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 필립핀 중동부 레이테(Leyte) 섬에서 발생한 대형 산사태로 매몰되어 주택 500여 채와 초등학교 건물이 사라졌고, 동시에 2,000여명의 주민들이 순식간에 죽음을 당하였다는 소식은 매우 가슴이 아프게 합니다. 이 지역에는 최근 10일 동안 2미터 가량의 비가 내린 것으로 집계됐는데 지진으로 산이 무너져 내림으로 어느 지역은 진흙의 깊이가 10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2006년도 초반부터 이런 대형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하니, 금년도 한 해 동안 세계 모든 곳에서 얼마나 많은 끔찍한 일들이 터질까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 끝에 와 있으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즐길까, 무엇을 소유할까?”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주님을 맞이할까?”에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과연, 마지막 때 끝에 와 있는 탓인지, 많은 교회들과 교역자들, 교회 지도자들이 시험에 들어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사탄 마귀도 자기의 때가 얼마나 남지 않을 줄 알고 총력을 기우려 시험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므로 우리 교인 모두는 지금까지 잘 가꾸어 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가는 일에 합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2장 10절부터 3장 9절까지에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세 종류의 나누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고, 3장 1절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로, 2장 15절과 3장 1절에 보면 ‘신령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은 어떠한 자들이며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과연 나 자신은 그 세 종류 중에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배우심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 일꾼들이 다되셔서 언제 주님이 재림하시더라도 다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본문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2장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 자입니까? 헬라어로 말하면 ‘프쉬키코스’이고, 영어로 표현하면 ‘men of the flesh’입니다.
인간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영과 혼과 육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혼과 육은 있지만, 영은 없습니다. 헬라어로 말하면, 혼은 ‘푸쉬케’라고 하고 영은 ‘퓨뉴마’라고 하는데 동물은 ‘푸쉬케’는 있으나 ‘퓨누마는 없습니다. 동물들 중에 영리한 것은 대단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소도 나름대로 영리하다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 자기 아버지는 달구지를 타고 한 40리 길을 가셨다가 돌아왔는데 식구들이 나가보니 아버지는 달구지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더랍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가 40리길을 혼자 찾아온 것입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소도 이처럼 영리한 구석이 있습니다. 개들도 영리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보다도 동물들 중에 원숭이나 침팬지는 거의 인간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원숭이나 침팬지가 아무리 영리해도 영이 없습니다.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미개한 토인이라도 모여서 자기들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지만, 원숭이나 침팬지들이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영은 가지고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그냥 놓아두면 싹이 않습니다. 몇 년이 가도 전혀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씨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 씨를 땅 속에 심으면 어느 날 싹이 나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달걀이 아무리 유정란(有情卵)이라도 가만 놓아두면 병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 닭 품에 두면 어느 날인가 병아리가 되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생명체는 가지고는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영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달걀을 어미 닭 품에 두면 병아리가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그 영이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생명체는 있으나 아직도 살아 있지 않은 사람, 성경적으로 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도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2장 14절 말씀을 보면 성령의 일을 받을 수 없음으로 믿음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씨앗에다가 아무리 비료를 주어 보십시오. 씨앗은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는 출석하지만 아직도 영이 살지 못한 분, 아직도 중생의 체험을 못한 분이 계십니까? 중생 받지 않고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3:3에서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세례 받는 분들에게 언제나 중생을 설명할 때 전기를 예로 듭니다. 여기 지금 전등이 켜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 연결된 전선을 끊으면 전등이 죽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전기와 전등의 관계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끊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영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영 사이에 연결하는 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마다 영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충성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지 못하고 씨앗 그대로 상태인 ‘육의 사람’으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줄이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놀랍지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 순간에 씨앗이나 달걀, 전등이 사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영도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휫필드는 청년 시절에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이 온통 시꺼먼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부정을 애썼습니다.
모든 사치를 마음으로부터 거부했습니다. 검소검약하게 살았고 일주일에 이틀간은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제에 힘썼으며 밤마다 기도로 지새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헛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음의 평안과 확신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 웨슬레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영혼 속의 하나님 생명」이란 책자를 얻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휫필드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써 주님께 매달렸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훗날 휫필드는 인디언들과 서인도제도의 사람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광부들과 런던의 부유한 귀족들의 접견 등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지역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네가 거듭나야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영은 거듭나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뿐 영생의 싹이 나지 않는 줄 믿으시고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심으로 여러분의 영이 영생의 싹이 나고 거듭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본문 안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면 좀 전에 말씀드린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자’와 어떻게 다릅니까? ‘육에 속한 자’는 씨앗으로 말하면 아직도 싹이 트지 않은 상태, 즉 중생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는 씨앗으로 말하면 땅 속에 들어가 싹이 나기 시작한 상태요, 중생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육신에 속한 자’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떻습니까?
(1)밥 대신 젖을 먹는 영적 유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나 지금도 못 하리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란 아직도 영적으로는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젖과 같이 부드러운 음식만 먹어야 합니다. 젖이란 연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위한 복음의 초보와 기본인 구원의 도리와 십자가의 구속과 같은 기초적이며 쉬운 복음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처럼 어린 신자들은 어려운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예화나 유머스런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수준입니다. 영적 유아기를 면치 못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을 보면 자기들이 먹고 싶은 것만 편식하고 먹는 양도 작습니다. 한참 자라는 청년들을 보면 먹고 나면 또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라면도 끓여 먹습니다. 성숙한 신자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로만은 부족하여 기독교 방송 등을 통해서 설교를 듣습니다. 또한 스스로 성경공부 하거나 영적인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습니다. 여러분 중에 일주일에 한두 번 설교 듣는 것으로 족한 분들은 어린 아이 신자, 즉 ‘육신에 속한 자’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도록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꿀 송이보다도 더 단 영혼의 양식으로 사모하고 좋아하는 심령이 될 때에 믿음이 날로 자라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성령의 지배가 아니라 육신의 지배를 더 받는 자들입니다.
