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

[스크랩] 사도신경의 유래와 그 변천과정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2. 21. 11:47

사도신경의 유래와 그 변천과정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붙인 것은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시 고백서를 12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전설은 이렇습니다. AD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12사도가 모여서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전파해야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한 분의 사도가 한 가지씩 말해서 모아 보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가 나왔다고해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사도 야고보는 일찍 순교해서 거기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 외 다른 사도들도 대체로 일찍부터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12사도가 한 자리에서 신조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 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회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정(修訂)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 강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다나시우스라는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로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습니다.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으며,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예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습니다.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4세기 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 번도 사도신경을 공식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경으로 번역되면서 어째 천주교의 연옥 기분이 나고 개운하지 못하다 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가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도 주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거룩한 공회”는 영어로 the Holy Catholic Church(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입니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경을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카톨릭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마10:17, 26:59, 눅22:66, 요11:47)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카톨릭의 성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산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죽은 자들의 이름을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도’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입니다(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결의한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비슷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경이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현제의 사도신경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라는 말로 사도신경은 끝맺음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신경이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으며 카톨릭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으며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사도신경에 명시한 어떤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다르게 가르친다면 어쩌면 이단일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출처: 믿음의 문학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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