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

[스크랩] 초대교회사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2. 21. 11:23

기독교의 전파와 박해

1. 기독교의 전파

 

그리스도교 (Christianity)

1세기에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성령강림절)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리스도교의 형성과 사도들의 전도

하느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神的)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형성과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 ·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로마가톨릭교회 (Roman Catholic Church)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 ·인종 ·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이 명칭은 그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역사

가톨릭교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해 창립되어,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다. 예수는 제자 중에서 12명을 선정하여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그에게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부여하였다(마태 16:18∼19).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 제자들은 성령(聖靈)에 의해 신앙이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사도의 장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로마에 사도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자와 순수한 그리스도교도가 있어 이들 사이에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할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열고 그리스도교도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을 강화해갔으나 전부터 로마제국에 있었던 이교(異敎)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그노시스 ·몬타누스 ·마르키온 및 마니교(摩尼敎) 등의 이단(異端)이 생겼다. 이 이단에 대항하여 교부(敎父)라 불리는 뛰어난 교회사상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클레멘스, 오리게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교에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하였으며, 4세기 말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배척하였다. 한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중요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교의를 명확하게 확정지었다. 중세에 이르러 처음 로마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는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로마가톨릭은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마침내 ‘보름스 협약’에서 서임권을 획득하고 교권을 확립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는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며, 안으로는 학문과 문화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교회는 차차 세속주의에 빠져들었고, 교회 지도자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의 계속으로 분열을 일으켜 대립교황(對立敎皇)이 출현하였다.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고 M.루터의 등장으로 결정적 단계를 맞게 되어 가톨릭교가 분리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회 등의 신수도회에 의한 쇄신운동을 진행시켜 교회는 점차 새로운 힘을 회복시켜 해외 선교활동 등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통일이 붕괴되면서 근대국가가 탄생하여 주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자 가톨릭교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어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는 전쟁과 박해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인종 ·국적 ·종교의 차별없이 원조하였고, 전후에는 평화 확립에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제2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 등 뛰어난 교의를 선언하였다.

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사도시대부터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 ·동유럽 ·러시아 방면으로 발전하여 분포되고 오리엔트의 헬라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 ·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 ·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2. 박해

 

그리스도교도박해 (persecution of Christians)

주로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 정신적, 특히 육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가하는 탄압. 그리스도교는 그 유일절대신관(唯一絶對神觀)의 고수와 타종교에 대한 비타협적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권력에 의하여 탄압과 박해를 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그리스도교도 박해가 행하여진 것은 고대 로마제국에서이다. 그리스도교는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이유로 같은 동포인 유대인에게 미움을 사,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제소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수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시대, 사도 바울로의 이방(異邦)전도의 행정(行程)에서 그를 박해한 것은 주로 유대인이었고, 로마정부는 이것을 유대인 내부의 종파(宗派)싸움으로 여겨 관여하기를 꺼리고, 때로는 바울로를 유대인의 박해의 손길로부터 구출해낸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차차 유대인의 민족적 기반을 떠나 세계종교로서 발전하기에 이르면서 로마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로마정부는 대체로 외래종교에는 관대하였는데, 거기에는 로마의 국가 제의(祭儀), 특히 황제예배의 인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똑같은 일신교(一神敎)인 유대교는 전적으로 민족종교였으므로 황제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원칙적으로 용인되어 있었으나, 세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이같은 예외 조치가 인정되지 않았다.

1세기말 도미티아누스황제 치하에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로마와 소아시아에서의 박해가 잘 알려졌는데, 특히 소아시아의 경우 황제예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사실이 신약성서 《요한의 묵시록》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현제시대(五賢帝時代:96∼180)에는 제국(帝國) 전반에 걸쳐 교도 박해가 심하지 않아 관헌들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도를 탐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교에 적의를 품은 민중의 소란이나 개별적 밀고에 의한 경우가 많았고, 배교(背敎)의사를 표명한 사람은 석방하였다. 그러나 스토아 철인(哲人)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도를 가혹하게 학대하여 이 무렵부터 순교자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의 뿌린 피는 씨앗’이 되어 새로운 신자의 수효도 늘어났다.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재판 책임자는 로마시(市)에서는 도장관(都長官), 속주(屬州)에서는 총독이었다. 재판 형식은 단순한 형사재판으로 보는 설과, 반역재판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처벌은 신분이 낮은 사람은 화형(火刑) ·십자가형 ·맹수와의 격투형 ·광산노동형, 신분이 높은 사람은 참수형(斬首刑)이나 유형(流刑)에 처하였으며, 처녀는 사창가(私娼家)에 넘겨지기도 하였다.

3세기 전반의 세웰스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완화되어 궁정 안에서도 교도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3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의 발전과는 반대로 로마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국력 재건의 기초로서 로마의 신(神)들에 대한 예배를 강화하였다. 따라서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두 황제에 의하여 종래의 국지적(局地的) ·우발적 박해와는 달리 뚜렷한 의도에 의한 제국(帝國) 전체에 걸친 조직적인 박해가 단행되었다. 이 박해로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를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교회 건물과 토지도 몰수당하였으며, 따라서 배교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 후 261년 가리에누스 황제 시대 이후 약 4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묵인되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말년인 303년부터 최후이자 최대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박멸의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고, 305년 황제의 퇴위 무렵부터 차차 박해가 완화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리키니우스 두 황제의 밀라노 칙령(勅令) 발포(發布), 나아가서 32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제국(全帝國)을 독재하에 두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공인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박해도 종결되었다. 로마제국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를 기록한 사서(史書)로는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유명하고, 근대의 문학작품에는 폴란드의 H.시엔키예비치의 《쿠오바디스》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비롯하여 순교자를 대상으로 한 미술작품인 성화도 많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역사도 두드러진다.