3-4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방법인 성령으로 좇아 행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지만, 성령의 지배가 아니라 육신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이기적입니다. 저 밖에 모릅니다. 어느 때는 아빠고 엄마고 없습니다. 자기가 제일이고 우선입니다. 저만 위해 달라고 합니다. 머리로는 이래서은 안 된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형제들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에 움켜쥐고 내놓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기를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다른 형제를 칭찬하면 시기심으로 견디지 못해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이 같은 육신적인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시기심과 분쟁이었습니다.
3절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 앞섰습니다. 4절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 세상적으로 보면 나보다 못한 자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나서 못 견디어 합니다.
동료나 후배 신자들이 앞서가며 영육 간에 갑작스럽게 잘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인간적인 생각에 시기심이 생기며, 더 나가서는 자신의 명예심에 까지 손상을 입었다고 여기게 되면 이상하게도 미움이 생기며 사사건건 못마땅하여 보이고 결국 실력 행사를 하여 견제 저지 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런 육신에 속한 어린 신자들이 교회 안에 지도급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시험 들기가 쉽고 분쟁이 일어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세력화함으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라보아야지, 동료 성도들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미숙한 행태의 육신적 구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사실을 일찌기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신의 시기심이나 교만 등 육신적인 모습을 십자가 아래 쳐서 복종시키는 경건의 연습에 힘쓸 때 성숙한 단계에 이를 줄 믿어야 합니다. 「강단 유머 백과」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도급에 있는 분들끼리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공개하면서 비판합니다. 교인들도 덩달아 패가 져서 싸우다 보니 나중에 교회가 갈라질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중재하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으나 좀처럼 분쟁은 멎을 줄을 모릅니다. 결국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컴퓨터에 문제를 입력시켜서 해결책을 얻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컴퓨터에서 답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홍익의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결코 사람 중심으로 운영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방법을 따르므로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본문 안에는 신령한 자들이 나옵니다.
신령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미 위에서 다 설명이 되었습니다. 신령한 신자는 무슨 일이든지 인간의 생각보다는 성령으로 판단하고 성령을 좇아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교회에서 하는 설교로 부족하여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묵상합니다. 더 나가서는 자기만 먹지 않고 교사나 구역의 일군이 되어 남에게 요리하여 말씀을 먹입니다.
이것이 장성한 신자, 신령한 교인입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생각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고 교회의 덕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오늘 5-9절에서 너무나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십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성숙한 고백입니까? 바울은 본문 5절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요,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하나님의 노예와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환과 심부름꾼으로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위해 섬기는 자들을 왜 경배의 대상으로 삼느냐고 반문합니다.
교회 지도자들 즉 목사와 장로나 중직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 하므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은 가지되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바울과 아볼로는 경쟁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동역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직무와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으로,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할 뿐,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취할 어떠한 영광이나, 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사명 감당한 축복과 상급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8절 “각각 자기의 일하는 데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얼마나 시원하고 명쾌한 말입니까? 이는 신령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요, 태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준까지 이른 상태라면 무슨 교회의 분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영적 유아기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 운영하고 신자들을 오도(誤導)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성령으로 판단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므로 우리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가는 역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친구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제가 작년에 집회차 다녀와던 남원산성교회의 김정명 목사님 간증입니다.
김 목사님은 음성나환자 교회에서 31년째 시무하고 계십니다. 지난번 동기회 때 친구 목사들이 “어떻게 그런 어려운 교회를 부임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전혀 갈 마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정읍 부근 신태인에서 목회를 할 때, 한 분이 찾아왔는데 음성나환자로 장로님이라고 하면서 어느 교회를 찾아가는 데 알려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오더니 자기는 어느 목사님을 청빙하고자 갔지만 마음에 안 들고 목사님이 마음에 드는데 우리 교회 청빙하고 싶더라고 하더랍니다. 그 교회는 당시 남원노회에서 두 번째 큰 교회였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번에는 수석장로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은 얼굴이며 손이 더 증세가 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분도 와서 얼마나 간곡히 부탁을 하는지요. 거절하노라고 너무나 힘들었답니다. 그런데 다음번에 는 잘 아는 선배 목사님이 충고하기를 “아니, 하나님이 부르시는지 어떻게 아는가? 기도도 안 해보고 무조건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므로 찔림을 받고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부임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두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더랍니다. 한번은 자기 주민등록등본을 보여주시는데 자기 주소가 그 교회 주소로 옮겨 있더랍니다. 또 한번은 환상 중에 자기에게 그 교회 교적부를 주시는데 보니까 수석장로인 홍 장로님의 이름이 제일 먼저 적혀 있더랍니다.
이렇게 확실히 보여주시는데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 마침내 그 교회 부임하여 31년째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이 바로 신령한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어서 속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가 이 자리에 계시다면 빨리 성숙함으로 신령한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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