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부자청년이 돌아간 진짜 이유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0. 30. 17:33

부자청년이 돌아간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187)>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마 19:16-23)

 

예수님도 선행구원관(?)

 

주님은 천국에서 누가 큰지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교회 안에서 서로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특별히 당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자와 아이를 사랑으로 품으라고 했다. 이제 부자 청년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주 있는지(16절) 묻자 구원과 천국에 관해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본문을 접하는 신자들로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먼저 믿음이 아닌 계명 준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청년이 계명들을 다 잘 지켰다고 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새로운 추가 계명을 주셨다. 청년이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돌아가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23절) 했다. 그럼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는 신자는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인가?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하는 의신칭의(以信稱義)의 진리를 예수님이 부인한 것인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복음서의 예수님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에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다. 예수님이 천국과 구원에 관해 가르칠 때에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어서 대화를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일학교 어린이들 가르치듯이 하나님이 착한 일을 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차원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대화의 상대나 가르침을 받는 청중의 신앙 상태에 적절하게 대답하시되 그 안에 당신만의 진리를 담아서 대화를 당신께서 주도하신다는 뜻이다.

 

지금도 청년은 어떤 선한 일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구원은 선한 일을 해야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도 그 차원에서부터 대답을 시작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구구셈밖에 모르는 중학교 저학년에게 삼차방정식을 가르치려면 일단 곱셈에서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인간의 공적은 허사이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쳐봐야 이해할 수도 없다. 예수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청년의 현재의 영적 실태,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계기, 왜 마지막에 돌아갔는지 그 이유 등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라.

 

청년은 부자였다. 누가가 ‘관원’이라고 표현했기에(눅 18:18)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이해한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서 현실적으로 가문, 학력, 재산, 지위 등 모든 것을 갖추어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자다. 마가는 또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했다(막 10:20). 부모의 믿음도 좋은 경건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세상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되었음에도 절제하는 도덕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한 것 자체가 그의 믿음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계명을 잘 지키며 착하게 살았고 남에게 잘못은커녕 손해 하나 끼치지 않았는데도 정작 자기 마음에는 평강이 없고 구원 받았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영적으로 갈급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가 바리새파에 속한지 불명(不明)하지만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십일조, 금식, 기도, 구제, 넷을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성실하게 준행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더러 구제하지 않는다고 야단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대놓고 자랑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은밀하게 구제하라고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19절)는 계명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21절)는 말씀보다 먼저 하셨다. 당시의 이웃 사랑은 바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 계명까지 다 지켰다고 했으니 평소에 그가 불쌍한 이웃들을 돌보았다는 뜻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이웃사랑 즉, 구제에도 열심이었으니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고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태가 단지 “네 소유를 팔아”(21절)라고 말한 것과 달리 누가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눅 18:22)라고 했다. 전 재산을 다 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22절) 근심하여 물러간 것이다. 재산이 적다면 어차피 호사스럽게 살지 못할 바에야 처분해서 나눠주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또 일반적으로 구제는 재산이 많아 여유가 있는 자들의 몫으로 재물이 있어야 구제도 계속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더러 빈털터리 거지가 되라는 것이다. 구제를 베푸는 지위에서 거꾸로 구제를 받아야만 하는 자리로 떨어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적으로 알기 쉽게 바꾸면, “거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영생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거지가 되느니 차라리 영생을 포기할 것인가? 둘 중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였다. 불행하게도 청년은 후자를 택하고 말았다.

 

예수님 답변의 절대적 전제

 

청년이 완악하고 죄를 많이 짓고 특별히 재물에 대한 탐욕이 유별해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당시 그의 입장이었다면 거의 대부분이 구제는커녕 계명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영생은 고민하지도 않고 영적갈증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할 것은 아예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청년은 당시로선 분명히 최고의 의인이자 영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자였다. 아직 무엇이 부족한지 물은 뜻은 아무리 어려운 계명이라도 지킬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천국을 선행지수(善行指數)로 따져 보낸다면 자기는 최고 점수를 얻어 제 일착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한 것은 시쳇말로 바꾸면 “네가 정말 모든 계명을 지킬 자신이 있다고? 그래! 그럼 이 계명도 지킬 수 있겠니?”라는 것이다. 아주 강한 스매싱으로 상대방 코트에 탁구공을 돌려보낸 셈이다.

