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좋은 믿음으로 살고자 작정한 사람이 있다. 그런 소망을 품고 이루기에 알맞은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글자를 배우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였다. 온 가족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생활의 교본으로 삼아 사는 가정이었다.
그는 한번도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매우 작은 일에서도 경건함을 유지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사람들도 그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믿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 학문을 배우는 데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 학파 출신이라면 다 알아주는 엘리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면서 실력을 닦았다.
그런 재능과 실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지위도 얻었다. 누가 보아도 상공한 사람이었다. 믿음에서 나무랄 데 없는 신실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실력과 지위가 모두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만큼만 믿고, 저 사람만 만큼만 실력 있고, 저 사람만큼만 지위를 가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해도 좋을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었다. 믿음 좋고, 실력 있고, 지위가 높은 그야말로 복되고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가꾸고 이루었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여태껏 자기가 잘못 살아왔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믿어온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온통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쌓은 학벌이나 심혈을 기울인 지위도 아무 쓸모없는 것이어서 당장 사퇴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선언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도 잘 아는 바울이다. 그는 유태인이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믿음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바리새인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있는 공회원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 믿어온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신앙이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여러분! 혹시라도 “바울이란 사람이 그동안 대강 믿는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다가 이제 진실을 말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바로 믿고, 누구보다 열심히 믿으려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의 믿음과 그 만큼의 성취를 이룬 사람인데 “잘못 믿었다. 잘못 살아왔다.”고 했으므로 그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울은 왜 자신의 삶을 온통 뒤엎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십자가의 경험’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는 가장 성경을 많이 알고, 가장 성경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때까지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바탕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십자가를 아는가? 십자가를 믿는가? 여러분이 만일 즉각적인 응답으로 ‘나를 위한 십자가’라고 대답하기를 망설인다면 믿음이 매우 심각한 부실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를 믿지 못하면 매년 다가오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하면 성탄절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면 성경이며 기도, 예배가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십자가를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도 하나님도 강 건너 불구경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다시 한 번 묻는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십자가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어떤 의미인가?
1.하나님의 계획
십자가는 오래 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십자가는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참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다. 온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시며 주인공으로 삼으시며,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며,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는 교제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그야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게 계속되었으면 십자가는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했다. 그것이 천길 낭떠러지인 줄 모르고 하나님을 버리고 제 홀로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세상사는 사람 누구도 죽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지금 현재 자기 속에 죽음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데는 둔하다. 사람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고 떠나는 인간의 비참을 보셨다. 제 죽을 길을 가면서도 룰루랄라 흥겨워하는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어떻게 저 인생을 살려낼까 궁리하신 결과 십자가를 계획하신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는 배반하고 떠난 길을 돌이켜 올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하고 무한한 사랑을 베풀기로 하신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를 고쳐서 죄의 질병을 이길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를 베풀며 더러워진 사람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로 한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요3:16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당연히 죽을 우리를 죽지 않게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요3:16을 수백 번, 수 천 번 읽고 암송해 보아도 우리는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한다. 마치 핏덩이로 태어나 사람구실 할 때까지 하루도 그 보살핌이 없이는 산 날이 없으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십자가는 감지하지 못하고, 다만 탈 없이 살도록, 부족함 없이 살도록 도와주시는 수준의 은혜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건강하고, 지위를 높이는 일은 십자가가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를 위해서 독생자를 죽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돈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지위도 드높은 아버지가 있고 그에게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백혈병이다. 의사는 1년을 넘기가 어렵다고 하고 치료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골수이식뿐이라는 것이다. 아들은 아직 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재산을 다 털고 지위를 내놓고라도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자기병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설명을 해줘도 자기가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대신에 아버지가 가진 재산과 지위에 몰두해 있다. “언제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실까?” “언제 아버지의 지위에 대신 오를까?” 밤낮 궁리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백혈병이 온 몸으로 번져가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만나기만 하면 “내 재산을 더 늘려주십시오.” “내 지위를 더 높여주십시오.” 조르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래 네 원대로 해라. 돈도 가지고 지위도 맘껏 가져라.” 아들의 생명을 포기해버리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아버지는 아무도 없다. 아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백방으로 치료의 길을 찾아낼 것이다. 마침내 딱 맞는 골수를 찾아냈다. 아버지의 골수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판정이 나온 것이다. 낭설일 필요도 없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버지 당신이 고통을 받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혹 잘못되어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고 수술대에 오르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보다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것이 십자가다. 우리 스스로는 죄를 인정하거나 죽음을 깨닫지도 못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해결할 대책을 수립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2. 예수님의 완성
지금 이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사라들이라도 하나님의 십자가 계획을 잘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현장까지 갔던 제자들도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계획- 십자가의 의미를 가장 알고 계신 분운 예수님이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변 하여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말하여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다.(마16:23)
그렇게 실수를 했으면 고쳐졌을 법 한데 끝까지 그러지를 못했다.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체포 조를 이끌고 왔을 때 그는 칼을 빼들고 예수님을 붙잡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대단한 충성심이기는 하지만 그 행동도 예수님으로부터 못마땅한 핀잔을 들어야 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3, 54) 베드로가 빼든 칼이 예수님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말씀이라고 하겠다.
