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제사와 술/고전8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34

타종교를 믿던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던 분이 예수를 믿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이 제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지내오는 제사를 그만 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안 어른이 생존해 계시면 더 어렵습니다. 또 많지는 않지만 예수를 믿게 되면 술을 못 마시게 된다고 생각해서 예수 믿기를 주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제사와 음주 문제에 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제사와 비슷한 문제를 고린도 교인들도 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수호신은 아프로디테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가면 제사를 지냅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면 일부는 제사 목적으로 바치고 나머지는 성전에서 제사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가서 제사 지낸다는 것은 종교적인 면 못지 않게 사교적인 면이 짙었습니다. 좋은 고기도 먹고 이웃과 더불어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제사와 아주 흡사합니다. 제삿날은 조상신을 섬기는 의미와 더불어 친척들이 모여서 서로 얼굴도 보고 제사 음식을 같이 나누는 친교적인 면도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크리스천이 성전에 가서 이러한 제사 음식상에서 먹는 것이 타당한가 안 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제사를 지난 후에 음복(飮福) 즉 복을 먹는다고 하여서 제사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음복을 해도 되냐 안되냐가 문제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그러한 모임에 가서 제사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제사 음식을 같이 먹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세상의 신은 다 만들어낸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다(4절하)." 이 말을 맞습니다.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을 섬기지만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음식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하는 것도 아니다(8절상)." 이 말도 맞습니다. 예수님도 음식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막 7:15, 19). 그래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상에서 음식 먹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결핍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프로디테 신을 일생동안 섬기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믿던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어렵습니다(7, 10-11절). 또 믿음이 좋은 사람은 음식에 지나지 않는 제사상의 음식도 평소에 먹는 음식과 다름없게 먹을 수 있지만, 제사상에 오른 음식을 먹음으로 신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일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생각이 이렇게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궁합이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과 결혼 말이 있을 때에 누군가 궁합을 보고 와서 궁합이 안 좋다고 하면 기분이 께름직해서 자신도 모르게 결혼을 피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괜찮다고 해서, 성전에도 가고 제사에 사용한 음식을 성전 식탁에서 먹게 될 때에 새로 시작한 기독교 신앙과 전래의 신앙으로 인한 갈등을 느끼게 되고 이 갈등에 못 이겨 옛 종교와 옛 생활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자신의 자유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크리스천은 제사에 참여하면 안 된다

크리스천이 제사에 참여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하여서도 여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랫동안 토속 신앙이나 다른 종교에 빠져있던 분들은 그런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사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사가 신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제사 음식이 한갓 음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머리 속으로는 알지만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에 감각적으로는 께름직합니다. 신앙에 갈등을 일으키고 잘못하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또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제사 음식을 먹지 말아야할 이유는 사실은 제사를 조상신에게 드리지만 악한 영이 제사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10장 20절에서 아프로디테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프로디테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아프로디테 흉내를 내는 귀신이 제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사상을 차렸을 때에 조상신이 와서 음식을 받는다면 기독교인들이 남들보다 앞장서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상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영이 허공을 떠다니는 것도 아니고, 부른다고 오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상신이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제사를 받을까요? 귀신 즉 악한 영들입니다. 이 세상을 떠다니는 것은 조상들의 영혼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 즉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10장 20절에서 말한 것처럼 귀신과 교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사상에 절하는 것도 거부하고 참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친척들이 다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고 추도 예배를 드리며 진정으로 부모님을 기리고 더불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Ⅱ. 술을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끊는 것이 더 좋다

