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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손 그건 아니다.(44)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1. 30. 14:02

삼손 그건 아니다.(44)

성경: 사사기16:21-31


삼손은 작은 태양이란 뜻입니다. 그는 이름대로 이스라엘의 빛이었고, 힘으로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용사입니다.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때는 블레셋이 40년 동안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구하시려고 삼손을 나실인으로 보냈습니다.(6:1-8) 나실인은 독주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하나님께 바친 사람입니다. 삼손 외에 사무엘과 세례 요한도 그렇습니다. 삼손은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반대와 나실인으로 잘못되는 이방인인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실패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들을 사랑합니다. 첫 번째의 아내의 변심과 그 뒤 기생을 취한 일 그리고 블레셋 여인 드릴라를 사랑한 그는 비극적인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사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블레셋은 드릴라를 매수하여서, 삼손의 머리는 잘라지고, 능력은 떠났습니다. 그는 밧줄에 묶이고, 두 눈이 뽑히고, 옥중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그 후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 할 때,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의 축제일에 삼손을 불러냅니다. 그리고 구경거리로 삼습니다. 그때 삼손은 마지막 기도요. 소원을 여호와께 드립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죽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집을 버틴 기둥을 양손으로 잡고, 몸을 앞으로 숙일 집이 무너지고, 그곳에 있던 모든 방백과 온 백성과 함께 최후를 맞이합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함께 죽은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기록합니다. 삼손의 힘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힘 때문에 살았고, 또 힘 때문에 죽었습니다.

 

힘이란 과학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말하고, 사회학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돈일 때는 재력(財力)이고, 벼슬일 경우에는 권력(勸力)이며, 지식일 때는 실력(實力), 육체적인 것은 체력(體力), 숫자일 때는 세력(勢力), 아름다움 일 때는 매력(魅力), 영적인 것일 때는 영력(靈力)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노력합니다. 힘은 좋은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것은 힘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오늘 삼손은 그 힘으로 20년 동안 자기민족을 지켰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힘 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에게 힘은 행복과 불행 두 가지를 동시에 주었습니다.

 

1. 절제가 없었다.- 삼손 그것은 아니다.-

사람이 힘이 있다고 막 쓰기 시작하면 반드시 종말이 반드시 옵니다. 삼손의 부모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삼손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을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깨끗하고 정결하게 키웁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점점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의논하지 않고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결정합니다. 부모가 말하자, 자기가 좋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사자를 찢어 죽인 일이나, 그 몸에서 나온 꿀의 비밀을 아내 될 여자에게는 말하면서도 부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성장 했었을 때 모습입니다.

 

우리는 삼손을 통해서 하나님도, 부모도 무시하는 무절제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부모들이 자식을 온 정성을 다하여 키우면 잘될 것이다. 효자가 될 것이다. 성공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일 뿐입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펄펄 피가 끓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하였고, 비참하게 죽었을 때는 부모가 장례를 치르게 한 불효자식입니다.

 

오늘 날도 잘 믿는 다는 가정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식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교회도 안 오려고 합니다. 오더라도 형식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런 자식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면 오고 안와도 그냥 둡니다. 그것뿐입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섬깁니다.


온 정성을 다 바칩니다. 이것은 제사장 엘리가 두 아들의 죄를 금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 가문은 심판을 받았고, 그의 가계는 몰락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대단하고 잘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는 삼손의 부모들을 봅니다. 이것이 절제 없이 마음대로 산 삼손이 부모에게 준 마지막 고통이라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왜 자식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데도 탄식하지 않습니까.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왜 신앙을 제처 두고 사는데도 두고만 보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사람이 죽는 것, 망하는 것, 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세워야 할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정에 신앙이 있습니까. 예배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이 안 믿는 사람들하고 다른 것이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삼손의 무절제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손 그것은 아니야.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삼손이 없나요, 힘들게 키웠는데, 다해 주었는데,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식들 말입니다. 율법에서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은 사형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자식들은 부모를 사형시키고 있습니다. 또 부모는 신앙 없는 자식들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괴로움도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마노아 부부의 아들 삼손은 거룩함의 상실했습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약하고, 생활을 천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살았습니다. 삼손의 생애를 조사해보면 도무지 절제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시간, , 지식, 젊음을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쓰는 사람은 삼손입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자리와 가정환경이 자기를 괴물로 만든 다고 느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700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 단테입니다. 그는 고리대금업을 하던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운명은 그를 휘몰아쳤습니다. 그것은 정치가로서 그의 꿈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피렌체도 돌아올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추방이 된 것입니다.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통고를 받습니다. 이 유배가 단테에게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깊이 몰입했습니다. 그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숨어있던 감정을 발견합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은 지성(知性)을 인생의 등불로 생각했고, 지성만이 인간의 불행을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단테는 지성이 아니라, 자신의 심연 속에서 일어난 감정인 사랑과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첫 작품을 씁니다. ‘비타 누오바’(Vita Nuova신생)입니다. 그는 그 24단락에서 노래합니다. “나는 내 심장 안에서 잠자고 있는, 사랑으로 충만한 영혼(spirito amoroso)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amore)이 저 멀리서 오는 것을 인식하고 너무 기뻤습니다.” 단테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사랑, 영혼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 것을 표현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신곡에서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각각 야심과 탐욕, 오만을 상징하는 표범과 사자, 암 늑대와 맞닥뜨리는 자신을 상상하며 신곡을 시작합니다. 신곡의 세계는 넓고 깊습니다. 영국의 비평가 엘리엇이, 단테는 인간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신곡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전부를 합한 것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신곡은 베아트리체를 위한 사랑의 헌시이자, 인류를 계몽하려는 지식인의 실천이며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신화를 비롯해서 중세의 기독교 사상과 천문학, 지리학, 예술, 그리고 단테 자신의 자전적 요소들을 아우른 야심작입니다.

