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십자가의 도(道)/고전1:18-2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20:42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맞아서 ‘십자가의 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도’란 한문으로 ‘길 도(道)’자로 길을 의미합니다. 즉 살 길을 알려주는 진리나 윤리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 길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나 종교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각기 바른 진리를 알려 주겠다고 종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불교, 유교, 회교, 도교, 조로아스타교, 남묘호랑교, 유대교, 태극교입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는 가정과 사회를 건전하게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어느 종교는 사회를 퇴보하게 만들고 정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과 사회가 바로 되려면 올바른 종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바른 삶을 주는 도, 개인이나 사회를 바르게 만들어 주는 종교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오직 ‘십자가의 도’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불교나 유교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하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나타남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4:6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을 열 수 있는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신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불교나 유교를 믿어서 잘된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가 정신적으로 병들었던 이유는 바로 불교나 유교가 그 사회를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불교를 보십시오. 미신, 점쟁이, 무당과 혼합하여 이 사회를 아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원래 불교는 그러한 미신이나 무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질되었습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를 보십시오. 얼마나 형편없이 못사는 나라가 되었습니까? 거지가 득실거리는 비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하게 뻗쳐가는 종교가 있다면, 이슬람교입니다.

전 세계의 5분지 1이 이슬람교도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 보십시오. 기름이 대단히 많이 나는 나라이지만, 종교를 잘못 믿음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때 가보면서 다시 한 번 그러한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다섯 가지 신앙적인 의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1)신앙고백으로,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시인해야 합니다. (2)기도생활로, 하루에 해들 때, 정오에, 오후 중반에, 해질 때, 잠들기 전 등, 하루 다섯 번 손과 얼굴에 땅에 대고 기도해야 합니다.

(3)구제생활로, 자기 수입의 40분의 1을 구제해야 합니다. (4)금식으로, 라마단 기간이 한 달 동안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음식과 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5)성지순례로, 적어도 일생 한 번은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엄격한 종교 의무에 얽매여 모든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금식기간 동안은 낮에는 굶고 밤에는 지나치게 폭식함으로 건강에도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네 사람까지 아내를 둘 수 있는 것과 여인들은 외출할 때는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함으로 여성들의 인권은 너무나 비참할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여성분들은 크리스챤이 된 것을 항상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스람권에 비해서 서구사회나 미국사회를 가보면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서 큰 감탄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야만족이던 그 사회를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 얼마나 잘 풍요로운 사회, 얼마나 찬란한 문명사회가 되었는지요? 세계 선진국은 거의가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가정과 사회에게 가장 좋은 영향을 끼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현세에서만 좋은 열매를 주는 종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는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망한 가정이나 사회, 국가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수(眞髓)는 바로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4복음서를 읽어보면 3분지의 2가 십자가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십자가 왜 중요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십자가는 성경의 지혜를 여는 열쇠와 같다는 점입니다.
본문 18절에서 25절 사이에 ‘지혜’라는 말이 8번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애써도 성경의 비밀, 구원의 문, 하나님의 세계를 열지 못했던 것은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고 율법의 열쇠로 하나님의 지혜를 열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율법이라는 열쇠로 열려고 하나 번번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여는 열쇠는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십자가라는 돋보기를 통해서 볼 때만 하나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집이라도 열쇠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때로 열쇠가 없어서 문을 열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온갖 도구나 철사를 동원하여 열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열쇠를 찾아서 돌리면 철거덕 열립니다.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성경의 열쇠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해야 모든 비밀이 열립니다. 부활의 길이 열리고 영생과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도를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주었음에도 십자가를 보는 인간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한 대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는 부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큰 이적을 나타내서 식민지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등 제반 문제를 기적으로 다 해결하고 다윗이 통치하던 이상의 나라, 지상낙원을 이룰 줄 소망하고 있었기에 십자가로 통해서 죄 용서를 받고 의로워지며 구원받는 다는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사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제일로 여기는 철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사상이든지 논리정연 해야 하는데 ‘십자가의 도’는 너무나 비합리적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앗수르나 바사, 갈타고, 이집트, 헬라, 로마에서 가장 흉악한 죄수들에게 사형을 시키는 가장 추한 형틀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그 거룩한 천국에 간다는 사상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기에 무식한 자나 노예들이 믿는 미련한 종교 사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요3:16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너무나 단순한 사상이요, 비합리적인 내용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지혜가 있다 하는 이들이 볼 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십자가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병 고침 받고, 기도 응답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의 능력을 부여받고 땅 끝까지 증거 하는 담대함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어떠한 문제, 어떠한 역경, 어떠한 시련도 능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단히 핍박을 받던 시절, 로마 황제 앞에 어느 독실한 신자가 붙들리어 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가 만일 신앙을 버리면 네 목숨을 살려 주고 국외로 추방하겠다.” “폐하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서 결코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좋다. 그러면 네 재산을 몰수하겠다.” “폐하, 그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보화는 모두 하늘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폐하의 손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고백하자, 황제는 대단히 노하여 “네 이놈, 네가 나를 약 올리고 있느냐? 너를 죽여 버리겠다.” “폐하. 나는 지난 40년간 죽어 있었습니다. 즉,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 있으니 폐하가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신자를 보고 기가 막혀서 체념하고 그를 성 밖으로 내 쫓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모두 십자가만이 속죄의 문, 구원의 문,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열쇠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는 열심히 참석하지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기독교들이 십자가 앞에서 명상하거나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여섯 시간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을까?’ ‘그 가시관의 찔리심, 그 매 맞으심, 그 못 박히심, 얼마나 크셨을까?’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와 자기와의 연관을 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안타까워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 앞에 모든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눅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줄 믿고 그 앞에서 모든 죄를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순간순간 붙들어 주셔서 올라가게 하시는 손길을 발견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교우들은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혹은 세례도 받고 제직으로 임명도 받았지만, 십자가만 바라볼 뿐,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도 않음으로 십자가의 구경꾼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한 교우들은 아무리 교회를 나와서 정신적인 수양을 쌓거나 어느 정도 위로는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회개가 무엇인 줄 압니까?

