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세상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5-40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09

요즘 책들을 보면 흔히 ‘자존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낙심과 좌절을 하게 되고 때로는 자살까지 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을 치유하여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한다. 죄인인 인간은 누구나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즉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 자기 사랑이란 게 너무 과하면 과했지 부족하지는 않다. 이런 실정이기에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 자기 사랑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원래 자기를 사랑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자기(自己) 부인(否認)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사랑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은 극단적인 자기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신적인 문제 등 특별한 경우로 자살하는 경우는 예외로 두어야 할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살했다. 그러면 그가 누구를 위해서 자살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자살했는가?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살을 종용하신 적이 있으셨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모른 척 했던 베드로에게나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에 놓고 도망갔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칼을 주시면서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 죽음으로써 해결될 문제라면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문제는 죽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회개할 것을 말씀하셨다. 회개란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인간은 눈이 어두워져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때로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자살이라는 것을 하기도 한다. 인간이 이렇게 볼 때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결국 자기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는 자기 사랑을 세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실제로 작은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식사 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안 했으면 안 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나는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거짓말이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웃을 해하는 것이다. 이렇듯 거짓말은 자기 보호의 수단이다. 남을 해쳐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비록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직접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불리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나는 어찌하여 나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에게 불리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결국 그 바탕에는 내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모두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자기에게 유리한 진실을 말할 뿐이다. 자식이 1등하면 진실을 말하지만, 자식이 꼴찌하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그대로 고백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럴 때는 표현 방법이 달라진다. ‘그래, 너 잘났어! 나는 못났고 못 배웠다. 왜?’ 이런 식이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의 인간관계에서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또 자기 보호를 위해 세상의 것을 추구한다. 세상의 것이 없으면 낙심하고, 있으면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이 인간이다.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다. 본문은 또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에는 “…하지 않은 자같이 살라”는 5개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29절의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0절의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1절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31절에서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말씀한다.

바울 사도는 본문의 맥락에 의거해서 결혼 문제를 맨 처음으로 언급한다. 이 말은 결혼 내의 성관계를 무시하라는 가르침은 아니다(cf. 3-5). 예수님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cf. 막 12:25) 결혼을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질 제도로 보는 관점에서 결혼을 지상의 절대적인 가치나 목표로 삼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으로 상대화하라는 가르침이다.
혼자 살 때는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결혼을 한 후 자기 배우자에게 매이는 경우가 있다. 바울 사도는 아내에게 매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가 있는 자들은 아내가 없는 자들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23절에 나와 있다. 우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지나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하며”라는 말을 들을 때, ‘그러면 아내를 보호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하라는 말인가? 행복하게 해 주지 말라는 말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악한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아내를 사랑하되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하셨다. 즉 자기 식대로 하면서 세상에 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살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30). 이 세상의 가치들(돈, 권력, 지식, 명예, 아름다움 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잘못 사용되거나 우상화되면 도리어 우리에게 해악이 된다. 진정으로 고귀하고 절대적인 가치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곧 없어져 버릴 가치들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다 하여(가난하고, 출세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고난 속에 있다 하여) 낙심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다. 반면에 그런 가치들을 많이 확보했다 하여 마치 영생이라도 얻은 양 좋아할 것도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얻을 영생에 대한 소망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인내와 힘을 주며, ‘출세’한 사람들에겐 교만하지 않도록 한다.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건들을) 사는 자들은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자같이 살며”,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그것을) 다 이용하지 않는 자같이 살라.” 사라져 갈 세상의 물건이나,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집을 사용할 수 있고, 또한 가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절대시하고, 그것들이 마치 우리에게 구원(완전한 행복)이라도 가져다 줄 것으로 우상화하고, 그것들에 푹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직장에 다니며 승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두 사라질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가치들이나 기회들을 상대화하고 그것들을 이용하되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

세상에서는 남에게 없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곧 힘으로 작용한다. 남보다 지위가 높아지면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며, 남보다 잘하는 게 있으면 그것 역시 힘으로 작용한다. 뭔가 힘이 될 만한 것들을 가진 자들에게는 말이 많다. 쉽게 남을 판단한다. 그러나 없는 자는 말이 없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과 비교하지도 않는다.
‘…하지 않는 자처럼’ 산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 애당초 세상 것을 힘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보다 낫다고 자랑하지도 않으며, 남보다 못하다고 기가 죽지도 않는다. 삶의 근거가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종교적인 것을 많이 한 자와 적게 한 자에게 차별이 있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남들에게 없는 자랑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지 않는 자처럼 산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힘으로 삼으며 살았다. 그러니 당연히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금식을 했고, 시간에 맞추어 빈틈없이 기도를 했고,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아주 철저한 십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살았다면 남들과 비교하고 정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그것으로 남들을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6)

바울 사도는 처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말씀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28절에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요점은 세상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환난이란 자기를 붙드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할 고난을 의미한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없을 고난이 결혼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결혼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매여 살 때가 많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보며 할 말을 못하고, 서로 자랑하고, 낙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자는 없는 자처럼, 없는 자는 있는 자처럼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22)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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