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

[스크랩] 한국 교회의 자유주의적 종교신학 전통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0. 30. 18:20

한국 교회의 자유주의적 종교신학 전통

 

 

이 신학전통은 종교문화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토착화를 전개한다. 협소한 의미의 “토착화신학”을 창작한다. 최병헌, 정경옥,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 김경재, 김광식, 이정배 등이 주도해왔다.

 

I. 탁사(濯斯) 최병헌: 토착화신학의 선구자

 

1. 생애(1858-1927)와 활동

1) 1858년 1월 16일 충북 제천에서 출생했다.

2) 가난해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한학으로 배움을 깊이 깨우친 사람이었다.

3) 1880년 서적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되었는데, 몇 번에 걸친 과거시험에 낙방하면서 좌절하고 있었다.

4) 배재학당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1888년 존스(G. H. Jones) 선교사의 가정교사로 추천되어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93년(35세)에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전도인의 생활을 시작했다.

5) 1898년부터 1900년까지 신약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조력했다. 특히 그는 1899년 1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만국기도회에 참석해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고, 1902년 5월에 열린 서울지방회에 참석하던 중 신비체험을 했다고 한다.

6)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목사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범이지만, 그들은 집례목사였고, 설교하고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최초의 목사는 탁사였다.

7) 정동교회를 12년간 담임목회하고, 인천 감리사(1914), 경성지방 감리사(1917), 나중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8) 성서 번역과 보급, 한글 운동, 문서 운동을 전개했다. 최초의 도서관 “大東書市”(1894)에서 일하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신학지 「신학월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또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회보」와 「제국신문」을 간행했으며, 「황성신문」의 기자로도 활약했다.

 

2. 학문적 관심

탁사는 기독교의 도리를 설명하고 타종교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기독교로 전향하는 데 학문적으로 규명할 필요성과 전통 종교 속에 있는 겨레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진리의 빛에 비추어 우리의 전통문화의 의미를 찾고 한국 문화 전체의 구원 문제를 생각했다.

 

3. 최초의 신학 논문: “죄도리”(1910)

한국인에 의한 첫 신학적 논문인 “죄도리”는 죄의 원인과 결과, 그 해결책을 삼위일체 신앙과 결부해서 풀이한 것이다. 이 글은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한 구원”이라는 두 개의 초점(Two S's: Sin-Salvation)을 통한 복음주의적 신앙이 잘 드러난다.

 

4. 종교관: 「만종일련」(萬宗 一臠)을 중심으로

1) 「만종일련」은 「신학세계」에 13회에 걸쳐 세계 여러 종교들을 종합적으로 논한 “종교변증론”(1916-20)을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에서 유교, 불교, 도교, 회교, 바라문교, 각종 신흥종교, 기독교 등을 소개했는데, 이 책으로 인해 탁사는 한국 신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2) 이 책에 나타난 탁사의 종교관은 포괄주의다. 그는 모든 종교의 상대적 절대주의와 성서적 절대주의를 주장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절대적이지 않다.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진리만이 절대적이다. 성서의 그리스도 복음과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구분하고,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타종교와 연속성이 있지만, 성서적 그리스도의 복음은 타종교와 연속성이 없다.

탁사가 타종교와 비교해서 기독교를 최고의 종교로 간주하는 기준은 “3대 관념,” 즉 유신론의 관념, 내세론의 관념, 신앙적 관념이다. 유교는 내세론이 없고, 불교는 무신론이고, 도교는 세 가지가 다 있지만 불완전하고 왜곡되어 있다. 기독교만이 이 세 종교를 온전하게 완성시키는 참 종교라는 것이 그의 논지다.

 

“玉食을 만나지 못하여서는 草食을 먹으려니와 옥식을 보고도 의심하며 먹지 아니하면 실로 어리석은 사람의 지혜 없는 일이라.” “若使孔夫子도 基督의 理를 見하셨더면 必也信徒이시오, 釋迦氏도 損己利人의 善果를 嘗하였더면 苦行林中에 六年風霜을 虛勞치 아니실지라.”

 

5. 사회참여 문제

탁사는 사회참여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혁명(1894), 을사조약(1905), 한일합방(1910), 105인사건(1911), 3ㆍ1운동(1919) 등, 민족사의 격동의 순간마다 철저한 침묵과 외면, 냉소와 무관심 밖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6. 평가

1) 송길섭: “토착화 문화를 외로이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신학자”

2) 신광철: “비교종교론적 기독교변증론”

3) 한숭홍: “개신교 선교 초장기에 속하는 당시에 이미 신학을 종교론적으로 보게 된 점은 과히[가히] 선구적이라고 하겠다.”

