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

[스크랩] 한국 교회의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전통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0. 30. 18:21

한국 교회의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전통

 

 

이 신학 전통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통한 사회변혁의 기능을 중요시한다. 전덕기, 송창근, 김재준, 김정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김용복 등이 주도해왔다.

 

 

I. 장공(長空) 김재준의 주체적 참여신학

 

1. 생애(1901-1987)와 활동

1) 1901년 11월 6일 함북 경흥에서 태어났다. 서당 훈장인 부친으로부터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3) 1910-1915년 경원 향동소학교, 고건원보통학교, 회형 간이농업학교를 졸업했다.

4) 1915-1917년 회령군청, 1917-1920년 웅기 금융조합 취직했다.

5) 1920-1923년 서울 중동학교 고등과, YMCA 영어전수과에서 공부했다.

6) 1920년 가을 승동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회심했다. 그 때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7) 1923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8) 1923-1926년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9) 1926-1928년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이때 김재준은 기독교사상에 기초한 “교육 왕국”을 세워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논문은 “바르트의 초월론”이었다.

10) 1928-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신학사), 웨스턴신학교(신학석사, 구약전공)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프린스턴에서 메이첸의 강의를 많이 듣고,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고민하는 발악상”을 보았다.

11) 1933-1936년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으로 재직했다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사임하고, 간도의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갔다. 이 때 그가 「순교자 열전」을 저술했다.

12) 1937년 월간 「십자군」 발행했다. 창간사에서 보수신학의 역사 부재성을 비판하고 역사참여를 강조했다.

13) 1940년 4월 조선신학원을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조선신학원 설립보고서”에 따르면, 학교 설립의 목적이 “복음적 신앙에 기(基)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김재준과 조선신학원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근거다.

14) 1945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고, 경동교회를 설립했다.

15) 1953년 4월 장로교총회에서 목사직 파면을 선고받았다. 1954년 한국 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됐다.

16) 1954-1961년 한국신학대학 교수 및 학장 등으로 재직했다. 4ㆍ19의거 때, 학생들이 시청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재준은 그 동안 가지지 못했던, 정권에 항거하는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7) 1970년 「제3일」 발간했다. 70년대는 한일협정과 유신체제에 대항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새 역사는 제3일에 시작된다. 오늘과 내일은 십자가의 길이고 제3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1973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공동의장 역임했다.

18) 1974-1983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이곳에서 「제3일」을 속간했다.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 의장을 지냈다.

19) 1987년 1월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달 27일 87세로 별세했다.

 

2. 신학성향과 목회적 관심

1) 김재준은 선교사들의 교리 중심적 정통주의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한국 교회가 신학적 성찰을 하지 않은 채 선교사들의 신학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것에 대해 도전했다. “한국 교회 50년이 .... ‘한국’ 기독교사냐 하는 데에는 너무 ‘얼’이 없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비판’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주입’과 ‘추종’이 있었을 뿐이다. 교회의 양이 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선교사의 사업 보고에 그 숫자를 늘인 정도요 한국 교회로서의 ‘역사성’이라고 할 만한 ‘성격’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김재준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신정통주의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 사이를 방황하는 구도자였다.”

 

2) 「오버린 전기」 번역

1946년 장공은 신학생들에게 목회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 「오버린 전기」를 번역했다. 프랑스의 개신교 목사인 오버린(1740-1826)은 산간 농촌 교회에서 평생을 목회하며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었다.

 

3. 성서관

1) 목적 영감설

김재준은 성서에 대한 본문비평, 언어비평(저등비평)과 문학비평, 역사비평(고등비평)을 수용하고, 축자영감설을 반박하면서 목적 영감설을 주장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만나 그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대하는 것을 다 얻은 셈이다. 성경이 자기 목적을 어김없이 달성하는데 성경이 틀렸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성서무오설’은 버젓하게 주장되는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신앙의 중심이 살아계시고 인격이신 하나님과 그 독생자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서 기록된 문서로서의 인격 아닌 성경으로 옮겨졌으며, 그 때문에 영의 종교가 책의 종교로, 인격의 종교가 물상의 숭배로, 자유하는 복음의 종교가 노예화하는 율법의 종교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내가 성서 문자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것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무오설을 지지한다: “그러면 이 오류 때문에 ‘성경 무오설’은 무너지고 마는가? 아니다!”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2) 동정녀 번역문제

김재준은 1933년부터 「신학지남」에 논문을 게재했는데, 그 가운데 특별히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1934. 1)가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처녀”라는 말이 “방년의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엘마”를 번역한 것이므로 반드시 동정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3. 교회의 사명과 개혁과제

1) 교회의 역할

김재준은 교회를 “전 우주적 생명의 공동체,”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교회는 “세상과 역사를 평화적으로 변화시킬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상적인 교회상으로 제시한 내용을 보면, 교회는 “세상 정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그 “지역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역사로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고, “평화운동”을 추진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떤 특권층의 소수 인간들로 구성된 기관에 충성”하기보다 민중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며, 학생, 노무자, 실직자들의 울타리가 되고, 성령으로 함께 하여 “좌절없는 희망의 등대”가 되어,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2) 한국 교회의 개혁 대상

(1) 신학하는 태도 개혁: 새로운 신학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2) 교회구조 개혁: 교권주의를 버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힘써야 한다.

