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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 침례인가, 세례인가? (퍼옴)

작은샘 큰물줄기 2019. 2. 24. 08:19
 
한글 「개역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밥티조'(baptizo, 스트롱 번호 907), '밥티스마'(baptisma, 908번), 그리고 '밥티스테스'(Baptistes, 910번) 등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그리스어 '밥토'(bapto, 911번)에서 나왔으며 신약성경에 총 115회 사용되었는데 용례별로 살펴보면 명사 '밥티스마'가 23회, 인물을 가리키는 명사 '밥티스테스'가 15회, 그리고 동사 '밥티조'가 77회 쓰였다.
한편 「한글개역성경」과는 달리 「바인의 신약성경단어사전」, 「국제표준성경백과사전」, 「엉거의 성경사전」, 「스트롱의 용어색인」 등 기독교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참고문헌들과 신학적 편견 없이 영어 단어 자체의 뜻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정평이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등의 세속 문헌들은 한결 같이 이 단어들의 의미가 '물로 뿌리는 세례'(sprinkling)가 아니라 '물 속에 담그는 침례'(immersion)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어원 자체가 너무나 분명한 이 단어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는 세례로 바뀌어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성경대로 침례를 행하지 않고 세례를 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보면 유일하게 중국 성경과 한국 성경에만 이 단어들이 세례로 번역되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전혀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침례가 세례로 바뀐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천주교가 기독교보다 먼저 진출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세례를 주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70% 정도를 차지하므로 다수결의 논리를 따라 세례가 옳고 침례는 그르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한국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민족의 하나님도 되신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침례를 주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70% 정도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침례가 맞고 세례는 틀린다는 말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까? 침례는 중요한 성경의 교리일 뿐 아니라 성경 본문의 전달 과정에 마귀가 개입한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되므로 성경에 근거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대로 행하기 원하는 성도들은 이 문제 역시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성도들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 그 판결에 기꺼이 순종해야 할 것이다. [목차]
 
 
침례를 주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나 세례를 주는 데는 많은 물이 필요 없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물들이 많음이라."(흠정역 요3:23, 이후의 성경 구절은 다 흠정역에서 발췌)
침례를 받으려면 물 있는 곳에 가야 하지만 세례를 받으려면 물을 가져 와야 한다.
"그들이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매"(행8:36)
침례를 받으려면 '물 속으로'(into the water) 내려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빌립과 내시가 물 속으로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니라."(행8:38)
침례는 '강에서'(in Jordan) 즉 물 속에서 받으나 세례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죄를 자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마3:6)
침례를 받은 후에는 '물 속에서'(out of the water) 나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행8:39)
성경은 한결 같이 침례가 '물 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불 침례와 성령 침례 역시 '잠기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참으로 나(침례자 요한)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그분(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데기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태우시리라."(마3:11,12)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성령 침례가 곧 불 침례이므로 뜨거운 불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침례자 요한은 이 구절에서 결코 그런 것을 뜻하지 않았다. 문맥과 함께 이 구절을 읽어보면 성령 침례를 받는 자는 예수님의 곳간에 즉 천국에 들어가지만 불 침례를 받는 자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절에서 침례 즉 '몸 전체가 잠기는 것'과 세례 즉 '이마에 뿌리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 성령 세례를 받아 이마에만 성령님이 계시면 어떻게 될까?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서 과연 이마에만 불이 붙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침례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 몸이 물 속에, 성령님 안에, 불 속에 잠기는 것'임을 보여 준다. [목차]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 매장,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면서 특별히 성도들도 예수님과 똑 같이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임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규례이다.
 