“그의 생애를 관통해 보면서 우리는 그가 철저히 이기주의적이었으며, 민중의 울분, 민족의 수난, 일제의 압박에 대하여 동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4) 이덕주: “그의 신학은 토착 종교와 다종교 공존상황에서 기독교를 변증해야 할 전도인으로서 다른 종교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문제의식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자생적’이라 할 수 있다.”

 

II. 철마(鐵馬) 정경옥: 토착화신학의 기초

 

1. 생애(1903-1945)와 활동

1) 1903년 5월 24일 정경옥은 진도(珍島)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2)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제적당했다.

3) 고향에 내려와 독립신문을 제작해 유포하다가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구속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성서를 통해 회심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2)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동경지진으로 귀국하여 1923년부터 27년까지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3) 미국 개렛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1927-29). 지도교수 롤(Harris F. Rall)은 당시 자유주의신학의 대표자였다. 그 뒤 노스웨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심리학을 전공했다(문학석사).

4) 귀국 후 1931년부터 감리교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2년간 고향에서 사생활을 가졌다가(1937-39) 다시 복직했다. 낙향의 가장 큰 이유는 교수생활에서 오는 타성과 영적 위기였다고 한다. 이때 출판된 것이 대표작인 「기독교의 원리」(1935), 「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 「조직신학개론」(1939)이다.

5) 1941년 만주 사평가(四平街)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42년까지 만주에 체류했다.

6) 1943년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에서 목회했다. 이 때 친일 부역을 했다고 비판받았다. 해방 4개월 전에 복막염으로 타계했다.

 

2. 신학배경과 사상

1) 존 웨슬리의 신학에서 기초를 제공받고, 슐라이어마허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지도교수 해리스 롤의 사상을 전폭적으로 의존했다.

 

2) 웨슬리: 인신득의, 온전한 성화,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확신,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는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좇아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교리 등.

 

2) 슐라이어마허: 종교를 절대의존감정으로 이해했고, 이성을 통한 신인식을 거부하고 종교적 감정, 심정을 통한 인간의 신인식 자체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3) 해리스 롤: “하나님의 절대 계시보다는 개인의 신앙 경험에서 하나님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믿으려는 다분히 감성적ㆍ경험적 신앙론에 정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종교의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고, “기독교를 ‘종교 신앙의 역사적 표현’과 ‘사회생활의 동적 표준’을 통한 종교 이해의 차원에서 설명”했다.

 

4) 이세종: 진도에 내려가 있을 때 만난 이세종은 천태산 골짜기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숨은 성자”였다. 그를 통해 토착적 영성을 배웠다.

 

3. 신학적 입장

1) “나는 신앙에 있어서 보수주의요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란 입장을 취한다.”(「기독교조직신학개론」 서문에서).

 

2) 71개조 “나의 신조”(1932)

(1)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 안에 啓示되고 또 實現된 바 하나님과의 人格的 交通이며, 人類의 兄弟的 關係인 것을 믿는다”(15조)

(2) 사람: “사람은 하나님의 創造的 意志의 最高表現으로서 自活的 人格의 所有者이며, 그 자체 안에 고귀한 價値와 目的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37조)

(3) 죄: “罪는 自我와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못된 觀念, 그릇된 態度, 그릇된 行動, 그릇된 結果를 스스로 意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52조)

(4)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生活과 죽음과 理想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화해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사람으로 말미암아 人類가 兄弟인 것을 알며, 實行하게 함에 있는 것을 믿는다.”(46조)

 

3) 토착화신학: “신학의 표현방식은 시대가 변하고 장소가 바뀜에 따라 가끔 변해왔다.” “기독교를 해석하는 방법과 그 형태는 각자의 문화형태에 비추어 향토화(鄕土化)하고 시대화(時代化)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학은 기독교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과 상호관련시키는 작업”이다.

 

4. 평가

-김영한: 한국 최초의 조직신학개론인 「기독교신학개론」(1939)을 저술: 기독론, 구속론, 성령론이 불분명하다. 대속의 복음보다는 “평화와 기쁨, 건강과 소망,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사회복음”을 가르쳤다. 기독론, 구속론, 성령론이 불분명한 것은 그의 인간론, 죄론, 역사관이 기독교적이기 보다는 계몽주의적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언급하고 있으나, 인간의 원죄성과 부패성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죄는 자아와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못된 관념, 그릇된 태도, 그릇된 결과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 원죄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역사의 진보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땅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종말론이 결여되어 있다.

 

-한숭홍: 정경옥은 두 가지 맥락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감리교의 조직신학자로서 교리적 체계를 처음으로 제공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신학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주장한 신학자라는 점이다. “그는 한국 신학계에서 종교신학의 효시가 되었으며, 그의 신학적 위치는 그 뒤 한국 감리교신학의 전통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III. 해천(海天) 윤성범의 성(誠)신학

 

1. 생애(1916-1980)와 활동

1) 1916년 1월 13일 경북 울진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3대째 기독교 가정. 아버지의 목회지 이전 때문에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생활했고, 그로 인해 방랑자적 기질이 생겼다고 한다.

