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의 짜임새와 특징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성령을 받았으나 이를 그의 삶에 바르게 접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교회 내의 갈등과 분파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고전 1,10 이하). 그들의 다툼과 분쟁은 바울이 증거한 십자가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고린도교인들은 영적으로 얻은 지혜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연결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인간적인 지혜로 과대평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과 미련한 것으로 부끄러워했던 것이다(참조 고전 1,23).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계시된 지혜를 오해하고 각자의 지혜를 추구함으로 서로 자기 자랑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분파의 위기에까지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 성령을 통해 교회에 현존하고 계심을 말한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열광주의에 대항해서 바울은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들이 미련한 것으로 거리끼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본문의 짜임새와 특징: 12-14 절은 고전 2,6-16에서 시작된 단락의 마지막 본문이다. 2,1-5의 문장 양식과는 달리 2,6에서는 일인칭 단수 양식에서 일인칭 복수 양식으로 주어가 바뀌고 있다. 여기서 '우리'란 단순히 '문장의 복수'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바울과 그의 선교동역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인이면 누구나 다 포함된다.
우리는 본문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본문이 서술적인가 아니면 논쟁적인가? 둘째로 여기에 언급된 지혜말씀이 고전 1,18이하에 언급된 '십자가의 도'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셋째로 그렇다면 지혜와 성령의 관계는 무엇인가? 넷째로 6 절의 '온전한 사람들'이 12 절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대비되고 있고, 계속해서 3,1이하에서는 '육신에 속한 사람'과 대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 6-16 절은 전체적으로 논쟁하는 문맥 가운데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아주 주제적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열광주의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진정으로 '온전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임을 보여주려 한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진정한 지혜를 소유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2) 1,18이하의 십자가의 말씀과 2,6이하의 지혜의 말씀과의 관계는 두 부분이 별개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동일한 말씀이 지닌 두 종류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전자(1,18이하)가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으로 서술된 내용을 담고 있다면, 후자(2,6 이하)는 인식론적이고 현실 적용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로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예수의 탄생, 공생애, 고난, 십자가, 부활, 재림 등의 한 부분으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증언이었다고 한다면, 후자는 구원의 드라마 전체를 조망하는 해석학적인 지혜의 내용으로서 십자가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혜 말씀이란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과 관련을 맺고 있다. 바울은 6-9 절에서는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고 있으며, 10-16 절에서는 그 지혜가 인식론적으로 신앙인에게 어떻게 주어지며 어떤 인간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에 성령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여기에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과 성령을 거부한 '육에 속한 사람'과의 대비가 나타나게 된다(고전 2,14-15).
4) 바울은 '온전한 사람들'(6 절)/'신령한 사람들'(15 절)이란 뜻을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직설법(Indicative)적인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명령법(Imperative)적인 관점이다. 첫째는 직설법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는가에 따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온전치 못한) 비그리스도인인가로 나누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 성령의 사람이며 온전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는 명령법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생각과 행동이 변화된 인물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 이해의 명령법적 관점은 자연스럽게 교육적인 성숙 단계를 묻는 물음과 관련된다.
따라서 바울은 3,1이하에서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어른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영의 사람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성령이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고 영으로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갈 5,25). 이러한 교육적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가 있고 '성숙한 사람(온전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분파하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육신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영적인 경험이 많은 성령적 열광주의자라도 바울의 눈에는 육적인 행동이 가득한 인물로 밖에는 비치지 않는 것이다.
6-16 절의 짜임새를 간단히 설명하면,
1) 6-9 절: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역사적 계시사건(십자가)과
2) 10-16 절: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영적인 계시 사건(말씀의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2. 분문 내용 풀이
12-15 절에서 바울은 먼저는 부정적으로, 다음은 긍정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표현한다. 즉 우리들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영의 출처를 말한다. '영을 받았다'는 것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지이기도 하다. 영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함'이다. '선물로 주신 것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주어진 것들이다. 11 절의 '하나님의 것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들을 말한다.
12 절에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서 인식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은 더불어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가 된다. 예를 들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갈 2,20)이라는 표현이나,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롬 8,16)는 표현이 바로 성령과 인간의 영의 공동인식을 보여준다.
13 절에서는 6 절에서 지혜를 말하는 대상에 대해서 말했지만 여기서는 지혜를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의 가르치는 말로서가 아니라, 영의 가르침으로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이해를 열어줄 뿐만 아니라 이 지혜에 대해서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한다. '영적인 것들'은 남성적(영적인 사람들)으로도 중성적(영적인 것들)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만약 중성적으로 번역한다면,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들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영적인 것들로 해석해야 인식되는 영적 해석방식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적으로 번역하면, '영적인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해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6 절에 나타난 온전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한다는 것에 대한 반복적인 강조라고 할 수 있다.