(3) 사회관계 개혁: ‘예’ ‘아니오’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강조했지만, 교회가 정당행위를 하거나 기독교정당이 세워지는 것은 반대했다.

 

4. 주체적 참여의 신학

장공의 신학은 단순히 역사의 신학이나 사회의 신학이 아니라 “역사참여의 신학,” “사회참여의 신학”이다.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사참여는 곧 사회참여를 의미했다.

 

1) 역사 이해

장공에 따르면, 역사란 “인간, 그것도 인간이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인격적 결단을 내려서 이루어 가는 행위에 의해서 성립된다.” “역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 산물”이다. “역사는 인간 활동의 총체적 결실”이다.

따라서 역사를 창조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의 인격적 결단”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목표설정과 결단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

 

2) 사회참여의 당위성

(1) 성서적 근거: 창조론과 섭리론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는 필수적이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의 구원사업으로서 역사 개입이며 이 구원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사회참여다.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일하신다. 그런 점에서 김재준은 “영혼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탈역사화를 비판”한다.

 

 

5. 평가

1) 긍정적 평가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 신학에 맞서 싸운 신학자요, 선교사들을 추종하는 교권주의자들에 의한 희생자이며,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정치개혁운동가, 대승적 기독교를 연 선구자 그리고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목회자, 한국의 종교개혁자.”

-김재준은 “역사참여와 사회참여의 신학의 기수”였다. 그리고 그의 역사 참여신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다.

 

2) 부정적 평가

-“‘자유주의 신학자,’ ‘신(新) 신학자,’ ‘성경 파괴자,’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 ‘예수의 기적, 부활, 승천을 믿지 않는 자,’ 심지어 ‘마귀’라고 불릴 정도의 이단자.”

-김재준은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교회의 “제사장적 기능, 목회적 돌봄과 치유, 복음을 통한 개인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성장과 선교” 등에는 소홀했다.

 

 

II. 죽재(竹齋) 서남동의 민중신학: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다”

 

1. 생애(1918-1984)와 활동

1) 1918년 7월 9일 목포 앞 바다 자은도에서 태어났다.

2)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1936년 전주 신흥중고등학교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3) 1937년 일본 동지사대학 문학부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신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시작했다.

4) 1941년 신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서 평양에 있는 요한성경학교 교사로 재직했다가 그 다음 해부터 19년 동안 대구에서 목회를 했다(대구제일교회, 범어교회, 동문교회 등). 이 시기에 그는 함석헌과 김재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5) 1952년 한국신학대학에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6) 1955년 캐나다 토론토대학 빅토리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1957년에는 동 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활동을 했다.

7) 1961년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에 취임했다. 그는 1950년대 틸리히의 실존주의 신학을 지나 60년대에 이르러 본회퍼의 세속화신학, 샤르뎅의 진화론적 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 몰트만의 정치신학, 죌레의 신의 죽음의 신학, 요아킴 플로리스의 성령의 제3시대론 등에 몰두했다.

8)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자연신학, 생태신학, 과학신학 등을 연구했고, 1970년대부터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았다.

9) 1975년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있었던 WCC “신앙과 직제” 회의에 참석한 후 “신학적 회심”을 했다. 그 뒤 김지하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삶과 신학에 획기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다.

10) 1975년 6월 '학원사태'로 해직되어 학교를 떠난 뒤, 그는 “서구의 신학자들이 쓴 신학서적과 교만하기 이를 때 없는 바리새인과도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만나지 못했던 갈릴리 예수를 후미진 골목, 냄새나는 민중의 마을에서” 만났다.

11)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여 함석헌·김대중 등과 함께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22개월). “감옥에서 갈릴리 예수와 22살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생각하고 다짐하면서 민중신학을 구상”했다.

12) 1978년 2월 한국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벽에 걸려 있던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본회퍼, 니버 형제 등 서구 신학자들의 사진을 내리고 대신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13) 1979년 한 해 동안 민중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문, “두 이야기의 합류,” “우리의 부활과 사월혁명,” “恨의 사제,” “恨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소리의 내력” 등을 발표했고, 그 후, “민중(씨알)은 누구인가”(1980),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1982),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1982), “민담의 신학-반신학”(1983), “십자가-부활”(1983), “세계의 생명과 그리스도”(1983), “문화신학-정치신학-민중신학”(1983), “빈곤의 사회학과 빈곤의 신학”(1983) 등을 차례로 내놓았다.

