한도를 정하지 않으면 애매모호하다. 그런데 나는 계명의 이유(理由)에 주의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다. 즉, 각 계명에 대해서 그 계명을 주신 까닭을 심사 숙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훈은 모두 명령하거나 금지한다. 그 이유 또는 목적을 생각하면, 그 명령이나 금지의 진상이 곧 알려진다. 다섯째 계명의 목적은 존경을 받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존경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요점은, 하나님이 어떤 특출한 점을 주신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이 옳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들을 멸시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첫째 계명의 의도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이다(참조, 출 20 : 2-3, 신 6 : 4-5). 그러므로 이 교훈의 요점은, 진정한 경건 즉,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경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불경건을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각 계명이 문제로 삼는 것을 탐구해서 그 목적을 찾아냄으로써 마침내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나 싫어하신다고 증언하시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같은 입장에서 반대 쪽으로 추론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면, 반대되는 것은 싫어하실 것이며, 이것을 싫어하신다면, 그 반대를 기뻐하실 것이며, 이것을 명령하시니 반대되는 것은 금지하실 것이며, 이것을 금지하시니 반대되는 것은 명령하신다는 식으로 추론해야 한다.

 

 

 

9. 계명과 금지

 

우리가 지금 모호하게 언급하는 것은 실지로 계명들을 해석할 때에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으나, 마지막에 언급한 점에 대해서 다른 증거로 확인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되더라도 처음에는 혹 어리석게 생각될는지 모른다. 선한 일을 명령할 때에는, 그와 충돌하는 악한 일은 금지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이 점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한 일을 금지할 때에는 그와 반대되는 의무를 명령한다는 것도 상식적 판단으로 기꺼이 용납될 것이다. 참으로, 서로 유덕한 일을 칭찬하면, 그 반대인 죄악은 비난받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투어가 의미하는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세상에서는 죄악의 반대인 덕행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14 우리는, 덕은 이 이상의 것, 죄악과 반대되는 의무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인간의 상식은 남을 해하지 말라거나, 그런 욕망을 품지 말라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이것도 있지만, 이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이웃의 생명을 도우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내가 하는 말이 무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부당한 고통이나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하신다. 그래서 동시에 형제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사랑의 의무들을 요구하신다. 이와 같이, 계명의 목적을 보면, 우리는 계명이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일을 언제든지 밝히 알 수 있다.

 

 

 

10. 강력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율법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어 죄를 몹시 혐오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를테면 반쪽 계명을 주시며, 원하시는 점을 분명히 표현하시지 않고 제유법으로 암시하실 뿐이었는가? 흔히 다른 이유들을 말하지만, 내가 특히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즉, 죄악의 추악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육은 항상 그것을 씻어버리고 그 위에 그럴 듯한 구실로 덮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종 죄악에 대한 더욱 강렬한 증오심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범행에 대해서 그 가장 무섭고 악한 요소를 본보기로서 치켜드시며, 우리가 그것을 듣고 떨게 하신다. 우리는 이 점에 속아서, 우리의 죄악을 평가할 때에 어느 정도로 숨겨진 것은 무시하게 되는 때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이런 기만에서 해방하시려고, 우리의 사고 방식을 훈련하신다. 수많은 죄악의 전체를 이 몇 가지로 나누어, 각 종류의 추악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이것들을 연상하게 하신다. 예컨대, 분노와 미움이라는 이름만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나 미움을 저주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분노와 증오심이 금지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들이 얼마나 가증한가를 더 잘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들을 무서운 죄악의 수준에 두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서 감동을 받아, 지금까지 경한 듯이 보이던 범행의 중대성을 더 잘 숙고하는 보다 더 익숙해진다.

 

 

 

(율법의 두 판과 그 각각에게 올바로 주어진 계명 11-12)

 

11. 두 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두 판으로15 구분된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한 인상적인 언급이 여러 번 있고, 건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거기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두 동의할 것이다. 또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알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두 부분으로 나누시고 모든 의의 전체를 거기 포함시키시며, 처음 부분에는 특히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경배에 관계된 종교적 의무들을 배정하시고, 둘째 부분에는 인간을 상대로 한 사랑의 의무들을 배정하셨다.

확실히 의의 첫째 토대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다. 이것이 무너지면, 의의 모든 다른 부분도 넘어진 건물의 깨어진 조각들같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한 편으로 하나님의 존엄성에서 그 영광을 빼앗는 불경한 모독 행위를 한다면, 도둑질이나 노략질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어떤 종류의 의라고 부르겠는가? 또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모독적 언사로 더럽힌다면, 음행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어떤 의가 되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고 소멸하려고 애쓴다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의라고 하겠는가? 경건이 없는 의를 떠드는 것은 헛된 젓이다. 이것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벤 시체를 아름다운 것으로서 전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불합리한 비이성적인 짓이다. 종교는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전체에 호흡과 건강을 주는 생명 그 자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사람은 상호간의 공정성과 사랑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의의 시초와 토대라고 부른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폐지하면, 사람들끼리 실천하는 공평과 금욕과 절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옳고 그름의 심판자로서 공경할 때에, 그러한 경배에서 그들은 서로 온화하게 또 해침 없이 살 줄을 알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근원과 정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첫 판에서 하나님께서는 경건과 올바른 종교적 의무들을 가르치시며, 거기 따라서 하나님의 존엄성을 경배하라고 하신다. 둘째 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거기 합당한 처신을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 주께서는 율법 전체를 두 제목으로 요약하셨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전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눅 10 : 27, 의역: 마 22 : 37,39). 주께서 율법을 구성하는 두 부분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두 판에 담긴 계명의 분류

