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인간의 미련에서 하나님의 지혜로/고전2:1-10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20:28
1. 본문의 상황과 배경

(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아볼로

본문과 주변의 단락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지혜'(소피아)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 상황을 야기(惹起)시킨 핵심적인 개념이다. 바울은 이 편지의 인사말 부분을 (1:1-9) 마치기 무섭게 즉각적으로 교회 내의 분파(分派)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1:10-17). 문제의 중심은 교회 개척자인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바울이 떠난 후에 와서 사역을 하며 말씀으로 물을 준 (3:6) 아볼로를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의 반목이었던 것 같다.

소위 게바파와 그리스도파에 대한 언급은 (1:12) 분열 현상에 대한 바울의 통렬(痛烈)한 풍자(諷刺, sarcasm)이지 실제 현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서의 3장 4-9절에서 분열의 문제를 재차 언급할 때, 오직 바울과 아볼로만 언급되는 것을 보면 문제는 두 지도자를 그릇된 방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다(3:4). 바울과 아볼로 사이는 내연(內燃)이 없이 협력하는 동역자 관계였으나 (3:6; 4:9; 16:12) 아볼로 추종자들이 소위 '지혜'를 내세워 교만을 행사하면서 교회가 시끄러워졌던 것으로 보인다(4:6-8, 19). 아볼로 추종자들과 관계되어 있고 바울이 공을 들여 비판하고 있는 이 '고린도의 지혜'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 그레코-로만 수사학과 말의 지혜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했다(행 18:24). '학문이 많은 자'의 헬라 원문은 '아네르 로기오스'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문 성경들은 eloquent man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사학으로 유명한 도시였고 그점에 있어서는 고린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코-로만 세계의 웅변 이론가들인 키케로나 퀸틸리안은 모두 이소크라테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수사학을 지혜와 동일시했다. 이런 사실들을 염두에 둘 때, 고린도전서에서 문제가 되었던 '지혜'는 바로 수사학적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말의 지혜" (1:17),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2:1), 또는 "지혜의 권하는 말" (2:4) 등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면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 하며 (4:19) 하나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수사학, 즉 웅변의 목적은 '설득'이었다. 설득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피스티스' 즉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일이었다. 즉 수사학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한 인간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설득을 위해서는 변사(辯士)에게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지식이 필요했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사고와 논리적 구성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수사학을 '지혜'라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득을 발생시키기 위해 논리적(로고스), 정서적(파토스), 인격적(에토스) 요인들을 잘 조합하는 변사의 재능 또는 능력을 '뒤나미스'라 명명(命名)했다.

이렇듯이 고대의 수사학 이론에서 등장하는 '소피아'(지혜), '피스티스'(믿음), '뒤나미스'(능력) 등은 모두 2장 1-5절에서도 핵심 개념들이다. 복음의 선포도 듣는 사람들에게 '피스티스'를 발생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발생을 전달자의 '뒤나미스'(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의 '뒤나미스'에 의존한다는 것이 바울의 선교 철학이요 전도 전략이었다. "너희 믿음(피스티스)이 사람의 지혜(소피아, 수사학)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뒤나미스)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5).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에 속하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성령의 인간 감동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진리이다(2:10).



2. 본문의 내용과 메시지



(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바울은 1장 17절 이후 2장 5절에 이르기까지 수사학의 배경을 갖고 있고 교회의 분열을 야기시켰던 인간의 지혜를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그러나 2장 6절에서부터 이때까지 거부해 오던 '소피아'를 긍정하는 듯한 자세로 돌아선다. "당신들이 굳이 지혜를 논하고 싶다면, 내가 당신들을 성숙한(온전한, '텔레이오스', 2:6) 사람들로 간주하고 참 지혜에 대해 말씀을 드리리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지요." 하나님의 지혜는 다름 아닌 복음의 핵심 메시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이를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복음이야말로 (고전 15:3a-5) '하나님의 지혜'이다. 물론 이 하나님의 지혜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스칸달론', 오늘날의 스캔들이란 단어가 여기서 옴)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모리아', 천치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moron의 어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스캔들과 천치(天痴)됨의 지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구원을 얻는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1:18).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인들에게 여전히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의 메시지이다. 복음은 지금도 적지 않은 이들에게 '스캔들'이다. 이 시대의 지배자들과 똑똑한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만 한다(2:8). 이 복음에는 의외성이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에이 말도 안돼..."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깊은 지혜 가운데 준비한 그리스도의 사건, 십자가의 복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감각으로는 경험하지 못한 터무니없는 신화(神話)처럼 들리고, 인간 지성의 마음으로는 닿지 않는 영역에 속한 추상(抽象)처럼 소원(疎遠)하기만 하다(2:9).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이 스캔들의 이야기야말로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며 그 어떤 공부로도 획득하지 못할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다.