 

2. 토착화된 세속화 신학

서구신학이 구체적 삶의 자리를 도외시하고 사변적 개념의 체계에 갇혀 있어서 구체적인 민중의 한(恨)과 단절되었다고 주장했다. “방내신학”(方內神學)에서 탈출하여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삶을 체험하는 “방외신학”(方外神學)을 할 것을 촉구했다.

 

3. 새로운 성서해석 방법론: 사회경제사 관점에서

예수의 해방은 사회적, 정치적 해방이다. 예수는 당시 민중계층의 한 사람으로서 묵시적 종말사상의 맥락에서 메시아 왕국을 선포하고 민중을 해방시키고,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정치권력과 기성종교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이해했다.

 

예수의 출현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의 선포, 곧 투쟁이었다. 마리아의 찬가(「누가」1:46 이하)에 의하면 예수의 탄생 자체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징표라는 소망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의 종말사상을 비종말론화 함으로써 제도적 교회가 등장했고, 교리와 신학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는 지배자의 종교가 되어 민중을 억압했다: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종교, 공적(公的) 종교, 호국종교가 된다. 새 질서를 갈망하는 눌린 자, 가난한 자, ‘암하레쯔’의 종교에서 승격하여 누르는 자, 부자의 종교가 된다. 이래서 정통 기독교가 성립된 이후로는 서민대중의 종교는 매양 거기에서 벗어나는 소종파(sects)나 때로는 이단(heretics)으로 변모한다. 예수가 무조건 자신을 거기 동일화했던 멸시받는, 가난하고 눌린 대중의 종교는, 곧 예수의 입장은 교회 밖에서 소종파와 이단으로 변모한다.

 

4. 예수와 민중(암 하레쯔)의 동일화

그는 김지하의 작품에 등장하는 천민을 민중 개념으로 수용했다. 여기서 “천민”이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특히 문화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예수가) 죄인, 곧 밑바닥 천민을 일차적으로 구원하러 왔다 했으면 오늘날에도 역시 교회가 종을 울리고 있는 한 천민들 가운데서 복음의 폭발적인 생명력을 획득해야 된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대상이 되는 가장 비참한 천민 자신이 그 구원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선봉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민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저항하고 승리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지금 내려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를 생각해봅니다. 어릴 적에는 구름을 타고, 옆에는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린 채로 찬란한 빛과 웅장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금빛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오시리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신다면 글쎄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서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피로한 우리 엄마에게 바카스를 쥐어주실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시끄러운 우리 공장에서 멍청히 일하는 내 옆에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와서 살짝이 내 일을 도와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터전 내 신앙, 우리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하는 삶, 일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남동은 민중 개념을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로 이해한다. 이 민중은 함석헌의 씨과 비슷하다. 씨은 “존재론적ㆍ우주론적 차원”에서 본 것이고, 민중은 “역사적ㆍ사회적 차원”에서 말한 것이다.

 

5. 기독론의 기초

서남동의 기독론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역사해석에서 출발하여 “기독교 이후의 시대,” “세속화의 시대”를 강조한다. 동시에 “보편사”를 기초로 “현재적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세속화된 오늘의 새 시대 경륜 속에 세속적 그리스도로 현존하신다.” 그는 “착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세속적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형태의 고난과 동일시된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다.

 

6. 전거론(典據論)

이 신학적 전환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전거론이다. 전거란 말은 역사적 사고를 의미하고, 근거는 철학적 내용을 내포할 때 사용된다. 성서 자체는 신학의 규범이 아니라 민중 현실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현재의 성령의 역사를 해석하는 전거로, 곧 참고서로 본다. 다시 말하면 텍스트는 현재의 우리 상황이고, 성서는 컨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성령론적 해석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컨텍스트의 모형에 근거한 성서해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게 별로 타당성이 없다고 보아요. 지금의 성령활동이고, 과거의 것은 하나의 전거(reference)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ㅡ그것이 사회의 문제이든, 국가의 문제이든ㅡ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이 신학하는 것이지, 「바르트의 그리스도론」이나 쓰는 것이 ‘신학’은 아닙니다.

 

 

7. 두 이야기의 합류

“한국의 민중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민중 전통과 한국의 민중 전통이 현재 한국 교회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활동에서 합류되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민중전통(요아킴의 “성령의 제3시대,” 토마스 뮌쳐의 급진종교개혁)과 한국의 민중전통(3ㆍ1운동, 4ㆍ19혁명, 1970년대 인권투쟁)이 한국 교회의 하나님의 선교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8. 하나님 나라와 구원 이해

1)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타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지금 눌린 자들이 상속받고 그 주인공이 될 약속의 새 시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콘스탄틴의 왕권종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신국은 “타계적인 피안”이 되었다.

