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

[스크랩] 십자군 전쟁의 원인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2. 21. 11:47

1. 십자군 전쟁의 원인

 

① 정치적 원인

1)이슬람의 동로마 침입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했다.  서방에 원병을 요청했다. 1071년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당함. 다음 황제  미가엘7세(1071 - 1078)가 교황 그레고리7세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라는 사람이 황제가 되어서 1086년 안디옥, 베데사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도시를 빼앗겼다. 그래서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레고리7세는 헨리4세와 서임권 논쟁을 하느라고 성공을 시키지 못했으나 다음 교황이 성공을 시켰다.
2)이슬람 세계의 분열
스페인 지역에서 1034년 회교 족장들의 싸움으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던 칼리프  왕국이 멸망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스페인 지역을 탈환했다. 1060년 이후 시칠리 섬 탈환, 기독교인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수 있었다.

② 경제적 원인

1)당시 영주의 장남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2)도시 상인들의 시장개척의 노력

③ 종교적 원인
1076년 부터 성지가 셀주크 터어키에게  점령당했다. 이들이 성지 순례를 방해했고,  교회는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동방교회까지 지배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한마디로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회가  개혁되고 신앙의 열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운동이었다.  

 

 

2. 공헌한 사람들

 

① 우르반2세
십자군을 정식으로 선포한 사람이었다. 그는 클루니 수도원의 부원장까지 지냈던 클루니 개혁운동의 중심이었던 사람이었다.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수 있었다.

② 은둔자 베드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꿈에 크리스도가 나타나서 성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구라파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설교를 했다. 그는 남프랑스,  스페인, 로레인, 라인강 지역까지 나귀를 타고 맨발로 다니며 설교를 했다.
*우르반2세가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행한 연설로  공식적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자리에 참석했던 4사람이 기록하고 있다. 그중 두사람의 글이다.
1)Fulcher :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은 십자군에 참여해서 죽으면 즉각적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 귀신을 믿는 천박한  민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점령한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가. 기독교인들의 자긍심에 호소했다. "같은  신앙인들끼리 부당하게 싸우는 자들은 불신자들과 싸우고,  봉건영주들은 잦은 싸움을 끝내고 이슬람교도와 싸우는 것이 낫다. 오랫동안 도적질을 했던 사람은  이번 기회에 기사가 되어라. 적은 돈을 보상으로 받고  용병으로 활동하는 자들은 이번 기회에  영원한 보상을 받기 위하여 이 전쟁에 참여하라.십자군에 직접 참여하는 자들은 땅을 팔아서 경비를  조달하라."   
2)Robert : 이슬람 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을 붙잡아서  노예로 팔거나, 살해하고, 교회당을 파괴하고, 제단을 헐었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서 화살 과녁으로  삼았다. 잔인한 이슬람 교도들의 박해상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이 땅에는 인구가 많다. 땅은 넉넉지 않다. 성묘가 있는 곳에 있는곳에 있는 악한자들을 �아내고 그땅을  차지하자. 그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 설교에 나타난 것처럼 이교도들에 대한 적개심,  경제적인 동기, 새로운 땅을 찾아 개척하는 등의 동기에서 비롯됐다.
3) 십자군에 참여해서 죽으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우르반2세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겐의 '순교로의 권면'이라는 책에서 세례를  받고 짓는 죄에 대해서는 순교의 피로써 용서를 받을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을 받았듯이 순교자의 피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4)레오4세(847 - 855) : 프랑스군에게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순교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설교하였다.

 

3.경과

 

① 십자군의 선발대(민중의 십자군)
1096년 출발.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 은둔자 베드로였다. 이 십자군에는 많은 농민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라인강 유역에 가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가 하면 이들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빚진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반셈족운동의 始原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이슬람족에게 전멸당하고 은둔자 베드로만 살아 돌아온다.  

② 제1차 십자군 운동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의 귀족들이 참여했다. 3개의 부대가 개별적으로 진군을 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십자군의 도덕적 영웅이었던 Godfrey였다. 가장  순수했던 마음으로 거룩한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운동에 참여했던 운동이다.
1)로레인, 플란더스   2)북부 프랑스   3)남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1096년 겨울에서 1097년 봄까지 도착했다. 십자군 전설에 의하면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60만명, 기사만 10만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타이어니의 책에 보면 실제로는  8천에서 만2천명정도 그리고 기사는 3천명 정도였을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 동방의 황제가 원한것은 원병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의 휘하에 와서 자신을 도와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목적은 단순히 동로마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1097년5월 니케아를 점령하고, 10월에는 안디옥에 이르렀다. 안디옥에 이르러서 8개월정도 고생하다 1098년 6월에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다음에는 이슬람의 반격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성안에서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반격을 가해서 승리를 했다. 이 사람들은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들이었다. 1099년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람들이 점령한 다음에 이곳에 라
틴왕국을 건설했다. 고드프리가 성묘의 수호자가 되었다. 고드프리가 1100년 죽은 다음 그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했다. 서방과 같은 봉건제도가 형성되었다. 종교도 라틴의식으로  재조정되었고, 많은 수도원들이 생겼다. 처음에는 이 왕국의 실권은 대제후의 모임이 가지고  있었다. 대궁정(High Court)에서 모였다. 그러나 아모르가 왕위에 오른뒤 왕권을 강화하고  대제후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라틴왕국의 보호를 위해서 기사종단들이 생겼다.
ⅰ)성전 기사 수도단 : 시토회를 모방하고, 불신자와 싸우고, 성지를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땅을 기증해서 성전 기사 수도단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ⅱ)성 요한의 병원 수도단 : 세례요한의 교회부근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순례자들을 진료하고 구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ⅲ)독일 기사단 : 나중에 프로이센을 점령한 아주 악명 높은 기사단이었다.

