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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주교, 불교, 힌두교, 유교의 사망관

작은샘 큰물줄기 2018. 6. 24. 18:32

천주교, 불교, 힌두교, 유교의 사망관

 

 

천주교

 

사망의 개념 혹은 죽음의 관념은 어느 종교이든 아주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신본주의의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인생은 유일하게 일생일사(一生一死)뿐이다. 유일신사상의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시공(時空)을 현세와 사후세계로 나누고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사후세계는 천당과 지옥뿐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은 후, 최후의 심판을 받아 천국을 가던지 아니면 지옥으로 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는 비록 죽는다 해도 심판 후 반드시 부활을 하여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의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는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사후세계에 대해 천주교에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이 하나 더 있다. 이 연옥은 천당과 지옥의 중간단계로써 연옥에 간 사람은 한 번 더 구원의 기회가 있다. 어찌되었던 죽음과 사후세계의 문제에 있어 기독교이든 천주교이든 이슬람교이든 유일신사상을 갖는 이들의 공통점은 우선 무엇보다도 유일신을 믿었느냐가 으뜸이고 주로 믿음에 의해 천당과 지옥이 결정되어진다는 점이다. 믿음을 통한 죽음은 바로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상봉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신자나 교우에게 육신의 흙집을 벗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죽음 자체를 초월하는 태도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믿음과 죽음을 통한 새로운 생명(영생)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

 

불교

 

“유가론기”에서는 죽음은 의식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라 얘기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종사, 즉 죽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우선 명진사는 천명이 다하여 죽는 것으로 천수를 다하고 받은 기한을 다 채우고 죽는 것이다. 두 번째는 외연사로, 외부의 인연에 의해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가는 죽음을 말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죽음을 신사와 심사로 나눈다. 신사는 “몸이 죽은 사람”으로 일반적인 죽음을 뜻하며, 심사는 “마음이 죽은 사람”이다. “선행법상경”에는 ‘만약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지간에 죽을 생각을 한다면 온 몸은 죽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는 생각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이며, 우리의 마음에서 죽음이 싹트면 그것은 순식간에 마음을 죽인다는 것이다.

 

불교의 생사관은 보통 사람들과 성인들의 죽음을 다르게 본다. 보통 사람들은 수명의 길고 짧음이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전생의 업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인들의 죽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이나 성문, 연각, 벽지불, 초지보살 이상은 윤회를 하지 않고, 자신이 수명과 육체를 자유자재하게 바꿀 수 있고, 또한 생과 죽음에 자유자재하여 이를 변이생사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죽음의 찰나에서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사유(四有)라고 한다. 이 사유에는 사유(死有),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가 있다.

 

우선 사유는 전생의 업력 인(因)에 의해 현세의 삶의 과(果)가 다 끝난 죽음의 순간으로, 즉 임종의 찰나를 말한다. 다음 중유. 중유는 중음 혹은 중음신이라고 칭한다. 중음의 기간은 칠칠일(49일)로써 인간이 죽으면 빠를 경우 7일 이내에 사후가 결정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중음의 49일간 내에서 칠일을 일기(一期)로 하여 첫 번째 칠일에 결정되는 경우도 있고, 두 번째 칠일에 결정되는 경우도 있고, 제일 마지막 인 일곱 번째 칠일인 49일에 마지막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중음 중생의 수명기간은 7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중음기간에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는다 하여 칠생칠사라고 한다.

 

중유는 크게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우선 이 3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중유에서 육체내의 모든 생명원소가 분해 된다. 그런 다음에 중음의 3단계 로 넘어간다. 우선 법성중음의 단계가 시작된다. 이마의 백명점과 배꼽의 홍명점이 위 아래로 이동하다 서로 교차를 할 때 무한한 자비와 희열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미 죽음이 다가와서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사망중음의 단계이다. 결국 이 두 점이 교차하다 멈추면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이제 중유 (혹은 중음)이 끝나고 생유가 시작된다. 생유는 간단하게 생을 받아 모태에 안착하려하는 찰나다. 그다음은 본유의 단계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사망 후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짓는 요인은 바로 살아생전에 행한 업력에 있다고 본다. 그 업은 수중수생, 수습수생, 수의수생으로 구분한다. 불교의 생사관은 무시이래로부터 시작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삼생 생사로부터 해탈하고자하여 개인의 수행을 통해 삼세인과와 육도윤회를 해탈하고 열반에 이르는 것을 구경의 목적으로 한다.

 

힌두교

 

인간의 출생은 다만 죽음을 지니고 있는 생물의 필연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업력에 의해 태어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윤회에 의해 선업이든 악업이든 모두 내세에 받아야 할 과보이다. 이 과보는 누구든 도망을 할 수 없는 인과응보이다. 즉 생사란 바로 전생의 선악업(善惡業)에 의해 결정지어진 과보에 불과한 것이다. 태어남, 죽음, 재사(再死) 혹은 재생(再生)은 모두 하나의 생사과정의 순환 사이클이다. 개인의 모든 행업(行業)에 의해 내세가 있고, 내세의 죽음에 의해 다시 태어남의 재생이 이어진다. 태어남은 바로 전생에 자신이 행한 업에 의한 하나의 생명과정이다. 이 생명과정이 다시 재생의 과정을 겪어야 하고 생사를 해탈하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생사의 과정인 것이다.

