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좋은 교회'라는 말을 하는데, 이 좋은 교회라는 말은 들고 또 들어도 듣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참 좋은 교회가 되려면 교회학교가 잘 되고, 특별히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10년, 20년이 지나도 계속하여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하는 자료를 검색하던 중 연령별 인구통계를 보았는데, 5년 단위로 분류한 것이었습니다. 20-24세가 약 400만명이었으며, 25-29세도 약 400만명이었습니다. 인구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빌리면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중간층 인구가 두터운 나라로 젊은 세대들이 많다는 정말 고무적인 수치였습니다. 이런 통계를 접하면서 우리 시대에 청년 선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청년들이 많은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청년주일을 맞이하면서 청년사역에 대한 여러 글과 책들을 보면서 여러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청년사역에 있어 매우 성공적인 교회들이 있습니다. 온누리교회, 동안교회, 삼일교회, 등이 대표적인 교회들입니다. 그 몇몇 교회는 청년들이 계속하여 모여드는데 왜 많은 교회들이 청년사역에 투자하면서 좋은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청년사역의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보수적이고 예배가 고정화되었고, 교회 안에 청년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기성 교인들이 그들이 자라던 시절만 생각하면서 교회 안의 청년들은 봉사의 일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보면 참으로 수고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각부에서 중심적인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청년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격려하고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젊음과 열정을 발산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지 못하고 교회의 중심적인 위치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보다는 미래가 더 좋은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하는데,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을 십분 배려하는 교육공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배당보다 교육관이 더 좋은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청년들의 문화공간으로 북카페와 작은 극장을 만들고 실내 농구장 정도를 갖출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청년사역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원하고 단기적인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청년들의 단기선교를 후원하고 있으며, 성년의식을 거행해주고, 청년주일을 잊지 않고 격려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우리 어른들은 옛날을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청년 때는 무슨 예산이 어디 있고, 격려가 어디 있었느냐고 할 것입니다. 요즈음 청년들은 많은 혜택만 누리고 있으면서, 의무를 잘 감당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말고, 좋은 일꾼으로 성장하기를 기다려 주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의 초점을 어른 중심에서 젊은 세대로, 청년 중심으로, 어린이 교회학교 중심으로 내려오도록 힘쓰면서 청년을 배려하는 마인드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은 장차 오는 시대의 주역들이며, 우리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는 바로 여러분의 교회이며, 우리는 여러분들이 교회의 여러 교육실에 모여있고, 활동하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앞으로 계속하여 후원과 기도를 아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비소설계에서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책으로 "최고 경영자 예수, JESUS CEO"라는 책이 있습니다. 앞으로 기업을 경영하려는 젊은이들과 특별히 꿈과 비전을 가지고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저자는 광고 대행, 마케팅 비즈니스 개발회사인 존스 그룹의 창업자이며 현 회장인 '로리 베스 존스' 여사입니다. 존스 여사는 국제인명사전에 오른 유명인사입니다. 이 분은 평신도이면서,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지도력을 위대하게 평가하여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 특히 지도력을 경영원리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려운 책이 아니라, 이야기식으로 풀어 쓴 아주 쉬운 책이요, 우리의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스 여사는 말합니다. 인류역사에 예수님만큼 완벽한 지도력을 보여준 지도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탁월한 지도력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있다면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파경영이라고 하여 남성적이며 권위적인 힘에 기초한 경영원리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여 여성적이며 상호협력적인 힘을 기초한 베타경영이란 원리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스여사가 예수님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었던 리더십은 알파와 베타를 합한 오메가 경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존스 여사는 예수님의 일생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85가지의 특이한 사례를 찾아내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아주 흥미 있는 발견으로 "예수님은 그의 상사인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유지하셨다"라고 합니다. 존 스여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상사가 누구인지 아셨고, 매일 그와의 교제를 유지하셨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서너 시간씩 그의 상사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가장 눈치를 살펴야 하고, 말을 들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나서야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존스 여사 자신도 하나님과 깊은 대화와 기도의 시간을 가진 후에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은 명상과 기도한 후에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여야 합니다. 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정체성, 나의 나됨, Identity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기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곧 자기를 아는 사람이요, 목표를 분명히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부르심의 소망으로 피곤한 줄도 모르고, 목숨 바쳐 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주어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마땅히 내가 할 일이라고 하면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이요,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간 사람으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롬1:1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노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당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분명한 자기 의식,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이미지는 종이란 이미지와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으며, 교회를 위한 당당한 사도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사도로서 바른 해석을 내리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을 기울이고, 사람이나 기쁘게 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는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들을 이끌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섬김에 있어, 철저히 자비량 노동하고 겸손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종이란 의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의 사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일꾼이란 말과 맡은 자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사도바울의 정체성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됩니다.
