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라든지, 아니면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라는 말은 얼른 이해가 되지만, “안녕하시렵니까?”라는 말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동엽이라는 개그맨은 “안녕하시렵니까?”라는 인사를 시도 때도 없이 계속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 말에는 핵심이 들어있지 않고 횡설수설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이 유행어와 연기로 말미암아 많은 인기를 얻었고, 그가 개그맨으로써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정해 보겠습니다.
만약 그가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되어 데스크에 앉아 채널 ONE의 6시 뉴스 시그널이 떨어질 때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시렵니까?”라고 인사를 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계속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방송국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또 가정해서 그가 만약 목사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서도 당장 쫓겨났을 것입니다. 좀 더 심하면 그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그 개그맨과 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명확한 주제도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들어도 상대방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주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짧지만 핵심을 분명히 잘 전달하는 사람이 말 잘 잘하는 사람입니다.
핵심을 잘 잡아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핵심을 잘 잡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모 대학 사학과 홈페이지에 세계문화유적에 대한 레포트를 쓸 때의 유의사항 3가지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유의사항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유의사항: 1) 세계문화유산에 한정해 생각할 것. 2) 핵심을 놓치지 말라. 무조건 길게 쓴다고 좋은 게 아니다. 이는 모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핵심을 빠뜨린 채 길게 쓴 경우는 감점 요소가 됨.” 여러분, 공부 못하는 학생은 Assignment나 Essay를 쓸 때,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선생님이 원하는 핵심은 빠트린 채 페이지 수만 많습니다. 그러나 공부 잘 하는 학생은 페이지 수는 많지 않지만 선생님이 원하는 핵심을 정확하게 적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오랫동안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를 하지 않고 횡설수설, 중언부언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침을 튀겨가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도 전도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복음을 전했음에도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많은 말을 했지만 복음의 핵심이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빠져 버리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삶을 보면, 그도 한때 그러한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이후에 등장한 어떤 사람들보다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사도였지만, 그가 2차 선교여행 중,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는 실수를 했습니다. 아덴은 오늘날 그리스의 아테네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덴은 헬라의 수도로서,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이요, 지혜의 본고장으로써 철학의 눈이라 불리우던 곳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에피큐르스, 제너의 활동무대로 그 당시 세계지성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1절에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간 것입니다. 그가 처음 아덴에 들어갈 때 이러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나도 과거 한 때 위대한 스승이신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다. 아덴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한 번 보자. 학문으로 비교한다면 나도 꿀릴게 없지” 물론 이 말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사도행전 17장 16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추측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행17:16~18상) 사도 바울은 아덴에 있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이 과거에 배운 학문과 지식을 동원해서 아덴에 있는 사람들과 토론을 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토론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 18절 하반절을 보면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 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은 학문적인 토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바울의 복음증거 스타일은 매우 논리적이고 학문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2절 이하를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들은 대부분의 아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그들은 오히려 바울을 비웃고 조롱까지 했습니다.
제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라는 단체에서 활동할 때, 1981년 여름에 거지순례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충청북도 옥천이라는 곳에서 4박5일(?) 동안 수련회를 통해 훈련을 받은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20여 명씩 팀을 짜서 7박8일 동안 전도하며 목적지인 OO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엽서를 구입한다든지, 본부와의 연락을 위해 팀장만 소액의 돈을 소지했을 뿐, 나머지 전도팀원들은 10원 한 장 가지지 못한 채 전도를 했습니다. 낮에는 시골동네에 들어가서 사영리라는 소책자를 들고 전도를 하다가 방문한 집이나 만나는 사람들이 밥이나 국수를 삶아주면 그 음식들을 먹고,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굶었습니다. 저녁에는 시골에 있는 교회나 마을회관에 모여 낮에 있었던 전도 결과를 이야기하며 기도회를 가진 후, 그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서, 혹은 지나가는 트럭, 등을 세워 히치 하이킹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을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처음 5일 동안 11명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만난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저녁에 모여 낮에 있었던 전도 결과를 이야기 할 때보면, 대부분의 팀원들은 자신들이 만난 사람들을 영접하게 한 비율이 50% 정도이고, 높아야 6~70% 정도인데, 저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100% 영접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일째부터 문제에 빠졌습니다. 12번째 만나는 사람부터는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 후, 제가 예수님을 영접시키려고 “저의 영접기도를 따라서 하시겠습니까?”라고 권유하면, 바쁘다고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가 “저는 OO 대학의 OOO입니다.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쟁이구만. 요즘 대학생들이 그렇게 할 일이 없남? 부모네 들이 뼈 빠지게 벌어다 준 등록금 가지고 공부하는 놈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라고 소리치며 더 이상을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 동네는 대대로 부처님 믿는 동네인데, 어디에 들어와서 예수 전하는 거야.”라고 하며 핍박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만난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팀원들은 처음과 달리(저녁에 모여 Sharing 할 때 들어보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영접시켰다고 하는데, 거꾸로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 사람도 영접시키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게 되어, 저녁 미팅에서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7일째 저녁 기도회 때, 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11명을 영접시킬 때까지는 겸손하게 성령님만을 의지했는데 12명부터는 교만하게 내 힘을 앞세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전에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했는데, 12명부터는 복음보다는 제 생각과 제가 아는 지식을 더 많이 강조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제가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아덴에서의 사도 바울은 24년 전 저와 같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결국 아덴에서 그는 복음증거에 실패했습니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과 변론하며 전한 복음이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조롱을 당했습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아덴에서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그리고 4절과 5절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아덴에서의 바울과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5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은 날마다 철학자들과 변론하며 토론하던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변론하며 토론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상황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6절 상반절에서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굴하지 않고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사도행전 18장 8절에 보면,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성공적인 복음 증거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실패가 오히려 유익
아덴에서의 실패가 바울에게 오히려 유익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가 오히려 우리를 더욱 복된 길로 이끄는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실패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때가 있습니다.
