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스크랩] 사도신경 강의(5) 예수라고 불리우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승구 교수|

작은샘 큰물줄기 2016. 8. 20. 14:55




예수라고 불리우시는 하나님의 아들(마1:18-21절) 



이번부터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서 성자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 때 전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고백했던 바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그 본질과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온전히 동등하신 하나님이시어, 역시 동일 본질의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그 고백말입니다. 사도 신경에서는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창조와 섭리에 대해 말할 때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그 일의 대표로 내세워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 때문에 마치 창조와 섭리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그래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신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 후에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때에도 아버지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창조의 대표자로 인정하는 터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부터의 우리의 논의는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그의 지상 사역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아들이신 그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계십니다. 성자가 계시니 성부가 계시고, 성부가 계시니 성자가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영원한 관계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계셨고, 지금도 무한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대제사장적 기도(요 17 장) 가운데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5). 이 말씀 가운데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는 말은 그가 영원 전에 삼위일체적 영광 가운데 계셨음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 가운데 계시던 성자께서[1] 그 하늘 영광을 떠나셔서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 땅에로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 분에게 붙여진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오늘은 왜 그 분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계시된 이름 "예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나 조부모들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이 세상의 관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부모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로 주어진 이삭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웃음이란 뜻의 이 이름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웃음과 사래의 웃음[창 17:17, 창 18:11-15], 그리고 할머니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에 대한 동네 사람 등의 웃음, 그리고 사래의 기뻐하는 웃음[창 21: 6] 등) 삼중의 웃음을 빗대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창 17:19). 세례 요한의 이름도 그가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그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지시해 준 이름입니다(눅 1:13, 59-64). 또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주신 일도 있습니다. "높은 아버지"(high father)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비"(father of the mutitude)라는 뜻의 이름인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주신 경우나(창 17:5), "발꿈치를 잡은 자"(heel-holder)라는 뜻의 야곱(????)에서(창 25:26) "하나님과 겨룬 자"(God's fighter)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고 고쳐 주신 경우가(창 32:28)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이런 이름의 변화는 그들의 역사 가운데서의 성격이나 특성의 변화를 나타내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라는 이름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리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 자체는 이전에는 없던 아주 독특한 이름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라는 이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름의 하나입니다. 구약의 예를 들면,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을 인도한 "여호수아"(?????)는 그 이름이 "예수"와 같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은 신약에서 예수라고 쓴 것과 정확히 같은 이름입니다. 신약에는 "바예수"(즉, 예수의 아들)라는 이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행 13:6) 예수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주 붙여지던 이름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자신들의 구원이 되심을 믿고, 그들의 자녀에게 그런 믿음을 표현하는 이름을 붙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의 "예수"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고 말씀한 것이 이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된 근본적 이유입니다. 또한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마리아의 수태 사실을 알고서[2]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를 근심하며 가만히 끊고자 할 때,[3] 주의 사자가 그의 꿈속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0-21). 이렇게 이 아이의 이름은 그 법적인 인간 부모 될 이인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의 사자의 말씀 속에서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시고, 붙여 주신 이름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요셉은 감연히 마리아를 데려오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그 아기의 법적인 아버지가 된 그 요셉이 그 아이의 이름을 주께서 계시해 주신대로 "예수"라고 하였습니다(눅 2:21; 마 1:25).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4] 그리하여 그를 법적으로 입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5] 즉, 요셉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legal father)[6] 또는 "양부"로[7] 행동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아이가 요셉의 계열을 따라서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되게 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이름의 기원입니다.

