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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이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알 레이시 (퍼옴)

작은샘 큰물줄기 2019. 2. 24. 08:00

아이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알 레이시


   알 레이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창조하실 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된지라(창 2:7).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살과 뼈를 취하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두 혼'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창 1:28). 그런데 재미있게도 아담의 후손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이...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습대로 한 아들을 낳았더니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부르고(창 5:3)

즉, 아담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었던 것같이 그의 모든 후손들도 다 살아 있는 혼인 것입니다.
독자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형상대로(in the image of God)만들어졌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모습을 따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창 1:26,27).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형상 중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사람들 가운데는 여전히 그분의 형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 혼의 불멸(the immortality of the soul)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없어질 수 없는 존재이신 것처럼 사람의 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일어나면 사람의 혼은 어디론가 가는데 물론 그 혼은 영원토록 의식을 가진 채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같은 기본 진리들을 부인하는 종교들이나 사교(邪敎)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부활의 때까지 무의식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이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지옥에 가되, 불꽃 속에서 소멸되어 그 존재가 사라진다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무덤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입증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살아 계실 동안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갈릴리에 거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사람의 아들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배반당하여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다시 일어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몹시 근심하더라(마 17:22,23).

그 후 체포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이틀 후면 유월절임을 너희가 아나니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하여 배반당하여 넘겨지리라, 하시더라(마 26:1,2).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형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고, 자신이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으며, 자신이 죽은 자들로부터 되돌아 올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그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기록대로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대다수가 현재까지 남아 있고 더러는 잠들었으며(고전 15:3-6)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그리고 부활에 관한 성경적 및 수많은 역사적 증거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믿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터이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 14:19).

그분께서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오셨다는 사실은 죽음이 사람의 혼의 종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존재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분께서는 자신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문자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자신이 행하리라 말씀하셨던 것들 중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그분께서는 그 옆에 있는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한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죄 가운데 빠진 채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두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께 말씀드리되, 주님 주께서 주님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저를 기억하옵소서, 하니(눅 23:42)

이때 우리 주님께서 무어라 답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날 낙원에서 회개하는 강도를 만나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자신의 죽음, 매장, 그리고 부활에 관해 진실을 말씀하셨다면, 그분께서 그날 그 강도를 낙원에서 만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씀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혼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잠을 잔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강도는 그 날 낙원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빌립보서 1:21-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는 것은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죽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6-8에서 "죽는 것이 곧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무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난처하게 만듭니다. 좀 더 알기를 원하신다면 누가복음 16장에 나와 있는 나사로, 아브라함, 그리고 부자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부자는 지옥의 그 고통스러운 불 속에서 타고 있었지만 결코 멸절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의식을 가진 채로 영원히 고통당함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계 14:11). 따라서 '사람의 혼의 소멸'을 가르치는 이론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혼은 어디론가 가게 됩니다.

제 6장에서 우리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 속에서 과연 아기가 언제 "영원히 죽지 않는 살아 있는 혼"(a living immortal soul)이 되는가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이미 말한 대로 "아이가 죽더라도 그의 혼은 살아 있으므로 어디론가 간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갑시다

'림보'라든지 혹은 '연옥' 같은 곳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성경 구절도 그런 곳이 있음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 카톨릭 사제나 신도들을 만나 제 성경이나 그들의 성경에서 그런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언급되어 있는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 분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은 딱 두 군데뿐입니다. '하늘[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이는 유아나 어린 아이들도 죽으면 하늘이나 지옥, 그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됨을 말해 줍니다(*역자 주: 하늘과 지옥의 실제적 존재 에 대해서는 부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본론에 들어갑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이나 지옥에서 의식을 지닌 채로 영원(eternity)을 보내게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린 아이들이 죽었을 경우 그들은 어디로 갈까요?

이제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직시합시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는 때때로 유아나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장례식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장례식에는 특별히 슬픔이 더 합니다. 어쩐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아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죽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그 작은 무덤 옆에 나타난다면, 그분께 손가락질하며 그분을 비난할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무서운 충격과 애이는 듯한 가슴,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 그리고 밀려드는 외로움을 이해합니다. 또한 저는 남아 있는 가족들이 다시는 이 세상에서 그 아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진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이 모든 감정은 매우 정상적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래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취하신 뒤 그것을 위에다 옮겨 심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옛 죄로 인해 저주받은 사악한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빌 1:23).

자 그러니 어린 자녀가 죽었다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비난하지 맙시다. 이제 그 아이는 결코 아픔이나, 병, 슬픔, 상심 등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넓은 사랑의 품으로 돌아간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차라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어린 아이들과 하늘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유아나 어린 아이가 죽으면 즉시로 천사들이 그들을 하늘로 데려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가장 잘 해주고 있는 마태복음 18장을 읽어봅시다.