크리스천이 술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이러한 질문에 관한 대답도 같은 원칙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술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맥주나 포도주가 음료수입니다. 물이 나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포도주와 맥주 제조하는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란서에 가면 음식에 포도주를 곁들여야 음식 맛이 나고 독일에 가면 맥주를 곁들여야 음식 맛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하기 위하여 술을 마십니다. 서양에서는 음식 맛을 돋구기 위하여 맥주나 포도주를 곁들이지만 한국에서는 술맛을 돋구기 위하여 음식을 안주라고 불러서 곁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실수와 범죄가 술과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문화에 젖어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술을 딱 끊지 않으면 믿음 생활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술이라는 연결 고리를 남겨 두면 세상으로 다시 빠져들기가 대단히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믿는 분들은 단호하게 술을 끊어야합니다. 믿음이 자라고 술 문화에 빠져들지 않을 때까지 적어도 7-8년은 맥주나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하셔서 세상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 분들에게이 맥주나 포도주를 마실지 안 마실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술을 통제할 수 없을 때입니다. 한국에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술을 상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러는데 이분들이 잊고 있는 것은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은 강하게 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도 술 취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4:3). 바울은 술 취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6:10). 여기에서 취한다는 것은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집사 자격을 말할 때에 술에 탐닉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딤전 3:8). 일년에 몇 번 정도 적당한 계제에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정도가 아니고 매주 한번 이상 마셔야하면 술 중독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들은 처음 믿는 분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술을 끊고 가끔이라도 입에 대면 안 됩니다.

둘째는 남에게 덕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술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4:21). 우리 나라 사람들의 70%가 실질적인 술 중독자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있습니다. 술로 인한 방탕, 물질적인 피해, 건강 손상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술을 끊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이면 새로 믿는 사람이 술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산호제에 있을 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믿음 좋은 장년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결혼식이 있었는데 신랑 신부는 교인이었는데 부모님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피로연에서 포도주가 나왔는데 이분은 크리스천은 술 문제에 자유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얼마 후 어떤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술로 인하여 건강을 상한 남편을 간신히 교회로 인도해왔는데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하면 그 교사의 예를 들면서 그 분도 술을 마시는데 왜 나는 마시면 안 되느냐고 한다고 울상이 되어서 말을 하였습니다. 이 때에 생각난 것이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물속에 빠지는 것이 났다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막 9:42).

어떤 분은 전도를 하기 위하여서는 분위기를 맞추어주기 위하여 같이 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큰 착각입니다. 술친구가 되어서 예수를 믿게 만든 예를 보지고 못했고 그렇게 해서 교회에 데리고 나온다고 해도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힘듭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오히려 평소에 술 담배를 같이 하던 사람이 끊는 모습을 볼 때에 예수를 믿을 확률이 커집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술담배를 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압니다. 그런데 술 담배를 끊으면 교회는 무언가 다르구나, 예수님라는 분은 정말 힘이 있구나. 이런 생각에서 예수 믿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술에 중독 될 염려가 없는, 믿음이 좋은 분들이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이나 새로 믿는 사람 앞에서는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것이 위선으로 생각되면 아예 술을 입에도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Ⅲ. 크리스천의 윤리는 지식보다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성경에는 회색 지대가 많습니다. 이러할 때에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는 지식에 의거하지 말고 사랑에 의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나 영적 체험이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다쳐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 믿는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분들이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안다는 분입니다. 신앙 생활에 자부심이 있으니까 새로 믿는 분들을 배려 않고 확신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찢는 분들도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성경 지식이 많은 분들입니다. 확신이 있으니까 투쟁을 마다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사랑이 덕을 세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데에 틀릴 수가 있습니다. 잘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르는 사람입니다(2절). 하나님처럼 크신 분의 의도를 우리가 어떻게 100% 자신을 갖고 알 수가 있습니까? 참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사랑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랑으로 결말 짖는 지식을 하나님은 참된 사랑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3절).

우리들은 특히 안 믿는 분이나 새로 믿는 분들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믿음에 지장 되는 일을 삼가야합니다. 특별히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노력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은 영혼 구원에 지장을 주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서 부엌 사역을 담당하시는 분들은 말에 신경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서너달 만에 돌아오는 목장 봉사이기 때문에 봉사 목장 식구들이 일에 익숙하지 않고 서투를 것입니다. 그래서 지시도 해야하고 가르치기도 해야하겠지만 언어나 표정 관리를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봉사하는 분들 가운데에는 아직 예수 영접을 하지 않는 분이라 새로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언성을 높이고 야단을 치면 "교회에서 사랑하라고 하는데 군대 식으로 하는구나!" 하고 교회나 목장을 안 나올 수 가 있습니다.

우리가 점점 믿음 안에 자라면서 이제는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단계를 벗어나야합니다. 또 내 믿음 생활에 지장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단계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내 행동이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역에 지장을 주느냐 아니면 도움을 주느냐는 차원에서 결정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13절).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를 처음 믿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되기를 소원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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