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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에 내는 헌금의 성서적인 성격에 대하여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0. 12. 18:08

교회에 내는 헌금의 성서적인 성격에 대하여



 


 

1.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헌금

 

1) 구약의 제사

 

제사절기

 

제사절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순례 절기와 정경절기라는 것입니다.

순례절기란 남자들이 1년에 세 번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말합니다.(23:14-17, 34:21-24)

 

순례 절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유월절, 칠칠절, 오순절(초실절, 맥추절이라고도 함),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월삭

 

정경절기

율법에서 지키도록 명시된 날들로 안식일, 월삭, 안식년, 희년, 등이 있는데

이때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멈춘다거나, 토지를 쉬게 한다거나,

노예를 풀어준다거나 하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 했습니다.

 

제물

대체적으로 제물은 순례절기에 드려 졌고, 제물들은 제단(Altar) 위에 받쳐서 드렸습니다.

제물은 소, , 비둘기, 곡물, , , 향 등을 드렸습니다.

 

이 복잡한 제사들이 구약에서 시행이 되었던 것은 죄인들의 속량과

하나님과의 교감을 위한 수단과 방법,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행위였습니다.(8:5, 13)

 

구약에서의 십일조

 

족장들의 십일조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국하던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주었습니다.

2. 야곱의 서원기도에서 십일조

나에게 축복해 주셔서 나로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25:19-22)

3. 특징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된 것들이 아니고 고대인들의 관행에 의한 것들이며

동시에 사람 편에서 조건적 성격을 가진 언급들이란 점은 율법의 요구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4.율법의 십일조

1) 민수기 1822-32절에서 명시한 것은 레위인 들로 회막(성막) 봉사에만

전념하게 하기 위하여 레위인들을 위해, 기업을 받은 다른 족속들에게 명령 된

것입니다.

2) 신명기 126-14절에서는 모든 제물과 함께 십일조를 내게 하고 그것을 택한

곳에서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3) 신명기 2612-13절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도록 명령합니다.(구제비 성격)

4) 사무엘상 815절에서는 소산의 십일조를 관리와 신하에게 주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세금의 성격)

5) 느혜미야 135절에서는 십일조는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에게 주도록

명하고 있습니다.(인건비)

6) 말라기 38-10절에 기록된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 말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곡간이 차고 넘치도록 축복한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말라기 선지가 십일조에 대하여 말할 당시 배경은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황폐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 들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 삶의 정착하는 일에 바빴고 자기기반(재산) 구축에

열심일 뿐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로 지켜야할 최소한의 의무(규례)들마저도

제대로 지키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레위인 들은 백성의 십일조가 없으니 손 놓고 앉아서 굶어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도 소나 양을 키워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1:14)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히 하나님 섬기는 일까지도 번폐스럽게(귀찮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도 실하고 좋은 것은 뒤로 감추고, 도적질한 것, 저는 것,

병든 것들로 제물을 삼아 드리는 짓을 하게 됩니다.(1:8, 13-14)

이와같은 상황에서 절망감을 느낀 말라기 선지는 위와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의 십일조 언급은 율법제정의 기본 뜻에서 이해되고 해석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성격을 요약하면

*고대인의 관행에 의해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 들의 몫으로

*(나그네)과 고아와 과부의 구제비로

*정부조직이 설립될 때 관리들의 인건비로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들의 인건비로 지출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십일조 성격은 헌물이지 제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제물(예물)과 헌물에 관해서는 명확한 성격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와 성전건축 헌금 같은 것입니다.

 

제물에 관해서 제물은 자기가 믿는 신께 바치는 제사제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경우는 인간들이

임의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된(명령된) 방법에 따라

드려지는 것이 제물이 갖는 특징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요구(지시)하심에 어긋나는 제사제물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거나 진노하셨다는 사실을 간과(看過) 해서는 안 됩니다.

(4:4-5, 15:10-14, 삼상13:8-14)

 

제물규정은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 편에서 직접 규정들을 정하시고

지시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제물의 경우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출애굽기29장과 레위기의 전장에서 제사제물들에

대해서 설명 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에 관해서는 영어로는 몇 가지

구별이 있습니다.