지금까지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회개는 지금까지 자아중심대로 살았던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끝없이 욕심을 부리고 혈기를 부리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를 중심해서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지요. 그 때부터 우리 심령 안에 부활의 능력이 싹이 트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깨어짐이 있은 후에야 부활 안에서 주님의 새사람으로 지음 받는 것이요, 그 다음에 가서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채 교회에서 봉사하고 활동하면 교회부흥에 장애요소가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심, 자기의 주견, 자기의 혈기로 일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옛사람인 나는 죽고 부활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새사람이 될 때는 주님의 열심, 주님의 주견, 주님의 인격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고함 고함을 지르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분은 남아 있는 식구들 때문에 하염없이 웁니다. 심지어는 어느 분은 죽음 직전까지 아내 원망, 자식 원망으로 혈기를 부립니다. 그러나 숨이 꼴깍 넘어가면 모든 것이 조용해집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사라지고, 불평도, 원망도 사라지고 빚이 산더미처럼 있든지, 젊은 아내를 두고 가든지, 홀로 남은 어린 아이가 서럽게 울든지, 혹은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서로 울근불근하든지 전혀 표정이 없습니다.

언제도 소개했습니다만, 채필근 목사님이 쓰신 「이야기 철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재미난 예화입니다. 평양시에서 북편으로 한 20리 떨어진 한 촌에서 한 노인이 돌아가셨습니다. 상주는 자기 조카에게 돈을 주면서 평양에 가서 상포 흥정을 해오라고 보냈습니다. 상포 흥정을 떠난 조카는 시내에 갔다가 빚진 채주를 만나서 있는 돈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조카는 돌아갈 염치가 없어서 아는 사람 집에 들어가 박히고 말았습니다.

