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이미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과는 다른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는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主)가 되시는 나라이다. 삶의 주관자(主管者)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로써 삶의 주관자가 인간이다. 이렇게 두 나라 사이에는 삶의 주관자가 다르기 때문에 그 성격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나라’인 반면,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은 자기를 ‘부각(浮刻)시키는 나라’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로마에 가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태국에 가서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미국에 가서는 어린아이들의 성기를 가지고 놀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각 나라는 저마다 다른 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 가서 우리 식대로 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법칙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아니,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이해될 수조차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 나라 백성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나라이다.
두 나라는 서로 반대된 모습을 갖고 있다. 삶의 주관자가 세상에서는 인간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재물을 손에 쥐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손에 쥔 것을 놓으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나 높아지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급기야는 남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높아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아지라고 말씀한다(마 18:4).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 미운 앞에 보란 듯이 나설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친다(롬 12:20). 또한 세상에서는 등수를 매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은 자기를 부각시키는 나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는 나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가 되신 나라와 인간이 주가 된 나라 사이에는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돈을 쓰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성경적으로 볼 때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뭔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기 위해 가난한 자를 두셨다. 신자라면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돈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가 되지 않고 자기가 주가 되어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어떤가?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반대로 돈을 마음대로 펑펑 쓰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사고와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적응할 수가 없다.
인간이 기준이 된 나라는 서로를 크고 작은 것, 그리고 높고 낮은 것으로 구분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서로 큰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물론 필요에 따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가족이 많은 사람이 큰 집에 사는 것은 당연하다. 사업을 하면서 장거리 여행을 하는 사람은 고급차를 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남의 눈 때문에 무조건 큰 집에 살아야 하고, 고급차를 타야 한다면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사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경쟁을 하여 자기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꾸 등수를 매기려는 이런 사고방식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상급에 관한 것이다. 8절에 보면 “자기의 일하는 대로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의 충성도나 기여도, 그리고 열심에 따라 천국에서 상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봉사한 사람은 천국에서 화려한 궁전에 살게 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초가집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식의 생각이 당연한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체적인 조건이나 돈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충성도나 기여도나 열심에서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별로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서조차 소외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가? 당신은 이 땅에서도 소외되어 살아가던 힘없는 사람들이 또 다시 천국에서도 소외되어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과연 그런 나라를 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들 중에서 초가집은 아닐지라도 25평짜리에서 사는 사람이 있으며 31평짜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뉠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은 곧 이분법적 사고를 교회 안에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일의 경중(輕重)을 따지게 되었다. 즉,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나누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목사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은 더 큰 상을 받고, 일반 교인들처럼 세상 일(?)을 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상이 적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일의 경중의 사고방식은 고린도교회에서 파가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을 더 위대하게 본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못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추종자들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5-7)
그러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 사도는 사람에게 차별을 두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씀이다. 사람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구원에 이를 자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상급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는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볼로와 바울이 ‘무엇이냐?’고 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아볼로나 자신은 심고 물주는 자들이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했다. 그러니 전혀 자랑할 게 없다는 논지였다. 이것을 번안(飜案)하여 생각해보자.
가령 선한 한 부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어느 날 부자는 어떤 곳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잔치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부자는 자신의 종들을 시켜 그 잔치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게 했다. 그 부자는 종들에게 각각 한 가지씩 일을 맡겼다. 어떤 종은 갈비찜을 맡아 일했고, 어떤 종은 떡을 맡아 일했으며, 어떤 종은 음료수를, 그리고 어떤 종은 과일 등을 맡아 일했다. 그리고 어떤 종은 맨 나중에 식사를 마친 사람들을 위해 이쑤시개를 나누어주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면 각각 음식을 나눠주는 종들끼리 구별을 지을 수 있는가? 갈비찜을 나눠주는 종은 더 위대한 반면, 이쑤시개를 나눠주는 종은 제일 못한 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주인이 맡겨준 자리에서 봉사한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잔치를 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먹인 것은 모두 부자가 한 일이다. 부자의 생각이며, 부자의 돈이며, 부자가 명령한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 섬기던 종들은 자기들이 한 것처럼 거들먹거릴 수가 없다. 또한 특정한 것을 나눠주는 종들을 추종한다는 것은 뭔가를 오해한 것임에 틀림없다. 갈비찜이 비싸니까 그것을 나눠주는 사람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추종하고, 이쑤시개를 나눠주는 사람은 이쑤시개 자체가 하찮은 것이니까 그 종은 멀리한다면 그것은 잔치를 배설한 부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행동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들은 “각각 주께서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고 말한 것이었다. 그냥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봉사자들일 뿐이라는 말씀이었다. 나아가 자기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7).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을 자랑하거나 추종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하나님만 따르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또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같은 종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면 굳이 목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맞는 말이다. 목사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목사는 부자로부터 각각 봉사하는 종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맡겨졌다고 할 수 있다. 갈비찜 쪽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그 장소를 넓게 확보하도록 갈비찜을 담당한 종에게 말한다. 그러면 목사는 전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각각의 종들은 들어야 한다. 부자 주인으로부터 그런 역할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목사가 남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역할이 그 역할이기 때문에 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랑하지 못할 것은 우리의 삶의 주관자는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신실하면 되는 것이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이다. 종종 이 말씀은 인간의 업적에 따를 보상론을 주장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많이 일한 사람은 큰 상을 받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은 상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자기의 ‘일하는 대로’라는 말은 전후 문맥과 상급에 관한 성경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인간의 행위에 따른 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자기의 일한 것을 따라서’라는 뜻이다.