한국의 그리스도교(가톨릭)는 조선 중기에 한국에 전래되어 천주교(天主敎)라 불리었는데, 이 새로운 종교의 윤리사상은 오랫동안 유학(儒學)에 지배되어 오던 기존의 가치관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의 유신(儒臣)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우리의 충효(忠孝)사상에 어긋나고 군신(君臣)의 도(道)를 어지럽게 하여 사회윤리를 파괴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1791년(정조 15)에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에 신유사옥(辛酉邪獄:신유박해)을 일으켜 대대적으로 천주교도를 박해하였다. 신유사옥은 천주교 전래 이후 최대의 박해로서, 천주교도 색출방법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시행되었고, 순교자의 수가 300명을 넘었다. 그 뒤로도 박해는 계속되어, 1839년(헌종 5)에는 다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때는 당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외세와의 대항이라는 정치정세와 관련하여 천주교도 박해가 더욱 심해져서, 1866년(고종 3)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비롯한 천주교인 수천 명이 학살된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가 있었다. 그러다가 1882년(고종 19)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는 끝이 났다. 그 후 1886년(고종 23) 프랑스와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천주교는 완전히 신교(信敎)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박해의역사 : 기독교 10대 박해 A.D 70-160

 

폴리갑 사도 요한의 제자.

익나티우스가 110년경 로마로 가는 길에 서머나 교회에서 폴리갑의 다뜻한 영접을 받았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은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은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지방 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 "

하드리안 (Hadrian) 박해 (76-138) 117년 황제 오름

예루살렘을 멸망 시킨 디도 장군의 아들이다. 하드리안은 예루살렘 이름을 "앨리아 카피톨리나" 바꾼 자이다.

원인 = 그리스도인을 증오

내용 = 국경일에 황제에게 예배 강요 성묘에 여신상을 세우게 하였다. (심한 박해는 없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박해 (121-180) 161년 황제 오름

원인 = 야만족들의 침략과 홍수와 전염병과 기아 자연 재해들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자 이것은 기독교 신자들 때문이라고 하였다

내용 = 177년 프랑스 리용에서 박해가 심했다

순교 = 폴리갑 순교.

또 이때 순교한 자들은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기가 있다. 펠리시타스는 특별회 교회에 의해 구별된 과부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해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두리라" 이에 총독은 그들을 마르쿠스에게 보냈으며 마르쿠스는 이들을 각각 다른 구역에서 처형시켰다. 저스틴 마터도 이때 죽었다. 당시 기독교 학자로 유명하였다. 쌍투스 라는 소년은 갖은 악형 하에서도 단지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 계속 이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신자들 몇 명이 용기를 얻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자의 최후를 맞았다. 3세기에 와서 교회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던 새로운 정책들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을 발안하고 수행했던 황제들은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데시우스였다.

셉티무스 세베루스 (Septimus Severus) 박해 (A.D 193-211)

원인 = 종교 혼합 정책을 실시하였다.

내용 = 태양 신에게 예배하도록 강요.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신들을 하용할 생각이었다.

순교 = 이레니우스, 오리겐 부친 순교 퍼페투아, 펠리시타스, 레보카투스, 세터니누스, 세쿤두르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두 집단이 있었다.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었다. 세베루스는 이 두 종교들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기독교나 유대교에 개종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당시까지 시행되고 있던 트라잔의 법령에 추가되어 수행되었다.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해졌던 서기 202년은 기독교 박해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그 당시 가장 유명한 순교자들은 203년경에 죽은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 이다. 퍼페투아는 어린 아이를 가지고 있던 상류층 여인이었다. 펠리시타스는 그의 하녀이다.

펠리시타스는 당시 임신을 하고 있어서 혹시 순교를 하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팔개월 만에 아이를 낳고 순교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간수들은 그녀에게 "해산의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 원형 경기장의 짐승들을 대항할 수 있겠느냐 ?"고 물었다 그 때 그녀는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수들 에게 대항할 때에는 또 다른 이가 내 가운데 역사 하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내 대신 또한 고통을 받으실 것이 틀림없다 " 라고햇다.

막시민 (Masmin) (막시미아누스)박해 (A.D 235-288) 간헐적인 박해.

교회의 감독인 두 사람 폰티아누스, 히폴리투스 광산에 보내어짐.

데시우스 (Decius) 박해 (A.D240-251) 249년 황제에 오름

원인 = 로마의 영광을 위해 다시 옛 종교를 수복하고자 했다

내용 = 기독교인들을 회유시켜 배교하도록 유도하였다.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했고 향불을 살라야 했다. 순종한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부해 주었다. 전통적 로마인이었던 데시우스의 눈으로 볼때 여러 혼란한 현상은 로마 국민들이 옛날의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옛 영광을 다시 복구하고자 한다면 옛날의 종교를 다시 수복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것이 데시우스 황제의 종교 정책의 기반이었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들이 아니라 배교자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50여년 전 터툴리안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 설파한 바있었다. 왜냐하면 더욱 많은 피가 흐를수록 교인들의 숫자는 증가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기독교 신자들을 살해하는 대신에 이들을 협박하고 회유시켜 변절시킬 수만 있다면 그 옛날 이교를 부흥시키려는 데시우스의 속셈이었다. 이런 박해의 결과 교회 내에 새로운 칭호가 생겼는데 "고백자"와 "배교자" 즉 변절자 라는 칭호가 생겼다. 당시에 오리겐이 고문을 당하였고 출옥 후 죽었다. 그 외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 반면에 변절자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발레리안 (Valerian) 박해 (235-260) 잠간 동안의 박해

원인 = 병과 흉년은 신이 노한 까닭으로 기독교를 박해

내용 = 예배 금지, 재산 몰수, 황제 숭배

순교 = 키프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 박해 (A.D245-313)

284-305년 까지 로마 황제 자리에 있으면서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원인 : 기독교인들이 군대에 입대를 거부

내용 : 기독교 병사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 불복종한 자들은 처형.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을 체포. 황제 숭배 제사 강요. 잔인한 고문으로 처형하였다.