바로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드리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맞아들이면 곧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어린 자 중 하나를 실족케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자기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자기에게 더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로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으라! 실족케 하는 일이 반드시 와야만 하되 실족케 하는 일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 있으라! 이러므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절뚝거리거나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로 실족케 하면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어린 자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길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을 남겨 두고 산 속에 들어가 길 잃은 그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보다 그 양을 인해 더욱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어린 자 중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14).

자, 지금부터는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살펴봅시다. 매우 심오한 성경의 진리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는 신약 성경에서 '아이들'(children)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들의 이해에 필요한 사항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가 '아이들'로 번역되는데, 하나는 '파이디온'(paidion)이고 다른 하나는 '테크논'(teknon)입니다. 이 중에 '테크논'은 성별에 상관없이 일반적인 용례로 '자손'(offspring)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몇 가지 용례를 살펴봅시다.

엘리사벳이 불임이므로 그들에게 아이(teknon)가 없었고 이제 두 사람 다 매우 연로하더라(눅 1:7).

위 구절은 단순히 엘리사벳과 사카랴에게 자손(남자든 여자든)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기록해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teknon)이 없이 아내를 남겨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자기 형을 위하여 씨를 일으켜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막 12:19).

이 구절에서 사두개인들이 가정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죽어 자손(남자든 여자든)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파이디온'은 유아(baby)나 어린 아이(toddler)를 의미합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기본 형태가 변할 때에만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기본 형태인 '파이디온'에서 '파이다리온'(paidarion)이라는 단어가 파생됩니다. 이 단어가 마태복음 11:16,17에 사용된 것을 보십시오.

이 세대를 어디에다 비유할꼬? 아이들(paidarion)이 시장터에 앉아 자기 동료를 부르며 말하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였고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애곡하여도 너희가 애통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17절을 보면, 여기 나오는 아이들이 매우 성숙한 사람처럼 자기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유아도 아니며 서너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닙니다. 그들은 상당히 나이가 든 아이들입니다.

'파이디온'에서 파생된 또 다른 단어는 '파이디스카에'(paidiskae)입니다. 사도행전 12:13에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베드로가 현관문을 두드리자 로다라 하는 소녀(paidiskae)가 듣고 나왔다가(행 12:13)

여기 나오는 소녀(damsel)도 결코 아장아장 걷는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그녀는 문으로 뛰어나가 대답할 정도로 성숙한 소녀(혹은 처녀)였습니다.

우리의 주제가 유아나 어린 아이들을 다루는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파이디온'의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동방으로부터 현인들이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짐을 실은 짐승과 함께 여행하며, 먼길을 오는데는 약 2년 정도(만일 중국에서 왔다면) 걸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사악한 왕 헤롯이 그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헤롯이 은밀히 현인들을 불러 그 별이 나타난 시간을 자세히 캐묻고(마 2:7)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에게 별이 2년 전에 처음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되, 가서 그 어린 아이(paidion)를 자세히 찾아보고 찾으면 내게 다시 알려주어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하게 하라, 하니라. 그들이 왕의 말을 듣고 떠났는데 보라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그 어린 아이(paidion) 있는 곳 위에 와 멈춰 섰는지라(마 2:8,9).

이에 헤롯이 현인들에게 우롱당한 줄을 알고 심히 격분하여 사람을 보내어 현인들에게서 자세히 캐물은 때를 기준으로 하여 베들레헴과 그 변경 온 지역에 있는 아이들(paidion)을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살륙하니(마 2:16)

위의 성경 구절에서 어린 주 예수님은 '파이디온'(paidion)이라 불립니다. 그분께서는 그때 두 살이 채 안되었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였습니다(*역자 주: 이 사실은 동방 박사들이 갓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는 장면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밥티스트(baptist, 침례자) 요한이 태어난 지 팔 일이 지났을 때, 성령님께서는 그를 '파이디온'이라 칭하셨습니다.

여덟째 날이 되매 사람들이 아이(paidion)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카랴라 부르니(눅 1:59)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들판에 있던 목자들이 와서는 "갓난아기(babe 혹은 baby)가 구유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눅 2:18).

보고 천사가 이 아이(paidion)에 대하여 말한 것을 널리 알리니(눅 2:17)

예수님께서도 갓태어난 아기를 '파이디온'이라 칭하셨습니다.

여자가 산고 중일 때는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이 있으나 아이(paidion)를 해산하자마자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곤고를 더이상 기억치 아니하느니라(요 16:21).

