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배짱이 우화>
어렸을 때 들었던 ‘개미와 배짱이’ 라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개미는 무더운 여름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울에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베짱이는 여름 내내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기타치고 놀았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베짱이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짱이는 개미에게 구걸하며 빌어먹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기회가 주어질 때,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우화입니다.
이것은 개미와 베짱이 1탄입니다.
요즘은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겨울에 먹을 양식을 쌓아두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베짱이는 여전히 시원한 나무 밑에서 기타 치며 놀았습니다.
여기까지는 1탄과 똑같습니다.
다른 것은 개미는 쉬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한 결과, 가을에 신경통, 류머티스, 관절염, 허리 디스크에 걸려 병원에서 고생하다가 겨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내내 기타 치며 놀던 베짱이는 가을에 신곡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대히트를 해서 겨울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헷갈립니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병들어 죽고, 기타치고 펑펑 놀던 베짱이는 부자가 되다니 세상에 그런 모순이 또 어디 있느냐?” 질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변화된 현대사회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농경문화에서는 힘쓰고 땀을 흘리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보산업시대에는 일의 개념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무실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메고 책상 앞에 펜을 들고 있어도, 컴퓨터 앞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일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육체노동만이 아니라 정신노동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요즘에는 새로운 창작노동이라는 개념도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며 춤추러 다니면, 양아치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창작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신판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베짱이는 놀고먹은 것이 아닙니다.
베짱이는 기타치고 놀았던 것이 아니라,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짱이는 열심히 기타 연습하고 노래연습을 하여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사람은 변합니다. 검은 머리가 하얀 머리로 변합니다. 허리가 굽어집니다.
제도와 관습도 변합니다. 법도 변합니다. 문화도 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든지 설립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회의 설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놀라운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에 이끌려 가야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전통이 교회를 이끌어 갑니다.
어떤 교회는 재정이 이끌어 갑니다.
어떤 교회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이끌어 갑니다.
어떤 교회는 화려한 건물이 이끌어 갑니다.
어떤 교회는 프로그램이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성지교회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비전을 품은 교회의 모습은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에 나타납니다.
초대교회는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친밀감을 나누는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성전에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훈련받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유무상통하며 베풀고 나누는 봉사하는 공동체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 증거 하는 증인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성지교회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입니다.
초대교회는 오늘 날과 같이 화려한 교회 건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오늘처럼 많은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자 밥이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땅이 진동하고 옥문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누룩처럼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마침내 로마라는 대제국을 복음으로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능력 있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능력 있는 성도, 능력 있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훨씬 더 좋은 시설과 환경과 프로그램으로 무장했지만 능력은 약해졌습니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도 너무 약해졌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오늘 우리가 극복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3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속주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세속화를 염려합니다.
그것은 교회 역시 물량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난히 큰대(大)자를 좋아합니다.
나라 이름부터 대한민국입니다.
거리 이름도 대부분 대자가 들어갑니다.,
강남대로, 양재대로는 있어도, 강남소로, 양재소로는 없습니다.
다리 이름도 영동대교, 성수대교, 한강대교--한강 다리 가운데 대자가 붙지 않은 다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큰 것은 모두 좋은 것처럼 여깁니다.
교회도 커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말합니다.
작은 개척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물으면 “작은 교회요”
왠지 힘이 없습니다.
큰 교회 목회를 하면 성공한 목사, 능력 있는 목사라고 인정합니다.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 무능한 목사, 실력 없는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라고 다 능력 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물론 작다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크지만 작은 교회가 있고, 작지만 큰 교회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이런 모습들이 바로 세속화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많은 부작용들이 생깁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교묘한 술책입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 이런 세속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가 좋은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이기주의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곧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기적인 모습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한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조차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는 배타적인 공동체가 되서는 안됩니다.
끼리끼리도 안됩니다.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여서도 안됩니다.
어느 교회에 가보면 특정한 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자기 고향 출신 목사님이 아니면 절대 모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특정 집단이나, 지역이나, 혈연에 의해서 결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셋째로 인본주의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생각이나 뜻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이 시대는 휴매니즘이 극에 달했습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본주의 기독교 입장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교만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의 출발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셔서 동산 중앙에 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왜 따먹으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씀하신 위험한 나무를 동산 중앙에 심었겠습니까?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보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시키기 원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피조물이다.”
사탄의 유혹은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 없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성의 힘으로, 과학기술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꾸어지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반드시 넘어서야 합니다.
세속주의, 이기주의, 인본주의 장벽을 극복할 때 교회는 능력 있는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in word but in power.)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이 땅에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I am Almighty God ;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나이는 75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기다리다 지친 아브람은 85세에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약속의 씨앗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벌써 그의 나이 99세, 사래의 나이는 89세로 경수가 끊어져 임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여기서 ‘엘’은 ‘하나님’이고, ‘샤다이’는 ‘능력’입니다.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했던 미국 칼빈신학원 루이스 벌코프 교수는 말했습니다.
"엘 샤다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엘 샤다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 그분의 주권 가운데 있다. 창조와 보존, 선택 혹은 유기, 만물의 운행과 통치가 엘 샤다이 그분의 품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엘 샤다이는 전능자 하나님이란 뜻 이전에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평안을 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잠을 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불편한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엔 생명이 있습니다.
젖을 빠는 아이에게 적어도 그 어머니는 전능한 존재입니다.
아기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들이 어머니의 품에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능력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에겐 너무 자연스런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분은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이 모든 일은 쉽고도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전능자-엘 샤다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항상 내 눈, 내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엘 샤다이의 환경을 볼 줄 압니다.
엘 샤다이의 관점으로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엘 샤다이-전능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언제나 내 곁에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엘 샤다이-하나님의 능력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떠나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 주님의 품을 떠나면 마른 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네킹과 같이 생명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됩니다.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주님의 능력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위르게 몰트만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재미있는 카멜레온 비유를 통해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환경에 맞추어 몸 색깔을 바꿉니다.
그것은 카멜레온 스스로가 환경을 변화시킬 만한 힘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카멜레온처럼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결국 침체를 겪고, 나중에는 도태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지 못한 교회는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교회는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철저하게 성령의 나타남과 기름 부으심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고, 말씀대로 순종케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탄을 제압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젖먹이와 같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님을 통하여 임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우리 모든 성지가족들이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될 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숫자나 프로그램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임할 때 우리는 이 지역사회에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지교회 창립 28주년 되는 기념주일입니다.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지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바로 사랑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바로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뜻 깊은 창립주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코자 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찾아주는 실로암 안과 병원을 건립하는 예물을 드립니다.
갑작스런 수재로 생명을 잃고, 집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앞으로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성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지교회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성도, 능력 있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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