    

나는 거룩함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디서 내가 그런 삶을 찾을 수가 있을까. 고전에서, 공부에서, 돈을 모으는데서, 죽도록 일하는 것에서, 사랑하고 또 즐기는 것에서, 아닙니다. 안된다고 이미 솔로몬이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무엇이던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던지 하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복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해오던 대로 하고 쭉 그대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신앙과 또는 불신앙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 신앙은 얼마이고 또는 불신앙은 얼마입니까. 오늘 밤에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가시면 당신은 후회 할 것이 없습니까. 할 것 다하고, 가진 것을 다 쓰고 가시길 바랍니다. 마음먹은 것을 이루고, 감사하며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숨 쉬는 나, 음식을 먹는 나, 음악 소리를 듣는 나, 꽃향기를 맡는 나. 그리고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 그런 나를 관조하며 새로운 나를 꿈꾸기 시작했다. ‘내가 갈망하는 나현재의 나는 딴 사람이었다. 지난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 버렸다. 내가 원하는 삶이나 그 궤적을 찾을 수가 없다. 기억이란 그물을 흘러간 세월에 던졌지만 내가 끌어올린 것들은 이기심과 욕망들뿐이었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나와 그것을 연장하고 있는 현재를 멈추고, 새로운 나, 나만의 나, 내가 간절히 원하는 나를 위해 새 길에 들어서고 싶다.”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유혹에 빠졌다.- 삼손 그것은 아니다.-

삼손은 드릴라라는 블레셋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fell in love with her)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여자에 대해서는 그저 좋아했다’ ‘마음에 들었다(liked her)’였는데, 드릴라에 대해서는 훨씬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드릴라에 대한 삼손의 사랑은 뜨겁고, 맹목적이어서, 나중에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힘의 비밀을 털어 놓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바보 같은 행동은 그 여자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드릴라 는 삼손을 사랑했을까요. 드릴라가 후에 보인 행동을 보면, 사랑한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사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그녀는 돈에 매수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에게 블레셋 지도자들이 대가로 제시한 액수는 어마어마합니다. 결국 드릴라는 삼손의 힘의 비밀을 찾기에 집요합니다. 삼손이 자기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드릴라 는 삼손에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당신의 힘의 비결을 말하지 않느냐”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없느냐.”는 그런 식의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1616절을 보면, 날마다 재촉하는 드릴라를 거부하지 못해서 삼손은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릴라를 거절하자니 사랑이 떠나갈 것 같습니다. 그는 결국 드릴라를 선택합니다. 그는 그 어리석은 선택을 하면서도 즉, 자기 머리를 깎여도 자신에게는 힘이 여전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사의 역할도 하고 사랑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지요.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유혹이요, 불이었습니다. 삼손은 그 사랑의 불에 타서 재가 된 것입니다.

 

힘으로 삼손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귀턱뼈 하나로 천 명을 처리한 사람입니다.(15:16) 가사 성에 기생을 찾아 갔을 때 블레셋 군사들이 포위했습니다. 새벽에 그를 죽이려는 작전입니다.(16:1-3) 그런데 새벽에 성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성문 두 짝을 빼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삼손입니다. 군사들이 기절초풍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를 대적할 것입니까. 부모도 마음대로 못해, 군사들도 못해, 그런데 그런 삼손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지는 것입니다. 쇠줄에 온 꽁꽁 묶이고, 두 눈이 뽑히고, 감옥에서 연자 맷돌을 돌립니다. 머리를 싹둑 잘랐습니다.

 

삼손은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드릴라에게 넘어갔습니다. 그가 내어준 무릎에 그만 녹아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것은 전봇대나 건물이 아닙니다. 돌멩이 하나 잘못 밟아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천사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마귀를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4)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뒤끝은 후회와 눈물이요. 죽음입니다.