히브리서를 보면, 우리는 모세가 석 달이 되기 전에 '파이디온'이라 불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 자기 부모에 의해 석 달 동안 숨겨졌으니 이는 그 부모가 아이(paidion)의 출중함을 본고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음이라(히 11:23).

이외에도 비슷한 성경 구절들이 더 있지만, 저는 이것들만으로도 성경이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유아'나 '아주 어린 아이'를 지칭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인 '파이디온'이 자라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닐 때 성경은 그를 '아이[소년]'(paidarion)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린 아이'가 '아이[소년]'으로 변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성경은 이점에 대해서도 매우 명확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해 봅시다.

신명기 1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광야에서 불신의 죄를 지은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듣고 진노하사 맹세하여 말씀하시되, 이 악한 세대의 사람들 중에는 내가 너희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좋은 땅을 볼 자가 정녕 아무도 없으리라. 오직 여분네의 아들 칼렙만이 그것을 보리라. 내가 그와 그의 자녀에게 그의 밟은 땅을 주리니 이는 그가 온전히 주를 따른 연고라, 하셨으며 주님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말씀하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네 앞에 선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곳에 들어가리니 그의 용기를 북돋우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상속케 하리라. 또 너희가 밥이 되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어린것들과 그 날에 선악간에 지식이 없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케 하리라(신 1:34-39).

하나님께서 분명히 책임질 수 있는 나이를 알고 계심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죄를 범했을 때,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어른들은 모두 요르단 강 저편에서 죽어 그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선과 악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은 그 죄악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또 다른 구절을 살펴봅시다.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한 표적을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칭하리라. 그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까지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이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혐오하는 그 땅이 두 왕에게서 다 버림을 받으리라(사 7:14-16).

그렇습니다. 심지어 주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성숙한 상태로 자라나셔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분께서 선을 택하시고 악을 거부하실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선 그렇게 될 때까지 자라나셔야만 했습니다. 유아 시절을 보낸 아이라면 누구나 이같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지 팔 일 만에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 있던 시므온에게 그분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율법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나서 갈릴리로 돌아가 본 고향 나자렛에 이르니라. 아이가 자라며 영이 점차 강해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39,40).

예수님께서 갓난아기였을 때, 그분께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을 때까지 자라나셨던 것입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분께서는 선과 악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눅 2:51 참조).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를 지은 바가 없다(히 4:15; 벧전 2:22)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나이까지 자라나셨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 원리는 매우 확실합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 중 어느 특정 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지게 됩니다. 매우 어릴 때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어머니의 태 속에서 우리가 형성되는 동안에 이미 우리는 본질상 죄인인 것입니다.

보소서 제가 불법 가운데 빚어졌음이여 모친이 죄 가운데 저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 죄인이 됩니다.

사악한 자는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우리는 모두 양같아서 곁길로 나갔음이여 우리는 돌이켜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사 53:6a)

여러분 중에 이 사실을 부인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에게 죄 짓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본질상 죄인이며, 자연히 불순종하며 죄를 짓습니다. 부모의 책임은 말을 듣지 않는 작은 가지를 올바로 세워 주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굽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의 인격이 형성되는 이 시기에 계속해서 그들의 나쁜 버릇을 바로잡아 주려 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먼저 나왔던 성경 말씀에 따른다면, 갓태어난 아기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식이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즉, 고의적인 죄를 짓지 않은) 죄인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행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말입니다.

로마서 5장에 기록된 바울 사도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럼에도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나니 아담은 오시기로 된 그분의 모형이라(롬 5:12,14).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1. 아담의 범죄의 유형을 따라서

2. 아담의 범죄의 유형을 따르지 않고서

만일 독자께서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실제로 죄를 처음으로 지은 사람은 아담이 아니고 이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기에 좋고 보기에도 즐거우며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그녀가 그 열매를 따먹고 그녀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창 3: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분은 이브가 아닌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man, 남자)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롬 5:12)

한 사람(man)의 범죄로 사망이 ... 군림하였은즉 ... (롬 5:17).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롬 5:19).

아담으로부터 ... 사망이 군림하였나니(롬 5:14).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브 대신에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실까요? 이브가 먼저 잘못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까? 그녀가 먼저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브가 먼저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브가 먼저 죄를 지었는데 왜 아담이 책임을 져야 할까요?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 교활함으로 이브를 현혹시킨 것같이 어떻게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일함으로부터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위에서 '현혹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beguile'이며, 웹스터는 이 단어가 '현혹하다', '마음을 홀리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정의를 내립니다. 바로 이런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탄은 속임수를 써서 이브를 미혹했고 그녀의 마음을 홀렸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녀로 하여금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했고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하였음이니라(딤전 2:14).