③ 제2차 십자군 운동
1144년 이슬람이 에데사를 점령함으로써 1147년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십자군을 주장했다.  

④ 제3차 십자군 운동
1187년 성지를 점령했으나 다시 패배하여서 예루살렘과 성지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⑤ 제4차 십자군 운동(1202 - 1204)
성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먼저 이집트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집트원정을 먼저 시작했다. 베니스의 상인들과 협력해서 헝가리에서 먼저 짜라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 폭동이 일어나서 많은 베니스의 상인들이 약탈을 당했는데 여기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알렉시우스라고하는 왕자가 다른 알렉시우스3세라고 하는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빼앗겼는데, 만약에 십자군들이 자신의 왕위를 되찾아 주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십자군들은 정통왕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1204부터 1261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부분을 서로마  제국에서 지배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에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를 세웠다. 명목상으로는 동방교회과 서방교회이 하나가 되었다. 1261년 동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라틴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라틴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었고, 결국 145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동로마 제국이 멸망되었다.  

⑥ 소년 십자군 운동 1212년
프랑스에서는 스데반이라고 하는 12살된 목동이, 독일에서는 니콜라스라고 하는 10살 된 소년이 중심이 되어서 많은 어른들과 함께 일부는 마르세이유  항구까지 도착하였다. 이 어린아이들이 생각할때는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둘로  갈라져서 성지까지 걸어갈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다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상인들에게  유혹되어서 상인들의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일부는 파선을 당하고 일부는 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십자군운동이 얼마나 환상에 의한 것이고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⑦ 제5차 십자군 운동(1218 - 1221)
⑧ 제6차 십자군 운동(1228 - 1229)

황제 프리드리히2세가 십자군 서약을 했다. 1229년 이집트의  술탄과 계약에 의해서 1244년까지 예루살렘을 기독교가 보유하게 되었다.

⑨ 제7차 십자군 운동(1248 - 1250)
프랑스의 루이9세는 이집트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풀려난뒤 1270년 다시 공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성 루이라고 불렸고, 십자군에 온 인생을 바쳤던 사람이다.

⑩ 제8차 십자군 운동(1271 - 1272)
영국의 에드워드왕자(나중에 에드워드1세가 되었다)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실패하고 돌아와서 그의 소원은 다시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결국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291년 마지막 땅까지 상실하였다.
*1096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운동은 1291년까지 약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루터 [터키인과의 전쟁에 대하여](1529)
1)터어키와의 전쟁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이어서는 안된다.  교황이 십자가의 깃발아래 전쟁에 참여해서는 안되고 황제가 중심이 되어서 터어키인들의 침략적 행위를  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2)터어키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앙때문에 터어키인들을 공격해서는 안된다. 터어키인들이 유럽을 침략했기 때문에 그 침략에 대한 응징으로 터어키인들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지탈환, 이슬람군의 진출을 저지, 동로마를 지원함으로써 동서방교회의 일치를  이루겠다
는 등의 목적은 실패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원정 때문에 동서방교회  사이의 앙금은 더 깊어졌다.

4.결과

 

① 귀족들이 전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왕권신장의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절대왕권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②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십자군전쟁은 클루니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절정에 올랐을때 시작되었으나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309년부터 1377년까지는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기이다.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가서 프랑스왕의 지배를 받던 시기이다. 1378년부터  1417년까지는 교회의 대분열 시기이다.
③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자처한 타락한 교황이 나왔던 르네상스 교황의 시기이다. 십자군전쟁이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 한명도 안나왔다.  그래서 교황이 공공연하게 적그리스도라고 공격을 받았다.
④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상업의  발전및 도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유럽 사회가 봉건 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유럽 사람들의 정신적 지평을 확장시켜주었다.
⑤ 4차 십자가 전쟁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콘스타티노플에 있는 동방의 서적들과 학자들이 서방으로 유입되었다.

5.교훈

 

① 헤겔의 주장
서방사람들에게 좀더 영적이고 정신적인것에 관심을 가지도록했다.  이 사람들이 처음에 시작할때는 예수님이 활동했던 거룩한 성지로 가면 무언가 거룩한 자취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묘교회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무덤이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느낀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로 왜 산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높은 정신의 세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 교회는 칼로써 승리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의 메세지로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십자군의 중지에 대한 이론

① Palmer Throop
'Criticism of crusade'라는 책에서 13세기에 와서 십자군 운동이 비판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반대자들은 십자군운동의 원리와 실행을 거듭 비판했다는 것이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세력들을 개종시키는데 방해요인이 되었다. 13세기 탁발수도회에서 십자군운동을 특별히 반대했다.
② Flahiff
십자군운동에 대한 비판은 12세기부터 나타났다.
③ Siberry
1985년 'Criticism of crusading'이라는 책을 써서 Palmer Throop에  대한 반대입장을 나타냈다. 12,13세기에 십자군운동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십자군운동이 이슬람세력을 개종시키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십자군운동이 성공하게 되면 이슬람에 대한 개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탁발수도회나 도미니크회는 이 운동에 반대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2,13세기에 십자군운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십자군의 잘못을 비판한 것이다. 특히 십자군들이 동로마 제국을 점령한 것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극소수가 십자군 자체를 비난했지만 이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중의 루터의 교리(교황이 일으킨  십자군운동에 반대)와 연결시켜  보면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1291년 십자군운동이 끝난후 서방의 여러 문헌들을 보면 십자군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문
헌들도 보인다. 오히려 8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끝난후 좌절감으로 말미암아 십자군 무용론이 대두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신앙&삶의 나눔
글쓴이 : 섬김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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