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결혼, 이혼, 재혼, 성생활/고전7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07

우리는 도덕적인 혼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 가족제도와 전통적인 도덕관이 무너지면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성서적인 가치관에 기초하여 나라가 세워졌던 미국은 기독교 윤리가 거부되면서 도덕적인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에 이혼률이 급증하고 가정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정이니 부부니 하는 전통적인 단어 조차도 의미가 애매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5-6 주에서 동거하는 동성애자에게도 부부에게 주는 혜택을 똑같이 주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에 기독교인들도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간의 이혼률이 일반인들의 이혼률보다 약간 더 높다는 기사를 읽고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바울은 결혼, 이혼, 재혼 성생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염려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하여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정황 안에 있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설교가 여러분을 매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의 원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혹시 여러분들이 몰라서 실수를 범했었다면 다시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Ⅰ. 가능하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


사도 바울은 혼자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8절). 독신 자체가 미덕이라서가 아니라 인생을 길게 볼 때에 그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잠간입니다(31절하). 인생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독신으로 살면 오직 주님에게만 집중하여 섬기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32-34절). 그래서 바울은 독신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한 분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어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수상쩍어 하는 눈으로 본다던가 결혼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결혼하지 못한다고 측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성도님은 부득이한 일로 이혼을 하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내고 계시는데 주위 분들이 독신으로 살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고 체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답답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독신으로 남기로 한 분들은 독신이라는 신분을 십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본인 쪽으로는 결혼을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애매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혼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독신으로 살라고 그러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것을 비관하지 말고 독신의 강점을 잘 살려서 이웃과 주님을 열심히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독신으로 사는 것은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서 혼자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8-9절). 결혼한 사람은 성적인 욕구를 억제 못하는 덜 영적인 사람이고 성적인 욕구를 극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혼자 사는 것은 은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처럼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각자 은사대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7절).

Ⅱ.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의 성적 욕구에 민감해야한다

고린도 교회에는 상반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그룹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고 영지 주의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도 성적이 관계를 멀리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성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일생을 한 몸 되기로 서약한 남녀에게 성적 관계의 즐거움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끼리 성적인 즐거움을 주고받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성에 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성적인 즐거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복인데 이것을 파괴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욕구는 마치 불과 같습니다. 난로에 들어있는 불은 우리의 얼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화덕에 들어있는 불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불이 정해진 곳에서 사용되지 아니하고 컨트롤에서 벗어나면 집을 태워버리는 화재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산을 홀랑 태워버리는 재난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 관계는 부부 사이에서만 즐겨져야합니다. 이 관계를 벗어날 때에 파괴를 가져옵니다. 부부 관계 밖에서 갖는 성 관계가 자신을 파괴하고 가족들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이웃에 수치를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성 관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니까 부부끼리는 즐겨야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부부끼리는 상대방의 성적 욕구에 민감해야합니다(3-4절). 우리 나라 어른들은 성관계는 남성들만이 요구하는 것이고 여성은 마지 못해 응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성 관계를 요구한다든지 성 관계를 즐기면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둘 다에게 성적인 욕구를 주셨고 그러므로 서로의 욕구를 존중해 주어야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아내에게는 순종하라고 하셨고 남편에게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에 있어서는 동등합니다(갈 3:27-28).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부부들은 서로의 성적인 욕구에 민감하고 서로의 요구에 응해주어야 합니다.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생활을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5절). 서로를 거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만 하면 안 되지요. 아내들이 남편의 성적인 요구에 응하기 힘든 것은 대부분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아기 키우고 가사 돌보고 어떤 경우에는 직장 생활까지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성관계를 원하면 강요하는 대신에 설거지를 도와준다든지 아기 목욕을 시키거나 잠을 재우든지 하여 아내의 마음에 성관계를 갖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아내가 성관계를 원하면 강요하는 대신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던지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단장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배우자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고 그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섬김의 도구가 성관계입니다. 가능하면 응해야합니다.

부부간의 성관계는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놀이가 없는 삶이 얼마나 삭막합니까? 그러나 재미있기는 하지만 역시 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관계를 행복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성적인 만족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딱지 치기가 재미있지만 딱지치기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 관계는 즐거운 놀이이기 때문에 설혹 상대방이 원할 때에 욕구가 없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여 응하다보면 재미가 붙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솔직히 별로 윷놀이에 관심이 없습니다. 설날 윷놀이하자고 하면 시큰둥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면 많이 웃게되고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별로 큰 관심이 없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여 응하면 재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Ⅲ. 크리스천에게 이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혼에 관하여 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로 "하지 말아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말 2:16).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는 부부 중에서 한 명만 예수를 믿고 다른 한 쪽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가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믿는 쪽은 신앙 생활을 하거나 봉사 활동을 하는데에 믿지 않는 배우자로 인하여 많은 지장을 받고 한 걸음 더 나가서 핍박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에 조차도 바울은 배우자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한은 이혼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2-13절).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더 잘하기 위하여, 혹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믿음이 적거나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써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혼이 절대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용서받지 못할 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배우자가 간음을 한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마 5:32). 바울도 믿지 않는 배우자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유로 이혼하자고 하면 이혼에 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5절). 저도 배우자가 예를 들어서 노름이나 마약 중독이 되었다면 자신과 자녀들의 생존권을 위하여 이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배우자가 폭력을 사용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이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이혼을 하려면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혼자 살던지 재결합을 해야합니다(11절). 이 두 가지밖에 선택이 없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혼의 목적은 서로 헤어져서 살며 배우자가 충격을 받고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거나 재혼을 하면 본인도 자유롭게 재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재결합을 기다리며 기다리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혼을 할 때에는 믿는 사람과 해야합니다(39절). 39절은 남편을 사별한 여성에게 주는 권고의 말씀이지만 이것은 미혼에게도 또 이혼한 배우자가 재혼을 하여서 화합의 길이 막힌 이혼 남이나 이혼녀에게 다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안에서'라고 했지 믿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주님 안에서'라는 '자신이 주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람의 인생의 목적은 사명 완수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던 믿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은 고후 6:14상에 의거하여 믿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그 구절은 결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반 생활에 관한 것입니다(고후 6:14하). 믿지 않는 사람과 밀착되어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기보다 어리석은 결정을 내었다고 보아야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삶을 사는 것은 끝난다고 보아야합니다. 여자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일생의 사명을 배우자 한 사람 예수 믿는 것에 두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약 70, 80년이 인생이 주어집니다. 사명을 위하여 살고 천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유일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을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도 모르는 배우자를 위하여(24절) 완전히 바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저에게는 생각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예수님보다 배우자를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과 결혼하든지 아니면 결혼할 사람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외에도 결혼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하여 여러분들이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율법 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두 가지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생은 잠시이며 우리는 나그네로써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사명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기초하여서 현명하게 올바른 결정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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