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스크랩]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작은샘 큰물줄기 2018. 6. 24. 18:33

하나님을 어떻게 있는가?


 



이신건 박사

 

그리스도인이 신앙하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대상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나는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곧장 생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분을 신앙하고 사랑하고 소망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여러 가지의 노력을 기울여 보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강히 주장하는 무신론자(無神論者)나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를 설득하기 위하여 예로부터 그리스도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온갖 견해들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하나님 증명은 모두 반대증명과 모순에 부딪혔고, 그래서 어떠한 증명이라도 완벽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부질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이성(理性)에 의해 완전히 증명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경험의 영역에 갇혀 있는 인간의 언어와 논리는 경험을 초월하는 존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 우상 혹은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에 의해 완벽하게 파악되는 존재가 어찌 인간의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경험적인 대상에 관한 인간의 인식도 늘 불완전하거늘, 완전하고 초월적이라고 신앙되는 절대자 하나님이 어찌 인간의 사고 안에서 완벽하게 파악되겠습니까?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가 있다면, 인간은 바로 하나님마저도 조종할 수 있는 사이비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에 제한되는 이런 불쌍한 하나님을 누가 섬기겠으며, 사이비 하나님이 된 인간이 누구를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은총으로 자신을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인간은 이 하나님을 오직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장에서도 이미 설명드린 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먼저 신뢰의 모험이고 직관적 투신의 행위입니다. 그 다음에야 이성이 이를 뒤따라와서 신앙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전인적인 결단과 투신행위 가운데서만 인식되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기에 알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점을 꼭 전제한다면, 하나님 증명의 시도들은 비록 완전한 증명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지시하고 예감하도록 돕는 유익한 보조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전제 아래서 하나님 증명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인간에겐 세 가지의 보편적인 통일된 관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영혼, 하나의 신에 대한 관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증명도 대체로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1. 우주로부터 증명하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하나님 증명은 우주의 모든 현상(운동, 질서 등)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최초의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퀴나스(Thomas von Aquinas)라는 신학자가 최초로 시도한 방식입니다.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 있는가? 또 그러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옛날의 인도인들이 생각했던 지구이해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들은 지구가 공중에 떠 있지 않고 큰 거북에 의해 떠받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거북은 우주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거북은 자신을 떠받쳐주는 아래의 거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무한히 큰 거북인 셈이고, 그래서 이 거북은 스스로 존재하는 거북, 더 이상의 원인을 갖지 않는 거북인 셈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생각하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흡사합니다. 즉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이 우주의 처음 원인입니다(설명 A).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원인이 없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왜 하나님이 마지막 원인이어야 하느냐?" "하나님은 또 누가 만들었나?" 지구가 꼭 한 마리의 거북에 의해 지탱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그 거북도 자신을 지탱하는 다른 거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한히 많은 거북(거북 아래 또 거북 ...)이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원인은 끝이 없게 되는 셈입니다(설명 B).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도 만물의 원인을 무한히 캐물을 순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무한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끝이 없는 산수놀이에 지치거나 포기하다 보면, "애라 모르겠다. 골치 아픈 문제로 고민하느니, 차라리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속 편하겠다."는 결론이 아닌 결론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또 하나의 기발한 생각은 여러 거북들이 하나의 염주(念珠)와 같이 고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생각에 의하면 많은 거북들이 제 각기 위의 거북을 떠받치면서도 동시에 아래의 거북에 의해 떠받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주는 처음도 끝도 없는 셈이 됩니다. 모든 것이 원인이 되면서도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불교, 힌두교의 가르침입니다(설명 C).

우리는 이 세 가지 설명을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까요? 설명 C는 설명 A와 설명 B의 모순을 해결한 가장 그럴 듯한 설명 같습니다만, 모든 존재가 스스로 신이면서도 피조물이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섬기고 섬김받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섬길 유일한 대상은 없는 셈입니다. 아니 모두가 절대자인 셈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중생(인간)이 본래 부처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부처인 인간이 왜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걸까요? 이것은 인간이 결코 절대자가 아니라 절대자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불교의 가르침대로 인간이 원래부터 부처라고 말한다면, 부처에게 귀의하지 말고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기만 하라고 가르쳐야 할텐데, 왜 부처에게 귀의하라고 가르치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절대자를 추구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을 절대자로 생각하라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그래서 깨달음의 도리인 불교도 어언 듯 종교가 되고 만 것이 아닐까요?

물론 설명 A도 썩 합리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더 이상 원인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말입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원인을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어린이도 가끔 "아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라고 묻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야. 더 이상의 원인은 없어!"라고 주장하면, 어떤 사람들은 같은 논리를 써서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이 세계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겠어. 이 세계도 더 이상 원인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주장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설명 A도 결국엔 설명 C와 같이 "세계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주장, 즉 범신론(汎神論=만물이 곧 신이다.)으로 빠집니다.

