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

[스크랩] 한국 교회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전통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0. 30. 18:11

한국 교회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전통

 

 

이 신학전통은 길선주, 박형룡, 박윤선, 김의환, 한철하, 차영배, 이종성, 박아론, 김명혁, 신복윤 등이 주도했는데, 대체로 청교도적 개혁신학과 (신)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I. 영계(靈溪) 길선주의 부흥운동

 

1. 생애(1869-1935)

1) 1869년 평남 안주군에서 출생했다.

 

2) 부친의 축첩, 사업의 실패, 시대적 혼란 등으로 길선주는 19세부터 염세적 성향을 보이고 종교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3) 1897년(28세), 도우(道友) 심종섭(金鐘燮)의 권유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기독교 서적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다.

 

4) 1897년 8월 15일 장대현교회의 신자로서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장대현교회의 영수(領袖)로 임명되었고, 1901년에는 장로로 피택되었다.

 

5)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07년 김종섭과 그가 전도한 김찬성과 함께 1회로 졸업했다. 한국 장로교의 첫 번째 목사가 되어 장대현교회에서 20년간 목회했다.

 

6) 길선주는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한 심령부흥운동의 불길을 평양에서 드높이는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1909년 시작된 백만인구령운동을 제안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7) 그는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에 전력을 다했다.

 

8) 민족현실에 대해서도 책임의식이 있었다. 1897년 안창호와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했고, 3ㆍ1운동 때 33인 대표로 참여했다.

 

9)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예수학당”을 설립했는데, 후에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로 발전했다.

 

10) 1935년 11월 26일 평서노회의 부흥회 마지막 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2. 신학 성향과 토착화 관심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길선주의 신앙은 근본주의신학에 근거해있다. 천당, 지옥, 원죄, 성경무오 등은 그의 신앙관을 대변하는 주요 단어다.

길선주는 토착화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그는 새벽기도회, 통성기도, 불교와 도교의 전통 계승, 찬송가의 토착화를 위해서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1909년에는 아악(雅樂)을 교회에 도입하기 위해 악사를 초빙하기도 했다. 또한 유교의 경전 연구열은 성경 연구열로 승화되었다.

또 교회직분 가운데 집사직을 이분화해서 안수집사와 서리집사로 구분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비활동인력을 동력화하기 위한 조처”라고 평가되었다.

 

3. 종말론 강조

1904년에 출판된 「해타론」(懈惰論)에서 길선주는 내세의 소망을 전제로 현세의 게으름을 타파하라고 권고했다.

1930년에 완성한 「말세학」(末世學)은 예수 재림의 징조를 예증하는 작품으로서 그의 종말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그는 계시록의 모든 내용과 기록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고, 또 이를 믿도록 역설했다. 이는 그의 설교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부터 급격하게 말세를 강조했는데, “예루살렘 멸망!” “평양 멸망!”을 외치며 그 시대를 “말세지말”(末世之末)로 여겼다. 길선주는 종말신앙을 통해서 내세에 희망을 갖게 하고 현세의 암담한 현실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이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1974년을 재림의 해로 추정하는 문제점을 보이기도 했다.

길선주는 성령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로 하여금 “메시아니즘적 희망”을 일으켜 삼일운동에 한국 교회의 민중들로 하여금 역사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신앙 형태는 묵시록을 중심으로 한 역사발전이었다. 암울한 민족의 절망적 현실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한국 교회의 “신앙지표”로 제시했던 것이다. 김양선은 이렇게 평가했다: “주님의 재림과 세계의 종말을 강조하고 사태의 긴박성을 내세우는 데 중점을 둔 그(길선주)의 부흥운동은 ... 억압과 가난에 눌려서 신음하는 한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4. 평가

길선주는 평생 부흥운동가로 살았다. 그가 설립한 교회수는 60 여개에 달했다. 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종말신앙은 한국 민중에게 “영적인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세론”이며, “보수적 부흥신학으로 민족 현실을 그의 구원론에 수용”하려고 했다. “길선주의 성령강림 신앙부흥운동은 한국 신학의 복음주의 및 영성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한국적 신학을 형성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II. 죽산(竹山) 박형룡: 교의신학에서 청교도적 개혁신학 정립

 

1. 생애(1897-1978)

1) 1897년 평북 벽동군에서 출생하여 어머니의 기독교신앙을 물려받았다.

