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능력의 십자가/고전1:18-24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20:52
우리는 가끔 인간의 무능, 무지,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부적을 갖고 다니면 안전하게 지켜주고, 재앙을 당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들 가운데도 보면 십자가의 모형을 가지고 부적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의미를 부여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항상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8절에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음 없는 자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무능력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렇게도 처절하게 당한 고통을 보고 있노라면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는 고백을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물론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지난 주일에는 “내려놓음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려놓음도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첫째,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습니다.

빌립보서2:17절 말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위해 자신을 전제의 제물로 드리더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기뻐하겠는 고백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중국선교를 위해 평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에게 젊은 선교사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선교를 하시려고 합니까?” 젊은 선교사들이 대답을 했습니다. “이 황무지 같은 중국 땅에 교회들이 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중국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미개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중국이 사랑스러워서도 아니고, 이곳 생활이 즐거워서도 아닙니다. 모래바람이 일고 미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문명의 불모지가 무엇이 그리 좋겠습니까? 이처럼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이 일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에 붙잡힌 자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즐겁지 않은 것을 즐거워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기뻐하며 걸어가게 됩니다. 십자가는 나를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만듭니다.

둘째, 희생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하면 생각하면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달리십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달리신 것은 전적으로 희생입니다. 내어 놓을만한 이유가 없이 그냥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전적인 희생입니다.

프랑스의 뒤믈린 신부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25년을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1899년 뒤물린 신부가 외출 중에 한 신자가 성전 건축비를 헌납하기 위해 많은 돈을 가지고 신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제관 문지기가 망치로 그 신자의 머리를 때려죽이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피묻은 망치를 신부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둔 문지기는 신부가 돌아오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방금 큰 죄를 지었으니 고해성사를 들어주십시오”
신부는 문지기를 데리고 성당으로 들어가 그의 고해성사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지에 들어와 보니 방안에는 신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신부는 문지기의 고해성사를 들었으므로 그의 소행인줄 알면서도 잠자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경찰이 조사한 결과 신부의 서랍에서 나온 피묻은 망치와 문지기의 거짓 증언으로 인해 신부는 살인범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는 어떤 경우라도 고해성사의 비밀을 누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지기는 교활하게도 그 점을 악용했던 것입니다. 신부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악마의 섬에 종신유배’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악마의 섬은 프랑스의 영토로서 심한 더위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신부는 여기서 중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의 유배생활 25년이 끝나가던 어느 날 파리시 빈민촌 어느 판자 집에서 늙은 병자 한 사람이 유언을 남겼습니다. ‘뒤믈린 신부님이 살인죄로 종신유배된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때의 살인은 사제관 문지기로 있었던 내가 저지른 것이다. 나는 살인 직후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했기 때문에 신부님은 무죄를 주장하지 못하고 종신형을 받았다. 진짜 범인인 나는 죽는다. 제발 신부님이 누명을 벗고 다시 돌아오도록 해달라‘

이렇듯 진범이 밝혀지자 뒤믈린 신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 동안 신부를 욕하고 성당을 떠났던 사람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다시 모여 들어와 신부를 맞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허물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생명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희생을 받은 우리 또한 구원하기 위해 이웃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를 통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셨습니다. 그 희생의 댓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 마다 능력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로 요구가 되어 지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희생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전적으로 100% 희생의 덩어리였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희생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희생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을 고스란히 당신이 짊어지고 가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기에 희생의 능력이 당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뒤믈린 신부는 희생을 능력을 보여준 아름다운 사건이라 여겨집니다.

셋째, 나눔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유월절 음식을 준비한 후에 마지막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떡을 직접 떼어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당신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창과 가시와 못과 채찍에 찢어진 살입니다. 그리고는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그것은 제자들, 인류를 위해 흘리는 피, 언약의 피, 생명의 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결국 자신의 살과 피를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 나뭄은 곧 온 인류에게 돌아가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작은 것을 나누었지만 온 인류에게 구원이 미쳤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래전 미국 스탠포드대학에 가난한 두 학생이 학비를 벌기 위해 그 당시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파데레우스키(1860-1941, 폴란드)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어렵게 파데레우스키 매니저와 연결되어 2천달러에 음악회를 개최하기로 계약을 했지만 1,600달러밖에 벌지 못해 4백달러의 적자가 나고 말았습니다.