2) 공주 영명중학교,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하기 두 달 전 폐병 3기 진단을 받았다. 해주, 평북 북진, 원산 송도원 등에서 3-4년 정도 요양 치료하여 완치 되었다.

3) 1937년 가을에 감리교신학교에 응시했으나 신체검사에서 낙방하고, 일본 동지사대학의 신학부에 입학했다(1937-1941). 그가 신학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광성고보에서 정경옥 교수의 설교를 듣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4) 1941년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해 일제 말 상황에서 목회를 했고, 1945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5) 1946년 1월 감리교신학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1948년 에밀 브루너의 「종교철학」을 번역했다. 그리고 1954년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유학, 칼 바르트, 칼 야스퍼스 등에게 배웠다. 바르트에게서는 신학의 패러다임을 배웠고, 야스퍼스에게서는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상호 이해를 촉진시킴으로 보다 높은 인간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얻었다.”

6) 1955년 12월 귀국했고, 1960년 바젤대학 제1호 한국인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7) 1960년 이후, 해천은 종교간 대화를 주장하며 토착화신학에 집중했고, 단군신화와 삼위일체의 문제, 성(誠) 신학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3년 단군신화 논쟁, 1973년 성(誠)신학 논쟁.

8) 197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했으며,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2, 토착화의 3단계

1) 제1단계/ 주체성의 문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거룩한 것과 진주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주체성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자의식, 즉 한국 교회라는 주체의식이 요구된다. 이는 선교사의 책동에 넘어가지 않는 교회를 의미한다.

 

2) 제2단계/ 수용성의 문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새 포도주의 “새”(neos), 새 부대의 “새”(kainos)는 서로 다른 단어다. 전자는 아주 새로운 것이요, 후자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3) 제3단계/ 복음의 토착화 문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변질가능성 속에서도 변질되지 않고 좋은 복음의 씨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복음의 토착화” 과업인 것이다. “복음은 토양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인간의 협조 없이는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밝히어진다.”(신인협동설).

“복음은 일회적이요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응당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쪽의 정황인 것이다. 이 정황파악과 이것에 대한 손질이 복음의 토착화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돌을 골라내고 비료를 주고 하는 것은 우리 쪽의 책임인 것이다.” 즉, 윤성범은 이 일을 소홀히 하면 복음의 씨가 아무 땅에나 막 떨어져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3. 성(誠)신학

“한국 신학 방법서설,”(「감신대학보」, 1961), 「기독교와 한국사상」(1964), 「한국적 신학-誠의 해석학」(1972)에 나타난 직관적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감ㆍ솜씨ㆍ멋”의 조화사상

 

⑴ 감론: “단군신화”

감론은 씨로서의 복음과 이를 받아들이는 자리로서의 문화적 a priori에 대한 소론(所論)이다. 즉, 내용은 복음이고 형식은 문화를 의미한다. “말씀[복음]은 신학의 핵심”인데 “이 핵심은 곡식의 씨와 마찬가지로 ‘자리’(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씨”와 “자리”는 한국 신학 수립의 전제가 되는 셈이다. 이 감의 문제를 불트만은 전이해로, 틸리히는 상황으로 설명한다.

윤성범의 설명에 따르면, 복음은 새 술이고, 새 가죽부대는 한국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a priori에 해당한다. 여기서 고유한 문화적 아프로오리는 주체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복음과 문화는 상호관련적이지만 동시에 내용과 형식이 될 수는 없다. 복음이 내용이라면 문화적 아프리오리는 형식이고, 문화적 아프리오리가 내용이면 복음은 형식이 된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윤성범의 논리는 복음을 너무 수동적으로 만든다. 지나치게 문화적 아프리오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윤성범은 단군신화의 설화적 형식에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적 신관을 대비하여 그 본질적 의미를 밝혀내는 일을 시도한다. 그는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 단군(檀君, 桓儉) = 성부ㆍ성령ㆍ성자로 유비한다. 모두 남성신으로 묘사되는 것을 공통점으로 든다. 환웅이 웅녀에게 잉태케 한 사건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잉태케 한 사건으로 유비된다.

여기서 “桓”은 “한”의 표음이므로, 세 신은 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세 하나님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고로 단군신화는 “삼위일체의 잔해”요 전이해다. 단군신화는 4-8세기 사이에 그리스도교(경교)사상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2) 솜씨론: “율곡의 誠사상”

솜씨론은 복음과 자리,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어떻게 손질하느냐의 문제다. 솜씨는 복음과 자리를 매개 손질하는 제3자다. 감론이 창조론이라면 솜씨론은 속죄론에 해당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을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를 그는 솜씨론이라고 부른다.