상가에서는 상포 흥정을 간 사람을 기다리다 못해서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상주는 기가 막혀서 아버지 시신 앞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혼자서 한다는 말이 “원, 이 녀석이 죽었나, 살았나?”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조카를 보고 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아버지 시신을 보면서 그런 말을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죽은 사람은 일체 반응이 없습니다.

그렇게 혈기가 많고 욕심이 많고 불평이 많던 사람이 죽으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공동묘지에 묻든지, 화장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혈기를 부리고 욕심 때문에 싸우고 교회 안에서도 흥분해서 옥신각신합니까?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부터라도 목회 일, 노회 일을 할 때에 어느 때는 누가 칭찬하고 높여주면 공연히 우쭐거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누가 알아주는 자가 없는 느낌이 들거나 싫은 소리나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 공연히 낙심하거나 흥분하여 울근불근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다시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다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아를 뽑아 버립니다. 그러면 누가 칭찬하든지, 알아주든지 말든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평강이 내 영혼 속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만 높이면 됩니다. 주님만 나타내는 것을 족하게 여기게 됩니다. 여러분이여. 교회에 와서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해 보십시오. 내 혈기, 내 주견, 내 열심 때문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고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16:25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아를 십자가를 못 박은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생긴 달란트를 말합니다.

교사이든, 성가대이든, 구역의 일이든, 혹은 집사나 중직, 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 등을 말합니다. 그 달란트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때문에 당하는 핍박, 예수님을 때문에 당하는 손해를 말합니다. 십자가는 신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믿게 되면 필히 따르는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핍박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원수 같은 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내 시간, 내 건강, 내 물질을 희생하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바로 지십시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못 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죽이어야 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 때마다 큰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십자가 피하다가는 요나처럼 풍랑을 만나고야 맙니다.

그러나 요나가 회개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 깜짝 놀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에스더가 주님을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바로 지니까, 자기도 살고 민족도 사는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목회의 길은 어느 때는 보람 있을 때도 많지만 어느 때는 너무 힘이 듭니다.

어느 때는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는 밤도 있고, 어느 때는 심한 오해를 받아서 다 버리고 어디 먼 곳으로 가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전력을 다해서 일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 나가서는 뒤에서 은근히 비난하는 느낌이 들 때는 사표를 내고 다른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내가 살아 있는 탓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 자아를 부숩니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모십니다. 그리고 다시 ‘내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면 다시 자유로워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강하게 붙드셔서 말씀으로 붙드시고 능력을 나타내 주시며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독일 어느 작은 마을에 드보라 라는 가난한 소작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한데다가 2년 동안의 가뭄으로 인해 남은 것이 전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인이 소작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받았습니다. 앞날이 캄캄해진 그는 식구들을 불러 모으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님, 저희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희의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끝나자, 그들이 기르던 새가 창문에 매달려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열자 새가 들어왔는데 그 입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그것을 팔아 쓸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드보라는 자기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그 반지의 주인을 찾아서 수소문해 보았더니 그 지역의 부자가 반지를 잃고 사방으로 찾고 있었던 것을 알고 즉시, 돌려주었습니다.

그 부자는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고마운 답례의 표시로 집과 땅을 마련해 주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드보라가 욕심의 유혹에 빠져 그 반지를 팔았더라면 잘못하여 도둑으로 몰렸을 번 하였으나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 때에 일생 살 수 있는 집과 토지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십시다.

그 십자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못 집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그 십자가를 바로 짐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전 교인이 할 것은 십자가 안에서 철저히 내가 녹아지고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음 받아 보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회개의 고백을 해 보십시오.

‘주님, 지금까지 자아중심으로만 살면서 자아의 욕심, 자아의 혈기, 자아의 자랑에만 매여 있었나이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드리오니 받아 주셔서 십자가 안에서 철저히 녹아지게 하옵소서. 그리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새사람, 주님의 지체가 되게 역사하옵소서.’라고 간구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 때에 십자가의 강한 능력, 성령의 강한 능력이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 강하게 붙드셔서 승리적인 삶을 살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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