 
세례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다가 일어나는 것 즉 사망과 매장과 부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한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골2:12)
세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 상징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워지신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3-4)
세례에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새로이 옷 입어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목차]
 
 
어떤 이들은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침례중생'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특히 유아세례를 주는 천주교에서는 이 의식을 통해 사람이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중생'을 지지하지 않으며 다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침례를 통해 자기의 거듭남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 마귀와 마귀의 천사들 및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믿고 거듭난 뒤에 침례를 받는 것이지 침례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행8:12).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주며 이 과정 속에서 크리스천 교회가 어떤 일을 실행했는지 보여 준다. 사도행전 8장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도행전 8장에는 스데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이 때에 처음으로 빌립이 이방인인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26-40절).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한글개역성경」은 이상하게 37절을 '없음'으로 삭제하고 있다. 원래 이 구절이 없었다면 그 다음 구절들이 한 절씩 앞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가 자기의 교리나 신학을 세우기 위해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36절에서 내시는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라고 물었으며 이에 대한 답이 37절에 나오고 내시는 그 답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한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매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행8:37)
이 부분에서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37절을 친히 기록하신 것이다. 즉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명확한 근거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교도들의 믿음과 연합한 천주교가 생겨났다. 중세암흑시대를 주도한 천주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들의 체제 하에 가두기 위해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 관행을 도입하여 믿음 고백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어 어려서부터 천주교인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행8:37의 말씀이 이런 비성경적 관행에 큰 거침돌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감히 성경 본문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글개역성경」,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NASB」 등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역본에는 이 중요한 구절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은 이 구절을 잘 보존하여 천주교의 유아세례 교리가 허구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과연 이 구절이 없으면 앞 뒤 문맥이 통하겠는가? [목차]
 
 
천주교에서는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교리문답서 공부를 위한 학습 기간을 두는 전통을 세웠으며 이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세례를 준다. 또한 천주교인들은 세례가 '은혜를 가져다 주는 대성사'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가 은혜를 가져다 주는 성사가 아닐 뿐더러 구원 또는 은혜도 가져다 주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엡2:8,9). 성경은 이 같은 천주교의 관행과는 달리 누구든지 믿으면 곧바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이디오피아의 내시는 믿음 고백과 함께 즉시 침례를 받았고 사도행전 16장의 자주색 옷감장사 루디아도 믿는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13, 14절) 같은 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 역시 믿은 즉시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채찍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자기 온 가족이 즉시 침례를 받은 뒤에"(행16:33) [목차]
 
 
위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람은 요르단 강에서, 어떤 사람은 광야의 오아시스에서, 어떤 사람은 집에서 침례를 받았다. 즉 몸을 담글 수 있는 곳이면 강이든 호수든 바다든 침례탕이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침례가 교회의 회원권과 관련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역 교회에서 침례를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할 수 있다. 또한 신자라면 누구나 침례를 줄 수 있으나 지역 교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목사나 혹은 교회에서 정한 성도 대표가 침례를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사실 대부분 미국 침례교회들이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침례를 행할 때에 침례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은 편한 옷을 입고 물 속에 들어가고 침례를 주는 사람은 먼저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 보는 데서 믿음의 고백을 할 것을 요청한다. 침례를 받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 침례를 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침례를 준다. "○○○ 형제/자매님의 믿음 고백과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줍니다." 이렇게 선포한 뒤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같이 죽었다가"(In the likeness of His death)라고 말하면서 침례 받는 사람을 뒤로 눕혀 물 속에 잠근 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같이 살아났습니다."(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라고 말하면서 그를 물 속에서 들어 올린다. 이렇게 해서 이 형제/자매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매장되었고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목차]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며 산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
예수님의 명령들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침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라"(마28:19)
주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불순종의 죄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약4:17)
많은 이들이 침례를 받으면 침례교인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침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좋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중세 암흑시대의 절정기에 종교재판이라는 것을 통해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당시 천주교 사제는 종교재판소에 끌려온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물로 뿌리는 유아세례가 맞는가? 아니면 물 속에 잠기는 침례가 맞는가?" 사제의 이 질문에 "물 속에 잠기는 침례가 맞습니다."라고 대답한 이들은 화형을 당하거나 손을 뒤로 묶인 채 물 속에 던져져 수장되었다. 이렇게 고난을 받은 믿음의 선조들로 인해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까지 바른 성경, 바른 진리가 전해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의 숫자를 따라 전통대로 세례를 고집하겠는가? 아니면 성경대로 침례에 순종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세례는 무효임을 깨닫기 바란다. 필자 역시 전통대로 세례를 받았으나 후에 성경을 통해 이런 진리를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침례를 받았다. 잘못 세례를 받았으면 다시 받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행19:1-5). 이 귀한 침례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목차] 