 

주님은 처음에는 살인, 도적질, 간음하지 말라는 것 같은 비교적 지키기 쉬운 계명을 말씀하셨다. 그러다 최고로 어려운 계명을 지키라고 했다. 예수님은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서 대화를 시도하다가 차츰 당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시면서 그 대화를 당신께서 주도하며 이끄신 것이다.

 

주님은 무엇보다 계명을 잘 지켜 착한 일로 천국을 간다면 자기가 일 등할 자신이 있다는 그 청년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우치려는 뜻이었다. 영적으로도 아주 어리석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도 큰 죄가 된다고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청년이 구원의 길을 물었는데도 예수님이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대답부터 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청년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질문했기에 그에 맞추어주려는 뜻이었다. 예수님 당신께서 선하지 않다거나,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선을 몰라서 가르치지 못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한 이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면 인간은 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이 행하는 선은 결코 완전한 선이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합격점에 결코 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부터 먼저 명확하게 전제한다는 뜻이다. 청년이 믿고 있는 선행구원관을 확실하게 부정한 바탕에서 대답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는 종교체계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있는 모든 여건, 여유, 자원 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그러고 싶은 마음과 실천할 수 있는 의지도 하나님이 주신다. 인간이 잘나서, 남들보다 유달리 착해서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신 계명을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에 의해서 한 것뿐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인간들 사이에서 점수를 매기고 순위를 정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자는 곳 전부 다 마련해준다. 그런데도 아이가 밥을 먹기 전에 손을 씻었고 또 반찬 투정하지 않고 잘 먹었으니 상을 달라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이도 많으니 자기 아이가 그러면 부모로선 기쁘고 또 장난감을 보상으로 사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 그 모든 과정을 당신께서 주도하셨어도 아주 기뻐하신다.

 

부모 생일날 자녀가 선물하는 것은 부모가 준 돈에서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랬다고 자식이 잘났다고 주위에 자랑할 거리는 결코 아니다. 부모의 바람은 자녀가 착한 일을 하고 그 보상으로 상을 주는 것보다, 그런 것 하나 없이도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세상 어떤 것도 절대 훼방할 수 없는 그런 관계말이다.

 

하나님도 인간과 어떤 이해타산도 개입되지 않는 관계를 이루길 진정으로 원하신다. 인간이 하나님만 생각하면 마음에 넘치는 기쁨이 우러나와 기꺼이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길 바라신다. 정말로 빈털터리가 되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길 원하신다.

 

선행으로 천국 갈 자신이 있다는 것은 자기는 남들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이다. 다른 이는 자기보다 열등하고 나쁘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선행과 구제를 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더 포악해서가 결코 아니다. 여건과 재물이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질병과 환난 등으로 힘들어서 도무지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수 있다.

 

정말로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면 구제는 꿈도 꾸지 못한다. 한국에서 삼사십 년 전 만해도 자녀를 남의 집에 식모나 머슴으로 팔아먹었다. 그런 부모가 아주 더 악해서 자식마저 버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대로 두었다간 모두가 다 굶어죽을 판이니까 자녀들만이라도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을 부잣집에서 해결하라는 가슴 아픈 사랑의 뜻이다.

 

이 부자 청년은 다른 이의 그런 가슴 아픈 사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 앞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완전히 닫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는가?

 

당시 유대사회는 일반대중들, 특별히 예수님이 오셔서 주로 만나 교제했던 저소득 소외계층의 어려운 사정을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명을, 아니 인간 장로가 만든 규정을 더 중요시하여서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죄인이라는 허물을 씌워서 공동체에서 추방했다.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자로 매도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이 만든 종교적 멍에를 메게 하고 그것으로 심판하고 저주했다. 인간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유대교라는 종교체계가 구원의 권한을 독점했다. 이 청년이 비록 정확하게 의식은 못했을지라도 그런 체계 안에서 그 체계에 따라 행동했다. 그런 체계가 옳다고 인정한 셈이다. 또 그런 체계 안에서 자기는 선행으로 일등하고 있다고 자랑한 것이다.

