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기초/고전3:10-1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44

본문에서는 바울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한다. ‘터’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초’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그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진정한 기초는 하나밖에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기초이다. 사실 세상은 기초라고 할 수 없다. 무너져 없어질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는 그리스도가 기초되지 아니한 것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그들의 삶의 기초로 여긴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많이 알려진 불교, 유교, 마호메트교 등이 있다. 그들 종교는 나름대로의 경전이나 체계화 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에 두고 있다. 기독교 역시 성경과 교리가 있다. 그리고 구원을 강조한다.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의 종교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상 종교도 포교를 하고 우리도 전도를 한다. 세상 종교에서도 나름대로 기도를 하고 우리도 기도를 한다. 세상 종교에도 예배라는 형식이 있고 우리에게도 역시 예배가 있다. 그리고 세상 종교에도 헌금이 있으며 우리에게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세상 종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외형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오직 기독교만을 고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과 불교인이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 손을 잡고 하루는 절에 가서 사이좋게 예배하고, 하루는 교회당에 와서 웃으면서 함께 예배한다면 소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너무 과(過)하다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쯤 석가모니 탄생일이 되면 교회 사람들이 절에 가서 찬불가를 불러주며 축하해 주고, 반대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불교에서 와서 찬송가를 불러준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흔히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화합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외형상으로 볼 때는 비슷한 것 같지만 종교와 기독교,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그 기초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초를 세상에 두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그 기초를 하나님 나라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로의 구원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세상 속으로의 구원을 원한다. 즉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현실로부터의 구원을 원한다. 돈이 없는 현실, 직장이 어려운 현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로부터의 구원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세상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이란 것도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런 나머지 종교인들은 구원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죽으면 덤으로 게게 되는 어떤 좋은 곳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세상과는 별개의 나라를 추구한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세상을 벗어난 나라를 추구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었고, 세상을 넘어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었다(롬 14:8).
기독교는 세상 종교와는 그 근본 기초가 다르다. 종교에서의 구원이라는 것도 결국은 세상을 기초로 한 구원일 뿐이다. 종교가 말하는 극락(구원)이란 인간이 상상한 나라로써 인간의 노력에 의해 갈 수 있는 나라이다. 한계성 있는 인간의 상상에 의한 극락, 인간의 노력에 의해 주어지는 극락이라면 그것은 결국 또 하나의 세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처럼 종교는 그 기초를 이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교리나 주장 등은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종교에 관한 강연을 듣는다면 ‘과연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동원해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언뜻 보아도 인간의 욕심이 보이는 수준 낮은 종교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죄인인 인간들로서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나라이기에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 주셔야 하고, 가는 방법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갈 수 없는 나라이기에 선택이란 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녕 우리가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알고 있는 자라면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의 구원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늘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요구할 것이며,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는 불평과 좌절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 김순성 교수는 지난 3일의 개교 60주년 기념 포럼(forum)에서 “전도 그 자체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가 수단이 되면 안된다.”고 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행위의 기초는 하나님이어야지 사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전도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그것이 목표이지 교회 부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교인 상담에 있어 하나의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사람들이 이사를 가거나 교회를 떠나는 문제에 있어서, 그 문제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 때문이라면 극구 말린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리는 이유는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은 교회를 옮기면 당장은 해결되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마찰은 어디를 가든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적인 문제라면 달리한다. 정말 신중하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결정일 경우에는 그렇게 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신앙적인 문제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처리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목사가 진리가 아니라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생사의 문제를 놓고 교인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막을 어떤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이 기초가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 그러나 마지막엔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나게 된다. 바울 사도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불로 심판할 때에 각 사람이 업적이 어떠한가를 검증하여 줄 것임을 가르친다. 만일 누구든지 불로 태울 때에 세운 업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업적이 불타면 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자주 오해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각 사람이 자기의 업적에 따라 천국에서 차별적인 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업적이 없는 어떤 사람들은 팬티만 입고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면 천국에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팬티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천국을 세상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세상 수준에서의 천국이라면 그게 좀 더 진보된 세상일 뿐이지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천국이라면 다른 종교에서도 능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미 전에 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상에는 차별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지금 기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일 뿐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 기초를 그리스도에게 두지 않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며, 마지막에 가면 그런 삶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서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본문은 세상에서 가치 있고 가치 없는 일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가치가 있는 반면, 짚으로 세운 것은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다만, 남을 것과 없어질 것의 두 가지로 나눌 뿐이다. 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들이며, 타서 없어질 것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워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것이 금이든 짚이든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 사도는 세상에서 보다 더 가치 있는 것과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을 나누는 고린도인들을 경계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 분쟁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어떤 일은 더 가치가 있은 반면, 어떤 일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교회의 목사나 장로, 집사나 권사로서 일하는 것은 더 가치가 있으며, 일반 교인으로서 일하는 것은 더 가치가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을 하든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무엇을 하든 기초를 세상에 둔 채 자신을 내세우려 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말씀이다.

결국 이 말씀은 어디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있는 업적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지 않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가 나중에는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기초를 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신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그 기초를 다른데 두고 있었다. 그런 나머지 서로를 적대시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구원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구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구원을 원했다. 그런 나머지 분쟁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그리스도를 기초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기초가 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자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다. 하나님 나라는 희생하는 나라이다. 우리가 이미 세상을 벗어나 다른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도구로 부름을 받았다. 도구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도구의 모습과 복종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표준으로 보여주셨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가령 연필을 생각해보자. 때로 하나님은 연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글을 쓰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때로는 연필을 부러뜨리심으로써 목숨같이 귀중한 것도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실 수도 있으시다. 그것이 도구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라는 것은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초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에서의 입지를 더 견고히 하기 위함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보여주는 자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세상에서 바보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오직 묵묵하게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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