즉 부자는 어떤 종에게는 떡을 나눠주는 일이, 어떤 종에게는 이쑤시개를 나눠주는 일이, 그리고 어떤 종은 여러 상황들을 종합하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맡겨졌다. 이처럼 각 종들에게는 다른 일들이 맡겨졌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던 간에 그 일한 것에 ‘따라서’ 상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주인의 말에 복종하여 말없이 순종한 종이라면 어떤 역할을 했던 간에 상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결코 누구는 더 큰 것을 받고 누구는 더 적은 것을 받는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상에 차별이 없다면 과연 열심히 봉사할 필요가 있으며, 열심히 예배하거나 헌금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상이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는가, 대충 살다가 천국에만 들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천국 백성은 누구인가? 그들은 세상의 사고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면 상에 대한 차별이 없다면 열심히 봉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각인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가 주관하는 생각인가? 그런 생각의 저변에는 자기는 결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정신이 깔려있다. 과연 그런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생각인가, 아니면 세상의 생각인가? 상이 같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저 예수님만 믿고 천국에 간다는 사고방식은 우상을 섬기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옳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믿어진다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이 옳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이 곧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도록 하라. 세상의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자.
우리에게는 드러낼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심고 물주는 일을 하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저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고 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로마에 가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태국에 가서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미국에 가서는 어린아이들의 성기를 가지고 놀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각 나라는 저마다 다른 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 가서 우리 식대로 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법칙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아니,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이해될 수조차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 나라 백성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나라이다.
두 나라는 서로 반대된 모습을 갖고 있다. 삶의 주관자가 세상에서는 인간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재물을 손에 쥐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손에 쥔 것을 놓으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나 높아지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급기야는 남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높아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아지라고 말씀한다(마 18:4).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 미운 앞에 보란 듯이 나설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친다(롬 12:20). 또한 세상에서는 등수를 매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은 자기를 부각시키는 나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는 나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가 되신 나라와 인간이 주가 된 나라 사이에는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돈을 쓰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성경적으로 볼 때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뭔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기 위해 가난한 자를 두셨다. 신자라면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돈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가 되지 않고 자기가 주가 되어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어떤가?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반대로 돈을 마음대로 펑펑 쓰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사고와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적응할 수가 없다.
인간이 기준이 된 나라는 서로를 크고 작은 것, 그리고 높고 낮은 것으로 구분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서로 큰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물론 필요에 따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가족이 많은 사람이 큰 집에 사는 것은 당연하다. 사업을 하면서 장거리 여행을 하는 사람은 고급차를 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남의 눈 때문에 무조건 큰 집에 살아야 하고, 고급차를 타야 한다면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사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경쟁을 하여 자기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꾸 등수를 매기려는 이런 사고방식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상급에 관한 것이다. 8절에 보면 “자기의 일하는 대로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의 충성도나 기여도, 그리고 열심에 따라 천국에서 상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봉사한 사람은 천국에서 화려한 궁전에 살게 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초가집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식의 생각이 당연한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체적인 조건이나 돈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충성도나 기여도나 열심에서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별로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서조차 소외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가? 당신은 이 땅에서도 소외되어 살아가던 힘없는 사람들이 또 다시 천국에서도 소외되어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과연 그런 나라를 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들 중에서 초가집은 아닐지라도 25평짜리에서 사는 사람이 있으며 31평짜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뉠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은 곧 이분법적 사고를 교회 안에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일의 경중(輕重)을 따지게 되었다. 즉,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나누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목사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은 더 큰 상을 받고, 일반 교인들처럼 세상 일(?)을 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상이 적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일의 경중의 사고방식은 고린도교회에서 파가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을 더 위대하게 본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못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추종자들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5-7)
그러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 사도는 사람에게 차별을 두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씀이다. 사람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구원에 이를 자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상급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는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볼로와 바울이 ‘무엇이냐?’고 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아볼로나 자신은 심고 물주는 자들이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했다. 그러니 전혀 자랑할 게 없다는 논지였다. 이것을 번안(飜案)하여 생각해보자.