 

2) 박형룡은 1910년 경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최권능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3) 1920년 숭실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Th.B/ Th.M)하여 1929년 남침례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논문은 귀국 후 완료했다(1932년 학위취득). 프린스턴에서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그레샴 메이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남침례신학대학원에서는 윌리엄 카버, 에드가 멀린스, 찰스 가드너로부터 배운다.

 

4) 1930년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그곳에서 변증학, 신학난제, 기독교윤리 등을 가르쳤다. 1935년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은 한국인에 의해 쓰인 최초의 조직신학저서로 평가를 받는다.

5) 신사참배 문제로 박형룡은 일본을 거쳐 만주로 망명했다. 평양신학교는 1938년 5월 무기휴학에 들어갔다. 그는 평소에 주기철과 함께 강력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하지만 1938년 8월 직전(주기철이 검거된 시점)에 일본으로 피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본신학교 교장 도미타를 따라 일본 신학교 청강생이 되어 일본에 갔고, 그곳에서 「표준성경주석」을 집필했다. 1941년 박형룡은 다시 만주 봉천의 만주신학원으로 가서 가르쳤다. 박형룡은 교장 정상인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부임했다고 하지만, 그가 만주에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6) 해방 후 박형룡은 교회재건에 앞장서면서, 신사참배에 동참한 한국 교회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자숙해야 한다고 했다. 1945년 11월 14일 평북 선천군 월곡교회에서 열린 “신사참배 통회자복 금식기도 수양대회” 때, 교역자들이 자책하는 의미에서 2개월간 교역에서 물러나 회개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수양대회를 주도하던 홍택기 등 다수의 목사들은 공적 회개를 반대하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반대했다.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했던 전력 때문에 더 강하게 회개운동을 이끌어가기 어려웠다.

 

7) 1947년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1948년 장로회신학교 개교를 위해 서울로 옮겼다. 다음 해 장로교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되었다. 총회 입장에서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모두 운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두 신학교를 통합하려했다. 통합한 뒤에 자유주의 신학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통합은 결렬되었다. 그러자 1953년 4월 제38차 총회는 김재준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신학교는 총회에서 탈퇴해 기독교장로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해 9월 박형룡은 총회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1953-1958).

 

8) 박형룡은 총신대학교 12대 교장으로 다시 부임했다(1969-1971). 박형룡은 자신을 내몰았던 신복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총회에서 그들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했다. 그러나 1971년 총회는 오히려 박형룡을 의원면직했고 박형룡의 추종자들은 10년 동안 소수파로 전락했다. 결국 1979년 박형룡을 지지하던 소수파는 합동보수라는 이름으로 분립했다. 박형룡이 소천한(1978. 10) 직후였다.

 

2. 유교적 교육이 끼친 영향

1)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 -「교의신학」 첫머리에서 “이 책은 역시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에 지나지 못한다.... 필자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파 정통신학(正統神學)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팔십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해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

 

2) 정통과 이단을 철저히 구분: “박형룡은 ‘다원성’(多元性)을 인정하지 않고 이분법적 사고로 신앙과 신학에 접근했다.”

 

3) 유교적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3ㆍ1운동 적극 가담, 1920년 목포 설화 사건. 설교 제목: “천(天)의 검(劍),” 본문: 에스겔 33: 6. 요지: 우리 민족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다.

 

3. 신학 배경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불렸고, “한국 보수주의적 정통 신학의 보루”라는 별명을 가진다. 찰스 핫지로부터 청교도적인 신학사상을, B. B. 워필드로부터 개혁주의신학을 배워 정통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교의신학」(전7권)은 핫지와 워필드의 신학을 배경으로,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근간으로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교도적 개혁신학이란 “구주대륙의 칼빈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을 의미한다.

