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음난한 시대, 거룩한 그리스도인/고전6:12-20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12

고린도 교회는 남다른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음란의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도 가장 음란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기록을 보면 고린도 신전에는 1000명 이상의 여사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곧 매춘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 와서 우상 앞에 제사를 지내고는 이 여사제들과 매춘을 하는 것은 보편화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처럼 행한다”라는 말이 “매춘 행위를 한다”라는 뜻으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살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전 5:9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은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예수 믿고 나서도 음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사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사귀면서 여전히 음란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거센 음란의 물결에 노출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 물결에 휘말려서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기 보다는 오히려 음란의 물결 속에 거룩함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음란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음란한 시대

얼마 전 매스컴을 통해서 낯선 용어 하나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스와핑(Swapping)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꾼다”라는 뜻으로 원래 미국에서 중고물품을 서로 교환하는 거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융계에서 다른 화폐나 주식, 채권을 일정한 조건으로 교환하여 거래할 때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엉뚱한 데 쓰여 지게 되었습니다. 부부끼리 서로 바꾸어서 성관계를 맺는 것을 스와핑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괴한 짓들이 197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생겼고, 1980년대 초에 일본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급기야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대체로 고학력자들, 재력이 있는 사람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서 은밀하게 성행하고 있답니다. 이들은 삶이 권태롭고 부부생활이 지루해서 이런 짓에 가담하고 있답니다. 부부 합의 하에 이런 짓들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게도 생각지 않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또 법적으로도 처벌이 불가능하답니다.

이것은 부부관계 밖에서 저질러지는 전통적인 간음과도 다르고, 성을 사고파는 매춘과도 또 다른 음란한 죄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아주 독창적인 음란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시대의 음란성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음란성의 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말세라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소위 인터넷 포르노 또는 웹 포르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 통계를 보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약 75%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2005년 12월 통계를 보면 우리 국민의 70%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인터넷 인구가 약 2800만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75% 어림잡아 19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웹 포르노에 노출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용이한 접근성(accessibility)입니다. 누구나 너무도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익명성(anonymity)입니다. 자기가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구입 가능성(affordability)입니다. 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일반 포르노시대와 이 웹 포르노시대는 정말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과거에는 일반 사람들이 음란물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습니다. 또 접촉했다 해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거기에 빠져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누구라도 쉽게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빠져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독 현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대략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해 본 사람들 중 15%가 중독 증세를 보인다는 통계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포르노 사이트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 중독입니다. 완전히 음란한 영상에 사로잡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 중독입니다.

미국 유타대학의 빅터 크라인(Victor Cline)은 이런 웹 포르노에 빠져드는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 중독(Addiction) 단계입니다. 계속해서 포르노를 찾는 단계입니다. 둘째, 강화(Escalation) 단계입니다. 좀 더 진한 포르노를 찾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마비(Desestization)단계입니다. 아무리 봐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기 힘든 단계입니다. 그리고 넷째, 실행(Acting out sexually)단계입니다. 보았던 장면들 그리고 상상 속에 담아 두었던 장면들을 실행으로 옮기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해서 음란의 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교회의 통계입니다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18%가 중독 수준은 아니더라도 가끔씩이라도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윤리 의식이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이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 12:39을 보면 주님께서 당시를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어떻게 탄식하실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하고 음란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고 근신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란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고 결국 저 음란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죄를 정말 무섭게 다루고 계십니다. 우선 십계명의 제 7계명에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못 박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성적으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세부적인 율법 조항으로 들어가 보면 중한 죄를 사형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사형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죄명이 32개 항목이 나옵니다. 그 중에 13개나 되는 내용이 이 음란죄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음란죄를 중하게 다루고 계신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시대, 음란한 나라, 음란한 공동체를 심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 고모라 땅이 불로 심판 받은 이유가 바로 음란죄 때문입니다. 그 성 거민들이 음란의 수렁에 빠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금수만도 못한 해괴하고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우리사회를 생각해 봅니다. 소돔 고모라 땅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는 성적 타락 현상을 봅니다. 음란의 물결이 이 강산을 뒤 덮고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가정을 심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 복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밧세바를 범한 뒤에 그와 그 가정에 감당키 힘든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딸을 범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이 아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통곡하며 도망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 아들 압살롬을 죽여야만 하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음란죄가 들어온 가정에 감당키 힘든 고통이 찾아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들을 돌아봅니다. 이혼률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파열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란죄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음란의 물결이 우리 가정들을 뒤 덮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을 성결하게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심령들을 심판하십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서원된 사람입니다. 사사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방 여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드릴라로 인해서 음란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치셨습니다.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눈이 뽑혔습니다. 짐승처럼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음란의 수렁에 빠지면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치십니다. 감당키 힘든 심판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런 음란한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욕망대로 음란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잠시의 쾌락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내게 유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하다보면 중독에 빠져들게 돼서 오히려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음란의 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음란의 영(루아흐 제누님)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음란의 영은 처음에 우리를 유혹합니다. 달콤한 성적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내게 주신 자유로 그 유혹을 따라갑니다. 그러면 그 음란의 영이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일단 음란의 영이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고 나면 그 음란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행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습니다. 이제 음란의 영의 종이 되고 맙니다.




일전에 인터넷 포르노 중독에 걸렸다 힘겹게 빠져나온 사람이 쓴 간증문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제목이 “올가미”(Hooked)입니다. 그 글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일단 내가 컴퓨터를 켜면 그 때부터 컴퓨터가 나를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 나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올가미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자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와 또한 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면 하지 않을 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셨는데 고집스럽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음행을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하지 않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둘째,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19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0절을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속량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값으로 내어 주시고 사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의 뜻대로 관리할 뿐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성결하게 관리하라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내 마음대로 음란한 데 우리 몸을 내어줘서는 안 됩니다.

둘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점입니다. 15절을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했습니다.(엡 1:23, 골 1:18 등)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온 성도들이 각 지체를 이루며 형성된 영적 유기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의 말씀을 요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 성도들은 가지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포도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에 사과가 열렸다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포도나무에는 포도 열매만 열려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결코 음란의 열매를 맺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셋은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는 점입니다. 19절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시대 성전은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도 그곳에 우상이 놓였다면 그곳은 거룩한 곳일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이유는 우리 심령 속에 성령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거룩한 사람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음행을 행하게 되면 우리 심령 속에 음란의 영이 임하게 되고 성령께서 떠나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음란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들로서 먼저 음란의 영과 싸워 우리 자신을 음란의 물결로부터 지켜가야 합니다.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음란을 걷어내야 하겠습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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