 

2) 기독교는 두 가지의 상징을 모두 물려받았다. 즉 신국신앙과 메시아 왕국신앙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신앙은 “병립 공존되어서 상호 견제되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하고 바람직하다.” “신국 상징이 메시아 왕국 상징에 의해 삼켜진다면, 사회개혁을 위해서 개인 영혼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생각과 결말이 나올 것이고,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에 의해 삼켜져버린다면, 지상 역사의 미래와는 상관이 없는 타계적 신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기독교의 경우에는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 속에 먹혀버렸던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에서 압도적으로 유력한 상징은 타계적인 신국과 영혼 불멸이었다.”

서남동의 이런 관점은 국가와 교회의 두 왕국사상(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왕국과 세상왕국 사이의 질적 차이를 부정한 것(급진 종교개혁자)이다.

 

3) 서남동은 자력적 구원을 천년왕국신앙과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는 자력적 구원과 타력적 구원을 종합하려는 시도다.

 

자력적 구원이라는 것은 성령감화의 길인데, 성령은 하느님의 내적인 존재양태며 성령의 감화는 내 마음도 생각도 새롭게 하며, 없었던 힘도 생기게 하여 중생시키는 구원임에 대해서, 타력적 구원을 강조하며 대변하는 신학은, 거의 예수의 ‘피’의 대속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며,... 그 대속은 율법적기계적으로나 마법적화학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남동은 자력과 타력을 합한 신학을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반펠라기우스주의 등에서 발견했다. 이것을 그는 “타율이 아닌 자율, 곧 신율”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바울도 칼 바르트도 폴 틸리히도 신(神)-인(人) 협력(co-worker, partnership)의 구원, 틸리히가 새롭게 명명한 신율을 말하고 있다.”

 

9. 부활 이해

1)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했다. 갈릴리는 “예수가 평생 활동하신... 버림받은 민중의 땅이고, 거기 반해서 예루살렘은 지배자의 권좌다.”

 

2) “예수의 부활의 몸, 부활의 실체는 민중으로 구성되리라는 약속이다. 갈릴리 곧 지금 소외된 민중이 종말론적인(혁명적인) 승리의 실체가 되리라는 말이다. 거기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다는 약속이다. 민중이 메시아 왕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약속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짓눌려서 죽은 것 같은 민중이 깨어나 함성을 지르고 머리를 쳐들고 자기 역사의 주체적인 역군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3) “예수의 부활은 살해된 예수의 부활이다. 부활은 살해된 자의 항변이며 한풀이며 침해된 신의 공의의 회복이다. 한이란 억울하게 죽은(죽임을 당한) 자의 혼이며 그 호소다.... 부활은 한풀이다.” “우리의 부활은 사회학적인 것이다.”

 

4) 오늘의 부활의 현장: “이러한 ‘오늘의 부활현장’이 없는 부활신학, 부활신앙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한갓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갈릴리 민중의 부활, 3ㆍ1운동, 4ㆍ19의거, 그리고 한국 교회의 사회선교, 또 전태일의 부활, 평화시장 노동자의 부활로 현장화ㆍ현실화ㆍ구체화되어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된다고 하겠다.”

 

5) “한국 교회의 역사적 경험에서는 부활절은 4월 혁명과 함께 겹친다. 4월은 부활의 달인 동시에 혁명의 달이다. 4월은 억압된 민중이 그 억압을 격파하고 민중이 자기의 주권을 되찾은 부활사건이다. 거기에서 민중은 일체감을 느꼈으며 집단적 엑스타시, 종교체험과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도래할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았다.”

 

10. 민중신학의 주제와 한국 교회의 과제

1)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으로 선언된다.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라기보다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경우에는 예수가 민중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의 구실을 하는 것이지,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의 구실을 민중개념이 하는 것이 아니다(후자가 전통적ㆍ기독론적 신학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성령론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2) 한국 교회의 과제

“나는 여러분에게 ‘한의 사제’가 되라고 권한다. 그리고 ‘소리의 매체’가 될 것을 권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눌린 자, 잃어버린 자, 저주받고 추방당한 자, ‘죄인과 세리들’의 소리의 매체가 될 것을 권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웃의 아픔과 그들의 한에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동정(identity)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 유대교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들이 민족주의적 메시아 대망과 묵시문학적 상상으로 투사된 우주론적 종말신앙 때문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도 그 전통적인 기독론 때문에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11. 평가

1) 김경재: “한국 신학사에 한국적ㆍ민중적 신학 형성의 장을 열어놓으신 분”

 

2) 채희동: “죽재는 그의 신학 3기에 속하는 과학신학 탐구기에 ‘신. 인간, 자연은 유기체적으로 하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은 한생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활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은 한생명신학인 것입니다.”

 

 

III. 심원(心園) 안병무의 성서적 민중신학: “민중 예수론”

 

1. 생애(1922-1996)와 활동

1) 1922년 6월 23일 평남 안주군에서 출생했다. 안병무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삶을 통해 민중의 고단한 삶을 체감했다. 간도 용정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재봉사로 일하다가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안병무는 민족주의와 기독교신앙을 체득했다.