하지만 박형룡은 벌코프가 가지고 있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그의 개혁주의적 성찰은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벌코프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문화변혁을 추구하는 신칼빈주의 전통을 수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형룡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이기보다는 미국적 의미의 근본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특성을 지닌 ‘정통주의’ 신학자로서 근본주의에 가깝다.

 

4. 신학 성향과 태도

초기 박형룡에 보여주었던 철학적 태도는 인간 이성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상식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신빙성을 논할 때는 성령의 증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기적에 의한 증거, 예언에 의한 증거 등의 외적 증거와 성경 도덕의 우월성에 의한 논증과 같은 내적 증거에 의존했다. 그러나 한국에 귀국한 이후 박형룡의 신학적 태도는 급변한다. 그는 한국교회사를 통해 볼 때, 그의 신학은 온건한 근본주의자에서 극단적 근본주의자로 변모해갔다.

박형룡의 사고체계는 이분법적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근본주의사상과 다르면 모두 다 자유주의 사상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도 박형룡에게는 신자유주의에 불과한 것일 뿐, 정통주의나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고 속에는 “보수주의=복음주의=근본주의=칼빈주의=정통주의”와 “자유주의=사회복음주의=공산주의=이단”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밖에 없었다.

박형룡에게 언제나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한국 교회를 자유주의신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신사참배를 했든 하지 않았던 결과적으로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가 초기에 신사참배를 비난한 것도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것이었고, 나중에 신사참배를 문제 삼지 않은 것도 자유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복음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것이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박형룡이 볼 때,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를 혹평하고, 과학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하며, 사회복음운동을 받아들였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포용적이다.

 

5. 성서 해석과 진화론 문제

박형룡은 초기에는 성서해석의 유연성을 보여주었지만, 나중에는 문자적 해석을 고수하며 근본주의적 배타성을 드러냈다. 그는 여러 차례 기계적 영감설, 직관적 영감설, 역동적 영감설을 비판하고, 유기적(organic) 영감과 완전축자 영감설(verbal plenary inspiration)을 주장했다. “하나님이 성경저자들을 기계적 방식으로(필기자가 붓을 임으로 두르듯이) 사용치 않으셨고, 기록시키려는 단어들을 그들의 귀에 불어넣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의 내면적 실유(實有)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동작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프린스턴의 성경관인 유기적 영감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박형룡은 성경의 문자적 무오와 기계적 영감을, 김재준은 성경의 실존적 해석과 사상영감을 주장한 것으로 한국 교회는 이해했다

초기 박형룡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인정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창세기의 하루를 한 시대로 인정, 노아 홍수도 국지적 사건일 가능성 인정. 1천년 가까이 산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명일 수 있다. 과학과 종교는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근대기독교신학난제선평」(1935)에서는 유신진화론을 반대했다. 불과 학위를 취득한지 불과 2년 만의 일이다. 그는 창조과학을 수용하고 모든 형태의 진화론 비판했다. 1970년대 전후해서 신복음주의를 비판할 때는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명령의 말씀으로 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진화론을 끌어다가 창조 기간을 수백만 년으로 늘려놓고도 성경과 배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니! 이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6. 타종교에 대한 태도

초기에는 타종교에도 진리의 일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교의 높은 윤리를 인정했지만, 그것을 완성한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보았다. 이 입장은 1950년대 말 에큐메니칼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기 전까지 견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성취설적 입장은 점차 배타적인 태도로 변했다. 그는 타종교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기독교의 이교(異敎)에 대한 적정(適正)한 관계는 타협(妥協)이 아니라 정복(征服)이다.”

타종교에 대한 박형룡의 배타적 “정복 모델”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작용해 한국 교회가 토착화를 논의하는 데 크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 침례교 등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드리워졌다. 그는 토착화신학이 “기독교 사상의 혼란을 일으키며 또 교인들의 신앙을 동요케 하는 폐해를 가져올” 뿐이라며 반대했다. 교회당을 토착적으로 짓고 찬송가를 전래의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등의 문화적인 토착화도 불필요하다고 했다.