나) 이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성령을 통한 계시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미련과 스캔들인 반면 구원을 받는 자에게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이 차이를 가져오는 변수는 성령이다. '피스티스' 즉 믿음을 일으키는 동인(動人)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처음에 고린도에 들어갔을 때 인간적으로 약했고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며 심히 떨기까지 했다고 회상한다(2:3). 이것은 자신감으로 포효(咆哮)의 장광설(長廣舌)을 쏟아내야 할 복음의 변사(辯士)에게 적절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미사여구(美辭麗句)에 의존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2:1, 4). 그러나 이 약한 바울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의존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을 때 지혜롭다는 저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고 고린도 교회가 탄생했다(2:5).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지혜 즉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게 해 준다(2:10a). 성령은 우리와 관계를 갖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깊음' 속에 침투하여 그분의 생각을 읽어내시기 때문이다(2:10b). 성령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교통(交通)하면서 (롬 8:26-27, 고전 2:10b) 하나님의 그 깊은 지혜의 뜻이 우리 마음 속에서 깨달음으로 이해되어지고 여기서 믿음이 발생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b). 성령을 소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고전 2:16b).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도 또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도 '성령의 내적 증거'(칼빈, 루터)에 철저하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발생하나 또한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2.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전병금 목사, 서울강남교회)





1. 오늘의 상황



우리는 지금 새로운 천년을 맞아 연대기적으로는 물론이고 카이로스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앨빈 토플러가 자신의 저서 "제3의물결"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농경시대였던 제1의물결과 공업화 시대였던 제2의물결을 지나 탈공업화 시대인 제3의 물결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메이너드(Herman Maynard)와 머턴스(Susan Mehrtens)는 더 나가 제4의 물결을 예고하고 있다. 이처럼 변화하는 시대에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그에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한다.

지난해까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교회와 관련된 사건들이 내적으로는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고, 외적으로는 기독교가 과연 사회에 유익을 미치는 순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이단 종파들의 돌출 행동이라거나 일부 몰지각한 신자들의 일탈 행동이라고 강변하지만 일반 사회의 시각은 모두 똑같은 기독교라고 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처럼 거대한 선교의 장애물 앞에서 교회는 아직도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개교회 성장 주의의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동시에 성숙해져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성장 지상 주의로는 성숙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선교의 어장을 황폐하게 만들어 성장도 기대 할 수 없게 된다.

교회와 성도들이 새로워질 때 선교의 어장이 풍어의 현장으로 변할 것이고 성도들은 소금처럼 빛처럼 세상을 밝히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인간의 지혜를 포기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 거기에서 거듭나야 하는데 우리는 거듭나되 두 번 거듭나야 한다. 한번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한번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안에서!"



2. 본문 적용



사도바울은 세계 철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아덴에 복음을 증거 하러 갔으나 실패를 맛보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헬라 철학 즉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익 학파에 심취한 사람들에게 철학적 변론을 이용하여 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고 결심한다.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더욱이 신앙 생활 이나 복음의 증거는 인간의 지혜를 의지할 적에 여지없이 실패하고 분열을 초래하고 만다.



(1) 인간의 지혜로는 실패한다.



철학이 발달한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다른 지역에서 보다 각별히 조심스럽게 전했을 것이다. 바울 역시 높은 수준의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기에 철학 지식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설명하였으나 뜻밖에 아무 결실도 얻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하면 결신자를 얻고 교회를 세운 바울이었지만 아덴에서 만큼은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그가 실패한 까닭은 복음보다 인간의 지혜, 즉 철학을 더 우선시하고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철학의 도시이므로 철학을 이용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헬라의 웅변술과 수사학은 그 말의 화려함과 현란함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퇴색시켜 버렸고 사변적인 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진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복음은 확실한 사실이고 능력이므로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할 때 역사가 나타난다. 이제 바울은 원색적인 복음만을 증거 하기로 하고 고린도에서는 예수와 십자가외에는 증거 하지 않았다. 이렇게 했을 때 고린도에서는 큰 결실이 있었고 교회가 세워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다. 인간의 지혜와 언어로 설득하려고 했을때는 실패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는 성공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혜에 더 의지하여 살고 있지는 않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면 그것은 실패의 지름길에 서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성경에서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명령들이 우리의 상식이나 경험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것이라서 놀라게 된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만났을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라고 하셨고 여리고성에 도달했을때는 아침마다 성을 돌으라고 하셨다. 이런 일들이 아무소용이 없는것 같았지만 홍해를 가르고 성을 무너뜨렸다. 성경에서 가장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사건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과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로도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웃음거리 같이 미련해 보이는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섭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 얻는데 무엇인가 더 특별하고 더 논리적인 것이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사건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간단하고 비논리적이어서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들풀 같은 인간이 어찌 이해 할 수있겠는가. 그래서 본문은 말씀하기를 "이 지혜를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했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충천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 시대가 소망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과학과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으며 환경이 파괴되고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고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만을 증거 하여 많은 결신자들을 얻을 수 있었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 했을 때 그는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변화시켜 예수 믿게 하고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도록 역사 하신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십자가 사건이 이해할 수 없고 납득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거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있음을 믿게 되고 감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가 믿어지는 것이 축복이요 은총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10절)고 했다. 성도의 삶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그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으며 주의 일도 감당 하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은 온전히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고 외쳤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능력 있는 성도로 살게 하시기 때문에 복음의 승리자로 살며 소금과 빛처럼 세상속에서 살려면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예 화

얼마 전에 내 놓으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 성도들은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사경회라고 하면 신학자들의 강연을 듣고 토론을 벌이는 정도였다. 그 교회의 사경회 강사로 초청 받고는 어떻게 전할까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바울의 아덴선교가 생각났다. 그래서 바울의 아덴선교 실패를 거울삼아 세상 적이거나 학문적인 이야기를 접고 온전히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만 전했더니 그때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그들에게 뜨거운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을 목격하였다.



※찬 송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399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465장)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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