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영혼의 통로를 밝히자/고전3:12-18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47

예일대학 생화학 교수였던 모르비츠 박사는 사람의 몸값을 600만 달러로 환산했습니다. 그것도 생화학물질인 효소, 아미노산, 단백질 등 인체 내의 원료 값만 따져도 그렇게 엄청난 액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화학 원료들을 활동성 세포로 만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데는 6000만조 달러를 쏟아 부어도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만들 수 없다는 증거가 되며, 생명의 생성과 활동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창조론의 기초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천하를 다 주어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고귀한 인간 생명의 가치를 물량으로 잰다든지 상품처럼 품평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어긋납니다. 더구나 이 귀한 육신을 함부로 취급하고 죽이고 자살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잘 생긴 얼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의 능력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시지만, 사람들은 겉모양, 특히 얼굴에서 풍기는 첫인상을 매우 중시합니다. 그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불과 6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는 외모, 표정, 제스처가 80%나 차지하고, 목소리라든지 말하는 방법 등이 13%,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격은 겨우 나머지 7%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얼굴의 표정이 그 사람의 첫인상과 인생을 결정한다는 통계입니다.

인상 요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얼굴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바뀝니다. 얼굴은 우리 신체 가운데 가장 오묘한 것으로 근육도 다른 신체 부분보다 가장 많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80개의 근육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기분이 좋은 사람의 얼굴과 기분이 나쁜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것이 얼굴입니다. 그것은 표정과 감정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이 마흔이면 그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바로 감정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똑 같은 지문이 없듯이 똑 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얼굴은 다 독특하고 제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얼굴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얼굴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의 유래



성경에도 ‘얼굴’이란 말이 293회나 나옵니다. 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영혼의 통로"입니다.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굴은 통로라는 뜻입니다. 멍한 사람들을 보면 얼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얼굴은 얼이 빠져있기 때문에 산사람의 얼굴과는 아주 다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도 모세의 성경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으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져 없어질 것인데, 그날은 모두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볼 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얼굴에 수건을 덮고 있습니까? 수건을 덮은 채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립니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영혼의 통로가 되는 우리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 어둠으로 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혼의 통로를 밝고 넓고 환하게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1. 기쁨의 본질을 알 때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네 할머니에 대한 시를 써 봐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이 정성껏 시를 써서 할아버지에게 보여 주자, 대충 읽어 본 할아버지는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시는 형편없지만 정성을 봐서 용돈은 준다. 자, 받아라. 네가 글을 써서 받는 최초의 돈이다. 그러나 명심해라. 이것이 시를 써서 받게 될 마지막 돈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할아버지는 ‘세계적인 손자의 재능’을 전혀 몰라봤습니다. 이 아이는 자라 1855년 영국을 대표하는 계관시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 테니슨입니다. 할아버지에게 냉대 받았던 그는 1883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으며 ‘국보(國寶)시인’의 위치까지 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하였습니다. 그가 쓴 ‘암벽 사이에 핀 꽃’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작은 꽃, 하지만 내가 너의 본질을/

뿌리까지 송두리째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평가절하 하는 것은 참으로 큰 오류입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알아야 영혼의 통로를 밝고 아름답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테니슨이 어느 날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첫인상은 행복하고 근면한 여인으로 테니슨의 가슴에 각인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습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넉넉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쁨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진정한 부활의 기쁨이 있어야 영혼의 통로가 밝고 넓어집니다.



2.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입니다. 그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회가 부패하자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똑똑한 젊은 사람들이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사람의 집에 모여 러시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프랑스 혁명사상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프랑스 혁명가의 기록을 분석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회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예의주시했고, 결국 1849년에 서클의 전 회원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살을 바늘처럼 찔렀습니다. 나중에 그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다. 나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나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5분뿐이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면서 3분을 사용했습니다. 2분이 남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차갑고 무겁게 찌그러들었습니다.

"아,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다니. 주여! 내게 다시 한 번 더 생명이 주어진다면 정말 보람차게 살 텐데요...." 그는 28년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 때 멀리서 한 병사가 황제의 특명을 갖고 달려 왔습니다. "황제께서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특명을 내렸소." 그는 가까스로 사형을 모면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에 시커먼 구름이 걷히고 일단 사형을 면했다는 반가움이 섬광처럼 반짝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거기서 4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초기에 한 여성이 그에게 신약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 성경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4년 내내 성경은 나의 베개 밑에 놓여 있었다. 어떤 때는 혼자 성경을 읽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때도 있었다. 어떤 죄수에게는 그 성경으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혁명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유토피아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불합리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랐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다 해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0년간의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와 무신론적인 사회개조 운동을 버리고 소설을 통해 러시아 사회를 변화시키는 저술활동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항상 하나님을 기대하는 열정을 띄고 있었으며,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지금도 설교자들이 전하기 어려운, 기독교 신앙의 깊은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달란트인 소설을 통해 오늘까지도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통로를 밝혀주는 설교는 교역자들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그의 달란트를 통해 깊이 있는 신앙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3. 전도하려는 열망이 있을 때



한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수없이 그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했지만 그녀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던 아주머니가 어느 날부터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교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우리 가게에 들르는 한 신사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항상 못생기고 덜 싱싱한 사과를 사갔어요. 너무 미안해서 사과를 몇 개 드렸더니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어요. 지금 당장 먹을 것이기 때문에 좀 썩은 것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 대신에 남들에게 싱싱한 사과를 팔라고 했지요. 저는 그때부터 그분에 대해 조금씩 존경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제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잖아요. 그분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기 위해 두말없이 따라 나섰지요.”



사형수로서 갖가지 표정을 짓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고 출옥하여 뛰어난 작품을 쓴 도스토예프스키! 그 작품들을 통하여 오늘도 수많은 인생들이 감명을 받고 영혼의 통로를 밝히고 있는 사실과, 그리고 못 생기고 덜 싱싱한 사과를 사가면서 사과장수 아주머니의 영혼을 밝혀주었던 그 신사의 인내와 예수 사랑 정신을 우리는 오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전도는 인내요,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명사가 아니라 영혼의 통로를 밝혀주는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통로를 열어주는 것은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요,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희생과 실천이 없으면 감동도 없고 전도도 없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 불쌍한 사람은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일생동안 태양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결코 어둠을 볼 여가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얼굴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32)”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6-17).”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영혼의 통로인 얼굴! 우리는 우리 얼굴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고들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하십니다. 우리 얼굴에 우리 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상이라고 합니다. 인상은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통로에 성경 말씀을, 우리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마음으로, 그리고 전도의 열망을 가지어서 영혼의 통로인 얼굴이 너도나도 환히 밝아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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