14 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못하는 인간상을 구체적으로 육에 속한 인간이라 부른다. 이는 구약 창조이야기에서 첫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 곧 자연적 인간을 말하는 것(창 2,7: LXX)을 바울은 그대로 사용한다. 그냥 호흡하며 살아있는 자연적 인간은 하나님의 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 두 개의 부정어가 반복된다. '받지 않는다'와 '알 수가 없다'는 말로서, 전자는 자연적 인간이 지닌 거부의 행위이며, 후자는 알 수가 없는 인식론적인 한계성을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것들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동시에 인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분별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5 절에서 14 절의 육에 속한 사람과는 대비되는 영적인 사람이 등장하는 그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 구절은 고전 4,3.4에서 영적으로 미숙한 바울의 적대자들이 영적인 사람인 바울을 비난하는 데 대해 그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선언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온전한 인간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성령의 인식에 의해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자기의 삶을 규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곧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결코 판단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영적인 사람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이는 성령주의자의 방종적인 태도를 옹호한다기 보다는 진정한 영적인 사람이 누리는 판단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 내에서의 영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모일 때에 나타나는 은사들이 진정한 은사인가를 규명해야 하고 또한 판단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고전 14,29; 살전 5,19-22). 바울은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자들이 잘못 지닌 방종을 비판하는 자유로 이 말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를 비난하는 어떤 자들에게서도 자유롭다(고전 4,3.4). 유일한 재판관이 계시다면 그분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6 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고 그를 가르치겠는가?"라는 이사야 40,13(LXX)을 인용하면서 그의 지혜말씀에 대해 결론을 맺고 있다. 여기서 주의 마음은 주의 영과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롬 11,34에서의 인용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었으나, 여기서는 아주 긍정적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바로 6 절에 언급된 '온전한 자들'이며, 10 절 이하에 나타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며, '성령에 속한 사람들'이다. 앞의 영적인 인간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 성령은 우리 밖에(extra nos) 계신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오시는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써 성령이 우리 안에(in nobis) 오셔서 우리를 위해(pro nobis) 활동하심을 알게 되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이것을 가르치게 하신다.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성령의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판단받지 않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이 자유를 남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마음을 늘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김정서 목사, 제주영락교회)
1. 이 시대의 상황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바른 깨달음은 역시 중요하다. 바른 이해와 올곧은 깨달음 속에서 사는 삶은 성숙한 삶이다. 그런데 오늘의 혼란하고 복잡한 세대에서 그 성숙한 삶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면에는 바른 이해가 부족하고 진정한 깨달음이 없는 상태로 살아감으로 원칙이 없고, 기본이 서있지 못한데 있다고 본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바울 사도가 걱정하여 서신을 보낸 고린도 교회가 그런 문제들로 복잡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의 교회에도 동일한 문제로 남아있다.
진리를 잘못 알고 있거나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본을 두지 아니하고 다분히 세상적인 가치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경향성 때문이다. 세상의 경험, 기준, 세상적 판단의 잣대로 신앙을 가지려고 할 때, 신앙생활에 있어서 세속적인 삶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분쟁하고 분파를 일으키며 군림하고 서로가 으뜸이 되려고 하는 일에 익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인습적이고 화석화되는 신앙에서 한 걸음도 아무런 영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섬기고 나누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하고 봉사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성숙한 신앙생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신앙인은 자기의 세상적 경험에서 얻은 가치와 지혜로만 사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이러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성장과 성숙이 따라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성령 안에서' 깨달아지는 바른 생각, 바른 마음, 바른 각성 속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성서적 교육과 훈련받음을 의무로 알고 또 그 노력을 즐거워해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마음을 소유하여, 바른 판단으로 결단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정말 필요하다.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늘어나서 진실로 교회를 교회되게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설교 작성을 위한 제안
1) 설교의 제목 : 주어진 제목 그대로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한다"라고 하거나, "신령한 신앙인", "성령의 사람", "진정한 영적 각성의 삶", "진정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 "영적인 사람의 성숙한 판단" 등으로 설교자가 필요로 하는 강조점을 제목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2) 설교의 내용과 방향 : 새 천년과 새로운 세기, 21세기를 맞이한 첫 해의 중간 지점인 6개월을 지나는 시점에서 본문은 설교하게 된다. 첫 주일에 가졌던 비젼과 결단을 다시 한번 반추하면서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을 향하여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판단을 무엇에서 찾고,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를 다져보는 의미로 설교의 내용과 방향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성도들의 신앙은 세상의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며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숙한 과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진정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재조명하게 되기를 바란다. 성령에 의해 계속 바르게 깨달아 가고 있으며, 세상적 생각과 가치가 신앙인인 '나',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밝히 진솔하게 깨달아지는 대로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모든 행동과 삶의 내용을 생각, 판단, 결단, 실행하는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3) 설교의 구성 :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로 나누인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외모는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고, 성숙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서 분파와 분열을 일으키는 교인들을 향해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잘 놀다가도 툭하면 금방 싸움 잘하는,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영적인 경험이 많은 열성적인 신자라 하더라도 분열과 분파를 일으키는 교인은 바울 사도의 눈에 육적인 사람으로 밖에는 비쳐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바울은 강조한다(12~15).
1. 성령의 사람은 깨닫는 은사가 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지배를 온전히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신령한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영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마음과 생각이 온통 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차서 당연히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더 많이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세밀한 은혜의 선물부터 아주 크고도 놀라운 은혜의 선물까지 느끼고, 깨닫고, 만족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찬송가 85장은 생각만 해도 좋은 주님을 노래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2.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지혜로 말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고 했다. 즉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하시고, 이것을 가르치게 하신다. 성령은 가르치시는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들은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다. 우리가 수학, 영어, 과학을 가르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 수는 있다.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찬송가 506장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성령의 사람이기에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들은 성령으로 가르칠 수 있다.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3. 성령의 사람은 판단의 자유를 누린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고 했다. 아직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 바울 사도는 두 가지로 말한다. 1) 의도적으로 받지 아니하는 거부의 행위로
2) 신령한 것들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인식론적인 한계성을 보일 뿐이다. 자연인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것'들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분별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비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한다. 또 모든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성숙한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는데 대해 그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것은 그가 온전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성령의 깨닫게 하는 인식에 의해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자기의 삶을 규정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에 의해 생각하고 성령에 의해 판단하며 성령에 의해 행동하는 한 어느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예속되지 아니하는 성숙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의 영적인 판단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말이다. 당연히 교회의 모든 일은 세속적인 판단 보다 영적인 판단이 우위성을 가진다.
교회에서는 영적으로 판단하는 논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잣대로 신령한 세계를 판단하거나 재단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야 판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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