 

이처럼 전생 윤회하는 주체로 영원불멸한 영혼의 생(生), 사(死), 재생(윤회), 해탈의 과정을“바가바드 - 기타”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힌두교의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의 존재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즉 비록 이 세상의 존재는 허깨비, 물거품처럼 일시적인 존재의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인생 삶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교육으로 인간을 교화하고 수행케 하여 이 세상에서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고 범신에게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에는 두 종류의 수행법이 있다. 하나는 세속사람들의 낮은 차원의 지혜(下智)에 의한 ➀절제 ➁금욕 ➂인내 ➃정심 ➄신앙 ➅적정 등 여섯 가지 수행을 통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상주불변의 실체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를 잠정적 해탈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진제(진리세계)의 높은 차원의 지혜(上智)를 갖춘 사람들이 자아가 바로 범신인 것을 깨닫는 방법이다. 이를 근본해탈이라고 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영혼의 해탈을 위한 인생의 목적을 ➀이(利) ➁욕(慾) ➂법(法) ➃해탈(解脫)로 말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서는 사성계급 가운데 바라문(바라문 계급의 승려), 크샤트리아(왕족계급), 바이샤(상인계급), 이 3종류의 계급을 재생족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모두 베다경전을 공부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리 와 종교적 생명을 부여받아 죽은 후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특권을 얻어 수행과 생활의 과정을 겸할 수 있는데, 하지만 마지막 계급인 수드라(농민계급 및 천민)는 일생족이라고 칭하여, 어떠한 종교적 생명이나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천민계급이라 이들은 일생일사로 끝나며 죽은 후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

 

유교

 

중국철학에 있어 유가의 생사관은 생명연속형을 제시한다. 특히 유가의 생사관은 죽음보다 현실적 삶을 중하게 여기며 자손만대의 대를 잇는 종묘사직을 중하게 여긴다.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의 일을 묻자, 공자가 답하길, 인간의 일도 모르는데 어찌 귀신의 일을 알랴? 또한 말하길, 감히 어찌 죽음에 대해 묻는가?”이처럼 공자는 다만 실질적인 현실에 중점을 두었고 현학이나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인간은 외적인 조건이 수반되어야만 비로소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유한한 존재라서 수명과 부귀가 천염에 달렸다고 공자는 말한다. 하지만 공자의 생사관에서 보면 세상에서 물러남이 없이 도를 행하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창조력의 개발과 자각이 바로 무한한 생명으로 돌아가게 되고 진종으로 자신을 안신입명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은 외적인 조건이 수반되어야만 비로소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유한한 존재라서 수명과 부귀가 천명(天命)에 달렸다고 말한다. 유가의 이상은 군자인데, 군자는 자아의식을 고취하고, 남을 사랑하고, 인의예지로 도덕적 자아의 수양을 쌓아 내적인 지선(至善)을 이루어 정신세계를 함양한 도덕적 인격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사회에 유용한 사람으로 도를 펼쳐, 도덕생명・지성생명의 가치를 성립함으로써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맹자도 역시 인간의 생명은 천(天)으로부터 왔고 인간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한정지어져 각자의 기질을 부여받았고 생명을 받았다고 규정짓고 있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 해도 누구든 자신의 천부적이고 선천적인 고유의 사단지심을 개발하고 발휘하면 사람마다 모두 요,순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본성을 다 아는 것이 바로 천(天)의 일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본심을 지키고 자신의 본성을 함양하면 바로 그게 천을 받드는 법이다. 요절을 하든 장수를 하든 의심하지 않고 다만 덕행을 함양하여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게 바로 수신입명의근본이다.

 

맹자는 명(命)의 개념을“찾아 구함에 있어 자신을 버리고 잃음으로써 유익함을 구하는 자신을 찾는 자이다. 도에서 찾고 명에서 얻어도 유익함을 구하는 것은 외적으로 찾는 자이다”라고 했다. 즉 하나는 내적으로 자신을 찾는 자요,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구하는 자이다.

 

순자도 역시 “우연하게 발생됨을 일러 명(命)이라 했다” 이처럼 전통유가의 주장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의 삶과 죽음, 흥성과 쇠망 모두 인간 자신의 힘 이외의 어떠한 운명이 발생작용을 하는데, 그 불가항력의 힘을 명(命)이라고 보았다. 이 명을 일종의 천의로 보았고 사명, 청명, 순명, 조명, 안명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인간의 근본을 “천자(임금)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신이 근본이다” 라고 했다. 즉 인간의 근본은 수신이며 수신의 근본은 덕이다. 덕은 바로 자신을 윤택하게 한다. 선진유가에서는 인생의 목적을 첫 번째 도덕적 수양과 정신적 함양을 인생의 가치로 두었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물질적 재물과 명예에 인생의 가치를 두었다.

 

중국철학에 있어 도가(道家)의 생사관은 삶과 죽음을 자연의 현상으로 보고 삶과 죽음을 모두 초탈하고 죽음을 달관한 인생을 중하게 생각하였다. 생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있는 것은 자연의 변화이므로 꼭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할 필요가 없다고 달관한다. 인생은 바로 태어나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래서 노자는 인생을 출입(出入)으로, 장자는 왔다 가는(來去) 자연 현상으로 보았다.

 

도가에서는 삶도 죽음도 모두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너무 인위적으로 삶에 치우치는 것을 일종에 생의 집착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일체를 순리대로 순응하면서 현실에 만족할 줄 알라고 충고한다. 인간이 욕망을 따르면 끝이 없으므로 노자는“만족할 줄 아는 자가 부자다”라고 말한다. 범부는 자기 주관적인 입장에서 논리적・이성적으로 지식을 쌓으며, 이기심을 바탕으로 명예 와 우월감 그리고 부귀와 권위를 쫓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지식을 작은 앎(小知)이라 하고, 이에 반해 논리적인 지성과 이성을 초월한 오성(悟性)의 심원으로부터 통찰되어 나오는 직관적 지혜를 큰 앎(大智 혹은 眞知)이라 하여 중히 여겼다.

 

옮긴글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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