 

율법 전체는 두 제목 아래에 포함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변명할 가능성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십계명으로 자기에게 대한 공경과 두려움과 사랑에 관한 모든 것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로 정하셨다. 계명의 구분법을 잘 알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각 사람이 자유로 판단해야 할 일임을 기억해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논쟁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득이 이 점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제출하는 구분법을 최근에 고안된 신기한 것인 듯이 웃거나 놀라는 독자들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을 열 마디 말씀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 의해서 자주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확실치 않은 점은 십계명의 수효가 아니라, 그 구분법이다. 처음 판에 계명 셋을 넣고 나머지 계명들을 둘째 판에 넣는 사람들은 우상에 관한 계명을 십계명에서 빼거나, 적어도 첫째 계명 속에 숨긴다. 주께서 그것을 독립된 계명으로 주신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들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째 계명을 어리석게 둘로 쪼갠다.16 그뿐 아니라, 그들의 구분법은 비교적 순결했던 시대에는 몰랐던 일이다. 이 점은 앞으로 곧 알려질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처음 판에 네 조항을 넣지만, 첫째 계명 대신에 계명이 없는 약속을 넣는다. 그러나 나는 아주 분명한 증거에 의해서 설복되기까지는 모세가 언급한 열 마디 말씀을 십계명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 열 마디는 가장 아름다운 순서로 배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의견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더 가능성이 있는 듯한 것을 따르겠다. 즉, 그들이 첫째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 전채에 대한 서론의 위치에 두어야 한다. 그 다음에 십계명 중의 넷을 첫째 판에 두고, 여섯을 둘째 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순서로 계명들을 논하겠다. 오리겐은 마치 이 구분법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듯이, 아무 이의 없이 제시했다.17 어거스틴도 보니파키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구분법을 지지하며, 계명들을 열거할 때에도 한 분 하나님을 경건한 복종으로 섬기라,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순서를 지킨다. 그는 이미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그것은 영적인 참 안식일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8 다른 데서 그가 처음 구분법을 좋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대단히 빈약하다. (첫째 판에 계명 셋을 넣을 때에) 셋이라는 수는 삼위 일체의 신비를 더욱 분명히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그곳에서, 다른 점들에서는 우리의 구분법을 더 좋아한다고 인정한다.19 이 분들 이외에 마태복음에 대한 저 미완성 주석을20 쓴 사람도 우리편에 섰다. 요세푸스가 두 판에 각각 다섯 계명을 배당하는 것은 필연코 당시의 일반적 견해를 따른 것이리라.21 이 구분법은 경건과 사랑을 혼동하는 점에서 불합리할 뿐 아니라, 주 예수의 권위에 의해서 반박된다. 마태에 의하면, 주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둘째 판의 규정 가운데 넣으신다(마 19 : 19).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로 하겠다.

 

 

 

(각 계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 13-50)

 

첫째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 : 2-3)

 

13. 머리말("나는……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 처음 문장을 첫째 계명의 일부분으로서 읽든지 또는 따로 분리하여 읽든지 간에, 그것이 율법 전체에 대한 일종의 서문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쪽으로 해도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첫째로, 율법을 제정할 때에는 그 율법이 멸시를 받아 폐지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제정하시려는 율법의 존엄성이 멸시를 받는 일이 결코 없도록, 특히 조처를 취하신다. 이 일을 확보하시기 위해서 삼중적인 증명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권위에는 권능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셔서, 선민이 그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그들을 억제하신다. 그들에게 은총을 약속하셔서, 은총의 즐거움으로 그들을 끌어 성결에 대한 열성을 일으키려 하신다. 유대 민족에게 주신 은혜들을 자세히 말씀하셔서, 자기의 친절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려 하신다.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권위와 합법적 지배를 의미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롬 11 : 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 안에 있는 것이라면, 만물을 주께로 돌리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의 멍에를 메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인데,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해괴 망측한 짓이겠기 때문이다.

 

 

 

14. 서문 ("나는……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에게는 명령할 권한이 있으며, 하나님께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 다음에, 사람을 부득이한 필연성만으로 강요하시는 듯한 인상을 주시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교회의 하나님이시라고도 선언하심으로써 즐거운 생각으로 그들을 다정하게 끌어당기신다. 이 말씀에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에(렘 31 : 33) 포함된 상호 조화가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영생불사를 확인하실 때에, 주께서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언멍하신 사실을 논거로 삼으셨다(마 22 : 32).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택한 것은 너희에게 금생에서 은혜를 줄 뿐 아니라, 내생의22 축복도 주기 위해서다"라고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율법의 여러 구절이 증언한다. 주께서 자비로 우리에게 자기 백성 가운데 있을 자격을 주셨으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백성과 성민으로 택하셨으며, 우리는 그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신 7 : 6, 14 : 2, 26 : 18-19의 융합).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거룩하게 되라"고 권고하신다(레 11 : 44, 19 : 2). 이 두 발언에서 예언자의 엄연한 힐문이 나왔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사랑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 : 6).