 

대다수 인간이 지키지 못할 계명

 

어쨌든 당시로선 가장 의로웠던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듯이,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계명은 솔직히 인간의 99.9%가 제대로 지키지 못할 계명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예수님이 구원의 길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신자가 그것도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에게 주시는 참 제자도의 길을 가르친 것이라고 해석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했는데 저런 대답을 하시는 즉,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분이 결코 아니다. 영생을 얻는 길을 물었으면 반드시 그에 맞는 정답을 주신다. 그보다 인간이 매번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을 해도 주님은 당신만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천국 진리로 대답. 즉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하신다.

 

지금도 이 청년은 자신은 어떤 계명도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무엇이 부족한가라고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주님이 전 재산을 팔아 나눠줄 수 있을지 반문함으로써 그는 염려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창피스런 모욕을 주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헛소리인지, 그런 자신감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제대로 깨달으라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너무나 현명한 대답이었지 않는가?

 

예수님의 답변을 자세히 다시 보라. 그 초점이 어디에 가있으며 또 결론을 어떻게 내렸는가? 인간의 99.9%가 지키지 못할 계명을 추가로 주시고,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기에 인간의 선은 완전한 선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미 말한 대로 계명을 지켜 영생을 얻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확실하게 밝히려는 의도였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청년에게 선행과 구제의 차원을 최고로 높은 수준으로 올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네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이 청년은 주님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근심하여 떠날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짧고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 자리에 엎드리며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인간으로써 온전한 선을 행할 수 없음을 감히 제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제가 잘못 알았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고백했어야 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라는 청년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은 21절 마지막 부분에 정확하게 나온다. “나를 좇으라.” 전 재산을 팔아서 나눠주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었다면 구태여 이 말씀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어찌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대답하셨다. 마치 당신은 선한 선생도 아니며 선한 일도 모르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당신을 좇으라고 했다. 처음 말과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 같다. 그럼 주님이 선하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지 않는가?

 

만약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면 당신을 좇으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또 인간 중에서 아주 특별히 선해도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이미 그 청년은 유대 사회에서 상위 0.1% 안에 들만큼 인간사회에선 충분히 선했기에 구태여 다른 인간을 좇을 필요가 없다. 바로 예수님 당신이 그 유일하게 선한 이 하나님이시기에 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하나님 본체로서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고 선포한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선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소관 아래 있다. 하나님만이 영생을 주실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리 의인이라 칭송 받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내 모든 것의 주인이자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 그동안 계명을 잘 지켜서 천국에 일등으로 갈 자신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에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이 어리석은 죄인을 용서해달라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좇아 영생을 얻는 첫 걸음이다.

 

만약 이 청년이 재산을 팔지 않았어도 진심어린 회개와 함께 이런 고백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예수님이 전 재산을 팔아 나누지 않으면 영생을 줄 수 없으니 빨리 내 말대로 다 팔고 다시 오라고 거절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착한 일을 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 재물의 욕심이 얼마나 많고 적은지 묻지도 않는다. 착하고 악한 것으로 따지면 우리 모두가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재물 욕심으로 따지면 솔직히 목사인 저부터도 아직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주님은 지금 거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좇으라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선한 이는 하나님 한분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죄인들끼리의 경쟁과 시기로 생성되는 것이라 불완전하며 죄로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재물이 우리 인생을 절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전, 만족, 안식, 행복, 기쁨 등을 절대 보장하지 못한다. 나아가 하나님이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 순간에 다 앗아갈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인생과 삶의 만족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뿐이다. 우리 존재를 충만케 하실 수 있는 것 즉, 항상 갈급하여 뻥 뚫려 있는 가슴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뿐이다.