 

침례

존 그랜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침례를 받았나요?" 이 질문은 초대교회 신자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구원받는 즉시 침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침례 사이의 기간으로 가장 긴 기간은 다소의 사울의 경우로써 3일이었습니다(사도행전 9장). 아마 당신은, 다소의 사울도 상황만 허락되었다면 구원받은 즉시 침례를 받았을 것이라는데 동의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침례를 받지 않았다면, 침례가 꼭 필요한지, 침례를 받지 않으면 영적인 생활에 손실이 있는지 자문해보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침례를 받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성경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침례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성경을 좀더 깊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침례를 받기 전에 어느 정도의 성숙이나 성경지식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는 구원받은 직후 온 가족과 더불어 침례를 받았는데, 이 온 가족은 믿은 가족들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침례를 영적인 생활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은 후에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을 살게 될 줄로 기대합니다. 마치 침례 이전과 침례 이후로 영적인 삶의 수준이 구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삶이 변화를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어린아이로서 영적인 성숙이라는 평생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신자들은 침례를 받으면 이러저러한 제한이 많을 것이므로 침례를 받기 전에 젊음을 만끽해야겠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침례는 또 하나의 영적인 새 출발이 아닙니다. 침례는 이미 일어난 변화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바로 새 생명의 특징이 당신의 삶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구원과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복종하는 것 사이에는 중간기간이 없습니다.
    침례는 순종의 첫 번째 표입니다. 침례는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의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치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라"고 예수님께서 명하셨습니다(마 28:19). 침례를 거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불순종이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순종을 요구하셨든지 그 뜻을 다 이해하든 못하든 우리는 순종해야만 합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출발할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결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분을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불순종하는 것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비결은 순종이며, 만일 우리가 첫 시험에 실패한다면 앞으로 주님을 섬기려는 모든 시도들도 적당히 타협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진보가 이뤄지기 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로 우리 양심에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결단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둘째로 침례는 보이지 않는 계약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일어난 일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변화를 경험했으나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침례는 그 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문제는 당신이 주 예수님을 위해 공적으로 증거할 준비가 되었느냐 여부입니다. 만일 이 최초의 증거가 실행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복음의 권능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과 기타 장소에서 주님을 공적으로 증거하는 일은 때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린 신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대적하고 비웃을 때 당황할 수 있습니다. 침례는 당신이 증거의 삶을 그 위에 건축할 수 있는 훌륭한 성경적인 기초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자주 말할수록 장애가 적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번째 사실은 침례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행위이며, 우리는 그 교리적인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침례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이로써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게 됩니다. 침례의 이러한 면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고백한 후에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성경적인 방법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물을 뿌리거나 그밖에 다른 방법으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유아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안에 거하겠느뇨?", 즉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계속 살아야겠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침례 문제를 거론합니다.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과,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특징짓는 옛 생활방식에 계속 거하는 삶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은 죄가 지배권을 갖는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장사된다는 것은 죽음이 일어났음을 최종적으로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우리는 자신이 옛 생활에 대해 죽었고 세상과의 관계를 청산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당신이 침례받는 그 순간부터 구원이 가져다주는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이 구주를 영접했을 때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새 생명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데, 이는 죽음이 모든 의무를 폐하고 죄에 대한 모든 종노릇을 끝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침례를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자마자 분별했듯이 당신의 침례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침례가 행해지지 않았다면 방해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제 당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께 머리 숙여 복종을 표하고, 침례를 통해 그분께 대한 당신의 충성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성경스터디
글쓴이 : 빛과소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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