 

 

 

15.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다음에 그의 은혜를 회상하신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배은망덕은 타기할 큰 죄악인 만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강렬한 감동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 바로 최근에 있은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상시키셨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할 만한 놀랍고 위대한 은혜였으므로, 자손들에게도 효력을 미칠 것이었다. 또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들이 가련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그 자유를 주신 이에게 복종과 기꺼운 섬김으로써 경배하기 위해서라고 주께서는 말씀하려 하신다. 그는 또 우리가 진정한 경배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항상 자기의 어떤 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자기의 거룩한 임재(臨在)와, 우상이나 조작된 신들과의 차이를 알리신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허망한 데로 기울어 질 뿐 아니라, 경솔․담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으면 즉시 어떤 어리석은 공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23 그러므로 이 악한 경향을 막는 치유책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함을 확실한 칭호로 장식함으로써 우리들을 이를테면 포위하시며, 우리가 전후 좌우로 헤매거나 경솔하게 어떤 신(神)을 조작하지 못하게 하신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신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고자 할 때에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때에 쓰신 표식들을 그에게 입히며, 이를테면 그 표식들 안에 국한한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출 3 : 6), 예루살렘 성전에서 좌정하게 될(암 1 : 2, 합 2 : 20), "그룹들 사이에" 계시다고 하며(시 80 : 1, 99 : 1, 사 37 : 16), 그 밖의 비슷한 표현들을 쓰는 것은 하나님을 어느 한 곳이나 한 백성에게만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 규례에서 어긋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뜻을 표시하신, 그 하나님을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또 우리의 의견이 일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여기서 해방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실 권리가 있는 하나님께 그들이 더욱 열렬하게 헌신하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이 생각해서는 안되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포로생활하던 시대는 우리 모든 사람의 영적 노예 상태를 예표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하늘 변호자께서 그 권능의 강한 팔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의 나라로 인도하시기까지 우리는 모두 영적 포로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자기 이름을 경배하게 만드실 의향으로, 바로의 견딜 수 없는 압박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 그와 같이 지금 그는 자기 백성이라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모두 악마의 무서운 힘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이 악마의 힘을 저 육체적 노예 상태가 예표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분기해서 가장 높으신 왕에게서 유래했다고 하는 그 율법에 유의해야 한다. 그가 만물의 근원이시므로 만물은 그를 궁극적 목표로 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모든 사람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데 사로잡혀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배우며, 친절하신 그에게서 모든 풍성하고 선한 것과 함께 영생의 영광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6. 첫째 계명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에 대해서 그 근거를 마련하시고 확립하신 후에, 첫째 계명을 말씀하신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 : 3).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는 자기만이 자기 백성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시며, 그들에 대해서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하거나 흐리게 하는 불경건과 미신을 일소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진실하고 열렬한 경건으로 자기를 경배하며 찬양하라고 명령하신다. 계명의 단순한 용어가 거의 이 뜻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있게 하면" 반드시 그에게 속한 것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고 금지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다른 신에게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이 수없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편의상 네 가지로, 즉 ⑴ 숭배(여기에 양심의 영적 복종이 부록같이 첨가된다), ⑵ 신뢰, ⑶ 기원(祈愿), ⑷ 감사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나는 "숭배"(adoration)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의 양심을 바치는 것을 숭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다. ⑵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서 그를 굳게 믿고 안심하는 것을 "신뢰"라고 부른다. 그에게 모든 지혜와 의와 힘과 진리와 인애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와 연결될 때에만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⑶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과 도움만을 우리의 의지할 것으로 믿어 구하는 마음의 습성을 나는 "기원"이라고 부른다. ⑷ 모든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감사"라고 부른다. 주께서는 이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신에게 옮겨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신을 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종교를 멸시하는 악인들은 흔히 모든 종교를 통틀어 조롱하며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경건이 가장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존엄성을 명상하며 경외하며 경배하며, 그의 축복에 참여하며, 항상 그의 도움을 구하며, 그의 역사(役事)의 위대성을 인정해서 찬양으로24 축하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유일한 목표로서 갈망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해야 한다. 미신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며, 여러 가지 신들 사이를 방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우리가 전에 말한 것을25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는 모든 날조된 신을 몰아내야 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친히 요구하시는 경배를 부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감축하는 것은 부당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 항상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26

다음에 있는 "내 앞에"라는 어구는 계명 위반을 더욱 가증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우리가 날조한 신으로 대신할 때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렴치한 여자가 자기 남편 앞에 정부를 끌어들여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권능과 은총으로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신다고 증언하신 것은, 그들이 새 신을 끌어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모독행위를 보시리라고 경고하며, 그들의 반역죄를 더욱 효과적으로 막으시려는 뜻이다. 이런 대담한 행위에는 불경건한 짓이 많이 첨가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만들든 간에, 자기에게는 모두 보인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건이 하나님의 시인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배교(背教)에 대한 극히 은밀한 생각도 없는 맑은 양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자기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외면적 고백에서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전에서 완전하며 부패하지 않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의 가장 비밀한 구석까지도 보신다.