 

7. 사회참여 문제

초기에는 사회문제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했으나(남침례교의 영향), 후기에는 신복음주의를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극단적으로 반대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사회참여는 사회복음에 기초한 것이고,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반대한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행진도 인종문제 선동으로 간주하고 반대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을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고 “공산주의를 돕는 사람이요, 비폭력이라는 미명 하에 폭동과 방화를 충동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사회참여에 대한 이런 반감으로 박형룡은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이 전개될 때 침묵함으로써 “권력의 그늘 아래 안식”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리어 그는 민주화에 대한 김재준의 참여를 부당한 정치참여로 간주했다.

 

8. 평가

1) 보수신학 수호: 자유주의사상이 한국 교회에 확산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아선 보수주의 신학(영미 청교도 개혁신학)의 대부였다. 그의 삶은 “근대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를 확립하고 이를 수호하려 한 인생”이었다.

-김정준: “박형룡 막사는 한국 보수주의 계통의 교회와 신학 형성, 그리고 그 지로(指路)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교파적인 관점을 떠나서 한국 신학사라고 하는 차원에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봉우리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 없다.”

 

2) 배타적 이분법적 사고: 박형룡은 한국 교회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이분구도로 분열되는 데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던 인물이다. 특히 박형룡의 배타적인 이분법적 사고는 한국 장로교가 분열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박형룡의 근본주의적 성서관과 배타성은 한 교단 안에서 자신과 다른 입장의 신학사상을 용납하지 못했고, 도리어 그들을 축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러나 그가 한 일은 결국 서구 기독교 근본주의 체계와 용어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재단한 것이었다. “박형룡의 이런 방법은 후일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미국 기독교의 시각에서 분석ㆍ해석하게 했고, 미국 교회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을 통해 분열한 것처럼 한국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3) 반공이데올로기 주창: 박형룡은 한국 교회에 반공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인 인물이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세 번째 분열하게 된 배경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있었다. 박형룡은 1953년 한국복음주의협회(NAE)를 조직하는 데 중추적 인물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반대하거나 경계하던 박형룡이 급격하게 강력한 태도로 반대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제43차 총회부터였다. 총회 직전에 박형룡은 3천만 환 불법전용사건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그 사건을 빌미로 NAE와 박형룡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박형룡은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한국 교회에 반공주의가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형룡은 보수적 단체인 NAE가 용공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하고 반대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다.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은 철저한 근본주의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 교회일치를 반대하는 분리주의적 성향의 교회관 등은 그의 신학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물론 한국 교회의 정통 신학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그의 공로로 인정하기도 하지만, 그가 내세운 정통 신학이 과연 어떤 의미의 정통신학인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III. 정암(正岩) 박윤선: 성경주석학에서 개혁신학 정립

 

1. 생애(1905-1988)

1) 평북 철산에서 빈농가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고, 9세 때 사서삼경의 본문과 주해까지 암송할 정도로 총명했다.

 

2) 고학으로 신성중학교를 마쳤다. 이 때 그의 별명은 “5분.” 이 학교에서 길선주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3) 1927년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 시절 정암은 전도대를 이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는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4)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헬라어, 히브리어,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성서 과목에 흥미가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훈련 받지는 못했다. 그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성경신학”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5) 1934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했다. 이 신학교는 1920년대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신학으로 기울자 윌슨(R. D. Wilson), 메이첸(J. G. Machen) 등이 칼빈주의를 기초로 세운 학교였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정암은 칼빈주의 신앙을 통해 신앙의 본질과 사명을 확신하게 되었고,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권위를 절대적으로 믿는 철저한 근본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자로 변모”했다. 1936년 잠시 귀국해서 성서주석에 참여하다가 1938년 다시 유학했다(반틸 밑에서 고대어와 변증학을 연구). “한국의 반틸”

 

6) 1941년 봉천 지역의 만주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신사참배 강요에 못 이겨 교수생활을 그만 두고 주석사업에 주력했다(한 번의 신사참배 고백).

 

7) 해방 후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다(1946-1960). 1953년 10월 화란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6개월 유학했다(아내의 교통사고 사망을 계기로).