정리하자면, 그 이름은 1세기 중반까지는 일반적인 이름이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붙여졌고, 그 의미도 독특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후에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너무나 악명 높은 이름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고귀한 이름이 되어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자녀들에게 붙여주지 않아 2세기부터는 희귀하게 된 이름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하면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주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친히 붙여 주신 것일까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요셉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그 이유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 1:21). 이스라엘 중에 예수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 때에는 그저 그 부모 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그저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이 아들을 낳고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고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안위함"이라는 뜻의 "노아"(???)라고 하였듯이 말입니다(창 5:29). 이와 비슷하게 여호와께서만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고백하면서 주께서 그 구원을 속히 가져다주실 것을 기원하는 것이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붙일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이 아이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이름을 지어 주시면서 그 이유까지를 밝혀 주셨는데,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8]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예수라고 하는 분은 기본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해 줍니다. 여기 아주 포괄적인 용어 하나가 나왔습니다: "구원"(???????). 이 구원이란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의 회복과 온전하게 함을 의미합니다.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회복과 온전하게 됨 -- 이것이 구원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뜻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이 구원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 본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시편 130:8은 "저가[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라고 말하여 이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과의 관계인 영적인 데에 있으므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물리적, 정신적 회복은 참되고 궁극적인 의미의 구원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에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사역의 일차적인 의미는 구속적이고 영적인 것이었습니다.[9] 그래서 이 예수님의 이름을 설명하면서도 "이는 ......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영적인 문제만을 해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는 영적인 문제로 시작하지만, 이는 결국 정신적 문제, 도덕적 문제, 그리고 물리적 문제까지를 낳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그로부터 오는 비참함이란 문제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총체적인 인간 문제의 해결도 결국 궁극적인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그로부터 물리적, 도덕적, 정신적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될 때에야?인간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예수라고 하는 분은 일차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렇게 온전한 의미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라고 불린 아이는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일하신 구원자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후에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공언하였습니다(행 4:12). 예수라는 그 이름이 무슨 신비한 마술적인 효과를 발휘해서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으므로 오직 그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샬이 잘 말하고 있듯이,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주라고 선언하셨다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10]

그러나 이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그가 구원을 이루시려고 한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같이 어린아이로 세상에 오셔서 자라나는 과정을 가지셨던 것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루신 구원의 과정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면, 그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모든 면에서 자라나셔서(눅 2:52), 기본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말씀과 행위로 가르쳐 주시고, 그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영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후에 부활 승천하셔서 그 하늘에 계시다가 그 하늘로부터 구원의 궁극적 완성을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신 것의 온전한 성취, 즉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회복과 완성의 온전한 드러남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종국적으로 마치실 때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그는 이미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또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구원자가 되신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중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둘째로,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특한 의미에서 이 예수님의 백성인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그의 백성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의 혈연적 백성인 유대인들이 그의 백성입니까?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백성의 일부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자신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요 1: 11)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이런 배척도 포함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의 백성입니까?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모든 종류의 사람이 다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구원을 이루신 이들이 다 예수님의 친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이 반발하고 나오자 사도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고 선언하고,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이의 집에서 따로 모임을 가질 때에 주께서 밤에 환상 가운데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 9-10). 고린도 도시 가운데 주의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직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 오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백성이 될 자들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11] 또한 사도행전에서 "백성"(????)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데 사용된 데 비해서, 여기서는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특합니다.[12] 이들을 이렇게 미리 "백성"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칼빈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곧 가족에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미리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신" 것이고,[13] 데이비드 윌리엄스가 말하고 있는 대로, "주께서는 그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행 13:48; cf. 요 10:16)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4] 아직은 그들이 다 나아 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주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면서 사도의 사역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믿고서 1년 6개월을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신 예수님의 백성인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말씀하신 모든 족속 가운데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다 지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마 28:19).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편에서는 누가 예수님의 백성인지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백성, 즉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그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왜냐 하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정한 수준의 것을 이루어야 예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될 뿐만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말도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은 당연히 그 나라에 백성다운 열매를 내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의 백성임을 확증해 주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너무 강조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되고, 스스로도 너무 내성(內省, self-reflection)에 빠져서도 안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여 예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의 확신이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29문은 예수라는 이름의 이런 뜻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즉 구원자라고 불립니까?"

(답) "왜냐 하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다른 데서 구원을 추구하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3.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의 함의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다른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로는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고서 실상 다른 것도 의지하는 것은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천주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 오던 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의 도움도 얻으려 하고, 자신들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도 의지하는 식의 신앙이 과연 참된 신앙인가, 과연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개혁자들이 문제시하였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이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0문에서도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과 지복(至福)을 성인들과 자신들이나 다른 것에서 찾는 이들은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라고 묻고서는 이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고 단호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자랑할지라도, 그들은 사실상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온전하신 구원자가 아니시든지, 아니면 참된 신앙으로 이 구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야만 하겠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 안에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 즉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성인들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든지,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함께 구원 얻을 만한 공로가 되는 행위와 삶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하신 구원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점은 아주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라고 주장해도, 다른 성인들이나 자신들의 공로도 의지하려고 하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면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예수님에 대한 다른 가르침 가운데서도 그를 믿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려 한다면, 그것도 예수님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들이 예수님을 자랑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판단 기준이 아니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살펴서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한 구원자로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가르침과 믿음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로 믿고 따르는 것이 되고, 이 판단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살펴 나가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도 우리는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주로 생각하고, 그분에게만 의존하며, 우리의 삶을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정돈해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대로 참으로 그 귀하신 이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註)-----------------------------------------

