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26-31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20:53
성도님들 가운데 안경을 쓰신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시력이 참 좋았는데 조금씩 눈이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글씨가 아른거립니다. 이제는 책을 가까이 놓고 보는 것보다 조금 떨어뜨려 놓고 보는 것이 잘 보입니다.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 모음 ‘ㅏ’와 ‘ l ’ 가 분간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도님들 가운데는 돋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번갈아 쓰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시력이 흐려지면 불편하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시력이 나빠 사물을 제대로 못보면 경우에 따라 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인류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함으로 영적인 시력을 잃었습니다. 영적인 시력을 잃었기에 인생을 살면서 영적으로 중요한 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의 가치 안경을 쓰고 살아갑니다. 어느 가치의 안경을 쓰고 사물과 세상을 보느냐가 세상을 살아가는 관(觀)이고, 세상을 보는 창문입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인생관,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관(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과 세상이 달라집니다.

기독교인은 ‘십자가 도’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도’의 안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가치를 가지고 인생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 의 안경을 끼고 자신과 세상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말하며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지혜, 능력, 문벌이 좋은 사람을 택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련한 사람, 약한 사람, 천한 사람, 무지한 사람들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자랑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12제자를 보면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보면 그들은 한결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몇 명은 어부였습니다. 천한 직업이었던 세리도 있습니다. 세상에 불만을 품고 무력으로라도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당시에 얼마나 평범하고 미천한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고관들이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아그람마타’라고 말합니다. 이는 ‘배우지 못한 무식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영어에서 문법을 ‘그래머’라고 합니다. 이는 헬라어 ‘그람마’에서 온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그람마’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이 베드로를 향해 ‘아그람마타’ 라고 한 것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교회의 지도자라니 웃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12제자는 소위 고관들이 보기에 별볼일 없는 무식하고 천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주역이 되지 못하고 조연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을 증거하는 일에 주연으로 세우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힘없는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심으로 힘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뤄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될 때까지 그 험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초대교회를 섬겼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노예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 로마 시민의 3분의 1이 노예였습니다. 복음이 노예와 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온갖 박해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었습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노예들은 쇠사슬로 묶고 학대하는 자신의 주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주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노예들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의 변화가 결국은 황제까지 믿게 되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기독교가 국교로 선언되고 교회가 세상적으로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영성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권력과 부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황이 황제를 임명할 만큼 교회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정적으로 풍부해진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을 지음으로 교회의 힘을 자랑했습니다. 중세 시대는 기독교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기독교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대를 사람들은 암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중세 시대가 가장 어두운 시대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만의 평가가 아닙니다. 기독교 자체에서도 그 시대를 가장 불행하고, 부끄러운 시대라고 말하며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기독교 자체에서도 박해와 순교를 당하던 가운데서도 순수한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있어도 세상의 권력과 부를 맘껏 누렸지만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 버렸던 중세 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사도 세계 교회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에 의해 이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이 이땅에 들어올 때 양반들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천민과 평민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양반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박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인 천민과 평민들은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이 땅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그 복음의 씨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때는 60,70,80년대입니다. 이 시기는 독재 체제 속에서 온 나라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속에 있었습니다. 정의가 무너지고 악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억압의 정치에 눌려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시름에 잠겨 있고 자포자기 하고 있을때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 당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불의한 곳에서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억압으로 숨을 쉴 수 없는 곳에서 자유를 외쳤습니다. 민족의 분단의 아픔을 끌어 안고 통곡하며 평화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위로를 받았고 교회가 외치는 정의와 자유를 통해 희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희망을 본 사람들은 교회로, 교회로 찾아 왔습니다. 여의도에 100만명이 모여 하나님께 울부짖는 모습은 세계 교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교회는 나라가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도리어 급성장을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교회 중에 우리 나라에 6개가 있다고 할만큼 대단한 성장을 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교회의 힘이 되었습니다. 그 힘은 교회의 건물 크기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어느 동네에 가든지 가장 큰 건물은 교회 건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수백억원, 수천억원을 들여 짓는 교회당을 보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교인의 숫자가 1200만명을 넘으면서 세상의 권력도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아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눈치를 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해졌습니다. 건국 이래 10대 대통령 중에 기독교인 대통령이 이승만,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현재 이명막 대통령까지 5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중에 3명이 장로입니다. 국회 의원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많은 수가 기독교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인 사랑장의 마지막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말씀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소망이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출석한 소망 교회 출신들의 막강한 힘을 빗대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교회와 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그만큼 힘있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당 건물은 웅장해지고 교회의 재정은 차고 넘칩니다. 교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있습니다. 기독교의 위상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납니다. 세상이 교회의 부와 힘을 부러워하기 보다 비웃고 비판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인해 존경받기 보다 그 힘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모습이 중세 교회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는 듯합니다.

교회 속에서 예언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불의를 보고도 불의하다고 외치지 못합니다. 교회가 불의를 향한 정의의 칼날이 무뎌져 있는 듯합니다. 교회보다 세상 사람들이 먼저 불의를 보고 불의라고 말합니다. 아니 교회가 불의를 행하고 불의를 감싸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쇠고기 수입 문제로 온 나라가 술렁입니다. 매일 저녁이면 수많은 시민들이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쇠고기 수입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수십년 동안 부르짖으며 쌓아 왔던 소중한 정신과 가치가 경제라는 가치앞에 무차별하게 무너진 결과입니다. 역사의식도, 민주주의 정신도, 법과 정의도 경제라는 가치 앞에 모두 내팽개치고 포기한 결과입니다. 좀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소중한 정신과 가치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우리들의 사회 의식의 가벼움이 부메랑이 되어 찾아온 슬픈 결과입니다.

기독교 장로를 절대적인 지지 가운데 지도자로 세운 교회는 이 아픈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경제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정직과 가치가 소중함을 말해야 하는데 교회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경제의 가치를 우선의 가치로 인정했습니다. 부정을 부정이라고 말하지 못했고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와 또 다른 촛불을 우리 마음과 교회에 밝혀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함에 대한 회개의 촛불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정신을 중심으로 바르게 서게 해 달라는 간절함이 담긴 촛불입니다. 교회가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를 외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돌들을 통해서도 외치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외치지 않으면 세상의 연약한 이들을 통해 외치게 하고 그 외침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들이 자랑하는 힘을 부끄럽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우리 행복한 교회가,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중세교회의 모습이 아닌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세상의 가치를 변화시켜 나가는 삶을 사는 가운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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