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참 좋은 교회는 /고전4:6-8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37
지난주일 저는 하나님이 보장하신 것 다섯 가지를 말씀드린 바 있었습니다.
신실하시고 미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짓을 모르시고 약속을 변개치 아니하시는 성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면 하나님의 주신 언약은 우리 인생에게는 “보증수표”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얼 보증하셨습니까?
이제 확실히 이뤄지게 끔 되어있는 하나님의 보장은 무엇입니까?

①죄용서 ②인도하심 ③심판을 통하여 억눌린 한을 다 풀어주심 ④구원하심 ⑤섬김을 기억하심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확실한 보장을 받아놓고 가는 인생인지라 그 신분에 있어서 이미 천국백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세상에 발을 딪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얻은 구원(결코 취소될 수 없는 너무나 확실한)과 아직 당도하지 않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구원을 얻고 가나안을 보장받았으나 광야세월을 보내야 했듯이 우리 믿는 이들의 현실의자리가 “이미”와 “아직”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고전4:8에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여기 “함께”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지금 이 말은 특히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죄 된 속성은 어디서 잘 드러나는 가하면 무슨 일만 생기면 자꾸 끼리끼리 모이려 하고 쓸데없이 경쟁하려고 하고 분리시키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도는 무엇이 다른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함께” 지어져 간다는데 차별성이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미 얻은 구원과 확실하게 보장받아 둔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엡2장 1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전에는 원수였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았는데 이방인이었는데 지금 십자가 안에서는 모두 똑같다 너희 중 유대인이라고 더 나은 것도 없고 이방인이라고 못한 것도 없다. 너희는 이제 하나다 옛날 율법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는 한편은 선민이고 한편은 이방이었지만 지금 십자가 아래서는 그러한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씀을 받아 들고서도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함께 구원 받고 함께 하늘나라로 향하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고 잘난 성도 못난 성도로 나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 ‘나는 적어도 다른 성도들 보다는 더 헌신 한다’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는 저 중직자들만 못하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저렇게 군림하고 대접만 받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죄의 습성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부리는 것과 같은 의미로 신약시대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언약공동체, 생명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혈통이나 배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차별됨이 없이” 예수님 믿는 것으로 모두가 동등한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모든 지난날의 배경은 불문하고 하나로 묶어 함께 지어져 가게끔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진정 유용한 사람은 배운 사람, 오래된 사람, 돈쯤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어지고 썩어지고 희생됨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감당을 ‘말없이’ 잘 감당하느냐 하는 것이 진정 교회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가장 피곤하고 신경 많이 쓰는 일이 무엇일까요 ?
그 일을 나서서 ‘제가 하겠습니다’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대부분 하겠다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에게 일이 주어지고 주어지니까 할 수없이 ka당하고 감당하다보니 그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 좋은 교회는 말썽 없이 조용한 교회가 아닙니다.
참 좋은 교회는 ‘사람 모인 곳에 의례히 일어나는 말썽을 잘 견뎌내는 교회가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일이 있는 곳에 사람 있고 사람 있는 곳에 별의 별 사람이 다 거기 있고 별의 별 사람모인 곳이 조용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입니다.

교회에서 진정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은 이 말 많고 탈 많은 공동체 죄성으로 인하여 분열의 가능성까지 안고 가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말없이 썩어지며 죽어지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병폐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갖게 되는 생각 중에 “아무개만 없어도 교회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텐데……” 하는 것이 가장 무지한 생각입니다.
나에게는 피곤하여도 하나님은 그가 이곳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라서 여기에 두신 것입니다.
내 맘에 안 들어도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얽히고설키고 엮어지면서 교회를 이루게끔 되어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 보실 때에는 지금 내가 그 사람 덕분에 뭔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 사람도 내 덕분에 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 덕분에 제가 이 만큼 되었습니다. 하는 자세로 교회를 이루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교회생활, 건강한 교회생활은 그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멀리하고 포기하고 외면하고 좆아내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고 감싸주고 용납하고 치료하고 고쳐가면서 함께 가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
십자가는 주께서 우리를 품으신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사망의 권세를 이겨낼 도리를 찾지도 못하고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단번에 품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의 용납을 받고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 들어간 것처럼 나 자신도 형제를 용납하고 품어야 합니다.
엡2:5말씀을 읽어 누릴 때 여기 “함께”라는 말이 몇 번 나오나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또 함께 일으키사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 예수님이 우릴 품어주시느라고 ”함께“하셨듯이 우리가 성도를 품으며 ’함께‘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로 존재하고자 할 때는 ‘주님과 함께’하여야 하고 ‘성도’와 함께 하여야 합니다.
갈2:20의 고백을 쉬운 말로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그 분의 것이 되었기에 그분을 머리로 모슨 모든 이들과 (그 출신성분, 혈통, 배경, 신앙연륜, 성품불문 나는 지체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갖는 것이 참 좋은 교회를 이루는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자세로 말미암아 외면하고 부정하고 포기하고 심지어 몰아내던 자세에서 치료하고 고치고 감싸면서 함께 성장 성숙하여 가는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미 얻은 구원과 아직 당도하지 않는 하나님나나를 향하여 가는 교회는 “지체의식”을 생명으로 여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에서 70세가 넘은 어느 장애인 할머니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 분은 나면서부터 한 쪽 다리가 성장을 멈추어 나머지 한 쪽 다리에 온 몸을 싣고 지팡이로 거동하셨는데 평생을 다리하나가 나머지 못 쓰는 다리의 몫까지 다 감당하고 살다보니 심한 관절염이 생겨서 이제는 건강했던 다리마저 못쓰게 되고 하루 종일 거의 앉아서 생활하고 움직이려면 두 팔이 다리노릇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몸에서 한 부분이 너무 연약하여서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데 된다고 하였을 때 그것 쓸데없이 거추장스럽기만 하다고 잘라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머지 건강한 부분이 그 부족한 부분의 몫을 짊어지고 갑니다.
그러면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 몸”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장25-27을 몇 번이고 묵상하다 보면 ‘참 좋은 교회’의 형상이 어느 정도 그려집니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즐거워하는 진정한 “한 몸 의식” 소유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지체된 우리 교회의 형제 중 실수가 있거나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예수님은 믿는 네가 직분자인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하고 흥분하고 지적하고 소문내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이 교회를 떠나게(나올 수 없게)만들거나 그걸 잘라내어 제거하는 것만이 교회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단정하진 않았습니까?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죄를 범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1-2)

형제 지체의 죄가 드러나거든 ‘너 잘 걸렸다’하고 흥분하고 여기저기 소문내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큰 소리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여러분 온유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미 정리한 바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비겁함, 나약함이 아니고 “제어되고 있는 ”힘“입니다.
잘 다스려지고 통제가 되는 게 온유입니다.

이 힘 조절이 안도니느사람이 온유하지 못하고 철없이 큰 소리부터 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체의 연약함에 온유함으로 돌아보고 오히려 자신을 돌아 볼 줄 아는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실수 있는 사람을 제거 하는게 능사가 아니고 바로잡고 치료해주는 기능을 감당하여야합니다.
틀린 것을 바로 잡아 주라는 것이 아니고 아픈 상처를 치료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못 본척하라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싸매어 주고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내 몸인데 포기할 수 있습니까 ?
어찌하든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 바울은 참교회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 살겠다는 생각을 가진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며 “함께 지여져 가는 교회”가 참 좋은 교회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남들이 잘못되어 가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지 말고 그들을 용납하고 치료하고 함께 하나님나라에 이를 생각을 못하고 사는 자신을 안타깝게 여겨야합니다.
참 좋은 교회, 수성교회성도가 다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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