1916년 덴마크에서 어떤 사람이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되던 목공소가 경제대공항으로 큰 타격을 받자, 장난감을 만드는 공장으로 업종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공장마저 불에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연속적인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나무토막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장난감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적인 브랜드로써, 수많은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레고>라는 장난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우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실패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한 번만 해도 재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실패를 통한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의 거친 성품이 다듬어지고,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통해 사람의 학문이나 언변으로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경험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년 6개월 동안의 고린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그 후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 아덴과 고린도에 방문하여 복음을 증거했던 경험을 생각하며 오늘 본문 1절부터 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전에 고린도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유창한 말과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도선교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윌리엄 케리에 대해서 들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편안하게 목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 도착한지 얼마 있지 않아 5살짜리 아들이 죽고,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아내가 정신병에 걸려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등, 여러 가지 시련이 있었습니다. 또한 7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할 만큼 사역에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집에서는 날마다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사실 인도는 언어가 하나가 아니라 부족마다,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번역 사역은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성경을 번역하여 그의 말년에는 44개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12개 지역에 선교회 지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안마(버마)에 이어 아시아 선교의 문을 활짝 연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케리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그가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놀랍니다. 그는 말년에 열병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동료 선교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그들에게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여보게들, 나의 잔은 가득 차다 못해 넘치고 있다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네.” 그는 그의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선교사가, 윌리엄 케리가 남긴 놀라운 업적을 들며 ‘선교사님, 정말 수고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계속해서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이 칭찬을 듣고 있던 케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죽거든 저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저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만 남겨 주십시요. 제가 죽거든 저에 대한 말은 그만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지 바랍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잠을 자듯,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둔 그의 한손에는, 그가 친히 번역한 벵갈어 신약성경이 들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죽거든 저에 대한 말은 그만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지 바랍니다.’라고 고백한 윌리엄 케리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학벌이나 이름이나 업적이 아닌,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아덴에서의 실패를 경험한 이후,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혜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만이 증거디기를 원햇습니다. 바울이 변한 것은 이 뿐만 아닙니다.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가 아덴에서의 실패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의기소침했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매우 지쳐버렸습니다. 그 이후 고린도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가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혜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힘썼습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증거의 현장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며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스펄전 목사님이 초창기 사역을 시작했을 때의 그의 설교는 자신이 생각해도 세련되지 못했습니다. 설교 도중 말을 더듬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른 사이에 허둥대는 바람에, 완전히 죽을 쑤는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설교를 마칠 때마다 ‘자신이 설교를 못한다.’는 심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루는 너무도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 내내 기도했습니다. 1주일 동안 끊임없이 설교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난 후 설교를 했는데, 예배가 끝나자마자 성도들이 그에게 몰려와 그의 설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흐뭇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만큼은 어린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가운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두 설교의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사실 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세련되지 못한 지난 주의 설교를 통해서 41명의 회심자를 낸 반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 이번 주의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 형제의 영혼도 구원 못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형편없었던 설교는 들어 쓰셨으나 그 훌륭한 설교는 버리셨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저도 종종 경험하는 일이지만,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설교하는 것과 인간의 지식과 열심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성령님께서 기름 부으신 설교는 듣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설교는 아무리 설교가 잘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은혜가 없고 듣는 사람에게 괴로움만 주게 됩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할 때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듣는 사람이 콧방귀도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설프게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름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나중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결코 한 영혼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결코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힌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가 한꺼번에 수천 명을 변화시켰던 설교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부터 39절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되자 그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면 아무리 딱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지난 7년 동안 중고등부에서 <시와 찬양의 밤>을 통해, 청년선교회에서 <새벽이슬의 소리>를 통해, 그리고 전 교회적으로 <홈컴밍데이>를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7년 동안 성령께서 역사하셨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준비한 행사에 참석하였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았을 때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행사임에도 전도의 열매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웅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웅변에 있다면 전도는 사람이 믿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학식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전도는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입안의 침샘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혀가 다 닳아 없어져 버릴 때까지 증거한다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말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전도는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과 역사를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우리교회 창립12주년을 맞이하여 계획하고 <홈컴밍데이>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는 내일 새벽부터 여러분들이 기도하며 적어낸 태신자 작정카드를 들고 거기에 올라와 있는 태신자들을 품고 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훈련, 샘지기모임, 사역훈련, 샘모임, 등의 모든 모임 시간마다 더불어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셔서 태신자들의 마음이 감동되어 <홈컴밍데이>에 참석하고, 첨석한 영혼들이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내 힘과 내 지식과 내 언변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면 이러한 귀한 일들이 가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번 <홈컴밍데이>를 통해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분도 이 일에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창립12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창립12주년 기념주일이 그저 우리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리가 아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의 축제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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