 

둘째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 : 4-5).

 

 

 

17. 볼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

 

앞의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히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자기 이외에 다른 신들을 상상하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제 그는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어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자기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떤 경배로 자기를 공경할 것인가를 더욱 밝히 선언하신다. 그러면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경배가 미신적인 의식으로 모독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합당한 경배를 즉, 자기가 친히 제정하신 영적 경배를 따르게 하신다. 그뿐 아니라, 이 범행의 가장 큰 허물을 곧 외형적 우상 숭배를 극악한 잘못이라고 지적하신다.

이 계명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 부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예속시키려는 바꿔 말하면, 그를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무엄한 짓을 억제한다. 둘째 부분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일체 금한다. 여기서는 모독적이며 미신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시하기 위해서 보통 만드는 모든 형상들을 간단히 열거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해, 달, 기타의 광명체들을 의미하며, 또한 새도 의미한다. 신명기 4장에서는(17,19절) 그의 마음을 피력하시면서 새와 별에 대해 언급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지각없이 이 표현을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을27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부분들은 저절로 알려지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겠다. 우리는 이미 제 1 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만드는 보이는 형상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가 되며 따라서 우상이 나타나면 즉시 진정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배웠다.28

 

 

 

18. 둘째 계명의 위협적인 말

 

첨부된 경고는 우리의 태만을 버리게 하는 데 적지 않은 효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하나님인즉(또는, '강대'한 즉, 하나님의 이 이름은 '힘' 이라는 말에서 왔기 때문이다),29 "나는 질투하여 내 이름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 : 5-6)30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만 우리가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여기에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알리시며, 그것을 멸시하거나 훼방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엘"은 "힘"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계명 본문에 그렇게 번역해 넣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떠한 동참자도 용인할 수 없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부르신다. 셋째로, 어떤 피조물이나 새겨 만든 형상에게 하나님의 존엄한 영광을 옮기는 자에 대항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수호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조상의 불경건을 모방할 손자와 증손자들의 대에까지 미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먼 후손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자비와 친절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해서 남편의 품성에 서시는 때가 심히 많다. 참으로 우리를 교회외 품안에 받아들이심으로써 우리와 맺으시는 인연은 거룩한 혼인과 같으며, 이것은 상호간의 신의를 기초로 삼아야한다(엡 5 : 29-32). 하나님은 진실하고 성실한 남편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시는 대신에, 우리에게서는 사랑과 정조를 배우자로서 요구하신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사탄과 정욕과 육의 추한 욕망에 맡겨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배교를 책망하실 때에, 그들은 체면을 버리고 간음으로 더러워졌다고 개탄하신다(렘 3장, 호 2 : 4이하, 참조, 사 62 : 4-5). 거룩하고 정결한 남편일수록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처를 더욱 분하게 여긴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장가드신 주께서는(참조, 호 2 : 19-90) 우리가 그의 거룩한 혼인의 순결을 버리고 사악한 정욕으로 더러워질 때마다 불타는 듯한 질투를 나타내신다. 그가 특별히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거룩한 존엄성을 경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경배하거나 미신으로 경배를 오염시킬 때 이를 더욱 느끼신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절대로 부패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신을 섬길 때에 우리는 혼인의 맹세를 어길 뿐 아니라, 간부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혼인 침상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19.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이르게 하거니와"

 

하나님이 자기는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에 이르게" 하리라고 하시는 의미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죄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정성에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강제로 담당하게 않겠다고 친히 선언하신다(겔 18 : 20). 그러나 조부의 죄가 후대에 미친다는 이 문장은 자주 반복된다. 모세는 자주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여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시는 여호와여"하고 말했다(민 14 : 18, 출 34 : 6-7). 예레미야도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라고 한다(렘 32 : 18). 어떤 사람들은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받는 벌로만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벌은 자녀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가하시는 때가 많으므로, 부모의 죄악 때문에 자녀들이 받아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의 죄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끌려 가리라고 선언한다(사 39 : 6-7). 바로와 아비멜렉의 가문들도 아브라함을 해한 죄로 재앙을 받았다(창 12 : 17, 20 : 3,18). 그러나 이 점을 들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해석이라기보다 도피가 된다. 여기서와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현세에 국한된 벌보다 더 큰 벌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의로운 저주는, 악인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를 괴롭힌다고 해석해야 한다. 저주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아비에게서 가장 부끄러운 생활밖에 기대할 것이 없지 않은가? 또는 아비의 죄악 때문에 주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같은 멸망의 길을 갈 것이 아닌가? 끝으로, 가증한 사람들의 저주받은 후손인 그 손자와 증손자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돌진할 것이 아닌가?