 

1.초대교회의 박해원인과 과정

1)박해의 원인

유대인의 미움과 질투, 황제숭배에 대한 거부,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종교로 오해

국가에 안전에 위험하다고 판단, 그릇된 미신적 사상

2)박해과정(10대박해)

네로의 박해(54-86)--- 도미티아누스(81-96)---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

(117-138)---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161-180)---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1-211)---

막시미누스(235-238)---데키우스(244-260)---발레리우스(257-260)-- 디오클레티우스

3)박해결과

기독교인들의 긴밀한 협력과 결속, 교회는 큰 시련을 당하지만 본래의 순수성 유지

기독교 대중화, 박해 종식후 배교자의 처리문제 대두

2.이단의 특징

1) 의미: 건전한 신앙과 교리를 떠난 자들을 가르키는말.

2) 특징: a.표리부동 b.교주의 신격화 c.계시 체험적 신앙 d.금전강조 e.이원론

3) 이단들의 종류

a.영지주의.......금욕주의, 도덕적 방종주의, 혼합주의, 이원론적 세계관

b.말시온주의.....구약성경의 전체를 부정 , 신구약의 하나님을 구별하여 봄.

예수님의 고난(십자가)를 인정하지 않음

c.몬타니즘..... .계시나 성령체험적인 극단신앙을 주장(성령파), 종말신앙 강조,

금욕주의 강조

 

3.신약성경의 정경화 과정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죽고, 로마의 핍박,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과, 복음의 보전과 전수의 문제에 귀착.

1)감독권 권위 확립

*익나티우스-감독 중심,연합,복종 *클레멘트-사도전승 *이레니우스-영지주의와 싸움 2)신약성경의 정경화

정경이란 표준,규칙을 의미, 영지주의 말시온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들을 수 집, 정경 자체의 사도성과 권위성 있었으며 이단의 공격 이전부터 신앙의 표준과 영적 유익을위해 사용하고 있었음

3)신조의 형성

사도신경의 확정은 이단과의 논박을 피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

신앙고백은 영지주의의 도세티즘을 뿌리째 근절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정체성과 믿음의 기초를 분명히 해주는 방파제 역활

 

4.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의 교부에 대하여

 

1)교부...사도이후 이후 험난한 시대의 진리와 수호를 위해 힘쓰며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 증한 지도자들

a.조건...교회의 정통교리와 학문에 기여, 생애의 거룩성, 고전성, 교회의 인정

2)초기 교부들 (니케아 회의 이전)

a.사도적 교부(속사도)...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위해 활동, 실천적 삶의 강조, 신 앙전통의 계승에 역점을 둠

인물... 익나티우스, 클레멘트, 폴리캅등

b.변증가.....기독교 정당성을 변호, 유대교와 이도교의 도전의 대해 반박,기독교 의 우월성 강조

인물....저스틴 마터(유스턴),티티안,데오필루스등

c.헬라교부....이레니우스,클레멘스,오리겐등 d.라틴교부

3)후기 교부들 (니케아 회의 이후)

자신의 신앙을 보다 논리적 과학적 증명, 정통신학의 원리와 체계확립,교리의 공식명료화

a.헬라교부(동방교부)헬라어를 쓰고 헬라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교회들

사변적인 신학논쟁 성행, 교회의 분파적 싸움이 되풀이됨

인물...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등

b.라틴교부(서방교부) 라틴어를 쓰며 라틴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교회(서유럽 포함)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조직과 신학에 질서가 잡혔으나 동방 교회의 비해 신학적 으로 뒤쳐짐

인물...터툴리안, 키프리안, 어거스틴

 

5. 1차에서 8차까지 종교회의(에큐메니칼)

 

1-8차의 종교회의의 주된 논쟁은 삼위일체논쟁과 기독론 논쟁이다. 1-2차 회의는

삼위일체 논쟁이고 3-8차 회의는 기독론 논쟁임

1) 1차 종교회의(니케아 종교회의)

성부 성자의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채택,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 배척

2) 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기독론 논쟁이 다루어짐

니케아 신조 재확인, 아리우스주의 배척(그리스도의 신성 약화, 성부에 대한 종속성을 강조한 주의),아타나시우스교리 재확인(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부와의 동일본질주장)

3) 3차 종교회의( 에베소 회의)

네스토리우스는 네스토리우스주의(신성강조, 신성약화)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 성을 강조, 그러나 그리스도 한 인격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에 대한 오류를 범함

4) 4차 종교회의(칼케돈 회의)

양성론 일성론 배격, 칼케돈의 신조 단성론 양성론 문제를 해결

5) 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단성론자들의 반발, 칼케돈 회의 그대로 인정.

6) 6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프)

단의론 정죄, 이의론 채택

7) 7차 종교회의(니케아)

성화숭배 결의

8) 8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6.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a.어거스틴...초기 기독교를 재건, 서방문화 기틀 형성, 초대교회 대표적 교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강조,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 강조

b.펠라기우스 논쟁.....(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분노 저항) 그는 신학 사상을 전개 시켜나가 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극단적인 이성에 기반을 둠

원죄설을 부정, 성경적인 죄론을 왜곡, 자력구원 강조, 신인협동설 주장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기독론 논쟁들(세계종교회의)

초대교회에서 다루어졌던 교리(신학)적 논쟁점

크게 정경과 신앙고백, 삼위일체교리,기독론,죄와 은총의교리, 말씀과 성례전교리

그중 삼위일체논쟁과 기독론 논쟁 이 1-8차 세계종교회의의(니케아 회의)에서

 

1. 1차종교희의[니케아종교회의] :

♦ 장소 : 니케아

♦ 시기 : 325년 , 콘스탄티누스 황제

♦ 주요내용 :호모우시오스(삼위일체, 동일본질인정)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은 배척)

2. 2차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장소 : 콘스탄티노플

♦ 시기 : 381년 , 테오도시우스 황제

♦ 주요내용 : 니케아 신조가 재확인

50년 넘게 끌어온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 문제가 일단락됨

☉ 아리우스주의 배척 (그리스도신성약화, 그리스도의 성부에

대한 종속성을 강화 했던 주의)

☉ 아타나시우스교리 재확인(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성부와의 동일본질을 주장)

 

1.2차 세계교회 회의는 큰 틀에서 삼위일체 논쟁 이였다.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기독론, 삼위의 제2위인 그리스도와 성부와의 관계에 관한 것

그런점에서 삼위일체 논쟁이면서도 엄밀한 의미의 기독론 논쟁이라 할수있다.