윤성범은 1963년 「사상계」에 기고한 논문에서 율곡의 「성학집요」 성실장(誠實章)에서 “성”(誠) 개념을 모든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는 한국적 솜씨로 규정한다. “誠은 道心과 天理의 통합의 원리”다. 성은 말씀이 이루어진 것=성육신이다. 다시 말하면, 리와 기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매개수단으로 성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성은 넓은 의미에서 “진리에의 하나의 태도”다. 성(誠)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존재근거요, 천지도(天之道)인 동시에 인지도(人之道)의 가능 근거다. 성은 “참 말씀”이고, “하나님의 본질”이다. 또 성은 “하늘의 도”다(誠者 天之道也). 그는 성을 계시와 복음과도 동일시한다. 따라서 성(誠)사상은 성육신 교리의 전이해가 된다.

 

3) 멋론: 화랑정신과 샤머니즘

멋론은 솜씨를 통해 일어나는 생명의 약동을 논하는 것이다. “말씀과 문화 a priori는 솜씨에 의하여, 곧 그리스도에 의하여 좁히여 짐으로 생명적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생명적인 것이 비로소 약동할 수 있게 됨은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적인 약동이 멋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구원의 현실이요, 구원의 장래를 내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멋은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 영역이다. 신학적으로는 구원론에 해당한다. 한국의 미는 예술과 도덕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종합미인 것이다. 또 그는 「정감록」에서 “종말론적 메시아니즘”을 읽는다. 이른바 한국적 멋이 여기에 있다.

 

4. 타종교와 관계

윤성범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를 맛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윤리와 종교를 구분하면서, 기독교가 한국에서 크게 전파된 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맛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교나 불교의 맛없는 종교생활에서 이제는 더 견디기 어렵게 되자 이 고루한 테두리로부터 용감히 뛰어 나온 많은 개종자들을 우리는 수 없이 열거할 수 있는 것이다.” 맛없는 종교는 일종의 율법주의의 맛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5. 평가

1) 김중은: 윤성범은 70년대 이후로 들어 와서 토착화의 “상대적, 다원적 절충주의”로 변모한다. 이로 인해 “복음주의나 보수적 입장에서는 ‘토착화논의’ 자체를 경원시하게 되었고, 다원주의적 토착화논의는 문화화, 현장화의 문제제기와 연대하여 마치 탈성서적, 탈기독교적 혼합종교운동이 마치 현대적이고 새로운 복음의 최첨단 전위신학인 것같이 착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2) 김광식: “실제로 해천은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유교, 기독교와 무교 등의 양자관계에서 서로의 개념과 사상이 얼마나 일치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해천은 변증법적 미학에 의하여 토착화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지 결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려고 했던 것은 진의가 아니다. 결국 해천은 결코 기독교를 해체하려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우리 문화 속에서 전달 가능한 언어로 바꾸어 놓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3) 윤성범의 토착화신학은 형식과 의미라는 관점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구현하는 데, 칼 바르트의 신학을 틀로 삼고, 그 안에 유교적 의미를 견강부회하는 토착화를 시도했다. 올바른 토착화는 유교적 전통을 틀로 하여, 그 안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드러내야 하는 데, 그는 일종의 혼합주의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IV. 소금(素琴) 유동식의 풍류(風流)신학

 

1. 생애(1922- )와 활동

1) 1922년 황해도 남천(南川)에서 출생했다.

2) 1943년 일본의 동부(東部)신학교에 입학하고, 1948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다.

3)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학부(1958년 신학석사 과정 수료), 스위스 에큐메니칼 연구원,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등을 거치면서 전후 15년에 걸친 본격적인 “신학행각”을 한다.

4)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가르치며, 한국신학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5) 학문의 전개: “도와 로고스”(1950년대), “복음의 토착화와 선교적 과제”(1960년대), “한국무교의 종교적 특성 연구”(1970년대), “풍류도와 풍류신학”(1980년대), “밀레니엄과 예술”(1990년대), “예술신학의 모색”(2000년대).

 

2. 복음의 토착화와 선교적 과제

1) 토착화에 관심

3대째 기독교인으로서 유동식이 토착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의 미국 유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처음 미국에 가 보니까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기독교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우리 종교인 줄로 알았는데 서양종교로구나 하는 것을 그때서야 안 것입니다. 내가 토착화라는 말을 쓴 배경은 이런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는 미국 유학 시절, 기독교 문화에 자연스럽게 젖어 있었던 자신의 개인적인 전통과 경험이 한국인의 보편적인 경험일 수 없다는 것과, 한국의 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은 너무나 이질적인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와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의 이질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었고,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닌 우리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토착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2) 신학적 과제

“기독교와 한국 문화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유동식은 기독교의 복음을 어떻게 우리의 문화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알맞게(이질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심는가 하는 문제에 온 정력을 쏟아 부었다. 즉 그의 초기 토착화론의 과제는 “복음의 씨가 어떻게 한국인의 마음 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한국인을 온통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느냐 하는 선교신학적 관심”이었다.