이 학생은 어쩔 수 없이 1,600달러를 파데레우스키에게 주며, 나머지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파데레우스키는 “학생들, 그러지 말고 1,600달러에서 모든 비용을 다 제하고 남은 돈에서 각 10%씩 둘아 나눠 가지고 나머지는 내게 주시오”라며 돈을 두 학생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종료후 파데레우스키는 폴란드 수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세계는 계속된 농산물이 흉작으로 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향해 식량지원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폴란드와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폴란드 수상 파데레우스키는 미국 연방식량국 허버트 후버 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파데레우스키가 후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자 허버트 후에게 간절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큰 기대는 할 수 없었지만 당장 절박한 상태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미국으로부터 수만 톤의 식량지원을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폴란드 파데레우스키 수상은 미국의 시량원조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미국의 허버트 후버 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파데레우스키가 후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자 허버트후버 국장이 “수상각하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제가 스텐포드 대학 학생으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수상각하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개최한 허버트 후버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 누구나 서로 섬기며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넘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성찬입니다. 그리고 그 나눔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채찍과 창과 가시에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림 속에 나눔의 능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넷째,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17절 말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닙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요 십자가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다 변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했습니다. 게바가 시몬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깡패, 안악골의 호랑이”이라고 불렸던 김익두는 그가 소문난 깡패에서 한국 초대교회의 목사요 부흥사가 된 것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한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변화된 이후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고장’을 보냈습니다. 과거의 깡패 김익두는 죽었고 자기는 이제 새로 태어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변화를 의심한 사람이 그를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구정물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지금의 김익두는 새로 태어난 사람이오”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성서를 100번 읽었고 그가 이끈 집회수는 776회 설교횟수는 2만8천여회, 교회신척 150처, 병자 치유1만 여명,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명에 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거부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14일 50여명의 신도와 함께 새벽기도를 하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곧 역사의 변화입니다. 당신도 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변화의 출발이자 종착점입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부흥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의 시키고 시내에 위치한 탬플교회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만 남은 고령화 된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교회 앞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목사님이 밖으로 나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앞에 모였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날은 1년에 한 번씩 사람이 교회 종탑에 올라가 십자가를 청소하는 날이었습니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높은 십자가 첨탑에 사람이 올라가 청소하는 그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청소를 마치고 내려온 청소부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거죠?” 목사님은 그 청소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빈 십자가는 아무도 쳐다 보지 않지만 사람이 달린 십자가는 많은 사람이 주목 한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목사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십자가지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우리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떠나가고 텅텅 빈 교회가 되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빈 십자가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를 집시다.” 이때부터 교회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요, 십자가 삶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십자가 삶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교회가 부흥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십자가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사랑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고스란이 담긴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에게서는 사랑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제2차 대전 중 많은 필리핀 병사들이 일본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형편없는 식사와 더러운 환경에 전염병까지 번져 날마다 많은 포로들이 죽어나갔다. 어느 날 심한 상처를 입은 비둘기 한 마리가 철조망으로 날아들었다. 증오와 미움에 가득 차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던 포로들은 정성을 다해 비둘기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비둘기는 현저하게 좋아지더니 급기야 완전히 나아서 스스로 날아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연민과 사랑이 비둘기를 살려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포로들 사이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포로들의 사망률이 60%나 줄어들었다. 바로 사랑의 힘 때문이었다. 사랑 때문에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고 사랑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고 사랑 때문에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듯이 말이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십자가를 연료로 하고 있으면 사랑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예수회의 이그나티우스의 말입니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 십자가지만 처음에 지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에 쉽게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십자가, 무겁게 보이고, 고통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그 너머에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이 들지만 십자가의 능력이 다시 당신의 짐을 져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것이 십자가 짐의 원리요, 지혜롭게 사는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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