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나는 얼마짜리 인생입니까?/고전6:12-20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10

사람들은 물건에 값을 매겨서 가치를 결정합니다.
마이크를 사는데 50만원을 지불하면 50만원짜리가 됩니다.
강대상을 사는데 3백만원을 지불하면 300만원짜리가 됩니다.
인간의 몸을 화학적으로 분해면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요?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해부학교수 먼센의 발표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인체를 분석하면 71%의 물과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황, 0.5%의 나트륨, 0.4%의 염소칼슘으로 구성되었답니다.
이것을 값으로 환산하면 약 89센트가 됩니다.
인간을 화학적으로 값을 매기면 천 원짜리 한 장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모든 것을 수치로 계산하는 계량화된 사회에서는 사람도 상품처럼 값을 정합니다.
소위 헤드 헌터(Head Hunter) 업체에서는 사람의 경력이나 능력에 따라서 값을 매기고, 회사에 소개를 합니다.
사람을 점점 상품화시키고 있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물건의 가치는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가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도 보석으로 만들면 값이 비싸지만 질그릇은 쌉니다.
물건의 가치는 누가 만드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똑같은 그림이라도 누가 그렸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집니다.
이 그림이 누구의 작품인 줄 아십니까?
스페인의 유명한 작가 피카소의 <황소머리>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어느 날 피카소가 길거리를 지나다가 버려진 자전거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을 떼다가 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약 300억 원 정도합니다.
버려진 쓸모없는 자전거 핸들과 안장도 피카소의 손에 들려지면 작품이 됩니다.
그리고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물건의 가치는 무엇을 위해 쓰이느냐에 따라서 효용가치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강아지 밥 주는 데 쓰면 개밥그릇입니다.
그런데 싸구려 질그릇이라도 임금님 밥상에 올라가면 귀한 그릇이 됩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일까요?
첫째로, 창조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지,정,의를 지닌 인격체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가치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 13-14절에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 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6절에 계속해서 보면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이셨으면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우리를 계획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기록해 놓으십니다.
이것을 다윗은 신묘막측(개역한글)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 몸을 보면 얼마나 신묘막측한지 모릅니다.
힌 쌀밥을 먹는데 검은 머리카락이 나옵니다.
평생 자라는 머리카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약 563Km가 됩니다.
평생 자라는 손톱의 길이는 3.7m이고,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이 가장 빨리 자랍니다.
우리 몸의 혈관의 길이는 약 10만Km로 지구의 둘레의 두 바퀴 반 인데, 시속 600만 Km로 돕니다.
피가 온 몸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50초 걸립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탄생자체가 신비입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려면 약 3-5억개의 정자가 한 마리의 난자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날 확률은 적어도 3억분의 1일입니다.
그 엄청난 확률을 뚫고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누가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모태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만세 전부터 예정하셨다가 특별하게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인간의 가치를 아는 첫 출발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우연히 태어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태어난 시간과 날자에 따라 사주팔자가 정해졌다고 믿습니다.
운명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사 한번 하려고 해도 손 없는 날을 잡아야 합니다.
결혼을 하려면 사주팔자를 봐서 궁합이 합니다.

진화론적 사고를 가지고 사는 자들의 삶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적을 가지고 다닙니다.
무엇이 쓰였는지, 무슨 내용인지 알지도 못하는 종이쪽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이런 운명론적 인생관, 진화론적 인생관에 빠지면 인간의 삶을 약육강식의 논리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합니다.

작품과 상품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상품은 대량생산입니다,
같은 제품의 물건을 수없이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작품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희소성이 있습니다.
상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집니다.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상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작품은 작가의 명예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든 창조의 걸작품입니다.
우리는 65억 인구가운데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유일무이한 작품입니다.
옆에 계신 분을 이렇게 축복해 볼까요?
“당신은 창조의 걸작품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입니다.”(You are special.)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창조의 작품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집니다.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창조의 작품이라는 분명한 창조의식을 지니면 우리는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롱다리(long leg)만 작품이 아니라 숏다리(short leg)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많이 가진 자도 적게 가진 자도, 많이 배운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소중한 작품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든 창조의 작품이라는 의식으로 날마다 적극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여기시는데 스스로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부족한 자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보배롭고 존귀한 자가 됩니다.
버려진 자전거일지라도 피카소의 손에 들려지면 작품이 되고,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절)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4절)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야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일까요?
나는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든 창조의 걸작품임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구속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계속해서 집을 나간 탕자처럼 세상으로 달려가 썩어질 것을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점점 더 하나님의 품을 떠나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멸망의 길로 달려갑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린 비상처방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에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가장 끔찍한 저주의 형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죄는 무생물이나 생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인간에게만 관계가 있습니다.
인류의 대표선수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모든 피조물이 타락합니다.
인류의 번성과 함께 죄는 더 번성하게 됩니다.
죄는 인격에 붙어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격을 지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죄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지만 우리의 머리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려고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려고 손과 발에 못을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몸으로 은밀하게 지은 죄를 용서하시려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19-20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의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닙니다.
주님의 피 값을 주고 사 주신,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 몸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몸을 함부로 사용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몸을 정욕을 위해 불살랐습니다.
거룩한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창기와 합함으로 창기의 지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성전된 너희들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을 지불하고 구원받은 ‘예수짜리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놀라운 신적교환(Divine Exchange)이 이뤄졌습니다.
우리의 형벌을 용서로 바꿔주셨습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의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가난을 부요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어떤 공로나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엄청난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고 우리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구속의 가치를 기억하고 사는 것이 지혜요 은혜요 능력입니다.

셋째로, 사명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신적 교환이 이루어진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릇이 무엇을 위해 쓰이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듯이 주님의 피 값을 주고 성전 삼아주신 우리 몸도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변합니다.
본문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하십니다.
구속의 은혜를 입었으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바로 부르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자로서 부르심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인생의 가치는 얼만큼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잠언19:18절에 “묵시(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unrestrained)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비전이 없는 인생은 고삐 뿔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 인생을 삽니다.
좌충우돌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0:18-20절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통한 열방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비전이요, 우리의 비전입니다.
위대한 명령에 대한 위대한 헌신은 위대한 사람, 위대한 교회를 만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을 보십시오.
자신의 뜻을 따라 살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울로 변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가장 고귀한 분으로 여깁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사도로서의 사명감을 발견합니다.
그가 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핍박과 죽음의 위협과 생명의 위기가 있었지만 바울은 끝까지 로마의 복음전파를 위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려 사는 바울의 인생은 너무나 멋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삶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내가 세워놓은 뜻, 야망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에 붙잡힌 사람,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소명의 문제요 사명감의 문제입니다.

호주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난 닉 부이치치의 삶을 통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영상 보기>

닉은 절망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용기와 희망을 보여줍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강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더 어려운 캄보디아를 돕는 구호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환경이나 신체적 조건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라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며,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희망의 빛을 던지며,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닉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하고 보배롭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속삭이십니다.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순종함으로 위대한 인생으로 우뚝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얼마짜리 인생으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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