이를 위해서 “씨”로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토양으로서 한국문화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 결과 「요한서신 주석」(1962)과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가 출간되었다. 이때 그에게 토착화의 주체는 복음이었다. 복음이 어떻게 우리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느냐 하는 것이 그를 사로잡는 관심의 초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동식에 있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세 단계를 거쳐 가는 신학적 여정을 통해 끊임없이 깔려있는 것은 “기독교 복음”이었다.

 

3) 결론

(1) 한국의 마음은 “한 마음”이다. 이 한 마음은 큰 마음, 종합지양(綜合止揚)하는 창조적 마음, 참여의 마음, 풍류의 마음을 의미한다.

(2) 한 마음에서 본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요 1:14, 빌 2:6f.).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부정을 매개로 인간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게 하시었다(요 14:20).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3) 다시 복음의 입장에서 본 한국종교는 그리스도 곧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그들의 형식을 통해서 반영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형식을 통해서 자기 부정을 매개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때 복음적 의미를 갖게 된다.

 

3. 한국 무교의 종교적 특성

1) 한국종교와 문화의 구조 파악

유동식은 한국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 구조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집착한 것은 무교(巫敎)였다. 그는 무교가 한국종교와 문화의 구조를 형성한 힘이라고 보았다. 그는 무교를 “한국의 문화사와 더불어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종교”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 “종교문화사의 바닥을 흐르고 있는 물줄기”이기 때문에 한국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75년에 빛을 본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는 그러한 그의 관심과 연구의 결산이라 할 수 있다.

 

2) 무교 연구의 결과

(1) 무교를 기독교가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종교적 영성을 형성하고 한국문화 형성을 위해 활력소”를 제공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2) “무교적 영성의 승화된 것이 풍류도”요, 이것을 “우리들의 종교적 영성”이라고 이해되었다. 여기서 유동식의 풍류신학이 대두되는 하나의 전환점이 형성된다. 그가 무교적 영성이 승화된 것을 풍류도로 이해하고, 그것이 한국종교사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우리의 종교적 영성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면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풍류도와 기독교신학의 관계 설정과 그 존재 상관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한국 신학의 광맥」(1982)은 이러한 풍류도를 토대로 우리의 종교문화사의 전개를 이해하려 했던 하나의 구체적인 시도였다.

 

3) 풍류도의 내용

(1) 유래: 풍류도는 본래부터 우리나라에 있어온 사상으로서, 이것은 “유불선 삼교의 본질을 속에 담은 포괄적 사상이며, 민중에 접해서는 이들을 교화하여 본연의 사람이 되게 하는 道理”라 했다. 이는 신라의 화랑제도의 설치에 대한 기사 가운데 인용한 최치원의 말에서 유래했다. 그는 최치원을 한국인의 영성을 처음으로 천명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2) 의미: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가 나타난 전형적인 예는 신라의 화랑도였다. 화랑(花郞)이란 풍류도를 몸에 지닌 사람을 일컷는 말인데, 이들은 도의로써 서로 몸을 닦고(相磨以道義),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기며(相悅以歌樂),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면서(遊娛山水) 사람들을 교화하고 풍류를 터득하며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그런 까닭에 유동식은 이러한 풍류도를 “단순한 신선도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대의 제천의례에 나타났던 원시적인 영성이 삼교문화를 매개로 승화된 한국인의 영성”으로 보았으며, 그 핵심을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로 교합”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3) 한국 사상의 기초 이념: “한 멋진 삶”

-“한”: 하나를 의미하는 “한”은 단순히 수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의 뜻이 들어 있는데, “초월적 본체 또는 절대자,” “크다 또는 높다” 그리고 “한울 곧 하늘”이 그것이다.

-“멋”: 멋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미적 감각인데, 여기에도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멋”에는 흥과 율동, 조화와 자연스러움 그리고 자유와 내실이 있다. “멋이란 운치나 흥취에 젖은 유연한 율동이로되, 거기에는 자유스러움이 들어 있고, 그 자유를 자아내는 힘이 속에 있는데서 이루어지는 조화와 아름다움”이다.

