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중간 평가
<본문> 고전 9:24-27
I. 들어가는 말
1. 오늘은 6월 마지막 주일이다. 일 년의 중간이다. 우리 신앙의 중간 평가를 해 보자.
2.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중간 평가를 공언했다. 하지만 두려워서인지 중간평가를 하지 못했다. 독일 대학에도 중간 시험(Zwischen Prüfung)이라는 게 있다. 중간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자. 중간 평가를 잘해서 하나님의 최종 평가를 좋게 받자.
3. 다른 사람의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중간 평가를 하자.
II. 나의 신앙 중간 평가
*기독교인,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자기 성찰에 있어 뒤떨어져 있다. 타종교, 특히 불교는 자기 성찰에 뛰어나다. 하지만 타 종교는 자기 성찰에 있어 한계가 있다. (타락한) 양심에 의해서 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비추어 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하지만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성령의 역사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더 성찰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겸손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김진 정신과 의사의 인간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6가지 제안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1. 한계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인정하자.
1) 사람은 자기화된-습관적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지난 주 수요일에 평택 시내에 나갔었냐고 내게 물었다. 그 분은 그 날 내 차와 같은 차종의 같은 색깔의 차가 시내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내가 거기에 왔었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날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은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베라 크루즈 하늘색 차를 보면 제가 생각났었는가 보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화된 습관에 따라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술을 먹으면 못 견뎌하고 담배를 피우면 좋아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하고 나중에 담배를 피우면 폭력이 끝이 났다고 한다.
2) 현재적인 의식의 흐름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제일 우선순위에 있는 하나의 의식 영역이 기타의 의식영역들을 가로 막게 되는 것입니다.”(p. 252) 예) 컴퓨터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고 하면 “예, 예”하면서도 잘 안 온다. 아이가 그 의식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밥을 차려 놓은 사람은 국도 식으니 화가 난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를 낸다. 아이는 그 화냄에 또 반응한다. 사실 사람은 우선 의식에 의해서 다른 것을 배려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 내는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다.
3) 사람은 자기 얘기를 한다.
-미국 유학 가기 전 어떤 교수님을 찾아가 미국 생활과 공부에 대한 조언을 주었다. 그런데 그 분은 보자 마자 재정적인 부담에 대해서 심사숙고해 보았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공부할 곳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서 그 분은 강조하셨다. 사실 그 분은 능력이 많으신 분인데 공부할 때 돈 때문에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꿈에 부풀어 있고 지금 도전에 직면하려고 하는 지를 잘 생각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부정적인 면을 많이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그 방을 나올 때 매우 실망되어 있었다. 사람은 상대방을 위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쉬운 것이다.
-반면 성숙한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야기 한다. 오래 전에 어떤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았는데 결국 가지 않기고 결정을 했다. 어떤 친구 목사님이 내게 와서 안가기를 잘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말씀해 주셨다. 어차피 안 가기로 결정한 것인데, 만약 반대의 말을 했으면 내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2. 자기 성찰 능력을 키워가자.
인격의 성숙은 자기 성찰에서 온다. 자기 성찰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자아 성찰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자. 자신의 실수를 자주 고백하도록 하자. 자아가 아픈 사람은 1) 공적으로 자아 비판을 거의 하지 않으며, 2) 말에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어 있다. 어떤 의사는 몸에서 느껴지는 곳이 아픈 곳이라고 한다. 몸이 가벼우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몸이 무거운 날은 발이나 손이나 몸이 느껴진다. 내가 자주 느껴지면 내가 아픈 것이다. 스스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규정하는 말을 타인에게 자주 하는 사람은 “나”가 아픈 것이다. 내가 병든 것을 알고 치유해 나가자.
3. 해석의 틀-해석 체계, 마음의 창, reference-을 넓혀 가자.