 

아들 둘을 가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려 왔는데 그 어머니가 강물을 처다만 볼뿐 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둘째 아들이 또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하며 슬피 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려 왔다가 물었습니다. 왜 첫 번째 아들이 죽었을 때는 울지 않더니 둘째가 죽으니 이렇게 슬퍼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첫째 아들은 해엄을 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죽어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 둘째는 해엄을 잘 치는데 죽었으니 안타까워서 이렇게 슬프게 우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짓고 유혹에 빠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유혹을 받고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러면 안 됩니다. 왜 삼손이 넘어졌습니까. 왜 드릴라의 유혹에 빠졌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설마하고, 함부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맥주한잔인데, 막걸리 한사발인데 설마하고 자동차 핸들을 잡습니다. 그래서 사고가 나고 죽습니다.

 

우리 어머니 위로 둘, 아래로 하나 이모 세분이 계셨는데 큰 이모님이 딸 다섯에 아들하나인데 나하고 한동갑입니다. 어릴 때 동내에서는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별명이 남이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늦게 했습니다. 두 부부가 식당을 차려서 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년이 지났는데 자식도 하나 없는데, 여자가 갑자기 살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나간 것이 아니라. 돈을 전부 해가지고 빗까지 내가고 갔다는 것입니다. 어찌어찌 해서 그 여자를 강원도에서 찾았는데 가보니 남편과 아이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신사라 그냥 돌아 와서 지금도 혼자 살고 있는데 지난 추석에 가니까 임대 주택에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여러분 이런 소설 같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온 것이 아닙니다. 유혹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삼손은 설마 나에게, 이것 하나쯤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말씀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 과일 하나 따 먹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40년을 했는데 그것 지팡이로 반석 두 번 쳤다고 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갈까.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3:25-27)

 

여러분 기도하라고 했는데, 설마 기도하지 않는다는 무슨 일이 있겠어,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사무엘은 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명령을 하시고, 바울은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목사님 아이들 도시락 사서 학교 보내야 합니다. 아직 새벽기도는 안 됩니다. 애가 어려서 떨어지지 않아서 어렵습니다. 일찍 일을 해야 해서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참아 주세요, 라고 하던 여러분들, 아직도 아이들 도시락 사줍니까.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갈판인데 아직도 잠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습니까. 신자가 기도를 하지 않고, 직분자가 새벽 기도도하지 않으면서, 교회부흥을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시면 당장 들을 것 같습니까. 꿈보다 정확하고, 환상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은 이 목사를 통해서 수없이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긴 삼손처럼 되지 마세요. 말씀을 받고 설마하고 불순종한 삼손처럼 되지 마세요.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를 돌아 보세요.

 

3. 기도로 마치다. 삼손 그것은 잘했다.-

세 지도자가 있습니다. 후보 A는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 있고, 점성술을 가지고 결정을 하며, 두 명의 부인이 있었고, 줄 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병 내지 10병의 마티니를 마신 사람입니다. 후보 B 두 번이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적이 있으며, 늘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도 있고, 하루에 꼭 위스키 4분의 1을 마신 사람자입니다. 후보 C 전쟁의 영웅이요. 채식가이며. 담배를 안 피우고, 맥주는 가끔 마시지만 불륜이 없는 사람입니다. 후보 A는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후보 B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습니다.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Adolph Hitler)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과거로만 가지고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는 죄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에 의해서 친일파의 자손이 될 수도 있고, 또 일본의 성자라는 가가와 도요히코는 창녀의 자식을 태어났습니다. 더 비참한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의 마지막은 나의 책임입니다. 삼손이 자신의 삶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많은 부끄러움을 만들어낸 것들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그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마쳤습니다. 이것이 삼손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것으로 명예를 삼아서도 안 됩니다. 지금 어떤가. 끝이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마지막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16:28)

 

그는 더 이상 나에게 기회가 없다. 이것은 마지막이다.’ 삼손은 결국 그렇게 갔습니다. 궁궐이 무너지는 그때 드릴라도 죽었고, 뇌물을 준 방백들도 죽었고, 들 떠있던 그 적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고 우상 신 다곤을 노래하던 것은 죽음의 장승곡이 되었습니다. 삼손을 모욕하고 조롱하던 그들은 무너지는 건물에 다 묻히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기도로서 마지막을 장식하였습니다.(28) 이것이 히브리서에서 삼손을 믿음의 명부에 올린 사건이요. 원인이 됩니다. 수많은 잘못이 있어도 하나님은 이 결정적인 하나를 통해서 그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지막은 어떤 말을 하면서, 어디서 끝날 것 같습니까. (김종선 권사 : 전세금 바치고 죽겠다.)

 

결론

빅토르 유고가 쓴 레미제라블이라는 말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전과자입니다. 그가 데려다 키우는 딸은 고아이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 책은 이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가.”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사람의 과거는 가난하고 불행 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사람이 변하여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주인공 장발장을 비롯하여, 사람이 변화 되는 힘은 사랑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큰 힘을 가진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암시를 소설은 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여기에 기독교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주님의 사랑만이 불쌍한 우리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조영호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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