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충성/고전4:1-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13

고린도교회는 분쟁 가운데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 사도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꾼들임을 말했다. 그런 후 바울 사도는 인간의 심판 문제를 새롭게 첨가하여 다루고 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1-2)

여기에 ‘일꾼’이라는 말과 ‘충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이 말씀은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 인용되곤 한다. 또한 헌신예배 때 교인들을 향해 충성하라고 강조할 때 곧잘 인용되곤 한다. 사실 교회에서 ‘충성하자!’라고 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몸과 시간과 돈을 바쳐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충성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이 말씀은 열심히 모든 것을 바쳐 일하라는 의미인가?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발사대 역할을 하는 도구가 아니다. 인간이 미리 자기 생각을 정해 놓은 다음, 그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자기 생각을 뒷받침해 줄만한 구절을 찾아 인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을 우리의 생각을 쏘아 올리기 위한 발사대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

먼저 ‘일꾼’이라는 말부터 생각해 보자. 일꾼이란 장로나 집사 등 교회에서 어떤 특정 직분을 맡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지만 교회 안에 세상적인 사고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차별화하려는 생각이 있게 되었다. ‘제자’라는 말이 그 한 예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제자가 있고 일반 교인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자 훈련을 받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제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교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제자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즉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만을 제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제자인 것이다. 제자라는 말이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흔히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부르는데, ‘사자’란 구약에서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에서도 천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cf. 빌 2:25). ‘일꾼’이란 말 역시 장로나 집사 등의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회 직분자들은 더 많이 충성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좀 못해도 된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누구인가? 그는 곧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를 가리킨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로부터 뭔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음성을 듣거나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비밀’이라고 하면 군대에서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 중요한 것들처럼 뭔가 몇몇 특별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의 ‘크고 비밀한 일’ 역시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크고 비밀한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되어진 말씀이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비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 중 누군가는 알 수 있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그런 비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본문의 비밀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2:7)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24)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이런 말씀들을 보면 비밀은 그리스도요, 십자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는 신자를 의미한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린도교회에서 사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비밀, 즉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치켜세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식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 드러내고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은 이방 사람이 하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자식 자랑이나 삶의 질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이 말씀 역시 우리가 열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군대에 가면 “충성!” 하며 경례를 한다. 충성이라고 하면 무조건적 복종을 생각할 수 있다. 군대는 그런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이처럼 교회에서도 이 말씀을 무조건 복종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배우자나 시부모가 뭐라고 하든 교회 일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본분의 충성(faithful, trustworthy)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충성이란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답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즉 ‘신자답다’는 말이다. 무조건 아무 말 말고 몸과 시간과 돈을 바치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자다움이라는 말씀이다.
즉, 신자는 신자다운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지 누구를 자랑하고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단지 교회 출석이나 헌금 등으로만 신앙을 판가름할 것이 아니라 신자다운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만 가지고 신자답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에 잘 오면서 만나기만 하면 자기 자랑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을 신자답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이게 하신 것이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모이게 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기에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전파할 뿐이다. 그렇게 충성되게 살다 보면 분명 힘든 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비밀(십자가의 도)을 말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충성이며 신자다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겼다.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다만 자신을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 우리를 판단하실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가난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기란 힘들다. 신앙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가난하게 되었을 때 다른 뭇 사람들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5)

만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난한 사람을 볼 때 기도를 하지 않아 하나님이 치셨다고 생각하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에게 그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은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과 더불어 벌어질 최후의 심판 전에 인간들로서 서로를 심판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cf. 마 7:1).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의 모든 인간들의 판단은 ‘편견’(prejudice)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또 인간의 외모만 보고 하는 것들이기에 오판(misjudgment)일 가능성이 많다. 바리새인들의 세리와 창기에 대한 판단이 그 한 예가 아니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적인 안목을 가지고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고를 따질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 복음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지막 때 비로소 진정한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충성된 자들을 각 사람을 칭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마지막 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최후의 심판 가운데 있을 칭찬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칭찬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비판도 칭찬도 결국 편견(prejudice)에 의한 것으로써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우리는 사람들의 비판이나 칭찬에 좌우로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면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 모두의 심판관은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외모만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인간적인 편견을 삼가야 할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려는 것에서 벗어나 복음을 의지하는 자들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충성하는 자의 모습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