11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좋은 설명과 변증으로 Donald Macleod, The Person of Christ (Leicester: IVP, 1998), 김재영 옮김, {그리스도의 위격} (서울: IVP, 2001), 제 2 장, 53-90을 보라.

22 이를 요셉이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에 따라 다음의 오는 행동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는 마리아가 임신했음이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 알게 되었다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어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의 사정을 요셉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Homer A. Kent, Jr., "Matthew,"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Chicago: Moody Press, 1962], 932). 두 번째 견해는 마리아가 이 놀라운 사실을 요셉에게 알렸다는 견해이다.

33 요셉의 생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일반적인 해석은 요셉이 공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즉, 마리아가 공적인 수치를 당하지 않게) 당대의 관례에 따라서 두 사람의 증인들 앞에서의 사적인 이혼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견해이다(Willoughby C. Allen, Gospel According to S. Matthew, ICC [Edinburgh: T. &T. Clark, 1907], 9; David Hill, The Gospel of Matthew [London: Marshall, Morgan &Scott, 1972], 78;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Grand Rapids: Zondervan, 1984], 75; R. T. France, Matthew,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England: IVP and Grand Rapids: Eerdmans, 1985], 77; Robert C. Mounce, Matthew: A Good News Commentary (New York: Harper &Row, 1985), 4; Craig L. Blomberg, Matthew,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ennessee: Broadman Press, 1992], 58;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Leicester, England and Grand Rapids: Eerdmans, 1992], 28, n. 39). 모리스는 20절의 동사가 aorist라는 것으로부터 이것이 요셉이 그의 마음을 결정했다는 뜻이라고까지 해석한다(Morris, 28).

다른 해석은 마리아로부터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받아들여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하나님의 고귀한 일에 자신은 감히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임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며 조용히 이 일로부터 물러나려고 텖다는 해석이다(John McHugh, The Mother of Jesus in the New Testament [Garden City; Doubleday, 1975], 164-72; R. H. Gundry,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Eerdmans, 1982], 21-22; Adolf Schlatter도 이런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김홍전, {그리스도의 오심} [서울: 성약]도 보라).

44 이 점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France, 78; Morris, 29를 보라. 또한 C. E. B. Cranfield, The Epistle to the Romans, vol. 1 (Edinburgh: T. &T. Clark, 1975), 59, n. 1도 보라.

55 Morris, 32.

66 J. Knox Chamblin, "Matthew,"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ed., Walter A.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9), 726; and R. E. Brown, The Birth of the Messiah (New York: Doubleday, 1979), 139.

77 김홍전, passim.

88 이런 차이에 대한 의식과 지적으로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한역, {성경 신학}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5), 341을 보라.

99 Cf. Mounce, 5; Blomberg, 59; Carson, 76: "in the biblical perspective sin is the basic.".

1010 I. Howard Marshall, Act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and Grand Rapids: Eerdmans, 1980), 101.

1111 이 점에 대한 지적으로 Marshall, 296을 보라.

1212 Cf. F. F.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Greek Text (Grand Rapids: Eerdmans, 1951), 346. 또한 Bruce, The Book of the Act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4), 372, n. 24도 보라. 여기서는 딛 2:14, 벧전 2:9f.을 같이 언급하고 있다.

1313 John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vol. II, trans. John W. Fraser,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inburgh: Oliver and Boyd, 1966;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7), 136.

1414 David J. Williams, Acts,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Peabody, Mass.: Hendrickson, 1985), 316.


(이승구 교수님의 사도신경 강의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알고 싶은 분은 "여수룬" 출판사에서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1) 으로 출판된 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유익이 되니라 봅니다.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1)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역과 그 위로, 여수룬 출판사/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2) 성령의 위로와 교회, 이레서원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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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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