2) 일본 대정대학교 문학부 예과 3년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로 진학하여 1950년 5월 졸업했다(문학사). 이때 일신회를 조직하고 일신교회를 세웠다.

3) 한국전쟁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크게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목숨의 위험을 느끼자 “자루 속에 든 모래알들”처럼 교회를 빠져나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제도교회와 성직자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평생 평신도로 살았다. 그 때 경험은 민중신학을 전개할 때, 그에게 민중 사건의 현장을 교회로 인식하게 했다.

4) 1950년 중앙신학교 창립에 참여하여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야성(野聲)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4) 1953년 평신도교회 설립(향린교회 전신)했다.

5) 1965년 1월 서독 하이델베르크대학 신학부 졸업(신학박사). 이곳에서 불트만과 실존주의 신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중앙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6) 1969년 월간 현존지 창간했다.

7) 1970년-1975년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8)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 설립하고, 「신학사상」을 발간했다. 본격적으로 한국신학을 전개했다.

9) 1975년 6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직되었다(1차). 그 해 8월 17일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등 기독자해직교수와 그 구속자 가족들과 해고된 기자 등이 참여하여 갈릴교회를 설립했다. 이 갈릴리교회는 “'민중교회'의 효시가 됨과 동시에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장”이 된다.

10) 1976년 3월 1일 “3ㆍ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한(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명, 문동환,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서명) “명동사건”으로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한 죄”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1) 1980년 개신교 수녀회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설립했다.

12) 1980년 3월 1차 복직되었다가 그 해 8월에 다시 강제 해직되었고(2차), 또 1984년 7월 2차 복직되었다.

13) 1987년 8월 정년퇴임하고, 한신대학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생명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민중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그래서 “생명의 신학”이다.

14) 1992년 9월 '한국민중신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했다. 한국 민중신학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신학으로서 자리매김시키기 위해 1994년 '한국신학연구소를 “민중신학공동체”로 탈바꿈시키고 재단법인 “아우내” 이사장에 취임했다.

 

2. 민중신학의 개화: 사건의 신학

1) 민중신학의 원경: “그 당시 간도는 마치 예수 당시 팔레스틴의 갈릴래아 같은 이방인의 땅, 민중의 현장이었지요. 민중에 대한 나 자신의 관심은 그러한 뿌리를 가진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신학적으로 개화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2) 민중신학의 전경: 안병무는 전태일의 분신사건을 접하면서, “막연하게 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민중이, 그의 뼈 속 깊이 스며들고, 다시 그의 몸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민중으로 살아왔던 어머니, 선천댁을 청계전 빈민지역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민중 속에서 보았고, 마침내 주체적으로 인간임을 선언한 전태일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3) 민중과 사건: “민중신학은 성서의 재발견과 한국 민중의 재발견이 마주침으로 생겨난 것이다.” “민중신학은 책상에서가 아니라, 고난의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 민중신학은 “말씀의 신학”이 아니라 “사건의 신학”(theology of event)이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사건이다. 말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초에 사건이 있었다.”

 

3. 성서관

1) 성서의 비교리화: “성서 자체가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삶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어떤 하나의 교리적 체계로 단색화시키게 되면 삶의 기록에서 ‘삶’이 쑥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어떤 틀에 가두어 질식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성서와 민중현실의 일치: “나의 전거는 성서뿐이예요. 나는 어느 경우에나 성서의 동의를 꼭 구해요.... 그래서 나는 민중론을 하지 않고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이지요.” 안병무는 “민중현실의 눈으로 성서를 보고 성서의 눈으로 민중현실을 바라본다. 서남동과는 달리 성서와 민중현실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보는 사고가 있는 것이다.”

 

4. 역사적 예수 문제

1) 마가복음 중심: 예수 복음의 진면목을 바울이 아니라 마가에서 찾는다. 바울은 비교적 안정된 헬레니즘 세계에서 활동(50년대)했고, 마가는 민중신학자였다. 마가복음 1장 14절[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을 마가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편집 부분으로 간주한다. 마가복음의 민중(오클로스)은 예수를 무조건 따르며 예수에게 희망을 건 사람들(라오스는 국민 개념)이다.

 

2) 침례 요한과 예수는 혁명가: 갈릴리는 예수의 복음사역에서 정치적 무대를 제공했다. 갈릴리 예수는 민중의 예수요 민중에게 신국을 선포한 자다. 예수의 죽음은 민중의 죽음이고 예수의 부활은 민중의 부활이다.

 

예수의 선언 가운데도 반체제적인 과감한 내용이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 도래 선언이 가장 극단적인 현실 부정적이고, 현 체제 혁명적인 선언이다.

 

혁명적 희망을 갖지 않으면 예수와의 연대 관계가 끊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낙관론에 안주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계가 주는 물질적 편리나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대신할 수 없다.... 아니다. 우리는 궁극적 평화주의자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의 혁명의 노선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이로써 우리는 언제나 기존 세대의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처럼 수난의 길은 항상 전제되어 있다.