그러나 아담의 마음은 이처럼 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브가 범죄함 가운데 있었으나(다시 말해 그녀가 처음으로 죄를 짓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그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브의 죄는 아담의 범죄의 유형을 따라 저질러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죄를 갖고 온 장본인으로서 아담을 지적하시며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로마서 5:14이 "아담의 범죄의 유형을 따라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 위에도 죽음이 군림했다"고 기록하고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겠습니까? 성숙하지 못함으로 쉽게 마음이 홀리는 어린 아이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브처럼 어린 아이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르며, 범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론 죽음이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해 왔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이브처럼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라서 성숙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도 더 이상 홀리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해의 정도가 완전히 성숙되어 그들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여 죄를 짓게 될 때, 비로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만일 어린 아이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죽는다면, 그들은 안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하늘(Heaven)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에 죽는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지 않는 한 지옥(Hell)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아이들은 어느 나이에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됩니까?"

사실 그때가 어떤 특정한 나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아이들 각자의 정신 기능 혹은 심성(mentality)의 성숙 정도, 또 그 아이가 얼마나 많이 영적인 빛을 받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배경을 갖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상대해 온 결과, 저는 경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며, 크리스천 가정에서 양육되고, 좋은 주일학교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양육받은, 보통 만 6-7세 정도가 되면 책임을 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범주에 속한 많은 아이들을 상대해 본 결과, 저는 이 아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악간에 확실한 지식"(신 1:39)을 갖고 있으며, "충분히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할 수 있음"(사 7:16)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저는 매우 심성이 밝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다섯 살만 되어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네 다섯 살에 믿음에 대한 고백을 한 아이들의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고백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재차 구원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몇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비록 아이가 구원을 알기에는 아직도 너무 어린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아이가 구원에 대해 올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아이를 방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심히 불쾌히 여기사 말씀하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이 이러한 자의 것이니라(막 10:14).

오직 성령님만이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어린 아이가 예수님을 영접해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 결과는 성령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크리스천 가정에서 양육되지 못합니다. 비록 아이들이 교회에 간다 해도 그들은 참된 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를 거의 듣지 못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쓸데없는 종교적 교리나 자유분방한 사회 복음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아이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때는 앞서 말했던 범주의 아이들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입니다. 이들이 죽어서 지옥에 가는(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나이는 아마도 여덟살, 아홉살 혹은 열살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저는 단지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라 이렇게 추측할 뿐입니다.

단 한번도 복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이교도 국가에 사는 어린 아이들인 경우 그 나이는 열 두살 혹은 열 세살 까지도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몇몇 독자들께서는 사람이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한,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 책임이 없고 따라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은 전부 허사일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 16:15).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합니다. 이교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받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안에 분명히 있음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한 권능과 신격이 그 만드신 것들에 의하여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하느니라. 하나님을 알되 그분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돌려 드리지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 상상 속에서 허망하여지며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공언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및 새들과 네 발 달린 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부정함에 내어 버려두사 자기들끼리 몸을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그분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시로다. 아멘.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타락한 애정에 내버려두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욕정이 불일 듯하여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하여 자기들의 탈선에 상응하는 보응을 스스로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곧 온갖 불의 행음 사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논쟁 속임수 적개심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19-29)

따라서 좀더 많이 영적인 빛을 받게 되면, 좀더 빨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모두에게(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빛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들어오는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덧붙이고자 합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정신박약아같이 정신적으로 뒤진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과 악에 대한 확실한 지식"(신 1:39)을 갖게 되고, 충분히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할 수 있는"(사 7:16) 성숙한 지경으로 그들의 마음이 자라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으면 하늘에 갑니다. 이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을 찾아 확인해 봅시다.

바로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 와 말씀드리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paidion)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마 18:1,2)

이미 앞에서 충분히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 '파이디온'은 아기나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자기에게로 직접 '부르신'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 아이가 두세 살 정도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조심스레 살펴보십시오.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제자들의 관심은 어린 아이가 하늘의 왕국에 가느냐 안 가느냐가 아니라, 하늘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존경을 받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아니한 채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주셨습니다.