 

청년은 어떤 계명도 지킬 수 있는 자신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까지 선행을 해야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지 정말로 궁금했었다. 그에 대해 주님이 전 재산을 팔라는 추가계명을 주신 뜻은 먼저 그런 자신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나아가 네가 다른 누구보다도 계명을 잘 지켰는데도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이젠 구원의 길이 혹시 다른데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고쳐 먹어보라는 뜻이었다.

 

이일이 있기 직전에 주님은 여자와 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적 기준으로 따지면, 아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측면에서도 분명히 이 청년이 그들보다 더 의인이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오히려 가장 천대 받는 아이를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자로 올려 주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길이요 진리이자 영생이신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 보고도, 그것도 주님이 당신을 따르라고 천국 문을 활짝 열었음에도 자기를 낮추지 못했기에 세상으로 돌아갔다.

 

구원받았다는 의미

 

예수님은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분만 선하다고 하셨다. 인간에게서 온전한 선을 기대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도 인간은 철두철미 죄에 찌든 추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한다. 이런 진술들이 인간을 완전히 깎아내려 무시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로운 청년조차 지키지 못했던 전 재산을 팔라는 계명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면 하나님은 거의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기 싫어한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그와 정반대다. “너희가 그럴 수 없음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특별히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종교적 규정에 묶여서 제대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다 당신께 나오라.”는 것이다. 당신의 긍휼과 사랑만이 인생을 채울 수 있는 참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 어리석고도 완악한 인간들의 죄를, 그것도 당신의 원수의 몫까지도 십자가에 다 감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참 인간답게 만들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보람을 찾으며, 자신의 존재에 안식과 평강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품 안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어그스틴이 고백한 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결코 그 영혼에 진정한 안식이 생길 수 없다.

 

이 청년은 재산이 많아서 다 팔아 빈털터리가 되면 걱정거리가 많아지리라 염려했다. 오히려 다 팔아 거지가 되더라도 하나님의 참 사랑 안에 들어가야만 근심이 없어진다는 진리를 몰랐다. 대신에 계명을 지켜서, 남들보다 앞서 영생을 얻을 생각만 했다. 전 재산과 자식을 일시에 앗긴 욥도 결국에는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다”고 실토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겸손하게 낮아진 후에 모든 고통을 해결 받았다. 청년도 감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계명이 있음도 몰랐던 제가 너무나 어리석었으니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님 앞에 무릎 꿇었어야 했다.

 

인간이 하나님 외에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고, 거기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모르는 고아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그 인생이 갈급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불신자들의 삶이 허망한 까닭이 신자들보다 죄를 많이 짓거나 재물의 탐욕이 더 강해서가 아니다. 자신들은 이 우주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인식의 틀을 깨지 못해서다. 자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자의 삶이 충만한 까닭도 죄를 덜 짓고 선행을 많이 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도덕적 의를 행하거나 종교적 열심을 내어 감정적 충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우연히 이 땅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고 강한 손으로 붙들려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자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고 또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려고 태초부터 예정하고 택하시어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 안고 계신다. 그리고 반드시 그 계획하고 뜻하신 영광의 자리에 신자를 그분께서 이끄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신자에게 영적 결핍이 해소된 것이다.

 

전 재산을 팔아야만 예수님을 좇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래야만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제자와 신자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신자가 예수님을 좇는 제자다. 본문은 참 제자도 이자 참 신자 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 그 길은 전 재산이 없어지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은 단 1센트도 줄지 않음을 확신하고 어떤 어려움에도 근심하지 않고 요동치 않는 것이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부닥쳐도 그 안에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와 권능이 풍성히 숨겨져 있음을 아는 것이다. 또 그래서 모든 고통과 이해되지 않음 등이 합력하여서 반드시 선을 이루심을 믿고 주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얻었고 구원받은 증거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뿌리를 즉,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정말로 진실하면서도 객관적 합리적으로 겸손하게 추구하다 보면 반드시 그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외아들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 밖에선 인간이 참 안식을 결코 찾을 수 없다.

 

본문은 예수님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당신을 좇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가장 먼저 아무리 크고 많은 선행이라도 하나님의 합격점수에 들 수 없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또 바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모든 영적인 갈증은 사라지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삶에서 매순간 실제로 맛보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박   신 목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