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우리를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한다. 아마도 당신은 성전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본문 16절과 17절의 확대 적용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Gerdon D. Fee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성경의 확대 적용의 문제를 다루면서 본문을 예로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린도전서 3:16-17이 분명히 지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본문은 하나님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자신을 위하여 구별해 놓으신 것은 거룩하며,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는 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원리를 제시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 원리를 그리스도인 개개인에 잘못 적용시켜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을 혹사하는 자를 징벌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예는 없는지 모르겠다. … 이 말씀을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시킨 것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수 세기 동안 해온 오류이다.”
사실 교회에서는 너무 쉽게 이 말씀을 “우리 몸은 성전이니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몸을 건강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개인적으로 적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즉 교회는 세상과 대립되어 있는, 세상과는 구별된 모임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당시 고린도에 만연해 있던 세상의 사상과 구별된 모임이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글자 그대로 세상에서 구별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이런 성전인 교회를 세상의 지혜나 사고방식으로 더럽히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17절의 번역은 이렇다. “만일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φθειρω) 하나님은 그 사람을 파괴할(φθειρω)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 성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인 우리가 바로 성전이다. 수도 없이 말했지만, 교회당은 성전이 아니다. 오늘날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이시며, 나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가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고집할 수 없다. 굳이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원 받은 우리가 바로 성전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함께 하시는 성전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곧 성전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전을 파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파괴하실 것이다.
그러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파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이 무시되고 인간의 지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성전이 파괴되는 것이다. 성전인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스려져야 한다. 그것은 21절 말씀처럼 교회 안에서는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가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가? 사람을 자랑하게 된다. 누가 더 잘하며, 누가 더 유명한가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것들로 인해 교회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성전 파괴로부터 자유로운가? 사실 우리 역시 사람을 자랑할 때가 많다. 교회에서 주차 관리를 해도 조그만 읍(邑)에 있는 교회의 어느 무명 성도가 하는 것과, 서울 어느 대교회의 유명한 회사 사장이나 국회의원이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하실까? 둘 다 사랑하신다. 이론적으로는 다 같은 성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그런 이론은 무의미한 경우가 허다하다. 유명한 사람이 주차관리를 하면 여러 사람의 입에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오르내리지만, 조그만 읍의 교회에 있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할 때는 그럴 수 있다는 정도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교회에서 간증자로 초청할 때 누가 초청의 대상이 되겠는가? 바울 사도는 사람을 자랑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후 8:16)
세상의 지혜로 교회를 바라보면 어떤 교회가 좋고 살아있는 교회인가? 교인이 많아 헌금이 많이 들어오고, 그래서 많은 일을 하는 교회일 것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게 살아있는 교회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과 다르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세상 지혜는 더 높고 더 위대한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런 더 높아지고 더 위대해지려고 하는 것이 죽음일 수가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교회에 안 다니고 불교에 다니고 천주교에 다니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 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큰 교회에 안 다니고 작은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을 밀어붙이고 세상 지혜를 따르기 때문이다. 교회 부흥은 사람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나라이다. 우리는 늘 은혜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말일 뿐이고 실제로는 온통 세상 지혜로 채워져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상 것은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풍족하게 누리고 사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풍족하거나 유리하게 주어졌을 때 은혜라고 말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마귀의 장난으로 넘겨버리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종종 자기의 좋은(?)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가령, 울릉도 호박엿이 맛이 있어 독거노인 집에 가면서 한 아름 사 가지고 갔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틀니를 한 사람이었다. 이럴 경우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는 아픔을 줄 수도 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막아섰다. 왜인가? 그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아도 베드로의 행동은 옳다. 하나님의 아들이 안 죽어야 되는 것이지 죽으면 되는가? 세상 지식으로는 말도 안되는 예수님의 이론에 베드로는 막아선 것이었다. 자기 생각이 옳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세상 지혜로 볼 때 은혜는 내가 잘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이다. 내가 잘되는 것만을 은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지혜이다. 하나님은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파괴할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통하여 세상에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어떤가를 보여주기를 원하시지, 풍족하게 되는 것만을 은혜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얼마 전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차에 치어 죽었다. 그 부모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다. 어떤 분이 그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분명하다. 뜻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오직 주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하여 선택 받은 자는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만 바라보는 자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크고 화려한 것을 자랑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할 수가 있다. 세상 사고는 위대한 사람을 자랑하고, 높은 사람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주신 하나님은 떠밀려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파괴되는 것이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응답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이 언제 당신의 원하시는 것을 기도응답으로 여기셨는가? 그것과는 반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다.
세상 인간이 원하는 것은 결국 이 땅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며 다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옳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고, 또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읽기와 기도 등을 통하여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나가려 하기 때문에 교회가 파괴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파괴를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오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한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니 필요하신 대로 사용하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가 성전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 가운데에는 세상을 벗어난 성전으로서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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