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조나단 에드워즈 -설교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2. 15. 19:58

조나단 에드워즈- 설교 |


 


이 간단한 논문은 설교자로서의 에드워즈 목사님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다. 특히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는 죄인의 회심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구속사의 흐름에 따라 설교를 했으며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강조했다. 즉, 어떤 사건도 독립적으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없다. 모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아럐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을 더 발전시키면 ‘경향성’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경향성적 실체로서 하나님의 성향이 무한하게 발산되는 것이다. 모든 것(물질, 식물, 동물, 인간 등)의 성향들과 경향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경향성 아래 존재한다. 그 중에 인간만이 이성이 있어 일반계시를 받을 수 있고, 택자만이 성령의 계시를 받을 수 있어 그 경향성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실체적 경향성은 성령께서 도장처럼 우리 심령에 인쳐주셔야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존재에 참여하게 되며, 그 영광을 나타낼 수 잇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설교(Jonathan Edwards and Preaching)


Frederick S. Leahy/서창원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는 것은 겸손함과 마음을 다 기울이게 하는 경험이다. 비록 차가운 인쇄물이기는 할지라도 그 내용은 우리들의 심성을 관통하는 놀라운 것이다. 신학자요 역사가요 철학자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에드워즈의 설교들은 따스하고 설득력이 있는 말씀들이다. 그 설교들은 수용하는 교회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설교신학임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인도 하에 그 설교들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좋은 열매를 낳게 할 것이다.


1. 에드워즈의 설교 방식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의 설교들은 스타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강해적이며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의 설교들은 싫증남이 없이 잘 소화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전체로서 성경의 문맥에서 본문이 있음을 본다. 에드워즈는 한 번도 한 본문 속에 다른 것을 읽는 법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말씀을 말씀으로 순수하게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들려지게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열정과 긴장감, 애원함이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설교를 듣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움직이게 하는 강한 진동을 불러 일으켰다. 강단을 위한 준비만큼 더 큰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설교자의 마음이 설교 준비만큼 똑같이 준비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그의 설교를 전부 적었다. 그리고 조지 휫필드가 에드워즈가 목회한 메사추세츠 주 노스햄프톤에서 설교했을 때까지 원고 그대로 읽었다. 휫필드의 즉흥적인 설교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에드워즈는 간편한 메모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간단한 요약보다는 약간 더 기록된 메모였다. 그는 설교 원고를 단지 읽기만 한다고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노스햄프톤에서 일어난 첫 부흥의 때에 설교 원고를 읽는 것이 이롭지 않은 것이 아님을 입증하였다. 설교할 때 어떻게 설교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그것은 예배에 있어서 설교 원고를 읽는 방식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었다.


죄인들에게 향한 에드워즈의 말씀 적용은 아주 엄격하기 그지없었고 종종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치 못한 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타오르는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설교에 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는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16:29-30 말씀의 설교를 끝맺으면서 에드워즈는 그의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하나님께 진지하게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시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은총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의 영혼들은 다 눈이 멀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의 충분성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아름다운 사역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볼 수 없는 상태에 머무는 한 그들의 인생을 그리스도와 함께 마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자들의 심령은 알지 못하는 구세주에게 결코 이끌림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감탄할만한 예표론은 흥미진진한 것들입니다. 그 방면에서 그처럼 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형(對型,antitype)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에 예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2. 에드워즈 설교의 생명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 주제들은 교회 훈육, 천사들의 지위, 기독교의 자선, 사회 관계, 가정 예배, 사단을 쫓아냄, 최후 심판 및 악한 자의 종말, 윤리적 행위, 시간의 고귀함, 기독교인의 순례길, 찬양, 슬픔 및 애도 등이었다. 우리가 에드워즈의 설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원론에 강조를 많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주권, 창조, 기독교 변증론, 윤리 및 전도 등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교회의 삶과 개인적인 생활, 불신자든 신자든 그들의 삶을 다루는 것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 색깔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가 전 인류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칼빈주의적 문화관 및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구속사의 폭넓은 흐름 속에서 생성이 되었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날 때까지 구속의 절정을 다루었다. 교회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혹은 자기 교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에드워즈는 결코 독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광의의 뜻에서 본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생각은 (교회 생활까지 포함하여) 그것이 축복이든 혹은 징벌이든 오늘날 교회가 부여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에드워즈의 설교의 깊이와 견고함을 가져다 준 비결이었다고 본다. 넓이와 깊이 차원에서 볼 때 에드워즈의 설교는 메튜 헨리의 설교와 견줄 수 있다. 그들의 스타일 역시 서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설교는 모든 삶의 유형의 다 포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덕법을 총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심지어 교회당에서 조는 것까지도 포함하여 그냥 지나치는 죄는 하나도 없었다. 에드워즈는 죄를 두루뭉술하게 다루는 법이 없었다. 그는 죄악들에 대하여 세세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3. 에드워즈의 설교는 교회와 사회에 팽배해 있던 상황의 문맥 가운데서 연구되어져야만 한다


에드워즈는 한편으로 증가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와(그는 이단으로 간주했음) 씨름해야 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목회하고 있는 지역에 사는 젊은이들의 도덕적 방종 씨름해야 했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마을의 젊은이들 사이에 방탕함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급속히 번져갔습니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밤늦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며 종종 술집에 드나들며 추잡한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그들은 자주 함께 모여서 음담패설을 일삼으며 환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들을 신바람 난 일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종종 밤이 맞도록 그같은 일들을 하며 다닙니다...”(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들, p. 347)