"언제 아이들이 죽으면 하늘에 가니이까?"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자,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신 사람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귀여운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문제는 해결되고 맙니다. 일단 하늘에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데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질문에 소리없는 침묵의 답을 주신 것입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저는 어린 아이들이 죽으면 하늘에 간다고 확신있게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더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해 이제 예수님께서 이 주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하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만일 우리 어른들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회심하여(be converted)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 어린 아이들은 회심할(be converted) 필요가 없으며 이미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들이 책임질 수 없는 어린 아이로 죽는다면, 그들은 하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그분께서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실 것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늘의 왕국이 이러한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3,14)

"이러한 자의 것"(of such)은 곧 소유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왕국은 현재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의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내게 올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는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어린 아이들과 하늘의 왕국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로 자라나 회개가 필요한 때에 이르기까지는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현재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이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맞아들이면 곧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니(마 18:5)

"내 이름으로"(In My Name)는 곧 '소속'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 내 이름으로 마실 물 한 잔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가 자기 보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막 9:41).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내 이름으로"는 곧 소속을 의미합니다. 자 또다시 그분께서 아이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봅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맞아들이면 곧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니(마 18:5).

그분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맞아들이는 자는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니라(마 10:40).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요점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것은 곧 아버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속에 감추인 진리가 독자의 마음에 자리잡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어린 아이들, 그리고 그분의 피로 거듭나 하늘 행 열차를 탄 어른들, 이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거듭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처럼 어린 아이들도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린 아이들이 그 상태에서 죽게 되면, 그들은 곧장 예수님께로 가서 그분의 피로 씻김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처럼 하늘에서 살게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분이 이 책을 읽을 수도 있으므로 저는 위에서 제가 보여 드렸던 진리를 다시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독자들이여! 어린 아이들은 언제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렇습니까? 당신은 회심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회심'(convert)이란 사실 군대에서 병사들의 훈련 시에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병사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서서 180°회전하여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뒤로 돌아 가!" 바로 이것이 제가 말씀드린 회심입니다. 당신은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느 방향입니까? 하나님의 방향입니까? 아니면 지옥(Hell)을 향하고 있습니까? 이제 당신은 하늘(Heaven)을 향해 방향전환을 해야만 합니다.

결코 이같은 변화를 '새로운 잎사귀'를 내는 것 정도로 생각지 마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는 '새로운 출생'(New Birth)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기적같은 역사에 의해 당신 안에 새로운 본성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와 달리 이것은 결코 밥티슴(침례 혹은 세례)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이상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결코 물 침례에 의해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 등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전통(견진성사나 성찬, 그리고 기타 여러 성례전)에서나 발견될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들어봅시다.

사람들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제쳐놓고 사람들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으니 ... 또 말씀하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도 저버리는도다.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며 ...(막 7:7-8a; 9; 13a)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심과 구원은 예수님 앞에서 당신이 사악한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용서를 구하고 그분께서 당신의 마음에 구세주로 임하시도록 요청할 때 이루어집니다.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모두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눅 13:3b).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 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롬 10:9)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의 마음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종교적 신조들과 상치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종교와 성경의 진리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성경의 진리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래도 구원받으려면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니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 점을 지목하셨습니다.

말씀하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마 18:3,4).

당신도 잘 알다시피, 어린 아이에게 무슨 자존심이나 프라이드가 있습니까? 이들은 겸손합니다. 그들은 소위 지성(intelligence)이나 위엄(dignity), 자기 의(self-righteousness)나 종교적 전통에서 비롯되는 프라이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언가 딴 속셈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인해 쉽게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 당신의 자존심과 프라이드를 모두 내어놓고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속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너를 위해 더 나으니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발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절뚝거리면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속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지우는 것보다 너를 위해 더 나으니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지우는 것보다 너를 위해 더 나으니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48).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죄와 자아를 사랑함으로 지옥행을 고집하시렵니까?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당신의 종교에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서 영접하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실 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릴테니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주 예수님! 저는 제가 죄인임을 잘 압니다.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제 마음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는 주님을 저의 구세주로서 받아들입니다. 아멘"

당신이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은 영원토록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성경대로 믿는 좋은 교회로 가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고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뒤 저자(혹은, 번역자)에게 편지를 주신다면, 저 역시 당신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과 제가 하늘에 가서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영원을 보낸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 이 장의 결론을 내려봅시다. 우선 우리는 한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그가 충분히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기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 시점을 아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하는데 있어 하나님께 도덕적인 책임을 지게 됩니다. 본질상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죄인인고로 그 아이는 종종 악을 택하고 선을 거부하며,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습니다. 그가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것이며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충분한 빛을 주셨기에 그는 응당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회심하여 구원받든지, 혹은 영원히 지옥에서 지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책임을 질 나이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안전합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께 속해 있으며, 하늘이 그분께 속해 있으므로 그 아이가 죽게 되면 곧장 하늘로 가게 됩니다.

출처 : 성경스터디
글쓴이 : 빛과소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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