 

 

3) 예수가 주체요 민중이 객체가 아니라, “민중의 관점에서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고, 오로지 ‘우리’(Uri)만 있다”고 주장했다. “민중을 뺀 예수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것은 화산맥이 계속 분출하듯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나사렛 예수에게서 단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나는 예수를 민중의 사건, 집단적 사건으로 보고 있어요. 그 사건(예수사건)은 결코 2천년전에 일회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겁니다. 이렇게 보면, 사건의 신학은 아주 자연스럽게 민중의 신학으로 연결됩니다.

 

4) 결국 “민중이 예수”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점에 있어서, 몰트만은 “‘예수가 민중이다’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민중이 예수이다’는 것은 거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안병무는 이 점이 서구 신학자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민중을 모르면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모르면 민중을 모른다.”

 

5. 성문 밖 교회, 성문 밖 그리스도

1)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했다. 성문 안에 있는 교회는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성문 밖으로부터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 이 교회에 창기가 들어갈 수 있소, 거지가 들어갈 수 있소? ... 철저한 이기주의 집단이고 현대의 사교장이 되어버리지 않았소? 이웃을 위한 장소이기보다는 자기보존과 확대를 위한 장소가 되어버렸지.”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교를 모방하였고, 이방 그리스도교회는 희랍적(의회제도 같은) 에클레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제도화해 가면서 그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 여러 조건(교리 등등)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2) 민중교회는 “민중의 고뇌를 같이 고뇌하고 민중과 함께 살고 함께 싸우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공동체, 이것이 참된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지요. 그것이 민중의 교회이구요.” “예수 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의 전락”이 일어났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밥상공동체는 파괴되고 종교의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종교의식 즉 예수의 피와 살을 나눈다는 종교의식만 남고 나눔ㅡ먹음ㅡ배부름-食口됨의 길은 포기해도 좋은 구실이 된 것입니다.”

 

3) 한국 신학과 교회의 과제: “상아탑의 신학”에서 벗어나 “민중현장에서 하는 신학”: “신학은 학문으로서의 신학, 상아탑의 신학에 머무르면 안 되고 민중현장에서 하는 신학, 운동으로서의 신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어떤 모델을 제시해서 제3세계의 그리스도교, 나아가 세계의 그리스도교가 본받을 수 있는 신학운동의 모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귀감을 만드는 일, 이것이 한국 신학과 교회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4) 민중교회의 예배 모델: 부락제와 무당굿

 

가난한 사람들이 일년에 한번씩 부락제를 지내지요. 저들은 집집마다 일정한 돈을 걷어 돼지를 몇 마리 잡아요. 그리고 각 가정마다 하얀 밥을 지어 와요. 동리 대표들이 이것들을 정해진 지점을 제단으로 삼고 전부 진열해놓고 정해진 주문을 외우는 등 제사행위를 해요. 그리고 나서 그 제물들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한 신에게 바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나눔의 모임, 그것은 글자 그대로 ‘하나되는 축제’입니다.

 

또 하나는 샤만, 즉 무당굿입니다. 서남동 교수가 恨의 司祭라는 발상을 했지만 무당들의 주된 역할은 억울한 자들의 恨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 동기야 어쨌든 상관없어요. 무당은 恨맺힌 사람, 그 가족, 마침내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혼신을 쏟아 恨풀이를 하여 그들을 원망이든 복수심이든 슬픔에서 해방시켜요. 그 분위기는 도식화된 기성교회의 예배와 비교가 안 돼요. 나는 여기서도 또 하나의 산 교회의 모델을 봅니다.

 

6. 죄 이해

“기존의 죄 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교회가 정해 놓은 교리를 그대로 믿지 않으면 죄”다. “사탄은 구조악이다.” “예수는 구조악이 없어지면 죄가 없어지고 죄가 없어지면 곧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公의 私有化” “하느님의 것을 사유화 또는 독점하는 것이 바로 죄”다.

 

7. 민중의 구원자 민중

1) 민중이 예수라면 그 민중은 누가 구원하는가?(몰트만) 민중 스스로 구원한다(안병무).

 

2) 물론 이것은 예수가 빠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사건없이는 민중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자기 실현의 장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또 민중 사건에 접하지 않았다면 예수 사건이 민중 사건으로써 하느님 사건이 됐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둘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3) 예수의 부활은 곧 민중의 부활: “오늘 민중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부활사건으로 경험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하는 사람은 현재 여기서 일어나는 부활사건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부활사건이 한국 땅에서 현재 속출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천여 명 이상의 청년 학생들이 투옥되어 있읍니다....”

