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품위 있는 교회/고전8:1-1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35

저는 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다양성의 가치를 발견한다. 큰 아이는 좀 hyper 쪽이다. 감동도 잘 받고, 흥분도 잘하고, 일단 열 받으면 control이 잘 안 된다. 얼마나 성급한지 아직도 중학교 수학시험인데도 덧셈뺄셈에서 하찮은 실수를 잘한다. 대신 마음이 여려서 상대에 대해 배려를 잘하는 편이다. 반면 둘째인 제 아들은 열을 잘 받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열 받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무척 꼼꼼해서 웬만한 수학문제는 잘 안 틀린다. 그러나 동작이 엄청나게 느리다. 뭐든지 걔 하는 스피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모인 우리부터도 뚜껑이 열릴 정도다. 작은 애는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안 하면 세상이 거꾸로 되는 줄 아는 반면, 큰애는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이니까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참 신기하다! 한 배에서 나왔는데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나 이게 바로 다양성의 아름다움이다.
다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다양성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공동체에서 융합이 될 때에는 사정이 좀 달라진다.
제 딸과 제 아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가치가 높은 것이긴 하지만 저희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는 그 ‘다름’이 서로 융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융합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 서로 다름을 가지고 상대에게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 그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였다.
고린도교회는 일단 지식이 풍성한 교회였다.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그랬다.
지식이 풍성하고 문화문명이 발달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그런 도시환경 안에 있었던 고린도교회도 그런 분위기였을 것이라는 상상은 매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몰라서’ 문제가 된 교회가 아니었다.
알 것은 다 알면서도, 그 안에 상대를 세워주는 사람들이 부족해서 문제였다. [1절]

고린도교회는 여러 파당이 있었는데, 그 파당을 나누게 하는 몇 가지 이슈들이 있었다.
음행, 성만찬, 제사 음식, 은사 사용 문제들이 바로 그 이슈들이었다.
본문은 그 가운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다룬다. [1절]
그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육 고기는 거의가 다 우상 신전에 제물로 바쳐진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상상이 가능할 것 같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 내의 A파(베드로파?)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로서 보수주의자들이고 경건주의자들이다. 그래서 그런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B파(자유주의자들/ 아볼로파?)를 향해 이렇게 비난했을 것이다. “저런 부정한 사람들 봤나? 세상에 식욕 때문에 신앙을 변질시키는 저 사람들이 무슨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그러는지 쯧쯧 불쌍한 것들....” 그러면 이 비난을 들은 B파가 가만있겠나? 그들은 A파를 향해서, “저 위선자들 잘난 척 하는 것 좀 봐라! 하나님이 다 깨끗하게 하셨는데 뭐가 문제냐? 복음의 ABC도 모르는 자들 같으니라고!” 아마 이렇게 같이 대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것들을 한 마디로 ‘못난 지식’이라고 평가한다. [2절]
‘못난 지식’이라는 말은 제가 만든 말인데, 알아야 할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않고) 알지 않아도 될 것들만 많이 아는 것을 뜻한다.
A파든 B파든 결국 그 못난 지식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의 이 ‘우상의 제물’은 단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하나의 case study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거기에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운동, 오락, 술, 담배, 여가, 취미, 직업, 전통, 행정, 제도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한 교회 내에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난 하는데 당신은 왜 안 하냐?”, 또는 “난 안 하는데 당신은 왜 하냐?” 하면서 서로 간에 비난의 재료로 삼을 수 있다.

솔직히 저의 어려움은 다른 게 아니다. 제 딸과 제 아들이 어떤 일을 가지고 서로 다툴 때 언젠가는 아빠로서 그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재판관인 제 자신도 혼동된다. 제 딸아이의 항변을 들어보면 거의가 맞는 말이다. 또 둘째 아들 아이의 말을 들어봐도 거의 다 맞다. 교회서도 그런다. A라는 분의 주장과 B라는 분의 주장이 서로 충돌했다. 그 주장이 서로 정반대 이야기다. 그런데 따로 따로 그 주장을 들어보면 둘 다 다 맞는 것 같다. 이게 아빠로서, 목회자로서, 또 당회를 운영하는 당회장으로서 갖는 저의 혼동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이 그들의 각 판단과 주장이 ‘맞고 안 맞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뭐든지 그게 옳으냐 옳지 않느냐를 가려내는 데만 익숙하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사실 거기에 있지 않다.