그러나 1,2차 종교회의의 논쟁은 기독론적 성격이 성부와의 관계 면에서 파악

되었기 때문에 ★삼위일체 논쟁 ★ 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를 논한 것이 기독론 논쟁이다.

또한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도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오리겐의 영향을 받아 로고스(말씀)가 인간 예수의 영을 대신하였다고 이해

♠ ‘신인’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하나님 이해

♠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익숙한 말씀-육신-기독론 으로 신성을 강조

♠ 아폴리나리우스는 이를 극단으로 밀고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영혼까지 부정

하여 영혼의 자리에 로고스로 대치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말씀-육신-기독론’ =대조= 안디옥의 ‘말씀 -인간-기독론

↳(안디옥학파의흐름.역사주의적해석)

뛰어난 세명의 갑바도기아인들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아폴리나리우스의‘로고스-육신-기독론’을 ‘로고스-인간-기독론’으로 대치

정통교리를 세우기위한 이들의 눈부신 활동과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에서 아폴리나리우스 주장이 정죄

알렉산드리아 학파 와 안디록 학파로 대표===기독론 논쟁

아폴리나리우스 정죄로 끝나지 않고 한쪽은 양성을 강조(네스도리우스로대표되 는 네스토리우스파)이고 한쪽은 연합을 강조하는 소위 단성론자들이다.

이두파는 정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공동체에서 수세기 동안 존재

 

3. 3차 세계종교회의(에베소 회의):

장소 : 에베소

시기 : 431년

주요내용 : 네스토리우스 견해 정죄

아폴리나리우스주의에 반대 성자는 참하나님의 아들,참으로

사람 이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오류를 낳고 말았다.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 로 보는파 안트로포고스(사 람의 어머니) 로 모아야 한다는 파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신임을 얻어 네스토리우스는

크리스토포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제안 양측은 모두 만족

알렉산드리아감독 시릴 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테오토코스문제로 논쟁

에베소 회의 이후 계속 ‘연합후의 한성’밖에 없다고 강조하여

유티키스주의로 길을 터놓고 말았다.

449년 불법적인 에베소 회의(일명 도적회의) : 플라비안이 정죄

 

4. 4차 세계종교회의(칼게돈 회의)

시기 : 431년 로마교황 레오의 중재와 마르시아누스 의 주재로 소집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 배격 , 유티케스즤 일성론도 배격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결코 혼합,변함,나뉨, 분리됨이 없이 엽합되었다고

했다.)

 칼케돈 신조는 단성론 과 양성론 문제를 해결

양성의 연합관계를 혼합이 아닌 연합으로 받아들여 한 인격안에서 통일하였

다는 점이 교회사적 의의

5. 5차세계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 시기 : 553년

 주요내용 ; 단성론자들의 반발 ,칼게톤회의를 그대로 인정

네스토리우스주의자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 칼케돈 신조를 따를수없었음-

큰세력 형성 동방황제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시도-통합령(헤노티콘)발표-칼게돈 신조를 조건부로 받아들였다 -저스틴(527-565)황제-반 칼게톤방향으로 급선회한다. -이에 단성론(일의론)자들은 단의론을 내세워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 가지고 있다 주장

 

중세시대의 종교회의

 

6. 6차 세계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시기 : 680년

주요내용 : 단의론 정죄 이의론 체택

7. 7차세계종교회의(니케아)

시기 : 787년

주요내용 : 성화숭배 결의

 

8. 8차세계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시기 : 879년

1,2차 = 삼위일체 논쟁

2,8차 = 기독론 논쟁

1-2차(그리스도 신성)

3-5차(그리스도양성)

6차(의지론)

7차(기독론)

8차(성부그리고 성자) 팔레오케

초대교회의 이단들

이단 : 헬라어(하이레시스) ‘선택’ 이나 ‘견해’를 의미 중세시대에 이르러

명백히 건전한 신앙과 교릴를 떠난자들으 가리키는 ‘이단’의 의미

를 교회사에서 이단을 지칭하는 역사적인 용어로 고착

(초대교부들은 하이레시스라는 용어를 영지주의자들이나 말시온

주의자들이나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이단성을 지적하는 단어로 사용

‘특정한 동일 견해를 가진 무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

헬라철학에서는 특정한 가르침에 집착하여 형성된 그룹들을 학파로 규정

예)에피쿠로스학파,스토아학파

안디옥의 감독 : 익나티우스는 하이레시스를 사용하여 인단들의 특징을 규정

“이들은 거짓 이야기꾼들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속이는자들

이다 ” 말한다

 

1. 영지주의(그노시즘-지식을 강조한다) 도덕적인방종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도덕적 방종주의는 그 뿌리를 영지주의에 두고 있다.

영지주의는 아메바와 같이 매우 변형적이고 혼합주의이다

근본사상 : 인도,바벨론,페르시아,등의 동양종교와 헬라철학(프라톤주의)의

근본사상들과 유사.

인간을 신적불씨가 악한 육체에 갇혀있는 존재라고 봄

구원관 : 비밀지식을 가질때 이루어진다고 봄 소수의 영적인

비밀지식을 전수받은 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진 비빌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영지주의는 헬라어 ‘알다’는 동사에서 파생

 

2 말시온주의(영지주의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 구약성경의전체를 부인,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악한존재로 여겼다.)

