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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차이

작은샘 큰물줄기 2016. 10. 25. 17:55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차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후부터, 오랜 세월동안을 기독교 신앙인의 대표적인 기도문으로서 암송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 일부 교회들은 이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주기도문이 자신들의 교회의 교리와 다르기 때문인데, 그러나 주기도문의 내용에는 어떠한 문제점도 없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에 대한 비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눅11:2-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9-13)

 

소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성경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있다.

초대교회의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을 모든 복음의 요약이라고 정의하였으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이래 지금까지도 암송되어지고 있으며, 소위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연구하는데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언급된 주기도문의 앞부분에 아주 흥미있는 기록이 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누가복음에는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는 언급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은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사실을 예수께 고하며,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과연 유대인들이 기도문을 몰라서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우리는 세례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알 수가 없다. 단지, 본인은 어떤 교회가(특히 구원파계열의 교회) 주기도문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비난의 이유는 암송하는 기도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리 암송을 위하여 만들어진 기도문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갖고 있었고, 그러한 기도문은 카톨릭의 기도문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기도문을 암송한다는 것은 형식적이며 타성적이 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암송하는 사람의 문제이며 주기도문 자체가 형식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이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그대로 동일하게 암송해야 한다면, 우리는 헬라어 혹은 아람어로 암송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하나의 모법답안적인 기도의 모델이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성경본문을 보면, 세례요한도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도 예수께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주기도문은 원래 암송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카디쉬”라고 하는 기도문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기도문은 아람어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이 카디쉬는 거룩한 기도라고 불리우며, 주로 회당예배 때에 회중들이 한 목소리로 이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예수님과 유대인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회당예배에 익숙한 사람들로, 이 카다쉬 기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이미 이 기도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람어 기도문의 최초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고 전해지는데, 이 기도문이 주기도문과 아주 유사하다.

 

주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창조하신 세계에서,

주의 크신 이름이 찬양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의 나라가 우리 생전에, 우리 날 동안에, 모든 이스라엘

집이 살아 있는 동안에, 빠르게, 속히 임하옵시며

주의 크신 이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아멘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다른가?

 

마태복음에는 6개의 청원을 가진 긴 본문이 나타나고 있으며(57단어), 누가복음에는 5개의 청원을 가진 보다 짧은 본문이 나타나고 있다(37단어).

또 호칭에서 차이가 있으며, 송영부분은 마태복음만이 기록하고 있다.


(호 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아버지여(눅11:2)

 

(제 1 청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눅11:2)

 

(제 2 청원)

나라이 임하옵시며(마6:10)

나라이 임하옵시며(눅11:2)

 

(제 3 청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이다(마6:10)

 

(제 4 청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눅11:3)

 

(제 5 청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11:4)

 

(제 6 청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눅11:4)

 

(맺는 말, 송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마태복음에 기록되어있는 주기도문의 송영부분은 몇몇 고대및 후기 사본에 첨가되어 있으며, 12사도의 교훈집 (didache)에는 "권세와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나타나며, 흠정역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특히 권위가 있다는 초기의 사본들은 이 송영을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그러나 이 송영부분이 초대교회부터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기록은 인정되어야 한다.(didache, 서방역본등)

 

KJV 영어성경에는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라고 되어 있으며(NIV는 생략, KJV는 기록), 개역성경은 괄호안에 송영을 넣어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도문은 조금씩 다르다.

이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인은 이러한 차이점이 오히려 정확한 기록이라는 증거가 되어진다고 생각한다.

만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동일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인위적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즉 마태가 듣고 기록한 것과 누가가 듣고 기록한 것에 서로 관점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 마태와 누가는 서로 다른 기도문을 들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학자들에게 매우 일리가 있는 견해로 받아 들여진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두 기도문이 기록된 상황이 서로 일치하고 있지 않은 점을 예로 들수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도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하실 때 가르치신 것으로 나타나는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산상설교(마 5-7장) 가운데 6장9절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의 이 기도문은 산상설교와는 오히려 다른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산상설교는 6:20-49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기도문은 오히려 갈릴리 사역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기사로 시작되어(눅 9:5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시고), 계속되어지는 기록 속에서 눅11장에 언급되어지는 사건이다.

즉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고, 또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중에 가르쳐주셨고, 즉 주기도문을 두 번 가르쳐 주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전후문맥을 보면, 분명히 그 상황과 배경이 다르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초기사역의 사건이고, 누가복음은 후기사역의 사건인 것이다.

즉 마태와 누가는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가르침을 듣고 기록을 하였다고 보는 것인데,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약간의 차이가 나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기도문을 두 번 가르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동일한 목사님이 2분예배와 3부예배때 동일한 설교를 하였다고 가정할 때에, 그 2부와 3부의 설교 본문은 내용은 같지만 문자적으로 정확히 동일하지 않다.

예수님의 기도문에 대한 설교가 초기 사역때에 산상설교를 통하여 있었고 마태는 이것을 기록하였으며, 후기 사역때에 예수님의 기도문에 대한 답변이(어느 제자의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설교되었던 것이 누가의 기록인 것이다.

 

예수님은 글자까지 동일한 기도문을 제시하시지 않았으며, 단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는 기도문의 제시를 알려 주신 것이기 때문에, 기도문은 당연히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기도문은 기도와 관련된 교훈 가운데 나오고 있다. 즉 마태복음 6:5-15 이 기도에 관한 교훈인데, 산상설교에서 이 기도문이 나온다.

 

마 6:5-6;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기도하라는 교훈

마 6:7-8;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교훈

마 6:9-13; 이렇게 기도하라는 기도문의 제시

마 6:14-15; 잘못에 대한 용서

 

누가복음에서도 역시 기도에 관한 교훈 가운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나오는데, 그 상황과 배경이 다르다.

눅 11:1;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

눅 11:2-4;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기도문 제시

눅 11:5-8; 밤에 찾아온 친구의 강청하는 기도

눅 11:9-13;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교훈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서로 다른 시간과 상황의 기록인 것이다.

마태복음은 보다 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한 산상설교의 가르침이며, 누가복음은 소규모의 국한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인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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