바울이 이 점을 아주 정확하게 간파했다.
1절 후반부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은 항상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래서 그 옳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 자기정체성이 세워지니까, 지식 있는 자들은 주로 주장하는 자세로 상대를 대한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사랑에는 지식을 cover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지식도 사랑으로 할례를 받아야 하고, 구속을 받아야 한다.
사랑 없는 지식은 상대를 바꾸지 못한다.
지식이 사랑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 지식이 사람을 바꾸게 한다.

바울 사도는 그 말을 ‘덕을 세운다’(건덕)는 말로 바꿔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오’라고 한다.
‘집이나 건물을 세우다’, 또는 ‘지혜, 애정, 은혜나 덕을 증진시키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철저하게 공동체를 전제로 하는 단어다.
혼자서 집을 세울 수는 없다.
나무라는 재료 하나만 갖고 집을 세울 수도 없다.

형광등 달아보셨는가? 여기는 형광등을 잘 안 써서 안 달았다가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 저희 집도 몇 년 전에 달았다[물론 제가 안 하고...]. 그때 느낀 거다. 아무리 배선을 잘하고 조립을 잘해도 천장에 매달 때는 누군가가 붙잡아줘야 한다. 최소한 반듯하게 달렸는지 목측으로 봐주는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달 수 있다.

건덕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성도 개인의 존재가치라는 것은 그 개인들이 힘을 합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지체로서 온전하게 서 줬을 때 의미가 있음을 말해주는 단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모든 것을 깨끗케 하셨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 눈에 보이는 성속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래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음식도 무얼 먹어도 괜찮다.
하나님께서 다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그 문제는 전혀 논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안 먹어야 하는가가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올바른 지식이어도,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올바른 지식마저도 반드시 공동체 내에서 다시 구속받아야 한다.
그랬을 때 그 지식의 능력이 행사된다.
그러면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랑의 자세, 건덕의 자세, 같이 집을 짓고, 상대를 세워주고, 은혜를 증진시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중자대라는 말이 있다.
나의 독단적인 기준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마구 적용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런 경우는 필히 ‘이현령비현령’이 되기 쉽다.

어떤 교회에서 사모가 화려한 옷을 입고 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목사 사모가 말이지, 무슨 돈이 있어서 저렇게 입고 다니나? 목사 사모면 좀 수수해야지” 했다. 그래서 그 비난을 들은 사모는 그 다음에 아주 싸고 약간 촌스러운 옷을 입고 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목사 사모면 공인인데 말이지, 저렇게 칠칠맞아 가지고서야....”라고 했단다. 목사가 뭘 잘 못하면 무능하다 그러고, 너무 똑소리나게 잘하면 너무 똑똑해서 문제다 그런다.

이렇게 되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이래도 비난 저래도 비난이 되어서, 교회는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상처들로만 가득 차게 된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이중자대식의 사고는 철저히 비 복음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지식이나, 자기 지식에 대한 주장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전혀 다른 가치가 하나 더 있다고 그 다음에서 가르친다.
그럼 그게 뭘까? 바로 ‘역설적 자유’라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을 예로 들어보자. [7-13절]
역설적인 자유는 고기를 대한 한 성도 개인이 그 고기가 우상의 제물인가를 ‘알고 먹었는지 모르고 먹었는지’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말은, 알고 먹었으니까 그건 죄고, 모르고 먹었으니까 그건 죄가 아니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자기가 먹는 고기가 우상에게 이미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을 자기도 알고 남도 알고 세상이 다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공중 앞에서 태연하게 먹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특별히 그 사람 주변에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을 때는 절대적으로 조심하라고 그런다.
신앙이 약한 자들이 그것을 보면서, “아 이것은 먹어도 되는 것이구나” 하며 용기를 얻어 그 고기 먹는 일에 쉽게 편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절]
그래서 바울의 평가에 의하면, 그런 자들은 결국 자기의 식욕을 교회 건덕에 앞세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는 개인적인 자유나 식욕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공동체의 건덕이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의 개인적인 자유는 교회의 건덕을 위해,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절제되는 아주 독특한 자유다.
할 수 있으나 남을 위해서 절제하고, 하기 쉽지 않으나 남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으로 더 해야 되는 자유, 그것이 바로 ‘역설적 자유’다.