 

 

 

20. 조상의 죄에 대한 벌이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모순되지 않는가?

 

우선 이런 벌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 않는가를 검토하겠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성품이 전적으로 정죄를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을 위해서 멸망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의 죄악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 어떤 불공정한 증오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도록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할 아무 근거가 없다. 추문이 자자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자기의 죄악 때문에 벌을 받아, 그들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다고 해서, 이와 같은 공정한 천벌에 대하서 누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에 대한 벌이 아들에게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신다(겔 18 : 20). 그러나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불행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고 하는 속담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겔 18 : 2). 그들이 생각한 뜻은, 자기들은 의롭건만 조상들의 죄 때문에 애매한 벌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노는 용서가 없고 은위의 병행도 없다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고 그들에게 언명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의로운 아들이 악한 아비의 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계명의 위협도 이런 뜻이 아니다. 주께서 악인들의 가문에서 자기의 은총과 진리의 광명과 그 밖의 구원 수단들을 제거하실 때에, 여기서 논의되는 벌이 실현되는 것이라면-즉,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며 눈이 어두워진 자손이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그들은 조상의 악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세상 고통을 받으며 드디어 영원한 멸망에 빠진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며, 그 원인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악인 것이다.

 

 

 

21.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를 천대까지31 베푸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이 말씀은 성경에 자주 나오며(신 5 : 10, 렘 32 : 18), 교회에 대해서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창 17 : 7) 엄숙한 언약에도 삽입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은 "의인이 죽은 후에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한다(잠 20 : 7, 의역).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양육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양육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경건자의 가문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신 언약에서 이 축복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신자들에 대한 특별한 위로가 있으며, 반대로 악인들에게는 큰 공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도 의와 악의 기억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시되어, 의에 대한 축복과 악에 대한 저주가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면, 의나 악을 행하는 당자들에게는 더욱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의 후손이 개선되며 신자의 후손이 타락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기의 선택을 방해할 수 있는 영구한 규정을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의인을 위로하며 악인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항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공허하거나 무력한 경고가 아니기만 하면 충분하다. 몇몇 악인에 대한 생전의 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증언하며, 죽을 때까지 벌을 면하는 죄인들도 모두 앞으로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증언이 된다. 그래서 아비의 덕택으로 아들이 받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를 보이시기 위해서 이 축복의 한 예를 드심으로써,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끊임없고 영구한 은혜를 증명하신다. 아비의 죄악을 아들에게서 추궁하심으로써 모든 악인들은 자기의 범법 때문에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 구절에서는 이 후자의 확실성에 특히 관심을 보이신다. 또 겸해서 자기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벌은 사대(四代)에 국한하시고 자비는 천대(千代)에 미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 : 7).

 

 

 

22. 계명의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의 존엄성을 우리가 거룩히 받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불순하거나 불경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금지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경외하도록 열성과 주의를 다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신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 항상 경외하며 조심하도록, 사고와 발언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논평할 때에도 그에게 영예가 되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열심히 준수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며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며 그의 거룩한 이름의 존엄성에 일치하며 그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야심이나 탐욕이나 재미를 위해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신비들을 경솔하게 또는 패악하게 왜곡 남용해서는 안 되며, 그 말씀과 신비들에는 그의 존엄한 이름이 새겨져 있으므로 항상 존경하며 존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련한 인간들이 흔히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물리치고, 우리는 그의 행적 훼방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줄로 인정하는 일에 관해서는 그의 지혜와 의와 인애를 찬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든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긋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허망되고 악한 일에 남용하여 더럽히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어 있으므로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존엄성이 사라지고 점점 멸시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기 쉬운 경솔한 태도도 심히 악하거든, 하물며 여러 가지 미신에 접신술과 무서운 저주와 불법한 제마술과 기타 악한 주문들에 악용하는 자들은 죄가 훨씬 더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계명은 특히 맹세와 관련이 있다. 맹세에서는 주의 이름을 가장 가증하게 악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성 모독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맹세를 언급하신다(참조, 신 5 : 11). 이 계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의 이름에 대한 경외에 관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계명이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용한 반복이 될 것이다. 사랑의 문제는 둘째 판에 미루었으며, 거기서 인간 사회를 해치는 위선과 위증을 비난하실 것이다. 율법의 구분법으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두 판에 배열하신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자기의 이름의 거룩함을 보호하지만, 인간 상호간의 의무를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결론한다.