만물의 원인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사막 한복판에서 우연히 시계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 때 우리는 "이 시계가 여기에 존재하게 된 원인이 뭘까?" "이 정교한 시계가 생겨난 이유가 뭘까?"라고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계가 제 힘으로 사막까지 왔다"거나 "오랜 시간이 지나자 우연히 시계가 만들어졌다"는 논리보다는 "어떤 지혜로운 시계공이 이를 설계하여 만들었고, 이를 사막에서 잃어 버렸다"고 믿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우수한 시계를 만든 지능적인 인간을 생각하는 것처럼 우수한 물질조직의 배후에 우수한 정신적 존재(영적인 하나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결코 억척과 맹신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설명도 완벽한 하나님 증명은 아닙니다. 우주 안에는 이성으로 풀 수 없는 혼돈, 맹목, 우연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제 1강에서도 말했다시피, 일차적으로 직관적 결단, 모험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신념이든지 그 속에는 일정한 믿음(직관)이 자리잡고 있다면, 나는 "혼돈을 믿느니 차라리 질서를 믿고, 혼돈 속에서도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념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분의 영광과 사랑을 찬양하노라면, 이 우주가 하나님의 작품임을 한 목소리로 증명하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힙니다. 파스칼이 말한대로, "마음은 머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도 훌륭한 하나님의 편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 속에는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을 알도록 남기신 흔적이 있고, 비록 파편적이나마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빛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로마서 1:20).


 

2.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증명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독하고 괴로울 때, 자신을 위로하고 구원해 줄 그 어떤 절대자를 찾으며, 그 절대자를 찾았다고 확신하게 되면, 놀라운 안정과 기쁨을 되찾게 됩니다. 실패, 죄책감, 불안, 질병, 죽음 등의 한계경험에 부딪힐 때, 어떤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 쾌락 등의 방법으로 이 고통을 잠시 벗어나려고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태도를 갖고서 절대자를 향해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런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특별하고 신비한 경험 속에서 절대자 하나님을 만났다고 의심없이 믿고 고백하며, 인생의 태도와 방법을 급진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들의 진실한 고백과 변화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찾아와 주셔서 자신을 알리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이 땅에 종교가 계속 존재할 당위성을 얻습니다.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종교에 귀의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성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방황과 방탕 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였고, 그런 후 그는 "하나님, 내가 당신의 품안에 안기기까지 내 영혼에 진정한 평안을 몰랐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 만남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신비한 것이어서, 객관적인 하나님 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은 한계상황 속에서 그 어떤 진정한 절대자를 만나기보다는 환상이나 망상 혹은 욕망의 그림자를 보거나 이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때때로 종교적 체험은 정신적, 심리적 질병(노이로제)의 현상과 흡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종종 이를 악용할 때도 있어서,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이 종종 착각을 일킨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보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종종 환상을 만들고 또 환상을 본다고 해서, 모든 환상이 다 거짓이라고 우길 수도 없습니다. 그처럼 비록 인간의 욕망이나 환상이 절대자를 만들거나 혼동을 일으킬 수 있고, 또 인간의 그러한 체험이 무조건 절대적인 하나님 증명이 될 수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욕구는 대개 그 충족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이 존재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이 존재합니다. 빛이 그리우면,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성이 그리우면, 연인이 존재합니다. 진리가 그리우면, 진리가 발견됩니다. 정의에 목마르면,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비록 이런 욕구가 종종 빗나가고 이그러진다고 하더라도, 또 비록 욕구의 대상이 종종 왜곡된다고 하더라도, 욕구의 대상을 깡그리 부인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인간이 집요하게 절대자를 추구하는 것도 바로 그 절대자가 우리보다 더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이 끈질기게 영원을 사모하는 것도 바로 그 영원이 우리의 허무한 삶 속으로 계속 파고 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이 그처럼 천국을 바라는 것도 바로 천국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늘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그 어떤 인간의 체험도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내보일 수는 없지만, 만약 인간의 일상적 한계를 깨뜨리고 들어오는 초월자를 만났다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편 107:9)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에 공명(共鳴)하여 그분을 찬양하는 악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그분의 영이 머무는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이름(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 증명방식을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려고 한 자는 안셀름(Anselm)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분 이상으로 더 위대한 자를 생각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생각 속에서만 가장 위대한 분으로 생각된다면, 그런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작은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자가 정말로 위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가장 정교하고 완벽한 것 같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내가 가장 완전한 섬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런 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은행구좌에 많은 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자연히 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지, 생각이 필연적으로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상상이 실제와 무관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상상 속의 용(龍)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상상 속의 유토피아(Utopia)가 이 땅 어디에 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한 관념, 하나님의 이름 혹은 하나님의 개념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만약 우리가 가장 위대하고 선하며 절대적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전제한다면, 그런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으리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연령에 도달하면, 하나님(신)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본능적(선천적, 직관적) 관념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했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식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고립되었다고 가정하십니다. 만약 그 부모가 자식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꿈이나 환상 혹은 텔레파시를 통해 실종된 자를 기적적으로 찾게 되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약 우리가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다면, 그분이 모든 인간의 관념 속에 자신의 이름 혹은 개념을 새겨 주셨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 관념이 하나님 존재의 필연적인 증명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신앙하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존재에 관한 인식의 흔적을 심어 놓으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도서 3:11)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9)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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