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또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멘!”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렇게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멈칫한다. 자신에게 뭔가 이렇다 할 뜨거운 체험이 없고, 신비한 현상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는지 잘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다가도 성령의 체험 문제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자신감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체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 있게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일컬어 성령 체험이라는 것도 말하는 사람마다 그 현상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잘 분간할 수가 없어 혼동이 일어나곤 한다.
당신은 성령 체험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 성령 체험이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감정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렇듯 성령에 대하여 많은 혼란을 갖게 되는가? 그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靈)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면 뭔가 평상시와는 다르다고 여긴다. 가끔 TV에서 미개인들의 신앙 풍습을 방영해 줄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아프게 되면 그는 마을에 있는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나름대로의 절차에 따라 의식을 치른다. 그러면 영이 임하게 된다. 일단 영이 임하게 되면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 마치 환각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마약을 통하여 환각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임한 영을 통하여 병이 고쳐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도 나타난다. 무당은 귀신의 힘을 받아 점을 친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의 영이 와서 앞일을 예견하게 한다. 그런 영을 받은 무당은 신비로운 힘을 갖게 된다. 대나무를 잡으면 대나무가 떨리거나 작두 위를 맨발로 걸어간다고도 한다.
여담이지만, 그런 무당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귀신의 영이 내려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때문에 점괘가 나오지 않아 무당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를 뜨게 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적이 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자리에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정말 당신이 무당이 푸닥거리를 하고 있는 곳에 몰래 가 서있을 때 무당이 작두를 타지 못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당신이 서있는 바로 코앞에서 무당이 여유 있게 작두를 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먼저 말해 두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무당이 작두를 타느냐 못 타느냐 하는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못 탄다면 당장 무당을 이겼다 싶어 뿌듯한 느낌이 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당이 계속 작두를 잘 탄다고 할지라도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본질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런 눈에 보이는 현상(現象)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흘러갔지만, 이처럼 사람들은 뭔가 영의 세계에 들어가면 신비하다고 여긴다. 그렇다 보니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일상과는 달리 뭔가 뜨거운 느낌이 있다거나, 무엇인가 탁 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거나, 공중부양(空中浮揚)같은 현상을 떠올리곤 한다. 흔히 교인들 사이에서는 성령을 받으면 병을 고친다거나 방언을 하는 등의 현상을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이런 지경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움칫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내세울만한 어떤 체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상에만 의존하는 모습이다.
또 하나, 사람들이 성령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열심이 없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나는 여기서 무엇이든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성령을 받기 위해 여기 저기 방황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역시 성령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은사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는 은사가 있으면 성령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한 식으로 여겼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못한 자 사이에 차별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런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면서 성령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성령님을 보내셨는가? 그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지엽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을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이 말씀은 12절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은혜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증거하시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방언이나 병 고침 등의 은사에 있지 않다. 성령을 받았는냐 못 받았느냐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많이 했지만 정작 그 은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해서 잘못 안 결과는 서로 자랑하는 것이었다. 뭔가 남보다 특별하게 보이는 은사를 추구하면서, 자기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은사를 소유했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는 자기 자랑으로 나아갔던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은혜라는 말만 많이 하면서도 정작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은사란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주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 나의 아들보다 2개월 정도 빨리 입대했다.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는 언제 면회가 가능한지 잘 알게 된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통해서든지 면회 갈 수 있는 날을 잘 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확하게 면회일이 되자 강원도 철원까지 면회를 다녀왔다. 그러나 나는 이미 면회 할 수 있는 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면회를 가지 않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아들이 스스로 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보자. 어떤 부모는 면회 날짜가 되면 즉시 면회를 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들은 면회 날짜가 되어도 면회를 가지 않는다. 그러면 둘 중 누가 옳은가? 누가 더 자식을 사랑하는 자인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정확한 날짜에 면회를 간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면회를 갔을 것이다. 그 부모가 판단했을 때는 그것이 최선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지 않은 부모 역시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서 가지 않은 것이다. 이런 마음을 안다면 어떻게 서로 판단할 수 있는가?
그런데 면회를 간 부모는 가지 않은 부모에게 매정하다고 비난하고, 가지 않은 부모는 간 사람에게 너무 나약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냐고 조롱하듯이 말한다면 얼마나 본질을 모르는 것인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자기뿐만 아니라 교회가 함께 서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은사는 곧 은혜로써 그 아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깔려있다. 그런데 누가 뭘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면서 서로 판단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의 예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에 고린도교회와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방언이나 병 고침 등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다. 나아가 우리가 무당 푸닥거리 하는 곳에 가있는데 무당이 작두에 올라가느냐 못 올라가느냐 하는 것 역시 우리가 얽매일 일이 아니다. 작두 위에 못 올라가면 어떻고, 계속해서 올라가서 춤을 춘다면 또 어떤가? 무당이 작두 위에 못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니까 감사하면 되고, 올라가서 계속 뛰고 있더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으므로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무당이 뛰어 다니든, 기어 다니든, 날라 다니든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므로 무슨 간증을 하더라도 ‘나는 이랬다 혹은 저랬다’가 아니라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깨닫게 하셨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성령님이 모든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하였고(10),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11).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께로 온 영이라고 말씀한다(12).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과 하나님이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곧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14).
우리는 서로 세상을 다르게 살아간다. 부유하게도 살아가고, 가난하게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인물이 좀 잘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은사도 각각 다르게 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을 부자로 통일되도록 일하지 않으신다. 신자라면 누구나 얼굴이 잘생긴 자로 통일시켜 주시는 게 아니다. 또한 신자라면 누구나 같은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통일이란 너와 나의 체험이 같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조폭들이 같은 문신을 하듯 방언을 하는 등의 외적(外的)인 것으로 사람들로 통일시키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가? 여러 환경과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되게 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삶, 신자들에겐 그것이 통일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십자가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가? 어찌하여 자신의 열심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려고 하는가? 그리고 왜 은사를 자랑하면서 자기에게 있는 은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가? 그것이 곧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으로써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알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서 자꾸 새로운 것을 체험하려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자꾸 더 자극적인 체험에 매달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달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이후 자기 체험을 자랑삼아 말한 적이 있는가? 그는 오직 체험을 말하면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하늘의 음성 들을 것 자체를 가지고 “너희들은 왜 못 들었느냐? 너희들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면 바울 사도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체험을 말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제 삼자의 체험처럼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것들만 자랑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밖에 다른 것이 없음을 말했다.
누군가가 특별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은 기도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온 은사라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서로 경쟁하고, 어떤 은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낙심하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자. 은사를 받지 못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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