 

 

 

23. 하나님께 한 고백으로서의 맹세

 

우선, 맹세란 무엇인가를 말해야겠다. 우리가 하는 말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이 맹세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모욕이 포함된 저주는 맹세라고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이런 확인법을 합당하게 쓰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경배라고 하는 구절이 성경에는 많다. 예를들면, 앗수르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을 볼러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서 예언할 때에, 이사야는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리라"고 한다(사 19 : 18). 바꿔 말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써 그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 대해서도,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라"고 한다(사 65 : 16). 예레미야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내 백성을 가르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리라"고 말한다(렘 12 : 16). 또 우리가 증인으로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증언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 불변하는 진리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을 진실에 대한 가장 적합한 증인이실 뿐 아니라, 숨은 일을 드러내어 진실을 확인하는 유일한 증인이며, 마음의 뜻을 아는 분으로 인정한다(고전 4 : 5). 사람들의 증언이 무력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달려가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한다. 특히 양심에 감추어 있는 일을 선언할 필요가 있을 때에 그렇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다른 신들로 맹세하는 자들에 대해서 심히 노하시며, 이런 맹세를 노골적인 반역으로 해석하신다.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다"(렘 5 : 7). 그리고 이 범과의 중대성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나는 멸절하리라"고(습 1 : 5-4)하는 처벌의 위협 속에서 선언하신다.

 

 

 

24.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짓 맹세

 

우리의 맹세에는 주의 이름에 대한 경배가 포함되기를 주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따라서 맹세에 경배가 아닌 거만이나 경멸이나 멸시가 내포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맹세를 하는 것은 사소한 모욕이 아니다. 율법에는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레 19 : 12). 하나님에게서 진실성을 빼앗는다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나 그를 허위의 옹호자와 승인자로 만드는 것은 그의 진실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라고 할 때에, "내 아들아‥‥‥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수 7 : 19)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대한 불경이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어떤 거짓으로 낙인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 것을 보면(요 9 : 24), 유대인들이 맹세를 시킬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 있는 표현들은 예컨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삼상 14 : 39),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4 : 44, 참조, 삼하 3 : 9, 왕하 6 : 31),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 롬 1:9) 등 이런 조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를 때에는 반드시, 만일 우리가 속인다면 하나님이 그 거짓 맹세에 대해 처벌해 달라고 비는 것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다.

 

 

 

25. 불필요한 맹세

 

진실할지라도 필요하지 않은 맹세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면, 하나님의 이름은 저속한 것이 된다. 그런 때에도 헛되이 부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동시에 맹세는 정욕이나 욕망을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서 허락하여 제정하신 것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불필요한 일에 맹세를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경건이나 사랑을 위한 경우 이외에 어떤 다른 필요성을 빙자할 수 없다. 이 문제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제멋대로 죄를 지으며, 그것이 관습이 되어 더 이상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경미한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보통으로 또 닥치는 대로 욕되게 하고 있다. 이 중대한 타락 행위가 오랫동안 계속되어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담대하게 되며 한 습성이 되어, 이것을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계명은 변할 수 없으며, 경고는 확고 부동하여, 언젠가는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천벌이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다른 방면에서도 어기고 있다. 우리가 맹세할 때에 하나님 대신에 그의 거룩한 종들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옮기는 것이며(출 23 : 13) 분명히 악한 짓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특별한 계명을 주시며(신 6 : 13, 10 : 20),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특별히 금지하신 데는(출 23 : 13) 타당한 이유가 있다. 사도도 이 일을 분명히 증거하여,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는"(히 6 : 16-17)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고 썼다.

 

 

 

26. 산상수훈은 이런 종류의 맹세를 금지하지 않는가

 

재세례파는 맹세에 대한 이 신중한 태도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맹세를 예외 없이 배척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맹세 금지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신 것같이 전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마 5 : 34,37, 참조, 약 5 : 12)32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생각 없이 그리스도와 충돌하며,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폐지하려고 지상에 내려오신 듯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의 원수로 만든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율법 아래에서 합법적인 것으로서 허가하실 뿐 아니라(이 점만으로 충분할 것이지만), 필요한 때에는 사용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2 : 10-11).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하시며(요 10 : 30), 자기는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으며(요 10 : 18), 자기의 교훈은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요 7 : 16) 말씀하신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일찌기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시인하신 일을 후에 금지하며 비난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을 자기 모순에 빠뜨리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다소의 난점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에 시간을 조금 소비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도하신 바를 주시하며, 그가 이 구절에서 목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율법을 완만하게 하거나 강화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가 거짓된 방법으로 매우 부패하게 만든 것을 다시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맹세를 전적으로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표준을 어긴 맹세만을 배척하셨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보통 위서만을 피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거짓맹세 뿐 아니라, 허망하고 무용한 맹세도 금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장 확실한 해석자이신 주님은 거짓 맹세뿐 아니라 맹세 자체가 나쁘다고 경고하신다(마 5 : 34).