-“삶”: 삶이란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개념과 살림살이라는 사회학적인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는 말이라고 설명하는 유동식은 이것이 곧 사람의 개념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온 삶이란 바로 사람됨을 위한 삶”이며 문화적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의 준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근거에서 유동식은 한국사상의 기초 이념을 구성하는 표현으로 “한 멋진 삶”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풍류도에 나타난 “한 멋진 삶”을 가리켜, “이것이 바로 옛부터 한인들이 몸에 지니고 살았던 이념이요, 얼이요, 삶의 목표”였다고 결론 짖는다. 이 “한 멋진 삶”은 앞으로 그의 풍류신학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식의 틀이 되고, 유동식의 전체 신학의 구조를 관통하는 원리가 된다.

결국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시대에 따라 유불선, 그리고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로서 “성쇠의 순환적 원”을 그리면서 전개되었는데(“螺旋三角圓錘의 형상”), “한”(불교), “삶”(유교), “멋”(기독교)으로 구성된 하나의 “풍류도적 구조”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4. 풍류신학

1) 풍류신학의 당위성

(1)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의 진리는 우리들의 종교적 영성인 풍류도의 눈으로써 주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 “한국의 종교문화사 자체가 제시하는 내적인 당위성” 때문이었다. 즉 한국의 종교문화사 전체의 구조적 위치로 보아 기독교는 한국의 풍류문화 형성이라는 결정적인 과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민족이 꿈꾸어 온 풍류문화는 그 완성을 기독교의 복음 안에서 이룰 수 있게 되며, 그러한 “한국 기독교의 선교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풍류신학”인 것이다. 유동식이 전개했던 “나선삼각원추의 형상”에서 볼 때, 가장 마지막에서 풍류문화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 논리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3) “오늘의 새로운 선교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풍류신학을 구상”하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문명은 지중해시대로부터 대서양시대를 거쳐 태평양시대로 넘어가고 있는데, 지금이 바로 제3의 문명인 환태평양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문명의 출현은 “기독교와 동양의 종교, 특히 아시아의 보편 종교인 불교와의 만남”을 불가피하게 했고, 더 이상 “과거의 서구 중심적 기독교 이해에 의한 선교신학에 매달려 있을 수 없게 되었다.”

 

2) “한 멋진 삶”의 신학

풍류신학의 눈으로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풍류도의 구조와 성서에 나타난 복음의 구조를 비교하여 그 일치성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설명하는 풍류도의 구조는 삼태극적(三太極的) 구조, 즉 셋이면서 하나인 3ㆍ1적 구조를 의미한다. 풍류도의 뿌리는 가무강신, 신인융합에서 소원성취를 꿈꾸던 옛 제천의식에 있는데, 노래와 춤은 “멋”을,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한”을, 소원성취는 “삶”을 터 닦는 것이요, 이 셋은 서로 내재하는 삼태극적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 구조의 핵심이 되는 것은 결국 “하느님과 인간이 태극적인 관계, 곧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데 있다.”

(1) “한”으로서 풍류신학: 하나님은 “한”님이시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다”(엡 4:6). 따라서 그분은 선한 자뿐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시며(마 5:45), 모든 피조물이 영광스러운 자유에 동참하게 하신다(롬 8:18-25). 이러한 하나님은 만물을 진화론적으로 창조하셨는데(무기물→생명화→인간화→사회화→靈化), 마지막의 영화된 세계는 자유와 사랑과 평화로 구성되며 그 완성은 종말론적인 미래에 기대된다. 그리고 이 종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영체로서의 부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완성되는 종말은 또한 “기독교문화와 동양 종교문화와 풍류문화가 완성되는” 날이다.

(2) “멋”으로서 풍류신학: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유유자적하는 풍류객이다.” 풍류란 바람의 흐름이며 “하느님의 활동”(성령을 의미)을 뜻하기 때문이다. “풍류객은 단순히 자유를 즐기는 존재일 뿐 아니라, ‘소리’ 곧 ‘삶’의 문화를 창조하는 예술가이다. 성령을 속에 모신 풍류객은 막힌 담(죄)을 헐고, 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창조하며 살아간다.(요 20:22f., 엡 2:14). 이런 뜻에서 풍류신학은 성령의 신학이요, ‘멋’의 신학이다.”

(3) “삶”으로서 풍류신학: “풍류객의 선교적 사명”을 언급한다. 풍류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接化群生)처럼, 성령을 모신 풍류객의 삶의 양식도 “단순히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명” 속에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동참한 새로운 존재의 삶이요, ‘한의 신학’을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동참하는 선교적 사명은 “자기중심주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리고 “사회적인 악의 세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국이 안고 있는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결론

유동식은 한국의 기독교 사상이 점차 “신인합일에 기초한 ‘멋의 신학’과 포월적인 ‘한의 신학,’ 그리고 인간화를 향한 ‘삶의 신학’을 형성하면서 전개된다”고 규정하고, 이 세 유형의 사상은 유기적인 하나의 민족적 이념으로 수렴되어야 할 것을 기대한다.