요10: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도 될 것이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약속)에 따라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냥 우연히 태어나서 좀 더 모범적이며, 선하며,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 아닌 것이다. 창 3:15하나님은 그 분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기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기로 하셨다. 복음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소개하면서 그 약속들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음을 증명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러 오셨음을 누차 밝히셨다. 요14:31에서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전체 사역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를 바라셨다.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 이루려고 하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아주 괴악한 죄수가 되어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오늘날도 흉악범이 아니고는 사형에 처해지는 일이 없다. 당시로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죄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죄목으로 처형되었었던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은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이었다. 죄목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불경죄였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총독 빌라도에 의해 사형이 선고 되었고, 가장 극형인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믿었다. 막10:45에서 스스로 밝히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대속물이라는 것은 속죄를 위해 대신 바쳐지는 제물을 말한다. 구약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양이나 소 같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다. 죄지은 사람이 받을 형벌을 소나 양이 대신 받게 하는 것이다. 대속물이 죽으므로 사람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자신이 그 대속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십자가라는 의미다. 예수님 자신은 죄 없는 순결한 분이셨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짐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였기 때문에 억지로 잡혀가는 것을 감수하셨다. 침 뱉음과 조롱을 당함을 참으셨다. 살을 찢는 채찍과 가시면류관, 손발에 못이 박히고 목숨이 끊어지기까지의 십자가 고통을 견디셨던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당함으로 죽을 우리의 생명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셨기 때문이다.
요10:에서 주님은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고 말씀하셨다. 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양들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를 살릴 줄 아셨기에 그 고통의 길을 달갑게 가신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아는가? “다 이루었도다”(요19:30)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겠는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루신 것이다. 죄인을 구원해서 영생축복에 이르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완성이다.
3. 우리의 적용
예수님에 관한 성경이 기록 중에 제일 길게 기록된 것이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그 어떤 사람의 전기에도 죽음을 그만큼 길고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간 행적은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간시간 장소와 사건의 변화에 따라 거의 빠뜨림이 없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왜 그렇게 했겠는가? 그의 죽음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삶 전체를 쏟아 부었던 사도 바울이 어디에다 가장 큰 강조점을 두었다고 하는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왜 그랬을까?
우리보다 훨씬 성경을 많이 아는 바울이었다. 우리보다 훨씬 생활이 바른 바울이었다. 우리보다 훨씬 믿음에 열심인 바울이었다. 그런 생활 가운데서도 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아갈수록 자기가 거기에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가 발견되었다.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다 지키지 못한 율법이 자기를 꽁꽁 묶어버리는 궁지에 몰렸다. 믿음만큼 삶이 향상되거나 열심만큼 인격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셨다. “네가 구원을 이루겠느냐? 아니다. 내가 이루어주마.”고 하셨다. “네가 아무리 해도 스스로는 씻어내지 못하는 죄, 아무리 애써도 다가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 너의 불가능을 알기에 내가 왔고, 너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내가 십자가를 졌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바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누가 나를 위해 죽다니! 내 안에 있는 모든 죄를 그가 가져다니! 죽어서 끝날 세상인줄 알았는데 내가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놓으시다니! 십자가에 그 모든 은혜가 감겨져 있다니!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고, 오히려 내가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내 죄를 대신하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니!
그 놀라운 체험을 바울은 이렇게 섰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체함과 가지와 같은 은혜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권하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1)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십자가를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줄 믿는가? 주님의 죽음이 내 형벌을 대신 받은 은혜인줄 믿는가?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영생을 얻는 줄 믿는가?
그렇게 된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로 이끄심을 감사하는가?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포도주 잔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이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요6:54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라.”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밝혀주신 것이다.
