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던 '광수생각'이라는 만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석‘이라는 청년이 편의점에 취직했습니다. 드디어 영석이가 첫 출근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첫 출근한 영석이에게 주인이 말합니다. “자네가 오늘 할 일은 매장 안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야!” 그때 영석이가 말합니다.
“예? 저보고 청소를 하라구요? 저는 대학출신인데요?” 그때 주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래? 미안, 내가 그걸 깜박했군! 빗자루를 이리 주게. 내가 비질하는 법을 가르쳐 줄테니.“ 영석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광수는 이렇게 만화를 그린 후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았습니다. <대학에도 식당이 있지만 대학이 밥 먹여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만화는 지식은 갈수록 쌓이는데, 생활은 따르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대해 꼬집은 내용입니다. 사실 사람은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배운 만큼 생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취득한 지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변화는 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동안 살면서 얻은 경험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그 경험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 자기가 습득한 지식과 차이가 나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의 우상화> 혹은, <지식의 우상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렘9:23) 우리는 이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용기와 부함을 자랑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최고로 여기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덴 사람들입니다. 아덴은 작년에 올림픽을 치렀던 지금의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옛날부터 아덴은 철학과 문학과 정치와 종교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덴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제논, 아리스토 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우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아덴에는 크고 작은 우상이 많을 때는 무려 3만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아덴 사람들은 매우 철학적이었는데, 그곳에는 대표적인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이 두 학파가 아덴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이곳 아덴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로부터 18절에서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은 이 두 부류의 철학자들과 더불어 아덴의 거리에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8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전도할 때와 달리, 아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아덴 사람들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날마다 회당과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과 심한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사도 바울
그런데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의 결실을 크게 거두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덴 사람들 가운데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도행전 17장 32절부터 34절까지를 읽겠습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는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 전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라고 하는 한 여자와 또 다른 몇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뿐, 아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사역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 이러한 실패를 경험한 바울이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때, 그 마음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저는 과거 평신도 때나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사도행전 18장 1절의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읽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으니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로 가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덴에서 실패한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설교 사역을 하다보니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목회자에게 가장 실망이 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목회자가 언제 실망하는 줄 아십니까? 돈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와서 몸이 아플 때가 아닙니다. 뒤에서 수군거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아닙니다. 다른 사역자들은 모르겠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이 될 때는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입니다. 분명히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을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능력 있는 말씀을 오랫동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을 때, 실망이 됩니다.
오랫동안 말씀으로 훈련받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성숙하지 않을 때, 실망이 됩니다. 또 예배를 마치고 ’오늘 설교 죽쒔다’는 느낌이 들 때, 스스로 실망이 됩니다. 그 때에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아덴에서 전도에 실패한 바울도 이러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가지고 아덴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실패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덴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습니다. 그는 실패를 딛고 일어섰습니다.
1940년대 초,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라는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53년 5월29일, 그는 네팔출신 셀파와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처음 시도에서 실패한 엔드먼드 힐러리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여 결국에는 세계 최고봉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 실패하셨습니까? 사업에, 직장생활에 실패하셨습니까? 학업에, 인간관계에 실패하셨습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했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지난 한 주 동안 믿음생활에 실패하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실패는 오히려 성공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도 아덴에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습니다. 고린도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행18:1,4~5) 우리는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바울의 사역 스타일이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절의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구절로부터 사도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는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논쟁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아덴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성공한 사도 바울
그 결과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7절 이하를 보면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18:7~8, 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는데,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라는 사람과 온 가족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목격한 바울은 훗날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분명하게 밝힌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날마다 토론하던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로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오직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곳에 영혼이 구원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을지 몰라도 십자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지만, 복음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3년 11월 4일 81세의 나이에 성철 스님이라는 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입적, 세상적으로 말하면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혼을 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10년 동안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16년 동안 솔잎 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를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 분은 수십 년 동안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았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의 고행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 분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아무리 고행을 해도 죄인은 죄인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하얀 사람이나 검은 사람이나 노란 사람이나, 빈부귀천, 남여노소, 피부색깔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에는 인간의 내면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의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라졌다면, 우리의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다시금 복음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벤트도 좋고, 프로그램도 좋고, 세미나도 좋고, 회의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는 연합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그것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우리는 약해지고 문제에 빠지고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큰 문제 때문에 교회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주 시시한 문제가지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는 예배 후 국에다 밥 말아먹을 먹을 것인가, 커피에다 비스켓을 먹을 것인가를 가지고 언쟁을 하다가 둘로 쪼개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밥이면 어떻고 커피면 어떻습니까?
교회당 카펫트 색깔이 빨강색이면 어떻고 갈색이면 어떻습니까? 창문에 커튼을 하면 어떻고 블라인드를 하면 어떻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신앙생활의 핵심도 아니고, 교회의 핵심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핵심입니다. 우리는 항상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인 복음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나 양보를 해서는 안 되지만, 핵심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교회 안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난쟁이를 겨우 면할 정도인 150센티미터의 신장에 불과한 작은 키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작았습니다. 그리고 환한 피부색깔을 띠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의 피부는 창백한 잿빛 색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벌레 같은 존재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로 찬송가 141장에 올라와 있는 가사를 그가 쓴 것입니다. 저는 아이삭 와츠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스펄젼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습니다. 어느 날 스펄젼목사님이 울고 있는 것을 목사님 사모님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 왜 울고 있어요?"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말이야,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 봐도 감동이 없어. 그래서 내가 울어" 혹시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감동이 없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몸 찢기시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이 맹숭맹숭하게 앉아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타성에 젖고, 매너리즘에 빠져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하면서도 그저 입술로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찢기신 몸을 드시면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마시면서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 안에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이 회복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바울의 전도/고전2:1-5 (0) | 2017.07.11 |
---|---|
[스크랩] 말과 지혜로 안됩니다/고전2:1-5 (0) | 2017.07.11 |
[스크랩] 오직 성령으로/고전2:10-16 (0) | 2017.07.11 |
[스크랩] 오직 십자가/고전2:1-5 (0) | 2017.07.11 |
[스크랩] 하나님의 영/고전2:10-16 (0) | 2017.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