가령 선한 한 부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어느 날 부자는 어떤 곳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잔치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부자는 자신의 종들을 시켜 그 잔치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게 했다. 그 부자는 종들에게 각각 한 가지씩 일을 맡겼다. 어떤 종은 갈비찜을 맡아 일했고, 어떤 종은 떡을 맡아 일했으며, 어떤 종은 음료수를, 그리고 어떤 종은 과일 등을 맡아 일했다. 그리고 어떤 종은 맨 나중에 식사를 마친 사람들을 위해 이쑤시개를 나누어주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면 각각 음식을 나눠주는 종들끼리 구별을 지을 수 있는가? 갈비찜을 나눠주는 종은 더 위대한 반면, 이쑤시개를 나눠주는 종은 제일 못한 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주인이 맡겨준 자리에서 봉사한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잔치를 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먹인 것은 모두 부자가 한 일이다. 부자의 생각이며, 부자의 돈이며, 부자가 명령한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 섬기던 종들은 자기들이 한 것처럼 거들먹거릴 수가 없다. 또한 특정한 것을 나눠주는 종들을 추종한다는 것은 뭔가를 오해한 것임에 틀림없다. 갈비찜이 비싸니까 그것을 나눠주는 사람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추종하고, 이쑤시개를 나눠주는 사람은 이쑤시개 자체가 하찮은 것이니까 그 종은 멀리한다면 그것은 잔치를 배설한 부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행동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들은 “각각 주께서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고 말한 것이었다. 그냥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봉사자들일 뿐이라는 말씀이었다. 나아가 자기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7).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을 자랑하거나 추종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하나님만 따르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또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같은 종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면 굳이 목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맞는 말이다. 목사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목사는 부자로부터 각각 봉사하는 종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맡겨졌다고 할 수 있다. 갈비찜 쪽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그 장소를 넓게 확보하도록 갈비찜을 담당한 종에게 말한다. 그러면 목사는 전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각각의 종들은 들어야 한다. 부자 주인으로부터 그런 역할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목사가 남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역할이 그 역할이기 때문에 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랑하지 못할 것은 우리의 삶의 주관자는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신실하면 되는 것이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이다. 종종 이 말씀은 인간의 업적에 따를 보상론을 주장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많이 일한 사람은 큰 상을 받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은 상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자기의 ‘일하는 대로’라는 말은 전후 문맥과 상급에 관한 성경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인간의 행위에 따른 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자기의 일한 것을 따라서’라는 뜻이다.
즉 부자는 어떤 종에게는 떡을 나눠주는 일이, 어떤 종에게는 이쑤시개를 나눠주는 일이, 그리고 어떤 종은 여러 상황들을 종합하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맡겨졌다. 이처럼 각 종들에게는 다른 일들이 맡겨졌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던 간에 그 일한 것에 ‘따라서’ 상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주인의 말에 복종하여 말없이 순종한 종이라면 어떤 역할을 했던 간에 상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결코 누구는 더 큰 것을 받고 누구는 더 적은 것을 받는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상에 차별이 없다면 과연 열심히 봉사할 필요가 있으며, 열심히 예배하거나 헌금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상이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는가, 대충 살다가 천국에만 들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천국 백성은 누구인가? 그들은 세상의 사고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면 상에 대한 차별이 없다면 열심히 봉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각인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가 주관하는 생각인가? 그런 생각의 저변에는 자기는 결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정신이 깔려있다. 과연 그런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생각인가, 아니면 세상의 생각인가? 상이 같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저 예수님만 믿고 천국에 간다는 사고방식은 우상을 섬기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옳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믿어진다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이 옳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이 곧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도록 하라. 세상의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자.
우리에게는 드러낼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심고 물주는 일을 하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저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고 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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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초/고전3:10-15 (0) | 2017.07.11 |
[스크랩] 하나님의 성전/고전3:16-23 (0) | 2017.07.11 |
[스크랩] 지혜로운 건축가/고전3:9-15 (0) | 2017.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