우리는 오늘 그 예식을 행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기를 바란다. 나를 위한 십자가를 체험하기 바란다. 나에게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은혜를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묵상하기 바란다.
그는 한번도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매우 작은 일에서도 경건함을 유지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사람들도 그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믿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 학문을 배우는 데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 학파 출신이라면 다 알아주는 엘리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면서 실력을 닦았다.
그런 재능과 실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지위도 얻었다. 누가 보아도 상공한 사람이었다. 믿음에서 나무랄 데 없는 신실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실력과 지위가 모두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만큼만 믿고, 저 사람만 만큼만 실력 있고, 저 사람만큼만 지위를 가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해도 좋을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었다. 믿음 좋고, 실력 있고, 지위가 높은 그야말로 복되고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가꾸고 이루었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여태껏 자기가 잘못 살아왔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믿어온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온통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쌓은 학벌이나 심혈을 기울인 지위도 아무 쓸모없는 것이어서 당장 사퇴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선언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도 잘 아는 바울이다. 그는 유태인이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믿음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바리새인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있는 공회원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 믿어온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신앙이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여러분! 혹시라도 “바울이란 사람이 그동안 대강 믿는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다가 이제 진실을 말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바로 믿고, 누구보다 열심히 믿으려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의 믿음과 그 만큼의 성취를 이룬 사람인데 “잘못 믿었다. 잘못 살아왔다.”고 했으므로 그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울은 왜 자신의 삶을 온통 뒤엎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십자가의 경험’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는 가장 성경을 많이 알고, 가장 성경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때까지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바탕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십자가를 아는가? 십자가를 믿는가? 여러분이 만일 즉각적인 응답으로 ‘나를 위한 십자가’라고 대답하기를 망설인다면 믿음이 매우 심각한 부실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를 믿지 못하면 매년 다가오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하면 성탄절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면 성경이며 기도, 예배가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십자가를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도 하나님도 강 건너 불구경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다시 한 번 묻는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십자가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어떤 의미인가?
1.하나님의 계획
십자가는 오래 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십자가는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참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다. 온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시며 주인공으로 삼으시며,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며,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는 교제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그야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게 계속되었으면 십자가는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했다. 그것이 천길 낭떠러지인 줄 모르고 하나님을 버리고 제 홀로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세상사는 사람 누구도 죽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지금 현재 자기 속에 죽음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데는 둔하다. 사람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고 떠나는 인간의 비참을 보셨다. 제 죽을 길을 가면서도 룰루랄라 흥겨워하는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어떻게 저 인생을 살려낼까 궁리하신 결과 십자가를 계획하신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는 배반하고 떠난 길을 돌이켜 올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하고 무한한 사랑을 베풀기로 하신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를 고쳐서 죄의 질병을 이길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를 베풀며 더러워진 사람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로 한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요3:16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당연히 죽을 우리를 죽지 않게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요3:16을 수백 번, 수 천 번 읽고 암송해 보아도 우리는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한다. 마치 핏덩이로 태어나 사람구실 할 때까지 하루도 그 보살핌이 없이는 산 날이 없으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십자가는 감지하지 못하고, 다만 탈 없이 살도록, 부족함 없이 살도록 도와주시는 수준의 은혜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건강하고, 지위를 높이는 일은 십자가가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를 위해서 독생자를 죽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돈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지위도 드높은 아버지가 있고 그에게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백혈병이다. 의사는 1년을 넘기가 어렵다고 하고 치료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골수이식뿐이라는 것이다. 아들은 아직 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재산을 다 털고 지위를 내놓고라도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자기병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설명을 해줘도 자기가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대신에 아버지가 가진 재산과 지위에 몰두해 있다. “언제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실까?” “언제 아버지의 지위에 대신 오를까?” 밤낮 궁리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백혈병이 온 몸으로 번져가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만나기만 하면 “내 재산을 더 늘려주십시오.” “내 지위를 더 높여주십시오.” 조르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래 네 원대로 해라. 돈도 가지고 지위도 맘껏 가져라.” 아들의 생명을 포기해버리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아버지는 아무도 없다. 아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백방으로 치료의 길을 찾아낼 것이다. 마침내 딱 맞는 골수를 찾아냈다. 아버지의 골수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판정이 나온 것이다. 낭설일 필요도 없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버지 당신이 고통을 받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혹 잘못되어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고 수술대에 오르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보다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것이 십자가다. 우리 스스로는 죄를 인정하거나 죽음을 깨닫지도 못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해결할 대책을 수립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2. 예수님의 완성
지금 이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사라들이라도 하나님의 십자가 계획을 잘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현장까지 갔던 제자들도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계획- 십자가의 의미를 가장 알고 계신 분운 예수님이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변 하여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말하여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다.(마16:23)
그렇게 실수를 했으면 고쳐졌을 법 한데 끝까지 그러지를 못했다.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체포 조를 이끌고 왔을 때 그는 칼을 빼들고 예수님을 붙잡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대단한 충성심이기는 하지만 그 행동도 예수님으로부터 못마땅한 핀잔을 들어야 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3, 54) 베드로가 빼든 칼이 예수님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말씀이라고 하겠다.