무슨 까닭에 맹세하는 것이 나쁜가? 분명히 주께서는 헛되이 맹세하는 것을 의미하신다. 그러나 율법에서 칭찬하는 맹세는 건드리시지 않는다. 우리의 논적들은 "도무지"라는 말을 완고하게 붙잡고33 더 강력한 추론을 하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맹세"에 붙지 않고 그 다음에 있는 맹세의 형식에 붙는다. 그들이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예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의 모든 구실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으면 천지를 두고 맹세하는 것으로 도망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막아버리신다. 우리가 겸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인 형태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생명의 빛이나 먹는 빵이나 자기의 세례나 그 밖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표적을 두고 맹세한다.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는 구절에서(마 5 : 34-35) 미신을 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함부로 간접적인 맹세를 해도 나쁘지 않다고 하는 자들의 간교한 궤변을 논박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쓰지 않는 듯이 말하지만, 그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확실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천사의 이름을 하나님 대신에 쓰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이교민족들은 왕에게 아첨하는 의미로 왕의 생명이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는 악풍이 있었다. 이런 거짓된 신격화는 유일신의 영광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써서 우리가 하는 말의 확인을 얻으려고만 할 때도, 비록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이런 모든 너절한 맹세는 하나님의 숭엄성을 해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금지하심으로써 이런 방자한 행동의 헛된 구실을 빼앗으신다. 내가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야고보도 같은 뜻으로 반복한다(약 5 : 1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짓인데도 불구하고 이 경솔한 짓은 언제든지 세상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라는 말을 문제의 핵심에 관련시켜서, 맹세는 예외 없이 불가하다는 듯이 해석한다면, 거기 즉시 첨가된 "하늘로도 말라‥‥‥땅으로도 말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이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허물을 경감해 준다고 생각한 그 궤변을 그리스도께서 반박하신 것이 분명하다.

 

 

 

27. 그러므로 재판 받지 않을 맹세는 필연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

 

주께서는 위의 구절에서, 율법이 금지한 맹세만을 비난하셨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가 가르친 완전성의 실례를 친히 보여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경우에 맹세하는 것을 주저하시지 않았다. 또 모든 점에서 선생에게 복종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제자들도 같은 예를 따랐다. 만일 맹세가 전적으로 금지되었다면, 누가 감히 바울이 맹세했을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사정상 필요한 때에 그는 서슴지 않고 맹세했으며, 어떤 때에는 저주까지 첨가했다(롬 1 : 9, 고후 1 : 23).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공적 맹세만이 이 금지에서 제외된다고 믿는다. 예컨대, 관리가 시키는 맹세, 군왕들이 조약을 엄숙하게 비준할 때에 쓰는 것, 또 백성이 군왕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 군인의 입대(入队) 선서 등이다. 바울이 복음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맹세도 그들은 이 부류에 넣는다. 사도들은 직무상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적 사절이기 때문이다.34 물론 이런 맹세들이 가장 안전한 것임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더 확실한 증언에 의해서 지지되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문제에서 관리는 증인에게 맹세를 강요할 의무가 있으며, 증인은 선서하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사도는 인간의 분쟁은 이런 수단으로 해결된다고 말한다(히 6 : 16). 맹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계명에서 확고한 승인을 받는다.

또 고대 이교도들이 엄숙한 공직 선서를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하는 일반적 맹세는 하나님의 존엄성이 들어 있지 않다는 듯이, 거의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 맹세일지라도 성결한 의도로 신중히 또 경건하게, 그리고 사정상 필요해서 한 것이라면, 그것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할 것이다. 그런 맹세에는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인(私人)들이 중대하고 진지한 문제에 관련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 합당하다면(삼상 24 : 12),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기를 원하는 것은 더욱 큰 근거가 있다. 그대의 형제가 그대를 배신자라고 비난할 때에, 그대는 사랑의 의무로서 해명하려고 할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의 완강한 악의 때문에 그대의 명예가 위태롭게 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당한 때에 그대의 결백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원하더라도 범과가 되지 않는다. "심판"과 "증언"이라는 말들을 비교하면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문제는 작은 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례가 대단히 많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비멜렉과 한 서약을 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창 21 : 24, 26 : 31), 야곱과 라반은 확실히 사사로운 개인들로서 서로 맹세함으로써 동맹을 확인했다(창 31 : 53-54). 보아스는 개인으로서 약속한 결혼을 같은 방법으로 룻에게 확인했다(룻 3 : 13). 오바댜는 개인으로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엘리야를 설복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맹세로 확인했다(왕상 18 : 10).

이와 같이 우리의 맹세를 규정하는 가장 좋은 원칙은 경솔하며 무분별하며 함부로 하는 또는 너절한 맹세가 되지 말고, 정당한 필요가 있어서 하는 맹세가 되라는 것이다. 즉, 주의 영광을 변호하거나 형제의 덕을 세우려는 것이라야 한다.35 이것이 이 계명의 목적이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 : 8-10).