또 “우주-종교적 신학”의 핵심은 우주의 진화에서 도달하게 될 종교적 영성세계에 있다. 이 영적 세계의 형성은 자기부정을 매개로 궁극적 실재와 통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동서 종교들 속에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구조가 된다. 필경 우주의 종말[자유, 사랑, 평화로 구성된 세계/ 기독교문화와 동양종교문화와 풍류문화가 완성되는 날]은 하나이다. 다양한 종교들은 제각기 자기의 몫을 담당하면서 인류의 종말론적 꿈인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형성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이것을 그는 동시에 “풍류도의 논리적 귀결”이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말한다.

 

5. 예술신학의 모색

1) 동서양의 차이

“동양은 대체로 사물들을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요소를 통해 탐구하여 왔고, 서양은 사물들을 이론적(理論的, theoretic) 요소를 통해 탐구하여 왔다.”(F. S. C. Northrop)

 

2) 예술신학의 과제

“창조적 문화형성의 공통적 사명”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 “불교가 철학적 깊이를, 유교가 도덕적 정갈함을 보여주었고, 이제 기독교가 예술적 상상력을 공헌해야 한다.”

 

3) 예술과 예수

예술은 종교의 전경이고, 종교는 예술의 후경이다. “영성과 종교문화는 둘이면서 하나요, 종교문화와 예술문화가 또한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의 빙산 위의 두 봉우리와도 같다.”

“종교가 신적인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요, 문화가 인간적인 역사, 곧 시간과 공간 안의 현상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종교와 문화 사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예술은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심연을 없이하는 복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유동식은 하나님을 최초의 예술가로 이해한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예술작품, “예술작업의 역사적 현실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과 시간이 만난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동행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전경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후경이다. 그리스도는 실로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이요, 그의 복음은 예술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승화시키는... 최대의 예술가”다.

 

6. 평가

1) 한철하: 첫째로 유동식의 풍류신학에는 민족이념이 절대화 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풍류신학의 내용이 “형식논리의 틀에 무리하게 서로 억지로 맞붙이는 어색함”이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한 멋진 삶”의 신학사상의 모호성이다.

 

2) 주체와 객체의 문제: 토착화의 주체는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라 “한국인의 영성”인 풍류도가 되어 버렸다.

 

3) 도식화의 획일성: 풍류도의 삼태극적 구조 안에서 “한 멋진 삶”을 통해 모든 종교의 차별성을 무시해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하나의 틀 속에 유불선 그리고 기독교를 혼합해 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이 불교로, “삶”이 유교로, “멋”이 기독교로 해석되다가도, 이들은 각각 다시 기독교의 하나님,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 신학계의 세 유형인 “교회적 보수주의 사상”과 “사회적 진보주의 사상” 그리고 “문화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연결된다.

 

4) 1980년대 급변하는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그의 풍류신학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V. 일아(一雅) 변선환의 대화신학

 

1. 생애(1928-1995)와 활동

1) 1928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했다. 19세에 신석구 목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기독교적 실존”으로 거듭났다.

2) 1948년 평양 성화신학교에 입학, 그곳에서 진보적인 신학수업을 받고 슐라이어마허, 리츨 등의 신학자들을 알게 된다.

3) 1960년 한신대학교 대학원(Th.M)에서 박봉랑(바르트 전공)과 서남동(틸리히 전공)을 만나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4) 미국 드류대학(1962-63, 1966-67)에서 실존주의 신학을 칼 마이켈슨으로부터 배웠다.

5) 스위스 바젤 유학(1976)이후, 3B(Barth, Bultmann, Buri) 사이에서 신학을 해나갔다. 특히 불트만의 좌파 프리츠 부리의 영향으로 비케리그마신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구속사적 배타성을 제거했다.

6) 1988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7) 1992년 불교와 대화를 시도하며 대화적 선교론을 주장하다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월간목회」, 1977. 7)로 교계의 찬반논쟁에 휘말린다. 결국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과 학장직 모두를 박탈당했다.

 

2. 종교간 대화의 토대

웨슬리의 선행은혜 사상에 기초하여, 기독교인은 물론 교회밖에 있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사랑과 관용을 베풀라는 하느님의 지상명령을 통해, 종교간 대화의 토대를 삼는다.

 

하느님의 주권과 공의는 우선적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에 조화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웨슬리 자신의 신념이었으며, 바로 이것이 칼빈적 이중예정론을 거부하는 근거이자 선행적 은총론을 강조하게 되는 이유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선생님은 선행은총론을 칼 라너의 익명의 기독교인 논리와의 동일선상에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3. 타종교와 관계

타종교와 관계는 “개종이 아니라 대화”여야 한다는 것이 대전제가 된다(John Macquarrie, P. Tillich). 서구 신학자들은(Fritz Buri를 포함하여)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라고 하는 전제하에서 일방적으로 기독교 서구가 동양에 대하여 문화적인 변혁을 일으켜야 된다는 사명을 말한다.” 이런 태도는 “일방 통행적인 십자군 멘탈리티로서 문화 종교적인 제국주의적 정복의 사고 형식”을 드러낸 것이다.