140년경 말시온은 소아시아의 시노페에서 로마로 왔다.

말시온은 로마에서 크레도라는 사람에게 감동

근본사상 :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는 열등한 신에 의해 영감된 것이었던 반면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신, 알수 없는 아버지로부터

온 계시이다라고 주장했다. 신약성경에서도 유대인들의 사상과

영향을 받은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여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만으

로 이루어진 자신의 고유한 성경을 만들었다.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

의 두하나님은 완전히 구별된 것이었고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

또한 예수는 직접 고난을 받지 않았고 고난받기 전에 떠났다고했다.

 

4. 몬타니즘(초대교회위협, 직통계시파,은사주의과장)

 

몬타누스 :소아시아의 아르다보에서 출생 전승에근거: 세벨레라는 이단종 교의 제사장이었다.

교리적 : 기독교적인 근거를 따랐다

 근본사상 : 계시나 성령의체험적인 극단신앙을 주장 ‘성령파(직통계시파)’가

몬타니즘 이라는 이단종파.

믿음과 예언자적 영정을 갖고 입박한 종말신앙을 강조

기독교를 옛날 종교의 방식으로 표현

성령의 사역을 지나치게 강조 156년 몬타누스 자신을 성령의

특별한 도구라고 선포하면서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약속이

실현되었다고 주장

두 여선지자 프리스카와 막시밀라는 예언과 방언과 계시를 통해

세계의 중말이 임박하였음을 말하고 페푸자라는 도시에 새로운

하늘도성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강조 금욕주의 강조

160년경 공희회를 소집하고 몬타누스주의를 정죄

초대 이단종파들의 부흥은 교회로 하여금 새롭게 무장 하는 계기

제도적인 면에서 감독의 권위가 굳게 세워짐

성경의 정경화 필요성을 절감 ,신조수립의 필요성을 절감

1)감독권위 확립 : 최초로 말한사람 안디옥교회감독 익나티우스[(AD115년)로마에 호송되어 순교]

그다음 클레멘트 이다. 그는 감독(장로)의 권위는 사도로부터

연유한 것이라는 사도적 계승을 강하게 주장(사도성)

익나티우스 :감독을 중심으로 한 연합과 복종

클레멘트 : 사도적 계승

리용감독 이레니우스 : 영지주의와의 투쟁에서 비롯된 영적 권위

는 초대교회에서 차츰 감독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2)신약성경의 정경화 (기준규칙)

정경이란 ‘표준규칙’을 의미한다

말시온 : 정경의 첫걸음이라 할수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제2세기에 영지주의 , 말시온, 대항하기 위하여 기록한 문서들의 수집

복음서사도행전,바울서신들, 그이후에 일반서신과 계시록순서

신약성경으로 수용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기준은 “사도성”이였다.

AD 367년에 아타나시우스 동방,서방교회모두 아타나시우스가 요구한

신약성경을 최종적으로 승인

3)신조의 형성

신경은 내가믿습니다라는 뜻인 라틴어,'credo'에서 나왔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오래된 신경은 사도신경 . 사도신경의 기원--신약성경

사도신경은 처음 세례자에게 문답식으로 진술되었던 신앙고백이 나중에 진술또는

선언으로 신조로 바뀌게된 것은 영지주의와 다른 이단들의 공격때문이었다.

사도신경의 확정--이단들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논박을 파할수 있는 유용한 무기

신앙고백은 영지주의의 도세티즘을(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시 않았다는 주의)

뿌리째 근절 . 이단들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정체성과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를

분명하게 건축해주는 방파제 역할

후기 동 . 서방 교부

니케아 이전==‘초기교부’라고하는데 크게 속사도 교부, 변증가, 헬라교부, 라틴교 부. 로 나뉜다.

니케아 이후==‘후기기독교 교부’ -헬라교부,라틴교부로 나뉠수 있다.

헬라교부-동방교부- AD330년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니노 플로 옮기면서 시작 )

라틴교부-서방교부(라틴어를 쓰며 라틴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교회들) 라틴문화의 특징 : 통일적이고 실용적

 

동방교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유세비우스 팜필루스라고도 한다)

교회사의 아버지 역사학의 시조 아리우스논쟁에 중보적입장을 취한 한사람

콘스탄틴황제와 아주친함 고대작가들의 저서와 서간들을 인용 ‘교회사’를 기록

(총10권) 원래 2권으로 [연대기(제롬이 많이 인용)]를 확장하고 면밀히 서술.

아타나시우스(296-373) 순교사화를 기룩 순교의 열정을 엿보게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반대한 최대의 인물로 크게 활약

성자의 신서확립을 위해‘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를 위해 46년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 17년동안 5차례의 도피와 은신을함 .

신앙의 통일성 수호를 위해 헌신 특별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본질

임을 명백히 하였다.

 

갑바도기아의 세 학자

가이사랴의 바실(325-379)

독실한 할머니의 영향을 받음 수사학교육을 받음

신학적인 면에서 그의 공헌은 삼위의 위격을 그 특질에 따라 구별한 것

교회사적으로는 동방수도원의 전형을 만들어 동상수도원의 아버지가 되었다.

닛사의 그레고리(335-395 바실동생)

371년 닛사의 감독이됨, 오리겐 이후 최초의 신학자였다고 할수 있다.

오리겐의 제자

니케아신조를 지지한 그는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구분하여

우시아-본질 , 휘포스타시스-위격 이란 뜻으로 썼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바실친구) --설교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경건한 어머니 노나의 영향 외모나 거동에서 평범하였으나 뛰어난 웅변

능력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설교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크리소톰과 함께

당대의 명 설교자로 알려졌다.

 

테오도루스(350-428)

크리소스톰의 친구 와 함께 당시 수사학자요 철학자인 리바니우스에게배웠다.