 

8.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확대

1)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을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서를 보는 나의 시각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등을 종교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아요. 예수사건, 메시야사건은 기독교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나는 민중의 사건을 거대한 하나의 火山脈에 비유하지요. 하나의 화산맥이 여러 시대를 두고 흘러오다가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분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 화산맥이 예수시대에 거대한 활화산으로 터진 사건이 바로 예수사건이다. 이렇게 보고, 그 화산맥이 지금 이 시대에도 면면히 역사의 지각 밑을 흘러가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들도 단절된 독립적 사건들이 아니라, 2천년전의 예수사건과 맥을 같이 하는 사건이라고 보고 있어요.

 

 

2) “그리스도의 이름도 모르고 예수의 이름도 모르는 곳이라도 고난당하는 민중의 현장에는 그리스도가 현존한다.” 안병무는 예수를 자신의 신학의 기점으로서 “엄마”로 인식하고 있음을 고백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부처이다. 부처가 내 안에 있다.’는 동양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내가 신이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이다.’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9. 평가

1) 폴커 퀴스터(하이델베르크대 교수): “예수와 민중을 다시 생각해 보기: 안병무가 남긴 것”에서 안병무는 “독일 신학계가 간과한 민중과 실천을 중심에 놓고 민중에 대한 예수의 무조건적 사랑을 강조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자세야말로 안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이라고 지적했다.

2) 채희동: “학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교육가로서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 보다 문자의 세계, 학문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하셨던 예수를 따라 살다가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한국신학계와 그 후학들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터를 다져 주고, 그래서 그의 온 생명을 한국 민중신학이라는 터 묻히고 돌아 가셨다.”

 

10. 민중신학에 대한 종합평가

1) 김영한: “민중신학은 정통신학이 도외시했던 민족역사의 고난과 그 의미, 민중의 한(恨)과 해방의 경험을 주제화시킨 점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고 있다.... 정통신학이 자칫 빠질 수 있는 개인주의적 신앙태도를 시정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사회적 구조악의 시정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정통신학의 개인위주의 윤리를 시정하도록 경각심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은 예수 복음선포의 중심 메시지인 종교적이고 영적인 우주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사회경제사적인 민중의 나라 도래로 변모시키고 있으며, 성서 내용과 교회사 과정을 사회경제사적인 이데올로기로 비종교화시키고 있다.” 또 “민중신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처형된 사건으로 봄으로써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정치 이데올로기화 하고 있다.” 하지만 “신약성서는 민중을 미화시키지 않을뿐더러 예수와 동일시 하지도 않는다.... /사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우매한 군중, 민중이었다.”

2) 김광식: 민중신학은 “체계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신학적 단상을 엮어 놓은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급진주의신학은 너무나 현세주의적이고 현실의 세속 속에 파묻혀 기독교의 본래적인 복음을 왜곡시키거나 상실할 위험성이 없지 않다.”

“민중신학은 기존의 교회를 비판하는 데는 어느 정도 용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민중적인 삶을 이 땅 위에 구체화하는 선구자가 되는 데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민중신학의 실패는 그 신학의 바탕이 될 만한 기초공동체 혹은 풀뿌리 공동체를 가지고 있지 못한 데 있다.”

3) 채희동(생명문교회 목사): 민중과 민중신학자 사이의 괴리현상을 지적한다. “오늘날의 민중신학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민중은 마을에 있는데 민중신학은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는 꼴이다. 민중은 마을에 남아 가난하고 헐벗으며 고난의 한 가운데 있는데 비해, 민중신학은 강단이라는 산으로 올라가 민중 몰래 자기들만의 언어로 신학을 말한다.”

 

 

IV. 통일신학

 

1. 배경

1) 우리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남북통일이다. 그러므로 통일신학은 진보적 사회참여신학 전통과 연계하여 좀 더 적극적이고도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2) 통일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대표적 인물은 박순경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민중을 포함한 민족 개념을 강조한다: “‘민중’이라는 주제는 한민족 혹은 조선민족이라는 주제에 내포되어 있다.”

 

내가 주장해 온 한국 신학의 주제 한민족 혹은 조선민족은 우리 민족의 역사성 사회성 세계성을 포괄하는 총체적 주제이다. 한민족 혹은 조선민족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 안에서 형성되어 온 역사적 산물이며, 세계와의 관계에서의 세계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개개인은 알든 모르든 그러한 민족총체성을, 민족공동의 죄악과 멍에를 운명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민족의 문제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3) 통일신학 계기: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은 근현대 민족사에서의 항일민족운동과 1945년 이래의 우리민족의 분단상을 극복하려는 통일운동이다.”

박순경은 1956-66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서구신학 전통에 빠져 방황하면서 민족의 문제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곧 우리민족의 항일투쟁과 해방을 연상하곤 했다”고 회고한다.” “나는 풍요로운 미국 땅에서 가난한 우리 민족을 애굽의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동일시하고 울곤 했다. 나는 눈물로써 과거역사를 되살려 낸다고 생각했다.”