1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길지어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계산하다, 판단한다, 간주한다, 숙고한다, 결론짓다,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딴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이미 결정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고 하여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여러 지도자들을 대변하면서 겸손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우리라는 말에는 사도바울을 포함하면서 아볼로를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목회자들로 인하여 분파가 형성되고 있었고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물론이고, 아볼로와 디모데 같은 형제들도 함께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보았습니다. 지도자라고 하면 연대의식과 동역자 의식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없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기가 매우 힘든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창업하라는 말이요, 목회자라면 개척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겸손함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지도자라고 하면 '나'라고 하는 말을 사용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세워야 하는 사도바울은 "우리"라는 하여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꾼이란 말은 '휘페레테스'라고 하는데, 노예라는 말과는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배에서 노를 젖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야 하고, 구령에 맞추어 노를 저어야 합니다. 이들은 오직 명령에 순종할 뿐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전쟁시에 배에서 노를 젖는 사람은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는 노예와 같습니다. 노 젖는 사람은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신뢰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길만이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그에게는 다만 복종할 수 있는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전쟁시에 노젖는 사람은 노예를 불러다가 도망가지 못하게 발에 차꼬를 채우거나 쇠줄로 채우고, 오로지 노만 젖게 합니다. 우리는 "벤허"라는 영화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지휘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오로지 그가 할 일입니다. 지휘관이 그의 생명이요, 지휘관이 길입니다. 왜 노를 젖느냐, 어디로 가느냐, 지금 어디쯤 왔느냐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일꾼입니다. 완전한 위탁과 완전한 위임이 이루어져야 할 수 있습니다. 전적인 순종과 전적인 위탁입니다. 무조건 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래도 좋습니다. 우리의 선장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시고, 생명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우리는 사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따지고 토를 달고 아는 척 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에 가는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과 함께 남은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맡은 자라는 말은 "오이코노모스"라고 하여 집을 맡은 자요, 청지기요, 우리나라의 집사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많은 자율권이 보장되고 있지만, 오직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요, 주인의 뜻을 따르고, 주인의 사용권을 인정하고, 주인의 철저한 감사를 받아야 하고, 결산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잘 연구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또한 정확하게 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충성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의어로 쓰여집니다. 믿음도 '피스토스', 충성도 '피스토스'입니다. 자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피스토스라는 말을 할 때는 '신뢰한다', '믿는다', '확신한다'는 말인데, 이 말은 다른 말로 '충성한다', '복종한'는 말입니다. 일꾼과 청지기는 오직 충성할 것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복종하고 충성해야겠습니다.
자, 이제 충성과 함께 판단의 문제를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지도자를 판단합니다. 나라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도지사가 되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적은 교회이지만, 목사도 성도들의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허물 중의 하나는 지도자를 판단하는데, 지나쳐서 자신의 판단, 세상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파벌이 생기고 고린도교회는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이란 말에 최후의 심판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편견에 치우치고, 배척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도요, 주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으로 일시적으로는 잘 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혹 무능하다거나 불충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라는 사람이 분명한 자기 의식, 자기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면,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이리 쏠리고, 저런 말을 하면 저리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판단 받는 것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자기 스스로도 판단하지 않았고, 주님 앞에 서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은 천사와 같이 여겼다고 하여도 그것 때문에 교만할 것도 아니요, 교인들이 좀 불편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도 실망하거나 어떤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꾸준한 사람, 달려갈 길을 다 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충성하였으면 하나님 앞에서 가서 판단 받겠다고 매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귀한 사도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도 자책할 것이 없었다고 하면 그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입니까? 그래도 그런 것 가지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지, 충성하였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각 사람의 충성도가 드러나는 날이 곧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잘 했다고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자신의 만족으로 그칠 것입니까?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면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감리교회를 이루신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반쪽 짜리 크리스천을 원치 않으신다"라고 했습니다. 반쪽 짜리란 말은 어중간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 크리스천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사람, 한편에서 보면 크리스천인 것 같고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바로 반쪽 크리스천(Half-Christian)입니다. 또한 웨슬리는 "하나님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죄 밖에는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사람,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백 명만 있으면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예 가는 길을 포기하고 누워있을 것입니까? 주저앉아 쉬실 것입니까? 세상 구경할 것 다하시면서 걸어가실 것입니까? 충성을 구하십시오. 우리 교회의 청년들과 사랑하는 성도들은 모두가 칭찬 받는 일꾼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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