 

 

 

28.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해서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없는 특별한 고려를 하므로, 해석하는 순서도 약간의 차이가 필요하다. 초대 교부들은 이 계명을 예시(豫示)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다른 상징들과 함께 폐기된 일이 즉, 어느 하루를 외면적으로 지키는 일이 이 계명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36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들은 문제의 절반만 언급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깊이 해석하며, 이 계명을 준수하는 세 가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첫째로, 제 칠일의 안식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안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다.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밖에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9. 약속으로서의 안식일 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서 이 영적 안식의 예시(豫示)가37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 이 계명에 대해서와 같이 엄격한 복종을 명령하신 계명이 거의 없다(민 15 : 32-36, 참조, 출 31 : 13이하, 35 : 2). 모든 경건이 전복되었다는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안식일을 더럽히며 범하며 지키지 않으며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공경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고(겔 20 : 12-13, 22 : 8, 23 : 38, 렘 17 : 21,22,27, 사 56 : 2),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는 최고의 칭찬을 주셨다. 따라서 신자들도 다른 계명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대한 계시를 가장 존중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레위 사람들은 공회 앞에서 말했다.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느 9 : 14). 율법의 모든 교훈 가운데서 안식일을 극히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교훈은 이 신비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며, 모세와 에스겔이 이 존엄성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고 하며(출 31 : 13-14, 참조, 35 : 2),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라"고 하셨다(출 31 : 16-17). 에스겔은 이 뜻을 더욱 자세히 표현하지만, 그 요점은 안식일이 한 표징이라는 것과, 이 표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겔 20 : 12).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를 억제하는 것이라면, 외면적인 표징과 내면적인 실상 사이에 아주 긴밀한 일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쉬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를 바쳐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맡겨야 하며, 우리의 모든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한 우리 자신의 일은 일체 쉬고,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며(히 13 : 21),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도록(히 4 : 9) 해야 한다.

 

 

 

30. 제 칠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칠일 중 하루를 지키는 것은 이 영원한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었다. 주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그들이 더욱 경건하게 그 날을 지키게 권장 하셨다. 그가 조물주를 본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열심을 자극시키는 데 적지 않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완전수로 되어 있는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어떤 비밀한 뜻을 캐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수를 택한 것은 영구성을 표시하시려는 것이며, 이유가 있다. 모세의 말이 이 점을 지지한다. 그는 차례차례 계속되는 낮과 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이 그 창조주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날로 끝맺는다(창 2 : 3). 이 수는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주께서는 이와 같이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는 안식이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안에 있는 복된 안식을 가지기 시작하며, 매일 새로운 전진을 성취한다. 그러나 아직도 육과의 싸움이 계속하고 있으므로, "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대한 이사야의 말이(사 66 : 23) 실현될 때까지는,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는(고전 15 : 28) 안식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자기의 안식이 완성될 것을 백성에게 대략 알리시며, 그들이 평생 안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명상함으로써 이 완성을 동경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38

 

 

 

31.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다

 

만일 누가 일곱이라는 수에 대한 이 해석을 너무 미묘하다고 해서 싫어한다면, 나는 더 간단히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께서는 하루를 정하셔서 백성이 율법의 지도하에 영적 안식을 끊임없이 명상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일곱째 날을 제정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혹은 그 날로서 충분하리라고 보셨다고 하며, 혹은 자기가 하신 예를 보여 주심으로 백성을 더욱 잘 분발시키려 하셨다고 하며, 흑은 적어도 그들이 조물주를 본받게 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안식일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셨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주로 제시된 신비를 우리의 수고를 영구히 쉰다는 점을 보존하기만 하면,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간에 별로 차이가 없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이 점을 회상하게 만들며, 신체적 노동만 하지 않으면 의무를 완전히 다한 줄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려고 반복 호소했다. 이미 인용한 구절 이외에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 58 : 13-14).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 : 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 : 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 : 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32. 넷째 계명은 어느 정도까지 외적인 법규를 벗어나는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둘째와 셋째 이유들은 고대의 그림자로 돌릴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똑같이 적용된다.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⑴ 일정한 날에 모여 말씀을 들으며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기도를 드려야 한다(참조, 행 2 : 42). 그리고 ⑵ 종들과 노동자들의 노고를 쉬게 해야 한다.39 주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에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처음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만 봐도 증거가 많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둘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 : 14-15). 또 출애굽기에서는,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숨을 돌리리라"고 한다(출 23 : 12). 이 두 가지 일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우리에게 명령하며,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모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 그러나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며 질서있게 해야 한다(고전 14 : 40) 예정과 규정이 없이는 적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주께서 유대인들의 곤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우리도 같은 곤란을 느낀다면, 아무도 이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우리의 지극히 천명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일에도 유의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33.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지금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일에 관해서 소동을 일으키므로,40 나는 부득이 이 문제를 길게 논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들을 지키기 때문에, 유대교의 정신을 받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것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가르친다(골 2 : 17). 그래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아직도 날들을 지키니, 자기는 그들 사이에서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냐고 염려한다(갈 4 : 10-11). 그리고 날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단언한다(롬 14 : 5).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사도가 어떻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를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지키는 목적을 사회 및 교회의 질서에 두지 않고, 영적인 일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보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육체 노동을 쉰 것은 육체 노동이 거룩한 연구와 명상을 방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중히 그날을 지킴으로써 옛적에 권장된 신비적 의식들을 존중하노라고, 일종의 소심에서 오는 상상을 한다. 사도는 날에 대한 이 어리석은 구별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사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합법적 날짜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가 세운 교회들을 이 목적으로 안식일을 보존했다.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하라고 지정했다(고전 16 : 2). 미신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주일보다 유대인들의 성일들에 위험성이 더 많았다. 미신을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놓았고,41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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