383년 플라비누스에게 장로임명을 받았다 392년 실리아 몹수에스티아의 감독

그가가르친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으로 정죄를 받으면서 그의 신학도 비판을받음

 

존 크리소스톰(346-407)

교회사적으로 “ 황금의 입” 이라는 찬사를 받음 , 유명한 수사학자 리바니오에게

배움 . 안디옥의 멜리티우스에게 신학을 배우고 후에 세례를 받음

374-381년 7년의 은둔생활을 하였다.

386년 사제가되어 안디옥에 12년동안 머물면서 웅변적인 설교를 하여 황금의 입을 가진 요한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직자들을 개혁하는데 힘을 씀

동방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서방교부

서방은 교회론 논쟁이 있었다. (인간의 죄와 은총의 논리)

동방의 오리겐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암브로시우스(339-337)-어거스틴의 영적인 아버지

특징 : 황제를 회개시켰다.

교회에 대한 국가의 내정간섭을 철저히 했다.

동방황제의 영향력을 차단 시킨사람.

그는 유명한 교회행정가,명석한 두뇌의 조직가, 신앙심 깊은 감독이요,설득력있

는 설교가요, 정통교리의 열렬한 용호자로 397년 사망할때까지 서구사회의 기초

와 신학발전에 크게 기여.

국가의 행정권과 자치권은 인정 신권청치체제,즉콘스탄틴 황제이후 동로마 제국

의 황제들이 주장해온 황제교황주의를 거부하고 종교화 정치를 분리하였다

 

히에로니무스(제롬345-419)

성경학자 번역가인 제롬으로 널리 알려짐

교황 다만수스 1세의 초청으로 로마를 여행 3년간 머물면서 교황의 친구요 비서

로 금욕생활을 봉사함.

수도원의 금욕새활을 찬양하고 도시 기독교인들의 헤이한 도덕생활을 비난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금욕적인 생활을 따르도록 힘썼다.

교황의 요청으로 수년에 걸친 노력을 기울여 당시의 공통적인 불가타 역본을완성

그가 서방교회에 끼친 최대의 업적

 

그레고리 1세(540-604)

신학적인 것은 어거스틴을 수용함, 자매수도원에 영향 ,초대교회의 마지막 교부

이자 최초의 중세 신학자 ,최초의 중세 교화으로 활동 ,정치지도자로 활약,

교황정치에 문을 연 사람.

어거스틴과는 달리 연옥설을 주장 예정론에 관해서는 무관심

후기 동서방 교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

하여 하나로 연합,성취하기 위한 투쟁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음

이들은 당대의 신학자요 목회자요 또한 행정가요 지도자로서 크게쓰임받았다.

동방에서 사변적이며,신학적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서방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생활의 문제, 즉 죄나 구속을 다루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1. 어거스틴의 교회사적 위치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요,사상가요, 역사가이다.

초대교회를 대표할말한 교부중의 교부이다.

이원론 사상에 기초한 마니교란 이단에 7년간 빠져있었다.

마니교는 평행선을 달리는 이원론 의 이단.

AD354 누미디아 지방의 타카스테에서 11월13일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롬 13:13,14절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돌아왔다.

어거스튼의 작품[자유의지론],[예정과 은총],[삼위일체론],[신국론]

어거스틴의 작품은 명료하다.

자신의 자서전적인 작품[고백록(참회록)]에는 신약성경 이래 인간 내면 심층의

죄의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끄집어내어 하나님앞에 세우는 책이다.

[신국론] 은 기독교 역사관을 최초로 설파해준 명작이다.

어거스틴의 강조점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것”도덕적 의무와 책임강조

삼위일체론이 안고 있는 근본적 맹점인 ‘종속설’을 완전히 제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성을 강조

어거스틴은 부정한 사제가 안수하고 세례를 준 것의 효력을 문제삼는 “도나투

스주의자”(교회론논쟁)들에 대항하여 사제 개인의 도덕성에 기초하기보다 그리스 도에게 달려 있으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 전체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은혜 를 집전하는 의식에 있으며 “사제직”에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죄론”에서 인간의 죄의 본질으 교만과 욕망 두 단어로 요약

 

2. 펠라기우스 논쟁(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분노 저항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영국 아일랜드의 덕망있는 수도사였다

그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 여기에 많은 성직자들이 동조하였다.

펠라기우스의 주장(반 어거스틴주의 로 해석)

1)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2)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사람으로 출생 ,범죄 여부와 관계없이 죽을 존재

3)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영향이 있으며, 전 인류는 아담의 죄와는 무관하다.

4)새로 태어난 유아는 아담의 범죄 인전의 상태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5)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

원죄설을 부정하여 성경적인 죄론을 왜곡 , 하나님과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총

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노력에 의한 자력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결국 인간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약화시키고 “신인협동설”

을 주장하였다.

펠라기우스 주장이후 반 펠라기우스주장 등장

반펠라기우스(절반만 수용) =원죄와 은혜구원-어거스틴주장수용

인간의 의지-펠라기우스 수용

어거스틴은 은총의 박사

초대교회의 박해의 원인, 과정, 결과

1)박해의 원인 : 네로 황제 이전의 기독교 박해는 주로 유대인의 미움과 질투

초대교회의 황제숭배에 대한거부(기본적인 근본적인 박해원인)

기독교를 불법적이며 부도덕한 종교로 오해

국가적 안전에 위험하다고 봄(정치적인 시각, 비밀결사체로 봄)

로마는 모임 자체를 두러워함

그릇된 미신적 사상 때문

2)박해의 과정 10대박해

네로의 박해(54-68) 64년7월18일 로마시 화재로인해-

(사도바울과 베드로 순교)

도미티아누스(81-96) 의 박해 :기독교인을 무신론자르 부름

반 불순분자로 여김

사도요한 밧모섬 유배

기독교인의 칸타쿰생활

트라야누스(98-117)의 박해 : 112년 조직적인 박해시작

하드리아누스(117-138) : 합법적이였다. 개혁적인황제.