 

*gift of money- 돈을 선물 한다, 돈을 기증 한다.

*Contributor- 기부, 기증, 기고, 공헌 하다.

*Donation- 주다, 기증하다, 기부하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가 Donation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받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단체, 혹은 국가기관, 각종 구제비 등에 해당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물처럼 하나님의 규정된 요구에 의해서 받쳐지는 것이 아니고 주는

자가 자기 자의적(自意的) 판단에 따라 주는 것입니다.

자의적 판단에 의해 내는 헌금이란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액수)의 많고 적음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주는 자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제물과는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을 거두고, 목사님은

헌금기도를 주여! 여기 당신의 백성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 예물을 바치오니

이 예물을 받으시고, 이 예물을 드린 손길들을 기억하사 크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성도들은 아멘, 아멘을 합니다.

예배순서 속에서 시행된 헌금(주일헌금, 십일조, 감사헌금 등)을 마치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헌금은 제물(예물)이 아닙니다.

 

5. 구약에서의 연보

역대하 349절 또는14

여기서의 연보는 성전 수리비로 쓰기위해 성전 여인들의 뜰 내부 벽에

연보 궤를 놓고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넣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과부가 연보 궤에 엽전 두 푼 넣는 것을 보시고 칭찬했던 것이

바로 이 연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12:41-44)

고궁이나 유적지 등지에서 입장료를 받아 고궁이나 유적지의 유지 보수비로

사용 하는 것과 비슷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연보 역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6. 포로이후의 고르반 (Corban)

고르반 제도가 생기게 된 기록이 별로 없어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게 되면서 본국에서처럼 율법에 명시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여건이 아닌지라

짐승으로의 제물 대신에 현금으로 내게 했던 것이 고르반제도의 출발로 보는

것이 대체적 견해 들입니다.

 

이후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은 고르반 성격을 갖게 되었고, 고르반의 영향은

어쩌면 지금의 교회의 헌금 문화를 제공하게 된 바탕이 된 듯도 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유전(遺傳)과 고르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을 예수께서 비판한

말씀을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사람의 유전을 더욱 지켰었나 봅니다.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 하라, 부모를 훼방 하는 자는 죽으리라’(20:12, 7:10)

하지만,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부모를 공경 하는 것 보다 고르반’(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유익이라 해서 고르반은 바치면서 부모 돌아보는 것은 외면을 했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책망 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 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 도다하고 이사야선지의 말을 인용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7:6-7)

 

네 부모를 공경하라한 것은 십계명에 명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고르반제도는 사람이 만든 유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유전을 쫓느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폐한다는 것입니다.

 

7. 신약성경의 헌물(헌금)에 관해서

 

신약 성경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성격의 헌금을 요구한

기록이 없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바쳐라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연보로 번역된 곳만 몇 군데 있을 뿐입니다.

 

1) 바울서신에서의 연보

특히 바울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바울은 여러 단어를 써가며

연보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연보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로기아 : 모금한다, 수금 한다 의 뜻(고전16:1)

*하폴로테스 : 기쁨으로(고후8:2)

*하드로테스 : 풍성한, 큰 선물, 관대히(고후8:20)

*율로기아 : 좋은 모금(고후9:5)

*코이노니아 : 교제(고후9:13)

 

이와 같은 단어들을 써가면서 연보를 요구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심히 곤경에 처해 있음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 해서

이방인 교회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11:27-30, 15:25-26)

그래서 억지로’ ‘인색함으로하지 말고(고후9:5, 7, 14) 또는 다른 이에게

흠 잡히지 않도록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면서 모금을 합니다.(고후8:20-21)

이 일은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벽을 허무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후9:12, 5:27)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연보로 번역된 로기아수금하다’,

거둬드린다의 뜻으로 지금교회에서 처럼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2) 십일조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2323-24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11:42 참고)

 

위 본문 중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신 것은

십일조도 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란 것입니다.