 

8) 1960년 성수주일에 대한 의견 차이로 고려신학교를 떠나 이듬해 서울 충정로에 있는 동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했다.

 

9) 1963년 총회신학교(총신대 전신)로 초빙되었다가 1974년 정년 은퇴했다. 1974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는 미국에서 성서주석에 몰두했다.

 

10) 1979년 2월-11월 총신대 대학원장으로 사역했고, 이듬해부터 1988년까지 김명혁, 신복윤, 윤영탁 등과 함께 합동신학교를 설립하고 사역했다.

 

2. 성경의 사람

박윤선은 개혁주의적 성서관에 입각해서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그래서 그가 평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사역은 주석집필, 신학교육, 목회사역이었다.

특히 신학자로서 성서를 주석하는 작업은 그의 필생의 과제였다. 그 결과, 그는 성경 전권을 주석했다. “한국인으로서 단독으로 성서 전체를 완전 주석하여 집필 간행했다는 것은 선교 100년의 짧은 역사에서 본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성경신학” 혹은 “주경신학”이라 불린다.

 

3. 성서관과 신학적 배경

1)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관 반대: 그는 역사비평적 해석을 거부하고 성경에 의한 성경해석과 문법적인 역사적 해석을 강조했다. 또 성령의 내적 증언과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성을 주장했다.

 

2) 개혁주의 원리로 성서 해석: 박윤선은 “성경은 성경으로야 해석된다는 개혁주의의 원리를, 우리는 그대로 믿는다”고 천명했다.

 

나의 교수 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불타는 가슴으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한 것은 칼빈주의 신학이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 신학이야말로 성경을 그대로 믿는 말씀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박윤선은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 교회에 최초로 소개한 학자가 되었다. 박형룡이 미국 구프린스턴 신학을 한국에 이식한 신학자였다면, 박윤선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적극 수용한 학자였다.

 

4.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1) 한국 교회의 문제점 지적: (1) 한국 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아니고, 간증과 예화 중심이다. (2) 한국 교회는 세상 도피적 경향을 가진다. 그래서 교회와 사회는 유리되어 있다. 칼빈주의 정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현실과 사회정치면에서 찾아야 한다. (3)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하나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도처에서 나타났다.

 

2) 박윤선 설교의 특징: (1) 성서원전의 의미를 천착한다. (2) 강해설교를 강조했다. (3) 변증적 성격이 강하다. 그는 바르트신학을 비판하고 개혁신앙의 변증했는데, 그것이 설교 속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설교는 교리적 명료성을 지닌 신학적 설교였다.

하지만 박윤선의 설교에는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 암울한 역사의 현실을 경험했으나 인권, 사회정의, 정치적 민주화, 경제정의, 국가에 대한 책임 등의 문제, 곧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무관심했다.... 그의 설교에서 예언자적 선포를 발견할 수 없다.”

3) 성경 전권 주석: 성경 66권을 칼빈주의 입장에서 주석함으로써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5. 평가

1) 김광식: 박형룡의 경우처럼, 박윤선도 “외국의 보수주의신학을 우리말로 옮겨놓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주장을 내세운 것은 아니고 선교사들의 신학을 전수시킨 것뿐이라 하겠다.”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주의신학은 과거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2) 한숭홍: “그는 상황신학을 거부하며 항상 1930년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풍, 곧 메이첸식 신학 이념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신학하였다.” “정암은 한국 기독교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올바른 암석이며, 칼빈주의가 토착할 수 있는 자리”다.

 

3) 김영한: “현실을 복음으로 변혁시키는 적극적 현실 변혁의 태도가 결여.”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정통신학은 근본주의적이었다.”

 

 

IV. 종합 평가

 

1. 긍정적 측면

-수직적 관계 중시

-영적 측면 강조

-개인 경건

-교회 양적 성장

 

 

2. 부정적 측면

-수평적 관계 소홀

-사회문제 관심 결여

-권위주의, 획일화(정통 이단 논쟁)

-토착화 무관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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