바울 사도는 9장에서 그것을 자기 개인에게 적용시킨다.
바울은 독신이었다.
그리고 교회가 주는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 삼았다.
“바울이 사도로서 뭔가 결함이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냐?” 하면서.
그러나 그 반대로, 바울이 만약 결혼했더라면 그들은 또 어땠을까?
아마 “왜 결혼하느냐? 결혼 하지 말고 더 충성해야지” 했을 것이다.
또 바울이 사례비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전도자가 왜 돈에 목매고 사느냐?” 하면서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난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한테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고 건덕이고 뭐고 없다.
오직 자기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한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8절]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세워주는 것은 식물이나 물질이 아니다.

사람이 배고플 때 음식 앞에 서면 먹는 그 일이 가장 최선이고 가장 가치 있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 먹고 나면 급속도로 맘이 변한다. 세상에 먹는 일처럼 허망하게 느껴지는 일도 없다. 저는 뷔페식당 가면 특별히 그것을 더 많이 느낀다. 먹기 전 마음과 먹은 후의 마음이 그렇게 현저하게 달라진다.

11절이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그 고기를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먹고 안 먹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먹고 안 먹고’가 교회 전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즉 나의 ‘먹고 안 먹고’가 교인들의 신앙을 증진시키는 쪽이냐, 아니며 그 반대쪽이냐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덕이 안 될 자리면 안 마시는 게 낫다.
나의 어떤 오락을 즐기는 것이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으면 일단 참으면 된다.
‘절제하고 절제하지 않고’가 문제지, 그것을 ‘해야 옳냐 안 해야 옳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게 남을 위하는 거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9장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다: “우리가 이 권(결혼, 사례비)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그에게 가장 중요한 대원칙, 대전제는 당연히 복음 전파였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내 자신 하나 절제시키고 희생하는 것쯤이야 우습다는 식의 각오가 엿보이는 표현이다.
얼마나 훌륭한 모습인가?

우리는 그 반대가 더 많다.
복음의 우수성과 탁월성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감격도 잘하고 순종도 잘한다.
그러나 본인의 희생과 절제 문제가 나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복음전파보다도 본인의 이득과 명예의 문제가 걸리면 양보가 잘 안 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다행히 교회라는 게 우리에게 있다.
교회는 이것을 최대한 고치기 위해서 모여서 노력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호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몸부림이 없으면 교회의 존재가치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세상이 교회의 그 노력을 보고 감동 받을 때 교회는 부흥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까지는 부흥은 요원한 문제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고급차 운전자가 고속도로에서 난폭운전을 하는 것을 보면 어색함을 느낀다(현재 이 안에 그러신 분이 있다면 죄송!). 그러나 팔아도 타이어 값밖에 안 나오는 차가 그러면 이해가 간다. 무식한 거지가 물건을 훔치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품위 있는 부자가 푼돈에 손을 대면 대단히 실망스럽다.

세상이 교회에게 갖는 기대가 그런 것 같다.
세상에는 교회가 품위 있는 귀족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교회가 부패의 온상지라고 상상해보자.
세상이 세속적으로 되려고 애쓰는 것보다, 교회가 더 세속적으로 되려고 애쓴다 치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세상은 분명 교회에게 거는 기대를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길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다른 길이라는 게 과연 있는가?
또 있더라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못하다!
되레 이상한 데로 간다.
이상하고 부도덕하고 자기 절제가 안 되는 이상한 데로 가버린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교회 내부의 타락은 세상을 향한 전도와 선교를 막아버린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반복한다.
우리 내부부터 잘 단속해야 한다.
우리 자신들부터 거룩에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특히 신앙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 내 자유를 절제시키는 역설적 자유로, 성숙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구역, 또 우리의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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