본문만 갖고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누구에게 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모세의 제자라고 자랑삼고 있는(9:28)

바리새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본문은 지금 바리새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란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에는 성경기록 배경과, 말씀한 의도와, 대상과, 시제(時制) 등을

참고해서 포괄적 또는 구체적인 검토를 통해서 해석되고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십일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외식(外飾)

책망함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 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하루살이)

잘 내는 것 자랑하지 말고 의(), ()과 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약대) 이란 걸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8.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되는가?

 

1)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에 대하여

지금까지 헌금()과 제물의 성격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은 곧 제물의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될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 불완전한 제사제물이 되었다는

뜻이 되며, 우리의 신앙행위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불신한 결과가 됩니다.

 

구약에서 요구했던 제사는 피의 제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9:11-22)

피의 제사는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제사를 드려 완성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여러 피의 제사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요, 모형이요,

그림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8:5, 9:9-10)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든 하나님께는 드린다. 바친다.’하면서 예물처럼

드릴수가 없고 드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입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러 왔나이다.’

하였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8-14)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제사장들은 매일 같은 제사를 드리지만 사람의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리스도로 제물이 되어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당신의 몸()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9:11-122)

고 하셨으며 자기를 단번에 제사를 드려 죄를 없게 하시고(9:26-28)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제사는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이다.

제사는 더 드릴 것이 없는 것이다.

아주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다.(참고, 17:11, 14;24, 6:53-54, 5:9, 1:7, 2:13)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헌금을 제물처럼(예물) 드린다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제사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뒤엎는 일이 되어

불신앙의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물을 요구하신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내 주신 분입니다.

주께서 인간들에게 헌금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거듭거듭 언급 하신 것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삼상15:22, 9:13 12;7,)고 하십니다.

 

2) 주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내가 주안에 주님이 내안에() 하심은 주님과 우리가 한 몸(同體)이 되었다는

것이고 한 몸이 되었다면 내 것이 주의 것이고, 주의 것이 내 것이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믿는 자)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들이기 때문에

재산을 따로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산이 따로 없는데 누구 것을 갖고 누구에게 바친단 말인가요?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항상 별거를 한다는 표현인 셈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며,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를 섬기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신과 한 몸이 될 수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믿는 자와

()사이에는 항상 객관적 관계, 곧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신을 섬겨야하기 때문에

그 신을 만나려면 당연히 예물을 들고 와서 그 신 앞에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곧 종교행위입니다.

 

신자에게 헌금을 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사이를 자꾸만 갈라놓는(떨어지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할 자를 그리스도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잘 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고 독려하는 것은 훌륭한 종교인은

만들 수 있어도 훌륭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는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3:6-7)

 

우리가 지금까지 헌금생활을 해온 것은 유대교의 율법과 로마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종교 문화의 유산입니다.

 

3)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주는 자와 받는 자에 대하여

신앙이란 믿는 자의 뜻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이 되는 이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라’(17:24-25)

 

이 말씀은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언급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니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殿)

계시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친히

주시는 분’(7:48-50)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시인의 말씀도 들어보기로 합니다. ‘산림의 짐승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 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 이로다

(50:10-12)

 

바울의 또 다른 곳의 증언도 들어봅니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12:14)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먹이시고 살게 하시는 것이지

인간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이 존재하시거나 하나님의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인간들처럼 자기의

신께 제물이나 헌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는 자(드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호세아선지가 말 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원하심이 아니라

당신이 만물의 주가 되신 분이란 사실을 알기를 원하시고 인정하기를

원하신 분입니다.(6:6, 3:6)

 

결론

하나님의 구속사의 목적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제사를 통하여 재물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의 피를 뿌려서 인간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답을 바라고 하신 일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그리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고 확신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다시 구약 율법으로 돌아가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단번에 제사를 드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려야 구원받고, 죽어서 좋은데 가고, 현세에서 재물 복

많이 받고, 자녀들 좋은 대학 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적인 헌금(연보)은 받는 대상과 성격과 내용이 지금의 교회구조에서 내는

헌금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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