사람은 자신이 가진 틀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는 경향성이 있다. 예) 어떤 사람은 ‘정신병을 낫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의 여동생이 정신병에 걸려서 기도원에서 2년여를 보냈는데 낫지 않았고, 어떤 아는 사람은 정신 병원에 오래 다녔는데도 낫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동생의 경우 정신병인데 귀신들린 것으로 착각하여 기도원에 오래 방치되는 동안 악화된 것이라고 한다. 또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낫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문가는 100% 돌아오는 것은 안 되었을지라도 병원에 오긴 전보다 10%, 20% 때로는 80% 호전되면 일종의 치료가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환원주의(감소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아는 영역으로 축소하여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창을 넓게 열어 해석의 틀을 넓혀야 한다. 자신의 가지고 있는 틀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다.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이런 오류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다. 제가 아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1) 목사와 2) 교사를 꼽는다. 그중에서도 목사가 더 어렵다고 한다. 환자로서 의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 교인도 아닌데 목사-의사 집사로 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틀을 넓혀야 한다. 그런데 이 틀을 넓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보다 잘 난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이런 일이 일어난다.
4. 신앙생활이 자신의 닫힌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을 최소화하자.
제가 두 달 전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나오는데 어떤 신자가 제게 대뜸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만 가르치느냐 어머니라고 가르쳐야지요”라고 하고 갔다. 그 분은 성경에 나오는 남성, 여성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신 분이다. 물론, 내가 이 문제를 좀 더 민감하게 다루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 자신도 내 설교의 주제도 아닌-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것을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상처 받은 일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닫힌 의식 속에 여러 상처들이 있고, 그것이 어떤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치유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닫힌 의식 속에 어떤 응어리가 있는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5. 자기가 바라는 자기를 세워 나가자.
1) 자신의 나쁜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화를 잘 안내는데 화를 냈다하면 주체할 수 없다. 나중에는 후회하고 자신의 그런 모습이 싫어진다. 이런 경우 “짜증나. 싫어. 좋아.”하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기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너무 좋은 사람만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픈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성숙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자기를 세워 나가야 한다.
2) 나의 자아의 본 모습은 하나님 안에서 본 자아이다: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자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현재 상처나서 어그러져 있더라도 비관하지 말자. 온전한 자아상을 계속 바라보면서 그 모습으로 화하기를 기대하자.
6. 사랑에 사람을 아는 지식을 그리고 사람을 아는 지식에 사랑을 더하자.
1) 사람이 실제로 변하는 것은 지식이 들어간 후에도 한 참을 걸린다. 인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다 판단할 수 있을지라도 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람을 현재의 행동으로만 보지 말고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가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보자.
2) 사람의 인격은 모두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예1) 예2)
-타인에 대한 이해에서 필수. 결과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역사를 보자.
III. 바울의 신앙 중간 평가
*바울은 신앙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고 있다.
1. 목표(향방)있는 달리기하기: 너무도 당연. 하지만 목표를 향하여 달려야 하는데 중간에 다른 데로 빠질 수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방향 감각을 잃고 달리는 데만 몰두할 수 있다. “나는 푯대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2. 허공을 치지 않는 권투 하기: 목표를 타격하지 못하고 헛방을 치는 것. 헛심을 쓰는 것. 신앙 생활에서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타격 중심을 올바로 때리고 있는가?”
3.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기: 의지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인간의 자아는 가만히 있으면 악 쪽으로 간다. 선은 힘써서 행해야 하지만 악은 저절로 된다.
1) 운전할 때 택시가 끼어들기 하면 욕이 저절로 나온다. 택시 승객으로 때 택시 기사가 너무 준법 운전을 하면 짜증난다.
2) 돈을 꾸어준 것은 잘 기억하고, 꾼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지 않았을 때: 상을 받기에 부적합 판정을 받을 수 있다.
IV. 나가는 말
1. 우리의 성찰은 양심 성찰을 뛰어 넘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자아성찰하도록 도와준다. 요 16:7-11.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심. 여기서 세상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일어난 마음을 가리킨다.
2. 말씀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면 곧 자아성찰이 된다. 히 4:12-16. 살았고, 활력이 있고, 검보다 예리....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 그런데 우리는 자기 합리화, 투사, 억압, 전위 등을 통해 방어 기재를 동원에 이 앞에 서지 않으려고 한다.
2) 조용히 하나님 앞에 서자(Q. T.)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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