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십자가의 도/고전1:18-2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20:52

어느 미국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찾아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아프리카에 오래 머물면서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맸지만 다아아몬드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낙심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마을에 들렸을 때 동네 아이들이 길거리에 앉아서 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을 무심결에 들여다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깎아 놓으면 예쁘지만 깎지 않으면 꼭 차돌과 같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둥글둥글한 돌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아이들에게 껌을 하나씩 나눠주며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는 돌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껌을 주며 이와 같은 돌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껌을 받아 들고 좋아하며 다이아몬드 원석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가공해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보석으로 가공된 다이아몬드는 부르는 것이 값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의 단단한 성질을 이용해 쇠와 유리, 콘크리트를 자르는 도구와 기계들을 만들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보석만이 아니라 산업화에 없어서는 안되는 광물질이 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이아몬드는 단순히 단단한 돌일 뿐입니다. 아이들의 손에서 공기돌로 취급되며 길거리에 버려지기도 합니다. 껌 하나와 다이아몬드 원석을 바꿀 만큼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놓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 생명을 걸고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신 ‘십자가의 도’가 바로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조롱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미련한 짓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이유와 그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끌어 안고 무릎을 꿇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담긴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합니다.

성경은 온 인류가 죽음의 두려움과 온갖 고통 속에서 사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창세기는 죄가 인류 속에 들어오는 과정과 그 죄로 인해 겪게 되는 죽음의 절망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 거하게 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세우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는 창조자와 창조물의 관계를 세우는 기준이었고 법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물인 사람의 관계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창조물인 사람이 창조자인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분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사단의 교묘한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에덴에서 추방 당하고 에덴의 영원한 삶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죽음의 공포와 온갖 두려움에 매여 살았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전쟁과 테러, 자연 재해와 기근, 폭력과 음란이 만연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의 죄, 불순종의 죄’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사람의 선행이나, 사람의 지혜,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끌어 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치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십자가의 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두 부류로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혜, 과학의 힘으로 모든 질병과 인류의 문제를 극복하고 결국은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추구한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영어로 필로소피입니다. 필로는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인류가 가지고 있는 죽음, 고통, 질병과 자연 재해 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 즉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창조자인 신이 인간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천하고 천한 사형의 틀인 십자가 위에서 창조주 신이 죽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생각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인류의 구원이 인간의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메시야가 오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여주시오, 표적을 보여주시오’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다윗 왕과 같은 능력을 가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능력한 것이었고, 우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마지막까지 조롱하며 외치기를 ‘네가 메시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를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외칩니다. 끝까지 표적, 능력을 요구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나무에 달려 죽는 자가 가장 저주 받은 자로 나오는데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헬라인과 유대인과 같은 속성의 믿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그 표적이 보이는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병낫게 해 주십시오.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보게 해 주십시오. 표적을 구하고 능력을 구합니다. 표적을 보면 놀라고 표적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믿음입니다. 항상 놀라운 일들이 내 주위에 일어나야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받습니다.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불안해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구도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지혜와 지식을 찾아 나섭니다. 항상 어느 곳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 있는가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전을 가르치는 곳에 가서 원전을 놓고 공부를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원전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배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원전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새로운 성경에 대한 배움을 자랑해도 그 지혜가 십자가의 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본문을 쓴 바울은 자신이 바로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과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적인 삶을 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율법에 정통한 랍비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사기꾼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비웃고 조롱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180도 바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변화를 본문 22절-23절을 통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말로 보면 ‘스칸달론’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스칼달론’ 이라는 말에서 나중에 ‘스캔들’이라고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을 수없는 이야기로 남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비웃었던 십자가에서 아주 놀라운 ‘십자가의 도’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은 만난 후에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신비적인 종교적인 행위를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집니다. 십자가의 도로 바울은 만족합니다. 바울은 ‘내가 평생에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를 향해 바울과 같은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고 고백함으로서 ‘십자가의 도’를 통해 만족하는 삶입니다. 더 큰 능력을 보기를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불안해 하며 또 다른 능력과 표적을 찾아 나서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으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통해 깨닫게 하신 구원의 지혜를 가지고 선포하며 섬기며 사는 삶입니다. 이루어 가는 구원이 아닌 이미 십자가 안에서 이뤄진 구원을 감사하며 선포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힘찬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성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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