 

자기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가장 고마우신 분이라고 보는 사람은 바로 그와 같은 체험을 통하여서 자기 친구들의 어머니도 존경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일편단심 때문에 우리는 결코 친구의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고 내 어머니만 어머니라고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일상체험입니다. 성숙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에 주제적으로 관계하면서도 다른 교파 사람과 다른 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와 양심을 존중합니다.

 

종교적 다원사회에서 기독교만 구원의 길이요, 성서만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고방식은 기독교 제국주의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타종교를 해치고 종교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저해하고 분쟁을 조장하는 세계평화의 적이다. 타종교는 “복음에의 준비(preparatio evangelica)”도 아니고 우상숭배도 아니다.

 

아세아의 기독교인들은 아세아의 종교인들과 함께 아세아의 종교적 영성이라는 요단강과 간디스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겠지만 아세아의 역사와 함께 오래된 절대빈곤의 과제와 싸우기 위하여 아세아인들 사이에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西洋志向을 깨치고 나아가며 하나의 세계 공동체의 형성을 지향하며 골고다로 향하는 고난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 경우 타자를 개종시키려는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타종교를 대하려고 한다는 것은 절대금물이다. 지구가 여러 위성들 가운데 하나이듯이 기독교도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4. 선교의 목표

교회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서로 사랑과 진리를 확장하는 인간화의 과제에 있다. “선교란 세계를 그리스도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역사의 원천이자 목표를 지향해서 나아가도록 인간들을 서로 촉구하고 격려하는 종교 상호간의 해후로 이해되고 있다.”

 

5. 한국 교회가 포기해야 할 우상 세 가지

1) 종교에 대한 서구적 편견: 전통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필요하다. “예수 천당” “개종주의적 십자군정신”을 극복해야 한다.

2) 교회중심주의: 성서와 교리를 우상화하는 근본주의, 조직과 제도를 절대시하는 교회론적 근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3) 그리스도론의 배타적 절대성: 파니카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지지한다. 파니카의 이론에 따르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명제는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명제로 전도될 수 없다.”

 

6. 신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

변선환은 자신의 대화신학을 “신 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명제는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명제로 전도될 수 없다.” “그는 ‘종교란 여러 가지 가지가 무성한 하나의 나무이다. 종교를 가지라고 보면 많고, 나무라고 보면 다만 하나이다’라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여 다원 종교성의 하나인 뿌리를 갈파하고 있다.”

“모든 강은 바다로 간다.... 큰 물은 경사를 따라서-인종이나 시대나 영혼에 따라서-서로 다른 강바닥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같은 물이다.... 가라. 큰 바다를 향하여 흘러가라.”(라마크리슈나의 말 인용)

“지구촌이라는 한 배에 타고 있는 인류의 생존이 문제되는 위기 때에, 지구를 구원하는 엄숙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인류의 소수 집단이 되어가고 있는 종교인이 제시하는 이상상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선의의 사람들, 무신론적 휴머니스트들과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는 폭넓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려고 한다.”

 

7. 평가

1) 김영한: “기독교 사상과 타종교 사상, 그리고 동양문화사상의 내용적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혼합주의 내지 혼용주의에 빠지고 있다.... 변선환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사도들과 역사적 기독교가 전해온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다 그리스도, 공자 그리스도 등으로 변질시키는 혼합주의에 떨어지고 있다.”

 

2) 이정배: “신학자로서 선생님은 철저하게 진리에 대한 대안적 물음에 철저한 분이였다. 그래서 그와 대화했던 종교를 달리했던 벗들이 그분을 참된 기독교인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의 정체성과 유일회성을 확립하는 것은 내가 너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너의 일부일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하다는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을 제안하긴 하였지만, 모든 것이 제안으로만 남아있고 토착화신학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VI. 종합 평가

 

1. 긍정적 측면

1) 서구 기독교 중심의 신학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기독교를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재해석했다. 전통문화와 해석학적 대화를 시도했다.

 

2)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배타성을 견제하고 보완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한국 교회에 문화적 다양성을 제공해주었다.

 

2. 부정적 측면

1)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를 여러 종교와 평준화시켰다. 또한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한국 문화전통을 기독교의 복음과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기독교의 독자성을 약화 내지는 제거했다.

 

2)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역할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한국 기독교의 철저한 순교적 신앙을 희화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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