에드워즈는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행동은 서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그것들은 이미 성경에서 확고히 지적하고 있는 바이며 특히 목회서신들 속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것들이다. 바울 서신에서 찾아지는 알미니안주의와 부도덕성의 쌍둥이 문제거리들을 직면한 에드워즈는 그것들을 거짓된 가르침과 곁들여서 다루기로 결심한 것이다. 바울 서신에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 에드워즈 당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불쾌한 일들을 지적하는데 사용되는 적합한 메시지임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1734년 가을에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설교 시리즈를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동일한 악한 일들을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에드워즈가 접근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그것은 용감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경적인 방식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같은 해에 부흥을 보내심으로써 에드워즈의 사역을 높이 사셨다. 그 다음 해에 부흥은 노스햄튼 지역을 넘어서 번져갔던 것이다.


4. 에드워즈의 설교 목적은 죄인의 구원함에 있어서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에드워즈는 그의 청중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회심을 설교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설교에서 말씀의 적용이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죄인들을 어디에도 숨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그는 성령의 검을 가혹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다음의 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발췌한 것이다(이 설교는 1741년 7월 8일 엔필드에서 한 설교로서 엄청난 결실을 얻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활이 들려졌습니다. 그 화살이 줄에서 당기어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공의는 이제 여러분들의 심장을 향해 겨냥되고 있습니다. 활이 당기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서 그의 진노의 화살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로부터 단 한순간이나마 지켜준다는 어떤 약속이나 의무가 전혀 없이 당겨지는 화살입니다.”


에드워즈는 그 설교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일어나 임박한 진노의 화살을 피하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이 회중의 상당수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소돔성으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여러분이 살기 위하여 급히 서두르십시오. 뒤를 쳐다보지 마십시오. 타 없어지지 않도록 산으로 도망치십시오.”


5. 에드워즈 설교로부터 배우는 교훈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전 경륜을 충실하게 다 선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상당히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자연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교리를 다룰 때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싫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위협적인 설교를 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그가 지옥에 대하여 설교했을 때 여러 번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가급적이면 지나치고 마는 현대 설교하고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요즘은 그런 설교는 상당히 변증적인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렇게 우물쭈물한 태도는 영원한 형벌에 빠질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는 불충분한 메시지인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나는 번개와 천둥소리 뒤에는 그의 회중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그의 진지한 마음이 있었다. 그의 경고에 메시지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한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리적이었다. 그러나 항상 성경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였다. 그는 그의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단에서조차 조직신학자처럼 설교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교리에 박식했던 칼빈과 닮았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들은 백성들에게 아주 친밀한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로부터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을 구사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 주님은 설교자중 황태자로서 완벽한 모범이시다.


에드워즈는 그의 설교 본문을 지지하는 모든 성경을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이 성경 해석의 최고 해석자임을 알았다. 그의 설교들은 성경에 대한 그의 박식함을 입증한다. 그러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에드워즈의 모범적 실제는 계시된 진리 안에서 성경의 조화를 확증시켜줌으로써 그의 설교의 권위를 더해 준 것이었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네 번째 교훈은 윤리로부터 교리를 분리시키거나 행동으로부터 신앙을 따로 분리시켜 설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추상적인 교리를 설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다양하게 그가 믿고 있는 교리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을 실천사항을 위하여 전달하였다. 이 방면에서 그는 성경적 패턴을 따랐다. 그는 기독교는 삶의 방식임을 알았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즉각적으로 도덕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교리와 삶을 연계시키는 그의 설교방식은 오늘날에도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그 순서를 반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경험이 먼저이고 그 후에 교리를 가르치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 에드워즈의 실천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는 바른 순서를 가지고 있었다. 교리가 행위를 규정한다. 성경이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삶이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진리와 일관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리라”고 기술한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벧후 3:10-12). 거기에 보면 교리와 삶이 차례로 연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알라.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여야 하는 것이다(요 3:4).


에드워즈의 설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목사는 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또 설교 준비를 위한 연구를 철저하게 하며 강단을 더욱 사랑하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실제 하루에 13시간이나 연구에 몰두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안 머리 목사는 ‘만일 이것이 한쪽측면에서 볼 때 과다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현대 기독교 사역의 흐름은 다른 쪽에 과다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현대 그렇게 많은 교회의 일들이 별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 기본적인 이유는 사적으로 영적인 우선권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Iain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p. 147


시간이 지나면서 에드워즈는 부흥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영적 상황이 기울어 가는 것에 의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후퇴는 앞서 일어난 것들에 대한 가치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한다. 그는 부흥이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았다.


예일 대학교에 있는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방문하는 자들을 위해 그 도서관에는 보물이 있다. 거기에서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원고를 포함하여 에드워즈의 설교 원고들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는 설교역사와 부흥의 역사에 남는 흥미진진한 연구대상자들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역사학자 필립 샤프는 그를 ‘미국의 칼빈’이라고 불렀다. 칼빈은 자신을 무엇보다도 설교자로 간주하였다. 다라서 모든 기독교 목사들도 먼저 자신을 설교자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십일조 이야기(kakaocaf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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