요10: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도 될 것이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약속)에 따라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냥 우연히 태어나서 좀 더 모범적이며, 선하며,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 아닌 것이다. 창 3:15하나님은 그 분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기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기로 하셨다. 복음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소개하면서 그 약속들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음을 증명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러 오셨음을 누차 밝히셨다. 요14:31에서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전체 사역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를 바라셨다.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 이루려고 하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아주 괴악한 죄수가 되어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오늘날도 흉악범이 아니고는 사형에 처해지는 일이 없다. 당시로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죄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죄목으로 처형되었었던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은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이었다. 죄목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불경죄였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총독 빌라도에 의해 사형이 선고 되었고, 가장 극형인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믿었다. 막10:45에서 스스로 밝히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대속물이라는 것은 속죄를 위해 대신 바쳐지는 제물을 말한다. 구약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양이나 소 같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다. 죄지은 사람이 받을 형벌을 소나 양이 대신 받게 하는 것이다. 대속물이 죽으므로 사람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자신이 그 대속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십자가라는 의미다. 예수님 자신은 죄 없는 순결한 분이셨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짐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였기 때문에 억지로 잡혀가는 것을 감수하셨다. 침 뱉음과 조롱을 당함을 참으셨다. 살을 찢는 채찍과 가시면류관, 손발에 못이 박히고 목숨이 끊어지기까지의 십자가 고통을 견디셨던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당함으로 죽을 우리의 생명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셨기 때문이다.
요10:에서 주님은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고 말씀하셨다. 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양들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를 살릴 줄 아셨기에 그 고통의 길을 달갑게 가신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아는가? “다 이루었도다”(요19:30)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겠는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루신 것이다. 죄인을 구원해서 영생축복에 이르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완성이다.
3. 우리의 적용
예수님에 관한 성경이 기록 중에 제일 길게 기록된 것이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그 어떤 사람의 전기에도 죽음을 그만큼 길고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간 행적은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간시간 장소와 사건의 변화에 따라 거의 빠뜨림이 없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왜 그렇게 했겠는가? 그의 죽음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삶 전체를 쏟아 부었던 사도 바울이 어디에다 가장 큰 강조점을 두었다고 하는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왜 그랬을까?
우리보다 훨씬 성경을 많이 아는 바울이었다. 우리보다 훨씬 생활이 바른 바울이었다. 우리보다 훨씬 믿음에 열심인 바울이었다. 그런 생활 가운데서도 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아갈수록 자기가 거기에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가 발견되었다.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다 지키지 못한 율법이 자기를 꽁꽁 묶어버리는 궁지에 몰렸다. 믿음만큼 삶이 향상되거나 열심만큼 인격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셨다. “네가 구원을 이루겠느냐? 아니다. 내가 이루어주마.”고 하셨다. “네가 아무리 해도 스스로는 씻어내지 못하는 죄, 아무리 애써도 다가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 너의 불가능을 알기에 내가 왔고, 너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내가 십자가를 졌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바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누가 나를 위해 죽다니! 내 안에 있는 모든 죄를 그가 가져다니! 죽어서 끝날 세상인줄 알았는데 내가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놓으시다니! 십자가에 그 모든 은혜가 감겨져 있다니!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고, 오히려 내가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내 죄를 대신하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니!
그 놀라운 체험을 바울은 이렇게 섰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체함과 가지와 같은 은혜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권하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1)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십자가를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줄 믿는가? 주님의 죽음이 내 형벌을 대신 받은 은혜인줄 믿는가?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영생을 얻는 줄 믿는가?
그렇게 된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로 이끄심을 감사하는가?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포도주 잔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이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요6:54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라.”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밝혀주신 것이다.
우리는 오늘 그 예식을 행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기를 바란다. 나를 위한 십자가를 체험하기 바란다. 나에게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은혜를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묵상하기 바란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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