125년 안식일 회당모임금지

변증가들이많이 등장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1-211)초기기독교에 관대 오리겐아버지

레오티다스 순교

자신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국민

에게 충성을 요구,입교금지령

막시미누스(235-238): 통치자로 하여금 조직적 활동

신전제사 촉구(히폴리투스순교)

데키우스(244-251) : 실제와 조직적이고 잔인한 기독교박해시작

제사증명서 발급 (황제의 아버지 필립이

기독교에 관대함으로 더 박해하였다)

발레리아누스(257-260):처음에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였다.

국가의 재난을 기독교인들 탓으로돌림

(로마감독 식수트르 2세 순교)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황제등극시 로마 무질서상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박해

극심한 기독교에대한 핍박이 있었다.

3)박해의 결과

첫째: 박해시에 기독교인들은 서로 긴밀히 협력하고 결속

둘째: 오랜 박해로 교회는 큰 시련을 맞았으나 내적으로는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보임

셋째: 박해를 통해 복음은 당시 하층 시민이나 어린이나 노예같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갖게됨. 점차 상류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됨

넷째: 박해의 종식이후 배교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됨

↳도나투스논쟁으로 비화

박해는 순교를 통하여 생명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독교가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이였다.

지도자급의 순교가 많았다.

신앙의 절개(유일신)을 보여주었다.(이자체가 전도가 되었다)

어진 5형제 왕

아우쿠스, 트라야누스,[ 법에 충실 영토학장(유프라테스-고대바벨론)까지]

하드리아누스,(개혁적인 황제, 열정이 있고 합법적이였다.),안토니오티우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미신과 점술가를 따랐다. 자영재해를 기독교인의 책임으로 돌림 ,폴리갑(사도요한의)순교

 

1.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논쟁

 

2. 이단들의 특징

◎이단이란 말은 헤라어 하이레시스에서 파생되었는데 ‘선택’이나 ‘견해’를 의미한다.

신약시대 초기 중성적의미에서 분파주의에 대한 비난의 용어로 사용되었고

교부시대에 이르러서는 명백히 건전한 신앙과 교리를 따난 자들을 가리키는 ‘이단’의 미리로 고착되었다

익나티우스가 말하는 이단들의 특징 - 거짓 이야기꾼, 그리스도의 이름을 속이는 자들, 설득력 있는말로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와 율법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탕생을 중상하며 십자가를 부끄러워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인하고 부활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소개, 성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창조는 하나님의 작품인데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상한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1)영지주의

2세기에 활발하던 이단으로서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도덕적 방종주의는 그뿌리를 영지주의에 두고있다.

영지주의 - ․ 변형적이며 포괄적인 혼합주의

․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는 악하고 현상세계 뒤에 있는 이념적 관념의 세계는 선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

․ 동양종교와 헬라철학(플라톤주의)의 근본사상과 유사

․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란 신적불씨가 약한 육체에 갇혀 있는 존재라고 본다. 이들은 구원이란 소수의 영적인 비밀지식을 전수 받은 자들에 의해 가르쳐진 비밀지식으로 이루어진다.

 

2)말시온주의

말시온은 로마에서 크레도라는 사람에게 감동을 받아 그의 교리를 배우게된다. 그의 교리는 ‘율법과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선포된 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전자의 하나님은 알려졌으며 후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분이 의로우신 반면 다른 한 분은 자비로우시다’로 구약과 신약의 두 하나님은 완전히 구별된 것이었고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 가르침의 조명하에 신구약을 읽고 바울서신과 누가복음만으로 이루아진 자신의 고유한 성경을 만들었다.

3) 몬타니즘

 

영지주의나 말시온과는 달리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적인 근거를 따르면서 계시나 성령체험적인 극단신앙을 주장한 ‘성령파’ 이단종파였다. 교회가 사도적인 열정과 원색적인 영성의 능력이 저하되어가던 2세기경 몬타누스는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믿음과 예언자적 열정을 갖고 임박한 종말신앙을 강조했으며 156년경에는 자신을 성령의 특별한 도구라고 선포하면서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약속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초대 이단종파들의 부흥으로 교회는 제도적인 면에서 감독의 권위가 궅게 세워지고 성경의 정경화 필요성과 신조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새롭게 무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신조나 성경의 정경화 과정, 감독들의 권위

 

2번의 문제에서 대두된 초대교회의 2세기를 지나면서 나타나게 된 이단들의 도전으로 인해 초대교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감독의 권위 확립과 신약성경의 정경화, 신조의 형성에 노력이 기울여졌다.

1) 감독의 권위 확립

예루살렘에서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에는 특별한 교회 정치적 직분이나 구조가 없었으나 차츰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집사, 장로, 감독이 생겨났다. 처음 장로와 감독은 일치된 직분으로 교호적으로 사용했으나 회의 소집시 의사진행의 대표역할, 여러 교회들의 행정적 중심역할, 교회의 박해에 대한 현명한 지도력, 이단문제를 처리할 만큼의 명확한 교리적 기초를 갖춘 훈련받은 장로의 요구등에 의해 감독의 권위가 격상되었다.

․ 익나티우스 : 감독의 권위 확립에 대해 최초로 말한 사람, 감독을 중심으로 한 연합과 복종

․ 클레멘트 : 감독의 권위는 사도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하며 사도적 계승 주장

2) 신약성경의 정경화

정경이란 ‘표준’, ‘규칙’을 의미

2세기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에 대항하기위해 거룩한 문서가 수집되었다. 제일 먼저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일반서신과 계시록 순서였다. 이들은 사도와의 연관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정경형성에 300년 가까운 세월이 요구되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와 최종적으로 승인된 책들이 동,서방 전교회에서 받아들여져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는 첫째로 사도적 저작에 있고 둘째로 초기부터 교회안에서 읽혀지고 신앙의 표준과 영적유익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 있으며 최종적으로 정경형성 과정에 전 교회에 일치된 마음을 주어 정경으로 채택하게 하는 성령의 사역에 있다.

ex)딤전3:16~17 바울의 고백

․ 아타나시우스 : 현존하는 최초의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내 놓은 사람(A.D367년)

3) 신조의 형성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신경은 사도신경으로 사도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후에 생겨났으며 일시적인 결과물이 아닌 점차적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됐다. 이를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도들의 중심적인 가르침을 충실히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의 확정은 초대교회의 이단들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논박을 파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였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신앙고백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신앙고백은 영지주의의 도세티즘을 뿌리째 근절시켰다. 그래서 처음 세례자에가 문답식으로 진술되었던 신앙고백이 더 크고 확고한 신앙고백으로 변모해 갔다. 이 신앙고백은 오늘날도 여러 이단들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정체성과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를 분명하게 해주는 방파제 역학을 하고 있다.