 

4) 박순경의 통일신학은 서구신학전통(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수용하면서,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 안에서 새롭게 증언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삼는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서구신학의 번역 신학에 그치고 말 것이며, 현재 사회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빛에서 규명해 낼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신학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통일신학의 주장과 과제

1) 통일신학의 일차적 과제: “한국 교회와 신학의 문제는 서양 특히 미국 자본주의 세력 아래 매여 있다는 점에서 또한 신앙을 주로 심리적 내면성으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구체적인 역사 사회 세계의 문제들을 몰각하고 반역사 반사회적으로 되어 버리곤 한다는 점에서 특히 민족분단의 주역들 즉 미ㆍ일을 비롯한 민족내부의 주역의 문제를 몰각하고 이 주역들을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서 지지해 옴으로써 반민족적으로 동시에 반복음적으로 되어 버렸다는 문제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일이 통일신학의 일차적 과제이다.”

 

2) 한국 신학의 주제와 주체: “한국 신학자가 자신의 민족성과 민족적 여건들을 망각하거나 민족적 문제들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채 신학을 논한다면, 그의 신학은 추상적이고, 우리 민족사회와 무관하고, 우리 민족을 왜곡하거나 반민족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박순경은 60년대 논의되었던 토착화신학 등은 민족사적 문제들과 무관하게 논의되었기 때문에 비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시도들은 동양의 종교문화사상을 민족사적 문제들과 무관하게, 예컨대 분단문제와 통일운동과 무관하게, 또한 반공기독교의 반민족적 상황을 방치하거나 이 상황에 안주하고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민족과 세계의 죄악 아래서, 분단상황 속에서, 민중의 생존권이 모순에 떨어진 사회상황에서, ‘한 멋진 삶’이란 무엇인가?”

 

3) 통일신학의 작업: “통일신학의 작업은 우선 반공기독교에 대한 비판작업이다. 반공기독교는 서양 제국주의ㆍ자본주의적 지배세력과 결부된 서양기독교문명 혹은 기독교선교의 산물이며 민족과 세계분단의 종교적 정신적 요인으로 작용했고 아직도 우리의 분단상황에서 작용한다. 반공기독교는 변혁을 외치는 피억압 민족ㆍ민중의 소리에 역행하여 복음과 신앙을 기득권자 기존체제옹호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다.”

 

4) 통일신학의 목표

(1) “통일신학은 첫째로 한국 교회로 하여금 반공을 넘어서서 민족해방 혹은 민족자주성확립을 위한 민족운동에 동참하도록 하는, 적어도 이러한 민족사의 의의를 긍정하도록 함에 봉사한다.”

(2) “둘째로 통일신학은 이제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저 민족ㆍ민중의 소리와 주제를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와 구원의 빛에서 재해석 재조명하면서 민족과 세계로 하여금 새민족 새세계 창출을 관철해 나가도록 하는 계기를 교회 민족 세계에 제공해야 한다.”

(3) “셋째로 통일신학은 민족으로부터, 세계로부터, 땅으로부터 터져 나온 변혁이론들을 원용해야 한다. 대표적인 변혁이론들로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물론 신학적으로 재조명 재해석되어야 한다.” “통일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을 신학적 주제들 즉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과 같은 주제들에 관련시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3.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 교회의 세 가지 과제

1) 신뢰성 회복

우선 남북한 교회의 신뢰성 회복이 중요하다. 어찌 북한 교회를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에 찬 시선은 이제 그만 접어두어야 한다. 지금 있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뢰성 회복의 문제에서 더 시급한 것은 남한 내부의 신뢰성이다. 남북한 사이의 통일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병행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얽힌 문제들을 풀어낼 의지가 필요하다.

 

2) 북한 선교의 개념 재정립

분단과 전쟁에 대해 역사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동족 간에 얽히고 맺힌 적대감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남한 교회는 더 이상 십자군식의 북한선교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실효성이 있는 요구인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통일한국의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남북 교회의 진정한 대화와 신학적 교류

서로간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분단의 책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분단의 책임을 전적으로 외세의 개입으로 떠넘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외세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서양 기독교의 제국주의나 반공주의에서 분단의 책임을 찾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못하고, 한국 교회가 분열과 다툼으로 일관되어 왔던 지난 역사를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

 

 

V. 종합 평가: 진보적 사회참여신학 전통

 

1. 긍정적 측면

-민족역사와 사회의 문제를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였다.

-예수의 삶의 양태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노동자와 소외된 이웃을 볼 수 있게 했다. 성서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자본주의의 병폐와 반공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

 

2. 부정적 측면

-성경과 신학에서 지나치게 탈교리화 되었다.

-교리를 단순히 권력구조를 영속화하는 수단으로 파악했으며, 기독교의 역사성을 상실하고 결국에는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나갔다(민중신학).

-계급투쟁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문제점이다. 따라서 민중을 지나치게 미화시키고, 참 생명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상대화했으며, 그 결과 성서적 기독교의 종교성을 상실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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