 

4. 세계교회 회의 내용

 

5.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의 교부에 대하여

○ 교부 : ․ 사도들 이후 핍박과 사상적 도전에 직면하던 험난한 시대에 진리의 수호를 위해

힘쓰며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한 지도자들

․ ‘교회의 아버지’로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

○ 교부의 필수조건 : ① 교회의 정통교리와 학문에 기여

② 생애의 거룩성

③ 시기적으로 고전성(서방 주후7세기 중반, 동방 8세기 중반)

④ 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함.

○ 속사도들의 사상 : ① 실천적 삶의 강조

② 신앙전통의 계승에 역점을 둠

○ 비판받고 있는 부분 : ① 순교에 대한 지나친 열망

② 내세에 대한 지나친 기대

③ 신학적 오해와 선행에 대한 부당한 강조

④ 신학적 용어의 편파적 사용

1.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교부(초기 기독교 교부)

1)사도적 교부(속사도, 변증가)

① 속사도 - 사도들과 교분이 있던 자들로서 많은 저작들을 남겼다.

특징 : 여러지역을 배경으로 활동했으나 모두 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위해 활동함.

인물 :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익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캅, 순교자 저스틴 마터,

헤르마스, 브리기아에 있는 히에라 폴리스의 파피아스,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

ⅰ)클레멘트(30~100년경) - ․ 로마교회의 유력한 장로

․ 교리적 체계보다는 선행과 덕행과 관련된 실천적 가르침에 역설을 두었다. 교회의 통일과 질서를 파괴하는 분열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붙잡을 것을 강조하였으며 직분계승의 중요성 강조

․ 96년경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 고전 중 가장 아름다운 문헌

ㄱ) 분열을 타파하고 교회의 질서와 통일 강조

ㄴ) 참다운 회개와 자신을 지키는 삶의 경건을 촉구함

ㄷ) 믿음에 의한 기독교적인 의를 강조함

ⅱ)익나티우스(117년 사망) - ․ 사도요한의 제자로 37년간(70~107) 안디옥의 감독

․ 트라야누스황제 기간에 로마로 압송되어 원형경기장에서 순교

․ 압송되면서 장중한 문체로 7편의 편지씀

ㄱ)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재성을 부정하므로서 그리스 도의 수난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가현설 비판

ㄴ) 교회안에서 직분의 삼중적 방식을 최초로 제시, 교회의 통일과 일치를 위한 권위의 질서 수립

ㄷ)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임

ⅲ)폴리캅(79~165) - ․ 사도요한의 제자이자 익나티우스의 친구

․ 가장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은 소아시아 교회의 대변자

․ 사도요한과 사도후 기독교회를 잇는 교량역할

․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 핍박때 장작불에 올려졌으나 타지않아 병졸의

칼에 맞아 죽음

․ 순교적 신앙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남.

ㄱ) 신앙의 주체(푯대)를 바로 정할것(=예수그리스도)

ㄴ) 실천적 신앙의 강조

ㄷ)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순교적 신앙의 유지

② 변증가 - 하드리아누스(117~38) 황제의 박해 시대부터 폭넓은 활약

인물 - 쿠아드라투스(2c초 아테네), 아리스티데스(2c 아테네), 아데나고라스(아테네),

데오필루스(안디옥주교), 멜리토, 헤게시푸스, 타티안, 저스틴 마터

ⅰ)저스틴마터 - ․ 가장 유명한 변증가

․ 철학적 훈련을 받았던 순회평교사로서 말시온을 반박하여 로고스개념의

정립 위해 헌신

․ 제1,2 변증서,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 이교대 대한 비판, 말시온 이교반박서

ⅱ)타티안(110~172) - ․ 저스틴 마터의 제자

․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

③ 헬라교부 - 소아시아 신학자 이레니우스(115~119), 그의 제자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판테누스와 그의 제자 클레멘스, 클레멘스의 제자 오리RPS(영혼 선지설)

④ 라틴교부 - 터툴리안, 키프리안

2.니케아회의 이후의 사도들(후기 동서방 교부) -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여 하나로 연합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 후기교부 - ① 자신의 신앙을 보다 논리적이며 과학적으로 증명

② 오랜 논쟁과 상호연합을 통해 정통신학의 원리와 체계확립

③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를 신학 적으로 공식화하고 명료화 함

① 헬라교부(동방교부) - ․ 헬라어를 쓰고 헬라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교회들

․ 동유럽과 중동, 터키와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포함

․ A.D330년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시작

․ 사변적인 신학논쟁 성행

․ 교회는 분파적 싸음이 되풀이하였는데 지리적혹은 민족적으로 복잡한

구성 때문이기도 함

인물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 갑바도기아의 3인(바실, 닛사의 그레고 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데오도투스. 크리소스톰

② 라틴교부(서방교부) - ․ 라틴어를 쓰며 라틴문화의 영향권 아래있는 교회, 서유럽포함

․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조직과 신학에 질서가 잡혔으나 동방교회에 비해 신학적으로 뒤쳐짐

인물 - 터툴리안, 키프리안,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제롬), 어거스틴, 그레고리1세

출처 : 신앙&삶의 나눔
글쓴이 : 섬김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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